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카카게[隆景]가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의 후계자가 된 데에는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모략이라는 덫이 작용하고 있다.

 모우리 가문[毛利家] 발전을 위해서는 세토 내해[瀬戸内海] 연안의 호족 코바야카와 가문을 빼앗는 것이 긴급한 과제였던 것이다.
 코바야카와 가문은 당시 누타[沼田]와 타케하라[竹原]라는 두 가문으로 나뉘어져
[각주:1] 있었다. 그 중 타케하라 가문의 당주인 오키카게[興景]가 병으로 죽었다. 운 좋게 모토나리의 조카가 죽은 오키카게의 부인이었다. 곧바로 모토나리는 당시 9살인 토쿠쥬마루[徳寿丸=후의 타카카게]를 후계자로 밀어 넣었다.
 그 직후 이번엔 누타 가문에서 당주 마사히라[正平]가 죽었고 거기에 그의 아들인 마타츠루마루[又鶴丸]에게 눈이 머는 불행이 찾아왔다. 모토나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처음부터 누타 가문의 중신 노미 씨[乃美氏]를 꼬셔놓은 상태에서 은밀히 모략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모토나리는 강제로 누타 가문을 타케하라 가문에 합병시키고는 그 당주에 타카카게를 앉혔다. 더불어 합병 반대파인 누타 가문의 가신들 하나하나를 숙청한 것이었다. 누가 보아도 일련의 당주 사망사건에는 모토나리의 검은 모략의 냄새가 풍기고 있다.

 어쨌든 이런 어두운 모략에 의해 탄생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이지만, 모우리 가문 발전의 방향타를 쥐고서는 전란의 세상에서 그 지모를 아낌없이 발휘하여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継], 시마 사콘[島 左近] 등과 더불어 센고쿠[戦国]의 삼대지장 중 한 명으로 손꼽히게 된다.

 타카카게가 죽었을 때,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는,
 "일본에서 지혜로운 사람 한 명이 사라졌다. 이 인물은 모우리 가문이라는 거대한 배를 조종하는 뱃사공과 같았다…"
 하고 회상하였다.

 또한 이런 이야기가 있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상급귀족[公卿]인 키쿠테이 하루스에[菊亭 晴季]와 바둑을 두다가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자 자기도 모르게
 “이건 타카카게라도 풀 수 없겠지……”
 라고 혼잣말을 한 것이다. 옆에서 관전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도
 “정말 그렇겠군요”
 라며 끄덕였다고 한다.

 거슬러 올라가 소년시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타카카게가 형인
모토하루[元春]와 각각 아이들을 데리고 편을 갈라 눈싸움을 하였을 때, 처음엔 모토하루의 돌격에 패하였지만, 두 번째는 부하를 몇 명인가 복병으로 숨겨 놓아 모토하루의 허를 찔러 승리하였다고 한다.

 타카카게가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선 것은 1547년 그의 나이 15살 때에 칸나베 성[神辺城]공략전이었고, 1555년 이츠쿠시마 전투[厳島合戦]에서는 일찍부터 후년 천하 삼대지장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은밀한 상륙작전에는 아무래도 세토 내해의 수군인 노지마[能島], 쿠루시마[来島] 수군의 응원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들과 교섭하여 현실화시킨 것이 타카카게인 것이다.

 이러한 외교적 수완뿐만이 아니라 실전에서도 민첩한 기동성을 보여주었다. 별동대를 이끌고 대담하게도 적의 정면인 이츠쿠시마 신사(神社) 오오토리이[大鳥居] 가까이에 배를 대었다.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의 군사들은 설마 적측인 모우리의 군사들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그냥 수상히 여기고 있자, ‘큐우슈우(九州)에서 원군으로 온 수군이다’[각주:2]고 속이고는, 적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상륙하여 스에 군의 본진 토우노오카[塔ノ岡]의 허리쯤에 진영을 세웠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의 결전에서는 스에 군의 배후에서 습격한 부친 모토나리 등의 주력과 호응하여 스에 군을 협공하였다. 타카카게 자신도 3개소의 상처를 입으면서 분전. 적 부하장수인 야마토 오키타케[大和 興武]를 포로로 잡았으며, 적 대장인 타카후사를 추격하여 자살로 몰아넣었다.


크게 보기                                                 < 이츠쿠시마의 전투 >

 1570년 6월.
 부친 모토나리가 이 세상을 떠나자 타카카게는 모토하루와 함께 테루모토[輝元]를 잘 보좌하여 [모우리의 양천(毛利の両川)[각주:3]]으로서 존재감을 발휘하였다. 그러는 한편 모우리 본가에 대한 충성심도 두터워, 조카인 테루모토가 머물고 있는 방을 지날 때는 반드시 무릎을 굽혀 예를 다하며 지나갔으며, 테루모토가 없을 때도 그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하통일을 목표로 서쪽으로 진격을 해 온 오다 군[織田軍]과의 격돌에서 그의 군략가로서의 특질이 발휘된다.
 1575년 오다 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오오사카[大坂]의 혼간지[本願寺]와 손을 잡은 모우리는 같은 해 7월 혼간지에 식량을 해상 수송하였는데, 그때 총지휘를 한 것이 타카카게였다. 모우리의 수송선단은 요격하러 나온 오다 군과 키즈가와 강[木津川] 하구에서 격전을 벌인다. 그러나 이쪽은 이츠쿠시마 이래의 전통을 자랑하는 코바야카와 수군이다. 오다 측의 수군을 능숙하게 포위한 후 철포, 불화살을 쏟아 붙는 듯이 공격하여 수 백 명을 죽이는 대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각주:4]

 이제 츄우고쿠[中国] 모우리의 명성은 시코쿠[四国], 큐우슈우[九州]에까지 이르렀다. 더구나 모우리는 그 이전에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통해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카이[甲斐]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도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과 호응하여 오다[織田]를 동서에서 협격하고자 하는 대전략이었다.

 이러던 중 오다-모우리 대결 최대의 고비가 되는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 공방전에 이르게 된다.
 이 전투는 타카마츠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의 할복을 조건으로 강화를 맺게 되는데,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의 변 소식이 전해지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죽음을 숨긴 채 다음 날 무네하루를 할복시키고는 급히 쿄우토[京都]로 군사를 돌려던 것이다.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소식은 모우리 군에게 있어서 다시 오지 않을 반격의 기회였다. 여기서 히데요시를 추격한다면 물리치는 것은 쉬웠다. 대부분이 이 의견에 찬성하였다. 하지만 타카카게는 결사반대를 외쳤다.

 타카카게 외교감각의 탁월함이 여기서 멋지게 발휘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카카게는 히데요시가 장래 반드시 천하를 쥐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추격하지 않고 히데요시에게 아케치[明智] 토벌을 성공시키면 반드시 히데요시는 모우리에게 호의를 갖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모우리의 장래를 위해서도 그러는 편이 훨씬 이득이라고 설득한 것이다.

 히데요시의 정권장악은 타카카게의 이 추격반대 덕분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후년 히데요시는 이때의 타카카게 배려에 깊은 감사를 하여, 모우리 씨[毛利氏]에게 이때의 은혜를 갚음과 동시에 특히 타카카게를 본가의 테루모토와 동격으로 올려, 대로(大老)의 한 사람으로 발탁하였다. 영지(領地)도 치쿠젠[筑前] 전부와 치쿠고[筑後]와 히젠[肥前]에 각각 2개군(郡)을 하사하여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만들어 주었다.

 한편 타카카게가 모우리 가문에 얼마나 헌신적이었는가는 히데아키[秀秋]를 양자로 받아들인 것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세자가 없는 모우리 가문에 히데요시의 양자 히데아키가 후계자 후보로 거론된 것이다. 타카카게는 경악했다. 아키[安芸] 명문가의 피가 히데요시의 친척이라고는 하여도 기껏해야 잡병[足軽]이나 맡을 인물에게 더럽혀진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타카카게 필사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히데요시의 주치의인 야쿠인 젠소우[施薬院 全宗]에게 히데요시의 의향이 어떤지 묻자, 히데아키를 모우리에 보낸다는 건은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타카카게는 이때 자기 가문을 희생시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52만석의 영지(領地)를 킨고 츄우나곤[金吾中納言] 히데아키 님에게 물리 드리고 싶습니다"
 는 요청하였다.
 모우리의 분가라고는 하여도 코바야카와 가문은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때부터의 명문가였다. 이런 명문가가 히데아키 따위에게 더럽혀 지는 것 또한 참기 힘들었다. 더구나 타카카게에게는 이미 동생인 히데카네[秀包]를 양자로 하고 있었음에도[각주:5], 그를 분가시키면서까지 히데아키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싶다며 간청한 것이었다. 타카카게의 모우리 가문 안녕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오히로이[お拾=후의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자 양자 히데아키의 처우에 곤란해 있었던 히데요시는 타카카게의 신청에 굉장히 기뻐하였다고 한다. 타카카게에게는 은거료(隠居料)로써는 파격적인 빙고[備後] 미하라[三原] 3만석이 주어졌다.

 이보다 앞선 1593년 1월.
 타카카게는 조선에서 전군을 그 지휘하에 두고서 명(明)나라의 병력 30만을 상대로 싸웠다. 적의 대장은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던 이여송(李如松)이었다. 이 명나라 장수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를 패주시킨 기세를 타고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타카카게는 이를 격파하는 대공을 세운 것이었다.[각주:6]
 그러나 조선에 있던 중 병을 앓았고 귀국하여 미하라에서 요양을 하였지만 1597년 뇌혈관 장애로 졸도하여 일생을 마쳤다.

