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jbpress.ismedia.jp/articles/-/27869
저자 : 후쿠야마 타카시[福山 隆]
 

1.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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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Foreign Policy”지(10월 11일호)에 ‘앞으로 세계 정치는 아시아에서 결정된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가 아니다. 미국은 앞으로도 계속 사태 해결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를 제목으로 하는 장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약간 필자의 사견을 더해서 요약하자면, 논지는 다음과 같다.

(1). 미국은 경제력 쇠퇴로 인하여 계속해서 ‘세계의 경찰관’을 완수하기에 충분한 전력을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앞으로는 중점지역을 정하여 일부에서는 과감히 철퇴하고, 특정지역에 전력을 집중시켜 배치할 필요가 잇다.

(2). 그렇다면 중점적으로 미국을 배치할 곳은 어디가 될까? 그것은 중국이 대두하고 미국의 경제적 이익도 큰 아시아-태평양 외에는 없다.

(3) 냉전 후 아시아에 있어서의 중점배치는 일본과 한국(합계 5만 명 이상의 미군을 배치)이었지만, 이를 재검토한다(일본의 전략적 기대치가 저하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4) 새로운 배치의 방향성은 다음과 같다.

  • 미군배치를 지리적으로 좀 더 널리(distributed), 그리고 항감성(抗堪性[각주:1])이 있으며, 정치적으로도 문제될 것이 적은(sustainable) 곳으로 한다.
  • 특히 남아시아, 인도양에서의 미군의 존재감을 강화한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남아시아, 인도양을 컨트롤하기에 전략적으로 중요국가.
  • 근래에는 태평양과 인도양이 군사적으로도 하나의 연결성을 지니게 되었다. 싱가포르는 두 바다를 잇는 조임목(choke point)이기에 전략적으로 중요. 싱가포르에는 이미 연안방위용 함정을 배치했으며, 앞으로 공동작전도 검토한다.
  • 이와 같은 전략 상의 필요에 미군의 배치, 행동을 어떻게 맞추어 갈 수 있을 것인가? 현재의 배치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미군의 존재감을 더 널리 분포시킬 필요가 있으며, 그를 위해 동맹국, 파트너 국가를 늘려간다.

 

2. 종래 미군 배치의 개요.

냉전 동안 미군은 소련을 봉쇄하기 위한 체제 – 전방전개 전략(前方展開戰略) – 에 기준을 두고 배치되어 왔다. 따라서 1991년 소련 붕괴 후 미국은 세계전략의 재검토를 해야만 했다.

미군의 전개상태의 재검토를 의미하는 GPR(Global Posture Review)은 해외주둔 미군의 체제를 근본에서부터 재검토한 것으로, QDR2001(2001년에 공표. 4년마다 국방정책을 재검토)에서 선언된 후 2003년 11월부터 정식으로 개시되었다.

그 기준구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공산권 국가를 봉쇄하기 위해 그 주변에 배치했던 미군병력은 구시대 방식.
(2) 사단(약 2만 명)이 아닌 여단(약 4000명)을 전투단위로 하며 소형경량의 부대를 급속히 전개할 수 있게 한다.
(3)  IT를 전면적으로 활용하여 정보수집과 명중 정밀도를 비약적으로 향상시키고 헤비 웨폰을 줄인다.
(4) 테러 활동과 대량파괴병기의 확산은 미국에 대한 위협이기에, 그에 대한 대응에 역점을 둔다.

이 기본구상은 소련 붕괴 후의 미국이 상대적으로 돌출된 군사력을 보유하여, 세계의 경찰관으로 전세계에 관여한다 – 는 전제가 되었다.

참고로 이 일환으로 일본에서도, (1) 오키나와[沖縄]의 제3해병 원정군사령부, 제3해병사단 등 8000명을 괌으로 이전, (2)주한미군인 제8군사령부를 폐지하는 대신에 소형(약 300명)의 제1군단사령부를 미 워싱턴에서 카나가와 현[神奈川県]의 자마[座間]로 이전 – 이 발표되었다.

3. 미국과 미군에 있어 새로운 정세의 출현

그러나 QDR2001이 책정될 시기에 비하여, 미국과 미군의 전략환경은 다음과 같이 커다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1) 일본의 몰락

일본이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있다. 이번 동일본대지진은 일본의 몰락을 가속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정권이 출현하여, 지금까지의 자민당 만큼 미국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일본을 「태평양의 요석(Key Stone of the Pacific)」이라는 위치에 놓고 중요시해 왔지만, 앞으로 일본을 미국전략에 활용할 계산을 세우기 어려워지고 있다.

(2) 중국의 대두와 군사적 위협의 현저화

당초 미국의 對중국정책은 ‘헷지(hedge)’와 ‘인게이지먼트(engagement)[각주:2]’ 정책에 양다리를 걸친 것이었다.

‘헷지’라는 것은 종래, 중국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때에는 언제라도 중국을 군사력으로 제압 혹은 봉쇄할 수 있는 체제 작성을 지칭한다.

‘인게이지먼트’정책이란 공산당 독재국가인 중국을 미국과 같은 스탠다드로 서서히 바꾸기 위해 중국과 관련성을 갖는 것으로, 경제, 사회, 인권기준 등을 미국 수준으로 맞추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은 중국이 항공모함 건조를 강행하고, 미국 항공모함 투입을 저지하기 위해 대함탄도 미사일 개발을 서두르는 등 현저히 군비확장에 우려를 표하며 ‘헷지’정책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3) 미국의 쇠퇴

원인이 어찌되었건 미국의 경제는 ‘세계의 경찰관’이라는 역할을 맡을 정도의 여력을 잃어가고 있다. 앞으로 10년간 국방예산을 최대 6000억 달러 삭감할 예정으로 육군, 해병대 최대 약 20만 명, 해군함정 최대 60척, 공군 전투기 최대 486대를 없애려 한다는 보도도 있다.

(4)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군

10월 21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 주둔 미군부대를 연말까지 전면철퇴 시킨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6월에는 약 10만 명의 규모인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을 7월부터 부분 철퇴하여 2012년 여름까지 약 3만3000명을 철수시키려는 계획을 발표했다.

아프가니스탄 주둔 비용은 지금까지 4400억 달러에 달하여 미국 재정에 무거운 부담이 되어 있으며, 남은 부대도 조기철퇴를 할 수 밖에 없을 거라 여겨진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 부대의 철퇴는 이어지는 미국의 세계전략책정을 서두르게 만드는 스위치가 될 것이다.
 

4. 새로운 미군전략의 골격과 특징.

(1) 미국의 기본 스탠스 –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미련

미국이 초대국의 지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납득할까? 펜타곤이나 국무성 등의 전략책정 담당자들은 신전략을 검토함에 앞서, 현실적으로 이제 미국이 팍스 아메리카나를 유지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종래의 수법처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 일본의 지원을 받으며 팍스 아메리카나를 유지하는 것에 노력하겠지만, 얼마 안가 단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의 신전략을 책정하기 위해서, 자국의 현재 상황 – 초대국인지, 대국 중 하나의 나라에 지나지 않는지 – 를 객관적으로 평가, 인식하는 것이 ‘앞으로 나가야 할 전략’을 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니까.

