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카카게[隆景]가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의 후계자가 된 데에는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모략이라는 덫이 작용하고 있다.

 모우리 가문[毛利家] 발전을 위해서는 세토 내해[瀬戸内海] 연안의 호족 코바야카와 가문을 빼앗는 것이 긴급한 과제였던 것이다.
 코바야카와 가문은 당시 누타[沼田]와 타케하라[竹原]라는 두 가문으로 나뉘어져
[각주:1] 있었다. 그 중 타케하라 가문의 당주인 오키카게[興景]가 병으로 죽었다. 운 좋게 모토나리의 조카가 죽은 오키카게의 부인이었다. 곧바로 모토나리는 당시 9살인 토쿠쥬마루[徳寿丸=후의 타카카게]를 후계자로 밀어 넣었다.
 그 직후 이번엔 누타 가문에서 당주 마사히라[正平]가 죽었고 거기에 그의 아들인 마타츠루마루[又鶴丸]에게 눈이 머는 불행이 찾아왔다. 모토나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처음부터 누타 가문의 중신 노미 씨[乃美氏]를 꼬셔놓은 상태에서 은밀히 모략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모토나리는 강제로 누타 가문을 타케하라 가문에 합병시키고는 그 당주에 타카카게를 앉혔다. 더불어 합병 반대파인 누타 가문의 가신들 하나하나를 숙청한 것이었다. 누가 보아도 일련의 당주 사망사건에는 모토나리의 검은 모략의 냄새가 풍기고 있다.

 어쨌든 이런 어두운 모략에 의해 탄생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이지만, 모우리 가문 발전의 방향타를 쥐고서는 전란의 세상에서 그 지모를 아낌없이 발휘하여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継], 시마 사콘[島 左近] 등과 더불어 센고쿠[戦国]의 삼대지장 중 한 명으로 손꼽히게 된다.

 타카카게가 죽었을 때,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는,
 "일본에서 지혜로운 사람 한 명이 사라졌다. 이 인물은 모우리 가문이라는 거대한 배를 조종하는 뱃사공과 같았다…"
 하고 회상하였다.

 또한 이런 이야기가 있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상급귀족[公卿]인 키쿠테이 하루스에[菊亭 晴季]와 바둑을 두다가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자 자기도 모르게
 “이건 타카카게라도 풀 수 없겠지……”
 라고 혼잣말을 한 것이다. 옆에서 관전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도
 “정말 그렇겠군요”
 라며 끄덕였다고 한다.

 거슬러 올라가 소년시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타카카게가 형인
모토하루[元春]와 각각 아이들을 데리고 편을 갈라 눈싸움을 하였을 때, 처음엔 모토하루의 돌격에 패하였지만, 두 번째는 부하를 몇 명인가 복병으로 숨겨 놓아 모토하루의 허를 찔러 승리하였다고 한다.

 타카카게가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선 것은 1547년 그의 나이 15살 때에 칸나베 성[神辺城]공략전이었고, 1555년 이츠쿠시마 전투[厳島合戦]에서는 일찍부터 후년 천하 삼대지장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은밀한 상륙작전에는 아무래도 세토 내해의 수군인 노지마[能島], 쿠루시마[来島] 수군의 응원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들과 교섭하여 현실화시킨 것이 타카카게인 것이다.

 이러한 외교적 수완뿐만이 아니라 실전에서도 민첩한 기동성을 보여주었다. 별동대를 이끌고 대담하게도 적의 정면인 이츠쿠시마 신사(神社) 오오토리이[大鳥居] 가까이에 배를 대었다.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의 군사들은 설마 적측인 모우리의 군사들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그냥 수상히 여기고 있자, ‘큐우슈우(九州)에서 원군으로 온 수군이다’[각주:2]고 속이고는, 적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상륙하여 스에 군의 본진 토우노오카[塔ノ岡]의 허리쯤에 진영을 세웠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의 결전에서는 스에 군의 배후에서 습격한 부친 모토나리 등의 주력과 호응하여 스에 군을 협공하였다. 타카카게 자신도 3개소의 상처를 입으면서 분전. 적 부하장수인 야마토 오키타케[大和 興武]를 포로로 잡았으며, 적 대장인 타카후사를 추격하여 자살로 몰아넣었다.


크게 보기                                                 < 이츠쿠시마의 전투 >

 1570년 6월.
 부친 모토나리가 이 세상을 떠나자 타카카게는 모토하루와 함께 테루모토[輝元]를 잘 보좌하여 [모우리의 양천(毛利の両川)[각주:3]]으로서 존재감을 발휘하였다. 그러는 한편 모우리 본가에 대한 충성심도 두터워, 조카인 테루모토가 머물고 있는 방을 지날 때는 반드시 무릎을 굽혀 예를 다하며 지나갔으며, 테루모토가 없을 때도 그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하통일을 목표로 서쪽으로 진격을 해 온 오다 군[織田軍]과의 격돌에서 그의 군략가로서의 특질이 발휘된다.
 1575년 오다 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오오사카[大坂]의 혼간지[本願寺]와 손을 잡은 모우리는 같은 해 7월 혼간지에 식량을 해상 수송하였는데, 그때 총지휘를 한 것이 타카카게였다. 모우리의 수송선단은 요격하러 나온 오다 군과 키즈가와 강[木津川] 하구에서 격전을 벌인다. 그러나 이쪽은 이츠쿠시마 이래의 전통을 자랑하는 코바야카와 수군이다. 오다 측의 수군을 능숙하게 포위한 후 철포, 불화살을 쏟아 붙는 듯이 공격하여 수 백 명을 죽이는 대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각주:4]

 이제 츄우고쿠[中国] 모우리의 명성은 시코쿠[四国], 큐우슈우[九州]에까지 이르렀다. 더구나 모우리는 그 이전에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통해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카이[甲斐]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도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과 호응하여 오다[織田]를 동서에서 협격하고자 하는 대전략이었다.

 이러던 중 오다-모우리 대결 최대의 고비가 되는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 공방전에 이르게 된다.
 이 전투는 타카마츠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의 할복을 조건으로 강화를 맺게 되는데,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의 변 소식이 전해지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죽음을 숨긴 채 다음 날 무네하루를 할복시키고는 급히 쿄우토[京都]로 군사를 돌려던 것이다.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소식은 모우리 군에게 있어서 다시 오지 않을 반격의 기회였다. 여기서 히데요시를 추격한다면 물리치는 것은 쉬웠다. 대부분이 이 의견에 찬성하였다. 하지만 타카카게는 결사반대를 외쳤다.

 타카카게 외교감각의 탁월함이 여기서 멋지게 발휘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카카게는 히데요시가 장래 반드시 천하를 쥐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추격하지 않고 히데요시에게 아케치[明智] 토벌을 성공시키면 반드시 히데요시는 모우리에게 호의를 갖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모우리의 장래를 위해서도 그러는 편이 훨씬 이득이라고 설득한 것이다.

 히데요시의 정권장악은 타카카게의 이 추격반대 덕분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후년 히데요시는 이때의 타카카게 배려에 깊은 감사를 하여, 모우리 씨[毛利氏]에게 이때의 은혜를 갚음과 동시에 특히 타카카게를 본가의 테루모토와 동격으로 올려, 대로(大老)의 한 사람으로 발탁하였다. 영지(領地)도 치쿠젠[筑前] 전부와 치쿠고[筑後]와 히젠[肥前]에 각각 2개군(郡)을 하사하여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만들어 주었다.

 한편 타카카게가 모우리 가문에 얼마나 헌신적이었는가는 히데아키[秀秋]를 양자로 받아들인 것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세자가 없는 모우리 가문에 히데요시의 양자 히데아키가 후계자 후보로 거론된 것이다. 타카카게는 경악했다. 아키[安芸] 명문가의 피가 히데요시의 친척이라고는 하여도 기껏해야 잡병[足軽]이나 맡을 인물에게 더럽혀진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타카카게 필사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히데요시의 주치의인 야쿠인 젠소우[施薬院 全宗]에게 히데요시의 의향이 어떤지 묻자, 히데아키를 모우리에 보낸다는 건은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타카카게는 이때 자기 가문을 희생시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52만석의 영지(領地)를 킨고 츄우나곤[金吾中納言] 히데아키 님에게 물리 드리고 싶습니다"
 는 요청하였다.
 모우리의 분가라고는 하여도 코바야카와 가문은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때부터의 명문가였다. 이런 명문가가 히데아키 따위에게 더럽혀 지는 것 또한 참기 힘들었다. 더구나 타카카게에게는 이미 동생인 히데카네[秀包]를 양자로 하고 있었음에도[각주:5], 그를 분가시키면서까지 히데아키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싶다며 간청한 것이었다. 타카카게의 모우리 가문 안녕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오히로이[お拾=후의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자 양자 히데아키의 처우에 곤란해 있었던 히데요시는 타카카게의 신청에 굉장히 기뻐하였다고 한다. 타카카게에게는 은거료(隠居料)로써는 파격적인 빙고[備後] 미하라[三原] 3만석이 주어졌다.

 이보다 앞선 1593년 1월.
 타카카게는 조선에서 전군을 그 지휘하에 두고서 명(明)나라의 병력 30만을 상대로 싸웠다. 적의 대장은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던 이여송(李如松)이었다. 이 명나라 장수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를 패주시킨 기세를 타고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타카카게는 이를 격파하는 대공을 세운 것이었다.[각주:6]
 그러나 조선에 있던 중 병을 앓았고 귀국하여 미하라에서 요양을 하였지만 1597년 뇌혈관 장애로 졸도하여 일생을 마쳤다.

