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

 히데요시(秀吉)의 죽음과 동시에 당연히 측근정치는 끝나고 그 정치적 붕당은 해산되어야만 했다. 붕당의 영수(領袖)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였다.
 하지만 제도로써 남았다. 히데요시는 유언으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운영체재를 새로이 만들었다. 행정면에서 히데요리(秀
)의 대리인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였으며 가정면에서의 보호자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였다. 이 둘을 최고 결정권자로 하여 최고 의결기관(議決機關)에는 그 둘을 포함한 다섯 명의 대로(大老)[각주:1]로 구성하였다. [오대로(五大老)]이다. 이어서 조정기관(調停機關)으로 [삼중로(三中老)][각주:2]를 두었고 거기에 그들 밑에 사실상 토요토미 가문 집행기관(執行機關)으로 이시다 미츠나리 등 [오봉행(五奉行)][각주:3]을 두었다. 이 때문에 고인의 측근은 이 새로운 시대에서도 제도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다.[각주:4]

 하지만 기껏해야 제도로써만이다. 그 측근으로서의 실질적 위력은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그들은 히데요시가 있었기에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었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이상 모든 신통력은 사라졌다.
- 토요토미 정권의 악(惡)은 모두 그들에게서 나왔다.
 라는 것이 히데요시 말년에 히데요시에게 피해를 입은 다이묘우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히데요시를 미워할 수 없기에 그들은 그 측근을 저주했다.

 "지부쇼우유우(冶部少輔=미츠나리)는 용서할 수 없다"

 라는 태도를 가장 농후하게 나타낸 것이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와 그 시녀단들이었다. 그녀들의 시각으로 보면 미츠나리는 천하의 행정관이 아닌 히데요시의 비서관에 지나지 않았고, 히데요시의 비서관이 아닌 요도도노(淀殿)의 이익대변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토요토미 가문의 중심은 당연하게도 어린 아이인 히데요리와 그 어미가 되었다. 그 대리인이 미츠나리였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그는 히데요시 시대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

 다행히 집정관 이시다 미츠나리 위에는 상부기관이 있었다. 그 대표가 토쿠가와 이에야스로 키타노만도코로와 그 시녀단은 이 이에야스의 힘을 빌려 저 요도도노 모자와 그 대리인의 억누르지 않으면 안 된다 – 고 생각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키타노만도코로와 이에야스는 급속도로 가까워져 한때는 성안에서
- 두 분은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닐까?
 하는 즈질적인 소문이 날 정도로 그 왕래가 빈번하였으며 둘의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 등은 특히 그랬다.

 이 당시 조선에서 돌아온 장수들 중 대부분이 그곳에 있을 때 본국에서 행해진 전공평가에 대해 크게 불만을 품었고, 그 불공평의 원흉이 히데요시 측근 이시다 미츠나리라고 하여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를 포함한 일곱 명의 다이묘우[각주:5]는 귀국 후 오오사카(大坂), 후시미(伏見)에서 시가전을 전개하여 미츠나리를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당연 미츠나리파도 방비를 하였다. 때문에 오오사카, 후시미 성 밑은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 전쟁이 일어난다~
 고 오오사카와 후시미의 시민 중 눈치 빠른 자들은 재산을 멀리 그리고 뿔뿔이 분산시키는 사람이 많았다. 퍼진 소문에 따르면,

 "이시다 지부쇼우유우님의 뒤를 밀어주고 있는 것이 요도도노라고 한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요도도노 그 자체는 아무런 위계(位階)도 가지지 못하였고 어떠한 권력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어린 주군인 히데요리를 그 무릎 위에 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존재로 세간에 인식되기 시작했다. 카토우 키요마사들 마저 세간의 그런 풍문을 믿어

 "우리들은 키타노만도코로님의 힘을 얻지 않으면"

 하고 지금은 비구니가 된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비호를 부탁하였다. 키타노만도코로도 충분히 납득하여 그들의 보호를 대로 필두인 이에야스에게 부탁해서는 그 내락을 얻었다. 이에야스는 내심 이 토요토미 가문의 내분을 기뻐하며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다며 오히려 은밀히 부채질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일들이 돌아가는 동안, 요도도노는 백치 같았다.
 - 아무래도 여러 다이묘우들 사이에 다툼이 있는 것 같다.
 는 것을 그녀가 안 것은 훨씬 후 –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에야스에게 오봉행의 자리에서 파면되어 오오사카 성(城)을 떠나 자신의 거성(居城)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佐和山) 성()으로 은거 (위장이지만)한 전후[각주:6]였다. 그녀는 시세에 관해서 남들이 싸우는구나 하는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다. 세간에서는 그녀와 친밀하다고들 하는 이시다 미츠나리에 대해서도 그렇게까지 자주 만난 적도 없었으며 흥미도 관심도 없었다. 단지 유모인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卿局)에게서,

 "이는 소문이옵니다만 에도 나이다이진(江戸内大臣=이에야스)이 히데요리님의 천하를 빼앗으려 한다고 하더군요"

 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녀는,

 "설마"

 라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에야스라는 – 저 뚱뚱한 50대의 인물에 대해서는 그 온화한 풍모 이외에 지식이 없었다. 자연히 실감도 나지 않았으며 더구나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의 척도로 그것을 부정했다. 관팔주(八州=칸토우(東))의 주인에 불과한 이에야스가 천하의 제후(諸侯)들을 거느린 토요토미 가문에게 감히 칼을 들이댈 턱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랬던 그녀가 - 자신이 아무래도 엄청난 풍운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사와야마에서 은거 중이던 이시다 미츠나리가 은밀히 거성(居城)에서 빠져 나와 밀행하여 오오사카 성(城)에 나타나면서였다. 요도도노와 대면했다.

 "나이후(府=이에야스)가 가진 야망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고 미츠나리는 이에야스가 얼마나 교묘한 수단으로 토요토미 가문에게서 정권을 찬탈하려는 가에 대해서 그 풍부한 정세인식과 너무도 날카로울 정도의 논리를 가지고 설명했다.
 '말이 참 많구나'
 요도도노에게는 때때로 따분한 이야기였으며 때때로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미츠나리라는 인물은 여성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은지에 관한 지식을 재능으로써 갖추자 못하고 있었다.

 "어려운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추측에 따르면 츄우나곤님(中納言=히데요리)은 어떻게 되신다는 것입니까?"

 하고 결국 참지 못하고 요도도노는 되물었다. 미츠나리는 말을 끊고 고개를 갸웃하면서 잠시 생각했다. 이렇게 된다면 위협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와뢰옵기 황송하오나 츄우나곤님은 얼마 안가 저 히데츠구님과 같이 되실 것이옵니다"

 "말도 안 됩니다. 히데츠구님은 나쁜 반역을 꾀했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옵니다. 히데요리님이 반역이라뇨?"

 '이렇게 무지할 수가'
 하고 미츠나리는 생각했다. 히데츠구는 정치적인 이유로 토멸된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행동에 따른 죄가 아니라는 것이 이 요도도노에게는 이외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미츠나리는 방법을 바꾸어서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기후 츄우나곤님(岐阜中納言=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처럼 되실 것입니다"

 "기후 츄우나곤님?"

 요도도노는 미츠나리가 말하는 뜻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 곁에 있던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卿局)에게 손짓하여 귓가로 와 설명하게 하였다.

 [기후 츄우나곤님]
 이라는 인물은 정삼위(正三位) 츄우나곤(中納言)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를 말한다. 히데노부는 노부나가(信長)의 적손(嫡孫)으로 오다 가문(織田家)의 정통 후계자였다. 히데요시에게서 노부나가 때부터의 거성(居城)인 기후 성(岐阜城)을 하사 받고 총 13만3천석의 영지(領地)에 봉해져 있었다. 나이는 20살 전후[각주:7]로 조부 노부나가에게 물려받은 듯한 수려한 용모와 화려함을 추구하는 성격을 이어받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그릇과 재능을 전혀 물려받지 못하여 활달한 성격만이 장점인 평범한 젊은이였다.
 - 원래대로라면 기후 츄우나곤님이 천하의 주인이시다.
 고 제후(諸侯)들간에 은밀히 속삭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당시 옛 주인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치른 뒤 이 오다 히데노부에게 오다 가문 600만석의 패권을 상속시키지 않고 은근슬쩍 자신이 오다 계열의 다이묘우(大名)들을 이끌고 이곳 저곳의 적을 평정하여 그 영역을 천만석 이상으로 불린 다음 조정에 주청(奏請)하여 칸파쿠(
白)에 임명 받았다. 칸파쿠가 되면 오다 가문보다 가문의 격이 높으며 더구나 칸파쿠라는 신하로서 가장 높은 직책은 텐노우(天皇)를 대신하여 일본의 정치를 통괄하는 직무인 이상 당연히 옛 주인 노부나가의 자식이나 손자도 일본의 종주(宗主)인 텐노우(天皇)의 권위에 따라 히데요시에게 지배를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논리에 따라 히데요시는 세상 사람들이 눈치채기 전에 오다 가문의 정권을 녹이듯이 없애버려 노부나가의 자식이나 손자도 자기 산하의 다이묘우로 만들어버렸다. 더구나 그 오다 히데노부는 히데요시를 앙모(仰慕)하여 오히려 진짜 아비인양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오다 가문은 일개 다이묘우(大名)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하고 요도도노는 미츠나리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보아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변하며 상체를 세차게 떨었다. 그러던 중 유모인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卿局)가 다가가 마치 여자아이를 대하듯이 요도도노의 손을 자신의 양 손으로 따스하게 감싸듯이 덮었다. 히데요리가 일개 다이묘우라는 위치로 떨어진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죽이면 될 일이지?"

