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쿠고[筑後] 야나가와 성[柳川城]의 성주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는 용맹하고 정직한 성격이었다. 이러 성격 덕분에 나중에 기적적인 복귀를 할 수 있게 된다.

 무네시게는 큐우슈우[九州]의 강호인 오오토모 씨[大友氏]의 일족 타카하시 죠우운[高橋 紹運]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타치바나 도우세츠[立花 道雪]의 양자가 되었다.[각주:1] 이 도우세츠라는 인물은 오오토모 가문에서도 굴지의 명장이었다.

 무네시게는 이 도우세츠에게 스파르타 교육을 받으며 키워졌다.
 예를 들면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식사 중의 일이다. 도우세츠가 보자 무네시게는 생선의 뼈를 발라내며 입안에서도 뼈를 혀로 골라내서는 손으로 집어 상 위에 놓았다. 도우세츠는 천둥 같은 큰소리를 지르며 화냈다. 
 “계집애처럼 뼈를 골라내며 쳐먹다니. 머리부터 입에 넣어라. 뼈도 이빨로 으깨어 삼켜라. 타치바나 가문을 잇는다고 하는 녀석이 생선 뼈도 삼기지 못하다니 앞길도 훤하구나!”
 이렇게 성장한 무네시게이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그 용명(勇名)은 높아져만 갔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의 출진명령으로 인하여 전국에서 여러 다이묘우[大名]이 쿄우토[京都]로 상경하였다. 이때 히데요시[秀吉]는 일부러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불러 그 휘하에 있는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도 함께 호출하여 타치바나 무네시게와 대면하게 한 뒤,
 “동국(東国)에 그 누구보다 뛰어난 혼다 헤이하치[本多 平八], 그리고 서국무쌍의 타치바나 무네시게.”라고 하며 여러 다이묘우들 앞에서 소개했다고 한다.

 무네시게는 용맹함에 더하여 인정미도 넘쳤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큐우슈우의 시마즈 가문을 정벌하기 위해 큐우슈우로 내려오자, 무네시게는 그런 토요토미 가문의 휘하 무장으로 어느 성을 공격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무네시게는 히데요시를 알현하게 될 일이 생겼는데, 그때 적의 성에 사자를 보내어,
 “태합[太閤] 전하를 알현하기 위해 잠시 휴전하고자 하오. 당신들이 지금 정전을 받아준다면 반드시 당신들을 위해 구명탄원하겠소.”
 라고 말하였기에, 성 측도 무네시게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겼다고 한다.
 무네시게가 알현하러 오자 히데요시는 굉장히 기뻐하며 명마(名馬)와 명도(名刀)까지 주며 대접하였지만, 무네시게가 성을 수비하는 자들을 살려달라고 하자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무네시게는 열심히 탄원하였다. 너무도 끈질기게 달라붙자 히데요시의 참모인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가 손으로 저리가라는 시늉까지 하며 쫓아내려 할 정도였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굴하지 않고,
 “그들을 살려주시지 않는다면 저도 역시 함께 죽여주십시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무네시게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결국 받아들여 수성하던 자들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한다.

 도리를 지킨다는 점에서도 무네시게는 명쾌했다. 삿사 나리마사가 다스리기 시작한 히고[肥後]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무네시게도 동원되어 공적을 세웠는데, 히데요시는 이때의 공적에 대한 상으로 무네시게를 사위(四位) 지쥬우[侍従]에 임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무네시게는 이때,
 “생각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오나, 주인 뻘인 오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 = 소우린[宗麟]의 아들, 분고[豊後] 후나이 성[府内城]의 성주]의 관위가 오위(五位)이기에, 관위로 주인을 뛰어넘는 것은 도리가 아니옵니다.”
고 하며 오위(五位)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히데요시의 의향에 따라 사위(四位)에 서임되었다.[각주:2]

 임진왜란 때 무네시게의 용맹함에 대해서도 명성이 높다. 조선 측에 “일본군의 맹장 타치바나”라 평판이 높을 정도였다.
 특히 경기도 벽제관(碧蹄館)에서는 명나라 군의 총대장 이여송(李如松)을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함께 격파하였다. 
 이때 일본군의 군감(軍監)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무네시게에게 한가지 제안을 하였다. 이렇게 발군의 무공을 세우더라도 히데요시[秀吉]에게는 총사령관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공적으로 알려질 터이지만, 만약 나에게 부탁한다면  무네시게의 공적으로 히데요시에게 전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무네시게는 쌀쌀맞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거참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구려. 있는 그대로 태합 전하에게 전하는 것이 군감인 당신의 임무가 아니었습니까? 부탁하면 잘 말해주겠다니 그 무슨 소리입니까?”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정도로 권세를 부리던 미츠나리라 하더라도 굴함이 없는 강직함이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 측에 서 오우미[近江]의 쿄우고쿠 타카츠구[京極 高次]가 지키는 오오츠 성[大津城]을 공략하였지만, 주전장(主戰場)인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에서 서군은 참패하였다. 무네시게는 군을 되돌려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한 뒤 동군에 대한 철저항전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네시게는 할 수 없이 군을 재정비한 뒤 큐우슈우[九州] 야나가와[柳川]로 철수하였다.
 도중 역시 같은 서군에 서서 장렬한 적중돌파에 이은 철수를 감행한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와 맞닥뜨리게 되었다.[각주:3] 
 타치바나 가문의 부대는 거의 손실이 없는 편인 것에 비해, 시마즈 가문의 부대는 참담한 모습의 패잔병으로 7~80명에 불과했다. 이를 보고 타치바나의 가신들 중에는, 
 “지금이야말로 아버님의 원수를!” 
 하고 은밀히 무네시게에게 권하는 자가 있었다. 무네시게의 친아비 타카하시 죠우운[高橋紹運]은 시마즈와의 전투에서 성을 함락당해 자해했기 때문이다.[각주:4]
 무네시게는 그 가신에게 용사가 할 짓이 아니라며 혼을 내고는, 시마즈와 함께 일심하여 큐우슈우로 향했다고 한다.[각주:5]
 나중에 시마즈에서는 이때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무네시게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에게 야나가와 성[柳川城]가 공격 당했을 때 원군을 보냈다.[각주:6]

