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가 만약 이에야스[家康]의 아들이라는 자리에 있지 아니했다면, 어엿한 센고쿠[戦国]의 영웅으로 한자리를 차지하며 찬란한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뛰어난 자질을 가졌으면서도 그 핏줄로 인하여 결국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고 일생을 끝마쳐 버린 것이다.

 히데야스의 자질을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히데야스가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67만석이라는 큰 영지에 봉해졌을 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가 방문해서는,
 “만약 천하에 이변이 일어났을 시에 소인은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누구의 눈으로 보건 동생인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보다 히데야스의 기량이 뛰어나 보였던 듯 하다. 아비 이에야스조차 히데야스를 두려워 했던 듯한 흔적이 있다.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때,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결전에 참가시키지 않으려고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봉쇄하는 임무를 주며 우츠노미야 성[宇都宮城]을 지키게 한 것은, 행여 히데야스가 세키가하라에서 전공이라도 세워 쇼우군 히데타다를 능가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각주:1]. 히데야스라면 이런 혼란을 틈타 천하를 취할법한 실력을 가졌다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히데야스의 생모는 이름을 오만[お万]이라고 하며 미카와[三河] 치리후[池鯉鮒[각주:2]]에 있던 신사에 근무하던 신관[각주:3]의 딸이었다고 한다[각주:4]. 이에야스의 정실 츠키야마도노[築山殿]의 시녀였던 것을 이에야스가 미카와 오카자키 성[岡崎城]의 목욕탕에서 손을 대어 히데야스를 낳게 했다고 한다. 오만이 임신한 것을 알아챈 츠키야마도노는 질투를 증오로 바꾸어 오만의 옷을 모두 벗겨 나무에 매달아 채찍질했다고 한다.[각주:5] [각주:6] [각주:7]
 이런 과정을 거쳐 태어난 히데야스는 그 용모가
동자개[ギギ – 매기와 비슷하게 생긴 물고기]와 닮았다 하여 ‘오기마루[於義丸]’ 라고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혼다 사쿠사에몬 시게츠구[本多 作左衛門 重次]나 이에야스의 적자 노부야스[信康]가 꾀를 내어 대면시켜 결국엔 이에야스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기마루에 대한 이에야스의 애정은 박했다. 그리고 히데야스가 태어난 지 5년이 지나 이에야스의 애첩 오아이노카타[お愛の方]에게서 히데타다[秀忠], 타다요시[忠吉]가 태어나자 한층 더 히데야스의 존재감은 엷어져 갔다.

 11살 때, 오기마루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에야스가 바친 인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히데야스의 호탕한 기질을 사랑했다. 이름을 자신의 ‘히데[秀]’와 이에야스의 ‘야스[康]’를 따 ‘히데야스[秀康]’로 지은 것도, 거기에 칸토우[関東]의 명족(名族) 유우키 씨[結城氏[각주:8]]를 계승하게 한 것도 히데요시의 깊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전[九州の役] 때, 히데야스가 후방에 있어 공을 세우지 못한 아쉬움에 눈물 흘린 것을 보고,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正]가 히데요시에게,
 “역시 토쿠가와 님의 기풍을 물려받으신 듯”
 하고 말하자 히데요시가,
 “그렇지 않네. 히데야스는 이제 내 아들이니 무(武)에 관해서는 이 히데요시를 닮은 것일세”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히데요시가 히데야스에게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졌었는지를 전해주는 이야기이다.

 또한 이러한 일도 있었다. 히데야스가 16살 때의 일이라 하는데, 히데야스가 후시미[伏見]에 있는 승마장에서 말을 타고 있을 때, 승마장 관리인이 경주라도 하려는 듯이 히데야스의 옆으로 달려와 말머리를 나란히 한 것이다. 히데야스는 그 무례에 분노하며 단칼에 베어 죽여버렸다. 관리인의 죽음에 승마장에 있던 관리인의 동료들이 살기를 띠며 히데요시에게 히데야스를 벌 주라고 간청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오히려,
 “내 아들에게 무례를 범한 승마장 관리인이야말로 죽어 당연하다”
 고 말하며 히데야스의 호방함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 히데요시가 죽은 뒤,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응어리져 있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무공파 장수들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 관료들의 알력이 표면화 되었다. 결국 카토우 등이 이시다 미츠나리 습격을 꾀함에 이르자 미츠나리는 어쩔 수 없이 이에야스에게 보호를 청하였고 그 후 목숨을 건지는 대신 사와야마[佐和山]에 은거 당하게 된다. 사와야마로 향하는 미츠나리의 안전을 위해서 이에야스는 히데야스에게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와 함께 호위를 맡도록 지시하였다. 히데야스는 그때 병사[足軽]들에게는 철포의 화승에 불을 붙인 채 경계하면서 행군하도록 하였으며[각주:9], 무사들에게도 갑주를 두르게 하여 완전 무장한 채로 행군하는[각주:10] 등 히데야스는 철저한 경계태세를 유지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데야스는 에치젠[越前] 후쿠이[福井[각주:11]]로 이봉(移封)되어 마츠다이라 성[松平姓]를 칭하였는데[각주:12], 1605년 히데타다가 쇼우군[将軍]이 되자 히데야스는 쇼우군의 형님이었기에 히데야스의 에치젠 가문은 “제도 밖의 에치젠 가문[制外の越前家]’이라고도 일컬어지며 남다른 대우를 받게 되었다.
 히데야스가 에도[江戸]에 올 일이 있을 때에는 쇼우군 히데타다가 일부러 시나가와[品川]까지 마중 나왔고, 시나가와에서 에도로 향하는 길에서 히데타다는 자신의 가마를 히데야스보다 아랫자리에 위치하도록 했을 정도였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히데야스의 행렬이 에도로 가기 위해서
우스이 고개[碓氷峠]]의 관문소[関所]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이때 에치젠 가문은 철포 100정을 휴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정도 에도로 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 천하의 법도였다. 당연히 관문소의 하급 관리들은 철포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를 보고 히데야스가 말했다.
 “그것은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3]]에게나 적용되는 법도일 것이다. 내가 에치젠 츄우나곤 히데야스[越前 中納言 秀康]임을 알고 막는 것인가?”
 히데야스가 이렇게 말하자 관문소의 하급 관리들은, 츄우나곤이건 다이나곤[大納言]이건 법도는 법도올시다. 통과시킬 수는 없소 하며 말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시팔시팔댔다. 히데야스는 격노했다.
 “관문소의 법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욕설들과 츄우나곤 다이나곤하며 운운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도다”
 라고 말한 뒤, 부하들을 향해서,
 “저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버려!”
 하고 명령한 것이다.
  에치젠 가문의 무사들은 일제히 창을 꼬나 쥐고 칼을 칼집에서 뽑았다. 하급 관리들은 놀라 모두 도망쳤다.
 이것이 에도에 전해지자 히데타다는,
 “관리들이 도망친 것은 분별 있는 행동이도다. 아무리 관리들이 죽더라도 함부로 츄우나곤(히데야스)에게 벌을 내릴 수는 없는 법”
 이라 말하며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히데야스의 마음 속에 배다른 동생 히데타다가 쇼우군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더라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느 날, 후시미[伏見]에서 오쿠니[阿国]를 불러 그 춤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오쿠니의 춤을 보면서 히데야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천하에는 수천 만의 여성이 있겠지만 이 오쿠니를 천하 제일의 여인이라 한다. 하지만 나는 천하 제일의 남자가 될 수 없으니 여자인 오쿠니에게조차 이르질 못하는구나. 이 어찌 분하지 않단 말인가”
 하고 말했다 한다.

 히데야스는 동생 히데타다가 쇼우군이 된지 2년 후에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
1574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둘째 아들. 1584년 코마키-나카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의 강화 교섭 후 인질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었고, 1590년 시모우사[下総]의 명문가 유우키 가문[結城家]의 양자가 되어 10만 1천석을 상속.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마츠다이라 성[松平姓]으로 복귀하여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67만석에 봉해졌다. 1607년 죽었다.

  1. 우에스기 정벌을 앞두고 세키가하라로 향하게 되는 오야마 평정[小山の評定] 후 약 1개월 간은 히데타다가 우츠노미야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후 히데타다는 후방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를 정벌하러 떠나고 대신해서 그제서야 그 임무를 맡게 된 것이 히데야스이다. 그 사이 미노[美濃]의 기후 성[岐阜城]이 너무도 단기간에 함락되어 상황이 변화되자 히데타다는 급히 세키가하라로 향하게 된다....한줄 요약하면 히데야스가 공 세울 것을 두려워 하여 처음부터 우츠노미야에 남긴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2. 현 치류우 시[知立市]. 당시 연못[池]에 잉어[鯉]와 붕어[鮒]가 많이 살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3. 신사(神社)의 말단 사무를 보는 직책인 샤닌[社人]이었다 한다. [본문으로]
  4. 나가미 시마노카미 요시히데[永見 志摩守 吉英]의 딸. 혹은 셋츠[摂津]의 의사인 무라타 이치쿠[村田 意竹]의 딸(또한 나가미 시마노카미가 나중에 셋츠로 가서 무라타 이치쿠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5. 그렇게 매달린 오만을 혼다 시게츠구[本多 重次]가 구해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낳게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6. 또는 오만이 매질을 맞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친척인 혼다 한에몬[本多 半右衛門]의 집으로 도망갔으며, 한에몬은 시게츠구에게 이런 일을 보고하여 시게츠구가 양육을 담당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에치젠 가문의 가전[越前家伝]에 따르면 –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이에야스의 명령을 거역하고 혼다 한에몬[本多 半右衛門]의 큰엄마(伯母)에게 와서 도망치겠다고 하자 한에몬의 큰엄마는 성으로 돌아가라고 했으나, 오만은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했다 한다. 이 한에몬의 큰엄마는 과거 이에야스가 어렸을 때 시중 들던 여성이라 한다. 한에몬의 큰엄마 다음 날 입성하여 이에야스를 만나 오만에 대해 보고하였지만 이에야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그냥 한에몬 큰엄마 집에서 머물다 30일 뒤 쌍둥이를 낳았다 한다. 한 명은 곧바로 죽었으며 나머지 한 명이 히데야스라고 한다....(여담으로 쌍둥이 중 하나가 죽지 않고 나가미 사다치카[永見 貞愛]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당시는 동물이나 한꺼번에 여럿 낳지 사람은 한 명씩만 낳기에 쌍둥이는 사람 취급을 안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에야스의 할머니부터 9대 쇼우군 이에시게[家重]의 생모에 이르기까지 에도 막부의 역대 쇼우군의 생모, 정실, 애첩, 측실 및 유모를 기록함과 동시에 그녀들의 출신 가문들을 기록한 [옥여기(玉輿記)]에 따르면, 유우키 가문은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초대 쇼우군[将軍]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의 셋째 아들인 유우키 토모미츠[結城 朝光]를 시조로 하며 - 공인된 요리토모의 아들은 2대 쇼우군 요리이에[頼家], 3대 쇼우군 사네토모[実朝]로 두 명뿐. - 히데야스의 양아버지가 되는 유우키 하루토모[結城 晴朝]는 토모미츠의 19대손이라 한다. 참고로 유우키 토모미츠는 그 어미가 요리토모의 씨를 품은 상태로 요리토모가 오가와 토모미츠[小山 朝光]에게 하사하였고 그 후 태어난 것이 유우키 토모미츠라 한다....근데 이걸 믿으면 질 확률이 높다. [본문으로]
  9. 오발의 위험과 화승을 아끼기 위해서 막 전투가 벌어지기 전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0. 갑옷과 투구 무게도 무시할 수 없는 터라 행군 시에는 상체 갑옷과 투구를 따로 챙겨서 이동하였다. [본문으로]
  11. 이때까지는 아직 키타노쇼우[北ノ庄]. 후쿠이[福居]로 이름이 바뀌는 것은 에치젠 마츠다이라 가문 3대이며 히데야스의 차남인 마츠다이라 타다마사[松平 忠昌] 때. 키타노쇼우[北ノ庄]의 키타[北]가 패배(敗北)와 글자가 같아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후에 후쿠이[福井]로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바뀌게 된다. [본문으로]
  12. 위키에 따르면 확실히 마츠다이라 성을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세키가하라 이후 토쿠가와 가문을 섬긴 가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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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09.12.06 08: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인은 매독이 가장 유력하지요?