말을 바꾸자면, (1) 지금과 같이 세계 패권의 유지를 목표로 한다. (2) 세계 패권의 유지를 단념하고 아시아 패권의 유지만을 최우선적 목표로 삼을 것인지 - 라는 것이다.

2014년에 발표될 예정인 다음 QDR에서 미국이 자국의 입장을 어떻게 인식하여 기술할지 주목된다.

(2) 미국의 이용해야 할 중국의 아킬레스건

중국은 자원을 해외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더구나 히말라야, 신장위구르 자치구나 몽골을 경유하여 내륙정면에서 물자를 반출, 반입하는 양이 한정적이기에, 역시 주요한 무역은 해양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해양 상의 중국 생명선(sea-lane)은 세 곳 있다.

제1의 루트는 믈라카 해협에서 인도양 경유로 중근동-아프리카에 이르는 것.

제2의 루트는 파푸아뉴기니 주변을 통과하여 오스트레일리아나 남미에 이르는 것. 참고로 이 루트는 대동아전쟁 때 일본(제국육해군)이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분단시키기 위해 실시한 ‘SF작전’의 방향과 같다.

‘SF작전’은 피지, 사모아 및 누벨칼레도니를 점령함에 따라, 남방전선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위협을 배제함과 동시에 미국(하와이 제도)과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의 시레인을 분단시킴으로 오스트레일리아를 고립시켜, 오스트레일리아를 영연방에서 탈락시키는 것을 노린 작전이었다.

제3의 루트는 류큐 제도[琉球諸島]에서 북미에 이르는 것.

제1의 루트의 조임목(choke point)은 믈라카 해협. 제2의 루트의 조임목은 파푸아뉴기니-마셜 제도-솔로몬 제도 등의 주변해역. 제3의 루트의 조임목은 오키나와[沖縄]-미야코 섬[宮古島]이 아닐까?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Ryukyu_map.jpg

미국은 중국과의 유사시에 상기의 초크포인트를 점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라 여겨진다.

(3) 새로운 배치를 하기 위한 고려요건

중국은 ‘Anti-Access(접근저지) / Area-Denial(영역거부) :A2AD’라는 해양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이 전략은 멀리에서 오는 적을 방위선 안에 침입시키지 못하게 하고(접급저지), 방위선을 돌파 당하여도 그 안쪽에서 적에게 자유로운 행동을 허용하지 않는(영역거부)라는 콘셉트이다.

추가하자면 중국은 이 방위선내에 존재하는 기존 미군기지에 대해서, 미국의 전투기가 기지에서 이륙하기 전에 탄도 미사일로 적 기지(일본 주둔 미군기지)의 활주로 등을 선제 공격하는 군사독트린을 새로 세웠다고도 보도되었다.(6월20일자 요미우리 신문).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이 각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하의 요소가 중요해 진다.

(i) 중국과의 거리를 종래 이상으로 떨어져 탄도 미사일의 사정 밖(약 1850km라 추정)으로 나오는 것이 바람직하며, 미사일의 기습공격에 대처(미사일 요격 미사일 등)할 수 있도록 한다.

(ii) 광역으로 분산할 것.

(iii) 미사일에서 피해를 국한시키기 위해 항감성(抗堪性) 강화나 활주로의 피해복구 능력을 강화

(4) 중시지역

상기 (2)의 분석과 같이 앞으로 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태평양 제도(파푸아뉴기니, 마셜 제도, 솔로몬 제도 등)을 종래 이상으로 중시하여 군사적 배치를 강화할 것이다.

특히 오스트레일리아는 상기의 3루트를 전부 장악(대처)할 수 있는 위치이며, 앞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전략적 가치는 미국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것이 될 것이다.

(5) 이중포위망의 형성

중국은 태평양 정면으로의 진출목표선으로서, 제1열도선(列島線=큐우슈우[九州]를 기점으로 오키나와, 대만(台湾), 필리핀, 보르네오 섬에 이르는 라인) 및 제2열도선(이즈 제도[伊豆諸島]를 기점으로 오가사와라 제도[小笠原諸島], 괌-사이판, 파푸아뉴기니에 이르는 라인)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미국은 앞으로 이에 대항하여, 종래의 일본-한국-대만-필리핀의 라인에 더해, 괌-마셜제도-솔로몬제도-오스트레일리아를 잇는 또 하나의 방위라인을 만들어, 중국을 이중으로 봉쇄하는 새로운 배치(new transformation)를 구성할 것이라 예상된다.

장래 미국이 전력 삭감을 큰 폭으로 하고, 중국의 상대적 전력이 제1열도선 부근에서 열세가 된 것을 인정할 경우, 제1열도선의 방위를 폐기하고, 괌-마셜제도-솔로몬제도-오스트레일리아를 잇는 또 하나의 방위라인까지 후퇴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이는 일본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버림받는 것을 의미한다.

(6) 군사 인프라 건설을 위한 재정 조치

앞으로는 오키나와의 제3해병 원정군사령부, 제3해병사단 등 8000명을 괌으로 이전할 때처럼 일본이 재정부담을 해주는 듯한 ‘좋은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미군의 새로운 전개기지는 관계국에 있는 기존 군사기지 외에 민간시설(공항, 항구)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침이 될 것이다.
 

5. 결언 – 일본에 미치는 영향

지금까지 일본은 미국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전략기반이었다. 그 이유는 (1) (냉전시대) 소련 극동군을 봉쇄하기 위한 거점. (2) 인도양이나 중동까지도 전개하는 미군에게 기지 기능의 제공. (3)재정적인 지원 등

그러나 근래 경제적으로 피폐해지고 있는 일본은 장래 재정적인 면에서 그다지 큰 공헌을 하기에는 기대할 수 없게 되고 있다. 미국은 일본을 더 이상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중국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일본에 주둔하는 미군기지는 서서히 중국의 탄도미사일 등의 위협에 노출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자민당 정권에 비하여 민주당 정권은 컨트롤하기 어렵다.

가까운 장래 미국은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지금처럼 ‘요석’이라고 여기지 않게 될 것이다. 그 결과로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다.

제1시나리오 : 미국은 미일안보를 유지하기는 하겠지만 그 신뢰성은 속 빈 강정이 될 것이다.
제2시나리오 : 미국은 일방적으로 미일안보를 폐기한다.
제3시나리오 : 미국은 미일안보조약을 쌍무조약으로 개정할 것을 강요할 것이다.

2차대전 이후 60년 이상에 걸쳐 일본의 평화와 번영의 기반이 되어 온 미일안보체제가  현재 중대한 기로의 앞에 놓여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일본은 전후 체제의 코페르니쿠스 적인 전환의 시기를 맞이할 지도 모른다.