 참고로 코바야카와 가문은 히데아키의 대가 되어서 자식이 없어 단절되지만,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이르러 당시 모우리 가문의 당주인 모우리 타카치카[毛利 敬親]가 일족 중의 한 명에게 코바야카와 가문을 잇게 하였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 隆景)]
1533년 태어났다.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삼남. 부친 모토나리, 조카 테루모토[輝元]를 도와
츄우고쿠[中国]를 경략. 미하라[三原]를 본거지로 하여 세토 내해[瀬戸内海]에 강력한 수군을 편제하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와 강화한 후, 히데요시의 시코쿠[四国], 큐우슈우[九州], 오다와라[小田原] 정벌[각주:7]에 참가. 조선의 역에서는 1593년 명(明)나라의 대장 이여송(李如松)의 대군을 개성(開城)에서 물리쳤다. 히데요시의 양자 킨고 츄우나곤 히데아키[金吾中納言 秀秋]를 세자로 받아들였으며, 1597년 6월 20일 죽었다. 65세.

  1. 누타(沼田) 쪽이 종가였다. [본문으로]
  2. 당시 오오우치 가문[大内家]의 당주는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동생 오오우치 요시나가[大内 義長]였기에, 타카카게는 오오토모 소우린이 보낸 원군이라고 한 것이다. [본문으로]
  3. 킷카와[吉'川']나 코바야카와[小早'川']에는 내 천(川)자가 들어있기에. [본문으로]
  4. 제1차 키즈가와 강 입구의 전투[第一次木津川口の戦い]. 참고로 2차는 오다 군의 철갑선으로 복수했다는 전투이다. [본문으로]
  5. 모우리 모토나리의 9번째 아들. 모친이 코바야카와 가문의 분가인 노미 씨[乃美氏]인 연도 있어 아들이 없던 타카카게의 후계자가 되어 있었다. [본문으로]
  6. 벽제관 전투를 말한다. 여기 쓰여있는 30만을 그대로 믿으면 지는 겁니다. [본문으로]
  7.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공격한 것.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포증 2009.09.21 17: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 3대 지장은 시마 사콘, 사나다 마사유키, 나오에 가네츠구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로 나오는군요. 다카카게가 죽자 마사유키로 대체가 된걸까요 ㄷㄷ

三.

 이 오기마루[於義丸]라는 인질은 히데요시[秀吉]를 크게 기쁘게 하였다. 무엇보다 토쿠가와 가문[徳川家] 있어서 가장 연장자인 남자 아이이며, 이에야스에게 있어서도 소중한 자식임에 틀림이 없었던 만큼 인질로서의 가치는 컸다.

 “그런가~ 이에야스 님은 오기마루를 주시는 건가? 그렇다면 내 자식으로 귀여워하겠으며, 좋은 대장(大將)으로 키우마. 기량에 따라서는 나중에 이 하시바 가문[羽柴家]을 이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고 히데요시는 중개자에게 말했다. 곧이어 그 오기마루가 토쿠가와 가문의 가로(家老)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의 아들 카츠치요[勝千代[각주:1]], 지금까지 오기마루를 키워왔던 혼다 사쿠자[本多 作左]의 아들 센치요[仙千代]와 함께 이 해의 12월 12일 하마마츠[浜松]를 출발하여 오오사카[大坂]로 올라왔다. – 라기보다는 그 기구한 운명으로 출발을 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오사카 성(城)에서 양부(養父)-양자(養子)의 대면이 행해졌다. 상단에 앉아있는 히데요시라는 양부는 오기마루가 여태까지 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여어~ 내가 너의 아비란다. 이쪽으로 오렴”

 하고 큰 목소리로 손짓 하였지만 오기마루가 삼가며 가만히 있자, 히데요시는 직접 내려와 오기마루의 어깨를 손을 얹었다. 히데요시는 다른 사람의 어깨나 머리에 손을 올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자신에게 넘어오게 만들곤 했다. 이 경우도 그러했다.

 “오늘부터 너는 이 집의 아이다. 여러 가지를 많이 배워두도록”

 하고 말했다. 오기마루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소년의 직감으로 말하자면 실재 아비인 이에야스보다 이 양아비 쪽이 훨씬 부친다운 내음을 가지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시간을 들이는 일 없이 그날 안으로 별실을 마련하여 오기마루를 하시바 가문의 자식으로서 성인식(元服)을 치르게 하였다.

 이름은 히데요시가 '히데야스[秀康]'라고 지었다. 하시바 히데야스[羽柴 秀康]라고 했다. 양아비의 ‘히데[秀]’, 친아비의 ‘야스[康]’가 취해졌다. 천하에 이보다 사치스러운 이름은 없을 것이다.

 “이름의 영향을 받는다면 일본 제일의 무사가 될 수 있단다”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히데요시는 조정에 주청(奏請)하여 히데야스를 위해서 관위(官位)를 받아다 주었다. 히데야스는 종오위하(從五位下) 지쥬우[侍従] 겸 미카와노카미[三河守]에 임명 받았다. 영지(領地)도 하사 받았다.
카와치[河内]에 1만석으로 아직 더부살이를 하는 소년으로서는 적지 않았다. 히데야스는 토쿠가와 가문에 있을 때보다도 모든 것이 좋아졌다.

 1587년의 히데요시의 큐우슈우[九州] 정벌에 히데야스는 14살로 종군하였다.
 다음 해인 1588년 4월, 양아비 히데요시가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를 자택으로 초대한 [쥬라쿠테이
행행(聚楽第 行幸)]의 성대한 의식이 치러질 때는, 불과 15살의 나이로 코노에쇼우쇼우[近衛少将]가 되어 다른 고관들과 함께 봉련(鳳輦)의 바로 뒤를 따르는 역할을 맡았다. 그때 그와 함께한 면면들은 카가 쇼우쇼우[加賀 少将]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고(故) 노부나가의 적손인 지쥬우[侍従]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 거기에 그와 같은 히데요시의 양자인 쇼우쇼우[少将] 하시바 히데카츠[羽柴 秀勝[각주:2]], 역시 쇼우쇼우[少将]인 히데아키[秀秋]라는 토요토미 가문의 귀공자들이기에 히데야스에게 있어서 이 날 자신의 화려함은 온 생애에 있어서도 잊기 힘든 것이었다.

 이 시기, 작은 사건이 있었다.
 히데야스는 토요토미 가문의 직속 신하[旗本]들에게 반드시 존숭(尊崇)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랬다. 형식상으로는 히데요시의 양자이며 관위도 보통의 다이묘우[大名]보다 위였다. 그러나,
 - 저 분은 인질이다.
 라는 관념이 사람들 태도의 밑바탕에 깔려 있어 성안의 말단 관리들의 응대에도 어딘가 무례함이 있었다.
 히데야스는 그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15~6살이 되면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주변과는 어떤 관계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남보다 배는 더 자존심이 센 성격이었다.

 어느 날.
 성안에서 말단 관리가 히데야스에게 소홀함이 있었다. 라기 보다는 싸가지 없는 얼굴을 했다.

 “게 섰거라! 다시 한번 그 표정을 지어 보거라”

 하고 히데야스는 복도에서 뒤돌아 서자마자 날카롭게 외쳤다. 말단 관리는 여전히 뻔뻔히 서있었다. 히데요시는 일갈하며 팔을 들어 뒷덜미를 잡아 마루에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말해 두마. 나는 불초(不肖)하지만 이에야스의 아들이며 이 가문의 양자이다. 그러니 다른 자들에게도 알려라. 앞으로 무례한 자는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겠다는 것을!”

 그 관리는 공포로 부들부들 떨었다. 곧이어 이 말이 히데요시의 귀에도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이 소년이 이외로 호탕한 기질을 숨기고 있었음에 놀랐다.

 “그런가~ 히데야스가 그렇게 말했는가? 미카와노카미(=히데야스)가 하는 말은 지당한 것이다”

 하고 성안 부하들에게 훈계하는 한편 그때까지 허용하고 있지 않던 토요토미 가문의 문장(紋章)도 허용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히데요시는 은근히 히데야스에게 경계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다른 가문의 자식은 될 수 있는 한 우둔한 편이 히데요시에게는 바람직했다.

 그 후 히데요시가 주의해서 관찰해보니, 역시 소년기를 탈피하기 시작한 히데야스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여 얼굴 생김새마저 위풍당당해졌다. 행동거지에 위엄이 있어, 토요토미 가문의 다른 양자인 예를 들면 히데츠구[秀次], 히데아키[秀秋],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와는 확실히 차원이 다른 사나이가 되려 하고 있었다. 혈연인 히데츠구는 너무 경박(明博)했으며, 마누라의 친척 히데아키는 우매하였고,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히데이에만은 다소 화려했지만 실속이 없는 편으로 어찌 보면 평범했다.

 이 중 단 하나 이에야스의 씨인 히데야스만은 전쟁터에서 삼군(三軍)을 지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쟁터에 있어 일개 병졸 하나하나까지 그 위령(威令)에 따르게 하기 위해서 장수인 자는 높은 위덕(威德)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데, 히데야스에게는 그 위덕인(威德人)으로써 소질이 있는 듯 했다.
 어쩌면 히데야스는 스스로 신경 써서 그러한 기량을 자신의 안에서 기르고 있는지도 몰랐으며, 의식해서 한 것이라면 더더욱 예사로운 기량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히데야스는 후시미 성[伏見城] 내의 마장(馬場)에서 말을 길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 마장은 토요토미 가문의 전용 마장이기에 히데요시나 토요토미 가문의 귀공자들밖에 사용하지 않았으며 당연히 히데야스에게는 그 사용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던 중 히데요시의 전용 말을 담당하는 마장 관리인이 말을 운동시키기 위해 마구간에서 끌고 나와 그 근처에서 달리게 하였고, 곧이어 말을 달리고 있던 히데야스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렸다. 토요토미 가문의 귀공자에 대해서 이렇게 무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장 관리인조차 히데야스를 그 정도밖에 보지 않았다. 히데야스는 얼굴을 그 남자에게 향했다. 말을 달리면서 칼을 뽑자마자,

 “무례한 놈!!”

