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각주:1]말기 나는 에타지마[江田島]에 있는 해군병학교에 있었다.
 내가 재학하고 있을 때, 카야노미야[賀陽宮]와 쿠니노미야[久邇宮]라는 두 분의 왕가[宮家] 사람이 계셨다. 아무래도 그분들은 특별 취급을 받아, 일요일에는 그분들이 휴식할 수 있는 한 채의 건물이 따로 있었으며 시종무관도 있었다.
 일요일에는 나도 대개 거기로 호출되어 왕가분들을 상대하거나 하였다. 상대라고 하여도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잡담이나 식사를 하는 것이었고 때로는 과자를 받는 정도였다.
 다른 생도들은 보통 일요일에 외출하거나 교관의 집에 놀러 갔다. 나도 때때로 외출하였지만 다른 생도들이 보기에 왕가의 상대를 하는 것 자체가 특별취급이었기에 생도들에게는 나라는 인물 역시 거리감이 있는 생도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탈도 많았다.
 상급생에게 호출되어,
 “이름을 말하라”
 고 하여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목소리가 작다며 따귀를 맞은 적도 있었다.

- 타야스 토쿠가와 가문[田安徳川家][각주:2] 11대 당주 토쿠가와 무네후사[徳川宗英]

출처: 토쿠가와 무네후사, “토쿠가와 400년의 비밀이야기”(文春文庫, 2004), 280-281쪽

  1. 2차대전 [본문으로]
  2. 8대 쇼우군 토쿠가와 요시무네[徳川 吉宗]의 둘째 아들 무네타케[徳川 宗武]를 시조로 하는 가문. 요시무네 때는 쇼우군 가문[将軍家]에 후사가 없을 시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다는 어삼가[御三家]와 이러저러한 문제로 거리가 멀어진지라 요시무네는 자신의 핏줄로 새로이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어삼경[御三卿]를 만들었다. 타야스 가문은 그 어삼경 중의 필두. 가문 명칭의 유래는 에도 성[江戸城] 북측에 타야스 문[田安門] 근처에 저택이 있었기에 이리 불렀다고 한다. 10만석의 영지가 있었지만 다스리지는 않고 막부에게 위임하는 형식으로 봉록만을 받았다. [본문으로]
일본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던 불교의 중이 쿄우토[京都]를 방문했다. 그는 굉장한 사기꾼에 변설이 뛰어났지만 위대한 설교자로 유명하며, 더할 나위 없이 거만한 자세에 모든 불승(佛僧)의 통념을 파괴하는 극도로 특이한 중으로, 이름을 무헨[無辺]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무한(無限) 즉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일본 전국에 그 이름을 떨쳤다.

어떤 사람은 그가 기적을 행한다고 말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무헨이 마음 속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며 마음 속 비밀을 파헤친다고 하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무헨에게 모여들었다. 무헨을 한 번 보고 그의 의상에 입맞춤하고자, 무헨의 숙소에 대군중이 모여들어 입구에서 그를 기다렸다.

원래 노부나가[信長]는 과도하게 기이한 짓을 뽐내는 자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며 또한 노부나가 자신 역시 거만하였기에, 스스로를 높이고 남을 내려다보는 사람이 노부나가의 영내(領內)에 있는 것을 참지 못하였기에, 예전부터 무헨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는, 무헨과 사자이보우[栄螺坊]라는 – 무헨을 자신의 처소에 숙박시키고 있는 다른 중과 함께 출두하라고 명령하였다.

