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

1619 7 21일 병사(病死) 85.

1535 ~ 1619.

형인 요시히사[義久]와 함께 큐우슈우[九州]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지만,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한 후에 가독 상속. 분로쿠-케이쵸우의 역[慶長役][각주:1]에서 활약했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는 서군에 속했지만, 패배 후에도 영지(領地)안도(安堵)받았다.

 

 

 







전쟁터가 어울리는 무인(武人)

 

 1535년.

 요시히로는 시마즈 가문[島津家] 15대 당주 타카히사[貴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요시히사가 후방에서 전군을 컨트롤하고 있었고, 요시히로는 그런 요시히사의 수족이 되어 각지에 출진. 최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우며 화려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본래대로라면 시마즈 가문의 한 무장으로 생애(生涯)를 끝마쳤을 터였다. 하지만 1595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토요토미 정권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계속 취하고 있던 요시히사를 은거하게 만들고, 시마즈 가문의 차기 당주에 요시히로를 앉힌 것이다. 요시히사나 시마즈의 가신들 대부분은 이 명령에 불만을 품었지만 히데요시의 명령에는 거부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따랐다.

 

 당주 요시히로의 지위는 토요토미 정권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었기에, 1598년에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정권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요시히로의 지위도 불확실한 것이 되었다.

 이 때문에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 요시히로의 동원 명령이 요시히사나 가신들에게 무시당했기 때문에 요시히로는 얼마 안 되는 수하를 이끌고 전쟁터로 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군이 패배하자 적중 돌파를 감행하여 귀국하지만 이 패전으로 인해 요시히로의 정치 생명은 끝나게 되었다.

 

다도(茶道)에 몰두

 

 정치 생명이 끝난 요시히로가 몰두한 것은 다도와 그것에 필요한 차제구(茶諸具)의 제작이었다.

 요시히로가 언제부터 다도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카고시마[鹿島] 현립 도서관에는 요시히로가 센노 리큐우[千 利休]에게 다도의 오의(奧義)에 대해 질문한, '이신(惟新 = 요시히로)님이 리큐우에게 물어본 조서[惟新より利休江御尋]'사본(寫本)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조선에서는 언제나 츠루쿠비의 차기(茶器 - 鶴首の茶入 학의 목의 형태를 한 차 가루를 넣는 사기로 된 도구(비슷한 형태역자 주)를 허리에 차고 다니며, 조금이라도 틈만 나면 차를 즐겼다고 한다.

 

 1606. 요시히로는 쵸우사[帖佐]에서 히라마츠[平松], 또 다음 해인 1607년에는 카지키[加治木]로 거처를 옮겼다. 이 카지키에 있을 때 요시히로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차를 함께 즐길 상대를 찾았으며 응하는 사람이 있으면 굉장히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카고시마에서 열린 다회(茶會)에 초대받았을 때에는 기대에 부푼 나머지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전날의 오후 8시 즈음에는 카지키를 출발하여 날이 밝기 전에 카고시마에 입성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에 갔을 때, 자신이 원하는 차기를 만들기 위하여 조선인 도공(陶工)사츠마[薩摩]로 데리고 왔다. 이것이 사츠마야키[薩摩焼]의 기원이다.

 데리고 온 도공들은 총 80 여명이었다고 한다. 이 중에 김해(金海)라는 도공이 요시히로의 맘에 특히 들었다고 한다. 요시히로는 그에게 '호시야마 츄우지[星山 仲次]'[각주:2]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5년 정도 쿄우토[京都] 근방에 유학시켰다고 한다.

 

 요시히로는 김해에게 쵸우사 저택의 북서쪽에 '우토[宇都] 가마'를, 카치키 저택의 북서쪽에 '오사토[御里] 가마'를 만들게 하여 자신 취향의 차제구를 만들게 하였다.

 동시에 이 당시에는 사츠마[薩摩]에서 사기를 만들기에 적합한 백토(白土)를 찾지 못하여, 조선에서 가지고 온 백토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히바카리테[火計手]'이다. 조선인 도공이 조선의 흙을 사용하여 만들어 구운 불() 만이(ばかり)[각주:3]이 사츠마[薩摩]의 것이라는 의미이다.[각주:4]

 

 또한 요시히로는 자신이 맘에 드는 차제구가 만들어 졌을 때에는 도장[각주:5]을 눌러 구웠다고 한다. '고한테[御判手]'라 한다. '카지키 영감탱이 이야기[加治木古老物語]'에는 고한테 하나라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손가락 하나쯤은 아깝지도 않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진중(珍重)받았다고 한다.

 

 타나카마루 컬렉션[田中丸コレクション]의 '카타츠키 챠이레[肩衝茶入][각주:6]'인 이름()사이노호코[サイノホコ], ‘토우쿄우 국립 박물관[東京国立博物館]의 '코쿠유우분린챠이레[釉文琳茶入]'[각주:7]인 이름 모치즈키[望月]등. 현재도 '코사츠마[古薩摩]'[각주:8]의 명품으로써 높은 평가를 얻고 있는 다기(茶品) 등도 이 우토와 오사토의 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병상(病床)에서 울리는 전쟁터의 함성

 

 1618년 봄.

 요시히로는 병으로 쓰러졌다. 예전의 전우였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나 류우큐우[琉球][각주:9] 국왕 등이 문병(問病)의 사신을 보내고, 막신(幕臣)[각주:10]으로는 쿄우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각주:11]였던 이타쿠라 카츠시게[板倉 勝重], 요시히로의 아들이며 당주인 이에히사[家久][각주:12]의 요청을 받아 쿄우토[京都]에서 명의(名醫)로 소문 난 쥬토쿠안[寿徳庵]을 카치키에 파견하여 요시히로를 진찰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요시히로는 쇠약해져 음식도 먹지 못 하게 되었지만, 가신들이 전쟁터에서의 함성을 지름과 동시에 옆에 있던 가신이 빨리 준비를 갖추시길 바랍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요시히로는 갑자기 제 정신으로 돌아와 단번에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 삼켰다고 한다. 항상 전쟁터에 몸을 두고 있었기에 전쟁터의 함성을 들으면 멋대로 몸이 반응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허무하게 병은 회복할 조짐도 보이지 않고 다음 해인 1619 7 21일.

 카치키의 저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85.

