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쵸우슈 한[長州藩]은 매년 1월1일이 되면 하기 성[萩城]의 가장 깊숙한 방에서 비밀 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중신들이 번주(藩主)에게 신년 인사를 올린 뒤, 필두 가로가 앞에 나아가, “올해는 어떻게 할까요?”라 물으면 번주가 “아직 이르네”라 답하는, 아주 간단한 의식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의 진위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의 원한을 잊지 않고 복수전의 시기를 주종간에 문답한다는 것이 정말 쵸우슈우[長州]다운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패하여 츄우고쿠[中国] 8개국[国][각주:1]이라는 거대한 영지에서 단번에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2개국으로 감봉된 당사자 - 그것이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이다.
 테루모토
는 시대의 영걸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손자이다. 1563년 테루모토의 부친 타카모토[隆元]가 지 아비 모리나리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불과 11살의 나이로 가문을 이었다. 당연 어린 테루모토를 대신하여 모토나리가 실질적인 당주로 정무를 계속 보았고,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 천[両川] ’이 모토나리를 보좌하는 체제가 성립되었다. 
 모토나리는 어려서 아비를 잃은 테루모토가 건강하고 예의 바르게 성장해 줄 것을 기도했다. 그리고 그 바람대로 무사히 테루모토는 15살의 봄을 맞이했다. 모토나리는 그 기쁨을 편지로 써서 테루모토의 모친에게  보낼 정도였다.

 테루모토는 위대한 할아버지에게 응석을 부리는 감이 있었다. 모토나리가 1567년 은거하려고 하자,
 “아버지 타카모토는 40살이 되어서도 뒤를 돌보아 주셨으면서 이제 막 15살이 된 저를 버리시려고 하시다니 뭐라 할 말도 없사옵니다. 그러니 저도 모우리 가문[毛利家]을 버리고 어디까지건 할아버지가 가시는 곳에 따라가겠습니다.”
 며 정말 아이처럼 우는 소리를 해댔다.
 모토나리는 이런 테루모토를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한편 귀엽다고도 생각했다.[각주:2]

 테루모토가 13살인 1565년.
 모우리 가문[毛利家]는
토다갓산 성[富田月山城]의 아마고 가문[尼子家]을 공격하였는데 이 때가 테루모토 전쟁터 데뷔였다. 4월 16일 테루모토는 모토나리에게 선봉에 서고 싶다며 자원하였다. 그러나 이날 적은 아마고의 주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킷카와 모토하루,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모우리 가문의 당주가 데뷔전을 치를만한 상대가 아니라며 테루모토의 선봉을 막았다. 테루모토는 크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어린 테루모토는 장수(將帥)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지 못했다기 보다 테루모토 자체가 격정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이었던 듯 하다. 시간이 흘러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그런 테루모토를 ‘대장의 그릇이 아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즉 테루모토는 정치적 감각이 결여된 인물이었던 듯 하다.

 예를 들면 1574년 빗츄우[備中] 미무라 사네치카[三村 実親][각주:3]의 키노미 성[鬼身城]을 공격하였을 때, 사네치카를 손녀사위로 둔 오우미 뉴우도우[近江 入道][각주:4]가 자기 가문만 살려 주면 사네치카를 잡아다 바치겠다고 하자, 테루모토는 그 더러운 수법을 절대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략을 중시하는 다른 중신들이 오우미 뉴우도우의 내응을 받아들이도록 테루모토를 설득시켰다고 한다.

 또한 1578년에는 ‘양 천[両川]’이 목숨을 살려주자고 하던 아마고의 유신(遺臣)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 鹿之助]를, 테루모토는 2번이나 살려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반항한 은혜를 모르는 놈이라며, 독단으로 시카노스케를 죽였다.[각주:5]

 1571년 모토나리의 죽음 이후에도 이런 성질 급한 테루모토가 큰 실수 없이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양 천[両川]’  중 하나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잘 컨트롤했기 때문이다. 모토나리가 죽은 뒤 모우리 가문은 과감한 킷카와 모토하루, 진중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모우리 가문의 양 기둥이 되어 모우리 가문의 안태를 지키고 있었다. 테루모토는 이 두 숙부 중 성격적으로는 모토하루에 가까웠지만 접촉의 기회는 타카카게 쪽이 많아 정치력이 탁월한 타카카게의 의견을 자주 따랐다.[각주:6]

 하지만 성격적으로도 대조적인 ‘양 천[両川]’은 1577년부터 시작되는 오다 가문[織田家]와의 전쟁 속에서 대응법을 둘러싸고 차츰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1582년 히데요시[秀吉]가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가 지키는 빗츄우 타카마츠 성[高松城]를 포위하였을 때 킷카와 모토하루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대립은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때 킷카와 모토하루는 철저항전을,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강화교섭을 주장한 것이다.
 결국 천하의 정세에 밝은 타카카게의 주장으로 인해 사태는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조건으로 강화교섭으로 이어졌다.
 이때 테루모토는 상기의 움직임 속에서 타카카게 노선을 따르기는 하였지만, 위험에 빠진 타카마츠 성의 구원을 주장하며 무네하루의 목숨과 바꾸어 강화교섭에 나서는 것에 세찬 거부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테루모토 자신의 의지와 반대되는 것이었다. 테루모토는 무네하루의 유족들에게 직접 위로의 말을 전하고 후히 대했다.[각주:7] 이보다 전에 ‘말려 죽이기[干殺し]’ 작전이 펼쳐진 톳토리 성[鳥取城]의 킷카와 츠네이에[吉川 経家]의 유족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했다.[각주:8]

 1582년 히데요시를 혐오하던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가 은거하고 4년 뒤에는 죽어, 모우리 가문은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 하에서 활로를 찾으려 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노선을 밟아가[각주:9], 1588년에는 테루모토가 히데요시에게 초청받아 타카카게,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 모토하루의 아들]와 함께 상락(上洛)하여 쥬라쿠테이[聚楽第]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환대를 받고 임관의 영예[각주:10]까지 맛본 것이다. 즉 모우리 가문[毛利家]은 완전하게 토요토미 정권에 속하게 된 것을 의미했지만 그것이 테루모토가 바라는 방향이기도 했다.

 1597년. 모우리 가문의 기둥이었던 코바야카와 타카카케가 죽고 다음 해인 1598년에는 히데요시가 죽었다. 모우리 가문의 중추는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로 옮겨져, 코바야카와 노선의 후계자는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와의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생겼다. 양자는 각자 놓여진 입장에 따라 킷카와 히로이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무공파 다이묘우[大名]와 친했고, 안코쿠지 에케이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와 손 잡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決戦] 때 테루모토는 안고쿠지 에케이의 요청에 응하여 서군의 총수가 되어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하였다. 히로시마[広島]를 출발할 때 중신 대부분이 반대했음에도 테루모토는 굳이 출마하였다고 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오대로(五大老)[각주:11] 중 하나로 선정된 은혜를 갚기 위함이었으나,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교활한 정권탈취를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일지도 – 격정가(激情家)인 테루모토라면 양쪽 다 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리 데루모토[毛利 輝元]
1553년 출생. 히데요시[秀吉] 휘하가 되자 시코쿠 정벌[四国征伐][각주:12],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13]에 참가하였고,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4]에도 참가. 1595년에는 오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총사령관으로 출진[각주:15].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패하여 120만석에서 수오우[周防], 나가토[長門] 36만석 9천석으로 감봉되었다. 1625년 4월 죽었다. 73세.

