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가 죽고 나서 100년 뒤, 에도 시대[江戸時代] 중기의 학자 겸 정치가 아리이 하쿠세키[新井 白石]는 야스마사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役] 이후 소극적이 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지 않게 된 것은, 이에야스[家康]의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막정(幕政)의 중추가 되어 활약하였기에 그런 마사노부와 대립하면 주가(主家)인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을 위해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고 그 마음 속을 헤아리며, 
 ‘그 당시의 무장으로서는 특별한 일이었다’
 고 야스마사라는 인물을 높이 평가하였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성실하고 솔직하며 용감한 미카와[三河] 무사로, 같은 나이의 혼다 헤이하치로우 타다카츠[本多 平八郎 忠勝]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토쿠가와 군단의 으뜸가는 맹장(猛將)이었다.

 야스마사는 미카와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1]에 16살의 나이로 데뷔전을 치렀고, 이때 무공을 세운 덕분에 이에야스의 신뢰를 얻어 이에야스의 이름글자 중 ‘야스[康]’를 하사 받았다. 이후 이에야스가 출진하는 곳에는 반드시 이에야스의 직속군[旗本] 선봉을 맡았으며, 1566년에는 혼다 타다카츠와 함께 '직속군 선봉부대 부대장[御旗本先手侍大将]'이 되어 토쿠가와 군단을 지휘하여 그 용장()을 전쟁터에 드러내게 되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秀吉]와 싸운 1584년의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合戦] 때 야스마사는 적의 기세를 죽이기 위해서 격문(檄文)을 만들어 히데요시에게 욕설을 선사하였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덕분에 출세한 가신[家臣] 주제에 지금은 그 주군의 아들을 상대로 활을 쏘고 있다. 이야말로 팔역의 죄[각주:2]에 해당하는 것이다. 비도(非道)한 히데요시와 같은 편에 서는 자에게는 반드시 천벌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군의 아들’이란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로, 이에야스는 노부카츠를 맹주로 하여 히데요시와 싸웠던 것이다.
 야스마사의 격문을 본 히데요시는 분노하였다.
 “코헤이타[小平太]를 산 채로 잡아 내 앞으로 데리고 와라.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은상은 바라는 대로 다 주겠다”
라고 사졸들에게 말했을 정도로 열화와 같이 화를 냈다.

 히데요시의 분노도 세월과 함께 사라졌다. 이유 중 하나는 이에야스에 대한 야스마사의 충성스런 성격이 히데요시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1586년의 일이다. 코마키-나가쿠테가 끝난 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강화를 맺었다. 히데요시는 토쿠가와 가문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姫]를 이에야스에게 시집 보냈다. 그때 함을 가지고 온 사자로 온 것이 야스마사였다. 히데요시에게 알현하였을 때 히데요시는,
 “여어 야스마사 왔는가. 코마키 전투 때는 자네의 잘린 목을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자네의 충성을 각별히 생각하고 있다네”
 하고 가볍게 언급하였을 뿐이었으며, 거기에 함을 가지고 온 중요한 사자가 관직이 없어서는 안 된다며, 같은 해 11월 9일에 종오위하(従五位下) 시키부노타이후[式部大輔]에 임명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날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로 불리는 동료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혼다 타다카츠도 서임되었다. 토쿠가와 가신 서임의 시초였다.

 세키가하라 결전 시에 야스마사는 히데타다[秀忠 – 후에 에도 막부 2대 쇼우군[将軍]]에 속해 있었다
 히데타다 군은 토우카이도우[東海道]를 거슬러 올라간 이에야스의 본군과 다른 길을 취하여 나카센도우[中仙道]를 서상(西上)하였다. 야스마사 외에 혼다 마사노부, 오오쿠보 타다치카[大久保 忠隣] 등이 속해있었다. 양군은 미노[美濃]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행군 도중 강적이 나타나 히데타다 군의 서상을 막았다. 시나노[信濃] 우에다 성[上田城]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유키무라[幸村] 부자였다.

 기략을 연발하는 사나다 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한 히데타다 군은 결국 세키가하라 결전에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이에야스는 굉장히 불쾌해 했다. 히데타다가 겨우 오우미[近江] 쿠사츠[草津]에 도착했을 때도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3일이 허무하게 지나갔다. 히데타다는 안절부절 못했다. 히데타다 진중은 침묵이 지배하였다. 이때 결심한 야스마사가 밤에 이에야스를 찾아갔다. 야스마사는 우선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며 사죄한 뒤 이어서 소신을 당당히 말하였다.
 “주군의 분노가 만약 세키가하라 결전에 시간 맞추지 못한 것을 책망하시는 것이라면 주군에게도 잘못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부자가 함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물리치고자 했으면 어째서 사자를 보내 빈번히 연락을 취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고 이에야스에게 따지며,
 “언젠가는 천하인(天下人)이 되실 히데타다 공이 무공 부족으로 인하여 부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무시한다면 이는 히데타다 공만의 치욕이 아니라 주군 자신에게도 그 비웃음이 쏟아질 것입니다”
 고 논리 정연히 설득하였다. 야스마사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이에야스라도 분노를 풀고 다음 날에는 히데타다와 대면하고 격려하였다.
 히데타다의 한없이 기뻐하였다. 자신의 가문이 있는 한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야스마사를 잊지 않을 것이라는 편지를 야스마사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미담과 같은 이야기 외에 야스마사에게는 이에야스에 대한 반골심을 나타내는 일화도 전해진다.
 1606년 4월, 야스마사의 병이 중하여 이에야스, 히데타다의 병문안 사자로 사카이 타다요[酒井 忠世], 도이 토시카츠[土井 利勝]가 파견되었을 때의 일이다. 사자를 향해서 야스마사는 이불 안에서,
 “저도 장(臟)이 썩어 이렇게 추해졌습니다”
 고 빈정대며 말했다. 예전 작전회의에서 혼다 마사노부가 발언하였을 때 마사노부를 향해서 야스마사는,
 “된장이나 소금이 늘고 주는지만 신경쓰는 장이 썩은 사람이 전투에 관해서 무엇을 안다고 말을 하는가?”
하고 매도한 적이 있었다.
 병상에서의 말은 마사노부 등을 중용하는 이에야스를 비난하는 것이고 하였으며, 평화로운 시대에 들어와 잊혀져 가는 존재인 예전 전쟁터 용사의 자조(自嘲)이기도 했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1548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 중 한 명. 1581년 토오토우미[遠江] 타카텐진 성[高天神城]를 공격하였을 때 적의 수급 40을 취했다 한다.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는 미요시 히데츠구[三好 秀次 – 후에 칸파쿠[関白]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군을 물리쳤다. 1590년 토쿠가와 에야스[徳川 家康]가 칸토우[関東]로 이봉(移封)되자 코우즈케[上野] 타테바야시[館林] 10만석에 봉해졌다. 1606년 악성 종양을 앓아 5월에 죽었다. 59세.

  1. 잇코우 종[一向宗 - 정확히는 혼간지[本願寺]]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종교 반란. 미카와 잇코우잇키[三河一向一揆]는 세금을 내지 않던 미카와의 혼간지 계열의 절에 세금 징수하려 하다가 그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란 [본문으로]
  2. '八虐'라고도 쓴다. 율령제 시대에 가장 무거운 죄. 기본 사형이며 감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텐노우[天皇]에 살해에 관한 모반(謀反), 황거나 황릉에 관한 불경인 모대역(謀大逆), 일본 국가에 관한 반란획책인 모반(謀叛), 신사에 관한 불경인 대불경(大不敬), 존속살해인 악역(悪逆), 대량 살인죄인 부도(不道), , 존속살인 이외에 존속에 관한 죄인 불효(不孝), 주군에 관한 배신인 불의(不義)...인 여덟가지 죄. 여담으로 이중 존손에 관한 악역, 부도, 불효의 경우 당시 일본에 유교논리가 없었기에 사법(死法)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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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11.10 08: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쌍류의 게임에서는 언제나 클론장수(..;)의 안습함에 사실 신장의야망류에서도 전용 전법도 없고 참 어정쩡하다 싶었는데.. 에, 역시 게임은 게임이니까요. 실제론 역시 4천왕 다운 대인배스러움을...

    여담이지만 암이란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수년후에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더군요. 아.. 역시 문제는 세키가하라였으려나(..;)

    그나저나 그저께 하마마츠도 지나갔었는데 왜 이에야스가 떠오르지 않았는지(..;)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1 12: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천왕 중 하나가 클론이란 말입니까!!!
      ...하긴 사천왕 중 No.1격인 사카이는 나이도 나이니 만큼 별개로 치고, 톤보키리라는 전용무기를 장착한 혼다 타다카츠나, 적비대[赤備え]를 둔 나오마사와 비교하면 좀 임팩트가 딸리긴 하는 편인 듯.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 하니... 실제로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개연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히데타다 군의 실질 No.1 참모 격(경험이나 명성에 더해 동원한 군사도 히데타다 직속군 15000을 제외하곤 토쿠가와 가문에서는 최다인 3000)이었을텐데도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트라우마가 없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도 이순신 장군을 그렇게 존경하지만 아산 지날 때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괘의치 마시길...

  2.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09.11.10 16: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하를 잡기 위해서는 뛰어난 지휘관들을 많이 보유해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면에서 항우나 유비, 제갈량이 결국 천하를 못 잡은 것은 그런 인재의 폭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을까요.

    ( 아, 물론 촉나라는 인재가 넘쳐도 국력이 부족해서 졌겠지만 )

    대망팬들에게는 야스마사보다도 고헤이타가 더 익숙하다는 점에서 대망은 획기적 문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1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인재도 인재지만 그것을 살릴 수 있는 시스템(보급, 행정, 의사결정에 필요한 소통 등등등)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달리(그러니까 대망이 나왔던 시대) 요즘 소설류는 통칭보다는 이미나[諱]를 주로 쓰는 것 같더군요. 제가 읽은 같잖은 소설만 그렇게 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개인적으로도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보다는 시바타 곤로쿠[柴田 権六]가 아직은 더 익숙하더군요. ^^...저도 대망이 첫 일본 소설이거든요.

  3. 골룸 2009.11.10 19: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다다카츠와 더불어 전란의 시기에 용감히 싸운 무사였죠
    다다카츠나 야스마사 같은 사람들을 보면 한 인간의 인성이 크게 변하게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도도다카토라 처럼 변화무쌍한 사람도 있는데 말이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1 12: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근데 주석 단 거 다 날라가고, 나름 교정했던 것도 그대로군요... 초벌 올려서 실례했습니다....그럼에도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다다카츠나 야스마사 같은 사람들을 보면 한 인간의 인성이 크게 변하게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좋은 말씀이십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이에야스 탓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타다카츠나 야스마사가 전쟁터만의 인물로 인식되긴 하지만...

      후년 에스파니아의 돈 로드리고가 오오타키 성의 거대한 모습에 타다카츠의 둘째 아들 타다마사가 왕인 줄 알았다는 것이나 세키가하라 당시 서군 여러 장수들에게 수 많은 편지를 보내며 동군 측으로 끌어 들인 것을 보면 타다카츠의 정치력이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야스마사도 또한 이에야스가 행한 칸토우 다이묘우 배치의 틀을 제시한 인물인 것을 보면 그 역시도 야전공성만의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정치력과 실적있는 인물들에게 아무런 상이나 영지 가증도 없이, 거기에 정치 중추에서 쫓아낸 이에야스를 아무리 주군이라곤 하지만 좋게 생각하기에는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당시는 유교의 '충'이란 논리가 도입 이전이었기에 더욱 그럴 수 있었을 것 같구요.

    • 골룸 2009.11.12 13:37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찌 보면 매정하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2대째로 넘어가는데 좀 부담이 될만한 인물들을 사전에 정리 한 것도 같고
      아무튼 그런 와중에도 도쿠가와 가문내에 큰 문제 없이
      혼다나 사카키바라 가문이 계속 됐던 걸 보면
      가문내의 결집이나 충성심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뭐 이에야쓰 입장에서야 쓸만큼 다 쓰고 어느 정도 포상도 한거니까요
      계속해서 느끼는거지만 이에야쓰는 참 짠 사람인거 같아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3 13: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전 사극 용의 눈물....인가에서 태종 이방원이 공신들을 내치면서 하는 말이....
      "저들이 기세등등하여 세자를 업신여길 것이 두렵소이다"....비슷하진 않지만 저런 뉘앙스였을 것입니다.

      공신들을 토사구팽하는 제왕들의 맘은 저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련하면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이에야스는 천하인의 그릇이 아니라며...
      "그는 가신들에게 영지를 아낌없이 나눠줄 그릇이 아니기에 천하를 잡진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짠 사람이긴 했나 봅니다.(...무엇보다 우지사토가 실제로 저런 말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4. 나라 2009.11.11 23: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친구의 최대의 잘못은 히데타다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에야스의 중뿔난 마음도 이해할만 합니다. 결과적으론 세키가하라 결전에 승리했지만, 히데타다군이 제대로 오지 못한 것은 확실히 불안 요인이었으니까요. 히데타다군이 제 시간이 왔으면 완승을 쉽게 보장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2 06: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다만 잘 나가는 부잣집 도련님, 말 좀 듣게 하기는 엄청 힘들 듯 싶습니다.

