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jbpress.ismedia.jp/articles/-/27372
저자 : 타마키 타다시[玉置 直司]

 2011년 10월 26일에 치러진 한국 서울 시장보결선거에서 야당계열의 무소속후보 박원순(55세, 당선 다음 날 시장에 취임)가 여당인 한나라당 후보인 나경원(47세)씨에게 압승하였다.

 1년 뒤 대통령선거를 남겨놓은 시점의 ‘수도결전’에서 승부수가 된 것은 ‘경제양극화’에 대한 불만이었다. 대기업이나 재벌을 강하게 비판해 온 시민운동가 출신 박원순씨의 당선에 경제계는 술렁이고 있다.


20~40대의 70%가 여당후보에게 NO!

참패한 여당 한나라당 후보인 나경원씨의 선거공보물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그야말로 야당 단일후보의 압승이었다. 박원순씨의 득표율은 53.4%로 여당인 나경원 후보에 7포인트 이상 크게 앞섰다.

 특히 큰 차이가 났던 것이 젊은층의 득표율이었다. 지상파방송 3사의 공동출구조사에 의하면 20대 69.3%, 30대 75.8%, 40대 66.8%가 박원순씨에게 투표하여 여당의 나경원 후보를 압도하였다.

 20대~40대 젊은 층의 70%가 여당후보에게 NO를 외친 결과이기에 여당에게 있어서는 충격적이다.

 “또다시 하필이면 피곤한 사람이 당선되었군”. 개표 뒤 하루 지난 10월 27일 낮에 만난 한 재벌기업의 임원은 이렇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피곤한 사람’이라는 것은 정말 그럴 것이다. 당선된 박원순 시장은 한국 재벌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박시장은 검사출신이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변호사가 되어 시민운동에 몸을 던졌다.

 2000년 총선거 때 특정 정치인을 저격하며 ‘낙선운동’을 펼친 것은 일본에서도 굉장히 유명한데, 한국 경제계에서는 그 이상으로 유명한 것이 ‘참여연대’라는 시민운동단체이다.


한국경제계가 두려워 한 ‘참여연대’

 박원순씨가 설립 시 주요멤버로 참여한 이 시민단체는, 재벌의 세습인사나 불투명한 기업통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대상기업의 주식을 취득하여 주식총회에 참석해 적극적으로 경영진을 추궁했다. 1998년 삼성전자 주식총회는 이 참여연대의 추궁으로 13시간 반이라는 기록적인 마라톤 총회가 되었다.

 박원순씨는 그 후 ‘아름다운 재단’이라는 사회공헌단체를 설립하였는데, 이 단체에는 삼성,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이나 대기업이 빠짐없이 기부에 응하였다. 이 기부에는 대기업에 ‘박원순씨의 목표가 되었다간 큰일난다’는 생각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박원순씨는 시민운동계에서 유명했지만 일반적인 지명도는 결코 높지 않았다. 박원순씨를 단번에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한국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사회운동가로 서울대 교수이기도 한 안철수(49세)씨였다.

 안철수 교수는 서울대 의학부를 졸업 후 연구직에서 활동하였다. 원래 컴퓨터를 좋아하여 1980년대 말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하였고, 이를 사업화하여 대성공을 거둬 ‘한국의 빌 게이츠’로 불리고 있었다. 그 후 회사 운영에서 손을 떼고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한 편, 전국을 순회하며 학생이나 젊은이들을 격려, 지원하는 강연이나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안철수 열풍’이 커다란 순풍이 되다.

뉴스뱅크F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서울에서의 승리를 기뻐하는 박원순씨]

 그 인덕과 젊은이들을 자기 돈으로 지원하는 모습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으며, 책을 쓸 때마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지금은 젊은이들의 교주적 존재가 되어 있다. 안철수 교수는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할 의향을 보였지만 ‘예부터 알던 맹우’인 박원순씨도 출마한다는 소식에 단념. 박원순씨 지원이라는 포지션을 취했다.

 둘이 ‘후보단일화’에 합의한 모습은 계속해서 TV의 뉴스에 보도되어 박원순씨도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박원순씨는 야당인 민주당 등의 지지도 얻어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여 압승하였다.

 이에 대해 여당 한나라당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열세인 선거전이었다.

 무엇보다 이번 ‘보궐선거’는 한나라당 소속의 전 시장이 야당 계열의 교육감이 결정한 ‘학교 무상급식’에 반대하여, ‘시장직을 건’ 주민투표를 실시했지만 투표율이 규정에 미치지 못해, 투표자체가 무효로 되어 시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시작된 소동극이 보궐선거의 계기가 되었다.