  1. 나가토[長門], 스오우[周防], 이와미[石見], 아키[安芸], 이즈모[出雲], 빈고[備後], 빗츄우[備中], 호우키[伯耆]. [본문으로]
  2. 여담으로 이때의 생활을 1613년 테루모토가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 후쿠하라 히로토시[福原 広俊]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11살 때부터 부모님 곁을 떠났고, 13살에 시마네[島根]로 불려가 19살 때까지 할아버지(모토나리)에게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지냈다. 모든 것을 할아버지 의견에 따라야 했으며 때로는 엄청나게 맞은 적도 있다"고 하였다. [본문으로]
  3. 이 당시는 우에다 이에자네[上田 家実]의 딸과 결혼하여 양세자가 되었기에 우에다 사네치카[上田 実親]로 불림. [본문으로]
  4. 우에다 이에자네[上田家実]의 아비 [본문으로]
  5.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의 명령이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6. 앞서 언급한 편지에서 테루모토는 이에 대하여 “나는 할아버지에게도 맞았지만 타카카게, 모토하루에게도 엄하게 교육받아 이래서는 몸이 견뎌나질 않겠구나 하고 생각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7. 테루모토는 그의 아들 시미즈 카게하루[清水 景治]를 중용하였고, 카게하루는 세키가하라 이후 감봉으로 인해 힘든 모우리 가문의 재정상황을 재건하는데 힘썼다. [본문으로]
  8. 츠네이에의 아들 츠네자네[経実]는 이와쿠니 번[岩国藩] 킷카와 가문의 사숙노[四宿老]의 한 명이 되었다. [본문으로]
  9. 여담으로 킷카와 모토나가와 형 모토나가[元長]까지 죽어 킷카와 가문[吉川家]의 당주가 된 히로이에는 이런 타카카게를 '타카카게는 히데요시 밑으로 들어간 결단을 자신의 가장 큰 공적이라며 자랑했다'며 빈정댔다. [본문으로]
  10. 토요토미 씨[豊臣氏]가 되어 토요토미노 테루모토[豊臣 輝元]라는 이름으로 종사위하(従四位下) 지쥬우[侍従]에 임명되었고. 같은 날 산기[参議]가 됨. [본문으로]
  1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2. 1585년 히데요시가 시코쿠[四国]의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를 공격한 전쟁. 테루모토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를 1진, 킷카와 모토나가[吉川 元長]를 2진으로 출진시켰을 뿐 참가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3. 1586년~1587년 사이에 히데요시가 시마즈 가문[島津家]에 공격당하던 큐우슈우[九州]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구원요청에 응하여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14. 테루모토는 쿄우토[京都]를 수비하는 역할을 맡아 칸토우[関東]에는 가지 않았다. 대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모우리 가문의 군세를 이끌고 히데요시 주변을 지켰다. [본문으로]
  15. 테루모토는 정유재란 때 병으로 참가하지 않았다. 참가한 것은 테루모토의 대리인[名代]으로 우군(右軍) 사령관이 된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였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05.11 07: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나도 빛나는 별이었던 모토나리, 다카모토, 모토하루, 다카카게의 곁에 있었던 터라 데루모토라는 별의 빛이 가렸던 것 같습니다. 세키가하라라는 최악의 악수를 비록 두기는 했지만 그 이후 영국의 경영이나 가신단의 체제 재정비 등을 본다면 암군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어보입니다. 어쩌면 좋은 할아버지와 숙부를 만나서 엄하게 다뤄진 것이 효과를 거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한자를 보고 즉석에서 생각난 농담입니다만. 시즈키(指月)를 직역하면 달을 가리키다, 즉 천하를 가리키다라고도 될 수 있겠군요. 과연 모리에게 가장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었을런지.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11 07: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테루모토를 높게 평가하는 편입니다.

      어떤 일화에 히데요시가 쿠로다 칸베에에게,
      "만약 내가 죽으면 누가 천하를 쥘 것 같나?"
      라는 물음에 칸베에가,
      "모우리 테루모토겠죠"
      라고 하자 히데요시는, 그렇지 않네.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천하를 쥘 것일세...
      라는 일화가 있습죠. 여기서는 칸베에를 높여주려고 했나 봅니다만, 테루모토 역시 천하를 손에 넣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일화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도련님은 맞으면서 커야 하나 봅니다.

      달...을 천하와 대칭시키나요? 이런 쪽은 지식이 부족해서 잘 모르겠군요.

  2. Gyuphy IV 2011.05.11 16: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할아버님한테 칭얼대는 테루모토씬을 전국무쌍3에서도 본적이 있는데 그게 실제 있었던 에피소드에서 유래된것이었다..는데에 좀 놀랐습니다(..)

    그러고보면 세키가하라의 최악의 한수... 뭐 그렇다 쳐도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3년 더 살았다 하더라도 세키가하라때 천하를 노리지는 못했을것 같다는게 제 생각이네요. 기껏해야 마에다가 정도의 영지안도쯔음으로 끝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군요. 어이쿠 뭐 지식이 일천해서 그저 제 단견일 다름입니다만..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11 23: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타카카게가 살아 있었음 금오중납언 히데아키도 섣부리 나서지 못했겠지요. 아무래도 히데아키가 데려온 상층부 일부를 제외하곤 나머진 타카카게의 의향에 따랐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무엇보다 그 조심스럽다는 이에야스다 보니 마에다 토시이에 때와 마찬가지로 어느정도 대화로 풀어나가려 했을 것 같습니다.

  3. 맹꽁이서당 2011.05.11 2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세키가하라 때 우에스기 가게카스의 행동을 놓고 질문을 드린 적이 있었는데 (싸우려면 싸우고 말면 말지 난의 시발점을 일으켜놓고 가만히 대치한건 무슨 의도였나), 모리 데루모토에 대해서도 '대망'을 읽으면서 비슷한 생각(제대로 싸우든지 말든지, 서군 총대장으로 추대되고 나서 왜 가만히 있었나)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리 가 내부에 이런 노선 갈등이 있었군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11 2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모리 가문 내부 갈등은 제가 생각하던 것 이상이더군요.

      특히 킷카와 가문[吉川家] 그것도 세키가하라 때 대활약(??)을 펼친 히로이에[吉川広家]의 삐뚫어진 정신상태가 재미있더군요.

      이건 언제 따로 포스팅을 하려 합니다.

  4. 본다충승 2011.06.03 14: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대로 물 먹으셨지예~ ㅎ 이 양반 유족 처리에 관해선 좀 의외네요. 세키가하라엔 당시 아마 데루모토 본인 대신 양자 히데모토가 대리출정 했지요? 그 히데모토의 본진을 막아서고 공격하지 못하게 땡깡부린게 히로이에 ㅎ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7: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테루모토가 물 먹은 건에 대해선, 당시의 시스템 상(토리츠기[取次] 제도) 굉장히 신의에 벗어난 짓을 한 것 같더군요. 테루모토(...아니 킷카와 히로이에 조차)가 속을 만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토리츠기가 정한 것은 대개 인정받던 시대였거든요)

      개인적으로 히로이에가 모우리 가문을 작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이에 대해서 따로 포스팅하겠습니다.

  5. 123 2011.08.27 2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기 번의 새해 첫 회의 부분 수정 바랍니다.
    가신이 "올 한 해 도바쿠(토막討幕, 막부를 쓰러뜨리는 일)의 일은 어찌 하실 것입니까?"라고 물으면
    번주가 "시기상조일세"라고 대답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하는 게 옳습니다.

    최근 모리 가의 당주가 TV에서 자기는 정작 그런 관습에 대해 종가에서 들은 바가 없는데,
    아마 후세의 창작일 거라고 대답했다고 하는군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30 09: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선 리플 늦어진 것에 사과를 드립니다.

      "옳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밑에 123님도 써 놓으셨듯이 실제 있었는지가 의문인 상황에서 어째서 그렇게 확실한 어투로 "옳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수정을 요구하시는지요?

      거기에 일본방송을 보셨으니 일본어를 아실테니 御庭番의 임무 중 遠国御用라는 것이 있으니 찾아보실 것을 권합니다. 과연 번주와 중신의 대화에서 감히 "討幕"이란 단어를 쓸 수 있는지 회의감이 드실 것입니다.

  모리 타헤에[母里 太兵衛][각주:1]라고 하면 ‘쿠로다 타령[黒田節]’[각주:2]으로 유명한 무인이다.
 노래 속에 등장하는 ‘히노모토 제일의 창[日ノ本一の槍]’ 니혼고우[日本号]는 원래 궁중에 있던 것이라고 하며, 오오기마치 텐노우[正親町天皇]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게 하사한 것이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거쳐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 전해진 것이다. 창날이 약 70cm 거기에 약 2m30cm의 푸른 창자루가 달린 창이다.
 
어느 날 마사노리가 사자로 파견된 타헤에에게 술을 강제로 먹이려고 하면서, 이걸 마시면 뭐든 바라는 것을 준다고 하며 커다란 잔에 술이 넘치도록 따라서 주자 타헤에는 그것을 완샷하고 난 뒤 니혼고우의 창을 냉큼 집어 들고 왔다고 한다[각주:3]. 즉 술로 따낸
것이다.

니혼고우[日本号]의 창날의 앞뒷면. 상기의 링크와 함께 보시길.

타헤에는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를 섬겼으며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와는 동료였다. 임진왜란 때는 쿠로다 카즈시게[黒田 一成][각주:4], 고토우 마타베에와 서로 번갈아 가며 선봉대장을 맡았다. 쿠로다 가문[黒田家]이
치쿠젠[筑前] 52만석의 대봉(大封)을 받았을 때, 타헤에도 쿠라테 군[鞍手郡] 타카토리 성[鷹取城] 1만 8천석의 높은 봉록을 하사 받았다. 가신이라고는 해도 다이묘우[大名] 클래스의 석고(石高)였다.