 하고 외치며 칼에 피 뭍을 새도 없이 안장에서 베어 죽여 버렸다. 그 재빠른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더구나 이 어마어마한 기개(氣槪)는 또 뭐란 말인가? 마장은 대소동이 일어났다. 어쨌든 피해자가 타고 있던 것은 히데요시의 전용 말이었다. 전용 말이라는 것만으로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히데야스는 거리낌없이 그 말을 피로 더럽혔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히데요시의 거소(居所)를 더럽혔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경우도 히데요시는 화를 내지 않고 반대로 이 양자의 강기(剛氣)를 칭찬하였다. 거기에 기술도 칭찬했다. 말을 달리며 상대를 베어 죽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을 듯하면서, 그러나 이외로 쉽지 않다. 그것을 히데야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다.

 이 즈음 이미 토요토미 가문의 막하 다이묘우가 되어 있던 이에야스는, 이 소문을 듣고,
 - 역시 내 피군.
 하고 목소리 낮추어 근신들에게 살짝 말했다. 이에야스는 이 시기부터 확실히 히데야스를 달리 보기 시작하여 세자(世子)인 히데타다[秀忠]보다 뛰어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제 와서 히데야스를 돌려달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아깝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이에야스에게 있어서 히데야스라는 아들은 가끔 머릿 속에서만 활동하는 존재였다.

 어쨌든 히데야스라는 젊은이가 시간이 흘러 만인을 뛰어넘는 기량을 갖춘다고 하여도 그 기량은 사용할 곳이 없었다. 토요토미 가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건 이에야스의 자식에게 천하를 물려줄 턱이 없을 것이며, 태어난 곳인 토쿠가와 가문에도 이미 히데타다라는 후계자가 있는 이상 히데야스는 쓸모가 없었다. 히데야스라는 인물은 기량이 있으면 있을수록 공중에 붕 뜬 기묘한 존재가 되어 갈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1. 카즈마사의 차남. 후에 야스카츠(康勝) [본문으로]
  2. 히데요시의 조카로 나중에 토요토미노 히데카츠[豊臣 秀勝]. 참고로 그의 친형은 살생관백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07 0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히데요시의 다른 양자들에 비하면 훨씬 낫군요.. 뭐, 그나마 제일 괜찮은 편이라는 우키다 히데이에도 사실 그저 범용했을 따름이니 원(..;)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07 08: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의 재능과 미모로는 히데이에의 압승!!!....으로 하면 안 될까요? ^^
    (거기에 수명도...)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07 16: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배 가까이 살았으니 압승이라면 대압승이군요(ㅎㅎㅎ) 사실 뭐 타다요시도 비슷한 시기에 죽은 이유 때문인지 히데야스 독살설도 보이는 걸 보면, 제명 다살고 돌아가신 미소년 히데이에 쪽이 더 나은 인생이었을지 모르겠네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07 16: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좀 글과는 빗나가는 얘기지만, 그런데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라면야 세키가하라 부상으로 죽은걸로 알고 있는데.. 둘다 즉사 할 정도는 아닌 비슷한 부상이라면 부상인데 이이 나오마사는 2년만에 귀천하고, 마츠다이라 타다요시쪽은 7년 뒤에 죽는건 또 무슨 조화인지..(냠.. 악성 종양이라는 말도 있고.. 이래서 역사란게 어려운가 싶습니닷)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08 1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게요. 아마... 상처가 덧 나서 악성 종양으로 발전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만...의학적인 지식이라고는 닥터K 이후로 전무하다 보니 모르겠군요. ^^;

六.

 윤
7월이 되어 이변이 일어났다. 12일 밤.

 후시미[伏見] 도바[鳥羽] 부근을 진원지로 하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사상 유례가 없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대지가 갈라지고 하늘엔 달무리가 져[각주:1] 순식간에 후시미, 도바, 요도가와[淀川] 해안의 여러 마을이 무너지고, 후시미 성 밑 마을의 남녀 2천명이 깔려 죽었다.

 다이묘우[大名]들의 저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근신중인 키요마사[正]의 저택도 객관(客館=大書院)이 무너져 내리고, 마구간에서는 불을 뿜었다. 하지만 키요마사는 이런 아수라장에서도 행여 있을지도 모를 위협에서 히데요시를 지키기 위해 성에 오를 것을 결심하여 부하들에게 준비를 명했다. 그 자신 몸에는 하라마키[巻]를 입고 흰 명주에 주색(朱色)으로 남무묘법련화(南無妙法蓮華)이라 쓰인 겉옷[陣羽織]을 걸치고선 이마에는 주황색 머리띠를 둘렀다. 손에는 8[각주:2] 길이의 봉()을 들었다. 봉은 쓰러진 가옥을 일으키는 지렛대로 쓰기 위해서였다. 무사 30, 일반 병사 200명에게도 봉을 들게 하여, 여진(餘震)이 계속되는 대지를 박차고 박차며 후시미 성[伏見城]에 당도하였다.
 
정문은 이미 무너져 쓰러져 있었다. 마츠노마루[
丸]라 불리는 성곽의 망루(望樓)도 무너져 시체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키요마사는 서둘러 히데요시를 찾으려 하였다.

 혼마루[本丸]로 가자!”

 키요마사는 목소리 높여 호령하면서 돌계단을 서둘러 올라가자 혼마루 내의 누각, 건물 등은 전부 쓰러져 있어 비명만이 여기저기서 들려올 뿐이었다. 히데요시가 벌써 깔려 죽었나? 하고 키요마사는 생각했지만 계속해서 등롱(燈籠)을 비추며 여기저기를 탐색하였다. 그러다 설마 하는 기분으로 더 안쪽으로 들어가 문 앞 작은 마당을 지나 문을 거쳐 정원에 들어서자, 정원 안에 쌓은 작은 동산의 잔디 위에 병풍을 둘러치고 카츠기[被布]를 뒤집어 쓰고 앉아 있는 상급 여관(女官) 20명 정도의 무리를 발견했다. 옆에 있는 소나무에 등롱이 걸려 있어 그 불빛이 닿는 곳에 히데요시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키요마사는 발견했다. 히데요시는 이 이변을 틈탄 자객을 겁내서인지 여성의 의상을 뒤집어 쓰고는 그 화려한 옷 속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왕년의 히데요시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잔머리나 굴린 땜질이었다. 키타노만도코로[政所], 마츠노마루도노[丸殿][각주:3], 코우조우스()도 있었다.

 키요마사는 가까이 다가가 엎드려서는 코우조우스를 향해서[각주:4],

 졸자는 카토우 카즈에노카미[加藤 主計頭]이옵니다.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님을 시작으로 타이코우님를 모시는 여러분들이 깔려 있으시기라도 한다면 이 지렛대로 들어올리고자 근신 자중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왔습니다

 고 큰소리로 말했다. 곧바로 네네는,

 토라노스케[虎之助]

 하고 말을 걸었다. 서둘러 히데요시 앞에서 칭찬을 해버리면 이럴 경우 키요마사의 행동이 공인 받아 히데요시도 그것을 승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잘 왔네. 정말 빨리 와주었구나

 네네는 계속 말했다.

 언제나 언제나 너의 장함과 공적을 든든하게 생각하고 있다네

 라는 네네의 목소리는 키요마사의 목소리보다도 더 컸을 것이다. 키요마사는 더 납작 엎드렸다. 땅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어서 키요마사는 고개를 들었다. 작법대로 시선은 코우조우스를 향해 코우조우스에게 말을 거는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키요마사가,

 들으시게 코우조우스!”

 하고 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졸자는 조선에서 억울한 누명을 입었소. 조선팔도에 공격해 들어가 경성(京城)을 제일 먼저 함락시켰으며[각주:5], 조선 왕자 형제 두 분을 잡기도 하였고[각주:6], 나중에는 간도(間島)의 오랑캐 땅까지 쳐들어갔으며, 길주(吉州)에서는 10만기()[각주:7]의 적을 쳐부수고 대장을 잡아 죽였으며, 그 외에도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하였건만 되돌아 온 것은 억울한 누명밖에 없어소. 타이코우님께선 지부쇼우[冶部少=미츠나리]의 말만을 믿으시며 그것의 진실인지 거짓인지 조사조차 해 주시지 않으시오

 라고 말하였다. 네네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키요마사의 말이 끝나자,

 전쟁터에서의 피곤이 쌓였는지 토라노스케의 얼굴이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구나

 라고 말하며, 키요마사를 위해서 히데요시의 동정을 자극해 주었다. 또한 히데요시에게,

 토라노스케에게 중문(中門)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른 장수들의 모습은 여전히 볼 수가 없군요

 라고 말하자, 히데요시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 인해 키요마사의 근신을 풀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뒤 네네는 히데요시를 더욱 설득하여 키요마사를 위해서 변호를 하였다. 결국 히데요시는,

 토라노스케를 거시기... 그래 용서한다

 고 말했다. 네네는 곧바로 코우조우스를 중문으로 서둘러 보내 키요마사에게 그것을 알리게 하였다. 네네가 자신의 피보호자를 위해서 해 준 마지막 중재(仲裁)였던 것일 지도 모른다.

 이 해로부터 3년째의 초가을. 히데요시는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다.
 
유언에 따라 오대로(五大老) 필두인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가 히데요리[頼]를 대신하여 조선에 있던 장수들을 철수시켰다. 조선에 있던 키요마사는 하카타[博多]에 상륙하여 후시미[伏見]로 돌아오자 복수를 선언했다. 지부쇼우를 죽이겠다고 하였다.