 혼란을 일으킨 여당의 전 시장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던 중 반한나라당 세력은 눈깜짝할 새에 박원순씨를 내세웠다.

 당황하며 여당이 내세운 후보가, 서울이 지역구로 미모로 인기가 높은 국회의원 나경원 후보였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의 선두주자’인 박근혜(59세) 의원도 4년 만에 선거지원 유세에 나서 필사적으로 나경원 후보를 지원했지만, 그 차이는 마지막까지 좁히지 못했다.


‘선거의 여왕’이라 일컬어지는 차기 대통령후보에게 뼈아픈 상처

 이번 선거결과의 의미는 (1) 수도 서울에서 여당후보가 참패했다. (2) 당선자가 무소속후보였다. (3)젊은이들이 압도적으로 야당측 후보에게 투표하였다 – 일 것이다.

 서울시장에 무소속 후보가 당선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2012년 총선거(봄), 대통령선거(연말)를 앞두고 정치계에 큰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여당 한나라당에 있어서는 수도결전에서 참패한 타격이 크다. 박근혜씨는 지금까지 ‘선거의 여왕’이라 불리며, 그녀는 지원한 후보를 대부분 당선시켜 왔다.

 이번에도 서울시장 선거와 동시에 치러진 부산시 구청장 선거 등에서는 지원 유세한 후보를 격전 속에서 전부 당선시켜 자신이 가진 위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유세한 서울 시장선거에서 여당후보가 참패한 것은 본인에게 있어서도 큰 상처가 될 것이다.

 투표일인 10월 26일은 부친인 박정희 전대통령의 기일이었다. 박근혜씨는 32주년인 이날 부친의 묘 앞에서 무엇을 보고하였을까?

 야당인 민주당은 더 큰일이다. 무엇보다 서울시장 선거에 후보조차 내세우질 못했으니까. 박원순씨에게는 집요하게 민주당 입당을 권했지만 박원순씨는 일축했다. 어쩔 수 없이 박원순 지원에 힘쓰긴 했지만, ‘민주당 해체와 정계재편은 불가피’라는 목소리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결과가 된 것인가? 경제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기존정당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새로운 얼굴의 정치인’을 원하는 커다란 흐름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경제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폭발, ‘새로운 얼굴의 정치인’을 요구하는 목소리

 한국은 1997년에 IMF위기로 일컬어지는 통화위기,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초경쟁사회, 초격차사회로 재탄생 해버렸다. 과감한 합리화와 국제화를 추진한 일부 대기업은 더 강해지고 더 거대해졌다. 그런 한편 경제격차도 훨씬 벌어져버린 것이다.

뉴스뱅크F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이명박대통령의 경제정책으로 인해 일부 대기업은 돈을 벌었지만 일반시민의 생활은 어려워지기만 했다.]

 2007년 말의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후보가 압승할 수 있었던 것은 “대기업 CEO출신으로 누구보다 경제에 정통한 내가 경제를 재건하여 누구나 잘 살게 하겠습니다”라는 메시지에 많은 국민들이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기업중시’의 경제정책으로 일부 대기업은 더 거대화했지만 격차는 벌어지기만 했다.

4년 전에 경제를 지지했던 젊은층…’그들만의 경제’에 분노, 反한나라로(링크:조선일보)’. 선거 다음날 ‘조선일보’는  이런 제목으로 시장선거를 총괄했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크게 성장하는 한편 ‘생활은 더 안 좋아지기만 했다’라는 것이 일반시민의 체감경기이다.

 이명박대통령은 파이를 크게 한 뒤 분배한다고 약속했다. 확실히 파이는 커졌지만, 일부 대기업으로의 부의 편중은 더욱더 심화될 뿐이었다.

 이러한 정권에 대한 잠재적 불만에 불을 붙인 뉴스도 선거기간 중 나왔다. 이명박대통령이 퇴임 후에 살 집을 준비하였는데, 토지구입비 등을 위해 43억 원의 국비를 투입한다는 발표로 인해 국민의 반발을 사 허둥지둥 철회를 하게 되었다.

 나경원 후보에 대해서는 연회비가 1억 원이나 하는 ‘초고급 피부관리 클리닉’에 다니고 있다는 뉴스가 선거전 종반에 진보계열의 인터넷 뉴스사이트에 ‘특종’으로 올라와, 눈깜짝할 새에 네티즌에게 퍼졌다. 나경원 후보진영은 ‘연회비가 1억 원이라는 것은 허위보도다’고 반론하였지만, ‘역시 갑부 패거리’라는 네거티브이미지를 붙여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격차확대’에 대한 불만 이상으로 커다란 변화가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어, 이것이 선거전에 영향을 끼쳤다는 흥미 깊은 시각도 나왔다.


