오다와라 평정(小田原の役[각주:1]) 때 히데요시(秀吉)는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의 무공(武功)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시하루는 내가 토우키치로우(藤吉
)라고 불리던 아주 옛날부터의 부하로 나와 함께 수 많은 전쟁에 참가하였다. 그 무용은 일기당천으로 미나모토노 요리미츠(源 光)[각주:2]의 사천왕(四天王)에 필적한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아자이(井) 공략에서는 적의 척후를 잡아 죽였으며, 나가시노 전투(長篠のい)에서는 2개의 수급을 취했다. 츄우고쿠(中) 모우리(毛利) 공략에서는 몸에 13군데의 상처를 입을 정도로 분전하였다. 아케치 토벌전(明智討伐戰)인 야마자키 전투(山崎合),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물리친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合) 등 요시하루의 무명(武名)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높아져 갔다.

 평소의 요시하루는 온화하였고 용모도 얼핏 보기에는 아녀자와 같이 부드러워 [부처님 모스케(茂助)]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이랬던 사람이 막상 전쟁터에 나가면 180도 바뀌어 악마와 같이 활약을 하는 것이다.
 1576년 아케치 미츠히데(
明智 光秀)의 영지(領地) 탄바(丹波)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하시바 히데요시,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 등 총 3만여가 지원군으로 참가하였다. 이 전투에서 요시하루의 부대는 실로 수급 36급을 거두었으며 더구나 그 중 3급은 요시하루가 직접 벤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이건 정말 '부처님 모스케'에 어울리지 않는 활약이구나. 앞으로는 '악마 모스케(鬼茂助)'라고 불러야겠다"
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평소의 요시하루는 정말 얌전하였지만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과 싸울 때는 한발작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다와라 평정 때의 일이다.
 야마나카 성(山中城[각주:3]) 공성에 참가한 요시하루는 성을 공격하기에 최적의 위치를 발견하고는 진을 쳤다. 그러자 동료인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가 그것을 보고 칸파쿠(
白) 히데츠구(秀次)에게 부탁하여 요시하루의 장소를 이동시키고 카즈우지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아니나다를까 나카무라 카즈우지가 야마나카 성에 제일 먼저 진입(一番り)하는 공적을 세운 것이다[각주:4].
 화를 억누를 수 없는 요시하루는 히데츠구 앞에 나아가 장소 교체에 따른 분노를 말을 가리지 않고 표출하였다. 주위에 있던 사람 모두가 어르고 달래도 듣지 않고 눈을 치켜 뜨며 나중에는 칼자루에 손을 댈 정도였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에게 접근하였다. 1599년 사대로(四大老), 다섯 행정관(五奉行)의 대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와 이에야스의 사이가 험악해지자 그 중간에 서서 양측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여 일단 큰일로 번지게 하지 않게 하였다. 그 공적에 보답하기 위해 이에야스는 은거료(隱居料)로 하라며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청하여 에치젠(越前) 후츄우(府中) 5만석을 주도록 만들었다. 이때 본거지인 하마마츠(浜松) 12만석을 아들인 타다우지(忠氏)에게 물려주었다.

 1600년 7월. 세키가하라 전투(ヶ原合)가 막 일어나려고 할 즈음 요시하루는 하마마츠를 출발하여 새로 얻은 영지인 에치젠으로 향하였는데 그 도중 자객의 습격을 받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미카와(三河) 치리우(池鯉鮒=현재는 치류우(
知立))에서 일어난 일이다. 예부터 알고 지내던 카가노이 시게모치(加々野井 重望[각주:5]그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친했다) 만나 함께 요시하루의 친구인 미카와(三河) 카리야(刈屋) 성주인 미즈노 타다시게(水野 忠重)에게 들렸고 타다시게는 그들을 위해 주연을 열었다. 주연이 깊어져 요시하루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갑자기 카가노이가 칼을 뽑아 타다시게를 베어 죽이며 여세를 몰아 요시하루를 습격한 것이다. 카가노이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자객이었다. 벌떡 일어선 요시하루는 곧바로 응전하여 반대로 카가노이를 베어 쓰러뜨렸다. 하지만 소란스런 소리에 급히 달려온 미즈노의 가신들이 피 묻은 칼을 들고 홀로 서 있는 요시하루를 보고, 그가 자신들의 주인과 카가노이 두 사람을 죽였다고 오해하였다[각주:6].
 요시하루는 열심히 설명하였지만 이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요시하루에게 불리했다. 천천히 조여오는 미즈노 가신들의 포위에 요시하루는 촛대를 발로 차 어둡게 하여 그 틈에 도망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각주:7]. 사건은 후에 요시하루의 무죄가 판명되어 이에야스에게서 병문안 편지를 받았다.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1543년생. 통칭 모스케(
茂助)로 이름(諱)은 요시사다(吉定), 요시나오(吉直)라고도 하였다. 와카사(若) 타카하마(高浜)[각주:8], 오우미(近江) 사와야마(佐和山)[각주:9] 등의 성주를 거쳐 하마마츠(浜松) 성주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후에는 아들 타다우지(忠氏)와 함께 이즈모(出雲)의 땅[각주:10]이 주어져 1611년 마츠에(松江)에 성을 축조. 이 해의 6월에 죽었다.

  1. 1590년에 히데요시가 칸토우(関東)의 후 호우죠우 씨(後北条氏)를 정벌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2. 헤이안 시대에 왠지 헤라클레스 급..까지는 아니고 하여튼 전설적인 활약을 펼치는 무사. 그의 이야기는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 "내 시체를 넘고 가라(俺の屍を超えてゆけ)"에 잘 나타나 있다(...믿으시면 곤란합니다) [본문으로]
  3. 후 호우죠우 씨(後北条氏) 축성의 진수가 담긴 성이었지만 단 하루 만에 낙성되었다. [본문으로]
  4. 덤으로 요시하루의 경우 옮겨진 구역에서 성을 공격하다 적자 킨스케(金助)가 전사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5. 보통 '加賀井 重望'로 알려져 있다(발음은 동일). 에도 바쿠후의 공식 기록서인 [토쿠가와 짓키(徳川実紀)]에 따르면 그는 미츠나리가 아니라 서군(西軍) 호쿠리쿠(北陸) 당담인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 한다...뭐 미츠나리가 서군의 총수격이었으니 그게 그거지만.. [본문으로]
  6. 사족으로 당시의 나이 요시하루 57세. 시게모치의 나이 39. [본문으로]
  7. 칼에 베인 상처가 17군데에 이르러 이후 거동이 불편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코구다카(石高)는 1만 7천석. [본문으로]
  9. 코쿠다카는 4만석. [본문으로]
  10. 23만 5천석으로 보통 24만석으로 칭해진다. 이 호리오 마츠에 번(堀尾松江藩)은 야스하루의 손자 타다하루(忠晴) 때 자식이 없어 끊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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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5.30 2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시마네현 소개 팜플렛에서 일본에서 유수의 천수각이 남아있다는 글을 본기억이 있는데 생각해보면 이양반처세때였던 것도 같군요(ㄷㄷ..)

    시마네현도 국립대가 있나 없나 싶어서 이리저리 찾아대던 시절 기억이덥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30 2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고 보니 다른 분들이 쓴 거 없으신가 하고 한국 웹 검색했는데 전부 마츠에 성에 관한 것만 있더군요.

      이즈모라...
      FSS의 이즈모시티..라는 명칭으로 인해 SF적인 느낌과
      코에이 게임으로 인해 깡촌..이라는 느낌과
      일본신화 땜시 왠지 종교적인 건물이 많을 듯한 느낌...이 교차하는 곳입죠 저에겐.