  1.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일본에서 지칭하는 말. [본문으로]
  2. 대대로 타테노 계[竪野系]의 도공은 이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김해의 자손들이라 한다. [본문으로]
  3. 일본어로 “~만”, “~뿐”일 때 사용하는 부조사. [본문으로]
  4. 여담으로 '테[手]'의 의미는 차제구의 분류하기 위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보리 엔슈우[小堀 遠州]'라는 다인과 그 주변 인물들에 의한 것으로, 가장 뛰어난 다기에 붙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자신의 이름 글자 중 하나인 '요시[義]'라는 글자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6. 한 쪽이 돌출 된 형태를 말함. [본문으로]
  7. 검은 광택이 나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
  8. 초기 사츠마 도자기, 즉 조선인 도공인 만든 도자기를 지칭. [본문으로]
  9. 현 오키나와[沖縄] 지역 [본문으로]
  10. 에도 막부[江戸幕府]의 신하 [본문으로]
  11. 에도 바쿠후의 쿄우토[京都] 치안 유지를 임무로 하는 직책이나, 쿄우토에 있던 막신들의 총 책임자였기에 황실 및 쿠게[公家], 서국 다이묘우[大名]들의 감시 등을 임무로 하였다. [본문으로]
  12. 타다츠네(忠恒)가 1606년 개명.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5 1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수했는데다 아들내미가..(우여곡절이 있었지만..)가독까지 이었으니,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패전도 종종 있긴 했지만 세키가하라에서의 스테가마리는..원츄!(결국 이이 나오마사와 도쿠가와 아들내미를 골로 보낸 원인이 되게 한..)

    귀석만자던가, 벽제관에서 명군을 박살낸데도 일조 했다더군요,(코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함께였던가..)

    시마즈가가 큐슈 3가문중에서는 제일 멀쩡히 버틴걸 보면 타카히사가 자식농사는 참 잘지은듯..(;;)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05 1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NHK대하 드라마, "토쿠가와 3대"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의 스테가마리 얼마나 비장감 있게 할까? 하고 조금 기대했었는데..... 철포 쏘고 나더니, 우아앙~ 하면서 도망가더군요....--;;

    귀석만자... 벽제관은 참가했는지 어땠는지.. 유명해지 것은 사천 전투가 아니었나요?
    제가 읽은 것 중에 황당한 것은 조명 연합군 20만....(--;)을 물리쳤다는 것. 성 주변에 화약이 담긴 통을 놓았다가 철포로 맞추어 폭발시켰다던가 하는 만화적인 이야기였습죠.

    유일하게 남은 것은...여러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사츠마라는 일본 최남단 지역... 큰 전투를 끝냈을 뿐인 동군 측에 거기까지 원정을 할 수 있는 여력이 남지 않았다는 점과 이시다 미츠나리 같은 뛰어난 후방 행정관이 없다는 점.(히데타다가 세키가하라에 늦춰진 이유 중에 하나는 그런 점에 있다고도 하더군요)
    또 하나는...그런 것을 염두에 둔 뻔뻔함.. 나중에 카이에키 당하는 무장들은 '꺼져~' 하면 알아서 기었지만, 시마즈 측은 '뭔 소리여~ 여까지 오기 힘들잔여~내 말 좀 들어봐~' 하면서 끝까지 버틴 점을 들 수 있지 않을까요?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5 2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ㄷㄷ.. 무슨 철포판 윌리엄텔입니까(;)

    ..그나저나 스테가마리개그란;;; ㅎㄷㄷ.. 한번 봐야겠군요(-_ㅋㅋ..)

    여담이지만 저희 일교과 교재에 보니 사츠마 석고가 73만석 나오더군요.. 그정도면 동군에 알아서 슬슬 긴 카가 100만석 다음인데.. 서군 출신 주제에 원츄군요(ㅋㅋ..)

    개인적으로는 도쿠가와와의 세키가하라 패전 후 교섭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데.. 뭐, 언젠가 기회가 되면 찾아 볼 생각입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05 2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졸자에게 명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말씀해 주시길.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5 23: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종종 의문이 있으면 질문드리도록합지요..(ㅎㅎ)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8.03.09 03: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키가하라때 이미 65세의 노장이었으면서도 용맹을 뽐냈군요.
    전쟁 소리를 들으면 음식을 먹었다는 부분을 보니 중국 주나라 유왕의 애첩 포사가 생각나네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9 1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그 이야기는 웃지 않는 미녀 웃기기?
    파블로프의 개가 조금 더 비슷하지 않나요? ^^;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ttl00013 BlogIcon 라빈스텐 2008.08.31 1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귀신 시마즈라는 별명이있는데 그건 임진왜란때 이순신 수군에게 신나게 발리기 싫어서 도공들을 귀신같이 납치하여 도망가서 귀신 시마즈라고 불리는거 같네요.
    일본에서는 평가가 후할진 몰라도 조선장수들과의 능력치로 보면 정말 일본장수들은 갓나새끼에 불과한거같습니다.
    한마디로 요놈도 조선장군들에겐 쪽도 않되는 과대 포장 같은 인물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31 18: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귀신 시마즈라는 별명이있는데 그건 임진왜란때 이순신 수군에게 신나게 발리기 싫어서 도공들을 귀신같이 납치하여 도망가서 귀신 시마즈라고 불리는거 같네요."

    ....이곳은 나름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오는 곳입니다. 리플 하나에 잘못된 지식을 가지게 될 분들이 생길 수 있으니 그러한 말씀은 미리 농담이라던지 하는 방식으로 처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마즈 가문은 일본 2ch에서도 요즘 날조의 대명사로 뽑히곤 합니다.
    鬼石曼子..라고 중국측 사료에 이름을 남겼다고 자신들은 주장하지만, 문제는 鬼라고 이름 앞에 붙이는 것은 당시 일본에서나 행하던 것인데 말이죠.

    "일본에서는 평가가 후할진 몰라도 조선장수들과의 능력치로 보면 정말 일본장수들은 갓나새끼에 불과한거같습니다. 한마디로 요놈도 조선장군들에겐 쪽도 않되는 과대 포장 같은 인물"

    ...그래 어떤 능력치로 어떻게 평가하실 건가요? 그 능력치는 또 어떤 것을 기준으로 부여하실 것인가요? 역사에 이름이 남은 인물을 한마디로 평가하시는 그 자신감이 부럽군요.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

1611 1 21일 병사(病死) 79.

1533 ~ 1611.

시마즈 씨[島津氏] 16대 당주(). 오오토모 씨[大友氏], 류우조우지 씨[造寺氏]를 격파하여 영토를 확대하지만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하고, 가독(家督)을 동생인 요시히로[義弘]에게 물려준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후에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카이에키[改易][각주:1]의 위기에 빠지자,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와 교섭하여 영지(領地)안도(安堵)받았다.