또한 일본정부에게 있어 긴요한 과제인 해병대를 후텐마[普天間]에서 괌으로 옮기는 계획에 대해서 미국정부는 상기와 같은 의도에서 백지로 돌려, 새로운 재배치의 전체 계획을 책정한 후에 일본주둔미군의 재배치를 새로이 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10월25일. 노다 요시히코[野田 佳彦] 총리와 회담한 레온. E. 파네타 국방장관은 지금까지 주장해온 것처럼 헤노코[辺野古]로의 이설을 주장했다. 이는 “어차피 이설의 가능성이 낮으니, 일본정부에 은혜를 만들어 둘 심산”이라 보아야 할 지도 모른다.

반세기 이상 이어온 전후체제를 어떻게 바꾸면 좋은 것일까? 일본국민은 안전보장과 번영의 길 – 생존의 길 – 에 대하여 진지한 토론을 나누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1. 군사기지나 레이더 기지에 적의 공격을 받더라도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 [본문으로]
  2. 적과의 대화. NYT선정 2009년도 오바마 정부 올해의 단어...라고 함. [본문으로]

 천하의 분수령이 대전투의 승패를 배반이라는 행위로 결정짓게 한 인물 – 때문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는 ‘사상 최대의 배반자’라는 오명을 역사에 남기고 있다.

 히데아키는 히데요시[秀吉]의 부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오빠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 家定]의 아들[각주:1]로 태어났지만, 히데요시 부부에게 자식이 없었기에 양자가 되어 키타노만도코로의 손에 키워졌다. 이 즈음에는 히데토시[秀俊]라는 이름을 썼다.

 1588년. 히데요시는 쥬라쿠테이[聚楽第]에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 天皇]의 행행(行幸)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는데, 7살의 히데아키도 이 영광스런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 즈음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각주:2] 하지만 다음 해인 1589년에 히데요시의 애첩 요도도노[淀殿]가 남자아이를 낳았다. 이때부터 히데아키의 운명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히데요시는 이 첫 아들에게 츠루마츠[鶴松]라는 이름이 지어주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불과 3년을 살았을 뿐이었다. 히데요시는 츠루마츠 사망이라는 충격을 잊으려는 듯 조선 침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도 또한 히데요시의 총애를 되찾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조선 침략이 한창이던 1593년, 요도도노는 또다시 남자아이(히데요리[秀頼])를 낳았기에 히데요시의 히데요리에 대한 눈먼 사랑이 시작되어, 우선 관백(関白)인 히데츠구[秀次]를 실각시켰다. 히데아키의 신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는 히데요시의 의중을 헤아려, 히데아키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로 들여보내는데 성공하였다.[각주:3]

 정유재란 때 히데아키는 일군의 대장으로 출진하였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의 농성으로 유명한 울산성(蔚山城)에 대규모 구원군을 이끌고 갔을 때의 일이었다. 도망치는 명나라 군사를 쫓아 총대장인 히데아키가 직접 창을 꼬나 쥐고 휘두르며 짐승을 쫓는 사냥꾼처럼 학살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였다.

 다음 해인 1598년. 돌연 히데아키는 귀국 명령을 받았다. 히데아키는 득의만만한 얼굴로 히데요시에게 출두하였다. 필시 조선에서의 활약에 대한 칭찬해 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히데아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은 의외로 조선에서의 경거망동을 질타하는 히데요시의 노호였다. 히데요시는 “네 녀석과 같은 놈을 대장으로 삼다니 내 눈이 삐었구나”라고 까지 말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북부 큐우슈우[九州] 33만 6천 석을 삭감하여, 에치젠[越前] 15만석의 이봉이라는 가혹한 결정까지 내렸다.
 히데아키는 이 사태가 모두 군감(軍監)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참언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골똘히 생각한 끝에 결론 내렸다. 하지만 지금은 뾰족한 수도 없었다.

 이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였다. 온화한 얼굴로 히데아키의 불평을 들어주고서는, 히데요시에게도 가 히데요시의 분노가 풀리도록 노력하였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었다. 이에야스의 조처로 감봉에 따른 이봉을 피한 히데아키의 처우도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흐지부지해졌다. 히데요시 사후 천하를 쥐고자 계획하고 있던 이에야스는 이러한 히데아키에게 은혜를 입힌 형태가 되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히데아키가 배반한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의 결전 당일, 마츠오 산[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히데아키는 시간이 흘러도 어느 편인지 확실히 나타내지를 않고 지켜만 보았다. 애간장이 탄 이에야스는 철포대에게 명령하여 히데아키의 배반을 재촉하는 철포를 쏘게 하였다. 이때서야 비로서 히데아키는 병사들을 움직여 서군의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를 공격한 것이다. 알려진 대로 이것이 세키가하라의 승패를 갈랐다.[각주:4]

세키가하라 포진도. 왼쪽 중간 마츠오 산[松尾山]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부대가 진을 치고 있다.

 싸움이 끝난 후 히데아키는 세키가하라 때 서군을 배반한 공적으로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에 51만석을 하사 받아 오카야마 성[岡山城]의 성주가 되었지만, 2년 뒤인 1602년에 21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계속 배반자라는 비난을 받아 정신이 병들었다던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망령에 괴롭힘을 받아 미쳤다는 등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츠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의 괴제백선상(魁題百撰相)에 나오는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 히데아키[秀秋]에게 원령(怨霊)이 되어 나타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1582년 오우미[近江]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 밑 마을에서 태어났다. 1584년 히데요시[秀吉]의 양자가 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5]에 출진. 이때 미노[美濃] 오오가키 성[大垣城]의 성주로 관직은 쇼우쇼우[少将]였다. 이어서 우코노에츄우죠우[右近衛中将], 산기[参議]
[각주:6] 겸 곤츄우나곤[権中納言]으로 이례적인 스피드로 승직하였다. 1594년에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가 되었다.

  1. 이에사다의 다섯 번째 아들. [본문으로]
  2. 이때 다른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는 텐노우[天皇] 나아가서는 텐노우의 대리인인 히데요시에게 대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였는데, 다이묘우들이 서약한 대상이 히데아키였다. [본문으로]
  3. 히데츠구의 실각이 나중(1595년)이며, 히데아키가 코바야카와 가문에 양자로 간 것은 1594년의 일. [본문으로]
  4. 지금까지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 때 히데아키가 서군이었다는 시각이었으나(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전 히데아키가 동군이 지키고 있던 후시미 성[伏見城] 공격군의 총대장이었던 것도 있어), 근래에 들어서는 동군으로 참전했다는 시각도 있다. 정황증거로 마츠오 산에 진을 치고 있던 서군 이토우 모리마사[伊藤 盛正]를 쫓아내고 차지한 점, 이후 행해진 서군 군의(軍議)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점, 말단인 시마즈의 사츠마 병사들 역시 히데아키를 동군으로 보고 있었다는 점 등이 있다. 그런 동군으로 참가한 히데아키가 참전을 주저했던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내건 당근인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가 성인이 될 때까지 관백(関白)직과 킨키[近畿] 근방에 2개국 가증에 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5.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6. 1590~92년 사이의 관직이라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본문으로]

출처 : http://jbpress.ismedia.jp/articles/-/27679
저자 : 코모리 요시히사[古森 義久]

미국의 오바마 정권이 안전보장적인 면에서 ‘아시아를 가장 중요시’한다는 것을 명확히 말하기 시작했다. 아시아-태평양을 다시 중요시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 중점을 두었던 미군의 전력을 동아시아로 돌릴 방침이라고 한다.

