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가 히데요시의 본진을 방문하는 그림.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 때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에 대한 평판은 굉장히 나빴다. ‘우인(愚人)’[각주:1], ‘영승(佞僧)’[각주:2], ‘요승(妖僧)’[각주:3] 등 최저의 표현으로 기록되어 비난 받았다.
 이는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때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를 서군의 총수로 내세워 쓰라린 패전의 맛보게 만들었고, 그에 따라 120만석이었던 영지를 단번에 37만석으로 떨어뜨린 장본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주로 모우리 가문[毛利家]가 퍼뜨린 악담인 듯 하다.

 우선 그에 대해선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안코쿠지 에케이라고 하면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횡사(橫死)와 히데요시[秀吉]의 천하제패를 예언한 통찰력이나 안목으로 유명하다.
 1573년. 당시 모우리[毛利]의 외교승이었던 에케이는 쇼우군[将軍]
요시아키[義昭]의 처우를 놓고 오다[織田]-모우리[毛利] 의 사이에 긴장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상경해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절충을 거듭하고 있었다.
예언은 이 교섭이 끝난 뒤 돌아오는 길에 오카야마[岡山]에서 모우리 가문의 중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에케이는 다음과 같이 썼다.

노부나가가 3~5년은 버틸 것입니다. 내년 즈음에는 공가(公家)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각주:4] 그러나 그 뒤 높은 곳에서 벌렁 자빠져 떨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토우키치로우[藤吉郎][각주:5]는 만만치 않게 뛰어난 사람입니다.
 에케이의 이 예언은 10년 뒤 현실이 되었다.[각주:6] 

 에케이의 출신성분에 대해서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듯 하지만, 아키[安芸] 카나야마 성[銀山城]의 성주 타케다 노부시게[武田 信重][각주:7]  핏줄이라 전해지며[각주:8] 아키[安芸]의 안코쿠 사[安国寺][각주:9] [각주:10]에 들어가 중이 되었으며, 이 절의 주지가 되었다.[각주:11] 이러는 사이 에케이의 스승인 에신[恵心]이 당시 외교승(外交僧)으로 모우리 가문[毛利家]과도 친했기에, 에케이도 모우리 가문의 외교승이 되었다.

 앞의 예언에서 10년. 에케이는 급격히 바빠졌다.[각주:12] 1582년 5월, 히데요시가 이끄는 대군이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을 포위하여, 당장이라도 오다-모우리 간에 대결전이 일어날지 모르는 정세가 된 것이다. 이때 에케이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를 대리하여 히데요시와 강화교섭에 나섰다. 히데요시는 타카마츠 성의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의 할복을 강화의 조건[각주:13]으로 냈다.[각주:14] 에케이는 독단으로 이것을 받아들여 시미즈 무네하루를 설득하여 배를 가르게 만들었다.[각주:15] 

 얼마 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대승을 거둔 히데요시는, 강화 때의 조건으로 내걸었던 모우리 가문의 영지 할양을 다시 꺼냈다. 그거도 만약 불복한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에케이는 다시 히데요시와 절충을 거듭했지만, 히데요시의 실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우리의 중신들 눈에는 에케이가 하는 일들이 모두 히데요시의 뜻을 대변하는 것으로만 보여, 나중에는 에케이를 “대갈이만 큰 땡중놈”이라고 욕하는 자까지 생겼다.
 이에 대해 에케이는 “지금은 사람의 외모나 모습으로 떠들 때가 아닙니다. 서로가 진심을 나눌 때입니다. 부디 저의 진심을 믿어주길 바랍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또한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은 모우리의 가문을 지키기 위함이며, 이것에 반대함은 천하의 정세에 어둡기 때문이다 – 라는 편지도 보냈다.[각주:16] 

 어쨌든 모우리 가문은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에케이도 이렇게 오랫동안 히데요시와 절충을 하는 동안 히데요시의 신뢰를 받아 승려인 채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각주:17]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의 항에서 언급했듯이,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모우리 가문은 에케이와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각주:18]의 대립[각주:19] [각주:20]으로 인하여 결국 아무 것도 못한 채 패배한 것이었다.[각주:21]

 에케이는 일단 전장에서 벗어났지만 쿄우토[京都]에서 잡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와 함께 참수되었다.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
아키[安芸] 안코쿠 사[安国寺]의 주지가 되어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사승(使僧)으로 활약, 후에 히데요시[秀吉]에게 이요[伊予] 와케 군[和気郡] 2만3천석을 하사 받았고 몇 년 뒤 6만석이 된다. 참수되었을 때는 63~4세라 한다.