 

 



히데요시가 내린 은거 명령

 

 1595 6.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시마즈 씨[島津氏]에게 영지안도장(領地安堵)을 발급하였다.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점하고 있던 영지에 행해지던 태합 검지[각주:2]가 종료되어 산출된 57 8천 여석의 영유(領有)를 승인한 것인데, 그 영지안도장에 쓰여진 이름은 시마즈 가문당주 요시히사가 아닌 동생 요시히로[義弘]로 되어있었다. 이것은 토요토미 정권에 비협조적인 요시히사에게서 시마즈 가문의 가독을 몰수하고, 친 토요토미 적인 요시히로를 시마즈 가문 당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동시에 요시히사는 시마즈 가문이 대대로 거성(居城)을 삼고 있던 사츠마[薩摩]카고시마[鹿児島]에서 물러나라는 명령을 받아, 오오스미[大] 토미쿠마[富隈]에 있는 토미쿠마 성[富隈城]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가 끝난 후인 1604년에는 오오스미[] 코쿠부[国分]에 마이즈루 성[舞鶴城]을 신축하여 거성으로 삼았다.

 

 단지 요시히로의 가독 계승은 토요토미 정권이 요시히사나 시마즈 가신단의 의향을 무시하고 멋대로 결정한 것이었기에 실권은 여전히 요시히사가 계속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실권을 누구에게 물려주는가에 대해서 강제로 은거를 당했던 요시히사를 끊임없이 고뇌하게 만든 것이다.

 

세 딸과 두 명의 후계자 후보.

 

 요시히사에게는 세 명의 아이가 있었지만 모두 여자였다.

 

 첫째 딸인 오히라[御平] 1551년생으로, 삿슈우 가문[薩州家][각주:3]의 시마즈 요시토라[島津 義虎]에게 시집갔다.

 요시토라의 부친 사네히사[久]와 요시히사의 부친 타카히사[貴久][각주:4] 예전에 종가(宗家)의 가독을 쟁취하려고 계속 다투어 왔던 사이였기에 요시토라도 겉으로는 요시히사에게 복종하고는 있었지만 그 본심은 알 수 없었다.

 1585년. 요시토라가 병으로 죽어 오히라가 낳은 타다토키[忠辰]가 그 뒤를 이었지만, 그 타다토키도 진심으로 복종한 것이 아니었기에 틈만 나면 본가를 탈취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1592년. 조선 출병 시[각주:5]에 요시히사의 휘하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멋대로 행동하다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다음 해인 1593년 카이에키 당하여 처지를 한탄하다 병으로 죽었다.

 또한 오히라는 타다토키 외에 타다키요[清], 타다히데[栄] 등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삿슈우 가문 카이에키 후 히고[肥後] 반국()를 영유(領有)하고 있던 코니시 가문[小西家]로 보내져 유폐되어 있었기에 요시히사의 후계자로 삼기 힘들었다.

 

 둘째 딸(이름 불명)[각주:6] 1563년생으로, 타루미즈 가문[垂水家] 시마즈 테루히사(島津 彰久)의 부인이 되었다.

 타루미즈 가문은 타카히사의 동생 타다마사[忠昌]를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테루히사는 3대째 가주(家主)였다. 테루히사는 1594 7월 조선에서 병으로 죽었지만, 1585년 그와의 사이에서 둘째 딸이 타다나오[忠仍]를 낳았었다.

 

 또한 셋째 딸 카메쥬[亀寿] 1572년생으로, 처음엔 요시히로의 세자(世子)인 히사야스[久保]에게 시집갔지만, 1593년 조선에서 히사야스가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 동생인 타다츠네[忠恒]와 재혼했다.

 

 이 때문에 둘째가 낳은 외손자 타다나오와 셋째 카메쥬의 남편이며 사위 겸 조카인 타다츠네. - 이 둘이 요시히사의 후계자 후보가 된 것이다.

 

제비뽑기로 정해진 후계자

 

 요시히사가 은거했던 1595년. - 타다나오는 11, 타다츠네는 20살이었다.

 요시히사는 자신의 피가 흐르는 외손자 타다나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싶었던 듯하지만 너무 어렸다.

 

 타다나오의 혈통을 이어받은 신죠우 시마즈 가문[新城 島津家]의 족보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요시히사는 사위인 타다츠네로 할지 외손자인 타다나오로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결심하지 못하였고, 쇼우하치만 궁[正八幡宮] 현 카고시마 신궁(鹿 神宮)에서 후계자를 정할 제비뽑기를 하였다.

 그 결과. 타다츠네를 후계자로 하는 제비가 뽑아져 요시하시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고 한다.[각주:7][각주:8][각주:9]

 이 제비뽑기의 이야기는 '신죠우 시마즈 가문 족보[新城島津家家譜]' 이외의 사료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필시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시히사는 타다츠네와 카메쥬 사이에서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길 기대하고 있었다. 타다츠네는 이 외손자가 가독을 이어받을 때까지의 징검다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요시히사의 기대와는 반대로 둘 사이에서는 아들이 생기질 않았다. 카메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아이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지자, 요시히사의 머리 속에서는 타다나오를……’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짙어져만 갔다.

 이리해서 가독 계승문제가 다시 문제가 되어 요시히사와 요시히로-타다츠네 부자(父子)간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가신들도 타다츠네 파()와 타다나오 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그러던 중 요시히사는 병이 나 1611 1 21.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79.

 요시히사의 사망으로 인해 가독 계승문제는 잠잠해져, 타다나오를 지지했던 가신 일부가 숙청되는 것을 끝으로 가문 분열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마즈 가의 가독은 타다츠네에서 타다츠네의 측실(側室)이 낳은 미츠히사[光久]에게로 이어졌다. 이 측실의 부친은 코니시 가문으로 유배를 갔던 삿슈우 가문의 시마즈 타다키요 - 즉 요시히사의 첫째 딸인 오히라의 아들이었다.

 종가(宗家) 적류(嫡流)에 자신의 피를 남기고 싶어했던 요시히사의 꿈은 외손의 혈통이 이어가는 것으로 현실이 되었다.

