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商人)출신으로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까지 승진한 인물. 그리고 기독교도. –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는 센고쿠 무장으로서 이색적인 존재이다.  
 상인으로서의 특질은 언변이 뛰어난 외교관, 경제감각을 갖춘 행정관으로 발현되었다. 거기에 무인으로서도 재능도 상당하여, 히데요시를 섬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582년 히데요시가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에 수공(水攻)을 결행하였을 때, 유키나가는 물 위에 배를 띄어 놓고 타카마츠 성에 포격을 하는 활약을 보였다.[각주:1]
 “힘이 굉장히 셌고, 지모는 남들보다 훨씬 뛰어났으며, 흰 피부에 키가 커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는 소리를 들은 유키나가는 역시 평범한 상인이 아니었다.

 200석으로 히데요시를 섬긴 것이 1579~80년[각주:2] [각주:3], 나이는 21~2세 즈음이라고 하는데, 10년도 지나지 않은[각주:4] 1588년에는 히고[肥後] 절반인 24만석의 다이묘우[大名]로 발탁되었다. 이례적인 스피드 출세로, 유키나가의 능력이 굉장히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유키나가가 확실한 기독교도로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1583~84년 즈음으로 경건한 기독교 무장인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과 친교를 맺으면서 부터이다. 유키나가의 양친은 예전부터 기독교도였기에 유키나가도 어려서부터 세례를 받아 ‘아고스티뉴(Agostinho)’라는 세례명이 있었지만 형식적인 것으로 신앙은 그다지 깊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타카야마 우콘과 친해지면서 유키나가는 그때까지 거만했던 행동이 사라져, 주위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온화하고 겸손한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 신앙도 깊어져 오오사카[大坂]에 한센병 병원을 세우거나, 고아원 사업에 힘썼다.

 하지만 1587년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 중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갑자기 선교사 추방령을 발령한 것이다. 이로 인해 타카야마 우콘도 다이묘우에서 추방의 몸이 되었다.
 유키나가는 이때 선교사나 우콘이 숨을 수 있는 집을 준비해 주었으며, 큐우슈우[九州]의 기독교 다이묘우들에게도 선교사 보호에 힘써줄 것을 요청하였다.
 유키나가는 이미 기독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었다. 만약 이러한 일들이 히데요시에게 알려져 추방당한다면 순교(殉敎)하려고까지 생각하였던 것 같다. 실제로 히데요시가 힐문하자 유키나가는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역설하였다.[각주:5] 그 때문인지 히데요시의 기독교 탄압은 완화되었다. 거기에 다음 해인 1588년 유키나가는 히고 절반 및 예부터 기독교의 아성인 아마쿠사 지방[天草地方]까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히고의 나머지 절반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에게 주어졌다. 창 한 자루로 출세한 전형적인 무공 다이묘우이다. 이러한 인간은 보통 유키나가처럼 머리를 쓰는 능력으로 출세한 자에 대해 세찬 반감을 품고 있다. 한편 유키나가 역시 키요마사와 같은 무장을 ‘머리가 없는 녀석’이라고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다. 더구나 이 둘, 키요마사는 열렬한 법화종(法華宗) 신자였으며 유키나가는 경거한 기독교도였다. 서로 사이가 가까워질래야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양자의 반목은 조선침략에서 함께 선봉을 서게 되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 침략에서 유키나가는 시종 화평교섭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키요마사는 끝까지 주전론자였다. 이 대립은 일본군의 작전에 지장을 끼칠 정도가 되었다. 거기에 더불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유키나가와 친한 감찰[軍監]의 불리한 보고로 인해 키요마사가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귀국하게 되어 질책을 받은 것이다. 키요마사의 유키나가-미츠나리에 대한 증오는 참기 어려운 것이 되어 있었다.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決戦]은 천하제패의 야망에 불타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이러한 키요마사를 대표로 하는 무공파(武功派)와 미츠나리-유키나가 등 봉행파(奉行派)의 대립을 이용해 일으킨 것이다. 패한 유키나가는 이부키야마[伊吹山] 산중으로 도망쳤지만, 몇 일 뒤 근처의 마을 사람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리고 동군(東軍)의 진영으로 데려가게 만들었다. 기독교도인 유키나가는 자신의 신앙상 자살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사카이[堺]의 약종상(藥種商) 코니시 류우사[小西 隆佐]의 아들. 비젠[備前] 오카야마[岡山]에 있는 상인 가문의 양자가 되어 오카야마 성주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히데요시[秀吉]의 츄우고쿠 공략[中国攻略] 때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외교관으로 히데요시에게 접근, 그 재능을 인정받아 히데요시의 요청으로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 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와 함께 로쿠죠우 강변[六条河原]에서 참수되었다.

  1. 히데요시[秀吉]의 일생을 다룬 군기물 태합기(太閤記)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에 따르면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와 함께 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이 당시는 아직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어용상인 아부라야[油屋]의 양자였는데, 유키나가의 뛰어난 능력을 눈여겨 본 우키나 나오이에[宇喜多 直家]가 히데요시로 보내는 사자로 유키나가를 보냄으로 히데요시와 만나게 되었다. 여기에는 당시 히데요시의 참모로 사카이[堺]의 유력자 중 하나였던 유키나가의 애비 코니시 류우사[小西 隆佐]의 존재도 영향을 끼쳤던 듯 하다. [본문으로]
  3. 이전까지 우키타 가문의 가신이었던 유키나가가 히데요시의 직신이 된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1581년 히데요시의 명령을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에게 전하는 역할을 맡았고 이 즈음 무로츠[室津]를 관리한 이 즈음부터가 아닐까 한다. 그후 히데요시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친 야마자키 전투[山崎の合戦] 후인 1582년 히데요시에게 세토 내해[瀬戸内海]의 쇼우도 섬[小豆島]의 관리권과 3000석의 녹봉을 받으며 수군의 장수로 세토 내해[瀬戸内海]를 장악하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루이스 프로이스는 이런 그를 '바다의 사령관'이라 표현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중간인 1585년 히데요시의 키이 정벌[紀伊征伐] 때의 공으로(기록으로는 패했다는 것만 있음 - 프로이스의 일본사) 3000석에서 1만석으로 봉록이 가증됨과 동시에 관리만 하던 쇼우도 섬[小豆島]를 영지로 받게 됨. 일설에는 10만석을 영유했다고도 함. [본문으로]
  5. 사실 처음에는 도움을 청하는 선교사들을 '내 사정도 있잖아~'하는 식으로 쫓아내거나 잠시동안 단교하였지만 오르간티노 신부에게 설득당하여 타카야마 우콘이나 기독교 신부들을 영지인 쇼우도 섬[小豆島]에 숨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10.13 15: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달만의 글이라 매우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이웃국가나 이웃영지에 대한 반감과 증오는 참으로 오래된 역사를 가진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히고를 나눠가진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졌을 증오는 오랜 기간 쌓여서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겠지요. 도도 다카토라나 가토 요시아키라 역시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만 서로를 인정하는 상태는 있었을텐데 과연 기요마사와 유키나가는 그러한 수준까지는 유지했었던걸까요? 흥미롭네요.

    유키나가가 죽은 이후 고니시 가문이 유지는 되었습니까? 하타모토로도 남아있지 못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3 2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자주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아무래도 그렇죠. 지금도 가까운 나라 사람들과는 사이가 안 좋듯이 당시도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나 유키나가는 그래도 많은 외교적 절충(이게 전투에서 활약보다는 훨씬 높게 쳐주는 편입니다)이나 수송 등의 임무를 맡은데 비해, 키요마사는 정말 시즈가타케 칠본창 때의 얻은 영지(이전 1000+시즈가타케 3000) 총 4000석에서 단번에 히고 반국 19만여석 + 히데요시 직할지 3만석 대관으로 총 23만석의 다이묘우로 단번에 출새합지요.

