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치스카 코로쿠 마사카츠(蜂須賀 小六 正勝)의 이름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도적 두목이었던 코로쿠가 소년 시절의 히데요시 즉 히요시마루(日吉丸)와
야하기(矢作) 다리[각주:1]위에서 만났다. 다리 위에서 자고 있던 부랑아 히요시마루의 머리를 발로 차서 깨우자 소년을 대담하게도 “무례하구나! 이리 와 사과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코로쿠는 그 호방함에 반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시바 료우타로우(司馬 遼太郎) 선생의 글에 나오는 것인데, 선조가 도적이라는 것에 옛
아와(阿波) 번주인 하치스카 후작은 창피를 느꼈다고 한다. 메이지(明治) 시대에 귀족원 의장을 지낸 하치스카 가문의 당주 모치아키[각주:2](茂韶) 후작은 어느 날 메이지 텐노우(明治天皇)를 알현하였을 때 테이블에 진귀한 담배가 있었기에 2~3개를 품 안에 넣었다. 도중에 자리를 뜬 텐노우(天皇)가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역시 선조는 속일 수 없구만”하고 크게 웃었다고 한다. 텐노우(天皇)까지 하치스카 코로쿠가 도적이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각주:3]
 
그러나 이 불명예스러운 전설은 쇼우와(昭和) 초기 와타나베 요스케(渡辺 世祐) 박사의 고증으로 인해 사라지게 된다. 무엇보다 당시 야하기바시 다리는 걸려있지 않았다는 것이 명확해 진 것이다.[각주:4]

 하치스카 가문은 도적 따위가 아닌 오와리(尾張) 아마 군(海部郡)의 호족으로, 현재도
렌게 사(蓮華寺)라는 이름있는 절이 남아있어 그곳에는 하치스카 가문에 관한 문서가 전해지고 있다.

 히데요시와 연을 맺게 된 것이 히데요시의 떠돌이시절인지 오다 가문(織田家) 내에서 만나면서부터인지 확실치 않지만 코로쿠 마사카츠가 세상에 얼굴을 내밀게 된 계기가 된 것은 히데요시의 스노마타(墨俣) 축성으로 인해서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는 자신의 영지(領地)인 오와리(尾張)와 사이토우 가문(斉藤家)의 미노(美濃)와의 국경에 성을 쌓아 전선기지로 만들려고 하였지만 사이토우 군의 방해로 인해 그 시도는 참담한 결과로 끝나 거의 불가능이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오다 가문에서도 미관말직이던 토우키치로우(藤吉郎=히데요시)가 단번에 만들어 버렸다. 세상에서 말하는 ‘스노마타 일야성(墨俣一夜城)’이다. 이를 계기로 토우키치로우는 크게 출세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성공의 뒤에서 활약한 것이 코로쿠 마사카츠이다.[각주:5] 코로쿠는 휘하의 도적들을 거느리고 스노마타 축성 공사와 수비에서 활약하였다. 스노마타 성이 완성되자 코로쿠는 오다 가문에 고용되어 성주가 된 토우키치로우를 돕는 역할을 하게 된다.

 코로쿠 마사카츠에게도 무공담은 전해지지만 그의 본질은 정략(政略)에 있었다.
 히데요시의 전투 방식은 상대를 죽이지 않고 항복시키는데 있었다. 상대를 이익으로 꼬시는 것인데 그 역할을 코로쿠가 담당하였다. 히데요시의
츄우고쿠(中国) 정벌에서 비젠(備前), 빗츄우(備中), 미마사카(美作), 호우키(伯耆)등의 여러 성을 공략했을 때 대부분 마사카츠의 외교절충으로 무혈 개성시켰다. 세토 내해(瀬戸内海)의 해적들도 코로쿠의 뛰어난 외교로 히데요시의 산하가 되었다.

 특히 가장 커다란 외교적 무대가 된 것은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 공략 시의 절충이었다.
 츄우고쿠(中国)의 실력자 모우리 씨(毛利氏)와의 강화(講和)가 이번 공성전의 처리 결과에 달려 있었다. 마사카츠는
쿠로다 칸베에(黒田 官兵衛)와 함께 모우리의 외교승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惠瓊)와 화의 교섭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하필 그때 혼노우 사(本能寺)의 변보가 전해진 것이다. 노부나가가 횡사했다는 소식이 모우리 측에 전해지면 강화는커녕 오다의 원군을 기대할 수 없기에 히데요시의 군은 모우리의 총공격에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패했을 것이다. 마사카츠는 이 중대한 위기 속에서 타카마츠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를 할복시키며 화의를 성공시킨 것이다.

 하치스카 가문은 후에 아와(阿波) 토쿠시마(徳島) 25만 7천석으로 막말까지 이어진다.

[하치스카 마사카쓰(蜂須賀 正勝)]
오와리(尾張)
하치스카 출신. 처음엔 그 지역의 소영주(小領主)였지만 오다 가문(織田家)을 섬겨 노부나가(信長)의 명령으로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각주:6]. 1581년 하리마(播磨) 타츠노(竜野) 성주가 된다. 1586년 오오사카(大坂)에서 죽었다.