 나도 끼워 주게

 하고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쿠로다 나가마사[ 長政], 아사노 요시나가[ 幸長],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오와리(尾張) 파벌의 장수들이 너도나도 달려와서는 키요마사를 따르겠다고 하였다. 복수심에 불타는 키요마사와는 달리 그들에게는 단순히 미츠나리를 조금 미워했던 감정 외에도 히데요시의 죽음을 기회로 미츠나리와 그의 파벌을 모조리 쓸어버려, 토요토미 가문의 권세나 중심을 그들이 생각하기에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 놓고 싶다는 정치적인 충동이 일었을 것이다. 적어도 쿠로다 나가마사, 이케다 테루마사, 아사노 요시나가는 그런 쪽의 즉 정치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사태는 절박했다. 공연한 소란이 아니었다. 때때로 시가전(市街戰)까지 일어날 뻔 했다. 미츠나리,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쪽도 방심하지 않고 자기들 저택 주변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벽 구석구석에 망루를 설치하여 경계하였다. 이 사태를 이에야스는 이용하였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죽는 순간부터 히데요리의 정권을 빼앗을 궁리만 하였고, 그것만을 생각하며 신중히 그러나 민첩하게 행동했다. 이에야스는 이 토요토미 가문의 분열 소동을 관찰하여 철두철미하게 오와리[尾張] 파벌의 다이묘우[大名]들을 꼬셔서 그들의 위에 섬으로써, 결국에는 이시다 파벌을 뭉개고 요도도노[淀殿], 히데요리 모자를 밀어내고자 하였다. 이것 외에는 천하를 취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나이후(=이에야스)가 뒤에서 그들을 후원하고 있다

 고 미츠나리는 성 안에서도, 동료들 앞에서도 세차게 조목조목 따져가며 비난하였지만, 이에야스는 개의치 않았다. 우선 오와리 파벌들과 연을 맺어, 인척(姻戚)의 끈을 이어놓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죽을 때 남긴 법이 있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 사당(私黨)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여러 다이묘우(大名) 간에 결혼은 허락을 받은 다음에 할 것.
이라는 사사로이 멋대로 다이묘우 가문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하는 법제를 남겼다. 이에야스는 그것을 무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 혼자 무시한다고 하여도, 이에야스에게서 딸을 얻는 다른 다이묘우가 이를 꺼리면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리 생각하여 이 일건에 대해서 키타노만도코로와 상담하기로 하였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 허락을 얻는다면 그녀를 따르는 또는 그녀와 친한 여러 다이묘우들은 부담 없이 이에야스와 인척관계를 맺을 것이다.

 키타노만도코로의 마음을 잡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오게 해 두지 않으면, 토요토미 가문에서의 공작은 무엇을 하건 하기 어려웠다. 이에야스는 쿄우[]의 아미다가미네 산봉우리[阿弥陀ヶ峰]히데요시의 묘소를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그 묘를 지키며 상복(喪服)을 입고 있던 네네의 거처에 몇 번이고 방문하였다. 선물도 보냈다. 사자(使者)도 파견하여 그 적적함을 위로하였다. 이 때문에 후시미[伏見]의 성 안에서는,
 
-
나이후 님과의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것은 아닌가?
 
라는 핑크 빛 억측이 돌 정도였다.

 물론 네네에게 그러한 감정이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누구보다도 이에야스의 역량과 성실한 듯한 인격을 신뢰하였다. 신뢰를 얻기 위해서 이에야스는 언동 하나하나 조심하면서 네네를 대했다. 네네는 결국,
 
토요토미 가문과 히데요리 님의 장래를 맡길 수 있는 것은 에도 나이후[ 府][각주:8] 이외에는 없다. 부탁을 하려면 나이후를 신뢰하고 오히려 모든 것을 맡기는 편이 좋을 것이다.’
 
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에야스라면 절대 나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이대로 미츠나리의 파벌이 요도도노 모자를 내세워 토요토미 가문을 농단(壟斷)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하다.

 지금까지 네네는 이성(理性)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네네의 감정(感情)이 그것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미츠나리의 파벌과 그들이 내세우는 요도도노와 그녀의 늙은 시녀들에게 토요토미 가문을 넘긴다는 것 등은 네네의 감정이 참을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질투가 아닌 - 히데요시를 도우며 이 가문을 세워 것은 네네이며 그들이 아닌 것이다. 또한 그들 파벌이 이기면 네네가 보호해 온 키요마사들은 멸망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네네는 최악의 사태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다. 정권이 이에야스에게 옮겨질 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이에야스라면 예전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후계자인 히데노부[秀信][각주:9]를 기후 츄우나곤[岐阜 中納言][각주:10]으로 만들어 보호한 것과 같이, 히데요리를 셋츠[津]야마토[大和] 근방에 성()을 주어 50~60만석의 다이묘우[大名]로 만들어서는 가계(家系)를 보호하고, 제사가 끊기지 않게 해 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조건으로 내걸어야 하나 하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 각오도 네네에게 있어서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오우미[近江] 아시우라[芦浦]칸논 사[音寺]의 성주이며 승()이기도 한 센슌(詮舜][각주:11] 이라는 자가 네네에게 은밀히 말한 것이기도 했으며, 이때도 네네는 냉정히 그것을 듣고 있을 수가 있었다. 듣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네네의 이성보다도 오오사카[大坂]에서 요도도노를 내세우고 있는 미츠나리 파벌에 대한 혐오가 그렇게 만들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여러가지 생각이 합쳐진 결과 네네는 이에야스를 신뢰하였다.

 혼인에 관한 것은 제 입으로도 토라노스케 등에게 말하겠습니다.”

 하고 네네는 이에야스의 사자에게 답했다. 곧바로 그리 되었다. 키요마사는 당시 홀아비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부하인 미즈노 타다시게[水野 忠重]의 딸을 양녀[각주:12]로 하여, 서둘리 준비해서는 키요마사에게 시집 보냈다. 거의 동시에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적자(嫡子) 마사유키[正之]에게 이에야스는 양녀를 시집 보냈다.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政]의 아들 요시시게()에게도 양녀를 시집 보내는 일을 진행시켰다. 미츠나리 등은,

 아미다가미네 묘소의 흙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백주대낮에 타이코우 님이 남기신 유법(遺法)을 어기고 있다!”

 고 이에야스나 키요마사 등을 규탄하였지만 키요마사 등은 그런 규탄을 묵살했다. 미츠나리가 요도도노 모자의 권위를 믿고 고압적으로 나오건 키요마사 등은 이미 키타노만도코로의 묵인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 마음 든든했으며 유법을 어긴다는 양심의 가책에서도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었다. 더구나 키요마사는 네네를 내알(內謁)하였을 때,

 어떤 것이건 나이후를 따르렴

 이라는 은밀한 지시를 받고 있었다. 네네의 지시를 따르는 한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불충(不忠)이 아니라는 습성이 소년일 때부터 그들의 마음 속에 법칙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사후, 2년째에 소위 세키가하라 쟁란[ヶ原の役]이 일어났다. 난이 일어나 미츠나리가 주모자가 되어 오오사카[大坂]에서 거병하였을 때, 네네는 오오사카[大坂]에서 벗어나 쿄우[京]의 산본기[三本木]에 은거하며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이때 네네는 자신의 조카인 와카사[狭] 키노시타 카츠토시[木下 勝俊]에게, 길을 잘 못 들지 마라, 에도 나이후를 따르라는 훈계를 하고 있으며 또한 그 카츠토시의 동생으로 네네에게 있어서는 양자 중의 한 명이기도 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에게는, 히데아키가 흐름 속에서 어쩌다가 서군에 참가하게 되어 버린 것을 알고는,

 나중에 나이후를 꼭 도와 주렴

 이라고 엄히 명령했다.

 키요마사큐우슈우[九州]에서 동군(東軍)이 되어 움직였으며 또한 세키가하라[ヶ原]에 있어서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네네가 어렸을 적 키웠던 무장들이나 친척들이 전부 동군의 이에야스 편에 서, 많은 활약을 하였고 결국 히데아키의 서군에 대한 배반이 승리를 결정지어 서군에 있는 요도도노의 파벌을 격파했다.
 
보는 방식에 따라서는 히데요시의 처첩이 각각 십 수만의 병사를 움직여 세키가하라 분지[ヶ原]에서 싸웠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그 틈을 타고 천하를 얻었다.

*******************************************************************************************************

 그 후가 네네의 여생(餘生)이 된다.
 
네네는 이 사태나 시세에 대해서 결국 한 마디의 발언도 하지 않았고 히데요시의 명목을 빌기 위해 불교에 전념하였다. 그것 말고는 다른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다. 세키가하라 쟁란
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난 1605,

 절을 가지고 싶구나

 하고 이에야스에게 코우조우스를 파견하여 그 뜻을 전했다. 이에야스는 물론 그 뜻을 받들어 자신의 중신(重臣)인 사카이 타다요[酒井 忠世], 도이 토시카츠[土井 利勝]의 관할로 하여, 쿄우[]의 히가시야마[東山]의 산허리에 장대하고 화려한 사원을 조영 시켰다. 코우다이 사[高台寺]가 그것이다.

 그녀는 이 코우다이 사[高台寺]에서 히데요시의 위패를 지키며 또한 이곳에 살았다. 이에야스는 자신에게 천하를 가져다 준 이 여성을 존중하여 카와치[内] 내에 화장(化粧)을 하는데 쓰시라는 명목으로 13천석을 주어 정중히 대하였다. 네네가 비구니가 되어 살아가는 동안 1615년에 오오사카 성[大坂城]이 공격받아 요도도노 모자가 죽었다. 그 후에도 여전히 그녀의 수명이 이어졌다.

 에도 막부[江戸幕府] 3대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의 시대가 된 1624 9 6. 76세의 나이로 죽었다.

*******************************************************************************************************

 에도 시대의 어떤 유학자(儒學者),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에 이르게 한 것은 키타노만도코로의 재기(才氣) 때문이다.
는 식의 말을 하였는데, 다소 빈정대는 듯하다. 그녀는 히데요시와 함께 토요토미 가문이라는 작품을 만들었고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스스로 칼을 꺼내어 그 뿌리를 끊었다. 다른 사람에게 건넬 수 없다는 호담함과 같은 것을 느낀다.