  1.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2. 타이코우 켄치(太閤 検地)라 읽음. 태합[太閤] 히데요시가 통일된 규격으로 논밭(영지안의 산과 숲은 제외)의 생산량을 계산하여 세금, 부역을 산출 혹은 할당하게 한 것. [본문으로]
  3. 삿슈우는 사츠마[薩摩]의 별칭. 시마즈 가문의 분가(分家), 당주가 대대로 사츠마노카미[薩摩守]를 자칭했었던 것이 이름의 유래. [본문으로]
  4. 사츠마의 이사쿠[伊作] 지역를 영유(領有)하고 있던 시마즈의 분가 이사쿠 가[伊作家] 출신. [본문으로]
  5.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6. 타마히메[玉姫]라는 설이 있음. [본문으로]
  7. 일본은 예전부터 중요한 일을 정하는 제비뽑기를 신의 뜻이라 여겼기에로 정했기에 아주 어처구니 없는 일은 아니었다. [본문으로]
  8. 무로마치 막부[室町 幕府]의 6대 쇼우군[将軍]인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 義教]는 3대 쇼우군 요시미츠[義満]의 셋째 아들로, 별칭이 [제비뽑기 쇼우군]라 한다. 형인 4대 쇼우군 요시모치[義持]의 아들인 5대 쇼우군 요시카즈[義量]가 아버지 보다 먼저인 19살의 나이에 죽고, 3년 뒤에 요시모치도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죽었다. 그 때문에 당시의 칸레이[管領 – 무로마치 바쿠후의 수상 격] 하타케야마 미츠이에[畠山 満家]는 3대 요시미츠의 아들들 사이에 누구를 쇼우군[将軍]으로 할지 이와시미즈하치만 궁[石清水八幡宮]에서 제비뽑기를 한 결과, 당시 중이었던 기엔[義円]을 환속시켜 쇼우군[将軍]으로 추대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9. 또한 현대에 이르러서도 각종 선거에서 동수의 표를 얻었을 경우에는 제비뽑기로 당선자를 정한다. 2007년 11월 27일만 하더라도 오키나와[沖縄]의 나고 시[名護市]의 시장은 제비뽑기로 정해졌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30 21: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3국을 지배할만한 장군이라고 이에야스가 평했던가요.. 혁신에서는 저평가된 감이 좀 있지만 명군은 명군이었떤듯..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7.12.01 01: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문단의 “즉 이에히사의 첫째 딸인 오히라…”에서 이에히사는 요시히사의 오기인 듯 하네요. 오히라가 요시히사의 아들이니.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01 07: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이에야스의 말은...실제로 그렇게 되었으니 뭐..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같은 일이고..(결과를 껴맞추는...죄송합니다... 이에야스를 높게 평가하지 않다보니, 그 이름만으로도 삐뚫하게 생각되어지네요).
    혁신에선 낮은 편인가요? 졸자같은 경운 보통 제일 마지막에 정벌하는 가문이다 보니, 시마즈 쪽 무장들의 능력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혁신은 제가 생각하기엔 시리즈 중 능력치 인풀레이션이 가장 높은 것 같던데...(제일 짜?B건은 열풍전...)

    신사본론님//언제나 고맙습니다. 얼릉 고쳤습니다. ^^;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1 1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자랑/도쿠가와-오다쪽 무장들 뻥튀기가 심해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하향화된 느낌이 크더군요.. 요시히사 S급 능력치는 내정 1개.. 요시히로도 철포 1개..

    뭐 시마즈 4형제는 전원 철포 전용 특기 스테가마리가 있긴 하지만..-전용 특기 없는 무장이 넘쳐나는 혁신을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메리트라면 메리트려나..-

    의외로 최고치가 120인걸 생각하면 그다지 높게 평가된 무장은 없어보이는듯.. 도쿠가와 이에야스만 해도 100넘는 능력치가 없으니까..(;;그런점에서 무적 겐신;;)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01 1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글쿤요. 최고치가 120이라는 것을 생각을 못 했네요. 혁신은 능력치 100넘기는 것을 쉽게 할 수 있다보니...(켄신 어르신이야 뭐...--; 전 오리지날에서 항구에 주둔군 3만 + 10만 가까운 인원과 철포탑 4갠가 있었는데도, 켄신 어르신 혼자서 이끄시는 2만의 병력과 군신+차현에 10만이 날라가고, 주둔군 3만은 나오지도 못하다가 항구 점령 당하니까, 비사문천의 깃발 아래 대동단결 하더군요... 호쿠리쿠의 둑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2 15: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뜩이나 통솔도 높은데다가.. 관동관령직 붙어있으니 기본이 27500이더군요..(-_-ㅎㄷㄷ..) 그나마 PK에서 차현 위력이 거의 반이나 줄었는데도 우에스기가로 하니 켄신 하나면 못 먹는 성이 없더랩던..(-_-..)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xtaiji83 BlogIcon 심플리진 2008.07.25 1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ㄳ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 忠興]

1645 12 2일 병사(病死) 83.

1563 ~ 1645.

호소카와 유우사이[]의 아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딸 가라샤가 부인이었지만, 혼노우 사[本能]의 변()에서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측에 섰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부젠[豊前] 코쿠라[小倉], 그 후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로 영지(領地)가 이동되었다. 말년은 산사이[]라는 호()를 칭하며 다도(茶道)와카[和歌]를 즐겼다.







은거 생활 25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부젠[豊前] 코쿠라 39 9천석 태수(太守)의 지위에서 물러난 것은 59살 때인 1621년이었다. 그 전년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산사이소우류우[宗立]'라 불리고 있던 그는, 해가 밝은 이 해에 부젠[豊前] 나카츠 성[中津]에서 은거 생활을 시작하였다.


 11년 후인 1632년.

 번주(藩主) 타다토시[忠利]가 히고[肥後] 쿠마모토 54만석으로 이봉(移封)되자, 이번엔 야츠시로(八代)()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여전히 은거생활 중이었다. 83세라는 당시로써는 드문 장수(長壽)를 끝마치기 까지 25년 간 은거한 것이 되는데, 그의 은거생활은 유유자적(悠悠自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타다오키는 다채로운 취미를 가진 무인(武人)이었다.
 무가(武家)의 옛 전통이나 의식, 작법에 밝은 것과 와카[和歌]렌가[連歌] 등에 뛰어났던 것은 조상 대대로의 전통이었으며, 저술(著述), 그림을 그리거나, 케마리[蹴鞠][각주:1], 사루가쿠[
] 외에 도검()이나 무구(武具)의 제작, 디자인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호소카와 가문 기록[細川家記]'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다도(茶道)는 센노 리큐우[千利休]'칠철(七哲)'[각주:2]'
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였다. 다인(茶人)의 신분인 산사이소우류우는 에도[]에 있을 때 자신의 저택에서 자주 다회()를 열어 여러 다이묘우[大名]와 교류를 맺었다.


 그런 많은 취미를 갖고 있던 타다오키이기에 은거 생활이라는 넘쳐나는 시간을 즐겼다고 봐도 좋겠지만, 그 마음을 들여다 보면 현역에서 물러난 노인에게 있을 법한 -긴장의 끈이 느슨해진 사람의 고독과 거기에서 오는 불만과 불안의 그림자가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당주 타다토시와의 불화설


 타다오키가 그러한 불만을 터트릴 수 있는 대상이 아들 타다토시에게 집중되었던 것은 부자의 연으로 봐서 당연하다고 보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타다토시는 셋째이면서 후계자가 되어 봉토를 이었기에, 은거한 아버지에 대해서 무엇이든 조심하였다. 타다오키로써는 울분을 풀 상대로써 만만한 부분도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은거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에게 인사를 하러 오지 않는 가신들의 태도에 대한 불만을 담은 편지를 타다토시에게 보내어 추궁했다. 이것은 후에 생각 없이 그런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한다고 반성을 했지만, 자주 투덜거리는 은거한 부친에게 아들이 질렸던 같다.