 타헤에는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기풍을 사랑하던 사나이로 상대가 주군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꺾는 일이 없었다.
 주군 나가마사의 적자 만토쿠마루[満徳丸=후의 타다유키[忠之]]가 4살이 되어 처음으로 바지[袴]를 입는 축하연 때의 일이다. 만토쿠마루의 후견인[お守り]이 된 타헤에는 이 아기를 무릎에 앉히고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서 어른이 되셔서 아버님을 능가하는 공명(功名)을 세우소서”
 라고 말하였다.
 나가마사는 그것을 듣고 화를 내며,
 “타지마(但馬=타헤에)!! 아비를 능가하는 공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조선에서도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지금처럼 태평스러운 시대에 어떻게 만토쿠마루가 나를 능가하는 공적을 세울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말하며 실언을 취소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타헤에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태연히 만토쿠마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무공을 자랑하다니 어처구니가 없군요.”
 라고 말하며 말을 취소하려 하지 않았다. 험악한 분위기가 되었지만 옆방에 있던 노신 쿠리야마 토시야스[栗山 利安]가 중재하여 겨우 나가마사는 화를 풀었다.
 “이거 내가 실수했네. 이리 와서 이걸 마시게”
 하고 술잔을 건네자, 타헤에는 세 번이나 더 달라고 한 뒤 다 마신 후,
 “오늘은 경하스러운 자리인데 분위기가 내려갔군요. 제가 춤을 추어 다시 분위기를 끌어 올리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일어서 노래 부르며 춤을 추었다.
 이때 쿠리야마 토시야스는,

 “마음 씀씀이가 깊은 것도 주군. 또한 사려가 부족한 것도 주군. 큰 얼간이는 타지마(=타헤에), 또한 믿음직스러운 것도 타지마”
 라고 했다고 한다.

 또 어느 해의 초반 신춘(新春)의 축하연에서 나가마사가 쿠리야마 토시야스의 저택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주연이 시작되어 밤 10시 즈음이 되자 나가마사가,
 “내가 있으면 젊은이들이 맘 놓고 술을 마시지 못하겠지. 난 이만 가니 맘 놓고들 술을 마시게”
 하고 말하곤 돌아가려 하였다. 이때 역시 이 자리에 있던 타헤에가 일부러 큰 소리로,
 “이런 날 좀 더 자리에 앉아서 젊은이들과 속 터놓고 즐기면 좋을 것을… 어쨌든 자기 멋대로인 주군이시군. 정수리에 커다란 뜸이라도 놓아 정신차리게 해야지 이거야 원…”
 라는 말을 내뱉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가마사는 듣지 못했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런 타헤에의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완고함으로 주군이라 하더라도 안중에 없다는 듯한 센고쿠 생존자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술을 좋아하는 타헤에의 일면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타헤에는 고토우 마타베에처럼 주군 가문을 버리는 일이 없었던 것을 보면 완고한 반면 주군 가문에 대한 충성심도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리 다헤[母里 太兵衛]
출생은 확실하지 않지만 씨는 모우리[毛利]였다고도 한다. 이름은 토모노부[友信]로 타지마노카미[但馬守]를 자칭하였다. 쿠로다 요시타카[黒田 孝高=죠스이[如水]]-나가마사[長政]를 섬기며 조선에서도 공을 세워 쿠라테 군[鞍手郡] 타카토리 성[鷹取城] 1만8천석에 봉해졌다.

  1. 위키에 따르면 쿠로다 가문[黒田家] 내에서는 모리는 ‘보리ぼり’라고 읽는 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여담으로 지금도 유명하여, 일본 유명 사회자인 타모리[タモリ]는 상대가 후쿠오카 사람일 경우 “후쿠오카의 결혼식에선 항상 술 취한 할배가 나와서 쿠로다 타령을 부른다”는 소재를 말하는 것을 보면 지금도 유명한 듯. [본문으로]
  3.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의 정전기에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파견된 모리 타헤에에게 마사노리가 자꾸 술을 권했다. 타헤에는 행여라도 실수할까봐 계속 거부했지만, 마사노리는 '마시면 뭐든 다 주마'라고 하며 결국에는 '술도 못마시는 쿠로다의 무사' 운운해대며 쿠로다 가문을 굴욕하자 술을 다 마신 뒤 '니혼고우'를 달라고 해서 가져왔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의 가신 카토우 시게노리[加藤 重徳]의 아들.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가 노부나가를 배신한 아라키 무라시게를 설득하러 갔다가 잡혔을 때 죠스이를 극진히 보살폈다고 한다. 그때의 보살핌을 잊지 않은 죠스이는 무라시게가 패해 몰락한 카즈시게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쿠로다 가문[黒田家]의 일문으로 대했다. 후에 쿠로다 가문이 치쿠젠 52만석에 봉해지자 그도 1만 6200여석에 봉해져 그의 후손은 대대로 쿠로다 가문 필두중신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gorekun.com BlogIcon 고어핀드 2011.03.14 2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노부나가의 야망>을 할 때 언제나 애용하는 무장이지요. 보통 성격이 완고하면 딱딱하고 매력이 없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데, 이 무장에게 남겨진 이야기들을 읽어 보니 오히려 아주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무장을 더 즐겨 쓸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요.

    +1. 그리고 니혼고우의 사진은 생전 처음 봅니다만... 저 창에 새겨진 것은 금강저라 하여, 부동명왕이 들고 다니며 마귀를 물리칠 때 쓰는 칼입니다. 부동명왕이든 금강저든 칼이나 창에 자주 새겨지는 대상이지요. 어쨌든, 굉장히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15 0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http://hima.que.ne.jp/tendou/tendou_data_d.cgi?equal1=E402 에 따르면 천도에서는 통솔 71에 무력 90이군요. 근데 저같은 경우 예전 시리즈를 할 때 보면 항상 오다 가문으로 하다 보니 모리 타헤에를 얻을 때 즈음(등장도 1571년이니)이면 이미 쩌리가 되더군요.

      과연 고어핀드님!!
      좋은 설명 감사드립니다. ^^
      위키에서 니혼고우에 대해서 찾아보니, 너무 아름다운 창이어서 창 제작의 장인들은 실력이 되면 일생에 한번은 복사에 도전한다고 하는군요.(그런 만큼 복사품도 많다고 하네요.)


 닛코우[日光]에 가면 토우쇼우 궁[東照宮][각주:1]에 있는 돌로 만들어진 오오토리이[大鳥居]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이는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가 저 먼 큐우슈우[九州]에서 거대한 바위를 옮겨와 건조한 것이다.
 
당시로써는 굉장히 힘들었을 듯한 이런 공정을 나가마사는 어떻게 해낼 수 있었을까?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에도[江戸]에서 닛코우로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 돌기둥 하나를 배 한 척에 싣고, 그 배의 양쪽에 굵은 밧줄을 연결한 배 두 척이 끌게 하였다. 육로로 옮겨지자 슈라구루마[修羅車]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나 큰 목재를 옮기는 수레에 싣고 수 마리의 소로 끌게 하였다. 닛코우로 가는 길은 흑토(黑土)라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두꺼운 널빤지를 200여 미터정도 빈틈없이 깔아가며 옮겼다.
 
오오토리이를 조립하는데도 고생하였다. 기둥을 양쪽에 세운 후 상부에 돌을 얹어야 했는데, 나가마사는 근처에 사는 백성들에게서 쌀, 보리, 메밀, 콩을 채운 가마니를 사 모은 뒤 이 가마니를 쌓아 발판으로 삼고 도르래를 장치하여 돌을 끌어 올렸다. 이것만으로도 천 명을 필요로 하는 대공사였다고 한다. 나가마사는 호쾌한 기술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가마사는 덩치가 컸기에 전쟁터의 모습은 괴물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가신(家臣) 시마 사콘[島 左近]은 '일본에서 가장 용맹한 무사'라고 경외 받았는데, 어느 날 갑주를 입고 살기를 풍기는 사콘을 보고 사콘의 부인조차 공포에 떨었다. 그러자 사콘은 "참 겁도 많으시군. 쿠로다 카이노카미[黒田 甲斐守=나가마사]가 갑주 입은 것을 보면 아예 기절하시겠구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쟁터에서의 활약도 매우 열정적이었다.
 
용맹하기로 유명한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는 나가마사의 부친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 때부터 쿠로다 가문의 가신이었는데, 나가마사는 전투에서 언제나 이 마타베에와 치열한 공적다툼을 벌였다. 가신들이 목숨을 아까지 않는 이런 무모한 모습에 간언하자,
"아버지(죠스이)가 안 계시다면 아들 타다유키[忠之]에게 선봉을 맡기고 나는 후방에서 지휘를 하겠지만, 아직 아버지는 건재하시다. 만약 내가 전사하더라도 우리 집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
 라고 말했다 한다.

