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나가의 성격은 크게 나누어 두 개의 면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합리적인 근대(近代)에 대한 동경과 잔혹한 살육에 대한 의지가 그의 몸 안에 공존하고 있는 것 같다.

 포르투갈의 선교사 프로이스(Luis Frois)는 직접 노부나가와 회견하였는데, 당시의 일을 로마 교회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전략)…키가 크고 말랐으며, 수염이 적고, 목소리는 대단히 크며…(중략)… 전술이 뛰어나고, 대부분의 규율에 복종하지 않으며, 부하의 진언에 따르는 것이 드물다…(후략)]

 고 쓰면서, 최하급의 병사와도 친근감 있게 이야기를 하는 대장(大將)이라 말하고 있다. 독선적인 성격이지만 뛰어난 군단지휘자의 풍모를 방불케 한다

 

 노부나가는 중세의 무거운 쇠사슬을 끊어, 일본에 근세의 여명기를 가져다 주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동시대의 영웅인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 차별화 되는 것은 이 근대적인 합리성일 것이다. 신겐이나 켄신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반드시 신불(神佛)에게 기도를 올렸지만 노부나가는 그것을 부정하였다. 노부나가는 무신론자였다.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납득한 것도 노부나가였다. 이보다 백 년 뒤, 에도 바쿠후(幕府)의 어용학자 하야시 라잔(林 羅山)은 지구가 둥글다는 설에 반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노부나가가 얼마나 시대에 앞선 근대성을 가지고 있었는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코우베()코우베 시립박물(市立博物館)에는 노부나가가 애용하던 세계지도 병풍이 있다.

 

 너무 합리적인 나머지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만 이용하려는 냉혹한 면이 있었다. 쓸모 있는 자는 히데요시와 같이 그 출신에 구애 받지 않고 계속 출세시켜 주었지만, 한번이라도 무능이라는 낙인을 찍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버렸다. 가로(家老)로써 힘써온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등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혼간지(本願寺) 공략에서 아무런 활약이 없었다는 이유로 고우야(高野)산(山)으로 추방 당하였고 말년에는 길가에서 굶어 죽는 비참함 죽음을 맛보게 하였다.

 

 1571 9.

 노부나가는 히에이잔(比叡山)산(山)을 포위하여 건물, 석탑, 승가가람(僧伽藍摩)을 전부 불태움과 동시에 남녀노약을 가리지 않고 수천 명을 학살했다. 이어서 1574년 키소카와() 강 하구(河口)나가시마(長島)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1])를 토벌했을 때는, 퇴성(退城)을 허용한 듯이 속여서는 방심한 틈을 타서 일제 사격하고 성에 불을 질러 2만여 명의 남녀를 태워 죽였다. 에치젠(越前)의 잇코우잇키 정벌에서는, 그 시체들로 인하여 후츄우(府中)의 마을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부 불교도에 대한 노부나가의 철저한 증오가 표출된 것이다[각주:2].

 반대로 기독교에는 관대하여 오히려 보호하였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발령한 선교사 추방령을 해제하였고, 쿄우토(京都)에 교회당을 세우는데 원조까지 하였다.

 

 노부나가에게도 익살스러운 인간적인 측면이 있었다.

 별명을 붙이는 것이 장기로, 히데요시에게는 [원숭이([각주:3])]라던가, [대머리생쥐(げネズミ[각주:4])]라고 붙였으며,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에게는 [대머리(キンカ)[각주:5]]라고 붙였다.

 

 따스한 인간성을 나타내는 편지가 남아있다. 히데요시의 마누라 네네(ねね)에게 보낸 것이다.

 […(전략)네네님 정도의 미인을 저 대머리생쥐 히데요시는 두 번 다시 얻지 못할 테니까, 네네님도 지금부터는 마님다운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질투 같은 것을 일으키지 않게…(후략)]

 히데요시가 여색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을 네네가 노부나가에게 호소하자 그 답변으로 보낸 편지이다. 그 외에도 냉철한 무장의 이미지와는 상상할 수 없는 인간미 넘치는 일면이 있었다.

 스모우(相撲[각주:6])를 아주 좋아하여, 1578년에 아즈치(安土)성(城)에서 열린 스모우 대회에는 주변에서 300여명이 모였고, 이 중에서 23명의 우수 씨름꾼을 선발하여 승자에게는 부채 등의 상품을 내렸다.

 

 오다(織田) 가문 중에서도 노부나가의 가문은 말류(末流)이다.

 오다 가문은 아시카가 쇼우군(足利 )을 보좌역인 시바(斯波) 가문의 오와리(尾張) 슈고다이(守護代[각주:7])였다. 이 오다 가문에 오와리 위쪽 4개군()이세노카미(伊勢守) 가문과 아래쪽 4개군()을 지배하는 야마토노카미(大和守) 가문이 있어, 노부나가가 태어난 가문은 이 야마토노카미 가문을 섬기는 세 행정관(三奉行[각주:8]) 중의 하나였다. 아시카가 쇼우군에서 보면 부하(斯波)의 부하(오다 종가(領家))의 부하(織田 大和守)의 부하(織田 正忠)에 지나지 않는다[각주:9].

 그러나 당시의 하극상 풍조를 타고 노부나가의 부친 노부히데(信秀) 시대에는 오와리(尾張) No.1 실력자로 올라선다.

 

 부친이 죽었을 때, 노부나가는 아직 16살로 세간에서 [최강 찌질이(うつけ)]로 불리며 얼간이 취급을 받고 있었다. 당시의 기록에 따라 그 풍모를 설명하자면, 반바지(半袴)에 나시(なしの浴衣)이며 헤어스타일은 챠센마게(茶筅), 머리를 묶는 끈(元結)은 빨간색이나 짙은 녹색 등의 강렬한 색을 좋아하였으며, 큰 칼(太刀)의 칼집은 붉은색. 무구(武具)도 새빨간 색이었다.

 이런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였고 걸어 다니며 밤, , 오이, 떡 등을 칠칠 맞게 흘려가면서 먹었다. 거기에 남의 어깨에 매달려 다니거나 하여 행동거지에 예절이 없는 것을 말하면 끝이 없었다.

 

 부친 노부히데의 장례식 날도 제대로 차려 입지 않고 나타나, 부처님 상 앞에 나아가서는 갑자기 향을 움켜쥐고는 부친의 위패에 집어 던지고서는 돌아갔다고 한다. 이 폭거에 교육을 담당한(傅役)인 노신 히라테 마사히데(平手 政秀)는 노부나가의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배를 가르고 죽었다.

 

 오케하자마()의 일전이 그런 노부나가의 천하를 손에 넣기 위한 첫 번째 도약대였다.