 그녀는 말년에 풍월을 즐기며, 그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여러 다이묘우들의 경애와 존경을 받으며 유유히 세월을 보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회한(悔恨)이라는 것을 전혀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1.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는 자주 관측된다고 하지만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고 한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도 지진과 달무리가 병용되어 기록되어 있는 기사도 있다. [본문으로]
  2. 약 240cm [본문으로]
  3. 쿄우고쿠 씨[京極氏]로 거처가 이 후시미 성[伏見城]의 마츠노마루 성곽에 있었기에 이리 불렸다. 또한 이 당시에는 가장 총애를 받고 있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4. 당시는 윗사람에게 직접 말하기 보다는 곁에 있는 부하 격인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예법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경성(한성)에 제일 먼저 도착한 이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이다. [본문으로]
  6. 두 왕자(임해군과 순해군)를 잡았다기 보다는 함경도 방면을 담당했을 때 당시 병사 모집을 하러 간 왕자들이 함경도에 갔다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鞠景仁)에게 잡힌 것을 건네 받은 것. [본문으로]
  7. 이런 말을 믿으면 진다. [본문으로]
  8. 에도는 현재의 토우쿄우[東京]. 이에야스의 본거지였기에 그의 관직명 나이후[内府]를 붙여 이리 불렸다 [본문으로]
  9. 노부나가[信長]의 후계자인 노부타다[信忠]의 아들. 즉 노부나가의 손자. [본문으로]
  10. 영지(領地)가 노부나가의 옛 본거지 기후 13만석에 관직이 츄우나곤이었다. [본문으로]
  11. 히에이잔[比叡山]의 서고(書庫) 세이쿄우보우[正教坊]의 주지였으며, 능력과 히데요시의 신뢰로 여러가지 행정관(奉行)을 역임하였다. [본문으로]
  12. 미즈노 타다시게는 이에야스의 외삼촌이었기에 자신의 외사촌을 양녀로 삼은 것이 된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14 2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아들네미 같았던 동군 소속 무장 모두보다 더 오래살았군요(;;;) 역시 여성의 여생이란 생각할게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있어서 요도도노 모자의 여생따위, 아무런 상관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르죠. 뭐 사실 그들 모자야 세키가하라 이후의 삶은 덤이었던 것이나 마찬가지고...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4.15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편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네네도 장수했군요)
    다음 편도 벌써 기대가 되는데, 주인공 [야마토 다이나곤]이 누군지 궁금하네요.
    (빈약한 지식으로 추측해보면... 히데요시 동생 히데나가인가요?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4.15 0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소에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 길주는 함경도의 도시입니다. 우리나라의 도 명명법이 목사-부였는지 병사-부였는지가 있는 대도시 두개의 이름을 따는 것인데요.(전라도는 전주랑 나주, 경상도는 경주랑 상주, 충청도는 충주랑 청조 같은 식이죠. 경기도는 일본의 긴키랑 같은 것이므로 예외 입니다만) 세조때 반란을 일으킨 이징옥이가 함길도 절제사 였습니다. 길주는 조선 초기까지만해도 상당히 큰 도시로 군사적, 행정적 중심지 였다는 것이지요. 아마 세조때 였는지 예종때 였는지 함경도로 바뀌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4.15 0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편에서 전개가 갑자기 급하게 흘러간 것 같아서 조금은 아쉽네요.
    2대로 단절된 야마토 고리야마 도요토미 가문의 초대 도슈로 든든한 형의 오른팔이라, 기대됩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4.15 0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키타노만도코로 편 완결이네요 야마토다이나곤도 기대됩니다
    일본문학을 전공하고있는 학생이지만 아직 실력이 빈약한 관계로(고어, 고어체는 정말 쥐약-_-) 책을 구해도 읽을 수 없으니 이렇게 발해지랑님의 번역하신 것을 기다리고있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paak81 BlogIcon 파악 2008.04.15 14: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좋은 글 읽게되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5 1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음...말씀해 주신 것은 조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군요. 확실히 역사상의 결과만 보면 의미가 없어보이기도 하지만... 왠지 어떻게든 존재 의의를 찾아 주고 싶군요...또한 나름 살려고 발버둥 쳤던 인물들의 생을 덤으로 하기엔 너무 잔인하다는 느낌도 드네요. 뭐 조선침략 원흉의 핏줄이니 인과응보이기도 하지만요 ^^

    맹꽁서당님//재미있게 보셨으니 다행입니다. 밑에 신사본론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야마토 다이나곤은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이옵죠. http://blog.naver.com/valhae0810/100035744758 &lt;- 전에 졸역했던 것입니다.

    지나가던님//드디어 저에게도 오셨군요. 그 유명한 '지나가던'님.... ^^
    실례했습니다. 좋은 지식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신사본론님//이책은 챕터 별로 그 인물에 대한 것만 중점적으로 다루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것에 더하여 과감한 삭제가 시바 선생님 작품의 특징이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많이 읽어 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요)
    기대는 하지 마십시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요 ^^;

    박선생님//역시....기대는 마십시요. 어디까지나 제 개인 취향으로 재미있던 것 뿐이니까요
    아물러....고어 관련은 저도.... --;
    저는 그래도 운 좋게 연이 닿은 이웃이신 shotokanfist님이 그쪽으로 굉장하셔서 든든하답니다.
    박선생님도 함 그쪽 방문을 권하고 싶군요.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파악님//고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보람을 느끼는군요 ^^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4.17 0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로 하시는 거라기엔 매끄러운 번역인듯 합니다^^
    shotokanfist님 블로그에도 방문 해봤는데 많은 자료들이 있네요(후한서부터 만엽집의 시가까지;)
    구경해보고나니 한문학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듭니다 참 배워야할게 많네요;;;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7 1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취미로 하다 보니 그렇게 까지 깊게 안 들어가도 된다는 점이 다행이군요 ^^

.

 

 하지만 이 이에야스의 말에는 다분히 회상이기에 생기는 허술함이 있었다. 현실의 세키가하라[ヶ原] 전장(戰場)에서 이에야스는 거의 절망적이었던 순간을 몇 번이나 맛보았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 전투의 승패를 사전에 결정짓고자 하였다. 적인 서군에 참가한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에 대해서 여러 방법으로 공작하고 회유(懷柔)하여 내응(內應)을 약속시켰다. 서군의 총수(總帥)인 모우리 씨[毛利]에게까지 공작하여 그 부하 장수인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家], 가로(家老)인 후쿠바라 히로토시[福原 俊] 등과 내응 약속을 하여 전장에서 절대 군사를 움직이지 않으며, 총도 쏘지 않겠다는 밀약까지 맺었다. 

 이에야스가 에도를 출발하여 전장으로 향하고자 할 때는 이미 마음 속으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도중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밀사(密使)가 내응을 신청해 왔을 때도,


 애송이 따위의 상대할 필요도 없다

 

 고 말하며 두 번이나 묵살하였을 정도였다.

 

 동과 서의 싸움은 이에야스의 부대가 틀어박혀있던 후시미 성[伏見城]을 서군이 공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방면 서군 4만의 총대장으로 히데이에[秀家]가 선택되었다.

 관위(官位)가 높은 것도 있으며 병력이 많다는 점에서 당연할 것이다. 예전 아직 하시바[羽柴]라는 성을 쓰던 히데요시[秀吉]가 히데이에의 망부(亡父) 나오이에[直家]의 임종 자리에서 약속했던 것과 같이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는 물론 일본국(日本)을 움직일 수 있는 큰 장수로 길러내 보이겠습니다'라는 말이 히데요시가 죽은 후 우연이겠지만 실현되었다.

 

 그렇군. 내가 지휘를 하는 것인가?”

 

 하고 히데이에는 순진하게 기뻐했다. 이 복잡한 정세 속에서 이 남자만은 아무런 정치적 고려도 하지 않고, () 타이코우[太閤]의 남겨진 아이를 위해서라는 소년과 같은 정의감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거병의 주모자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 동료인 오봉행들 조차 뒤로는 어떻게 움직일지 수상쩍은 시기에 이 비젠 츄우나곤[備前 中納言]만은 신뢰하여,

 

 비젠 츄우나곤만은 안심할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즉 정치, 정세(政勢)가 아군에 유리하다는 듯이 착색(着色)하거나, 전쟁이 끝난 후 이익을 약속할 필요도 없이 솔직히 부탁하면 솔직히 받아 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더구나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은 병사수도 압도적으로 많았고 또한 그 휘하의 비젠 병사들은 용감하였으며, 히데이에는 겁()을 미워하고 용()을 사랑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이 17천의 병사 수야 말로 서군의 주력이 될 것이다.

 

 히데이에는 70명의 장수와 4만의 군세를 배치하여 공성전(攻城戰)을 개시해서는 곧바로 후시미 성을 함락시켰다.

 그 후 히데이에는 오오사카[大坂]에서 병사들에게 휴식을 준 후 곧이어 이세[伊勢]를 거쳐 미노[美濃] 오오가키[大垣]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밤의 어둠을 타고 빗속에서 행군을 하여 세키가하라[ヶ原]의 예정 전장에 도착하여, 그 분지의 서쪽에 융기하는 통칭 텐마야마[山] 산의 허리에 진지를 둘 곳을 고른 후 병사를 5단으로 배치하였다. 히데이에의 본진에는 부대 표식[大馬印]으로 '붉은색의 후키누키[赤池吹貫]'가 세워졌고, 산꼭대기에서 산허리에 걸쳐 '흰 바탕에 큰북의 원[太鼓紋]'을 그린 우키타 가문의 깃발이 내걸렸다. 밤이 걷힘과 동시에 포진이 완료되었다.

세키가하라 포진도. 하늘색이 서군(西軍), 붉은 색이 동군(東軍). 노란색은 처음엔 서군이었다가 나중에 동군으로 배신하는 부대이다.(누르면 커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에야스가 움직였다.

 이에야스는 미노[美濃] 아카사카[赤坂]를 출발하여 서군의 뒤를 따라서 야간행군을 계속하여 밤이 물러감과 동시에 세키가하라에 도착하여 8만의 병사를 전개시켰다.