중국군의 확장을 주시하며 억지력을 증강시키는 전략이 최대의 주안점이라 여겨진다. 이 변화자체는 일본에게 있어서 환영할만한 움직임이지만, 현실적으로 미군 전력의 아시아 시프트가 발표한대로 실제적인 효과를 수반하며 진행될지의 여부에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점이 여전히 남아있다.


미군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아시아, 태평양으로 시프트.

미군의 아시아 시프트는 오바마 정권의 중추에 있는 두 명에 의해 거의 동시에 밝혀졌다. 레온 파네타(Leon Panetta) 국방장관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다.

힐러리 클린턴

레온 파네타

아시아를 순방중인 파네타 장관은 10월 24일 일본 체재 중에도,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에서 군사 존재감을 강화할 것이다”고 천명하였다. 미군의 이라크 주둔은 올해가 마지막이며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미군 규모가 착실히 축소됨에 따라, 미군의 세계적 전략이 ‘전환점’을 맞이하였고, 그 전환의 중점은 아시아로의 전환이라고 한다.

클린턴 장관도 최근 발표한 유력 외교잡지에 송고한 정책논문 “미국의 태평양 시대”에서, “지금까지 미국이 10년 동안 해 온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사노력은 그 중점을 옮겨, 앞으로 적어도 10년간은 아시아-태평양으로 시프트해야 한다”고 명언했다.

아시아 시프트를 하는 최대의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중국 때문이다. 

클린턴장관은 시프트해야 하는 원인에 대해 논문에서는 외교나 경제 그리고 전략적인 면에서 아시아-태평양으로의 포괄적인 관여가 필요해졌다고 주장하면서도 특히 중국에 관해 가장 많이 언급하였다. 더구나 ‘중국 군사력의 근대화와 확대’나 ‘중국의 군사적 의도의 불투명성’이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고 對중국 관여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도, ‘공해에서 항행의 자유’를 재삼 강조하여, 중국의 남지나해 등에서의 방약무인한 행동에 경고를 보냈다.

파네타 장관도 미국이 앞으로 아시아-태평양 전략을 중요시하는 배경으로, “중국은 군사력의 근대화를 급속히 추진하고 있으며 더구나 투명성이 결여되어 있다. 거기에 동지나해나 남지나해에서 위협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다”며 구체적으로 말하였다.


일본에 있어서는 환영할만한 ‘아시아로 돌아오는 미국’

그렇다면 미군은 새로운 아시아 시프트 전략으로 어떠한 조치를 구체적으로 취할까? 파네타, 클린턴 양 장관의 발표나 발언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것을 추측할 수 있다.

  • 미국은 일본과 한국이라는 오랜 동맹과의 유대를 강화한다.
  • 미군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주둔규모를 확대하고 합동연습을 늘린다.
  • 미군은 싱가포르에 연안경비함대를 배치하고, 태평양에서 인도양에 걸쳐 경비활동을 강화한다.
  • 미군은 필리핀에 함정의 기항을 늘리고, 해당지역 테러대책부대의 훈련에 임한다.
  • 미군은 중단되어있던 인도네시아 군의 훈련을 재개한다.
  • 미국은 인도나 베트남과의 방위교류를 진행시킨다.
클린턴 국무장관은 미국의 이러한 움직임을 ‘세계의 새로운 현실에 대한 대응’이라고 표현했다. 일본 등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 있어서는 ‘아시아로 돌아오는 미국’은 환영할만하다. 중국이 군사확장을 거듭하며 국제합의를 무시하는 행동이 현저해진 지금, 초강대국 미국의 군사강화는 아시아에서의 억제력이 되어 안정을 증가시킬 움직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 안심하고만 있을 수 없다. 미국의 아시아 복귀가 정말로 중국의 확장에 대해 억지력이나 안정에 실제적인 효과를 볼 수 있을까?

우선 상기의 ‘강화책’을 보아도, 구체적인 개개의 조치는 어느 것이건 규모가 작고 사소한 방위책이다. 일본이나 한국과의 동맹 강화나 심화라고 하여도 구체적인 조치가 없다.

무엇보다 미국의 아시아에서의 방위전략 자체가 현재 몇 가지 장해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그런 종류의 장해는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중시전략’ 전체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그림자는 아시아 측에 있어서는 심각한 걱정거리이다.
 

미국의 재정위기가 국방비에 직격

그렇다면 어떤 장해가 있는 것인가?

첫 번째로는 미국의 재정위기이다. 미국정부는 현재 미증유의 재정적자에 신음하고 있어 정부 지출의 대폭삭감을 강요 받기에 이르렀다.

의회의 초당파 특별위원회가 11월 하순까지 지출삭감의 합의를 보지 못했을 경우, 국방비는 자동적으로 ‘앞으로 10년간 최소 5000억 달러’라는 대규모 삭감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 국방부는 자주적으로 현재 연간 6000억 달러 수준의 국방비를 2017년까지 누계로 합계 4500억 달러 분을 줄이기로 하였다.

국방비의 대폭 삭감에서 우선 가장 많이 삭감되는 것은 지상에서 활동하는 육군부대나 해병대의 예산이라고 한다. 아시아에 주둔 중인 미군은 육군이나 해병대의 비중이 크다. 때문에 국방장관이 아무리 아시아 주둔미군의 증강을 원하더라도, 예산조치라는 차원에서의 부대축소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국무, 국방 양 장관이 아무리 ‘아시아-태평양에서의 군사관여 증대’를 외쳐도, 그대로 실현될 수 없는 가능성도 높은 것이다.


중국에 대해서 ‘저자세’인 오바마 정권

두 번째 장해는 오바마 정권 자체의 자세이다.

오바마 정권은 대만이 그리도 바래왔던 전투기 F16 C/D형의 판매를 결국 거부했다. 대만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구식 F16 A/B형을 부품 교환 등으로 업그레이드 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Taiwan F-16 Debate
Taiwan F-16 Debate by Al Jazeera English 저작자 표시변경 금지

대만으로의 무기판매는 미국의 국내법인 ‘대만 관계법’에 근거하여 대만의 방위강화를 위해 실행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오바마 정권은 대만이 원하는 신예전투기를 팔지 않았다. 명백히 중국에 대한 배려이다.