 1560 5 19일 심야. 노부나가는 갑자기 나각(法螺貝)을 울리게 하여 병사를 동원하면서, 손수 코우와카마이(幸若舞[각주:10]) [아츠모리(敦盛)]를 춤추었다.

 [인간 오십년, 하천(下天)과 비교해 보니, 몽환(夢幻)과 같도다(人間五十年、下天のをくらぶれば、夢幻のごとくなり).]

 이 부분을 세번 춤추었다 한다. 춤이 끝나자 뜨뜻한 물에 밥을 말아서 먹은 뒤 질풍과 같이 달려 나갔다고 한다.

 

 적은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대군단을 이끄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이다. 오와리 절반만 소유한 오다 씨()같은 것은 가볍게 물리치고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천하에 패를 외치고자 하였다. 오다 가문의 위급존망지추(危急存亡之秋)였다. 이마가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기습 전법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폭풍우가 치고 있었다. 오다 군()덴가쿠하자마(楽狭)에서 쉬고 있는 이마가와 군의 허를 찔러 습격, 결국 대장 요시모토의 수급을 베고 승리의 함성을 울려 퍼지게 한 것이었다(누누이 말씀 드렸듯이 저는 아케치 님의 “[說] 오케하자마(桶狹間) 진상정면공격설”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생각합니다. – 역자 주)

 

 1575 5나가시노(長篠)의 전투는 일본 전투 사상 획기적인 전투였다. 근대 전법을 구사한 오다 군이, 그때까지 센고쿠(戦国) 최강을 자랑하던 타케다(武田) 군단을 괴멸시킨 것이다. 노부나가는 철포 3000정을 끊임없이 타케다의 병마(兵馬)에 집중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각주:11].

 

 아즈치(安土) 7층루의 장대한 성을 쌍은 것은 1579년이다. 아즈치는 쿄우토(京都)와 가깝고 비와코(琵琶湖) 호수의 물길을 이용할 수 있으며, 북쪽으로는 호쿠리쿠(北陸)와 통하며, 남쪽으로는 이세(伊勢)로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7층의 텐슈카쿠(天守閣)의 내부는, 카노우(狩野)파의 벽화로 장식되었고, 최상층은 금박(金箔)을 입혔다고 한다. 일본에 와 있던 선교사들은 성안의 어느 것이나 세계에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한 건물이라고 절찬하였다.

 

 희대의 영웅 노부나가는 1582 6 2. 갑자기 일어난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으로 인해 혼노우(本能)()에서 쓰러졌다.

 이날, 모리 란마루(森 蘭丸)의 보고로 모반의 군세가 아케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노부나가는 단 한마디 [是非に及ばず 할 수 없군, 어쩔 수 없군한국어로 정확히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 역자 주]라고 말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노부나가는 손수 활을 들고 싸웠지만 이제는 여기까지라는 것을 깨닫자 건물 깊숙이 들어가 문을 닫고 자인(自刃)했다.

 

 그는 단 한 올의 머리카락도 이 세상에 남기지 않았다. 적에게 자신의 시체를 보여지는 것에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1534년 노부히데(信秀)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죽은 후 오와리 절반을 통일하였고,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에서 물리치고 미카와(三河)의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동맹을 맺어 오와리를 통일. 1564미노(美濃)를 공략. 1568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옹립하여 쿄우토(京都)에 입경한다. 이후 아자이(), 아사쿠라(朝倉), 타케다(武田) 등 여러 가문을 물리치고 혼간지(本願寺)의 잇코우잇키(一向一揆)를 항복시켜 천하 제일의 실력자가 되지만, 패업(覇業)을 목전에 두고 부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으로 인하여, 쿄우토(京都) 혼노우(本能)() 에서 자인했다. 49.
  1. 혼간지(本願寺)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농민 폭동군. [본문으로]
  2. 증오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과격한 행동은 에도 시대의 혼간지(本願寺) 측이 왜곡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원숭이(일본 발음으론 사루(さる))라고 붙게 된 것은, 1591년 쿄우토(京都)에 낙서가 되어있길.. “말세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무 아래 있는 어느 칸파쿠를 보더라도(末世とは別にはあらじ、木下にさる関白をみるにつけても)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나무 아래’는 키노시타(木下)로 히데요시가 하시바(羽柴) 성을 쓰기 전의 성이다. [본문으로]
  4.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칭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정말로 대머리였다기 보다는, 미츠(光)의 아랫부분과 히데(秀)의 윗부분이 결합되어 ‘대머리 독(禿)’이 되었고, 그와 같은 뜻인 ‘キンカ頭’로 부르지 않았나 싶다. [본문으로]
  6. 일본 씨름 [본문으로]
  7. 여러 지역을 가진 슈고 혹은 바쿠후(幕府)의 중요 직책을 가지고 있을 경우 그 지역에 가지 않은 채 가신 혹은 친척에게 대신 그 지역을 통치시켰고 그런 사람을 슈고다이(守護代)라 하였다. [본문으로]
  8. 오다 이나바노카미(織田 因幡守), 오다 토우자에몬(藤左衛門), 오다 단죠우노죠우(織田 弾正忠)의 세 가문. [본문으로]
  9. 이세노카미 가문(伊勢守)이 오다 가문의 종가라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10. 단한 춤을 추며, 옛 무장들의 영웅담을 읊는 것. [본문으로]
  11. 3000의 철포와 3단 철포는 없었다는 것이 대세이다. 자세한 사항은 검색해 보시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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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9 02: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년도 NHK 대하드라마 주인공이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이기에 만약 그 때까지 번역할 수 있다면 그가 짱 먹을 것 같습니다(예로 '무인 토시이에'의 주인공 마에다 토시이에 포스트( http://blog.naver.com/valhae0810/100023192573 )는 제 블로그에서 가장 많은 댓글과 링크 스크랩을 자랑하고 있습죠)

    문제는 나오에 카네츠구는 92번째 인물이고, 이제 노부나가는 19번째 인물이라는 거....
    (아마 내년 그 드라마가 끝날 즈음에나 가능하지 않을지...)

    개인적으로도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7.20 0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노부나가!!!
    역자 주에 쓰신 것 처럼 부풀려진 면도 있지만 어쨌든 대단한 인물이네요
    '빠'는 아니지만 여러가지로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전국무장100화 중에서 댓글이 가장 많이 달리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보네요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7.20 0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지인』은 나오에 카네츠구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군요
    내년엔 다시 남자들의 세계를 그린 대하드라마~!!! >ㅁ<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0 1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연은 워터보이즈에서 빤스입고 춤추던 츠마부키...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20 1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분도 플레쉬 오버 덕분에 깔끔한 화장을 하실 수 있었던 듯 싶더군요(-_-;) 아무튼 이렇듯 허무하게 죽으리라고는..잔넨(-_-)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1 08: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무라고 말씀하시니까, 프로이스가 노부나가의 죽음에 대해 말한 부분이 생각납니다.(저는 그 부분이 맘에 들더군요)
    [그 이름만으로도 만인을 공포에 떨게했던 인물이, 이 세상에 머리카락 한 올도 남기지 않았다]...는 부분이(...자세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뜻이었던 것 같네요 ^^)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kanshiniove BlogIcon 루키아 2008.08.27 2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오다 노부나가를 아주아주 좋아합니다앗..ㅋ.ㅋ.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free_artist BlogIcon 2008.09.18 15: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1 2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루키아님//저도 노부나가를 아주아주 좋아합니다!