 하지만 날씨가 개전(開戰)을 허락하지 않았다. 안개가 짙어 적과 아군의 식별이 불가능하여 쌍방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 걷히기 시작한 것은 오전 8시를 지나서부터였다. 같은 시각에 최초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싸움은 동군 선봉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대 6천이 서군을 향해 돌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을 정면으로 받은 것이 우키타 히데이에의 부대였다. 곧바로 격전으로 이어졌고 후쿠시마 부대는 선봉이 무너져 궤주(潰走). 결국에는 몇 백 미터 정도 퇴각하게 되었다. 마사노리는 크게 화를 내며 은()으로 된 부대 표식을 세차게 흔들며 몸소 진두로 달려나가 패잔병들을 수습하려고 하였으나 우키타 군의 세찬 공격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동군은 이 패색에 낭패했다. 곧바로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부대, 츠츠이 사다츠구[筒井 定次]의 부대가 달려들어 우키타 부대의 측면을 노리려 했지만 곧바로 반격당하여 후쿠시마 부대와 함께 퇴각했다.

 

 히데이에는 산허리의 높은 곳에 놓여진 의자에 앉아서 이 전황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군사들을 움직이는 것은 아카시 카몬 타케노리[明石 掃部 全登]가 맡았으며, 5단으로 나뉘어져 배치된 부대는 노부하라 토사[延原 土佐], 우키타 타로우자에몬[浮田 太左衛門], 오사후네 키치베이[長船 吉兵衛], 혼다 마사시게[本多 重][각주:1]등이 각각 지휘하였다. 이 용감하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대장의 휘하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용감함으로 싸웠다.

 

 고독한 싸움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왜냐하면 이에야스의 사전 공작에 의해 서군의 7할은 깃발을 움직이지 않았고, 총을 쏘지 않았으며, 진영을 땅바닥에 붙인 채였다. 나머지 3할만이 싸우고 있었다.

 3할의 주력은 우키타 부대이며, 거기에 더해 이시다 미츠나리 부대,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라는 2부대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7할은 잠이라도 자는 듯이 방관하고 있었다. 이 서군 7할의 방관을 보고 이에야스는 당초 이겼다고 생각했다.

 

 싸우고 있는 적은 어느 깃발과 어느 깃발인가?”

 

 라며 안개 속으로 척후를 보내어 확인해 보자 위와 같았다. 이에야스가 보기에 미츠나리에게는 무략(武略)이 없으며, 히데이에는 애송이가 지나지 않았다. 오오타니 요시츠구가 다소 뛰어나다고는 하여도 영지(領地)가 작았기 때문에 그 지휘하의 병사는 소수였으며, 거기에 요시츠구 자신은 갑옷도 입지 못할 정도로 병이 진행되어 있었다.

 

 하지만 안개가 걷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황은 이에야스의 낙관론을 차츰 배신하기 시작했다. 서군의 3할이 사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군은 전선(全線)에 걸쳐서 붕괴가 시작되어 이에야스의 지휘조차 거의 전해지지 않았고, 각 부대도 연계가 끊어져 각각 싸우고 있는 형세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그 생애에서 자기 지휘하의 아군이 이렇게까지 지리멸렬한 상태로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칼과 창의 한가운데서 병사들을 질타하고 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몇 번인가 무너져 후퇴하면서도 그 풍부한 실전 경험으로,

 이길 수 있다

 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대를 마구 무너뜨리고 있는 정면의 우키타 부대가 그 위세에 비해서는 돌격이 계속해서 이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후쿠시마 부대가 4~5백 미터나 퇴각하면 그들은 더 이상 병사들을 돌격시키지 않고 멈추게 하여, 분지의 중앙까지 쫓아가는 것을 두려워해 몇 번이나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기묘한 적군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마사노리는 알게 되었다. 우키타 부대에는 아군이 없었다. 서군의 여러 장수들은 주변의 산꼭대기, 산허리, 길 옆에 포진하고 있었지만 우키타 부대의 공격에 가세하려고 하지 않았다.

 

 적은 한 겹이다! 후속 부대가 없다! 두려워 마라!”

 

 마사노리가 포효하며 어벙대고 있던 사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이 적군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면서부터였다. 마사노리가 보건대 우키타 부대에 아무리 위세가 있다고 하여도 결국엔 피로해 질 것이며, 결국에는 약해질 때가 올 것이다.

 

 마사노리는 무너져 있던 군사를 재정비해서는 역습에 나섰다. 이 때문에 사방의 진지에서 보고 있으면, 후쿠시마 가문의 산길 모양의 깃발과 우키타 가문의 큰북 깃발이 서로 검은 연기를 피우는 듯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고 때로는 서로 뒤엉켜, 때로는 한쪽이 쫓고, 때로는 한쪽이 쫓기거나 하여 어느 쪽이 이길지 알 수가 없었다. 오전 11시 즈음에는 이시다 진지 정면의 동군도 격퇴당하였고, 오오타니 진영분지 중앙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는 것에 비해, 밀린 동군은 분지의 중앙부에 뭉쳐서 헛되이 인마(人馬)의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정오가 되어서 역전되었다.

 마츠오야마[松尾山] 산꼭대기에 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가 배반하여, 15천의 병사를 휘몰아 산허리에 진지를 갖추고 있던 서군 오오타니 부대를 치고 길게 늘어진 대형(隊型)의 옆구리를 찔러 그들을 거의 전멸시켰기 때문이었다. 요시츠구는 배를 갈랐다. 이 때문에 우키타 부대는 동군의 대부분에게 포위당하여 고립되었다.

 

 히데이에에게는 이 순간에 일어난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건 킨고[金吾=히데아키]인가!? 킨고 일리가 없다!”

 

 처음 외친 것은 이 말이었다. 히데이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킨고 히데아키 거동의 수상쩍음에 대해서는 싸움이 일어나기 전부터 미츠나리 등 서군 지휘부가 계속 의혹을 가지고 있었지만, 히데이에는 어디까지나 낙관(樂觀)하여,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고 미츠나리에게도 말하였고, 요시츠구에게도 말했었다. 이 남자답게 그 이유는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의 양자이다

 

 그 뿐이었다.

 

 그는 타이코우에게 큰 은혜를 입고 있다. 나도 양자라는 입장에서 킨고의 마음을 추측하건대, 설사 모두가 히데요리[頼]님을 배반한다고 하더라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나랑 내기해도 좋다니까. 킨고는 절대 배반하지 않을 걸

 

 이라고. 그렇게만 히데이에는 말하였고, 더구나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듯했다.

 

 정말 극단적인 낙관론자이시군

 

 라고 미츠나리는 뒤에서 히데이에를 그렇게 평했으며, 실제로 히데이에와는 거병 이래 그런 쪽의 복잡한 정세에 관한 내용을 거의 상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히데이에는 세상의 기괴함을, 지금 이 전쟁터를 급변시키고 있는 이변에서 알게 되었다. 이 히데이에라는 시를 좋아하는 세상이 태평 성대한 때였다면 2류 정도의 시인이 되어 있었을 것 같은 이 인물은 자신의 우둔한 정치 감각을 깨닫는 것보다도 오히려 상대의 부도덕(不道德)에 분노했다.

 

 킨고를 용서할 수 없다!”

 

 라고 말했다. 용서하고 말고를 떠나서 이미 아래의 우키타 군세는 심각한 타격을 입어 이제는 진형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무너져 있었건만, 히데이에의 관심사는 히데아키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뿐이었으며 오히려 그리하다 죽으려고 결심하였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서는,

 

 말을 끌고 와라

 

 라고 명령했다. 지금부터 말을 달려 코바야카와 진영으로 돌격하여 킨고를 찾아서는 그와 서로 찔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용서치 않으리

 

 라고 히데이에는 말하며, 등자에 발을 걸어서는 말 위에 올랐다. 아카시 카몬이 말 끈을 잡았다.

 

 옳지 않습니다

 

 카몬은 패전의 관례로써 주장(主將)인 히데이에를 이 전쟁터에서 도망가게 하고자 하고 있었다. 북동쪽을 보자 이미 미츠나리의 사사오야마[笹尾山] 진지[陣地]도 무너져, 방금 전까지 산꼭대기에서 휘날리고 있던 [大一大万大吉][각주:2]의 깃발이 없어진 것을 보면 미츠나리도 도망쳤을 것이다. 그것을 카몬이 말하자,

 

 지부쇼우[冶部少]는 지부쇼우, 나는 나

 

 라고 이 젊은 시인은 말했다. 히데이에가 말하기를,

 

 지부쇼우는 어쩌면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이 일전을 일으켰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 의지로 이 장소에 와, 움직이고 있다. 다른 것은 모른다. 단지 고() 타이코우 전하의 유언을 받들어 히데요리님의 세상을 지키고자 있는 힘껏 싸웠다. 그것을 저 부도덕한 킨고 때문에 졌다. 킨고를 이 칼로 죽이는 것 이외에 내 의지를 관철할 길은 없다.”

 

 고 히데이에는 계속 말했지만 카몬은 듣지도 않고 재빨리 깃발을 말게 하고 부대 표식을 꺾고선 히데이에의 친위대들에게 그를 둘러싸고 도망치라고 명령하였다. 히데이에는 인마(人馬)의 흐름에 휩싸이듯이 서쪽으로 도망쳤다.

 

 히데이에는 지고 우키타 가문은 멸망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토요토미 가문의 번병(藩屛)으로 세웠던 양자들 중에 이 남자만이 양아비의 희망에 응했다.

 

*********************************************************************************************************

 

 그 후의 히데이에의 생애는 다른 이야기꺼리가 된다.

 그는 이후 사츠마[薩摩]로 달아나 은밀히 시마즈 씨[島津氏]의 비호(庇護)를 받았다. 후에 시마즈 씨가 막부(幕府)에 항복한 뒤 그 존재가 들어났지만, 시마즈 가문과 거기에 그의 부인의 친정인 마에다 가문[前田家]이 함께 막부에 탄원하여 조명(助命)을 빌었기 때문에 사형은 면하여 일단 스루가[駿河]로 보내져 쿠노우잔[久能山] 산에 유폐되었다. 이에야스에게는,

 죽일 것 까지는 없다

 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세키가하라 후 이시다 미츠나리, 안코쿠지 에케이[瓊],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등의 주모자들은 처형당하여, 그 목은 쿄우토[京都]의 강변효수(梟首)되었지만, 히데이에는 원래부터 그들에게 정객(政客)으로 대우받지 않았었고, 단지 의협심과 전투력을 인정받아 참가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과연…… 세키가하라의 전쟁터에서 저 정도로 활약하여 동군을 몇 번이나 위기로 몰아 넣었건만, 그러나 일이 지나고 보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어서, 그 존재 자체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이에야스는 판단했다.

