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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마사노리'에 해당되는 글 26건

  1. 2008.03.03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1- (8)
  2. 2008.02.24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6- (10)
  3. 2008.01.12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6- (6)
  4. 2007.12.30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4- (13)
  5. 2007.12.09 살생관백(殺生関白)-7- (10)
一.

검은 백합 한 송이
라는 편지가 네네()에게 전해진 것은 1587년의 한창 더울 때였다.
근시일 내에 보내겠습니다.
라고 편지를 보낸이는 말하고 있었다.
 
정말일까?’
 
네네는 처음엔 그 목록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백합(百合)이 검다니 - 그것만으로도 이야기가 너무 괴이했다.

 뭔가의 착오겠죠

 라고 네네는 시녀(侍女)들에게도 말했다. 그녀는 남편인 히데요시[秀吉]가 그러했듯이 세상의 괴이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네네[々], [々]라고도 쓴다. 네이코[寧子]라고도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귀족이 되면서부터였다. 귀족의 여성은, 예를들면 '켄레이몬인 토쿠[門院 ][각주:1] '식으로 子자가 붙는다. 남편 히데요시가 칸파쿠()가 되었을 때, 칸파쿠의 정실(正室)은 키타노만도코로[政所]라고 불리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세간(世間)에서 그리 불렸다. 그 즈음 궁정의 공식 문서에서는,
 
[
토요토미노 요시코[豊臣 吉子]]
 
로 되어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에 대해서 그녀 자신에게 어떤 주체성이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吉이라는 글자가 복스럽고 좋다는 뜻에서 그 글자가 선택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네네가 어떤 글자의 이름으로 쓰여지건 그녀가 종일위(從一位)라는 여성으로써 최고의 위계(位階) 소유자이며,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가정과 후궁, 여관(女官)들의 총지배자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목록을 헌상한 사람은 삿사 나리마사[ 成政]였다.
 
나리마사는 토요토미 가문에게 있어서는 정치적 범죄자였다. 오다 가문[織田家]의 토박이 가신(家臣)이며, 노부나가[信長]에게 그 무용(武勇)과 강직(剛直)함을 사랑 받아 계속해서 승진을 거듭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군의 장수가 되었다. 노부나가 말년에는 호쿠리쿠 탄다이[北陸探題[각주:2]]였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막하(幕下)에 배속되어 엣츄우[越中] 일국()을 소유하는 신분이 되었다.
 
노부나가가 죽어 호쿠리쿠의 시바타 카츠이에와 히데요시가 그 후계자 자리를 놓고 싸웠을 때, 나리마사는 당연하게도 카츠이에 측에 서서 히데요시에게 대항하였다. 단순히 정치상의 소속으로 그렇게 되었던 것뿐만 아니라 이 인물만큼이나 극도로 히데요시를 싫어한 옛 오다 가문의 장수도 드물었다.

 히데요시는 호쿠리쿠를 제압하고 엣츄우[越中]로 진격해 들어가 나리마사를 항복시켰지만, 이 정도로 히데요시를 싫어하는 인물의 목숨을 이외로 살려주었다. 세상은 히데요시의 도량에 놀랐는데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나리마사 자신이었다.
 
어째서 내 목숨을 살려준 것인가?’
 
라는 의문은 나리마사와 같이 단순하고 목이 뻣뻣한 인물에게 있어서는 생애 풀 수 없는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보다도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였다. 자신을 혐오하는 나리마사까지 죽이지 않았다는 평판은 천하로 널리 퍼져 나가, 그것을 전해들은 여러 지역의 대항자(對抗者)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성을 열고 활을 땅에 던지며 복종해 올 것이다. 그런 효과를 히데요시는 기대했다. 이 효과를 더욱 크게 하기 위해서 나리마사에게 엣츄우의 일개 군()을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세상은 놀라 자빠졌다. 거기에 이어 큐우슈우[九州] 정복 후, 일본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이라고 일컬어지는 히고[肥後] 50여만석을 나리마사에게 주었다.
 
어째서 이 정도로 후은(厚恩)을 받는 것인가?’
 
라고 나리마사는 생각하여, 이 인물 나름대로 겨우 답을 낸 것이 네네의 존재였던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뒤, 나리마사는 잠시 오토기슈우[御伽衆[각주:3]]로서 히데요시를 가까이서 섬기고 있었다. 이 즈음 네네에게도 배알(拜謁)하였고 또한 선물도 보냈다.
 
이 부인(婦人)에게 허술히 해서는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이 나리마사에게 있었다. 일단 패해서 살아남은 인물인 만큼 그런 종류의 감각은 오히려 남들보다도 더 날카로워졌다고도 말할 수 있다. 토요토미 가문의 인사(人事)에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모신(謀臣)쿠로다 죠스이[田 如水]나 초창기부터 선봉대장(先鋒大將)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 등이 아닌, 이 키타노만도코로라는 것을 나리마사도 알게 되었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나가하마[長浜]의 꼬꼬마 코쇼우[小姓] 때부터 손수 길러 어렸을 때의 싹수부터 꿰뚫어 보아 일치감치 히데요시에게 추천한 것이 그녀라는 소문도 있었고 그 외에도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를 나리마사는 많이 듣고 있었다. 히데요시도 그녀의 인물 감정에는 신용을 하고 있었으며, 항상 그것을 존중하였고 그 의견을 허술히 하지 않았다. 토우키치로우[藤吉[각주:4]]였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토요토미 가문은 히데요시와 그녀의 합작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네네는 명랑한 성격에 더구나 거드름 피우지 않았고 조금도 권세를 휘두르는 일 없는 부인이었지만, 그러나 단 한가지 버릇이 있다면 키타노만도코로가 되어서도 초창기와 마찬가지로 가문 내의 인물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좋아하여 인사(人事)에 끼어든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평가에 사심이 없고 적확(的確)하다는 점에서 히데요시도 그것을 존중하여 때로는 상담하거나 하였다. 자연히 그녀의 위복(威福)과 다정함을 우러르는 무장(武將)의 무리가 형성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카토우 키요마사나 후쿠시마 마사노리 거기에 그녀의 양갓집의 아사노 나가마사[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 등은 그 살롱(salon)의 가장 오래된 구성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삿사 나리마사가 자신의 기괴할 정도의 영달이 어쩌면 키타노만도코로덕분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 것도 이런 토요토미 가문이었기에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저 부인은 나 같은 놈에게 호의를?’
 
이라는 이유도 어렴풋이 알았다. 네네의 남성에 대한 호의에는 뚜렷한 특징이 있어, 궁중에서 사교(社交)가 뛰어난 인물보다도 전쟁터에서 무용이 뛰어난 자에 대한 평가가 후했다. 남자의 와일드함과 강직함을 사랑하였고, 예를 들어 그들이 저돌적인 것으로 인하여 실패를 하였다고 하여도 그녀는 오히려 그 실패를 미덕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히데요시가 언젠가 두서너명의 무사(武士) '면밀하지 못한 자이다'라는 이유로 추방하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듣고 그들의 위해서 여러 번 옹호하여 결국에는 구해 준 적도 있었다.
 
그녀의 아래에 모이는 무장들의 무리는 이윽고 무단파(武斷派)라는 인상을 세상에 끼치기에 이르는 것도 거슬러올라가면 그녀의 그러한 기분에 의한 것일 것이다.

 나리마사는 그런 점에서 자신과 같은 남자가 키타노만도코로의 호감을 얻고 있다는 이유를 알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나리마사는 그녀나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尾張] 사람이었다. 시골에서 태어난 그녀는 이런 점에서도 다소의 경향이 있어, 토요토미 가문에 많이 있는 오우[近江] 사람들에 대해서는 겉으로만 대하는 태도를 취하였고 자신과 같은 오와리 사람들에게는 각별한 친근감을 보였다. 오와리 서부 카스가이 군[春日井郡] 히라 촌[比良村] 출신인 삿사 나리마사에 대해서는 - 이것만으로도 네네에게 타인(他人)이라 생각할 수 없는 기분을 들게 하였을 것이다.
 
이 호의에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다
 
고 나리마사는 생각했다.
 
이런 경우 인사(人事)에 대해 강한 관심을 갖고 있는 키타노만도코로와의 유대(紐帶)를 강하게 해 두는 것이 앞으로 먼 지방에서 생활하는 몸으로써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무엇을 보내야 좋을지에 대해서 나리마사는 곤혹해 했다. 그녀는 원래부터 물욕(物慾)이 없는 것에 더해 지금의 신분이라면 무엇을 보내건 그다지 기뻐하지도 않을 것이다. 깊게 생각한 끝에 나리마사는 자신이 예전에 지배하고 있던 엣츄우[越中]의 명산(名山) 타테야마 산[立山]의 높은 곳에 검은 백합이 핀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 정도로 진귀한 꽃은 없었다. 엣츄우에서조차 검은 백합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어, 기껏해야 쿠로베[部] 계곡에 사는 사냥꾼이나 타테야마 산의 권현(權現[각주:5])을 존숭(尊崇)하는 수행자들 몇몇이 그것을 보았다고 하는 정도였다. 나리마사는 이 검은 백합을 보내고자 하여, 한때는 자신의 부하이기도 했던 엣츄우 지역의 무사들에게 급사(急使)를 파견하여 그 채집을 의뢰하였다. 진귀한 것이라고는 하여도 현지의 나무꾼이나 사냥꾼에게 부탁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 그루를 얻어서는 그것을 통에 넣어 오오사카[大坂]로 운반시켰다. 꽃은 뜨거운 날씨를 싫어하기 때문에 수송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힘이 들었다. 그것이 오오사카에 있는 나리마사 저택에 도착하자 나리마사는 곧바로 그 중 한 송이를 금(金)으로 그림이 그려진 검은 옻칠을 한 통에 꽃꽂이하여 키타노만도코로의 비서(秘書)인 늙은 비구니 코우조우스()에게 보내었다. 코우조우스도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을 두지 않고 곧바로 키타노만도코로의 방으로 가지고 가, 그곳의 도코노마(床の間)에 놓았다.

 이것이 편지에 있던 검은 백합인가……”

키타노만도코로는 말을 입에 머금은 채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목을 쭈욱 내밀을 수 있을 만큼 내밀어 꽃에 몰입되었다. 검다……기 보다 엄밀히 말해 검보라색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상상했던 칠흑의 꽃잎보다도 그 자연스런 색조가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빛 속에서는 선명하게 검었다. 곧이어 키타노만도코로는 통통한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 자신의 기쁨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므츠지쥬우[従]님은 참으로 친절하시구나

 라고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나리마사는 이 당시, 하시바 성[羽柴姓]을 하사 받아[각주:6] 므츠노카미[守]가 되어 지쥬우[従]에 임명 받았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하시바 므츠지쥬우(羽柴 陸)라 통칭되고 있었다.

 오히려 무사(武士)는 이래야 하는 것이죠

 라고 목소리를 적셔서 말했다. 강직하고 굽힘이 없는 속에 이런 친절함을 가진 인물이야말로 오다 가문[織田家]의 하급 무사 가문에서 자라난 그녀의 미의식(美意識)에 걸맞는 무장상(武將像)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히데요시가 총애하고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오우미[近江] 계의 봉행 나부랭이들에게 이렇게 빛과 색깔을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하고 속으로 비교해서 더욱더 나리마사라는 인물을 중히 평가하며,

 역시 사람에게 깐깐한 오다 우다이진[織田 右大臣[각주:7]]님의 눈에 든 사람이구나

 라고 말했다. 거기에 얄밉다고 할지…… 엣츄우[越中]에서 수백 리 길의 산과 강을 오르고 건너게 한, 이 꽃을 단 한 송이만 보낸 나리마사의 생각이었다. 그 터무니없는 노력과 비용 속에서 일편의 와비[[각주:8]]를 찾아낸 나리마사는 평소,

 졸자(拙者)는 차()를 모릅니다

 라고 말했으면서도 이것은 다도(茶道)의 극의(極意)가 아닌가?

