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일본판을 번역한 것. 발번역이다.

모토나리가 1557년 세 아들(모우리 타카모토[毛利 隆元],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에게 보낸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선 '三子教訓状'이라고 한다.

제1조.

몇 번이고 말했겠지만, 모우리[毛利]의 성(姓)이 절대 끊기지 않도록 유념해라

제2조.

모토하루와 타카카게는 다른 가문(킷카와, 코바야카와)을 잇고 있지만, 모우리[毛利]라는 두 글자를 소홀히, 등한시 해서는 안 된다. 모우리를 잊는다는 것은 절대로 옳지 못한 일이다. 이건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제3조.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세 명의 사이가 조금이라도 벌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한 일이 생기면 세 명 다 한꺼번에 멸망이라고 생각하라. 다른 가문을 멸망시켜 온 모우리의 자손이기에 (남들보다) 더 많은 원한을 받고 있단다. 어떻게든 살아남았다고 하여도, 가명(家名)을 잃었다면 자손 1~2명 생존해 있다고 하여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행여라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말로는 표현 못할 정도이다.

제4조.

타카모토는 모토하루, 타카카게의 도움을 받아 모든 것을 지시해라. 또한 모토하루와 타카카게는 모우리가 강력하기에 각각의 집안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자기가 뛰어나기에 각각의 집안을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만약 모우리 종가가 약해지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부하들의 마음도 바뀌는 것이니, 이것을 마음 속에 새겨놓지 않으면 안 된다.

제5조.

요전에도 말했듯이 타카모토는 모토하루, 타카카게와 의견이 맞지 않는 일이 생기더라도 장남이니까 부모의 마음가짐으로 어떤 것이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모토하루, 타카카게는 형 타카모토와 의견이 맞지 않는 일이 있어도 타카모토는 장남이니까 너희들이 따르는 것이 순리다. 모토하루, 타카카게가 그냥 모우리 본가에 있었다면, 가신인 후쿠하라[福原]나 카츠라[桂]와 같이 부하가 되어 어떤 것이건 타카모토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다. 지금은 둘 다 다른 가문을 잇고 있기는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자신들은 모우리의 가신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좋다고 생각한다.

제6조.

이 가르침은 손자의 세대가 되어도 마음에 새기고 지켜주었으면 한다. 그렇게 된다면 모우리, 킷카와, 코바야카와 세 가문은 언제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바라고는 있지만 먼 미래까지는 어찌 할 수도 없다. 적어도 너희들 세 명만은 반드시 이런 다짐을 지키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가명도 이익도 함께 잃게 될 것이다.

제7조.

죽은 니들 어머니 묘우큐우[妙玖]에 대한 공양과 명복을 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제8조.

고류우[五龍] 성주(城主)인 시시도 타카이에[宍戸 隆家]에게 시집간 딸을 나는 불쌍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니들이 나와 같은 마음으로 니들이 살아있는 동안은 잘 대해주길 바란다. 그래주지 않는다면 나는 니들을 원망할 것이다.

제9조.

지금 사리분별을 못하는 아주 어린 애들이 있다. 그건 7살의 모토키요[穂井田 元清], 6살의 모토아키[毛利 元秋], 3살인 모토토모[出羽 元倶]이다[각주:1]. 장래 머리와 마음이 남들만큼만 되어 성인이 된 애가 있으면 가련하게 여겨 어디 먼 곳에라도 땅을 나누어 주길 바란다. 만약 우둔하고 좆병진이라면 어떻게 하든 상관 없다. 아무런 도움을 줄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니들 셋과 고류우[五龍]와의 사이가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나는 정말 불행할 것 같다.

제10조.

나는 전쟁에서 많은 생명을 죽게 만들었다. 이 인과응보를 반드시 받게 될 것이기에 마음 한 편에선 항상 슬프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너희들 각자도 이것을 마음에 새겨,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젠가 이 모토나리가 이 인과응보로 인해 갑자기 죽더라도 새삼 마음의 준비가 된 니들 셋에게는 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제11조.

나 모토나리는 20살 때에 형 오키모토[興元]와 사별하고 그 이후 오늘 날까지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크고 작은 파도에 휩싸였던 모우리 가문도 다른 가문들, 많은 적과 싸워 오며 여러 가지 변화를 이루어 왔다. 그러는 변화 속에 나 한 사람만이 거친 풍랑을 헤치고 오늘날까지 살아 남은 것에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이상함을 느끼고 있다. 되돌아보면 내 몸을 위해서 특별히 조심하고 있는 것도 없고, 또한 골격이 크고 건강한 것도 아니며, 지혜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착한 마음을 가졌다며 신불이 특별히 돌보아 줄 정도도 아니다. 어쨌든 특별히 뛰어난 것도 없는데 이렇게 난국을 헤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어째서일까 하고 내 나름대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으며,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이상하다. 그렇기에 지금 하루라도 빨리 은퇴하여 평온한 여생을 보내며, 맘 편히 다음 생을 바라는 기도를 올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의 세태를 보면 불가능하기에 어쩔 수 없다.