    쏭님//자주자주 들려주세요~

  10. 오호라 2016.09.02 07: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림은 히데요시그림입니다.

 쿄우토(京都) 토우지(等持)원(院)에 현존하는 요시아키의 목상(木像)을 보면, 얼굴 아래쪽이 통통한 얼굴로 코가 크며 눈썹이 수려하고 콧수염이 아래로 쳐진 전형적인 귀족의 용모이다.


 진위를 보증할 수는 없지만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일으킨 [혼노우(本能)()의 변]의 흑막은 요시아키라는 것이다. 노부나가(信長)에게 추방되어 빙고(備後) 토모노우라()로 망명해 있던 요시아키가 예전 자신의 부하였던 미츠히데에게 비밀리에 지령을 내려 노부나가를 죽이게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자신을 쇼우군으로 만들고 추방했던 노부나가에 대한 끝없는 증오가 느껴진다.


 요시아키의 노부나가에 대한 증오는 무시무시할 정도였지만 노부나가 덕분에 쇼우군이 되었을 때는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하였다. 그랬을 뿐만 아니라 1569 4월에 요시아키의 새로운 거처 니죠우() 저택이 완성되어 그곳에 그 저택을 만들어 준 노부나가가 기후(岐阜)로 돌아간다는 작별 인사를 하러 온 돌아갈 때가 되자 문 밖까지 직접 배웅을 하고 노부나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서 있었다고 한다.


 요시아키는 12대 쇼우군 요시하루(義晴)의 둘째로 태어났지만, 처음에는 불문(佛門)에 들어가,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 이치죠우()원(院)의 몬제키(門跡[각주:1])가 되어 카쿠케이()’라는 호로 불리고 있었다.

 그 조용한 불문의 생활이 - 요시테루(義輝=13대 쇼우군)가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마츠나가(松永) 무리에게 살해당하자 급격히 변하기 시작한다. 카쿠케이는 미요시-마츠나가 무리를 피하여 오우미(近江)의 와다 코레마사(和田 惟政), 칸논지(音寺)성(城)롯카쿠 요시카타(六角 義賢), 와카사()의 타케다 요시무네(武田 義統[각주:2]) 등을 의지하여 방랑하다가 에치젠(越前)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에게 갔을 때 겨우 안정을 되찾아, 여기서 환속(還俗)하여 요시아키()’라는 이름이 되었고, 곧이어 요시아키()’로 개명하였다.


 요시아키의 운명은 노부나가로 인해 크게 비약한다. 1568 7, 둘은 기후의 릿쇼우(立政)사(寺)에서 회견했다.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쇼우군으로 옹립함으로써 자신이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고자 하였다.

 요시아키를 옹립한 노부나가는 6만의 대군을 이끌고 상락(上洛)하여 미요시 세력을 쫓아버리고,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를 항복시켰다.


 드디어 요시아키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에 임명된 것이다. 여러 지역을 유랑한 끝에 얻은 영광이었다. 요시아키는 이 때 노부나가에게 아시카가 가문의 문장인 [오동나무(桐)[각주:3]] [니히키료우(二引)[각주:4]]의 사용을 허락하였고, [아빠 오다 단죠우노죠우님(御父織田忠殿)[각주:5]]라는 명칭으로 쓴 직접 쓴 표창장()까지 보내었다. 얼마나 그의 기쁨이 컸던가를 알 수 있다.

 그 기쁨은 다음 해까지 이어진다. 다음 해(1569) 정월에 미요시 일당이 쇼우군의 거처인 혼코쿠()사(寺)를 습격하자 노부나가는 기후에서부터 눈 속을 삼일 만에 주파하여 미요시 군세를 쫓아낸 것이었다.

 거기에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위해서 니죠우()에 새로이 쇼우군 저택을 만들어 주었다. 손수 공사의 감독관이 되어 2만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불과 1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쇼우군과 노부나가의 좋은 관계는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요시아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쇼우군이란 노부나가의 괴뢰(傀儡) 실권은 어디까지나 노부나가가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요시아키는 실권을 가지고 싶었다. 은밀히 에치젠의 아사쿠라(朝倉)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上杉), 카이(甲斐)의 타케다(武田)나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노부나가와 적대하는 세력과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부나가는 이 불온한 움직임에 민감히 반응했다. 1570년 정월, 상경한 노부나가는 쇼우군 요시아키에게 강한 태도로 나왔다. [전중 법도(殿中御掟)]를 정하여 쇼우군이 다른 여러 지역에 편지를 보낼 때에는 반드시 노부나가가 쓴 편지도 첨부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걸로 쇼우군의 정치 행동은 크게 제약 받게 되었다. 쇼우군이라는 것은 이름뿐인 존재였다.


 바야흐로 요시아키의 물밑 공작은 점점 심해졌다. 노부나가의 제약이 반대로 반발로 작용한 것이다.

 여러 지역의 다이묘우들에게 보내는 노부나가 타도의 밀서는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과 싸우고, 이시야마 혼간지와 교전하며,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 적대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도 요시아키가 배후에서 선동한 것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요시아키의 적대적 행동에 참을 수가 없게 된 노부나가는 신겐이 서상(西上)하기 직전인 1571 9, 요시아키에게 17개조에 이르는 강경한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 여러 지역에 밀서를 내려서는, 말() 같은 것을 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
  • 우리들(노부나가)과 사이가 안 좋아졌다며 재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에 쿄우() 전체가 시끄럽다. 이렇게 니죠우()의 저택이 있는데 어디로 가시려는 것인가?
  • 노부나가와 친한 사람은 여관(女官)들마저도 잔인한 처벌을 하고 있다.
  • 소송을 노부나가가 청해도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 다른 지역에서의 헌상품을 감추거나 쌀을 팔아 금으로 바꾸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리 하시는 것인가?

 요시아키의 급소를 하나하나 찌르는 힐문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요시아키의 책모는 그치지 않았다. 그 시기 이러한 쇼우군의 행동에 정나미가 떨어진 중신(重臣)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는 결국 요시아키를 버리고 노부나가의 신하로 들어간다.


 1573 2.