      사족으로....세키가하라 때 토쿠가와 가문의 실질적 전투집단은 이에야스 휘하에 있던 토우산도우[東山道] 방면군이 아니라, 히데타다가 이끌던 나카센도우[中仙道] 방면군이라 하더군요. 전투에 적합한 토쿠가와 가문 내의 만석 이상을 가진 무장들은 타다카츠와 나오마사를 제외하곤 히데타다 휘하에 속했다고 합니다.

      만약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히데타다 군이 있던 전쟁터에 있던 상태였다면 후쿠시마 마사노리, 쿠로다 나가마사, 호소카와 타다오키 등의 힘을 빌릴 필요 없이 토쿠가와 군만으로 승부를 결정지었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합니다.

      또한 나중에 후쿠시마, 쿠로다 등에게 전공에 따른 막대한 영지를 줄 필요도 없었을 테고요.

  5. 나라 2009.11.12 1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나중에 후쿠시마에겐 제대로 엿을 먹이지 않습니까;;;
    히데타다가 제 시간에 오고 서군이 서로 배반하지 않고 결전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 항상 그게 궁금하더군요. 만약 미츠나리가 이겼으면 가마쿠라 시대의 싯켄 같은 사람이 되었을까나;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3 13: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카이에키[改易]라는 손이 한번 더 가면 그 만큼 위험도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에도가 아닌 자기 영지에 있을 때 카이에키 영이 떨어졌다면 과연 역사처럼 순순히 응했을지는 궁금합니다만...

      뭐 그래서 참근교대라던가 일국일성령이라는 보험이 있었긴 합니다만, 이외로 히데요시 은고 다이묘우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하면 서국에 몰려 있었던 만큼 다시 전화의 시대로 돌아갈 확률이 0%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모든 불씨를 세키가하라에서 히데타다가 늦음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로 배반하지 않고 결전이라...개인적으로는 서군이 승리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미 서군은 높은 곳을 전부 제압하여 동군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포위하고 있었고, 동군은 전부 그 아래 혹은 평지에 진을 치고 있었던 입장인지라...
      (포진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ja/0/05/Sekigahara.png )

      장기전으로 가면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군사들이 동군 후방 보급을 끊을 수 있는 반면 서군은 바로 뒤편이 이시다 미츠나라의 영지인지라 보급면에서는 서군이 비교적 자유롭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합니다.

      미츠나리...는 어땠을까요...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나중에 정쟁에 패하여 한때의 인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6. dsfsd 2012.03.23 0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츠나리 - 서군 - 시마즈 모리 - 임진왜란의 주역들일 뿐 아니라 나중에 도쿠가와 막부 전복하고 메이지유신으로 조선을 다시 쳤던 그 뿌리 아닙니까 과거의 일이지만 고소하다는 얘기밖에 안나옴..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3.24 15: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댓글 늦어 죄송합니다. ^^;

      ...근데 본문글과 리플은 좀 매치가 안 되는군요. 단지 이름이 거론되어서인가요?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알기 힘들군요. 인과응보에 대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인가요?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가장 비밀스런 모의를 할 때 상담을 나누던 모신(謀臣)이다. 이에야스는 마사노부를 아예 친구와 같이 대했다 한다.

 “백성의 재산을 남지도 않게 부족하지도 않게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는 말로 유명한 [본좌록[本佐[각주:1]]은 마사노부가 썼다고 한다.[각주:2]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이에히사[島津 家久[각주:3]]가 부친 요시히로[義弘]에게 보낸 편지에,
“이에야스 님은 정치에 관해 사슈우[佐州=마사노부]하고만 상담을 나누는 것 같이 보입니다”
라고 쓴 것을 보아도 마사노부가 이에야스 정권에서 중추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던 듯 하다.

 이에야스가 살아있을 때 이런 말이 유행했다 한다.
 “카리 님, 사도 님, 오로쿠 님[雁殿、佐渡殿、お六殿]”라는 말로, 카리 님은 매사냥을 말하며[각주:4], 오로쿠 님은 측실 중 한 명[각주:5] 그리고 사도 님은 마사노부를 이른다.
 이렇게 이에야스에게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사노부는 불과 2만2천석의 영지를 받는 것에 만족하였다. 미움 받기 쉬운 자신의 존재를 잘 이해하고 있어 많은 영지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사서에 따르면 마사노부의 용모는 매독으로 인하여 피부가 떨어져 나가 어금니가 보일 정도로 심했다 한다.

 마사노부는 하급무사로 매조련사[ 출신이라고 한다. 1563년 미카와[三河]에서 봉기한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6]는 이에야스에게 처음으로 찾아 온 시련이었는데, 마사노부는 이 잇코우잇키 군의 참모가 되어 이에야스에게 반항하였다.
 반란군 측과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의 사이에 화의가 맺어지자 마사노부는 쿄우토[京都]로 탈출, 일시적으로 마츠나가 단죠우 히사히데[松永 弾正 久秀] 밑에서 지냈다.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를 살해한 이 효웅도 마사노부를 보고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며 기량을 인정했다 한다. 그 후 마사노부는 카가[加賀], 에치고[越後]를 유랑한 후 유명한 오오쿠보 히코자에몬[大久保 彦左衛門[각주:7]]의 형이며, 이에야스의 중신인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의 추천으로 다시 토쿠가와 가문에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한다.[각주:8]

 전쟁터에서의 활약 같은 것은 마사노부에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마사노부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타케다 가문[武田家]이 멸망하면서 부터로, 당시는 외교관적인 자리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기 전날 밤부터 오오사카 농성전[大坂の陣]에 걸쳐 마사노부의 모략적인 재능은 풀가동하게 된다. 이에야스가 천하를 손에 넣느냐 마느냐 하는 중대한 시기였다.

 히데요시[秀吉]가 죽자, 그때까지 히데요시의 측근 행정관으로서 권세를 떨쳐왔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미워하고 있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등 무공파의 면면들이 결국 미츠나리를 없애기 위하여 움직였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미츠나리를 구했다. 이것도 마사노부의 헌책이었다.
 “미츠나리를 살려두면 타이코우[太閤[각주:9]]에게 은혜를 느끼고 있는 다이묘우[大名]도 미츠나리를 너무 원망하는 나머지 언젠가 토쿠가와 편을 들 것입니다”
 하고 이에야스에게 진언하였다.

 오오사카 농성전에서도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멸망으로 이끄는 스토리는 거의 마사노부 혼자서 쓴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겨울에 일어난 농성전[大坂冬の陣] 강화 조건으로써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외측 해자를 메우게 되었는데, 토쿠가와 측은 세 번째 성곽[三の丸]뿐만 아니라 내측인 두 번째 성곽[二の丸]까지 마구 메워버린 것이다. 토요토미 측이 몇 번이나 항의하였지만 공사 책임자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마사노부의 아들]의 답변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회피하여 전혀 진전이 없었다. 참다 못한 요도도노[淀殿]가 쿄우토의 마사노부에게 사자를 파견하자, 마사노부는 오오고쇼[大御所[각주:10]]가 감기에 걸려 있으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며 답변을 회피하였다. 더구나 그 후에는 자신이 감기 걸렸다며 역시 답변을 회피하였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오오사카 성의 내측 해자도 전부 메워 버렸다. 마사노부는 적당한 때를 살펴 오오사카 성으로 향했다.
 이때 마사노부의 말이 기발했다. 메워진 내측 해자를 보고,
 “이런 기괴한 일이 다 있나”
 고 말하며 공사 책임자인 자기 아들 마사즈미의 죄가 가볍지 않다며 화를 낸 것이다. 철저한 오리발 작전으로 오오사카 측을 가지고 논 것이다.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
1538년생. 1590년 사가미[相模] 타마나와[玉縄] 2만2천석.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노중(老中)이 된다.[각주:11] 1616년 6월 죽다. 59세.

  1. 마사노부의 성 혼다[本多]의 앞 글자 本과 관도명 사도노카미[佐渡守]의 佐를 따서 만든 것으로, 이렇게 앞 글자씩을 따와 두글자로 상대를 부르는 것을 카타묘우지[片名字 혹은 片苗字]라 부르며 상대에게 경의를 표할 때 쓴다고 한다. [본문으로]
  2. 2대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물음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정치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관해 7개조로 쓴 책이라 한다. 혼다 마사노부가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당시 유명한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가 작성했다고 전해지는 가명성리(仮名性理)라는 책과 거의 같은 내용이라, 손을 댄 후 마사노부의 이름을 사칭해서 나온 책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사츠마 번[薩摩藩] 초대 번주이자 요시히로[義弘]의 아들인 시마즈 타다츠네[島津 忠恒]를 말한다. 처음엔 타다츠네 였으나 1606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이름 한 글자를 하사 받아 이에히사[家久]로 개명. [본문으로]
  4. 사냥을 뜻 하는 狩り와 기러기를 의미하는 雁는 둘 다 발음이 '카리'이다. 이에야스는 매사냥의 장점으로 하루 종일 사냥하느라 뛰어다니면 배가 고파져 식사도 더 맛있어 지고 밤에는 피곤하기에 일찍 잘 수 있어 자연스레 빠구리도 안 할 수 있기에 건강에 좋다고 말했다 한다. [본문으로]
  5. 이에야스 측실 중 가장 똑똑했다는 에이쇼우인[英勝院 - 여담으로 만화 '영무자 이에야스'의 여주인공 같은 역으로 나왔다]의 하녀 같은 존재였으나, 이에야스의 눈에 들어 그의 측실이 되었다. 이에야스가 죽은 뒤에 칸토우 쿠보우[関東公方]의 한 갈래인 오유미 쿠보우[小弓 公方]의 피를 잇는 아시카가 요시치카[足利 義親]에게 시집간다. 29살에 닛코우에 있는 이에야스의 묘소[日光東照宮]에 참배하여 분향하였을 때 향로가 터져 파편에 맞고 죽었다고 한다. 에도 쇼우군 가문의 여성들을 다룬 '막부조윤전[幕府祚胤伝]'이라는 책에 따르면, 당시로서는 당연시 되던 남편 죽은 뒤 머리 밀고 비구니가 되는 일 없이 미모를 너무 뽐냈기 때문이 아닌가? 라고 쓰여 있다. [본문으로]
  6. 혼간지[本願寺] 문도들을 바탕으로 한 그 지역 무사, 농민들의 종교 반란. [본문으로]
  7. 오오쿠보 타다타카[大久保 忠教]. 토쿠가와 가문이 천하를 손에 넣는데 큰 공적을 세운 무공파들보다 신참이며 주판알 잘 굴리는 문치파들을 중용하는 체제를 비판하며 토쿠가와 가문이 걸어온 길과 자기 오오쿠보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설파한 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를 써서, 당시 문치파에 밀려 불만 많던 무공파 가신들의 지지를 얻었다. [본문으로]
  8. 관정중수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에 따르면 7년 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한보[藩翰譜]에 따르면 19년 뒤에 토쿠가와 가문으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본문으로]
  9. 타이코우란 칸파쿠[関白]자리를 자기 자식에게 물려준 사람에 대한 경칭. 즉 여기서는 히데요시를 말함. [본문으로]
  10. 에도 시대에는 살아서 쇼우군[将軍] 자리에서 은퇴한 전 쇼우군을 지칭. 즉 여기서는 이에야스를 말한다. [본문으로]
  11. 아들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는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이에야스의 곁에 있었기에 이에야스의 의향을 히데타다에게 전하는(강요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듯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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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라 2009.10.29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오 저 이에야스 바둑친구가 원래 이에야스에 반기를 들었던 자라니... 역사란 참 재밌네요 :)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1 1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같은 침대를 썼다거나 연예 편지를 보낸 것 같지는 않지만 굉장히 친했던 것 같습니다.

      오오쿠보 나가야스[大久保 長安]에서 보듯이 이에야스도 쓸 모가 있다고 생각하면 마구 이용하지만 쓸 모가 없다고 판단되면(여기서는 나가야스의 죽음) 씨를 말리는 것을 보면 마사노부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났기에 가능했던 우정이라고도 생각합니다.

  2. 나라 2009.10.29 12: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언제나 포스팅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10.29 1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사람도 쿠로다 칸베에처럼 매독의 희생자(-_-..)였군요, 어금니가 보인다니 이거 뭐 할로윈 특집도 아니고(...;) (오늘 영어 수업에 할로윈 동영상을 보여주는데 딱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추측이 됩니다 ㅎ;)

    여담이지만 카리라기에 문득 사냥狩り를 생각했는데 그 한자가 아니었군요. 그러고보니 결과적으론 뜻이 비슷한 센스..