 호소카와 부자의 불화설도 있다.
 예를 들면 쇼우군[
] 이에미츠[家光]가 천연두에 걸리자 쾌유기원의 기도를 해달라는 아들 타다토시의 요청을 받았을 때, “될 수 있음 하지 않고 싶다고 떼를 썼던 것과 타다오키가 야츠시로 성() 새로운 저택에 연못을 파려고 할 때, 막부(幕府)의 눈을 의식한 타다토시가 조심스럽게 경고를 한 것에 대하여 타다오키가 안색을 바꾸어 화를 내며 되물은 것 등과 같은 부자간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예전엔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동격이었다는 자부심을 버리질 못하는 은거한 부친과 교묘한 처세술을 바탕으로 가문을 지키고자 하는 당주인 아들. 서먹서먹해진 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 생겼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은 결국 [노병은 사라질 뿐]이라는 순리를 순순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타다오키의 [영감탱이의 땡깡]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전쟁터가 그립구나


 하지만 그런 부자 관계는 타다오키 79살 때인 1641, 타다토시의 죽음에 의해 뚝 끊긴 것이다. 타다토시는 첫째 타다타카[忠隆]가 어떤 이유로 타다오키에게 폐적(廢嫡)된 후[각주:3], 후계자가 될 터였던 둘째 오키아키[興秋]를 대신하여[각주:4] 후계자가 되었다(후에 오키아키는 가문을 뛰쳐나가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役]에서 토요토미(豊臣) 측에 섰기 때문에 타다오키에게 자살을 명령받는다).


 번()의 기반을 닦는 어려운 임무를 맡았던 타다토시가 56살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자신의 투덜거림을 들어 주지 않은채 죽어버린 것이다. 타다오키는 자신이 너무 오래 산다고 한탄하지 않았을까?


 거기에 83살 때, 50을 넘어서 낳은 넷째 아들 타츠타카[立孝]도 죽어버렸다(향년 31).


 타츠오키는 그 해의 12 2일에 죽었다. 죽을 때 전쟁터가 그립구나”[綿考輯[각주:5]]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화려한 무구를 몸에 걸치고, 수 많은 전쟁터를 질주했던 젊은 날의 자신의 모습이, 이 자타가 공인하는 무인(武人)의 뇌리에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1. 과거 일본에서 행해진 축구의 리프팅과 같은 경기, 여러 명이 사슴 가죽으로 된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발등으로 서로 주고 받는 경기. [본문으로]
  2. 리큐우 휘하의 뛰어난 제자 일곱 명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 利貞]를 이름. [본문으로]
  3. 첫째 타다타카의 부인은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代]였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전투 전에 서군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등에 의한 동군 측 무장의 인질 억류 시도가 있었는데, 타다오키 부인인 가라샤는 이를 거부하고 자살한. 그러나 이 때 타다타카의 부인 치요는 가라샤와 함께 죽지 않고, 옆집에 있는 자신의 친 언니이자 우키타 나오이에[宇喜田 直家]의 부인인 고우히메[豪姫]에게로 도망친다. 이것이 가라샤를 사랑하던 타다오키의 분노를 사서 후에 타다타카에게 이혼을 명령하지만, 타다타카는 거부하여 폐적당한다. 또한 이런 설도 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이전, 히데요시 죽은 후의 혼란기에 타다오키는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 – 치요의 오빠],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등과 함께 이에야스 암살을 노린다는 소문으로 인하여 입장이 난처해진 적이 있었기에, 마에다 가문[前田家]과의 인척 관계를 없애 이에야스의 의심을 풀려고 했다는 설이 현재는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by 위키피디아) [본문으로]
  4. 둘째 오키아키[興秋]는 당시 에도에 인질로 있던 셋째 타다토시가 당주가 되자 타다토시를 대신하여 인질로써 에도로 가던 도중 자신이 후계자가 되지 못한 것과 인질로 받쳐지는 데 대한 울분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모가미 가문[最上家]의 예에서와 같이 그 때까지의 세자(世子) 대신에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받친 아들을 막부(幕府)의 인물들과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후계자로 삼는 일도 있었기에, 비단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후에 그와 행동을 같이 했던 요네다 켄모츠[米田 監物]가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役] 후 번으로 돌아와서는 대대로 가로(家老)를 맡은 점과 진위가 가려지진 않았지만, 아마쿠사[天草]에 있는 촌장[庄屋]의 족보가 오키아키의 후손이라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생존했었다는 설이 있다. 단지 요네다 켄모츠는 그때까지 전쟁터에서 워낙 뛰어난 무공을 많이 세운 무장이었던 점과 타다오키의 명령으로 오오사카 성[大坂城]에는 스파이로 들어갔기에 아무 일 없이 돌아와서 가로를 지냈다는 설도 있다. [본문으로]
  5. 호소카와 가문의 기록.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22 19: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니 노부나가라고 불리던 아찌니 성격 참...-_-;;

    타다토시는 무사시를 상당히 존경해서 우대했다 하더군요. 무사시가 죽을때도 호소카와가가 산킨코타이 하는 길목에 묻어달라고 했다니 뭐.. ㅎㄷㄷ;

    P.S. 가라샤씨의 자살방법은 참.. 아니, 이건 타살이 아닌가 싶을 정도..(쩝쩝;; 카톨릭 탓인가..)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23 16: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다오키야 노부나가를 워낙 존경해서, 죽을 때까지 매'달' 노부나가의 기일엔 명목을 빌었다고 할 정도이니...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ttl00013 BlogIcon 라빈스텐 2008.08.31 09: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씨는 명문 가문으로서 히데요시때 몰락햇지만 임진년때 참가해서 진주성 전투때 김시민에게
    자기 동생도 잃고 대패해버렷죠..
    한마디로 히데요시에게 눈치보면서 억지로 참여햇다가 동생도 잃고 팔도 다치고...
    어쨋뜬 요놈도 조선군에겐 발리는 인물, 전체적으로 ?f을때 일본놈들은 싸움은 잘햇지 조선군에게 머리는 정말 못따라갑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31 18: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다오키의 호소카와 가문이 히데요시때 몰락하지는 않았습니다.

    진주성 전투 때 동생을 잃어요? 흠... 동생들은 임란 후에도 다들 살아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혹시 출정을 알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일본군은 코니시 유키나가가 워낙 뛰어났던 것이 마치 일본군 전체가 뛰어났던 것으로 인식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 ]
1611년 6월 24일 병사(病死) 50세.