  1. 오오타 규우이치[太田 牛一]의 케이쵸우기[慶長記], [본문으로]
  2. 아첨하고 얍삽한 중이란 뜻으로, 이와쿠니 킷카와 가문[岩国吉川家]의 가로(家老)인 카가와 마사노리[香川 正矩]가 저술한 인토쿠기[陰徳記]에 나오는 표현. 이 책은 주군인 킷카와 씨를 정당성을 주기 위해 각색한 티가 많이 난다고 한다. [본문으로]
  3. 1663년 아사노 히로시마 번[浅野広島藩]의 번 의사[藩医]인 쿠로카와 도우유우[黒川道祐]가 만든 지역 역사지인 게이비국군지[芸備国郡志] [본문으로]
  4. 실제로 노부나가는 다음 해인 1574년 종삼위(從三位) 산기[参議]가 되었다. [본문으로]
  5. 히데요시의 통칭 [본문으로]
  6. 저자는 이 예언을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일으킨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을 떠올린 듯 한데, 이는 결과론으로, 아마도 에케이는 노부나가의 부하가 반란을 일으킨다는 의미보다, 이 1573년 당시 노부나가의 권력기반이 강고하지 않다보니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였을 것이다. [본문으로]
  7. 노부시게는 다른 이름으로 ‘토모 노부시게[伴 信重]’라 하며, 아키 타케다[安芸武田家]의 당주인 카나야마 성주인 타케다 노부자네[武田 信実]의 사촌뻘이다. 사촌뻘이라 한 이유는, 노부자네가 와카사 타케다[若狭武田家]에서 아키 타케다 가문에 양자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에케이[恵瓊]가 아키 타케다 가문의 핏줄인 점은 맞는 듯 하다. 에케이의 증조할아버지인 타케다 모토시게[武田元繁]는 아키 타케다 가문의 당주였으며, 모토시게의 아들이자 에케이의 할아버지인 ‘토모 시게키요[伴繁清]’ 부터 토모 씨[伴氏]를 칭했다. [본문으로]
  8. 에케이의 출신을 알려주는 유일한 기록 ‘후도우인 유래기[不動院由来記]’에 따름. [본문으로]
  9. 안코쿠 사[安国寺]는 14세기 초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세운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전란으로 죽은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일본의 각 쿠니[国]에 세운 임제종(臨濟宗) 계열의 절이다. [본문으로]
  10. 아키[安芸]에 있는 안코쿠 사[安国寺]는 아키의 슈고[守護]였던 아키 타케다 가문[安芸武田家]의 위패를 보관하는 보제사(菩提寺)였기에, 아키 타케다의 피가 흐르는 에케이도 이런 연으로 이 절에 들어간 듯 하다. 여담으로 이 절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후에 아키 지역에 들어 온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서군의 수괴가 주지였던 이 절을 임제종에서 진언종(真言宗)으로 바꾸고 절이름도 ‘후도우 원[不動院]’으로 바꾼다. 위의 주석에 에케이의 출신을 알려준다는 기록이 ‘후도우 원 유래기[不動院由来記]’인 이유를 아실 수 있으리라 [본문으로]
  11. 1569년. 쿄우토 오산[京都五山] 중 4위이며 임제종 총 본산인 토우후쿠 사[東福寺]의 도서관장인 장주(藏主) 겸임. [본문으로]
  12. 뭐 사실 이 이전에도 모우리 가문이 오오토모 가문[大友家], 우키타 가문[宇喜多家] 등과의 대결에서 외교절충이나 후방지원 등에 활약했다. 갑자기 바뻐진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13.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쳐했던 모우리가 히데요시에게 화평을 청했고 이에 히데요시가 제시한 것이 ①모우리의 영지 중 5개 쿠니[国] 할양 ②인질제출 ③앞으로 개기지 않겠다는 기청문(起請文) 제출로. 무네하루의 할복을 조건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4. 그러나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일어나,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를 처벌하기 위해 상경하고자 하여 일시정전을 바라며 무네하루의 할복을 요구. 어차피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으로 낙성과 마찬가지였던 타카마츠 성의 성주 무네하루가 성의 병사들 목숨을 구하는 대신 할복하여 죽었다. [본문으로]
  15. …는 모우리 가문[毛利家]이 에케이 악인-무네하루 충신설을 만들기 위해 후세에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무네하루 할복에 에케이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에케이는 이 이후 모우리-히데요시 간의 화평교섭 때 참가하였을 뿐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16. 에케이의 끈질긴 교섭으로 본래 히데요시가 원했던 5개 쿠니[国] – 빗츄우[備中], 빈고[備後], 호우키[伯耆], 이즈모[出雲], 미마사카[美作] - 중 히데요시에게 비젠, 미마사카, 호우키의 세 개군(郡), 빗츄우의 동부를 할양하게 되지만, 대신 빈고[備後], 이즈모[出雲]와 호우키의 일부, 그리고 빗츄우의 서부를 지키게 된다. [본문으로]
  17. 에케이가 다이묘우[大名]였다는 것은 에도 시대의 편찬물에 쓰여졌을 뿐으로, 당시의 사료에는 안코쿠 사[安国寺]의 사령(寺領)으로 서국(西国)의 각 다이묘우 들의 영지에서 500~5000석씩 각출한 총 1만1500석이 주어졌다고 한다. 즉 에케이 개인이 아닌 절의 영지로 주어진 것이다. 거기에 만약 에케이가 다이묘우[大名]였다면, 히데요시 정권이 다른 다이묘우들에게 부과한 군역(軍役)처럼 군역을 부과받았겠지만, 에케이는 그것이 없었으며, 또한 영지 경영에 필수적인 가신단이 있어야 했지만, 역시 에케이에게는 가신단 또한 없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8. 모우리 양천[毛利両川] 중 하나이며, 모우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둘째 아들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의 셋째 아들. [본문으로]
  19. 대립이 있었다는 것은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가 세키가하라 전쟁이 지난 후에 비망록[覚書]으로 적어 놓은 것에 나오는 것으로, 내용은 모우리 가문이 서군에 붙게 된 것은 에케이의 말빨에 이은 독단에 이은 것이며, 나님(히로이에)는 말쌈하면서 까지 말렸지만 에케이가 듣지 않았다. - 는 식으로, 나쁜 것은 모두 에케이때문이라는 것과 그에 따라 모우리 가문과 킷카와 히로이에는 이에야스에게 개긴 적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내용을 날조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0. 후세의 편찬물이 아닌 당시의 서장 들을 살펴보는 한 히로이에와 에케이가 특별히 사이가 나쁘다거나 혹은 싸운 적은 없다. [본문으로]
  21. 사실 이는 서군 총사령관이면서도 양다리를 걸쳐 동군과도 부전조약을 맺은 모우리 테루모토[毛利輝元] 탓이 크다. 테루모토는 은거해 있던 미츠나리[三成]에게 에케이를 파견하여 반 이에야스 공작을 주도하였고, 한편으론 동군의 부사령관격이었던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와 친한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에게 명령하여 동군과도 연락하며, 전투가 일어나기 전날에는 동군-모우리 가문간에 부전조약을 맺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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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i IV 2011.10.29 16: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어디서 굴러들어온지 모를 돌인데 굉장히 출세(...여담이지만 무려 코에이사 모리 모토나루전에서는 모토나리 사후 가입캐러로 대활약 하더군요)한 사람이라 궁금했었는데 이런 연유가 있었군요.

    상대적으로 같은 교토 로쿠죠가와라에서 참수된 두명에 비하면 격이 떨어지는...사람으로 생각했었는데 쓰신 글을 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던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면 아무튼간에 승려신분으로 1만석 이상을 받은 사람이 더 있던가요? 텐카이는 어땠으려나..)

    그러고보면 같이 로쿠죠가와라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의 유골발굴때 보았던 포스팅인데, 同時に1本の「小づか」も発見されました。小づかとは打ち首にあった人を埋葬する時に首と銅をつなぐためのものです。라네요. 대충 잘린 목과 밑부분을 이어주기위한 것으로 해석하면 되려나요? 다른 참수된 사람들도 이렇게 묻는게 상례였는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어이쿠 고인께 실례되는 생각이나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30 03: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활동이나 업적 등을 보면 그 둘 보다 더하면 더했다고도 생각합니다.