 요시아키는 결국 깃발을 선명히 하여 노부나가 타도의 병사를 일으켰다. 타케다 신겐이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에서 토쿠가와()-오다(織田) 연합군을 대패시킨 것에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타케다와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군세로 노부나가를 포위 섬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기를 잃고 있었다. 요시카가가 이미 포위 작전을 내팽개치고 에치젠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요시아키는 이때 (西) 오우미(近江)이시야마(石山)에서 잇코우 종도(一向宗徒)들을 규합하여 거병하였다. 예전 형 요시테루(義輝)를 죽인 미요시, 마츠나가 등과도 손을 잡았다.


 하지만 결국 노부나가의 적은 아니었다.

 7. 야마시로(山城) 마키노시마(槇島)성(城)에서 농성하며 최후의 저항을 시도해보았지만 버티질 못하고 당시 2살의 아들 요시히로(義尋)를 인질로 바치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15대가 이어졌던 아시카가 바쿠후(幕府)는 사실상 끝을 고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

1537년 요시하루(義晴)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엔 외숙부 전() 칸파쿠(関白) 코노에 타네이에(近衛 稙家)의 유자(猶子)가 되어 나라(奈良) 이치죠우(一条)() 몬제키(門跡) 카쿠케이(覚慶)라는 이름으로 불문에 있었지만, 환속하여 요시아키(義秋)라 하고, 후에 요시아키(義昭)로 고친다. 처음엔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의지하였지만, 결국 오다 노부나가에 옹립되어 제15대 아시카가 쇼우군이 된다. 노부나가와 사이가 틀어지자 쫓겨나 빙고(備後)로 도망쳤다. 머리를 깎고 쇼우잔 도우큐우(昌山 道休)라는 호를 칭하였고,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보호를 받으며 1만석을 하사 받는다. 1597년 죽다. 61.

  1. 몬제키는 황족이나 고급 쿠교우(公卿)가 잇는 절을 말하며, 이치죠우 원(院)은 코노에 가문의 영향력이 강한 곳으로 외숙부인 코노에 타네이에(近衛 稙家)의 유자(猶子)로 들어갔다. [본문으로]
  2. ‘요시즈미’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3. 이것은 원래 황실의 것으로 쇼우군 가문이 하사 받은 것을 다시 노부나가에게 허용한 것. [본문으로]
  4. 후타츠히키(二つ引)’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5. 사족으로 노부나가는 1534년생, 요시아키 1537년생. 세 살차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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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10 18: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형의 비극적 최후를 보았음에도 괴뢰로 만족하지 못하고 과욕으로 신세를 망쳤군요..-_-; 뭐 그래도 히데요시가 일만석이라도 주었으니 다행입니다마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1 0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순식간에 잠깐 맛 본 권력이 너무나 달콤했나 봅니다. 일만석을 받았지만, 쓸모가 없어진 쇼우군은 죽고 나서 마에다 겡이에게 무시받을 정도라고 하니 조금 시대의 장난감이 된 듯한 느낌도 듭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7.11 08: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살의 요시히로를 인질로 '바치고' 아닌가요? 저도 자주 틀리는 부분이라. 이 양반 결국은 노부나가, 히데요시 때까지 개기다가 망하더군요. 그런데 사실 아시카가 바쿠후는 요시아키는 커녕 전성기라 불리는 요시미츠 때에도 큐슈 탄테이의 처리등 지방권력과 영지가 너무 거대해서 골치를 썩였죠. 문제를 찾아보자면 다카우지까지 올라가지만. 할튼 능력보다는 조상들의 바쿠후 시작부터 잘못돼서 애꿎게 피본 케이스랄가요..(먼산 -_-;;)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1 12: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헉~ 그러네요. 이건 저번에 지적 받았는데도 또 이래 버렸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타카우지가 '어쩌다보니' 쇼우군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손노우(尊王) 주의자임과 동시에 살려고 발버둥치다가(표현은 조금 과장되었지만) 정권을 잡아서 인 것 같고,
    또한 자기와 동급의 No.2를 너무 키워주었으며(동생 타다요시(直義)),
    거기에 급히 정권을 잡은 듯이 보이는 것이 슈고 다이묘우(守護大名)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준비해 두지 못한 것 또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7.12 07: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막부 재흥을 위한 행보는 안타까울정도입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3 16: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덕분에 이웃나라인 한국에서는, 그의 위대한 선조 아시카가 타카우지보다도 더 유명한 것 같습니다.
    (....요시테루가 더 유명할지도...)

二.

 이로부터 몇 년이 흘러 토쿠가와 가문의 가정에도 많은 변동이 있었다. 변동 중에 최대의 흉사(凶事)는 적자 노부야스[信康]가 기후[岐阜]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지시로 인하여 그 생모 츠키야마도노[築山殿]와 함께 자결를 강요 받아 죽은 것이다.
 1579년이었다.
 이유는 노부야스와 관련된 정치상의 의혹이었다. 비밀리에
카이[甲斐]의 타케다 가문[武田家]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었으며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았다. 당시 토쿠가와 가문에 있던 어느 누구도 그것을 믿지 않았지만, 그러나 노부나가는 믿었다. 이에야스에게 처와 자식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노부나가는 토쿠가와 가문 적자의 기량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듣고 오다 가문 장래에 불안을 느꼈다. 그를 죽이는 것으로 노부나가는 자기 자손의 안전을 꾀했다 – 는 설도 있다.

 노부나가의 진짜 의중은 모르겠지만 그 명령은 명쾌했다. 그의 산하(傘下) 다이묘우[大名]인 이에야스에게 있어 따르던지 반항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반항하기에는 이에야스가 너무 약소했다. 동쪽에는 타케다 씨(氏)가 있어 그 무력이 여전히 토쿠가와 가문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 타케다 씨(氏)의 군사적 위협을 막기 위해서는 종전대로 오다 가문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가문을 보전해 가기 위해서는 노부야스와 츠키야마도노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이에야스는 죽였다. 그들을 죽인 것은 부친이며 남편인 이에야스의 마음이 아니라, 이에야스가 필사적으로 키우고 있던 자신의 권력이라는 것이었다. 그 권력의 의지에는 이에야스 자신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노부야스의 죽음은 1579년 9월 15일 토오토우미[遠江] 후타마타[二俣]에서 행해졌고, 그의 모친이 죽은 것은 그 전달 25일 토오토우미 토미츠카[冨塚]에서 행해졌다. 노부야스 21세였다. 미카와[三河]의 백성들은 이 불행에 통곡하며,

[참으로 분하고 억울한 일이로다.
이 정도의 주군은 또 나오기 어려우니 (미카와 이야기(三河物語)]
 라고 쑤군대며 자해한 젊은 주군을 아쉬워했다.