1562년 ~ 1611년.
시즈가타케[賤ヶ岳] 칠본창(七本槍)[각주:1]중 한 명. 히데요시[秀吉]가 큐우슈우[九州]를 제압하자 히데요시에게서 히고[肥後]의 반(半)을 하사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동군(東軍)에 속하였고, 히고 일국(一国)를 영유하며 쿠마모토 성[熊本城]을 축성하였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회견을 성사시켰지만 곧바로 병이 나서 죽었다.



갈등으로 고심한 말년

 카토우 키요마사가 일부 지역을 뺀 히고[肥後]와 붕고[豊後]의 3개 군(郡)[각주:2]을 합하여 54만석을 소유하게 된 것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인 1600년 11월.

 키요마사의 "말년"은 용맹을 바탕 삼아 혁혁한 공을 세워 온 센고쿠[戦国] 무장에서 위정자(爲政者)로 변신한 이 해의 38살부터 한창 일할 나이인 50세로 죽었을 때까지인 12년간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쿠마모토에서는 키요마사를 [세이쇼우 코우(清正公 = 키요마사 공)]을 줄여 [세이쇼코 상(セイショコ さん = 키요마사 씨)]이라 부르며 키요마사의 은덕(恩徳)을 우러르는 풍습이 남아있다. 이 12년 동안 키요마사가 정력적으로 기반을 닦고 발전을 위해 노력한 것이 후에 쿠마모토 발전의 기초가 되었고 지금도 그 노력의 은혜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의 명성(名城)인 쿠마모토 성(城)의 축성, 가도(街道)의 정비, 관개(灌漑)의 확충, 간척(干拓) 등에 의한 경작지(耕作地)의 조성, 제사(製絲) 등의 산업 진흥 등이 그 후의 히고 쿠마모토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히고 카토우 가문[加藤家]은 그 다음 대인 타다히로[忠広]의 삭탈관직[改易[각주:3]]과 함께 끊어지지만, 카토우 가문 다음으로 이봉(移封)되어 온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이 카토우 가문의 유적, 풍습을 존중한 것도 키요마사에 대한 히고 사람들의 감사와 존경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군(名君) 카토우 키요마사의 말년은 정말 충실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내면(内面)에서는 토요토미 은고(恩顧)의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토쿠가와 정권에 순종할 수 밖에 없는 인간적 갈등으로 고심했다고 여겨진다.

토요토미 안태(安泰)를 꾀하다

 키요마사에게는 세 명의 측실(側室)이 있었다고 한다.
 2남 1녀를 낳은 ‘혼가쿠인[本覚院 = 통칭 카와지리도노[川尻殿]]’, ‘죠우코우인[浄光院 = 통칭 키쿠치도노[菊池殿]]’, 후에 뒤를 잇는 셋째 아들 타다히로와 둘째 딸 아마[あま]의 1남1녀를 낳은 ‘쇼우오우인[正応院]’이다.

 키요마사가 죽은 뒤, 불과 12살며 셋째 아들 타다히로가 뒤를 이은 것은 이미 장남 토라노스케[虎之助]가 2살, 둘째인 타다마사[忠正]가 8살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정실(正室)[각주:4]법호(法號)를 ‘쇼우죠우인[清浄院]’이라 하는데, 이에야스의 외숙부 미즈노 타다시게[水野 忠重]의 딸이다. 이에야스는 모친 오다이[於大 = 덴즈우인[伝通院]]의 동생인 이 타다시게의 딸을 양녀로 삼아서 키요마사에게 시집보냈다[각주:5].

 그리고 키요마사의 장녀인 코야[古屋 – 혼가쿠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를 토쿠가와 사천왕[徳川 四天王][각주:6] 중 한 명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아들 야스카츠[康勝]와 결혼시켰고, 둘째 딸 아마를 후에 어삼가(御三家[각주:7])인 키슈우 토쿠가와 가문[紀州家]를 세운 이에야스의 10째 아들 요리노부[徳川 頼宣]와 결혼시켰다.

 토쿠가와 가문과 키요마사가 이런 인척(姻戚)관계로 이어진 것은,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한 책략의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다. 토요토미 은고 다이묘우(大名)를 회유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키요마사가 비록 서국(西国) 큐우슈우[九州]에 있더라도, 키요마사라는 인물은 적으로 돌리면 또 이 정도로 성가신 무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키요마사는 밖에서 보면 토쿠가와와 친하며, 토요토미와는 거리가 생긴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우직한 인물은 고(故) 히데요시의 두터운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 은혜를 갚는 길은 겉으론 토쿠가와에게 복종하면서, 히데요리를 당주로 하는 토요토미 가문의 안태를 꾀하는 것 말고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강요하는 니죠우 성[二条城]에서 히데요리와의 회견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등과 함께 요도도노[淀殿 – 히데요리의 생모]를 설득하여 실현시킨 것은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귀국 도중에 병이 나다

쿠마모토 시[熊本城]에 있는 키요마사 동상.

 이에야스와 히데요리의 회견은 1611년 3월 27일 무사히 끝났다.
 니죠우 성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온 키요마사가 침실에서 몸 안에 품고 있던 단도를 꺼내고 잠시 이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慶元記[각주:8]].

 회견장에서 만약의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그 단도로 히데요리를 지킬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태가 되지 않았다는 안심에서 흐른 눈물일 것이다.

 히데요리를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경호하며 돌려보내는 도중에 후시미[伏見]에 들렸다. 그곳에 있는 자기 저택 앞을 흐르는 강에 배를 띄우고 그 배에서 잔치를 연 키요마사는 그제서야 어깨의 무거운 짐을 내린 듯한 생각이 들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같은 해 5월 하순.
 귀국하던 배에서 갑자기 병이 나 병든 몸을 질질 끌듯이 하며 쿠마모토로 돌아왔다. 혀가 꼬이는 증상의 병이었는데 확실한 병명(病名)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병은 나날이 악화되어 6월 24일 숨을 거두었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 夏の陣]에서 토요토미가(家)가 멸망하기 4년 전이었다.