 그 반역을 꾀한다는 이에야스를 말이다. 미츠나리는 넙죽 엎드렸다. 그 말 한마디가 필요했다. 나머지는 히데요리의 도장이 찍힌 교서(敎書)를 만들어 사방의 다이묘우들에게 동원령을 내려 오오사카로 불러들이면 되었다.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2. 이코마 치카마사(生駒 親正),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一氏). [본문으로]
  3. 일반적으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본문으로]
  4. 상기의 오대로, 오봉행이 제도로써 정착되었다고 하는 것은 에도 시대 들어서의 군기물(ex.甫庵太閤記)에 나온 것으로 당시 오대로는 五人の衆 혹은 五人御奉行(다섯 명의 행정관)등으로 표현되었다. 오봉행은 꼭 다섯 명이나 상기의 인물들이 아닌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가 있는 등 확실치 않았다고 한다. '토요토미가문의 사람들 - 우키타 나오이에' 편에 언급된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가 히데요시의 유언을 적은 곳에 오봉행에 해당하는 단어는 "행정관 다섯 명(年寄衆五人)" 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일반적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를 말한다[関原始末記], [徳川実記]. 다만 그 인물 구성은 기록마다 틀려 '전국무장의 말년과 최후 -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잠깐 이름이 나온 이타자카 보쿠사이(板坂 卜斎)의 메모(板坂卜斎覚書)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빠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있으며, 미츠나리를 습격한 무장 일곱명에게 보낸 편지인 [윤3월5일자 이에야스의 편지(閏三月五日付家康書状)의 수신인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우 요시아키가 빠지고 대신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正),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6. 위에서 언급한 일곱 명에게 습격을 당할 뻔한 미츠나리는 기책을 발휘하여 오히려 그 숨겨진 수괴인 이에야스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하였고, 이에야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한편 일곱 명을 납득시키기기 위해서 사와야마 은거를 명하였다. [본문으로]
  7. 히데노부는 1580년생으로 이 당시(1599년)에는 19살...이지만 당시는 일본도 태어나면서 나이를 세어(数え年) 20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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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맹꽁이서당 2009.02.14 2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도도노 편은 특히 분량이 많군요. 마지막 오사카 싸움은 어떻게 서술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네요. 이번 편도 잘 읽었습니다. ^^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15 08: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그냥 다른 편들의 두 배정도이지만...

      가령 히데나가 편은 쓰는 저도 재미가 있다 보니 단 번에 번역할 수 있었는데 이번 편은 그냥 덤덤하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2.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2.15 00: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이젠 토시이에도 죽고 코바야카와 크리가 터지겠군요;;

  3.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2.22 13: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시다 미츠나리의 본거지인 사와야마가 사카이와 멀지 않은, 예전 미요시 일당의 근거지중 한곳이었나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23 10: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본문에 사와야마 링크 건 곳으로 가 축소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와야마는 오우미(近江)에서도 미노 측에 가까운 곳이고 사카이는 현재 오오사카(大坂)에 있던 곳입니다.

      미요시씨의 최전성기 때도 오우미에는 롯카쿠 사다요리(六角 定頼)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기에 그의 거성 칸논지 성(観音寺城)보다 동쪽에 있는 사와야마까지는 손을 뻗칠 수는 없었죠.

    •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2.26 19: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른 지역과 착각을 했나봅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27 20: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아직 많이 틀리는 편이라... ^^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는 이름을 후지타카(藤孝)라고 한다. 센고쿠 무장 중에서는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단정지어도 좋다. 고전(古典)을 산죠우니시 사네에다(三西 枝)와 쿠죠우 타네미치(九 種道)에게 배워 고금전수(古今授), 중세 시학(歌) 등을 집대성하였다.

 태어나 자란 환경이 좋았다. 모친은 역사상 굴지의 석학 키요하라 노부카타(原 宣賢)의 딸로, 표면적인 부친으로는 미츠부치 하루카즈(三淵 晴員)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12대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라고 한다. 쇼우군이 코노에 히사미치(近衛 尚通)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기에 이미 요시하루의 애를 배고 있던 모친은 미츠부치 가문에 하사된 것이다.

 후지타카는 미츠부치 가문(三淵家)에서 태어났지만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의 양자가 된다[각주:1]. 자란 것은 모친의 친정 키요하라 가문으로 거기서 후년의 와카(和歌), 문학적 소양 등을 기초를 길렀을 터인데 달리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후지타카가 시에 눈을 뜬 것은 어느 전투에서 함께 있던 무사가 옛 시(古歌)를 읊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적을 쫓다가 도중에 놓쳐서 포기하고 돌아오려고 할 때에 이 무사가,

당신은 아직 멀리 안 갔을 거요 내 옷깃에,
눈물도 아직 식지 않았으니
君はまだ遠くは行かじ我袖の、
も未だ冷かならねば
라는 옛 시를 읊으며 적이 타다 버린 말을 조사한 것이다. 안장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이 무사는 적이 아직 멀리 도망치지 못한 증거라고 후지타카에게 가르쳐주었다. 그 말을 듣고 더 추격해서 적병의 모습을 발견하여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후지타카는 시에 뜻을 두었고 후에 결국 달인의 영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후지타카가 처음으로 섬긴 주군은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후지(足利 義藤[각주:2]=후에 요시테루(義輝)이다. 13살 때였다. 아시카가 바쿠후의 쇠망기로 1554년에는 쇼우군 요시테루 자신이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에게 쫓겨나 오우미(近江) 쿠츠키(朽木)로 도망쳤다. 이때 후지타카도 그를 따르며 쓴맛을 맛보았다. 이 쿠츠키 계곡(朽木谷)에서 후지타카는 책을 읽기 위한 등불을 밝힐 기름이 없어 가까운 신사(神社)의 등불에서 기름을 훔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568년 이 요시테루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와 미요시 일당에게 살해당했을 때는 영지(領地)인 야마시로(山城) 쇼우류우지 성(勝寺城)에 있었기에 난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때가 32살이었다. 이때부터 고난의 유랑생활이 시작되었다. 요시테루의 동생으로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사(寺) 이치죠우(一)원(院)의 몬제키(門跡)였던 카구케이(慶=후에 요시아키(義昭))를 옹립하여 쇼우군의 자리에 앉히기 위한 후원자를 찾기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 사이를 돌아다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만나 요시아키를 15대 쇼우군 자리에 앉히는 것에 성공한다. 이때 후지타카는 노부나가에게 야마시로 나가오카(長岡)를 하사 받아 성(姓)을 '나가오카'로 바꾸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후지타카는 쇼우군 요시아키에게 불신감을 품기 시작한다. 노부나가의 괴뢰에 지나지 않는 쇼우군 자리가 불만인 요시아키는 은밀히 반오다(反織田) 세력과 손을 잡았고 결국에는 모반까지 계획하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후지타카의 날카로운 정치적 감이 빛난다. '요시아키는 망하고 천하는 노부나가의 것이 된다' - 후지타카는 그리 확신하여 요시아키가 모반을 꾀한다는 사실을 예전 함께 요시아키를 섬겼고 지금은 양다리로 노부나가까지 모시고 있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전하여 노부나가 측에 선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1582년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이 일어났을 때도 이 정치적 감이 빛을 발한다.
 그는 아케치 미츠히데가 노부나가를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미츠히데의 능력으로는 천하를 유지시킬 수 없을 거라 판단하였다. 이 때문에 평생의 친구인 미츠히데의 요청을 거부한다. 이때 미츠히데의 딸 타마(たま=가라샤(ガラシャ))를 부인으로 둔 아들 타다오키(忠興)에게,
 "나는 노부나가의 은혜를 입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은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그러나 너는 미츠히데와 사위-장인이라는 사이. 아케치에게 가는 것도 안 가는 것도 너의 마음대로 하여라"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결국 타다오키도 부친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에 대한 조의를 표해 미츠히데의 요청을 물리쳤다.

 머리를 민 후지타카는 가독을 타다오키에게 물려주고 자신 본래의 문화인적인 특질을 발휘하게 된다. 유우사이(幽)라는 호는 이 시점에서의 것이다. 히데요시의 시마즈(島津) 정벌에 종군하였을 때 유우사이는 항복한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를 위해 따스한 온정을 베풀었다.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바쳐진 요시히사의 딸 카메쥬(亀寿)를 유우사이가 노력하여 가족들에게 돌려보낸 것이다. 유우사이와 요시히사가 귀여운 딸에 관한 시를 지어 서로 받고 보낸다는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가 그 모습에 감동하여 카메쥬를 인질인 신분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히데요시의 황금시대. 고전파 지식인으로서 유우사이는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1588년 4월. 히데요시는 새로 지은 쥬라쿠테이(聚
第)에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의 행행(行幸)을 기획하였는데 이는 전년도의 키타노 대다회(北野大茶)와 마찬가지로 토요토미 정권의 여러 다이묘우들에 대한 거대 정치 이벤트였다. 유우사이는 이때 와카(和歌)의 자리에서 조정의 예법에 맞추어 예식을 거행하고 대표로서 와카 몇 수를 헌상하는 등 고전의 교양 없이는 불가능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런 행사를 화려하게 장식하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유우사이 자신은 그런 화려함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평소 그는 어디까지나 옛 전통에 따라 의상 같은 것도 검은색 일색이었다고 한다.