 아사노 나가마사[野 長政]가 출세하는데 있어 히데요시[秀吉]의 친족이었다는 것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나가마사의 부인 오야야[おやや]가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ねね=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와 배다른 자매[각주:1]였기에 나가마사와 히데요시는 동서지간이 된다. 친족이 적었던 히데요시가 나가마사를 중용한 것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히데요시의 측근으로서 군사에 관해서도 담당하기는 하였지만 주로 외교나 민정가로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민정가로서의 나가마사를 나타내는 에피소드가 있다.
 후에 이 아사노 나가마사의 후손으로 겐로쿠[元
1688~1703] 시대 소위 '아코우 사건([赤事件][각주:2]'을 일으켜 당시 세상에 충격을 준 하리마[播磨] 아코우[赤穂] 5만석 아사노 타쿠미노카미 나가노리[匠頭 長矩[각주:3]]가 있는데, 이 사건 최대의 주역이 되는 가로(家老)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大石 内蔵[각주:4]]가 영내(領內) 순시를 위해 아보시[網干]라는 곳에 들렸을 때이다. 이 마을 중심가의 한 곳만 공터가 되어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궁금히 여겨 마을사람에게 물어보자,
 "이곳은 아사노 단죠우[
=나가마사]님이 히메지[路]에 계실 적에 그분의 저택이 있던 자리옵니다. 백성들을 잘 보살펴 주신 분이었기에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이곳은 풀 한 포기 손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고 답했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휘하가 된 나가마사는 히데요시가 1573년 아자이 나가마사[ 長政]의 옛 영토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12만석을 하사 받자 히데요시에게서 120석을 받았고, 다음 해인 1574년 히데요시가 거성을 나가하마 성[長浜城]으로 옮긴 후 노부나가와 함께 전쟁터를 전전하였기에 히데요시가 부재인 동안 이 성을 다스릴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거기에 하리마[播磨], 츄우고쿠[国] 공략에서는 히데요시와 행동을 함께하며 전선부대장으로서 용전분투하였고 또한 히데요시의 거성 히메지 성[路城]의 보충 공사를 담당하거나 하였다.

 1586년은 아사노 가문의 장래를 보았을 때 기념할만한 해가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접촉하여 절친해지는 계기가 되는 단초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役] 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와 화해(和解)를 꾀하며 아비 다른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姫][각주:5]를 이에야스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 교섭성립을 위해 분주히 뛰어다녀 이 1586년의 결혼을 성립시켰는데, 이때 성실히 임하는 모습을 이에야스에게도 인정받아 나가마사는 한층 더 명성을 높이게 된다.

 임진왜란 때 나가마사는 본진에서 근무하며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성의 축조를 담당하였다. 이때 세운 망루()가 후에 카라츠 성[唐津城]으로 옮겨졌는데 나가마사의 관도명(官途名)인 단죠우쇼우히츠[正少弼]의 이름을 따 단죠우망루[正櫓]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나고야에 있을 때 나가마사는 히데요시를 화나게 하여 자칫하면 죽을 뻔한 사건이 일어난다.
 서전의 파죽지세에 콧대가 높아진 히데요시는 작전회의 자리에서,

 "일본은 이에야스에게 맡기고선 나는 30만 군세를 이끌고 조선에 건너가 곧바로 명의 수도에 진격하여 황제가 될 생각이다"
 고 선언한 것이다. 이에야스가 그런 큰 일을 담당하기에는 벅차다고 하자, 그것을 옆에서 듣고 있던 나가마사가 이에야스에게,
 "지금 칸파쿠 전하의 말씀은 제정신으로 한 말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필시 뭔가에 씌어 미치신 것 같으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히데요시의 얼굴이 급변했다.
 "네 이놈 나가마사! 내 직접 네놈을 죽이겠다!"
 고 외치며 손에 칼을 쥐고 일어섰다. 동석해 있던 마에다 토시이에[
前田 利家]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鄕]가 열심히 말렸다. 그래도 나가마사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절 죽여서 국가가 안정된다면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근년 조선과의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은 궁핍해 있습니다. 거기에 전하가 바다를 건너시면 국내 치안은 흔들릴 것입니다. 바다 건너는 것도 중지하시고 파견군도 전부 불러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히데요시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되었다. 결국 나가마사는 숙소에서 벌을 기다리는 몸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 히고[
肥後]에서 반란[각주:6]이 일어나 나가마사의 말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어 죄를 용서받았다. 그 후 진압되어 어수선한 히고[肥後]를 진정시키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각주:7]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네 명의 대로(大老)[각주:8]와 다섯 행정관(五奉行)[각주:9]이 이에야스의 전횡에 분노하여 이에야스 타도를 꾀하였지만, 토시이에가 죽은 뒤 나가마사는 다른 행정관들과는 다른 행동을 취하며 이에야스와 기맥을 통하였다. 또한 1599년 무공파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이 이시다 미츠나리를 제거하고자 했을 때도 나가마사는 아들 요시나가[幸長]를 무공파에 참가시켰다. 이제 나가사마는 확실히 이에야스 편에 섰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이 즈음의 정치정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0월 갑자기 나가마사는 영지(
領地)인 카이[甲斐]로 내려갔다. 자세한 사정은 확실하지 않지만 일설에 따르면 9월 9일 이에야스가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頼]를 방문하고자 하였을 때, 행정관 중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와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등이,
 "마에다 토시나가[
前田 利長][각주:10]에게 모반의 낌새가 있습니다. 아사노 나가마사나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히지카타 카츠히사[土方 勝久], 오오노 하루나가[大野 冶長]를 부추겨 암살을 꾀하려 하고 있습니다"
 고 이에야스에게 밀고하여 그 때문에 나가마사는 영지(
領地)에 칩거를 명령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나가모리들의 참언을 믿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가마사는 카이[
甲斐]로 내려가자마자 에도[]에 가서 이에야스의 후계자 히데타다[秀忠]를 만나 그에게 환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가마사는 얼마 지나지 않은 1600년 1월에 셋째 아들 나가시게[長重]를 히데타다에게 출사시켰으며, 세키가하라 결전[原の戦い] 결전에서 나가마사는 히데타다를 따라 나카센도우[中山道]를 거슬러 올라갔고 적남인 요시나가는 이에야스의 선봉으로 출진한 것이다.

 말년의 나가마사는 이에야스의 바둑상대로 자주 초대받았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천하의 정치정세에 대해 나가마사의 의견을 듣기 위함이었다. 나가마사가 죽자 이에야스도 바둑을 관두었다고 한다.

 아사노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쟁 후 키이[紀伊] 37만4000석이 요시나가에게 주어졌고, 나가아키라[長晟]의 대[각주:11]가 되어 아키[安芸] 42만6000석에 봉해져 이후 아사노 가문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이어진다.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1544년생. 야스이 시게츠구[
安井 継]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사노 나가카츠[浅野 長勝]의 양자가 되었다[각주:12]. 첫 이름은 나가요시[長吉]. 1587년 와카사[狭] 오바마[小浜] 성주. 임진왜란에서는 조선에 건너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등과 함께 진주성 공격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카이[甲斐] 후츄우[府中] 22만5천석.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뒤에는 적자 요시나가[幸長]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 1611년 4월 7일 죽었다. 68세.

  1. 키타노만도코로 즉 네네는 양녀(나가마사의 양부 아사노 나가카츠의 부인의 여동생의 딸) [본문으로]
  2. 아사노 나가노리가 에도 성에서 바쿠후 의전 담당인 코우케[高家] 필두 키라 코우즈노스케[吉良 上野介]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 당시는 싸움 당사자간에 누구에게 죄가 있건 양쪽 다 처벌을 받았으나[喧嘩両成敗], 토자마[外様]의 약소번(5만석)의 다이묘우[大名]인 아사노 나가노리는 할복 & 번 폐쇄라는 엄벌이 처해졌지만 막부의 요직에 있는 키라에게는 아무 벌도 없었다. 그에 대한 복수로 번 폐쇄로 직장을 잃은 아코우 낭인들의 키라를 살해한 사건. 보통 '츄우신구라[忠臣蔵]'로 유명하다. [본문으로]
  3. 나가마사의 현손(玄孫). 즉 나가마사의 손자인 아코우 초대 번주 아사노 나가나오[浅野 長直]의 손자 [본문으로]
  4.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아코우 번 필두 가로로 아코우 사건의 주모자였다. 복수극에 성공한 이후 충성스런 신하 & 진정한 무사의 대명사가 된다. [본문으로]
  5. 시바 료우타로우[司馬 遼太郎]선생이 쓴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에 등장하는 스루가고젠[駿河御前]. [본문으로]
  6.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가신 우메키타 쿠니카네[梅北 国兼]가 일으킨 우메키타 반란[梅北一揆]를 말함. [본문으로]
  7. 여담으로 이 이야기는 18세기 중반의 유학자 유아사 죠우잔[湯浅 常山]이 쓴 상산기담(常山紀談)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 책에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8. 이에야스를 제외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9.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본문으로]
  10.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아들. [본문으로]
  11. 나가마사의 둘째 아들. 임진왜란 때 조선에 건너왔던 형 요시나가에게는 딸밖에 없어서 동생인 나가아키라가 후계를 이었다. [본문으로]
  12. 나가마사의 모친이 아사노 나가카츠의 누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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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iroyume 2009.05.23 1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요토미 히데요리 정권은 과연 아사노 나가마사, 기타노만도코로 등과 같은 히데요시의 가깝고 먼 친척들에게 '비정통적'인 정권이었을까. 히데요시에게 진절 머리가 난 걸까? 혹은 대세를 따른걸까? 아니면 히데요리가 세키가하라 당시 서군을 정군으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압적 성격이긴 하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가의 수호자로 비춰진걸까. 아님 히데요리는 천하통치의 능력이 없으니 사슴(천하의 패권)은 이에야스에게 안겨줘야 된다고 생각했을까. 히데요시의 친척들이 자의반 혹은 타의반 거의 히데요리를 떠나간 걸 보면 히데요시도 어지간히 사람관리는 안한 듯 합니다. 이래서 어찌보면 전통적인 가신과 귀족적 태생이 중요한걸지도? 저야 꼬시지만 말입니다 케케. 잘 읽고 갑니다.