 참고로 코바야카와 가문은 히데아키의 대가 되어서 자식이 없어 단절되지만,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이르러 당시 모우리 가문의 당주인 모우리 타카치카[毛利 敬親]가 일족 중의 한 명에게 코바야카와 가문을 잇게 하였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 隆景)]
1533년 태어났다.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삼남. 부친 모토나리, 조카 테루모토[輝元]를 도와
츄우고쿠[中国]를 경략. 미하라[三原]를 본거지로 하여 세토 내해[瀬戸内海]에 강력한 수군을 편제하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와 강화한 후, 히데요시의 시코쿠[四国], 큐우슈우[九州], 오다와라[小田原] 정벌[각주:7]에 참가. 조선의 역에서는 1593년 명(明)나라의 대장 이여송(李如松)의 대군을 개성(開城)에서 물리쳤다. 히데요시의 양자 킨고 츄우나곤 히데아키[金吾中納言 秀秋]를 세자로 받아들였으며, 1597년 6월 20일 죽었다. 65세.

  1. 누타(沼田) 쪽이 종가였다. [본문으로]
  2. 당시 오오우치 가문[大内家]의 당주는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동생 오오우치 요시나가[大内 義長]였기에, 타카카게는 오오토모 소우린이 보낸 원군이라고 한 것이다. [본문으로]
  3. 킷카와[吉'川']나 코바야카와[小早'川']에는 내 천(川)자가 들어있기에. [본문으로]
  4. 제1차 키즈가와 강 입구의 전투[第一次木津川口の戦い]. 참고로 2차는 오다 군의 철갑선으로 복수했다는 전투이다. [본문으로]
  5. 모우리 모토나리의 9번째 아들. 모친이 코바야카와 가문의 분가인 노미 씨[乃美氏]인 연도 있어 아들이 없던 타카카게의 후계자가 되어 있었다. [본문으로]
  6. 벽제관 전투를 말한다. 여기 쓰여있는 30만을 그대로 믿으면 지는 겁니다. [본문으로]
  7.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공격한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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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증 2009.09.21 17: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 3대 지장은 시마 사콘, 사나다 마사유키, 나오에 가네츠구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로 나오는군요. 다카카게가 죽자 마사유키로 대체가 된걸까요 ㄷㄷ

五.


 얼마 안가 츠루마츠[鶴松]가 죽었기에, 히데요시는 그 비탄(悲歎) 속에서 외정(外征)의 지령을 내렸다.

 - 원숭이 녀석 죽을 장소를 잃어서 미쳤나!?

 토자마[様][각주:1]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등은 어떠한 필연성도 생각할 수 없는 이 대규모 외정에 대해 뒤에서 그렇게 욕을 퍼부었다.

 대다수 다이묘우[大名]의 마음 속도 비슷했음에 틀림이 없다. 우지사토뿐만 아닌 거의 대부분의 다이묘우는 봉토(封土)를 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영민(領民)과는 아직 친숙하지 않았고, 또한 전란(戰亂)이나 검지(地)[각주:2]로 인해 받은 상처에서 백성들은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막대한 외정의 전쟁 비용을 어떻게 조달하라는 것인가?

 '봉행(奉行) 녀석들이 부추기고 있다.'

 라는 소문이 네네의 귀에도 들어왔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봉행들이 히데요시라는 노망난 독재자에게 슬픔을 외정으로 달래라고 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하고 네네는 생각했지만, 진실을 판단하기 위한 자료를 가지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이미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라는 곳에서 멀어져 버린 것이다. 지금은 미츠나리, 나가모리[長盛], 마사이에[正家]라는 오우미[近江] 사투리를 사용하는 재간꾼들이 히데요시를 자신들의 것으로 삼아, 그 무리가 토요토미 가문 내의 대소사, 인사, 천하의 형법(刑法)과 같은 것들을 집행하고 있었다. 이 현상을 네네 주위에 있는 여관(女官)들의 여자의 눈으로 보면,

 - 요도도노[淀殿]는 요즘 권세(權勢)가 있으시다.

 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 그러했다. 근래 토요토미 가문은 오우미[近江] 사람들에게 독차지 당해 있었다. 네네가 돌봐주고 있는 오와리[尾張] 계열의 다이묘우들은 중앙에 대해서 아무런 발언권도 가지질 못하고 있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중심은 이미 키타노만도코로[政所]가 아닌 요도도노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이것이 가문 내에서 자주 화제(話題)가 되었다. 매일 네네가 듣는 화제는 모두 이것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우미 파벌에게 따돌림 당하고 있는 여러 다이묘우, 토요토미 가문의 직속 신하, 거기에 측실이나 여관들까지도 네네에게 와서는 울분이나 불만을 표하였다. 그들은 네네에게 매달리는 것 이외에 기댈 만한 곳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요도도노가 나쁜 것은 아니다

 히데요시에게 사랑 받고 있는 이 측실의 험담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네네는 이 점에 관해서만은 냉철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요도도노는 그 특출한 미모를 제외하면 어디를 보아도 평범한 자질을 가진 여성이며, 단지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다소 권세욕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나서서 정치 세력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없었다.

 만약 나쁘다고 한다면 그녀의 주위에 있는 옛 아자이 가문[浅井家]에서 온 늙은 시녀들이었다. 이 무리들이 요도도노가 츠루마츠의 [생모]가 된 것을 기회로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대항하고자 하여, 이시다 미츠나리를 시작으로 하는 토요토미 가문의 봉행들과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한편, 미츠나리 등도 요도도노를 추대함으로써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토요토미 가문의 중추에 계속 자리잡고자 하고 있었다. 그런 소위 주변 인물들이 요도도노를 정치적 존재로 만들어 가고자 함에 틀림이 없었다. 네네는 그렇게 보고 있었다. 네네가 보기에 나쁜 것은 그들이었다.

 

 네네는 마음속 깊이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저 무리들은 히데요시님이 돌아가신 다음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 상상도 하고 싶지 않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뒤 츠루마츠와 요도도노가 이 토요토미 가문의 제일 윗자리에 앉아 미츠나리 이하 오우미 파벌의 다이묘우를 측근으로 거느린다. 자연히 키타노만도코로는 후퇴하고 그녀를 의지하고 있던 창업(創業)의 공신들은 힘을 잃어 갈 수밖에 없다. 네네는 그래도 상관 없지만 오와리 출신자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꿈에서도 신음 소리를 낼만한 미래상일 것이다. 물론 일이 일인만큼 모두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을 뿐, 누구도 이 두려운 미래에 대해서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1592 4.

 외정군은 조선에 상륙하였다.

 제1군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2군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를 선봉으로 하여 각지의 성을 함락, 앞을 다투며 북상하였다.

 당초는 파죽지세라 할만 했지만, ()나라의 대군이 정면의 적이 됨에 따라 진공(進攻)은 정체되고 각지에서 부대가 고립되어 때로는 고전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또한 유키나가와 키요마사는 사이가 나빠 서로 돕기는커녕 무엇이건 서로 으르렁거렸기에, 상대방도 그것을 알고 거기에 파고들어서는 반격하였고, 이 때문에 아군의 작전에도 자주 차질을 빚었다.

 

 이런 종류의 사태를 조절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관으로 히데요시는 군감(軍監)이라는 자신의 대리인을 파견하였다.

 후쿠하라 나오타카[福原 直高], 오오타 카즈요시[大田 一吉] 등 작은 영지(領地)의 다이묘우들이었다. 이들은 전부 오우미 파벌이었으며, 그런 군감의 총책이라고 할 만한 존재가 이시다 미츠나리였다. 미츠나리는 조선에 상주(常駐)하지는 않고 전선을 시찰하고서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는 히데요시의 곁에서 현지의 군감들이 보내오는 보고서를 정리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이런 군감단(軍監)의 면면들은 이시다 당()이었기 때문에 유키나가에게는 좋고 키요마사에게는 냉엄했다. 때로는 키요마사의 언동을 무뇌아처럼 보고하였다.

 예를 들면 평화 교섭 단계에 들어갔을 때, 키요마사는 토요토미의 성()을 하사 받지 않았음에도 명나라 사자에게 보낸 공문서에 '토요토미노 키요마사[豊臣 ]'라고 서명하였다고 보고되었다. 또한 명나라 사자에게

 

 "당신들 대명인(大明人)은 코니시 유키나가라는 자를 일본국의 무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저것은 무사의 무자도 모르는 사카이[堺]의 상인(商人)이다. 겁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키요마사의 언동이 조선에 있는 군사들을 혼란 시키며, 적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보고를 히데요시는 준공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받았다. 히데요시는 분노하여 키요마사라면 그럴 것이다, 곧바로 불러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바로 급사(急使)가 조선으로 건너가 키요마사에게 그 뜻을 전하였다.

 키요마사는 자신의 군단을 전선에 남겨두고 장교 50, 일반 병사 300명이라는 적은 수의 병사를 데리고서는 부산에서 배를 타고 세토 내해[瀬戸海]를 거쳐 오오사카[大坂]에 직행한 후 후시미에 도착했다.

 

 히데요시는 알현을 허락하지 않았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라도 내알(內謁)할까 생각하였지만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고 있는 몸이기에 그것도 불가능하였다. 키요마사는 여장(旅裝)도 풀지 않고, 오봉행(五奉行)의 한 사람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의 저택을 방문하여 성안의 사정을 듣고자 하였다.