원래 대결을 싫어하고, 군사를 경시하는 경향이 강한 오바마 정권이 이렇게 중국의 기세에 눌려 계속 후퇴를 할 가능성은, 유력 안보연구기관인 ‘신 아메리카 세기 연구소’의 예측에서도 지적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 경제나 정치 그리고 군사에서도 힘을 늘림에 따라 미중관계에 파워 시프트가 일어나며, 오바마 정권의 온건한 ‘관여 정책’이 그 시프트를 가속시킬 지도 모른다 – 는 것이었다.

즉, 오바마 정권은 의회나 공화당에 의해 추진되어 온 아시아에서의 군사태세 강화를 말로야 천명하겠지만, 중국에 대해 단호한 억제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측을 쉽게 할 수 있다.


일본의 협력체제가 불가피하지만…

세 번째는 미일동맹의 약체화이다.

일본의 역대 민주당 정권은 미일동맹의 ‘강화’를 외치면서도 후텐마 기지[普天間基地] 문제의 정체 등, 실제로는 오히려 미일동맹의 후퇴나 약체화를 일으켜왔다. 미국측에서도 주일미군이 맡아야 할 전략적 역할의 중요성은 지금도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현실적인 측면에서 일본에 대한 의존도는 낮은 편이다.

이 경향과 반비례하듯이 미국은 한국과의 동맹을 강화해왔다.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맹방은 이젠 일본이 아닌 한국이다’(헤리티지 재단의 브루스 클링너 연구원)이라는 시각까지 퍼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중국의 미사일이나 대만 공략 능력의 증강 등에 대비하여, 미국이 억지력을 강하하기 위해 우선 아시아에서 협력을 얻어야만 하는 동맹 파트너는 여전히 일본이다.

그 일본이 미군기지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방위비 삭감으로 인해 미국과의 동맹 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분담까지 줄이면, 미군의 아시아 전략 전체가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볼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 일본이 해 온 인도양에서 미군의 대테러 전쟁수행을 위한 연료보급활동을 일본 민주당 정권이 탄생하면서 그만 둔 것에 대한 낙담과 실망은 미국에 여전히 남아있다.

적어도 세 가지 이러한 걱정거리가 미군의 아시아 신전략 행방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 http://jbpress.ismedia.jp/articles/-/27372
저자 : 타마키 타다시[玉置 直司]

 2011년 10월 26일에 치러진 한국 서울 시장보결선거에서 야당계열의 무소속후보 박원순(55세, 당선 다음 날 시장에 취임)가 여당인 한나라당 후보인 나경원(47세)씨에게 압승하였다.

 1년 뒤 대통령선거를 남겨놓은 시점의 ‘수도결전’에서 승부수가 된 것은 ‘경제양극화’에 대한 불만이었다. 대기업이나 재벌을 강하게 비판해 온 시민운동가 출신 박원순씨의 당선에 경제계는 술렁이고 있다.


20~40대의 70%가 여당후보에게 NO!

참패한 여당 한나라당 후보인 나경원씨의 선거공보물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그야말로 야당 단일후보의 압승이었다. 박원순씨의 득표율은 53.4%로 여당인 나경원 후보에 7포인트 이상 크게 앞섰다.

 특히 큰 차이가 났던 것이 젊은층의 득표율이었다. 지상파방송 3사의 공동출구조사에 의하면 20대 69.3%, 30대 75.8%, 40대 66.8%가 박원순씨에게 투표하여 여당의 나경원 후보를 압도하였다.

 20대~40대 젊은 층의 70%가 여당후보에게 NO를 외친 결과이기에 여당에게 있어서는 충격적이다.

 “또다시 하필이면 피곤한 사람이 당선되었군”. 개표 뒤 하루 지난 10월 27일 낮에 만난 한 재벌기업의 임원은 이렇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피곤한 사람’이라는 것은 정말 그럴 것이다. 당선된 박원순 시장은 한국 재벌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박시장은 검사출신이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변호사가 되어 시민운동에 몸을 던졌다.

 2000년 총선거 때 특정 정치인을 저격하며 ‘낙선운동’을 펼친 것은 일본에서도 굉장히 유명한데, 한국 경제계에서는 그 이상으로 유명한 것이 ‘참여연대’라는 시민운동단체이다.


한국경제계가 두려워 한 ‘참여연대’

 박원순씨가 설립 시 주요멤버로 참여한 이 시민단체는, 재벌의 세습인사나 불투명한 기업통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대상기업의 주식을 취득하여 주식총회에 참석해 적극적으로 경영진을 추궁했다. 1998년 삼성전자 주식총회는 이 참여연대의 추궁으로 13시간 반이라는 기록적인 마라톤 총회가 되었다.

 박원순씨는 그 후 ‘아름다운 재단’이라는 사회공헌단체를 설립하였는데, 이 단체에는 삼성,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이나 대기업이 빠짐없이 기부에 응하였다. 이 기부에는 대기업에 ‘박원순씨의 목표가 되었다간 큰일난다’는 생각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박원순씨는 시민운동계에서 유명했지만 일반적인 지명도는 결코 높지 않았다. 박원순씨를 단번에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한국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사회운동가로 서울대 교수이기도 한 안철수(49세)씨였다.

 안철수 교수는 서울대 의학부를 졸업 후 연구직에서 활동하였다. 원래 컴퓨터를 좋아하여 1980년대 말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하였고, 이를 사업화하여 대성공을 거둬 ‘한국의 빌 게이츠’로 불리고 있었다. 그 후 회사 운영에서 손을 떼고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한 편, 전국을 순회하며 학생이나 젊은이들을 격려, 지원하는 강연이나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안철수 열풍’이 커다란 순풍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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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의 승리를 기뻐하는 박원순씨]

 그 인덕과 젊은이들을 자기 돈으로 지원하는 모습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으며, 책을 쓸 때마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지금은 젊은이들의 교주적 존재가 되어 있다. 안철수 교수는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할 의향을 보였지만 ‘예부터 알던 맹우’인 박원순씨도 출마한다는 소식에 단념. 박원순씨 지원이라는 포지션을 취했다.

 둘이 ‘후보단일화’에 합의한 모습은 계속해서 TV의 뉴스에 보도되어 박원순씨도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박원순씨는 야당인 민주당 등의 지지도 얻어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여 압승하였다.

 이에 대해 여당 한나라당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열세인 선거전이었다.

 무엇보다 이번 ‘보궐선거’는 한나라당 소속의 전 시장이 야당 계열의 교육감이 결정한 ‘학교 무상급식’에 반대하여, ‘시장직을 건’ 주민투표를 실시했지만 투표율이 규정에 미치지 못해, 투표자체가 무효로 되어 시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시작된 소동극이 보궐선거의 계기가 되었다.