  2. 朴先生 2009.05.26 0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타가 있는 듯...
    '어수순한 히고를 진압시키라는 명령을 받게된다' -> '어수선한 히고를'이 아닌가요?

  3. 나라 2009.05.28 0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지랑님 글을 읽다보면 가끔 바치다를 받히다 라고 쓰시는 경우가 있더군요. 죄송하지만 잘못 아시는 것 같아 적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28 1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니다. 제 고질병이옵죠. T.T

      그런 것을 발견하면 꼭 좀 지적해 주셨으면 하고...지적해 주시면 좋지 않냐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죠스이(如水)는 호(號)이며 이름은 요시타카[孝高], 통칭을 칸베에[官兵衛]라고 한다.
 히데요시[秀吉]는 이 칸베에의 지략을 굉장히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이미 천하인이 된 히데요시가 측근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쩌다 보니 히데요시가 죽은 뒤 누가 천하인이 되느냐로 화제가 옮겨졌다. 측근들은 한결같이 '오대로 중 한 사람이 아닐까?'고 하였다. 히데요시는 머리를 저으며 "그렇지가 않네. 저 쿠로다 칸베에 말고는 생각할 수 없지"라고 말했다. 모두 이상히 여겼다. 칸베에는 기껏해야 부젠[豊前] 12만석의 다이묘우[大名]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노부나가[
信長]가 급사한 이래 자신은 아케치[明智] 정벌[각주:1]을 시작으로 여러 전투를 경험하였다. 전투에 임하여 아무리 고심해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문제가 생겨 이를 칸베에에게 상담하면 그 답은 자신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과 똑같았다. 오히려 칸베에 쪽이 훨씬 의표를 찌른 작전을 세웠다. –고.
 또한 히데요시는 "세상에 두려운 자가 둘 있으니 토쿠가와 이에야스[
川 家康]와 쿠로다이다. 토쿠가와는 그래도 온화한 사람이지만 쿠로다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알 수 없는 자이다."라고도 말했다 한다.

 칸베에가 센고쿠의 무대 전면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히데요시와 만나면서부터이다. 히데요시가 츄우고쿠[中国] 모우리[毛利] 공략을 위해 하리마[播磨]로 병사를 이끌고 왔을 때부터이다. 그때까지 칸베에는 하리마의 시골 다이묘우[大名]에 속한 가로(家老)에 불과하였다. 주군은 고챠쿠 성[御着城]의 성주인 코데라 마사모토[小寺 政職]라 하였다.
 1577년 10월 히데요시가 모우리 정벌의 사령관으로 하리마에 왔을 때 칸베에는 자신의 거성(居城)인 히메지 성[
路城]를 바치고 자신은 히메지 성의 두 번째 성곽(二の丸)으로 옮겨 살았다[각주:2]. 히데요시는 이 해의 7월 칸베에에게 보낸 편지에 '자네는 내 동생 코이치로우[小一=히데나가[秀長]]만큼이나 편한 사람일세'라고 까지 적었다. 칸베에의 기량에 느끼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이 때 이후 칸베에는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와 함께 히데요시 참모의 한 사람이 되었다.

 칸베에의 노력으로 인해 하리마의 대부분은 오다 측에 붙게 되지만, 1578년 3월 하리마 최대의 호족 미키 성(三木城)의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가 모우리 쪽으로 돌아서자 다른 호족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칸베에의 주군인 코데라 씨에게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거기에 또 생각도 못했던 사태가 일어난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하리마에 구원하러 올 예정이었던 오다 가문의 유력 무장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갑자기 반기를 치켜세웠던 것이다. 노부나가조차 벙찌기만 할 뿐인 급변이었다.

 여기서 칸베에는 친구이기도 한 무라시게를 설득하기 위해서 단신으로 무라시게가 있는 이타미 성[伊丹城]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무라시게에게는 오다 쪽으로 돌아갈 생각이 아예 없었다. 사자(使者)인 칸베에도 원래대로라면 살해당할 처지였지만 무라시게와 오랜 기간 친교를 맺어왔고 또한 종교가 같은 천주교였기에 살해당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참혹한 포로 생활이 시작되었다. 

 습한 시궁창 같은 감옥이었다. 가려움을 일으키는 피부병이 머리 부분을 잠식하였으며[각주:3] 다리의 근육이 떨어지고 피부병 때문에 오른쪽 무릎이 썩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반년도 버티지 못했겠지만 칸베에의 생명력은 여기서 1년을 버틸 정도로 강했다. 낙성으로 인하여 구출되기는 하였지만 이 감옥생활로 인하여 죠스이는 오른쪽 다리의 자유를 잃었다. 또한 이 때 무라시게와 뜻을 같이한 코데라 씨는 히데요시에게 성에서 쫓겨났다. 칸베에가 코데라 성(姓)을 버리고[각주:4] 원래의 쿠로다[田]로 돌아온 것은 이때부터이다.

 1582년 6월 2일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었다. 죠스이는 이때 히데요시를 따라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최전선기지인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의 수공(水攻)에 참전하고 있었다. 흉보가 그 진영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정신이 나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동요하고 있던 히데요시의 귓가에 "지금이야말로 히데요시님이 천하를 잡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이옵니다"하고 칸베에는 속삭인 것이다.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한 정세판단이었다. 히데요시는 이 때 이후 칸베에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으며 히데요시 정권의 최대 공로자임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가 칸베에에게 하사한 것은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12만석밖에 안 되었다.

 죠스이가 가슴 속에 숨기고 있던 천하에 대한 야망을 잠시나마 비친 것은 후에 천하를 나누는 싸움이라는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때였다.
 당시 적자(
嫡子)인 나가마사[長政]는 이에야스의 부사령관 격으로 세키가하라에서 싸웠는데, 그 사이 죠스이는 전격적인 움직임으로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붕고[豊後] 등 큐우슈우[九州] 북-중부의 서군 세력을 물리치고 그 지역을 손에 넣은 것이다. 휘하의 주력병사들을 나가마사가 세키가하라로 거느리고 갔기에 죠스이에게는 소수의 병사밖에 없었다. 하지만 죠스이는 백성, 낭인을 긁어 모아 용병군단을 조직하였다. 금은을 방 안에 산더미같이 쌓아서 지원자들을 모았다고 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쿠로다 군은 동군 토쿠가와 쪽이라고 깃발을 선명히 하고 있음에도, 죠스이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이에야스[家康] 양 쪽을 저울에 메달며 수상쩍은 행동을 보였다는 말이 있다. 미츠나리에게서 협력을 요청하는 밀사가 왔을 때, "큐우슈우[九州] 중 7개 쿠니[国]를 준다면 – "하고 서군에 설 듯한 척을 하였다.

 본심은 이러했다. 토쿠가와와 이시다가 싸우고 있는 틈을 타 큐우슈우를 제압하고 양군이 싸우다 지쳤을 때를 봐서 단번에 중앙으로 진출, 천하를 손에 넣으려고 한 가공할 야망이었다. 하지만 세키가하라의 승패는 허무하게 결정이 나 토쿠가와가 이겼다.