    아.. 영무자 이에야스에서의 그 처자..는 아니고 그 처자의 여종이라지만; 아무튼 죽은 이에야스 폴터 가이스트 따위에 맞아 죽다니..(;;) 아쉬운 일이에요. 아니, 미인 박명이기에 어쩌면 더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결국 그것도 복이려나(..)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1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로 전 칸베에 매독설을 부정합죠 ^^

      저 어금니 보인다는 것은 그의 정적 중 하나가 일기인지 뭔지에 마사노부가 그 꼴이 되었다고 낄낄대며 쓴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어디서 읽었는지 알 수가 없더군요.

      참고로 주석에도 썼던 막부조윤전이란 책에는 급사(頓死)라고만 나옵죠[日光御宮に参詣、神前に於て頓死す]. 일본 웹에서 파편에 죽었다고 해서 썼는데, 지금 보니 확인되지 않은 것을 쓴 쓸데없는 사족인 것 같군요...(개인적으로는 믿을 만한 사이트이긴 합니다만)

  4. ckyup 2009.10.30 0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 하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마사노부는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을때쯤 서서히 드러나다가, 세키카하라 전후로는 거의 견줄만한 상대가 없을정도의 너구리 그림자가 되더군요.... 그러고보면 이에야스는 역시 현명한 정치를 펼친것 같습니다 - 혼란시에는 무관을 중용하고, 그 이후에는 문치중심으로 나가는..... 어쩌면 박대통령이 그점에서 인간경영에 실패한것 같군요 - 혁명과 정권안정때에 중용하던 군출신들을 끝까지 측근에 두었다가, 그 측근들이 술과 여자 바치는 아첨배로 점점바뀌며 저희들끼리 힘과 신임의 암투를 벌이는 가운데 암살당하지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1 1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란의 시대때는 무공파를, 패권이 확립된 뒤로는 문치파를...한 고조 유방이나, 왕자의 난을 제패한 태종 이방원의 예에서도 보이듯이 역사의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데요시 사후 무공파와 문치파의 싸움이 일어난 것(세키가하라 전쟁)도 그로 인해서 입죠. 히데요시가 더 살아 강력한 중앙집권(즉 문치파 득세)이 실현되었다면 세키가하라는 어쩌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생각합니다.

      전혀 딴소리가 되겠지만 그만큼 외로웠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부하가 그렇게 해 쳐먹는 것을 알면서도 왠간해선 곁에 두어야 할 정도로 대화상대가 필요하지 않았을지...권력자의 자리는 외롭다고들 하니까요.(참고로 외로워도 좋으니 전 그 자리를 꼭 맛보고 싶군요.)

  5. Favicon of http://strasbourg.egloos.com/ BlogIcon Orca 2009.10.30 0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사노부가 죽은 뒤, 마사즈미 대에서도 계속 쇼군 가의 측군으로 활약해, 나중에는 시모츠케 우츠노미야 15만석에 이르지만, 결국 히데타다 시대 때 한방에 몰락. 그냥, 나중에 그걸 알게 되니까 씁쓸하더라구요.ㅎ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1 1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마사노부는 죽으면서 마사즈미에게,
      "많이 바라지 마라, 3만석까지는 좋다. 그 이상은 바라지 마라"
      고 했다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한방에 훅~ 갈 정도로 정적이 많은 것도 원인인 듯 싶습니다. 같은 편이 많았음 그렇게까지 몰락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역시 빽과 끈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6. 골룸 2009.11.05 1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봤습니다
    한 사람의 성격과 기질이 태어나면서 완전히 정해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타고난 기질이 중요하겠지만 살면서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그것도 달라지는 것 같네요
    잇꼬잇끼와 패배, 유랑, 복귀... 뭐 이런 걸 거치면서 혼다 마사노부라는 인간이 만들어 진 것 같습니다
    이거 절대 딴지는 아닌데 위에 마사노부 1583년생은 아닌거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05 17: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살아온 환경이나 경험에 따라 사람의 인성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예. 1538년을 오기했습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얼릉 고치겠습니다. ^^ 제가 워낙 오타가 많으니 보이시면 꼭 알려주셨으면 하고 부탁드립니다.

  7. seeker 2017.10.05 15: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은 잘봤는데요. 혼다 마사노부는 59세가 아닌 79세 죽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수정부탁드립니다.

 1960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두 명이었다는 놀랄만한 이설(異說)을 발표한 사람이 있다. 사의(史疑)라는 책을 저술한 무라오카 소이치로우[村岡 素一郎]이다. 토우카이 지방[東海地方]의 지방관리로 근무하던 중 미카와[三河]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후년 천하를 손에 넣은 이에야스는 세라타 모토노부[世良田 元信]라는 양아치들의 두목이었다고 한다. 그는 진짜 이에야스(당시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 元康])의 부하가 되어 불시에 진짜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이에야스에게 이런 이설이 나올 정도이니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선조 역시 확실치 않다. 닛타 겐지[新田源治][각주:1]의 자손을 자칭하고 있지만 이는 나중에 날조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토쿠가와 가문의 시작은 코우즈케[上野] 닛타 군[新田郡]에 살던 토쿠아미[徳阿弥]라는 행각승()으로, 이 스님은 떠돌던 중 미카와에 와서 서부 미카와의 마츠다이라 향[松平郷]의 호족 타로우사에몬[太郎左衛門]의 사위가 되어 환속, 이름을 마츠다이라 타로우사에몬 치카우지[松平 太郎左衛門 親氏]라고 했다 한다.[각주:2]
 후년 이에야스가 쇼우군[将軍]이 되었을 때 아시카가 겐지[足利源氏][각주:3]의 명문 키라 씨[吉良氏][각주:4] [각주:5]의 족보를 물려 받은 것[각주:6]도 이런 애매한 선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명백한 족보사칭이다.

 

화제를 돌려, 이에야스의 천하쟁취는 두견이[ほととぎす]에 비유하여, 울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가 노부나가[信長], ‘울게 만들겠다’가 히데요시[秀吉], 마지막으로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리자’라는 식으로 정권의 자리를 획득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에도 시대[江戸時代] 후기 턴포우[天保] 연간[각주:7]에 그려진 풍속도에는 갑주를 입은 남자들이 떡을 만들고 있는 장면이 있어, 절구공이를 들고 막 찧으려고 하는 것이 노부나가, 그 옆에서 떡을 만들고 있는 것이 히데요시, 그리고 최상석에 가만히 앉아서 떡을 먹는 것이 이에야스이다. 이에야스의 천하쟁취를 비꼰 그림으로 그 때문에 만든이인 우타가와 요시토라[歌川 芳虎]는 막부(幕府)에 체포되어 60일간 수갑이라는 형(刑)과 절판이라는 벌에 처해졌다.

 “인간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이에야스의 유훈(遺訓)이라 알려진[각주:8] 이 말은 그의 인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참을 인(忍)이라는 글자가 그의 생애를 관철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보다 8살, 히데요시보다는 5살 어리다. 조부 키요야스[清康]의 시대부터 미카와 오카자키[岡崎] 성주가 되었지만, 동쪽의 이마가와[今川], 서쪽의 오다[織田]라는 강력한 세력에 끼어 약소세력의 비애를 맛보고 있었다.
 조부 키요야스가 자신의 부하에게 살해당하면서부터 마츠다이라 가문은 고난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보호를 받기 위해 어린 이에야스는 인질로 바쳤고, 그로 인해 이에야스와 마츠다이라 가문은 인종의 시절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12년간 마츠다이라 주종(主從)은 고난 속에서 허덕이지만, 이 시기에 이에야스의 참을성 강한 성격이 만들어진다.

 1560년 5월 19일.
 오다 노부나가의 전격작전으로 인해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죽어, 덕분에 이에야스도 인질생활에서 해방된다. 이에야스는 19살이 되어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과 관계를 끊고 오다와 동맹을 맺어 미카와 통일을 이룬다. 1563년, 그때까지 모토야스[元康]에서 이에야스[家康]로 개명한다.

 막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찰나 본거지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적이 봉기한다. 영내에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9]가 봉기한 것이다. 미카와에 있던 이마가와 잔당에 더해 대대로 마츠다이라 가문을 섬기던 미카와의 무사들까지도 반기를 들었다.
 이를 반년에 걸쳐 겨우 진압하였는데, 강화 조건의 실시에서 이에야스는 일찌감치 후년의 뻔뻔한 정치성을 발휘한다. 잇코우 종[一向宗][각주:10] 사원의 안전을 보장했으면서도 막상 반란이 진정되자 잇코우의 절들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약자와 맺은 약속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지만, 강자에게는 어디까지나 의리를 지키는 정책이 일찍이도 이때부터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즈음 강자 노부나가에게는 자신의 적자(嫡子) 노부야스[信康]에게 노부나가의 딸과 결혼시켜 충성의 뜻을 나타내었고, 나중에는 그 노부나가가 명령에 따라 자기 아들 노부야스를 죽이기까지 한다.(이 부분은 졸역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아 처자식을 죽였다?"를 참조 삼아 보시길.)

 이에야스는 조심성 있는 성격이었지만 막상 전투에 들어서면 그의 호방함에는 괄목할 만한 것이 있었다. 1572년,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2만 군세와 싸운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에서 그런 모습을 여실히 드러난다.


 이 전투는 센고쿠 최강인 코우슈우[甲州]의 군세가 상대. 더구나 상경(京)하려는 대군이었다. 이에야스의 패전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맞서 싸워 실제로 참패하였다.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퇴각해 온 이에야스는 일부로 성문을 활짝 열고 성문 안팎으로 화톳불을 대낮같이 밝히게 하였다. 적에게 공격해 볼 테면 하라는 대담한 전술이었다. 뒤를 쫓아 온 코우슈우의 병사들은 어떤 함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결국 공격을 단념하였다. 그리고 이에야스 본인은 뜨슨 물에 밥을 말아 세 그릇을 비우고는 코를 크게 골며 잤다고 한다.
 싸움이 끝난 후 타케다의 맹장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는, “토쿠가와 군의 전사자는 모두 우리에게 등을 보이지 않고 죽었다”고 신겐에게 보고하였다. 이에야스는 패하기는 했지만, 토우카이 No.1 무장[각주:11]이라고 일컬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전쟁터에서 이에야스가 지휘하는 모습은 섬뜩할 정도다. 처음엔 지휘봉을 휘두르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주먹을 쥐고 말 안장 앞부분을 두드리며 공격하라!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너무도 세게 두드려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피가 날 정도였다. 그래서 이에야스의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박였다고 한다.

 천하에 대한 야망이 이에야스의 마음 속에서 형태를 띄기 시작한 것은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각주:12] 때부터 일 것이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태두로 그 꿈은 잠시 접어 둔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대놓고 정권획득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바친 서약서를 어기고 여러 다이묘우[大名]들과 그들의 자식에게 자신의 양녀를 시집 보냈고, 또한 자기 마음대로 여러 다이묘우의 영지를 가증시켜 많은 다이묘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이전에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에게 보낸 편지는 실로 179통에 이른다고 한다.
 그렇게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서군을 격파하였고,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확인 사살하여 토쿠가와 정권을 반석에 올려 놓은 것이다.

 말년의 이에야스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50세 전후부터 비만 체형이 되었고 아랫배가 나와 혼자서 훈도시를 조이지 못하여 시녀(侍女)에게 조이게 할 정도였다. 신장은 5척 1~2촌(약 155~158)정도였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굉장히 건강을 생각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매사냥이 이에야스 건강의 원천인 듯 죽을 때까지 매사냥을 행한 횟수는 천 번을 넘는다.

 이에야스의 측실은 10명 이상 있는데 다이묘우 등 고귀한 집안의 딸들을 동경했던 히데요시와는 반대로 이에야스의 측실에는 하층계급의 딸이나 미망인이 많았다. 말년까지 정력은 절륜했던 듯 소위 토쿠가와 어삼가(御三家)[각주:13]의 오와리 가문[尾張家]의 9남 요시나오[義直]는 59살 때, 키이 가문[紀伊家]의 10남 요리노부[頼宣]는 61살 때, 미토 가문[水戸家]의 11남 요리후사[頼房]는 62살 때의 아들이다. 

 건강을 소중히 한 이에야스는 의사 이상으로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화제국방(和剤局方)[각주:14]’이라는 의학서를 항상 옆에 끼고서 스스로 진단하고 약을 조제할 정도였다. ‘만병원(万病圓)’이라 이름 지은 약을 특히 잘 만들었다고 한다.[각주:15]

 1616년 4월. 죽음을 앞둔 이에야스는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와 측근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 할 일을 세세히 지시하였다. 유체나 위패의 위치는 물론 닛코우[日光]에 작은 묘소를 세우는 것까지 지시하였다. 죽기 이틀 전에는 죄인(罪人)을 시험 삼아 베게 한 명도(名刀) 미이케덴타[三池典太]를 베갯머리에 가지고 오게 한 뒤, 이불에서 일어나 혼신의 힘을 다하여 허공을 내리쳤다. 그리고 당장 죽을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확실한 말투로, “나는 이 칼을 가지고 자자손손을 지키겠다”고 외쳤다.