 유우사이의 고전에 대한 조예는 전쟁에서도 그 가치를 발휘한다.
 천하가 둘로 나뉜 세키가하라(
ヶ原) 때의 일이다. 아들인 타다오키는 이에야스를 따라 칸토우(東)로 내려가 있었기에 아들을 대신해서 탄고(丹後) 타나베 성(田城)에서 농성전을 치르게 된다. 후쿠치야마(福知山)성주 오노기 누이노스케(小野木 縫殿助)를 시작으로 한 1만5천여의 서군이 포위한 타나베 성에는 불과 500여의 수비병밖에 없어 낙성은 시간문제라 여겨졌다. 유우사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때 조정에서 유우사이가 죽게 됨으로써 옛 것들이 끊기는 것을 안타까워해 유우사이에게 개성을 권한 것이다. 하지만 유우사이는 이를 정중히 거절. 다만 고금전수의 기록들이 재로 변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기에 이들 전부를 텐노우(天皇)의 동생 하치죠우노미야 토모히토(八宮 智仁)에게 보내고자 하였다. 조정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텐노우의 칙령으로 서군에게 타나베 성의 포위를 풀게 하였고 대신 유우사이는 탄바(丹波) 카메야마 성(山城)으로 옮기게 만들었다.

 말년의 유우사이는 쿄우토 닌나(仁和)사() 주변에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호소카와 유사이(細川 幽斎)]
1534년생. 호소카와 모토츠네(細川 元常)의 양자가 된다. 효우부다이후(兵部大輔)에 서임받았다. 처음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 속해있었지만 1573년 오다 노부나가로 말을 갈아타 1580년 탄고(丹後)를 하사 받았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후에 가문을 타다오키(忠興)에게 물려주었고 1589년 타다오키의 영지(領地)와는 별도로 미야즈 성(宮津城) 4만석을 받는다. 1610년 8월 20일 77살로 죽었다.

  1. 유우사이의 부친 미츠부치 하루카즈는 호소카와 가문의 서류 이즈미 슈고가문(和泉守護家) 출신으로, 하루카즈의 모친의 친정인 미츠부치 가문에 아들이 끊겼기에 양자로 들어갔으며, 유우사이는 다시 후계자가 없던 큰아버지 호소카와 모토츠네(細川 元常)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본문으로]
  2.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의 '후지'는 이 요시테루의 전 이름의 글자를 하사받은 것(一字拝領)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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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2.04 1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킨텐슈 그러니 처음 산죠니시 사네에다를 봤을때, 에? 산죠 니시사네에다 아닌가?..로 착각했던 추억이 떠오르는군요; 산죠니시라는 성이 따로 있을줄이야(;)

    닌나지는 쿄토에 갔을때 스쳐 지나갔었습니다만.. 하긴, 쿄토의 버스 정류소는 죄다 절이름 투성이니(;)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역사적으로 공부할만한 사적이 많다는 증거이겠죠. (이름 있는 유적만 가더라도 이틀씩이나 걸리는 쿄토니;) 개인적으로는 아쉽습니다만 뭐 나고야가 싸니; 음, 아시가루는 싼맛에 쓰는 것 처럼 역시 싼게 좋은게죠(머엉;)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7 20: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 성 읽기 어렵죠... 위키는 그런 면에서 정말 좋습니다.

      일본 개그맨 하나와의 "SAGA"라는 노래를 보면 사가현(佐賀県) 지역은 버스정류장이 "**씨 집 앞"...이라고 하더군요...^^

      천하인을 둘이나 배출한 지역!!!
      어디든 근성만 있으면 됩니다. 멋진 근성 발휘를 기대하겠습니다.

  2. 朴先生 2009.04.13 1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건덕후는 아니지만 왠지... 古今傳授어택을 시전하는 호소카와 유우사이의 모습이
    G건담의 도몬이 샤이닝 핑거를 쓸 때의 모습과 오버랩되는군요

    "나의 고전이 빛나며 울부짓는다! 포위를 풀라고 찬란하게 외친다! 必殺!! 고오그으으음저어언수우우우어태에에엑!!!"

    결론은... 아무튼 이래서 인문학이 완전히 쓸모없진 않나보다라는 겁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08 11: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야~ 건담G무투전을 아시면 훌륭한 건덕후십니다.
      (저는 아무로 팬이라 아무로 나오는 건담만 보고 그 이후는 아예 무시하는 편입죠)

      예전에 소문으론 저 성우가 용산인지에 나타나 저 대사를 외치자 덕후들이 따라 외쳤다는 전설이 있던데...

      유우사이야 잘 하니까 그랬겠죠... 어중간 했으면 그냥 戰死!...였지 않을까요.

六.

 그 다음 해 7월. 미츠나리[三成]가 오오사카[大坂]에서 거병하였다. 이에야스의 죄상을 열거하고, 그를 물리쳐 히데요리[秀頼]의 정권을 보전한다 – 는 것이 거병의 명목이었다.
 이 때 이에야스는 칸토우[関東]의
오야마[小山]에 있었다. 히데야스[秀康]의 거성인 유우키[結城]에서 가깝다. 불과 2리[각주:1] 정도일 것이다. 이에야스[家康]는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씨[上杉氏]를 물리치기 위해 이곳에 와 있었다. 우에스기 씨(氏)를 정벌하려는 이에야스의 공식적 위치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대로(大老)로서이며, 이 출정은 공공을 위한 싸움이었다. 이 때문에 토요토미 가문의 여러 수 많은 다이묘우들을 이끌고 있었다. 이에야스로서는 이들을 가지고 오오사카의 반란 다이묘우 무리들을 물리치면 좋았다.

 하지만 여러 장수들에게도 의향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의향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 옛 성터가 있는 이 오야마 언덕에 다이묘우들을 모아 거취를 결정케 하였다. 운명의 선택에 주저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이에야스 측에 서는 것을 소극적인 행동으로 나타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곧이어 모두 그 자리의 분위기에 물들여져,
 - 이의 없사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나이후[内府=이에야스[각주:2]]
와 운명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고 모두 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이 이에야스가 생각하던 대로 되었다. 이에야스는 만족했다. 이에야스에게 부여된 이 이후의 모든 운명은, 이 7월 25일 오야마 군의(軍議)의 성공이 기초가 되었다 – 고 말해도 좋았다.

 회의는 곧바로 미츠나리 토벌을 위한 작전회의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 선봉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등 토요토미 계의 다이묘우들로 편성되어 곧바로 서쪽을 향해서 출발했다. 이에야스는 일단 에도[江戸]로 돌아간 후, 토쿠가와 군(軍)을 이끌고 토우카이도우[東海道]로 나아가기로 하였고, 적자(嫡子) 츄우나곤[中納言] 히데타다[秀忠]에게는 토쿠가와 제2군을 이끌게 하여 나카센도우[中仙道]를 이용하게 하였다.

 문제는 히데야스였다.
 전투에는 참가시킬 수 없다 – 는 방침을 이에야스는 세웠다. 이에야스가 보건대 히데야스는 필시 전쟁터에서 용맹할 것이다. 만약 큰 공을 세우기라도 한다면 크게 상을 주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렇게 되면 히데야스의 존재가 커져 적자 히데타다와의 균형이 무너지게 된다. 히데야스와 함께 야전을 하고 성을 공격하며 고락(苦樂)을 함께 맛보게 될 토쿠가와 휘하의 장졸들은 어느덧 히데야스를 따르게 되어, 온화하기만 한 것이 장점인 히데타다를 능가하게 될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다음 대는 히데타다 – 라고 정하고 있던 토쿠가와 가문의 통제가 그로 인해 흔들릴 것이며, 히데야스 자신도 자신감을 팽창시켜 동생의 영화를 시기하고 모반할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히데야스를 잔류군의 장수로 하였다. 우에스기 군(軍)의 견제로써 우츠노미야 성[宇都宮城]을 지키게 하고 칸토우[関東]의 동북변에 머물면서, 먼 에도 성(城)의 방위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 뜻을 히데야스의 진영에 사자를 보내 알렸다. 사자는 일족인 마츠다이라 겐바노카미 이에키요[松平 玄蕃頭 家清]였다.

 히데야스는 사자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끝까지 듣지는 않았다. 자리에서 펄쩍 뛸 정도의 기세로,

 “말도 안돼!!”