한국사회에 커다란 변화? ‘경제논쟁은 아무런 성과도 없다’라는 의식도

 어떤 정치학자는 이렇게 분석하였다.

 “IMF 위기직후부터 한국은 극심한 약육강식의 자본주의국가로 변신하였다. 누구나가 경제를 최우선시하였다. 이명박씨에게 기대한 것도 실리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IMF위기에서 15년 가까이 지나 최근에는 경제적 가치관보다도 도덕적 의식이나 정(情) 등 전통적인 가치관을 중시하는 풍조가 강해졌다.
여당인 한나라당은 꿈과 같은 경제성장을 말하며, 야당인 민주당은 분배중시를 주장한다. 많은 국민, 특히 젊은 층은 이러한 경제논쟁이 성과가 없기만 하다는 것에 자각하여 기존 정당에 속하지 않는 안철수 교수나 박원순씨에게 끌린 것이 아닐까?”

 박원순씨는 시민운동 출신이라고는 해도 지금까지의 많은 시민운동가들과는 굉장히 다른 경력의 소유자이다. 서울의 명문고인 경기고등학교에서 서울대(학생운동으로 중퇴)를 거쳐 검사가 되었다. 그 후 시민운동으로 위치를 바꾸었지만, 이데올로기를 중시하는 과격파가 아닌 보다 실무에 정통한 시민운동을 계속해 왔다.

 안철수 교수도 좀 특이한 경력이다. 둘의 공통점은 프로 정치가가 아니라는 것. 특정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운동가도 아니라는 것이다.

 투표 이틀 전인 24일 오후. 안철수 교수는 박원순씨의 선거사무소를 방문하여 격려했다. 기자 등 보도진의 앞에서 악수하고 대화를 나눈 것은 불과 5분이었지만, ‘안교수가 직접 응원했다’는 모습이 몇 번이나 TV에 나와, 마지막까지 투표할지 정하지 못하고 있던 젊은층에 나름 영향을 끼쳤다 것에는 틀림이 없다.

 이번 선거결과는 앞으로의 한국 정치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정계에서 당면의 최대 초점은 안철수 교수가 내년 대통령선거에 출마를 할지 안 할지이다.

 이번 선거에서 박원순씨를 당선으로 이끈 최대의 공로자는 안철수 교수이다. 8월말에 정계진출의 뜻을 나타낸 이후 그 인기는 상승일로이다. 대통령 선거를 생각한다면 그 전에 있는 총선거에도 준비할 필요가 있다. 안철수 교수가 기존 정당에 입당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에, 그럴 경우 야당의 재편은 불가피하다.

 안철수 교수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지금까지 ‘박근혜 대세론’으로 굳혀져 있던 여당도 커다란 변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예측 불가능한 정치의 계절, 대기업은 전전긍긍

 투표 당일인 10월 26일부터 27일에 걸쳐 한국의 정계, 미디어 관계자는 혼란에 빠졌다. 대부분의 반응은 “충격적인 결과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는 필시 안철수 교수가 출마할 것이다. 이젠 누구도 안교수에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성질 급한 어느 학자는 “여당은 2012년의 대통령선거를 포기하는 편이 좋다. 2017년을 향해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이다.

 물론 대통령선거까지는 1년 이상 남았다. 안철수 교수나 박원순 시장의 인기가 일과성으로 끝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단지 젊은층의 압도적 다수가 ‘기존 정당이 아닌 새로운 선택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 간단히 바뀔 것 같지는 않으며, 정계는 큰 변화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좀 더 눈앞의 일을 생각한다면 대기업이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원순씨가 서울시장에 취임하여 시장이라는 자리에서 대기업을 때리는 사태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세론의 대기업에 대한 시선이 더욱 싸늘해질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세론의 압력으로 이명박정권이 ‘친기업정책’에서 더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을 터이다.