      그래도 노력한 만큼 출세한 유키나가에 비해, 히데요시와 동향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출세한 키요마사는 안 좋을 수 밖에 없었겠지요. 거기에 키요마사는 틈만나면 유키나가가 무가 출신이 아닌 상인 출신이라고 깠다고 하니까요.

      유키나가가 죽은 뒤 코니시 가문은 멸문됩니다.
      장남[코니시 효우고노카미小西 兵庫頭]은 세키가하라 당시 오오사카 성[大阪城]에 (아마도) 인질로 있다가 싸움에서 졌다는 소식에 당시 오오사카 성을 수비하고 있던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가 지레 겁먹고 죽였다고 합니다. 이에야스는 너무한 처사라며 엄청 화냈다고 하던데... 음...

      아들 '아사야마 야사에몬[浅山 弥左衛門]'은 실제로 코니시의 아들인지 불명이나, 쿠로다 가문[黒田家]의 가신들 선조를 기록했다는 '쿠로다 가문 가신 선조 유래기[黒田家御家人先祖由来記]'에 따르면 유키나가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쪽은 야사에몬 손자 이후에는 기록에 없다고 합니다.

      또 하나 측실의 자식이라고 하는 '코니시 히데사다[小西 秀貞]'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인물은 우키나 가문[宇喜多家]에 맡겨졌다가 (역시 인질??) 싸움에 패했다는 소식에 시코쿠[四国]의 사누키[讃岐]로 도망쳐 중이 되어서는 세이렌 사[西蓮寺]를 세워 초대 주지가 되었고, 이후 그 자손들이 사누키에 대대로 살았다고 하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딸이며 대마도주 종의지(소우 요시토시=宗義智)에게 시집간 딸(코니시 마리아[小西マリア])은 세키가하라 후 이혼 당하고 나가사키에서 숨어살다가 죽었습니다.
      종의지와 코니시 마리아 사이에 생긴 아들(그러니까 유키나가의 외손) 만쇼 코니시[マンショ 小西]는 에도 막부의 기독교추방령으로 인해 마카오로 추방당한 뒤 로마에 가서 사제의 직위를 얻고 일본에 돌아와 포교활동을 하나 잡혀서 처형(일본인으로서는 마지막 사제였다고 합니다.)

  2. 본다충승 2011.10.13 18: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쿠사... 아마쿠사 시로? ^^; 세키가하라에서 고군분투 한 보람도 없이 한방에 훅 갔죠. 공명의 갈림길에선 조선에서 막 돌아온 기요마사&마사노리가 미츠나리한테 죽빵 날리려던걸 유키나가가 말리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3 21: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맞습니다. 그 아마쿠사 시로우 토키사다[天草 四郎 時貞]가 나온 땅입지요.
      이곳은 유키나가 영지였던 만큼 기독교도들이 많이 모여 살았고, 그런만큼 막부의 감시와 탄압도 심하여 1613년 추방당한 기독교 선교사 마르코스 페라로는 추방당하면서 "앞으로 25년 뒤 신동이 나타나 하느님의 나라를 세울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였고, 실제로 25년 뒤인 1637년 아마쿠사 시로우를 대장으로 한 잇키[一揆]가 막부의 대관(代官)을 죽이면서 시마바라의 난이 시작됩지요.

    • 본다충승 2011.10.13 23:49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 예언은 마치 영화나 소설에 나올법한 이야기 네요. 하지만 현실은 참으로 처참한...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4 00: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죠. 예언이란게 무책임해서 그럴 듯하게 만들다 보니 거기에 혹한 사람들을 더 많이 모이게 하여 피도 더 많이 흐르게 만들죠.

  3. Gyuphy IV 2011.10.13 22: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아주 좋아하는 엔도 슈사쿠 선생님의 '숙적'에서 아주 인상깊게 그려진 무장이라 기억에 오래 남았다죠. (소설 결말부에서 딸내미와 부인이 '무려' 카토 키요마사를 독살(..;;)하는 듯한 암시를 넣어둬서 어린마음에 아주 흥미깊었습니다만..)

    사실 종교인이 저정도로 살며 저정도로 출세하기도 힘든데 다카야마 우콘처럼 마닐라오쿠리(..)되는것 보다는 나름대로 삶의 한 궤적을 남기고 갔으니 괜찮은 삶이었다 보여집니다. 뭐 국내입장에서는 임진왜란(..) 탓에 좋게 볼래야 좋게 볼수 없다쳐도 천연기념물 잡아간 키요마사보다는 낫다 싶긴 하덥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4 00: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숙적이라는 소설에서 나카우라 쥬리안[中浦ジュリアン]이 죽는 장면이 쓰여있나요? '이 남자가 죽을 때'에 써먹으려고 했는데, 어디선가 엔도 슈우사쿠 선생이 그 '숙적'이라는 곳에 나온다고 하여서요.

      뭐.. 어떤 성격의 기록인지 잘 모르겠지만 豊臣秀吉九州下向記라는 책에는 조선에서 파죽지세로 진격 중인 유키나가를 히데요시가 "문무천하제일이며 충절은 비할데 없다. 조선이라면 1/3, 대명을 손에 넣었을 때는 50개국을 줄테다"고 할정도로 히데요시에게 인정받던 인물이니 기독교도라 하여도 어느 정도는 눈 감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4. Gyuphy IV 2011.10.14 0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게 꽤 오래전에 본 책이라 잘 기억은 안나지만 마지막 장면이 니죠성 회견 마치고 뱃편에서 키요마사가 혀꼬이고 엎어져서 바로 죽는 장면(..-_-...)이었으니 나카우라 쥬리안의 몰년을 생각해보면 아마 안나왔었던듯 싶은데 집에 책을 두고온바람에 확인이 되지 않아 죄송합니다(..)

  5. 정동희 2011.10.18 16: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도라노스케나 이치마스도 히데요시와의 인척 관계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까지 출세하지는
    못했을 텐데요...
    쵸닌의 자식이었던 유키나가쪽이 능력은 더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암튼 이게 다시 히데요시 때문이고... 조일전쟁 때문이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8 22: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키요마사나 마사노리도 나중에 나름 행정력을 갖추었다곤 하지만 말씀대로 그들이 오와리 출신이 아니었다면 그만큼 출세하기도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히데요시의 통일전에 유키나가는 다방면으로 활약하더군요. 주로 수군으로 활동하는 한편 군수물자 수송이나 하카타[博多]의 재건 등 동시기 키요마사가 3~400명 이끈 소부대의 지휘관(뭐 큐우슈우 정벌 시 군량 쪽 회계담당이었다고도 합니다만)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둘 사이에 차이는 꽤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912년 쿄우토[京都]의 다이토쿠 사[大徳寺]에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묘를 이장하게 되었을 때 미츠나리의 유골을 조사하였다.  
 조사에 따르면 미츠나리의 골격은 여성과 착각할 정도로 얇았다고 한다. 마치 히로사키 시[弘前市] 스기야마 가문[杉山家][각주:1]에 전해지는 미츠나리 초상화[각주:2]처럼, 섬세하고 여성적인 풍모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체형의 사람은 고지식하며 비사교적, 유모어가 부족하고, 섬세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보통 자연이나 책 등을 사랑하는 지능형으로, 인간에 대해서는 냉담냉혹 한 편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이시다 미츠나리와 관련된 일화의 대부분에서 그런 특징을 옅볼 수 있다.