  1. 링크된 맵은 야하기 야하기바시 역(矢作橋駅). 오른쪽에 흐르는 것이 야하기가와 강(矢作川). 다리는 역에서 동북쪽 근처에 있었다 한다 [본문으로]
  2. 이 책에서는 ‘시게아키’라고도 루비가 되어 있지만 ‘茂’라는 글자는 14대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모치(徳川 家茂)의 모치(茂)를 물려 받았으니 모치아키가 정확하다. [본문으로]
  3. 모치아키의 부친 나리히로(斉裕)는 에도 바쿠후 11대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나리(徳川 家斉)의 아들로 하치스카 가문에 양세자로 들어갔기에 혈연적으로 이어져 있지는 않다. [본문으로]
  4. 야하기바시 다리는 1601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참고로 히데요시는 1598년에 죽었다. [본문으로]
  5. 이 이야기는 주로 무공야화(武功夜話)의 기술에 따른 것이라고 하는데, 그 책에는 현대에나 쓰는 말이나 당시에는 없었지만 마을끼리 합병되면서 만들어진 지명, 교차검증에 따라 틀린 기술이 많은 점 등으로 인해 근년 무공야화는 위서(僞書)가 아니냐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본문으로]
  6. 1573년에 아자이 가문을 멸망시킨 노부나가가 히데요시에게 옛 아자이 가문 영지를 하사하였을 때 히데요시에게서 1600석의 영지를 받았다고 하니 이 즈음부터는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볼 수 있다고 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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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ameh 2009.05.18 00: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좀 곁다리 느낌입니다만, 메이지덴노에 관련된 일화 말입니다만 교수에게 들은것만해도 제법 재밌는게 몇개 있는거 보니 (어휘력 부족으로 잘 들리진 않았습니다만 에휴;) 그 근엄한 얼굴에비해 의외로 유머감각이 있었던 사람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나저나 이 시간에 접속이라(;;)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18 10: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항상 여덟 팔자로 입술을 앙 다물고 있는 것이 참 인상적이더군요. 그 덴노우는.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이토우 히로부미 등에게 모든 눈이 가서인지 메이지 덴노우에 관해서는 그다지 거론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그냥 제가 관심 없었을지도...그래서 이번에 책 한 권 샀습죠!...아직 안 읽었지만요.)

      첫술부터 배부를 수 있남요.
      불과 몇 달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사셨던 분이 가시자 마자 다 귀에 들어오면 그것만큼 불공평한게 어디 있겠습니까~

      제 글 올리는 시간에 비하면 준수하신 편입니다. ^^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모반한 사람으로서도 유명하지만 다인(茶人)으로서도 일류인 인물이었다. 무라시게가 소장하고 있던 이도챠완(井茶碗)은 '아라키 코우라이(荒木高麗)'라 불리며 명물을 기록한 여러 장부에 실린 천하의 명물이었다. 무라시게에게서 이에야스(家康)의 손으로 옮겨졌고 그 후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尾張川家)[각주:1]에 전해져 지금도 토쿠가와 미술관(川美術館)에 보존되어있다.

 소년시대의 무라시게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소년 무라시게는 힘이 대단히 셌다고 한다. 부친 요시무라(義村)를 태운 바둑판의 양 다리를 잡고 들어 올려서는 방을 세 바퀴 돌았다고 한다. 겨우 12살 때의 일이다[각주:2].

 처음엔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가신[각주:3]이었지만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幽))와 함께 노부나가의 휘하로 들어가 뛰어난 활약을 발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秀) 등의 다이묘우(大名)도 무라시게에게 배속되어 있었다.

 무라시게의 모반은 1578년에 뜬금없이 일어났다. 노부나가에게 적대하고 있던 츄우고쿠(中)의 모우리 씨(毛利氏)로 배를 갈아탄 것이다. 당시 무라시게는 셋츠(津) 방면군 사령관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 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등과 어깨를 견줄 정도의 위세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무라시게의 뜬금없는 모반에 노부나가는 "무엇이 부족하여 그러는가?"라고 놀랐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말하라"고 하면서 "반역하려는 뜻을 버리고 인질로 모친을 바치도록"하고 설득의 사자(使者)를 보냈다. 사자로 보내진 것은 아케치 미츠히데[각주:4], 마츠이 유우칸(松井 友閑)[각주:5], 만미 센치요(万見 千千代)[각주:6]였다. 히데요시도 이타미(伊丹)에 있는 무라시게의 거성(居城)으로 가서 뜻을 거두도록 재촉했다. 쿠로다 칸베에(田 官兵衛=죠스이(如水))가 설득하러 갔다가 포로로 잡힌 것은 이 때의 일이다.

 모반의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아라키 가문의 가신이 노부나가의 적인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에 쌀을 밀매한 것[각주:7]이 밝혀졌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또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참언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필시 진짜 원인은 노부나가의 잔인하고 폭군적인 성격을 무라시게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은 모반에 대한 것을 해명하기 위해서 노부나가에게 가려고 했지만 가노(家老)[각주:8]들이 "잠깐 동안은 용서하시겠지만 의심 많은 분이기에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충고를 들은 것도 있어, 무라시게는 더 이상 오다 가문에서는 살아갈 길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무라시게가 소장하고 있던 청자(靑磁)로 된 꽃병(花甁)이 모반의 원인이라고 한다. 노부나가가 꼭 갖고 싶다고 하는 것을 무라시게가 거절하였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삐졌다고 한다.

 승산이 있던 모반이 아니었다. 무라시게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무라시게의 휘하인 타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키요히데를 등돌리게 해서는 양도(糧道)를 끊자 무라시게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고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각주:9]. 이런 사정을 "처자식, 형제를 버리고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것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이라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처자식과 일족을 이타미 성(伊丹城)에 남겨둔 채 종자(從者) 5~6명만을 데리고 탈출한 것이다. 일단 아마가사키 성(尼ヶ崎城)으로 피신[각주:10]한 무라시게는 이후 하나쿠마 성(花城)[각주:11]에 갔다가 여기서 빙고(備後)로 가서 모우리 씨에게 보호를 청했다.

 무라시게에 대한 노부나가의 증오는 지독했다.
 그에 대한 보복은 이타미 성에 남겨진 무라시게의 처자에게 향해졌다. 21살의 미녀로 와카(和歌)가 뛰어났다는 무라시게의 부인을 시작으로 여관(女官) 등 122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때의 비명소리는 '하늘에도 소리가 닿았다'고 할 정도였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또한 여자 하인, 무라시게 부하의 어린 자식(
若党) 등 510여명을 네 채의 작은 집에 가두어서는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고 한다.