 세상에 검은 백합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겠죠

 이것을 모두에게 보여주었으면는 생각에, 이 검은 백합을 위한 다회(茶會)를 열고자 그 준비를 명했다. 그녀가 대접해야 하는 주인(=테이슈(亭主))이기는 했지만, 다회를 실제로 운영하는 접대(=시타토리모치(下取持))에는 사카이[]의 모즈야[屋]의 젊은 부인이 맡았다. 모즈야의 부인은 센노 리큐우[千 利休]의 딸 '오킨[おきん]'을 말하며, 키타노만도코로를 시작으로 토요토미 가문의 부인들에게 다도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 다회는 성공하여 큰 평판을 얻었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후궁에 있는 귀부인(貴婦人)들로 당연히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부인들은 모두 이 높은 곳의 눈에서만 핀다는 동화 속의 이야기에나 나오는 꽃에 감탄의 목소리를 내며 약속이라도 한 듯,

 눈에 복을 받을 수 있어 일생의 영광이옵니다

 라고 입을 맞추었다.

 후세(後世).
 
이 다회에는 이야기가 더 추가되었다.
 
이 이야기에는 요도도노[淀殿]를 등장시키고 있다. 요도도노도 이 다회에 손님으로 초대되었는데 미리 검은 백합의 이야기를 들었기에 거기에 한 번 더 궁리하여 자신도 수하를 엣츄우[越中]에 파견하여 검은 백합을 채집시켰다. 엣츄우[越中]는 삿사 나리마사 다음의 다이묘우[大名]를 두지 않고 토요토미 가문의 직할령으로 삼고 있었다. 직할령의 지배는 오오사카[大坂]의 봉행(奉行)들이 관리하고 있었다. 이 봉행들이야 말로 이시다 미츠나리,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등 요도도노를 보호자로 우러르고 있는 오우미[近江]계의 문관(文官)들로, 이 점 그녀에게 있어서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다.

 이렇게 채집시킨 것이 아직 오오사카에 도착하기 전에 요도도노는 키타노만도코로가 주최한 다회의 손님이 되었다. 다른 손님들은 한 송이의 검은 백합에 이 세상의 신비에 놀라움을 보여 주었지만, 그러나 요도도노만은 예외였다.
 
조용히 그것을 지긋이 본 후 형식적으로만 찬미하였다. 이 담담한 태도가 키타노만도코로를 의아케 하였다. 원래 둔감한 것일지도 라고 생각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요도도노는 검은 백합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기해 하지 않는 것, 그 둘 중에 하나였다.

 그로부터 3일 후.
 
일이 명확해졌다. 요도도노가 사는 니노마루[[각주:9]]의 긴 복도(長廊下)에서 꽃꽂이에 쓸 꽃을 채집하는 행사가 열려 키타노만도코로도 초대되었다. 그녀가 코우조우스를 데려 가자, 3일 전에 그녀가 그토록 자랑하고 그토록 떠들썩하게 다회까지 열게 한 그 검은 백합이 다른 마타리 같은 잡초와 함께 바구니에 마구 담겨 주변을 장식하는 꽃으로 꽂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 송이나 두 송이가 아닌 20, 30이나 아무렇게나 꽂혀가며,
 
-
검은 백합 같은 것은 진귀한 꽃도 아니다.
 
고 키타노만도코로의 무지함을 비웃고 있는 듯했다. 이런 창피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더구나 그녀의 굴욕은 공개되어 버렸다. 이 문제는 토요토미 가문의 여성들을 지배하는 사람으로서의 권위에 관한 것이 되었다. 그녀는 요도도노를 미워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이 모든 것이 검은 백합을 헌상하여 이런 굴욕을 맛보게 한 삿사 나리마사에게까지 증오하게 되었다. 곧바로 히데요시를 움직여 나리마사에게서 새로운 영지(領地)인 히고[肥後]를 빼앗아 결국에는 셋츠[
津] 아마가사키[尼崎]에서 할복하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었다……

 고 한다.
 
이 이야기를 후세 후세 사람들은 믿었지만, 그러나 사실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나리마사가 영지(領地)를 몰수당한 1587년에는 아직 요도도노가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었나 되지 않았나 하는 시기이며, 저 만큼의 기획을 짜서 키타노만도코로와 대항할 정도의 위세(威勢)는 당연하게도 아직 가지지 못했다.
 
또한 삿사 나리마사의 실각(失脚)은 다른 사건과 정치적 이유에 의한 것으로 검은 백합의 이야기를 빙자하기에는 너무 유치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와 요도도노라는 두 규벌(閨閥)의 다툼이 후에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와 운명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워간다는 사실을 사실 이상으로 상징화했다는 점에서 이 정도로 높은 함축성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도 또 없을 것이다.

  1. 타이라노 키요모리[平 清盛]의 딸로 부친의 의향에 따라 황실에 들어가 안토쿠 텐노우[安徳天皇]를 낳았다. 헤이케[平家] 전성기의 상징적 인물. [본문으로]
  2. '탄다이’란 그 지역의 군사, 정치, 판결권을 소유한 총책임하는 기관 혹은 인물. [본문으로]
  3. 히데요시의 말 상대 [본문으로]
  4. 히데요시가 미관말직일 때의 이름 [본문으로]
  5. 일본은 산을 신으로 여기는 산악신앙이 있어, 타테야마 산을 이자나키[伊邪那岐]의 화신이라 여겼다. 또한 일본의 신들을 불교의 부처님들의 화신이라는 신불습합(神仏習合) 사상에 따라 이자나키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화신이라고도 여겼다. [본문으로]
  6. 히데요시가 토요토미 씨[豊臣氏]를 칭하기 이전에 사용했던 성(姓). 유력한 인물들이나 공이 많았던 부하들에게 이 하시바 성을 하사하여 일문(一門)의 효과를 기대하였다. [본문으로]
  7.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지칭. [본문으로]
  8. 심플함 속에서 맑고 한적한 정취 [본문으로]
  9. 두 번째 성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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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04 1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삿사 나리마사 이야기가 이 이야기였군요.. 어쩐지 겨우 이런일로 죽인다니 그 현명한 기타노 만도코로치고는 단순한 느낌이 들었었는데..

    뭐, 아무래도 자기 지방 사람들을 우대하는건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 듯 싶습니다. 글쎄요.. 왜그럴까요?(쿨럭;)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5 0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화나 에피소드에 있는 이야기들은 뛰어난 인물의 실수를 감추기 위해서 다른 사람 탓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검은 백합이야기도 그런 의미가 아닐지...

    저도 그게 이해가 안가더군요... 자기 지역 출신 우대가...
    임진왜란 때 출진한 어느 부대(...음 갑자기 생각이 안나는군요)는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 출신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무장단과 그렇지 않은 하급자들의 알력이 있었다고 하던데...

    이렇게 전 생각합니다.
    당시는 세금 & 병사를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사람 머리수를 갖추어야 했기에, 자기 영내의 백성들이 다른 나라로 유출되는 것을 막았다고 생각합니다. 자연히 다른 쿠니(国)의 사람들과 만나기 힘들었고, 지금도 외국인을 배척하듯이 당시는 더욱 배타적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다른 지역의 흉은 곧바로 받아들이지만, 칭찬은 믿기 힘든 것도 또한 사실.
    (대표적으로 "일본은 없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일본은 있다"는 생각했던 만큼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거기에 당시의 관습법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国質,郷質라는 것이 있어,
    같은 쿠니, 혹은 마을의 A라는 사람에게 타지역의 B라는 사람에게 돈을 빌리며, B는 A와 같은 쿠니 혹은 마을 사람인 C에게 돈을 받거나 물품 대금을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고 하더군요.
    이런 면에서 사기 치는 사람이 분명 생겼을 것이고, 이런 과정에서 서로간에 불신도 싹트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06 2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군요. 오오.. 생각할 점이 있는 답변을..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7 1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 단 것에 오타가 수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많군요.. --;;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

  5. 이노센스 2010.02.13 22: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권현은 일본어로는 곤겐이라 읽습니다. 이는 인간의 몸을 입고 속세에 내려온 부처를 이르는 호칭으로서 명망이 높은 인물에게 종종 붙여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단적으로 유명한 경우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죽은 뒤에 도쇼구에 모셔져 도쇼다이곤겐의 칭호를 얻었지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2.22 03: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신호(神號)같이 고유명사를 제외하곤 '권현'이란 불교 용어를 일본식으로 고쳐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권현은 신이 이 세상에 임시의 모습을 가지는 것으로 산악신앙과도 많은 연관이 있던 것 같더군요. 굳이 인간의 몸을 입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지식이 부족해서 묻습니다만 이에야스 말고 또 権現의 호를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명망 높은 인물에게 종종 붙여진다고 하시니 생각 외로 여러 명이 있었나 보군요.

      개인적으로는 이에야스가 곤겐이 된 것은 텐카이[天海]와 그의 말에 넘어간 히데타다[秀忠]에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6. 이노센스 2010.02.13 22: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게시물의 하단이 잘리는 것이 아쉽네요. [도요토미 가문 사람들]은 저도 서울 교보문고에서 일본어 문고판으로 읽은 기억이 나는 데 번역을 생각보다 잘 해놓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리마 사람 이야기]는 없어서 아쉬웠지만요. 다만 한글로 옮기기 곤란한 말이라면 이해하겠지만 다소의 장난기 어린 표현이 시바 료타로의 간결하고 침착한 문장 스타일을 망가뜨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어 번역보다 돌출되는 문제인 듯합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2.22 03: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이버에서 이쪽으로 오면서 뒷글이 많이 잘리더군요....근데 이번 편은 한 번 손을 본 곳이라 잘리지 않았는데...

      '하리마 사람 이야기'는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가 주인공인 '하리마 바다 이야기[播磨灘物語]'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장난기 어린 표현...이라....
      ^^ 그렇군요. 이노센스님은 제가 쓴 장난기가 담긴 표현을 어떻게 표현하실수 있으시려나요? 시바 선생의 간결하고 침착한 문장 스타일을 살리는 방법 좀 알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하지만 이 이에야스의 말에는 다분히 회상이기에 생기는 허술함이 있었다. 현실의 세키가하라[ヶ原] 전장(戰場)에서 이에야스는 거의 절망적이었던 순간을 몇 번이나 맛보았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 전투의 승패를 사전에 결정짓고자 하였다. 적인 서군에 참가한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에 대해서 여러 방법으로 공작하고 회유(懷柔)하여 내응(內應)을 약속시켰다. 서군의 총수(總帥)인 모우리 씨[毛利]에게까지 공작하여 그 부하 장수인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家], 가로(家老)인 후쿠바라 히로토시[福原 俊] 등과 내응 약속을 하여 전장에서 절대 군사를 움직이지 않으며, 총도 쏘지 않겠다는 밀약까지 맺었다. 

 이에야스가 에도를 출발하여 전장으로 향하고자 할 때는 이미 마음 속으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도중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밀사(密使)가 내응을 신청해 왔을 때도,


 애송이 따위의 상대할 필요도 없다

 

 고 말하며 두 번이나 묵살하였을 정도였다.

 

 동과 서의 싸움은 이에야스의 부대가 틀어박혀있던 후시미 성[伏見城]을 서군이 공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방면 서군 4만의 총대장으로 히데이에[秀家]가 선택되었다.