 미츠나리는 뛰어난 재치로 인해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미츠나리의 출신지 오우미[近江] 사카타 군[坂田郡] 이시다 촌[石田村] 근처에 있는 절에 심부름하는 아이[寺小姓]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나이는 15~16 즈음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당시 오우미[近江]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주로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매사냥을 하던 도중 목이 말라 이 절에 목을 축이러 온 것이다.
 미츠나리가 접대를 맡았다. 곧바로 차를 끓여 히데요시에게 권했다. 첫 번째로 내온  차는 커다란 찻잔에 미지근한 차를 7~80%를 담아서 내왔다. 히데요시는 맛있게 전부 마시고 난 뒤 한잔 더 바랐다. 미츠나리는 방금 전보다는 조금 뜨거운 차를 찻잔의 반 정도 담아서 내왔다. 히데요시는 이것도 다 마시고 난 뒤 한잔 더 바랐다. 미츠나리는 아주 뜨거운 차를 작은 찻잔에 조금만 담아 내온 것이다.
 히데요시는 미츠나리의 이런 재치가 맘에 들어 절의 주지에게 청하여 미츠나리를 데리고 와 곧바로 시동으로 삼았다. 이렇게 히데요시를 가까이서 모시게 된 미츠나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현명한 재능을 발휘하며 차츰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어갔다.[각주:3] [각주:4]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느 날 히데요시가 미츠나리를 호출하여 지금까지의 공적에 대한 포상으로 500석을 가증(加增)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500석 대신에 우지[宇治], 요도[淀]의 양 천 기슭에 자라는 백성들이 맘대로 베고 있는 갈대의 예초권(刈草權)을 저에게 주신다면, 1만석에 상당하는 군역(軍役)을 부담하겠습니다”
 하고 청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미츠나리의 청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양 천의 천기슭 수십 리 안에 있는 갈대를 베는 것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여 결국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각주:5] 

 미츠나리 의 이러한 이재(理財)의 재능도 히데요시는 맘에 들었다. 더구나 미츠나리의 경우 그런 재능을 사욕이 아닌 히데요시에 대한 멸사봉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언제나 미츠나리는,
 “남을 섬기는 사람은 주인에게서 받은 봉록을 전부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긴다는 것은 주인의 것을 훔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다 써버리고서 남에게 돈을 빌리는 것은 어리석은 자이다”
 고 단언하였다.

 이에 관한 일화로 용장(勇將)으로 이름 높은 시마 사콘[島 左近]을, 미츠나리는 자신의 봉록의 절반 가까이를 들여 가신으로 삼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진다.[각주:6] 
 미츠나리는 뛰어난 무사에게 최고의 대우를 할 수 있도록 힘썼던 듯 하다. 그것도 히데요시에 대한 봉공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츠나리 자신의 주변은 실로 꾸밈이 없고 수수했다. 후에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패하여 거성인 사와야마 성[佐和山城]도 함락되었는데, 공격군의 병사가 성 안을 돌아보자 방은 모두 초벽(初壁)만 한 상태였으며, 바닥은 대부분 판자만 덧댄 채였다. 마당에 정원수(庭園樹)도 없었다고 한다.

 미츠나리의 근무태도도 굉장히 착실하였으며 다방면에 이르렀다. 밤중에 폭풍이 들이쳤을 때에는 다음 날 아침 6시에 이미 성의 파손상태를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즉 미츠나리는 이런 경우 철야를 해가며 성 안을 돌아보았던 것이다. 원래 이런 역할을 해야 할 담당관은 10시 즈음이나 되어서야 보고하러 오는 꼴이었다.

 이상과 같은 미츠나리의 근무태도는 결코 히데요시에게 아첨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주 히데요시에게 격한 말투로 간언(諫言)하였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미츠나리는 1585년 7월 히데요시가 관백(関白)에 임명되어 토요토미[豊臣]라는 성(姓)을 칭하게 되었을 때, 관백의 제대부(諸大夫) 12명[각주:7] 중 한 사람에 선정되어 종오위하(従五位下) 지부노쇼우유우[治部少輔]에 임명되었으며, 나중에는 토요토미 정권의 오봉행(五奉行)[각주:8] 중 한 사람으로 행정의 중책을 짊어지지만, 가지고 있는 재능과 능력으로 순식간에 No.1 실력자가 된다.

 미츠나리의 치적을 간단히 살펴보면, 히데요시가 중요시했던 사카이[堺]의 총독을 1586년부터 1588년까지 맡았으며,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9] 때의 병참, 하카타[博多]의 부흥,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와의 외교절충에 힘 썼으며,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0], 히데요시의 오우슈우 정벌[奥州征伐][각주:11]에 출진, 그리고 두 번에 걸친 조선침략에서는 침략군의 운송과 병참, 무기 보급 등의 지휘를 취하였으며 감찰[軍監]까지 맡았다. 거기에 관백 히데츠구[秀次] 사건[각주:12], 태합검지[太閤検地][각주:13]에도 참여하는 등등 히데요시가 행한 중요정책 전반에 미츠나리는 중요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했기에 히데요시도,
 “나와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자는 미츠나리뿐”
 이라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미츠나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히데요시 정권의 No.1 실력자였다.
 코우야 산[高野山]의 모쿠지키 상인[木食 上人]은,
 “미츠나리는 오봉행 중 제일인자인 듯이 행동하며, 조금이라도 거스른다면 해를 끼치는 사람이다”
 고 말했으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는,
 “태합의 고굉지신으로, 그 위세는 비견할 자가 없다”고 말하였고,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는 가신인 코다마 모토카네[児玉 元兼]가 가지고 있는 명도(名刀)를 미츠나리가 원하였는데, 제출이 늦어져[각주:14] 미츠나리의 기분이 상하면 큰일이라며 빨리 제출해 달라고 코다마 모토카네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그러했기에 미츠나리는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을 대하는 태도가 거만하여 평판이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미츠나리를 극도로 증오하는 무리가 있었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등 창 한 자루로 돌격하며 출세한 히데요시의 아이들, 즉 무공파 무장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미츠나리는 아무런 무공도 없는 주제에 히데요시의 맘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잘난체하며 이런저런 지휘를 하는 건방진 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했기에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오대로(五大老)[각주:15] 필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천하제패의 야망을 들어내기 시작하자, 저 무공파 장수들은 미츠나리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적극적으로 이에야스와 손잡고 미츠나리 등 문치파와 격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다음 해인 1599년 3월, 문치파의 좌장적 존재였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죽자, 무공파 칠장[각주:16]은 미츠나리를 습격하고자 하였다. 미츠나리는 이때 하필이면 이에야스에게로 도망쳐 난을 피할 수 있었는데[각주:17], 이런 모습에서 당시의 정치상화 속에서 고립된 미츠나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각주:18]. 이 사건으로 미츠나리는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으로 은거를 강요당해, 천하는 이에야스의 독무대가 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戦い]은 대단원이었다. 대다수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각주:19]의 다이묘우는 미츠나리가 내건 ‘토요토미 가문을 위해서’라는 대의명분만으로 더 이상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미츠나리의 중대한 오산이었다.

 미츠나리는 세키가하라에서 패하여 도망치다 잡혔다. 그 뒤에 몇 개의 일화가 전해진다.
 의복이 더러워져 있었기에 이에야스가 입던 옷을 주었을 때, 그것을 미츠나리에게로 가지고 온 자가,
 “이것은 우에사마[上様]가 하사하신 것”
 이라고 하자,
 “히데요리[秀頼]님 말고 우에사마는 따로 없을 터”
 라고 말하며 그 옷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잡힌 미츠나리를 내려다 보며 욕을 하였을 때,
 “무운 다하여 네 놈을 이러한 처지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구나”
 고 대답했다고 한다.