 후에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자 친교가 있던 히데요시의 부름을 받아 다인(茶人)으로 섬기며 일생을 마쳤다.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셋츠(摂津) 출신. 오다 노부나가(
織田 信長)를 섬기며 셋츠 이타미 성(伊丹城) 성주가 되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공략에 임하고 있었지만 모우리(毛利)-혼간지와 내통하여 모반을 일으키지만 실패. 후에 머리를 밀고 뉴우도우 도우훈(入道道糞)이라 자칭하였다. 1586년 죽었다. 52세.

  1. 에도 바쿠후(江戸幕府)의 쇼우군(将軍)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만들 수 있는 가문인 어삼가(御三家)의 필두. 단 에도 시대를 통해서 쇼우군을 배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본문으로]
  2. 밥 많이 처먹는 아들에게 아비가 한 마디 하자 "무사는 힘이 쎄야 합니다"라 말하곤 그 증거랍시며로 저렇게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정확히는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셋츠슈고(摂津守護)인 이케다 카츠마사(池田 勝正)의 가신. [본문으로]
  4. 그의 딸은 무라시게의 적남 무라츠구(荒木 村次)의 부인이었다. 참고로 이 부인은 이때 이혼하여 미츠히데의 중신 히데미츠(明智 秀満)와 재혼. [본문으로]
  5. 마츠이 유우칸은 사카이(堺)에서 노부나가의 대리인이었으며 또한 당시 노부나가의 차제구 수집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기에 다도에 밝은 무라시게와는 친분이 깊었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6. 당시 노부나가 최측근 시동. 노부나가 뿐만 아니라 노부타다(信忠)에게도 신뢰 받고 있었다. 이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포지션을 이어받은 것이 모리 란마루. [본문으로]
  7. 정확히는 무라시게 휘하에 있던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清秀)의 가신이 그랬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 말은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이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1년 가까이 버텼지만 무라시게를 궁지로 몰아 넣은 타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키요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돌아섰기에 성을 버리게 된다. 참고로 상기의 만미 센치요(万見 千千代)는 이타미 성을 공격하다 전사. [본문으로]
  10. 이 성은 무라시게의 적남 무라츠구(荒木 村次)의 거성. 참고로 이때 마지막으로 노부나가는 무라시게에게 아마가사키와 하나쿠마를 내놓고 항복하라고 하였으나 이마저도 거절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이때도 싸우기는 하였다. 성을 공략한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활약은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를 쫓아낼 때 쓴 노부나가의 서장에도 언급될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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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28 09: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콘은 지가 용서비는걸 말려놓고 반란일으키니까 나중에 배신때리네요...

  2. 맹꽁이서당 2009.03.29 08: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턴오버 님 말씀대로 우콘 황당하군요. 근데 노부나가 성격을 생각해보면 맞긴 맞는 말 같습니다.
    최소한 처자들에 대한 안전판은 마련해 놓고 거사를 일으킬 것이지.. 딸 뻘 (역산해보니 무라시게는 반란시 44세군요) 미녀 아내도 버리고 갈 정도면 알수없는 속사정이 급했나 보네요.

    이름은 모릅니다만, 노부나가 말년에 배신한 중신들이 몇명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노부나가의 '광기'가 모두의 눈에 비쳤나 보네요. --a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9 16: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노부나가의 성격은 결과론...이 아닐까 합니다.
      어떻게 보면 무라시게의 배반은 노부나가에게 가신들에 대한 불신감 생성 버튼을 누르는 결과가 아니었나 하고도 생각하고요. 우콘이 도대체 무슨 근거를 가지고 저런 말을 했는지 아직까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모친을 인질로 받치고..."..를 보면 당시까지는 노부나나가 무라시게의 인질을 받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자마인 인물에게 셋츠를 맡기면서도 당시로는 당연시 되던 '인질'을 받지 않았던 것만 해도 노부나가가 무라시게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지를 옅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만큼 충격도 컸겠고요. 일본에는...可愛さ余ってにくさ百倍...라는 말이 있습죠. 사랑했던 만큼 미움도 크다는 말인데..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이타미 성에서의 도주는....
      이런 설도 있습니다.
      이타미 성은 주변 강들과 절벽의 천연의 요새에, 성 안에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総構え(호우죠우 오다와라 성의 유명한 구조...이지만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総構え는 이 이타미 성이라고 합니다)...로 인해서 난공불락을 자랑하고 있었다 합니다. 따라서 도망이라기 보다는 아들 무라츠구의 아마가사키 성으로 가서 육지로는 오다 가문에게 포위된 것을 피해 배편(간척된 지금과는 달리 당시는 바다에 면한 성이었다고 하네요)으로 모우리(毛利)나 혼간지(本願寺)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함이었다고도 합니다. 이타미 성이 워낙 튼실하니 자기가 없어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듯 합니다.

      노부나가를 배신한 중신은 미츠히데가 유일하지 않나요?

      전 아직까지는 이 무라시게의 배신부터 노부나가가 가신들에게 불심감을 품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이서당 2009.03.29 18: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다른 글에서 어느 중신이 (미츠히데 이전에)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야기를 봤었는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다 보니 그가 바로 '아라이 마사시게'인줄 몰랐네요. 중복으로 생각한 셈이지요. --a 도자마 가신들에게는 인질이 당연시 되었군요. 덕분에 새로운 사실 하나 알아갑니다. ^^

    그러고보니 센고쿠 15권 말미에서 '외부 적들'과 '내부 적들'을 따로 작성하여 X를 긋는 노부나가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군요. (물론 창작이겠습니다만...) 그땐 1574년이라 아라이의 반란 이전인 셈이네요.

    PS. 요새 이 블로그의 외부 링크를 타고 다른 블로거 분들의 역사 관련 포스팅을 훝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답니다. 혹시 역사 쪽으로 추천해 주실만한 곳은 없으신지요? ^^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양대 중신이었다. 히데요시가 이 두 사람을 닮고 싶다며 하시바(羽柴)라는 성을 자칭할 정도였다.