 야나가와로 귀향한 뒤 큐우슈우에 있던 동군 측의 무장들과 싸웠지만 승산이 없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개성하였다. 무네시게가 성을 떠날 날이 되자, 영내의 백성 150여명 정도가 무네시게의 앞길을 막고,
 “치쿠고[筑後] 네 고을(四郡)의 백성들 모두 무네시게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각오이오니, 부디 성으로 돌아가시옵소서”
하고 탄원한 것이다.
 무네시게는 백성들의 마음씀씀이에 감사한 뒤, 싸우지 않고 항복하는 것은 영민을 위해 개성하는 것임을 알리자, 백성들은 모두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무네시게는 일개 낭인의 신분으로 전락하지만 기적적으로 컴백을 이루어낸다. 유랑하던 무네시게를 이에야스[家康]가 고용한 것이다. 처음엔 오우슈우[奥州] 타나쿠라[棚倉] 1만석이었지만, 차츰 승진하여 결국 옛 영지였던 치쿠고[筑後] 야나가와[柳川] 10만석[각주:7]의 성주로 복귀한 것이다. 무네시게의 인덕이 이에야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
1568년생. 무네토라[宗虎, 統虎], 시게토라[鎮虎], 마사나리[正成] 등 여러 번 이름을 바꾸었고 ‘무네시게[宗茂]’라고 한 것은 말년에 와서이다. 1587년 치쿠고[筑後]의 네 개 군(四郡)에 13만 2천 석을 하사 받아 야나가와 성[柳川城]의 성주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하였기에, 전쟁 후 치쿠고 영내에서 나베시마 카츠시게[鍋島 勝茂][각주:8]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등과 싸우나 항복. 1620년 재차 야나가와 성의 성주가 된다. 1642년 11월 25일 죽었다. 75세.    

  1. 타치바나 도우세츠의 딸이며 당시 여성으로는 드물게 타치바나 가문[立花家]의 가독을 잇고 있던 긴치요[立花誾千代]와 결혼해서. [본문으로]
  2.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이 끝난 다음 해인 1588년 당시, 큐우슈우[九州]에서 '지쥬우[侍従]'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오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 류우조우지 마사이에[竜造寺政家], 타치바네 무네시게[立花宗茂] 단 4명 뿐이었다. 요시히로는 사츠마[薩摩], 요시무네는 분고[豊後], 마사이에는 히젠[肥前]이라는 각각 한 지역[国]의 주인[国主]이었으나, 무네시게는 치쿠고[筑後]의 절반 정도만을 소유함에도 지쥬우[侍従]가 되었다. 이는 무가관위(武家官位)로 다이묘우들의 서열을 만들려 하던 히데요시의 의향에 비추어보았을 때 오오토모 가문[大友家]의 휘하에 있던 무네시게를 히데요시가 얼마나 맘에 들어 했는지 알 수 있으리라. [본문으로]
  3. 1600년 9월 22일 오오사카 앞바다인 니시노미야 앞바다[西宮沖]에서 만났다고 한다. [본문으로]
  4. 그러나 실제로는 세키가하라 전후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가장 신경을 쓰고 있던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후계자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인 며느리 카메쥬[亀寿]의 오오사카 탈출을 도운 것이 먼저 오오사카에 와 있던 타치바나 무네시게였다고 한다. 타치바나는 임진-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함께 싸운 요시히로를 존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여담으로 둘이 함께 츄우고쿠[中国] 스오우[周防]에 도착하였을 때, 무네시게는 요시히로의 배로 건너가 인사를 하였는데 둘은 만나자 마자 눈물을 흘리며 서로의 생존을 기뻐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사실 시마즈 가문이 원군을 보낸 것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清正]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영지를 공격하였기에 코니시 가문이 같은 서군이었던 시마즈 가문에 원병 요청에 따른 것. 오히려 시마즈 가문과 카토우 키요마사의 군이 대치 중일 때 먼저 항복한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시마즈 가문에 편지를 써서 화해를 권고하였다. [본문으로]
  7. 정확히는 10만 9200석이라 한다. 참고로 세키가하라 전쟁 이전에는 13만 2000석. [본문으로]
  8.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의 아들. [본문으로]

 ‘성격 자체가 장난꾸러기’라고 에도시대[江戸時代]의 사서(史書)에 쓰여있듯이, 마에다 케이지로우 토시타카[前田 慶次郎 利太=토시오키[利大], 토시마스[利益]라고도 전해진다 [각주:1]]는 기행(奇行)으로 유명하다.


 카가[加賀] 100만석의 시조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조카이다. 그러나 조카이긴 하지만 피가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휘하였던 오와리[尾張] 아라코 성[荒子城]의 성주 마에다 토시히사[前田 利久]에게는 적자(嫡子)가 없었기에, 토시히사는 자기 마누라의 오빠인 타키가와 기다이유우 마스시게[滝川 義太夫 益重][각주:2]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각주:3] 마에다  가문[前田家]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이 양자로 들어온 인물이 바로 케이지로우[慶次郎]이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토시히사의 셋째 동생인 토시이에를 가문 당주로 앉혀버린 것이다.[각주:4] 그리고 케이지로우는 토시이에의 가신으로 편입된다.


 무용(武勇)도 뛰어났지만 가무음곡(歌舞音曲)도 좋아하였다. 그런 케이지로우를 토시이에는 ‘세상을 얕보는 녀석’이라며 엄히 질책하였다. 케이지로우는 그런 잔소리가 맘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자리였을 지도 모를 당주자리에 앉아있는 삼촌이 맘에 안 들었을 수도 있다.
 “이거 떠나야 겠구먼”
 이렇게 맘을 정했지만, 그냥 나가기에는 재미가 없었다. 케이지로우는 궁리하였다.