(출두한 무헨을) 꿰뚫어지도록 쳐다본 뒤,
(너는) 어느 나라의 사람인가?하고 물었다.
무헨은 단지 “무한[각주:1]“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노부나가는 “중국, 시암 어느 쪽 사람인가? 하고 신문했다.
무헨은 자신이 순례하고 있다고 하였다.
노부나가는 “모든 인간은 일본, 중국, 인도가 아니면 안 된다. 너가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라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너의 신분을 알려고만 하면 곧바로 알 수 있으니 어서 말하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무헨은 “반도우 지방[坂東地方]인 데와[出羽]의 하구로[羽黒] 출신입니다”라고 말하였다.(확실히 이곳은 악마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모인 장소[각주:2]이다).
노부나가는 이에 답하여 말했다. “나는 이 자가 사기 치는 것을 좋아하는 요술사라고 예전부터 너희(가신)들에게 말하였다. 이 놈은 방금 전까지 자신의 출생지도 거주지도 갖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을 (일본의 옛 중인) 코보 대[弘法大師]라고 선전하며, 남들이 준 그 어떤 것도 받지 않고 자신에게 욕심이 없다며 받은 것들을 숙박했던 집에 놓고 간다 – 고 사람들은 말한다. 정말 그렇다면 어째서 이 놈은 항상 같은 집에서만 머무는가? 나는 그것을 물욕이 없기에 하는 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것은 받은 물건들을 자기 것을 만들기 위한 잔꾀이다. 무헨 너는 기적을 행한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내 앞에서 행해보거라”
고 하였지만 무헨은 기적의 ‘기’자도 보이질 못했기에,
노부나가는 “기적을 행하는 인간은 본성, 마음가짐, 눈의 움직임, 표정에서 그가 가진 덕을 나타낸다. 그러나 너는 흔히 볼 수 있는 나무꾼보다도 천하며 야비하다. 너는 무지한 부녀자들을 속여 너가 통과하는 지역이나 마을에서 돈을 쓰게 만들고, 불쌍한 사람들을 학대하고 있다. 그건 정말 악한 일이다”고 말하고선 가신들에게 “너희들 어서 이 놈을 혼내주거라”고 말했다.

무헨은 곧바로 그 자리에서 조금 구타 당하고, 길고 아무렇게나 길렀던 머리를 빡빡 깎인 뒤 목줄에 매여 거리를 돌게 하는 불명예를 안겨준 뒤 도시에서 쫓아냈다.

나중에 노부나가는 또다시 무헨이 여전히 사기를 치며, 밤중에 남녀가 무헨을 방문하고, 무헨이 병든 여성들을 낫게 한다며 주술을 부린다는 것을 듣고, 자신의 명령이 엄격히 지켜지길 바라는 노부나가는 모든 길에 보초를 배치하여 무헨을 잡도록 명령하여 무헨이 잡히자 곧바로 참수시켰다. 이교도들은 노부나가가 무헨을 죽이는 것에 약간의 공포를 느꼈지만, 무헨이 죽고 난 뒤 그가 행했던 위선과 사기를 알려짐에 따라, 노부나가의 굉장히 사려 깊은 행위라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각주:3] 제2부 29장


무헨에 대해서[無邊の事]

3월 20일. 무헨이라는 행각승이 이시바 사[石馬寺]의 사자에보우[栄螺坊]의 처소에 잠시 거주하고 있었다. 자주 기이하고 특이한 술법을 부린다고 한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이 바칠 수 있는 만큼의 돈이나 물건을 가지고 ‘술시의 비법[丑の時大事の秘法][각주:4]’을 전수받고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절의 문 앞에 모여있다고 한다.

노부나가 공[信長公]은 무헨에 대한 소문을 평소 자주 들으셨는 바, 무헨을 만나보고 싶다 말씀하셨기에, 사자에보우는 무헨과 함께 아즈치로 왔다. 곧바로 마구간으로 행차하셔 이곳에서 무헨을 천천히 살펴보시더니 평소 생각하던 모습과 같더라.

(노부나가가) 행각승의 태어난 곳은 어딘가? 하고 물으시자

(무헨은) 무변(無邊)이라고 답했다.

(노부나가가) 다시 묻네만 중국인인가? 천축인인가? 하고 거듭 물으시자

(무헨은) 단지 수행자일 뿐, 이라고 답했다.