 10월 1일. 로구죠우 강변[六条河原]의 처형장에 끌려갈 때, 미츠나리는 너무도 목이  말라 경비하는 자에게 따스한 물을 달라고 하였다. 공교롭게도 당장 따스한 물을 구할 수 없어 경비무사는 대신으로 하라며 곶감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곶감이 가래병에 좋지 않다며 거절하였다. 경비무사는 지금 죽으러 가는 주제에 몸에 좋지 않다니 하면서 비웃었다. 미츠나리는 말했다.
 “큰 뜻을 품은 자는 목이 떨어지는 순간까지 목숨을 아껴 어떻게든 그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고.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1560년 오우미[近江] 사카타 군[坂田郡] 이시다 촌[石田村] 출생.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눈에 띄어 코우가[甲賀] 미나구치[水口] 성주가 되면서부터[각주:20] 출세하여 종오위하(従五位下) 지부노쇼우유우[治部少輔]가 되었고 오봉행(五奉行)의 한 명으로 선정된다. 1595년 오우미 사와야마[佐和山] 19만 4천석에 봉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를 참모로 삼아 서군(西軍) 8만을 이끌고 싸우지만 패하여 사형당했다. 41세.

  1. 미츠나리의 둘째 아들 이시다 시게나리[石田 重成]가 히로사키 번[弘前藩]으로 도망간 뒤 시게나리의 아들 요시나리[吉成] 때부터 스기야마 씨[杉山氏]를 칭함. [본문으로]
  2. 위에 있는 초상화. [본문으로]
  3.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 작자미상의 일화 모음집 무장감장기(武将感状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며, 미츠나리의 첫째 아들 시게이에[重家]가 기록한 것에 따르면 미츠나리는 18살 때 히데요시가 히메지[姫路]에서 츄우고쿠[中国] 방면을 담당했을 때부터 섬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사족으로 후세의 군기물 ‘이시다 군기[石田軍記]에는 히데요시가 미츠나리의 후장을 파려고 시동으로 들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갈대는 지붕을 만드는데 쓰이거나, 물건을 가리는 발(簾)을 만드는데 쓰였기에 거의 필수품으로 여겨지던 것이라 한다. 이어지는 이야기로 미츠나리는 후에 이때 얻은 돈으로 화려한 무구를 몸에 걸치고 수백 기(騎)의 무사를 이끌고 와 히데요시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의 ‘고금무가성쇄기(古今武家盛衰記)’에 실린 글이라 한다. [본문으로]
  6.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水口城] 4만석일 때 2만석을 떼어 주었다고 하나, 미츠나리는 미나구치 성의 성주가 된 적이 없었으며, 시마 사콘은 미츠나리가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9만석의 영주일 때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7. 나카무라 시키부쇼유유우 카즈우지[中村 式部少輔 一氏], 이코마 우타노카미 치카마사[生駒 雅楽頭 – 이 당시엔 마사카츠[政勝]라 하였음], 오노기 누이도노스케 시게카츠[小野木 縫殿助 重勝], 아마고 쿠나이쇼우유우 하루히사[尼子 宮内少輔 晴久], 이나바 효우고노스케[因幡 兵庫助], 츠게 사쿄우노스케[柘植 左京亮], 츠다 오오이노카미[津田 大炊頭], 후쿠시마 사에몬다이후 마사노리[福島 左衛門大夫 正則], 이시다 지부노쇼우유우 미츠나리[石田 治部少輔 三成], 오오타니 쿄우부우쇼우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少輔 吉継], 후루타 효우부쇼우유우 시게츠네[古田 兵部少輔 重恒], 핫토리 우네메노카미[服部 采女正]. [본문으로]
  8. 주로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를 이름. [본문으로]
  9. 히데요시의 전쟁금지령[惣無事令]을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정벌하려 한 전쟁. 1587년 개전. [본문으로]
  10.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1. 1591년 1월의 오오사키-카사이의 난[大崎・葛西の乱]과 9월의 쿠노헤 마사자네의 난[九戸政実の乱]. [본문으로]
  12. 사실 미츠나리는 히데츠구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미츠나리는 칸토우[関東] 사타케 령[佐竹領]의 검지(検知)하기 위해 출장간 상태였다. [본문으로]
  13. 일종의 토지조사. 정확한 수확량을 선출하여 세금과 부역할 양을 정하였다. [본문으로]
  14. 살생관백 히데츠구[秀次]도 이 칼을 노리고 있었기에, 모토카네는 어느 쪽을 주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기에 늦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15.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6. 일반적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를 말한다[関原始末記], [徳川実記]. 다만 그 인물 구성은 기록마다 틀려 '전국무장의 말년과 최후 -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잠깐 이름이 나온 이타자카 보쿠사이[板坂 卜斎]의 메모[板坂卜斎覚書]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빠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있으며, 미츠나리를 습격한 무장 일곱명에게 보낸 편지인 [윤3월5일자 이에야스의 편지(閏三月五日付家康書状)의 수신인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우 요시아키가 빠지고 대신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正],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17. 실제로는 이런 적 없다. 오오사카[大坂]에서 공격받은 미츠나리는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도움으로 후시미 성[伏見城] 안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피했고 여기서 농성했으며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와 연계하여 무공파 칠장 및 이에야스를 협격하려 하였다. 다만 동료였던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가 주저하는 사이 협격 모의는 실패하고, 이에야스와 화해를 하는 조건으로 책임을 지고 미츠나리는 봉행에서 물러나 은거를 하게 된다. [본문으로]
  18. 사실 이 사건은 미츠나리 하나만 노린 사건이 아니라, 봉행파 다수를 노린 사건이었으나 은거를 하며 봉행직에서 물러난 것은 미츠나리 한명 뿐이라, 후세에 미츠나리만 공격받은 양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9. 히데요시의 은혜를 입어 다이묘우가 된 무장들. [본문으로]
  20.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주가 된 적은 없다. 시마 사콘[島 左近]을 등용할 때 미나구치 4만석 중 2만석을 떼어 주었다는 일화 때문에 퍼진 낭설로, 당시(1590) 미나구치의 성주는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였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08.19 15: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도 시대를 거치며 음침하고 어두운 이미지의 미쓰나리 인간상이 부각되면서 악당의 이미지였습니다만, 요새는 가장 인기있는 인물 중 하나로 부각되더군요(전국무쌍, 전국바사라를 포함한 응용창작매체 포함). 역사는 돌고 도는 건가봅니다.

    개인적으론 어떤 일화보다도 요시쓰구와의 일화가 미쓰나리라는 인물을 제대로 나타내지 않는가 싶습니다. 소통하는 능력이 떨어졌던 인간성 좋은 사람 정도랄까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1 1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요시가 에도시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인기가 있었기에, 그런 영웅 히데요시의 어두운 면을 대신 짊어질 사람이 필요했고, 그런 인간으로 적합했던 것이 신군(神君) 이에야스에게 끝까지 개긴 미츠나리. 뭐 미츠나리가 진정한 충신이라면 저 세상에서 히데요시의 방패막이가 된 자신을 자랑스러워 할지도 모르겠군요.

      사족으로....
      소슈 님은 제 블로그에 2000번째 리플을 다신 분이십니다. 축하드립니다. ^^

    •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08.22 15: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두번째 밀레니엄을 달성했다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번째 영예도 제가 안았으면 좋겠군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3 17: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앞으로도 오래오래 찾아주십시오. ^^

  2. 간스케 2011.08.23 1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츠나리를 소인배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는거 같더군요.
    물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예전에 그러한 글을 한번 접했을때 흥미로웠던 것은 사실인데...
    발해지랑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들어보고 싶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7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그냥 미츠나리가 역사의 패배자이다 보니 이것저것 뒤집어 썼다는 느낌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는데,

      "예전에 그러한 글을 한번 접했을때 흥미로웠던 것은 사실인데..."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혹시 그 글을 소개해 주셨음 감사드리겠습니다.