 이때 얻은 이에야스의 상심은 천하를 얻은 말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아물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다만 이에야스의 성격은 참을성이 매우 깊기에 이런 슬픔을 충분히 견뎠다. 비통한 나머지 흐트러지는 일 없이 평소대로 군무(軍務)도 정무(政務)도 막힘이 없었다. 죽이라고 명령한 노부나가보다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견딘 이 인물 쪽이 더 정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토쿠가와 가문의 적자는 순서를 가지고 말하자면 오기마루(於義丸)가 그 자리에 앉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이에야스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은 듯 했다. 오기마루가 장래 토쿠가와 가문을 짊어질 정도로 똑똑한가, 아니면 우둔(愚鈍)한지를 판별해 보려는 것 조차 이에야스는 흥미가 없는 듯 했다. 때때로 사쿠자[作左]가 이에야스 앞으로 나아가서는 - 오기마루님의 일상을 지켜보건대 필시 뛰어난 명장이 되실 기량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 말을 해보곤 했지만 이에야스는 말려들지 않았다.

 “여섯 일곱 먹은 아이의 행동으로 장래의 기량을 점칠 수는 없다”

 고 말했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키우며 교육하고 있는 사쿠자에게는 그렇게 만은 생각되지 않았다. 사쿠자가 보건대 결국은 히데야스의 생모 오만[おまん]에게 문제가 있는 듯했다. 이에야스는 그 부자대면 후 오만을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불러들여 방을 하나 내 주었지만, 그러나 오만과 다시 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이에야스와의 애정을 이어갈 정도의 매력이 오만에게는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 배에서 나온 아이에게도 정이 잘 가지 않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 즈음, 실은 어린 과부를 사랑하고 있었다. 오아이[お愛]라는 이름이었다. 그 오아이가, 노부야스가 죽은 해의 8월. 눈썹이 엷은 남자 아이를 낳았다. 모친인 오아이는 그래도 18살로 젊었으며,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에야스는 그녀의 방에서 밤을 보냈다. 자연히 그 핏덩이에게도 깊은 정을 보냈다. 아기이름을 나가마루[長丸]라고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에야스는,

 “타케치요(竹千代)라고 불러라”

 고 말했다. 이것로 사태는 매듭지어졌다. ‘타케치요’라는 것은 토쿠가와 가문 대대의 관례로써 후계자인 아이에게 붙이는 아기이름이었다. 이에야스도 꼬꼬마일 즈음은 타케치요라 불렸으며, 먼저 죽은 노부야스도 꼬꼬마일 때는 타케치요였다. 그렇다고 하면 이 핏덩이는 토쿠가와 가문의 세자(世子)라는 것이 될 것이다.

 다섯 살 연상의 형 오기마루는 무시되었다.
 - 동생을 세우고, 형을 무시하면 나중에 가문 내란의 불씨가 되지 않을까?
 하고 그리 속삭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에야스는 모르는 척 하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에야스는 그러한 것에 가장 신경을 쓰는 인물이였기에 은밀히 여러모로 궁리하여 오기마루를 어떻게 할 지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다음 해, 또 오아이에게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셋째이면서도 오츠기마루[於次丸[각주:1]
]라고 이름 지었다. 세자의 다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장남일 터인 오기마루는 또다시 무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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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이 흘렀다.

 이에야스의 운명이 180도로 변한 것은 1582년 6월 오다 노부나가가 쿄우[京]의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자신의 부하 장수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살해 당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의 머리 위에 서 있던 사람이 사라졌다. 남겨진 오다 정권을 이을만한 인물은 자기라고, 이에야스는 당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더 빨리 미츠히데를 물리친 것은 오다 가문의 엘리트인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였으며, 히데요시는 그 기세를 타고 정권을 손에 넣으려 했다. 당연 그 반대파와의 사이에서 권력 쟁탈의 내홍(內訌)이 일어나 히데요시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싸웠고, 결국에는 오다 가문의 호쿠리쿠[北陸] 총독인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물리침으로 인해 정권 탈취 전쟁의 승리자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이 쟁란(爭亂)의 밖에 있었다. 라기보다는 스스로를 밖에 두었다. 이에야스는 오히려 이 난을 틈타서 자기 영지(領地)를 늘리는 것에 방침을 두고 토우카이[東海] 지방의 이삭줍기에 전념했다.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때 이에야스는 본국인 미카와 말고는 불과 토오토우미를 가진, 양 지역을 합쳐 60만석 정도의 다이묘우에 지나지 않았지만, 노부나가가 죽은 후 눈깜짝할 사이에 스루가[駿河], 카이[甲斐], 시나노[信濃] 세 지역을 주워 총 130만 석으로 땅을 늘렸다. 그 동원병력은 가볍게 3만4천을 넘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토우카이의 패왕(覇王)’이라 말해도 좋았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히데요시는 쿄우[京]에 정권을 확립하였다. 그 지배영역은 킨키[近畿], 호쿠리쿠[北陸], 산인[山陰], 산요우[山陽]의 일부를 포함한 6백30만석에 가까웠다.

 당연히 양자는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카츠[信雄]에게 요청을 받아들이고 그의 동맹자가 되어 히데요시를 고발(告發)하는 입장으로 도전했다.
 히데요시야말로 오다 정권을 도둑질한 자이다 – 라는 입장이었다. 명분으로써는 유리했다. 곧이어 양군은 노우비[濃尾[각주:2]]
평야에서 대치하였고, 1584년 늦은 봄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군의 이동을 탐지하여 그것을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크게 물리쳤다. 하지만 기껏해야 국지적 승리로 전쟁 자체에는 영향이 없었다.

 히데요시는 천하통일의 이루어가는 과정 중이었기에 여기서 이에야스와 결전을 벌이기 보다 오히려 외교로 꼬셔서 자신의 막하(幕下)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우선 오다 노부카츠를 회유(懷柔)하였다. 이에야스는 고립되었다. 거기에 그 이에야스를 히데요시는 회유했다. 이에야스는 그 권유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이상 싸우면 압도적 다수인 히데요시의 군세에 멸망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9월에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사이에 강화(講和)가 성립되었다. 히데요시가 내민 조건 중에 하나는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받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질이라는 것은 이상하다 – 고 이에야스는 처음에 그것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전투의 승리자가 인질을 받치고 적에게 평화를 구걸하는 것은 고금동서에 예가 없었다. 히데요시는 곧 그 말을 고쳤다.
 - 양자를…
 이라는 것이었다. 인질이건 양자건 자신의 아이를 받친다는 그 내용에 변함은 없었지만, 그러나 양자 결연이라고 한다면 세간에 대해 이에야스의 체면이 선다. 이에야스는 즉석에서 승낙했다.