      승려 신분으로 영지라...글쎄요..승려들은 寺領이라는 형식으로 받지 개인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보니...
      말씀하신 텐카이도 텐카이 개인이 받은 것은 모릅니다. 다만 그가 세운 칸에이 사[寛永寺, 쇼우군의 위패가 있고, 만약 막부와 쿄우토 조정과의 사이가 틀어질 경우 텐노우로 만들기 위해 황족의 인물을 주지로 받는 절]의 경우 최전성기 때 1만1790석을 소유했다고는 하지만, 이도 단계적으로 높아진 것이라...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무엇보다 참수형은 최고형이다 보니 유족들이 가져가 따로 모시는 것도 힘들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때때로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가령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경우는 목이 베인 뒤, 목은 효수된 뒤 이후를 알 수 없지만, 몸통은 기독교도들이 쿄우토[京都]의 기독교 사제관으로 몰래 가져와 묻었다고 합니다.(참수될 때 유키나가가 입었던 옷에 유언이 쓰여있다고 하더군요)

      여담으로 고승이었던 에케이의 유체를 따로 묻기 위해 '사이쇼우 죠우타이[西笑承兌]'가 운반의 허가를 구하자, 당시 쿄우토 책임자였던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奥平信昌, 나가시노 전투의 계기가 된 나가시노 성을 지키던 인물]는 그런 허가를 받지 못했다며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는 알 수가 없네요.

  2.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11.02 13: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느 시대나 그러한 인물들이 있는 법입니다만 16세기 일본의 인물들은 가깝게 느껴지면서 때론 이해할 수 없는 매력들이 있는데 안고쿠지 에케이 역시 그러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케이가 뛰어난 외교능력을 가졌다고는 확신을 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론 히데요시와 모리의 외교에서 에케이가 외교 책임자라고 보는 것보다 고바야카와가 그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옳다고 여겨집니다. 아무리 그가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모리 가문의 명운을 건 교섭에서 외교승을 중용한다는건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고 봐야겠지요. 그의 역할은 보좌로 봐야 맞는게 아닐런지.

    대 미쓰나리 외교도 데루모토와 깃카와를 비롯한 모리 혈족의 도마뱀 꼬리 자르기식의 처리로 인해 에케이가 모든 죄를 뒤집어쓴 것이라고 봐야 옳을 것 같습니다.

    말해놓고 보니 에케이가 참 불쌍하군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03 07: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결제권이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가지긴 했습지요. 다만 실무를 맡은 것이 에케이였습니다. 에케이는 쿄우토 오산[京都五山]의 인맥들을 활용하여 정보수집과 히데요시 측의 의중을 알아보는 한편, 히데요시 측의 실무진인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와 조정에 힘썼다고 합니다. 오히려 모우리 가문 산요우[山陽] 방면 담당인 타카카게(뿐만 아니라 모우리 가문 거의 전부가)는 비젠, 빗츄우가 관할지였다 보니 반대하는 편이었습죠. 히데요시의 힘을 인지하지 못하고 양보할 수 없다며 반대만하는 모우리 가문의 면면들에게, 에케이는 술 마시고 술기운에 투정을 마구 부린 편지도 현재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외교승이라는 것이 센고쿠 시대에서는 꽤나 널리 퍼졌던 시스템입니다. 세속적인 무가(武家)의 싸움에, 세속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고 여겨지던 승려는 중간에서 여러가지 조정을 맡곤 했습니다.

      가령 게임 상의 이야기입니다만, 신장의 야망에서 승려가 방문했을 때 외교적 선택(타세력의 침입시 강제적인 전투종결 및 단기간 부전합의, 포로를 반드시 데려 올 수 있음)에서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것에는 당시의 그러한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테루모토는 그런 짓이 특기인 것 같더군요.
      후년의 일입니다만 토요토미 가문을 멸한 오오사카 공성전 때 테루모토는 토요토미 측에 줄을 대기 위해서 중신 나이토우 모토모리[内藤 元盛]를 사노 도우카[佐野 道可]라는 인물로 변신시켜 오오사카로 보내며, 모토모리에게 만약 실패했을 시에는 모토모리의 자손들을 보호하겠다고 하면서도, 종전 후 모토모리가 토쿠가와에게 잡혔을 때 모토모리는 모우리 가문과의 관여를 끝까지 부정하며 모우리 가문에 충성을 다하지만, 테루모토는 이에야스에게 혼날까봐 모토모리의 아들을 전부 죽입니다.

    •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11.03 15: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군요. 그렇다면 에케이가 대 히데요시와의 외교 전반에 관여했다고 보는 것이 옳겠군요. 그렇다면 노부나가의 죽음을 알았을테인데 정보의 입수가 늦었다는 것이 되는지 궁금해지는군요.

      여하튼 어긋난 지식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하사해주셔서 오늘도 새로운 정보를 얻고 가게 되는군요. 열심히 받아먹도록(?!) 하겠습니다.

      모토나리의 음험함을 가장 잘 이어받은 것이 데루모토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숙부인 다카카게보다도 더요.

  3.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07: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시가 시즈카타케 전투 후 종전에 맺은 모리와의 강화를 무시하고 다시금 처음 강화를 맺을때의 요구사항을 들이댔다는건가요?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일본사 이것저것 2011.10.17 07:58 Posted by 渤海之狼

각지를 전전하던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가 1568년 쇼우군이 되자, 그때까지 키나이[機内] 지방을 장악하고 있다가 쫓겨났던 미요시삼인중[三好三人衆]은 재탈환을 노리며 쇼우군 요시아키가 임시로 거처를 삼고 있던 로쿠죠우[六条]의 혼코쿠 사[本圀寺][각주:1]를 1569년 1월 4일 공격합니다.

1569년 1월6일 자신이 옹립한 쇼우군이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기후 성[岐阜城]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는 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자신은 단기(單騎)로 쿄우토[京都]를 향합니다. 하필 눈이 엄청나게 와 생각만큼 나아가질 못하던 중 노부나가는 오다 군(織田軍)의 물자를 수송하던 운송업자들이 다투고 있는 것을 목격합니다.

노부나가는 운송업자들이 다투고 있는 곳에 가서 “어째서 다투느라 가질 않고 있는가?”라고 물어, 그 이유가 서로 자기 말에 배당된 물품이 더 무겁다는 등이 이유로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노부나가는 각자의 말들에 짊어진 물품들을 내리게 한 뒤 직접 짊어진 뒤 “똑같은 무게다. 서두르길 바란다”며 진격을 재촉합니다.