 관위(官位)가 높은 것도 있으며 병력이 많다는 점에서 당연할 것이다. 예전 아직 하시바[羽柴]라는 성을 쓰던 히데요시[秀吉]가 히데이에의 망부(亡父) 나오이에[直家]의 임종 자리에서 약속했던 것과 같이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는 물론 일본국(日本)을 움직일 수 있는 큰 장수로 길러내 보이겠습니다'라는 말이 히데요시가 죽은 후 우연이겠지만 실현되었다.

 

 그렇군. 내가 지휘를 하는 것인가?”

 

 하고 히데이에는 순진하게 기뻐했다. 이 복잡한 정세 속에서 이 남자만은 아무런 정치적 고려도 하지 않고, () 타이코우[太閤]의 남겨진 아이를 위해서라는 소년과 같은 정의감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거병의 주모자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 동료인 오봉행들 조차 뒤로는 어떻게 움직일지 수상쩍은 시기에 이 비젠 츄우나곤[備前 中納言]만은 신뢰하여,

 

 비젠 츄우나곤만은 안심할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즉 정치, 정세(政勢)가 아군에 유리하다는 듯이 착색(着色)하거나, 전쟁이 끝난 후 이익을 약속할 필요도 없이 솔직히 부탁하면 솔직히 받아 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더구나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은 병사수도 압도적으로 많았고 또한 그 휘하의 비젠 병사들은 용감하였으며, 히데이에는 겁()을 미워하고 용()을 사랑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이 17천의 병사 수야 말로 서군의 주력이 될 것이다.

 

 히데이에는 70명의 장수와 4만의 군세를 배치하여 공성전(攻城戰)을 개시해서는 곧바로 후시미 성을 함락시켰다.

 그 후 히데이에는 오오사카[大坂]에서 병사들에게 휴식을 준 후 곧이어 이세[伊勢]를 거쳐 미노[美濃] 오오가키[大垣]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밤의 어둠을 타고 빗속에서 행군을 하여 세키가하라[ヶ原]의 예정 전장에 도착하여, 그 분지의 서쪽에 융기하는 통칭 텐마야마[山] 산의 허리에 진지를 둘 곳을 고른 후 병사를 5단으로 배치하였다. 히데이에의 본진에는 부대 표식[大馬印]으로 '붉은색의 후키누키[赤池吹貫]'가 세워졌고, 산꼭대기에서 산허리에 걸쳐 '흰 바탕에 큰북의 원[太鼓紋]'을 그린 우키타 가문의 깃발이 내걸렸다. 밤이 걷힘과 동시에 포진이 완료되었다.

세키가하라 포진도. 하늘색이 서군(西軍), 붉은 색이 동군(東軍). 노란색은 처음엔 서군이었다가 나중에 동군으로 배신하는 부대이다.(누르면 커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에야스가 움직였다.

 이에야스는 미노[美濃] 아카사카[赤坂]를 출발하여 서군의 뒤를 따라서 야간행군을 계속하여 밤이 물러감과 동시에 세키가하라에 도착하여 8만의 병사를 전개시켰다.

 하지만 날씨가 개전(開戰)을 허락하지 않았다. 안개가 짙어 적과 아군의 식별이 불가능하여 쌍방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 걷히기 시작한 것은 오전 8시를 지나서부터였다. 같은 시각에 최초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싸움은 동군 선봉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대 6천이 서군을 향해 돌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을 정면으로 받은 것이 우키타 히데이에의 부대였다. 곧바로 격전으로 이어졌고 후쿠시마 부대는 선봉이 무너져 궤주(潰走). 결국에는 몇 백 미터 정도 퇴각하게 되었다. 마사노리는 크게 화를 내며 은()으로 된 부대 표식을 세차게 흔들며 몸소 진두로 달려나가 패잔병들을 수습하려고 하였으나 우키타 군의 세찬 공격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동군은 이 패색에 낭패했다. 곧바로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부대, 츠츠이 사다츠구[筒井 定次]의 부대가 달려들어 우키타 부대의 측면을 노리려 했지만 곧바로 반격당하여 후쿠시마 부대와 함께 퇴각했다.

 

 히데이에는 산허리의 높은 곳에 놓여진 의자에 앉아서 이 전황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군사들을 움직이는 것은 아카시 카몬 타케노리[明石 掃部 全登]가 맡았으며, 5단으로 나뉘어져 배치된 부대는 노부하라 토사[延原 土佐], 우키타 타로우자에몬[浮田 太左衛門], 오사후네 키치베이[長船 吉兵衛], 혼다 마사시게[本多 重][각주:1]등이 각각 지휘하였다. 이 용감하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대장의 휘하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용감함으로 싸웠다.

 

 고독한 싸움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왜냐하면 이에야스의 사전 공작에 의해 서군의 7할은 깃발을 움직이지 않았고, 총을 쏘지 않았으며, 진영을 땅바닥에 붙인 채였다. 나머지 3할만이 싸우고 있었다.

 3할의 주력은 우키타 부대이며, 거기에 더해 이시다 미츠나리 부대,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라는 2부대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7할은 잠이라도 자는 듯이 방관하고 있었다. 이 서군 7할의 방관을 보고 이에야스는 당초 이겼다고 생각했다.

 

 싸우고 있는 적은 어느 깃발과 어느 깃발인가?”

 

 라며 안개 속으로 척후를 보내어 확인해 보자 위와 같았다. 이에야스가 보기에 미츠나리에게는 무략(武略)이 없으며, 히데이에는 애송이가 지나지 않았다. 오오타니 요시츠구가 다소 뛰어나다고는 하여도 영지(領地)가 작았기 때문에 그 지휘하의 병사는 소수였으며, 거기에 요시츠구 자신은 갑옷도 입지 못할 정도로 병이 진행되어 있었다.

 

 하지만 안개가 걷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황은 이에야스의 낙관론을 차츰 배신하기 시작했다. 서군의 3할이 사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군은 전선(全線)에 걸쳐서 붕괴가 시작되어 이에야스의 지휘조차 거의 전해지지 않았고, 각 부대도 연계가 끊어져 각각 싸우고 있는 형세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그 생애에서 자기 지휘하의 아군이 이렇게까지 지리멸렬한 상태로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칼과 창의 한가운데서 병사들을 질타하고 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몇 번인가 무너져 후퇴하면서도 그 풍부한 실전 경험으로,

 이길 수 있다

 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대를 마구 무너뜨리고 있는 정면의 우키타 부대가 그 위세에 비해서는 돌격이 계속해서 이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후쿠시마 부대가 4~5백 미터나 퇴각하면 그들은 더 이상 병사들을 돌격시키지 않고 멈추게 하여, 분지의 중앙까지 쫓아가는 것을 두려워해 몇 번이나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기묘한 적군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마사노리는 알게 되었다. 우키타 부대에는 아군이 없었다. 서군의 여러 장수들은 주변의 산꼭대기, 산허리, 길 옆에 포진하고 있었지만 우키타 부대의 공격에 가세하려고 하지 않았다.

 

 적은 한 겹이다! 후속 부대가 없다! 두려워 마라!”

 

 마사노리가 포효하며 어벙대고 있던 사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이 적군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면서부터였다. 마사노리가 보건대 우키타 부대에 아무리 위세가 있다고 하여도 결국엔 피로해 질 것이며, 결국에는 약해질 때가 올 것이다.

 

 마사노리는 무너져 있던 군사를 재정비해서는 역습에 나섰다. 이 때문에 사방의 진지에서 보고 있으면, 후쿠시마 가문의 산길 모양의 깃발과 우키타 가문의 큰북 깃발이 서로 검은 연기를 피우는 듯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고 때로는 서로 뒤엉켜, 때로는 한쪽이 쫓고, 때로는 한쪽이 쫓기거나 하여 어느 쪽이 이길지 알 수가 없었다. 오전 11시 즈음에는 이시다 진지 정면의 동군도 격퇴당하였고, 오오타니 진영분지 중앙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는 것에 비해, 밀린 동군은 분지의 중앙부에 뭉쳐서 헛되이 인마(人馬)의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정오가 되어서 역전되었다.

 마츠오야마[松尾山] 산꼭대기에 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가 배반하여, 15천의 병사를 휘몰아 산허리에 진지를 갖추고 있던 서군 오오타니 부대를 치고 길게 늘어진 대형(隊型)의 옆구리를 찔러 그들을 거의 전멸시켰기 때문이었다. 요시츠구는 배를 갈랐다. 이 때문에 우키타 부대는 동군의 대부분에게 포위당하여 고립되었다.

 

 히데이에에게는 이 순간에 일어난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건 킨고[金吾=히데아키]인가!? 킨고 일리가 없다!”

 

 처음 외친 것은 이 말이었다. 히데이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킨고 히데아키 거동의 수상쩍음에 대해서는 싸움이 일어나기 전부터 미츠나리 등 서군 지휘부가 계속 의혹을 가지고 있었지만, 히데이에는 어디까지나 낙관(樂觀)하여,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고 미츠나리에게도 말하였고, 요시츠구에게도 말했었다. 이 남자답게 그 이유는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의 양자이다

 

 그 뿐이었다.

 

 그는 타이코우에게 큰 은혜를 입고 있다. 나도 양자라는 입장에서 킨고의 마음을 추측하건대, 설사 모두가 히데요리[頼]님을 배반한다고 하더라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나랑 내기해도 좋다니까. 킨고는 절대 배반하지 않을 걸

 

 이라고. 그렇게만 히데이에는 말하였고, 더구나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듯했다.

 

 정말 극단적인 낙관론자이시군

 

 라고 미츠나리는 뒤에서 히데이에를 그렇게 평했으며, 실제로 히데이에와는 거병 이래 그런 쪽의 복잡한 정세에 관한 내용을 거의 상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히데이에는 세상의 기괴함을, 지금 이 전쟁터를 급변시키고 있는 이변에서 알게 되었다. 이 히데이에라는 시를 좋아하는 세상이 태평 성대한 때였다면 2류 정도의 시인이 되어 있었을 것 같은 이 인물은 자신의 우둔한 정치 감각을 깨닫는 것보다도 오히려 상대의 부도덕(不道德)에 분노했다.

 

 킨고를 용서할 수 없다!”

 

 라고 말했다. 용서하고 말고를 떠나서 이미 아래의 우키타 군세는 심각한 타격을 입어 이제는 진형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무너져 있었건만, 히데이에의 관심사는 히데아키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뿐이었으며 오히려 그리하다 죽으려고 결심하였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서는,

 

 말을 끌고 와라

 

 라고 명령했다. 지금부터 말을 달려 코바야카와 진영으로 돌격하여 킨고를 찾아서는 그와 서로 찔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용서치 않으리

 

 라고 히데이에는 말하며, 등자에 발을 걸어서는 말 위에 올랐다. 아카시 카몬이 말 끈을 잡았다.

 

 옳지 않습니다

 

 카몬은 패전의 관례로써 주장(主將)인 히데이에를 이 전쟁터에서 도망가게 하고자 하고 있었다. 북동쪽을 보자 이미 미츠나리의 사사오야마[笹尾山] 진지[陣地]도 무너져, 방금 전까지 산꼭대기에서 휘날리고 있던 [大一大万大吉][각주:2]의 깃발이 없어진 것을 보면 미츠나리도 도망쳤을 것이다. 그것을 카몬이 말하자,

 

 지부쇼우[冶部少]는 지부쇼우, 나는 나

 

 라고 이 젊은 시인은 말했다. 히데이에가 말하기를,

 

 지부쇼우는 어쩌면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이 일전을 일으켰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 의지로 이 장소에 와, 움직이고 있다. 다른 것은 모른다. 단지 고() 타이코우 전하의 유언을 받들어 히데요리님의 세상을 지키고자 있는 힘껏 싸웠다. 그것을 저 부도덕한 킨고 때문에 졌다. 킨고를 이 칼로 죽이는 것 이외에 내 의지를 관철할 길은 없다.”