(노부나가는) 인간이 태어나는 곳은 중국, 천축, 일본 밖에 없는데도 그 외라고 하니 참으로 수상하구나. 그렇다면 네 놈은 틀림없이 괴물이겠구나. 그렇다면 불로 지져버리겠다. 여봐라 불을 이리 가지고 오너라. – 라고 명령하시자,

그 말에 겁이 난 무헨은, 데와[出羽]의 하구로[羽黒]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노부나가는,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더냐? 여태까지 태어난 곳도 없고, 사는 곳도 없다면서 속였다. 또한 불법을 널리 퍼트린다(弘法)고 떠들고 다니며, 욕심이 없다면서 사람들이 물품을 주면 받아서 자신이 머무는 곳에 두면서 계속 그곳만 이용하는 것은 일견 욕심 없이 보이겠지만, 반대로 이는 무욕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이한 술책을 행할 수 있다고 하니 그 기이한 짓을 보여 보거라 – 고 명령하셨지만 무헨은 전혀 하지 못했다.

(노부나가가 말하길) 대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은 용모에서 안색까지 남보다 뛰어난 것이 있다. 네놈은 산적만도 못하다. 여자나 아이들을 속이고 내 영지에서 그들의 돈을 갈취하다니 참으로 괘씸하도다. 이놈에게 창피를 주어라 – 고 명령하셔서, 긴 머리를 가위로 군데군데 자르고 나체로 만들어서는 끈으로 묶어 조리돌림을 한 뒤 아즈치에서 추방하였다.

또한 나중에 노부나가는 무헨이 어찌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물으셨는데, 여전히 술시의 비법을 전수한다거나 혹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 또는 병에 걸린 여성 등에게 ‘배꼽비교’라는 것을 행한다고 하였다. “미래를 위해서다.”라고 말씀하시고는 노부나가 님 직할지와 휘하 다이묘우[大名]들에게 명령을 내려 잡아들이도록 하여 잡히자 심문 후 처형하였다.

(노부나가는 무헨을 머물게 했던) 사자에보우에게 “어째서 아즈치 근방에 저런 종자를 머물게 하였는가?”하고 물으시자,

“이시바 사의 본당에 비가 새, 그것을 수리하고자 권선(勸善)을 위해서 잠시 머물게 하였습니다”고 말하자,

노부나가는 이 돈으로 절을 수리하라며 은자 30매를 하사하셨다.

-오오타 규우이치[太田牛一] 신장공기(信長公記)[각주:5] 권13[각주:6]


개인적으로 기독교 프로이스의 이교도를 바라보면서 쓴 서술과 일본인 오오타 규우이치의 서술의 차이가 재미있었습니다.
거기에 배꼽비교...라는 은근 성적인 표현을 프로이스가 알면서도 안 썼는지 혹은 몰랐는지, 그리고 당시 일본의 세계사상인 중국, 천축, 일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천축(인도)를 시암(태국)이라 한 것도 흥미롭습니다.
또한 무헨이 칭했다는 것이 정말 프로이스의 기술대로 일본의 옛 승인 '코우보우 대사[弘法大師]'인지, 아니면 일본의 연구자들이 말하는대로 '불법을 넓힌다(弘法)'으로 쓰인 것인지도 궁금.
또한 그 후의 처방에서 프로이스는 기술 안 했지만, 오오타 규우이치의 기술에는 나오는 절의 수리비를 주는 노부나가의 모습은 나름 츤데레?