 

 지부쇼우[冶部少=미츠나리]놈이 꾸민 참언(讒言), 덫일 것이다. 필시 그럼에 틀림이 없다

 

 고 키요마사는 굉장히 화가 났는지, 나가모리가 한마디의 설명을 하기도 전부터 고개를 흔들어대며 소리를 질렀다.

 군감(軍監)의 면면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후쿠하라 나오타카는 미츠나리의 친척[각주:3]이며, 오오타 카즈요시, 쿠마가이 나오모리[能谷 直盛], 카키미 카즈나오[垣見 一直] 등은 모두 미츠나리에게 알랑거린 덕분에 출세해 온 오우미[近江] 파벌 사람들로 당연 자신들의 파벌인 유키나가를 옹호하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고 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지부쇼우놈의 목을 뽑고 자신도 죽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나가모리는 서둘러 진정시킨 후,

 

 지금에 와서는 지부쇼우의 권세에 견줄 만한 자가 없네. 그러한데 무슨 말을 하시는 겐가? 그와 화해를 하시게. 하지 않으시면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일세. 우선 그 화를 가라앉히게. 졸자가 자리를 주선할 테니 내일이라도 지부쇼우와 만나시게

 

 라고 말하자, 키요마사는 무가의 신이시여!! 라고 갑자기 방바닥을 치며 노성(怒聲)을 터뜨리고는,

 

 신불(神佛)도 굽어살피소서.

 그자와는 평생 화해 따위 하지 않겠소. 졸자는 조선팔도에 쳐들어가 수십 번 싸워 대명(大明)도 물리치고 추위와 더위를 참았으며, 때로는 굶주림도 겪었소이다. 그에 비해 지부쇼우놈은 편안하게 성안에 있으면서 더구나 히데요시 전하의 총애를 내세워 우리처럼 전쟁터에서 일하는 자들을 멸하려 한다. 그렇게 좆 같은 녀석들하고 우리들이 화해를 할 수 있을까? 할 수 없소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모처럼 둘의 사이를 좋게 하고자 했던 나가모리도 발을 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가 1596 1월이었다. 그대로 아무런 추가조사도 없이 키요마사는 근신을 명령 받아 후시미[伏見]의 자택에 유폐 당했다. 이후 아무런 기별도 없었다.

 

 이보다 1년 반 전에 요도도노의 배에서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 때문에 이때까지 토요토미 가문 후계자였던 히데츠구[秀次]의 영향력은 저하되었다. 히데츠구는 앞날에 불안을 느끼고 난행(亂行)을 계속 저질렀기에 토요토미 가문은 그 정권이 성립된 이래 가장 어두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이미 왕년의 똑똑한 인물이 아니어서 사람이 변한 듯 노망이 나, 생각하는 모든 것이 히데요리의 앞날에 대한 것뿐이었고, 그 설계를 미츠나리 등에게 연구시켰으며, 미츠나리 등도 이 토요토미의 천하가 무사히 히데요리에게 상속되는 것만을 연구하여 히데요시에게 헌책하였다. 곧이어 히데츠구는 죽음에 이르지만, 이 키요마사가 귀국했을 때까지만 해도 아직 히데츠구는 살아 있었다.

 

 사실 미츠나리는 키요마사에 관한 놀랄만한 풍문이 조선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군감(軍監)의 보고로 알고 있었다. 명나라 쪽에서 키요마사의 무용을 두려워하여 그를 자기네 편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1593 5.

 키요마사가 울산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을 때, 명나라는 장군 유정(劉綎)을 통하여 키요마사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때 유정이 보낸 사자(使者)의 입으로,

 

 "히데요시가 지금 일본 60여주를 다스리고는 있지만, 영걸(英傑)이라고 하여도 수명의 길고 짧음은 예측할 수가 없다. 그가 죽은 후 일본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또한 아무리 히데요시가 장수를 한다고 하여도 그는 당신을 미워하여 당신이 공적을 세우는 것을 싫어한다."

 

 고 말하게 한 후, 유정의 자필 편지를 키요마사에게 전하였다. 그에 따르면,

당신은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지만 일개 지방관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때가 되어 우리에게 온다면, 나는 맹세코 대명 황제 폐하에게 말씀을 올려 당신이 대관(大官)에 봉해지도록 보증을 서겠다. 어째서 이 좋은 일을 하지 않으려는 건가?
 라고 되어 있었으며, 또다시 사자의 입으로 넌지시 명나라와 힘을 합쳐 히데요시에게 반격을 하자고 암시하였다. 단 키요마사는 종군승에게 글을 쓰게 하여 이것을 거부하였다. 그 편지 속에서,

물론 당신이 말하고 있는 대로 나는 한가한 무리들에게 무고를 받고 있다[각주:4]. 그러나 나는 태합(太閤=히데요시)의 충신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다.

라는 말을 덧붙여 보냈다.

 

 어쨌든 이렇게 명나라와 키요마사가 주고받은 편지의 대략적인 내용은 미츠나리의 손에 들어와 있어, 이 건에 대해서는 아무리 미츠나리라도 히데요시에게 보고하는 것을 주저케 하여 자신의 선에서 뭉갰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다른 측면에서 이것을 처리하였다. 키요마사가 이 이상 조선에서 큰 공을 세우는 것은 다음 세대인 히데요리에게 있어서는 좋지 않을 것이다. 외정(外征)을 하러 나간 장군이 무훈(武勳)을 세워 거기서 강대한 세력을 얻을 경우, 반대로 그 무력이 중앙 정권을 위험하게 하는 것은 멀리 당()나라의 현종(玄宗) 황제를 배신한 안록산(安祿山)의 예까지 갈 것도 없이 바로 가까이에 히데요시라는 예가 있었다.

 

 오다 가문[織田家]츄우고쿠[国] 방면 사령관이었던 히데요시가 거기서 노부나가[信長]의 급사를 듣고 병사를 되돌려 미츠히데[光秀]를 물리치고는, 그 무력으로 오다 가문의 남겨진 자식들을 압도하여 토요토미 정권을 세웠다. 키요마사에게 그 정도의 야심이나 정치력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 무훈을 더욱 키워줄 필요가 없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죄를 만들어 전쟁터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네네는 거기까지 이 사태의 진상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으며 알 필요도 없었다. 네네는 단순하면서도 직선적으로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네네가 보기에 미츠나리는 네네를 보호자로 하는 오와리[尾張] 파벌의 무장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움으로써 네네의 날개를 꺾어 요도도노 모자(母子)의 권세를 강화해 가려고 하고 있을 것이다.

 필시 그럴 것이다

 네네는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키요마사를 구할 방도가 없어 시간만 보내었다. 키요마사는 반년간 유폐 생활을 하였다.
  1. 여기서는 직속 부하가 아니라 나중에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거나 군문에 들어온 다이묘우[大名]를 지칭. [본문으로]
  2.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그 전보다 더욱 많은 양을 내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불만이 많았다. [본문으로]
  3. 미츠나리 여동생의 남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4. 예기(禮記)의 태학(大學)에 이르길 ‘소인은 한가하면(할 일이 없으면) 좋지 않은 짓을 하려고 한다(小人間居爲不善)’는 부문에서 따 온 것 같다…. 아마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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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08 12: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침묵'에서도 나와있는 내용이더군요.. 기가막힌 천재지변이 구해주지 않았다면야(-_-...좀 네타려나..,)

    아무튼 키요마사는 상당히 인물은 인물이었던듯.. 이모저모에서 두려워했던걸 보면.. 혁신에서는 좀 과소평가된 느낌이 없잖아 들더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08 19: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센구미(新撰組)의 콘도우 이사미(近藤 勇)도 가장 좋아했던 인물이라니까요.
    코에이의 게임에서라면... 확실히 내정치가 너무 낮은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내정에 관한 것은 더 주어도 괜찮을 것 같더군요.

  3. 이노센스 2010.02.13 2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요마사가 외친 신의 이름은 다시 원문을 확인해봐야하지만 무가의 수호신인 '하치방 대보살'일 겁니다. 시바 료타로의 다른 소설 [세키가하라]에서도 그러하거니와 가마쿠라 이래의 무사들은 궁시의 신인 하치방 대보살에게 승전을 기원하거나 맹세를 걸고는 했습니다. 만약 아니라면 '비사몬텐'이나 '마리지텐'일 수도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2.22 0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문은
      "神仏も照覧あれ"...로 시작합지요.

      글쎄요... 어느 신에게 빌었을지... 소설에서 나오는 글 가지고 너무 단정지어서 말씀하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요?

      키요마사는 법화종의 신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経)이라 쓰인 깃발을 애용했다고 합니다. 만약 하치만대보살이나 비사문천, 마리지천을 믿었다면 그 쪽 깃발을 애용했겠지요.

二.


 어쨌든 이야기를 되돌리자.

 삿사 나리마사가 히데요시에게 죽음을 언도 받은 것은 1588년 윤5월로, 이 때문에 히고[肥後]는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다. 이 나리마사의 후임으로 누가 임명 받을까 하는 것이 성중(城中)의 화제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織田家]의 일개 방면군 사령관이라는 신분에서 갑자기 천하를 손에 넣었다. 때문에 에도 막부를 세우게 되는 토쿠가와 가문[家]과는 달리 그를 따랐던 부하들 중에 쿠니모치 다이묘우[ 大名][각주:1]가 될 정도의 기량이나 경력, 가문의 격()을 가진 자가 적었다. 그렇기에 이런 경우 싹수가 보이는 젊은 직속 가신 중에서 발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누가 좋을까?