 예상이 빗나간 데에 대한 애석함 때문인지 세키가하라 전쟁 후 죠스이는 아들인 나가마사가 토쿠가와 세력의 중심이 되어 뛰어난 활약을 보인 것을 알자 "이 천하의 얼간이 같은 놈"하고 투덜대었다고 한다.

 이 귀모(鬼謀)의 사나이는 죽을 때까지도 연기를 펼쳤다. 임종의 때가 다가오자 이유도 없이 중신들을 욕하며 쪽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도가 지나쳐 나가마사가 한마디 하자 "이는 너를 위해 서란다. 중신들의 마음이 나에게서 떠나 빨리 나가마사의 대가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함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구로다 조스이(田 如水)]
1546년 하리마[播磨] 히메지[
路]에서 태어났다. 처음엔 코데라 마사모토[小寺 政職]를 섬겼지만 히데요시[秀吉]의 츄우고쿠([中国] 공략 때부터 히데요시의 모신(謀臣)이 되었다. 1580년 하리마 내에 1만석이 주어졌고, 1585년에는 야마자키[山崎] 성주가 되었으며, 1588년에는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12만 5천석이 되었다. 경건한 천주교도로 세례명을 '돈 시메온(Don Simeon)'이라고 하였다. 1604년 59세에 죽었다.

  1.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치기 위한 츄우고쿠 대반전[中国大返し]에 이은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를 말한다. [본문으로]
  2. 나머지 일족은 부친(쿠로다 모토타카[黒田 職隆]의 은거성인 코우노야마 성[国府山城]으로 보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이로 인해 瘡頭라는 별명이 생겼다. 우리식 표현으로 하면 '곰보'가 되겠지만, '瘡'라는 글자는 매독의 속칭이기도 하기에 그가 매독에 걸렸다는 말이 생긴 것 같다. [본문으로]
  4. 이때까지만 해도 '코데라 요시타카[小寺 孝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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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朴先生 2009.04.09 0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칸베에도 속을 알 수 없는 "厚黑"의 대가 였군요
    게다가 난국을 틈 타 저런 엄청난 계획을 세웠다니 정말이지... 멋져부러 '-^)b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09 05: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문만 번역하는 곳에 중국어 단어가 나와서 당황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냥 "동군 올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후세로 가면서 죠스이에게 있는 이미지 혹은 선입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커진 이야기가 저 세키가하라 때 정권쟁취...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十.

 이에야스(家康)도 요도도노(淀殿)의 눈치를 살폈다. 만약 그녀가 성질이라도 부려 히데요리(秀)를 내세워서는 또다시 옛 토요토미(豊臣) 계열의 다이묘우(大名)들을 규합이라도 한다면 곧바로 천하에 난이 일어나 이에야스가 어렵사리 손에 넣은 천하가 주먹에서 모래알 빠져나가듯 사라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세키가하라(
ヶ原)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일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등은 이에야스에게 각각 50만석 전후의 봉토를 얻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히데요리의 가신이기도 하다는 이중적인 입장을 지키며 틈만 나면 오오사카성(大坂城 )에 가 히데요리를 배알하고 인사를 올렸다. 만약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가혹하게 대하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에야스는 에도(江)에 있으면서도 토요토미 가문의 필두 대로라는 자격으로 천하에 임했다. 세키가하라부터 2년 뒤인 1602년 2월 14일에 재차 오오사카에 나타났고, 다음 해 3월 14일 히데요리를 배알하고는,

 "평소 문안 인사를 드리지 못하여 이제서야 신년인사를 올리옵니다"

 라고 말하였다. 3월 중순이 되어서야 신년인사를 하는 것도 묘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가신으로써의 예를 취하였고 취함에 따라 카토우 키요마사 등 옛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의 감정을 진정시켰다. 다음 해 1603년의 배알을 마지막으로 이에야스는 오오사카에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제서야 토요토미 가문이라는 한때 일본을 지배한 강성했던 이름을 잊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히 오오사카 성 밑도 쇠퇴하였고 대신해서 에도가 번창하였다.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도 에도에 저택을 세워서는 자신들의 처자식을 자발적으로 에도에서 살게 하는 식으로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바쳤다. 카토우 키요마사 조차 – 라기보다 오히려 키요마사가 앞장서 미야케자카(三宅坂) 고개 위에 집터[각주:1]를 달라고 해서는 황금을 여기저기 처바른 저택을 만들어 처와 자식을 살게 하였다. 이제 에도 정권에 거역하지 않겠다는 증거를 이에야스와 천하에 공언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키요마사를 따라 다른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들도 그리하였다. 이에야스는,
 - 이제 오오사카에 새해 인사할 필요가 없겠군
 하고 생각하여 오오사카에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히데요리는 힘을 상실했다.
 하지만 관위만큼은 남다르게 승진했다. 승진하는 것이 당연했다. 토요토미 가문이 가진 봉토의 규모야 일개 다이묘우에 지나지 않았지만 다른 다이묘우와 다른 점은 부친 히데요시나 히데요리에게는 형 뻘인 히데요시의 양자 히데츠구(秀次)가 칸파쿠(
白)에 임명 받은 것처럼 귀족(公家)이라는 점에 있었다. 이런 점은 다섯 셋케(五家-섭정, 칸파쿠가 될 수 있는 문벌)인 코노에(近衛), 타카츠카사(鷹司), 쿠죠우(九), 니죠우(二), 이치죠우(一条)와 다를 바 없었다. 히데요리는 소년이었지만 1601년에 종이위(從二位) 다이나곤(大納言)에 임명 받았으며, 1603년에 나이다이진(内大臣)이 되었다. 10살의 어린 나이다이진은 과거를 찾아보아도 드물 것이다.
 나이다이진 정도 되면 조정 백관의 총수라고 말해도 좋았다. 이 때문에 쿄우토(京都) 조정은 오오사카에 마땅한 예를 치렀다. 신년이라도 되면 친왕(親王), 상급귀족(公卿) 등이 오오사카로 대거 내려와, 성내에 있는 건물에서 히데요리를 배알하고는 이 토요토미 성(姓) 2대째인 귀인(貴人)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이런 점에서만은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만이 신년인사 하러 오는 것을 그만둔 이유, 더불어 상기와 같은 이유가 있음에도 그만 둔 더 큰 이유는 - 이 해에 이에야스가 조정에 주청하여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에 칭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세이이타이쇼우군은 아주 옛날 키소 요시나카(木曽 義仲)
[각주:2],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각주:3]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겐지(源氏)가 아니면 임명 받지 못한다.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 尊氏)[각주:4]도 겐지였기에 임명되었으며,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도 토키 겐지(土岐 源氏)를 칭하였기에 임명 받았다[각주:5].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織田家)의 부하 장수 시대에 본성(本姓)을 공개적으로 칭하지 않았으며 한때 헤이시(平氏)를 칭했기 때문에 세이이타이쇼우군이 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조정에 주청하여 조정이 만들어 준 성(姓)을 받는(朝臣) 형식으로 토요토미(豊臣)를 하사 받아서는 귀족(公家)이 되었고 칸파쿠()라는 자격으로 일본을 통치하였다. 이에야스도 처음엔 겐지를 칭하지 않았지만 노부나가(信長)와 동맹을 맺고 있던 시절에 조정에 청하여 겐지 공칭을 허락 받았다[각주:6]. 다행스럽게도 이로 인해 쇼우군 가문(軍家)에 임명되었다. 세이이타이쇼우군의 최대 특전은 바쿠후(幕府)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쟁 후 이어지고 있던 에도의 비합법적 정부를 바쿠후 창설로 인해 정당화 할 수 있었으며 그런 합법성을 갖고 다이묘우를 거느리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토요토미 가문에게 형식상이나마 머리를 굽히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한지 이미 3년이 지난 상태였다.

 이 소식은 곧바로 오오사카에 전해져 요도도노와 그녀의 시녀들을 놀라게 하였다.

 "가신 주제에 바쿠후를 연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이 바쿠후를 연 이상 이젠 정권을 토요토미 가문에게 반환할 의사가 없다는 것은 아닌가?
 이때도 요도도노는 카타기리 카츠모토(
片桐 且元)를 불러 마치 카츠모토가 이에야스인 마냥 힐문했다.