 

 고 히데이에는 계속 말했지만 카몬은 듣지도 않고 재빨리 깃발을 말게 하고 부대 표식을 꺾고선 히데이에의 친위대들에게 그를 둘러싸고 도망치라고 명령하였다. 히데이에는 인마(人馬)의 흐름에 휩싸이듯이 서쪽으로 도망쳤다.

 

 히데이에는 지고 우키타 가문은 멸망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토요토미 가문의 번병(藩屛)으로 세웠던 양자들 중에 이 남자만이 양아비의 희망에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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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의 히데이에의 생애는 다른 이야기꺼리가 된다.

 그는 이후 사츠마[薩摩]로 달아나 은밀히 시마즈 씨[島津氏]의 비호(庇護)를 받았다. 후에 시마즈 씨가 막부(幕府)에 항복한 뒤 그 존재가 들어났지만, 시마즈 가문과 거기에 그의 부인의 친정인 마에다 가문[前田家]이 함께 막부에 탄원하여 조명(助命)을 빌었기 때문에 사형은 면하여 일단 스루가[駿河]로 보내져 쿠노우잔[久能山] 산에 유폐되었다. 이에야스에게는,

 죽일 것 까지는 없다

 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세키가하라 후 이시다 미츠나리, 안코쿠지 에케이[瓊],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등의 주모자들은 처형당하여, 그 목은 쿄우토[京都]의 강변효수(梟首)되었지만, 히데이에는 원래부터 그들에게 정객(政客)으로 대우받지 않았었고, 단지 의협심과 전투력을 인정받아 참가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과연…… 세키가하라의 전쟁터에서 저 정도로 활약하여 동군을 몇 번이나 위기로 몰아 넣었건만, 그러나 일이 지나고 보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어서, 그 존재 자체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이에야스는 판단했다.

 

 후에 쿠노우잔에서도 옮겨져, 에도[江戸] 남쪽 120(里)[각주:3] 떨어진 해상에 있는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로 유배되었다. 히데이에는 이 섬에서 40년을 살았다. 섬에서는 언제나 궁핍하여, 평소 만드는 것을 생업으로 삼아 그것을 먹을 것과 바꿔가며 간신히 덧없는 목숨을 이어갔다. 평소,


 한번이라도 쌀밥을 먹고 죽고 싶다


 가 입버릇처럼 되었다. 그것이 에도[戸]에까지 이야기가 퍼져, 어느 해인가 배편으로 몇 가마니의 쌀이 보내져 왔다. 보낸 사람은 그의 옛 신하로 세키가하라에서는 이에야스 측에 섰기 때문에 지금은 에도에서 잘나가고 있는 하나부사 시마노카미[花房 志摩守]였다. 옛 주인에 대해서 켕기는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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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이에는 1655년 겨울. 84세의 고령으로 죽었다. 그 사이 히데요리도 죽고, 이에야스도 죽어 토쿠가와 쇼우군[軍]도 이미 4대째인 이에츠나[家綱]의 시대가 되어 있었다. 세키가하라의 패배자이기는 했지만 승리자의 어느 누구보다도, 이 귀양살이를 한 사람은 오래 살았다.

 

==========================================================宇喜多秀家,======================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수어지교를 맺었다는 이에야스의 모신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둘째 아들. 에도 막부 2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유모의 아들을 죽이고 토쿠가와 가문에서 나와 우키나 가문[宇喜多家]에서 2만석을 하사받고 가로를 하고 있었다. 후에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양자가 되기도 하였으나 나중엔 카가 마에다 가문[加賀 前田家]으로 이적하여 가로(家老)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이시다 미츠나리의 부대표식에 쓰여 있던 말.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해서,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하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 같다고 함. [본문으로]
  3. 약 480km.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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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27 09: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키가하라 서군 참전 무장중 최장수한 친구지요. 카이에키 당하기는 했지만 장수로 보상 받았다고 생각했다면 그걸로도 위안 삼을만은 했을듯?

    (P.S..그렇게 생각하자면..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쿨럭;)

    P.S.2 오타니 요시츠구의 분전은 대단하군요. 당시에 갑옷도 못 입을 정도였을 줄은 몰랐습니다(..그러니 평이 그렇게 좋을 수 밖에)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gorefined BlogIcon 고어핀드 2008.02.27 18: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우키다 히데이에는 도요토미 집안의 사람들 중 제일 흥미 있는 캐릭터인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는 오오타니 요시츠구를 좋아하는데, 갑옷을 입지 못할 정도라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그 와중에도 분전한 걸 보니 인기있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28 01: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이야~~~ 쌀밥 한 번 먹고 죽고 싶다고 할 정도면 위안까지는....^^;;

    여담이지만... 세키가하라 서군 측에 섰던 시마 사콘의 인기도 대단하다더군요.
    쿄우토(京都)는 오랜 기간 역사의 중심지였던 만큼 어느 곳이건 역사적인 자취가 있는 곳이라 그걸 일일이 자랑으로 하지 않는다는데, 어느 음식점은 과거 시마 사콘의 쿄우토 저택이 있던 곳을 아직까지도 자랑스럽게 내세운다고 하더군요.
    ps;다메엣찌님은 호소카와 타다오키 팬?? ^^

    고어핀드님//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오오타니 요시츠구는....글로는 저렇게 간단히 표현되었겠지만, 실제로는 아마...정말...참혹한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눈도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활약을 보인 것 같습니다.
    계획으로는 이거 끝난다음에 만화 "꽃의 케이지"의 원작 "일몽안풍류기"를 하려고 하는데, 그 작품에선 마에다 케이지에게 감동을 주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에 하나로 나오더군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2.29 2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꽃의 케이지 +_+ 일본 전국시대를 처음 알게해준 만화. 중학생때 봤는데 참 충격이었던...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1 09: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다충승님//어떤 면에서 충격이셨을라나... 쩍쩍 갈라지는 것에서?
    쓸데없는 사족이겠지만...원작에선 조선으로 간답니다. 만화는 한국과의 마찰을 피하기위해서인지 류우큐우(오키나와)로 바꾸었더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3.03 1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에다 케이지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많지요.
    만화 주인공으로 어울릴만한 인물입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3 1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등장 인물들은 대부분이 찌질하게 나오더군요 ^^

  8. 2013.09.04 16: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번이라도 쌀밥을 먹고 싶은게 소원이라니ㅠㅠ내가 만나면 맛있는 한끼 대접할텐데

  9.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21: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각주 3번을 48km로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

 히데요시[秀吉]의 사후(死後), 쟁란(爭亂)이 일어났다. 1600 5월 여름. 미츠나리[三成]가 거병하였다. 간적(奸賊) 이에야스[家康]를 토벌한다고 하였다. 미츠나리에게 있어 모든 것은 히데요리[)]와 요도도노[淀殿]를 위해서였으며 이 남자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였다. 자신 말고는 토요토미 정권을 지키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비장한 각오로 임했다.

 천하의 제후는 동서(東西)로 나뉘었다.

 이러는 사이,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쿄우[京]에 있었으며,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이후 코우다이인[高台院]이라 불렸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이에야스를 후원하며, 이에야스의 힘으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보존하고자 그녀의 영향 아래 있던 여러 무장들에게 권하여 이에야스 측에 가담시키려 하였고 거의 성공하였다. 단지 그녀는 히데아키[秀秋]의 우둔함이 두려웠다. 서군(西軍)의 달콤한 말에 넘어갈 위험이 있어 히데아키의 깃발이 어느 쪽으로 향할 지, 이 젊은이에 한해서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코우다이인은 그를 쿄우로 불러,

 에도()[각주:1]은 당신의 은인입니다. 결코 방향을 틀리지 마시길

 하며 정성 들여 타일렀다. 히데아키는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
 하지만, 히데아키는 이미 그 몸이 오오사카[大坂]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엔 온통 서군 뿐이라 서군 측에 설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미츠나리는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싸움에 이기고 난 후 100만석 영지를 준다는 뜻을 전해왔다. 히데아키는 다소 동요했다.
 
서군에 붙을까?’
 그러나, 칸토우[東]에도 사자(使者)를 보냈다. 그러는 한편 서군에 붙어 동군(東軍)의 소부대(小部隊)가 수비하는 후시미 성[伏見城] 공격에 참가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도대체 히데아키는 어느 쪽에 붙어있는 것인가? 더구나 그 후 서군의 지시에 대해서 굉장히 애매한 움직임을 보였다. 예를 들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오우미[近江]의 타카미야[高宮]라는 곳에 틀어박혀서는 군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미츠나리는 히데아키의 거동을 의심하여,
 
아군에게 큰 해가 된다. 아예 죽여버리는 것이 좋겠다
 고 생각. 히데아키를 불러들여 몇 번이나 그 기회를 만들고자 했으나 히데아키는 응하지 않았다.

 미츠나리뿐만 아니라 칸토우[東]에 있던 이에야스도 히데아키에게 믿음을 주는 것을 두려워해,
 
뭐라 해도 좆병진이다.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가 없다
 고 생각하여 히데아키의 밀사(密使)가 왔어도 만족스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에야스가 에도를 출발하여 전장(戰場)으로 향하던 도중, 토우카이도우[東海道] 오다와라[小田原]에서 또 다시 히데아키의 밀사가 이에야스가 머무르는 곳으로 왔다. 그것을 이에야스의 부하 나가이 나오카츠[永井 直勝]가 응대하여 이에야스에게 만날 의향이 어떤지 물었다. 용건은 '서군을 배반하고 싶다'는 것이라고 한다.

 만날 필요 없다

 고 이에야스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했다. 이에야스는 이 즈음 서군에 가담한 여러 무장들을 와해(瓦解)시키고자 온 힘을 다하여 뒷공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료(幕僚)들은 이런 이외의 태도에 놀랐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는 서군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대부대(大部隊)를 거느리고 있으며 그 머릿수는 얕볼 수 없었다. 더구나 이쪽에서 꼬시는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내응(內應)하겠다고 자청하고 있는데, 그걸 만나지도 않겠다는 것은 어쩌자는 것일까?

 애송이 놈의 말, ()을 주기에 부족하다

 라고 이에야스는 그 이유를 말했다. 만약 함부로 응했다가 막상 그 때가 되어서 내응하지 않았을 경우 애송이의 잔머리에 넘어간 꼴이 되는 것이다. 이에야스로써는 승패 이상으로 명예가 걸린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5
일 후, 이에야스가 시라스카[白須賀]에 도착했을 때 히데아키의 세번째 밀사가
진중(陣中)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부하에게 시켜 적당히 응대하게 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 1600 9 15일 아침부터 벌어졌다. 하지만 히데아키는 여전히 서군에 속하여있었으며 더구나 계속 군을 움직이지 않았고, 분지(盆地)의 서남부에 있는 표고(標高) 293미터인 마츠오 산[松尾山]의 산꼭대기에 진()을 치고 아래쪽의 전황(戰況)을 관망(觀望)하고 있었다.

 킨고[金吾]는 도대체 어쩔 생각인가?”

 그 산을 올려보는 동서 양군의 어느 누구던 그런 의혹을 가졌다. ()은 마치 저 먼 하늘에 있는 듯했다. 당연히 아래서는 그들의 움직임을 알 수 없었고 싸울 의지가 있는지 어떤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죽은 히데요시가 킨고를 위해서 붙여준 히라오카 이와미[平岡 石見], 이나바 탄고[ 丹後] 두 명은 이미 이 전날 밤 동군의 쿠로다 나가마사[ 長政]를 통해서 내응을 약속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도 나가마사가 그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히데아키의 신청을 승낙했다. 더구나 단순히 입으로만 하는 약속이 되지 않게 토쿠가와 가문에서 오쿠다이라 사다하루[平 貞治], 쿠로다 가문[黒田家]에서는 오오쿠보 이노스케[大久保 猪之助]가 각각 연락과 감시를 위해서 히데아키의 진중에 가 있었다.