 

 히데요시는 침묵을 사랑하지 않았다. 이런 중대한 사안일수록 마치 노래라도 부르는 듯이 나불대면서 하였다. 그것을 듣고 네네 아니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라고 해야만 할까 – 가 곧바로,

 

 “토라노스케[虎之助]야 말로 적임자겠죠”

 

라고 말하였다. 토라노스케라는 것은 키요마사[正]의 통칭이었다.

 키요마사라는 젊은이는 히데요시의 모친 나카(오오만도코로[大政所])의 친척으로, 키요마사가 5~6살 때 히데요시는 키요마사의 모친에게 양육을 부탁 받았다. 히데요시는 흔쾌히 수락하여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부엌 밥을 먹이며 키웠다. 네네가 타진 옷을 기워준 적도 있었으며, 여름이나 겨울에 입을 것도 네네가 걱정하였고, 심한 장난을 야단도 치며 때린 것도 네네였다. 키우느라 들였던 노력이 그대로 네네의 애정으로 바뀌어 있어, 그녀에게 키요마사 만큼이나 귀여운 무장은 없었다. 곧이어 꼬꼬마 코쇼우[小姓]가 되었고 이어서 불과 15살의 나이에 170석을 받는 몸이 되었으며,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세운 공으로 인해 3000석을 받는 신분이 되었다. 키가 6척을 넘어[각주:2] 전쟁터에서는 위풍당당하였으며 또한 장재(將材), 무략(武略)도 있는 듯 했다. 거기에 네네의 눈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도 귀염성 있는 성격이었다. 지금 이 젊은이에게 토요토미 가문이 은혜를 베풀면 언젠가 그 은혜를 반드시 갚으리라.

 

 아직 어려~”

 

 히데요시는 거부하지는 않고 중얼거렸다. 3000석의 직무밖에 경험하지 못한 26살의 젊은이를 갑자기 거대 다이묘우로 삼는 다는 것이 좀 그렇다는 의미였지만, 그러나 갑자기 정권을 얻은 토요토미 가문이었기에 뭐든지 속성(速成)으로 해야 했다.

 

 괜찮겠지

 

 라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키요마사로 하겠다

 

 고 마음 정한 후, 히데요시는 이 인사(人事)에 자신의 장대한 다른 구상을 결부시켜 화려함을 더하게 하였다. 다른 구상이란 언젠가 대명(大明)을 공격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대명 정복이라는 것은 히데요시가 아직 오다 가문의 방면군 사령관이었을 즈음부터의 꿈으로 살아있는 동안 이 꿈만은 실현하고 싶어했다.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당시 히데요시가 히메지 성[城]에서 아즈치[安土]로 가서 노부나가에게 인사를 올렸을 때 반은 농담삼아,

 

 큐우슈우[九州]를 하사해 주시면 그 곳의 병사들을 이끌고 가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히데요시가 큐우슈우라고 말한 것은 대명(大明)으로 바다를 건너가기에 편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히고[肥後]는 큐우슈우에서도 온 지역에 미전(美田)으로 가득 차, 일본의 어느 지역보다도 많은 병사를 기를 수 있었다. 더욱이 히고 사람들은 그 지역에 있던 키쿠치 씨[菊池氏][각주:3] 이래 용감하기로 유명했다. 이 지역을 키요마사에게 하사하면 어떻게 될까? 히데요시 휘하에서 토라노스케 키요마사 만큼이나 외정(外征) 선봉대장에 어울리는 남자도 없었다. 히고[肥後]의 경제력은 그 과중한 군역(軍役)에 견디기에 충분했으며, 키요마사 정도의 남자가 히고 병사를 이끌고 가면 대명(大明)의 병사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반국()을 주자

 

 히데요시는 말했다. 히고의 반이라고 하여도 25만석이여서, 3000석인 키요마사의 신분에서 말하면 기절할 정도의 출세였다.

 

 키요마사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히데요시의 큰 은혜를 느끼는 한편 그보다도 더 깊은 감정으로 자신의 양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키타노만도코로의 따스함을 느꼈다. 어린 아기가 막 목욕을 끝낸 모친의 향기를 맡고 싶어하는 듯한 기분과 같은 것이 언제나 키타노만도코로에 대한 키요마사의 마음 속에 있었다. 키요마사에게 표면적인 주인(主人)은 히데요시였으며, 감정상의 주인은 키타노만도코로였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머지 반국 24만석은 야쿠로우[弥九朗]에게 주기로 하였다. 사이 좋게 지내라

 

 라는 말을 히데요시에게 들었을 때, 키요마사는 얼굴을 숙여 절을 하면서도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저 약방(藥房) 출신의 야쿠로우 놈과……’

 라는 생각이 들자 히데요시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키요마사는 무공(武功)이 있어야만 값어치가 있다는 소박한 가치관을 신봉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보호자인 키타노만도코로의 가치관과 일치하였으며, 가치관이 일치하였기에 그녀는 키요마사를 사랑하였으며 키요마사도 그녀를 따를 수 있었다. 그런 키요마사에게 히데요시의 인사(人事)는 이해할 수 없었다.

 

 코니시 야쿠로우 유키나가[小西 弥九朗 行長]는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방면군 사령관으로 츄우고쿠[国] 공략을 하고 있을 때 주워온 남자였다.

 임기응변에 뛰어났고 외교 감각이 있었기에 히데요시는 그를 부하로 삼아 하급 참모장교로써 여러 곳에서 부렸다. 또한 유키나가의 부친인 사카이()약종상(藥種商) 코니시 쥬토쿠[小西 寿徳]나 형인 죠세이[清]도 가신으로 삼아 행정을 맡기거나  경리(經理)를 담당시키는 등 총애하고 중용하였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손에 넣자 키요마사와 같은 야전(野戰), 공성(攻城)의 군인보다도 유키나가처럼 경제를 보는 눈이 있는 정략가(政略家) 쪽을 중용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참고로 상인(商人)인 코니시 일족은 사카이[]에서 오오사카[大坂]에 걸쳐 번영하였지만, 유니나가의 코니시 가문은 그 일족 중에서도 중급 정도의 위치에 있는 가문이었기에 그쪽 방면에서도 명문가(名門家)라고 할 수 있을 정도도 아니었다.

 

 약종상이라는 가업 상 대대로 조선 무역에 숙지(熟知)하여 유키나가도 몇 번인가 바다를 건너 간 적이 있어 조선의 지리나 정세에 밝았고 거기에 조선말도 할 줄 알았다. 그 점이 히데요시에게는 매력이었다. 언젠가는 대 조선 외교를 담당시키고 싶었고, 막상 조선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키요마사와 함께 선봉대장을 맡기고 싶었다. 키요마사의 무용(武勇)에 유키나가의 기략(機略)과 해외 지식이라면 원정군에게는 범에 날개를 단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키요마사는 이해 할 수 없어,

 결국 이런 것이겠지

 라는 편견만으로 사태를 보았다. ()로 공적을 세우지 못하여도 성 안의 방바닥에 앉아서 손바닥이나 비벼 히데요시의 비위를 맞추는 무사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자보다 중용되어 가는 세상이라는 생각이었다. 더구나 그 성 안의 무리들이 토요토미 정권의 중추(中樞)에 들러붙어 강고한 단결심을 보이고 있었다. 재자(才子)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당수격(黨首格)이 되어 오우미[近江]계의 관리들을 다스렸으며, 코니시 유키나가도 그 계열에 속해 있었다.

 

 먼 곳에 가면 어찌 될지……’

 라는 걱정이 당연히 키요마사에게는 있었다. 키요마사는 성 안의 무리들을 미워했고 또한 소원(疎遠)했기에, 중앙에서 말도 안 되는 참언(讒言)을 당하기라도 하면 삿사 나리마사와 같이 부임 후 영지(領地) 몰수 이어서 할복이라는 운명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 나리마사가 만약 성 안의 무리들과 친했다면 중앙의 무마가 먹혀 들어 그런 비운의 결말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키나가는 미츠나리와 사이가 좋다. 이런 점에서 잘 해나갈 것임에 틀림 없다

 라는 그 하나만이 키요마사를 신경 쓰이게 하였다. 이 때문에 봉지(封地)로 떠나기에 앞서 키타노만도코로를 배알(拜謁)하여,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이라고 마치 하소연이라도 하는 듯이 아뢰었다.

 

 저는 그 약방놈하고 사이가 나쁘옵니다. 한 나라() 50만석을 둘로 나누어 각각 통치하는 이상, 당연 분쟁도 일어나 서로간의 기분도 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약방놈은 지부쇼우유우[冶部少輔 = 미츠나리]를 통해서 주군에게 졸자(拙者)를 참언 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때는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해주시옵소서... 라는 것이 키요마사의 바램이었으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키요마사가 앞날을 우려하는 것 - 이것을 그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이상으로 같은 걱정을 하는 사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그녀 자신도 키요마사와 같이 요즈음의 문치 중시로 치우친 토요토미 정권에 은근히 분노를 느끼고 있어 미츠나리나 유키나가와 같은 무리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안심하시고 떠나십시오.