 

 후에 쿠노우잔에서도 옮겨져, 에도[江戸] 남쪽 120(里)[각주:3] 떨어진 해상에 있는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로 유배되었다. 히데이에는 이 섬에서 40년을 살았다. 섬에서는 언제나 궁핍하여, 평소 만드는 것을 생업으로 삼아 그것을 먹을 것과 바꿔가며 간신히 덧없는 목숨을 이어갔다. 평소,


 한번이라도 쌀밥을 먹고 죽고 싶다


 가 입버릇처럼 되었다. 그것이 에도[戸]에까지 이야기가 퍼져, 어느 해인가 배편으로 몇 가마니의 쌀이 보내져 왔다. 보낸 사람은 그의 옛 신하로 세키가하라에서는 이에야스 측에 섰기 때문에 지금은 에도에서 잘나가고 있는 하나부사 시마노카미[花房 志摩守]였다. 옛 주인에 대해서 켕기는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히데이에는 1655년 겨울. 84세의 고령으로 죽었다. 그 사이 히데요리도 죽고, 이에야스도 죽어 토쿠가와 쇼우군[軍]도 이미 4대째인 이에츠나[家綱]의 시대가 되어 있었다. 세키가하라의 패배자이기는 했지만 승리자의 어느 누구보다도, 이 귀양살이를 한 사람은 오래 살았다.

 

==========================================================宇喜多秀家,======================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수어지교를 맺었다는 이에야스의 모신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둘째 아들. 에도 막부 2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유모의 아들을 죽이고 토쿠가와 가문에서 나와 우키나 가문[宇喜多家]에서 2만석을 하사받고 가로를 하고 있었다. 후에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양자가 되기도 하였으나 나중엔 카가 마에다 가문[加賀 前田家]으로 이적하여 가로(家老)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이시다 미츠나리의 부대표식에 쓰여 있던 말.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해서,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하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 같다고 함. [본문으로]
  3. 약 480km.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27 09: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키가하라 서군 참전 무장중 최장수한 친구지요. 카이에키 당하기는 했지만 장수로 보상 받았다고 생각했다면 그걸로도 위안 삼을만은 했을듯?

    (P.S..그렇게 생각하자면..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쿨럭;)

    P.S.2 오타니 요시츠구의 분전은 대단하군요. 당시에 갑옷도 못 입을 정도였을 줄은 몰랐습니다(..그러니 평이 그렇게 좋을 수 밖에)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gorefined BlogIcon 고어핀드 2008.02.27 18: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우키다 히데이에는 도요토미 집안의 사람들 중 제일 흥미 있는 캐릭터인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는 오오타니 요시츠구를 좋아하는데, 갑옷을 입지 못할 정도라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그 와중에도 분전한 걸 보니 인기있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28 01: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이야~~~ 쌀밥 한 번 먹고 죽고 싶다고 할 정도면 위안까지는....^^;;

    여담이지만... 세키가하라 서군 측에 섰던 시마 사콘의 인기도 대단하다더군요.
    쿄우토(京都)는 오랜 기간 역사의 중심지였던 만큼 어느 곳이건 역사적인 자취가 있는 곳이라 그걸 일일이 자랑으로 하지 않는다는데, 어느 음식점은 과거 시마 사콘의 쿄우토 저택이 있던 곳을 아직까지도 자랑스럽게 내세운다고 하더군요.
    ps;다메엣찌님은 호소카와 타다오키 팬?? ^^

    고어핀드님//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오오타니 요시츠구는....글로는 저렇게 간단히 표현되었겠지만, 실제로는 아마...정말...참혹한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눈도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활약을 보인 것 같습니다.
    계획으로는 이거 끝난다음에 만화 &quot;꽃의 케이지&quot;의 원작 &quot;일몽안풍류기&quot;를 하려고 하는데, 그 작품에선 마에다 케이지에게 감동을 주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에 하나로 나오더군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2.29 2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꽃의 케이지 +_+ 일본 전국시대를 처음 알게해준 만화. 중학생때 봤는데 참 충격이었던...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1 09: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다충승님//어떤 면에서 충격이셨을라나... 쩍쩍 갈라지는 것에서?
    쓸데없는 사족이겠지만...원작에선 조선으로 간답니다. 만화는 한국과의 마찰을 피하기위해서인지 류우큐우(오키나와)로 바꾸었더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3.03 1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에다 케이지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많지요.
    만화 주인공으로 어울릴만한 인물입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3 1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등장 인물들은 대부분이 찌질하게 나오더군요 ^^

  8. 2013.09.04 16: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번이라도 쌀밥을 먹고 싶은게 소원이라니ㅠㅠ내가 만나면 맛있는 한끼 대접할텐데

  9.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21: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각주 3번을 48km로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

 히데요시[秀吉]의 사후(死後), 쟁란(爭亂)이 일어났다. 1600 5월 여름. 미츠나리[三成]가 거병하였다. 간적(奸賊) 이에야스[家康]를 토벌한다고 하였다. 미츠나리에게 있어 모든 것은 히데요리[)]와 요도도노[淀殿]를 위해서였으며 이 남자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였다. 자신 말고는 토요토미 정권을 지키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비장한 각오로 임했다.

 천하의 제후는 동서(東西)로 나뉘었다.

 이러는 사이,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쿄우[京]에 있었으며,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이후 코우다이인[高台院]이라 불렸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이에야스를 후원하며, 이에야스의 힘으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보존하고자 그녀의 영향 아래 있던 여러 무장들에게 권하여 이에야스 측에 가담시키려 하였고 거의 성공하였다. 단지 그녀는 히데아키[秀秋]의 우둔함이 두려웠다. 서군(西軍)의 달콤한 말에 넘어갈 위험이 있어 히데아키의 깃발이 어느 쪽으로 향할 지, 이 젊은이에 한해서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코우다이인은 그를 쿄우로 불러,

 에도()[각주:1]은 당신의 은인입니다. 결코 방향을 틀리지 마시길

 하며 정성 들여 타일렀다. 히데아키는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
 하지만, 히데아키는 이미 그 몸이 오오사카[大坂]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엔 온통 서군 뿐이라 서군 측에 설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미츠나리는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싸움에 이기고 난 후 100만석 영지를 준다는 뜻을 전해왔다. 히데아키는 다소 동요했다.
 
서군에 붙을까?’
 그러나, 칸토우[東]에도 사자(使者)를 보냈다. 그러는 한편 서군에 붙어 동군(東軍)의 소부대(小部隊)가 수비하는 후시미 성[伏見城] 공격에 참가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도대체 히데아키는 어느 쪽에 붙어있는 것인가? 더구나 그 후 서군의 지시에 대해서 굉장히 애매한 움직임을 보였다. 예를 들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오우미[近江]의 타카미야[高宮]라는 곳에 틀어박혀서는 군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미츠나리는 히데아키의 거동을 의심하여,
 
아군에게 큰 해가 된다. 아예 죽여버리는 것이 좋겠다
 고 생각. 히데아키를 불러들여 몇 번이나 그 기회를 만들고자 했으나 히데아키는 응하지 않았다.

 미츠나리뿐만 아니라 칸토우[東]에 있던 이에야스도 히데아키에게 믿음을 주는 것을 두려워해,
 
뭐라 해도 좆병진이다.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가 없다
 고 생각하여 히데아키의 밀사(密使)가 왔어도 만족스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에야스가 에도를 출발하여 전장(戰場)으로 향하던 도중, 토우카이도우[東海道] 오다와라[小田原]에서 또 다시 히데아키의 밀사가 이에야스가 머무르는 곳으로 왔다. 그것을 이에야스의 부하 나가이 나오카츠[永井 直勝]가 응대하여 이에야스에게 만날 의향이 어떤지 물었다. 용건은 '서군을 배반하고 싶다'는 것이라고 한다.

 만날 필요 없다

 고 이에야스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했다. 이에야스는 이 즈음 서군에 가담한 여러 무장들을 와해(瓦解)시키고자 온 힘을 다하여 뒷공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료(幕僚)들은 이런 이외의 태도에 놀랐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는 서군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대부대(大部隊)를 거느리고 있으며 그 머릿수는 얕볼 수 없었다. 더구나 이쪽에서 꼬시는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내응(內應)하겠다고 자청하고 있는데, 그걸 만나지도 않겠다는 것은 어쩌자는 것일까?

 애송이 놈의 말, ()을 주기에 부족하다

 라고 이에야스는 그 이유를 말했다. 만약 함부로 응했다가 막상 그 때가 되어서 내응하지 않았을 경우 애송이의 잔머리에 넘어간 꼴이 되는 것이다. 이에야스로써는 승패 이상으로 명예가 걸린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5
일 후, 이에야스가 시라스카[白須賀]에 도착했을 때 히데아키의 세번째 밀사가
진중(陣中)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부하에게 시켜 적당히 응대하게 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 1600 9 15일 아침부터 벌어졌다. 하지만 히데아키는 여전히 서군에 속하여있었으며 더구나 계속 군을 움직이지 않았고, 분지(盆地)의 서남부에 있는 표고(標高) 293미터인 마츠오 산[松尾山]의 산꼭대기에 진()을 치고 아래쪽의 전황(戰況)을 관망(觀望)하고 있었다.

 킨고[金吾]는 도대체 어쩔 생각인가?”

 그 산을 올려보는 동서 양군의 어느 누구던 그런 의혹을 가졌다. ()은 마치 저 먼 하늘에 있는 듯했다. 당연히 아래서는 그들의 움직임을 알 수 없었고 싸울 의지가 있는지 어떤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죽은 히데요시가 킨고를 위해서 붙여준 히라오카 이와미[平岡 石見], 이나바 탄고[ 丹後] 두 명은 이미 이 전날 밤 동군의 쿠로다 나가마사[ 長政]를 통해서 내응을 약속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도 나가마사가 그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히데아키의 신청을 승낙했다. 더구나 단순히 입으로만 하는 약속이 되지 않게 토쿠가와 가문에서 오쿠다이라 사다하루[平 貞治], 쿠로다 가문[黒田家]에서는 오오쿠보 이노스케[大久保 猪之助]가 각각 연락과 감시를 위해서 히데아키의 진중에 가 있었다.