제12조.

11살 때, 사루가케 성[猿掛城]에 살고 있을 때, 이노우에 모토카네(井上 元兼)의 집에 여행을 하던 한 스님 와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강의하였다. 어머님도 참석하여 강의를 들었다. 그때 나도 역시 11살에 전수를 받았는데, 지금도 여전히 매일 아침 기도를 빼놓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 그것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염불을 10편씩 외우는 것이다. 그러면 앞날은 물론 현세의 행복도 바랄 수 있다. 또한 우리들은 옛날부터 현세의 소원을 태양에게 기도를 올렸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내 한 몸을 지켜 준다고 생각하니 특히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니들 셋도 매일 아침 이것을 게을리 하는 일 없이 실행해 주길 바란다. 물론 태양이건, 달 어느 쪽에 하건 같다고 생각한다.

제13조.

나는 옛날부터 이상할 정도로 이츠쿠시마 신사[厳島神社]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 오시키바타 전투[折敷畑の合戦[각주:2]] 때에도, 막 싸우려는 참에 이츠쿠시마에서 사자(使者)로 이시다 로쿠로우사에몬죠우[石田 六郎左衛門尉]가 공양미와 승리를 기원하는 두루마기를 가지고 왔기에, 이것은 (승리를 내려주시려는) 신의 뜻이라 생각하여 분투한 결과 이길 수가 있었다. 그 후, 이츠쿠시마에 성을 쌓으려고[각주:3] 배를 타고 건너고 있을 때, 갑자기 적의 군선 세척이 공격해 왔었는데 교전의 결과 다수의 적을 죽이고, 그 목을 성 앞에 나란히 내 걸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어쩌면 이것은 이츠쿠시마에서 대승리를 거둘 전조일 것이라는 것으로, 내가 건너고자 할 때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신의 계시라 생각하였고, 이츠쿠시마 다이묘우진[厳島大明神]의 고마우신 가호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 속으로 크게 안도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 너희들도 이츠쿠시마 신사를 믿는 것이 정말 중요하며 나 역시도 그것을 정말 바라고 있다.

제14조.

지금까지 자주 말해 두어야지 하고 생각했던 것을 이 기회를 빌려 하나하나씩 말하였다. 이제는 이 이상 더 할 이야기는 없다. 내친 김에라고는 하여도 말하고 싶은 것을 전부 말하니 더 이상 바랄 나위 없을 정도로 나는 큰 복을 받았구나. 좋구나 좋아.

  1. 이들 3명은 모토나리의 아들들로 이 편지의 3형제와는 배다른 동생들이다. [본문으로]
  2. 스에군과 싸운 이츠쿠시마 전투의 전초전. 스에 측 7000을 역시 산으로 유인하여 기습으로 승리하였다. 이 싸움에 승리함으로써 모우리는 잠시 동안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본문으로]
  3. 미야오 성[宮尾城]을 말하는 것 같다. [본문으로]

출처: http://www.toyokeizai.net/life/hobby/detail/AC/5cb184218574b0d2647111bb5f8b7b0a/page/1/

저자: 사사키 노리히코

< Stanford Memorial Church

사진 출처는 위키(en)의 스탠퍼드 대학>


스탠퍼드(Leland Stanford Junior University)에 와서가장 먼저 놀란 것은 한국인 유학생의 존재감이었습니다. 물론 중국인 학생도 많습니다만, 그보다는 한국인 유학생의 급격한 증가가 인상적입니다.


현재 스텐퍼드에 있는 한국인 대학원생수는 395. 1995년의 159명에 비해 2배 이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제 한국인 대학원생은 중국(대학원생수 457), 인도(382)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스텐퍼드의 일대 세력이 되어 있습니다. 인구 약 5000만 명밖에 안 되는 한국이 그 26배의 인구를 가진 중국과 필적하는 유학생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 기세가 계속된다면 가까운 장래에 한국인은 유학생 중 최대세력이 될 지도 모릅니다.

최근 컬럼비아(Columbia University) 대학에서 놀러 왔던 중국인도 내가 살고 있는 기숙사에서 만나는 아시아 사람 중 대부분이 한국인이라고 말하였던 것을 보면, 이런 경향은 뉴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한국인 유학생을 보면서 감탄하게 되는 것은 영어에 대한 높은 학습의욕입니다.