 부친 죠스이의 교육 방침으로 나가마사와 마타베에는 형제처럼 자랐지만 그것이 역기능으로 작욕하여, 둘은 어렸을 때부터 끝없이 싸웠다.[각주:2] 결정적으로 사이가 틀어진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마타베에는 나가마사가 강 한가운데서 조선 장수[각주:3]와 필사적으로 격투하고 있는 것을 방관만하며 도우려하지 않았던 것이다[각주:4].
  나가마사에게는 마타베에가 하는 짓 하나하나가 맘에 들지 않았다.
  전의관(全義館)에 포진하고 있을 때 호랑이가 마굿간에 침입하여 말을 잡아먹은 사건이 일어났다. 가신 칸 마사토시[菅 政利][각주:5] [각주:6]가 퇴치하고자 달려들었지만 호랑이는 더욱 날뛰었다. 마사토시가 위험에 처하자 마타베에가 달려들어 호랑이의 미간에 두 번 칼질을 퍼부어 겨우 잡았다고 한다. 나가마사는 마타베에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한 부대의 대장이라는 자가 축생과 싸우다니 이 무슨 짓이더냐?"하고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각주:7]

 1606년 결국 나가마사와 마타베에는 헤어진다. 나가마사가 노[能]를 관람하는 자리에서 마타베에의 아들 모토노리[基則]에게 작은 북[小鼓]을 치게 만든 것에 분노[각주:8]하여 마타베에는 1만6천석의 가록(家祿)을 버리고 쿠로다 가문을 떠났다.[각주:9]

 나가마사는 무용일변도인 외견과는 달리 굉장히 뛰어난 정략가(政略家)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죽은 뒤의 혼돈스런 정치정세 속에서 토쿠가와 정권수립을 위해 암약한 것이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토벌군을 일으켜 시모츠케[下野]의 오야마[小山]까지 갔을 때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병 소식이 전해져 왔다. 여기서 토쿠가와 가문의 운명을 나누는 사상 유명한 오야마의 군의[小山の軍議]가 열리게 되었다.

 이에야스를 따라온 다이묘우[大名] 대부분이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의 다이묘우였다. 거기에 미츠나리는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명령에 따라 토쿠가와 타도의 병사를 일으켰다고 하였다.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의 향배가 이에야스의 운명을 쥐고 있었다. 이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존재가 급격히 클로즈업 된다. 히데요시가 손수 키운 맹장(猛將)이며 히데요리에 대한 충성심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그런 사내가 토쿠가와 편에 선다고 표명한다면 다른 장수들도 전부 이에 따를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가마사는 이런 흐름을 민감히 캐치하여 이에야스에게 부탁받기 전에 마사노리의 진소(鎭所)를 방문하였다. 나가마사는 다음과 같이 마사노리를 설득했다고 한다.
  "미츠나리놈은 토요토미 가문을 위해서라고 떠벌리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천하를 쥘 심산이다. 생각해보게나. 어리신 히데요리님에게 거병의 의지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마사노리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무공파 다이묘우[武功派大名]의 대표격인 인물로, 문치파인 미츠나리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나가마사는 마사노리의 그런 증오심을 자극한 것이다. 마사노리는 나가마사의 교묘한 설득에 넘어가 단번에 미츠나리에 대한 적개심을 일으켜 미츠나리와 싸우는 것을 맹세한 것이다.

 다음 날 열린 오야마 군의는 마사노리가 발언한 말에 따라 장수들은 전부 토쿠가와 측에 서게 된 것이다. 이에야스는 나가마사의 행동이 굉장히 기뻤는지 애용하던 투구와 말을 한 마리 주었다. 나중에 나가마사에게 치쿠젠[筑前] 52만 3천석이라는 거대한 영지를 준 것도 이 오야마 군의에서의 공적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각주:10]

 정계의 막후 모사라 할 수 있는 정치력을 가진 나가마사였지만 그의 부친 죠스이의 기량에는 결국 이르지 못했다. 나가마사는 항상, "나는 14살 때부터 여러 번 공적을 세웠지만 사람들은 조금도 칭찬해 주지 않았다.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의 아들]는 천하의 누구나가 그의 무용을 칭송한다. 이는 요시나가의 부친 나가마사에게 특별한 무공(武功)이 없었기 때문에 요시나가의 이름이 빛나는 것이다" 라고 하며 은근히 너무나 위대했던 아비를 갖았다는 것에 한탄하였다고 한다. [각주:11]

 그렇다고 하여도 부친 죠스이의 영향은 커 영지경영에 대한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부친의 방식을 지켰으며, 임종할 때에도 아들 타다유키에게 오로지 죠스이의 노선을 지키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구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1568년생. 요시타카[孝高=죠스이[如水]]의 아들. 1589년 가문을 이어 부젠[豊前]의 6개 군(郡)과 카와치[河内] 탄보쿠 군[丹北郡][각주:12]을 영유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에도 출진하여 김해성(金海城) 공략. 1597년 정유재란에서는 직산(稷山)에서 1만의 명나라 군을 격파[각주:13].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부젠 18만석에서 치쿠젠[筑前] 52만석[각주:14]이 된다. 1623년 8월 4일 죽었다. 56세.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 신사(神社). [본문으로]
  2. 여담으로 쿠로다 죠스이가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를 설득하러 갔다가 잡혀 유폐되었을 때, 마타베에의 백부 2명이 쿠로다 가문을 떠나는데, 마타베에도 함께 쿠로다 가문을 떠나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를 섬긴다. 그러나 나가마사가 마타베에의 기량을 아까워해 다시 불러들였다. 오히려 죠스이는 배신자의 핏줄이기에 가까이 쓰지 말라고 하여, 나가마사는 쿠리야마 시로우에몬[栗山 四郎衛門]의 요리키[与力]로 삼아 100석만 주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이응리(李應(応)理)라고 하는데 누군지 모르겠음. [본문으로]
  4. 당신의 주군이니 구하라고 하는 코니시[小西] 부대 사람의 말에 "내 주군이라면 저 정도로 죽지는 않을 것이오" 라고 고토우 마타베에는 말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나가마사는 간신히 이기고 나왔는데, 마타베에는 태연히 부채질하면서 구경하고 있었기에 벙쪄했다 한다. [본문으로]
  5. 菅은 '스게'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6. 사족으로 이 칸 마사토시는 세키가하라에서 시마 사콘[島 左近]을 부상(혹은 사망)당하게 하는 철포대의 지휘관이었다. [본문으로]
  7. 물론 칸 마사토시도 함께 혼났다. [본문으로]
  8. 모토노리는 원래 작은 북을 잘 쳐 나가마사가 시킨 것이기는 했지만, 무사인 자신이 연극배우[能楽師]의 흥을 위해서 치는 것에 굴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아비인 마타베에에게 일러 일이 발생. [본문으로]
  9. 마타베에의 영지는 오오쿠마 성[大隈城]였는데, 이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興元]의 영지와 인접한 곳이었다. 쿠로다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이는 호소카와 가문이 부젠[豊前]에 오기 전 영주인 쿠로다 가문이 치쿠젠으로 이동하면서 연공(年貢)을 싹슬이 가져가는 바람에 호소카와는 초기 영지경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만큼 쿠로다 나가마사를 미워했다. 나가마사 역시 자꾸 항의하는 호소카와 가문에 화가 나 가신들에게 호소카와 가문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하였다. 호소카와를 감시하고 압박을 주라고 배치한 마타베에가 오히려 호소카와와 친하게 지내자 나가마사가 자주 화를 내었기에 이런 불화가 쿠로다 나가마사와 코토우 마테베에 양측에 쌓인 면도 있다. [본문으로]
  10. 거기에 세키가하라 때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가 배신하도록 암약한 것도 나가마사였다고 한다. 전투가 행해질 때 히데아키가 배신을 하지 않자 초조해진 이에야스는 나가마사에게 사자를 보내 히데아키가 배신을 하는 것이 확실한지 다그칠 정도였다. 즉 히데아키는 나가마사가 담당했다. 여담으로 다그치는 이에야스의 사자에게 나가마사는, “히데아키가 배신할지 어떨지 내가 지금 그걸 어케 알어!! 싸우기 바쁜데 짜증나게 할래?”…라고 했다고 한다. 보고를 들은 이에야스는 짜증이 확 나 왼손 엄지손가락 손톱 물어뜯어 피 철철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그러나 효심은 깊어, 시즈가타케[賤ヶ岳]의 전초전인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 盛政]의 강공 때 사쿠마 군세의 공세에 놀란 죠스이가 죽음을 각오하며 부하 쿠리야마 시로베에[栗山 四郎兵衛]에게 아들을 데리고 도망가라고 하여 쿠리야마는 나가마사에게 아무 것도 알리지 않은채 나가마사와 함께 전장을 벗어났다. 나중에 쿠리야마에게 이동지를 묻다가 사정을 알아챈 나가마사는 “아무리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아들이 아비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다”면서 전장으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덧붙여 이 시즈가타케에서 수급을 얻어 450석을 하사 받음. [본문으로]
  12. 전부는 아니고 쿠로다 나가마사의 시즈가타케 활약 450석 +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 때 후방을 노리던 네고로[根来], 사이카[雑賀]를 격퇴하여 2000석 + 쿠로다 죠스이 가족 재경료 500석. [본문으로]
  13. 직산 전투를 말하는 것인데, 명나라 기병 4000에 쿠로다 5000의 격돌. 몇 차례 접촉은 있었으나 서로 물러났음. [본문으로]
  14. 치쿠젠 전부, 히젠[肥前] 2군(郡), 치쿠고[筑後] 2군을 포함하여 정확히는 52만2천4백여석.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03.08 0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망의 세키가하라 전투 대목을 읽다보면 마쓰다이라 다다요시가 나가마사와 마타베에의 일화와 똑같은 포지션에 놓이는 일이 있었지요. 소하치씨는 뻔뻔한(?) 소설가인 셈이군요.