 하고 성을 내며 소리질렀다. 무문(武門)에서 태어나 이렇게 큰 전투를 앞두고 잔류군을 맡으라니 말이 되느냐? 나는 따르지 않겠다. 오늘 밤에라도 진을 거두고, 선봉이 되어 토우카이도우[東海道]를 거슬러 올라갈 생각이다, 그렇게 아버님에게 전하도록……

 사자인 이에키요는 새파래져서는 오야마의 이에야스에게로 돌아왔다. 이에야스는 잠시 생각한 후,

 “알았다. 히데야스를 곧바로 여기로 오라고 전하도록”

 라고 말했다. 저런 기세가 센 젊은이에 대해서는 말하는 방식이라는 것이 있다. 이에키요는 그것을 몰랐다. 히데야스가 오야마의 언덕으로 올라왔다. 이에야스는 일부러 일어서서 히데야스를 진영의 현관에서 직접 맞이하여 별실로 안내했다. 마치 높으신 분을 접대라도 하는듯한 정중함이었다. 자리에서 이번 전투의 전략을 설명하며,

 “지금 동쪽의 적인 우에스기 씨(氏)를 남겨 놓은 채 서쪽의 적을 치려고 한다. 토쿠가와 가문이 죽느냐 사느냐다. 만약 서쪽의 미츠나리와 교전 중에 배후의 우에스기가 들고 일어나서 아이즈[会津] 분지에서 뛰쳐나와 칸토우 평야에 난입하여 그 기세를 타 에도를 등뒤에서 공격해 오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 가문은 멸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고 말했다.
 심각한 전략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이에야스는 그 문제를 해결해 놓고 있었다. 우에스기 씨(氏)에 대해서는 다테 씨[伊達氏]와 모가미 씨[最上氏] 등의 걸림돌을 배치시켜 놓았으며, 또한 우에스기 씨(氏)는 칸토우[関東]를 절대 습격하지 못한다.

 이에야스는 그리 내다보고 있었다. 우에스기 씨(氏) 100만석의 병력으로는 아이즈 분지에서의 방위선이 한계이며, 밖으로 싸우러 나갈 정도의 능력은 없다.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미치지 않는 한, 그들 우에스기 병사가 칸토우 평야로 출격해 오는 일은 우선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유우키 히데야스에게는 그렇게 속 편히 말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이 사태는 비통한 일이 아니면 안 되었다. 이에야스는 위기를 과장하고, 히데야스가 가진 젊은이의 비장감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에스기 가문은 켄신[謙信] 때 부터 천하를 떨치는 강호(强豪)이다. 카게카츠는 켄신이 남긴 법을 잘 지키고 있으며, 그 가로(家老) 나오에 야마시로노카미[直江 山城守]의 무략은 당대에 비견되는 이 없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인물로는 안되므로 고심 끝에 소장(少将)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맡아주겠는가?”

 하고 말했다. 히데야스는 사람이 달라지기라도 한 듯 기뻐하며 이 임무를 받아들였다. 이에야스는 거기에 전술상의 조언도 덧붙였다.

 “노림수는 이렇다”

 하고 이에야스는 짐짓 세세하게 말했다. 우에스기 세(勢)가 칸토우에 출격해 온다. 그것을 우츠노미야 성(城)에서 방어하며 싸우려고 생각하지 마라. 성을 버려라.

 “성을 버리는 것입니까?”

 “버리는 것이다”

 우츠노미야 성(城)은 평지에 있는 평성(平城)으로, 농성한다고 하여도 그다지 방어가 되지는 않는다. 그보다 야외에서 결전을 벌여라. 야외에 진을 치고 적이 토네가와 강[利根川]을 다 건너면 멀리 우회하여 적의 배후를 차단하려는 기세를 보여라. 적은 그것을 보고 당황해서는 아이즈[会津]로 돌아갈 것이다. – 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전술로써 이 이상 멋진 것은 없을 것이다. 우에스기 씨(氏)가 칸토우[関東]로 나왔을 경우, 그 너무도 장대한 원정이기에 후방에 대한 위험을 계속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약점을 자극하면 반드시 이긴다 – 는 것이었다.

 히데야스는 더욱 더 기뻐했다. 일단 거부했던 것이 얕은 생각이었다고 후회했다. 이번 전란(戰亂)에서 이보다 화려한 전선(戰線)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여담이지만, 이 시기 토쿠가와 군단 속에서 히데타다, 히데야스, 타다요시[忠吉]라는 이에야스의 세 아들에 대해서 정곡을 찌르듯이 비평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것에 대해 이에야스의 직속 신하[旗本] 중 하나인 나가이 나오키요[永井 直清]가 글로 써 남겼다. 이 미츠나리 거병이라는 소식이 오야마 진영에 도착하였을 때,

히데타다 님은 무언가 걱정하는 듯 하셨고, 미카와노카미(=히데야스) 님은 히죽히죽 웃으셨다. 사츠마노카미[薩摩守=타다요시] 님은 흥분하여 명성을 높일 기회라고 기뻐하셨다
라는 것이었다. 히데야스가 히죽히죽 하고 있었던 것은 운만 좋으면 이 난을 틈타 천하를 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적자 히데타다는 모처럼 이에야스에게 물려받을 예정인 천하를 미츠나리의 거병으로 인해 놓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했다 – 는 것이었다. 이 비평은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히데야스와 히데타다의 성격론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만큼 정곡을 꿰뚫고 있었으며, 이에야스도 그런 점을 염려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전투는 이에야스의 승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히데야스는 아무런 전공도 없었다. 우에스기 씨(氏)는 결국 아이즈[会津]에서 나오지 않았고, 히데야스는 우츠노미야 성(城)에서 머물기만 하면서 단 한발의 총탄을 쏠 기회조차도 없었다. 잉여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젊은이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제비만을 항상 뽑는 운명이 부여된 것 같았다.

 덧붙여 말하면 적자인 히데타다는 제2군을 이끌고 나카센도우[中仙道]를 나아가, 미노[美濃]에서 이에야스의 토우카이도우[東海道]를 거슬러 온 제1군과 합류할 예정이었지만, 시나노[信濃]에서 서군(西軍)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에게 방해 받아 결국 세키가하라의 일전에는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히데타다는 성실했지만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조금 기분 나쁜 것을 표시했을 뿐으로, 싸움이 끝난 후에도 히데타다에게서 세자의 자리를 뺏지 않았다. 그것을 들을 때마다 히데야스는 자신의 패기와 의욕이 덧없었다. 자신에게 나카센도우의 군을 이끌게 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이 일전으로 토요토미 가문은 일개 다이묘우의 위치로 전락하였고 이에야스는 천하를 얻었다. 다이묘우들을 재배치하고, 만들고, 폐하는 것이 행해졌을 때 히데야스를 북국(北国)에 봉했다.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현 후쿠이 시[福井市])를 거성(居城)으로 삼았고 에치젠[越前] 전체와 와카사[若狭], 시나노[信濃]의 일부를 합하여 75만석이라는 거대한 영지(領地)를 히데야스는 얻었다. 하지만 어느 곳이건 겨울에는 눈 때문에 중원으로 나올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눈의 감옥에 갇힌 것 같다”

 고 히데야스는 에도에서 파견되어 온 부속가로[付家老] 하세가와 우네메[長谷川 采女]에게 작은 목소리로 불만을 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도에서는 이에야스가 쇼우군[将軍]이 되어 토쿠가와 막부(幕府)를 성립시켰으며, 2년 후에 쇼우군 자리를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순푸[駿府]에 은거하였다.

 히데야스는 쇼우군의 형이면서 일개 다이묘우에 지나지 않았다. 성(姓)은 토쿠가와 가문의 별성(別姓)인 마츠다이라[松平]로 복귀하였지만, 세간에서는 유우키 소장[結城 少将]이라 통칭되며 조금 음습함을 띠운 존숭(尊崇)을 그에게 보냈다.

 소년일 즈음부터 그의 특징이었던 천부(天賦)의 위엄 – 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너무 예리했던 듯하지만 – 은 나이와 함께 더욱더 농후한 색채를 더했다.
 1604년 7월, 이에야스가 후시미[伏見]에 체재하고 있었을 때 히데야스는 자택에서 스모우[相撲] 대회를 열어 부친 이에야스도 초대했다. 자연히 여러 다이묘우나 이에야스의 직속 신하[旗本]들이 따라왔다. 곧이어 동과 서로 나뉜 스모우 꾼들이 14시합을 마친 후, 메인이벤트로 동서(東西)의 오오제키[大関[각주:3]
]인 '아라시옷테[嵐追手]'와 '쥰레이[順礼]' 양 선수가 모래판[土俵]에 오르게 되자 온 마당이 들끓었다.

 ‘아라시옷테’는 에치고[越後] 출신으로 쿄우토[京都]에서 활약하고 있으면서, 어느 상급 귀족[公卿]의 후원을 받으며 당대 천하제일이라 평판이 높았다.

 ‘쥰레이’는 카가[加賀] 출신으로 마에다 가문[前田家]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예전에 쿄우[京]의 키타노텐만[北野天満]에서 모금을 위해 개최된 스모우 대회에 나가 7일간 33번의 시합에서 연승하여 이 승리를 기리기 위해 ‘쥰레이[각주:4]’라고 개칭한 인물이었다.