이때의 모습을 신장공기는

운송업자들이 물품 배당 문제로 다투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말에서 물품을 내리게 하여 양쪽 다 살펴보신 뒤, “같은 무게다. 서둘러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봉행(奉行)인 자가 어느 한쪽만 편들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셨기에 하신 일이다.
馬借の者も、御物を馬に負候とて、からかいを仕り候。御馬より下りさせられ、何れも荷物一々引見御覧じて、同じおもさなり、急ぎ候へと仰せ付げられ候。是れは奉行の者に依怙贔屓もあるかと、おぼしめしての御事なり。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의 대통령 되시는 분이 자주 쓰시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이렇게 직접 해본 뒤 해결책을 내놓아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뿐인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비웃음만 살 뿐이라는 것은 어째서 몇 년이 지나도록 이해하지를 못하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1. 여담으로 당시는 '혼코쿠 사[本國寺]'라고 '코쿠'의 글자를 國자로 썼으나, 에도 시대에 미토 코우몬[水戸黄門]으로 유명한 토쿠가와 미츠쿠니[徳川光圀] 생모의 추선공양을 한 뒤 미츠쿠니의 보호를 받아, 이후 혼코쿠의 '코쿠' 자가 圀로 바뀌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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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던 불교의 중이 쿄우토[京都]를 방문했다. 그는 굉장한 사기꾼에 변설이 뛰어났지만 위대한 설교자로 유명하며, 더할 나위 없이 거만한 자세에 모든 불승(佛僧)의 통념을 파괴하는 극도로 특이한 중으로, 이름을 무헨[無辺]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무한(無限) 즉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일본 전국에 그 이름을 떨쳤다.

어떤 사람은 그가 기적을 행한다고 말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무헨이 마음 속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며 마음 속 비밀을 파헤친다고 하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무헨에게 모여들었다. 무헨을 한 번 보고 그의 의상에 입맞춤하고자, 무헨의 숙소에 대군중이 모여들어 입구에서 그를 기다렸다.

원래 노부나가[信長]는 과도하게 기이한 짓을 뽐내는 자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며 또한 노부나가 자신 역시 거만하였기에, 스스로를 높이고 남을 내려다보는 사람이 노부나가의 영내(領內)에 있는 것을 참지 못하였기에, 예전부터 무헨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는, 무헨과 사자이보우[栄螺坊]라는 – 무헨을 자신의 처소에 숙박시키고 있는 다른 중과 함께 출두하라고 명령하였다.

(출두한 무헨을) 꿰뚫어지도록 쳐다본 뒤,
(너는) 어느 나라의 사람인가?하고 물었다.
무헨은 단지 “무한[각주:1]“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노부나가는 “중국, 시암 어느 쪽 사람인가? 하고 신문했다.
무헨은 자신이 순례하고 있다고 하였다.
노부나가는 “모든 인간은 일본, 중국, 인도가 아니면 안 된다. 너가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라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너의 신분을 알려고만 하면 곧바로 알 수 있으니 어서 말하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무헨은 “반도우 지방[坂東地方]인 데와[出羽]의 하구로[羽黒] 출신입니다”라고 말하였다.(확실히 이곳은 악마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모인 장소[각주:2]이다).
노부나가는 이에 답하여 말했다. “나는 이 자가 사기 치는 것을 좋아하는 요술사라고 예전부터 너희(가신)들에게 말하였다. 이 놈은 방금 전까지 자신의 출생지도 거주지도 갖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을 (일본의 옛 중인) 코보 대[弘法大師]라고 선전하며, 남들이 준 그 어떤 것도 받지 않고 자신에게 욕심이 없다며 받은 것들을 숙박했던 집에 놓고 간다 – 고 사람들은 말한다. 정말 그렇다면 어째서 이 놈은 항상 같은 집에서만 머무는가? 나는 그것을 물욕이 없기에 하는 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것은 받은 물건들을 자기 것을 만들기 위한 잔꾀이다. 무헨 너는 기적을 행한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내 앞에서 행해보거라”
고 하였지만 무헨은 기적의 ‘기’자도 보이질 못했기에,
노부나가는 “기적을 행하는 인간은 본성, 마음가짐, 눈의 움직임, 표정에서 그가 가진 덕을 나타낸다. 그러나 너는 흔히 볼 수 있는 나무꾼보다도 천하며 야비하다. 너는 무지한 부녀자들을 속여 너가 통과하는 지역이나 마을에서 돈을 쓰게 만들고, 불쌍한 사람들을 학대하고 있다. 그건 정말 악한 일이다”고 말하고선 가신들에게 “너희들 어서 이 놈을 혼내주거라”고 말했다.

무헨은 곧바로 그 자리에서 조금 구타 당하고, 길고 아무렇게나 길렀던 머리를 빡빡 깎인 뒤 목줄에 매여 거리를 돌게 하는 불명예를 안겨준 뒤 도시에서 쫓아냈다.

나중에 노부나가는 또다시 무헨이 여전히 사기를 치며, 밤중에 남녀가 무헨을 방문하고, 무헨이 병든 여성들을 낫게 한다며 주술을 부린다는 것을 듣고, 자신의 명령이 엄격히 지켜지길 바라는 노부나가는 모든 길에 보초를 배치하여 무헨을 잡도록 명령하여 무헨이 잡히자 곧바로 참수시켰다. 이교도들은 노부나가가 무헨을 죽이는 것에 약간의 공포를 느꼈지만, 무헨이 죽고 난 뒤 그가 행했던 위선과 사기를 알려짐에 따라, 노부나가의 굉장히 사려 깊은 행위라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각주:3] 제2부 29장


무헨에 대해서[無邊の事]

3월 20일. 무헨이라는 행각승이 이시바 사[石馬寺]의 사자에보우[栄螺坊]의 처소에 잠시 거주하고 있었다. 자주 기이하고 특이한 술법을 부린다고 한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이 바칠 수 있는 만큼의 돈이나 물건을 가지고 ‘술시의 비법[丑の時大事の秘法][각주:4]’을 전수받고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절의 문 앞에 모여있다고 한다.

노부나가 공[信長公]은 무헨에 대한 소문을 평소 자주 들으셨는 바, 무헨을 만나보고 싶다 말씀하셨기에, 사자에보우는 무헨과 함께 아즈치로 왔다. 곧바로 마구간으로 행차하셔 이곳에서 무헨을 천천히 살펴보시더니 평소 생각하던 모습과 같더라.

(노부나가가) 행각승의 태어난 곳은 어딘가? 하고 물으시자

(무헨은) 무변(無邊)이라고 답했다.