 거기서 이에야스는 오기마루를 토요토미 가문에 바치기로 한다. 타케치요는 그 동생이면서 세자이기 때문에 보낼 수 없었다.
 - 이제서야 오기마루의 쓸모가 생겼군.
 이라고 이에야스는 생각했을 것이다. 오만이 낳은 오기마루는 이러한 외교상의 재료로 사용되기 위해 토쿠가와 가문에서 키워진 듯한 것이었다. 나이도 11살이 되어 있었다.

  1. ‘츠기(次)’는 ‘다음’이라는 뜻. 이에야스의 네째 아들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 [본문으로]
  2. 미노(美'濃')와 오와리('尾'張)에 걸쳐있기에 이런 이름이 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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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6.29 07: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에도 잘 읽었습니다. ^^
    흠.. 이 글에도 노부야스를 노부나가가 죽인 것으로 나와 있네요. [기초지식] 포스트 이후 내내 궁금했는데, 언제 한번 그 속사정을 시원하게 알고 싶군요.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07: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사는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
    오늘 내에 예전에 그에 대해서 번역한 것이 있으니 찾아서 올리겠습니다.
    (뭐 이에야스가 죽였다는 설도 세부에는 차이가 있으니, 어디까지나 그 중 하나입니다만..)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30 00: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노부야스는 생존설까지 있는걸 보면 참 인기도 좋았던듯...
    이번에도 잘 보고 갑니다. 히데타다는 어떻게 보면 참 자리를 거저먹은 듯..기량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전술적 재능은 GG였는데도..(뭐 그것도 운이라면 운이겠습니다만..)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30 08: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혹시 당시엔 눈썹 엷은 놈은 태어나면서 부터 히키마유(引眉)하기 편해서 키슈(貴種)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

二.

 

 하시바 가문이나 나가하마 성[長浜城] 성 밑 마을에서는 과부가 된 그녀를,

 '아사히 히메[]'

 라 불렀다. 히메[姫][각주:1]라 하더라도 오랫동안 햇볕에 탄 잔주름은 화장으로도 감출 수 없었고 나이도 30을 몇 개인가 넘어, 이제는 그 호칭에 걸맞은 눈이 부실 듯한 화려함[각주:2]은 없었다. 더구나 남편의 죽음으로 굉장한 충격을 받았는지 표정이 항상 어두웠고 나이보다 늙어 보였다.

 어떤 심경인지……’

 히데요시[秀吉]만큼이나 사람 마음을 꿰뚫는 사람도 이 말없는 여동생이 지금 어떤 심정으로 있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새로운 남편을 찾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주변을 찾아보니 소에다 진베에[副田 甚兵衛]라는 자가 부인을 잃고 홀아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히데요시는 맘을 정하여 이때도 스기하라 호우키[杉原 伯耆]가 이 혼담을 담당하게 되었다.

 

 소에다 진베에의 신분은 원래부터 하시바 가문의 가신이 아니라, 이전 노부나가의 부하로써 히데요시에게 파견되었던 사람이지만 히데요시가 나가하마 성주가 된 이후 하시바 가문에 속하게 되었다.

 대단한 인물은 아니다

 히데요시는 그 점이 불만이었다. 무사(武士)로서 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장래 아무리 좋게 보아도 성()을 가질 수 있는 기량이 없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매력은 - 오와리[尾張]의 소에다 씨[副田氏]라고 하면 아이치 [愛知郡]의 명문가라는 점이었다. 히데요시는 피의 고귀함을 원했다. 소에다 씨 정도가 고귀하다는 것은 이상했지만, 이 시기의 히데요시의 지위로 본다면 그 정도로도 충분히 고귀하다고 말해도 좋았다.

 

 단 당사자인 소에다 진베에가 이 결혼에 그다지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건 곤란합니다.”

 

 하고 단호히 호우키에게 말했다. 이유를 말하길, 자기는 기량이 부족하며 남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만약 장래 내가 조금이라도 출세를 하게 된다면, 남들은 이 소에다 진베에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마누라와 결혼한 덕분에 영달하였다고들 말할 것이다.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은 남자로서 참기 힘들다, 이 결혼식 이야기는 없었던 것으로 해주시길 이라고 말했다.

 이외로 기골이 있는 사나이군

 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히데요시는 진베에를 달리 보게 되었다. 역시 아이치 군[愛知郡]의 지방 명문가 출신답게 자부심을 가진 사나이라고이 이야기를 그냥 버리기에는 아깝게 되어,

 

 어떤가? 한번 더 가보시게

 

 라고 말했다. 말을 바꾸면 [명령]이었다. 호우키는 그렇게 소에다 진베에에게 전했다. 진베에도 이렇게까지 되면 복종할 수 밖에 없었다.

 

 맞이하고부터, 이렇게까지 기묘한 여자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가(武家)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세한 격식 같은 것을 몰랐다. 예를 들면 무가에는 연중행사가 많아 팔삭(八朔)이나 상서(祥瑞)로운 날은 어떤 가정 행사를 하고 자신은 어떤 의복을 입으며 남편에게는 어떤 준비를 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몰랐고, 그러한 지식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소에다 가문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다스려갈 능력도 없었다. 다만 그러한 무가의 주인마님으로서의 일은 그녀에게 딸려 온 노녀(老女)가 전부 대행하였고, 그 밑의 시녀가 수족처럼 움직였다. 그런 점을 덮기 위해서 하시바 가문에서 화장할 때 쓰라는 명목으로 땅(化粧料)이 붙어왔다.

 

 아사히는 하루 종일 거실에 멍하니 앉아있을 뿐이었다. 히데요시의 배려인 듯 ()나 습자(習字)의 선생이 붙어 있었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에도 흥미가 없는 듯했다. 이 여성은 몸 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탄력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를 어떻게 누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조금도 모르겠군

 요괴와 같구먼 - 하고 소에다 진베에는 처음에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상 말해야 할 것은 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1개월 정도 지나 진베에는 과감하게 말해 보았다.

 

 조금만 더 힘내 줄 수 없으신가?”

 

 진베에는 말하길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어라. 행동도 씩씩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사히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같은 것을 말해 보았다.

 

 어떠하오?”

 

 하고 부드럽게 한번 더 말했다. 진베에는 이 시대의 무사로는 드물게도 여성의 마음을 세심하게 배려할 수가 있는 남자였던 것 같다. 그것이 아사히의 마음 어딘가를 단번에 녹였을 것이다.

 

 힘드옵니다!!”

 

 고 갑자기 외치듯이 말했다. 그 커다란 목소리에 진베에가 놀랄 정도였다. 아사히는 굉장히 괴로운 듯한 모습이었는데, 얼굴을 들여다 보자 이를 악물고 있었다. 울고 있는 듯 했다.

 

 뭐가 그리 힘드신가?”

 

 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물어 보자, 둑이 터진 듯이 처음으로 울음 소리를 내었다.

 이것이 이 여자의 울음 소린가?’