 어느 날인가 케이지로우는 토시이에에게 다도(茶道)의 자리에 초대하고 싶으니 부디 참석해 주시기를 바란다며 요청하였다. 토시이에는 ‘허허~ 이제 케이지로우도 맘을 고쳐 잡았나 보군’이라며 기쁜 마음으로 케이지로우의 저택으로 갔다. 케이지로우는 겨울이니 우선 뜨거운 물로 목욕부터 하라고 토시이에에게 권했다. 추위에 떨던 토시이에는 케이지의 마음씀씀이가 더 맘에 들었다.      
 하지만 케이지로우는 한 번 맛 좀 보라는 심산이었다. 욕조에는 냉수로 채우고 욕실에는 누가 보아도 물이 뜨거운 듯이 보이기 위해서 김이 나오도록 욕실 주변에 뜨거운 물이 담긴 그릇을 여러 개 두었다. 그렇게 김이 가득 차 있기에 속은 토시이에는 욕조로 풍덩하고 몸을 던진 것이다. 찬물에 정신이 번쩍 든 토시이에는,
 “네 이놈 케이지로우!!”
 하고 화냈지만, 그런 토시이에를 무시한 채 뒷문에 메어두었던 명마 마츠카제[松風]에 올라타자 마자 곧바로 말달려 떠난 것이다.


 전국을 방랑하였다. 하지만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가로(家老)로 지장(智將)으로 이름 높은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와 우정을 맺은 뒤[각주:5]에는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을 섬기게 된다. 이때 케이지로우는 코쿠조우인 횻토사이[穀蔵院 ひょっと斎]라는 이름으로 칭하며 기묘한 옷을 입고 카게카츠를 알현했다고 한다. 기인(奇人)으로 이미 유명했기에 우에스기 가문에서는 2000석[각주:6]을 하사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케이지로우는 나오에 카네츠구를 따라 데와[出羽]의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 공략에 참가하였는데, 이때 당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자루가 붉은 색인 창을 들고 ‘대 후헨모노[大ふへん物]’라 쓰여진 큰 깃발을 등에 지고 전투에 나선 것이다. 우에스기 가문은 유명한 무사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이들은 케이지로우의 이 등깃발[旗指物]을 보고 화를 냈다.
“신참주제에 대무변자[大武辺者=다이부헨모노[だいぶへんもの]]라는 것을 메다니 무슨 생각이냐”
고 트집을 잡았다. 그러자 케이지로우는 낄낄대더니,
“이거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하는군요. 여러분들은 시골뜨기다 보니 글자의 촉음(濁音)도 모르나 보네요. 이는 ‘대 불편자[大不便物=다이후헨모노[だいふへんもの]]’라 읽는 것입니다. 제가 오랜 낭인생활을 하여 가난하기에 이리 썼을 뿐이외다”
고 놀렸다고 한다.

굉장히 궁핍하여 불편하게 산다[だいふへんもの]고 쓰인 등깃발

 이때 입은 옷들도 눈에 띄었다. 검은 갑옷에 새빨간 전포[羽織], 황금색 염주를 목에 걸고, 금칠을 한 표주박을 옷깃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자신과 타는 말에는 자신과 똑같은 두건[頭巾]을 씌었다고 한다.


 나중에 주군 카게카츠[景勝]를 수행하며 에도[江戸]에 갔을 때, 또다시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목욕탕에 들어갈 때 훈도시의 옆에 작은 칼[脇差]를 차고 들어간 것이다. 그것을 보고 같이 입장하려던 사람들도 따라서 작은 칼을 찬 채 들어갔다. 케이지로우는 욕탕에 들어갔다 나온 뒤 차고 있던 작은 칼을 꺼내어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작은 칼은 사실 대나무로 된 때주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짜로 작은 칼을 차고 온 사람들은 칼자루도 젖고 쇠에 습기가 차 고생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쟁 뒤 우에스기 가문은 요네자와[米沢]로 삭감되어 이봉 되었기에 가신들 중에는 떠나는 사람도 많았지만, 어디까지나 우에스기 가문의 기풍을 사랑했던 케이지로우는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마에다 게이지로[前田 慶次郎]
마에다 가문[前田家]에서는 엣츄우[越中] 아오 성[阿尾城]에 있었지만[각주:7], 1590년[각주:8] 아이즈[会津]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을 섬겼고, 말년에는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강의하거나 하였다. 카게카츠[景勝]의 아들 사다카츠[定勝] 때 요네자와[米沢]에서 죽었다.[각주:9]

  1.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을 따라 요네자와[米沢]로 옮긴 뒤에는 주로 토시사다[利貞]라는 이름을 썼던 듯. 이 ‘토시사다’를 새긴 표주박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함 [본문으로]
  2. 마스우지[益氏]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또는 마스시게의 부인으로 이미 마스시게의 자식을 임신했던 여성을, 토시히사가 그런 것을 알면서도 그 여성과 결혼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4. 1569년의 일. 사족으로 아라코의 마에다 토시히사는 후년 노부나가에게 과거 반항하였다는 이유로 추방당하는 하야시 히데사다[林 秀貞]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에 노부나가에게 개기는 히데사다의 의향에 따라 자주 노부나가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취했기에, 그런 반항적인 토시히사를 경질하여 노부나가의 측근인 토시이에[前田利家]를 마에다 가문의 당주로 앉혔을 가능성도 크다. 단 이는 역자인 내 개인적인 생각이며 일본에선 아직까지 이런 주장을 하는 이는 없으니 주의요망. [본문으로]
  5. 대략 1597년 난카 겐코우[南化 玄興]라는 승려의 소개로 묘우신 사[妙心寺]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본문으로]
  6. 단 현재 남아있는 사료(慶長五年会津御在城分限帳=1600년 아이즈에 거주하는 가신 명부) 에는 외인부대[組外衆]의 필두 1000석이라 함. [본문으로]
  7. 이 당시 아오 성의 성대[城代]로 약 6000석의 지행을 받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나오에 카네츠구와 만난 것이 1597년이라 하니 1598년이 맞을 듯. [본문으로]
  9. 생몰년에 대해서 마에다 가문의 자료에 따르면 생년은 1533년이고 야마토[大和]에서 1605년에 73세로 죽었다고 하며, 우에스기 가문 사료에 생년은 1541년이며 요네자와[米沢]에서 1612년에 70세로 죽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581년 9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에치고[越後] 카스가야마 성[春日山城]에서 모우리 히데히로[毛利 秀広]라는 무장이 카게카츠의 측근 나오에 노부츠나[直江 信綱][각주:1]와 야마자키 슈우센[山崎 秀仙]을 습격하여 살해하였다. 모우리 히데히로는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에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이 둘을 원흉이라 생각하여 앙심을 품고 있었다.[각주:2]  
 카게카츠는 켄신[謙信] 때부터 우에스기 가문[上杉家] 집사(執事)의 가문인 나오에 노부츠나[直江 信綱]가 후계자도 없이 살해당했기에 나오에 가문이 끊기는 것을 안타까워 하며, 자신의 시동[小姓] 히구치 요로쿠[樋口 与六]에게 나오에 가문을 잇게 하였다. 이 히구치 요로쿠가 후에 우에스기 가문을 지탱하고 있다고 칭송 받는 명신(名臣) 나오에 야마시로노카미 카네츠구[直江 山城守 兼続]이다. 카게카츠의 시대에 우에스기 가문의 군정(軍政), 민정(民政)은 모두 이 나오에 카네츠구가 담당하였다.