(노부나가가) 다시 묻네만 중국인인가? 천축인인가? 하고 거듭 물으시자

(무헨은) 단지 수행자일 뿐, 이라고 답했다.

(노부나가는) 인간이 태어나는 곳은 중국, 천축, 일본 밖에 없는데도 그 외라고 하니 참으로 수상하구나. 그렇다면 네 놈은 틀림없이 괴물이겠구나. 그렇다면 불로 지져버리겠다. 여봐라 불을 이리 가지고 오너라. – 라고 명령하시자,

그 말에 겁이 난 무헨은, 데와[出羽]의 하구로[羽黒]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노부나가는,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더냐? 여태까지 태어난 곳도 없고, 사는 곳도 없다면서 속였다. 또한 불법을 널리 퍼트린다(弘法)고 떠들고 다니며, 욕심이 없다면서 사람들이 물품을 주면 받아서 자신이 머무는 곳에 두면서 계속 그곳만 이용하는 것은 일견 욕심 없이 보이겠지만, 반대로 이는 무욕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이한 술책을 행할 수 있다고 하니 그 기이한 짓을 보여 보거라 – 고 명령하셨지만 무헨은 전혀 하지 못했다.

(노부나가가 말하길) 대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용모에서 안색까지 남보다 뛰어난 것이 있다. 네놈은 산적만도 못하다. 여자나 아이들을 속이고 내 영지에서 그들의 돈을 갈취하다니 참으로 괘씸하도다. 이놈에게 창피를 주어라 – 고 명령하셔서, 긴 머리를 가위로 군데군데 자르고 나체로 만들어서는 끈으로 묶어 조리돌림을 한 뒤 아즈치에서 추방하였다.

또한 나중에 노부나가는 무헨이 어찌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물으셨는데, 여전히 술시의 비법을 전수한다거나 혹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 또는 병에 걸린 여성 등에게 ‘배꼽비교’라는 것을 행한다고 하였다. “미래를 위해서다.”라고 말씀하시고는 노부나가 님 직할지와 휘하 다이묘우[大名]들에게 명령을 내려 잡아들이도록 하여 잡히자 심문 후 처형하였다.

(노부나가는 무헨을 머물게 했던) 사자에보우에게 “어째서 아즈치 근방에 저런 종자를 머물게 하였는가?”하고 물으시자,

“이시바 사의 본당에 비가 새, 그것을 수리하고자 권선(勸善)을 위해서 잠시 머물게 하였습니다”고 말하자,

노부나가는 이 돈으로 절을 수리하라며 은자 30매를 하사하셨다.

-오오타 규우이치[太田牛一] 신장공기(信長公記)[각주:5] 권13[각주:6]


개인적으로 기독교 프로이스의 이교도를 바라보면서 쓴 서술과 일본인 오오타 규우이치의 서술의 차이가 재미있었습니다.
거기에 배꼽비교...라는 은근 성적인 표현을 프로이스가 알면서도 안 썼는지 혹은 몰랐는지, 그리고 당시 일본의 세계사상인 중국, 천축, 일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천축(인도)를 시암(태국)이라 한 것도 흥미롭습니다.
또한 무헨이 칭했다는 것이 정말 프로이스의 기술대로 일본의 옛 승인 '코우보우 대사[弘法大師]'인지, 아니면 일본의 연구자들이 말하는대로 '불법을 넓힌다(弘法)'으로 쓰인 것인지도 궁금.
또한 그 후의 처방에서 프로이스는 기술 안 했지만, 오오타 규우이치의 기술에는 나오는 절의 수리비를 주는 노부나가의 모습은 나름 츤데레?

ps:...노파심 삼아 추가합니다만, 이 기술만으로 노부나가가 불교를 억압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노부나가가 싫어했던 것은 있지도 않는 것으로 남들을 현혹시키는 사람 혹은 단체를 혐오하고 벌을 주었을 뿐입니다.
  1. 포르투갈어로 infinito라 쓰여 있다 함 [본문으로]
  2. 하구로는 슈겐도우[修験道]의 수행장이다. [본문으로]
  3. 현대어역은 추오우코우론 사[中央公論社], 마츠타 키이치[松田毅一] 선생의 것을 이용. [본문으로]
  4. 술시는 오전 2시 즈음. 그래서 프로이스의 기록에 무헨의 처소로 밤중에 남녀가 찾아간다고 나온다. [본문으로]
  5.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마치다 판[町田版]을 이용 [본문으로]
  6. 신장공기 권13은 1580년의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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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1.07.22 19: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머리빨로 만들어냈던 권위가 머리를 깎인뒤에 사라졌다는 점에서 삼손씨와 비슷한 스토리진행처럼도 보이는데요, 그런 성경적(?) 해석의 프로이스씨와는 다르게 신장공기쪽은 한국 중고딩들 두발단속하듯 몇군데에 고속도로를 내버렸다며 적어놓은걸 보면...

    같은 사건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느껴집니다(;!)(어이쿠 이게 아니려나..)

    어휴 요샌 그나저나 꽤 덥군요.. 발해지랑님도 이래저래 건강 신경쓰며 잘 보내세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7.22 19: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깍인 다음에도 여전히 배꼽비교를 하고 다닌 것을 보면, 여전히 권위는 살아있었던 듯.

      그차이가 재미있더군요. 악마라던가, 노부나가에게 거만하다는 수사를 붙여 놓는다거나..

      그러게요. 많이 덥군요. 규피님께서도 夏バテ가 되지 않도록 많이 그리고 잘 드시길 비옵니다.

  2. 정동희 2011.07.25 11: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부나가를 보면 중세를 넘어 근대적인 합리인이란 생각이 듭니다
    종교를 억압했다기 보다는 부처를 등에 업고 혹세무민하는 자들을 싫어했다고 생각하구요
    요즘도 이렇게 되도 않는 짓거리 하면서 예수나 부처를 팔아 제 욕심 챙기는 놈들이 있는데
    노부나가 처럼 불러다 때리고 창피를 줬으면 좋겠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7.25 12: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신장공기에서도 노부나가가,
      "미래를 위해서다(先々までの爲めにて候)"라고 했듯이, 나중을 생각한다면 위정자는 분명히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합습죠. 다만...국내 정치가들은 정치꾼이다보니, 눈 앞의 표가 더 중요하지 나라의 미래 따위...

      여담으로...
      지금의 일본에서도 노부나가만한 리더가 없다면서, 미래를 위해서라면 당장의 비난 같은 것은 감수해야 하는데 그런 인물이 없다면서 투덜대더군요.