 마치 꼬꼬마로 돌아간 듯이 자기를 잊은 막무가내의 울음소리였다. 진베에는 아사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목소리에 반한 듯할 감정에 휩싸였다. 틀림없는 인간 여성의 목소리였다.

 

 날이 새기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있네. 울고 싶으면 울게. 무언가 말하고 싶으면 말해시게. 나를 남이라 생각하지 말시게

 

 그렇게 말해주자, 아사히는 조금씩 입술 안 쪽에서 말을 만들기 시작했다. 들어보니, 놀랍게도 이 집에 와서 자신은 너무 긴장하고 있다, 그것이 힘들다고 말하였다.

 ‘……그랬구나

 하고 진베에에게는 이외였다. 아시하의 친정은 종오위하(從五位下) 치쿠젠노카미[筑前守]. 소령(所領) 20만석이라는 다이묘우[大名]의 가문이었다. 소에다 가문은 오다 가문의 부하였을 때 100석이었고 지금은 200석에 지나지 않았다. 20만석에서 200석 부하 가문에 와서 긴장하여 거의 정신을 상실해 버릴 정도였다는 것은 정말로 뜻밖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사히가 태어난 곳은 오와리에서도 최하층 소작농이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시집간 집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런 세계에서 계속 살고 있었다면 아사히도 편안히 세상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아비 다른 오빠인 히데요시가 아사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던 세계에서 파워엘리트가 되어, 전례가 없는 입신출세하였고 지금은 오다 계열의 다이묘우로서는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 때문에 아사히의 운명도 환경도 일변했다. 나가하마로 오자 마님이라 불리는 신분이 되었다. 전남편이 죽은 후, 그 생모인 오오만도코로[大政所]와 함께 요 일년간 성안에서 살며 많은 시녀들의 시중을 받았다. 모든 것은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 같았다. 시녀들은 모두 오와리나 오우미[近江]의 무가(武家) 출신자로 모든 것이 아사히와는 달랐다.

 아사히는 그녀들이 쓰는 무로마치[室町] 풍의 무가 언어를 사용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말 없는 성격이 더 말이 없어지게 되었다. 거기에 결혼 이야기가 나와서는 가신인 소에다 가문에 시집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아사히의 가부도 묻지 않고 히데요시가 정하고는,

 

 소에다 가문은 누가 뭐라 하건 명문가다. 예의 범절이나 무가의 격식 등을 어서 빨리 배워 두렴

 

 이라고 말하며 예전에 오우미의 지배자였던 쿄우고쿠 가문[京極家]을 섬겼다는 노녀에게 배우게 하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번거로움을 뭐라고 할까…… 예를 들면 남편과 같은 방에 있을 경우, 코를 풀기 위해서는 옆방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푸는 방식도 품 안에 있던 종이()를 꺼내어 처음엔 약하게, 다음은 조금 힘차게, 또 다음에는 처음과 같이 약하게 푼다. 세 번에 걸쳐 푸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러했다. 오와리에서 밭일하고 있을 즈음 종이 같은 것이 백성에게 있을 턱도 없기에 모두 손으로 풀고 털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급변한 환경일 것이다.

 

 그런 긴장이 소에다 가문에 와서 더욱 더 심해져 피의 순환이 막혔는지 혀도 움직이지 않았고 긴장했는지 몸동작도 가르쳐준 대로 따라지지 않아 그 때문에 아무 말 없이 계속 앉아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좋은 여자구나

 고 진베에는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으로 이 오동통한 마누라를 보았다. 자신이 종오위하 치쿠젠노카미의 여동생 되시는 분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이렇게 몸을 굳히고 있었다.

 

 잘 알았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네

 

 고 진베에는 웃지 않고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될 수 있는 한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의작법이라는 것은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 하면 이것만큼 몸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 없다. 창피를 두려워하지 말고 틀린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느긋하게 행동하면서 조금씩 고쳐가라, 그것이 중요하다, 나도 가르쳐 줄 테니 나쁜 제자가 되어라, 좋은 제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내가 당신을 키워 주겠네

 

 라고 말했는데, 이는 진베에에게 있어서 아사히를 안심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 여성을 무가의 부인으로 만드는 것에 열의를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진베에는 집에 있는 한 그러한 것에 신경을 쓰며 아사히를 가르쳤다. 하지만 무엇보다 젊지도 않았으며 30년을 넘게 백성의 여자로 살아 온 아사히를, 이제 와서 다른 여성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들짐승을 가축으로 만드는 것보다 어려웠다. 그러나 진베에는 그런 것에도 열의를 느꼈다.

 

 한편 사적이 아닌 공적으로써의 진베에는 그다지 출세를 못했고,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500석으로 더해진 것 외에는 별다른 것도 없었다.

 하시바 가문이 군단(軍團)인 이상 이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예를 들어 1000석이라면 자신의 가신이나 부여된 아시가루[軽] 한 조 정도[각주:3]는 이끌 수 있어, 한 개 전투 단위의 대장으로써 전쟁터에서는 단순한 용맹뿐만이 아닌 전술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기량이 없는 진베에에게 1000석을 주면 가문 내의 사기에 문제가 생길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 군단의 활동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기에,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이런 사정 때문에 진베에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 줄 수는 없었다.

 

 세상의 난이 진정되면 성 하나는 주겠다

 

 고 히데요시는 아사히에게 그런 약속을 하였다. 평화로운 시대가 온다면 무능한 자에게 아무리 많은 땅을 주어도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후 5년이 흘렀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信長]의 명령으로 츄우고쿠[国] 방면 사령관이 되어 오우미를 출발하여 하리마[播磨]로 향할 때, 진베에를 전열에서 빼서는 나가하마를 지키게 하며 영지(領地)의 민정을 담당시켰다. 이것은 다소 적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김에 700석으로 해 주었다.

 그 정도의 신분이었지만 소에다 가문은 소유한 석고(石高)보다 훨씬 유복했다. 성에서 아사히에게 보내지는 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쌀 덕분에 아사히는 충분히 작은 다이묘우[大名]급의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진베에는 물론 그 혜택을 관리하였다.

 

 진베에는 이 즈음 병이 많아져 더 이상 전쟁터에 갈 수 있는 몸이 아니게 되었다. 자주 열이 낫고, 열이 나면 10일 이상 자리에 누웠는데, 아사히는 이런 경우가 되면 마치 물을 만난 고기와 같이 활기를 찾아 열심히 병간호를 하였다.

 병간호를 시키면 이 여자보다 잘하는 마누라도 없을 것이다

 라고 진베에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사히는 여전히 들냄새가 빠지지 않았고 여전히 무가 부인으로서는 부족했지만, 그러나 환자의 간호에는 무로마치 풍습 등의 구속이 없었기에 아사히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해방된 듯한 마음으로 열심히 했을 것이다.

 

 아이가 없었다.