 그 다음 날, 신류우인 본슌[神流院 梵舜]을 불러 “쿠노우[久能山]의 내 묘소에, 내 몸을 서쪽으로 향하게 해서 안치하라”고 했다고 한다. 즉 서방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6] 쪽으로 향하게 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대로(大老)를 불러, “히데요리[秀頼]를 부탁 드립니다. 부탁 드립니다”고 유언한 안쓰러운 모습에 비하면, 실로 냉정한 최후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1542년생.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 広忠]의 적자. 아명 타케치요[竹千代], 이름이 처음엔 모토노부[元信], 다음엔 모토야스[元康]였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전사를 기회로 독립하자, 1568년 즈음 미카와[三河]를 평정.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후 미카와, 토오토우미[遠江], 스루가[駿河], 카이[甲斐], 시나노[信濃]의 남반부를 영유. 히데요시[秀吉]와의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는 결전을 피해 화해하였다.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7] 후인 1590년 칸토우[関東] 6개 지역에 242만석을 하사 받아 에도 성[江戸城]를 거성(居城)으로 하였다. 1603년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 되어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열었다. 1616년 4월 7일 죽었다. 75세.

  1. 오우슈우[奥州]를 무대로 펼쳐진 전구년의 역[前九年の役]과 후삼년의 역[後三年の役]에서 대활약한 미나모토노 하치만타로우 요시이에[源 八幡太郎 義家]의 셋째 아들 요시쿠니[義国]의 첫째가 코우즈케[上野]의 닛타[新田]라는 곳을 영유하면서 닛타라는 성을 썼다. [본문으로]
  2. ...는 에도막부가 편찬한 책(朝野旧聞褒藁)에 따른 말이고, 후세 아직까지 권위를 인정 받는 와타나베 요스케[渡辺 世祐]라는 사람의 논문에 따르면 - 토쿠아미에게 조상을 묻자, 토쿠아미는 "뭐 우리네라고 하는 것들은 동서남북을 떠돌며 여행하는 사람들로, 어디건 상관없이 유랑하는 자이기에 그런 것을 물으면 창피합니다"라고 했다 한다. 당시 무사란 한곳에 정착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에, 떠돌이라는 것이 창피하다고 한 것이다.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우군 가문[将軍家]. 닛타 겐지와 마찬가지로 요시쿠니[義国]가 아시카가 장[足利庄]을 영유하며 그의 둘째 아들 요시야스[義康]가 영유하며 이후 아시카가 씨가 된다. 사족으로 닛타와 아시카가 양 쪽의 선조인 요시쿠니는 아시카가 시키부다이후[足利式部大夫]라고 칭한 것을 보면, 닛타와 아시카가 중 적류는 아시카가 인 듯. [본문으로]
  4. 아시카가 씨 3대 당주 요시우지[義氏]가 카마쿠라 중기 미카와의 키라 장[吉良荘]을 하사 받아, 아시카가의 땅을 물려 준 적남 야스우지[足利 泰氏]를 제외한 서장자 나가우지[吉良 長氏 - 사족으로 이 나가우지의 둘째 아들 쿠니우지[国氏]가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선조이다], 셋째 요시츠구[吉良 義継]에게 부터 시작하는 가계. 키라 장은 야하기가와 강[矢作川]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형인 나가우지는 서쪽을 영유하여 사이죠우 키라 씨[西条吉良氏]를 칭했다. (동생 요시츠구는 처음엔 동쪽인 토우죠우 키라시[東条吉良氏]가 되나 후에 오우슈우[奥州]의 남조 측을 정벌하기 위해 오우슈우로 가 오우슈우 키라 씨[奥州吉良氏]의 선조가 되어 무로마치 막부 초기 잠깐 활약하나 몰락). [본문으로]
  5. 후에 나가우지의 손자 미츠요시[吉良 満義] 때 미츠요시와 그의 적남 미츠사다[吉良 満貞]가 무로마치 막부 초반 혼란기에 각지를 전전하여 비운 사이 본거지인 키라의 동쪽을 미츠사다의 동생 타카요시[吉良 尊義]가 횡령하여 토우죠우 키라 씨[東条吉良氏]가 성립. 후에 오우닌의 난[応仁の乱] 때 이 토우죠우 키라 씨의 5대 당주 키라 요시후지[吉良 義藤]가 동족이며 예전 종가집인 사이죠우 키라 씨[西条吉良氏]와 싸우다 전사. 그 뒤를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 5대 당주 나가치카[松平 長親 - 이에야스의 고조부가 된다]의 셋째 아들 마츠다이라 요시하루[松平 義春]가 잇고 이때부터 토우죠우 마츠다이라 씨[東条松平氏]가 된다. [본문으로]
  6. 센고쿠 시대 키라 씨는 동쪽의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의 압박에 대항하기 위해 동서 양 가문은 키라 요시야스[吉良 義安] 때 합병. 요시야스의 부인은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키요야스[松平 清康]의 딸. 또한 요시야스는 후에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포로가 되어 있던 시기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만나 친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7. 1830~1844년 사이. [본문으로]
  8. 이 말은 이에야스의 손자이자 미토 코우몬[水戸黄門]으로 유명한 토쿠가와 미츠쿠니[徳川 光圀]가 한 말을 바탕으로,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어떤 놈(이케다 마츠노스케[池田 松之介])가 이에야스의 글을 흉내 낸 것을 또 딴 놈(타카하시 테이슈우[高橋 泥舟])가 각지의 이에야스 사당[東照宮]에 바친 것이라고 한다.(by wiki) [본문으로]
  9. 혼간지[本願寺] 문도들을 바탕으로 한 그 지역 무사, 농민들의 반란. [본문으로]
  10. 혼간지[本願寺]의 종파인 쟁토진종(浄土真宗)의 별칭. [본문으로]
  11. 海道一の弓取り. [본문으로]
  12. 1582년 아케치 미츠히데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란을 일으켜 살해한 사건. [본문으로]
  13.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가문. [본문으로]
  14. 중국 북송(北宋) 휘종 대에 만들어진 중국의 의약서. [본문으로]
  15. 여담으로 죽기 전 이에야스는 이 만병원에 굉장히 의지하였다. 이에야스의 전의(典醫)인 카타야마 소우테츠[片山 宗哲]가 말리자 신경질내며 그를 시나노[信濃]의 타카시마[高島]로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본문으로]
  16.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전까지는 토쿠가와의 부하가 아니었던 가문. [본문으로]
  17. 히데요시가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멸한 1590년의 전쟁.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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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iroyume 2009.10.19 1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왠만큼은 다 아는 내용이지만 승려가 마쓰다이라가의 선조인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정설이 아니라 그냥 추측 중에 하나라는 것과 50세부터 비만이라는건 원래부터 비만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좀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인 듯.
    이 양반도 보면 만만찮은 간웅인데 노부나가, 히데요시의 생애가 격렬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뭍히는 듯 그러고 보면 불같다고 생각하는 노부나가도 여자(네네에게 보낸 편지) 자상한 면이 있는 한편 느긋하다고 생각하는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당시 제장들에게 열라게 편지써보낸 것과 같은 것이겠죠. 소하찌씨는 저런 이에야스를 어떻게 그럴듯 하게 미화를 잘 시켰을까나. -_-;
    떡에 관한 일화는 아는데 저 그림을 본건 처음입니다. 어째 우리나라의 솥단지 얘기가 생각나는건......

    즐거운 한주 되세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0 1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야마오카 선생의 소설의 영향이 큰 듯 합니다. 그런 인물은 다시 찾기도 힘들 정도로 성인군자로 나왔을 정도다 보니.

      개인적으로 그 소설 초반의 노부나가는 정말 멋진 듯 합니다.

      우리나라의 솥단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비슷한 이야기 인가요?

      흰꿈님도 좋은 한 주가 되시길 바랍니다.

  2. 나라 2009.10.19 11: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득 궁금한게 생겼는데... 저 일본식으로 중간에 머리 깎는 습관은 언제 생긴 건가요? -_-;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0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야마가와[山川] 출판사의 일본사 사전에 따르면 중세(카마쿠라 시대~센고쿠 시대) 귀족부터 시작되었다고 나오며, 일본 위키 해당항목[さかやき]를 보면 1176년에 그 기록이 보인다고 하네요.(즉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날뛰기 몇 십년 전부터 나왔다는 말입죠)

      생성 초반엔 전쟁터에서 투구를 쓸 때 후끈거리고 답답한 것을 막기 위해서 했는가 봅니다만, 나중엔 무가의 일상 생활에서도 하게 되어, 특히 무가에서는 성인식 때 이발역[理髪役]을 맡은 사람이 머리를 밀고나 잘라 줌으로써 아이에서 성인이 되었음을 외견 상으로도 알 수 있게 됩죠.

  3.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0.19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떡 치는 (...이라고 하니 어감이 요상하군요;;) 얘기는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림에 미츠히데도 들어가 있는지는 처음 알았네요. 처음 보기도 하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0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론 꽤 유명한 그림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어쩐지 그래서 미디어위키에도 없었군요.(즉 저 그림은 와세다 전자 도서관에서 무단으로 다운 받은 것! 우하하하)

      그러고 보니 몇 달전에 떡집 사장이 수 십명의 여성들을 농락했다고 자극적인 제목을 달던 몇몇이 떠오르는군요.
      (떡집사장이 떡은 안치고 떡을...이라는 식으로 ^^)

  4. 나라 2009.10.20 17: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소중한 정보 감사합니다!

  5. ckyup 2009.10.20 2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대망에서의 너구리 이미지가 우리에게는 상식이 되었나 봅니다 - 무조건 대의를 위해서만 행동하는 성인군자..... 좋은글 또 감사합니다, 몰랐던걸 알게되었군요. 떡반죽하는 히데요시 그림이 참 재밌네요. 물론 또 대망 이야기지만..., 삼국지와 비교해보면 삼국지의 주군들은 거의 모사나 군사들의 머리에 의지하는면이 많지만, 대망에서보면 가장 똑똑한 군사도 주군들의 머리를 따르지 못하더군요, 특히 히데요시. 그리고 대망이 뻥이 덜 심해요 - 군사숫자에서 비교해보면 확실하죠, 삼국지는 갑자기 급하게 정찰나가도 한 5천 끌고 나가죠.

    암튼 좋은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연재물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3: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래도 처음으로 접했을 때의 이미지가 가장 오래 가는 것 같습니다. 동물도 태어나서 처음 본 생물을 어미로 여긴다고 하는데 그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대망과 삼국지의 차이는 작자의 인식 차이라 생각합니다. 재미를 느끼게 하는 곳을 대규모 군사 움직임에서 찾느냐 인물의 심리에 중저을 두느냐의 차이 아닐까요?

      정찰나가도 오천...^^ 정말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순간 박장대소하였습니다.

  6. 맹꽁이서당 2009.10.21 1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너구리 영감이군요. [삼국지 연의]가 수많은 독자들에게 촉한정통론을 심었듯이 (머리가 굵어지면서 위나 오에도 관심이 가긴 하지만, 맘 깊은 곳에서는 역시..) [대망]도 마찬가지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노부나가나 히데요시가 평화를 정착시켰으면 이에야스는 역사속에서 다테 마사무네 정도의 위상이 아니었을까, 아님 이에야스가 히데요시 정도 나이(세키가하라 직전?)에 죽었다면 전국시대가 더 이어지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나이 먹으면서 조조 쪽으로 옮겨지긴 했지만 여전히 제갈량에 대한 동경은 지워지질 않더군요(유비는 많이 인식이 변했지만요)

      노부나가가 살아서 천하통일 했을 시에는...음... 개인적으로는 오다 가문 휘하의 무장들이 너무 쟁쟁해서 이에야스가 나올 자리나 있었을지...뭐 IF의 이야기는 각자 다들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보니 이거다..라고 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에야스가 죽더라도 그후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마에다 토시이에 혹은 모우리 테루모토 정도가 이에야스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7.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09.10.21 19: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천하인이 있는가 하면, 저런 천하인도 있고.
    천하를 얻기 위한 사람은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봅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4: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는 말은 그래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뭐 천하만 손에 넣으면 조상 바꾸기야 쉬울테니까요. 사람들이 믿건 안 믿건 대놓고 반론을 하지는 못할테니까요.

  8. Favicon of https://liquer.tistory.com BlogIcon 2009.10.21 2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금 사이언스 채널에서 [전사]란 제목으로 이에야스 다큐멘터리를 방영해주더군요. 이에야스가 딱히 나쁘진 않게 나오는데 결말이 좀 씁쓸했던것도 같습니다. '미츠나리는 죽고 히데요리는 반란을 일으켰다 죽고 이에야스의 가문은 250년간 일본을 지배했다.' 식으로 -_-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4: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호~ 사이언스 채널에서도 그런 것을 하나 보군요. 뜬금없겠지만 히스토리 채널 없애버린 중앙일보에게 갑자기 분노가 이는군요. ^^;

      이에야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겠지!!..하고 말하고 싶군요. ^^ 뭐 일본 사람들도 쇼우군 가문[将軍家]와 섭정가문[摂家]의 상하구별을 못하는 사람들 많으니 그건 어쩔 수 없는 듯.