 ‘정치에는 될 수 있는 한 관여하지 않는다’가 한국 대기업의 기본적인 자세이지만, 세계경제가 불경기인 지금 기업성과 악화가 예상되는 시점에서 정부의 협력을 얻지 못하는 것은 기업활동에도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2012년 총선거(봄)과 대통령선거(연말)를 실시한다. 같은 해에 두 대형선거가 실시되는 것은 20년에 1번 있을 수 있는 일로, 앞으로 본격적인 ‘정치의 계절’을 맞이한다. ‘예측 불가능한 정치의 계절’은 대기업에 있어서도 굉장히 불안한 일일 것이다. 

http://news.searchina.ne.jp/disp.cgi?y=2011&d=0415&f=national_0415_069.shtml

일본의 개소문같은 사이트 서치나의 기사입니다.
중국 검색사이트 서치나의 게시판에서 위무제 조조(魏武帝 曹操)와 일본 센고쿠 시대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중 누가 낫냐? 라는 스레가 세워져 중국어를 일본어로 쓰여진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

● 스레 세운 사람:372436683
내가 생각하기에 노부나가는 500년에 1번 있을까 말까한 야심적인 영웅이다. 조조는 1000년에 1번 나올까 말까한 교활한 영웅이다!

---------------------------------

● 織田龍秀一
노부나가는 영웅이고 조조는 간웅이다. 어느 쪽이 듣기에 좋냐? 현대 일본인은 다들 오다 노부나가를 영웅으로 간주하지. 현대 중국인은 조조가 영웅인지, 간웅인지, 야심가인지 잘 모른다. 시대가 달라도 답은 이미 나온 거 아냐?

● 122.96.254.*
어느 쪽이 강하냐고 하면 어렵군. 둘 다 많이 닮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중국인이니까 역시 조조를 지지해!

● 鳳雛一輝
완성 전투와 혼노우 사의 변. 누가 살아 남고 누가 죽었는지를 보고 알아야지.

● 玉柴政夏
조조는 단지 토지와 농민 획득 방법을 잘 알고 있었을 뿐이야. 한편 노부나가는 위대한 개척자다.

● LOVE歩歩ayumi
조조 쪽이 교활하다고 생각해. 노부나가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뭐 한때 지랄 좀 떤 거 같지만

● abcdxyz2010
노부나가는 천하인으로서 사리사욕이 없었다고 생각해. 조조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야심뿐이었다고 생각해

● 211.136.115.*
↑ 노부나가에게 사리사욕이 없었다고? 사리사욕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일까? 조조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야심뿐이었다고? 젊었을 적의 조조는 손권과 함께 한왕조에서도 손꼽히는 충신으로 여겨진 적도 있다구. 정말 이 게시판에 있는 놈들은 어째서 이렇게 조조를 깔려고만 하는거야?

● 陸不遜
그다지 노부나가빠들을 공격하려는 것은 아닌데, 노부나가는 자기 부하조차 확실히 관리하지 못해 결국 자살했잖아.

● sjy1201
조조가 죽은 뒤 그 자식들을 북방을 계속 지배했지.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뒤 적자는 영지를 지키지 못했어[각주:1]. 다른 자식들의 결과도 모두 알고 있을 터.

● blkid
노부나가는 동탁과 닮았지. 동탁도 강했어. 하지만 조조에 비교하기엔 부족하지

● 849319572
그냥 둘을 몇 번 싸우게 해보면 알지 않아?

  1. 노부나가의 적자 노부타다[信忠]는 노부나가와 같은 날 죽음. 아마 글쓴이는 노부타다의 적자 히데노부[秀信]와 헷갈린 듯. 히데노부는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에서 미노[美濃] 기후[岐阜] 13만석. 정삼위[正三位] 곤츄우나곤[権中納言]이 되나, 세키가하라 때 서군 측에 서 영지 몰수 후 얼마 안가(1605년) 죽음. [본문으로]

 ‘오케하자마 전기[桶狭間戦記]’ 최종화에서 타이겐 셋사이[太原 雪斎]가 어렸을 적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타이르는 장면이 있다. 말하길,
 “난세에서 살기 싫다면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정점에 서서 난세를 끝내거라” 

 이는 아사쿠라[朝倉] 5대 100년의 번영을 쌓은 중흥조(中興祖) 아사쿠라 소우테키[朝倉 宗滴]의 [아사쿠라 소우테키 말씀집[朝倉宗滴話記]]에 나오는 말이 출처이다. 소우테키는 1477년생이며 셋사이는 1496년생. 기이하게도 아사쿠라 소우테키와 타이겐 셋사이는 같은 1555년에 죽는다. 그야말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인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소우테키는,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이기는 것이 최고다

 라고 하였다. 아사쿠라 가문[朝倉家]의 군사 책임자[軍奉行]로 생애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낸 무장의 말이다. 그것은 소빙하기로 인한 기근에서 살아남은 중세인(中世人)의 말이기에 무게감이 있다.