스탠퍼드에서는 유학생 대상의 영어수업이 열리고 있는데, 거기에 참가하는 학생의 반 이상이 항상 한국인. 때때로 여긴 한국인가?’라고 착각할 때도 있을 정도입니다. 한글은 언어적으로는 일본어와 비슷할 정도로 영어와는 갭이 큰데도 불구하고, 영어를 말하는 힘을 급속히 키우는 노력에는 머리가 수그러집니다. 한국에서는 영어 조기교육도 활발하다고 합니다.예전에 한국인 클래스메이트가 아장아장 걷고 있는 딸에게 영어를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일본과 비교하여 영어교육열의 차이를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조국에 대한 상반된 감정


그렇다면 어째서 그렇게까지 유학이나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일까요?

추상적인 답으로써는 [21세기 글로벌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미국에서 일하기 위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만나보았던 한국인 유학생, 특히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 중에서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 사람은 거의 본적이 없습니다. 대다수는 계속 미국에서 일을 하고 싶다’, ‘일정기간 미국 연구소나 대학에서 일하고, 그 다음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학생들입니다. [한국인=애국심이 강하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 반응에는 놀랐습니다(물론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애국심의 강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오히려 자국경제가 활발하게 발전하는 것도 있어서인지, 중국 유학생 쪽이 조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많은 듯 합니다.


경제성장률도 일본에 비하면 높으며(2007년은 5.0%), 삼성, LG, 현대라는 글로벌 기업도 있는데 어째서 그들은 나라를 떠나려 하는 것일까요?

우선 장래에 대한 불안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급격한 저출산(출생률은 일본보다도 낮다)], [소득격차의 확대(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원의 임금문제 등)], [중국과의 가혹한 경쟁] 등과 직면해 있어, 미래에 대한 밝은 전망을 가지는 것이 어려운 것은 확실합니다. 최근도 통화위기설이 그럴 듯하게 퍼져, 경제의 기초가 강고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 그 이상으로 절실한 것은 역시 인생에 대한 적은 선택기일 것입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한 어느 일본인이 한국에서는 모두가 의사나 변호사를 목표로하며 가혹한 경쟁을 하고 있다. 정말 피곤할 것이다고 한탄하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물론 일본에서도 의사, 변호사는 인기입니다만 제조업, 금융업, 서비스업 등 모든 업계에 매력적인 직업이나 일이있습니다. 여러 업계에 세계적인 기업이 있어, 직업 선택기가 풍부한 것은 미국 이외에 일본과 독일 등 일부 선진국에 한할 것입니다.


경쟁이라는 것은 확실히 중요합니다만, 경쟁으로 싸울 만한 분야가 한정되어 있다면, 사회는 다양성이 증가하기보다는 획일성이 늘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이상으로 심한 수험전쟁, 학력경쟁이 그 경향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뜨거운 교육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에는 배울 만한 점이 많습니다만, 한국인 유학생에게는 [우물 안 경쟁에 지쳐서 도망쳐 왔다]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확실히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일을 하는 것은 한국인


이전 이과계통의 한국인 유학생에서 스탠퍼드에서 박사학위를 따면 미국에 남지 않더라도 삼성이건 LG 등어디에건 취직할 수 있잖아?”라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저렇게 아침부터 밤까지 오랜 시간 동안 일하는 것은 싫다”.

물론 회사나 일하는 부서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한국도 일본과 견줄 정도로 근로시간이 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2005년도 OECD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근로시간은 OECD 국가에서 톱. OECD 국가 평균인 주간 약 38시간(휴일은 제외)에 대해, 한국인 평균은 45시간입니다(참고로 일본은 34시간입니다만, 잔업이 있기에 더 길 터).

더구나 삼성에서 일한다고 하여도 일이 기술자나 연구원에게 있어서 흥미롭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삼성의 인기분야는 마케팅이나 디자인으로, 기술자나 연구원은 주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기술자천국인 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결국 현재의 유학 붐은 [한국인]의 국제경쟁력 향상으로는 이어져도, 국가로써의 [한국]의 저력을 높이는 것으로는 이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국가의 인재들이 미국으로 유출되는 의미로써는 국가에 있어 마이너스일지도 모릅니다. 중장기적으로 본다면 그들은 조국의 산업발전의 중추가 될지도 모르며, 세계에 걸쳐 활약하는 화교(華僑)와 같은 존재가 될 지도 모르고, 어쩌면 미국시민이 되어 조국에는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부()와 거대한 국내시장 덕분에 젊은이의 유출이 큰 흐름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은 일본을 이렇게까지 큰 경제로 키워 올린 앞 세대에 감사함과 동시에 일본경제의 경쟁력을 올리기 위해서 국내에 매력적인 직업, 일 등을 남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야구계와 같이, 일본의 일류인재가 계속에서 해외로 유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국내에 매력적인 직업이나 일이 없어져 어쩔 수 없이 해외로 나가야만 하기 전에 우리들이 먼저 해외로 나가 일본경제, 일본기업의 경쟁력향상에 이바지한다 그러한 용기도 지금의 일본인에게는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Ps; 이 글은 자이(東洋経済) 자동차, IT업계를 담당하던 저자(사사키 노리히코(々木 紀彦)가 휴직 후 스탠퍼드 대학 대학원에 다니면서 쓰는 시리즈 기사인 [젊은 기자의 스탠포드 유학기(若手記者スタンフォ学記)]2008-09-16일에 실린 글이다.