 구경꾼들은 이 시합에 열광하며 다이묘우들도 모두 일어섰고 직속 신하들도 환호성을 질러,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이 때, 히데야스는 모래판 정면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섰을 뿐이었다. 한 마디도 안하고 서서는 천천히 마당을 둘러보았다. 단지 그랬을 뿐인데도 모래판 주위의 모든 건물과 온 마당이 깊은 산속에 있는 양 정적에 휩싸였다.
 이에야스는 몹시 놀라며 감탄했다. 후에,

오늘의 구경, 흥이 있었지만
히데야스의 위엄이 놀랍도다.
  고 주위에 말했다. 이 천부의 위엄은 전쟁터에서 쓰여야 했지만 결국 그 기회가 그를 찾아오지는 않았다.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두려워했다. 그를 에치젠 75만석에 봉한 뒤, 비와고 호수[琵琶湖] 동쪽 호숫가에 나가하마 성[長浜城]을 다시 세워, 대대로 토쿠가와 가문을 섬겨온 믿을 수 있는 나이토우 씨[内藤氏]에게 지키게 하였다. 만약 오오사카의 토요토미노 히데요리가 난이라도 일으킨다면, 그의 형뻘인 에치젠의 히데야스가 이에 호응할지도 모른다 – 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오우미[近江]의 나가하마는 에치젠과 쿄우[京] 근방을 연결하는 중간지점으로, 히데야스가 오오사카와 합체하기 위해 남하해 왔을 때 나가하마에서 이를 막는다 – 는 것이 목적이었다. 오오사카 성(城)의 히데요리와 에치젠의 히데야스가 한편이 되었을 경우 에도의 토쿠가와 히데타다가 거기에 대항할 수 있는지 어떤지가, 이에야스에게는 의문이었다.

 실제로 소문마저 돌았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가 히데야스의 저택에 방문하였을 때 술에 취해서는,

 “만약 천하에 큰일이라도 일어난다면, 소인는 당신과 함께 할 것입니다.”

 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 의미는 오오사카에서 토요토미노 히데요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만약 히데야스가 형제의 정으로 히데요리 편에 선다면, 이 마사노리는 아무 생각할 것 없이 당신과 함께 싸우겠다. 그것을 약속한다 – 는 것으로, 에도 정권이 가장 위험시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 위험한 시기도 공허해졌다. 오오사카의 토요토미 가문이 소위 겨울-여름의 싸움을 일으키기 이전인 1607년에 히데야스는 병이 들어 자기 영지(領地)에서 죽었다. 34살이었다. 사인은 악성 매독과 이상쇠약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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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야스는 살아있을 때 무언가를 일으킬 거라 여겨졌다. 그가 에도에 왔을 때, 토쿠가와 가문의 접대 태도는 도를 넘어설 정도로, 쇼우군[将軍] 히데타다는 시나가와[品川]까지 마중 나와, 시나가와에서 에도로 가는 도중 히데타다는 자신의 가마를 히데야스보다 뒤에 놓으려고 할 정도였다. 히데야스는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두 가마가 나란히 하여 가는 방식이 되었다. 히데타다의 이 과도한 마음씀씀이는 필시 이에야스에게서 나온 지시였을 것이다. 히데야스에 대한 예의를 과도하게 함으로서 그의 웅대한 기상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런 주도면밀한 배려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였다.

 히데야스가 태어나면서부터 그 생애는 공허하였다. 드라마틱한 성격을 가졌으면서도, 그 생애는 아무 드라마틱한 요소도 가지지 못했고,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았으며, 또한 일어나지도 않았다.

 무엇 때문에 자신은 태어났는가? – 히데야스가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 성[北ノ庄城]에서 마지막 숨을 들이켰을 때, 문득 그렇게 생각했음에 틀림이 없다.

=====================================================================了==================

  1. 약 7.8km [본문으로]
  2. 이 당시의 이에야스의 관직이 '나이다이진[内大臣]'으로 그 나이다이진을 중국식(唐名)으로 나이후[内府]라 불렀다. [본문으로]
  3. 지금과 달리 최고위는 요코즈나[横綱]가 아닌 오오제키였다. [본문으로]
  4. 성지'순례’의 그 ‘순례’의 일본 발음이 '쥰레이'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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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cogwtw.tistory.com BlogIcon NOA 2008.07.28 22: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는김에 1편부터 차례대로 재밌게 잘읽었습니다.
    찾아보니 교보에는 들여와있는 책 같아서 구입해볼까합니다. 가격도 싼것 같고^^;

    4번째 문단에서 "저 온화하기만" 에서 "그"가 빠진게 아닌가 싶습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9 15: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엔화가 쌀 때 사서, 우리 나라 도서보다 싼 가격에 구입했습죠.

    에?? 사투리? 젤나가의 피조물?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9 19: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저의 의미로 사용하신게 아니었나 보군요;; 실례했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7.29 1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편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9 2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NOA님//확실히 NOA님이 하시는 말슴대로 하는 편이 부드럽습니다. 다만 될 수 있으면 아주 어색하지 않는 한 원문을 따르려 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원문은 [人気があのおだやかなだけが取柄の秀忠をしのぐ・・・]입니다.

    맹꽁이서당님//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29 22: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어이 갔군요. (허허..-_-;) 히데야스가 가담한 오사카의 진이라.. 상당히 재밌었을 것도 같습니다. -假定의 문제지만..-나이토 박살내고 남진하는 히데야스에.. 카토도 후쿠시마도 건재할때니 시마즈까지 가담한다면 적어도 큐슈의 도쿠가와 세력은 전멸이었겠군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30 1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뒤에 있던 마에다와 아사노까지 오오사카에 섰다면 파괴력은 정말 발군이었겠다고 생각합니다.
    오오사카 전투에서 오오사카 측의 약점은 거물이 없었다는 점도 하나라고 보는데, 히데야스가 있었다면 오오사카 측에 서는 가문도 생기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큐우슈우는 (토쿠가와에게) 조금 위험한 애들 모아 놓은 곳이라, 말씀대로 되었을지도 모르죠.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7.31 07: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엇을 위한 인생인가 하니 이런 인생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한 인생이니라- 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31 2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연... 그럴 수도 있군요. 저러한 인생도 있다는 것...

五.

 이에야스[家康]는 그 흐름을 조종했다. 여기서 신경 쓰이는 것은 히데야스[秀康]의 존재였다.
 - 그 분은 순진하시다. 길을 잘못 들지 않게 잘 보좌하라.
 며 히데야스의 가로(家老)들을 불러 이에야스는 훈계하였다. 히데야스가 순진하게 토요토미 가문[豊臣家] 문제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 그 중 어느 한 쪽 진영에 옹립되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이에야스의 숨겨두었던 의도가 무너질 수 가능성이 높았다.

 파벌은 두 개였다.
 이에야스를 정권 찬탈의 의도를 가진 야심가로 규탄하고 있는 것이 히데요시(秀吉)의 정무 보좌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그 무리들로, 그들은 히데요리[秀頼]의 생모 요도도노[淀殿]를 자기 파벌의 보호자로 두고 있었다.
 이 이시다 파벌에 대항하고 있는 것이 야전파(野戰派)라고 할 수 있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그의 친구들로, 그 파벌의 중심에는 히데요시의 정실(正室)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가 자리잡고 있다.

 두 파벌 다 히데요시가 키운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토요토미 정권이 확립되면서부터 이시다파는 문관(文官)으로 정권의 중추에 있었고, 카토우파는 야전 종사자가 되어 중추에서 밀려났다. 카토우 파는 자신들을 일이 있을 때마다 곤경에 빠뜨려온 것이 히데요시 측근인 이시다파였다고 보고, 히데요시가 죽자마자,
 - 이제는 전하 때문에 조심하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시다 놈들을 죽이고 그 고기를 씹어 보자.
 고 울부짖으며 각각 오오사카[大坂)]의 자신들 저택을 무장하고, 공공연히 대립하며, 시가전까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이에야스는 이 토요토미 가문의 내분(內紛)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때로는 토요토미 가문 필두 대로(大老)로서 두 파벌을 중재하였고, 때로는 은근히 부추겼다. 이에야스가 은밀히 밀고 있었던 것은 키타노만도코로와 카토우 키요마사의 파벌이었다. 이에야스는 카토우파에 꼽사리 껴, 이 파벌이 이시다파를 향해서 뿜어대고 있는 증오의 에너지에 풀무질하고 두들겨 단단히 해서 만든 칼로 정권 교체의 쿠데타를 완성시키고자 하였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칸토우 군단(関東 軍團)을 가지고 토요토미 가문을 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토요토미 가문의 은혜를 입은 다이묘우들끼리 내부에서 싸우는 형식을 그대로 유지시키며, 그 격화(激化)의 마지막 단계에 일대 결전을 연출하여, 그제서야 처음으로 쿠데타를 전개한다 – 는 구상이었다. 이 구상대로 이에야스는 착실히 돌을 깔았으며, 그렇게 깐 돌 한수 한수가 재미있을 정도로 성공하였다.

 ‘히데야스는 그냥 풀어놓아서는 안 된다. 무슨 짓을 해버릴 지 알 수가 없다’
 고 이에야스가 생각한 것은 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히데야스를 자유로이 풀어놓으면 오오사카로 내려가 히데요리를 따르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었다. 히데요리를 따르게 되면 자연히 이시다파의 진영에 들어갈 것이다.