 소우테키는 간단하게 무자(武者)의 마음가짐을 말한 거라 여겨진다. 하지만 전투에 참가하는 무자란 기본적으로 소규모이긴 하여도 재지영주(在地領主)이다. 자립한 센고쿠의 마을=총촌(惣村)의 영주는 그 마을 내의 재판권과 징세권[徵稅權]을 가진다. 그 영주들은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살아 남는다”를 규범으로 삼아 행동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거기에는 조정(朝廷)도 막부(幕府)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대전제가 있다. 그 행간에서 “나에 대한 것은 내 자신이 결정한다”는 사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내 몸은 내가 지킨다”는 냉철한 사상이다. 철포나 칼로 무장하는 것도 자력(自力). 어떤 영주에게 붙는가도 자력. 전투에 참가하는 것도 자력. 물길 싸움으로 물을 확보하는 것도 자력. 중세인은 모름지기 자력(自力)이었던 것이다. 이를 역사용어로 “자력구제(自力救濟)”라고 부른다. 글자 그대로 ‘자력’으로 ‘구제’한다는 사상이다.

 이 자력구제가 인정되는 아니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중세에는 전쟁이 필요했으며 전쟁이 분쟁해결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4권에서 언급했듯이 “약탈[乱取り]’이라는 ‘전쟁작법(戦争作法)”에 따라 전투 그 자체가 국가 운영의 한 수단으로 변해간다.

 이 자력구제를 확실히 명문화(明文化)하여 법제도로 확립시킨 것이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이지 않을까? [이마가와 법률 추가[今川仮名目録追加]]에서

스스로의 역량을 가지고 내 영국[国]에 법도를 반포
(自らの力量を以って、国の法度を申しつけ)

함으로써,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이 ‘자력’으로 재판권, 징세권을 가진다고 선언하였다. 즉 ‘자력구제’를 ‘영국[国]’ 단위로 확대시킨 것이다. 그렇게 세력을 확대하여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태수(太守)가 되어, 마침내 오와리[尾張]에 침공하지만 도중에 쓰러진다. 그러나 ‘영국을 자력구제’한다는 사상은 [코우슈우 법도[甲州法度之次第]] 등 각 가문의 분국법(分国法)[각주:1]에 영향을 끼쳐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의 근본사상이 되었다.

 오다 정권[織田政権]이 어떠한 천하통일을 구상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정권을 이은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 토쿠가와 정권[徳川政権]을 보면 ‘자력구제’를 어떻게 하면 배제하느냐가 정치과제가 되어 간다.
 토요토미 정권은 ‘태합검지[太閤検地]’로 석고(石高)를 명확히 하고, ‘칼사냥[刀狩り]’으로 무장을 해제시켰으며, ‘다툼 정지령'[喧嘩停止例]’으로 총촌(惣村)의 전투를 금지하였고, ‘총무사령(惣無事令)’으로 다이묘우[大名]’간의 다툼을 중재하였다. 이는 전부 ‘자력구제’의 부정이었다. 자력구제를 뼛속까지 이해하며 하극상(下剋上) 최대의 구현자인
히데요시[秀吉]가 이런 것들을 전부 규제하게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그리고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들어서게 되자 전일본의 재판권, 경찰권을 막부가 장악하게 되어 중세의 종말, 근세의 시작을 보게 된다. 유일하게 신고제에 따른 ‘복수[仇討]’만이 허용되게 되지만, 이는 더 이상 ‘자력구제’라고 볼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렸을 적 셋사이와 요시모토에게 교육받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살아가며 그야말로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그리고 강대한 무력을 배경으로 ‘스스로의 역량을 가지고 영국[国]에 법령을 반포’,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열어 난세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가 자신의 영지에 반포한 법. [본문으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 행해진 전투[合戦]에 대해서는 굉장히 복합적인 연구가 다수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런 다채로운 세계가 우리들을 매료하고 있다. 이번에는 작중에서도 많이 언급되고 있는 전시약탈[乱取り=乱妨라고도 한다]이라는 단어를 축으로 당시의 전투 풍경에 대해 추구하고자 한다.

 [갑양군감[甲陽軍鑑]]에서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 한 말로 유명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전투에서 이기려는 목적은 남의 영지를 점령하여 자국의 영지를 확대하는 것에 있다. 영지를 확대해야만  자국의 사람들은 은상을 얻어 기뻐한다. 때문에 소령(所領)을 얻고 거기에 또 가증을 받아 입신출세하는 것이 사무라이[侍]의 본망인 것이다.
  즉 “창 한 자루로 무공을 세워 언젠가는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전쟁터로 향한다”는 사상이며 지금까지의 센고쿠 시대 전투 이미지는 이 말에 다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당시의 전투를 묘사한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각서[日本覚書]]의 기사를 살펴보자. 일시를 보면 ‘1585년 6월 14일’이라고 한다. 전 661항목 중 3개 항목을 소개한다.