  9. shotokanfist 2009.10.25 15: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전사라는 프로그램을 문장으로 정리해서 동명의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누가 책을 줘서 읽어봤습니다만, 번역상의 오류가 많았는지 (설마 원저자가...) 기본적인 연도나 인명, 사실관계에 오류가 많아서 읽으면서 좀 황당했던 기억이 나네요.

    프로그램 자체는 호평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못봤는데, 평이 좋더군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6 1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검색해 보니....
      전사들(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전사들의'이기는 기술') Heroes and villains

      라는 책이 나오는데 이것인가 보군요.... 설명에 인문경영서다...라는 부분이, 좀 슬프게 느껴지는 군요. 그냥 인문서라고 해도 될 것을 꼭 경영서라는 부분을 붙여야 한다는 점이 조금 아쉽군요.

      이야~ 어쩌면 윌리엄 아담스의 수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숨기진 역사를 쓴 것일 수도...(물론 그럴리 없겠지만요 ^^ )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데와[出羽] 전역에서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군세와 싸운 하세도우 전투[長谷堂合戦]를 그린 '하세도우 전투 병풍[長谷堂合戦図屛風]에 그려져 있는 요시아키[義光]

 야마가타[山形] 성주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는 이웃나라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의 모친 요시히메[義姫]의 오빠이다. 혈통 자체가 우월한 몸매에 뛰어난 용모를 가졌던 듯 하다.[각주:1] 후에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의 용색에 반하여 오우슈우[奥州] 원정 때 쿄우토[京都]로 데려가 측실로 삼았다.

 각설하고, 요시아키의 활약은 16살 때 강도퇴치의 일화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부친 요시모리[
義守]와 타카유[高湯] 온천[각주:2]에 휴식을 취하려 갔는데, 그날 밤 강도가 습격해 온 것이다. 이때 요시미츠는 '형형한 눈빛을 하고 마치 화살이 쏘아지듯이 뛰쳐나가 날카로운 칼질로' 단번에 강도 2명을 베어 부상을 입혔고, 이어서 그 중 가장 거대한 사나이에게 달려들어 쓰러뜨려 제압한 후 두 번 찔러 상대가 힘이 없음을 확인한 다음 목을 베어 칼끝에 꿰어서 높이 쳐들고는 우렁차게 함성을 질렀다 한다.

 부친 요시모리는 옆 나라 다테[伊達]의 비호(庇護) 하에 있었기에 젊은 날의 요시아키가 너무나 뛰어나고 용맹한 것에 불안을 느껴 요시아키의 폐적(廢嫡)하기로 결심하고 유폐시킨다. 물론 이는 다테 가문[伊達家]의 의사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모가미 가문의 자립을 목표로 하는 요시아키를 위험하다 여겨 부친인 요시모리에게 아들 요시아키 살해를 명령한 것이다. 유폐 중의 요시아키는 이런 다테 가문에서 독립을 기원하며 주변에 있던 절 릿샤쿠 사[立石寺]에서 소원성취를 빌었다. 요시아키 23~25살 즈음의 시기였다. 요시아키는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부친 요시모리를 강제로 은거시킨 후 모가미 가문[最上家]의 후계자로 정해져 있던 동생 요시토키[義時]를 공격하여 자살하도록 만들었다[각주:3]. 이어서 1577년에는 다테 측에 붙어있던 텐도우 성[天童城]의 텐도우 요리사다[天童 頼貞]를 공격하였다[각주:4]. 다음 해에는 남쪽으로 공세의 방향을 돌려 카미노야마[] 성을 낙성시켰으며, 또다시 북쪽의 신죠우[新庄]로 향해 마무로[] 성을 점령하여 마침내 모가미 군[最上郡] 전체를 판도에 넣었다. 1582년에는 숙원이던 쇼우나이[] 지방으로 진출하였다.

 다다음 해인 1584년, 요시아키는 야치 성[谷地城]의 성주 시라토리 나가히사[白鳥 長久]를 모략을 이용해 야마가타 성으로 불러서는 살해하였다. 모략이야말로 요시아키의 진면목으로, 그는 힘으로 몰아 붙이는 타입의 무장이 아니었다.

 1587년, 요시아키는 쇼우나이에 침공하는데 이로 인해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와 험악한 관계에 빠진다. 마사무네가 쇼우나이 지방의 무토우 씨[武藤氏]의 부탁을 받아 중재(仲裁)에 나서자, 겉으로는 마사무네의 중재를 받는 척하며 방심시킨 후 불시에 대군을 이끌고 쇼우나이 지방으로 침공한 것이다. 요시아키는 마사무네에게 있어서는 모친 요시히메의 오빠이기에 외삼촌이다. 하지만 마사무네는 이 배신행위를 용서할 수 없었다. '체면이 깎였다. 이 원한을 붓으로 다 적기도 힘들다'고 말하며 마사무네는 격노하였다. 모가미와 다테 사이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사태로 번졌다. 그때 요시히메가 양국 군세가 대치하고 있는 곳에 가마를 타고 들어가 80일 동안 움직이지 않고 머물러 결국 양자의 충돌을 회피시켰다고 한다. 이때의 반감은 나중에까지 이어져, 후에 요시아키와 요시히메는 손을 잡고 마사무네 독살 미수사건으로 이어진다(다테 마사무네 항 참조)

한편 쇼우나이 지방은 강적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세력이 손을 뻗쳐왔다. 1587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전국에 영()을 내려 다이묘우[大名]들간의 사적인 싸움을 금지하였기에[각주:5], 다음 해 5월에는 모가미-우에스기 간의 항쟁을 멈추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10월에 우에스기 측의 혼죠우 시게나가[本庄 繁長]가 이를 무시하고 쇼우나이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이하 역자 가필================================================

 1587년. 다테 가문의 종속하에 있던 오오사키 가문[大崎家]에서 내분이 일어나, 친 다테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던 오오사키 가문의 가신 우지이에 요시츠구[氏家 吉継]가 다테 마사무네에게 구원을 요청. 마침 다테 가문에게서 독립을 바라고 있던 오오사키 요시타카[大崎 義隆]는 분가 격[각주:6]인 모가미 가문의 요시아키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비슷한 시기 요시아키는 쇼우나이를 지배하고 있던 무토우 씨[武藤氏][각주:7]의 당주인 무토우 요시우지[武藤 義氏]를 모략으로 요시우지의 부하를 이용해서 살해. 요시우지의 뒤를 이은 요시오키[武藤 義興]는 우에스기 가문의 맹장 혼죠우 시게나가[本庄 繁長]의 아들인 요시카츠[武藤 義勝]를 양자로 받아 들임과 동시에 혼죠우와 그의 주군인 우에스기 가문의 힘을 빌어 영내를 안정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이 쇼우나이 지방의 친 모가미 파의 호족들의 불안을 부채질하여 호족들은 일제히 봉기한다. 이를 호기로 본 요시아키는 쇼우나이에 침공. 요시오키를 살해하고 요시카츠를 에치고[越後]로 쫓아 보내어 일단 쇼우나이 지방을 손에 넣는다. 이때 오오사키 가문의 구원 요청이 도착한다.

 다테 마사무네는 오오사키 령으로 진격하나, 마사무네는 나카니이다 성[中新田城]를 공격 중 대패하여 중신 이즈미다 시게미츠[泉田 重光]를 인질로 바치고 겨우 궁지를 벗어나지만, 오오사키 령에 원군으로 온 모가미 요시아키의 군세와 나카야마[中山]란 곳에서 대치하게 된다. 또한 이 패배는 오우슈우 전역에 소문이 퍼져 반 마사무네 파의 다이묘우[大名]들이 일제히 마사무네 영토를 침공하기 시작하여 위기에 빠진다.

 한편 오오사키 령에 도착하여 마사무네의 군세와 대치하고 있던 요시아키에게도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에치고로 도망쳤던 무토우 요시카츠가 지 애비인 혼죠우 시게나가와 함께, 요시아키가 마사무네와 싸우는 틈을 타 쇼우나이로 진격. 쇼우나이의 모가미 측 호족들을 물리치고 쇼우나이를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모가미 령으로 침공한다.

 서로 적들에게 침공 당하였지만 대치하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던 마사무네와 요시아키는 마사무네의 모친이며 요시아키의 여동생인 요시히메가 이 대치하는 곳에 가마를 타고 와 화해를 종용. 서로 다방면에 적들을 두고 있던 양측은 화해를 하게 된다.

======================================이상 역자 가필====================================================

 요시아키는 분노하여 히데요시에게 호소하였으나[각주:8],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는 이미 히데요시와 면식을 튼 사이였으며 더구나 히데요시 측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도 친한 사이였다. 소송은 우에스기 측이 월등히 유리했다. 요시아키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통하여 자신의 정당함을 호소했지만 결국 소송에 졌다[각주:9]. 이후 요시아키는 히데요시의 비위에 맞추기 위해서 이에야스를 통해 매[] 등을 헌상했지만, 히데요시의 태도는 냉담하여 요시아키가 쿄우토로 인사를 올리러 간다고 하여도 '그럴 필요는 없소'하며 거부하였다.

 요시아키는 더욱더 이에야스를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小田原] 정벌 때 요시아키는, 히데요시가 "조금 더 늦었다면 여기가 위험했을 것이야"라고 하며 목을 툭툭 친 다테 마사무네보다도 더 늦게 오다와라에 당도하였지만[각주:10], 이때도 이에야스가 중간에서 잘 주선해 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어 이에야스에게 고마운 마음을 크게 갖게 되었다.

 이후 요시아키는 자기 가문의 안전을 위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였다. 히데요시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측근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에게 편지를 보내, "히데요시님을 섬기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었습니다"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였고, 오다와라 정벌을 끝낸 후 우츠노미야[宇都宮]에 온 히데요시의 처소에 처자식을 몽땅 데리고 출사하여 히데요시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1591년. 토요토미노 히데츠구, 토쿠가와 이에야스 등 15만의 대군이 난부[南部]의 쿠노헤 마사자네[ ]를 정벌하기 위해 오우슈우[奥州]로 왔을 때도 요시아키는 중앙의 실력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머리를 굴렸다. 이에야스에게는 둘째 이에치카[家親][각주:11]를 가신으로 삼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일종의 인질제공이다. 이에야스에게 있어선 다이묘우[大名]의 자식을 가신으로 한 최초의 사례였기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히데츠구가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에게 눈독을 들인 것도 이때이다. 쿠노헤 정벌을 마치고 쿄우토로 돌아가던 도중 야마가타 성에 들린 히데츠구를 요시아키는 성대히 영접하며, 그 시중으로 아직 12살인 딸 코마히메를 내보냈다. 히데츠구는 그녀의 미모에 빠져 요시아키에게 청하여 쿄우토로 데려가 시첩으로 만든 것이다. 마사무네의 숙부 다테 시게자네[伊達 ]는 이를 '만천하의 비웃음거리'라고 자신의 일기에서 비난하였다.

 히데츠구의 측실이 된 코마히메는 이름도 '오이마노츠보네[お]'로 불리게 되지만, 히데츠구의 실각사건 때 산죠우 강변[河原]에서 참수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더구나 요시아키에게도 히데츠구 모반사건의 불똥이 튀어 한때는 쥬라쿠테이[楽第]에 감금당하는 신세가 된다.

 히데요시 사후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는 당연히 이에야스 측에 서 야마가타로 진군하는 우에스기의 지장(智將)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의 군세와 싸웠다. 정강을 자랑하는 나오에 군단이기에 고전을 면치 못하였지만,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의 승전보가 전해져 구사일생한다.

 그러나 요시아키의 너무나도 자기 가문 안전을 위해 머리를 굴린 결과가 반대의 결과로 나온다. 요시아키는 이에야스의 마음에 들기 위해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이 되어있던 둘째 이에치카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장남 요시야스[義康]를 살해하게 되는데, 요시아키가 죽은 뒤 이로인해 가문이 흔들려 이에치카의 아들 요시토시[義俊]의 대[각주:12]에 모가미 가문의 야마가타 번은 소멸하게 된다[각주:13].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
1546년생. 데와[
出羽] 야마가타[山形] 성주. 아시카가 씨[足利氏]의 일족 시바 카네요리[斯波 兼頼][각주:14]의 후손으로 요시아키는 11대째. 임진왜란 때는 히젠[肥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에서 이에야스[家康]와 함께 주둔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야마가타 57만석이 된다. 1614년 1월 18일 죽었다. 69세.