 혼란을 일으킨 여당의 전 시장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던 중 반한나라당 세력은 눈깜짝할 새에 박원순씨를 내세웠다.

 당황하며 여당이 내세운 후보가, 서울이 지역구로 미모로 인기가 높은 국회의원 나경원 후보였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의 선두주자’인 박근혜(59세) 의원도 4년 만에 선거지원 유세에 나서 필사적으로 나경원 후보를 지원했지만, 그 차이는 마지막까지 좁히지 못했다.


‘선거의 여왕’이라 일컬어지는 차기 대통령후보에게 뼈아픈 상처

 이번 선거결과의 의미는 (1) 수도 서울에서 여당후보가 참패했다. (2) 당선자가 무소속후보였다. (3)젊은이들이 압도적으로 야당측 후보에게 투표하였다 – 일 것이다.

 서울시장에 무소속 후보가 당선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2012년 총선거(봄), 대통령선거(연말)를 앞두고 정치계에 큰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여당 한나라당에 있어서는 수도결전에서 참패한 타격이 크다. 박근혜씨는 지금까지 ‘선거의 여왕’이라 불리며, 그녀는 지원한 후보를 대부분 당선시켜 왔다.

 이번에도 서울시장 선거와 동시에 치러진 부산시 구청장 선거 등에서는 지원 유세한 후보를 격전 속에서 전부 당선시켜 자신이 가진 위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유세한 서울 시장선거에서 여당후보가 참패한 것은 본인에게 있어서도 큰 상처가 될 것이다.

 투표일인 10월 26일은 부친인 박정희 전대통령의 기일이었다. 박근혜씨는 32주년인 이날 부친의 묘 앞에서 무엇을 보고하였을까?

 야당인 민주당은 더 큰일이다. 무엇보다 서울시장 선거에 후보조차 내세우질 못했으니까. 박원순씨에게는 집요하게 민주당 입당을 권했지만 박원순씨는 일축했다. 어쩔 수 없이 박원순 지원에 힘쓰긴 했지만, ‘민주당 해체와 정계재편은 불가피’라는 목소리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결과가 된 것인가? 경제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기존정당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새로운 얼굴의 정치인’을 원하는 커다란 흐름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경제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폭발, ‘새로운 얼굴의 정치인’을 요구하는 목소리

 한국은 1997년에 IMF위기로 일컬어지는 통화위기,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초경쟁사회, 초격차사회로 재탄생 해버렸다. 과감한 합리화와 국제화를 추진한 일부 대기업은 더 강해지고 더 거대해졌다. 그런 한편 경제격차도 훨씬 벌어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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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대통령의 경제정책으로 인해 일부 대기업은 돈을 벌었지만 일반시민의 생활은 어려워지기만 했다.]

 2007년 말의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후보가 압승할 수 있었던 것은 “대기업 CEO출신으로 누구보다 경제에 정통한 내가 경제를 재건하여 누구나 잘 살게 하겠습니다”라는 메시지에 많은 국민들이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기업중시’의 경제정책으로 일부 대기업은 더 거대화했지만 격차는 벌어지기만 했다.

4년 전에 경제를 지지했던 젊은층…’그들만의 경제’에 분노, 反한나라로(링크:조선일보)’. 선거 다음날 ‘조선일보’는  이런 제목으로 시장선거를 총괄했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크게 성장하는 한편 ‘생활은 더 안 좋아지기만 했다’라는 것이 일반시민의 체감경기이다.

 이명박대통령은 파이를 크게 한 뒤 분배한다고 약속했다. 확실히 파이는 커졌지만, 일부 대기업으로의 부의 편중은 더욱더 심화될 뿐이었다.

 이러한 정권에 대한 잠재적 불만에 불을 붙인 뉴스도 선거기간 중 나왔다. 이명박대통령이 퇴임 후에 살 집을 준비하였는데, 토지구입비 등을 위해 43억 원의 국비를 투입한다는 발표로 인해 국민의 반발을 사 허둥지둥 철회를 하게 되었다.

 나경원 후보에 대해서는 연회비가 1억 원이나 하는 ‘초고급 피부관리 클리닉’에 다니고 있다는 뉴스가 선거전 종반에 진보계열의 인터넷 뉴스사이트에 ‘특종’으로 올라와, 눈깜짝할 새에 네티즌에게 퍼졌다. 나경원 후보진영은 ‘연회비가 1억 원이라는 것은 허위보도다’고 반론하였지만, ‘역시 갑부 패거리’라는 네거티브이미지를 붙여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격차확대’에 대한 불만 이상으로 커다란 변화가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어, 이것이 선거전에 영향을 끼쳤다는 흥미 깊은 시각도 나왔다.


한국사회에 커다란 변화? ‘경제논쟁은 아무런 성과도 없다’라는 의식도

 어떤 정치학자는 이렇게 분석하였다.

 “IMF 위기직후부터 한국은 극심한 약육강식의 자본주의국가로 변신하였다. 누구나가 경제를 최우선시하였다. 이명박씨에게 기대한 것도 실리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IMF위기에서 15년 가까이 지나 최근에는 경제적 가치관보다도 도덕적 의식이나 정(情) 등 전통적인 가치관을 중시하는 풍조가 강해졌다.
여당인 한나라당은 꿈과 같은 경제성장을 말하며, 야당인 민주당은 분배중시를 주장한다. 많은 국민, 특히 젊은 층은 이러한 경제논쟁이 성과가 없기만 하다는 것에 자각하여 기존 정당에 속하지 않는 안철수 교수나 박원순씨에게 끌린 것이 아닐까?”

 박원순씨는 시민운동 출신이라고는 해도 지금까지의 많은 시민운동가들과는 굉장히 다른 경력의 소유자이다. 서울의 명문고인 경기고등학교에서 서울대(학생운동으로 중퇴)를 거쳐 검사가 되었다. 그 후 시민운동으로 위치를 바꾸었지만, 이데올로기를 중시하는 과격파가 아닌 보다 실무에 정통한 시민운동을 계속해 왔다.

 안철수 교수도 좀 특이한 경력이다. 둘의 공통점은 프로 정치가가 아니라는 것. 특정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운동가도 아니라는 것이다.

 투표 이틀 전인 24일 오후. 안철수 교수는 박원순씨의 선거사무소를 방문하여 격려했다. 기자 등 보도진의 앞에서 악수하고 대화를 나눈 것은 불과 5분이었지만, ‘안교수가 직접 응원했다’는 모습이 몇 번이나 TV에 나와, 마지막까지 투표할지 정하지 못하고 있던 젊은층에 나름 영향을 끼쳤다 것에는 틀림이 없다.

 이번 선거결과는 앞으로의 한국 정치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정계에서 당면의 최대 초점은 안철수 교수가 내년 대통령선거에 출마를 할지 안 할지이다.