  3.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07.25 18: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꼭 글을 쓰면 그 글의 요지는 안 읽고 엉뚱한걸 찾는 부류가 더러 있는데, 오늘은 제가 그러한 형국이었습니다. 저 글을 읽자마자 다른건 안 떠오르고 손책과 우길이 떠오르더군요(..) 우길 역시 무헨과 마찬가지로 목이 잘리는 참화를 피하지 못하였으며 손책과 노부나가 역시 폭력적인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이 자꾸 떠오르는 덕분에 글을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손책의 모습이 그러했지만 노부나가 역시 자신의 위에 누군가가 선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인것 같습니다. 요시아키는 이것을 빠르게 파악했던 듯 합니다만 말입니다.

    다시 읽어보니 프로이스는 무헨과 노부나가의 대담이 어디서 일어났는지 확실한 파악을 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눈에 들어오는군요.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어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노부나가의 세계관에서 왜 조선은 빠져있었던 것일까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7.25 23: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 그런 식으로 볼 수도 있군요. ^^
      못 보던 것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만 손책은 멸망시킨 적의 세력에 죽고, 노부나가는 자신의 부하에게 죽었으니 동일하게 보기에는 좀....
      ( 거기에 저는 노부나가가 동시대 일본의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특별히 포악하다거나 폭력적인 면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에 서는 것에 이것도 포함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노부나가의 경우 텐노우의 권위를 세워주는 편이었습죠. 가령 조정이 노부나가에게 관백, 태정대신, 장군...셋 중 원하는 것에 되시오...라는 삼직추임문제[三職推任問題] 때 조정의 칙사를 만나는 문제에 있어서, 너무 급작스러운 말이라 답변을 미루어야 하는데 그래도 칙사를 만나도 되나? 라고 물을 정도였습죠. 오히려 조정의 칙사인 카쥬우지 하레토요[勧修寺晴豊]는 "어쨌든 우선 만나뵙고 싶다"고 할 정도로 절차를 무시하집요.

      직접 보지는 않았을테고 아마 노부나가의 가신들 중 누군가에게 들었을테죠.

      중화라는 문명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을 듯 합니다.

    •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07.26 09: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매일 가르침만 받아가서 적자나실까봐 걱정입니다. 좋은 지식 또 알아가네요.

      음식 조심하시고 건강하세요 ㅎㅎ

  4. Favicon of http://ndd247.tistory.com BlogIcon needled247 2011.07.31 23: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장공기의 한 부분을 볼 수 있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 그런데 신장공기는 어디서 번역된 걸 찾으셨나요? (아니면 직접 번역하셨나요?) 소설, 드라마 말고 제대로 된 일본전국시대 역사서를 한번 보고 싶은데, 번역된 책이나 온라인 도큐먼트 같은게 있나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01 06: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번역한 것입니다. 계획 상으로는 전국무장 100이라는 책을 다 번역하고 나면 신장공기의 번역을 할 생각입니다.

      음... 아무래도 제 관심사가 일본쪽이다 보니 주로 일본에서 검색을 하는지라, 한국에서 일본측 역사서 등을 번역하는 분이 계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한분 계셨지요. 중간에 관두셨습니다만)

    • Favicon of http://ndd247.tistory.com BlogIcon needled247 2011.08.01 15: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어를 잘 하시는군요. 부럽습니다^^

http://news.searchina.ne.jp/disp.cgi?y=2011&d=0415&f=national_0415_069.shtml

일본의 개소문같은 사이트 서치나의 기사입니다.
중국 검색사이트 서치나의 게시판에서 위무제 조조(魏武帝 曹操)와 일본 센고쿠 시대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중 누가 낫냐? 라는 스레가 세워져 중국어를 일본어로 쓰여진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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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레 세운 사람:372436683
내가 생각하기에 노부나가는 500년에 1번 있을까 말까한 야심적인 영웅이다. 조조는 1000년에 1번 나올까 말까한 교활한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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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織田龍秀一
노부나가는 영웅이고 조조는 간웅이다. 어느 쪽이 듣기에 좋냐? 현대 일본인은 다들 오다 노부나가를 영웅으로 간주하지. 현대 중국인은 조조가 영웅인지, 간웅인지, 야심가인지 잘 모른다. 시대가 달라도 답은 이미 나온 거 아냐?

● 122.96.254.*
어느 쪽이 강하냐고 하면 어렵군. 둘 다 많이 닮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중국인이니까 역시 조조를 지지해!

● 鳳雛一輝
완성 전투와 혼노우 사의 변. 누가 살아 남고 누가 죽었는지를 보고 알아야지.

● 玉柴政夏
조조는 단지 토지와 농민 획득 방법을 잘 알고 있었을 뿐이야. 한편 노부나가는 위대한 개척자다.

● LOVE歩歩ayumi
조조 쪽이 교활하다고 생각해. 노부나가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뭐 한때 지랄 좀 떤 거 같지만

● abcdxyz2010
노부나가는 천하인으로서 사리사욕이 없었다고 생각해. 조조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야심뿐이었다고 생각해

● 211.136.115.*
↑ 노부나가에게 사리사욕이 없었다고? 사리사욕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일까? 조조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야심뿐이었다고? 젊었을 적의 조조는 손권과 함께 한왕조에서도 손꼽히는 충신으로 여겨진 적도 있다구. 정말 이 게시판에 있는 놈들은 어째서 이렇게 조조를 깔려고만 하는거야?

● 陸不遜
그다지 노부나가빠들을 공격하려는 것은 아닌데, 노부나가는 자기 부하조차 확실히 관리하지 못해 결국 자살했잖아.

● sjy1201
조조가 죽은 뒤 그 자식들을 북방을 계속 지배했지.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뒤 적자는 영지를 지키지 못했어[각주:1]. 다른 자식들의 결과도 모두 알고 있을 터.

● blkid
노부나가는 동탁과 닮았지. 동탁도 강했어. 하지만 조조에 비교하기엔 부족하지

● 849319572
그냥 둘을 몇 번 싸우게 해보면 알지 않아?