 한편, 서군 측도 될 수 있는 만큼의 회유(懷柔策)은 쓰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에,

 히데요리님을 위해서 입니다

 라 히데아키를 설득하여 전의(戰意)를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단순한 충절론(忠節論)만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히데아키에게 거대한 이익을 약속하였다. 이익이라는 것은, '히데요리님이 15살이 되시기 전까지 킨고님에게 천하를 다스리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관백[白]추대(推戴)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 조건에는 히데아키도 적잖이 마음이 흔들렸다.

 이 좁은 세키가하라 분지에 동군 약 7, 서군 약 8만의 군세가 대치하였다.
 아침. 전날 밤에 내린 비가 갬과 동시에 교전 상태가 되어
정오(正午)가 가까워짐에 따라 전황이 격렬해졌다. 더구나 서군의 주력 부대인 이시다[石田],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 등이 사력을 다해서 싸웠기 때문에, 밀린 동군은 기세가 눈에 띌 정도로 저하되었다. 이어서 오전 11시가 넘자 동군의 일부에서는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히데아키는 여전히 8천의 군사를 움직이지 않은 채 산꼭대기에서 내려올 기색조차 없이 동서 어느 쪽에도 붙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히데아키는 산 아래의 전황이 뜻밖이었다. 아군인 서군이 진다고 예상했기 때문에 적인 동군에 내응을 약속하였는데 산 아래의 전황은 서군이 유리했다. 산꼭대기에서 히데아키는 이 남자 나름대로 계산을 하였다. 이대로 상황을 봐서 이기는 것이 결정된 쪽에 붙으면 이보다 좋은 것은 없을 터이다.

 한편 이에야스에게 있어서도 이시다 쪽의 분전은 더욱 뜻밖이었을 것이다. 전투가 시작된 후 몇 번이나 마츠오 산을 올려다보며,

 킨고는 아직인가? 아직 내응하지 않는 건가?”

 하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단 말인가? 하지만 산꼭대기에 빽빽하게 세워져 있는 코바야카와 가의 깃발은 움직이질 않았고 그 거취도 알 수 없었다. 히데아키의 거동은 이에야스가 예측했던 대로가 되었다. 결국 정오 전의 이에야스는 그가 낭패(狼狽)했을 때의 버릇인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해,

 애송이에게 속다니…… 분하구나 분해!”

 라고 자기도 모르게 몇 번이고 말했다. 이에야스는 비상수단을 택했다. 위협이었다. 곧 철포대의 일부를 전진시켜 히데아키가 있는 마츠오야마의 기슭으로 보내 산꼭대기를 향해서 이에야스의 분노를 표출하는 듯이 연달아 발포하게 하였던 것이다.

 히데아키라는 남자에게는 이 발포가 무엇보다도 큰 효과가 있었다. 산꼭대기의 히데아키는 놀라 두려움에 허둥거리듯이 서군을 향해서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것이 정오였다. 8천의 코바야카와 군세는 산을 내려와 아군의 진지로 내달렸다. 전세(戰勢)는 이 순간 역전되었다.

 싸움에 이긴 후 분지 서쪽의 이에야스 진지에 여러 무장들이 모여들어 축하가 이어졌지만 이 싸움에 승리를 가져다 준 최대의 공로자인 히데아키만은 아직 자신의 진지에서 비를 계속 맞고 있었다.
 
이에야스에게 혼난다
 는 공포가 있었고 또한 자신이 연기했던 역할이 얼만큼이나 거대한 것이었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듯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

 킨고님은 아직 오시지 않은 듯하군

 하고 이에야스가 말하여 전령(傳令)인 무라코시 모스케[村越 茂助]에게 맞이해 오도록 명했다.
 
저 좆병진에게는 여러 번 손이 가는구먼
 이라고 이에야스는 생각했다. 곧이어 히데아키가 왔다. 쿠로다 나가마사가 부축하는 형태로 이에야스의 진지로 데리고 들어왔다.

 이에야스는, 히데아키에게만은 예()를 취하여 우선 자리에서 내려와, 투구의 턱끈만 풀고 말하길,

 츄우나곤님. 오늘의 전공(戰功)이 아주 크시니 앞으로 원한을 가지지 않겠소

 라며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히데아키는 놀라 앞으로 자빠지듯이 절을 하였다. 원래의 태생으로 돌아간 듯 마치 백성과 같았다. 이런 인물이 토요토미 가문일문(一門)이었다. 그 보기 흉한 모습에 그곳에 있던 토요토미 계()의 여러 무장들 역시 창피해져 모두 눈을 돌렸다. 쿠로다 나가마사가 참지 못하고 옆에 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 소곤거렸다. 마사노리는,

 당연한 것. 참새가 매에게 까불었던 것이네. 그렇다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

 라고 말했다. 하지만 마사노리 자신도 아직 사태를 충분히 이해하질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참새가 몇 시간 동안 역사의 열쇠를 쥐고 있다가 결국 공포에 떤 나머지 뛰쳐나가 이에야스에게 천하를 쥐게 만들었다. 이에야스만이 그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다. 지하(地下)의 히데요시도 이 양자(養子)가 토요토미 가문을 망하게 만드는 일을 할거라고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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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야스는 히데아키의 전공을 칭찬하며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에 50만석을 하사하여 그 공적에 보답하였다. 하지만 그 후 히데아키는 매일 밤 광란(狂亂)하며 음란(淫亂)에 빠졌고 적은 양의 술을 마시곤 취하여 곧이어,

 세키가하라의 전공 일등은 내다!”

 고 시녀(侍女)들을 모아서는 칼을 뽑아 들고 전쟁 흉내를 내었다. 보좌하던 노신(老臣)들도 그 광포함을 두려워하여 주요한 자는 대부분 그가 살아있을 때 뿔뿔이 흩어졌다. 곧이어 머리에 병을 얻어 세키가하라 전투로부터 2년 후인 1602 9월 오카야마 성[岡山城]에서 병으로 죽었다.

*********************************************************************************************************

  죽었다고?”

 쿄우[]의 코우다이인[高台院]은 이 조카의 부고(訃告)를 들었을 때 이렇게 말하였을 뿐이었다. 계명(戒名)도 물어보지 않고 그렇게 지나갔다. 그녀가 만든 이 양자는 토요토미 가문을 망하게 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이 세상에서  완수하였다.

=======================================================金吾中納言,======================
  1. 이에야스. 이에야스의 거성이 에도에 있었기 때문이 이렇게 불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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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njw321 BlogIcon 이그네스 2008.01.12 15: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장의야망 혁신에서는 소성 패다가 오히러 자기가 죽는 그런 비슷한 이벤이 있었던거 같은데.. (본인은 대충 봐 넘겨서 정확하진 않지만....) 여기선 병으로 죽는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12 15: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새가 매에게 까불었던 것이군요(왜 이게 해석이 저는 그토록 어려웠던걸까요..ㅎㄷㄷ; 해석하느라고 참새와 매에 관한 소설을 머릿속에서 한편 썼었더랩던;;)

    그나저나 시바선생은 몰년의 히데아키의 나이를 기입하지 않는 센스를 보여주심으로서 '실수'를 적당히 덮고 넘어가시는 센스를 발휘하셨군요(-_-..ㅎㄷ...)

    그.. 히데아키의 죽음에 관한 여러 이설을 안 넣고, 그냥 '뇌에 병이 들어 죽었다'로 간결하게 끝내는 센스도, 괜찮더군요. 역시 시바선생..이라는 느낌이랄까.

    모쪼록 수고하셨습니다. -이제는 미려한 히데이에 차례이군요(ㅎㅎ..)-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13 1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그네스님//그런 설도 있습니다. 술 먹고 전쟁 흉내내다가 소성 혹은 시녀에게 칼을 빼앗겨 죽었다는 설이나, 매사냥 나갔다 오다가 파이어볼을 채여서 그걸로 병을 얻어 죽었다는 설. 혹은 (가장 유명한)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유령에 괴롭힘 받다가 죽었다는 설. 혹은 암살 & 독살설 등...
    한번 이것도 읽어 보시길.. http://blog.naver.com/valhae0810/100039195550

    다메엣찌님//참새 & 매는 문맥상 그렇게 했습니다. 대항한다는 글자로 쓰여있긴 합니다만, 까분듯하게..
    저는 그 다음 문맥의 것을 살리지 못한 느낌이 드네요. [그가 말하는 ~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 투구의 턱끈만 풀어 놓는 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더군요.

    そんなこといっちゃダメ!

    저 간결함 정말 맘에 들더군요. ^^ 보통 생각하면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저주의 말 한마디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 그냥 [이 순간 전세가 역전 되었다]로 끝내시다니..

    그쵸.. 다음은 [미남의 파동]에 눈을 뜬 [미의 극에 달한 히메] 고우키(豪姫)가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며 진정한 미남을 찾다가 걸린 눈이 아름다운 청년 히데이에... 그의 고난과 역경이 다음 주부터 여러분을 찾아갑니다.(by CAPCOM)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13 2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ㅋ 아무튼 세키가하라 이후 반세기 넘게 사신 분이니.. 천수까지 복받은 미남자(ㅋㅋㅋ)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1.31 05: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투구의 턱끈만 풀어놓는다" 라는것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히데아키에게 각인시키려고한것 같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31 0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 과연....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군요. 전 예의상의 표현인 것 같기도 한데..
    (나름 많은 책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처음 본 표현이거든요)
    근데 히데아키가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이에야스가 과연 생각했을지...
    (...라고 할까 마치 세익스피어 문학 토론하는 것 같군요 ^^)

.

 양자를 보내는 측인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은 히데아키를 위해서 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하였다. 우선 양아버지인 타카카게[隆景]에 대한 답례로써 빈고[備後] 미하라 성[三原城] 3만석을 주었다. 은거소(居所)로써는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가 끼기 전에 빨리.
 
라는 식으로, 히데요시는 일이 결정된지 3개월째가 되자 히데아키를 타카카게가 머물고 있던 빈고 미하라 성[三原城]로 보냈다. 히데요시는 이 젊은이에게 될 수 있는 한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부속 가로[付家老]도 군사(軍事)에 뛰어난 다이묘우[大名] 급 부하를 둘 골라 히데아키의 무게감을 더하게 하였다. 히데아키 본인은 단지 남이 깔아 준 궤도에 타고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미하라 성에서 당주가 되기 위한 여러 의식, 행사가 끝났다. 타카카게는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집안의 어른다운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오래된 가신(家臣)들은 그런 타카카게의 표정에서 씁쓸한 그림자를 찾아내어 남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저 좆병진 때문에!’
 라는 식으로 뒷담화를 하는 자도 있었으며, 성 밑에 있는 쿄우신 사[真寺][각주:1]장노(長老) 기타츠[義達] 등도 히데아키를 배알(拜謁)한 후 몰래 일기에 적었다.

놀랄 만큼 멍청하며 또한 난폭하고 거만하다. 가문 멸망의 조짐인가? 슬프도다 슬퍼

 1597 6 12. 
 
타카카게는 66세로 죽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영토는 치쿠젠[筑前]과 그 밖의 것을 포함하여 52 2500석이라는 큰 영지(領地)였다. 그것이 히데아키의 것이 되었다.