 이에야스는 자식인 히데야스에게도 손을 썼다. 1599년 3월, 이에야스는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를 불러,

 “나를 경호해 주길 바란다”

 고 말했다. 이에야스는 사정을 설명했다. 정세가 악화되어 이시다 측은 이에야스에게 위해를 가하고자 끊임없이 밀모를 꾸미고 있는 듯하다 – 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며 히데야스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쿄우토[京都] 근방에는 토쿠가와 가문의 병사가 소수밖에 없었다. 내 몸 지키기가 힘들구나 – 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적자(嫡子)인 히데타다[秀忠]는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칸토우[関東]로 돌아가 에도[江戸]에서 출동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쿄우[京]-오오사카[大坂]에는 토쿠가와의 군사가 적다. 츄우나곤[中納言=히데타다]을 대신하여 나를 도와주길 바란다”

 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이에야스는 그렇게 부탁함으로써 히데야스의 의협심을 자극시키고자 하였다. 바라던 대로 히데야스는 감격했다. 이 진짜 아비에게 이렇게 부탁 받은 것은 태어나서 이번이 처음이었으며, 히데야스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눈물이 나오려 했다.

 “불초한 소생이지만 분골쇄신하겠사옵니다”

 고 히데야스는 거의 외치듯이 소리를 질렀으며, 이때 처음으로 이에야스의 자식이 된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 후의 일상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즉 이에야스의 저택, 숙소에 항상 처박혀 있을 뿐이었다. 외출도 못 하였고,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다.
 ‘한층 맘이 놓이는군’
 하고 이에야스는 생각했다. 이렇게 새장 속에만 넣어두면, 다른 야심가의 희생물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1599년 윤3월 3일.
 히데요시가 죽은 뒤, 토요토미 가문에서 중재 세력이었던, 대로 차석(大老 次席)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오오사카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죽었다. 카토우 키요마사들은 그로 인해 폭동의 자유를 얻었다. 토시이에가 죽은 그 3일 뒤의 밤, 이시다 미츠나리를 오오사카에서 죽이고자 시가전을 계획하였다. 미츠나리는 사전에 알아차리고, 홀홀 단신으로 후시미[伏見]로 도망쳤다. 카토우들은 그를 쫓았다. 카토우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였다.

 미츠나리는 도망갈 곳이 마땅치 않자 대담하게도 후시미의 이에야스 저택으로 도망 와 보호를 청했다. 이에야스는 미츠나리에게 있어서 쓰러뜨려 마땅한 숙적이었으며, 더구나 쫓아오는 일곱 장수들의 숨겨진 보호자였고, 그 장막 건너편의 수괴였다. 물론 그것을 미츠나리는 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에 그 숨겨진 사정을 반대로 이용하였다. 이에야스는 자신을 죽일 리 없다 – 고 보고 있었다. 바로 그러했다. 이에야스는 그를 보호하고 죽이지 않았다.

 이에야스의 부하들은,
 - 이 기회에 미츠나리를 죽이십시오.
 하고 헌책하는 자도 많았다. 계속 탄핵을 받고 있는 미츠나리를 죽이고, 일곱 장수의 호의를 얻는 편이 좋다 – 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들을 생각도 안 했다. 단 한 사람, 모신(謀臣)인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만은 이에야스와 같은 의견이었다. 미츠나리를 보호하고 살려두어, 그의 거성(居城)인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으로 풀어준다. 후일 그는 반드시 책모(策謀)하고 다이묘우들을 긁어 모아 이에야스를 물리치기 위한 병사를 일으킬 것이다. 그때야말로 쿠데타가 완성될 때이며, 그때까지는 미츠나리를 살려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야스는 후시미까지 쫓아온 일곱 장수를 설득했다.

 “돌아가신 전하가 저 세상으로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또한 히데요리 공(公)의 천하는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후시미에서 일을 낸다면 불충 이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오. 만약 그래도 여전히 지부쇼우유우[冶部少輔=미츠나리]를 죽이고자 하신다면, 이 이에야스가 상대를 하겠는데, 어떠신지?”

 하고 반 공갈을 하였다. 모두 이에야스가 그렇게까지 말을 한다면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야스는 그날 밤 미츠나리를 자택에서 머물게 하고, 다음날 아침 그를 보내고자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도중에 키요마사들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지 않는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에야스의 배려는 세심했다.

 “소장(少将=히데야스), 당신이 세타[瀬田]의 다리까지 보내드리시게”

 하고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불러 미츠나리의 경호를 명했다. 히데야스는 알았다고 하며 만약을 위해 질문을 하였다.

 “만약 도중에 키요마사들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싸워라”

 하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이 한마디가 히데야스를 흥분시켰다. 이렇게까지 뛰어난 기상과 재기(才氣)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히데야스는 지금까지 한번도 전투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小田原] 정벌에도 종군하였으며, 조선침략에 있어서도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까지 따라는 갔었다. 그러나 야전에 나가지 않았다. 히데야스의 기량은 여태까지 실전에서 시험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안심하고 싸우라고 하였다. 전투가 일어날 리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에야스의 아들인 히데야스가 경호하고 있는 것이다. 키요마사들이 히데야스의 경호대를 공격하는 것은 이에야스에게 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할 리가 없다 – 고 보고 있었다.

 히데야스에게 있어서는 불행하게 도중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히데야스는 미츠나리와 말머리를 함께하며 다이고 가도[醍醐 街道]를 나아가며, 반은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과 함께 미츠나리를 염려하며 말했다.

 “목숨을 바꿔서라도 공을 지키겠소이다”

 하고 히데야스는 볼에 젊디젊은 피로 붉게 물들이게 하며 말했다. 미츠나리는 이 말을 오해했다.
 ‘역시 이 분은 다르다. 히데요리님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계실 것이다. 이에야스나 그 외의 사람들과는 별개의 감정을 토요토미 가문에 대해 가지고 있다. 아군이 되어주지는 않을까?’
 하고 자신의 의도에 좋은 쪽으로만 해석했다. 곧이어 세타의 물길에 걸려있는 세타 대교[瀬田 大橋]의 서편까지 왔다. 동쪽으로 이 다리를 건너면
오우미[近江] 평야가 펼쳐져 있다. 북 오우미의 산야는 미츠나리의 영지(領地)였다.

 “그럼 이제는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히데야스가 정중하게 말했다. 미츠나리도 정중하게 예를 올리며, 마침 몸에 지니고 있던 마사무네[正宗][각주:1]의 단도(短刀)를 히데야스에게 선물하였다. 이 즈음 미츠나리가 소유하고 있던 이 단도의 명성은 온 천하에 울리고 있었기에, 그런 것을 선물했다는 것은 얼마나 깊은 감사와 호의를 나타내고자 하였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단도는 후세, 이시다 마사무네[石田正宗]라 칭해지며 전해 내려오고 있다.

  1. 여기서 ‘마사무네’는 칼 상표의 이름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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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7.20 1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생부터 불행하더니 자신의 힘을 펼칠 수도 없고 친부한테는 계속 이용당하네요
    시로유메님 말씀처럼 역시 인생은 운!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0 1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행한 히데야스를, 시바 선생은 더욱 극대화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20 17: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화도 재밌게 봤습니다. 여기서 이시다가 유우키 히데야스에게 칼을 주는군요..

    더불어, 무려 나츠코미때(;) 상경하시어 오덕질 할 시간 쪼개시어 기간한청 이시다 마사무네 공개판을 찍어오신 이름 없는 일본분께 박수를(ㅎㄷㄷ)

    どうやら刀の受け傷らしく、ここから「石田切込正宗」の号がついたらしいです。
    切込라게 칼에 난 금을 가리키는 말로 알고 있는데 아무튼 이러한 이명이 있군요. 덕택에 국보는 아니고 중요문화재라지만, 왠지 몇몇 기스가 더 칼로서의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ㅎㅎ)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1 08: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봐주셔서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

    나츠코니...라는 것이 오덕후와 관계가 있는 것인가 보군요. 정확하게는 어떤 것인가요?
    검색해 보아도, 그냥 참가했다는 글들만 보여서...

    칼은 칼등으로 막는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칼 등에 상처난 것 또한 좋더군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25 2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여름 코믹마켓(만화 동인지등을 파는 큰 시장..이랄까나요)이요. 그걸 줄여서 나츠코미(夏コミ)라고 하는 듯 하더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6 1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그렇게 줄인 것이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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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우부(刑部)는 두려움에 참지 못하고 성으로 가, 대로(大老) 집무실에서 히데이에를 배알(拜謁)하였다. 집무실 앞에는 마당이 있었다. 마당에 있는 연못가에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싸리가 피어있었다.