 나가히데는 성실했지만 완고했다. 그에 대해서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노부나가가 오우미(近江)의 아자이 나가마사(
井 長政)를 멸망시켰을 즈음, 조정에 주청하여 휘하 부하장수들에게 관위를 수여했다. 히데요시는 치쿠젠노카미(筑前守)가 되었으며 아케치 미츠히데는 휴우가노카미(日向守), 시바타 카츠이에는 슈리노스케(修理亮),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す)가 사콘쇼우겐(左近監),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셋츠노카미(摂津守)가 되었다. 나가히데에게는 에치젠노카미(越前守)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가히데는 '지금의 고로우사에몬(五郎左衛門)으로 충분합니다'라 우기며 듣지 않아 결국 노부나가도 포기했다고 한다. 이러한 융통성 없는 일면이 나가히데에게는 있어 시류에 완전히 순응하지 못했던 말년의 비극을 낳게 된다.

목면 토우키치, 쌀 고로사, 돌격하라는 시바타에, 후퇴전의 사쿠마[각주:1]
木綿藤吉米五郎左かれ柴田に、退佐久間
 노부나가 전성기 때 항간에서 유행한 노래(小唄)인데, '목면 토우키치'는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郎)[각주:2]를 지칭하여 부지런한 사람을 의미하고, '쌀 고로사'는 나가히데의 특징을 쌀로 표현한 것이다. 종횡무진하며 기책(奇策)을 발휘하는 화려함은 없지만 반드시 필요하며 견실한 그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에서 초고속 출세를 하여 태두하자 시바타 카츠이에는 거센 적의를 불태우지만 나가히데는 오히려 히데요시를 옹호하는 입장에 섰다. 노부나가 사후의 분쟁에서도 나가히데는 히데요시 측에 섰다.
 1582년 6월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노부나가가 죽자 히데요시는 질풍과 같은 기세로 츄우고쿠(中
)에서 동진하여 아케치 미츠히데를 물리쳤는데 이때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아 시코쿠(四)를 정벌하기 위한 준비로 셋츠() 스미요시(住吉)의 포구에 있던 나가히데는 히데요시의 군과 합류하여 아케치군에게 대항했다.
 노부나가 사후 시바타 카츠이에-하시바 히데요시의 주도권 다툼으로 유명한 키요스 회의(
清洲会議)에서도 나가히데는 히데요시를 위해 힘써 히데요시와 함께 노부나가의 적손 산포우시(三法師)[각주:3]를 오다 가문의 후계자로 내세웠다.

 나가히데의 운명에 미묘하게 금이 나기 시작한 것은 히데요시가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시바타 카츠이에를 물리치고 그를 키타노쇼우(北ノ庄)에서 죽이며 천하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디면서부터이다.
 겉으로 보기에 니와 가문은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야마자키 전투(
山崎合戦)[각주:4]와카사(若)와 오우미(近江) 북부를, 시즈가타케(賤ヶ岳) 후에는 에치젠(越前)과 카가(加賀)의 2개 군(郡)을 합하여 실로 123만석이라는 거대한 영지(領地)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가히데는 히데요시의 휘하 장수로 전락했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자신보다 격이 낮았던 히데요시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욱이 나가히데의 가슴을 무겁게 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히데요시는 카츠이에를 멸한 후 오다 가문의 삼남 노부타카(
信孝)를 자해시켰고[각주:5], 코마키-나카구테(小牧長久手)에서는 차남인 노부카츠(信雄)를 공격한 것이다. 오다 가문이야말로 나가히데의 주가(主家)였다. 그런 주가의 자식을 죽이고 공격하는 히데요시의 횡포에 참을 수 없었으며, 그렇게까지 해가며 노부나가 사후의 천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히데요시에게 환멸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카츠이에처럼 히데요시를 철저히 증오하며 싸우지도 못했으며,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처럼 능숙하게 시류에 타 추종하지도 못했다.

 나가히데는 에치젠(越前) 후츄우(府中)의 거성(居城)에 틀어박힌 채 울적한 나날을 보내었고 몇 번에 걸친 히데요시의 초대에도 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1585년 4월 16일, 병상에서 자결한 것이다.
 그 자결할 때의 이야기가 기괴하다. 사서에 따르면 '가령 어떠한 병이건 내 목숨을 앗아가려고 한다면 그야말로 적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 적을 물리치마'라고 말하며 스스로 배를 갈라 손을 집어 넣고는 뭔가를 꺼냈다. 매의 부리와 같은 형태를 한 덩어리였다. 나가히데는 이 이물질을 반드시 히데요시에게 보내라고 한 뒤 죽었다고 한다.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1535년생. 오다 가문을 대대로 섬겨온 가문 출신. 오우미(
近江) 사와야마(佐和山)의 성주가 되었고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와 동맹을 맺고 카츠이에를 쓰러뜨려 에치젠(越前) 등 123만석을 받았다. 51살에 자해.

  1. 차례 순으로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를 말한다. [본문으로]
  2.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되기 전에 쓰던 이름. [본문으로]
  3. 노부나가의 후계자인 적자 노부타다(信忠)의 아들로 후에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 [본문으로]
  4. 히데요시가 아케치 미츠히데를 물리친 전투. [본문으로]
  5. 어차피 비슷한 것이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오다 가문의 당주 '격'이 된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가 자해시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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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20 10: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다가 4대 중신 가운데 노부나가의 자리를 그대로 물려받은 히데요시와는 달리 나머지 시바타, 타키카와, 니와는 얼마 못 가 몰락했고, 오래 살지도 못 했네요. 기회를 잡은 자와 못 잡은 자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히데요시가 자기들 위에 있는걸 용납 못해서 인가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1 21: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인자니까요.^^
      일인자란 껄끄러운 것을 싫어하더군요. 아무래도 동격이나 위에 누가 있음 조심조심하는 것이 당연.

      일인자...라는 것은 단어 뜻 그대로 동격이나 그 위에 아무도 없기에 일인자라고 생각합니다.

      설사 살려두고 싶다고 하더라도 일인자 휘하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겠죠.

    •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22 10: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제가 표현을 세밀하게 하질 못했네요.