 "자네는 거짓말을 한 것인가?"

 하고 요도도노는 숨을 거칠게 하며 책망하였다. 카츠모토는 즉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한 후 자기자신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남몰래 바라고 있던 것을 흡사 이에야스의 머리 속 생각인양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런~ 쇼우군() 직은 일대에 한해서이옵니다. 그 후에는 히데요리님께 물려주실 생각이옵니다"

 이 시기 에도에서 자기 영지(領地)인 히로시마(広島)로 돌아가던 후쿠시마 마사노리도 오오사카에 들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를 배알하여 비슷한 말을 하였다.

 "잠시 동안만 참으시면 되옵니다"

 라는 것이었다. 마사노리가 말하길 이에야스는 1543년 호랑이띠로 이미 노령이다. 그와 반대로 나이다이진(内大事=히데요리)님은 어린 나무가 쭉쭉 자라듯이 커가며, 커갈수록 이에야스가 죽음에 가까워진다. 이에야스가 죽으면 졸자(拙者)를 시작으로 한 천하의 제후들은 더 이상 토쿠가와 가문에 세울 의리가 없어진다. 토쿠가와 가문 자체도 이에야스를 잃으면 지금과 같은 강한 전투력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옵니다. 초조해하지 말고 난을 일으킬 생각하는 일 없이 일단 에도의 지시를 따르시길. 언젠가 때가 오면 아무리 토쿠가와 가문이 정권을 반환하고 싶어하지 않더라도 우리들이 활과 칼을 들고 토요토미 가문으로 되찾아 오겠습니다. – 라는 것이었다.

 "반드시 그리 하겠사옵니다"

 하고 마사노리는 힘주어 말했다.

 이 너무도 듬직한 말에는 안심이 되는 한편 아무리 요도도노라도 걱정도 되었다.

 "사에몬다유우(左衛門太夫=마사노리)님. 그러한 말씀하셔서 행여라도 에도(江戸)로 그 말이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하고 이 귀부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남을 걱정하였다. 마사노리는 그것만으로도 감동하여 눈물을 머금고,

 "고맙사옵니다"

 라며 목소리를 적셨다. 하지만 곧바로 고개를 쳐들어 큰소리로 외쳤다.

 "듣더라도 무슨 일이 있겠사옵니까? 원래 에도님(江戸殿=이에야스)에게 있어 저는 은인이옵니다. 저 세키가하라 때 제가 미츠나리(三成)를 미워한 나머지 에도님에게 가담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제후들은 앞다투어 에도님을 따른다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그러했다. 선대 히데요시와 친척인 자[각주:7]로, 그 때문에 토요토미 다이묘우 중에서는 키요마사와 더불어 후다이(譜代)[각주:8] 필두로 여겨지고 있었으며, 세키가하라 즈음에는 그런 마사노리조차 이에야스에게 가담하였기에 다른 다이묘우들도 거리낌없이 오오사카 측을 물리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 시기의 이에야스에게 있어 마사노리의 정략적 가치는 그만큼 거대한 것으로 그러한 자신의 가치를 마사노리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전쟁터에서 마사노리는 이에야스 측의 선봉으로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한가운데서 용맹한 활약을 벌여 서군을 무너뜨렸다. 어쨌든 마사노리가 이에야스에게 기여한 것은 누구보다도 컸다. 거기에 마사노리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이전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서 이에야스 편에 서라고 권유한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에게 마사노리는,

 "에도님을 돕기는 하겠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츠나리(三成)에 대한 원한 때문일세. 이 전투에서 에도님이 이긴 후 결코 히데요리님의 신상에 지장이 없도록 에도님의 입으로 확약을 듣고 싶네"

 라고 말하여 이에야스는 나가마사를 통하여,

 "그러한 일은 없다"

 라는 뜻의 말을 받았다. 그런 후쿠시마 사에몬다유우이기에 가령 이 말이 칸토우(関東)에 전해지더라도 이에야스는 퉁퉁거리지도 못할 터이다 – 라고 말하였다. 요도도노는 비로소 안심했다.

 그러나 에도의 이에야스는 마사노리 정도의 실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곧 밝혀졌다.
 가볍게 쇼우군 직을 사퇴한 것이다. 취임한지 2년 후인 1605년의 4월이었다. 그런데 그 사임한 그날 조정에 주청하여 쇼우군 직을 적자 히데타다(
秀忠)에게 물려주어 일본의 지배권을 세습시켰다. 이 소식만큼이나 오오사카를 낙담시키고 요도도노와 그녀의 시녀단을 분개시킨 것은 없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히데타다에게 쇼우군 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줌으로써 더 이상 히데요리에게 정권을 물려줄 의사가 없다는 뜻을 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이때 히데요리는 13살로 관위는 우다이진(右大臣)에 임명된 상태였다. 앞으로 승진한다면 칸파쿠밖에 없었으며 칸파쿠가 되면 죽은 아비 히데요시의 선례를 따라 한편으론 백관을 거느리고 조정의 중심에 서며 한편으론 이백여 제후들을 이끌며 천하의 정치를 총괄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세 이래 무가(武家)의 통솔자로 여겨지는 세이이타이쇼우군과 당연하게도 충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1. 현재 일본의 헌정기념관. '미야케자카 고개(三宅坂)'라는 이름은 시간이 흘러 17세기 중반에 미야케 가문(三宅家) 참근교대시에 이용하는 에도저택이 생기면서부터 생긴 이름으로 당시는 ...뭐라고 불렸는지 모르겠음. 데헤~ [본문으로]
  2. 미나모노토 요리토모와는 사촌지간이다(부친끼리 배다른 형제. 사족으로 요시나카의 부친은 요리토모의 큰형(悪源太)에게 살해당했다). 겐페이 쟁란기(源平爭亂) 때 토벌 명령이 내려진 헤이케(平家)를 누구보다도 빨리 쿄우(京)에서 쫓아냈다. 키소(木曽)는 묘우지(苗字)이며 본성(本姓)은 미나모토(源). 보통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 義仲)'로 알려져 있다. 요리토모의 부하뻘이었지만,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나대다가 그 꼴을 못 본 요리토모가 정벌군을 파견하자 정치적 우위를 세우기 위해 코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을 협박하여 쇼우군이 되었다. [본문으로]
  3.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를 연 사람. [본문으로]
  4.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를 연 사람 [본문으로]
  5.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이후 미츠히데가 지원을 호소하며 호소카와 유우사이에게 보낸 편지(明智光秀公家譜覚書)에 나타나는 말로 종삼위(従三位)와 쇼우군에 임명받았다고 주장했다. 혼노우지의 변에 있어서의 조정흑막설의 증거로 많이 사용되는 떡밥이지만 개인적으로 당시까지 미츠히데의 관위인 종오위(従五位) 휴우가노카미(日向守)에서 무가로써는 하나의 허들인 사위(四位)를 뛰어넘어 단번에 종삼위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신빙성은 없다고 생각한다.(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다) [본문으로]
  6. 1566년 미카와 통일 기념으로 그때까지 쓰던 마츠다이라(松平)를 토쿠가와(徳川)로 바꾸면서. 마츠다이라 자체의 본성은 가모(賀茂)인 듯 싶지만 이때부터 본성은 미나모토(源)라고 우겼다. [본문으로]
  7. 마사노리의 모친은 히데요시의 숙모. [본문으로]
  8. 대대로 그 가문을 섬기는 가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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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3.13 18: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이번에도 시달리는군요(...)뭐 아무리 쪼고 볶은들 뭐 히데요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다이진 위로는 못올라가겠습니다만(ㅎㅎ;)


    히데요리에 대해 또 이글을 읽어 관심이 생겨 위키를 찾아보니, 히데요리의 남자아이들 중에 로쿠죠가와라에서 참수당한 쿠니마츠 말고도, 求猒上人라는 사람이 겐로쿠 초두에 80세로 죽었을때 낙성시에 3세였던 차남이었다는 설이 있다고 하더군요. 뭐 위키에도 이 대목 말고는 안나오는이니 누구인지는 잘 알수는 없지만;


    P.S. 전혀 관계 없는 사족입니다만 네이버블로그의 머리에 요구르트 핼멧을 쓴 쥐X이가 아주 인상깊었습니다(허허헛)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3 1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처음 보는 이름인지라 검색해 보니...