 이번 선거에서 박원순씨를 당선으로 이끈 최대의 공로자는 안철수 교수이다. 8월말에 정계진출의 뜻을 나타낸 이후 그 인기는 상승일로이다. 대통령 선거를 생각한다면 그 전에 있는 총선거에도 준비할 필요가 있다. 안철수 교수가 기존 정당에 입당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에, 그럴 경우 야당의 재편은 불가피하다.

 안철수 교수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지금까지 ‘박근혜 대세론’으로 굳혀져 있던 여당도 커다란 변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예측 불가능한 정치의 계절, 대기업은 전전긍긍

 투표 당일인 10월 26일부터 27일에 걸쳐 한국의 정계, 미디어 관계자는 혼란에 빠졌다. 대부분의 반응은 “충격적인 결과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는 필시 안철수 교수가 출마할 것이다. 이젠 누구도 안교수에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성질 급한 어느 학자는 “여당은 2012년의 대통령선거를 포기하는 편이 좋다. 2017년을 향해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이다.

 물론 대통령선거까지는 1년 이상 남았다. 안철수 교수나 박원순 시장의 인기가 일과성으로 끝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단지 젊은층의 압도적 다수가 ‘기존 정당이 아닌 새로운 선택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 간단히 바뀔 것 같지는 않으며, 정계는 큰 변화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좀 더 눈앞의 일을 생각한다면 대기업이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원순씨가 서울시장에 취임하여 시장이라는 자리에서 대기업을 때리는 사태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세론의 대기업에 대한 시선이 더욱 싸늘해질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세론의 압력으로 이명박정권이 ‘친기업정책’에서 더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을 터이다.

 ‘정치에는 될 수 있는 한 관여하지 않는다’가 한국 대기업의 기본적인 자세이지만, 세계경제가 불경기인 지금 기업성과 악화가 예상되는 시점에서 정부의 협력을 얻지 못하는 것은 기업활동에도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2012년 총선거(봄)과 대통령선거(연말)를 실시한다. 같은 해에 두 대형선거가 실시되는 것은 20년에 1번 있을 수 있는 일로, 앞으로 본격적인 ‘정치의 계절’을 맞이한다. ‘예측 불가능한 정치의 계절’은 대기업에 있어서도 굉장히 불안한 일일 것이다.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가 히데요시의 본진을 방문하는 그림.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 때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에 대한 평판은 굉장히 나빴다. ‘우인(愚人)’[각주:1], ‘영승(佞僧)’[각주:2], ‘요승(妖僧)’[각주:3] 등 최저의 표현으로 기록되어 비난 받았다.
 이는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때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를 서군의 총수로 내세워 쓰라린 패전의 맛보게 만들었고, 그에 따라 120만석이었던 영지를 단번에 37만석으로 떨어뜨린 장본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주로 모우리 가문[毛利家]가 퍼뜨린 악담인 듯 하다.

 우선 그에 대해선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안코쿠지 에케이라고 하면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횡사(橫死)와 히데요시[秀吉]의 천하제패를 예언한 통찰력이나 안목으로 유명하다.
 1573년. 당시 모우리[毛利]의 외교승이었던 에케이는 쇼우군[将軍]
요시아키[義昭]의 처우를 놓고 오다[織田]-모우리[毛利] 의 사이에 긴장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상경해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절충을 거듭하고 있었다.
예언은 이 교섭이 끝난 뒤 돌아오는 길에 오카야마[岡山]에서 모우리 가문의 중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에케이는 다음과 같이 썼다.

노부나가가 3~5년은 버틸 것입니다. 내년 즈음에는 공가(公家)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각주:4] 그러나 그 뒤 높은 곳에서 벌렁 자빠져 떨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토우키치로우[藤吉郎][각주:5]는 만만치 않게 뛰어난 사람입니다.
 에케이의 이 예언은 10년 뒤 현실이 되었다.[각주:6] 

 에케이의 출신성분에 대해서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듯 하지만, 아키[安芸] 카나야마 성[銀山城]의 성주 타케다 노부시게[武田 信重][각주:7]  핏줄이라 전해지며[각주:8] 아키[安芸]의 안코쿠 사[安国寺][각주:9] [각주:10]에 들어가 중이 되었으며, 이 절의 주지가 되었다.[각주:11] 이러는 사이 에케이의 스승인 에신[恵心]이 당시 외교승(外交僧)으로 모우리 가문[毛利家]과도 친했기에, 에케이도 모우리 가문의 외교승이 되었다.

 앞의 예언에서 10년. 에케이는 급격히 바빠졌다.[각주:12] 1582년 5월, 히데요시가 이끄는 대군이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을 포위하여, 당장이라도 오다-모우리 간에 대결전이 일어날지 모르는 정세가 된 것이다. 이때 에케이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를 대리하여 히데요시와 강화교섭에 나섰다. 히데요시는 타카마츠 성의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의 할복을 강화의 조건[각주:13]으로 냈다.[각주:14] 에케이는 독단으로 이것을 받아들여 시미즈 무네하루를 설득하여 배를 가르게 만들었다.[각주:15] 

 얼마 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대승을 거둔 히데요시는, 강화 때의 조건으로 내걸었던 모우리 가문의 영지 할양을 다시 꺼냈다. 그거도 만약 불복한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에케이는 다시 히데요시와 절충을 거듭했지만, 히데요시의 실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우리의 중신들 눈에는 에케이가 하는 일들이 모두 히데요시의 뜻을 대변하는 것으로만 보여, 나중에는 에케이를 “대갈이만 큰 땡중놈”이라고 욕하는 자까지 생겼다.
 이에 대해 에케이는 “지금은 사람의 외모나 모습으로 떠들 때가 아닙니다. 서로가 진심을 나눌 때입니다. 부디 저의 진심을 믿어주길 바랍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또한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은 모우리의 가문을 지키기 위함이며, 이것에 반대함은 천하의 정세에 어둡기 때문이다 – 라는 편지도 보냈다.[각주:16] 

 어쨌든 모우리 가문은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에케이도 이렇게 오랫동안 히데요시와 절충을 하는 동안 히데요시의 신뢰를 받아 승려인 채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각주:17]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의 항에서 언급했듯이,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모우리 가문은 에케이와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각주:18]의 대립[각주:19] [각주:20]으로 인하여 결국 아무 것도 못한 채 패배한 것이었다.[각주:21]

 에케이는 일단 전장에서 벗어났지만 쿄우토[京都]에서 잡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와 함께 참수되었다.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
아키[安芸] 안코쿠 사[安国寺]의 주지가 되어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사승(使僧)으로 활약, 후에 히데요시[秀吉]에게 이요[伊予] 와케 군[和気郡] 2만3천석을 하사 받았고 몇 년 뒤 6만석이 된다. 참수되었을 때는 63~4세라 한다.