  1. 노부나가의 적자 노부타다[信忠]는 노부나가와 같은 날 죽음. 아마 글쓴이는 노부타다의 적자 히데노부[秀信]와 헷갈린 듯. 히데노부는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에서 미노[美濃] 기후[岐阜] 13만석. 정삼위[正三位] 곤츄우나곤[権中納言]이 되나, 세키가하라 때 서군 측에 서 영지 몰수 후 얼마 안가(1605년) 죽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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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1.05.18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완성전투와 혼노지의변을 적절하게 비교해넣은 중국 네티즌의 센스가 참 인상깊네요. 어이쿠 그런 점에서라면 일기당천 보디가드를 키워놓지 않은 우다이진의 패배려나(...) 오늘은 무려 3포스팅이라 좀 놀랐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18 17: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저 센스는 '과연~'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또 달리 보자면 장수, 가후와 아케치 미츠히데의 차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번 주 일주일 내내 퇴근 못하고 일요일 9시에 퇴근했습죠. 덕분에 이번 주는 널널하군요.(어제는 집에서 쉬기도 했습죠)

  2. 블루드림 2011.05.19 22: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나름 노부나가를 인정하는 모습이 훈훈하네요.
    이건 코에이의 조조=노부나가의 이미지 메이킹이 성공일까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20 10: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근데 저 게시판 사람들이 단순한 일빠집합소을 가능성도 있고 하다보니 극소수의 생각일 가능성도 있습죠.

      아마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만, 코에이와 관련해서 선후관계를 따지면 조조를 노부나가화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리즈 별 일러스터를 보면 노부나가는 계속 비슷한 이미지로 왔지만, 조조는 초창기때는 중국풍이지만 어느 때부턴가 노부나가와 닮아서 나오더군요.

  3.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11.05.21 18: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끗발 날리던 전성기 시절 미요시 나가요시가 좀 닮지 않았나요? 아니려나요...^^;;

    무쌍오로치 시리즈에서는 그냥 대놓고 둘이서 마왕 간웅 허허 좋다 이러고 있고
    이러다 삼국지 x 야망 크로스오버도 나올거 같은데....왠지 나오면 정말 재밌을듯(...)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22 1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재미는 있을 듯 한데, 삼국지 X 야망 크로스오버가 나오면, 중간에 낀 한반도는 주전장이 되어 난리가 나겠군요.)

    •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11.05.22 20: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지금 지도상으로 말고 어차피 판타지라 무쌍처럼 중국 일본 맵을 섞어 놓는다는 의미로요~ 무쌍에선 땅이랑 성이 딴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설정이라^^:;

      적당히 쓰니 글이 모호해졌네요. 죄송합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24 0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아닙니다.
      제가 요즘 게임을 전혀 하지 않다 보니 잘못 이해했습니다. 오히려 잘못 이해한 제가 사과를 드려야 할 듯.
      (...그리고 은근 이순신 장군님이나 유성룡, 권율 등 조선측 인물들이 나오길 하는 바램도 있었고요 ^^; )

출처: http://careerzine.jp/article/detail/1789 

일본 IT 업계 전직 사이트 CAREERzine에 올라온 글입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 회사 트렌더스가 20~59세 사이의 일본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 관심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60%가 ‘있다’고 대답.

 ‘있다’고 대답한 사람에게 ‘센고쿠 시대의 어떤 부분에 흥미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1위는 ‘센고쿠 무장의 캐릭터, 인물상’         77%
2위는 ‘센고쿠 무장이 보낸 격동의 인생’      59%
3위는 ‘혼돈스런 하극상 사회’                    38%
4위는 ‘전투의 전법, 전술’                         36%

 센고쿠 무장 중에서 가장 빨리 출세할 듯한 인물은?

1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秀吉]          41%
2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21%
3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17%
4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15%
5위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2%

‘기업가로 성공할 듯한 인물’은?

1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                        38%
2위 토쿠가와 이에야스                           35%
3위 오다 노부나가                                 32%
4위
타케다 신겐                                    16% 

히데요시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눈치가 빨라 임기응변에 능하고, 일을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잘 만든다’ (23세 여성), ‘하극상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성품’(27세 남성), ‘백성에서 천하를 손에 넣은 현명한 노력가에 오기가 센 무장이라 생각’(25세 여성)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저 질문에 가장 출세할 듯한 인물은 이건 뭐 두말할 필요도 없이 히데요시일 듯. 하지만 기업가로는 노부나가,

기업가 히데요시의 단점을 보자면,
무엇보다 주제도 모른 해외침략.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자신의 규모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덩치만 불리려 한 인수합병 혹은 주력 업종 외에 제대로 된 인식도 없으면서 문어발 확장이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전 히데요시건 이에야스건 노부나가가 없었음 저렇게 컸을지도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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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04.27 07: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셨을런지 모르지만 드라마 '욕망의 불꽃'에서는 이와 비슷한 감상이 느껴졌는데, 극중에서 이순재옹은 이러한 대사를 남기셨죠. 기억에 의존한 것이라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나는 회사를 세우고 영민(순재옹의 아들)이는 회사를 정리하고, 민재(손자 즉 3세) 대에 들어서 회사가 크게 번창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저 대사를 들으면서 오다 - 도요토미 - 도쿠가와 3대가 생각이 났습니다. 앞의 두 명이 그러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이 자의는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2. 178 2011.04.28 14: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출세는 완전 히데요시 이미지인듯...
    기업가는 호죠 우지야스 생각나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28 17: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가 시스템 운영은 최고였던 듯 합니다.

      호우죠우 가문은 기록을 많이 남겨놓았기에 지금도 당시를 연구하려는 사람들 대부분이 호우죠우 가문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더군요. 거기에 선정을 베풀었는지 이에야스가 들어간 다음에도 옛 호우죠우의 시대를 잇지 않았다고 할 정도니까요.

      여담으로 호우죠우 가문도 노부나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인해 멸망으로 이어집죠..어디까지나 결과론입니다만...^^
      5대 당주 우지나오[北条氏直]의 정실로 노부나가의 딸을 맞이하여 가문과 영지를 보존하고 싶었는데, 혼노우 사의 변 크리.

  3. 나그네 2011.05.05 0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눈팅만 하다가 첨으로 글 남겨 봅니다. 전국무장에 관한 글들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
    개인적으로 전국무장 중에서 히데요시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히데요시는 오다와라정벌 이전과 이후가 좀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아서...(마치 삼국지에서 적벽대전 이후의 관우 같다능....)
    이시다 미츠나리가 좀 의외네요. 적을 굉장히 많이 만드는 스타일일 듯 한데 출세를 빨리 할 무장으로 꼽히다니...
    암튼 저 개인적으로는 아무래도 '기업가'적 인물은 이에야스가 아닐까 하는....기업가는 일시적 성공도 중요하지만 그 성공을 영속화시키는 능력을 봐야하지 않을까요? 그런면에서 250년 막부의 초석을 놓은 이에야스에 한표....그런 의미에서 호죠가의 소운도 평가대상이지 싶은...^^;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05 23: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방문 감사드립니다. ^^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인식입니다만,

      히데요시는 원래 잔인하고 포악하며 욕심이 많았던 인물인 듯 하더군요. 나중에 여러 문학작품이 나오면서 조금씩 좋아지지 않았나? 하고 생각합니다.