 

 라고 그녀는 키요마사에게 말했다. 언제나 말이 명쾌한 것이 그녀의 특징이었다. 이 변함없는 시원시원함을 접하여 키요마사는 얼굴 표정까지 밝아져 들뜬 마음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명쾌하게 말했던 만큼 기분이 밝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키노시타 성[木下姓]이었을 즈음부터 그녀의 내조(內助) 없이는 히데요시의 공()을 말할 수 없었다. 인사(人事)의 상담도 하였고, 밖으로 원정을 나간 히데요시를 위해서 오다 가문과의 사교(社交)에도 힘썼으며, 가문 내의 정세도 조사하여 정리해서는 히데요시에게 알려주었고, 또한 일가의 가계를 꾸려나가는 한편, 부하들의 뒤도 잘 돌봐주었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히데요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 성주였던 하시바 성[羽柴姓]시대에도 그러했다. 이 시기의 히데요시는 츄우고쿠[国] 방면에 나가 있어 거의 부재였기 때문에 사실상의 성주는 그녀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에 그녀가 했던 그런 역할을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행정관[奉行]들이 하고 있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시스템이 정비됨과 동시에 그녀는 그 역할에서 실직(失職)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 힘도 소멸되었다.
 
예를 들어 키요마사가 참언 당했다고 하여도 그것을 처리하는 미츠나리 등의 행정기관에 그녀는 아무런 힘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보호해 줄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1. 한 나라(国)를 소유할 정도의 거대 다이묘우. [본문으로]
  2. 1척 = 약 30.3cm 따라서 180 이상. [본문으로]
  3. 예전부터 많은 무용을 남겼다. 도(刀)가 주류였던 일본의 전쟁에 창[やり(槍)]를 발명하여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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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08 1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이라도 있었다면 키타노만도코로가 그렇게까지는 마음쓰진 않았을 듯 싶은데.. 도요토미 가문에 적자가 없다는건 치명적인 약점이었군요.. 재능 있는 사람들의 구심점이 없다는 것음 참.. (세키가하라를 보면..-_-;)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9 1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교적인 권선징악에 따른 올바른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나라 시선에서 보면요 ^^)

.

 

 다음 해인 1598 4.

 히데아키[秀秋]는 귀환 명령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키요마[清正] 이하 수비군을 전장(戰場)에 남겨둔 채 후시미[伏見]개선(凱旋)하였다. 히데아키는 전쟁터에서 얻은 햇볕에 멋지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시기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멋진 때였을 것이다. 출발할 때는 아직 공사 중이었던 후시미 성[伏見城]은 완성되어 있었다. 히데아키는 가슴을 펴고 입성하여 히데요시를 배알(拜謁)하였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히데요시[秀吉]의 노성(怒聲)이 머리 위로 쏟아진 것이다.

 히데요시는 울산성 구원 때 히데아키가 졸병들과 함께 창질이나 한 것에 땅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며,


  나는 너 같은 놈을 상장(上將)으로 삼을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까지 말하여 히데아키의 공적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뭔 일이래

 처음엔 멍했다. 이어서 이거야 말로 조선에 있는 여러 장수들 모두가 원망하고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참언(讒言)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히데아키는 천성이 소심한 탓인지 격앙()하여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말을 더듬었다. 더듬은 탓인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그것이 양아버지였으면서 이모부를 공갈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렇지 않아…아니…않사옵니다. 전하는 트린 틀린 보고를 받으신 거다 아니 겁니다.”

 

 라고 외치곤,

 

 그렇다면 여기에 감찰관들을 불러 주십시오. 그 지부노쇼우[冶部少=미츠나리] 놈도 불러주세요. 전하의 앞에서 흑배 아니 흑백을 가릴 테니

 

 니 뭔 말을 한다냐?”

 

 히데요시도 오와리[尾張]의 사투리로 히데아키보다 더 큰소리를 질렀다. 큰 소리에 비해 히데요시는 이미 (老衰)해 있어 그 쇠약함에는 죽음의 그림자 조차 드리워져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한때 역사를 창조했던 그의 이성(理性)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고, 단지 감정(感情)만이 그의 몸을 가늘게 흔들고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선 이 괴이한 소년을(이라고는 해도 21살이었지만) 귀족으로 만들어 주며, 거대 다이묘우도 만들어 준 것도 모두 자기 자신이었다. 그런 은혜를 망각하고 이 늙어 살 날 얼마 남지 않은 노인에게 큰소리 치며 공갈을 하다니 이 무슨 배은망덕이란 말인가.

 

 히데요시는 혓바닥을 잃어버린 듯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슬픔과 분노가 그를 지배하여 호우(설명, 그림) 속에서 떨었다. 히데요시가 이런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원래 말이 많았으며 재치가 뛰어났고, 너무나도 풍부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던 히데요시는 - 그런 점에서도 지금까지의 히데요시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무 말 않은 채로 자리를 차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자리에 들겠다

 

 히데요시는 시중드는 신하에게 그리 말했다. 먼젓번에는 몸이 쇠약한 나머지 잠자리에서 오줌을 지려 몸이 오줌으로 적셔진 적도 있었다. 오늘의 히데요시는 잠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분했고 불안했다. 저 배은망덕한 놈이 히데요리를 보호하기 위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니, 이 상태로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히데요시는 히데아키의 처분을 새삼 결심하였다.

 

 한편 히데아키는 아직도 성안에서 큰소리를 질러대며 히데요시의 측근들에게 욕설을 퍼부는 식으로 지랄하고 있었다. 미츠나리를 이리 내오라~ 고 하였다.
 그
미츠나리가 나왔다.

 

 킨고님 부르셨습니까?”

 

 미츠나리는 양 눈을 똑바로 쳐들고, 히데아키의 시선을 받아들이며,

 

 히데아키님의 지금 상태로는 히데요시님의 분노가 당장 풀릴 것 같지가 않사옵니다. 나중에 히데요시님의 기분이 풀리시면 다시 한번 자리를 만들겠사오니 오늘은 일찍 자택으로 돌아가시옵소서

 

 라고 조금도 떨림 없이 말했다.

 

 ……지부쇼우!!”

 

 히데아키는 작은 [脇差]의 칼자루를 쥐고 달려 들었다. 진짜로 벨 생각이었다. 하지만 스승이며 가로(家老)인 야마구치 겐바노카미 마사히로[山口 玄蕃頭 正弘]가 제지했다. 그 손을 히데아키는 떨쳐버리고서는,

 

 네 놈도 저 지부쇼우와 한 편이냐?”

 

 라고 소리질렀다. 이 폭언에는 아무리 마사히로라도 참을 수 없어, 이 일이 있은 뒤 히데요시에게 청하여 스승 겸 가로의 자리에서 물러나, 그의 영지(領地)카가[加賀] 다이쇼우지 성[大聖寺城](6만석)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이때 부속 가로인 스기하라 시게마사[杉原 重政]가 지랄하는 히데아키의 등 뒤에 매달리며 말렸다. 그러는 사이 이러한 소동을 알현(謁見)에 동석하고 있던 토요토미 가의 대로(大老)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었다. 곧이어 일어서서는,

 

 킨고님, 졸자는 성을 나서려 합니다. 함께 나가시지요

 

 라고 조용히 말하자, 히데아키는 일종의 위압감에 굴복했는지 분노에 부들부들 떨던 몸이 일순간에 멈추어지며 얌전해졌다. 이 광경은 익살스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이 즈음 무게감있고 의지할만한 장로의 풍모로 토요토미 가문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자신의 뱃속은 히데요시가 죽은 뒤 반드시 올 것인 정변(政變) 만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예전부터 키타노만도코로[政所]에게 신뢰를 받고 있었던 운도 있기에, 키타노만도코로를 통해 그녀를 따르는 다이묘우[大名]들의 신뢰를 얻고자 틈만 나면 은혜를 팔려고 하였다. 히데아키는 어리석다고 하여도 52만석의 거대 다이묘우이며, 키타노만도코로의 조카이기도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에야스는 이 젊은이에 대해서 과분할 정도의 친절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는 이에야스에게 껴안기 듯 성을 나왔다. 자택에 돌아가 술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3~4잔 정도로 숨 쉬는 것을 괴로워할 정도로 취했다. 원래 이 남자는 술에 약했다.

 자택에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에게서 히데아키에게 사자(使者)로 코우조우스[主]가 파견되었다. 코우조우스에 대해서는 제 1 [살생관백]에서 언급하였다. 토요토미 가문 가정 내의 것들을 다스리는 여관장(女官長)이다. 히데아키는 토요토미 일족의 예우를 받고 있었기에, 사자도 딱딱한 관리가 아닌 토요토미 가문의 여관장이 맡았다. 히데츠구의 쥬라쿠테이[第]에서 물러나게 설득한 것도 이 비구니였다. 사람됨이 둥글둥글하여 누구에게나 경애 받았다. 그 비구니가 토요토미 가문의 두 양자인 경우에는 2번 다 저승사자가 되었다. 비구니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치쿠젠[筑前]과 그 외의 영지(領地)들은 몰수 되었습니다. 어여 빨리 에치젠[越前]으로 옮기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외치려 하였다. 하지만 말문이 막혀 입만 뻐끔대며 숨이 거칠어 졌다. 코우조우스는 이런 모습에 두려움을 느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도망치고자 하였다. 하지만 히데아키가 비구니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봐~ 내는 죄가 없다

 

 전하의 말씀이십니다. 얌전히 따르시는 것이 신상(身上)에 좋습니다

 

 죄가 어없단 말이다. 그런데

 

 히데아키의 뇌리에, 형 뻘이었던 히데츠구와 그 처첩들의 비참한 최후가 떠올랐다.

 도 죄라고 하던 모반의 사실 등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가 되어서야 그것을 알았다.

 

 나를 죽여라

 

 라고 외쳤다. 미친 것은 아니었다. 히데아키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금이 가장 냉정하다고 생각하였다.