  3. ckyup 2011.08.24 0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친구 머리가 그렇게 좋았다고 하던데.., 보통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시험으로 잣대를 삼았는데 이당시 전국시대엔 어떤 특별한 제도나 시험이 있었나요? 우리가 흔히아는 이당시 특출난 사람들 간베에, 미츠나리, 마사노부 등등..., 전부 알려진 바로는 우연한 인연으로 등용되던데요.... 궁금하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7 12: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도나 그런 것은 없었고, 일반적으로 무사들이란 한 지역의 지배층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행정적 소양은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평소에는 자신의 영지 혹은 맡겨진 영지의 행정을 담당(代官)하다가, 특별한 일(전쟁, 토목공사 등)이 생기면 상위의 무장(주군 혹은 요리오야[寄親])에게 담당관[奉行]에 임명되는 식이었습니다.(대충 간략하게는 이렇습니다)

      예를들어 쿠로다 칸베에의 경우 히메지[姫路]를 다스리는 작은 영주였다가, 그 위에 히데요시[秀吉]라는 인물이 오자 그 휘하에 속한 것입죠. 속한 상태에서 하리마[播磨] 지역에 있는 반노부나가 상태의 무사들을 회유 또는 동원령에 따라 히메지의 무사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서기는 했겠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히데요시의 참모 혹은 군사로 활약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등용문제는 지배구조에 관한 문제라 간단히 쓰기가 어렵군요. (제가 가진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 뭐라 잘 설명하기가 어렵군요. ^^;)

  4. 정동희 2011.08.31 14: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나우누리 신장동 시절에 닉네임으로 쓴 인물이었네요
    센코쿠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고, 격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이에야쓰와 대립한 큰 인물이었습니다
    위의 일화들을 보면 유능했지만 거만했다 라는 느낌인데
    사실 유능한 사람이 거만해지지 않기가 참 힘들죠
    그런 면에서 자신의 성질을 감추고 상대를 배려하는 능력이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31 20: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클에서는 사나다 유키무라를 쓰시더니.. 똥싸개 이에야스와 반대편에 서는 인물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

      저는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유능한 미츠나리의 능력에 열폭한 사람들이 별걸 아닌 일에도 그의 행동을 거만하게 보고 그렇게 기록해 남겨놓았을지도 모른다고요.

    • 정동희 2011.09.01 16:30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에야스... ㅋㅋ 희대의 두 영웅 밑에서 잘 굴러 먹었고 결국은 천하를 꿀꺽
      상황에 따라서는 마누라나 장남도 가차 없이 죽이고... 후흑술의 대가인데
      아무래도 정이 안가네요

    • 정동희 2011.09.01 16: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미츠나리 개인이 거만했고 아니고를 떠나서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는 위치였기 때문에 뭍 사람들의 질시를 받는 건 당연했다고 생각합니다
      미츠나리가 좀 더 사려가 깊었다면 어떻게든 그런 이미지를 불식시키도록 노력을 했어야 했겠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5 12: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입니다만.... 질투 받는 것은 질투 하는 쪽의 인식이 변하기 전에는 받는 쪽이 아무리 노력해도 변함이 없는 것 같더군요.

  5. 정동희 2011.08.31 14: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미쓰나리의 거만함이나 독단이 이른바 무단파와의 갈등을 불러 결과적으로 토요토미를 멸망으로 몰아 넣은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구요
    토요토미 멸망의 가장 주요한 이유는 히데요시의 어처구니 없는 조일7년 전쟁의 휴유증 이라고
    개인적으로 단언합니다
    조일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정유재란만 일으키지 않았어도
    토요토미 정권이 그렇게 쉽게 망하진 않았을 겁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31 2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토요토미 정권은 임란 후에도, 세키가하라 전쟁이 끝난 뒤에도 어느 정도 방귀는 뀔 수 있는 힘이 있었다고 하더군요(근래엔 이런 주장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그런 토요토미 정권을 끝장낸 이에야스의 능력도 굉장히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 정동희 2011.09.01 1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도시이에가 살았을 때 거병을 했다면,
      마시다 나가모리가 히데요시 직할지 재력만 미츠나리에게 지원 했다면
      뭐 그런 등 등 등의 설이 의미가 있겠습니까만은
      어쨌든 이에야쓰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건 저도 동감입니다
      특히 여러 다이묘들한테 이러 저러한 도움 주고 편지 보내고 공작하고 하는 건 참
      정말 어지간히 오지랍 넓고 부지런한 노인네였어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5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근래에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인지라 저도 깊숙히는 모릅니다만 세키가하라 이후에도 토요토미 정권의 힘은 이에야스의 칸토우 정권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힘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러했기에 세키가하라 이후 15년이란 긴 시간을 들여 토요토미 정권의 힘을 깍으려 한 것 같습니다.

  6. Favicon of http://pray4abyss.egloos.com/ BlogIcon 로날드럭 2011.09.01 16: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은근히 말년 히데요시가 잘못한 일을 미쓰나리가 뒤집어 쓰는 면이 많은 것 같더라구요.
    근데 요즘은 미쓰나리가 이에야스는 물론이고 히데요시의 인기를 능가하고 있으니(....)

    눈팅은 오래 해왔는데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건 처음이네요.
    앞으로 자주 들리겠습니다(__)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5 12: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씀하신대로 요즘 서브컬처에서는 미츠나리의 인기가 히데요시를 뛰어넘은 듯 하더군요. 뭐 히데요시야 워낙 오래(2차 대전 이전부터) 빨아대서 진물이 빠졌던 것도 있는 듯 합니다만.

      앞으로도 자주 들려주시고 알려주실 일 있음 많이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

  7. ㅇㅇ 2015.07.03 07: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군 총대장를 모우리 테루모토가 아닌 세키가하라에서 적극적으로 싸운 우키타 히데이에를 세웠다면 나은 결과가 나왔을 거 같네요.

    모우리 테루모토 정말 못난 놈, 일본판 유선(아두)이군요. 총대장이 오사카 성에 놀고 있다니...

    미츠나리 같은 편협한 놈이 총대장 대리역한다는 것 자체가 패배가 점쳐진거죠. 무공파의 이탈과 시마즈의 야습 진언 각하.
    원숭이 없으면 제 구실 못하는 놈.

  8. 마사무네 2017.03.14 15: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확히는 담에 좋지 않아서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이 반드시 이루어야하는 목표가 있고 그일을 반드시 이룰려고 하는자는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목숨을 아끼고 절대로 인생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


 히데이에[秀家]는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제일의 악모가(惡謀家)로 악명 높았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581년 나오이에가 죽기직전에 당시 오다 가문[織田家]의 쵸우고쿠[中国] 모우리 공략[毛利攻め]을 담당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 히데이에(당시는 하치로우[八郎])의 후사를 부탁하여, 이에 응한 히데요시는 나중에 히데이에를 유자(猶子)[각주:1]로 삼게 된다.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름글자도 히데요시의 ‘히데[秀]’를 하사 받아 하치로우[八郎]에서 히데이에[秀家]로 바뀌었으며, 히데요시 덕분에 관위도 계속해서 승진하였다. 1594년 조선침략 중 공적을 세워 24살의 젊은 나이로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임명 받아, ’비젠 츄우나곤[備前中納言]’으로 칭해질 정도였다.
 결혼 또한 히데요시의 애정이 듬뿍 담긴 것이었다. 부인은 히데요시가 친자식처럼 기른 양녀 고우히메[豪姫 –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딸]였다.

 히데요시의 이러한 히데이에에 대한 애정은 친자식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도 변하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양자들 중 관백(関白) 히데츠구[秀次]는 자살을 언도 받았고, 히데아키[秀秋]는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에 양자로 보내졌지만, 이 히데이에만은 유자의 신분을 계속 보장받았던 것이다. 나중에 히데요시가 병상에 누워서 후사를 부탁한 오대로(五大老)[각주:2]의 면면들에 관해 이야기 할 때도,
 “히데이에는 어렸을 적부터 내 손수 키웠던 사람이기에, 히데요리를 지켜는 것에 있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며 깊은 신뢰를 보냈다.