    본디 성정이 색을 밝혔는지 혹은 삶에 대한 불만이 그 쪽으로 향했는지 (개인적으로는 후자) 모르겠으나 뛰어난 재능이 센고쿠 시대에 발휘되지 않은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 아, 물론 발휘되면 히데야스의 손에 수많은 목숨이 이슬처럼 사라질테니 오히려 인류애적 차원에서는 잘된 일인가요.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그런데 마쓰다이라 가문은 장남에게 있게 했지만 유키 가문은 4남에게 상속시켰던게 맞는가요? 벌써부터 까먹으면 안되는데.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06 09: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죠....
      히데야스의 얼굴에는 츠키야마의 증오가 서려 있어서 이에야스는 그것을 볼 때마다 꺼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스님(텐카이[天海]라고 하지만 텐카이가 이에야스와 만나는 것은 빨라야 1590년인지라...)에게 그것을 없애는 기도를 부탁하자, 효험이 있었는지 그 증오가 떨어지긴 했지만 대신 얼굴에서 고름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더 정나미가 떨어진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히데요시에게 양자(...라 쓰고 '인질'이라 읽는다고 합니다)로 보냈다고 합니다.(1584년)

      상기의 이야기에서는 이에야스가 매독균을 보유하고 있었는 듯 하고 히데야스는 모친의 태내에 있을 때부터 매독균에 감염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쵸. 난세의 재능이라야 결국 사람 죽이는 것으로 이어지는지라.... 그래도 자질(뭐! 패왕의 자질을 가졌다고!? - by 삼국전투기 4권 장수가 조조를 평하며)과 성망을 갖추었으면서도 결국 반란 일으키지 않은 것만은 평가해야 할 듯.

      다섯째 아들 나오모토[直基]라고 하는데 바로 위에 넷째가 일찍 죽었으니 넷째라 해도 무방할지도...

      전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닌지라 그럴 땐 위키를 자주 이용합죠. ^^

  2. 나라 2009.12.07 1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우키 히데야스가 실제로 기량을 보인 적이 있나요? 기량을 펼친 적이 없다면 있는지 없는지 아는 건 불가능할텐데..
    물론 히데타다에 비한다면야...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08 0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니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에피소드 3개만 들으면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고...

      뭐 머리 짱 좋은 니체니 할 수 있는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이라도 대여섯개 이상의 에피소드를 통해 그 인물의 그릇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3. Asura 2010.01.10 14: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에야스의 씨라고 믿겨지지 않는다'면서 좋아했던 유키 히데야스군요.
    '그' 미츠나리가 좋아했다면.. 분명 재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얼굴이 동자개 닮았든, 고름이 뚝뚝 떨어졌든, 상대가 미츠나리라면 납득이 가네요..(업병(한센병유력)을 앓은 오타니 요시츠구와 친하게지냈던 인물).

    이사람에 대해서는 유곽에 들락날락하다가 스스로 코를 잘랐다는 애기도 있던데.

    저는,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받은 마사무네를 '이시다 마사무네'라 명명하고 평생 아꼈다는 에피소드가 제일 좋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10 2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쩌면 말씀하신 대로일지도 모릅니다.
      (후세에 전해진 미츠나리에 대한 잘못된 인상이 워낙 많아, 있던 사실도 없애다는 것이 많은 것을 보면 더 많은 이야기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코를요? 으~ 끔찍하군요.(전 처음 들어봅니다만... ^^; )

  4. shiroyume 2012.02.13 15: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생각보다 재밌네요. ^^

十三.

 요도도노(淀殿)는 분노했다. 상경하라니 마치 주인이 가신에게 보이는 태도가 아닌가? 사실 여기서 히데요리(秀)가 상경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관습에서 보건대 이에야스(家康)의 부하 다이묘우(大名)가 된다는 계약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요도도노는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키요마사(正)나 요시나가(幸長)는 [고(故) 타이코우(太閤)가 직접 키운 무장]이라는 자격으로 끈기 있게 요도도노를 설득했다. 이 귀부인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그녀의 자존심을 자극하면 안 되었기에 다소 말을 모나지 않게 하였다.
 - 지금만 조금 참으시면 됩니다
 라는 것이었다. 천하의 누구도 믿지 않는 관측이었지만 요도도노와 그녀의 시녀들에게만은 통용되었다. 이에야스가 죽고 나면 바라던 모든 것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토요토미 가문은 전쟁을 피해야만 하옵니다. – 고 키요마사들은 말했다. 요도도노도 그 점이 두려워,

 "그렇다면 히데요리님이 상경하시면 이에야스의 마음을 풀 수 있다는 것인가?"

 라는 것을 몇 번이나 키요마사에게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그렇사옵니다. – 하고 키요마사는 몇 번이나 말했을 것이다. 상경만 하신다면 양 가문에는 평화만 있을 뿐이옵니다 - 고 지금은 이에야스의 부하 다이묘우(大名)가 된 키요마사는 그 입장으로 보증하였다. 요도도노는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요도도노는 차츰 마음이 풀어졌다. 잠시 갸웃거리더니 뜬금없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코우다이인(高台院)님께서 히데요리님에게 해가 되실 말씀을 하시지는 않을 터이니 그에 따를 수밖에 없겠지"

 하고 그녀가 혼자 중얼거리자 예전부터 이 여성을 좋아하지 않았던 키요마사조차 가슴이 저려와 눈물을 흘리며, 졸자가!! – 감정을 주체 못하겠는지 거센 말투로 말했다.

 "졸자가 우다이진(右大臣)님의 손을 잡고 메시어 니죠우 성(二城)까지 함께 하는 이상,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우다이진님의 생명은 지키겠사옵니다"

 라고 말했다. 키요마사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이에야스가 이번 기회에 히데요리를 죽이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소문이 오오사카 성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도도노에게 전쟁이라는 자신의 생각 범위를 넘어선 커다란 위협보다도, 히데요리가 칼날에 쓰러진다는 자기나름의 현실적 상상 쪽을 훨씬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요도도노는 통통한 턱을 끄덕이면서 그제서야 승낙했다.

 이 해의 히데요리는 19살. 더 이상 소년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으며 거기에 벌써 1남 1녀의 부친이기도 했다. 정실 센히메(千)의 자식이 아니라 히데요리가 자신의 곁에 있던 시녀들에게 낳게 만든 아이들이었다.
 - 굉장히 어린아이 같다.
 라는 것이 이에야스의 귀에 들어와 있는 히데요리의 평판이었지만 그러나 아이를 만드는 능력에 있어서만은 망부 히데요시(秀吉)보다 뛰어났다. 그러면서도 상경여부 등 자신의 몸과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중대사에 관해서는 모두 모친에게만 맡겼다.

 히데요리가 오오사카(大坂)를 출발한 것은 그로부터 수일 후인 3월 27일이었다. 텐마(天)에서 화려한 귀족선(御座船)에 몸을 싣고 요도가와(淀川) 강을 거슬러 북상하였다. 이 히데요리의 신변을 지킴에 있어서도 키요마사는 만전을 기했다. 우선 쿄우토(京都)에서 예상치 못했던 사태가 일어났을 때를 대비하여 자기 가문 내에서 억센 무사 500명을 추려 상인이나 중으로 변장시켜 시내를 돌아다니게 하였으며, 거기에 300명을 후시미(伏見)에 주둔시켰고, 요도가와 강의 강변 경비를 위해서 아사노 요시나가(野 幸長)의 부하들을 포함한 철포 1000, 창병 500, 궁수 300인 부대를 배와 함께 북상시키는 한편 자신은 신발담당 하인, 가벼운 차림의 하급무사(足軽) 30명만을 주변에 두고 있었다. 이 신발담당 하인이나 하급무사들도 실은 변장으로 모두 경험 풍부한 무사 중에서도 용사만을 고르고 골라 따르게 하고 있었다. 거기에 항상 키요마사와 일컬어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와 미리 상담하여 후쿠시마 가문의 병사 1만 명을 자신의 본거지 히로시마(広島)에서 올라오게 하여 만일을 대비하였다. 마사노리 자신은 당장 쿄우()를 제압하기 쉬운 야하타(八幡)에 숙소를 정하여 거기서 뿌리라도 박힌 듯 다른 다이묘우(大名)들처럼 니죠우 성(二条城)에 가지 않았다. 단지 이에야스 측에게는 병 때문에 거동을 못한다는 식의 말은 하였다. 이에야스 측으로서는 카토우, 후쿠시마의 거동은 불유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토우, 후쿠시마에게 있어선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그렇게 많은 활약을 해 주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그런 만큼 이에야스는 좀 과중하게 보일지 모를 경비태세를 이해해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히데요리는 후시미(伏見)의 선착장에서 배를 내렸다. 키요마사와 요시나가는 히데요리의 가마의 양 옆에 찰싹 붙어 둘 다 거대 다이묘우(大名)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종자라도 되는 듯 예의 바르고 조심스럽게 더구나 말에도 타지 않은 채 걸어갔다. 후시미(伏見)에는 이에야스가 보낸 자신의 11살 난 아홉 번째 아들 토쿠가와 요시나오(徳川 義直[각주:1]) 9살 난 10남 요리노부(頼宣[각주:2])가 마중 나와 길 위에서 인사를 올렸다. 그 요시나오와 요리노부가 각각 자신의 종자들에게 양산을 받치게 하고 있는 것을 키요마사가 보고,

 귀인에 대해서 무례하오. 당장 양산을 치우시오

 하고 주의를 주었다. 이런 키요마사의 과감한 태도도 후에 이에야스를 불쾌하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이에야스는 곧바로 화내지 않았다. 이에야스가 죽은 뒤 카토우, 후쿠시마 양 가문은 에도 정권에 의해 멸문을 당한다.
 
어쨌든 19살 히데요리의 행렬은 입경하였다. 그 화려함은 타이코우 생전의 행렬을 방불케 하여 히데요시 행렬의 특징인
대모갑(玳瑁甲)으로 코팅된 창 천 자루를 2열 종대로, 철포대의 철포 덮개는 하나하나가 전부 호랑이 가죽이라는 화려함이었기에 쿄우토(京都)의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토요토미 가문의 행진을 보고 타이코우가 살아있을 적의 그 눈부심을 떠올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 즈음 쿄우토(京都)의 시민감정은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친토요토미였기에 당시 쿄우토의 거리에는 [15살이 되었다면 앞 싸리를 묶으시오~ 묶으시오]라는 노래가 불려지고 있을 정도였다. 노래의 의미는 히데요리님이 15살이 되면 이에야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성 앞의 방책을 준비하라는 뜻이었다. 그 히데요리가 지금은 훌륭히 자라 나이도 19살이 되어 죽은 아비와 같은 행렬을 하고 쿄우토(京都)에 올라온 것을 – 쿄우토(京都)의 사람들은 한 편의 웅장한 연극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그 행렬을 보았을 것이다. 히데요리가 탄 가마 옆에서 황공해하면서 시종해 가는 180cm가 넘는 키요마사를 보며 그 충성스럽고 의로움에 감동하여 키요마사라는 사나이에게 더욱 깊은 애정을 품었을 것이다. 키요마사는 살아있을 때 서민들에게 경애 받아 토쿠가와 가문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에도의 시민들조차 그를 의한 노래를 불렀다. [에도의 모가리에게 거칠 것은 없겠지만 밤색 제석천(帝釈栗毛=키요마사의 애마)은 피하시오].[각주:3]
 
후시미(伏見)에서 쿄우()로는 타케다(竹田) 가도를 이용했다. 도중 도로 옆에 마중을 나온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와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가 절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그들은 이에야스 휘하 다이묘우이긴 하였지만 이 시대 이 시기의 그들 감각으로 말하자면 이에야스는 상관이긴 했어도 주군이 아닌 다소 애매한 상하관계였으나 토요토미 가문과는 순수한 주종관계였다. 때문에 그들은 무릎 꿇고 넙죽 엎드린 예를 취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형식상 그렇다는 것이지 그들의 충성심은 이미 토요토미 가문에서 떠나 있었다. 가마 옆의 키요마사는 그들을 보자마자,

 "두 분도 따르시오"

 하고 말을 걸었다. 이 때문에 토자마다이묘우(大名[각주:4]) 중에서도 이에야스에게 충성하기로는 손에 꼽히는 그들도 어쩔 수 없이 그 장소부터 키요마사처럼 예의 바르게 가마를 시종했다.
 가마는 니죠우 성의 성문을 거쳐 곧이어 현관에 다다랐다.