      [일본의 슬기로운 중들(浄土本朝高僧伝)]이라는 책에 따르면 -

      태어날 때부터 현명하고 설법에도 뛰어난 '큐우엔(求猒)'이라는 고승(上人)이 말년에 후시미에 은거하며 살았는데 겐로쿠 초반 80세의 나이로 죽었다.

      임종의 자리에서 제자에게 자신은 히데요리의 둘째 아들로 낙성시 3살이었다는 것, 에도에 숨어산 후 조우죠우 사(増上寺 - 에도에 있는 절)에서 학승이 되었다고 고백.

      중년이 되어서 간 오오사카 성의 거대함과 후시미 성터 쓸쓸함을 보고 세태의 흐름에 개탄도 하였지만 말년에는 '천하는 한 사람만의 천하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니들도 망념과 집착을 버리고 세태에 구애 받는 일 없도록 하라'

      ps;일본에 관한 것을 검색하실 때는 야후저팬에서도 꼭 검색해 보시길...일본에 관해서만이라면 구글보단 오히려 더 좋은 검색엔진입죠.

  2. 맹꽁이서당 2009.03.13 2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쿠시마도 말은 저렇게 했겠지만.. 결국 오사카 전투에서 히데요리 측으로 참전한 다이묘는 없었겠죠?

    번역하신 [전국 무장의 말년] 후쿠시마 편을 찾아보니 1619년까지 살아있었던 것을 보면 말이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3 2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신경쓰이는 다이묘우들는 에도성을 지키게 했습니다(에도성을 공격당할 일은 없으니 이름만 다른 억류). 그 중에는 물론 후쿠시마 마사노리도 있었고, 그는 오오사카로 와 달라는 히데요리의 친서도 펼쳐 보지 않았고 사자도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뭐 설사 억류당하지 않았더라도 오오사카 측에 서는 일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만)

      여담으로...
      에도성에 남겨진 인물 중 가장 이외였던 인물은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라고 합니다. 본문에도 잠깐 언급되듯이 세키가하라에서는 거의 동군의 부사령관격이었으며 실질 뒤에서 가장 많은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야스는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는 결과가 되었으니까요. 뭐 결국 여름의 전투에는 참가하게 되지만요.

  3.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14 00: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제부터 시바 료타로의 <세키가하라 전투>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내용이 이것과 비교적 겹치는 부분이 있군요. 언제 한 번 시바 료타로에 대해 알려주시길 부탁드려요 ^^ ㅋ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4 02: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래도 동시대의 이야기를 그리는 같은 작가의 것이다 보니 비슷할지도...참 저는 아직 그것을 읽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연이 닿으면 읽어 보고 싶군요.

      에...저같은 경우 시바 선생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위키에 실린 거 읽는 정도? 그분의 책도 완독한 것이라곤 '타올라라 검'과 '이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 "역사의 교차점에서" 뿐입죠.

  4. 카즈토요 2009.03.20 16: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바 료타로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시바 선생의 작품중에서도 그 방대한 사료의 토대위에 과감한 취사를 통해 극적인 내용들을 빠른 속도로 써내려가고 있어서 정말 빨리 읽히는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일본의 근대를 결정짓는 극적인 사건의 원인과 전개, 연계된 인물들의 심리, 다양한 성격들의 조화와 갈등이 마치 큰 강이 흐르는 듯 속도감있게 읽혀졌습니다.
    대세앞에서 처세하는 군상들의 세세한 묘사와 여러 유명한 사건들이 주는 재미들도 솔솔하구요.

    다만... 시바 료타로 식의 역사 다루기가 조금 위험해 보일때도 있습니다. 마치 NHK사극을 보듯이 인물과 사건의 묘사가 너무나도 주관적으로 디테일하고 생생한데 이것은 독자가 해당역사에 대해 중도적 관점을 냉정하게 유지하고 있지 않다면 작가의 주관적 픽션을 그대로 인정하게 되는 오류의 위험이 크다고 느끼곤 합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1 2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재미있는 책인가 보군요. 시바 선생의 세키가하라.
      틈나면 꼭 읽어 보겠습니다.

      그쵸...
      소설은 소설일 뿐입죠.
      이 10편을 쓰다가 이상한 것이 있어 따로 포스팅하려다 ....귀찮아서요~..못하고 있습니다.

  5.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3.20 19: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대에 한해서이옵니다 - 하고 말했는데 불과 2년후에 히데타다가 넘겨 받았으니...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헐 님아...좀..." 싶겠군요(...)
    ...암튼 이번화도 잘 읽었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1 21: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뭐 선수끼리인데요..

      개인적으로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인지...신경이 쓰이는 인물입니다. 카츠모토는..

  6. 본다충승 2009.05.06 13: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구리 니 본성 가모 라며? ㄴㄴ 미나모토임... 우기면 장떙..... -_-;; 몇달 못봤더니 기억이 가물가물 해서 다시 읽고 있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09 04: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賀茂...는 이에야스의 선조 토쿠아미(徳阿弥)..가 오기 전의 마츠다이라(松平)의 본성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이도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좀 복잡하지만...
      마츠다이라고우(松平郷)라는 지역의 호족으로 마츠다이라 씨가 있었고 그곳에 떠돌이 중(遊行僧)을 하던 徳阿弥가 마츠다이라 씨의 사위로 들어가서 마츠다이라 치카우지(松平 親氏)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이 토쿠가와 이에야스이옵죠.

      본문의 주석을 달 때만 해도 저는 미카와 통일 후 겐지(源氏)를 칭한 줄 알고 있었습니다만 요즘 새로 읽은 책(신 역사군상 12. 토쿠가와 이에야스)에서는 - 미카와 통일 기념으로 토쿠가와(徳川)란 성을 처음 칭했을 때만 해도 후지와라(藤原)라는 성을 썼고, 후년 쇼우군(将軍)이 되고 나서야 그때부터 겐지(源氏)를 칭했다고 하는군요.

九.

 소동은 천하의 소동이 되었다.
 1600년 9월 15일. 미츠나리(
三成)를 주모자로 하는 다이묘우(大名) 연합은 미노(美濃) 세키가하라()로 힘차게 나아가 이에야스(家康)와 거의 다섯 시간에 걸쳐 격투를 벌였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패했다.

 이 전투로 인하여 천하는 일변했다. 이에야스는 전쟁터에서부터 전투대형을 풀지 않은 채 군세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 오우미(近江)를 거쳐 쿄우(京)에 올랐고 거기서 오오사카(大坂)로 내려가 오오사카성 서쪽 성곽(
西)의 작은 텐슈(小天守)에 들어가 그곳을 임시 정무소로 하였다. 중앙 성곽(本丸)의 텐슈(天守)에는 히데요리(秀頼)가 있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를 배알하여,

 "무사히 반역의 무리들을 미노 세키가하라에서 토멸하였사옵니다"

 하고 토요토미 가문(豊臣家) 필두 대로라는 자격으로 보고하였다.
 히데요리는 상석에서 유모의 시중을 받으며 앉아서는 흰 피부에 볼통통한 얼굴을 조금 들어올리며 이 뚱뚱한 노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에야스의 말이 끝나자,

 "수고"

 라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에야스의 공을 치하하였다. 알현이 있기 조금 전, 노신(老臣)인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에게서 나이후(内府=이에야스)가 오거든 이렇게 말씀하시옵소서 – 라는 것을 미리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어린 히데요리에게는 지금 무슨 일이 끝나고 어떤 일이 시작되고 있는 지를 몰랐다.

 하지만 사태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그대로 오오사카성 서쪽 성곽에 눌러앉아서는 토요토미 가문 대로 겸 히데요리 후견인이라는 자격으로 자신에게 거역했던 세키가하라 패배자들의 영지(領地)를 몰수하여 자신의 편을 들어준 무리들에게 나눠주는데 몰두하였다. 그러는 사이, 토요토미 가문의 다이묘우(大名)들은 예전 히데요시에게(秀吉)에게 그러했듯이 서쪽 성곽의 이에야스에게 출사하였고 쿄우(京)나 사카이()에서도 고급 귀족(公卿), 귀족이나 황가의 피를 잇는 승려(門跡), 상인, 스님 등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에 축하를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 성황은 히데요리 모자가 살고 있는 중앙 성곽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이에야스는 이 서쪽 성곽에서의 작업 – 논공행상 – 이 끝나 히데요시 시대의 다이묘우 배치가 전부 바뀌어 이에야스 중심의 편성으로 바꾸었을 즈음이 되자, 이에야스는 더 이상 같은 오오사카성에 있으면서도 중앙 성곽의 히데요리에게 인사를 올리지 않게 되었다.