 저것은 말이지 교우부. 알고 있나? 저건 미야기노[宮城野]의 싸리다

 라고 히데이에는 마당으로 시선을 향한 채 말하였다. 히데이에는 싸리를 좋아하여 오오사카[大坂]에 있는 저택 안에도, 후시미[伏見]에 있는 저택 안에 여러가지 싸리를 키우게 하고 있었다. ‘미야기노[宮城野]센다이[仙台]의 동쪽 교외에서 해안까지의 들판으로 가을에는 싸리, 도라지, 마타리가 흐드러지게 피며, 방울벌레나 귀뚜라미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곳이기에 옛날부터 와카[和歌]의 명소(名所)로 알려져 있다. 이 싸리는 오우슈우[州]다테 마사무네[伊達 正宗]가 히데요시에게 받친 것이라고 한다. 히데이에는 아쉽게도 오우슈우 정벌[奥州征伐]에 참가하질 못하였기에 이 들판을 본 적이 없었지만, 이 들판을 상상하며 시를 만든 적도 있으며 코카[古歌]도 암송하곤 하였다. 여전히 마당으로 시선을 향한 채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여러 마음들이 머무는 미야기노의 꽃과 곤충의 노래들
さまざまに心ぞとどむ宮城野の花のいろいろ虫の声々
라는 시가 튀어나오자, 그때까지 고개를 숙이고만 있던 교우부는 결국 참지 못하여,

 황송하옵니다만……”

 하고 고개를 들어 가문 내 소동(騷動)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교우부는 히데이에에게 자극을 줄 필요를 느껴,

 요전에 병으로 돌아가신 오사후네 키이노카미[長船 紀伊守]님은 병때문이 아닙니다. 독살(毒殺) 당한 것입니다. 독을 탄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역시 히데이에는 놀랐다. 누가 독을 탔냐고 묻자, 본거지의 필두 가로(筆頭 家老)인 우키타 사쿄우노스케[宇喜多  左京亮 히데이에의 숙부 타다이에[忠家]의 아들. 후에 사카자키 데와노카미 나오모리[坂崎 出羽守 直盛]]의 소행이라고 교우부는 말했다. 과연…… 사쿄우노스케의 성격을 보면 뭐든 화를 잘 내며, 생각이 없고 더구나 냉혹할 때도 있기에 독을 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본거지에 있으면서 그런 것이 가능할까? 거기에 무엇보다 증거가 없었다.

 교우부. 경솔한 말을 하지 말거라

 아닙니다. 경솔한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사쿄우노스케 무리들이 전투 준비를 마치고 산요우 가도[山陽街道]를 이용하여 소리 높이며 올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사쿄우노스케 무리라는 것은, 사쿄우노스케를 필두로 토가와 히고노카미[川 肥後守], 오카 에치젠노카미[岡 越前守 전편에 부산에서 죽었다는 부젠노카미의 아들), 하나부사 시마노카미[花房 志摩守]와 하나부사 스케노효우에[花房 助兵衛]를 지칭하며, 스케노효우에를 제외하곤 다들 식록(食祿) 5만석 이상인 거물들이었다. 만약 소동으로 발전한다면, 카미가타[上方]주재(駐在)하는 가신단과 본거지에 머물던 가신단 들간의 전투라는 다른 가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사태가 될 것이다.

 하지만 히데이에는 낙관하였다.

 아카시 카몬[明石 掃部]과 잘 이야기 해보게

 라고 말하였다. 아카시 카몬은 이름을 타케노리[全登]라 하며 전투의 명인이라 일컬어지는 인물로, 오사후네가 죽은 다음부터 카미가타 파()의 필두 가로를 맡고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은 사변(事變)이 되었다.
 
아카시 카몬이 중재에 나섰지만 쌍방을 설득시키지 못하였고, 우선 구() 오사후네파는 후시미[伏見] 저택에서 농성. 본거지파는 오오사카[大坂]로 진출해서 소규모 시가전을 펼쳐 비젠지마[備前島]의 우키타 가문의 오오사카 저택을 점령. 요도가와[淀川]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오사후네파와 본거지파간에 무장대치 상태가 되었다.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히데요시 생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보다가 놔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 히데이에와는 친밀한 사이인 오오타니 교우부쇼우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少輔 吉継]였다. 요시츠구는,

 실례가 안 된다면 중재에 나서고 싶은데

 라고 히데이에에게 말하였다. 히데이에는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던 때이기도 하여, 창피했지만 자기 가문 내분 처리를 다른 다이묘우[大名]에게 부탁하기로 하였다.

 말 잘했네. 꼭 좀 부탁하네

 라며 요시츠구에게 부탁하였다. 실은 마음속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신뢰할 수 있는 남자였다.
 
츠루가[
敦賀] 5만석의 작은 다이묘우[大名]이기는 했지만,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당시부터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행정을 담당하며 그 수완을 높게 평가 받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히데요시가 곁에 두고 키웠다. 히데요시의 바램대로 승진을 거듭하였고 시원스런 성격과 뛰어난 무략(武略)도 있었기에, 히데요시가 어렸을 때부터 키운 다이묘우[大名]들 중에서도 출중한 편에 속한다고 평가 받았다.

 한센병을 앓아 이미 얼굴이 무너져 항상 얼굴을 하얀 천으로 감싸고 양 눈만을 내 놓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토요토미 가의 파벌에 있어서는 출신이나 직무상의 교유관계로 인하여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연이 깊었다. 하지만 미츠나리처럼 파벌 활동은 하지 않고, 초연(超然)하였다.

 중재하기 위해서는 에도 나이후[府][각주:1]를 내세울 수밖에 없다'
 
고 생각하였다.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가문의 필두 대로(大老)이고 히데요리를 대리하여 정무를 맡고 있으며, 후시미[伏見]에서 정사(政事)를 살피고 있었다. 그 이에야스의 말이라고 하면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가로들도 말하는 것을 들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야스 정도되는 인물이 일개 다이묘우의 가신단 다툼에 개입하기에는 신분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요시츠구는 이에야스 휘하의 다이묘우를 꼬시고자 하였다. 토쿠가와 휘하의 다이묘우라고 하면 첫손에 꼽히는 것이 사카키바라 야스마사[原 康政]였다. 야스마사는 이에야스가 아직 미카와[三河]에 있던 시대 때부터의 후다이[譜代], 칸토우[東]에 있는 이에야스의 영지 250만석 중 코우즈케[上野] 타테바야시[館林]에 10만석을 하사 받고 있었다. 관위(官位)는 종오위하(從五位下) 시키부다유우[式部大輔]였다.

 곧바로 야스마사를 방문하였다.

 졸자(拙者)가 도움이 된다면야 얼마든지

 라며 찬성하였다. 그 후 함께 분주히 뛰어다녔다. 쌍방의 대표를 후시미[伏見]에 있는 사카키바라 저택으로 부르거나 해서 교섭에 임하였지만 쉽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시츠구는 포기하지 않았다. 요시츠구 에게 있어서는 '히데요리 공[公]의 천하가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디려는 이 때에' 이러한 소동이 나중에 대란(大亂)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이 둘이 함께 힘쓰고 있다는 소문이 이에야스의 귀에 들어갔다.

 이외로군. 우리 집의 코헤이타[小平太 = 야스마사의 통칭]까지 도와주고 있다는 것인가?”

 이에야스는 떨떠름했다.
 
이 남자는 난()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소동이 천하 대란으로 이어졌을 때야말로, '히데요리님을 위해서 가만둘 수 없다'는 명목으로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을 동원하여 그 한 쪽을 토벌하고, 그 토벌군의 기세로 막부(幕府)를 열어버린다 거나, 아니면 우키타 가문의 자멸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에야스가 보건대 장래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일 것이다. 미츠나리는 기껏해야 20만석 정도의 다이묘우이기 때문에 자신의 편에 서줄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을 꼬시지 않으면 안되었다. 필시 주된 전력(戰力)으로 우키타 히데이에를 꼬실 것이다. 히데이에는 히데요리를 위해서라면 용감히 참여할 것임에 틀림없다. 어떤 일이 있건 이에야스에게는 적이 될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의 가문이 자멸하려 하고 있는 것은 이에야스에게는 만족할 만한 일이였다. 그렇기에 그것을 일부러 중재하려 하는 바보도 아니었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우직할 정도의 기질을 가진 소박한 사나이로 전투를 경험한 횟수는 많았지만, 그러나 천하의 정치에 관여하거나 미묘한 정세의 움직임을 살피는 듯한 능력은 전혀 없었다.
 
이에야스로서는 지금같은 경우 야스마사를 훈계(訓戒)해야만 했다. 그러나 훈계하는 이상 이에야스는 자신의 은밀한 의도나 정략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되지만, 지금은 그것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야스는 이 때 주위의 부하들과 잡담을 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이외로군. 우리 집의~'라고 말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코헤이타 말이다. 생각해 봐라. 이미 시치노스케[七之助]가 올라와 있지 않은가?”

 시치노스케라는 것은 히라이와 카즈에노카미 치카요시[平岩 主計頭 親吉]를 말하며, 이에야스 휘하 다이묘우 중 한 사람으로서 코우즈케 우마야바시 성[城] 3 3천석을 영유(領有)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렇게 칸토우[東]의 휘하 다이묘우를 교대로 후시미[伏見]로 올라오게 하고 있었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이미 후시미 주재(駐在) 기간이 지나 있어, 히라이와와 교대하고 어서 귀국해야만 하는데 우키타 가 내분 중재로 바빠 그럴 기색조차 없었다.

 정말 좆병진에도 정도가 있다. 저건 필시 사례금(謝禮金) 때문일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중재가 성립되면 우키타 가문에서 사례로 돈이 나온다. 이에야스는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물론 당연히 이에야스도 야스마사를 그런 남자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이럴 경우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이에야스의 말은 곧바로 야스마사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야스마사는 크게 화를 내며 곧바로 칸토우[東]의 본거지로 돌아갈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에야스는 그걸로 족했다. 이에야스는 태어날 때부터 정략가(政略家)인지, 자신의 부하를 움직일 때도 항상 이렇게 속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많았고, 거의 버릇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었다.

 역시 야스마사는 화를 내었다.

 날 그런 놈으로 생각하고 계신 건가!!”

 라고 친한 동료를 붙잡고는 이에야스에 대한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고, 그 뒤 이에야스가 기대하던 대로 곧바로 부하들을 이끌고 칸토우로 돌아가 버렸다.