큰 지도에서 관련지명-요도도도_아들_13 보기

 이에야스는 현관까지 마중 나와있었다. 30여명의 다이묘우들도 전부 현관 앞 흰 모래를 깐 곳에 넙죽 엎드려 히데요리가 가마에서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키요마사가 가마 옆에 오른쪽 무릎을 꿇고 곧이어 양손을 들어 가마의 문을 잡고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었다.
 '어떻게 자랐는가?'
 라는 것이 이에야스의 이 날 최고 관심사로 거의 숨을 죽이고 마른침을 삼키며 히데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오사카 성 깊은 곳에서만 성장한 히데요시의 아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며 히데요리가 역사에 그 몸을 노출하는 것도 이번이 최초였다.

 히데요리가 나왔다.

 이에야스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키가 180cm 가까이 되는 듯했다. 백설 같은 피부에 시원스런 눈매를 가진 위풍당당한 위장부(偉丈夫)로 그가 서 있는 것만으로 그 주위에서 광채를 뿜는 듯했다. 이런 훌륭한 골격은 모계 쪽 할아버지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의 판박이 같아 만약 그 머리와 심장까지 나가마사에게 물려받았다면 절대 쉽지 않으리라.
 이에야스는 그리 생각했다.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갑자기 상쾌해진 것은 이에야스의 정치적 입장에서 보면 묘했지만 그러나 좋은 골격을 가진 젊은이를 좋아하는 이에야스의 – 뿐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인간으로서의 – 말하자면 습성으로써 이에야스는 유쾌한 기분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직접 앞장서 안으로 들어갔다. 히데요리는 키요마사를 거느리고 아직 청년이라고 부르기에는 이른 키무라 시게나리(
木村 重成 – 히데요리 유모의 아들)에게 칼을 들게 하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 복도를 거쳐 객관의 앞을 지나 곧이어 [대면실]이라고 칭해지는 건물 끝으로 들어갔다.

 이에야스는 북을 향해서 앉았다.
 히데요리는 남을 향해서 이에야스와 대좌하는 자리에 앉았다. 쌍방 대등한 자리였다. 키요마사가 히데요리의 곁 60c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이 날 성안에서 작은 칼(
脇差
)도 차면 안되었기에 품 안에 단도를 숨기고 있었다.
 쌍방 대등한 입장이었기에 동시에 절을 하였다. 곧이어 키타노만도코로 – 이미
법체(
法體)가 된 코우다이인(高台院) 네네() – 가 나타나 이에야스와 히데요리 사이에 앉아 쌍방을 주선(周旋)하였다. 위계라는 점에서 말하면 종일위(從一位)인 코우다이인이 제일 높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안상이 나왔다. 들고 나오는 역할을 맡은 이들은 토쿠가와 가문 직속의 중신들로 이타쿠라 이가노카미(
板倉 伊賀守[각주:5]), 나가이 우콘(永井 右近[각주:6]), 마츠다이라 우에몬타이후(松平 右衛門大夫[각주:7]) 등이 예법대로 발을 바닥에 끌며 상을 내왔다. 히데요리는 사전에 키요마사에게 들은 대로 칠오삼의 상차림[각주:8]으로 나온 주안상에 한 번도 젓가락을 대지 않았고 잔도 입술에 가까이 대기만 할 뿐 마시지는 않았다. 대면은 말하자면 의식(儀式)으로 쌍방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곧이어 술잔을 세 번 받았을 때 키요마사가 히데요리를 향해서,

 "오오사카의 어머님께서 기다리실 것입니다. 오늘은 이만 자리를 뜨시옵소서"

 라고 말하자, 이에야스는 처음으로 입술을 떼어 목소리를 내었다. 굉장히 밝은 목소리로,

 "정말 오오사카의 어머님께서 기다리시겠구려. 오늘 참 경사스러운 날이었소. 그만 돌아가시길"

 하고 말했다. 그 말을 하며 이에야스가 일어나자 히데요리도 일어났다. 시종 무언이었다.
 이에야스는 다음 방까지 히데요리와 함께 갔다. 가다가 히데요리를 올려다 보며,

 "도노(殿)는"

 하고 그런 경어를 사용하여, 기분이 좋은 듯 말했다.

 "도노는 생각보다 훨씬 멋진 성인이 되셨소. 경사롭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 같소. 졸자는 나이를 많이 먹어 내일은 어찌 될지도 모르오."

 하고 말했다. 더 말하길,

 "졸자의 수명이 다하거든 우효우에(右兵衛=9남 요시나오)와 히타치노스케(常陸介=10남 요리노부)를 잘 부탁 드리옵니다."

 거기에는 요시나오, 요리노부라는 이에야스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히데요리는 그 쪽으로 눈길을 주고는 미소를 지으며(처음으로 표정이 변했다)

 "알겠습니다."

 하고 명쾌하고 또렷또렷하게 말했다. 이 상쾌한 말투를 들었을 때, 이에야스는 이때만큼 히데요리에게 시샘을 느낀 적이 없을 것이다. 늙음이란 이미 그 자체로 약함을 뜻하며 젊음이라는 것은 노인에게서 보면 그 자체가 거만함이었다. 이에야스는 이 젊은이를 자기가 죽을 때까지 살려 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히데요리는 쿄우토(京都)를 떠났다. 그 후 이에야스가 자기 방에서 휴식하고 있을 때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찾아왔다. 이에야스의 침실에까지 올 수 있는 것은 이 늙은 모신(謀臣)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다. 마사노부는 히데요리와 대면했을 때의 감상을 들으러 온 것이다. 어떠셨습니까? 하고 마사노부가 묻자 이에야스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곧이어 툴툴대며,

 히데요리는 어리석다고 들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현명했다. 다른 사람의 명령 같은 것은 받을 것 같지 않다

 는 뜻의 말을 하였다. 마사노부는 이때 이에야스에게 가까이 가, 걱정할 거 없지 않습니까? 저에게 그 분을 어리석게 만드는 묘안이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을 했다지만 사실인지 어떤지. 마사노부의 묘안이라는 것은 칸토우()에서 센히메()를 따라 오오사카(大坂)에 가 있는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려 히데요리가 주색에 빠지도록 만들어 정신을 황폐화시키자는 내용으로 사실 그렇게 비밀리에 지시를 내렸다고는 하지만 현실의 이에야스도 마사노부도 그런 것에 기대할 정도로 철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거친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1.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어삼가(御三家) 필두인 오와리 가문(尾張家)의 시조. 단 결국 한 번도 쇼우군 배출을 하지 못했다. [본문으로]
  2. 어삼가 No.2 키이 가문(紀伊家)의 시조. 후에 8대 요시무네(吉宗), 14대 이에모치(家茂)를 배출. [본문으로]
  3. 원문은 [江戸の無頼漢(もがり)にさわりはすとも、よけて通しゃれ帝釈栗毛]. 모가리(もがり)란 당시 에도에서 유명했던 공갈범을 말한다. 역자는 '帝釈栗毛'을 밤색 제석천이라고 해석하였다. 栗毛는 말의 털이 밤색을 의미하며, 帝釈는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帝釈天)을 말한다. [본문으로]
  4. 세키가하라(関ヶ原) 이후부터 토쿠가와 가문을 따른 다이묘우(大名). [본문으로]
  5. 이타쿠라 카츠시게(板倉 勝重). 당시 에도 바쿠후의 쿄우토 감시관(京都所司代). [본문으로]
  6. 나가이 나오카츠(永井 直勝) – 뛰어난 전술지휘관으로 작지만 각 요소요소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본문으로]
  7. 마츠다이라 마사츠나(松平 正綱) 당시 에도 바쿠후 재정장관(勘定頭). [본문으로]
  8. 七五三の本膳. 메인에 7개의 안주, 두 번째 상에 다섯 가지 안주, 세 번째 상에 세 가지 안주로 구성된 상. 성대한 주연에 나오는 차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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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이서당 2009.04.19 07: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편도 잘 읽었습니다! 히데요리가 키가 180가까이 되었다니 놀랍네요 (정말 히데요시의 씨? --a).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21 0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모계쪽 유전자를 이어 받았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초년기에 험하게 살았다는 히데요시에 비해 세상의 좋은 것은 모두 먹고 자란 히데요리는 키가 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담으로...
      60년대에만 하더라도 180만 넘어도 거구 소리를 들었지만(모 하드보일드 풍의 탐정은 6피트의 키로 엄청난 거구란 묘사가 있습죠) 지금은 그렇지도 않습죠. 어딘가에서 읽기로는 사람의 키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이유에는 냉장고의 보급을 들더군요. 신선한 먹거리가 인간의 키를 늘려 주었다고요.

  2. 댓글달자 2009.04.19 14: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인해 볼수는 없지만 십중팔구 히데요시 진짜 아들이 아닐겁니다.
    다른 여자들이 다 히데요시 씨를 못 받았는데 요도기미만 받았다는게 뭔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외모도 현저히 다르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21 0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예전엔 그리 생각했지만 지금은 반반입니다.

      여담으로...히데요시에게도 친자식은 있었습니다. 히데카츠(秀勝)라고...그를 너무 아쉬워 했는지 후에 양자 두 명(노부나가의 4째 아들, 살생관백 히데츠구의 동생)에게도 물려줄 정도였습죠.

      떠도는 말로는 딸도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다산이 가문 특징인 오다 가문의 여인 요도도노만이 두 명이나 히데요시의 자식을 배출한 것도 일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요약하자면 애기씨가 부족한 히데요시와 임신을 쉽게 하는 몸을 가진 요도도노...유독 요도도노만 임신한 이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임신이란 생각외로 쉽기도 혹은 어렵기도 하다더군요.

  3. dameh 2009.04.22 15: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전에 니조성에 갔을때 遠侍の間에 들어간적이 있었는데 설명에 '니조성 회견'이 여기서 열렸었다는 글이 있더군요.

    왠지 이 글을 읽고 그 광경을 떠올리니 전율 비슷한게 느껴집니다. 이래서 역사라는게 해볼만한 학문인가..싶기도 합니다만;

    사실 나고야에 산다면서 나고야성은 한번도 안가본 주제에 교토이야기 하려니 좀 묘하긴 묘하군요;; 아 게으름이랄까; 잡다하게 바쁨이랄까..;; 세월만 빨리 흐르고있으니 원;;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22 16: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문에서는 御座の間(저는 '대면실'이라고 번역)라 하여 응? 이라는 생각에 검색해 보니 다메엣찌님 말씀대로군요. 이루어진 곳은 토오자무라이(遠侍)에서 행해졌네요.

      御座の間는 시로쇼인(白書院)- 저는 '객관'이라고 번역했지만 이곳은 쇼우군의 침실이었고 - 의 별칭이었군요.

      아이 참~ 시바 선생님도...
      시로쇼인을 지나 시로쇼인으로 들어간다니...

      아~ 그 전율 저도 느끼고 싶군요...
      (당분간 일본에 갈 일이 없네요. 전...)

      뭐 전 한국에 살면서 일본에 관한 것만 포스팅하는데요 뭐.... 참~ 나고야성에 가시거든 사진 많이 찍고 저 좀 공유해 주세요~~~(나고야성 뿐만 아니라 역사관련 사진은 찍으면 전부 공유해 주세요)

  4.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4.25 21: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번 편에 이어서 잘읽었습니다.

    히데요리 얘기가 나와서입니다만...정실이 낳은 아들이 적자가 될수 있는것 같은데, 측실이 낳은 히데요리를 적자라 볼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딱히 경쟁자(?)가 없는 후계자라....;;; 상속은 했지만 적자라고는 부르지 않는지, 아님 그냥 그래도 적자라고 하는지 궁금하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26 2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른 아이가 있었다면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만 외동아들만 있는 상황에서 적자라는 명칭에 모친을 구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일본에서 적자는 모친의 구별보다는 우리의 '세자'...말씀하신 후계자에 가깝지 않았을까요?