 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히데이에의 운명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첫 번째 신호는 집안싸움[御家騒動]이었다.
 히데이에는 무장으로서의 자질은 꽤 있었지만, 영지(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빗츄우[備中] 절반)를 다스리는 정치능력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히데요시의 과보호 상태에서 성인이 되었기에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히데이에의 가신단 중 본거지에 있는 ‘본거지파[国許派]’와 수도권에 올라와 있던 ‘수도권파[上方派]’의 가로(家老)들 사이에 험악한 파벌대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히데이에가 부인인 고우히메 휘하 가신으로
카가[加賀] 마에다 가문[前田家]에서 파견된 나카무라 지로우베에[中村 治郎兵衛][각주:3]를 중용한 것이 본거지파를 자극했다.

 그래도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는 공공연히 다툼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히데요시가 죽자 결국 본거지파 가로들의 분노가 폭발, 나카무라를 주살해야 한다면 공공연히 병사를 일으켜 수도권으로 올라온 것이다. 필두가로 우키타 사쿄우노스케[宇喜多 左京亮 – 후에 사카자키 데와노카미[坂崎 出羽守]][각주:4], 토가와 히고노카미[戸川 肥後守][각주:5], 하나부사 시마노카미[花房 志摩守][각주:6] 등이었다. 하지만 나카무라를 아낀 히데이에가 나카무라를 카가로 도망치게 하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사쿄우노스케 들은 이번엔 주군이 적이라며, 오오사카의 우키타 가문 저택 앞에 바리케이트[逆茂木]를 치고 화톳불을 피워 전투준비를 한 것이다. 금방이라도 시가전으로 발전할 듯 하였으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중재로 전투는 회피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커 우키타 가문의 본거지파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활약하게 된다.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히데이에는 서군의 부사령관 격으로 1만7천의 대군을 거느리고 출진하였다. 결전의 이틀 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는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군 제장들의 동요하는 모습에 한탄하면서도, ‘그 와중에 우키타 히데이에는 목숨을 던질 각오로 있는 것이 든든하다’고 적었는데, 태합(太閤) 히데요시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히데이에의 성실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초반의 활약은 훌륭했다. 아카시 타케노리[明石 全登][각주:7]가 이끈 우키타 군[宇喜多軍]은 용맹으로 이름을 떨치는 동군(東軍)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대와 치열한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서군은 패했다. 히데이에는 전쟁터에서 후퇴, 해로(海路)를 타고 사츠마[薩摩]까지 잠행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끝까지 숨지 못하고 포로가 되어,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로 유배당한다.

 이후 이 섬에서 살길 50년, 1655년 84세에 죽었다고 한다. 그 사이 토요토미 가문[豊臣家]는 멸망하였고, 토쿠가와 쇼우군[徳川将軍]도 4대 이에츠구[家継]의 시대가 되어 있었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1572년생. 히데요시[秀吉] 휘하로 시코쿠 정벌[四国征伐]
[각주:8],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9],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0], 조선의 역[朝鮮の役][각주:11]에 종군하였다. 전성기 때는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빗츄우[備中]의 절반, 하리마[播磨] 일부를 합쳐 총 57만4천석을 영유했다.


  1. 양자와 같은 개념이나 양아비의 성(姓)과 재산을 상속받지는 않는다 [본문으로]
  2.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3. 시바 료우타로우[司馬遼太郎] 선생의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豊臣家の人々]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4와 5편에 등장하는 인물. [본문으로]
  4. 우키타 아키이에[宇喜多 詮家]. 히데이에와는 사촌지간(각각 아비가 형제) [본문으로]
  5. 토가와 타츠야스[戸川 達安]. [본문으로]
  6. 하나부사 마사나리[花房 正成] [본문으로]
  7. 시바 료우타로우[司馬遼太郎] 선생의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豊臣家の人々]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5와 6편에 등장하는 아카시 카몬[明石 掃部]을 말함. [본문으로]
  8. 1585년 행해진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羽柴秀長]의 시코쿠[四国] 침공. [본문으로]
  9. 히데요시의 전쟁금지령[惣無事令]을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정벌하려 한 전쟁. 1587년 개전. [본문으로]
  10.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1.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합쳐 일본에선 이렇게도 부른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07.18 09: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의 글이시군요!
    아무도 댓글을 달지 않은 글에 첫 댓글을 남기는 것은 인터넷을 키면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 감히 말하겠습니다.

    뭐랄까요, 어떠한 인물들의 삶에서 히데요시는 때론 냉혹하지만 때론 매우 따뜻한 사람의 양면성을 보이며 개입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장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는 쪽이 히데이에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치적인 상황을 떠나 정말로 히데이에를 사랑한 것으로 보이니 말입니다. 아마 히데이에의 착하고 순수한 성품이 순수한 일면을 가지고 있던 히데요시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리라 생각되네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이에야스가 굳이 히데이에를 죽이지 않은 것은 마에다 가문과의 관계도 있지만 5대로 시절부터 그 역시 히데이에의 성품을 알고 있었던 것 역시 작용을 하지 않았나 감히 추측해봅니다. 물론 유배생활을 하게 된 히데이에는 자신이 50년을 더 살거라곤 생각을 못했겠지만 말입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7.19 1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시바 선생의 우키타 히데이에 #2에 이런 문장이 있습죠.
      " 히데요시 자신도 하치로우 모친의 몸을 알고 있던 만큼 어렴풋이 그렇게 착각할 법한 정념(情念)을 이 소년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부친이라는 것은 원래 출산의 고통이라는 동물적인 체험이 없이, 단순히 그 아이의 모친의 몸을 알고 있을 뿐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히데요시는 히데이에 부친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했다."
      .... 히데이에 모친 엔유우인[円融院]의 몸을 통해서 정말 아들로 인식하고 있었을지도...

      저 개인적으로는 시바 선생의 평과 같습니다.
      이에야스가 생각하기에 히데이에가 주도적으로 큰 일을 벌일만한 그릇이 아니었기에(거기에 자신의 가문을 잘 다스리지 못한 것도 있고), 그냥 유배로 끝나지 않았을지.
      (물론 성품이 뛰어난 것도 있었기에, 여러 다이묘우들의 조명탄원 운동도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2. 맹꽁이서당 2011.07.18 18: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요토미 가의 사람들... 예전에 올리셨을 때 반갑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게 벌써 3년전이라니 세월 참 빠릅니다 ㅎㄷㄷ
    그나저나 우키다 가의 본거지파는 좀 어정쩡했겠네요. 아무리 도쿠가와를 위해 활약했더라도 세키가하라 이후 가문 자체가 날아간 상황이니.. 어디 다른 가문에 취직이라도 했을까나.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7.19 1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때는 나름 자주 포스팅을 했었는데 말입죠.. 정말 세월 참 빠릅니다.

      주군의 가문 자체는 날아갔어도,

      사카자키(우키타 사쿄우)는 이와미[石見] 츠와노 번[津和野藩] 3만석(오오사카 공성전 후 가증 되어 약 4만 3000석).

      토가와 히고노카미(타츠야스)는 니와세 번[庭瀬藩] 3만석.

      하나부사 시마노카미(마사나리)는 5000석의 거물 하타모토[旗本]가 되었던 지라 나름 알아서들 출세했다고 보아야 합죠.

 언제부터인지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쵸우슈 한[長州藩]은 매년 1월1일이 되면 하기 성[萩城]의 가장 깊숙한 방에서 비밀 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중신들이 번주(藩主)에게 신년 인사를 올린 뒤, 필두 가로가 앞에 나아가, “올해는 어떻게 할까요?”라 물으면 번주가 “아직 이르네”라 답하는, 아주 간단한 의식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의 진위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의 원한을 잊지 않고 복수전의 시기를 주종간에 문답한다는 것이 정말 쵸우슈우[長州]다운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패하여 츄우고쿠[中国] 8개국[国][각주:1]이라는 거대한 영지에서 단번에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2개국으로 감봉된 당사자 - 그것이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이다.
 테루모토
는 시대의 영걸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손자이다. 1563년 테루모토의 부친 타카모토[隆元]가 지 아비 모리나리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불과 11살의 나이로 가문을 이었다. 당연 어린 테루모토를 대신하여 모토나리가 실질적인 당주로 정무를 계속 보았고,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 천[両川] ’이 모토나리를 보좌하는 체제가 성립되었다. 
 모토나리는 어려서 아비를 잃은 테루모토가 건강하고 예의 바르게 성장해 줄 것을 기도했다. 그리고 그 바람대로 무사히 테루모토는 15살의 봄을 맞이했다. 모토나리는 그 기쁨을 편지로 써서 테루모토의 모친에게  보낼 정도였다.