 야스마사가 일을 내팽개쳤기 교섭이 부서졌다. 더 이상 요시츠구 혼자서는 완고한 비젠[備前] 사람들을 달래며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결국 그도 손을 떼었다.

 히데이에는 사태의 정면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오오사카 비젠시마 저택에 농성 중인 우키타 사쿄우노스케의 무리들은 후시미로 올라와서는 히데이에에게 강하게 요구했다.

 우리에게 나카무라 교우부를 건네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사쿄우노스케의 말투만은 공손하였지만, 태도는 거만하였고 이렇게 된 이상 주군이라고 하여도 칼을 들고 응수할 수도 있다는 기세였다. 후에 이 인물은 '사카자키 데와노카미'라 이름을 바꾸고 이에야스의 부하 다이묘우[大名]가 되는데 전설의 '센히메() 소동'[각주:2]뿐만 아니라, 여러 번 자기의 뜻대로만 하기 위해 소동을 일으켜 결국에는 자멸한다. 말하자면 성격적으로 '전문 소동꾼'이기에, 지금 같은 경우에 히데이에에게 조금 정치력이 있다고 하여도 부드럽게 처리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히데이에는 화를 내었다.

 교우부도 내 부하이다. 그를 버리고 너에게 건넨다면 가문 내에서 내 면목이 서질 않는다.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며 히데이에도 역시 눈에 핏발을 세우며 이 미친 사람 같은 가로를 달래려고 하였지만, 사쿄우노스케는 흥분만 할 뿐 손댈 수가 없을 정도였다. 후시미[伏見]로 왔을 때부터 이 미친 듯이 시끄러운 인간은 외모부터 특이하게 하고 나타났다. 머리를 빡빡 밀고서는,

 우리의 바램이 통할 때까지 머리를 기르지 않겠다!”

 며 그것을 자기들 무리에게도 강요하였다.

 다음 날도 사쿄우노스케는 왔다. 하지만 이 날 히데이에는 기분이 좋았다. 소동의 원인인 나카무라 교우부를 타일러 돈을 주어서는 지난 밤에 은밀히 카가[加賀]로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교우부는 어딘가로 쫓아보냈다

 고 히데이에는 말하였다. 사쿄우노스케는 의심했다.

 거짓말이죠?”

 라며 빤히 쳐다보았다. 히데이에는 그 건방진 태도에 화가 날뻔했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사쿄우노스케는 우키타 가문 10명의 가로 중 7명을 자신의 무리에 끌어들여 이끌고 있는 이상, 잘못하면 가문이 붕괴될 위험이 있었다. 이렇게 참고 있는 것만이 히데이에가 가진 쪼그만 정치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이 집을 자네 발로 직접 찾아 다니시게. 그런데 만약 찾아도 교우부가 없다면 자네의 그 태도는 가만 두지 않겠네

 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그 날은 어쩔 수 없이 사쿄우노스케 들은 물러나, 오오사카의 비젠시마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사쿄우노스케와 내통하고 있던 자가 있어, 교우부에게 돈까지 쥐어주며 보냈다는 것을 알렸다. 사쿄우노스케는 크게 화를 내며,

 메야! 주군이 그렇게까지 교우부를 두둔하신다면야 주군은 적이다!”

 라고 말하며, 비젠시마 저택의 요소요소에 전루(戰樓)를 세우고 길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였으며 밤에는 화톳불을 피워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당연히 이 상태로 놔두면 토요토미 정권의 수도(首都)라고 할 수 있는 오오사카에서 시가전이 벌이질 것이다. 히데요리를 대신하여 정무를 맡고 있던 이에야스도 이대로 놔둘 수는 없게 되어, 결국 몸을 움직여 대로(大老)로서 판결을 내렸다. 원래대로라면 주인에게 대항하려 한 가로들은 당연히 배를 갈라야 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

 다른 가문으로 보내 근신을 명한 것이다. 더구나 그들을 자신의 저택으로 불러, 그쪽 심정은 잘 알고 있다. 틈을 보아서 풀어주겠다는 식의 말을, 부하의 입으로 전하게 하였다. 더구나 다른 가문에서 근신 중인 기간 중에 은밀히 여러가지를 보내와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이에야스에게 감사하였고 충성을 맹세했다. 벌을 받은 것은 우키타 사쿄우노스케, 토가와 히고노카미, 하나부사 시마노카미, 하나부사 스케노효우에. 이들은 후에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전부 이에야스 쪽에 붙었고, 사쿄우노스케와 히고노카미는 다이묘우[大名]가 되었으며, 시마노카미는 6000석의 상급 모토[旗本], 스케노효우에도 이에야스를 직접 모시는 자리에 앉게 된다.

 그 이상으로, 이 처리는 우키타 가문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그들이 떠났기 때문에 그들의 부하들도 떠나, 이 때문에 우키타 가의 동원 병력은 30% 정도 저하되었다.

 지부쇼우유우[冶部少輔=이시다 미츠나리]가 왜 가만히 있었는지……”

 라고 이에야스는 나중에 이 사건을 떠올리며 술회하였다. 자기가 미츠나리였다면 히데이에에게 조언을 하여 우키타 가문의 내분을 어떻게든 조용히 시키고, 어쨌든 저렇게 죄인이 나오지 않게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우키타 가문의 머릿수가 적어진 결과 전쟁터에서의 움직임이 그만큼 둔해진 것이었는데, 미츠나리는 그때 거기까지 내다보질 못했다. 다른 가문의 작은 소란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고 아무런 손도 쓰지 않았다. 그런 것을 보아도 미츠나리는 원래부터 내 적이 될만한 인물은 아니다. 무략(武略)이 없다……고.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에도[江戸]는 이에야스의 본거지가 있던 곳. 나이후[内府]는 이에야스의 관직 나이다이진[内大臣]을 중국식으로 부른 것. [본문으로]
  2.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센히메는 이에야스의 손녀이며,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부인이다. 오오사카 성이 함락될 때, 이에야스는 그녀를 불쌍히 여겨 '누가 그녀를 구해올 자는 없는가? 바라는 것은 모두 들어 주겠다' 고 하여 사카자키(우키타 사쿄우노스케)가 이에 나섰다. 그는 무너지는 대들보로 인하여 얼굴에 화상을 입으면서 구했고, 구한 뒤 자신의 마누라로 삼게 해달라고 하였지만, 이미 얼굴이 화상으로 인하여 보기 흉하였기에, 센히메는 거절하고, 혼다 타다가츠의 손자이며 미남으로 유명한 혼다 타다토키[本多 忠刻]에게 시집가게 된다. 이에 분노한 사카자키는 시집을 가는 행렬의 가마를 탈취하려 하였지만, 미리 적발되어 1만명의 병사들이 저택을 포위하자 자살했다고 한다......그러나 실은 센히메는 토요토미 측에서 이에야스로 보내졌으며, 중간에 호위를 맡은 것이 사카자키였다고 한다. 시집 행렬 가마 탈취는, 이에야스가 센히메를 쿄우토[京都]의 쿠게[公家] 가문으로 시집 보내는 중매를 사카자키에게 의뢰하여 실행 단계에 이르렀을 때, 센히메가 혼다 타다토키에게 시집가는 것을 알고, 막부가 자기을 무시했다는 것과 상대편 쿠게[公家]에 대한 면목을 잃어 탈취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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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19 2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야 미츠나리가 아무 관심도 안 기울였다니...

    오오타니 요시츠구가 아깝군요_-_;;; 그 애송이 중녀석(본문 표현대로라면;)에게가 아니라, 오오타니 요시츠구에게57만석을 줘놨더라면 어땠을까 궁금해 지는데요(...)

    P.S. 예나 지금이나 얼굴에 관한 비극은 참... 센히메 소동도 그렇지만, 역시 잘 생기고 볼일(-_-;?!)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9 2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사람은 이런 해석을 하더군요.
    이시다 미츠나리는 어디까지나 히데요시의 유언을 존중하여, 이에야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고.
    그렇기에 주제넘게 나서지 않았다는 해석을 하더군요.

    떠도는 말로는 히데요시가 요시츠구에게 100만명을 맡기고의 그가 어떻게 지휘를 하는지 보고 싶다고 했다던데...
    그렇기엔 너무 다방면으로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아니라면 세키가하라 때의 너무 선명한 죽음에 후세 사람들이 [判官贔屓]해서 과대 평가를 했을 수도 있고)..... 이 인물은 현재의 평가와 당시의 능력에 대해서는 의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ps;초반만 그렇죠? :) 뭐 0에서 1로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다곤 합니다만, 경험 상 1까지만 가면 얼굴은 그다지 소용 없더군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20 1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키가하라에서 시종일관 치밀한 예측으로 싸우다 가장 멋지게 전사한(;)인물이기에, (시마 사콘은 합전 시작 얼마 안 되서 배에 구멍이 난 뒤로는 전장이탈이었고-_-;) 그런 평이 남지 않았나 싶더군요. 혁신에서 몇 안되는 캐러에게 있는 전용스킬 '강습'을 넣어 준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듯 싶고..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20 14: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그 짧은 시간은 굉장했다고 생각합니다. 요시츠구는 미담만 전해져 내려 오는 것이 왠지 전 이상하더군요(제가 모르는 추문이 있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