 

 죽여 주길 바란다. 살아 있는 동안은 전하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에치젠[越前]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죽음을 내리신다면 더 이상 명령에 따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구니! 그렇게 전해주게. 차라리 이 킨고[金吾]를 죽이라고

 

 코우조우스는 도망치듯이 저택을 나왔지만, 그러나 이런 상태로 성으로 돌아가 아까 본 모습을 보고할 순 없었다. 곤란한 나머지 타고 있던 가마를 재촉하여 큰 길의 서쪽으로 가 이에야스의 저택으로 향했다. 이에야스에게 구원을 청하고자 한 것이다.

 

 어찐 일이신가?”

 

 이에야스는 잘 여문듯한 볼에 미소를 만들며 말했다.

 

 킨고님에 대한 것입니다

 

 킨고님?”

 

 킨고님은 어릴 때부터 성질이 사나워 한번 신경을 폭발시키면 우리들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사옵니다

 

 라고 히데아키의 상태를 고한 뒤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야스는 수긍하여 부하에게 구두로 계책을 알려 코바야카와[小早川] 저택으로 보냈다. 이에야스의 계책은,

 

 신상을 위해서입니다. 우선 이봉(移封)을 받아들이십시오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히데아키는 치쿠젠[筑前]에서 곧바로 옮기지 말고, 또한 중신들도 옮기지 않으며, 우선은 부속 다이묘우[大名]의 부하들이나, 신규 채용한 부하들을 몇 명씩 에치젠[越前]으로 보내십시오. 한줄 요약하면 옮기는 척만 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버는 동안 졸자(이에야스)가 어떻게든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 전하에게 부탁하여, 명령을 철회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이에야스의 이치에 맞는 더구나 마음이 담긴 조언에는 히데아키도 감격하여,

 

 어떻게든 잘 부탁 드립니다

 

 라고 모든 것을 맡겼다.

 

 다음 날 이에야스는 등성하여 누가 보아도 급한 일이 있는 듯이 히데요시에게 내알(內謁)을 청했다. 히데요시는 자리로 나왔지만 이에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불쌍한 척을 하며 눈을 내리깔고 침묵하였다. 그 후 두 마디 정도 날씨나 계절에 관한 이야기를 한 후 물러났다.

 다음 날도 똑같이 내알을 청하였고 그러나 역시 똑 같은 짓을 하였다. 3일째도 그러했다. 히데요시는 수상히 여겨,

 

 나이후[内府=이에야스]께서는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은데?”

 

 라고 물었다. 히데요시는 항상 이에야스에 대해서만은 부하라기 보다는 손님의 예를 취하여 다른 제후와는 다른 말씨를 사용했다.

 이에야스는 애처로운 미소를 지으며,

 

 킨고 츄우나곤님에 대한 것입니다. 어떻게든 해 드리고 싶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알현을 청하였으면서도 막상 말할 때가 되면 전하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은 듯하여 이렇게 말씀도 못 올리고 있습니다.”

 

 ~ 그일 때문인가

 

 히데요시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 그 후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에야스는 굳이 말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났다. 다음 날도 성에 올랐으며 또한 그 다음 날도 알현하여 끈질기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왜 그러신가? 아직도 킨고 때문에 고생하고 계신가?”

 

 몇 일 지나 히데요시는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이에야스의 대답은 먼젓번과 같았다. 히데요시는 결국 참지 못하고,

 

 히데아키의 죄는 명백. 그러나 처분에 대해서는 나이후에게 맡기겠소

 

 라고 말했다. 이에야스는 희열에 찬 표정을 만들어,

 

 그렇다면 토요토미 가문의 먼 장래를 위해서 좋은 계책을 내 놓겠습니다.”

 

 고 절을 하며 대답했다. 히데요시는 그 말 만으로도,

 

 아아~”

 

 하고 눈물을 흘리며,

 

 나이후의 그 말 한마디. 부처님의 목소리처럼 성스럽게 들렸습니다. 부탁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부탁 드리겠다는 말은 히데아키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히데요리를 말한 것이다. 히데요리를 위해서 히데아키의 처분을 잘 해주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성을 나와 자택에 코바야카와 가문의 가로들을 불러 모아 히데요시의 말을 전했다.

 모두 이에야스의 호의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또한 이에야스는,

 

 나는 공의(公儀=정부(政府))의 대로(大老)로서 킨고님의 처분을 행하게 되었다. 본심을 말하자면 영지(領地)에 대해서는 예전과 같이 치쿠젠의 영지를 그대로 인정하고 싶다. 그러나 손바닥을 뒤집듯이 곧바로 그럴 수는 없다. 히데요시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송구스럽다

 

 는 것이었다. 이에야스의 처분은 세심했다.

 

 우선 각각의 자택에서 근신(謹愼)할 것

 

 이라는 것과,

 

 그 후 좋은 소식을 기다릴 것

 

 이라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이에야스가 보기에 히데요시의 생명은 길지 않을 것이다. 죽어버리면 그 뒤는 흐지부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에야스의 이 처분은 사무면에서 다소의 혼란을 만들었다. 이미 히데아키의 치쿠젠[筑前]의 옛 영토는 토요토미 가문의 직할령이 되었기에, 미츠나리 등은 코바야카와 가문에게 비우라고 재촉을 하였다. 히데아키는 다시 이에야스에게 울며 매달렸다. 이에야스는 이에 대해서,

 

 조금씩 반환하시길

 

 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코바야카와 가문은 영지(領地)를 조금씩 반납했다. 때문에 일부의 가신들은 코바야카와 가문에서 받았던 영지(領地)를 잃었기에 낭인(浪人)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낭인들이 100명 정도 생겼을 즈음 히데요시가 죽었다. 히데아키가 죄를 얻어서부터 4달이 지난 1598 8 18일이었다. 이에야스의 예상대로 히데아키는 그대로 옛 영토에 눌러앉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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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8 1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츠나리의 막장은 계속되는군요(;;;)
    -쓰던 코멘트가 다 날아가 버려서 이거야 원;;-

    코우조우스는 전하도 돌아가셨는데 어쩔련지 모르겠습니다(-_-ㄲ..)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8 2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그래서 '가끔' 다 쓰고 난 뒤 우선 Ctrl+C를 눌러 복사를 해 둡니다 ^^
    (문제는 가끔 하다 보니 어떤 때는 왕창 쓰고 난 뒤 그냥 전송했다가 날라가고 난 뒤에야,
    '아~ 왜 하필 오늘따라 복사 해두지 않았지..'하면서 후회할 때가 더 많지만 말이죠..--;)

    코우조우스는 키타노만도코로 쪽 인간이다 보니 그 후에도 잘 살았겠죠.(줄 잘 서는 것도 능력)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8 2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이 블로그에서 안전하게 코맨트를 남기려면 메모장에서 우선 써놓고 ctrl+a + ctrl+c ctrl+v 3연타를 때리는게 안전한데...

    군바리다 보니 귀찮군요(...;)

    기다리다 못해서(아.. 근성이 없어서 원;) 긴코츄나곤 뒷쪽도 좀 읽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후, 이에야스 앞에서 쭈삑쭈삣되는 히데아키를 외면하는 키타노만도코로 당 애들을 보니 참.. 한편의 블랙코메디랄까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8 2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킨고'가 맞겠지요..(이런 실수를;;)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8 2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리 읽으셨다면 저도 허투루 할 수 없으니 더 조심해서 써야겠죠 ^^

    그 애들도 우스웠겠죠. 자신들은 피를 뒤집어 쓰며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지만, 혈통으로 그 자리에 오른 킨고가 좋게는 보이지 않았겠죠.(더구나 비굴한 모습을 보았으면 더욱 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9 09: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7.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8 04: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에야스 수완이 대단하네요. 계속 찾아가서 될때까지 뚱하니 있는다ㅎㅎ

.

 양자를 보내는 측인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은 히데아키를 위해서 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하였다. 우선 양아버지인 타카카게[隆景]에 대한 답례로써 빈고[備後] 미하라 성[三原城] 3만석을 주었다. 은거소(居所)로써는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가 끼기 전에 빨리.
 
라는 식으로, 히데요시는 일이 결정된지 3개월째가 되자 히데아키를 타카카게가 머물고 있던 빈고 미하라 성[三原城]로 보냈다. 히데요시는 이 젊은이에게 될 수 있는 한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부속 가로[付家老]도 군사(軍事)에 뛰어난 다이묘우[大名] 급 부하를 둘 골라 히데아키의 무게감을 더하게 하였다. 히데아키 본인은 단지 남이 깔아 준 궤도에 타고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미하라 성에서 당주가 되기 위한 여러 의식, 행사가 끝났다. 타카카게는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집안의 어른다운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오래된 가신(家臣)들은 그런 타카카게의 표정에서 씁쓸한 그림자를 찾아내어 남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저 좆병진 때문에!’
 라는 식으로 뒷담화를 하는 자도 있었으며, 성 밑에 있는 쿄우신 사[真寺][각주:1]장노(長老) 기타츠[義達] 등도 히데아키를 배알(拜謁)한 후 몰래 일기에 적었다.

놀랄 만큼 멍청하며 또한 난폭하고 거만하다. 가문 멸망의 조짐인가? 슬프도다 슬퍼

 1597 6 12. 
 
타카카게는 66세로 죽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영토는 치쿠젠[筑前]과 그 밖의 것을 포함하여 52 2500석이라는 큰 영지(領地)였다. 그것이 히데아키의 것이 되었다.