 테루모토는 위대한 할아버지에게 응석을 부리는 감이 있었다. 모토나리가 1567년 은거하려고 하자,
 “아버지 타카모토는 40살이 되어서도 뒤를 돌보아 주셨으면서 이제 막 15살이 된 저를 버리시려고 하시다니 뭐라 할 말도 없사옵니다. 그러니 저도 모우리 가문[毛利家]을 버리고 어디까지건 할아버지가 가시는 곳에 따라가겠습니다.”
 며 정말 아이처럼 우는 소리를 해댔다.
 모토나리는 이런 테루모토를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한편 귀엽다고도 생각했다.[각주:2]

 테루모토가 13살인 1565년.
 모우리 가문[毛利家]는
토다갓산 성[富田月山城]의 아마고 가문[尼子家]을 공격하였는데 이 때가 테루모토 전쟁터 데뷔였다. 4월 16일 테루모토는 모토나리에게 선봉에 서고 싶다며 자원하였다. 그러나 이날 적은 아마고의 주력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킷카와 모토하루,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모우리 가문의 당주가 데뷔전을 치를만한 상대가 아니라며 테루모토의 선봉을 막았다. 테루모토는 크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어린 테루모토는 장수(將帥)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지 못했다기 보다 테루모토 자체가 격정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이었던 듯 하다. 시간이 흘러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그런 테루모토를 ‘대장의 그릇이 아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즉 테루모토는 정치적 감각이 결여된 인물이었던 듯 하다.

 예를 들면 1574년 빗츄우[備中] 미무라 사네치카[三村 実親][각주:3]의 키노미 성[鬼身城]을 공격하였을 때, 사네치카를 손녀사위로 둔 오우미 뉴우도우[近江 入道][각주:4]가 자기 가문만 살려 주면 사네치카를 잡아다 바치겠다고 하자, 테루모토는 그 더러운 수법을 절대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략을 중시하는 다른 중신들이 오우미 뉴우도우의 내응을 받아들이도록 테루모토를 설득시켰다고 한다.

 또한 1578년에는 ‘양 천[両川]’이 목숨을 살려주자고 하던 아마고의 유신(遺臣)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 鹿之助]를, 테루모토는 2번이나 살려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반항한 은혜를 모르는 놈이라며, 독단으로 시카노스케를 죽였다.[각주:5]

 1571년 모토나리의 죽음 이후에도 이런 성질 급한 테루모토가 큰 실수 없이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양 천[両川]’  중 하나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잘 컨트롤했기 때문이다. 모토나리가 죽은 뒤 모우리 가문은 과감한 킷카와 모토하루, 진중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모우리 가문의 양 기둥이 되어 모우리 가문의 안태를 지키고 있었다. 테루모토는 이 두 숙부 중 성격적으로는 모토하루에 가까웠지만 접촉의 기회는 타카카게 쪽이 많아 정치력이 탁월한 타카카게의 의견을 자주 따랐다.[각주:6]

 하지만 성격적으로도 대조적인 ‘양 천[両川]’은 1577년부터 시작되는 오다 가문[織田家]와의 전쟁 속에서 대응법을 둘러싸고 차츰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1582년 히데요시[秀吉]가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가 지키는 빗츄우 타카마츠 성[高松城]를 포위하였을 때 킷카와 모토하루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대립은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때 킷카와 모토하루는 철저항전을,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강화교섭을 주장한 것이다.
 결국 천하의 정세에 밝은 타카카게의 주장으로 인해 사태는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조건으로 강화교섭으로 이어졌다.
 이때 테루모토는 상기의 움직임 속에서 타카카게 노선을 따르기는 하였지만, 위험에 빠진 타카마츠 성의 구원을 주장하며 무네하루의 목숨과 바꾸어 강화교섭에 나서는 것에 세찬 거부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테루모토 자신의 의지와 반대되는 것이었다. 테루모토는 무네하루의 유족들에게 직접 위로의 말을 전하고 후히 대했다.[각주:7] 이보다 전에 ‘말려 죽이기[干殺し]’ 작전이 펼쳐진 톳토리 성[鳥取城]의 킷카와 츠네이에[吉川 経家]의 유족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했다.[각주:8]

 1582년 히데요시를 혐오하던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가 은거하고 4년 뒤에는 죽어, 모우리 가문은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 하에서 활로를 찾으려 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노선을 밟아가[각주:9], 1588년에는 테루모토가 히데요시에게 초청받아 타카카게,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 모토하루의 아들]와 함께 상락(上洛)하여 쥬라쿠테이[聚楽第]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환대를 받고 임관의 영예[각주:10]까지 맛본 것이다. 즉 모우리 가문[毛利家]은 완전하게 토요토미 정권에 속하게 된 것을 의미했지만 그것이 테루모토가 바라는 방향이기도 했다.

 1597년. 모우리 가문의 기둥이었던 코바야카와 타카카케가 죽고 다음 해인 1598년에는 히데요시가 죽었다. 모우리 가문의 중추는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로 옮겨져, 코바야카와 노선의 후계자는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와의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생겼다. 양자는 각자 놓여진 입장에 따라 킷카와 히로이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무공파 다이묘우[大名]와 친했고, 안코쿠지 에케이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와 손 잡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決戦] 때 테루모토는 안고쿠지 에케이의 요청에 응하여 서군의 총수가 되어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하였다. 히로시마[広島]를 출발할 때 중신 대부분이 반대했음에도 테루모토는 굳이 출마하였다고 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오대로(五大老)[각주:11] 중 하나로 선정된 은혜를 갚기 위함이었으나,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교활한 정권탈취를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일지도 – 격정가(激情家)인 테루모토라면 양쪽 다 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리 데루모토[毛利 輝元]
1553년 출생. 히데요시[秀吉] 휘하가 되자 시코쿠 정벌[四国征伐][각주:12],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13]에 참가하였고,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4]에도 참가. 1595년에는 오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총사령관으로 출진[각주:15].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패하여 120만석에서 수오우[周防], 나가토[長門] 36만석 9천석으로 감봉되었다. 1625년 4월 죽었다. 73세.