    그러고보니 다케나카 가문은 시게카도가 번을 세웠나요? 한베에는 구로다 가문의 큰 은인셈이지만 자기 가문엔 마땅한 역할을 하지 못한 셈이 되는건데 말입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08 08: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 어떤 에피소드인가요? 대망은 노부나가 죽은 이후부터는 읽질 않아서요.

      입번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전쟁터에서도 분발하고 나름 큰 공적(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생포)에 자기 영지에서 전투(세키가하라)가 일어났는데도 가증을 못 받은 것을 보면 정치외교력이 부족했던 듯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03.08 18: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망 9권 '늙은 호랑이와 젊은 표범'이란 챕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탈출과 이이 나오마사와 마쓰다이라 다다요시의 추격이 주 소재인데 여기서 다다요시는 혈기를 참지 못하고 섣불리 추격을 하다가 시마즈 무사에게 목숨을 잃게 될 상황에 처하지요.

      이때 (여기선 이에야스의 전령이라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호로무사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오구리 다이로쿠란 도쿠가와 무사가 지나가다가 요코타 진에몬이란 다른 무사가 다다요시를 구해주려는 것을 저지합니다. 다다요시는 가까스로 살아나온 후 눈이 벌개져 다이로쿠와 진에몬을 찾지만 이미 주위에선 사라졌지요.

      세키가하라의 피냄새가 멎을 무렵 이에야스가 군대를 점검할때 다다요시가 오구리 다이로쿠에 대해 따지게 되고, 이에야스의 질문에 다이로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대장의 신분이었으므로 그리하였습니다"

      이에야스는 다다요시에게 자상한 훈계를 하면서 훈훈한 엔딩을 맞습니다.

      볼때마다 매우 흡사한 에피소드라고 생각됩니다만 학식이 짧은터라 다른 분들에겐 아니라고 느껴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케나카 시게카도가 글솜씨가 뛰어났던 것으로 아는데 애석히도 그쪽의 재주는 없군요. 그러고보면 미노계 인물들 중 마지막까지 웃은 사람은 별로 없다는게 또 역사의 아이러니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09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도련님께서 직접 싸우신다는 것이 우선 에러군요(^^)

      아마 찾으면 좀 있을 것 같지만...
      (당장 떠오르는 것은 모리 란마루 집안의 모리 가[森家]군요. 미마사카 18만석으로 입번하지만 중간에 후계없어서 폐번크리.

      뭐 그래도 미노 계열 중 가장 출세한 사람이라면 이번 년도 NHK대하드라마 고우[江]의 라이벌이 되는 카스가노츠보네[春日局] 인 듯하군요(태어난 곳은 탄바[丹波]라고 합니다만..)

  2. ckyup 2011.03.09 05: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친구에대한 평가는 그렇게 좋치도 나쁘지도 않은것 같던데요, 마사노리나 기요마사와 더불어 전국말기에 흥미를 더해주는 무장임에는 분명한것 같습니다 - 왠지 전투에 데리고 나가서 본진 앞에두면 든든할것 같은....


 센고쿠 시대[戦国時代]는 좋은 주군을 찾아 여러 가문에 발길을 남기는 것이 일상다반사였기에, ‘7번 주군을 바꾸지 않으면 제대로 된 무사라고 할 수 없다’고 일컬어졌을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 전형적인 인물이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였다. 타카토라는 7번 주군을 바꾸었다.

 처음 오우미[近江] 아자이 가문[浅井家]을 섬긴 타카토라는 이때 아직 13살의 소년이었다. 그 당시 일화로 도망자를 처치한 이야기가 있다. 죄를 짓고 도주하다 어느 집에 숨어 들어가 저항하는 죄인을 처치하였는데, 이때 행한 타카토라의 모습에서 그의 인생 전반에 걸친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부친과 형이 집 안에 들어가 죄인과 싸우자, 죄인은 틈을 엿보다 집 밖으로 도망쳤다. 타카토라는 문 근처 그늘에 숨어있다가 도망에 성공했다고 방심한 죄인을 불현듯이 덮쳐 처치하였다고 한다. 즉 정공법보다도 오히려 물밑 정치교섭에 뛰어난 타카토라의 특색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타카토라는 아자이 가문이 아네가와[姉川]에서 오다[織田]-토쿠가와[徳川] 연합군에게 패하여 위세가 낮아지자, 17살에 낭인이 되어 같은 오우미의 아츠지 아와지노카미[阿閉 淡路守]를 섬겼고[각주:1], 그 다음으로 이소노 탄고노카미[磯野 丹後守]를 섬긴다. 둘 다 한 달 어쩌면 수개월 만에 각 가문에 한계를 느껴 오다 노부즈미[織田 信澄]의 가신이 되었지만[각주:2] 노부즈미도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때 누명을 쓰고 살해당했다. 노부즈미의 부인이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딸이었기에 미츠히데 일당으로 오해 받아 살해당한 것이다[각주:3].

 다음으로 히데요시[秀吉]의 동생 하시바 히데나가[羽柴 秀長]를 섬기면서 2만석까지 출세. 그제서야 안정을 찾나 싶었더니 그 히데나가도 1591년에 죽었고, 다음으로 히데나가의 양자인 히데야스[秀保]를 섬기지만 히데야스 역시 몇 년 뒤 죽자, 아무리 타카토라라도 한때는 세상을 버리고 코우야 산[高野山]에 은거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히데요시의 소환에 응하여 하산하여 이요[伊予] 7만석에 봉해졌다. 이렇게 타카토라는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 히데요시 휘하에 속하게 된 것인데, 그러는 동안 눈에 뛸만한 무용담이 거의 없다. 타카토라는 창놀림보다는 원활한 인간관계를 추구함으로써 세상을 헤쳐나간 것이다.

 훗날의 일로 그가 부하를 얼마나 능숙히 썼는가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신 중에 유녀(遊女)에 빠진 자와 도박에 미친 자가 있어 둘 다 재산을 모두 잃고 말았다. 타카토라는 유녀에 빠진 자를 좆병진이라며 영구추방하였지만, 도박에 미친 자에게는 100일간 근신과 급료 감봉에 그쳤다. 이 둘에 대한 처분에 차이가 생긴 것은 이러했다. 유녀에 빠져 무기까지 파는 놈은 앞길이 암담하지만, 도박에 미친 자는 남에게 이기려는 호승심이 있기에 무사로서는 아직 쓸만한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각주:4]

 또한 사표를 내고 떠나는 가신에게 타카토라는 그 무사를 초대하여 직접 차를 대접하고 차고 있던 칼을 주면서,
“새로 취직하는 곳에서 맘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다시 돌아오게나”
라는 말을 항상 하였기에 일단 토우도우 가문[藤堂家]을 떠났더라도 다시 돌아와 예전 봉록을 그대로 받은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타카토라는 이름있는 무사를 자신의 가신으로 삼는 것에도 노력하였다. 센고쿠 시대에 탑 클래스 급의 무용을 자랑하던 와타나케 칸베에[渡辺 勘兵衛]를 2만석으로 데리고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쟁터에서는 무명잡배 100명보다도 명성이 자자한 와타나베 칸베에 쪽이 적에게 더 공포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 타카토라의 생각이었다.

 타카토라의 이름이 갑자기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은 히데요시가 죽은 다음부터이다. 혼돈스러운 정세 속에서 타카토라는 그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주인 고르기를 행했다. 타카토라는 히데요시 사후의 천하인(天下人)을 이에야스[家康]로 보고 자주 친해지려고 접근하였으며[각주:5], 그러기 위해 이에야스와 대립하고 있던 사람들의 정보를 크건 작건 세세히 이에야스에게 보고하였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무리가 꾸미던 이에야스 타도 계획을 밀고 한 것도 타카토라였다. 선택 받은 이에야스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죽어 히데요리[秀頼] 후견자로 사실상 No.1 실력자가 되자, 모반을 꾸몄다는 이유를 대며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토시이에의 후계자]와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에게 인질을 바치게 만들었다.
 