밤 사이 한국을 강타한 요미우리 신문의 기사를 번역해 보았음...

 

출처http://www.yomiuri.co.jp/politics/news/20080714-OYT1T00501.htm

저자: 読売新聞

게재시간: 20087142234

 

 정부가 중학교 사회 교과서의 새로운 학습지도 요령해설서에 타케시마(竹島문제를 처음으로 명기한 것은타케시마의 소유에 관해서 지금까지의 교육이 불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단지한국 측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일한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 염려되고 있다.

 

 타케시마 문제를 둘러싸고는, 2005 3나카야마 나리아키[中山 成彬] 문부과학상(당시)이 국회에서 "다음 번 학습지도 요령에서는 확실히 써야 할 것이다"고 답변하여이번 학습지도 요령의 개정 작업에서 검토가 되었다하지만 새로운 요령안의 발표시기가 올해 2월 한국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과 겹쳐문부과학성은 일한 관계에 대한 영향을 고려하여 기재를 미루었다이에 대해자민당 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생겼기 때문에문부과학성은 해설서에 명기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한국측은 민감하게 반응했다기술하는 것의 조정이 마무리에 다다른 이번 달 9이 대통령은 홋카이도우[北海道] 토우야코[洞爺湖] 서미트 회의장인 호텔에서 후쿠다[福田] 수상과 서서 이야기를 하였을 때우려의 뜻을 표명관계자에 따르면수상이 "타케시마를 쓸 수밖에 없다"고 알리자대통령은 "지금은 곤란하다기다리길 바란다"고 요구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 내에서는 "한국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말해야 할 것은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수상의 의향을 따르면서표현에 대해서는 허용되는 만큼의 최대한 조정을 거듭했다.

 

 토카이"渡海" 문부상은 11수상관저에서 마치무라 관방장관을 방문하여, 2종류의 문안(文案)을 제시했다하나는 북방영토의 기술에 이어 [타케시마 등도 언급하여북방영토와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의 영토영역에 대해서 이해시키는 것도 필요하다]고 하는 A또 하나는 이것에 이어 [또한 타케시마에 대해서는 한국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고 한국의 주장을 기록한 B안이었다최종적으로는 13일 밤, A안의 전제를 [우리 나라와 한국과의 사이에서 타케시마를 둘러싸고 주장이 상반된다는 것 등도 언급]하는 것으로 결착되었다.

 

 자민당 내의 보수파 의원은 [우리 나라의 고유 영토]라는 표현을 미룬 것에 대한 불만이 나오고 있다나카가와 쇼우이치[中川 昭一] 전 정조회장은 14, [한국에 양보하여애매한 기술이 되어버렸다견해서에 쓰는 것이라면 고유의 영토라고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여정부의 대응을 비판했다.

 

 한국 측도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내세워일한관계가 좋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만큼일본 정부 내에서는 [명기하는 것은 당연하지만타이밍이 좋지 않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마치무라 장관은 14일 기자회견에서 [일한관계가 어긋나 버리면, (북한의 핵 문제를 둘러싼) 6개국 협의의 프로세스나납치문제를 포함한 일본-북한간의 여러 현안 해결에도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고 말하며일한 쌍방의 냉정한 대응을 호소했다.

 

ps; 기사의 분위기를 전하려고 하다보니 한일을 일한으로, 독도를 타케시마로 하였음. 이건 이해를...

ps2; 대충 한 것이니 세세하게 파고 들어가지 마시길...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는 평생에 걸쳐 결코 잊지 못할 억울한 일이 하나 있다.
 "마왕"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명사 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명령에 따라 아들인 노부야스[信康]와 마누라 츠키야마도노[築山殿]를 자신의 입으로 사형선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맹자의 명령이라고는 해도 자신의 손으로 마누라와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이에야스에게도 엄청난 고뇌가 뒤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른 노부야스, 츠키야마 살해사건'은 어딘가 이상하다.
 우선 사건의 개략을 살펴보자.


 1560년 5월.
 오다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물리쳤다. 그리고 3년 뒤 천하통일을 목표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는다. 동맹의 증거로써 노부나가의 딸 토쿠히메[徳姫]와 이에야스의 아들 노부야스의 결혼이 성립된다.