  1. 나가토[長門], 스오우[周防], 이와미[石見], 아키[安芸], 이즈모[出雲], 빈고[備後], 빗츄우[備中], 호우키[伯耆]. [본문으로]
  2. 여담으로 이때의 생활을 1613년 테루모토가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 후쿠하라 히로토시[福原 広俊]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11살 때부터 부모님 곁을 떠났고, 13살에 시마네[島根]로 불려가 19살 때까지 할아버지(모토나리)에게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지냈다. 모든 것을 할아버지 의견에 따라야 했으며 때로는 엄청나게 맞은 적도 있다"고 하였다. [본문으로]
  3. 이 당시는 우에다 이에자네[上田 家実]의 딸과 결혼하여 양세자가 되었기에 우에다 사네치카[上田 実親]로 불림. [본문으로]
  4. 우에다 이에자네[上田家実]의 아비 [본문으로]
  5.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의 명령이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6. 앞서 언급한 편지에서 테루모토는 이에 대하여 “나는 할아버지에게도 맞았지만 타카카게, 모토하루에게도 엄하게 교육받아 이래서는 몸이 견뎌나질 않겠구나 하고 생각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7. 테루모토는 그의 아들 시미즈 카게하루[清水 景治]를 중용하였고, 카게하루는 세키가하라 이후 감봉으로 인해 힘든 모우리 가문의 재정상황을 재건하는데 힘썼다. [본문으로]
  8. 츠네이에의 아들 츠네자네[経実]는 이와쿠니 번[岩国藩] 킷카와 가문의 사숙노[四宿老]의 한 명이 되었다. [본문으로]
  9. 여담으로 킷카와 모토나가와 형 모토나가[元長]까지 죽어 킷카와 가문[吉川家]의 당주가 된 히로이에는 이런 타카카게를 '타카카게는 히데요시 밑으로 들어간 결단을 자신의 가장 큰 공적이라며 자랑했다'며 빈정댔다. [본문으로]
  10. 토요토미 씨[豊臣氏]가 되어 토요토미노 테루모토[豊臣 輝元]라는 이름으로 종사위하(従四位下) 지쥬우[侍従]에 임명되었고. 같은 날 산기[参議]가 됨. [본문으로]
  1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2. 1585년 히데요시가 시코쿠[四国]의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를 공격한 전쟁. 테루모토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를 1진, 킷카와 모토나가[吉川 元長]를 2진으로 출진시켰을 뿐 참가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3. 1586년~1587년 사이에 히데요시가 시마즈 가문[島津家]에 공격당하던 큐우슈우[九州]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구원요청에 응하여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14. 테루모토는 쿄우토[京都]를 수비하는 역할을 맡아 칸토우[関東]에는 가지 않았다. 대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모우리 가문의 군세를 이끌고 히데요시 주변을 지켰다. [본문으로]
  15. 테루모토는 정유재란 때 병으로 참가하지 않았다. 참가한 것은 테루모토의 대리인[名代]으로 우군(右軍) 사령관이 된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였다.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05.11 07: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나도 빛나는 별이었던 모토나리, 다카모토, 모토하루, 다카카게의 곁에 있었던 터라 데루모토라는 별의 빛이 가렸던 것 같습니다. 세키가하라라는 최악의 악수를 비록 두기는 했지만 그 이후 영국의 경영이나 가신단의 체제 재정비 등을 본다면 암군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어보입니다. 어쩌면 좋은 할아버지와 숙부를 만나서 엄하게 다뤄진 것이 효과를 거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한자를 보고 즉석에서 생각난 농담입니다만. 시즈키(指月)를 직역하면 달을 가리키다, 즉 천하를 가리키다라고도 될 수 있겠군요. 과연 모리에게 가장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었을런지.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11 07: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테루모토를 높게 평가하는 편입니다.

      어떤 일화에 히데요시가 쿠로다 칸베에에게,
      "만약 내가 죽으면 누가 천하를 쥘 것 같나?"
      라는 물음에 칸베에가,
      "모우리 테루모토겠죠"
      라고 하자 히데요시는, 그렇지 않네.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천하를 쥘 것일세...
      라는 일화가 있습죠. 여기서는 칸베에를 높여주려고 했나 봅니다만, 테루모토 역시 천하를 손에 넣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일화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도련님은 맞으면서 커야 하나 봅니다.

      달...을 천하와 대칭시키나요? 이런 쪽은 지식이 부족해서 잘 모르겠군요.

  2. Gyuphy IV 2011.05.11 16: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할아버님한테 칭얼대는 테루모토씬을 전국무쌍3에서도 본적이 있는데 그게 실제 있었던 에피소드에서 유래된것이었다..는데에 좀 놀랐습니다(..)

    그러고보면 세키가하라의 최악의 한수... 뭐 그렇다 쳐도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3년 더 살았다 하더라도 세키가하라때 천하를 노리지는 못했을것 같다는게 제 생각이네요. 기껏해야 마에다가 정도의 영지안도쯔음으로 끝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군요. 어이쿠 뭐 지식이 일천해서 그저 제 단견일 다름입니다만..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11 23: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타카카게가 살아 있었음 금오중납언 히데아키도 섣부리 나서지 못했겠지요. 아무래도 히데아키가 데려온 상층부 일부를 제외하곤 나머진 타카카게의 의향에 따랐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무엇보다 그 조심스럽다는 이에야스다 보니 마에다 토시이에 때와 마찬가지로 어느정도 대화로 풀어나가려 했을 것 같습니다.

  3. 맹꽁이서당 2011.05.11 2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세키가하라 때 우에스기 가게카스의 행동을 놓고 질문을 드린 적이 있었는데 (싸우려면 싸우고 말면 말지 난의 시발점을 일으켜놓고 가만히 대치한건 무슨 의도였나), 모리 데루모토에 대해서도 '대망'을 읽으면서 비슷한 생각(제대로 싸우든지 말든지, 서군 총대장으로 추대되고 나서 왜 가만히 있었나)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리 가 내부에 이런 노선 갈등이 있었군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11 2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모리 가문 내부 갈등은 제가 생각하던 것 이상이더군요.

      특히 킷카와 가문[吉川家] 그것도 세키가하라 때 대활약(??)을 펼친 히로이에[吉川広家]의 삐뚫어진 정신상태가 재미있더군요.

      이건 언제 따로 포스팅을 하려 합니다.

  4. 본다충승 2011.06.03 14: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대로 물 먹으셨지예~ ㅎ 이 양반 유족 처리에 관해선 좀 의외네요. 세키가하라엔 당시 아마 데루모토 본인 대신 양자 히데모토가 대리출정 했지요? 그 히데모토의 본진을 막아서고 공격하지 못하게 땡깡부린게 히로이에 ㅎ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7: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테루모토가 물 먹은 건에 대해선, 당시의 시스템 상(토리츠기[取次] 제도) 굉장히 신의에 벗어난 짓을 한 것 같더군요. 테루모토(...아니 킷카와 히로이에 조차)가 속을 만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토리츠기가 정한 것은 대개 인정받던 시대였거든요)

      개인적으로 히로이에가 모우리 가문을 작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이에 대해서 따로 포스팅하겠습니다.

  5. 123 2011.08.27 2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기 번의 새해 첫 회의 부분 수정 바랍니다.
    가신이 "올 한 해 도바쿠(토막討幕, 막부를 쓰러뜨리는 일)의 일은 어찌 하실 것입니까?"라고 물으면
    번주가 "시기상조일세"라고 대답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하는 게 옳습니다.

    최근 모리 가의 당주가 TV에서 자기는 정작 그런 관습에 대해 종가에서 들은 바가 없는데,
    아마 후세의 창작일 거라고 대답했다고 하는군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30 09: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선 리플 늦어진 것에 사과를 드립니다.

      "옳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밑에 123님도 써 놓으셨듯이 실제 있었는지가 의문인 상황에서 어째서 그렇게 확실한 어투로 "옳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수정을 요구하시는지요?

      거기에 일본방송을 보셨으니 일본어를 아실테니 御庭番의 임무 중 遠国御用라는 것이 있으니 찾아보실 것을 권합니다. 과연 번주와 중신의 대화에서 감히 "討幕"이란 단어를 쓸 수 있는지 회의감이 드실 것입니다.

신일본하우스[新日本ハウス] CM

동영상 2011.05.08 13:28 Posted by 渤海之狼




住みなれた我が家に
정든 내 집에

花の香りを添えて
꽃 향기를 곁들이고

優しく育った樹木香りも入れて
정성들여 키운 목향도 더해

この街で一番、素敵で暮らしたし
이 동네에서 가장 멋지게 살고 싶어

リフォームしようよ
新日本ハウス
리모델링 합시다
신일본하우스

일본 만화 헤우게모노[へうげもの] 131화(12권 마지막 장)에 나온다.
처음엔 '이게 뭔가?' 하고 유투브를 검색하였더니 나온 CM.

한국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알아가면 알아 갈 수록 호감을 가질 수 없는 히데요시[秀吉]지만,
이 만화에서 나온 이 장면만은 너무도 적절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