  1. 1583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후에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의 무대가 되는 아마쿠사[天草] 섬 등은 기독교도들이 많았기에 막부에 부탁하여 옆 지방인 붕고[豊後]의 세 개군(郡)과 교환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카이에키[改易]라 읽는다.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4. 키요마사의 정실은 야마자키 카타이에[山崎 片家]의 딸로, 키요마사가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건너가 있던 중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쇼우죠우인[清浄院]은 후실(後室). [본문으로]
  5. 그녀의 나이 18세. 키요마사와는 20살 차이가 난다. [본문으로]
  6.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토쿠가와가(家)를 지탱한 네 명의 공신을 지칭. [본문으로]
  7. 오와리[尾張], 키슈우[紀州], 미토[水戸]에 이에야스의 각각 9째, 10째, 11째 아들들이 임명된 가문으로, 후에 쇼우군 본가가 끊길 경우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가문. 특징 겸 우대로써 토쿠가와[徳川]라는 성(姓)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에도 바쿠후에서는 다방면에 걸쳐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본문으로]
  8.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条 綱成)의 증손자 호우죠우 우지나가(北条 氏長)가 쓴 책.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19 2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아저씨도 암살인지 독살인지 하는 설이 있더군요..ㅎㄷㄷ

    소녀닌자 이즈미던가..라는 막장 망가에서는 이 아저씨를 비롯 세키가하라 이후에 죽은 다이묘는 all암살이라는 황당한 설정의 망가도 있었지만;;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19 2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오사카 공략전을 앞두고 무용이 뛰어나고, 오오사카 바로 아래인 키이(紀伊)를 영유하고 있던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호쿠리쿠(北陸)의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 히메지(姫路)의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등... 각각의 위치에서 바쿠후의 군을 견제할 수 있고, 또한 토요토미家와 굉장히 친했던 가문의 당주들이 비슷한 병 혹은 급사라는 형식으로 동일한 시기에 죽었던 것이 그런 설로 전해져 오는 것 같습니다.(반대로... 그런 이들이 동일한 시기에 죽어서 이에야스에게는 오오사카 공략을 결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겠지만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19 2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즈미... 만화는 본 적이 없고, 영화 아즈미 2탄만 쪼금 보다가 다 못 보았습니다만... 만화 재미있나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20 0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그 황당한 만화의 리뷰만 본거라서.. 따로 말은 못 드리겠지만 리뷰만 봐도 참 막장..(-_-;;)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7.11.20 2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만화는 재미 면에서는 아주 충실합니다. 만화라는걸 염두에 두고 보면 아주 재미있죠.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21 1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옷~ 볼리바르님~ 반갑습니다. 그렇군요. 재미는 있나보군요. 왠만하면 전국물은 다 읽는데(사무라이 디퍼 쿄우~도 읽었는데..) 소년 검객이라는 말에... 연약한 여자애가 썩둑썩둑 사람 자른다는데 왠지 말이 안된다는 생각에 읽지 않았는데, 함 봐야 겠네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korea40003 BlogIcon korea40003 2007.12.14 1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토기요마사아닌가?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4 2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립 국어원의 일본어 표기법
    http://www.korean.go.kr/06_new/rule/rule05_01_04.jsp
    에 따르면 korea40003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만....전 예전에 그 표기법 때문에 아직도 발음에 무리를 겪고 있어서,
    일부러 글자 발음대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 점 양해를...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5.04 14: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니시와 더불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무장이 아닐까 생각..(모 게임사의 게임의 영향으로 인해 -0-)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4 18: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임진년 1진과 2진일테니까요. 함경도 담당이라 저 북쪽까지 갔으니 아무래도 그만큼 유명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에...어떤 게임이요? 코니시까지 나올 정도면 코에이 신장이나 태합 시리즈 같은데...)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5.04 2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내 게임사의 임진록 시리즈와 거상시리즈죠.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5 14: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이름만 들어보고 해 본적이 없어서...^^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ttl00013 BlogIcon 라빈스텐 2008.08.31 09: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임진왜란때 조선 사람들 중에서 제일 무섭운 사람중 넘버원이 가토 기요마사임...
    쾌지나 칭칭나네 이말도 조선사람이 기요마사를 너무 무서워서 해서 아직도 전해지는 노랫말이죠,
    예전 조선 사당이나 무당에 기요마사의 그림을 붙여서 귀신을 쫓을정도로 기요마사는 조선에서 원수인 놈과 동시에 가장 무서운 인물입니다.
    조선의 호랑이를 좋아해서 조선 호랑이를 씨를 말릴정도로 잡아 가서 히데요시에게 호랑이 가죽 선물도 주고~설에는 호랑이를 맨손으로 ??쳐 잡앗다고 하지만 그건 쫌 구라가 섞인듯 합니다.
    기요마사설에는 영웅은 색을 좋아한다는 말처럼 너무 여자를 밝힌 탓인지 셩병인 매독으로 죽엇다는 설이있습니다.
    아즈미 같은 쓰레기 SF 잡 영화에서 독살로 죽은게 아닙니다.~~

  1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31 18: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쾌지나 칭칭나네...라는 말은 저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확정을 지어서까지 말씀하실 만한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시베리아 호랑이가 한 인물이 몇 년간 몇 마리 잡았다고 씨가 마를 정도면 이미 그 전에 멸종에 가까운 상태여야 하지 않을까요?

    창으로 잡았다는 설이 있지만, 맨주먹은 처음 듣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만화에서는 아즈미가 칼로 죽이던데 영화에서는 독살로 나오나요?

  1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6 0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지랑//..쾌지나칭칭나네라는..말은...카토기요사마녀석댐에..생긴말..맞고요..제가..이글..모두..댓글읽어본결과..발해지랑님은..자신이..일본역사인물올리면서..일본역사인물들을..비하하시더군요..아주..니만의생각으로..반박하시던대...증거자료를보여줘도..말을4가지없게..마무리하고..아주..보기안좋내요...

  1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6 0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ko.wikipedia.org/wiki/%EC%BE%8C%EC%A7%80%EB%82%98_%EC%B9%AD%EC%B9%AD%EB%82%98%EB%84%A4
    위키의 '쾌지나 칭칭나네'의 항목입니다. 키요마사의 이야기는 하나의 설일 뿐입니다.

    증거자료 보여 주셨습니까? 우선 해당 링크라도 걸어 주시던지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기분나쁘셨다면 미안합니다만 우선 제 말에 반론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거나 링크를 걸어 주셔야지, 4가지 없게 한다는 말씀만 하시니.... 그래서는 서로 아무런 발전이 없습니다. 또한 그렇게 끝내면 서로 기분만 나뻐지지 않을까요? 그럴 필요가 뭐가 있나요?

  17. 참~ 2011.01.26 14: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지랑님이 참으세요 아골이 여까지출몰하네요

  18. 아이즈 2012.07.13 17: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같은맥락으로
    그래도 나름 도요토미가 충신이엇기때문에
    도쿠가와한테 부담된것도 잇겟지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7.20 2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변 굉장히 늦은 점 사과드립니다.

      뭐...토요토미 가문과 이러저러 연이 깊던 가문들의 주인들이 비슷한 시기에 죽어나갔다는 정황증거는 있습니다만... 아직 더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소 요시토시(宗 義智)

1615 1 3일 병사(病死) 48.

 

1568 ~ 1615.

큐우슈우[九州] 평정을 끝낸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쓰시마[馬] 일국()를 안도(安堵)받았다.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지휘 하에서 출진.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하지만 용서받아 조선과의 관계 회복에 힘썼다.