 상속한 후 2차 조선 침공[각주:2]이 발령되어 히데아키는 새로운 운명에 태워졌다. 원수(元帥 = 총대장)에 임명된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로 대규모의 외정군(外征軍)일 경우 순수하게 군사적으로만 따지면, 총사령관은 토요토미 가문필두(筆頭) 다이묘우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 등이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불가능했다. 위대한 인물을 외정군 총사령관으로 만들면 전쟁터에서 외정군을 장악하여, 인망을 얻고, 명성을 얻어, 그 때문에 개선(凱旋) 후 국내 정치 체재를 변동시킬 위험이 있었다.
 하기는 당초 이에야스라는 안()도 조금은 나왔었다. 실제로 이에야스는 일찍이,

 졸자가 있는 한 주군(히데요시)에게 갑옷을 입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히데요시를 위해서 원정군 사령관의 직책을 맡겠다는…… 이것은 말하자면 이에야스의 아부(阿附)였지만, 그런 척을 하였다. 이번 해외 원정에 관해서 이에야스는 다른 대부분의 다이묘우가 그랬던 것처럼 속으론 반대하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적어도 한번 정도 사령관이 되겠다는 물밑 협상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진 이에야스의 가신 중 하나가 그런 식의 말을 하자, 이에야스는 속마음이 들킨 것처럼 삐쳐서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바다를 건너면 하코네[箱根[각주:3]]는 누가 지킨단 말이더냐?”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 보다 조금 전, 아이즈[津] 91만 여석의 다이묘우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죽었는데, 죽기 전에 이 조선 출병 계획을 듣고,

 원숭이 녀석! 죽을 장소를 잃어 미쳤구나

 라고 측근에게 내뱉듯이 말했다. 이것이 대부분의 다이묘우가 맘속으로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히데요시의 외정은 히데요시가 자신의 명예심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한 것으로, 제후들에게는 물질적으로 아무런 이익도 없었다. 1차 조선 침공[각주:4]으로 제후들의 영내(領內)는 피폐했다. 지금도 그로 인해 국고(國庫)가 비었다고 한다. 토요토미 가문의 인기는 이로 인해 급속도로 저하되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왕년의 자기자신과는 별개의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정세를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고, 전쟁터에 가지 않은 제후들에겐 인부와 돈을 염출(捻出)시켜, 후시미[伏見]의 다른 장소에 대규모 축성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축성은 군사상의 이유가 아니라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아직 아기에 지나지 않는 히데요리[頼]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후시미 성[伏見城]에 산다는, 말하자면 팔불출 같은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 즈음부터의 히데요시는 어떤 것을 생각하건, 모든 것이 히데요리를 위해서라는 것이 생각의 출발점이 되어 있었다[각주:5]. 원숭이놈은 미쳤다고 가모우 우지사토가 혀를 찬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킨고츄우나곤[金吾中納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여러 불운 중의 하나가, 이러한 정세 속에서 원정군의 사령관이 된 것을 포함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아키는 다이묘우[大名] 42, 총 인원 16 3천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후방인 부산(釜山)에 사령부를 두었다. 보좌역으로 쿠로다 죠스이[田 如水]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함께 하였다.
 선봉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였으며, 항상 우세를 점하기는 했지만 1차때와는 달리 사기가 오르질 않았고, 각 장수들 간에도 연락과 규율이 흐트러져, 위로는 다이묘우[大名] 아래로는 인부에 이르기까지 염전(厭戰) 기운이 팽배하여, 때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패배를 하였다.
 이런 전쟁터의 상황은 파견된 감찰(監察官)들에게서 곧바로 후시미[伏見]로 보고되었다. 이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받아 정리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1차 원정 때의 감찰관[메츠케(目付)]은 미츠나리였으며, 그는 그 검단(檢斷)적인 성격을 노골적으로 발휘하여 카토우 키요마사 이하 여러 장수들의 비리(非理)(바늘로 낸 구멍 정도의 규율 위반이었지만) 공격 대상으로 삼아 하나하나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미츠나리는 성격적으로 작은 과오, 규율을 지키지 않는 것,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전쟁터에 나간 여러 장수들은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키요마사 등은 봉록을 빼앗길 위험에 처해질 정도였다. 이번 제 2차 원정에서 미츠나리는 후시미[伏見]에 있었지만, 보고서는 모두 그의 눈을 거쳐 정리된 후 히데요시의 귀로 들어갔다.
 당연히 히데요시는 원정군의 현황이 맘에 들지 않았고, 어느 장수에 대해서건 불만족스러웠다.

 원정 10개월째에 유명한 울산 농성전이 펼쳐졌다. 키요마사는 고군분투하며 성을 지켜 4만의 명나라 군과 싸웠지만 식량이 떨어졌다. 급보를 부산의 총사령부로 날려 구원을 청했다.

 킨고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라며 쿠로다 죠스이는 히데아키의 이름으로 여러 장수들에게 군령을 보내었고, 다방면에서 한꺼번에 진격하여 적을 역포위한 뒤 크게 싸워 적의 목을 취하길 13238급이라는 대승을 거두었다. 히데아키는 처음 경험한 실전의 재미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명군 4만은 갈팡질팡하기에 바빴고 일본군은 사슴을 쫓는 사냥꾼과 같이 손쉽게 학살하고 다녔다. 히데아키는,
 
내도~’
 하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 젊은이의 성격은 자기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제지하려던 막료(幕僚)를 채찍으로 후려갈겨 물리치고 말을 몰아서 적에게 뛰어들었다. 친위대(御馬廻りの)도 히데아키를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쫓아갈 수 밖에 없었다.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며 창에 뛰어나질 못해도 좋았다. 히데아키는 미친 듯이 찔러대 13명의 적을 죽였고 자신도 피를 뒤집어 써 새빨갛게 되어서야 피로를 느끼고 이 놀이를 멈추었다.

 이 소식이 후시미에 전해졌다.
 히데요시는 울산성을 끝까지 지켜낸 키요마사를 포함한 3명의 장수[각주:6]에게 표창장을 수여하였고 구원군인 히데아키 이하 여러 장수의 활약에도 굉장히 만족하여,

 킨고도 나름 하는구나~”

 하고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히데요시는 기뻐하였다. 기분이 좋을 때의 히데요시에게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듯한 그런 인격적 매력이 아직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 기분이 몇 일 뒤에 뒤바뀌었다. 이 변화는 20세기인 오늘날에는 오히려 의학(醫學)의 영역일 것이다.

 킨고는 용서할 수 없다.”

 고 갑자기 말했다. 히데아키에 대해서 새로운 떡밥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이전과 똑 같은 보고서였지만 그 평가가 조금 바뀌어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바뀌게 된 것은 미츠나리의 의견이었다. 미츠나리는 생각하였다. 이 울산성 구원으로 히데아키의 인기가 오르기라도 하면 장래 히데요리에게 위협이 될 것이다. 히데아키의 형 뻘인 관백(白) 히데츠구[秀次]가 죽어 히데요리의 해()가 하나 줄어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히데아키. 거기에 부하로서는 너무 강대한 힘을 가진 칸토우[東]의 토쿠가와 이에야스 일 것이다. 
 
히데요리의 장래를 안전하게 한다는 것이 미츠나리가 가진 유일무이한 정치적 입장이었으며, 히데요시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미츠나리를 총애(寵愛)하여 중용(重用)하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히데요시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심 이외에도 요도도노[淀殿]와 그 자식에 대해, 풍토(風土)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오우미[近江] 북부 출신이었다. 요도도노는 예전에 노부나가에게 멸망 당한 북부 오우미의 다이묘우 아자이 씨[氏]의 따님으로, 즉 북부 오우미 사람에게는 신성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었다.
 자연히 토요토미 가문의 다이묘우 중 오우미[近江] 계열은 요도도노를 중심으로 살롱(salon)을 만들었고, 그것이 규벌(閨閥)이 되어, 요도도노가 히데요리를 낳음과 동시에 이 무리가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면에서 주세력이 되었다.

 이에 대해, 카토우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오와리[尾張] 출신들은 같은 오와리 출신의 키타노만도코로[政所]와 어렸을 적부터 깊은 인연으로 맺어져, 자연히 키타노만도코로를 중심으로 규벌을 만들고 있었으며, 이들이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하는 파벌과 적대하여 무슨 일이건 대립하였다.

 지금 조선에 건너간 장수들 대부분이 키타노만도코로 당()이었다. 이 당이 장래 히데아키를 추대(推戴)하여 히데요리에게 대항할지도 몰랐다.

 킨고님을 너무 띄어주는 것은 히데요리님을 위해서 좋지 않습니다

 미츠나리는 진언(進言)하였다. 항간에서는 칸파쿠 히데츠구의 죽음도 이 미츠나리의 참언(讒言)이었다고 믿겨지고 있었다. 미츠나리가 참언을 했건 하지 않았건 히데츠구의 몰락은 미츠나리의 정치적 견해와 히데요시의 이해(利害)가 일치되어 있었으며 그의 몰락이 히데요리의 장래를 안전하게 한 것도 틀림없었다.

 역시…… 그런가?”

 히데요시는 히데아키의 행동에 대해 미츠나리의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겼다. 전군 사령관이라는 자가 손수 창을 들고 적진으로 달려들어서는 안 되었다. 그 외에도 성격이 거칠었고 막무가내인 점도 많았다.
 
히데아키에게 벌을 내려야 하나?’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무장으로써의 마음가짐이 되어있지 않은 것이었지 도덕상의 문제이거나 법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또한 그로 인해 싸움에 진 것도 아니며 오히려 사기가 더 높아져 이겼다. 벌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벌을 내려야만 했다.
 히데아키의 행동을 살펴 보니, 양아버지인 타카카게가 정한 군제(軍制)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여, 그 때문에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의 장병들은 몹시 불쾌해 하고 있다. 타카카게는 누가 보아도 이 시대의 명장이었다. 가신들은 타카카게를 존경했으며, 이 때문에 코바야카와 가문의 병사들은 강했고 군법이 엄정했다. 그러나 히데아키가 거기에 들어간 뒤 의미도 없이 그 군제를 무시하고 있다. 죽은 양아버지를 존경하는 듯한 모습이 전혀 없었으며, 경건(敬虔)함이 전혀 없었다. 히데아키가 그러한 성격이라면, 히데요시가 죽은 후 토요토미 가문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할 것이다. '놀랄 만큼 멍청하며, 또한 난폭하고 거만하다'고 한다. 놀랄 만큼 멍청하다고 하여도 히데아카의 곁에 나쁜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라도 있으면 어떤 막되먹은 짓을 할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히데아키의 존재는 히데요리의 장래에 해가 되면 해가 되었지 결코 득이 되질 않을 것이다.