 카네츠구는 키가 크고 용모도 뛰어났으며 말을 하는데 막힘이 없어 변설(辯舌)에도 능했다고 한다. 더구나 문학적인 소양도 갖추고 있었다. 에도 시대[江戸時代] 초기의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도, 문무 양쪽에 뛰어난 인물로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함께 거론하였다.

 우에스기 가문이 임진왜란에 종군하였을 때, 카네츠구는 점령한 조선 성에 들어가면 반드시 서고(書庫)부터 찾았다고 한다. 지금 요네자와 시[米沢市]에 있는 일본의 국보 송판(宋版)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는 그때의 전리품이다.[각주:3]
또한 요네자와[米沢]로 옮긴 뒤에도 일반적으로 ‘나오에 판 문선[直江版文選]’이라 칭해지는 『오신주문선(五臣註文選)』을 출판. 성 밑에 있는 젠린 사[禅林寺=현재는 호우센 사[法泉寺]]’에 학문소 ‘젠린 문고[禅林文庫]’를 열었다.

 카네츠구는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봄 기러기가 날 닮았나. 내가 기러기와 닮았나. 낙양성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돌아가네
春雁我に似たり 我雁に似たり 洛陽城裏花に背いて帰る[각주:4]
 라는 한시가 유명하다.

 카네츠구는 이렇게 학문적인 인간이면서도 의표를 찌르는 일화도 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아이즈를 영유하고 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산호우지 쇼우조우[三法寺 勝蔵][각주:5]라는 무사가 자신의 하인을 죽였다. 죽일 정도의 죄는 아니었던 듯 하인의 친척들이 화를 내며 죽은 하인을 살려내라고 소동을 일으켰다. 이를 들은 카네츠구는 백은(白銀) 20매로 합의를 보도록 하였지만, 하인의 친척들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더욱 큰소리를 쳤기에 카네츠구가 아무리 조정을 하려고 노력해도 “죽은 사람을 살려 내라”고 할 뿐으로 결말이 나지 않았다. 카네츠구는 결국 마음을 정해 판결을 내렸다.
 “어쩔 수 없구나. 그렇다면 내가 염라대왕에게 편지를 써 줄 테니 너희가 저승에 가서 그 하인을 데려오도록”
 라며 소동을 일으킨 자들[각주:6]을 저승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서는 염라대왕과 저승사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맞이하는 자를 보냈으니 부디 죽은 자를 살려서 돌려 보내 주십시오”
 라는 푯말을 세워 사람들에게 알렸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실 일리 없고 원래 중국에 있었던 이야기라고 하지만 민정가로서 유명했던 카네츠구와 연관시킨 것이 흥미롭다.[각주:7]

 또한 이런 일화도 전해진다.
 
히데요시[秀吉]가 아직 살아있을 때의 일로, 후시미 성[伏見城]에 여러 다이묘우[大名]가 모였을 때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가 품속에서 커다란 황금판을 꺼내어 모두에게 자랑하였다. 커다란 황금판이 신기했는지 다이묘우들은 모두 조심스레 손에 들고는 구경하였다. 그 말석에 카네츠구도 있었다. 카네츠구에게도 차례가 오자 카네츠구는 부채를 펴서는 그 황금판을 받고 마치 배드민턴 라켓으로 셔틀콕을 튕기듯이 통통 튀기며 살펴보았다.
 마사무네는 카네츠구가 배신(陪臣=다이묘우의 가신)이기에 다른 다이묘우들과는 달리 나름 겸손하게 행동하는 줄 알고,
 “직접 손으로 잡고 보아도 되네”
 라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카네츠구는,
 “제 손은 켄신 공[謙信公] 때부터 선봉장의 지휘봉을 쥔 손이외다.[각주:8] 저런 천한 물건을 손에 쥐면 손이 더러워지니 이렇게 부채에 올려서 보는 것이올시다.”
 라고 말하고는 부채로 탁 쳐서는 황금판을 마사무네 앞으로 보냈다고 한다.[각주:9]
 이 역시 사실이 아니지만, 카네츠구의 호방함을 말해줌과 동시에, 카네츠구가 배신이면서 다이묘우들 사이에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도 꿀림이 없는 위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카네츠구가 섬긴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은 켄신[謙信]이라는 영걸이 있었으며, 그의 자식[각주:10] 카게카츠[景勝]는 오대로(五大老)[각주:11] 중 한 명이다. 그리고 그 카게카츠의 중신인 카네츠구는 히데요시에게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인물’이라 평가 받았고[각주:12] [각주:13], 그렇기에 카게카츠가 아이즈[会津] 120만 석을 영유했을 때 히데요시의 특명으로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 석을 하사 받았다.[각주:14] 당시 30만 석 이상 영유하는 다이묘우[大名]는 이에야스[家康] 이하 11명, 히데요시가 직접 키운 무장인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는 25만석,[각주:15]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는 20만 석[각주:16]이었다.
 이렇듯 카네츠구는 배신(陪臣)의 신분이면서도 보통의 다이묘우가 가지지 못한 기량과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다른 다이묘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진면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휘된다.