      나머지 히데요시가 원래 나머지 세 사람 밑에 있었다가 1인자가 됐으니 나머지 세 사람 입장에서는 히데요시 밑에 있는게 좀 힘들지 않았나 하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존심을 지키면서도 존중받는 2인자가 된 이에야스가 새삼 대단해 보입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3 17: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니다.
      이에야스는 그런 점에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다 가문 내에서야 서열의 상하가 있었을테지만,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와 동급(여기도 상하는 있지만)인 상태에서 노부나가의 부하에게로 기어들어갔으니.

      쉽지 않았겠죠...
      ...라는 한편 휘하 부하들(& 딸린 식솔들)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이었다고도 생각합니다.

  2. 맹꽁이서당 2009.03.20 1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23만석이면 한때나마 거대했네요. 전국시대 종반에는 가문별로 부침이 심했군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1 21: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절대적인 권력자의 존재가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니와 가문의 경우 나가히데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것이 불가능했기에 죽자 그 아들에게 갖은 누명을 씌어 몰수했지만요.

  3. 朴先生 2009.04.09 0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엄청나게 뛰어나진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될 사람... 이런 사람이 되고 싶네요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는 전성기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휘하에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무장이었다. 군사적 능력이 특히 뛰어나 '나아갈 때도 타키가와, 물러날 때도 타키가와(進むも川、退くも川)'라 일컬어져 전쟁터에서 가장 용맹함을 필요로 하는 선봉이나 그 이상으로 어려운 철퇴시의 방어군 대장을 항상 맡았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이 그때까지 상승기류를 타고 있던 카즈마스의 운명을 바꾸었다. 이 즈음 카즈마스는 코우슈우 평정(甲州平定)[각주:1]칸토우(東) 마야바시(厩橋)에 진주하여 그곳 경영에 힘쓰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소식은 10일이나 걸려 카즈마사에게 전해졌지만 그 소식에 곧바로 아케치 토벌군을 일으킬 수 있는 정세가 아니었다. 코우즈케(上野)를 점령하고 있다고는 해도 주변은 모두 적지로 더구나 강대한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씨(北
氏)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카즈마스는 변보를 들었을 때 이를 막료에게 전했다. 더구나 부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점령지역인 코우즈케의 지역무사(地侍)들에게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한 것이다. 같은 소식을 부하들에게 엄중히 함구령을 내린 히데요시와는 대조적이다. 거기에 카즈마스는 인질마저 지역무사들에게 돌려보냈다. 코우즈케의 무사들은 이에 감격하여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신다'고 말하며 상경하려는 카즈마스를 따라 힘을 보태겠다고까지 말하였다.

 코우즈케 세력의 협력은 얻었지만 타키가와군의 상경은 참담했다. 처음엔 코우즈케의 군사들을 이끌고 코우즈케-무사시(武)의 접경인 칸나가와(神流川) 강에서 호우죠우군과 싸워 한번은 이겼지만 두 번째 전투에서는 대패하여 간신히 시나노(信濃) 코모로(小諸)로 도망쳐서는 키소(木)를 거쳐 겨우 본거지인 이세(伊勢)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또한 질풍과 같은 기세로 군을 되돌려 곧바로 아케치 미츠히데를 물리친 히데요시와는 크게 다른 점이다.

 각설하고, 노부나가 사후 혼란기의 판단이 그의 운명을 그르쳤다. 오다 가문의 부대장으로서는 유능하였지만 그 오다 가문이라는 우산이 치워지자 정치적 판단이라는 것이 중요한 요소로 떠올랐다. 카즈마스에게는 그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단지 오다 가문에서 자신보다 상석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시바타 카츠이에 측에 선 것이다.
 시바타 공략에 앞서서 히데요시는 카즈마스의 거성(居城) 이세(伊勢) 나가시마 성(
長島城)을 공격했다. 6만의 대군으로 성에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겠다는 듯한 맹렬한 공세에도 끝까지 버텼지만 정작 시즈가타케에서 시바타 군이 패하자 성을 열고 항복하였다.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건졌지만 카즈마스의 투지는 사라져 예전 그토록 절찬 받던 용장의 모습은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히데요시가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와 싸운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い)에서 카즈마스는 히데요시 휘하로 출진하였지만 왕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추태를 보이고 만다. 토쿠가와 측의 오와리(尾張) 카니에 성(蟹江城) 성주 마에다 타네토시(前田 種利[각주:2])에게 유리한 조건을 내걸어 무혈점령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노부나가의 차남)에게 공격 당하자 곧바로 항복한다.

 이에야스는 자신을 배신한 마에다 타네토시의 목을 바치라고 하며, 이에 응하면 카즈마스의 목숨은 살려준다고 하였다. 이에야스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사의 수치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을 카즈마스는 승복한 것이다.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비겁자의 낙인은 피할 수 없었다.

 카즈마스는 당시 병에 걸려 남이 부축해 주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병이 허탈한 그의 마음을 더욱 약하게 했을 것이다. 말년엔 히데요시에게 얼마 되지 않는 땅을 받아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다 세상을 떠났다.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 一益)]
1525년생. 오우미(近江) 코우가(甲賀) 출신으로 낭인 생활을 하던 중 노부나가(信長)의 눈에 띄어 그를 섬겼다. 1574년 이세(伊勢) 나가시마(長島) 농민반란군(一揆)을 평정한 후 나가시마 성주가 되었다. 1583년 카츠이에(勝家)와 동맹을 맺고 히데요시(秀吉)와 싸우다 패했다.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い) 후 에치젠(越前) 오오노(大野)에 은퇴해 살다 1586년 죽었다. 62세.

  1. 타케다 카츠요리를 멸한 전쟁. [본문으로]
  2.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첫째딸 코우(幸)의 남편인 마에다 나가타네(前田 長種)의 부친. 계보상 거슬러 올라가면 이 타네토시 쪽이 토시이에의 가문보다 격이 높다고 한다(즉 토시이에 가문이 방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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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19 05: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혼노지의 변 당시 나이가 상당히 많았네요. 시바타 카츠이에와 비슷한 연배군요.
    (트랙백을 따라가보니 3살 아래였군요)

    말년에는 용장의 이미지는 어디가고 마음 약해지고 판단력 흐려진 노인이나 다름없었네요...