  1. 오오타 규우이치[太田 牛一]의 케이쵸우기[慶長記], [본문으로]
  2. 아첨하고 얍삽한 중이란 뜻으로, 이와쿠니 킷카와 가문[岩国吉川家]의 가로(家老)인 카가와 마사노리[香川 正矩]가 저술한 인토쿠기[陰徳記]에 나오는 표현. 이 책은 주군인 킷카와 씨를 정당성을 주기 위해 각색한 티가 많이 난다고 한다. [본문으로]
  3. 1663년 아사노 히로시마 번[浅野広島藩]의 번 의사[藩医]인 쿠로카와 도우유우[黒川道祐]가 만든 지역 역사지인 게이비국군지[芸備国郡志] [본문으로]
  4. 실제로 노부나가는 다음 해인 1574년 종삼위(從三位) 산기[参議]가 되었다. [본문으로]
  5. 히데요시의 통칭 [본문으로]
  6. 저자는 이 예언을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일으킨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을 떠올린 듯 한데, 이는 결과론으로, 아마도 에케이는 노부나가의 부하가 반란을 일으킨다는 의미보다, 이 1573년 당시 노부나가의 권력기반이 강고하지 않다보니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였을 것이다. [본문으로]
  7. 노부시게는 다른 이름으로 ‘토모 노부시게[伴 信重]’라 하며, 아키 타케다[安芸武田家]의 당주인 카나야마 성주인 타케다 노부자네[武田 信実]의 사촌뻘이다. 사촌뻘이라 한 이유는, 노부자네가 와카사 타케다[若狭武田家]에서 아키 타케다 가문에 양자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에케이[恵瓊]가 아키 타케다 가문의 핏줄인 점은 맞는 듯 하다. 에케이의 증조할아버지인 타케다 모토시게[武田元繁]는 아키 타케다 가문의 당주였으며, 모토시게의 아들이자 에케이의 할아버지인 ‘토모 시게키요[伴繁清]’ 부터 토모 씨[伴氏]를 칭했다. [본문으로]
  8. 에케이의 출신을 알려주는 유일한 기록 ‘후도우인 유래기[不動院由来記]’에 따름. [본문으로]
  9. 안코쿠 사[安国寺]는 14세기 초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세운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전란으로 죽은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일본의 각 쿠니[国]에 세운 임제종(臨濟宗) 계열의 절이다. [본문으로]
  10. 아키[安芸]에 있는 안코쿠 사[安国寺]는 아키의 슈고[守護]였던 아키 타케다 가문[安芸武田家]의 위패를 보관하는 보제사(菩提寺)였기에, 아키 타케다의 피가 흐르는 에케이도 이런 연으로 이 절에 들어간 듯 하다. 여담으로 이 절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후에 아키 지역에 들어 온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서군의 수괴가 주지였던 이 절을 임제종에서 진언종(真言宗)으로 바꾸고 절이름도 ‘후도우 원[不動院]’으로 바꾼다. 위의 주석에 에케이의 출신을 알려준다는 기록이 ‘후도우 원 유래기[不動院由来記]’인 이유를 아실 수 있으리라 [본문으로]
  11. 1569년. 쿄우토 오산[京都五山] 중 4위이며 임제종 총 본산인 토우후쿠 사[東福寺]의 도서관장인 장주(藏主) 겸임. [본문으로]
  12. 뭐 사실 이 이전에도 모우리 가문이 오오토모 가문[大友家], 우키타 가문[宇喜多家] 등과의 대결에서 외교절충이나 후방지원 등에 활약했다. 갑자기 바뻐진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13.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쳐했던 모우리가 히데요시에게 화평을 청했고 이에 히데요시가 제시한 것이 ①모우리의 영지 중 5개 쿠니[国] 할양 ②인질제출 ③앞으로 개기지 않겠다는 기청문(起請文) 제출로. 무네하루의 할복을 조건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4. 그러나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일어나,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를 처벌하기 위해 상경하고자 하여 일시정전을 바라며 무네하루의 할복을 요구. 어차피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으로 낙성과 마찬가지였던 타카마츠 성의 성주 무네하루가 성의 병사들 목숨을 구하는 대신 할복하여 죽었다. [본문으로]
  15. …는 모우리 가문[毛利家]이 에케이 악인-무네하루 충신설을 만들기 위해 후세에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무네하루 할복에 에케이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에케이는 이 이후 모우리-히데요시 간의 화평교섭 때 참가하였을 뿐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16. 에케이의 끈질긴 교섭으로 본래 히데요시가 원했던 5개 쿠니[国] – 빗츄우[備中], 빈고[備後], 호우키[伯耆], 이즈모[出雲], 미마사카[美作] - 중 히데요시에게 비젠, 미마사카, 호우키의 세 개군(郡), 빗츄우의 동부를 할양하게 되지만, 대신 빈고[備後], 이즈모[出雲]와 호우키의 일부, 그리고 빗츄우의 서부를 지키게 된다. [본문으로]
  17. 에케이가 다이묘우[大名]였다는 것은 에도 시대의 편찬물에 쓰여졌을 뿐으로, 당시의 사료에는 안코쿠 사[安国寺]의 사령(寺領)으로 서국(西国)의 각 다이묘우 들의 영지에서 500~5000석씩 각출한 총 1만1500석이 주어졌다고 한다. 즉 에케이 개인이 아닌 절의 영지로 주어진 것이다. 거기에 만약 에케이가 다이묘우[大名]였다면, 히데요시 정권이 다른 다이묘우들에게 부과한 군역(軍役)처럼 군역을 부과받았겠지만, 에케이는 그것이 없었으며, 또한 영지 경영에 필수적인 가신단이 있어야 했지만, 역시 에케이에게는 가신단 또한 없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8. 모우리 양천[毛利両川] 중 하나이며, 모우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둘째 아들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의 셋째 아들. [본문으로]
  19. 대립이 있었다는 것은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가 세키가하라 전쟁이 지난 후에 비망록[覚書]으로 적어 놓은 것에 나오는 것으로, 내용은 모우리 가문이 서군에 붙게 된 것은 에케이의 말빨에 이은 독단에 이은 것이며, 나님(히로이에)는 말쌈하면서 까지 말렸지만 에케이가 듣지 않았다. - 는 식으로, 나쁜 것은 모두 에케이때문이라는 것과 그에 따라 모우리 가문과 킷카와 히로이에는 이에야스에게 개긴 적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내용을 날조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0. 후세의 편찬물이 아닌 당시의 서장 들을 살펴보는 한 히로이에와 에케이가 특별히 사이가 나쁘다거나 혹은 싸운 적은 없다. [본문으로]
  21. 사실 이는 서군 총사령관이면서도 양다리를 걸쳐 동군과도 부전조약을 맺은 모우리 테루모토[毛利輝元] 탓이 크다. 테루모토는 은거해 있던 미츠나리[三成]에게 에케이를 파견하여 반 이에야스 공작을 주도하였고, 한편으론 동군의 부사령관격이었던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와 친한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에게 명령하여 동군과도 연락하며, 전투가 일어나기 전날에는 동군-모우리 가문간에 부전조약을 맺는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