 1598년 8월 히데요시의 죽음으로부터 1년 동안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하에 대한 야심을 명확히 드러냈고,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나오에 카네츠구는 차례로 아이즈로 귀국하였다. 아이즈 120만 석으로 이봉되어 아직 1년 반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고, 그 동안 히데요시의 조문을 위해 상경하거나 하여 아이즈 경영이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쿄우[京]-오오사카[大坂]에는 아이즈의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카게카츠가 영내에 도로나 다리의 정비, 성의 수축과 낭인을 새로이 등용하고 있다. 거기에 아이즈 와카마츠[会津若松]의 교외인 코우자시하라 평원[神指原]에 새로이 성을 쌓고, 본성인 와카마츠 성[若松城]의 해자를 깊게 파는 등의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바로 모반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의심했다.

 1600년 4월.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상경을 재촉하는 사자를 보냈다. 동시에 나오에 카네츠구에게는 카네츠구와 친분이 있던 쇼우코쿠 사[相国寺]의 승 사이쇼우 죠우타이[西笑 承兌]에게 명령하여 카게카츠의 상경을 권하라고 하는 편지를 쓰게 하였다.
 카네츠구는 죠우타이에게 답서를 썼다. 카게카츠에게는 이미 허락을 맡은 상태였다. 이것이 후세에 ‘나오에 장[直江状]’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에야스에 대한 통렬한 도전장이다. 내용은 죠우타이[承兌]가 의심하며 거론한 항목 하나하나씩 반론한 것이기에 굉장히 장문이지만 요점을 말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선 상경 재촉에 대해서는, 신영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고 그나마 여러 사정으로 영지 경영할 시간이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지금 착수해야만 한다는 뜻을 밝힌 후 ‘이번에 또 다시 상경하라면 영지를 다스릴 틈도 없지 않은가?’라고 하였으며, 서약서를 제출하라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썼으며 또다시 같은 것을 쓰더라도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튕겼고, 전쟁 준비를 하는 것 같다는 것에 대해서는, ‘쿄우토 근방의 무사들은 차제구(茶諸具)를 모으겠지만 우리들 시골뜨기 무사들은 창이나 철포, 활과 화살을 모은다. 이는 그 지역의 풍속이니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소”라 하였다. 이는 반쯤 약올리는 생각으로 답했던 것이리라. 계속해서 말했다. “도로나 다리를 만드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라면 당연한 일. 만약 역심을 품었다면 다른 나라와의 국경에 해자를 파고 길을 끊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굉장히 도발적인 어구를 이어갔다.
 “역심이 없으면 상경하라니 이건 마치 아이들의 말투외다. 무엇보다 역심을 품었던 자가 실패해서 도망쳐 상경해서는 새로이 땅을 하사 받고 권세가(여기서는 이에야스를 지칭)와 인척관계를 맺으며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이러한 현 세태는 카게카츠의 마음과 맞지 않는다”고 한 뒤,
 “나이후 님[内府様=이에야스], 츄우나곤 님[中納言様=히데타다]께서 아이즈를 공격하러 오신다고 하는데 모든 것은 그때 해결합시다”고 끝을 맺었던 것이다.

 5월3일. 이 서장은 오오사카의 이에야스에게 전해졌는데, 이를 본 이에야스는, 
 “63살 내 평생 지금까지 이렇게 무례한 서장은 본 적이 없다”
 며 분노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의 군을 일으켰는데, 이후의 경과는 지금까지 몇 번 언급했기에 생략하지만, 이에야스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거병 소식을 듣고 오야마의 진[小山の陣]에서 병을 되돌리자, 카네츠구는 언젠가 다시 이에야스와 싸우게 될 것이라며 그 전에 배후를 든든히 하기 위해 모가미 령[最上領]을 침공하지만 그러던 중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서군(西軍)의 패전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나오에 가네쓰구[直江 兼続]
1560년생.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고굉지신으로 히데요시[秀吉]에게도 인정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 후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카네츠구의 영지였던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로 삭감되어 이봉되는데, 카네츠구는 계속해서 성과 성 밑 마을 조영을 담당했다. 1619년 12월 19일 에도[江戸]에서 죽었다. 60세.