이에야스가 이렇게 인질을 얻도록 만든 것이 타카토라였다. 자신도 나서서 동생 쿠라노스케 마사타카[蔵之助 正高]를 에도[江戸]에 보냈다. 곧이어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이 다가오자 타카토라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있어 중대한 역할을 맡게 된다.

 1600년.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했다는 소식에 이에야스는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정벌 중이던 군사를 회군하였지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등의 부대가 오와리[尾張] 키요스 성[清洲城]까지 진출하였는데도, 이에야스 자신은 에도 성[江戸城]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선견 부대의 장수들의 동향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그들은 전부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 다이묘우[大名]들이기에, 갑자기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에게 돌아설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타카토라의 무대 뒤 활약은 이때도 펼쳐지게 된다. 이에야스가 에도 성에서 대기하도록 진언한 것도 타카토라였으며, 키요스 성에 있으면서 다른 장수들의 동향을 시시각각 에도에 보고한 것도 타카토라였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러한 타카토라의 정보에 따라 안심하고 에도를 출발하였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9월 15일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동서(東西) 결전의 막이 올랐다. 여기서도 타카토라의 수면 하 공작이 빛을 발한다. 타카토라의 부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지휘아래서 서군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부대와 싸웠지만 차츰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반이 형세를 역전시켰다. 마츠오 산[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코바야카와 부대가 오오타니 부대의 옆구리를 찌른 것이다. 그리고 오오타니 부대에 속해 코바야카와를 대비하기 위해 배치했던 쿠츠키[朽木], 와키자카[脇坂], 오가와[小川], 아카자[赤座] 등의 약소 다이묘우마저 코바야카와에 동조하여 오오타니를 공격한 것이다. 이 약소 4명의 다이묘우가 배신하도록 사전에 공작한 것이 타카토라였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활약으로 인해 타카토라는 8만석에서 단번에 이요[伊予]의 반인 20만석으로 가증되었다.

 이에야스에 대한 타카토라의 헌신은 계속 이어졌다. 앞서 언급된 동생 마사타카[正高]에 이어, 1606년에는 다른 다이묘우들보다 앞서 처자식을 에도에 보냈을 뿐만 아니라, 휘하 가로[家老] 4명의 자제들까지도 에도에서 살게 만들었다.

 타카토라의 헌신적인 자세는 이에야스가 죽어서도 이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막부(幕府)에 대한 충성으로 닛코우[日光]에 이야야스 묘소 선정, 건물 설립 등에 조력하였으며, 에도 우에노[上野]에는 칸에이 사[寛永寺]가 세워졌을 때에는 지금도 남아있는 우에노 토우쇼우 궁[上野東照宮][각주:6]을  만들어 바쳤다.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1556년 오우미[近江] 아자이 군[浅井郡] 토우도우 향[藤堂郷]에서 태어났다[각주:7]. 아자이 가문[浅井家] 멸망 후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가 1594년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섬겨 이요[伊予] 우와지마[宇和島]에 7만석. 1597년 제2차 조선침공[각주:8]에서는 수군(水軍)으로 출동.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이요[伊予]의 절반을 하사 받았으며, 오오사카 전쟁[大坂の役]에서 세운 공적으로 이가[伊賀], 이세[伊勢] 거기에 더해 시모우사[下総] 카토리 군[香取郡]을 합쳐 총 32만3900여석의 영지를 거느린다. 1616년 4월 17일 죽었다. 75세.

  1. 아자이 가문[浅井家]과 아츠지를 떠난 것은, 두번 다 성질을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다투다 칼을 뽑아 부상을 입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오다 노부즈미[織田 信澄]는 이소노 탄고노카미의 양자였기에, 이소노가 노부나가에게 쫓겨난 뒤 그대로 노부즈미를 섬기게 아닌가 싶다. [본문으로]
  3. 노부즈미가 살해당하기 이전에 노부즈미와 결별하였다. 결별이유는 뭔가 맘에 안 들었기 때문이라고만 한다. [본문으로]
  4. 사족으로 만약 저였다면 둘 다 쫓아 냈을 것입니다. 도박이건 유녀건 앞뒤 가리지 못 하는 놈들이기에 앞길이 암담하긴 마찬가지. 오히려 도박이 더 맘에 안 듭니다. 주위에 도박에 미친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피하시길. [본문으로]
  5. 그 이전 히데요시의 정무소였던 쥬라쿠테이[聚楽第]의 이에야스 거처를 건축한 것이 타카토라로, 이때부터 친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에도에 있던 토우도우 저택[藤堂藩邸]에 만들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7. 이누가미 군[犬上郡] 혹은 코우라 군[甲良郡] 출신이 더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정유재란.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0.08.30 08: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오랜만에 보는 새 포스팅의 느낌이란 이런 것이군요!
    독자들을 갈증에 시달리게 하기 위해 일부러 장치를 마련하셨다고 믿겠습니다. 무정한 분 같으니(..응?)

    일본에서 도도하면 가장 빠르게 생각나는 것은 다카토라와 헤이스케가 아닐런지요. 다카토라는 이순신에서의 굴욕 덕분인지 그나마 대중에게 더 유명한 느낌이 듭니다.

    다카토라는 7번이나 주인을 바꿨지만 사람됨됨이를 보아 주인을 섬길때는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섬겼다는 느낌이 듭니다.

    사족입니다만 유녀와 도박에 빠진 이야기를 하셨는데, 도박에 빠진 자의 경우에는 저도 써볼 의향은 있습니다. 인생은 도박판이니까요. 승부사라고 완곡하게 바꿔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후후) 아, 그리고 각주 5번에 '타카노라'라고 쓰셨네요. 첫 댓글을 다는 자는 오타도 제일 처음 지적하는 영예를 누릴 수 있어서 참 좋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8.30 2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말 죄송합니다. 늙은 것이 그저 게을러서....

      토우도우[藤堂]하면 말씀하신 이름에 더해 전 개인적으로 토우도우 효우에[藤堂 兵衛]가 추가로 떠오르는군요. 지상 최강의 교장[校長]에게 한 칼에 두동강이가 나도 죽지 않는 양반입죠.

      초반에 지 성질머리 못 참고 뛰쳐 나온 것을 보면 히데나가 이후에나 열과 성의를 다 했나 봅니다.

      인생은 도박판이다!!라고 외쳐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만큼 판돈(빽이라던지 돈이라던지)이 있어서 성공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 같더군요. 거기에 휩쓸리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꼼꼼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얼릉 고치겠습니다.

  2. Gyuphi IV 2010.08.30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세키가하라 이전에 가봤을때 서군 패배조(...)들 포진터 한꺼번에 몰린데를 보긴 했는데 세부공작은 이녀석 때문이었던가(...) 서군측에 있어서는 정말 눈엣가시었겠군요(...) 초전에서 잘 싸우던게 다 망했으니(...)

    시간당 6000엔의 아가씨와 자금운용의 묘에 따라 같은 금액으로 수시간 이상 버틸 수 있는 게임센터 파칭코를 비교해 본다면 도박쪽에 미친 친구가 묘하게 재능에서 앞선다는 느낌을 받긴 합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8.30 23: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책에선 그렇다는데... 다른 곳에선 그렇다고 한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책의 신뢰도야... (번역하고 있는 제가 할 말은 아닙니다만...^^; )

      일본에 있을 때, 파친코에 빠진 유학생을 보았습니다만... 그분을 말리려 그분 부인께서 파친코에 갔다가 같이 빠져서 부부가 함께 파친코를 하더군요.....결국...

      파친코가 지금도 그때와 같은 시스템인지 모르겠지만, 가장 소액인 3000엔짜리 카드는 금방 사라지더군요. ^^ 6000엔으로 그 이상 불릴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같은 경우라면 아가씨에게...(퍽~)

      재능은 모르는 거라 생각합니다. 단순히 파친코에 특화된 재능으로 다른 곳에는 무능할 수도 있으니까요.

      여자건 도박이건 자기 일을 내팽게친 상태에서 이미 아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같음 차라리 자기 일 내팽게치지 않고 승부욕 있는 사람을 찾는 노력을 더하겠습니다.

  3. 1 2010.09.02 1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읽었습니다. 언제 올라오나 한달에 몇 번씩 들어왔는데 드디어 올라왔네요!
    계집질, 도박 둘 다 뭐. 근데 보통 음주까지 세 개 같이 하지 않습니까?ㅋ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9.04 2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서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찾아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뭐든 적당히만 하면 스트레스 풀기도 하기에 나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적당을 넘어서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입죠. 공자할배도 그랬다고 하더군요. 뭐든 과하면 부족한만 못하다고 했다니까요.