 역시…… 히데아키에게 치쿠젠[筑前] 52만석은 너무 크지

 히데요시는 말했다. 큰 영지(領地)와 많은 병사를 가진 만큼 사람들은 그를 추대하려 하겠지만 조그만 땅밖에 없다면 추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히데아키의 땅을 거두어들이고 에치젠[越前] 15만석 정도로 하자. 거기를 어디로 할 것인지 조사해 두어라

 히데요시는 미츠나리에게 그에 대한 사무를 맡겼다.
  1. 지금은 소우코우 사[宗光寺] [본문으로]
  2. 정유재란을 말함. [본문으로]
  3. 하코네[箱根 – 맵의 한 가운데 箱根山이라 쓰여져 있는 곳. 확대나 축소해 보면 대충 위치는 알 수 있다…고 생각함]는 토우카이도우[東海道]의 요충지로 오오사카[大坂] 쪽에서 칸토우[関東]로 갈 수 있는 최단 거리에 있는 곳으로, 험한 곳이 많은 천연의 요해(要害)이다. 따라서 의미적으로 ‘칸사이[関西]의 세력에게서 칸토우를 지킨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임진왜란을 이름. [본문으로]
  5. 역사상으론 히데요시가 성을 새로 지은 것은 지진으로 인해 그때까지 살던 성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또한 어린 아이를 성주로 삼는 것은, 일찍부터 아이에게 직신(直臣)을 만들어 주기 위한 방편으로 흔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2살 때 나고야 성[那古野城]의 성주가 된 것과 같이. [본문으로]
  6. 나머지 둘은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오오타 카즈요시[太田 一吉].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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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31 1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허허.. 치쿠젠 52만이 에치젠 15만석이 됐더라면야.. 세키가하라에서의 그 참혹한 꼴도 없었겠군요;

    킨고 녀석에게도 미츠나리에게 개인적으로 악감정을 품을 만도 했겠는데요..(그런데도 뭘 믿고 미츠나리는 킨고 녀석이 서군에 남을거라고 단정지을 수 있었는지-_-..)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1 17: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곳에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칸파쿠 + 카미카타(上方)에 1개국 추가... 로 꼬셨다고 하더군요.
    그리고....이 글에선 히데아키의 소령이 52만석이라고 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후 얻은 것이 우키타 히데이에의 옛 영토 55만(혹은 50만석...) 카미카타에 가까워 졌다곤 하지만, 전투를 결정지은 것에 비하면 적을 것을 보면, 다른 곳에서 말하듯이 이 때는 33만 여석 근처가 아니었을지...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2 1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적어도 일본 위키를 보면 52만석...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군요.(ㅁㅎㅎ)

    徳川家康 (関東に256万石)
    前田利家 (加賀など83万石)
    宇喜多秀家(吉備東半57万石)
    毛利輝元 (吉備西半・安芸など120万石)
    小早川隆景(筑前33万石)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2 1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なお小早川隆景死後、上杉景勝(会津120万石)が大老となり、前田利家死後、嫡子の利長がその地位を継いだ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2 19: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바야카와 석고가 의외로 적었군요. 뭐, 많은편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모리 종가에 비하면..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kelt200 BlogIcon 깃쨩 2008.01.03 02: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
    히데아키의 그릇이야 그렇다지만 다른 소설속에서의 미츠나리는 음모에 능하고 째째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 같기도..
    반면 요즈음 評도 그렇고 葵徳川3代였던가? 드라마에서는 忠義者로 나오던데...긍정적으로 보는 면도 많은 것 같아요^.^
    만약関ヶ原에서 미츠나리가 이겼다면..이라던지...
    어쨌든 미츠나리는 고지식한 점으로 자신을 파멸시켰지만 센스만점에 교양도 겸비한.. 같은 취미의 사람들이 놓고 봤을 때 흥미만점 인물인 것 같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4 17: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그 봉토라는 것이 저한텐 복잡 미묘하더군요.
    종가인 모우리 가에 비하면 (같은 오대로급이지만) 적다고 할 수 있지만, 모우리 가문이 츄우고쿠 국인 연합체 중 맹주 격인 역사를 가졌다 보니, 히데요시가 이 만큼 다 니 땅~ 이라고 인정을 하여도, 동급의 다른 도자마(국인)들에겐 어쩔 수 없이 자치권을 허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 직할령은 어느 정도가 되었을지...
    그에 비해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아예 본거지를 벗어나 치쿠젠에 새로 영지를 하사받은 만큼, 데리고 있던 국인들을 직신화 & 영지의 직할령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 52만석의 근거는 후에 기어 들어 온 쿠로다 가문이 신고한 영지가 약 50만석 근처다 보니 그리 되지 않았을지...)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4 1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깃쨩님//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방문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

    이시다 미츠나리는 굉장히 유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위시한 히데요시의 소위 문치파 관료 조직이 조금만 덜 유능했다면,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었을 꺼라 생각합니다.(후방 행정 보급 지원 없이 십만 단위가 넘는 인원을 움직일 순 없을테니까요.)

    제가 생각하기엔 이시다 미츠나리는 패장이기에 모든 것을 뒤집어 쓴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시다 미츠나리가 암살에 관여했다고 알려진 가모우 우지사토의 유능한 전투 집단이 그대로 미츠나리의 품에 안긴 것이나, 참언했다고 알려진 살생관백 히데츠구의 부하들도 세키가하라 때는 미츠나라 측에서 목숨을 던진 것을 보면, 현재 알려진 것과는 다른 뭔가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특히나 세키가하라 때와 임진왜란 전에는 이시다 미츠나리에 대한 것이 그다지 문제가 없는데(제가 과문한 탓일지도...), 갑자기 임진왜란 때와 세키가하라 사이에 두고 이시다에 대한 안 좋은 것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혼자 음모론 놀이 하기에도 재미있더군요. ^^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4 18: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 업데이트는 일요일 즈음이 되어야 할 것 같군요.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4 2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부분은 딱 꼬집어서 말하기 힘든 부분이군요.

    일단 히데아키의 봉토는 치쿠젠일국, 치쿠고와 히젠의 일부분 도합 35만7천석이었던 걸로 알려져 있긴 합니다.

    그런데, 치쿠젠은 영제국상으로는 상국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 일개국 만으로도 30만석强에 해당하지요. 그러면 치쿠고와 히젠을 더하지 않고도 표고 35만석에 달해버리는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히데아키 이후에 입봉한 쿠로다 나가마사의 경우에는 히데아키와는 달리 치쿠고, 히젠을 제외한 치쿠젠국 1개국 만으로도 50만석 이상(52만석인가 53만석인가)의 석고거든요.

    이것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안드로메다 고무줄 석고가 되겠습니다만,

    이건 역시 태합검지라는 실시의 과도기였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야할 부분 같습니다.

    이 전제하에서 생각해 보면, 히데아키가 치쿠젠에 재봉하던 당시, 表高는 35만석이라 해도, 實高는 50만석 이상(60만석 까지도)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이후 쿠로다씨가 치쿠젠 일국에 입봉되었을 때는 검지결과가 반영되어 표고가 실고에 맞게 상향조정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4 2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니까 위 내용에서 히데요시의 독백인 "치쿠젠 52만석은 너무 많다."라는 말은 치쿠젠 검지가 끝났으나, 아직 실제 표고 상향조정은 되지 않았던 시기에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소설가 중에는 그래도 고증을 잘 해주는 시바 선생이 실수한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어요. >.,<
    그런데, 제가 큐슈쪽 검지 완료시기를 모르기 때문에, [이렇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좀 뻘쭘하네요.
    단순히 쿠로다 나가마사의 후쿠시마번 52만석과 착각했을 가능성도 없다고는 못하겠습니다만, 시바선생의 면목을 봐서라도 검지와 관련해서 생각하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6 21: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otokanfist님//흐르는 돌입니다 ^^(流石)
    저는 그 쪽으론 생각도 못하고, 혹시 쿠라이리치(蔵入地)를 코바야카와 가문이 담당하기에 그런건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에 대한 자료를 본 것 같은데 찾질 못해서(어느 책인가에 있었는데...) 생각나는데로 적었는데... 이야~ 역시 함부로 말해선 안 되겠군요. ^^ 앞으로도 좋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6 2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제 리플은 거의 추리(...) 수준이어서 신빙성은 없어요. ^^;;

七.

 이 즈음, 쥬라쿠테이(聚楽第)를 방문하는 다이묘우(大名)는 한 명도 없게 되었다.
 눈치 빠르기로 소문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같은 자는 예전 가장 친한 척하며 한때는 10일에 한번 정도 방문했던 인물이었지만 발길을 끊었으며, 히데츠구에게 황금 100매를 빌렸던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는 그로 인해 서로 사이가 좋다는 의심을 사는 것이 두려워 그 돈을 갚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 결국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돈을 빌려 히데츠구에게 갚았다. 이에야스는 그 후 에도(江戸)로 돌아갈 일이 있었는데,쿄우(京)를 떠나면서 자신을 대신하여 쿄우(京)에 있던 세자(世子) 히데타다(秀忠)에게,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와 칸파쿠(関白=히데츠구)가 싸우게 되면 무조건 타이코우에게 붙어라. 타이코우가 만에 하나라도 죽는 일이 생긴다면, 곧바로 오오사카(大坂)에 가서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각주:1])를 호위해라”

 는 말을 남겼다.
 이미 세상이 그렇게까지 과열되기 시작한 이상 히데츠구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쿠마가이(熊谷)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정에 3000매의 백은(白銀)을
진납(進納)하였다. 장래 일의 경과에 따라 히데요시를 쓰러트렸을 경우 신정권을 곧바로 승인 받고자 위함이었다. 1595년 7월 3일이었다. 바로 그날로 이 비밀이 후시미(伏見)로 새었다.

 히데요시는 결국 결심하여 다섯 명의 힐문사(詰問使)를 파견하였다.
 미야베 젠쇼우보우(宮部 善祥坊),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마에다 겡이(前田玄以),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토미타 토모노부(富田 知信)였다.
 히데츠구는
인견(引見)하여, [모반이라니 뜬소문에 지나지 않는다. 모반할 생각은 없다]라는 뜻의 서약서를 써 건넸다. 백은을 진납한지 이틀째였다.

 다섯 명은 후시미(伏見)로 돌아와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그로부터 3일째 되던 날 다른 사자들이 쥬라쿠테이(聚楽第)로 파견되었다. 예전에 히데츠구의 숙로(宿老)였던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 거기에 먼젓번의 미야베, 마에다 겡이를 포함한 다섯명이었다.

 “그런 뜬소문이 떠돌아 서로 의심이 생긴 것은 요컨대 서로 직접 이야기를 나누실 기회가 없어서일 것입니다. 후시미(伏見)까지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를 죽음의 사자라고 생각한 히데츠구는 끝까지 거부하며 승낙하지 않았다. 그들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후시미(伏見)에서 다른 이가 와서 별실에서
내알(內謁)을 청했다.
 비구니인 코우조우스(孝蔵主)라는 노녀(老女)였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 가장 신임을 받고 있는
여관(女官)으로 히데츠구는 어릴 때부터 이 비구니와는 친했다.

 “이 비구니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세요”

 라고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말했다. 타이코우님은 기분 좋으십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전하를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계시지는 않사옵니다. 아무 염려하실 것이 없사옵니다, 고 하였다. 히데츠구는 숙로인 다이묘우(大名)들은 경계하였지만 이 비구니에게는 낚였다. 히데요시의 계략은 성공했다. 뒷문으로 들어온 이 비구니 쪽이 실은 죽음의 사자였다.

 “그런가? 그럼 가보세”

 라고 하며 곧바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측근인 쿠마가이들이 막을 틈도 없이 히데츠구는 비구니와 함께 현관을 나섰다. 히데요시에겐 손자뻘인 세 명의 아기들을 앞세우고 호위는 백 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 오후 조금 지나 쥬라쿠테이(聚楽第)를 출발하여 타케다(竹田) 가도를 이용하였고 오후 3시 즈음에는 후시미에 도착했다. 후시미의 거리에서는 소란이 일어나 가재도구를 들고서 도망치는 이들도 많았다. 떠도는 소문에 히데츠구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온다고 한다. 히데츠구는 생각치도 못했던 이런 반응에 놀랐다.
 ‘내가…… 내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인가?”

 “우선 오시는 길에서 맞은 먼지를 떨구시길”

 이라며 휴식소로 지정되었다는 키노시타 요시타카(木下 吉隆)의 저택으로 안내 받았다. 그러나 문에 들어서자 마자 은밀하고 재빨리 모든 문이 닫혔다. 이때 히데츠구는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다. 곧이어 사자가 성(城)에서 와, 만날 필요 없다며 그대로 코우야(高野)산(山)에 가라고 하였다. 히데츠구는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날 밤 승복(僧服)으로 갈아입고 후시미를 출발하여 이틀 후 코우야산(山)에 올라가 세이쥬쿠 사(青宿寺)에 도착하였다. 다섯 날째에 산기슭에서 타이코우 히데요시의 사자들이 각각 부하들을 이끌고 올라왔다. 정사(正使)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라 한다.