  1. 나중에 카네츠구의 부인이 되는 오센노카타[お船の方]의 남편이었다. 나오에 가문에는 데릴사위로 들어와 나오에 카게츠나[直江 景綱]의 딸 오센노카타와 결혼하여 남자자식이 없었던 나오에 가문을 이었다. [본문으로]
  2. 모우리 히데히로는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사망 후 후계자 다툼인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에서 처음엔 카게카츠의 반대편인 카게토라[景虎] 측이었으나 그를 배신하고 카게카츠 측으로 넘어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동맹을 맺을 때는 카츠요리에게 사자로 파견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야마자키 슈우센은 유학(儒學)을 숭상하여 배신자인 히데히로에게 약속된 은상을 못 받게 하였다. 이에 분노한 히데히로는 야마자키 슈우센과 말다툼하다 살해하였고 그 옆에서 말리던 나오에 노부츠나도 함께 살해하였다. [본문으로]
  3. 송판(宋版)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는 원래 일본에 있었던 것으로, 소유주였던 일본의 승려 난카 겐코우[南化 玄興]에게 물려받은 것이고, 조선에서 가져간 것은 『송신언행록(宋臣言行錄)』 65권 20책,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90권, 『신편고금사문유취(新編古今事文類聚)』 221권, 『부석음주례주소(附釈音周礼註疏)』 42권, 『중용장구대전(中庸章句大全)』 4권, 『산곡시집(山谷詩集)』, 『오조명신언행록 전집(五朝名臣言行録前集)』 등이라 한다. [본문으로]
  4. 언제 지어졌는지는 모르나, 일반적으로 토요토미 정권의 수도였던 후시미[伏見]를 뒤로하고 아이즈[会津]로 향할 때 지어진 것이라 한다. 낙양성과 후시미를 엮은 것. [본문으로]
  5. 쇼우조우는 ‘카츠조우’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6. 죽은 하인의 형, 큰아비, 조카. [본문으로]
  7. 이 일화는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간행된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 권15[巻之十五] 나오에 카네츠구[直江兼続] 편에 실린 것으로, 원문에 따르면 푯말에는 케이쵸우 2년(慶長二年=1597년) 2월 7일이라고 쓰여있다고 한다. 즉 본문대로 카게카츠[景勝]가 아이즈[会津]를 영유하던 때가 아닌 아직 에치고[越後]에 머물 때이다. 카게카츠가 아이즈로 이봉되는 것은 1598년의 일 [본문으로]
  8. 에피소드 같은 일화 상이 아닌 실제로 카네츠구와 켄신이 만났을 가능성은 낮다. 더구나 켄신이 죽은 1578년 당시 카네츠구는 아직 19살. 지휘봉을 쥐기에는 너무도 어리 나이이다. [본문으로]
  9. 역시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에 나오는 일화. [본문으로]
  10. 양자. 켄신 누나의 아들. [본문으로]
  1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2. 메이지 시대에 간행 된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 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배신(陪臣)으로 나오에 카네츠구,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호리 나오마사[堀直政]는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자들이라며 절찬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한편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에 만들어진 사가 나베시마번[佐賀鍋島藩]의 번사(藩士)가 간행한 하가쿠레[葉隠]의 10권 145편에서 히데요시는 천하를 취하기 위해서는 대기(大氣), 용기(勇氣), 지혜(知慧)를 겸비해야 하는데, 현재 다이묘우[大名] 중에서는 그런 사람이 없지만, 배신(陪臣) 중에는 삼요소 중 두 개씩 가진 자가 세 명이 있다. 다만 나오에 카네츠구는 대기, 용기는 있지만 지혜가 부족하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대기와 지혜는 있지만 용기가 부족,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는 용기와 지혜가 있지만 대기가 없다고 하였다 한다. [본문으로]
  14.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를 에치고에서 아이즈 120만석으로 이봉할 때, 히데요시가 카네츠구에게 30만석을 주라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카네츠구가 카게카츠에게 하사 받은 것은 6만석(위키에 따르면 카네츠구 휘하 무장[与力]까지 포함하면 30만석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15. 카토우 키요마사는 히고[肥後]의 절반. 사실 카게카츠가 아이즈로 이봉한 1598년 당시에는 19만 5천 석. [본문으로]
  16.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오와리[尾張] 키요스[清洲]를 중심으로. 24만석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신슈우 우에다 성[信州上田城]은 검은 판자벽[黒板壁]의 망루와 함께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성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성의 역사를 보면 사나다 가문의 재성 기간은 마사유키[昌幸]와 그의 장남 노부유키[信之]를 합쳐도 40년에 불과하며[각주:1], 그 뒤를 이어 들어온 센고쿠 가문[仙石家][각주:2]은 85년이며[각주:3], 그 다음을 이은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각주:4]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160년이라는 오랜 기간 이 성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현재 남아있는 우에다 성[上田城]의 망루는 센고쿠 가문이 있을 때 세워진 것이다.

 이와 같이 우에다 성[上田城]과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연결성은 역사적 시간상으로 보면 가장 짧지만, 사람들의 역사적 지식상에는 센고쿠 가문이나 마츠다이라 가문의 이름이 우에다 성과 연결되는 일은 굉장히 드물다. 즉 불운하게도 센고쿠 가문과 마츠다이라 가문은 사나다의 이름에 가려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정도로 사나다와 우에다 성의 이름을 높인 사실은 어떤 것인가?

 사나다라는 명성만으로 보자면, 그것은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사나다 일본 제일의 무사[真田日本一の兵]」라며 칭송 받았던 유키무라[幸村]가 그 중심일 것이다. 그러나 유키무라의 명성은 우에다 성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으며, 유키무라의 부친이며 축성자인 마사유키가 이 성의 주역이다. 사실 사나다의 위명(威名)이라는 것도 마사유키가 쌓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후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목전으로 다가왔을 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마사유키와 함께 서군 측에 섰기에, 전쟁이 끝난 후 키이[紀伊]의 쿠도야마[九度山]로 유배 당했던 사나다 유키무라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하였는데, 그 소식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전해졌다. 이때 이에야스는 “아비냐 아들이냐?”라며 두 번이나 거듭해서 물었으며, 더구나 그때 문을 손으로 잡고 있었는데 그 문이 덜컹덜컹 소리를 낼 정도로 떨었다. 입성한 것이 유키무라라는 것을 알고 그제서야 떨림이 멈추었다고 한다. 이 즈음 마사유키는 이미 죽어 이 세상에는 없었지만, 이에야스는 ‘사나다’라는 이름만 듣고서도 혼란에 빠져 몸을 떨 정도였던 것 같다.

 상기의 일화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에야스가 이리도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에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를 찾자면 이에야스는 두 번이나 우에다 성의 마사유키를 공격하여 두 번 다 격퇴 당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실이 이에야스에게는 사나다 마사유키와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패배자 근성에 가까운 심리상태로까지 발전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의 부친 유키타카[幸隆] 때부터 옆 나라 카이[甲斐]의 주인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을 섬겼다. 마사유키는 유키타카의 셋째 아들로 코우후[甲府]에서 태어나, 소년일 즈음부터 신겐의 측근 시동[小姓]이 되었으며, 카이의 명문 무토우 가문[武藤家]을 이어, 무토우 키헤에[武藤 喜兵衛]라는 이름으로 신겐의 곁에서 활약하였다. 신겐은 그런 마사유키를,
 “무토우 키헤에와 소네 타쿠미[曽根 内匠][각주:5]는 내 양 눈과 같다”
 라 평했다. 이런 마사유키가 신겐의 외교, 군략(軍略), 전법을 배우지 않을 턱이 없다. 또한 부친 유키타카는 신겐 휘하의 모장(謨將)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부친의 지모도 마사유키에게 흐르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1582년. 주가(主家)인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오다 가문[織田家]에게 공격 당한 끝에 도망치다 텐모쿠 산[天目山]에서 죽자, 마사유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따랐으며,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횡사하자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에 속하였고 이어서 토쿠가와[徳川] 그리고 우에스기[上杉] 식으로 주가(主家)를 바꾸어, 어떻게든 하나의 세력으로 열강들 사이에 존재감을 발휘해 갔는데, 이 수완은 주군 신겐, 부친 유키타카에게 물려받은 재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요시[秀吉]도 이러한 마사유키를 ‘종잡을 수가 없어 얕잡아 볼 수 없는 자[表裏比興の者]’라고 평할 정도였다.