 

 

 



바쁜 말년

 

 쓰시마의 도주(島主) 소우 요시토시[宗 義智]는 임진, 정유의 난 때는 청년 무장으로 바다를 건너가 분전하는 한편, 명 왕조 정복의 야망을 품고 있던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와 명-조선과의 사이에서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처 마리아의 부친 코니시 유키나가의 제 1군에서 선봉으로 싸우는 몸이면서, 대륙 정세에 어두운 히데요시의 명 정복 계획을 억지(抑止)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성과는 올리지 못했다.

 

 소우 씨[宗氏] 1587년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 때부터 히데요시를 섬겼고, 그에게서 주어지는 무리한 요구 사이에서 고민하였다. 조선과의 무역을 바탕으로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쓰시마의 도주로써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은 섬의 사활(死活)에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일찌감치 싸움을 막을 수 있는 길을 탐색한 것이다.

 

 그러한 미묘한 입장에 있었던 요시토시는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서군 측에 섰다.

 () 히데요시에게서 사츠마[薩摩] 이즈미 군[出水郡] 중에 1만석을 가증(加增)받았던 고마움 장인인 코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움직여야 했기에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패전 후. 장인 유키나가의 목은 베어졌지만 요시토시는 용서받았다. 그는 마리아와 이혼하여 코니시 가문과의 연을 끊었다. 이 때가 요시토시 33살 때였다.

 

 그때부터 요시토시는 이에야스[家康]의 지시를 받으며 명과 일본의 관계 수복, 조선과의 국교 회복과 무역 협정 체결에 노력하다 48살 때 죽는다.

 그 노력은 에도 시대[江戸時代]의 조일(朝日) 외교의 기초를 쌓은 것이기에, 외교-절충으로 바뻤던 이 15년의 세월이 그의 너무 빨랐던 '말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일 국교 회복에 조력

 

 쓰시마 번[対馬藩]의 조일 강화교섭(講和交涉)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퇴한 다음 해인 1599년에 이미 착수되고 있었다.

 쓰시마는 돌이 많고 거친 땅이기에, 섬에서는 거의 쌀을 얻을 수 없어 조선과의 무역으로만 섬을 지탱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빨리 무역을 재개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야스는 아직 무역에 대해서까지는 생각이 없었지만, 쓰시마 번은 스스로의 존재 가치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이 교섭을 추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요시토시는 이 해와 다음 해(1600)에도 강화 교섭의 사자(使者)를 조선으로 보냈지만, 그들은 잡힌 후 아직 조선에 머물고 있던 명군에 넘겨져 돌아오지 않았다. 그 명군이 일본에서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가 일어날 즈음 귀국한 후부터 또다시 강화 교섭을 진행시켰지만 사태는 호전되지 않은 채 1604년을 맞이한다. 이 해에 부산에서의 무역을 허가하는 사승(使僧 유정(惟政)손 문욱(孫 文彧)이 일본 국내의 상황을 살핀다는 숨겨진 임무를 가지고 조선에서 파견되었다.

 

 이에야스와 히데타다[秀忠]가 - 요시토시와 함께 상경(上京)한 이들과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회견한 것은 다음 해인 1605 3월이다. 후에 요시토시는 조선과의 국교를 담당하는 입장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막부(幕府)에 인정받아 히젠[肥前] 내에 2800석을 따로 하사 받았다. 이를 보면 이에야스가 조선과의 관계 수복에 차츰 적극적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는 사이 1607 1월.

 조선 사절단(정사 여우길(呂 祐吉), 부사 경 섬(慶 暹), 서장관 정 호관(丁 好寬)) 460명이 파견되어 요시토시와 함께 쓰시마에서 에도로 가서 쇼우군[軍] 히데타다를 만났다.

 외국 사절단(使節團)이 에도로 온 것은 획기적인 것으로, 토쿠가와 막부의 위세를 일본 국내에 알릴 수 있는 효과도 가져다 주었다. 히데요시로 인해 무너진 조일 관계는 이렇게 겨우 수복되어 국교가 회복된 것이다.

 

조선 무역을 재개

 

 사실을 말하자면, 요시토시는 조선 사절과 이에야스 사이에서 이에야스의 국서(國書)와 조선의 국서를 위조했던 것이다. 이유는 길어지기에 생략하지만 그런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무엇보다 쓰시마를 위해서 조일 무역 회복을 너무 갈망(渴望)한 나머지 그랬던 것이다.

 조일 무역은 1609기유약조(己酉約條)로 재개되었다. 조선과 쓰시마 번[対馬藩] 사이에서 맺어진 이 무역협정은 예전과 비교하면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요시토시는 완전 부활을 목표로 노력하던 중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夏の陣] 직전에 쓰시마에서 죽었다.

반쇼우 원[万松院]에 있는 요시토시의 묘(墓) - 나가사키 현[長崎県] 이즈하라 정[厳原町]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1.13 1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서를 어떤 식으로 위조했나요?
    조선에 보내는 것은 아무래도 바쿠후 쪽이 더 비굴하게 보이도록 했겠죠?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15 15: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못하면 이녀석도 참수당할뻔 한건가요..ㅎㄷㄷ;;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15 1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턴오버님//저도 확실한 것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조선이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하면서 우선 바랬던 것이, 어느 왕족인지 왕인지의 능을 파헤친 놈을 잡아오라는 말에, 쓰시마에 있던 죄인(나이가 임진년 당시에는 2~3살 정도 되는)을 데려왔는데, 말을 못하게 수은으로 목을 지져놓은 놈을 데려왔다고 하더군요. 어쨌든 후에 쓰시마의 가로가 저런 국서 의조를 바쿠후에 일러바친 사건(이에미츠 때의 일)이 있었는데, 바쿠후는 그냥 쓰시마의 손을 들어 주었다고 하더군요. 차후에 그에 대한 포스트를 자세히 조사해서 올려볼 생각(먼 훗날의 이야기겠지만요 ^^)입니다.

    다메엣찌님//아마... 기독교로 개종했던 이유는 코니시 유키나카와의 끈을 강화하기 위함이 아니었을지... 코니시의 가문은 약 가게로 유명했는데, 조선의 대일무역 주력 상품 중에 하나가 인삼... 그런 조선과의 일본 측 창구는 쓰시마.. 인삼을 매개로 쓰시마와 코니시 가문이 묶여져 있고, 또한 코니시 유키나카는 일본 중앙 정계에서 파워 엘리트...였지만, 세키가하라에서 코니시 가문은 몰락... 필요 없어졌으니 이혼 & 개종... 아마 기독교는 필요에 의해 선택했던 만큼, 참수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쓰시마의 주력은 남만무역이 아닌 조선무역이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