 상속한 후 2차 조선 침공[각주:2]이 발령되어 히데아키는 새로운 운명에 태워졌다. 원수(元帥 = 총대장)에 임명된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로 대규모의 외정군(外征軍)일 경우 순수하게 군사적으로만 따지면, 총사령관은 토요토미 가문필두(筆頭) 다이묘우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 등이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불가능했다. 위대한 인물을 외정군 총사령관으로 만들면 전쟁터에서 외정군을 장악하여, 인망을 얻고, 명성을 얻어, 그 때문에 개선(凱旋) 후 국내 정치 체재를 변동시킬 위험이 있었다.
 하기는 당초 이에야스라는 안()도 조금은 나왔었다. 실제로 이에야스는 일찍이,

 졸자가 있는 한 주군(히데요시)에게 갑옷을 입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히데요시를 위해서 원정군 사령관의 직책을 맡겠다는…… 이것은 말하자면 이에야스의 아부(阿附)였지만, 그런 척을 하였다. 이번 해외 원정에 관해서 이에야스는 다른 대부분의 다이묘우가 그랬던 것처럼 속으론 반대하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적어도 한번 정도 사령관이 되겠다는 물밑 협상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진 이에야스의 가신 중 하나가 그런 식의 말을 하자, 이에야스는 속마음이 들킨 것처럼 삐쳐서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바다를 건너면 하코네[箱根[각주:3]]는 누가 지킨단 말이더냐?”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 보다 조금 전, 아이즈[津] 91만 여석의 다이묘우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죽었는데, 죽기 전에 이 조선 출병 계획을 듣고,

 원숭이 녀석! 죽을 장소를 잃어 미쳤구나

 라고 측근에게 내뱉듯이 말했다. 이것이 대부분의 다이묘우가 맘속으로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히데요시의 외정은 히데요시가 자신의 명예심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한 것으로, 제후들에게는 물질적으로 아무런 이익도 없었다. 1차 조선 침공[각주:4]으로 제후들의 영내(領內)는 피폐했다. 지금도 그로 인해 국고(國庫)가 비었다고 한다. 토요토미 가문의 인기는 이로 인해 급속도로 저하되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왕년의 자기자신과는 별개의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정세를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고, 전쟁터에 가지 않은 제후들에겐 인부와 돈을 염출(捻出)시켜, 후시미[伏見]의 다른 장소에 대규모 축성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축성은 군사상의 이유가 아니라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아직 아기에 지나지 않는 히데요리[頼]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후시미 성[伏見城]에 산다는, 말하자면 팔불출 같은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 즈음부터의 히데요시는 어떤 것을 생각하건, 모든 것이 히데요리를 위해서라는 것이 생각의 출발점이 되어 있었다[각주:5]. 원숭이놈은 미쳤다고 가모우 우지사토가 혀를 찬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킨고츄우나곤[金吾中納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여러 불운 중의 하나가, 이러한 정세 속에서 원정군의 사령관이 된 것을 포함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아키는 다이묘우[大名] 42, 총 인원 16 3천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후방인 부산(釜山)에 사령부를 두었다. 보좌역으로 쿠로다 죠스이[田 如水]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함께 하였다.
 선봉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였으며, 항상 우세를 점하기는 했지만 1차때와는 달리 사기가 오르질 않았고, 각 장수들 간에도 연락과 규율이 흐트러져, 위로는 다이묘우[大名] 아래로는 인부에 이르기까지 염전(厭戰) 기운이 팽배하여, 때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패배를 하였다.
 이런 전쟁터의 상황은 파견된 감찰(監察官)들에게서 곧바로 후시미[伏見]로 보고되었다. 이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받아 정리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1차 원정 때의 감찰관[메츠케(目付)]은 미츠나리였으며, 그는 그 검단(檢斷)적인 성격을 노골적으로 발휘하여 카토우 키요마사 이하 여러 장수들의 비리(非理)(바늘로 낸 구멍 정도의 규율 위반이었지만) 공격 대상으로 삼아 하나하나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미츠나리는 성격적으로 작은 과오, 규율을 지키지 않는 것,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전쟁터에 나간 여러 장수들은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키요마사 등은 봉록을 빼앗길 위험에 처해질 정도였다. 이번 제 2차 원정에서 미츠나리는 후시미[伏見]에 있었지만, 보고서는 모두 그의 눈을 거쳐 정리된 후 히데요시의 귀로 들어갔다.
 당연히 히데요시는 원정군의 현황이 맘에 들지 않았고, 어느 장수에 대해서건 불만족스러웠다.

 원정 10개월째에 유명한 울산 농성전이 펼쳐졌다. 키요마사는 고군분투하며 성을 지켜 4만의 명나라 군과 싸웠지만 식량이 떨어졌다. 급보를 부산의 총사령부로 날려 구원을 청했다.

 킨고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라며 쿠로다 죠스이는 히데아키의 이름으로 여러 장수들에게 군령을 보내었고, 다방면에서 한꺼번에 진격하여 적을 역포위한 뒤 크게 싸워 적의 목을 취하길 13238급이라는 대승을 거두었다. 히데아키는 처음 경험한 실전의 재미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명군 4만은 갈팡질팡하기에 바빴고 일본군은 사슴을 쫓는 사냥꾼과 같이 손쉽게 학살하고 다녔다. 히데아키는,
 
내도~’
 하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 젊은이의 성격은 자기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제지하려던 막료(幕僚)를 채찍으로 후려갈겨 물리치고 말을 몰아서 적에게 뛰어들었다. 친위대(御馬廻りの)도 히데아키를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쫓아갈 수 밖에 없었다.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며 창에 뛰어나질 못해도 좋았다. 히데아키는 미친 듯이 찔러대 13명의 적을 죽였고 자신도 피를 뒤집어 써 새빨갛게 되어서야 피로를 느끼고 이 놀이를 멈추었다.

 이 소식이 후시미에 전해졌다.
 히데요시는 울산성을 끝까지 지켜낸 키요마사를 포함한 3명의 장수[각주:6]에게 표창장을 수여하였고 구원군인 히데아키 이하 여러 장수의 활약에도 굉장히 만족하여,

 킨고도 나름 하는구나~”

 하고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히데요시는 기뻐하였다. 기분이 좋을 때의 히데요시에게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듯한 그런 인격적 매력이 아직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 기분이 몇 일 뒤에 뒤바뀌었다. 이 변화는 20세기인 오늘날에는 오히려 의학(醫學)의 영역일 것이다.

 킨고는 용서할 수 없다.”

 고 갑자기 말했다. 히데아키에 대해서 새로운 떡밥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이전과 똑 같은 보고서였지만 그 평가가 조금 바뀌어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바뀌게 된 것은 미츠나리의 의견이었다. 미츠나리는 생각하였다. 이 울산성 구원으로 히데아키의 인기가 오르기라도 하면 장래 히데요리에게 위협이 될 것이다. 히데아키의 형 뻘인 관백(白) 히데츠구[秀次]가 죽어 히데요리의 해()가 하나 줄어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히데아키. 거기에 부하로서는 너무 강대한 힘을 가진 칸토우[東]의 토쿠가와 이에야스 일 것이다. 
 
히데요리의 장래를 안전하게 한다는 것이 미츠나리가 가진 유일무이한 정치적 입장이었으며, 히데요시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미츠나리를 총애(寵愛)하여 중용(重用)하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히데요시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심 이외에도 요도도노[淀殿]와 그 자식에 대해, 풍토(風土)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오우미[近江] 북부 출신이었다. 요도도노는 예전에 노부나가에게 멸망 당한 북부 오우미의 다이묘우 아자이 씨[氏]의 따님으로, 즉 북부 오우미 사람에게는 신성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었다.
 자연히 토요토미 가문의 다이묘우 중 오우미[近江] 계열은 요도도노를 중심으로 살롱(salon)을 만들었고, 그것이 규벌(閨閥)이 되어, 요도도노가 히데요리를 낳음과 동시에 이 무리가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면에서 주세력이 되었다.

 이에 대해, 카토우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오와리[尾張] 출신들은 같은 오와리 출신의 키타노만도코로[政所]와 어렸을 적부터 깊은 인연으로 맺어져, 자연히 키타노만도코로를 중심으로 규벌을 만들고 있었으며, 이들이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하는 파벌과 적대하여 무슨 일이건 대립하였다.

 지금 조선에 건너간 장수들 대부분이 키타노만도코로 당()이었다. 이 당이 장래 히데아키를 추대(推戴)하여 히데요리에게 대항할지도 몰랐다.

 킨고님을 너무 띄어주는 것은 히데요리님을 위해서 좋지 않습니다

 미츠나리는 진언(進言)하였다. 항간에서는 칸파쿠 히데츠구의 죽음도 이 미츠나리의 참언(讒言)이었다고 믿겨지고 있었다. 미츠나리가 참언을 했건 하지 않았건 히데츠구의 몰락은 미츠나리의 정치적 견해와 히데요시의 이해(利害)가 일치되어 있었으며 그의 몰락이 히데요리의 장래를 안전하게 한 것도 틀림없었다.

 역시…… 그런가?”

 히데요시는 히데아키의 행동에 대해 미츠나리의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겼다. 전군 사령관이라는 자가 손수 창을 들고 적진으로 달려들어서는 안 되었다. 그 외에도 성격이 거칠었고 막무가내인 점도 많았다.
 