一. 우리들(유럽인)에게는 하사관, 소대장, 십인조장(十人組長), 백인대장(百人隊長) 등 (계급이) 있다. 일본인은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一. 우리들의 국왕이나 대장은 병사에게 보수를 준다. 일본에서는 병사들 각각이 종군하면서 먹거나 마시거나 입는 것들을 전부 자비로 해야만 한다. 
一. 우리들은 토지나 도시, 촌락 및 그곳의 부(富)를 빼앗기 위해 다툼이 일어난다. 일본의 전투는 언제나 대부분이 밀, 보리, 쌀을 빼앗기 위한 것이다.
 일본 군대는 지휘계통을 가진 계급제도가 없고, 병사들은 종군 중에 식사나 의복도 전부 자비로 준비하며, 토지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쌀이나 보리 등의 식량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한다.
 프로이스는 일본 무사의 군대를 이렇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살핀 [갑양군감]의 기사와는 많이 다르다. 과연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운 것일까? 다시 [갑양군감]을 보면 이런 기사가 눈에 띈다. 텐분11년[각주:1]에 행해진 [다이몬 고개 전투[大門峠合戦]]의 한 구절이다.
10월 7일에 코우후[甲府]를 출진했다. <중략> 25일에는 우미지리[海尻=현 미나미사쿠 군[南佐久郡]]로 출진하시는 것이 결정되자 주민의 가옥을 부시고[小屋落し][각주:2], 약탈[乱取り], 전답에 남아 있던 농작물 약탈[刈田働き]를 행하는 잡병들의 약탈이 시작되었다. <중략> 약탈이 3일간 밤낮에 걸쳐서 행해졌다. 내일부터는 조금 멀리 약탈하러 나가고자 하여 아침에 출발 저녁에 본진에 돌아왔다.
 여기서 나오는 약탈[乱取り]이라는 것은 인신매매를 하기 위한 납치, 물건의 약탈 등을 말하는 단어다. 전쟁하러 간 곳에서 먹을 수 있는 것, 사용할 수 있는 것,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등 모든 것을 빼앗았다는 묘사다. 
 결국 4일 후 신겐은 스와 대명신[諏訪大明神]에게서 신탁을 받았다는 형식으로 약탈을 정지시킨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내용은 프로이스가 기록한 것을 방불케 하여 군단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잡병의 약탈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이 당시 전쟁터 약탈[乱取り]의 실태가 아닐까? 앞서 본 ‘입신출세를 위한 전투’가 아니라, ‘약탈[乱取り]을 위한 전투'인 것이다. 유추해 보자면 신겐이 주창한 ‘사무라이의 본망’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부대를 이끄는 무장(武將)의 마음가짐이지 적장의 목을 베어 은상을 얻는 것이 불가능한 잡병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오케하자마 전기 4권 19화에 등장하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13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도 ‘약탈[乱取り] 당하였다. 1550년 미요시 나가요시[三好 長慶]에게 대항하기 위해 나카오 성[中尾城]에서 농성하던 요시테루는 미요시 군의 공세에 결국 철퇴. 성을 넘겨 주고 도망쳤다. ‘토키츠구 경기[言継卿記]’를 살펴보자. 

오늘 밤(11월 21일), 히가시야마[각주:3] 무가[東山武家=요시테루[義輝]]의 성이 함락되었다. 스스로 불을 질렀다고도 한다 <중략> 그저께 불타고 남은 건물에 다시 불을 질러 약탈했다고 한다. 히가시야마 무가의 성 오늘 미요시 군세 약탈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미요시 군은 공성전에서 승리한 후 철저하게 불을 지르고 약탈했다. 쇼우군의 권위도 잡병들의 약탈[乱取り]를 막지 못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대다수의 다이묘우[大名]들은 잡병들의 약탈[乱取り]을 묵인했다. 약탈이 전투에 참가시키는 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투가 보다 합리화된 텐쇼우 연간[天正年間] 즈음이 되자 ‘약탈[乱取り]’은 주로 인간을 납치하는데 의미가 좁혀진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전투의 상태를 종합하자면 다음과 같은 전투의 작법을 볼 수 있다. 
 ①. 출진한 군단은 야전이나 공성 등의 전투를 행한다. 
 . 승패가 결정된 뒤 또는 전투가 행해지던 중에도 잡병들은 약탈[乱取り]을 한다. 쌀이나 일용품 등(또는 인간)을 약탈한다. 사무라이 타이쇼우[侍大将]나 다이묘우는 그런 약탈[乱取り]을 묵인한다. 
 . 전투에 승리하여 약탈[乱取り]이 행해지는 기간(3~4일간) 후에 푯말을 세워 [약탈 금지] 등의 명령을 내린다. 
 . 다이묘우는 점령한 영지(領地)의 지배권, 잡병은 빼앗은 쌀이나 일용품을 가지고 본국에 돌아온다. 