  1. 요시히메도 한 미모로 유명했다 한다. [본문으로]
  2. 현재는 자오우 온천[蔵王温泉]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동시대의 군기물 혹은 다테 가문의 기록에도 요시아키의 동생 요시토키의 기록이 없기에(요시토키의 이름이 처음으로 거론되는 것은 18세기 들어서라고 한다) 요시아키가 동생을 공격하여 자살하게 만든 것은 의문시 되고 있다. [본문으로]
  4. 점령은 못하고 요리사다의 딸을 요시아키의 측실로 삼는 것으로 화해. 그러나 1582년 요시아키의 삼남 이에치카[清水 義親 - 모가미 씨의 일족 시미즈[清水] 가문을 상속]를 낳고 죽어 텐도우 가문과의 동맹이 끊기게 된다. [본문으로]
  5. 이 전인 1585년에 큐우슈우[九州]지방을, 1587년에는 칸토우[関東]와 오우슈우[奥州]에 각각 선포하였다. 이것을 선포함으로써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와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할 수 있는 대의명분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본문으로]
  6. 오오사키와 모가미 가문의 선조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오우슈우 칸레이[奥州管領] 시바 이에카네[斯波 家兼]이다. 이에카네의 큰아들인 타다모치[大崎 直持]가 오오사키[大崎] 지방을 영유하며 '오우슈우 탄다이[奥州探題]'가 되었으며, 둘째아들인 카네요리[最上 兼頼]를 데와[出羽] 모가미 군[最上郡]에 파견하여 '우슈우 탄다이[羽州探題]'로 만들었다. [본문으로]
  7. 코에이[光栄]의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다이호우지 씨[大宝寺氏]로 표현된다. [본문으로]
  8. 히데요시의 사투금지령은 1587년 12월. 혼죠우 시게나가가 침공한 것은 1588년에 들어서이기에. [본문으로]
  9. 여담으로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은 이때 얻은 쇼우나이 지방과 나중에 이봉된 아이즈[会津]가 모가미 가문의 영지로 인해 분단된 상황이었기에, 세키가하라 전쟁 때 모가미 영토를 침공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그에 따른 실패로 120만석에서 30만석으로 줄어들게 된다. [본문으로]
  10. 부친 요시모리[最上 義守]의 장례식 때문에 늦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당시 이에치카의 나이 10살로, 성인식 후 이에야스[家康]의 이름글자 중 뒷글자 '야스[康]'가 아닌 앞글자 '이에[家]'를 받은 것을 보면 나름 괜찮은 대우를 받았던 듯. 후에 2대 야마가타[山形] 번주가 되지만 3년만에 죽어 후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본문으로]
  12. 요시아키의 넷째 아들 야마노베 요시타다[山野辺 義忠]와의 다툼 끝에. 요시토시의 그릇이나 능력에 의문을 품은 가로들이 야마노베 요시타다 옹립을 꾀하였다. [본문으로]
  13. 그후 모가미 가문은 오우미[近江]에 1만석으로 멸봉 당하나 9년 뒤 요시토시가 병으로 죽자 남겨진 아이(요시토모[義智])가 너무 어려(당시 2살) 영지는 반인 5000석으로 줄어, 다이묘우[大名]가 아닌 다이묘우 급 직신[交代寄合]이 된다. 사족으로 에도 시대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일족을 제외하곤 최대급(57만석)의 삭탈관직[改易]. [본문으로]
  14. 모가미 카네요리[最上 兼頼]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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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iroyume 2009.10.05 06: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마히메가 히데츠구 첩인건 알았지만 이에치카를 가신으로 바쳤던건 처음알았던 사실. 자신이 행했던 업보는 결국은 자신에게나 친한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교훈을 주는 인물...... 정말 이런꼴 보고 있으면 조선이 선진국이라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어요 -_-;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에치카와 비슷한 케이스로,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바쳐졌던 구마모토 호소카와[熊本細川藩]의 2대 번주 호소카와 타다토시[細川 忠利]도 비슷한 케이스입죠. 세째이면서도 이에야스와 안면을 튼 덕분에 둘째 오키아키[興秋]를 제쳐두고 번주가 될 수 있었습죠(장남인 타다타카[忠隆]는 세키가하라 때 부인이 시어머니(가라샤)를 버리고 튄 것 땜시 폐세자)

      조선도 뭐 왕자의 난이나 영조-사도세자를 보면 비슷하지 않나요?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건 흑역사는 있습니다.

  2.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0.05 16: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도를 때려잡는걸 보면 깡 있어 보이는데 반대로 가문 보전 때문에 열심히 뛰어다녔군요;;;

    뻘플로....혁신에서 요시아키 나오기전 모가미로 플레이하면 카키자키 이상으로 빡세던 기억이....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항상 6척짜리 철로된 봉을 들고 다녔다고 하네요.
      위에 있는 그림 전체 화면(신역사군상17. '나오에 카네츠구' 실려있습죠)을 보면 저런 표정으로 도망치는 어떤 놈을 그 6척짜리 철봉으로 떼리고 있는 장면입죠.

      혁신에서 카키자키도 다이묘우로 등장하던가요?..라고 한자 변환하고 있으니 홋카이도우[北海道]의 그 분이셨군요. ^^

  3. 나라 2009.10.05 2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저 친구는 정말 인생무상이더군요..(멍)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그런데 시게자네가 마사무네의 숙부였나요? 사촌으로 알고 있었는데.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자리 오랫동안 비워서 죄송했습니다. ^^

      깊이 들어가면 워낙 사람 좋던 요시아키가 이놈저놈에게 땅도 많이 떼어준 것이 화근이 된 듯하더군요. 그렇게 기득권이 된 세력이 강성한 탓에 어린 주군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듯 합니다.

      다테 시게자네는 마사무네 할아버지 타네무네[稙宗]의 자식 사네모토[実元]의 아들이기에 우리나라로 하면 5촌 당숙이 됩죠.

  4. 이거참 2009.10.05 2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자식을 죽이고 형제를 죽이고 이런거 보면 일본인들이 참 독종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조상들이 이런 시대를 살아와 이렇게 잔인하고 독한 인종들만 살아남는 시대가 있었고 그 후손들이 지금의 일본인들이니 말입니다. 지금도 무의식 한켠에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 안 가린다는 의식이 그들의 역사적 체험과 기억으로 남아있을거라 생각하니 소름끼치는군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13: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렇지도 않기는요. 부하들의 주도권 다툼에 아들 잃었다고 슬퍼했다고 하더군요.
      이 글은 요약입니다. 한 인물에 관한 것을 쓰는데 천 몇 백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덧붙여..

      건방지게 들리시겠지만 가히 좋지 않은 시각이십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자기 오줌으로 갈증을 풀며 살려달라고 소리치는데도 결국 죽였던 영조가 있는 우리는 역시 그렇게 잔인한 족속인가요?

      국가존망의 위기 때 자신의 영달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충무공을 모함하고 충무공의 참모부 건물을 하렘으로 만든 원균과 같은 민족인 우리는 역시 수단방법 안 가리는 막장인가요?

      편견과 우월감은 백해무익한 감정입니다. 부디 그런 감정에서 헤어나오셨으면 하는 마음에 건방진 소리를 하였습니다. 기분 나쁘셨겠지만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나그네 2012.11.10 0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래전 포스트의 댓글이지만 몇가지 주제넘은 첨언을 해봅니다.
      영조의 경우도 비교적 최근인 몇년전에 비밀편지가 발견되었다고 하죠.
      몰래 음식물의 반입도 지시하였으나 모두 차단되고 심지어는 건강상태의 보고도 거짓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죽고난뒤 무척 애통해하며 힘없는 자신을 원망했다는데..
      편지가 진실이든 거짓이든 실제 역사적 사건은 인과관계가 명확치않은 복잡한 사연들과 이해관계가 얽혀 벌어지는것이므로 영조 자신의 의지만이었다고 보긴 어렵겠죠.
      일본의 경우 전쟁 + 인접한 여러 쿠니와의 혈연,정치적관계가 워낙 복잡한데 가신들의 목소리와 이해관계도 무시못하니.. 다테의 경우도 그렇고 그런 비극이 많을 수 밖에 없겠죠.
      자식을 잃은 아비의 심정은 어느나라나 비슷할것같습니다. ^ ^

      발해님 포스트 즐겁게 읽고 갑니다. 'ㅇ'¥

  5. 나라 2009.10.06 15: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전국시대의 일본들인은 조선인들보다 잔인하기야 하겠습니다만. 에도 막부 시절이 되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지 않나요. 돈이 없어 칼을 팔고 타케미츠를 들고 다니는 30석 사무라이 모습을 그린 야마다 쇼지 감독 영화가 생각나네요.
    권력투쟁에 있어 잔인하게 끝나지 않은 예가 얼마나 될까요? 일본인들이 특별나게 잔인한 게 아니라, 그런 예가 드물 것 같은 걸요. 조선시대 당파 싸움도 끔찍한 결과를 낳았었습니다. 몽고나 중세 유럽, 혹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의 잔인함은요? 남아공의 샤카, 아메리카 제국끼리의 전쟁, 심지어 뉴기니나 에스키모인들은 규범에 맞지 않으면 그냥 죽여버리는 걸요. 굳이 오래 내려가지 않더라도 한국전쟁 시기의 한국인들은 아귀인가요? 일본을 구석기 시대로 돌릴 뻔한 미국은요? 영국과 독일의 2차 대전은요?
    그렇게 일방적으로 몰아가시는 것 자체가 그렇게 싫어하시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악독한 일본인의 모습을 닮아가시는 것 같네요.

  6. 맹꽁이서당 2009.10.06 18: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몰랐던 다이묘 한 명 또 알고 갑니다. ^^ 57만석이라는 거대한 번이 소멸한 것이 안타깝네요.

    세키가하라 전투 때 우에스기와 싸웠던 가문이었군요. 저는 아직도 세키가하라 전투의 방아쇠를 당겼으면서도 도쿠가와 가문과 한판 제대로 붙지 않은 우에스기 가케카쓰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번역하신 '전국 무장의 말년'에서는 모가미나 다테 가의 배후 습격이 두려웠다... 고 했는데, 그럴거면 아예 시작하지를 말던지.. --a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좀 늦었지만 추석 잘 쇠셨길 바랍니다 ^^ 그러고보니 2016 올림픽은 리오데자네이루가 되었더군요. 남미 첫번째라는 상징성이 있으니 명분에서는 네 도시 중 가장 컸지만, 실제로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요. --a

    아, 새 블로그는 무기한 연기하고 있습니다. 번역이란게 그리 쉽게 되는 것이 아니더군요. ^^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6 2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세키가하라 때의 우에스기 군의 행태는...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세키가하라 결전이 하루만에 끝난 것이 아니고 더 길어질 것이라 예상한 것이라고.

      모가미 가문으로 인해 분단된 영토를 하루 속히 연결하여 다시 침공해 올 이에야스에 대한 대비하던지,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가 졌다면 그 길로 칸토우로 침공했을 때를 위한 후방 안전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몰라도 불온한 시기에 쇼우나이[庄内]와 아이즈[会津]가 모가미 영토로 분단되어 있는 우에스기는 필연적으로 모가미 령을 침공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비슷하게 다테 마사무네도 장기간 펼쳐질 것을 대비하여 오우슈우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같은 동군 계열인 난부 가문에 반란(와카 타다치카[和賀 忠親]를 이용. 후에 이에야스에게 들킬 것을 두려워 한 마사무네가 암살)을 일으키기도 했습죠.

      조금 씩이라도 미리 해 놓는 편이 오히려 빨라지더군요.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

  7. ulanfu 2012.11.10 01: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권모술수와 암살,이간으로 점철되었다고 이야기 하지만 간악하고 비정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실제 가독을 물려받았을땐 무력을 사용할수도 없는 처지였고(친다테파들이 워낙 많은 상태여서)
    본인이 전쟁에 의한 피해를 굉장히 싫어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저런 간악한 인물에게 내통하거나 자기 주군을 배신하는 행동을 하진 못할겁니다 여하튼 배신이건,이간책이건 자기위하의 가신들에겐 굉장히 후한 군주여서 일개 항장에게도
    몇만석씩 녹봉을 줄정도로 관대한 군주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결과 지나치게 새력이 큰 가신들의
    모반으로 개역당하게 됩니다만... 실제 야마가타현은 현재에도 일본제일의 곡창지대고
    전국시대때도 사카이와 비견할정도로 사카다 지방의 상업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가미직속 50만석포함 가신들의 녹봉을 다 합치면 50만석 가까이 되었기 때문에 요시아키가 죽기전엔 모가미계 무사들의 녹봉은 총 100만석을 넘겼다고 합니다

 1974년 10월.
 338년 만에 다테 마사무네[
伊達 政宗]의 유체가 햇볕을 쬐었다. 센다이 시[仙台市] 즈이호우 전[瑞鳳殿] 터에 있던 묘의 석실이 발굴된 것이다. 백골화되어 있긴 하여도 거의 완전한 상태로 이장되어 있었다. 골격으로 추정하면 마사무네는 보통 몸집에 보통 키[각주:1]로 코가 높았으며 이외로 상냥한 얼굴을 한 현대적인 생김새였다고 한다. 그것은 저 권모술수의 화신과도 같은 센고쿠의 맹장이 가진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외눈이었는지 어땠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곳에 가면 유골로 복원한 다테 마사무네의 얼굴을 볼 수 있다(가장 하단))

 마사무네라 하면 '독안룡[独眼竜]'이라는 이명[異名]으로 더 유명[각주:2]하다. 5살 즈음 앓은 천연두로 인하여 오른쪽 눈이 멀었다고 한다. 소년시대의 그는 자신의 추한 용모 때문에 극단적인 콤플렉스에 빠져 우물쭈물하고 자기비하가 심한 꼬꼬마였다. 마사무네 다음으로 태어난 '지쿠마루[竺丸]'가 수려한 외모에 똑똑하고 외향적인 성격이었기에 더 비교당하여 친어미에게조차 미움을 받았다.