 그리고 1570년.
 이에야스는 그때까지 거성이었던 오카자키 성[岡崎城]을 아들 부부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새로이 지은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10년 정도 흐르자... 이에야스의 처 츠키야마도노가 등장하여 쓸데없는 참견을 한다. 아들 노부야스 부부는 금슬이 좋아 사이에 딸 두 명을 두고 있었지만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토쿠가와 가문의 장래를 걱정한 츠키야마가 노부야스에게 미녀를 보낸다. 노부야스는 그 미녀에게 빠졌을 뿐만 아니라 오카자키 성 밑 마을에서 유행하던 풍류춤[風流踊り]에도 흠뻑 빠져버린다.
 거기에 츠키야마도노도 타케다[武田] 측의 스파이 겐케이[減敬]를 통해서 타케다 측과 내통할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츠키야마도노의 모친은 노부나가가 죽인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여동생이다. 노부나가에게는 처음부터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것이다.
 이런 것을 보고 그 때까지 무시 받고 있던 토쿠히메의 역습이 시작되었다(이번에는 노부야스의 부인 토쿠히메의 등장인 것이다). 토쿠히메는 지금까지의 사정을 편지에 적어 그것을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를 통해서 애비 노부나가에게 보냈다. 편지는 12개조로 되어 있어 그 중의 2~3개를 거론해 보면,

-. 요즘 오카자키 성 밑 마을에는 춤이 유행하고 있는데 노부야스는 그 춤에 빠졌을 뿐만 아니고 춤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활로 싸 죽였다.
-. 노부야스는 토쿠히메에게 딸려 온 시녀 코지쥬우[小侍從]를 자주 고자질한다고 입을 찢어 죽였다.
-. 츠키야마도노는 타케다의 스파이 겐케이라는 의사와 밀통하고 있으며 오다 토쿠가와 가문과 오다 가문을 망하게 해달라며 부탁하고 있다.
 이 편지를 읽은 노부나가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사실관계를 사카이 타다츠구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사카이 타다츠구는,
 "12개 중 10개는 사실이옵니다"
 며 인정해 버린 것이다. 노부나가는 노발대발했다. 화를 냄과 동시에 이것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노부나가에게 는 적자로 노부타다[信忠]가 있다. 그러나 기량이 노부야스보다 훨씬 떨어지기에 내심 장래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부타다와 노부야스의 시대가 된다면 노부타다는 노부야스의 쨉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호기로 삼아 노부야스를 죽인다면.... 이라고 생각하여, 이에야스에게 노부야스와 츠키야마도노의 사형을 명했다.

 이에야스는 앙천했다. 그러나 이에야스에게 있어 시국이 어려운 이 때에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깰 수도 없어 눈물을 삼켜가며 부인 츠키야마를 죽이고, 다음에 아들 노부야스의 배를 가르게 하였다.
이상이 사건의 개략이다.....

◎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에게 기대고 있었다?!

 이 사건은 거의 정사로 취급 받고 있으며, 이 사건을 근거로 만들어진 토쿠가와 이에야스 관련의 소설,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고뇌하는 이에야스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정말로 이상한 점이 많다. 그 이상한 점을 거론해 본다.

 우선, 이에야스에게 노부야스의 죽음을 명한 노부나가인데, 아무리 마왕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명사라고는 하여도 이때 이에야스가 어쩌면 반항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반항까지 안 가더라도, 부인과 아들의 죽음까지 명령하는 노부나가와는 더 이상 같이 못 해 먹겠다며 동맹을 파기해 올 것이라고 생각을 안 했을까??
 그랬다면 정말로 곤란한 것은 노부나가였을 터인 것이다. -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당시 상황은 이에야스보다는 노부나가가 힘든 때였다.

 노부나가는 [천하포무(天下布武)]를 선언해, 무(武)의 의한 천하통일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는 이에야스 이외에 모두 적들뿐이었다.
 그 때문에 에치고[越後]의 우에스키[上杉]에게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츄우고쿠[中国]의 모우리[毛利]에게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탄바[丹波]에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이세[伊勢]에는 타키가와 가즈마스[滝川 一益] 등 장수들을 각지에 파견하고 있었다.

 이것 외에도 '나가시노 전투[長條合戦]'에서 타케다 측과 싸워 한번은 이겼다고는 하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는 살아 남아 반격의 틈을 노리고 있었다. 거기에 에치젠[越前]의 잇코잇키[一向一揆]가 힘을 길려왔지, 칸토우[関東]에서도 호죠 우지마사[北条 氏政]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이렇게 노부나가의 주위가 모두 적 투성이로 기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에야스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있다. 당시 노부나가에게 적을 막는 것뿐만 아니라 내부를 다스리기에도 바빴다. 부하인 시바타 가츠이에와 하시바 히데요시의 불화를 시작으로, 우군으로 편입한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배반, 이어서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도 배반...이란 상태였다.
(상기는 세세히 따지면 오류가 있다. 그냥 대세가 그런 분위기였다…는 정도로 하자 – 역자 가필)

 노부나가에게 있어, 정말 기댈 수 있는 것은 이에야스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에야스에 대해 딸이 푸념을 했다는 정도로 '처와 아들을 죽여라'며 잔인하고 위험한 명령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덧붙여 노부야스의 기량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면서 호기라 생각해 죽이라고 명령한 것도 이상하다. 딸인 토쿠히메의 말이 사실이라면, 노부야스는 춤에 빠진 얼간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백성을 죽이는 바보인 것이다. 기량을 두려워하기는커녕 그 정도라면 가만 놔두어도 자멸할 터이다.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는 그런 춤에 빠진 노부야스보다 바보였던 것일까?