      미츠나리는 오히려 시대가 내려오면서 안 좋은 쪽으로 변한 듯 합니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발도 넓었기에 상당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지만 아무래도 반역군의 수장이다 보니, 살아 남은 사람들이 안 좋은 것들을 전부 미츠나리에 밀어 넣은 것 같더군요.

      특히나 그 일하는 방식만 본다면야, 현대 일본에서도, 일본식 관리 프로젝트의 선구자 운운할 정도니까요. 거기에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것에도서 많은 돈을 뽑아내는 듯한 에피소드에, 부하에게 아낌없이 주는 모습을 보면 관리자로서는 최상급이었던 듯 합니다.

      이에야스도 센고쿠 3영걸 중 하나로 꼽히니 당연 인물이겠지만, 250년 이어진 에도 막부 전체로 본다면은 흔히 토쿠가와 3대로 지칭하 듯 - 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츠 이 세명이 다 공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야스가 남겨놓은 유산만 보면 분쟁의 씨앗은 남아 있는 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 히데타다가 그 씨앗을 잘 뽑았고, 거기에 이에미츠가 시스템으로 평온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호우죠우 소우운北条早雲은 확실히 창업은 잘 했지만, 그의 인생 후반기에 행한 업적들이 대부분 그의 아들 호우죠우 우지츠나北条氏綱가 한 것들이라고 하더군요.

      편협한 제 주장만 주저리 늘어놓은 것 같은데...
      이 경영자적인 면을 창업에 무게를 두어야 할지 아니면 그 이후 번영으로 이어가는 부분에서 놓아야 할지에 따라서 평가는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ps;제가 노부나가빠..에 가까운지라 노부나가말고 다른 사람 언급하시면 단점 찾아내기 바쁩지요. 이건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

  4. 나그네 2011.05.06 1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해까지야....
    저야 일본사를 그다지 잘알지도 못하고 일본어도 잘 못하고 한국사람이 쓴 교양개론서 하나 읽은게 고작인데요. 발해님 번역하신 글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
    제가 히데요시를 평가한다고 한건 일본사 통틀어서 그렇게 출세한 인간이 없는 걸로 알고 있고 그 출세가 필요불가결한 무력동원만 하고 나머지는 이해조정(말빨?)으로 가능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에야스에게 한방 먹기는 했지만 혼노지변 이후 오다와라 정벌까지의 히데요시의 정략을 보면 실로 깔끔하다고 느껴져서요.(열도 통일을 위한 최단거리를 가로지르는 듯한...)
    뭐 그 이후에는 삽질의 연속이었던 것 같은데 이게 원래의 본 모습인지 아니면 자만심이나 노망(?)에서 나온 결과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걸 본 모습으로 본다면 발해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p.s 저는 이에야스빠가 아닐뿐더러 절대 히데요시빠는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이에야스케릭터(능구렁이 너구리)는 밥맛이고 한국인으로서 히데요시를 좋아하기는 참 어렵지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06 21: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 일본 전쟁의 흐름은 반드시 투항교섭 -> 결렬시 무력...으로 이어졌습지요. 히데요시만이 그렇게 이해조정을 한 것만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죠.

      오히려 히데요시의 경우(그리고 타케다 신겐 등 몇몇도 그러했지만) 나중에 알아서들 기라며 츄우고쿠中国에 첫번째로 공략하는 곳은 싸그리 죽이고 시체들을 창에 꿰어 진군하는 식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습죠.

  5. 나그네 2011.05.06 1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쩌면 말년의 히데요시의 삽질이 너무 빠른 성공에서 기인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네요. 경쟁상대(대표적으로 이에야스)를 박살내 놓은 것이 아니라 적절히 타협을 통해 무마해 놓은 거였고 빠르게 형성된 세력이었기에 내부결속도 공고하지 못했던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 오버하게 된 건 아닌지...결국 그 오버스러운 행태에 의해 단점이 덧난 꼴이 되었겠지만 말이죠.(어디까지나 갠적인 망상)
    다시한번 강조하는데 저는 절~~때(x100) 수길이빠는 아니지만요 센코쿠 무장중에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 하나인 것은 사실입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06 22: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에야스를 상대로 교섭에 나선 것은 저도 나그네 님과 비슷합니다. 당시 히데요시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킨키近畿라는 발판이 확고히 다듬어진 편이 아니었기에, 이에야스와는 어떻게든 빨리 끝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즉 나그네님 말씀대로 너무 빠른 성공에 발판을 다질 틈이 없었다고)

      ps; 개인적으론 히데요시에게 흥미는 많이 있습죠. 다만 그 젊은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잘 알 수가 없다는 점이 좀 아쉽더군요.

  6. 하시바 2011.07.29 0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제도 모른 해외침략"이라고 하셨지만, 애초부터 히데요시는 매우 낮은 신분의 남자였습니다. 일개 다이묘의 가신으로도 설 수 없을 천한 신분의 남자가 오직 능력만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며 그것들을 모두 현실로 이뤄낸 인간입니다. 그런 히데요시기에, 역시 '가질 수 없는' 혹은 '누구도 가져본 적이 없는' 조선과 대륙을 가지려고 한 것은, 어쩌면 그의 속성으로는 당연한 행동이 아니었을까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7.29 17: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보통 그런 것을 '주제(혹은 분수)도 모른다'라고 합지요. 아니면 '허황된 망상'이라고도 하고요.

    • ken 2011.08.25 08:43  댓글주소  수정/삭제

      꿈을 추구한다..라고 말하고 싶군요
      가정에 불과하지만 연개소문이 정말 중원도모를 시도했더라도 "주제도 모르는 망상"이라고 폄하할 수 있는 건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7 12: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꿈이라...
      전쟁은 거는 쪽의 백성들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을 미사여구로 표현하시다니... 참 안타깝군요.

      "가정에 불과하지만 연개소문이 정말 중원도모를 시도했더라도 "주제도 모르는 망상"이라고 폄하할 수 있는 건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라고 말씀하셨는데...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연개소문이 우리 역사에 속한 인물이기 때문인가요? 제 블로그 우상단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 그런 식의 인식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잣대는 항상 일정하기에 잣대인 것입니다. 기분에 따라 줄거나 는다면 그것은 잣대가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