      특히나...公家의 경우.
      적자의 선택은 부친의 권한이었다고 합니다. 그 부친인 히데요시가 적자라고 했으니 그것으로 끝이 아닐까요?

      ....까지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노아님께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시면 말씀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4.29 2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적자는 정실의 자식만.이라는 생각이었던지라 그냥 왠지 애매한 느낌이랄까...

      ...생각해보니 노부나가-노부타다의 경우도 있는게 제 고정관념이었나 봅니다;;

  5. 본다충승 2009.05.06 14: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나 아이를 만드는 능력에 있어서만은 망부 히데요시 보다 뛰어났다." 이 구절이 참 재밌네요.
    어삼가 도련님들과 오사카 전투의 토요토미측 중요 무장 키무라 시게나리도 등장 했네요.

十一.

 세간에게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
)란 육체가 없는 유령과 같은 존재였다. 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자질과 성격을 가진 젊은이인지를 동시대의 어느 누구도 – 그 모친과 시녀들 등 극소수의 측근들을 제외하고는 – 알 방도가 없었다.
 그를 죽이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
川 家康)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 분께서는 어떻게 자라셨나?"

 라는 질문을 오오사카(大坂)에서 사람이 오면 꼭 물어보았지만 천편일률적인 것밖에 듣지 못하였다.
 - 똑똑한가? 바보인가?
 라는 것 하나만은 이에야스가 꼭 듣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노골적으로 그렇게 물을 수 없기에 더더욱 없는 재료에서 억측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똑똑하다면 일찌감치 난을 일으켜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바보라면 – 역시 죽일 수 밖에 없지만, 단지 죽인다는 것을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을 것이다.

 이에야스가 마지막으로 히데요리를 본 것은 히데요리가 만 10살 때인 1603년 2월 4일이었다. 이미 세키가하라(ヶ原) 전쟁이 3년 전 과거였으며 이에야스는 사실상 일본의 지배자이기는 했지만 아직 쇼우군(軍)이 되어 있지는 않았던 상태로, 이때 이에야스는 직접 오오사카로 내려가 가신의 신분으로 새해 인사를 올렸다. 그때도,
 '극히 평범한, 뭐 하나 볼 것 없는 아이군'
 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안심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우둔한 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피부가 희멀건 하며 아래쪽이 큰 입술을 새빨갛게 칠하였고, 정신상태가 축 처졌는지 10살이나 되었으면서도 알현의 자리에서 위엄을 지키지 못하여 걸핏하면 유모의 무릎에 파고들려고 하여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 알현을 마지막으로, 바로 이 해의 바로 같은 달[각주:1]에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軍)이 되어 명실공히 지배자의 자리에 앉았다. 거기에 이 해의 7월, 이에야스는 6살 난 손녀딸 오센(於千)을 오오사카로 내려 보내 히데요리와 결혼시켰다[각주:2]. 센히메(千)의 결혼은 굳이 이에야스가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는 고(故) 히데요시(秀吉)가 임종의 자리에서 남긴 유언으로, 이 유언을 지키지 않으면 히데요시의 휘하에 있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고 히데요시 은고(恩顧)의 다이묘우(大名)들이 어쩌면 동요할지도 몰라, 이에야스의 입장에서는 막 태어났을 뿐인 토쿠가와 정권의 안정과 그들 토자마다이묘우(外大名)의 진정시키기 위해서 이 소년과 꼬마숙녀의 결혼을 진행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 해의 3월.
 이에야스는 후시미(伏見)에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제 자신이 세이이타이쇼우군인 이상 오오사카로 가서 신년인사를 하는 통례대신,

 "그쪽에서 신년인사를 하러 오게"

 라는 뜻을 토요토미 가문에 넌지시 비쳤다. 이에야스에게 있어선 과거가 어찌되었건 현재의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자신의 주인인 히데요리에게 알려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연히 오오사카는 놀랐다. 아무리 세키가하라 이후 이쪽 토요토미 가문의 영지가 불과 70여만석이라는 일개 다이묘우정도로 봉토가 깎였을지언정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가문의 신하인 것에는 변함이 없으며, 그가 고 히데요시에게 '히데요리님을 보살펴 키우겠습니다'라고 맹세한 쿠마노 서약서(熊野誓紙[각주:3]
)의 서약은 아직 살아있다. 거기에 관위(官位)라는 점에서도 히데요리, 이에야스에게는 상하가 없었다. 그러한데 어째서 히데요리가 이에야스를 알현하기 위해서 후시미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주인이 가신에게 알현한 예가 일본 밖의 나라들은 몰라도 일본에는 있을 턱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하고 요도도노(淀殿)는 가로(家老)인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향해서 열화와 같이 화내며, 그렇게는 안 된다. 토쿠가와님이야말로 이쪽으로 오시라고 하게, 그렇게 전하게, 라고 말했다.

 "말씀대로 하게"

 하고 요도도노의 늙은 시녀들도 달린 입마다 요도도노와 같은 뜻의 말을 했다. 카츠모토는,
 '이렇게 몰라서야'
 하고 거의 절망했다. 여성에게 가장 이해시킬 수 없는 것이 정치일 것이다.

 "물론 도리로 따지면 진정 하시는 말씀대로 일 것이옵니다만"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설득시키고자 하였다. 이치는 물론 그러하옵니다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옵니다, 하고 현실을 턱이 빠질 정도로 설득하였건만 끝내 여성들은 납득하지 못하여 결국 카타기리 카츠모토가 히데요리의 대리인이라는 형식으로 사자(使者)가 되어 후시미(伏見)로 올라가 이에야스에게 신년인사하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자네가 대리인으로 가는 것이라면 좋네"

 하고 요도도노(히데요시가 죽은 뒤 다이구인(大虞院)이라는 호로 불리고 있었지만)는 아무렇지도 않게 수긍했다. 이런 면에서도 도리 운운하며 떠벌리는 것치고는 논리의 개념이 요도도노에게 부족한 점이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체면론을 강행하려고 하는 이상 아무리 대리인이라도 히데요리의 굴욕인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요도도노는 히데요리의 안전을 너무도 걱정한 나머지 앞뒤 가리지 않고 오오사카성에서 후시미로 보내고 싶지 않은 것뿐 단지 그뿐이었다. 요도도노는 다른 수많은 모친과 마찬가지로 자기 몸의 연장으로서의 히데요리만을, 오직 그 안전 하나뿐으로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질 않는 듯했다.

 카츠모토는 후시미로 올라가 이에야스를 배알하고 신년인사를 올렸다.

 "히데요리님은 어떻게 되셨는가?"

 하고 이에야스는 배경이 알 것 같으면서도 일부러 물었다. 카츠모토도 모나지 않도록,

 "죄송합니다만 감기이옵니다"

 하고 답했다. 이에야스는 아무 생각 없다는 듯 끄덕이며,

 "그거 걱정되는먼. 그러나 그 감기도 내년에는 낫겠지? 내년은 쿄우(京)에서 만나고 싶구나"

 하고 말했다. 즉 내년에는 꼭 오게, 라는 뜻일 것이다. 카츠모토도,

 "내년에는 꼭"

 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이에야스는 다짐이라도 받았다는 듯이 크게 끄덕였다.

 그 내년(1605년)이 왔다. 이 해 4월, 이에야스는 자신의 적자 히데타다(秀忠)에게 세이이타이쇼우군을 계승시켜 정권을 더 이상 히데요리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 천하는 토쿠가와 가문이 세습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히데타다는 쿄우(京)에 올라가 취임 인사와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입궐하였고, 만천하의 다이묘우들은 모두 쿄우로 몰려들어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에게 축하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우다이진(右大臣) 토요토미노 히데요리만은 쿄우(京)에 가지 않았고, 이에야스 부자에게도 축하를 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조바심이 났다. 히데요리를 자신 쪽으로 오게 함으로써 토요토미 가문도 이젠 토쿠가와 가문에 굴복했다는 사실을 천하에 알리고, 토요토미 가문에게도 이 새로운 관계를 인정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야스는 쿄우(京)에 살고 있는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히데요시가 죽은 뒤 정식 명칭은 코게츠니고우(湖月尼公))를 움직여 그녀에게서 오오사카(大坂)로 사자(使者)를 보내게 하였다. 키타노만도코로는 명목상 히데요리의 공식 모친이기에 그런 점에서 가장 권위가 있을 터였지만, 그러나 요도도노는 주둥이를 앙 다문 조개와 같이 그 권고를 묵살했다.

 다음 해인 1606년도 쌍방은 만나는 일 없었고, 그 다다음 해 2월에 히데요리는 천연두를 앓아 한때는 사망설조차 퍼졌다. 이에야스는 이 시기 에도(江)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히데요리는 죽은 건가? 히데요리는 죽지 않은 것일까?"

 하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죽는 것이 천하를 위해서일 것이다. 살아있으면 이에야스는 곧바로 이를 죽이기 위한 싸움을 걸어 멸하여 자기 후손들에 대한 후환을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분의 죽음을 기도하고 싶을 정도지 않습니까?"

 하고 이에야스의 늙은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는 말했다. 일찍부터 마사노부는 토요토미 가문을 조기에 멸해야 한다는 주장론자로, 지난 1604년 히데요리가 감기를 이유로 상경 거부를 했을 때도 그것을 이유로 싸움을 일으키면 좋지 않습니까? 하고 이에야스를 꼬셨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세간의 반응이 두려웠다. 고 히데요시의 무덤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도 히데요리를 죽여버리면 세간의 평판은 어찌될까? 지금은 좀 더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에 서쪽으로 보낸 다이묘우들이 토쿠가와 가문에 굴복했다고는 해도 본심은 몰랐다. 특히 히데요시가 손수 키운 카토우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에 이르러서는 히데요리에게 은밀히 안부를 묻는 사자를 보낸다고 하며, 그 중에서도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은,
 - 때를 기다리십시오.
 하고 히데요리나 요도도노에게 속삭이고 있다고도 한다. '때'라는 것은 이에야스가 늙어 죽을 때를 기다리라는 것으로 그렇게 되면 히데요시의 옛 은혜를 기억하는 다이묘우들을 규합하여 정권을 에도에서 오오사카로 옮기겠다 – 고 말한다는 것이다. 마사노리가 말하길, 이에야스가 살아있는 동안은 다른 다이묘우들도 이에야스를 겁내 필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자신이나 키요마사도 이에야스에게는 은혜를 입고 있어 그를 상대로 싸움을 걸 마음도 생기지 않지만, 그러나 히데타다의 대가 된다면 더 이상 지킬 의리도 용서도 없다. 그런 것이었다......
 마사노리는 그런 것을 말하며 요도도노와 그녀의 측근들이 경거망동하는 것을 막고 있다고 한다. 그런 정보가 이에야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 정보의 진위는 차치하더라도 저 경솔한 후쿠시마 마사노리라면 할 듯한 말이며 다른 토자마다이묘우(
外様大名)들도 크건 작건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문제는 이에야스와 히데요리의 나이였다. 이에야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늙고 약해지는 반면 히데요리는 시간이 갈수록 성인이 되어간다.

 "이외로 히데요리님이 천연두로 돌아가시면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은 오히려 카토우, 후쿠시마 패거리들이지 않겠습니까?"

 하고 마사노부는 말했다. 그들은 히데요시가 손수 키운 자들이지만 세키가하라에서는 이에야스 측에 서(이유는 서군의 주모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에 대한 증오와 그 이상으로 자기 가문에 대한 보신 때문이었지만), 후쿠시마는 전쟁터에서 선봉이 되었으며 카토우는 큐우슈우(九州)에서 서군의 코니시(小西), 시마즈(島津)를 틀어막아 각각 토쿠가와의 천하 수립에 다대한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남들보다 배는 더 애증이 깊은 성격인 만큼 토요토미 가문의 쇠퇴에 마음을 아파하여 히데요리에게 자기 가문에 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존재나마 지키고자 하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여기서 히데요리가 자연사라도 하면 그들의 감정은 해방되어 위험한 다리를 건너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마사노부는 그 낌새를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야스에게는 불행하게도 히데요리는 위기를 벗어나 목숨을 건졌다. 이에야스는 실망했지만, 그러나 그러는 사이 그의 마음을 편안케 하는 정보가 귀에 들어왔다. 히데요리가 생사를 왔다갔다하는 동안 그 어느 다이묘우도 그에게 병문안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를 두려워하는 다이묘우의 마음이 그렇게 강하였고, 토쿠가와 정권의 견고함과 지속성을 그렇게 중히 여기고 있었다는 것은 이에야스에게 있어서도 이외였다.