히데아키에게 벌을 내려야 하나?’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무장으로써의 마음가짐이 되어있지 않은 것이었지 도덕상의 문제이거나 법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또한 그로 인해 싸움에 진 것도 아니며 오히려 사기가 더 높아져 이겼다. 벌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벌을 내려야만 했다.
 히데아키의 행동을 살펴 보니, 양아버지인 타카카게가 정한 군제(軍制)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여, 그 때문에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의 장병들은 몹시 불쾌해 하고 있다. 타카카게는 누가 보아도 이 시대의 명장이었다. 가신들은 타카카게를 존경했으며, 이 때문에 코바야카와 가문의 병사들은 강했고 군법이 엄정했다. 그러나 히데아키가 거기에 들어간 뒤 의미도 없이 그 군제를 무시하고 있다. 죽은 양아버지를 존경하는 듯한 모습이 전혀 없었으며, 경건(敬虔)함이 전혀 없었다. 히데아키가 그러한 성격이라면, 히데요시가 죽은 후 토요토미 가문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할 것이다. '놀랄 만큼 멍청하며, 또한 난폭하고 거만하다'고 한다. 놀랄 만큼 멍청하다고 하여도 히데아카의 곁에 나쁜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라도 있으면 어떤 막되먹은 짓을 할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히데아키의 존재는 히데요리의 장래에 해가 되면 해가 되었지 결코 득이 되질 않을 것이다.

 역시…… 히데아키에게 치쿠젠[筑前] 52만석은 너무 크지

 히데요시는 말했다. 큰 영지(領地)와 많은 병사를 가진 만큼 사람들은 그를 추대하려 하겠지만 조그만 땅밖에 없다면 추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히데아키의 땅을 거두어들이고 에치젠[越前] 15만석 정도로 하자. 거기를 어디로 할 것인지 조사해 두어라

 히데요시는 미츠나리에게 그에 대한 사무를 맡겼다.
  1. 지금은 소우코우 사[宗光寺] [본문으로]
  2. 정유재란을 말함. [본문으로]
  3. 하코네[箱根 – 맵의 한 가운데 箱根山이라 쓰여져 있는 곳. 확대나 축소해 보면 대충 위치는 알 수 있다…고 생각함]는 토우카이도우[東海道]의 요충지로 오오사카[大坂] 쪽에서 칸토우[関東]로 갈 수 있는 최단 거리에 있는 곳으로, 험한 곳이 많은 천연의 요해(要害)이다. 따라서 의미적으로 ‘칸사이[関西]의 세력에게서 칸토우를 지킨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임진왜란을 이름. [본문으로]
  5. 역사상으론 히데요시가 성을 새로 지은 것은 지진으로 인해 그때까지 살던 성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또한 어린 아이를 성주로 삼는 것은, 일찍부터 아이에게 직신(直臣)을 만들어 주기 위한 방편으로 흔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2살 때 나고야 성[那古野城]의 성주가 된 것과 같이. [본문으로]
  6. 나머지 둘은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오오타 카즈요시[太田 一吉].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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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31 1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허허.. 치쿠젠 52만이 에치젠 15만석이 됐더라면야.. 세키가하라에서의 그 참혹한 꼴도 없었겠군요;

    킨고 녀석에게도 미츠나리에게 개인적으로 악감정을 품을 만도 했겠는데요..(그런데도 뭘 믿고 미츠나리는 킨고 녀석이 서군에 남을거라고 단정지을 수 있었는지-_-..)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1 17: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곳에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칸파쿠 + 카미카타(上方)에 1개국 추가... 로 꼬셨다고 하더군요.
    그리고....이 글에선 히데아키의 소령이 52만석이라고 하지만, 세키가하라 전후 얻은 것이 우키타 히데이에의 옛 영토 55만(혹은 50만석...) 카미카타에 가까워 졌다곤 하지만, 전투를 결정지은 것에 비하면 적을 것을 보면, 다른 곳에서 말하듯이 이 때는 33만 여석 근처가 아니었을지...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2 1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적어도 일본 위키를 보면 52만석...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군요.(ㅁㅎㅎ)

    &amp;#24499;川家康 (&amp;#38306;東に256万石)
    前田利家 (加賀など83万石)
    宇喜多秀家(吉備東半57万石)
    毛利輝元 (吉備西半&amp;#12539;安芸など120万石)
    小早川隆景(筑前33万石)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2 1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なお小早川隆景死後、上杉景勝(&amp;#20250;津120万石)が大老となり、前田利家死後、嫡子の利長がその地位を&amp;#32153;いだ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02 19: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바야카와 석고가 의외로 적었군요. 뭐, 많은편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모리 종가에 비하면..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kelt200 BlogIcon 깃쨩 2008.01.03 02: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
    히데아키의 그릇이야 그렇다지만 다른 소설속에서의 미츠나리는 음모에 능하고 째째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 같기도..
    반면 요즈음 評도 그렇고 葵&amp;#24499;川3代였던가? 드라마에서는 忠義者로 나오던데...긍정적으로 보는 면도 많은 것 같아요^.^
    만약&amp;#38306;ヶ原에서 미츠나리가 이겼다면..이라던지...
    어쨌든 미츠나리는 고지식한 점으로 자신을 파멸시켰지만 센스만점에 교양도 겸비한.. 같은 취미의 사람들이 놓고 봤을 때 흥미만점 인물인 것 같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4 17: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그 봉토라는 것이 저한텐 복잡 미묘하더군요.
    종가인 모우리 가에 비하면 (같은 오대로급이지만) 적다고 할 수 있지만, 모우리 가문이 츄우고쿠 국인 연합체 중 맹주 격인 역사를 가졌다 보니, 히데요시가 이 만큼 다 니 땅~ 이라고 인정을 하여도, 동급의 다른 도자마(국인)들에겐 어쩔 수 없이 자치권을 허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 직할령은 어느 정도가 되었을지...
    그에 비해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아예 본거지를 벗어나 치쿠젠에 새로 영지를 하사받은 만큼, 데리고 있던 국인들을 직신화 &amp; 영지의 직할령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 52만석의 근거는 후에 기어 들어 온 쿠로다 가문이 신고한 영지가 약 50만석 근처다 보니 그리 되지 않았을지...)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4 1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깃쨩님//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방문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

    이시다 미츠나리는 굉장히 유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위시한 히데요시의 소위 문치파 관료 조직이 조금만 덜 유능했다면,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었을 꺼라 생각합니다.(후방 행정 보급 지원 없이 십만 단위가 넘는 인원을 움직일 순 없을테니까요.)

    제가 생각하기엔 이시다 미츠나리는 패장이기에 모든 것을 뒤집어 쓴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시다 미츠나리가 암살에 관여했다고 알려진 가모우 우지사토의 유능한 전투 집단이 그대로 미츠나리의 품에 안긴 것이나, 참언했다고 알려진 살생관백 히데츠구의 부하들도 세키가하라 때는 미츠나라 측에서 목숨을 던진 것을 보면, 현재 알려진 것과는 다른 뭔가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특히나 세키가하라 때와 임진왜란 전에는 이시다 미츠나리에 대한 것이 그다지 문제가 없는데(제가 과문한 탓일지도...), 갑자기 임진왜란 때와 세키가하라 사이에 두고 이시다에 대한 안 좋은 것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혼자 음모론 놀이 하기에도 재미있더군요. ^^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4 18: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 업데이트는 일요일 즈음이 되어야 할 것 같군요.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4 2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부분은 딱 꼬집어서 말하기 힘든 부분이군요.

    일단 히데아키의 봉토는 치쿠젠일국, 치쿠고와 히젠의 일부분 도합 35만7천석이었던 걸로 알려져 있긴 합니다.

    그런데, 치쿠젠은 영제국상으로는 상국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 일개국 만으로도 30만석强에 해당하지요. 그러면 치쿠고와 히젠을 더하지 않고도 표고 35만석에 달해버리는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히데아키 이후에 입봉한 쿠로다 나가마사의 경우에는 히데아키와는 달리 치쿠고, 히젠을 제외한 치쿠젠국 1개국 만으로도 50만석 이상(52만석인가 53만석인가)의 석고거든요.

    이것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안드로메다 고무줄 석고가 되겠습니다만,

    이건 역시 태합검지라는 실시의 과도기였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야할 부분 같습니다.

    이 전제하에서 생각해 보면, 히데아키가 치쿠젠에 재봉하던 당시, 表高는 35만석이라 해도, 實高는 50만석 이상(60만석 까지도)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이후 쿠로다씨가 치쿠젠 일국에 입봉되었을 때는 검지결과가 반영되어 표고가 실고에 맞게 상향조정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4 2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니까 위 내용에서 히데요시의 독백인 &quot;치쿠젠 52만석은 너무 많다.&quot;라는 말은 치쿠젠 검지가 끝났으나, 아직 실제 표고 상향조정은 되지 않았던 시기에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소설가 중에는 그래도 고증을 잘 해주는 시바 선생이 실수한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어요. &gt;.,&lt;
    그런데, 제가 큐슈쪽 검지 완료시기를 모르기 때문에, [이렇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좀 뻘쭘하네요.
    단순히 쿠로다 나가마사의 후쿠시마번 52만석과 착각했을 가능성도 없다고는 못하겠습니다만, 시바선생의 면목을 봐서라도 검지와 관련해서 생각하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06 21: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otokanfist님//흐르는 돌입니다 ^^(流石)
    저는 그 쪽으론 생각도 못하고, 혹시 쿠라이리치(&amp;#34101;入地)를 코바야카와 가문이 담당하기에 그런건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에 대한 자료를 본 것 같은데 찾질 못해서(어느 책인가에 있었는데...) 생각나는데로 적었는데... 이야~ 역시 함부로 말해선 안 되겠군요. ^^ 앞으로도 좋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1.06 2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제 리플은 거의 추리(...) 수준이어서 신빙성은 없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