ps:...노파심 삼아 추가합니다만, 이 기술만으로 노부나가가 불교를 억압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노부나가가 싫어했던 것은 있지도 않는 것으로 남들을 현혹시키는 사람 혹은 단체를 혐오하고 벌을 주었을 뿐입니다.
  1. 포르투갈어로 infinito라 쓰여 있다 함 [본문으로]
  2. 하구로는 슈겐도우[修験道]의 수행장이다. [본문으로]
  3. 현대어역은 추오우코우론 사[中央公論社], 마츠타 키이치[松田毅一] 선생의 것을 이용. [본문으로]
  4. 술시는 오전 2시 즈음. 그래서 프로이스의 기록에 무헨의 처소로 밤중에 남녀가 찾아간다고 나온다. [본문으로]
  5.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마치다 판[町田版]을 이용 [본문으로]
  6. 신장공기 권13은 1580년의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히데이에[秀家]는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제일의 악모가(惡謀家)로 악명 높았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581년 나오이에가 죽기직전에 당시 오다 가문[織田家]의 쵸우고쿠[中国] 모우리 공략[毛利攻め]을 담당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 히데이에(당시는 하치로우[八郎])의 후사를 부탁하여, 이에 응한 히데요시는 나중에 히데이에를 유자(猶子)[각주:1]로 삼게 된다.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름글자도 히데요시의 ‘히데[秀]’를 하사 받아 하치로우[八郎]에서 히데이에[秀家]로 바뀌었으며, 히데요시 덕분에 관위도 계속해서 승진하였다. 1594년 조선침략 중 공적을 세워 24살의 젊은 나이로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임명 받아, ’

비젠

츄우나곤[備前中納言]’으로 칭해질 정도였다.
 결혼 또한 히데요시의 애정이 듬뿍 담긴 것이었다. 부인은 히데요시가 친자식처럼 기른 양녀 고우히메[豪姫 –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딸]였다.
 히데요시의 이러한 히데이에에 대한 애정은 친자식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도 변하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양자들 중 관백(関白)

히데츠구

[秀次]는 자살을 언도 받았고, 히데아키[秀秋]는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에 양자로 보내졌지만, 이 히데이에만은 유자의 신분을 계속 보장받았던 것이다. 나중에 히데요시가 병상에 누워서 후사를 부탁한 오대로(五大老)[각주:2]의 면면들에 관해 이야기 할 때도,
 “히데이에는 어렸을 적부터 내 손수 키웠던 사람이기에, 히데요리를 지켜는 것에 있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며 깊은 신뢰를 보냈다.
 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히데이에의 운명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첫 번째 신호는 집안싸움[御家騒動]이었다.
 히데이에는 무장으로서의 자질은 꽤 있었지만, 영지(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빗츄우

[備中] 절반)를 다스리는 정치능력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히데요시의 과보호 상태에서 성인이 되었기에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히데이에의 가신단 중 본거지에 있는 ‘본거지파[国許派]’와 수도권에 올라와 있던 ‘수도권파[上方派]’의 가로(家老)들 사이에 험악한 파벌대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히데이에가 부인인 고우히메 휘하 가신으로

카가

[加賀] 마에다 가문[前田家]에서 파견된 나카무라 지로우베에[中村 治郎兵衛][각주:3]를 중용한 것이 본거지파를 자극했다. 그래도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는 공공연히 다툼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히데요시가 죽자 결국 본거지파 가로들의 분노가 폭발, 나카무라를 주살해야 한다면 공공연히 병사를 일으켜 수도권으로 올라온 것이다. 필두가로 우키타 사쿄우노스케[宇喜多 左京亮 – 후에 사카자키 데와노카미[坂崎 出羽守]][각주:4], 토가와 히고노카미[戸川 肥後守][각주:5], 하나부사 시마노카미[花房 志摩守][각주:6] 등이었다. 하지만 나카무라를 아낀 히데이에가 나카무라를 카가로 도망치게 하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사쿄우노스케 들은 이번엔 주군이 적이라며, 오오사카의 우키타 가문 저택 앞에 바리케이트[逆茂木]를 치고 화톳불을 피워 전투준비를 한 것이다. 금방이라도 시가전으로 발전할 듯 하였으나,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의 중재로 전투는 회피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커 우키타 가문의 본거지파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활약하게 된다.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히데이에는 서군의 부사령관 격으로 1만7천의 대군을 거느리고 출진하였다. 결전의 이틀 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는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군 제장들의 동요하는 모습에 한탄하면서도, ‘그 와중에 우키타 히데이에는 목숨을 던질 각오로 있는 것이 든든하다’고 적었는데, 태합(太閤) 히데요시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히데이에의 성실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초반의 활약은 훌륭했다. 아카시 타케노리[明石 全登][각주:7]가 이끈 우키타 군[宇喜多軍]은 용맹으로 이름을 떨치는 동군(東軍)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대와 치열한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서군은 패했다. 히데이에는 전쟁터에서 후퇴, 해로(海路)를 타고 사츠마[薩摩]까지 잠행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끝까지 숨지 못하고 포로가 되어,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로 유배당한다.
 이후 이 섬에서 살길 50년, 1655년 84세에 죽었다고 한다. 그 사이 토요토미 가문[豊臣家]는 멸망하였고, 토쿠가와 쇼우군[徳川将軍]도 4대 이에츠구[家継]의 시대가 되어 있었다.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1572년생. 히데요시[秀吉] 휘하로 시코쿠 정벌[四国征伐]
[각주:8],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9],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0], 조선의 역[朝鮮の役][각주:11]에 종군하였다. 전성기 때는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빗츄우[備中]의 절반, 하리마[播磨] 일부를 합쳐 총 57만4천석을 영유했다.