 그야말로 기근에서 탈출하기 위한 전투 – 라는 측면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신장공기[信長公記]’에 따르면 노부나가[信長]가 특별히 귀여워하던 하얀 매(鷹)에게 ‘란토리[乱取り] – 즉 약탈 –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란토리가 나오는 매사냥을 보기 위해서 군중이 모일 정도로 인기를 떨쳤다고 한다. 우뢰와 같은 갈채를 받으면서 사냥감을 잡는 ‘란토리’. 센고쿠 시대의 세상을 잘 표현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1542년. [본문으로]
  2. 진영에 세우는 가건물을 세울 때, 나무를 베어 가공을 하면 시간이 걸리기에 주변 가옥을 부셔서 세웠고 이것을 小屋落し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3. 아시카가 쇼우군의 정무소가 있던 지역 이름. [본문으로]
출처: http://www.asahi.com/international/update/1114/TKY201011130389.html

 한국 이명박 대통령과 후나바시 요우이치(wiki_jp)[船橋 洋一] 아시히 신문 주필의 인터뷰 일부를 발췌하는 기사들은 있으나 전문은 게재한 곳이 없기에(...있으면 대략 시간낭비) 번역해 올립니다.

- 는 후나바시 요우이치 씨의 질문.
굵은 글자는 이명박 대통령의 답변입니다.




- G20 의장국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셨습니다. G20을 앞으로 어떻게 키워나가고자 하십니까? 그리고 의장으로서 이번 회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처음 G20이 모인 것은 2008년 11월 워싱턴. 그때는 (금융)위기였기에 선진국, 신흥국 등 대륙을 대표하는 나라들이 모였습니다. 지금은 회복기에 들어섰습니다만 걱정은 남아있습니다. 위기 때는 단결하지만 회복기가 시작되면 나라마다 각각의 사정이 다르기에 과연 한마음이 될 지 걱정입니다. 그 고비가 된 것이 서울에서의 회의입니다. 앞으로도 G20이 계속 이어질 것인가, 서울에서 합의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많이 제기되었습니다. 때문에 과거의 회의에는 없었을 듯한 부담감을 크게 느꼈습니다. 서울 회의로 인해서 G20 역할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입니다.[각주:1]

 결과적으로 G20에 속한 나라들은 세계의 문제를 토론하는 자리로써 앞으로도 G20을 대신할 포럼이 없다는 인식을 가졌습니다. 회의 마지막에는 모든 정상들이 G20이야말로 세계적으로 어려운 때 문제 해결의 장소가 될 것이라는 인식을 같이 하였습니다. G20을 대신할 상설 채널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G20 멤버 이외에도 개발문제가 있기에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2개국을 초청하였습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까지 G20이 앞으로도 선도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최선진국, 신흥국, 가장 가난한 나라까지 모두가 G20에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 한국은 세계의 글로벌 파워로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는 14년전에 가입한 선진국입니다. 한국이 G8에 들어가 G8을 강화하는 시대가 온 것은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아직 세계 경제문제가 주된 관심사인 G20입니다만 이번 토론에서는 기후변동에서 개발도상국 개발문제까지 다양한 토의를 하였습니다. G20에서 함께 연구하는 편이 효과적이라 생각합니다.

- 한국은 환태평양 파트너십 협정(TPP)에 어떤 방침을 가지고 임하고 있습니까?

 상징적인 효과는 있습니다만 실질적 효과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역내의 APEC 국가들이 역내에서 자유무역을 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어 어느 나라건 (TPP를) 검토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한국도 그러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 한일 자유무역협정(FTA)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까요?

 제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일본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많은 나라와 FTA를 맺고 있습니다. 비관세 장벽을 없애는 것만으로 자유무역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세 장벽과 비관세의 장벽을 없에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당 부분이 일본 측 의사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 일본의 어려움 중 하나는 농업을 보호하고자 하는 정치적 압력입니다만 그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TA를 연달아서 성사시키고 있습니다. 어떻하면 농촌, 농민의 반발, 불안감, 반대 등을 극복하고 FTA 쪽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입니까?