 마사무네의 어렸을 적 이름[幼名]은 '본텐마루[梵天丸][각주:3]'였다. 모친은 같은 지역인 오우슈우[奥州]의 호족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의 여동생으로 '요시히메[義姫]'라 하였다. 이 모친은 추하고 어두운 본텐마루를 싫어하고 동생인 지쿠마루를 편애하였다. 남편 테루무네[輝宗]에게 몇 번이나 본텐마루를 폐하고 지쿠마루를 후계자로 삼으라고 하였다. 나중에는 친정 오빠인 모가미 요시아키와 짜고 마사무네를 독살까지 하려고 하였다. 친어미에게까지 미움 받았기에 본텐마루는 한층 더 열등감의 포로가 되어 성격도 삐뚤어졌음에 틀림이 없다[각주:4].

 그런 마사무네를 구한 것이 젊고 혈기왕성한 교육담당 '카타쿠라 코쥬우로우[片倉 小十郎]'였다. 후에 다테 가문[伊達家]를 짊어지고 있다는 평판을 받으며 중신[重臣]이 된 인물이다. 카타쿠라는 마사무네가 천하의 영웅이 될 인물이라며 계속 격려하였다.

 또 한 사람. 본텐마루의 강력한 지지자가 있었다. 부친 테루무네였다. 11살의 본텐마루에게 성인식을 치르게 하였을 때 '마사무네'란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 이름은 다테 가문 9대 당주 다이젠노다이부[大膳大夫] 마사무네의 이름이었다. 문무에 뛰어나 다테 가문을 융성으로 이끈 영광스런 이름이었다. 이것을 보아도 부친 테루무네가 얼마나 본텐마루에게 기대하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각주:5].
 테루무네는 1584년 41살의 나이에 가독[
家督]을 마사무네에게 물려주었다[각주:6]. 과감한 은퇴였다. 무엇보다 부인 요시히메를 중심으로 지쿠마루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테루무네는 은거를 선언함과 동시에 요시히메와 지쿠마루를 데리고 모가미 가문과의 국경 가까이에 있는 코마츠 성[小松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다테 가문의 본거지는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에 있었다.

 1584년 당시 중앙 정세는 센고쿠[戦国] 군웅할거의 시대가 끝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뒤를 이어받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 의해 천하통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토우호쿠[東北] 지방은 여전히 모가미, 다테, 오오사키[大崎], 소우마[相馬], 아시나[芦名], 니카이도우[二階堂], 타무라[田村] 등 여러 호족들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그런 정세 속에 오오우치 비젠[
大内 備前[각주:7]]이라는 소호족이 다테 가문을 방문하였다. 예전엔 다테 가문에 속해있었지만 지금은 아이즈[会津]의 아시나 가문이나 히타치[常陸]의 사타케 가문[佐竹家]과 친분을 나누고 있는 인물로, 마사무네의 가독상속을 축하하러 인사를 올리러 온 것이다. 요네자와에 저택까지 세워 충성을 맹세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아시나의 첩자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분노한 마사무네는 흑막 아시나 토벌을 결심하였다. 또한 가문에 자신의 권위를 확립시키고 싶었다. 1585년 8월, 다테의 군세는 오오우치 비젠이 지키는 오데모리 성[小手森城]을 습격하였다. 아시나나 니혼마츠[二本松]의 하타케야마 요시츠구[畠山 義継][각주:8]가 오오우치 편을 들고 있어 고전하였다. 하지만 마사무네는 오오우치의 군세가 기세를 타고 성 밖으로 나온 그 순간을 민감히 캐치했다. 단번에 수 많은 총격을 쏟아 부었고, 다시 성안으로 도망가려는 오오우치의 군세에게 모든 총포를 집중시켰다. 성 측은 무너졌다. 대장 오오우치 비젠도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마사무네가 오데모리 성을 공략한 뒤 행한 처치가 참혹했다. 항복한 노약남녀 800여명을 남김없이 학살한 것이다. 다테 마사무네의 공포를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후 오오우치와 손잡았던 니혼마츠의 하타케야마 요시츠구가 다테 가문에 엄청난 재앙, 마사무네의 생애에 있어서 최대의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항복하여 용서받은 요시츠구가 그 감사에 대한 인사를 드린다는 핑계[각주:9]로 미야모리 성[
宮森城]의 테루무네를 만나러 왔을 때의 일이다. 이날 1585년 10월 8일, 마사무네는 매사냥을 하러 나가있었다. 마사무네가 없는 틈에 생긴 사건이었다.
 테루무네와 회견이 끝나자 요시츠구는 돌아가기 위해서 성문으로 향했다. 성문까지 가는 길은 대나무 울타리가 양쪽에 늘어선 좁은 길이었다. 그 좁은 길을 요시츠구의 가로[
家老] 3명이 앞장서고 그 뒤를 요시츠구, 테루무네, 테루무네의 부하들이 뒤를 이었다.
 대나무 울타리 밖으로 나왔을 때 요시츠구와 가로 3명이 테루무네를 향해서 땅에 손을 대고 절을 하였다. 그 순간이었다. 요시츠구가 벌떡 일어나 갑자기 테루무네를 붙잡고 칼을 빼 들어 테루무네의 목에 갖다 대었다. 다테 가문의 가신들은 놀라 노성을 지르긴 하였지만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테루무네를 인질로 잡은 요시츠구 일행은 유유히 걸어가 말을 타고 자신의 영지 니혼마츠를 향해서 도망쳤다.

 사태를 듣고 달려온 마사무네의 눈에 요시츠구에게 잡힌 부친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여기서 부친을 적에게 빼앗기면 다테 가문의 패배였다. 그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각주:10] [각주:11].
 마사무네의 명령에 철포가 불을 뿜었다. 요시츠구는 이때 테루무네를 찔러 죽이고 자신도 배를 갈라 죽었다고 한다
[각주:12]. 마사무네는 하타케야마 일행 50여명을 남김없이 죽이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요시츠구의 시체를 난자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길가에 세워 모욕 주었다.

 이렇게 19살의 마사무네는 이후 가문에서 완전한 독재권력을 쌓아 23살인 1589년에는 아이즈 4개 군[], 센도우[仙道] 7개 군[]을 정복하여 광대한 영토를 손에 넣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 해인 1590년, 다테 가문에 있어서 두 번째인 더구나 중대한 위기가 닥친다.
 당시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小田原]의 호우죠우 가문[条家]를 공략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다. 마사무네에게도 참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호우죠우와 히데요시를 저울로 재고 있던 마사무네는 즉답을 피했다. 거기에 운 나쁘게도 히데요시에게 속한 아시나 가문을 공격하여 히데요시의 힐문을 받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분노할 것이라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 오다와라에 가면 살해당할지도 몰랐다. 이제 취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 사[
] 속에서 생[]을 찾는다.
 이것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마사무네의 오다와라 참전은 결정되었지만, 출발 바로 전날 친모인 요시히메가 마사무네를 독살하려 한 사건이 일어났다. 해독제를 복용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사건은 동생 코지로우(
小次=지쿠마루)를 편애하여 옹립을 꾀한 모친의 음모였다. 마사무네는 후환을 끊기 위해 동생을 자신의 손으로 칼로 찔러 죽였다. 그날 밤, 모친은 친정인 모가미 가문으로 도망쳤다[각주:13].

 어쨌든 마사무네는 히데요시를 알현함에 앞서 장례식 때 쓰는 끈으로 머리를 묶고 갑주 위에 흰 마[]로 된 겉옷[陣羽織]이라는 사자[死者]의 복장으로 참진하였다. 마사무네의 목숨을 건 연출이었다. 거기에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나 히데요시의 비서실장 격인 야쿠인 젠소우[薬院 全宗]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히데요시의 마음을 풀게 부탁하였다. 효과가 있었는지 용서받아 새로 점령한 아시나의 영지는 몰수당했지만 70여만석은 안도[安堵]되었다.

 그 후 마사무네는 또다시 히데요시의 힐문을 받게 된다. 근린에서 카사이-오오사키 반란[葛西大崎一揆]을 뒤에서 선동했다는 죄상이다[각주:14]. 이때도 마사무네는 사자[死者]의 복장을 몸에 걸치고 거기에 더해 금박 입힌 십자가를 행렬의 맨 앞에 세우고 히데요시를 만나러 갔다. 반란을 선동했다는 증거서류의 사인[花押]이 거짓이라고 주장[각주:15]하여 겨우 위기를 벗어났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의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는 동군에 속하였고 이해(1600년) 12월부터 센다이[仙台]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다음 해 4월에 그곳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마사무네는 기독교에 흥미를 느껴 1613년에는 가신 하세쿠라 츠네나가[支倉 常長]를 저 먼 이국 로마에 파견하여 교황에게 오우슈우 왕[奥州王] 마사무네의 국서를 헌상하고, 선교사 파견과 에스파냐와의 통상[通商] 알선을 의뢰하였다[각주:16].

 정치적인 모략으로 가득 찬 효웅이었지만 시인적인 재능도 발군이어서 한시[漢詩] 30수, 와카[和歌] 275수를 남겼다. 소년시대의 암울했던 일상이 그의 문학적 교양을 키웠을 것이다.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1567년생. 1584년 데와[
出羽] 요네자와[沢] 성주. 1591년 이와테사와 성[岩手城] 51만석. 1592년 임진왜란에도 출진.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우에스기 군[上杉軍]과 싸웠다. 1636년 5월 24일 죽었다. 70세.

  1. 당시 기준. 159.4cm. [본문으로]
  2. 에도 시대[江戸時代] 유학자 '라이 산요우[頼 山陽]'가 붙인 이름이다. 여담으로 라이 산요우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말로 유명한 '적은 혼노우 사에 있다(敵は本能寺にあり)'는 말을 만든 사람으로도 유명. [본문으로]
  3. 모친 요시히메[義姫]가 '문무에 뛰어나고 충효의 마음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길 바란다'며 유명한 슈겐도우[修験道]의 수행자에게 기도를 부탁. 그 수행자는 유도노 산[湯殿山]에 올라가 기도를 올린 후 증거로 유도노 산의 온천물을 먹인 고헤이[御幣]를 가지고 와서 모친의 침실에 놓았다. 그 효험인지 요시히메는 태몽으로, 어느 신선이 자신이 머물 곳으로 요시히메의 뱃속을 빌리며 그 댓가로 고헤이[御幣]를 요시히메에게 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마사무네는 어렸을 적에 저 '본텐마루'말고도 '고헤이사마[御幣様]'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여담으로 슈겐도우에서는 '고헤이'를 '본텐'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일화로는 저 삐뚫어진 마사무네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대부분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마사무네가 찌질이 짓을 벌임 -> 당한 사람들이 에도 막부에 제소 -> 막부 관료들은 '마사무네니까 어쩔 수 없음'하고 용서 -> 그런 전말을 보던 이 또한 찌질함이 둘째라면 서럽다는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어처구니 없다며 혀를 참.... 식의 이야기가 몇몇 있는데 대부분 정형화된 패턴인지라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궁금. [본문으로]
  5. 다테 가문은 11대 당주부터 성인식을 치를 때 당시의 쇼우군에게 청하여 이름 한자를 물려받았다[一字拝領]. 16대 당주 '테루'무네['輝'宗]의 경우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이며, 마사무네의 할아버지이며 15대 당주 하루무네[晴宗]는 12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의 글자를 물려받은 것. 마사무네가 성인식을 치를 즈음엔 쇼우군 요시아키[義昭]가 노부나가에게 추방당하고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요시아키 건재했다면 마사무네가 아닌 '아키무네[昭宗]'였을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6. 이로써 마사무네는 다테 가문 17대 당주가 되었다. [본문으로]
  7. 오오우치 사다츠나[大内 定綱]. [본문으로]
  8. 영지가 니혼마츠[二本松]에 있어 니혼마츠 요시츠구[二本松 義継]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9. 용서는 받았지만 요시츠구의 영지 대부분을 마사무네에게 몰수당하여 그로인해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0. 다테 가문의 기록이 아닌 다른 가문의 기록, 즉 아이즈 번[会津藩]의 기록으로 1672년 간행 된 会津旧事雑考에는 따르면, 마사무네가 지 아비가 있는데도 공격하려는 낌세를 캐치한 요시츠구가 먼저 테루무네를 찔렀고, 그것을 본 마사무네가 공격하여 요시츠구와 그의 무리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또한 아키타 번[秋田藩]의 기록으로 1698년 간행 된 奥羽永慶軍記에는 마사무네 측의 총격으로 테루무네까지 죽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2. 잡힌 테루무네가 시게자네[伊達成実]에게 '주저말고 쏘아라. 나를 걱정하여 가문의 창피를 남기지 마라'고 하여 그 낌세를 눈치 챈 하타케야마 측이 테루무네를 먼저 찔러 죽였고, 그 모습을 눈 앞에서 본 다테 측의 공격에 하타케야마 측이 몰살되었다는 것은 다테 가문의 정사 [治家記録]와 [成実記]에 나오는 말. 이 기록에 따르면 마사무네는 사냥터에서 납치 사태를 듣고 이쪽으로 막 오고 있던 중으로 마사무네는 이 자리에 없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다테 가문의 정사 治家記録에 실린 것이라고 하나, 실제로 요시히메는 그로부터 4년 뒤인 1594년에 요시아키에게로 갔다. 모가미 가문을 전문으로 다루는 사이트( http://mogamiyoshiaki.jp/ )에 따르면, 마사무네는 자신을 반대하는 파벌이 코지로우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막기 위해 연극을 하였고 그 결과 동생까지 죽인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비밀리에 행해진 것이기에 그 동안 모친은 몰랐고 모친은 4년 뒤에나 이 사실을 알고 친정으로 떠난 것이 아닌가 - 고 하고 있다. 실제로 그 4년사이에 마사무네가 자기 엄마에게 선물이나 편지를 보낸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한다. [본문으로]
  14. 소네 시로우스케[曾根 四郎助]라는 자가 마사무네의 반란선동 편지를 바쳤다고 한다. 소네의 부친은 테루무네의 죽음에 순사[殉死]하였지만 그 댓가로 아무 것도 받지 못하였기에 마사무네를 원망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5. 자신의 사인에는 바늘로 구멍을 뚫지만 증거서류에는 구멍이 없기에 자신의 것이 아닌 위조된 것이라 주장. [본문으로]
  16. 결과는 실패. 이미 유럽에선 에도 바쿠후[江戸幕府]가 기독교 탄압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던 상태라 백안시 당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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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kyblue 2009.08.12 2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한게 오슈라는 곳에서 60만석이라는게 가능했었는지 묻고싶습니다.