 참고로 이런 정보들은 오오사카성 안에서 보내지고 있었다. 정보제공자는 하나하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히데요리의 친위군[각주:4] 부대장 7명 중 2명(아오키 카즈시게(青木 一重), 이토우 탄고(伊藤 丹後))은 이에야스의 프락치였으며, 거기에 고 히데요시의 오토키슈우(御伽衆[각주:5])였던 오다 죠우신 뉴우도우(織田 常真 入道=노부나가(信長)의 둘째아들[각주:6])는 나이차이가 나긴 하여도 요도도노의 외사촌이었기에 오오사카성 안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지만 히데요시 사후엔 뭐든 칸토우()를 위해서 힘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이에야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냈다.
 히데요리의 회복은 이에야스와 그의 측근에게 속으로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이제 이 젊은이를 이 세상에서 없애기 위해서는 확고한 정략과 군사밖에 없다는 것을.

 사실상 오오사카성의 실권자는 요도도노의 유모인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蔵卿局)라는 것을 이에야스도 혼다 마사노부도 알고 있었다. 마사노부는 여러 사람을 거치는 방식으로 칸토우의 사주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여 능숙히 이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에게 하나의 공포심을 심었다. 지금 당장 신사불각(神社佛閣)을 세우지 않으면 히데요리님이 죽는다 - 는 것이었다. 히데요리가 이번에 천연두를 앓은 것도 원령(怨靈)의 저주 때문이다 – 고 하였다. 고 히데요시공은 그 생애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쟁터에 나가 수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 원령들의 저주가 앞으로도 히데요리님을 괴롭힐 것이다. 천하에 쓰러져가는 신사불각이 많은데 그런 것들을 재건하면 악령들은 물러갈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남들에게 들은 그대로 요도도노에게 전했다. 요도도노는 전율했다.

  1. 정확히는 1603년 2월 12일. [본문으로]
  2. 센히메의 모친 오고우(小督)는 요도도노의 막내동생. 따라서 히데요리와는 외사촌지간이다. [본문으로]
  3. 쿠마노는 일본의 거대한 신사(神社)가 있던 곳으로, 여기서 발행되는 부적과 같은 서약서 뒤에 서로 약속한 것을 쓰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를 어기면 하늘의 벌을 받아 반드시 죽는다고 믿었다. [본문으로]
  4. 명칭은 나나테구미(七手組). 7개의 부대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5. 히데요시의 말상대. 히데요시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지식을 늘려갔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즉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를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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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22 10: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부카츠가 나중에 불문에 귀의했었군요.

    시바 료타로의 <세키가하라 전투> 정말 재밌네요. 이거 다 읽으면 9권까지 읽다 중단한 <료마가 간다>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겠습니다 ^^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3 17: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엔 굉장히 유행한 듯 합니다.
      중이 되는 것은...

      신겐이나 켄신...같이 쪼큼 특이하게 읽는 사람들은 거의 중이 되면서 바꾼 호..더군요.

      료마가 간다...는 꽤 긴가 보군요. 전 절대 못 읽을 듯...
      만화로 된 '어이~ 료마'도 꽤 길었던 것 같은데 이것도 읽으면서 굉장히 힘들었거든요...그래도 이건 정말 재미있게 본 듯.

      ps;여담으로...료우마...라는 이름이 나오면 항상 그의 부인(오료우(お龍)의 나중 일이 떠올라서 개인적으로 쪼큼 울적(??)한 기분이 듭니다.

    •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24 08: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절 이름, 호나 출가 후의 법명은 다 음독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오료가 어떻게 됐나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5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료우마가 죽은 뒤, 이러저러하다 궁핍하게 되어 예전 료우마의 부하나 동료로 당시는 메이지 정부의 고관들을 찾아 가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누구 하나 도움 주지 않았고(이는 오료우가 료우마 생존 시 성질이 개같았다는 점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도움 줌 사람은 사이고우 타카모리(西郷 隆盛)로 20엔(...억지로 현재 한국 화폐가치로 치면 약 200~300만원 정도)을 주었다고 하네요.

      나중에 재혼하였는데 알콜의존증에 걸려서는 매일 술 마시며 취해서는 "나는 사카모토 료우마의 부인이다"라고 외쳤다고 하네요. 평소 입고 다니는 옷도 사카모토 가문의 문양이 박힌 옷을 입고 다녔고요.

      그런 것을 지켜봤어야 했을 오료우의 남편과 그런 식으로나마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오료우... 둘 다 불쌍해서요.

      여담으로...
      여러 매체에서 타카스기 신사쿠가 피를 토하면 키스하며 그 피를 닦아주던 알흠다운 사랑을 보여주던 우노'라는 여성은 섹스중독자였던 듯... 신사쿠가 죽자 그의 이름을 지키려 하는 신사쿠의 꼬봉 이토우 히로부미, 이노우에 몬타 등이 비구니로 만들어 신사쿠의 보제사에 갇아 놓고 주변에 감시인을 배치하였다고 하네요(뜬금없이 이 이야기는 왜 하냐고요? 잘난체 하고 싶었습니다. 우하하하)

    •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27 1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덕분에 좋은거 많이 알게 됐네요.
      뭐, 잘난체 하시면 덩달아 더 많이 배우게 되니 참 좋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해주시길 바랄게요 ㅋ

      우노 라는 여자 참 불행했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3.23 10: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야흐로 君臣豊樂이 나올때가 도래했군요. 뭐 저도 이 남은일가들의 생명연장은 말 그대로 '단지 생명연장일 따름'이라고 생각했고, 사실 이사람들이 어지간히 똑똑했다면 세키가하라 이후 납작 엎드렸어야 됐을텐데 결국 그것도 아니었던지라 죽음을 자초한 것이라고 밖에(..ㅡㅡ;)

    한편으로 생각하면 히데요시에대한 원령에 요도도노가 히데요리의 목숨에 불안을 느꼈다는걸 보면 씨도둑질(;;;...)은 아니라는 설에 시바선생은 무게를 두는 것도 같군요..(음..;)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3 17: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소설 상의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말하는 것 처럼 이에야스가 죽기까지 납죽 업드리고 있었다면 재미있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반반입니다.
      예전에는 히데요시 이외의 씨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임신도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그러다 보니 요즘은 히데요시의 씨다...라는 생각이 강해진 상태입니다.

  3.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3.29 1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요도도노는 뭐...조삼모사로군요;;;

十.

 이에야스(家康)도 요도도노(淀殿)의 눈치를 살폈다. 만약 그녀가 성질이라도 부려 히데요리(秀)를 내세워서는 또다시 옛 토요토미(豊臣) 계열의 다이묘우(大名)들을 규합이라도 한다면 곧바로 천하에 난이 일어나 이에야스가 어렵사리 손에 넣은 천하가 주먹에서 모래알 빠져나가듯 사라지게 될 것이다.
 실제로 세키가하라(
ヶ原)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일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등은 이에야스에게 각각 50만석 전후의 봉토를 얻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히데요리의 가신이기도 하다는 이중적인 입장을 지키며 틈만 나면 오오사카성(大坂城 )에 가 히데요리를 배알하고 인사를 올렸다. 만약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가혹하게 대하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에야스는 에도(江)에 있으면서도 토요토미 가문의 필두 대로라는 자격으로 천하에 임했다. 세키가하라부터 2년 뒤인 1602년 2월 14일에 재차 오오사카에 나타났고, 다음 해 3월 14일 히데요리를 배알하고는,

 "평소 문안 인사를 드리지 못하여 이제서야 신년인사를 올리옵니다"

 라고 말하였다. 3월 중순이 되어서야 신년인사를 하는 것도 묘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가신으로써의 예를 취하였고 취함에 따라 카토우 키요마사 등 옛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의 감정을 진정시켰다. 다음 해 1603년의 배알을 마지막으로 이에야스는 오오사카에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제서야 토요토미 가문이라는 한때 일본을 지배한 강성했던 이름을 잊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히 오오사카 성 밑도 쇠퇴하였고 대신해서 에도가 번창하였다.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도 에도에 저택을 세워서는 자신들의 처자식을 자발적으로 에도에서 살게 하는 식으로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바쳤다. 카토우 키요마사 조차 – 라기보다 오히려 키요마사가 앞장서 미야케자카(三宅坂) 고개 위에 집터[각주:1]를 달라고 해서는 황금을 여기저기 처바른 저택을 만들어 처와 자식을 살게 하였다. 이제 에도 정권에 거역하지 않겠다는 증거를 이에야스와 천하에 공언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키요마사를 따라 다른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들도 그리하였다. 이에야스는,
 - 이제 오오사카에 새해 인사할 필요가 없겠군
 하고 생각하여 오오사카에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히데요리는 힘을 상실했다.
 하지만 관위만큼은 남다르게 승진했다. 승진하는 것이 당연했다. 토요토미 가문이 가진 봉토의 규모야 일개 다이묘우에 지나지 않았지만 다른 다이묘우와 다른 점은 부친 히데요시나 히데요리에게는 형 뻘인 히데요시의 양자 히데츠구(秀次)가 칸파쿠(
白)에 임명 받은 것처럼 귀족(公家)이라는 점에 있었다. 이런 점은 다섯 셋케(五家-섭정, 칸파쿠가 될 수 있는 문벌)인 코노에(近衛), 타카츠카사(鷹司), 쿠죠우(九), 니죠우(二), 이치죠우(一条)와 다를 바 없었다. 히데요리는 소년이었지만 1601년에 종이위(從二位) 다이나곤(大納言)에 임명 받았으며, 1603년에 나이다이진(内大臣)이 되었다. 10살의 어린 나이다이진은 과거를 찾아보아도 드물 것이다.
 나이다이진 정도 되면 조정 백관의 총수라고 말해도 좋았다. 이 때문에 쿄우토(京都) 조정은 오오사카에 마땅한 예를 치렀다. 신년이라도 되면 친왕(親王), 상급귀족(公卿) 등이 오오사카로 대거 내려와, 성내에 있는 건물에서 히데요리를 배알하고는 이 토요토미 성(姓) 2대째인 귀인(貴人)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이런 점에서만은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만이 신년인사 하러 오는 것을 그만둔 이유, 더불어 상기와 같은 이유가 있음에도 그만 둔 더 큰 이유는 - 이 해에 이에야스가 조정에 주청하여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에 칭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세이이타이쇼우군은 아주 옛날 키소 요시나카(木曽 義仲)
[각주:2],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각주:3]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겐지(源氏)가 아니면 임명 받지 못한다.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 尊氏)[각주:4]도 겐지였기에 임명되었으며,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도 토키 겐지(土岐 源氏)를 칭하였기에 임명 받았다[각주:5].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織田家)의 부하 장수 시대에 본성(本姓)을 공개적으로 칭하지 않았으며 한때 헤이시(平氏)를 칭했기 때문에 세이이타이쇼우군이 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조정에 주청하여 조정이 만들어 준 성(姓)을 받는(朝臣) 형식으로 토요토미(豊臣)를 하사 받아서는 귀족(公家)이 되었고 칸파쿠()라는 자격으로 일본을 통치하였다. 이에야스도 처음엔 겐지를 칭하지 않았지만 노부나가(信長)와 동맹을 맺고 있던 시절에 조정에 청하여 겐지 공칭을 허락 받았다[각주:6]. 다행스럽게도 이로 인해 쇼우군 가문(軍家)에 임명되었다. 세이이타이쇼우군의 최대 특전은 바쿠후(幕府)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쟁 후 이어지고 있던 에도의 비합법적 정부를 바쿠후 창설로 인해 정당화 할 수 있었으며 그런 합법성을 갖고 다이묘우를 거느리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토요토미 가문에게 형식상이나마 머리를 굽히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한지 이미 3년이 지난 상태였다.