 농민의 문제는 단순한 경제문제가 아닙니다. 한국과 일본이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FTA를 체결하려면 많은 농민을 설득해야만 합니다만 반대가 굉장히 많습니다. 지금도 깃발을 휘날리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가가 그런 반대들을 극복하여 결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모든 분야가 국제적인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농업도 국제경쟁력을 가져야만 하는 점이 중요하며, 농민도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는 농민의 입장을 정치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려는 것이 아니라, 농민의 입장에 서서 어떻게 하면 외국과 경쟁해가면서 잘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대화를 많이 나누고 싶습니다. 제 생각을 이해해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근본적으로 한반도의 평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가 전제이며 그 다음이 경제협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협력이 실현되면 자연히 통일문제입니다. 지금 당장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고 북의 비핵화라는 커다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저는 언제라도 정상회담이 가능하다고, 취임했을 때부터 일관되게 말해 왔습니다. 하지만 정상회담을 국내의 정치적인 목적때문에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한반도의 남북전체를 위한 길을 탐색하기 위한 회담을 해야만 합니다.

- 저는 북한이 권력계승기에 진입하고 있으며, 불안정하게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도 미리 상정하여 한국의 대응, 한미, 한미일의 협력이 필요하지 않냐고 생각합니다.

 삼대세습은 일반적,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납득되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삼대세습했다고 해서 곧바로 북한이 위험해 진다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항상 한반도 전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한반도 전체, 동아시아 전체의 정세를 보고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협력할 것이며, 지금도 협력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은 동맹관계이며 미국과 한국도 동맹관계이기에 자연히 말씀하신 것은 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금은 예전에 비해 더욱 국제무대에서 상호간 긴밀히 협력하고 있습니다. 천안함 사건이 있던 때도 국제연합에서 일본이 앞서서 잘 협력해 주었습니다. 그렇 것을 통해서 상호 신뢰가 깊어지기에 북한 정세가 위험하다거나 위험하지 않다거나에 관계없이 앞으로도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 한일 안전보장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재 우리는 자연스럽게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면 자연히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강화한다고 하면 주변 나라들이 의심스런 눈으로 볼 지도 모르기에, 반대로 그런 의심을 강하게 받게 될 지도 모릅니다. 자연스럽게 서로 이해하고 신뢰를 쌓아 간다면 자연스레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번 한국에서 대량파괴병기 확산방지구상(PSI)의 훈련이 있었을 때 일본에서도 왔습니다. 훈련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았지만 참관하였습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면 다음에도 또 자연스럽게 관계가 발전해 나가지 않겠냐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 자체가 지금까지 없었던 일입니다.

- 한미의 군사연습을 예전에 했을 때, 일본 해상자위대를 옵저버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미일간 훈련할 때 한국도 옵저버로 올 수 있습니까?

 참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히.

- (한국이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문화재 인도 서명이 한일간에 행해집니다. 연내에 1205점을 인도할 때 대통령 스스로 한 번 더 일본에 오셔서 가져가시는 것도 가능할까요?

 그런 문제는 일본 국회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통과된 다음부터 생각하겠습니다.

- 6자회담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어떤 행동, 태도로 나올 필요가 있을까요?

 간단한 일입니다. 과거를 되돌아 보면 6자회담을 하고 있는 도중에 적절한 보상을 주더라도 그들은 핵실험을 하여 망친 다음 또 (회담에) 나오거나 하는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전략에는 6자회담을 열더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핵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사를 전제로 회담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과 한국은 같은 생각이며, 중국도 어느 정도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러시아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미국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회담을 위한 회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북한이 만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하면 핵을 포기하는가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대화하는 자세를 가지고 나올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북한에 대해서 언제나 중국을 모델로 하라고 말해 왔습니다. 중국정부에 대해서도 북한을 중국과 같이 해 주길 바란다고 말햇씁니다. 우리들이 개방하시오, 변하시오 라고 하여도 그들은 오해하는데, 중국이라는 성공사례도 있으며 체제도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직역 반, 의역 반. 제 실력이 딸릴 수도 있겠지만 좀 중구난방한 느낌이 있습니다. 일본어 가능하신 분은 링크를 직접 참고하시고 보시는 편이 좋을 듯.
  1. 아마도 서울 회의에서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면 G20이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으셨다고 말씀하시는 듯.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