 “틀림없이 마사노리인가?”

 히데츠구는 확인을 위해서 물어보았다.

 “틀림없습니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히데츠구는 자신의 운명이 다한 것을 깨달았다. 마사노리와는 어렸을 때부터 사이가 안 좋은 채로 살아왔다. 그 마사노리가 이런 때 사자로 선정된 것을 보면 말로 듣지 않아도 명료했다. 죽음이다.

 역시 죽음을 언도 받았다.
 이 순간부터 히데츠구는 지금까지의 이 남자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이 죽음의 명령을 받았을 때 히데츠구는 자신의 문서담당관인 승려 사이도우(西堂)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거의 이겨갈 때 즈음 마사노리의 명령을 받은 히데츠구의 측근 사사키베 아와지노카미(雀部 淡路守)가 와서는 준비가 다 되었다는 것을 히데츠구에게 보고했다. 히데츠구는 바둑판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겼다”

 고 뜬금없는 말을 하였다. 바둑이었다.

 “모두들 나중에 증거로 봐 두라고. 내가 이겼다”

 과연 주위가 그것을 보자 히데츠구가 이긴 바둑이었다. 이것 자체가 기묘했다. 여태까지 히데츠구가 사이도우에게 바둑으로 이겨본 적이 없었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날 이때가 되어서야 이긴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기뻤는지 짝사랑을 앞에 둔 소년과 같이 볼을 붉히며,

 “지금부터 나는 배를 가르러 가지만 이 바둑판은 흩뜨려놓지 말게. 조심히 방으로 옮겨라. 모두 나중에 돌을 놓은 것을 잘들 살펴보게”

 라고 말하곤 사사키베 아와지노카미를 향해,

 “유서를 쓰고 싶군. 허락되는지를 알아봐 주게”

 라 말하였다. 그것이 허용되었다.

 히데츠구는 자신의 친아비와 정실, 시첩(侍妾) 일동들에게 간결한 유서 한 통씩 세 통을 썼다. 붓놀림이 경쾌했다. 다 쓰고 난 후 붓을 던졌다. 던지고 난 후 승려 사이도우를 향해서,

 “내 일생은 타이코우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죽음도 또한 그렇다.”

 고 말했다. 자신의 생애가 하나하나 타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기묘함을, 이 남자는 마음속 깊이 되돌아 본 것일 것이다.

 “이제 나는 죽는다. 이것도 타이코우의 뜻이다. 그렇지만 내가 내 배를 가르는 칼은 내 손안에 있다.”

 요컨대 배만은 자신이 가른다, 그것만은 자기자신이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사이도우에게,

 “자네는 중일세. 죽을 필요는 없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이도우는,

 “쓸데없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는 제 맘대로 함께하겠습니다”

 라며 자신도 배를 가를 준비를 하였다. 사이도우는 참고로 코우조우스(孝蔵主)의 조카이다. 숙모의 거짓말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내심 각오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히데츠구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본 후, 곧이어 할복의 자리에 앉았다.
 착각을 했는지 이 남자는 동쪽을 향했다. 불법에 이르기를 부처는
서방십만억토(西方十萬億土)에 계시다고 한다. 서쪽을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건 작법(作法)에 어긋납니다. 서쪽을 향하십시오”

 라고 사이도우가 충고를 하자 히데츠구는 아무 말도 없이 있었다. 다시 한번 충고를 하니,

 “부처님은 시방(十方)에 계시다고도 한다. 방위에 연연하진 않겠네”

 라고 말하였다. 적어도 생애의 마지막 정도는 자기 맘대로 하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카이샤쿠(介錯)의 칼이 번쩍이며 시체는 작법이 틀린 채로 동쪽을 향해서 쓰러졌다.
 사이도우는 그것을 보고,

 “전하는…… 방향을…… 잘못 아시고 계시다. 이것이 묘하다. 전하의 생애도 이랬던 것은 아닐까?”

 라고 말하였다.
 사이도우는 서쪽을 향했고 서쪽을 향해서 목이 떨어졌다. 자연히 시체는 히데츠구와는 반대 방향이 되었다. 사이도우가 마지막에 중얼거린 위에 말이 히데츠구의 생애를 상징한 말인 듯이 항간에 전해졌다.
 사실, 히데츠구는 태어난 연(縁)이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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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츠구가 죽은 뒤 그 처첩과 그녀들이 낳은 아이는 성별의 구분 없이 전부 사형당했다.
 
형장(刑場)은 쿄우(京)의 산죠우 강변(三条河原)이었다.
 60 평방미터 사방에
(濠)를 파고 거기에 울타리를 둘러쳤고 형을 집행하는 천인(賤人)들에게 갑옷을 입히고 활과 화살을 들려주었다.

 집행된 것은 8월 2일.
 쥬라쿠테이(聚楽第)의 남문(南門)부터 백색의
수의(壽衣)를 입은 그녀들을 몰아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천인들이 물건이라도 던지듯이 그들을 수레에 집어넣었고 한 대에 2~3명씩 태워서는 산죠우 강변으로 옮겼다.
 형장의 남쪽 구석에
토단(土壇)이 세워져 머리가 하나 올려져 있었다. 히데츠구의 머리이었다.

 “저걸 봐라~! 저걸 보라구~!”

 라고 천인들은 소리 질렀고 지르면서 그녀들을 울타리 안으로 몰아넣었다.
 울타리가 닫히고 살육이 시작되었다.
 그녀들을 천인들이 쫓아가서 찌르고 잡아서는 베었다. 천인이 2~3살 먹은 어린 귀족을 잡아서는 모친의 눈 앞에서 강아지라도 죽이듯이 죽였고 그것을 보고 기절한 모친을 다른 천인이 안아 세워서는 목을 쳤다.

 이치노다이(一ノ台)도 그 딸인 미야노카타(宮ノ方)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녀는 사세구(辭世句)를 준비해 놓았다. 딸의 사세구는 이렇다.

 모녀의 헤어짐을 듣고 우울했지만, 같은 길을 가니 기쁘구나
 憂きはただ親子の別れと聞きしかど同じ道にし行くぞうれしき
 형은 공개로 행해졌다.
 수만의 구경꾼들이 형장을 에워쌌고 특히 장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죠우 다리에는 다리가 무너지지 않을까 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도 이 사형이 무엇 때문에 행해졌고,천하에 대해서 어떤 효과를 기대하며 공개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곧이어 처형은 종료되었고 원래부터 강변 한 켠에 파여져 있던 구덩이 속에 그들의 시체와 히데츠구의 머리가 함께 던져졌다. 흙이 덮이고, 그 무덤 위에 석탑이 세워졌다.
 악역을 저지른 히데츠구의 무덤[秀次悪逆塚]
 이라고 그 비석에는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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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고시치로우 히데츠구의 친아비인 미요시 무사시노카미 카즈미치(三好 武蔵守 一路)는 영지(領地)와 위관(位官)을 몰수당해 원래의 신분인 평민으로 떨어져 사누키(讃岐)로 유배당했다.

 “뭔 일이래……”

 이 야스케는 사누키(讃岐)의 유배지에서 자신이 먹을 땅을 괭이질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뭔 일인지... 이 친아비도 또한 자기 일생의 정체를 이해할 수 없었음에 틀림없다.

    ======================================================殺生関白,了====================

  1. 히데요시의 정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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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9 17: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요시 카즈미치야 뭐.. 본래의 운명으로 돌아갔으니 담담했을듯, 히데츠구도 마지막되니 제법 용자스러운 면모를 보여주는군요...

    그나저나 히데요시 친 누님은 어떻게 되었을련지.. 측근인 쿠마가이 녀석 운명도 궁금하고..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9 17: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쪼록 수고하셨습니다. 대조해가며 천천히 다시 읽어봐야할듯..(정말 소설은 읽으려니 ㅎㄷㄷ라..)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09 19: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대조는 하지 말아주세요... 시바 선생의 필력을 살릴 수 없어서 여러 번 고생한 끝에 제멋대로 갔다붙인 곳이 많아서리..^^;

    참고로... 히데요시의 친누나이자 히데츠구의 어미인 즈이류우인 닛슈(瑞龍院 日秀)는 히데츠구가 죽은 후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 즈이류우인(瑞龍)원(院)을 세워 비구니 호인 닛슈(日秀)를 칭하며, 히데요시의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가 죽은 다음 해인 1625년 93살의 나이로 죽었다고 합니다... 친누나이니까 살려 주었나 보네요.

    쿠마가이 역시 연좌되어 할복을 명령받아 니손(二尊)원(院)에서 배를 갈랐다고 합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9 19: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원서는 읽을 엄두도 안나서..(ㅎㅎ..)

    키타노만도코로보다 장수했다니..(히데요시보다 10여세 연하로 알고있는데..) 어지간한 장수군요...

    다시 읽어보니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소심함이 한층 엿보이는군요.. (어이, 아들내미한테는 한때는 이에야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며?ㅋㅋ..)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0 14: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이야기는 조금 의심이 가는게... (잘 알려진 이야기이긴 하나)
    몇 몇 책에서는 히데츠구가 죽은 이후의 일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별일 아니었는데 히데요시 측에서 땡깡을 부렸다는 말도 있고, 또한 이에야스한테 돈을 빌렸다는 것도 조금... 왜냐면 그의 장인 마에다 토시이에의 경우 돈을 잘 빌려주기로 유명했거든요.(뭐 하필이면 그 때 토시이에에게 돈이 없었다면 그 뿐이지만 말입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10 17: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시이에 돈 잘빌려주는 건 유명하지요(이아저씨는 꽃의 케이지에서의 주판영감이미지가 자꾸 떠올라서~~;)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P.S. 타다오키 처 가라샤는 아케치 미쓰히데 딸내미로 알고 있는데.. 혈연이 참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 같습니다. (에휴...어려워서 원;)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0 23: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로 힘이 있는 가문끼리 만세에 걸쳐 좋은 게 좋은 것지~ 라면서 겹사돈 맺는 거야 어느 시대 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가라샤...하면 전 타다오키의 의처증이 우선 생각나더군요... ^^ 쪼잔한 녀석~ 하면서..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kelt200 BlogIcon 깃쨩 2007.12.11 0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그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살생관백 다음 챕터 대머리쥐의 일족 얘기도 있는지 궁금하군요. 고맙습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1 13: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위에서 다섯번째 리플... 타다오키의 장인 마에다 토시이에라 했는데, 사돈이군요... ^^; 이 실수는 자주 하는군요...--;

    깃쨩님//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은...

    킨고 츄우나곤(金吾中納言) ->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를 다룬 단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 히데요시의 정실 '오네'를 다룬 단편
    야마토 다이나곤(大和 大納言) ->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를 다룬 단편
    스루가고젠(駿河御前) -> 히데요시의 막내 여동생을 다룬 단편.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둘째 아들로,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 인물
    하치죠우노미야(八条宮) -> 황족으로 히데요시의 유자(猶子)가 된 인물
    요도도노(淀殿)와 그 아들 ->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도노와 히데요리(秀頼)의 이야기......

    가 남아 있으며... 매주 일요일 업데이트 할 예정(이라고 쓰고 '어긋나기 위해 계획을 이르는 말'이라고 해석된다....)입니다.

  10.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8 07: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처형장면이 너무나 비참하군요. 처자들이 뭔 죄가 있다고 죽여도 곱게 죽이지 어찌 저리 잔인하게 죽인건지... 이 때 이미 히데요시 정권은 끝난것 같습니다. 수백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그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