 이 소식은 곧바로 오오사카에 전해져 요도도노와 그녀의 시녀들을 놀라게 하였다.

 "가신 주제에 바쿠후를 연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이 바쿠후를 연 이상 이젠 정권을 토요토미 가문에게 반환할 의사가 없다는 것은 아닌가?
 이때도 요도도노는 카타기리 카츠모토(
片桐 且元)를 불러 마치 카츠모토가 이에야스인 마냥 힐문했다.

 "자네는 거짓말을 한 것인가?"

 하고 요도도노는 숨을 거칠게 하며 책망하였다. 카츠모토는 즉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한 후 자기자신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남몰래 바라고 있던 것을 흡사 이에야스의 머리 속 생각인양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런~ 쇼우군() 직은 일대에 한해서이옵니다. 그 후에는 히데요리님께 물려주실 생각이옵니다"

 이 시기 에도에서 자기 영지(領地)인 히로시마(広島)로 돌아가던 후쿠시마 마사노리도 오오사카에 들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를 배알하여 비슷한 말을 하였다.

 "잠시 동안만 참으시면 되옵니다"

 라는 것이었다. 마사노리가 말하길 이에야스는 1543년 호랑이띠로 이미 노령이다. 그와 반대로 나이다이진(内大事=히데요리)님은 어린 나무가 쭉쭉 자라듯이 커가며, 커갈수록 이에야스가 죽음에 가까워진다. 이에야스가 죽으면 졸자(拙者)를 시작으로 한 천하의 제후들은 더 이상 토쿠가와 가문에 세울 의리가 없어진다. 토쿠가와 가문 자체도 이에야스를 잃으면 지금과 같은 강한 전투력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옵니다. 초조해하지 말고 난을 일으킬 생각하는 일 없이 일단 에도의 지시를 따르시길. 언젠가 때가 오면 아무리 토쿠가와 가문이 정권을 반환하고 싶어하지 않더라도 우리들이 활과 칼을 들고 토요토미 가문으로 되찾아 오겠습니다. – 라는 것이었다.

 "반드시 그리 하겠사옵니다"

 하고 마사노리는 힘주어 말했다.

 이 너무도 듬직한 말에는 안심이 되는 한편 아무리 요도도노라도 걱정도 되었다.

 "사에몬다유우(左衛門太夫=마사노리)님. 그러한 말씀하셔서 행여라도 에도(江戸)로 그 말이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하고 이 귀부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남을 걱정하였다. 마사노리는 그것만으로도 감동하여 눈물을 머금고,

 "고맙사옵니다"

 라며 목소리를 적셨다. 하지만 곧바로 고개를 쳐들어 큰소리로 외쳤다.

 "듣더라도 무슨 일이 있겠사옵니까? 원래 에도님(江戸殿=이에야스)에게 있어 저는 은인이옵니다. 저 세키가하라 때 제가 미츠나리(三成)를 미워한 나머지 에도님에게 가담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제후들은 앞다투어 에도님을 따른다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그러했다. 선대 히데요시와 친척인 자[각주:7]로, 그 때문에 토요토미 다이묘우 중에서는 키요마사와 더불어 후다이(譜代)[각주:8] 필두로 여겨지고 있었으며, 세키가하라 즈음에는 그런 마사노리조차 이에야스에게 가담하였기에 다른 다이묘우들도 거리낌없이 오오사카 측을 물리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 시기의 이에야스에게 있어 마사노리의 정략적 가치는 그만큼 거대한 것으로 그러한 자신의 가치를 마사노리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전쟁터에서 마사노리는 이에야스 측의 선봉으로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한가운데서 용맹한 활약을 벌여 서군을 무너뜨렸다. 어쨌든 마사노리가 이에야스에게 기여한 것은 누구보다도 컸다. 거기에 마사노리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이전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서 이에야스 편에 서라고 권유한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에게 마사노리는,

 "에도님을 돕기는 하겠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츠나리(三成)에 대한 원한 때문일세. 이 전투에서 에도님이 이긴 후 결코 히데요리님의 신상에 지장이 없도록 에도님의 입으로 확약을 듣고 싶네"

 라고 말하여 이에야스는 나가마사를 통하여,

 "그러한 일은 없다"

 라는 뜻의 말을 받았다. 그런 후쿠시마 사에몬다유우이기에 가령 이 말이 칸토우(関東)에 전해지더라도 이에야스는 퉁퉁거리지도 못할 터이다 – 라고 말하였다. 요도도노는 비로소 안심했다.

 그러나 에도의 이에야스는 마사노리 정도의 실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곧 밝혀졌다.
 가볍게 쇼우군 직을 사퇴한 것이다. 취임한지 2년 후인 1605년의 4월이었다. 그런데 그 사임한 그날 조정에 주청하여 쇼우군 직을 적자 히데타다(
秀忠)에게 물려주어 일본의 지배권을 세습시켰다. 이 소식만큼이나 오오사카를 낙담시키고 요도도노와 그녀의 시녀단을 분개시킨 것은 없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히데타다에게 쇼우군 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줌으로써 더 이상 히데요리에게 정권을 물려줄 의사가 없다는 뜻을 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이때 히데요리는 13살로 관위는 우다이진(右大臣)에 임명된 상태였다. 앞으로 승진한다면 칸파쿠밖에 없었으며 칸파쿠가 되면 죽은 아비 히데요시의 선례를 따라 한편으론 백관을 거느리고 조정의 중심에 서며 한편으론 이백여 제후들을 이끌며 천하의 정치를 총괄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세 이래 무가(武家)의 통솔자로 여겨지는 세이이타이쇼우군과 당연하게도 충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1. 현재 일본의 헌정기념관. '미야케자카 고개(三宅坂)'라는 이름은 시간이 흘러 17세기 중반에 미야케 가문(三宅家) 참근교대시에 이용하는 에도저택이 생기면서부터 생긴 이름으로 당시는 ...뭐라고 불렸는지 모르겠음. 데헤~ [본문으로]
  2. 미나모노토 요리토모와는 사촌지간이다(부친끼리 배다른 형제. 사족으로 요시나카의 부친은 요리토모의 큰형(悪源太)에게 살해당했다). 겐페이 쟁란기(源平爭亂) 때 토벌 명령이 내려진 헤이케(平家)를 누구보다도 빨리 쿄우(京)에서 쫓아냈다. 키소(木曽)는 묘우지(苗字)이며 본성(本姓)은 미나모토(源). 보통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 義仲)'로 알려져 있다. 요리토모의 부하뻘이었지만,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나대다가 그 꼴을 못 본 요리토모가 정벌군을 파견하자 정치적 우위를 세우기 위해 코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을 협박하여 쇼우군이 되었다. [본문으로]
  3.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를 연 사람. [본문으로]
  4.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를 연 사람 [본문으로]
  5.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이후 미츠히데가 지원을 호소하며 호소카와 유우사이에게 보낸 편지(明智光秀公家譜覚書)에 나타나는 말로 종삼위(従三位)와 쇼우군에 임명받았다고 주장했다. 혼노우지의 변에 있어서의 조정흑막설의 증거로 많이 사용되는 떡밥이지만 개인적으로 당시까지 미츠히데의 관위인 종오위(従五位) 휴우가노카미(日向守)에서 무가로써는 하나의 허들인 사위(四位)를 뛰어넘어 단번에 종삼위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신빙성은 없다고 생각한다.(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다) [본문으로]
  6. 1566년 미카와 통일 기념으로 그때까지 쓰던 마츠다이라(松平)를 토쿠가와(徳川)로 바꾸면서. 마츠다이라 자체의 본성은 가모(賀茂)인 듯 싶지만 이때부터 본성은 미나모토(源)라고 우겼다. [본문으로]
  7. 마사노리의 모친은 히데요시의 숙모. [본문으로]
  8. 대대로 그 가문을 섬기는 가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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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3.13 18: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이번에도 시달리는군요(...)뭐 아무리 쪼고 볶은들 뭐 히데요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다이진 위로는 못올라가겠습니다만(ㅎㅎ;)


    히데요리에 대해 또 이글을 읽어 관심이 생겨 위키를 찾아보니, 히데요리의 남자아이들 중에 로쿠죠가와라에서 참수당한 쿠니마츠 말고도, 求猒上人라는 사람이 겐로쿠 초두에 80세로 죽었을때 낙성시에 3세였던 차남이었다는 설이 있다고 하더군요. 뭐 위키에도 이 대목 말고는 안나오는이니 누구인지는 잘 알수는 없지만;


    P.S. 전혀 관계 없는 사족입니다만 네이버블로그의 머리에 요구르트 핼멧을 쓴 쥐X이가 아주 인상깊었습니다(허허헛)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3 1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처음 보는 이름인지라 검색해 보니...

      [일본의 슬기로운 중들(浄土本朝高僧伝)]이라는 책에 따르면 -

      태어날 때부터 현명하고 설법에도 뛰어난 '큐우엔(求猒)'이라는 고승(上人)이 말년에 후시미에 은거하며 살았는데 겐로쿠 초반 80세의 나이로 죽었다.

      임종의 자리에서 제자에게 자신은 히데요리의 둘째 아들로 낙성시 3살이었다는 것, 에도에 숨어산 후 조우죠우 사(増上寺 - 에도에 있는 절)에서 학승이 되었다고 고백.

      중년이 되어서 간 오오사카 성의 거대함과 후시미 성터 쓸쓸함을 보고 세태의 흐름에 개탄도 하였지만 말년에는 '천하는 한 사람만의 천하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니들도 망념과 집착을 버리고 세태에 구애 받는 일 없도록 하라'

      ps;일본에 관한 것을 검색하실 때는 야후저팬에서도 꼭 검색해 보시길...일본에 관해서만이라면 구글보단 오히려 더 좋은 검색엔진입죠.

  2. 맹꽁이서당 2009.03.13 2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쿠시마도 말은 저렇게 했겠지만.. 결국 오사카 전투에서 히데요리 측으로 참전한 다이묘는 없었겠죠?

    번역하신 [전국 무장의 말년] 후쿠시마 편을 찾아보니 1619년까지 살아있었던 것을 보면 말이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3 2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신경쓰이는 다이묘우들는 에도성을 지키게 했습니다(에도성을 공격당할 일은 없으니 이름만 다른 억류). 그 중에는 물론 후쿠시마 마사노리도 있었고, 그는 오오사카로 와 달라는 히데요리의 친서도 펼쳐 보지 않았고 사자도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뭐 설사 억류당하지 않았더라도 오오사카 측에 서는 일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만)

      여담으로...
      에도성에 남겨진 인물 중 가장 이외였던 인물은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라고 합니다. 본문에도 잠깐 언급되듯이 세키가하라에서는 거의 동군의 부사령관격이었으며 실질 뒤에서 가장 많은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야스는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는 결과가 되었으니까요. 뭐 결국 여름의 전투에는 참가하게 되지만요.

  3.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14 00: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제부터 시바 료타로의 <세키가하라 전투>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내용이 이것과 비교적 겹치는 부분이 있군요. 언제 한 번 시바 료타로에 대해 알려주시길 부탁드려요 ^^ ㅋ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4 02: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래도 동시대의 이야기를 그리는 같은 작가의 것이다 보니 비슷할지도...참 저는 아직 그것을 읽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연이 닿으면 읽어 보고 싶군요.

      에...저같은 경우 시바 선생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위키에 실린 거 읽는 정도? 그분의 책도 완독한 것이라곤 '타올라라 검'과 '이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 "역사의 교차점에서" 뿐입죠.

  4. 카즈토요 2009.03.20 16: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바 료타로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시바 선생의 작품중에서도 그 방대한 사료의 토대위에 과감한 취사를 통해 극적인 내용들을 빠른 속도로 써내려가고 있어서 정말 빨리 읽히는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일본의 근대를 결정짓는 극적인 사건의 원인과 전개, 연계된 인물들의 심리, 다양한 성격들의 조화와 갈등이 마치 큰 강이 흐르는 듯 속도감있게 읽혀졌습니다.
    대세앞에서 처세하는 군상들의 세세한 묘사와 여러 유명한 사건들이 주는 재미들도 솔솔하구요.