 

  1. 양자와 같은 개념이나 양아비의 성(姓)과 재산을 상속받지는 않는다 [본문으로]
  2.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3. 시바 료우타로우[司馬遼太郎] 선생의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豊臣家の人々]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4와 5편에 등장하는 인물. [본문으로]
  4. 우키타 아키이에[宇喜多 詮家]. 히데이에와는 사촌지간(각각 아비가 형제) [본문으로]
  5. 토가와 타츠야스[戸川 達安]. [본문으로]
  6. 하나부사 마사나리[花房 正成] [본문으로]
  7. 시바 료우타로우[司馬遼太郎] 선생의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豊臣家の人々]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5와 6편에 등장하는 아카시 카몬[明石 掃部]을 말함. [본문으로]
  8. 1585년 행해진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羽柴秀長]의 시코쿠[四国] 침공. [본문으로]
  9. 히데요시의 전쟁금지령[惣無事令]을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정벌하려 한 전쟁. 1587년 개전. [본문으로]
  10.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1.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합쳐 일본에선 이렇게도 부른다. [본문으로]


2001년 스마프[SMAP] 특별편 - 키무라 타쿠야[木村 拓哉]가 담당한 에피소드.
개인적으로 기묘한 이야기의 각종 요소를 전부 갖춘 최고의 수작이라고 생각함.

 1578년 3월.
 천하에 용명이 자자했던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켄신은 평생 부인을 맞이하지 않았기에 친자식이 없어 자연스레 후계 다툼은 켄신의 양자 중 둘로 압축되었다.
 한 사람은 동족[각주:1] 나가오 마사카게[長尾 政景]와 켄신의 누나 센토우인[仙桃院]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카게카츠[景勝], 또 한 사람은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의 성주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의 아들 카게토라[景虎]였다.

 카게카츠는 부친 마사카게가 켄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항복한 뒤 우사미 사다미츠[宇佐美 定満]에게 살해[각주:2]당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모친과 함께 켄신 아래서 자랐는데, 켄신과는 친척인 것도 있어 켄신에게 귀여움 받으면서 자랐다. 켄신은 카게카츠를 위해서 손수 습자첩(習字帖)을 만들어 주었으며, 켄신이 에치고를 통일했을 때 받은 ‘단죠우쇼우히츠[弾正少弼][각주:3]’의 관직명을 카게카츠에게 물려주었다. 그런 점 때문에 켄신은 카게카츠를 후계자로 점찍은 것이라 여겨졌다[각주:4].

 하지만 켄신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기에 유언도 남겨지질 않아 카게토라에게도 충분히 후계자의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켄신의 장례식도 치러지지 않은 채 카게카츠와 카케토라 사이에 상속을 둘러싼 싸움이 일어나 에치고를 둘로 나누는 쟁란이 시작되었다. 세상에서는 이를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이라고 한다.
 다음 해인 1578년 3월 카게카츠는 오타테의 난의 승자가 되었다. 이때 카게카츠의 나이 25세였다.