  4. 정동희 2010.09.09 1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간만에 글 정말 잘 봤습니다
    다카토라 이 놈은 정말... 전국시대에서도 보기 드물게 흥미로운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 놈을 모사꾼, 기회주의자 수준으로만 생각했는데, 나름 인생은 열심히 살았더라구요
    만화책 '센코쿠' 인가 에서는 의외로 상당한 무용의 인물로 묘사했더군요(근거가 있는 모양입니다)

    다카토라가 주인을 여러번 바꿨다지만 역시 주인이라면 히데나가가 떠오르는데
    저도 직장생활 10년하면서 여러가지 느낀 바가 있지만
    이 히데나가를 섬길때가 이 인물의 최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나중에 이에야쓰를 섬기면서 더 출세를 하긴 했지만, 뒤로 욕도 많이 먹었으니)

    다카토라의 출신이나 그 간에 섬긴 주인(이소노, 노부즈미)을 보면 참 재수가 없었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던 그가 히데나가를 만나면서 앞길이 확 트인거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9.11 11: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타카토라는 키와 덩치가 크다는 기록과 그가 죽었을 때 살펴보니 수 많은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보면 무용도 꽤 뛰어났을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의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인한 실패 등을 히데나가 밑에 와서야 경험으로 살린 것 같습니다.

    • 정동희 2010.09.13 1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젊어서 사람 죽이고 도망친 건 도시이에 하고도 비슷하네요
      제가 늘 주장하지만 역시 인간은 여러가지 경험을 통해서 바뀐다는...
      젋어서는 욱해서 사람 죽이고 했지만, 나이 들어서는 엄청 신중해 질 수도 있다는...

  5. 정동희 2010.09.09 16: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랄까... 그 동안 전망도 안보이고 딱히 실력도 없는 그저 그런 중소 하도급업체 부장정도로 근무하다가
    갑자기 초 일류 대기업 회장의 동생 회사에 임원급으로 입사를 하게 됐다고나 할까요

    말이 동생 회사지 사실은 본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고, 사세(영지)도 상당하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빵빵하고, 주인도 능력있고...
    그야말로 가진 능력을 보여주며 도약 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만났다랄까...

    특히 시코쿠 원정은 그 절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마 히데요시가 직접 참전하지 않은 최초의 대규모 원정으로 생각되는데, 글자 그대로
    회장의 대리인으로 부회장(히데나가)이 프로젝트의 총책을 맡았고,
    히데나가가 그 밑에 수석 중역이었으니, 이 때의 감개가 어떠했을지...
    특히 도중에 일(죠쇼카베 공략)이 지연되자 회장이 직접 나서겠다 했는데
    이 때 히데나가가 처음으로 제가 직접 나섰는데 체면좀 살려 주십쇼 하면서 거절했잖아요

    이 때의 기분도 생애에 다시 느끼기 어려운 쾌감이 아니었을까 생각 됩니다

    그리고 뒤 이은 규슈 정벌에서도 별동대(10만)를 이끌고 전공을 세웠고,
    누가 보더라도 히데요시 정권에서의 이인자는 히데나가
    히데나가의 오른팔은 다카토라 라고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도쿠가와 정권 하에서의 몇 십만석이 뭐 대단하겠습니까)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9.11 11: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와 지금을 좋은 예로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확실히 히데나가의 오른팔 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히데나가가 죽고 난 뒤 히데나가의 후계자인 히데야스[秀保]의 대리인 격으로 임진왜란에 출정한 것을 보면 야마토 토요토미 가문[大和豊臣家]에서 지위는 수석가로급이었듯 합니다.

    • 정동희 2010.09.13 1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나가도 보통 인물이 아닌데
      그 가로격으로 발탁이 됐다면 다카도라가 여러가지로
      능력을 보였던 모양입니다
      사실 그 전에 근무했던 곳을 보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데 말이죠...(최종 이력이 쓰다 노부즈미 밑에 있다 나온...)
      암튼 다카도라나 시마사콘이나 히데나가집이 잘 됐으면
      훨씬 역사에 크게 남았을 것 같은데요
      능력도 능력이지만 역시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6. 정동희 2010.09.09 16: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구나 히데나가는 어쩄든 히데요시 보다 나이가 적고,
    히데요시는 마땅히 후계자도 없으니
    다카토라의 마음속에 원대한 포부와 계획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주인(히데나가)이 갑자기 졸 하고,
    그 후계자 마저 얼마 살지 못했으니,
    이 때 절망감과 상실감이...

    미쓰나리 처럼 일찌 감치 엘리트로 발탁되어 본사 중역을 했던 것도 아니고,
    도라노스케나 이치마스 처럼 인척관계로 승승 장구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런 중소기업 전전하다 마침내 줄을 잡아 대권까지 바라보게 됐는데
    한순간에 다시 퇴물 뒷방 늙은이가 되었으니...

    그래도 은거했다가 다시 나와서 히데요시, 이에야쓰를 섬긴 걸 보면
    젊어서 부터 인고의 세월을 거치며 쌓은 공력이 헛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간만에 글을 보고 기뻐서 두서 없이 말이 많아졌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9.11 1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중이되겠다고 세상을 등졌던 것을 히데요시가 설득하여 자기 휘하로 만든 것을 보면 히데요시에게도 인정받았던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헛된 공력은 아니었던 듯.

      감사한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 꾸준히 글을 올리겠습니다.(...근데 전 이 주말에도 일하고 있어요...T.T)

    • 정동희 2010.09.13 1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요시의 인정은 당연한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시코쿠 정벌 사령관, 큐슈 정벌 별동대 사령관의
      수석가로격이니...
      지금으로 따지면 대표PM이나 본부장이 있지만 실제 업무는 그 밑에 실무수석이 많이 하잖아요
      히데요시 특기가 옆집 기둥뿌리 뽑기인데, 자기 동생이자 정권이 2인자 격인 히데나가의 심복을 몰랐을 리 있을까요

      암튼 그건 그렇다 치고
      토요일까지 근무로 노고가 많으십니다
      풀뿌리 민초의 삶이 참 고단하네요

 타카카게[隆景]가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의 후계자가 된 데에는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모략이라는 덫이 작용하고 있다.

 모우리 가문[毛利家] 발전을 위해서는 세토 내해[瀬戸内海] 연안의 호족 코바야카와 가문을 빼앗는 것이 긴급한 과제였던 것이다.
 코바야카와 가문은 당시 누타[沼田]와 타케하라[竹原]라는 두 가문으로 나뉘어져
[각주:1] 있었다. 그 중 타케하라 가문의 당주인 오키카게[興景]가 병으로 죽었다. 운 좋게 모토나리의 조카가 죽은 오키카게의 부인이었다. 곧바로 모토나리는 당시 9살인 토쿠쥬마루[徳寿丸=후의 타카카게]를 후계자로 밀어 넣었다.
 그 직후 이번엔 누타 가문에서 당주 마사히라[正平]가 죽었고 거기에 그의 아들인 마타츠루마루[又鶴丸]에게 눈이 머는 불행이 찾아왔다. 모토나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처음부터 누타 가문의 중신 노미 씨[乃美氏]를 꼬셔놓은 상태에서 은밀히 모략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모토나리는 강제로 누타 가문을 타케하라 가문에 합병시키고는 그 당주에 타카카게를 앉혔다. 더불어 합병 반대파인 누타 가문의 가신들 하나하나를 숙청한 것이었다. 누가 보아도 일련의 당주 사망사건에는 모토나리의 검은 모략의 냄새가 풍기고 있다.

 어쨌든 이런 어두운 모략에 의해 탄생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이지만, 모우리 가문 발전의 방향타를 쥐고서는 전란의 세상에서 그 지모를 아낌없이 발휘하여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継], 시마 사콘[島 左近] 등과 더불어 센고쿠[戦国]의 삼대지장 중 한 명으로 손꼽히게 된다.

 타카카게가 죽었을 때,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는,
 "일본에서 지혜로운 사람 한 명이 사라졌다. 이 인물은 모우리 가문이라는 거대한 배를 조종하는 뱃사공과 같았다…"
 하고 회상하였다.

 또한 이런 이야기가 있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상급귀족[公卿]인 키쿠테이 하루스에[菊亭 晴季]와 바둑을 두다가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자 자기도 모르게
 “이건 타카카게라도 풀 수 없겠지……”
 라고 혼잣말을 한 것이다. 옆에서 관전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도
 “정말 그렇겠군요”
 라며 끄덕였다고 한다.

 거슬러 올라가 소년시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타카카게가 형인
모토하루[元春]와 각각 아이들을 데리고 편을 갈라 눈싸움을 하였을 때, 처음엔 모토하루의 돌격에 패하였지만, 두 번째는 부하를 몇 명인가 복병으로 숨겨 놓아 모토하루의 허를 찔러 승리하였다고 한다.