    다만... 시바 료타로 식의 역사 다루기가 조금 위험해 보일때도 있습니다. 마치 NHK사극을 보듯이 인물과 사건의 묘사가 너무나도 주관적으로 디테일하고 생생한데 이것은 독자가 해당역사에 대해 중도적 관점을 냉정하게 유지하고 있지 않다면 작가의 주관적 픽션을 그대로 인정하게 되는 오류의 위험이 크다고 느끼곤 합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1 2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재미있는 책인가 보군요. 시바 선생의 세키가하라.
      틈나면 꼭 읽어 보겠습니다.

      그쵸...
      소설은 소설일 뿐입죠.
      이 10편을 쓰다가 이상한 것이 있어 따로 포스팅하려다 ....귀찮아서요~..못하고 있습니다.

  5.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3.20 19: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대에 한해서이옵니다 - 하고 말했는데 불과 2년후에 히데타다가 넘겨 받았으니...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헐 님아...좀..." 싶겠군요(...)
    ...암튼 이번화도 잘 읽었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1 21: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뭐 선수끼리인데요..

      개인적으로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인지...신경이 쓰이는 인물입니다. 카츠모토는..

  6. 본다충승 2009.05.06 13: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구리 니 본성 가모 라며? ㄴㄴ 미나모토임... 우기면 장떙..... -_-;; 몇달 못봤더니 기억이 가물가물 해서 다시 읽고 있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09 04: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賀茂...는 이에야스의 선조 토쿠아미(徳阿弥)..가 오기 전의 마츠다이라(松平)의 본성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이도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좀 복잡하지만...
      마츠다이라고우(松平郷)라는 지역의 호족으로 마츠다이라 씨가 있었고 그곳에 떠돌이 중(遊行僧)을 하던 徳阿弥가 마츠다이라 씨의 사위로 들어가서 마츠다이라 치카우지(松平 親氏)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이 토쿠가와 이에야스이옵죠.

      본문의 주석을 달 때만 해도 저는 미카와 통일 후 겐지(源氏)를 칭한 줄 알고 있었습니다만 요즘 새로 읽은 책(신 역사군상 12. 토쿠가와 이에야스)에서는 - 미카와 통일 기념으로 토쿠가와(徳川)란 성을 처음 칭했을 때만 해도 후지와라(藤原)라는 성을 썼고, 후년 쇼우군(将軍)이 되고 나서야 그때부터 겐지(源氏)를 칭했다고 하는군요.

六.

 윤
7월이 되어 이변이 일어났다. 12일 밤.

 후시미[伏見] 도바[鳥羽] 부근을 진원지로 하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사상 유례가 없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대지가 갈라지고 하늘엔 달무리가 져[각주:1] 순식간에 후시미, 도바, 요도가와[淀川] 해안의 여러 마을이 무너지고, 후시미 성 밑 마을의 남녀 2천명이 깔려 죽었다.

 다이묘우[大名]들의 저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근신중인 키요마사[正]의 저택도 객관(客館=大書院)이 무너져 내리고, 마구간에서는 불을 뿜었다. 하지만 키요마사는 이런 아수라장에서도 행여 있을지도 모를 위협에서 히데요시를 지키기 위해 성에 오를 것을 결심하여 부하들에게 준비를 명했다. 그 자신 몸에는 하라마키[巻]를 입고 흰 명주에 주색(朱色)으로 남무묘법련화(南無妙法蓮華)이라 쓰인 겉옷[陣羽織]을 걸치고선 이마에는 주황색 머리띠를 둘렀다. 손에는 8[각주:2] 길이의 봉()을 들었다. 봉은 쓰러진 가옥을 일으키는 지렛대로 쓰기 위해서였다. 무사 30, 일반 병사 200명에게도 봉을 들게 하여, 여진(餘震)이 계속되는 대지를 박차고 박차며 후시미 성[伏見城]에 당도하였다.
 
정문은 이미 무너져 쓰러져 있었다. 마츠노마루[
丸]라 불리는 성곽의 망루(望樓)도 무너져 시체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키요마사는 서둘러 히데요시를 찾으려 하였다.

 혼마루[本丸]로 가자!”

 키요마사는 목소리 높여 호령하면서 돌계단을 서둘러 올라가자 혼마루 내의 누각, 건물 등은 전부 쓰러져 있어 비명만이 여기저기서 들려올 뿐이었다. 히데요시가 벌써 깔려 죽었나? 하고 키요마사는 생각했지만 계속해서 등롱(燈籠)을 비추며 여기저기를 탐색하였다. 그러다 설마 하는 기분으로 더 안쪽으로 들어가 문 앞 작은 마당을 지나 문을 거쳐 정원에 들어서자, 정원 안에 쌓은 작은 동산의 잔디 위에 병풍을 둘러치고 카츠기[被布]를 뒤집어 쓰고 앉아 있는 상급 여관(女官) 20명 정도의 무리를 발견했다. 옆에 있는 소나무에 등롱이 걸려 있어 그 불빛이 닿는 곳에 히데요시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키요마사는 발견했다. 히데요시는 이 이변을 틈탄 자객을 겁내서인지 여성의 의상을 뒤집어 쓰고는 그 화려한 옷 속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왕년의 히데요시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잔머리나 굴린 땜질이었다. 키타노만도코로[政所], 마츠노마루도노[丸殿][각주:3], 코우조우스()도 있었다.

 키요마사는 가까이 다가가 엎드려서는 코우조우스를 향해서[각주:4],

 졸자는 카토우 카즈에노카미[加藤 主計頭]이옵니다.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님을 시작으로 타이코우님를 모시는 여러분들이 깔려 있으시기라도 한다면 이 지렛대로 들어올리고자 근신 자중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왔습니다

 고 큰소리로 말했다. 곧바로 네네는,

 토라노스케[虎之助]

 하고 말을 걸었다. 서둘러 히데요시 앞에서 칭찬을 해버리면 이럴 경우 키요마사의 행동이 공인 받아 히데요시도 그것을 승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잘 왔네. 정말 빨리 와주었구나

 네네는 계속 말했다.

 언제나 언제나 너의 장함과 공적을 든든하게 생각하고 있다네

 라는 네네의 목소리는 키요마사의 목소리보다도 더 컸을 것이다. 키요마사는 더 납작 엎드렸다. 땅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어서 키요마사는 고개를 들었다. 작법대로 시선은 코우조우스를 향해 코우조우스에게 말을 거는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키요마사가,

 들으시게 코우조우스!”

 하고 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졸자는 조선에서 억울한 누명을 입었소. 조선팔도에 공격해 들어가 경성(京城)을 제일 먼저 함락시켰으며[각주:5], 조선 왕자 형제 두 분을 잡기도 하였고[각주:6], 나중에는 간도(間島)의 오랑캐 땅까지 쳐들어갔으며, 길주(吉州)에서는 10만기()[각주:7]의 적을 쳐부수고 대장을 잡아 죽였으며, 그 외에도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하였건만 되돌아 온 것은 억울한 누명밖에 없어소. 타이코우님께선 지부쇼우[冶部少=미츠나리]의 말만을 믿으시며 그것의 진실인지 거짓인지 조사조차 해 주시지 않으시오

 라고 말하였다. 네네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키요마사의 말이 끝나자,

 전쟁터에서의 피곤이 쌓였는지 토라노스케의 얼굴이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구나

 라고 말하며, 키요마사를 위해서 히데요시의 동정을 자극해 주었다. 또한 히데요시에게,

 토라노스케에게 중문(中門)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른 장수들의 모습은 여전히 볼 수가 없군요

 라고 말하자, 히데요시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 인해 키요마사의 근신을 풀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뒤 네네는 히데요시를 더욱 설득하여 키요마사를 위해서 변호를 하였다. 결국 히데요시는,

 토라노스케를 거시기... 그래 용서한다

 고 말했다. 네네는 곧바로 코우조우스를 중문으로 서둘러 보내 키요마사에게 그것을 알리게 하였다. 네네가 자신의 피보호자를 위해서 해 준 마지막 중재(仲裁)였던 것일 지도 모른다.

 이 해로부터 3년째의 초가을. 히데요시는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다.
 
유언에 따라 오대로(五大老) 필두인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가 히데요리[頼]를 대신하여 조선에 있던 장수들을 철수시켰다. 조선에 있던 키요마사는 하카타[博多]에 상륙하여 후시미[伏見]로 돌아오자 복수를 선언했다. 지부쇼우를 죽이겠다고 하였다.

 나도 끼워 주게

 하고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쿠로다 나가마사[ 長政], 아사노 요시나가[ 幸長],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오와리(尾張) 파벌의 장수들이 너도나도 달려와서는 키요마사를 따르겠다고 하였다. 복수심에 불타는 키요마사와는 달리 그들에게는 단순히 미츠나리를 조금 미워했던 감정 외에도 히데요시의 죽음을 기회로 미츠나리와 그의 파벌을 모조리 쓸어버려, 토요토미 가문의 권세나 중심을 그들이 생각하기에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 놓고 싶다는 정치적인 충동이 일었을 것이다. 적어도 쿠로다 나가마사, 이케다 테루마사, 아사노 요시나가는 그런 쪽의 즉 정치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사태는 절박했다. 공연한 소란이 아니었다. 때때로 시가전(市街戰)까지 일어날 뻔 했다. 미츠나리,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쪽도 방심하지 않고 자기들 저택 주변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벽 구석구석에 망루를 설치하여 경계하였다. 이 사태를 이에야스는 이용하였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죽는 순간부터 히데요리의 정권을 빼앗을 궁리만 하였고, 그것만을 생각하며 신중히 그러나 민첩하게 행동했다. 이에야스는 이 토요토미 가문의 분열 소동을 관찰하여 철두철미하게 오와리[尾張] 파벌의 다이묘우[大名]들을 꼬셔서 그들의 위에 섬으로써, 결국에는 이시다 파벌을 뭉개고 요도도노[淀殿], 히데요리 모자를 밀어내고자 하였다. 이것 외에는 천하를 취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나이후(=이에야스)가 뒤에서 그들을 후원하고 있다

 고 미츠나리는 성 안에서도, 동료들 앞에서도 세차게 조목조목 따져가며 비난하였지만, 이에야스는 개의치 않았다. 우선 오와리 파벌들과 연을 맺어, 인척(姻戚)의 끈을 이어놓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죽을 때 남긴 법이 있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 사당(私黨)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여러 다이묘우(大名) 간에 결혼은 허락을 받은 다음에 할 것.
이라는 사사로이 멋대로 다이묘우 가문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하는 법제를 남겼다. 이에야스는 그것을 무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 혼자 무시한다고 하여도, 이에야스에게서 딸을 얻는 다른 다이묘우가 이를 꺼리면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리 생각하여 이 일건에 대해서 키타노만도코로와 상담하기로 하였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 허락을 얻는다면 그녀를 따르는 또는 그녀와 친한 여러 다이묘우들은 부담 없이 이에야스와 인척관계를 맺을 것이다.

 키타노만도코로의 마음을 잡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오게 해 두지 않으면, 토요토미 가문에서의 공작은 무엇을 하건 하기 어려웠다. 이에야스는 쿄우[]의 아미다가미네 산봉우리[阿弥陀ヶ峰]히데요시의 묘소를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그 묘를 지키며 상복(喪服)을 입고 있던 네네의 거처에 몇 번이고 방문하였다. 선물도 보냈다. 사자(使者)도 파견하여 그 적적함을 위로하였다. 이 때문에 후시미[伏見]의 성 안에서는,
 
-
나이후 님과의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것은 아닌가?
 
라는 핑크 빛 억측이 돌 정도였다.

 물론 네네에게 그러한 감정이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누구보다도 이에야스의 역량과 성실한 듯한 인격을 신뢰하였다. 신뢰를 얻기 위해서 이에야스는 언동 하나하나 조심하면서 네네를 대했다. 네네는 결국,
 
토요토미 가문과 히데요리 님의 장래를 맡길 수 있는 것은 에도 나이후[ 府][각주:8] 이외에는 없다. 부탁을 하려면 나이후를 신뢰하고 오히려 모든 것을 맡기는 편이 좋을 것이다.’
 