 이에야스가 둘을 죽인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죽인 날짜도 이상한 것이다.
 위에서 적은 개략에서는 자세히 적지 않았지만, '둘을 죽여라'하고 노부나가가 명령한 것이 1579년 7월16일. 그리고 이에야스가 자객을 풀어 츠키야마도노를 죽인 것은 8월29일인데, 이 사이 한달 반이나 걸린 것이다. 시간이 너무 걸린 것은 아닐까?
 노부나가의 성격으로 본다면 말한 것은 곧바로 실행시켰어야 할 터이다. 더구나 그 이유가 [타케다와의 내통]이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한달 반 동안이나 그대로 놔두고 있었던 것일까??
 더불어 이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를 한꺼번에 죽이지 않은 것도 이상한 점이다. 최종적으로 노부야스가 자인을 명령 받은 것은 츠키야마도노의 죽음에서 또 보름 정도 지난 9월 15일인 것이다.

◎ 이에야스에게 있어 처와 아들은 방해물이었다??!!

 어쨌든 이 사건에는 이상한 점이 많은데 이 [이상함]은 사건에서 노부나가를 빼버리면 부드럽게 연결되어 간다.
 처음부터 노부나가의 명령 따위는 없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후세의 창작인 것...이라고 해 보는 것이다.

 노부나가가 명령했다......고 쓰여 있는 것은 [徳川実紀[각주:1]], [改正三河風土記[각주:2]], [武徳編年集成[각주:3]] 등 전부 후세의 것으로, 또한 이에야스를 신군(神君)으로 쓰고 있는 자기네들끼리의 것들뿐이다. 이에야스에게 불리한 것들은 쓰여 있지 않다.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았다는 것은 창작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는 이에야스 자신의 뜻으로 죽였다...... 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에야스 스스로 사랑하는 처와 귀여운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사실 이에야스는 더 이상 츠키야마도노와의 사랑 같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1570년.
 이에야스는 그때까지의 거성인 오카자키 성을 노부야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신축한 하마마츠 성으로 옮겼다. 이때 츠키야마도노는 하마마츠로 가지 않고 노부야스와 함께 오카자키에 남아있었다. 이후 7년간 이에야스는 츠키야마도노와 별거 상태였던 것이다. 사랑이라고는 없었던 것이다.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는 이에야스의 영지(領地) 왼쪽 반인 오카자키 성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오른쪽 반인 하마마츠 성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고....
 당시 노부야스는 21살로 이에야스는 36세. 가신들은 자연히 좌와 우로 나뉘어져 있었다. 결국,노부야스를 맹주로 하는 [오카자키 파]와 이에야스를 맹주로 하는[하마마츠 파]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이다. 파벌이 생겼던 것이다.

 적으로부터의 공격보다도 내부 분열을 우려한 이에야스는 기선을 제압해 오카자키 파의 중심인물 츠키야마도노를 죽였다. 그리고 오카자키 파 면면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주요인물들을 확인해 내기 위해서였다.
 그런 뒤에 오카자키 파의 중핵인 노부야스에게 죽음을 명한 것이다. 귀여운 아들이라고 할 틈은 없었다. 파벌을 형성하여 영지를 둘로 나누려 했던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기에, 귀여워했던 만큼 미움도 그 만큼 커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도 파벌항쟁 과정에서 아들 요시노부[義信]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다테 마사무네[伊達 正宗]도 동생 코지로우[小次郎]를 참살하였다.

 덧붙여 주요인물로 확인된 [오카자키 세 행정관(岡崎三奉行)]인 고우리키 키요나가[高力 淸長], 혼다 시게츠구[本田 重次], 아마노 야스카게[天野 康景] 등의 가신은 오카자키 파에 속하였기에 사건 후 푸대접을 받았고, 오카자키 파의 필두가로(筆頭家老)였던 이시카와 가즈마사[石川 數正]는 참을 수 없어 토쿠가와 가문을 떠나 히데요시에게로 도망친 것이다.
(이 부분은 오버. 대부분 이후에도 중요한 일들을 맡았으며 카이에키나 푸대접 등에는 각각의 사정이 있었다. - 역자 가필)

 이에야스를 신군으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자기들끼리의 책이었기에 이러한 이야기를 그대로 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토쿠히메의 푸념, 노부나가의 잔인한 명령 등이 창작되어 눈물을 꾹 참으며 신군 이에야스는 사랑하는 처와 아들을...... 이 된 것이다.