 카게카츠는 과감한 무장이었다.
 오타테의 난으로부터 수년이 지난 1582년 3월.
카이[甲斐] 타케다 가문[武田家]을 멸문시킨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에게 명령하여 우에스기 공략을 시작[각주:5]한 것이다. 카게카츠는 각오를 정했다. 칸토우[関東]의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에게 그런 결의를 담아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카게카츠는 좋은 시대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활과 화살을 들고 에치고 하나만으로 일본 전토 60여주와 싸우려고 합니다. 일전을 치러 멸문한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명예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운 좋게 살아 남는다면 일본에 비할 바 없는 영웅으로 이름을 남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면목을 세우는데 이보다 더한 것은 없사옵니다.[각주:6]

 또한 시대는 나중이지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의 도화선이 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생트집[각주:7][각주:8]이 있었을 때, 카게카츠는 휘하의 장수들을 모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카게카츠는 모반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그러나 그냥 나이후[内府=
이에야스]에게 굴복하는 것도 내 뜻과 다르다. 이제는 결심했다. 싸우게 되면 우리 가문은 멸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떠나고 싶은 자가 있다면 지금 떠나도록”
 카게카츠가 실제로 저렇게 말했는지는 둘째치고 시국에 정면으로 맞서려 한 카게카츠다운 일화이다.

 카게카츠의 직속부하들은 카게카츠를 누구보다도 두려워했다고 한다. 정말 추상같은 위엄이 있었던 것 같다. 우선 카게카츠는 직속부하들에게 단 한번도 따스한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미소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카게카츠는 한 마리의 원숭이를 길렀다. 어느 날 이 원숭이가 카게카츠의 두건을 쓰고 카게카츠의 자리에 앉아 깍지를 끼고서는, 잘 알겠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고, 명령을 내리는 흉내를 내었다. 아마 카게카츠의 흉내를 내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보고 카게카츠는 웃었는데, 이 웃음은 카게카츠가 근신들에게 보인 생애 유일한 웃음이었다고 한다.

 또한 어느 때인가 후지가와[富士川] 강을 건널 때, 한 배에 사람이 너무 많이 타서 가라앉으려 하였다. 카게카츠는 노기 서린 얼굴로 일어나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한번 휘둘렀다. 그러자 배에 있던 부하들은 일제히 강으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천하가 되어 카게카츠가 쿄우토[京都]에 갔을 때의 일이다. 카게카츠 이하 수백 명의 행렬은 너무도 조용하여 기침소리 하나도 내지 않았고 오로지 사람과 말의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고 한다.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阪冬の陣] 때의 일이다. 카게카츠는 막부군에 속하여 오오사카 시기노[鴨野]에 포진하였다. 그곳을 니와 나가시게[丹羽 長重][각주:9]가 방문하였는데, 그때 카게카츠는 몸에 갑주도 걸치지 않고 청죽(靑竹)으로 지팡이 삼아 걸상에 앉아서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좌우에는 장병 300여명 모두가 창을 세우고 한쪽 무릎을 꿇고서는 카게카츠와 함께 오오사카 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깃발은 켄신 때부터 이어져오는 감색 바탕에 히노마루[日の丸]의 부대표식[馬標]과 [毘]의 깃발을 치켜세운 진중은 너무나도 숙연하였다.
 나가시게는 군기가 너무도 빠릿빠릿한 그 모습에 뻑이 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말해주었다고 한다.

 어쨌든 시대를 앞으로 되돌려 1582년 4월부터 시작된 오다 군[織田軍]의 우에스기 공략은 6월 3일 엣츄우[越中]에 있는 우에스기의 속성(屬城) 우오즈 성[魚津城]이 함락되어 카게카츠는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지만, 바로 이 전날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는 바람에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건을 알게 된 오다 군은 병사들을 이끌고 본거지로 돌아간 것이다.
 이후 카게카츠는
히데요시[秀吉]를 차세대 패자(覇者)로 보고 접근하여 히데요시의 신뢰를 얻어 오대로(五大老)[각주:10]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고, 아이즈[会津] 120만석[각주:11]으로 당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에 이은 제3위이란 거대한 영지를 하사 받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 카케카츠의 인생은 그야말로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계속 보내주었다고 볼 수 있지만, 1598년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바뀌게 된다.