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에야스라면 절대 나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이대로 미츠나리의 파벌이 요도도노 모자를 내세워 토요토미 가문을 농단(壟斷)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하다.

 지금까지 네네는 이성(理性)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네네의 감정(感情)이 그것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미츠나리의 파벌과 그들이 내세우는 요도도노와 그녀의 늙은 시녀들에게 토요토미 가문을 넘긴다는 것 등은 네네의 감정이 참을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질투가 아닌 - 히데요시를 도우며 이 가문을 세워 것은 네네이며 그들이 아닌 것이다. 또한 그들 파벌이 이기면 네네가 보호해 온 키요마사들은 멸망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네네는 최악의 사태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다. 정권이 이에야스에게 옮겨질 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이에야스라면 예전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후계자인 히데노부[秀信][각주:9]를 기후 츄우나곤[岐阜 中納言][각주:10]으로 만들어 보호한 것과 같이, 히데요리를 셋츠[津]야마토[大和] 근방에 성()을 주어 50~60만석의 다이묘우[大名]로 만들어서는 가계(家系)를 보호하고, 제사가 끊기지 않게 해 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조건으로 내걸어야 하나 하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 각오도 네네에게 있어서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오우미[近江] 아시우라[芦浦]칸논 사[音寺]의 성주이며 승()이기도 한 센슌(詮舜][각주:11] 이라는 자가 네네에게 은밀히 말한 것이기도 했으며, 이때도 네네는 냉정히 그것을 듣고 있을 수가 있었다. 듣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네네의 이성보다도 오오사카[大坂]에서 요도도노를 내세우고 있는 미츠나리 파벌에 대한 혐오가 그렇게 만들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여러가지 생각이 합쳐진 결과 네네는 이에야스를 신뢰하였다.

 혼인에 관한 것은 제 입으로도 토라노스케 등에게 말하겠습니다.”

 하고 네네는 이에야스의 사자에게 답했다. 곧바로 그리 되었다. 키요마사는 당시 홀아비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부하인 미즈노 타다시게[水野 忠重]의 딸을 양녀[각주:12]로 하여, 서둘리 준비해서는 키요마사에게 시집 보냈다. 거의 동시에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적자(嫡子) 마사유키[正之]에게 이에야스는 양녀를 시집 보냈다.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政]의 아들 요시시게()에게도 양녀를 시집 보내는 일을 진행시켰다. 미츠나리 등은,

 아미다가미네 묘소의 흙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백주대낮에 타이코우 님이 남기신 유법(遺法)을 어기고 있다!”

 고 이에야스나 키요마사 등을 규탄하였지만 키요마사 등은 그런 규탄을 묵살했다. 미츠나리가 요도도노 모자의 권위를 믿고 고압적으로 나오건 키요마사 등은 이미 키타노만도코로의 묵인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 마음 든든했으며 유법을 어긴다는 양심의 가책에서도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었다. 더구나 키요마사는 네네를 내알(內謁)하였을 때,

 어떤 것이건 나이후를 따르렴

 이라는 은밀한 지시를 받고 있었다. 네네의 지시를 따르는 한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불충(不忠)이 아니라는 습성이 소년일 때부터 그들의 마음 속에 법칙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사후, 2년째에 소위 세키가하라 쟁란[ヶ原の役]이 일어났다. 난이 일어나 미츠나리가 주모자가 되어 오오사카[大坂]에서 거병하였을 때, 네네는 오오사카[大坂]에서 벗어나 쿄우[京]의 산본기[三本木]에 은거하며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이때 네네는 자신의 조카인 와카사[狭] 키노시타 카츠토시[木下 勝俊]에게, 길을 잘 못 들지 마라, 에도 나이후를 따르라는 훈계를 하고 있으며 또한 그 카츠토시의 동생으로 네네에게 있어서는 양자 중의 한 명이기도 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에게는, 히데아키가 흐름 속에서 어쩌다가 서군에 참가하게 되어 버린 것을 알고는,

 나중에 나이후를 꼭 도와 주렴

 이라고 엄히 명령했다.

 키요마사큐우슈우[九州]에서 동군(東軍)이 되어 움직였으며 또한 세키가하라[ヶ原]에 있어서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네네가 어렸을 적 키웠던 무장들이나 친척들이 전부 동군의 이에야스 편에 서, 많은 활약을 하였고 결국 히데아키의 서군에 대한 배반이 승리를 결정지어 서군에 있는 요도도노의 파벌을 격파했다.
 
보는 방식에 따라서는 히데요시의 처첩이 각각 십 수만의 병사를 움직여 세키가하라 분지[ヶ原]에서 싸웠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그 틈을 타고 천하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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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가 네네의 여생(餘生)이 된다.
 
네네는 이 사태나 시세에 대해서 결국 한 마디의 발언도 하지 않았고 히데요시의 명목을 빌기 위해 불교에 전념하였다. 그것 말고는 다른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다. 세키가하라 쟁란
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난 1605,

 절을 가지고 싶구나

 하고 이에야스에게 코우조우스를 파견하여 그 뜻을 전했다. 이에야스는 물론 그 뜻을 받들어 자신의 중신(重臣)인 사카이 타다요[酒井 忠世], 도이 토시카츠[土井 利勝]의 관할로 하여, 쿄우[]의 히가시야마[東山]의 산허리에 장대하고 화려한 사원을 조영 시켰다. 코우다이 사[高台寺]가 그것이다.

 그녀는 이 코우다이 사[高台寺]에서 히데요시의 위패를 지키며 또한 이곳에 살았다. 이에야스는 자신에게 천하를 가져다 준 이 여성을 존중하여 카와치[内] 내에 화장(化粧)을 하는데 쓰시라는 명목으로 13천석을 주어 정중히 대하였다. 네네가 비구니가 되어 살아가는 동안 1615년에 오오사카 성[大坂城]이 공격받아 요도도노 모자가 죽었다. 그 후에도 여전히 그녀의 수명이 이어졌다.

 에도 막부[江戸幕府] 3대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의 시대가 된 1624 9 6. 76세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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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도 시대의 어떤 유학자(儒學者),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에 이르게 한 것은 키타노만도코로의 재기(才氣) 때문이다.
는 식의 말을 하였는데, 다소 빈정대는 듯하다. 그녀는 히데요시와 함께 토요토미 가문이라는 작품을 만들었고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스스로 칼을 꺼내어 그 뿌리를 끊었다. 다른 사람에게 건넬 수 없다는 호담함과 같은 것을 느낀다.

 그녀는 말년에 풍월을 즐기며, 그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여러 다이묘우들의 경애와 존경을 받으며 유유히 세월을 보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회한(悔恨)이라는 것을 전혀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1.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는 자주 관측된다고 하지만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고 한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도 지진과 달무리가 병용되어 기록되어 있는 기사도 있다. [본문으로]
  2. 약 240cm [본문으로]
  3. 쿄우고쿠 씨[京極氏]로 거처가 이 후시미 성[伏見城]의 마츠노마루 성곽에 있었기에 이리 불렸다. 또한 이 당시에는 가장 총애를 받고 있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4. 당시는 윗사람에게 직접 말하기 보다는 곁에 있는 부하 격인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예법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경성(한성)에 제일 먼저 도착한 이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이다. [본문으로]
  6. 두 왕자(임해군과 순해군)를 잡았다기 보다는 함경도 방면을 담당했을 때 당시 병사 모집을 하러 간 왕자들이 함경도에 갔다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鞠景仁)에게 잡힌 것을 건네 받은 것. [본문으로]
  7. 이런 말을 믿으면 진다. [본문으로]
  8. 에도는 현재의 토우쿄우[東京]. 이에야스의 본거지였기에 그의 관직명 나이후[内府]를 붙여 이리 불렸다 [본문으로]
  9. 노부나가[信長]의 후계자인 노부타다[信忠]의 아들. 즉 노부나가의 손자. [본문으로]
  10. 영지(領地)가 노부나가의 옛 본거지 기후 13만석에 관직이 츄우나곤이었다. [본문으로]
  11. 히에이잔[比叡山]의 서고(書庫) 세이쿄우보우[正教坊]의 주지였으며, 능력과 히데요시의 신뢰로 여러가지 행정관(奉行)을 역임하였다. [본문으로]
  12. 미즈노 타다시게는 이에야스의 외삼촌이었기에 자신의 외사촌을 양녀로 삼은 것이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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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14 2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아들네미 같았던 동군 소속 무장 모두보다 더 오래살았군요(;;;) 역시 여성의 여생이란 생각할게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있어서 요도도노 모자의 여생따위, 아무런 상관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르죠. 뭐 사실 그들 모자야 세키가하라 이후의 삶은 덤이었던 것이나 마찬가지고...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4.15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편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네네도 장수했군요)
    다음 편도 벌써 기대가 되는데, 주인공 [야마토 다이나곤]이 누군지 궁금하네요.
    (빈약한 지식으로 추측해보면... 히데요시 동생 히데나가인가요?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4.15 0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평소에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 길주는 함경도의 도시입니다. 우리나라의 도 명명법이 목사-부였는지 병사-부였는지가 있는 대도시 두개의 이름을 따는 것인데요.(전라도는 전주랑 나주, 경상도는 경주랑 상주, 충청도는 충주랑 청조 같은 식이죠. 경기도는 일본의 긴키랑 같은 것이므로 예외 입니다만) 세조때 반란을 일으킨 이징옥이가 함길도 절제사 였습니다. 길주는 조선 초기까지만해도 상당히 큰 도시로 군사적, 행정적 중심지 였다는 것이지요. 아마 세조때 였는지 예종때 였는지 함경도로 바뀌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4.15 0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편에서 전개가 갑자기 급하게 흘러간 것 같아서 조금은 아쉽네요.
    2대로 단절된 야마토 고리야마 도요토미 가문의 초대 도슈로 든든한 형의 오른팔이라, 기대됩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4.15 0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키타노만도코로 편 완결이네요 야마토다이나곤도 기대됩니다
    일본문학을 전공하고있는 학생이지만 아직 실력이 빈약한 관계로(고어, 고어체는 정말 쥐약-_-) 책을 구해도 읽을 수 없으니 이렇게 발해지랑님의 번역하신 것을 기다리고있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paak81 BlogIcon 파악 2008.04.15 14: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좋은 글 읽게되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5 19: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음...말씀해 주신 것은 조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군요. 확실히 역사상의 결과만 보면 의미가 없어보이기도 하지만... 왠지 어떻게든 존재 의의를 찾아 주고 싶군요...또한 나름 살려고 발버둥 쳤던 인물들의 생을 덤으로 하기엔 너무 잔인하다는 느낌도 드네요. 뭐 조선침략 원흉의 핏줄이니 인과응보이기도 하지만요 ^^

    맹꽁서당님//재미있게 보셨으니 다행입니다. 밑에 신사본론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야마토 다이나곤은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이옵죠. http://blog.naver.com/valhae0810/100035744758 &lt;- 전에 졸역했던 것입니다.

    지나가던님//드디어 저에게도 오셨군요. 그 유명한 '지나가던'님.... ^^
    실례했습니다. 좋은 지식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신사본론님//이책은 챕터 별로 그 인물에 대한 것만 중점적으로 다루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것에 더하여 과감한 삭제가 시바 선생님 작품의 특징이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많이 읽어 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요)
    기대는 하지 마십시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요 ^^;

    박선생님//역시....기대는 마십시요. 어디까지나 제 개인 취향으로 재미있던 것 뿐이니까요
    아물러....고어 관련은 저도.... --;
    저는 그래도 운 좋게 연이 닿은 이웃이신 shotokanfist님이 그쪽으로 굉장하셔서 든든하답니다.
    박선생님도 함 그쪽 방문을 권하고 싶군요.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파악님//고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보람을 느끼는군요 ^^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4.17 02: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로 하시는 거라기엔 매끄러운 번역인듯 합니다^^
    shotokanfist님 블로그에도 방문 해봤는데 많은 자료들이 있네요(후한서부터 만엽집의 시가까지;)
    구경해보고나니 한문학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듭니다 참 배워야할게 많네요;;;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7 1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취미로 하다 보니 그렇게 까지 깊게 안 들어가도 된다는 점이 다행이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