 어쨌든 이야기를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사유키와의 싸움으로 되돌리자.
 1584년. 마사유키는 이 즈음 이에야스에 속해있어, 이에야스는 적대관계였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손을 잡고 있던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에 대항하기 위해 우에다 성[上田城]을 쌓았지만, 그 다음 해 이에야스가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와 화의(和議)를 맺으면서 사나다의 영지 코우즈케[上野] 누마타 지방[沼田地方]을 호우죠우 가문에 넘긴다는 방침을 정하고는 마사유키에게 통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사유키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 누마타는 이에야스에게 받은 것이 아니오. 우리들의 힘으로 손에 넣은 것이외다.”
 며 거절하였다. 거기에 지금까지 적대하고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손을 잡은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런 마사유키의 반항에 격노하며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 등에게 8000의 병력[각주:6] 을 거느리게 하여 우에다 성을 공격시켰다.
 대군을 자랑하는 토쿠가와 군[徳川軍]은 단번에 성 밑 마을을 돌파하여 성벽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사유키의 책략이며 바라던 바였던 것이다. 이때까지 유유히 바둑을 두고 있던 마사유키는 적을 충분히 끌어들였다고 판단하자 곧바로 명령을 내려, 성안에서 철포를 일제히 발사하게 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대군인 만큼 한번 혼란에 빠지자 헤어나오질 못했다. 성 밑 마을에서 갈팡질팡 도망치는 토쿠가와 군을 목표로 이번엔 복병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공격하였다. 그야말로 토쿠가와 군은 총붕괴 상태가 되었다.
 토쿠가와 군은 결국 3개월에 걸쳐 우에다 성과 대치했지만, 토쿠가와 가문의 중신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가 히데요시에게로 망명하는 대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결국 다시 공격하지 못하고 병사를 물렸다.
 
이로 인해 사나다 마사유키의 무명(武名)은 천하로 퍼졌다.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히데요시 조차 이기지 못했던 토쿠가와 군세를 작은 성 하나에 의지하여 패퇴시켰기 때문이다.

 사나다 마사유키가 다음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싸우게 되는 것은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였다. 잘 알려졌듯이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와 그의 둘째 아들 유키무라[幸村]가 서군(西軍)에 속하였고,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동군(東軍)에 속하였다.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각주:7] 도중 노부유키와 헤어져 시모츠케[下野]에서 거성 우에다 성으로 돌아 온 마사유키-유키무라 부자는 여기서 나카센도우[中山道]를 거슬러 서상(西上)하려는 토쿠가와 군의 발을 묶고자 하였다.

 9월.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가 거느리는 3만8천이 코모로 성[小諸城]에 착진. 곧바로 우에다 성을 개성하라고 명령하였다. 마사유키는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머리까지 밀고는 공순(恭順)의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증거가 되는 서약서를 제출하는데 시간을 끌었다. 히데타다는 초조해하며 재촉하였다. 그러자 마사유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실은 농성 준비를 위해서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이제야 군량 반입도 끝나, 무기나 장비류도 제대로 갖추어졌으니 한번 싸워보자 합니다”
 히데타다는 분노하였다. 지금 여기서 단번에 물리쳐주마 - 하고 우에다 성을 공격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15년 전과 똑같은 전법을 취하여 그때와 똑같이 총격을 받고 복병에 당하는 등 전투를 주도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기만 했다. 히데타다는 이 우에다 공성에서 몇 일이나 소비하였지만 세키가하라로 서둘러야 했기에, 끝내 이루는 일 없이 샛길을 이용하여 전쟁터로 향했지만 결국 세키가하라 결전에는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이에야스의 역정을 사게 된다.

 이렇게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은 두 번이나 토쿠가와 군을 쳐부순 사나이로 만천하에 그 무명(武名)을 떨치게 되지만, 불운하게도 세키가하라에서의 결전에서 서군은 패하였다. 
 이렇게 되면 다른 서군의 제장들처럼 참수죄에 처해질 터였지만, 동군에 속해있던 장남 노부유키가 필사적으로 조명탄원하였기에, 죽음만은 면하여 유키무라와 함께 코우야 산[高野山]으로 유배 당하게 되었다.
 
유배에 앞서 마사유키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나이후[内府=이에야스][각주:8]야말로 이러한 처지로 만들고 싶었는데…”
 하면서 눈물을 떨구었다고 한다.

 유배지의 마사유키에게는 노부유키를 시작으로 사나다 가문의 사람들은 일족이건 가신이건 예를 다하여, 편지도 끊임없이 주고 받았고 금전 등도 계속 보냈다. 그러나 마사유키는 유배당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16명의 가신이 따라붙었으며 다이묘우[大名]였을 때의 격식도 계속해서 유지하였다. 그랬던 만큼 드는 돈도 많았을 것이다. 마사유키는 자주 노부유키 등에게 돈을 보내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언젠가 사면 받을 날이 올 거라 기대하여, 이에야스의 측근인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에게 활발히 청탁하거나 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아무리 마사유키라도 늙어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1611년, 64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1545년생. 두 명의 형 – 노부츠나[信綱], 마사테루[昌輝]가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전사하였기에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당주가 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9]에 종군하였을 때 히데요시[秀吉]가 여러 무장들 앞에서 마사유키에게 전략을 물어보는 등 영예(榮譽)와 면목을 세우게 된다.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이에야스[家康]의 중신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둘째 유키무라[幸村]가 히데요시의 봉행(奉行)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딸과 결혼하여[각주:10] 토쿠가와 - 토요토미 양측과 연을 맺었다. 또한 마사유키의 부인은 우타 요리타다[宇田 頼忠]의 딸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부인과는 자매지간이었다. 