 천하를 향한 이에야스의 야망이 명확해지자, 카게카츠는 새로운 영지를 다스려야 한다는 명목으로 1599년 고굉지신인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와 함께 아이즈로 귀국하여, 이후 이에야스의 상경명령에도 응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영내(領內)에 있는 성곽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이미 이에야스와의 전쟁을 결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미리 손잡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카게카츠는 이에야스가 물러간 다음에도 병사들을 이에야스의 본거지 에도[江戸]가 있는 남쪽으로 보내지 않고, 배후에 있는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의 영지 야마가타[山形]를 공격하기 위해 나오에 카네츠구를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카네츠구는 야마가타 성[山形城] 근방까지 진격했지만, 그때 이미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서군(西軍)이 패한 뒤였다. 카게카츠는 결국 항복의 길을 택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 景勝]
1555년생. 처음엔 키헤이지[喜平次]. 가독(家督)을 이은 얼마 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 항복하여 이후 충성을 다했다. 1586년 에치고[越後]를 중심으로 55만석을 영유했으며, 후에 토요토미[豊臣]의 성(姓)과 하시바[羽柴]의 씨(氏)를 하사 받았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임진왜란에도 참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의 패전으로 아이즈 [会津]120만석에서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석으로 감봉되어 이봉되었다. 1623년 죽었다. 69세.

  1. 켄신이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의 가독을 물려받기 전의 성이 나가오[長尾] [본문으로]
  2. 보통 둘이 배타고 연못에서 놀았는데 술에 취해 둘이서 수영하다 익사하였다고 하며, 켄신에게 반항적인 마사카게를 여명 얼마 안 남은 사다미츠(76세)가 살해함으로써 주군 켄신을 편하게 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군기물 北越軍談 이야기라고 한다. [본문으로]
  3. 관리를 감찰하는 기관 '단죠우다이[弾正台]'의 차관. 억지로 우리나라의 기관과 비교한다면 감사원 공직감찰본부장 쯤? [본문으로]
  4. 근래에 들어선 에치고의 영주에는 카게카츠,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는 카게토라에게 물려주려 한다는 시각이 대세인 듯. [본문으로]
  5. 엣츄우[越中] 방면에선 시바타 카츠이에, 시나노[信濃] 측에선 모리 나가요시[森 長可], 코우즈케[上野]에선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 一益]가 각각 카게카츠의 에치고[越後]를 노렸다. [본문으로]
  6. 사실 이때는 정세가 이렇게 사면초가가 되고 나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고, 이전까지는 어떻게든 노부나가와 화해하려고 노력했었다. [본문으로]
  7. 一. 영지 경영하지 말고 빨리 상경해라, 一. 어쩌면 조선을 다시 공격할 수도 있으니 그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다. 一. 에치고[越後]의 호리 히데하루[堀 秀治]가 말하길 카게카츠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 一. 어째서 무기 사들이고, 길이나 다리를 고치며, 성을 새로 쌓고 있나? 등 [본문으로]
  8. 그러나 사실 우에스기 가문이 정비한 길이나 새로 만든 성 등은 모가미 영토로 침입하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카게카츠에게는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혼란이 일어났을 때 모가미 가문[最上家]의 영토로 침입하여 탈취하려 했던 것 같다. 또한 성을 새로 짓는 행위는 히데요시가 엄히 금했던 것이었던 만큼, 이에야스가 괜한 생트집을 잡는다고는 할 수 없다. [본문으로]
  9.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의 아들. 이 당시 히타치[常陸] 훗토 번[古渡] 1만석의 번주. [본문으로]
  10.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1. 아이즈[会津] 92만석, 사도[佐渡] 14만석, 쇼우나이[庄内] 14만석.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