 타카카게가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선 것은 1547년 그의 나이 15살 때에 칸나베 성[神辺城]공략전이었고, 1555년 이츠쿠시마 전투[厳島合戦]에서는 일찍부터 후년 천하 삼대지장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은밀한 상륙작전에는 아무래도 세토 내해의 수군인 노지마[能島], 쿠루시마[来島] 수군의 응원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들과 교섭하여 현실화시킨 것이 타카카게인 것이다.

 이러한 외교적 수완뿐만이 아니라 실전에서도 민첩한 기동성을 보여주었다. 별동대를 이끌고 대담하게도 적의 정면인 이츠쿠시마 신사(神社) 오오토리이[大鳥居] 가까이에 배를 대었다.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의 군사들은 설마 적측인 모우리의 군사들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그냥 수상히 여기고 있자, ‘큐우슈우(九州)에서 원군으로 온 수군이다’[각주:2]고 속이고는, 적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상륙하여 스에 군의 본진 토우노오카[塔ノ岡]의 허리쯤에 진영을 세웠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의 결전에서는 스에 군의 배후에서 습격한 부친 모토나리 등의 주력과 호응하여 스에 군을 협공하였다. 타카카게 자신도 3개소의 상처를 입으면서 분전. 적 부하장수인 야마토 오키타케[大和 興武]를 포로로 잡았으며, 적 대장인 타카후사를 추격하여 자살로 몰아넣었다.


크게 보기                                                 < 이츠쿠시마의 전투 >

 1570년 6월.
 부친 모토나리가 이 세상을 떠나자 타카카게는 모토하루와 함께 테루모토[輝元]를 잘 보좌하여 [모우리의 양천(毛利の両川)[각주:3]]으로서 존재감을 발휘하였다. 그러는 한편 모우리 본가에 대한 충성심도 두터워, 조카인 테루모토가 머물고 있는 방을 지날 때는 반드시 무릎을 굽혀 예를 다하며 지나갔으며, 테루모토가 없을 때도 그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하통일을 목표로 서쪽으로 진격을 해 온 오다 군[織田軍]과의 격돌에서 그의 군략가로서의 특질이 발휘된다.
 1575년 오다 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오오사카[大坂]의 혼간지[本願寺]와 손을 잡은 모우리는 같은 해 7월 혼간지에 식량을 해상 수송하였는데, 그때 총지휘를 한 것이 타카카게였다. 모우리의 수송선단은 요격하러 나온 오다 군과 키즈가와 강[木津川] 하구에서 격전을 벌인다. 그러나 이쪽은 이츠쿠시마 이래의 전통을 자랑하는 코바야카와 수군이다. 오다 측의 수군을 능숙하게 포위한 후 철포, 불화살을 쏟아 붙는 듯이 공격하여 수 백 명을 죽이는 대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각주:4]

 이제 츄우고쿠[中国] 모우리의 명성은 시코쿠[四国], 큐우슈우[九州]에까지 이르렀다. 더구나 모우리는 그 이전에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통해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카이[甲斐]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도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과 호응하여 오다[織田]를 동서에서 협격하고자 하는 대전략이었다.

 이러던 중 오다-모우리 대결 최대의 고비가 되는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 공방전에 이르게 된다.
 이 전투는 타카마츠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의 할복을 조건으로 강화를 맺게 되는데,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의 변 소식이 전해지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죽음을 숨긴 채 다음 날 무네하루를 할복시키고는 급히 쿄우토[京都]로 군사를 돌려던 것이다.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소식은 모우리 군에게 있어서 다시 오지 않을 반격의 기회였다. 여기서 히데요시를 추격한다면 물리치는 것은 쉬웠다. 대부분이 이 의견에 찬성하였다. 하지만 타카카게는 결사반대를 외쳤다.

 타카카게 외교감각의 탁월함이 여기서 멋지게 발휘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카카게는 히데요시가 장래 반드시 천하를 쥐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추격하지 않고 히데요시에게 아케치[明智] 토벌을 성공시키면 반드시 히데요시는 모우리에게 호의를 갖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모우리의 장래를 위해서도 그러는 편이 훨씬 이득이라고 설득한 것이다.

 히데요시의 정권장악은 타카카게의 이 추격반대 덕분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후년 히데요시는 이때의 타카카게 배려에 깊은 감사를 하여, 모우리 씨[毛利氏]에게 이때의 은혜를 갚음과 동시에 특히 타카카게를 본가의 테루모토와 동격으로 올려, 대로(大老)의 한 사람으로 발탁하였다. 영지(領地)도 치쿠젠[筑前] 전부와 치쿠고[筑後]와 히젠[肥前]에 각각 2개군(郡)을 하사하여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만들어 주었다.

 한편 타카카게가 모우리 가문에 얼마나 헌신적이었는가는 히데아키[秀秋]를 양자로 받아들인 것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세자가 없는 모우리 가문에 히데요시의 양자 히데아키가 후계자 후보로 거론된 것이다. 타카카게는 경악했다. 아키[安芸] 명문가의 피가 히데요시의 친척이라고는 하여도 기껏해야 잡병[足軽]이나 맡을 인물에게 더럽혀진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타카카게 필사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히데요시의 주치의인 야쿠인 젠소우[施薬院 全宗]에게 히데요시의 의향이 어떤지 묻자, 히데아키를 모우리에 보낸다는 건은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타카카게는 이때 자기 가문을 희생시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52만석의 영지(領地)를 킨고 츄우나곤[金吾中納言] 히데아키 님에게 물리 드리고 싶습니다"
 는 요청하였다.
 모우리의 분가라고는 하여도 코바야카와 가문은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때부터의 명문가였다. 이런 명문가가 히데아키 따위에게 더럽혀 지는 것 또한 참기 힘들었다. 더구나 타카카게에게는 이미 동생인 히데카네[秀包]를 양자로 하고 있었음에도[각주:5], 그를 분가시키면서까지 히데아키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싶다며 간청한 것이었다. 타카카게의 모우리 가문 안녕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오히로이[お拾=후의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자 양자 히데아키의 처우에 곤란해 있었던 히데요시는 타카카게의 신청에 굉장히 기뻐하였다고 한다. 타카카게에게는 은거료(隠居料)로써는 파격적인 빙고[備後] 미하라[三原] 3만석이 주어졌다.

 이보다 앞선 1593년 1월.
 타카카게는 조선에서 전군을 그 지휘하에 두고서 명(明)나라의 병력 30만을 상대로 싸웠다. 적의 대장은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던 이여송(李如松)이었다. 이 명나라 장수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를 패주시킨 기세를 타고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타카카게는 이를 격파하는 대공을 세운 것이었다.[각주:6]
 그러나 조선에 있던 중 병을 앓았고 귀국하여 미하라에서 요양을 하였지만 1597년 뇌혈관 장애로 졸도하여 일생을 마쳤다.

 참고로 코바야카와 가문은 히데아키의 대가 되어서 자식이 없어 단절되지만,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이르러 당시 모우리 가문의 당주인 모우리 타카치카[毛利 敬親]가 일족 중의 한 명에게 코바야카와 가문을 잇게 하였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 隆景)]
1533년 태어났다.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삼남. 부친 모토나리, 조카 테루모토[輝元]를 도와
츄우고쿠[中国]를 경략. 미하라[三原]를 본거지로 하여 세토 내해[瀬戸内海]에 강력한 수군을 편제하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와 강화한 후, 히데요시의 시코쿠[四国], 큐우슈우[九州], 오다와라[小田原] 정벌[각주:7]에 참가. 조선의 역에서는 1593년 명(明)나라의 대장 이여송(李如松)의 대군을 개성(開城)에서 물리쳤다. 히데요시의 양자 킨고 츄우나곤 히데아키[金吾中納言 秀秋]를 세자로 받아들였으며, 1597년 6월 20일 죽었다. 65세.

  1. 누타(沼田) 쪽이 종가였다. [본문으로]
  2. 당시 오오우치 가문[大内家]의 당주는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동생 오오우치 요시나가[大内 義長]였기에, 타카카게는 오오토모 소우린이 보낸 원군이라고 한 것이다. [본문으로]
  3. 킷카와[吉'川']나 코바야카와[小早'川']에는 내 천(川)자가 들어있기에. [본문으로]
  4. 제1차 키즈가와 강 입구의 전투[第一次木津川口の戦い]. 참고로 2차는 오다 군의 철갑선으로 복수했다는 전투이다. [본문으로]
  5. 모우리 모토나리의 9번째 아들. 모친이 코바야카와 가문의 분가인 노미 씨[乃美氏]인 연도 있어 아들이 없던 타카카게의 후계자가 되어 있었다. [본문으로]
  6. 벽제관 전투를 말한다. 여기 쓰여있는 30만을 그대로 믿으면 지는 겁니다. [본문으로]
  7.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공격한 것.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포증 2009.09.21 17: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 3대 지장은 시마 사콘, 사나다 마사유키, 나오에 가네츠구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로 나오는군요. 다카카게가 죽자 마사유키로 대체가 된걸까요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