 "나이후는 더 이상 어제까지의 나이후가 아니다. 천하의 지배자인 것이다"

 라는 것을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가문의 부엌데기에게까지 철저히 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곧이어 이에야스는 자신의 근거지인 에도(
江戸)로 돌아가기 위해 오오사카(大坂)를 떠날 때도 부하를 히데요리에게 보내었을 뿐으로 자기자신은 인사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요?"

 하고 요도도노의 측근, 특히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蔵卿局) 등은 이에야스의 돌변한 태도를 비난하였지만 그러나 그 목소리는 낮아, 다른 시녀들의 귀에 들어가는 것조차 두려워하여 요도도노에게만 속삭이고 있었다. 여하튼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후 토요토미 가문의 다이묘우 하나하나를 전부 그 손으로 휘어잡고 있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권위가 소멸되었다.

 처음에 요도도노는 세키가하라의 패전에 대해 둔감하여 단순히 이시다 미츠나리의 무리들이 몰락했다는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이건 무엇보다 이에야스의 책략에 의한 것일 것이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에서 대승을 거두자마자 곧바로 사자(使者)를 오오사카로 급파하여,

 "세키가하라의 일건은 이시다 지부쇼우유우(石田 冶部少輔=미츠나리)의 사욕으로 인한 것이며 히데요리님과 그 어머님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기에 원한 같은 것은 없사옵니다"

 라고 말하였고 그 말 덕분에 오오사카성이 쓸데없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막았다. 이로 인해 요도도노도 안심하였다.

 "토쿠가와님이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요도도노도 그리 말하였고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도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오오사카성에 입성하자마자 태도를 바꾸어 갑자기 으름장을 놓았다.

 "아무래도 세키가하라의 일건은 이시다 지부쇼우유우 지 혼자서만 짠 계획도 아닌 것 같다. 조사에 따라 만약 중대한 모의가 밝혀진다면 그 아무리 존귀한 분이라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라는 뜻의 말을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성안에 퍼트렸다. 그 아무리 존귀한 분이라고 하더라도 – 라는 범주에는 물론 히데요리 모자가 들어갈 것이다. 이것에 요도도노는 떨었다. 예전 히데츠구(秀次)와 그 처첩, 자녀들처럼 산죠우(三条) 강변에서 꼬챙이에 꿰여 죽는 것이 아닐까? 이 때문에 요도도노는 이에야스가 마음 상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에야스에 대해서 일절 비평을 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시녀단들에게 조심케 하였다.

 "오오사카 여자들이 숨 죽이고 있군"

 이에야스는 만족했다.

 "그래야 하기 쉬워지지"

 하고 이에야스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요요도노들이 목을 움츠리고 있는 사이에 서쪽 성곽에서 논공행상 작업을 진행하면서 토요토미 가문의 영지(領地)를 기세 좋게 삭감해 버렸다.
그렇게 깎이고 남은 고(故) 히데요시의 유산이라는 것은 오오사카성 하나와 셋츠(
), 카와치(河内), 이즈미(和泉) 세 지역()에 흩어진 65만 7400석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히데요리는 일개 다이묘우의 – 그것도 카가(加賀) 마에다 가문(前田家)보다도 석고가 낮은 – 위치로 전락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요도도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고 시녀들이 소문을 듣고서 웅성대기 시작한 것은 이에야스가 에도로 떠난 다음부터였다. 그녀들은 어리석게도 그때까지 토요토미 가문의 석고가 그 정도로 되어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럴 리가 없다"

 요도도노는 아직도 믿지 못했다. 하지만 만약을 위해서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勝元)를 호출하였다. 카츠모토는 오우미(近江) 출신으로 히데요시가 손수 키운 무장이며, 히데요시의 오우미 나가하마(長浜) 시대부터 친위대에 속하여 섬겼고 시즈가타케(賤ヶ岳) 전투[각주:1]에서는 크게 활약하여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동료 소년들과 함께 적진에 돌입, 그 공은 소위 칠본창(七本槍[각주:2])에 꼽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 키요마사나 마사노리만큼 인정받지 못하여 다이묘우가 되지는 못했다. 카츠모토가 무략가이지도 정략가이지도 않은 것이 그 이유로, 재주는 아무리 보아도 평범하여 단지 성실함만이 장점으로 비쳐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 히데요시의 말년, 히데요시가 히데요리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이렇게 자신이 키운 가신(家臣)의 존재를 소중히 여김에 따라 1만여석을 주어 약소이기는 하지만 다이묘우로 만들고 [상시 히데요리를 알현할 수 있는 자격]이라는 것을 주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역할을 히데요시가 주지 않았던 것은 이미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를 임명하고 있었으며, 정무에 있어서의 대리인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임명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토시이에는 세키가하라 이전에 병으로 죽었으며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후 위와 같이 되어 천하의 호령자가 되었다. 어쨌든 토요토미 가문에는 가로(家老)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야스는 승리한 뒤 오오사카성에 들어서자 마자 카츠모토를 불러,

 "이치노카미(東市正=카츠모토)님이 히데요리님을 돌보시길"

 하고 히데요리 후견인 겸 토요토미 가문 가로라는 직책에 임명하는 한편 토요토미 가문 직할지에서 땅을 떼어 카츠모토의 녹을 늘려서는 1만 8천석으로 하였다. 단 이에야스는 요도도노와 이 인사(人事)에 대해서 아무런 상담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거의 타인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인물로, 거기에 이에야스가 임명한 가로라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어떤 꿍꿍이가 있는 듯하여 친근함을 가지려고 해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은 이 카츠모토에게 사정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이치노카미. 히데요리님의 영지(領地)는 몇 석인가?"

 본론부터 말했다.

 "글쎄 그러니까 그것이…"

 카츠모토는 망설이는 표정을 보일 수는 없다며 얼굴을 바닥에 부딪힐 기세로 넙죽 엎드려 얼굴을 바닥에 문지르며 궁리를 짜냈다. 이 건에 대해서는 당연히 이에야스에게서 그에게 일방적으로 통지되어 있었으며 그 뿐만 아니라 새로운 영지(領地)에 대한 세금 목록과 토지대장도 정리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그 사실을 히데요리 모자에게 알려야 하나 어쩌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알게 되면 이 자존심 세고 세간에 대한 지식이 무지한 이 귀부인은 얼마나 미쳐댈 것이며 또한 어떤 사태를 일으킬 것만 같았다.
 '어쩌면 눈치채지 못할지도 모르지'
 고 한편으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도 있었다. 다행스럽게 히데요리는 어렸고 요도도노는 오오사카성 중앙 성곽(
本丸)만을 이 세상 전부로 여기며 시녀들만을 상대로 하며 생활하고 있다. 그런 환경에만 있다면 토요토미 가문의 처해진 상황은 알 필요도 없었으며 가령 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아직 히데요리님이 천하의 지배자시다 - 라는 어제 밤 꿈의 흔적을 계속 맛보고 계셔주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카츠모토의 뻔뻔함이라기 보다 무능함과 소심함의 결합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요도도노는 아무래도 진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카츠모토는 몇 번이나 말을 주저하기는 하였지만 결국 65만 7400석이라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현실을 말했다.

 처음에 요도도노는 의미불명의 소리를 질렀는데 그것이 분노였을지 놀람이었을지 엎드리고 있던 카츠모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다음 말은 카츠모토의 귀로 충분히 파고들어왔다.

 "히데요리님을 대신하여 그쪽에게 묻겠습니다. 그쪽은 이에야스의 수하인가? 아니면 이 가문의 가신인가?"