 츠키야마와 노부야스의 살해는...... 이에야스 본인의 의사였던 것이다..

ps; 이 글은 1994년에 발간된 고토우 쥬이치[後藤 寿一]의 [뭔가 이상하잖아! 일본사(なんかヘンだぞ!日本史)]에 있던 것을 번역한 것입니다.예전에 하이텔 전클에 올렸던 것을 조금 손 봐서 올립니다. 조금 오버기가 있지만 그냥 그런 흐름이었다고 생각해 주시길... 세세하게 파고드면 양이 너무 많아져요~(그래서 그런 능력이 없어서 번역해서는 올리는 것입니다. --; )

  1. 에도 바쿠후의 공식 기록서. 19세기 전반 즈음 편찬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토쿠가와 가문의 역사를 기록. 19세기 전반 편찬. [본문으로]
  3. 이에야스의 전기. 18세기 중반에 작성. [본문으로]
이 게시판에 올려도 괜찮은지 모르습겠니다만...

디시의 공지와 비슷한 것인가 보더군요.

센고쿠(戦国) 시대 게시판의 기초 지식

이 정도는 알아 두지 않으면 병진 취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센고쿠 시대 전반적인 것에 대해.

  • 치안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쿄우토(京都)도 자치조직 같은 것이 있었다).

  • 하지만 역시 다이묘우(大名)끼리의 국경 근처는 위험했다.

  • 영토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석고(石高). 예를 들면 오와리(尾張)같은 곳은 저렇게 조그맣지만 50만석이 넘는 대국.

  • 1만석X250이 대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병사수. 예를 들어 50만석이면 12500, 100만석이면 25000 정도가 기준

  •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던 시대였기에 숫자가 굉장히 엉망. 오케하자마에서 이마가와4만이라던가 미미카와(耳川 오오토모(大友)와 시마즈(島津)의 싸움 역자 주)에서 오오토모 6만이라던가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

  • 노부나가는 인망이 있었다.

  • 노부나가는 이외로 좋은 사람.

  • 노부야스(信康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의 아들)는 노부나가가 죽인 것이 아니다.

  • 노부나가에게 좋지 않고 이에야스에게 좋은 이야기는 대체로 에도 시대의 창작(아네가와(姉川) 전투, 노부야스죽이기 등)

  • 노부나가와 미츠히데는 사이가 좋다.

  • 아무 때나 방화를 일삼는 것은 아니다(미노(美濃) 공략때도 산 전체를 불태우면 을 취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 노부나가는 아스퍼거 증후군

  • 삼단철포 같은 것은 없다.

  • 낙시낙좌()는 노부나가의 오리지널이 아닌 롯카쿠(六角)의 것을 베낀 것. 참고로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도 했던 것.

  • 오케하자마는 어쩌다 이겼다는 것이 대세.

  • 하지만 그걸로 노부나가를 과소평가하면 이노우 전투( 노부나가와 동생 노부유키(信行)간의 싸움 700 vs. 1700 – 역자 주), 모리베 전투(森部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목 사냥꾼 아다치(頸取足立)’를 쓰러뜨렸다는 전투. 3000 vs. 6000(사이토우()) – 역자 주), 텐노우지 전투(天王寺 텐노우지 요새(7000)을구원하는 노부나가 3000 vs 혼간지 15000의 전투. 노부나가는 선두에 서서 돌격했다고 한다 역자 주) 등 적은 수로 대군을 물리친 전투가 몇 번 더 있었기에 오케하자마에서 어쩌다가 이겼다고 하여도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다.

  • 미카타가하라 전투 최대의 피해자.

  • 신겐 정도는 여유롭게 쓰러뜨린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

  • 백성에게 사랑 받은 타이코우(太閤) 어르신이라는 것은 거짓말.

  • 혼노우(本能)()의 변시점에서 히데요시의 위치는 가신 필두인 시바타(柴田), 2위인 아케치(明智), 여러 좋은 대우를 받고 있던 니와(丹羽) 아래인 4번째 정도.

  • 가난한 농민 출신이 아니라 부잣집 출신(이었다는 설도 있다)

  • 잔혹한 행위를 많이 했다.

  • 노부나가가 죽은 다음부터 노부나가 뒤따마로 없던 것도 만들어서 퍼트린 것을 보면 정말로 성격이 나쁘다.

  • 알려진 만큼 타케나카(竹中)나 쿠로타()의 도움을 받지 않았지만 히데나가(秀長)의 힘 없이 천하인 히데요시는 될 수 없었다.

  • 토요토미 가문 멸망의 원인은 전부 이 녀석.

  • 아기씨(精子)가 없다.

  • 히데요리()는 아마 이 녀석의 아이가 아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 편.