    당시 오슈라면 미개발지역이 많았을텐데요.

    그러고보면 관동8주의 도쿠가와가 250만석, 에치고-아이즈합해서 우에스기가가 120만석이라는 것도 좀 이해가 잘 이해가 안되네요 ^^;;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2 2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가능합죠. 므츠[陸奥] 지역만 하더라도 태합검지 때 170만석 가까이 되었으니까요.

      미개발인 것도 있지만 신고 안하고(그럼 세금 안내도 되니까요) 그냥 경작하는 지역도 많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해가 안 가신다는 것은 어떤 것이 이해가 안 가시는 것인지... 보통 땅은 평야가 많은 곳이 석고도 높더군요. 시나노[信濃]는 오와리[尾張]보다 몇 배는 더 크지만 태합검지로는 오와리 57만석에 시나노 40만석. 아무래도 산지가 많으면 적습니다.

      우에스기[上杉]가 아이즈[会津]로 옮기면서 에치고[越後]의 영지는 몰수됩니다(몰수라고 하니 부정적 어감이 강하군요.) 에치고는 호리[堀] 가문 외에 여러 가문이 들어와서 차지하게 되지요.

  2. shiroyume 2009.08.12 2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 보니 고쿠가 꼭 쌀생산량은 아니지 싶은데...예를 들어 막말의 조슈는 생산량을 100만석 이상 상회했다는 말도 있고...

    잘 봤습니다. 사실 거의 다 아는 내용이지만 이렇게 보니 다시 한 번 생각나네요.

    무엇을 위한 수고였던가..흔히 말하는 천시, 인화, 지리 중 하나라도 빠지면 대업을 이루기는 힘들다는 말이 생각나는 인물....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2 21: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본은 쌀 생산량입죠. 다른 작물도 그 작물로 어느 정도 쌀을 살 수 있느냐로 변환되고요.

      쵸우슈우[長州]가 100만석이나요? 무라타(村田) 덕분에 70만석 중반까지 갔다는 이야기는 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런 것 같습니다. 대충 보기에 지리와 인화는 어떻게 갖추어 졌던 것 같던데 천시는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3. ckyup 2009.08.13 0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테....는 뭔가 일을 저질를것 같으면서도 2%부족한 인상을 주는 인물인것 같습니다, 대망에서요. 전 이 친구하고 모리 데루모토(?) 하고 항상 헷갈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3 01: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요. 뭔가 꾸몄다간 항상 걸리기나 하고 말입죠. 역시 오우슈우[奥州]가 그의 한계였나 봅니다.

      미음(ㅁ)이 두 개씩 들어가서 일까요? ^^ 저도 예전엔 일본 이름 익숙치 않아서 헷갈리는 것이 많아서 한자음 그대로 읽기도 했었습죠. 오다 노부나가는 직전신장..이라던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는 풍신수길..이라던가..

      여담이지만 "꽃의 케이지"의 해적판인 "비룡문"에서 번역자가 재미있게 이름을 붙여 놓았더군요.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시다 삼성!!
      나오에 카네츠구는 나오에 겸속!!

    • ckyup 2009.08.13 2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름도 비스무리하고, 또 너구리 바로 다음으로 힘은 있어보이지만 화끈하게 일한번 저질러 보지도 못하고..., 그래서 그런것 같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4 12: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그런 면이 있습죠. 화끈하게 못하는 면은...

      그래도 모우리 테루모토는 오오사카 농성전에서 비밀리에 오오사카 측을 지원한 '사노 도우카 사건[佐野道可事件]'까지 일으켜서 맘 속으론 이에야스에 대한 개김성은 끝까지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이점이 마사무네와 쪼금 다르다면 다르달까요..

  4. 나라 2009.08.13 1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테 마사무네.. 그래도 그 동네에선 제법 크게 자란 사람 아닙니까. 나름.
    오사키-카사이 반란도 걸리고, 가모에게 시비한 것도 걸리고, 나중엔 이것저것 다 걸리지만.

    그래도 교활하게 넘어간 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저래뵈도 천하의 부장군 아닙니까.

    개인적으론 NHK에서 했던 다테 마사무네 사극이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4 1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그 어감은 멋있는 것 같습니다.
      "천하의 부장군"

      오~ 보셨나요?
      NHK 대하 드라마 사상 최고의 작품이라는데... 아직 접해보진 못했습니다. 여담으로...어느 작품에서건 다테 마사무네 역을 맡는 사람은 언제나 와타나베 켄[渡辺 謙]과 비교당한다고 하더군요.

  5. ray201 2009.08.13 14: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어쩜 그리 세세히 잘 아셔서 쓰는지? 늘 감탄, 또감탄.
    "이시다 삼성! 나오에 겸속!"은 걸작 중 걸작 같군요.ㅎㅎ.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4 12: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게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참 인상적이었죠.
      우에스기 경승[上杉 景勝]이라던가, 오쿠무라 위문[奥村 助右衛門]이라던가...

  6.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8.13 18: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무쌍인지 무쌍오로치인지 기억은 안나지만...모가미가 위험에 처하자 삼촌이랍시고 구하러 뛰어가던걸 생각하면 (게임이지만서도...) 실은 독살 계획까지 같이 짜고 있었다니 ㅎㄷㄷ

    그리고 여담이지만 저는 소우마하고 아리마하고 헷갈리더군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4 12: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란의 시대야 육친이고 뭐고 없을테니까요.

      저도 일본 고대 인물들 이름 들어가면 헷갈리더군요. 역시 뭐든 많이 접해서 익숙해지는 것이 상책인 듯 싶습니다.

  7. 맹꽁이서당 2009.08.14 1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테 막부가 성립되었으면 지금 일본의 수도는 센다이가 되어 있을까요? ^^ 다테가문이 원래부터 오슈에 자리잡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전국시대 말기를 거치면서 원래 영지를 지킨 가문도 거의 없어진 모양이네요.

    상관없는 얘깁니다만, 미소녀 피규어 사진 찍어올리는 것도 흥미가 떨어지고 해서 가을 쯤 이글루스에 새 블로그를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고전 목록이랑 미흡하나마 역사 관련 서적을 하나 옮겨볼까 해요.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4 1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시카가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를 세운 아시카가도 그다지 연고성 없는 쿄우토[京都]에 바쿠후를 세운 것을 보면 꼭 센다이에 세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담으로 다테씨는 막말유신 사이에 '오우우 열번동맹[奥羽越列藩同盟]'에서 결국 쇼우군[将軍]이 됩지요. 이름도 '칸토우 곤 세이이타이쇼우군[関東 権征夷大将軍]'에 센다이 번주 다테 요시쿠니[伊達慶邦]가 임명됩지요....뭐 어디까지나 구상이었지만요. ^^

      陸奥나 出羽나 일본 옛 사람들은 싸그리 奥羽라고 한 것을 보면 거기서 거기인 것 같습니다.

      오!!!! 기대 만빵하고 있겠습니다. 좌표 꼭 찍어주시고요!!

      지도편달은요...오히려 절 많이 가르쳐 주시느라 피곤해 하실 듯.

  8. Favicon of https://wwangel.tistory.com BlogIcon 폭주천사 2009.08.14 12: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 무장에 대한 이런 자세한 글을 처음 읽는군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다테 마사무네는 만화 "사무라이 디퍼 쿄우"와 애니메이션 "전국 바사라"에 주인공으로 나온 인물이라서 더 친근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4 13: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좋게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

      다테 마사무네는 정말 여러 창작물에서 활약하더군요. 뒤 늦은 천하인이라던가 잘생기고 패셔너블 했다는 점이 지금도 인기의 원천인 것 같습니다.

  9. 나라 2009.08.14 14: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제 사극에서도 천하인이라기보단 살아남기 급급한 다이묘... 눈치 하나는 정말 죽여주더군요. 그리고 온갖 모략에서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수법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난부령을 침범하는 일만 안 저질렀어도 100만석 얻었을지도 모르지만... 아. 역시 이에야스가 무슨 핑계를 대서든 안 줬을려나요. 나중에 영 딴판없는 이요 10만석이나 하나 덜렁 주니..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4 19: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말 재미있을 것 같군요. 그 큰 덩치로 빠져나갈 궁리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

      얻었을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합니다만 어땠을지... 대신 그의 사위이자 이에야스 6번째 아들은 마츠다이라 타다테루[松平 忠輝]에게 75여만석을 주니(뭐 한꺼번도 아니고 차츰차츰이지만요) 마사무네로서는 만족했을 지도 모르죠.

      이야~ 10만석이라도 준 것은 그나마 다행입죠. 더구나 저 우와지마 번[宇和島藩]은 사현후 중 하나인 다테 무네나리[伊達 宗城]가 나오니 그건 그것대로 다행이 아닐지.

  10. 朴先生 2009.08.17 0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래 전국무장 100화 중 보기드물게 많은 댓글이 달린 편이로군요.
    과연 다테 마사무네~!!!

    애꾸눈은 상당히 컴플렉스였나 봅니다. 외눈이 되고 무려 65년 동안이나..
    자기비하가 심한 꼬꼬마 시절에다가, 죽을 때는 초상화에 외눈으로 그리지 말라고 했던 걸 보면 말이죠.(모든 걸 초월한 나이련만) 그렇지만 현대에 와서 많은 창작물에서 활약하는 건 마사무네의 성격이나 실력도 그렇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 '외눈박이 눈' 때문이 아닐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왠지 희소성 있는 유니크한 간지이지 않습니까? ^^
    그렇게 생각하니 좀 웃기네요. 본인한텐 커다란 컴플렉스였는데, 후대 사람들한테 그게 주요하고 멋진 이미지라니요. 뭐 애꾸눈이 뭐가 멋지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죄송합니다;;

    어느덧 전국무장 100화도 56번 째 편이군요.
    '천 지 인'이 끝나기 전까진 나오에 카네츠구 편을 볼 수는 있겠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7 09: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마사무네 정말 인기 좋더군요. 요즘 게임을 하지 않는 저조차도 파란 陣羽織하고 노란색 달이 걸친 투구, 거기에 육도류(원피스의 조로의 두 배)가 자주 눈에 밟힐 정도로 이곳저곳에 출연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말씀하신대로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오에 카네츠구는 92번째로 실렸습죠....저도 이 책을 처음 번역할 때 천지인 하는 동안 쓰는 것이 목표였습니다만...지금 페이스로 보아서는 무리 ^^

  11.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09.08.20 10: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들은 심적인 능력이 발달되는 것 같아요.
    마사무네는 대표적으로 그런 류의 인물인것 같습니다.

    가타쿠라라는 가신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슈의 패자는 다른 가문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20 19: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뛰어난 No.2의 존재는 확실히 조직이 돌아가는데 원활히 해주는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그보다 뛰어난 No.1이 있을 때에 한정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백락일고(伯樂一顧). 부하는 주인이 뛰어나야지만 비로소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