  2. dad 2011.01.14 1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동관령에 오른 건 노부나가가 그만큼 믿을수 있었던거 같긴 한데...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져버렸는데 관동관령의 의미 같은게 그래도 남아 있었던건가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1.14 13: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노부나가와는 공사(公私)로 가까웠다고도 합니다.

      노부나가가 카즈마스에게 내린 임무를 신장공기(信長公記)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関東八州の御警固
      관동팔주의 수호장.



      東国の儀御取次
      동국의 총독

      이라고 하였지 관동관령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죠.

      그럼 관동관령을 내렸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후세의 사람들이 비슷한 유형의 직책(이름)을 생각하다 보니 무로마치 막부의 관동관령이 있기에(마침 다스리는 지역도 비슷) 그 말을 따다 붙인 것입니다.

      지금 집이 아니라 언제 쯤부터 타키가와에게 관동관령이라는 단어를 붙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집에가 찾아보고선 다시 보충해서 댓글 달겠습니다.

    • dad 2011.01.17 1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막부 역직이랑은 상관이 없는건가 보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와는 대조적으로 강직하고 우직한 장수였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죽은 뒤 노부나가의 후계자리를 둘러싸고 히데요시와 격렬한 주도권다툼을 벌이다 패했다.

 전해지는 카츠이에의 목상을 보면 눈꼬리가 치켜 올려진 염라대왕과 같은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카츠이에는 오다 가문 내에서도 그의 부대 표식(馬印)인 금색 고헤이(御幣)가 [귀신 시바타의 고헤이]라 칭송 받을 정도로 맹장이었던 것이다.(이곳(링크)에 가보면 중간 즈음에 좌상과 금색 고헤이(御幣)를 볼 수 있다)

 맹장이라는 이미지와 반대로 카츠이에게는 뛰어난 민정가로서의 일면도 있었다.
 농민 반란군(一向一揆)을 멸하고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의 성주가 된 카츠이에는 칼 단속령(刀狩)을 단행하여 농민들의 무기를 전부 몰수한 후 그것을 다시 농기구로 만들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남은 것은 쇠사슬로 만들어 쿠주류우가와 강(九頭龍川)에 가교(架橋)를 세웠다. 영지(領地)에서 48척의 배를 모아 떠내려가지 않게 쇠사슬로 엮고 그 위에 널빤지를 이어 다리로 만든 것이다. '후나바시(舟橋)'라는 이름이 붙여져 지금도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키타노쇼우를 종단하는 아스와가와 강(足羽川)에 반은 돌, 반은 나무로 평판이 자자한 '오오하시(大橋)'도 만들었다.

 시바타 씨(柴田氏)는 대대로 오다 가문의 가로(家老)를 역임하는 가격(家格)을 가지고 있으며 카츠이에는 중신 필두로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한때는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츠(信勝)[각주:1]의 모반에 가담하여 노부나가에게 반항하였다. 당시 캐찌질이(大うつけ)라고 불리고 있던 노부나가를 오다 가문 번영을 위해 없애버리고자 한 것이다. 그것에 실패하자 곧바로 머리를 밀고 용서를 구하였다. 보통 노부나가는 한번 자신에게 모반을 일으킨 자는 절대로 용서하는 일 없이 곧바로 죽였지만[각주:2] 카츠이에의 경우 그의 우직과 성실함이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카츠이에의 무공을 말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독 깨기 시바타(かめ割り柴田)]라는 에피소드이다. 1570년 오다 노부나가가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朝倉)를 공격하였을 때 갑작스런 아자이 나가마사(井 長政)의 배신으로 인해 실패했던 시기였다. 오우미(近江) 방어를 위해 카츠이에는 쵸우코우지(長光寺)성()을 소수의 병사와 지키고 있었는데 거기에 남 오우미의 옛 주인인 롯카쿠 죠우테이(六角 承禎)가 8000의 병사를 이끌고 공격해 온 것이다. 농성전이 시작되었다. 성의 용수지(用水池)를 빼앗겼기에 이내 성 안에 마실 물이 바닥을 드러냈다. 적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항복을 권고해 왔다. 갈증으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카츠이에는 성 안의 모든 병사를 모아 결의를 다졌다.
 "이대로 간다면 자멸할 뿐.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오늘 밤 출격하여 최후의 꽃을 피워보지 않겠는가?"
 그리고 성 안에 남은 물을 큰 독에 모아 병사들에게 한 잔씩 마시게 한 후 손수 나기나타(薙刀)로 독을 깬 것이다. 그리하여 시바타의 군세는 전원 결사의 돌격을 감행하여 몇 배나 되는 적을 물리친 것이다.

 1582년 6월 2일.
 혼노우(本能)사(寺)에서 주군 노부나가가 죽은 시점이 카츠이에 인생의 분수령이었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인이 되는 것은 필두 중신은 자신이다. – 그렇게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아케치 미츠히데(
明智 光秀) 토벌을 히데요시가 먼저 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카츠이에와 히데요시간에 주도권 다툼이 펼쳐지게 된다.

 오다 가문의 후계를 정하는 키요스 회의(議)가 그 결정적인 장면이 되었다. 카츠이에는 노부나가의 셋째 노부타카(信孝)를 내세웠으며 히데요시는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죽은 적자 노부타다(信忠)의 아들 산포우시(三法師=후에 히데노부(秀信))를 내세웠고,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를 자기 측에 끌어들인 히데요시가 결국 적통이라는 명분을 이유로 산포우시 추대에 성공한 것이다.