  1. 우에다 성 축성한 1583년~사나다 가문이 마츠시로[松代]로 이봉한 1622년까지. [본문으로]
  2. 만화 센고쿠로 유명한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의 아들 센고쿠 타다마사[仙石 忠政]가 입봉. [본문으로]
  3. 1622년~ 1706년. [본문으로]
  4. 열여덟 마츠다이라[十八松平] 중 후지이 마츠다이라 가문[藤井松平家]. [본문으로]
  5. 타케다 24장[武田二十四将] 중 한명인 소네 마사타다[曽根 昌世]. [본문으로]
  6. 토쿠가와 막부가 대패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병력을 적게 기록하였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다. [본문으로]
  8. 당시 이에야스의 관직 나이다이진[内大臣]을 중국풍으로 부른 것. [본문으로]
  9.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0. 사위 유키무라와 장인 요시츠구의 나이차이가 최소 2 ~ 최대 11살 차이라 아마 조카나 친족의 여성을 양녀로 삼은 뒤 시집 보낸 듯, [본문으로]

 쿠키 요시타카[九鬼 嘉隆]는 히라도[平戸]의 마츠라 가문[松浦家]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명한 수군(水軍) 대장이다. 요시타카의 선조는 키이[紀伊] 무로 군[牟婁郡] 쿠키 포[九鬼浦] 출신으로, 요시타카의 조부 즈음부터 시마[志摩]에 살았으며, 요시타카는 시마 7개 섬[志摩七島]의 수군을 휘하에 둔 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게 되었다.

 쿠키 수군의 위력은 뭐라 해도 유럽에서 전래한 화포중심의 새로운 장비였다.
 1578년 6월. 요시타카는 거함 7척을 이끌고, 키이의 사이가 포[雑賀浦] 앞에서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願寺] 측에 선 키이 사이가[雑賀]의 수군 500척을 ‘유럽의 화술[蛮国之火術]’로 격파하였다. 사이가의 고전적 해적(海賊)의 전법으로는 신병기 화포를 장비한 쿠키 수군에 승리할 방도가 없었다.

 7척의 거함은 폭 약 13m, 길이 약 22m로, 당시의 상식을 깨는 거대함선이었다. 더구나 선체는 철을 두른 철갑선이었다.
당시 일본에 와 있어 이 배를 목격한 포르투갈의 선교사 오르간티노는, “일본 전국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며, 우리 왕국(포르투갈)의 배와 닮았다…”고 하며 배에는 대포 3문이 장착되어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해의 9월. 오다 노부나가도 이 7척의 신예전함을 보기 위해 친히 사카이[堺]로 향할 정도였다. 이후 11월, 쿠키 수군은 이 신예함을 거느리고, 혼간지[本願寺]로 군량을 수송하기 위해 오오사카 만[大阪湾] 키즈 강[木津川] 앞에 나타난 모우리 수군[毛利水軍] 600여 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요시타카는 이 전공으로 시마와 이세[伊勢]의 각지에 3만5천 석을 하사 받아, 새로이 토바 성[鳥羽城]을 쌓고 본거지로 삼았다.

 하지만 이 일본 해군 역사상 획기적인 전함건조자의 명예는 임진왜란 때 모래성처럼 무너지게 된다. 요시타카는 수군의 총사령관적인 역할로 출진하였지만, 일본수군은 조선의 명장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에게 연전연패한 것이다.
 요시타카는 그 책임을 전가 받아 1597년 은퇴를 명령 받고 가독(家督)을 차남 모리타카[守隆]에게 물려주었다. 모리타카는 토바 성 3만 석을 영유하였고, 요시타카는 은거료(隠居料)로 5천 석이 주어졌다.

 그러나 요시타카의 운명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자 암전한다. 아들인 모리타카를 토쿠가와[徳川] 측에 서게 하고, 요시타카 자신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권고에 응하여 서군(西軍)에 선 것이다.
 처음에 요시타카는 아들인 모리타카가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을 떠나는 토쿠가와 군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미츠나리의 사자를 두 번 거절하였지만, 쿠마노 신쿠우 당[熊野新宮党]의 호리우치 우지요시[堀内 氏善]가 “오오스미노카미[大隅守=요시타카] 님만 응해주신다면 곧바로 쿠키 님 밑으로 달려가겠다.”는 것을 전해 듣고, 결국 서군 가담을 수락한 것이다.
 
또한 다시 한번 자신의 힘으로 화려한 영광의 쿠키 수군을 다시 만들고 싶었을 것인지도 모른다.

 아들인 모리타카는 아비가 서군으로 돌아섰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그것을 이에야스[家康]-히데타다[秀忠]에게 보고하여 자신에게 딴 마음이 없음을 맹세하였다. 이에야스는 그 뜻을 기뻐하며 모리타카에게 귀국하여 시마-쿠마노의 수군을 복속시키라 명령하였다.

 모리타카가 귀국하자 이미 토바 성은 요시타카의 손에 떨어져 있어, 본뜻과는 다르게 부자지간에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역시 서로 배려하며 자그마한 싸움만 있었을 뿐이었다.
 세키가하라 결전은 동군의 승리로 끝났고, 모리타카는 서군 선박의 통행을 막은 공적으로 5만5천 석으로 가증되었다.

 한편 패한 측인 요시타카는 아고[英虞]의 와구 포[和具浦]에 숨어있었지만 곧이어 자살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모리타카의 가로(家老) 토요타 고로우에몬[豊田 五郎右衛門][각주:1]이 독단으로 요시타카에게 자살을 강요했다고 한다. 모리타카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조명탄원이 성립된 것도 모른 채. – 때문에 토요타는 후에 모리타카의 명령으로 참수 당했다고 한다.[각주:2] 

구키 요시타카[九鬼 嘉隆]
1542년생. 오오스미노카미[大隅守]. 처음엔 키타바타케 가문[北畠家] 휘하였지만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속하여 혼간지 공략[本願寺攻め]에 참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에서는 서군에 속하여 1600년 10월 자살. 59세.    

  1. 토요타의 부인이 요시타카의 장녀인 것을 보면 가신들 중 필두의 위치에 있었던 듯. [본문으로]
  2. 일설에 따르면, 토요타 고로우에몬은 몸을 땅에 묻고 머리만 남겨놓은 채 옆에 톱을 놓아, 지나가는 사람들이 토요타의 목을 톱으로 베게 만들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