  • 자기한테 안 좋은 것은 전부 노부나가에게 덮어 씌었다(아들 죽이기, 미카타가하라에서 3000밖에 병사를 보내 주지 않았다 등)

  • 아네카와에서의 분투 같은 것은 없었다 - 라기보다 아네카와 전투 자체가 알려진 만큼 대규모 전투는 아니었다.

  • 미카타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의 미스라기 보다 거기서 물러난다면 코쿠진()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게 되기에 어쩔 수 없이 출진. 별로 신겐이 굉장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는 것이 타당.

  • 실은 알려진 만큼 괴로운 인질 시대 같은 것은 없었다(요시모토에게는 굉장한 기대를 받았고, 타이겐 셋사이(太原 雪)에게 교육을 맡길 정도였다)

타케다 신겐 편.

  • 센고쿠 시대에서 가장 과대평가 받고 있는 과대사천왕(타케다, 우에스기, 시마즈, 다테, 쵸우소카베(長宗我部) 5명이 있지만 단어 가지로 따져서는 안 된다)의 필두.

  • 항상 우세한 상태에서 싸움을 걸기에 소수의 군사로 대군을 물리친 전투가 없다.

  • 그런 주제에 몇 번이나 졌던 것을 보면 이 녀석 역시 전쟁 하수일 것이다.

  • 노부토라(信虎) 이상으로 세금 폭탄을 먹였다.

  • 영민들에게 미움 받았다.

  • 기껏해야 코쿠진() 연합의 맹주적인 존재이기에 조직 만들기는 안 된다.

  • 사람을 쓰는 것이 정말로 뛰어난지 어떤지는 미묘.

  • 노부나가가 두려워하거나 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

  • 자기보다 격이 떨어지는 인물밖에 이기질 못한다.

  • 오야붕(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는 개기질 못한다.

  • 미카타가하라는 3배의 병력 차이가 있었기에 이길 수 있었다. 별로 신겐이 굉장한 것은 아니다.

  • 메뚜기전법(상대의 지역에서 물자를 약탈)과 인신매매로 겨우 버텼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정도.

  • 카와나카지마는 안개 속에서 퇴각하다가 우연 부딪혔을 뿐.

  • 타케다 가문 멸망의 원인은 전부 이 녀석.

  • 상대방이 일부러 동맹을 신청해서 맺었는데도 불구하고 손바닥 뒤집듯이 간단히 동맹을 끊는 것을 보면 너무 멍청이 같아서 옹호해 줄래야 옹호해 줄 수가 없다.

  • 처음부터 카이(甲斐) 22만석을 전부 가지고 있는 등 굉장히 좋은 환경.

  • 처음부터 5000의 병력을 움직일 수 있었기에 굉장히 좋은 환경.

  • 시나노(信濃)에는 다이묘우(大名)가 없는(소규모 호족 밖에 없었다) 굉장히 좋은 환경.

  • 기본적으로 역사 게임이라거나 TV 방송 등에서는 최강 취급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다테나 시마즈와 그리 차이가 나질 않는다.

우에스기 켄신 편.

  • 실은 여자가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 그 이상한 행동도 여자라고 하면 왠지 납득할 수 있는 것이 많다.
  • 메뚜기 전법과 인신매매가 특기

  • 우에스기는 **성을 뺏어 100의 금과 200의 식량을 얻었다 - 라는 게임 같은 것을 실제로 한 무서운 다이묘우(大名).

  • 10만의 대군으로 호우죠우()를 공격하지만 니노마루()도 없었던 오다와라(小田原)()을 낙성시키지 못했다.

  • 영토 확장 욕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영토 확장을 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 마지막 즈음은 북새통에 호쿠리쿠(北陸)의 대부분을 손에 넣어 100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

  • 오다 가문과의 국력 차이를 보면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이길 수 없다.

  • 테토리가와 전투(手取川)는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것이 아니라, 히데요시가 멋대로 전선 이탈하여 혼란에 빠진 카츠이에(勝家)를 쓰러뜨린 것뿐.

  • 우에스기측이 주장하는 만큼 큰 전투는 아니다.

  • 라기보다 실제로 있었는지 어떤지 조차도 미묘(있었다고 하여도 그걸로 우에스기 켄신의 명성을 높일 수 있는 듯한 큰 전투는 아니다)

호우죠우 가문 편.

  • 호우죠우라는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우지츠나(氏綱) 때부터라고 한다.
  • 알려진 소우운(早雲) 실적의 대부분은 우지츠나가 한 것.

  • 우지야스가 한 카와고에 전투(河越 - 11000으로 60000의 군세를 물리친 전투)는 여러 설이 있긴 하지만 우에스기와 호우죠우의 밸런스를 보는 한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전투로 센고쿠 시대에 기리 남을 멋진 전투.

  • 우지야스, 츠나시게(綱成), 우지시게, 우지마사 등 농성만 하였다.

  • 명군(名君)이 비교적 많은 핏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