 주도권 다툼에서는 패했지만 카츠이에는 그 대신 당시 절세의 미녀라 칭송 받던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노카타(お市の方)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당시 카츠이에 61세.
 오이치노카타는 박복한 운명에 휘둘린 여성이었다. 처음엔 오우미의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시집가 2남3녀를 낳았지만 오빠 노부나가에게 남편 나가마사는 멸망 당하고 장남까지 살해당하였다.

 히데요시도 오이치노카타를 남몰래 동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히데요시와 카츠이에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合
)는 오이치노카타를 빼앗긴 히데요시가 카츠이에에게 실연당한 복수를 한 것이라는 설이다. 히데요시는 싸움에 패하여 키타노쇼우에서 농성하는 카츠이에에게 목숨은 살려줄 테니 코우야산 산(高野山)으로 물러나라며 3만석의 땅까지 약속했다고 한다. 그 본심은 오이치노카타를 자신의 것으로 하려는 것이었다고 하지만 믿기 힘든 이야기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손에 넣는데 있어 최대의 강적은 카츠이에였다.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도 보고서에 '히데요시는 카츠이에만을 두려워한다'고 적었다. 에도 시대 초기 바쿠후(幕府)의 유학자인 하야시 가호우( 鵞峰[각주:3])도 '히데요시는 카츠이에의 목숨을 살려주자고 하는 부하에게, 카츠이에가 살아서는 내 야망이 성취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기록하였다.

 1583년 3월 시즈가타케 전투가 카츠이에의 운명을 정하였다.
 1개월간에 걸친 지구전이 펼쳐지던 중에 기후 성(岐阜城)의 오다 노부타카 공격에 나선 히데요시의 빈자리를 노려 카츠이에의 부하장수인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 盛政)가 기습을 감행했다. 이 사쿠마의 기습은 성공하여 히데요시 측의 무장인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秀)를 전사시키고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을 패주시키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거만해진 사쿠마는 예정대로 철수하지 않았고 카츠이에의 세 번에 걸친 명령도 승리에 취하여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 패전의 소식을 듣자마자 예전 츄우고쿠 대반전(中大返し)를 방불케 하는 무서운 속도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52km를 불과 5시간 만에 주파한 초인적인 속도였다.
 시즈가타케에 나타난 히데요시군을 보고 그 경이적인 신속함에 시바타군은 동요했다. 4월 20일 미명부터 시작된 시즈가타케의 결전은 카토우 토라노스케(加藤 虎之助=키요마사(
正)), 후쿠시마 이치마츠(福島 市松=마사노리(正則)) 등 소위 칠본창의 무공 등에 힘입어 히데요시의 승리가 결정되었지만, 이미 개전하기 전부터 카츠이에의 패배는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즉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후와 카츠미츠(不破 勝光), 카나모리 나가치카(金森 長近) 등 시바타 휘하의 여러 무장이 히데요시에게 내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바타군은 붕괴되어 에치젠으로 패주하기 시작했다. 카츠이에도 불과 100여기의 수하들에게 보호받으며 토치노키토우게 고개(木峠)를 넘어 에치젠(越前)에 들어섰고, 그 후 마에다 토시이에의 거성 후츄우(府中)에 도착했을 때는 불과 8기로 줄어있었다. 이때 카츠이에는 후츄우 성의 마에다 토시이에를 방문하였다. 배신한 토시이에를 원망하는 마음이 카츠이에에게 없었다. 토시이에가 내온 식사를 다 먹은 후 지금까지 토시이에가 자신에게 해 준 것에 감사를 한 후, "자네와 치쿠젠(筑前=히데요시)은 굉장히 친한 사이. 나와의 약속은 버리고 히데요시와 같은 편이 되어 영지(領地)를 지키시게"라고 권했다 한다. 더군다나 카츠이에는 키타노쇼우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토시이에에게 인질인 딸[각주:4]을 돌려보내었다.

 키타노쇼우의 최후가 왔다.
 이제 성의 병사는 3000도 안 되었다. 이미 밖에는 노도와 같이 에치젠으로 진격해 온 히데요시의 대군이 성(
)을 포위하고 있었다. 카츠이에는 고굉지신이라 부를 수 있는 80여명의 부하를 텐슈(天守)로 불러들여 석별의 주연을 벌였다. 한 사람 한 사람 술을 따라주며 돌아다녔고 부하들의 부인과 시녀들, 그녀들의 말상대인 비구니에게까지 시중을 들었고, 가무음곡을 즐기며 취했다고 한다.

 주연이 끝나자 카츠이에와 오이치노카타는 거실로 옮겨 옛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츠이에는 이때 몇 번이나 오이치노카타에게 성에서 나갈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오이치노카타는 마지막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남편과 운명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하였다. 오이치노카타는,

그렇지 않아도 졸린 여름 밤에
꿈길로 유혹하는 두견새려나
さらぬだに
ぬる
夢路をさそうほととぎすかな

 카츠이에는,

여름 밤 꿈길이라는 허무한 흔적의 이름을
저 하늘까지 가져가다오 두견새여
夢路はかなき
雲井にあげよほととぎす

 라고 각각 사세구를 읊었다.

 다음 날 1583년 4월 24일 미명부터 히데요시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정오에 이르러 이제는 각오를 정해야 할 때라고 본 카츠이에는 텐슈(天守)에 올라 화약에 불을 붙여 일족들과 함께 자인하고 성과 운명을 함께하였다.

[시바타 가쓰이에(柴田 勝家)]
1522년 태생. 통칭 곤로쿠(
). 슈리노스케(修理亮). 오다 가문(織田家)의 필두중신으로 1575년 9월 노부나가(信長)의 에치젠(越前) 농민반란군(一向一揆) 토벌 후 에치젠 국주()가 되었다. 혼노우(本能)사()의 변 때는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와 싸우고 있었다.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패하여 거성 키타노쇼우()에서 자해하였을 때는 62세로 부인인 오이치노카타(お)는 37세였다.