 한편, 서군 측도 될 수 있는 만큼의 회유(懷柔策)은 쓰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에,

 히데요리님을 위해서 입니다

 라 히데아키를 설득하여 전의(戰意)를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단순한 충절론(忠節論)만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히데아키에게 거대한 이익을 약속하였다. 이익이라는 것은, '히데요리님이 15살이 되시기 전까지 킨고님에게 천하를 다스리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관백[白]추대(推戴)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 조건에는 히데아키도 적잖이 마음이 흔들렸다.

 이 좁은 세키가하라 분지에 동군 약 7, 서군 약 8만의 군세가 대치하였다.
 아침. 전날 밤에 내린 비가 갬과 동시에 교전 상태가 되어
정오(正午)가 가까워짐에 따라 전황이 격렬해졌다. 더구나 서군의 주력 부대인 이시다[石田],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 등이 사력을 다해서 싸웠기 때문에, 밀린 동군은 기세가 눈에 띌 정도로 저하되었다. 이어서 오전 11시가 넘자 동군의 일부에서는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히데아키는 여전히 8천의 군사를 움직이지 않은 채 산꼭대기에서 내려올 기색조차 없이 동서 어느 쪽에도 붙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히데아키는 산 아래의 전황이 뜻밖이었다. 아군인 서군이 진다고 예상했기 때문에 적인 동군에 내응을 약속하였는데 산 아래의 전황은 서군이 유리했다. 산꼭대기에서 히데아키는 이 남자 나름대로 계산을 하였다. 이대로 상황을 봐서 이기는 것이 결정된 쪽에 붙으면 이보다 좋은 것은 없을 터이다.

 한편 이에야스에게 있어서도 이시다 쪽의 분전은 더욱 뜻밖이었을 것이다. 전투가 시작된 후 몇 번이나 마츠오 산을 올려다보며,

 킨고는 아직인가? 아직 내응하지 않는 건가?”

 하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단 말인가? 하지만 산꼭대기에 빽빽하게 세워져 있는 코바야카와 가의 깃발은 움직이질 않았고 그 거취도 알 수 없었다. 히데아키의 거동은 이에야스가 예측했던 대로가 되었다. 결국 정오 전의 이에야스는 그가 낭패(狼狽)했을 때의 버릇인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해,

 애송이에게 속다니…… 분하구나 분해!”

 라고 자기도 모르게 몇 번이고 말했다. 이에야스는 비상수단을 택했다. 위협이었다. 곧 철포대의 일부를 전진시켜 히데아키가 있는 마츠오야마의 기슭으로 보내 산꼭대기를 향해서 이에야스의 분노를 표출하는 듯이 연달아 발포하게 하였던 것이다.

 히데아키라는 남자에게는 이 발포가 무엇보다도 큰 효과가 있었다. 산꼭대기의 히데아키는 놀라 두려움에 허둥거리듯이 서군을 향해서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것이 정오였다. 8천의 코바야카와 군세는 산을 내려와 아군의 진지로 내달렸다. 전세(戰勢)는 이 순간 역전되었다.

 싸움에 이긴 후 분지 서쪽의 이에야스 진지에 여러 무장들이 모여들어 축하가 이어졌지만 이 싸움에 승리를 가져다 준 최대의 공로자인 히데아키만은 아직 자신의 진지에서 비를 계속 맞고 있었다.
 
이에야스에게 혼난다
 는 공포가 있었고 또한 자신이 연기했던 역할이 얼만큼이나 거대한 것이었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듯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

 킨고님은 아직 오시지 않은 듯하군

 하고 이에야스가 말하여 전령(傳令)인 무라코시 모스케[村越 茂助]에게 맞이해 오도록 명했다.
 
저 좆병진에게는 여러 번 손이 가는구먼
 이라고 이에야스는 생각했다. 곧이어 히데아키가 왔다. 쿠로다 나가마사가 부축하는 형태로 이에야스의 진지로 데리고 들어왔다.

 이에야스는, 히데아키에게만은 예()를 취하여 우선 자리에서 내려와, 투구의 턱끈만 풀고 말하길,

 츄우나곤님. 오늘의 전공(戰功)이 아주 크시니 앞으로 원한을 가지지 않겠소

 라며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히데아키는 놀라 앞으로 자빠지듯이 절을 하였다. 원래의 태생으로 돌아간 듯 마치 백성과 같았다. 이런 인물이 토요토미 가문일문(一門)이었다. 그 보기 흉한 모습에 그곳에 있던 토요토미 계()의 여러 무장들 역시 창피해져 모두 눈을 돌렸다. 쿠로다 나가마사가 참지 못하고 옆에 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 소곤거렸다. 마사노리는,

 당연한 것. 참새가 매에게 까불었던 것이네. 그렇다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

 라고 말했다. 하지만 마사노리 자신도 아직 사태를 충분히 이해하질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참새가 몇 시간 동안 역사의 열쇠를 쥐고 있다가 결국 공포에 떤 나머지 뛰쳐나가 이에야스에게 천하를 쥐게 만들었다. 이에야스만이 그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다. 지하(地下)의 히데요시도 이 양자(養子)가 토요토미 가문을 망하게 만드는 일을 할거라고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

 이에야스는 히데아키의 전공을 칭찬하며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에 50만석을 하사하여 그 공적에 보답하였다. 하지만 그 후 히데아키는 매일 밤 광란(狂亂)하며 음란(淫亂)에 빠졌고 적은 양의 술을 마시곤 취하여 곧이어,

 세키가하라의 전공 일등은 내다!”

 고 시녀(侍女)들을 모아서는 칼을 뽑아 들고 전쟁 흉내를 내었다. 보좌하던 노신(老臣)들도 그 광포함을 두려워하여 주요한 자는 대부분 그가 살아있을 때 뿔뿔이 흩어졌다. 곧이어 머리에 병을 얻어 세키가하라 전투로부터 2년 후인 1602 9월 오카야마 성[岡山城]에서 병으로 죽었다.

*********************************************************************************************************

  죽었다고?”

 쿄우[]의 코우다이인[高台院]은 이 조카의 부고(訃告)를 들었을 때 이렇게 말하였을 뿐이었다. 계명(戒名)도 물어보지 않고 그렇게 지나갔다. 그녀가 만든 이 양자는 토요토미 가문을 망하게 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이 세상에서  완수하였다.

=======================================================金吾中納言,======================
  1. 이에야스. 이에야스의 거성이 에도에 있었기 때문이 이렇게 불렸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njw321 BlogIcon 이그네스 2008.01.12 15: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장의야망 혁신에서는 소성 패다가 오히러 자기가 죽는 그런 비슷한 이벤이 있었던거 같은데.. (본인은 대충 봐 넘겨서 정확하진 않지만....) 여기선 병으로 죽는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12 15: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새가 매에게 까불었던 것이군요(왜 이게 해석이 저는 그토록 어려웠던걸까요..ㅎㄷㄷ; 해석하느라고 참새와 매에 관한 소설을 머릿속에서 한편 썼었더랩던;;)

    그나저나 시바선생은 몰년의 히데아키의 나이를 기입하지 않는 센스를 보여주심으로서 '실수'를 적당히 덮고 넘어가시는 센스를 발휘하셨군요(-_-..ㅎㄷ...)

    그.. 히데아키의 죽음에 관한 여러 이설을 안 넣고, 그냥 '뇌에 병이 들어 죽었다'로 간결하게 끝내는 센스도, 괜찮더군요. 역시 시바선생..이라는 느낌이랄까.

    모쪼록 수고하셨습니다. -이제는 미려한 히데이에 차례이군요(ㅎㅎ..)-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13 1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그네스님//그런 설도 있습니다. 술 먹고 전쟁 흉내내다가 소성 혹은 시녀에게 칼을 빼앗겨 죽었다는 설이나, 매사냥 나갔다 오다가 파이어볼을 채여서 그걸로 병을 얻어 죽었다는 설. 혹은 (가장 유명한)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유령에 괴롭힘 받다가 죽었다는 설. 혹은 암살 &amp; 독살설 등...
    한번 이것도 읽어 보시길.. http://blog.naver.com/valhae0810/100039195550

    다메엣찌님//참새 &amp; 매는 문맥상 그렇게 했습니다. 대항한다는 글자로 쓰여있긴 합니다만, 까분듯하게..
    저는 그 다음 문맥의 것을 살리지 못한 느낌이 드네요. [그가 말하는 ~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 투구의 턱끈만 풀어 놓는 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더군요.

    そんなこといっちゃダメ!

    저 간결함 정말 맘에 들더군요. ^^ 보통 생각하면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저주의 말 한마디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 그냥 [이 순간 전세가 역전 되었다]로 끝내시다니..

    그쵸.. 다음은 [미남의 파동]에 눈을 뜬 [미의 극에 달한 히메] 고우키(豪&amp;#23019;)가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진정한 미남을 찾다가 걸린 눈이 아름다운 청년 히데이에... 그의 고난과 역경이 다음 주부터 여러분을 찾아갑니다.(by CAPCOM)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13 2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ㅋ 아무튼 세키가하라 이후 반세기 넘게 사신 분이니.. 천수까지 복받은 미남자(ㅋㅋㅋ)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1.31 05: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quot;투구의 턱끈만 풀어놓는다&quot; 라는것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히데아키에게 각인시키려고한것 같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31 0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 과연....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군요. 전 예의상의 표현인 것 같기도 한데..
    (나름 많은 책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처음 본 표현이거든요)
    근데 히데아키가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이에야스가 과연 생각했을지...
    (...라고 할까 마치 세익스피어 문학 토론하는 것 같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