 요도도노의 입장에서 보면 카츠모토는 토요토미 가문을 이에야스에게 팔아 넘겨버렸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중대한 – 히데요리가 어느새 일개 다이묘우의 위치로 전락해 버린 상태라는 믿기 힘들 정도로 중대한 사태 – 에 대해 사전에 상담했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하오나"

 하고 카츠모토는 그제서야 목구멍 저 안에서 말을 끄집어 내어, 그것이 전쟁인 것입니다. 요번 패전 때문에 이시다 미츠나리는 조리돌림 끝에 참수. 안코쿠지 에케이( ),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밀지(密旨)를 내리신 히데요리님의 죄는 불경스럽습니다만 당연 – 이라고 말했을 때 요도도노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막았다.

 "나를 협박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사옵니다"

 카츠모토는 낭패하였지만 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별개의 말을 하였다.

 "이는 준비금이옵니다"

 라고 이 혈색 나쁘고 몸집 작은 인물은 말하였다. '이는'이라는 것은 65만여석을 말하는 것이었다.

 "준비금?"

 "그 단어가 귀에 거슬리시면 히데요리님 양육에 따른 비용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호오~"

 요도도노는 흥미를 느낀 듯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한가?"

 "그렇사옵니다"

 카츠모토는 자신에게 납득시키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65만여석을 히데요리가 성인인 될 때까지의 경비라고 해석하면 너무 많을 정도의 거액인 것이다.

 "나이후가 말하길"

 하고 카츠모토는 말을 이었다. 종전대로 크나큰 직할지를 어린 주군이 가지고 있으면 또다시 제2, 제3의 지부쇼우(미츠나리)가 나타나 천하를 흔들 뿐만 아니라 결국 토요토미 가문을 위험에 빠뜨리게 만든다. 나이후는 그것을 깊이 생각하여 그것이 토요토미 가문을 위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눈물을 머금고 65만여석으로 한 것이다 - 고 말하였다.

 "정말인가?"

 "감히 거짓을 말씀 드리겠습니까?'

 "그렇다면 히데요리님이 크신 다음에는 천하를 히데요리님께 돌려준다는 것을 에도 나이다이진(戸内大臣=이에야스)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이군"

 "그렇사옵니다"

 "확실한가?"

 "그렇사옵니다"

 카츠모토는 긍정은 차츰 애매해졌지만 요도도노와 시녀들은 수군거리다가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는 사람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카츠모토의 확답을 가장 믿지 않고 있는 이가 카츠모토 자신이었다.
 '설마 나이후가'
 고 생각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카츠모토 자신이 창작하여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 거짓말을 만들 정도의 재주도 이 남자에게는 없었지만 – '나이후의 심중'이라며 천하를 일시적으로 맡고 있겠다는 말은 이에야스의 모신(
謀臣)인 혼다 사도노카미 마사노부(本多 佐渡守 正信)에게서 들은 것이었다.
 - 요도님께서는 귀부인이시기에 흥분시키면 안 되오. 꼭 그렇게 말씀하시길.
 하고 혼다 마사노부는 구두로 지시하였다. 그때 카츠모토는 급히 진지한 얼굴로,

 "그건 정말이시죠?"

 라고 하면서 마사노부의 눈을 응시하였다. 마사노부는 조금 당황한 후 곧 크게 웃으며,

 "무슨 말을 하시나 했더니. 이런~ 이치노카미님까지 왜 이러시오~'

 하며 계속 웃었다. 이 파안대소는, 새삼스레 물을 것까지도 없이 그것이 나이후의 진심이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 왜이래 선수끼리, 이제 와서 요상한 것을 말해서는 곤란합니다 - 라는 의미인지 카츠모토의 능력으로는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었고 또한 그것을 되물을 용기도 없었다. 이런 정도의 인물을 토요토미 가문의 재상으로 만든 것도 이에야스의 책략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카츠모토조차 요도도노와 그 시녀단의 무지함에는 동정이 일 정도였다. 의문을 느껴야 할 곳을 잘못 찾고 있는 듯 했다.
 가령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직할지 중 사카이(
)와 하카타(博多)라는 2대 해외무역항을 장악해 버렸다는 것에 있었다. 지금까지 그 두 항구도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관세(關稅)라는 막대한 돈이 토요토미 가문으로 흘러 들어왔지만 지금은 그것이 전부 에도(江戸)로 흘러가고 있다. 정말로 이에야스가 히데요리가 성인이 된 후에 정권을 토요토미 가문으로 반환할 생각이라면 관세를 오오사카성의 금고로 쌓아두며 히데요리 장래를 위해 계속 저축해 놓지 않으면 안 되었을 터였다. 그런 것 하나에서도 이에야스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 요도도노와 그녀의 시녀들은 헤아려야만 할 것이다.

2007/06/20 -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 카타기리 카츠모토

  1. 1583년에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전투. 여기서 승리함으로써 히데요시는 일본의 패권을 손에 넣게 된다. [본문으로]
  2.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대활약하였다고 선전된 일곱명의 무장을 이른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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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3.03 2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불쌍한 카타기리 카츠모토군요..(;;)

    개인적으론 우직함 탓에 찾아온 재앙이 가슴아팠습니다만(;;)

    그렇다곤 해도 요도도노는 참.. 아무래도 총명한 외삼촌의 재능을 물려받진 못한 듯 하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난세에 저 무능은 죄악에 가까운 일인데말이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03 23: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 좋은 때 안 좋은 위치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카츠모토는...

      어라~ 만화 꽃의 케이지...에서는
      그 후우마 코타로우(風魔 小太郎)의 카게(影)가 요도도노에게 "훗. 과연 센고쿠의 패왕 노부나가의 피를 잇는 여자군"..하는데 말이죠..(그러고 보니 노부나가의 피를 잇지는 않았군요. 여동생(お市)의 딸이니...어떤 곳에서는 노부나가와 이치가 금단의 사랑을 나누는 것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쵸...난세에 무능은 죄악이죠..사족입니다만 요즘 해외도서를 살 때마다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2.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05 12: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챠챠히메라 불릴 때는 귀엽고 깜찍한 느낌, 요도도노로 불릴 때는 그냥 욕심많은 아줌마의 느낌이 나는군요;;

    그나저나 두집 살림을 차리셨군요! 두 개 모두 잘 운영하시길 바랍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05 17: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감상으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챠챠~ 하면 발랄한 느낌이고, 요도...하면 왠지 쫌...뭐 그렇다고요..

      응원 감사드립니다.(..응원 맞죠? 빈정 아니신거죠!?)
      그냥도 괜찮겠지만 태그 모아둔 곳을 보면 너무 복잡해서요.

    •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06 15: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댓글 쓰면서 어투가 좀 이상한가 싶어 수정하려다가 귀찮기도 하고 해서 그냥 넘어갔었어요. 이모티콘이라도 넣을걸 그랬나봐요 ㅋㅋㅋ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07 11: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고맙습니다...라고 하기에는 밋밋해서 저렇게 썼을 뿐입니다.
      (제 원래 말하는 스타일이 그러하옵니다)
      턴오버님이 이상한 점은 아무 것도 없습죠. 오해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3.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3.08 19: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편도 잘 읽었습니다.

    나이다이진과 나이후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만...
    나이후가 나이다이진을 중국식으로 읽은것이라는데 (나이다이진 나이후로 검색하니 발해지랑님 블로그가 나오더군요) 둘을 나눠쓰는 이유 같은게 있나 궁금합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09 19: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함...여기 가보세요.
      http://ja.wikipedia.org/wiki/唐名

      저는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몇 년전부터 그냥 "사장"이라면 될 것을 "CEO"라고 하지 않습니까?
      영어 들어가니 멋있어 보이나 봅니다.
      그리고..
      당시의 슈퍼 파워는 물론 중국...
      그렇기에 자기네식 이름보다는 중국식 이름이 멋있어 보였나 보죠.

    •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3.11 01: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꽤 오래전부터 그랬나보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4. 2013.09.07 1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시는 죽을때까지 이거 걱정했는데 마누라가 정치는 하나도 몰라서 더 나빴다.마누라가 정치적으로 기민했으면 히데요시의 공백을 훌룡하게 채우고 히데요시와 자기가 낳은 아들이 일본을 지배하게 만들었을지도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3.09.07 17: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오사카 공방전은 여러가지 요인들이 복합해서 일어난 것이다 보니 여성 한 명이 어떻게 해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