  1. 보통 노부유키(信行)로 많이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2. 내가 알기로는 이런 적 없다. 곧바로 죽인 사례를 아시는 분은 댓글 부탁. [본문으로]
  3.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초기에 활약한 유학자 하야시 라잔(林 羅山)의 아들. [본문으로]
  4. 후에 히데요시의 측실 카가도노(加賀殿)가 되는 마아히메(麻阿姫).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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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11 0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 주3에서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여러 번 배신때렸을 때도 세번째만에 치러가지 않았었나요. 여기서 읽었던 것 같네요. 아자이 나가마사 역시 곧바로 죽였다고 하기에는 배신당했을 때와 시간 간격이 너무 긴 것 같고요.

    2. 오이치가 미녀라는 말은 정말 많이 들었는데, 대하드라마에 나오는 오이치는 다 아줌마들 뿐이네요... <토시이에와 마츠>, <공명의 갈림길> 모두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1 21: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일본에서도 노부나가는 그런 이미지다...라는 것입죠. 성질 더럽고 지 맘에 안 드면 당장 칼부터 드는 식의 이미지.

      오이치는...그러네요. 왜 그럴까요? ^^
      일본 NHK대하드라마도 결국 라인(즉 누구누구 라인, 어느 회사 라인 등등)을 타는 식이라고 하더군요. 따라서 비중 없는 조연일 경우 그 라인 논리에 따라서 적당한 인물이 된다고 하더군요. 특히 공명의 갈림길에서는 그것이 심해 오다 노부나가를 맡은 타치 히로시(舘 ひろし)의 라인(이시하라 군단...이라고 이도 쫌 복잡)이 많이 기용되었다고 하네요(뭐 타블로이드 신문에서 본 것이다 보니 진짜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요)

    •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13 04: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노부나가는 비중있어서 캐스팅을 세심하게 하지만, 같이 딸려 나오는 오이치는 대충 하는거였군요 ㅋ

      지금 하고 있는 NHK 대하드라마 <천지인>에서 오다 노부나가로 나오는 가수 겸 배우 킷카와 코지는 실제로 킷카와 모토하루의 자손이라더군요.

      (킷카와 코지 이름을 다음에서 검색했더니 발해지랑님 블로그가 나오더군요. 웬 소설에서 '킷카와'를 '키츠카와'라고 하질 않나, 심지어는 '요시카와'라고 하질 않나 하는 댓글이더군요 ㅋㅋ)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3 1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충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무래도 조금은 덜 고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 저도 노아님에게 배웠습니다.
      제가 가진 일본 연예계 지식이라야 smap라던가 초기 모닝구 무스메...정도인지라 그런 쪽으로 빠삭한 노아님의 블로그는 도움이 많이 됩니다.

      예전 다메에찌님이 알려주신 것이군요.
      일본 사람들도 명함 주고 받으면서 이름 물어보는데 한국 사람이야 어쩔 수 없죠...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래도 소설 번역이니 공부 좀 하시고 하시지...라는 생각도 한편으론 듭니다.

  2. 카즈토요 2009.03.11 03: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명의 갈림길>에서는 아자이 나가마사의 큰 아들은 오이치의 친자식이 아니라 세 딸을 낳기 전 나가마사가 시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나오던데.. 어떤게 사실인지?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1 2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그 공명의 갈림길을 보지 못한 고로 어떤 내용으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첫째 아들인 만푸쿠마루(満福丸)의 경우 나가마사가 오이치와 결혼하기 전 첫번째 장가인 롯카쿠의 가신의 딸과 결혼했을 시에 생긴 아이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런 기록은 당시에는 없고 아주 후대(메이지 시대)에 아자이 씨의 후손이 기록한 족보에 기록된 것이라 현재는 이설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과 달리(한국도 솔직히 족보는 쪼큼 의문시 할 때도 있다고 합니다만) 일본은 족보가 그리 신빙성있는 자료가 아닌 듯 합니다. 고급귀족(公卿)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에도 시대에 만들어 진 것이 많은지라 조상 뛰우기가 장난이 아니라고 하네요.

      개인적으로는 이치와 나가마사의 결혼한 시기로 여겨지는 1567년에 당장 그 해에 아이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만푸쿠마루가 죽을 때(1573년) 10살이라고 하기에 만푸쿠마루가 태어난 해는 1563년 즉 3년의 차이가 생깁니다. 그렇기에 오이치의 아이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당시의 년도 기록이 정확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보니 '바로 이거다'라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3. 맹꽁이서당 2009.03.12 08: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바타도 천하인을 노리고 있었군요.
    만약 시바타가 히데요시를 물리치고 대권을 잡았다면, 그가 내세운 노부타카와 결국 갈등이 생기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3 11: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어땠을까요?
      전 왠지 충실히 따랐을 것만 같더군요. 근거라곤 노부타카가 그리 녹녹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 뿐이지만요.

      노부타카는 동시대의 남만인과 일본인 등의 평이 엄청 좋더군요. 남만인들은 - 신중하며 예의 바른 위대한 용사, 일본인들도 '문무의 달인', '지용(知勇)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등... (덧붙여 외모가 노부나가와 가장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뭐 실제론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요. 역시 역사의 IF는 재미있습니다. ^^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3.12 2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근현대 하이쿠에서도 종종 보이지만... (저는 시엔 잼병입니다만 본이 아니게 문창과 친구가 있어서 종종 읽게 됩니다만;)

    저 호토토기스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의미를 두고 읽어야 할지 의미를 두지 않고 읽어야할지) 모르겠던 경우가 상당하더군요; 읽기도 힘든데 저런걸 짓는 당대인의 교양을 생각하면 종종 숙연해질때가 있습니다..(뭐 사세구의 경우엔 내용 자체도 숙연합니다만;)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13 11: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단어의 뜻을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아서요..
      이런 것을 해석할 때마다 문학적 소양이 너무 없구나...어렸을 때 무협지만 읽지 말고 시 도 좀 읽어 둘 걸...하는 생각이 절로 나더군요.

      그러게요...호토토기스...
      나중에 알게 되시면 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굽신굽신)

      죽기 전에 지은 시라 더욱 비장미를 더해 주는 것 같습니다. 사세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