 이 점은 진베에도 곤란했다. 아사히가 석녀인 것이 확실해진 이상, 보통이라면 마땅한 여자를 들여서는 후계자를 만들어 소에다 가문의 제사가 끊기지 않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다른 무사의 경우 필요이상으로 미녀를 들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진베에는 히데요시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하고 있기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

 

 하고 아사히에게 무가의 관습을 가르치면서 은근슬쩍 물어본 적이 있다. 진베에는 말했다. 무문의 가문이라는 것은 가문의 이름과 제사가 끊기지 않게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만 하는데, 후계가 없을 경우 정실(正室)은 자신이 맘에 드는 시녀 중에 하나를 남편에게 보내는 것이 통례이다. 그렇게 말하자 아사히도 원래부터 그러한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듯 아무 말도 안하고 엎드려 울어버렸다. 여전히 의사는 명료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 말하자면 꼬꼬마와 같이 통곡하는 모양이 이미 세찬 거부를 표명하고 있었다.

 역시 안 되나?’

 이 하나만은 진베에도 아사히를 교육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따르지 않는 것을 보면 이는 본래의 질투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역시 자란 곳이 무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무가에서 자랐다면 질투심의 억제는 가훈으로 행해졌으며 가문이 끊기지 않게 유지하는 것의 중요함도 마음 속으로 새기고 있었을 터였다.

 결국 백성의 딸이군

 라고 이러한 때는 그리 생각할 수 밖에 없었으며, 거기에 그냥 백성의 출신보다 성가셨던 것은 그녀의 오빠가 진베에의 주인인 치쿠젠노카미라는 것으로, 이 때문에 무턱대고 강행할 수도 없었다.

 

 오빠한테도 아이는 없습니다

 

 고 아사히는 흐느껴 울면서 한마디만 하였다. 이런~ 그건 아니지~, 하고 진베에는 생각한 것이다. 하시바 가문 같은 것은 오다 가문 후다이[譜代]의 중신 니와 나가히데[ 長秀]시바타 카츠이에[田 勝家]를 가져다 붙였을 뿐만인 성으로, 본성도 지역 연고도 없었다. 거기에 비해 소에다 가문은 작다고는 하지만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부터 내려오는 가문으로 노부나가의 오다 가문보다도 가문은 뚜렸했다. 친정인 하시바 가문과 같은 감각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했다. 하지만 이것을 말해보았자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기에 진베에는 그 이상은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4년 후에 큰 사건이 일어났다.

 1582 6 2. 오다 노부나가가 가신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쿄우[]의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음을 당한 이다.

 미츠히데는 이 반란을 일으킨 후 오다 가문의 근거지인 오우미를 제압하고자 5일에 그 부장()아케치 미츠하루[明智 光春]에게 아즈치 성[安土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아즈치 성의 수비는 오다 가문의 모우 카타히데[蒲生 賢秀]가 지키고 있었지만 병력 부족으로 인하여 적이 오기 전에 성을 버리고 노부나가의 측실 20, 시녀 수백 명을 호위하며 카모우 군[蒲生郡] 히노[日野]자기 으로 철수했다. 아즈치 성의 북쪽으로는 오다 가문의 중신 니와 나가히데의 거성인 사와야마[佐和山]가 있었지만, 여기도 지키는 병사가 소수였기에 빈 성이 되었다. 거기에서 그 북쪽은 히데요시의 나가하마 이었다. 하시바 가문의 유력 무장들은 하나같이 츄우고쿠[国]에 있었으며 나가하마에는 없었다.

 성에 있는 것은 몇 안 되는 무사와 히데요시의 가족뿐이었다. 단 이미 문관(文官)같은 일을 하고 있는 소에다 진베에가 있었다.

 

 성을 지킵시다

 

 고 처음엔 진베에가 떠들었다.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々]는 이 인물의 당황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성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성안에 무사다운 사람은 10명도 없지 않은가? 10명 정도의 무리도 오다 가문의 장래에 절망하였고 또한 진베에의 지휘하에서 싸우는 것을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슬며시 가족들을 데리고 미노[美濃], 오와리[尾張]로 도망쳐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막는다는 것일까?

 

 다음날 진베에는 주장을 바꾸어, 오와리로 도망칩시다, 고 말했다. 도망칠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이 인물은 단지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을 시끄럽게 떠들 뿐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역시 싸울 때는 쓸모가 없는 사람이다

 하고 네네는 진베에가 맘에 안 들어,

 

 내가 지시를 하겠네. 자네는 닥치고 있게

 

 하고 말했다. 이 나가하마의 동쪽에 히데요시가 예전에 오다니 성[小谷城]을 공격할 때 쌓았던 야전용의 성이 남아 있었다. 산성(山城)이었기에 적을 막기에 나가하마보다는 훨씬 든든했다. 거기로 물러나기로 하고 네네는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을 보호하며 성에서 나왔다.

 그 성을 나올 때도 진베에는 짐들을 지키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성 밑 마을(城下町)이나 근처의 마을 사람들에게 어떠한 지시를 내리는 일 없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후일 히데요시의 마음을 굉장히 상하게 하였다. 진베에가 조금만 머리를 써서 적어도 편지 한 장이라도 츄우고쿠[国]에 있는 히데요시에게 보내어, 가족들은 모두 무사하십니다 는 소식을 알렸다면 히데요시는 크게 안심하여 신경쓸  필요 없이 복수전에만 전념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진베에라는 남자가 녹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빗츄우[備中]에서 서둘러 군세를 돌려 히메지[路]에서 아마가사키[尼崎]로 내달리고 내달리는 동안 말 위에서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했는지 셀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보다 가신의 무능에 대해서 너그러운 편이었지만, 그러나 이 때는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초조해져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1. 보통 젊은 나이의 ‘아가씨’를 뜻 함. [본문으로]
  2. 아사히[旭]는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뜻한다. [본문으로]
  3. 예를 들어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경우는 1000석의 부하에게 32명(기마무사 5명, 등에 깃발을 꼽은 자(指物) 10명, 창 10명, 부대 깃발 2명, 철포 5명)을 지휘케 하였다. 1581년 기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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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5.25 17: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몇 번이나 시집을 간 것인지... 이에야스가 3번 째인가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25 19: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책에서는 이에야스가 3번째입니다. 저도 이 책에서 처음 접한 인물인지라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힘들군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5.25 1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내용이 공명의 갈림길에서 본것과 상당히 유사 하네요. 공명의 갈림길에서는 맘고생 하다가 진베에와 재혼하고 좀 잘 사나 싶었는데, 강제 이혼 당하고 이에야스에게 시집 가더군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25 2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아무래도 관련 자료가 적어서 그런가 봅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5.26 15: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사히 히메라.. 생각해보면 전혀 호칭과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군요, 30여년 하루종일 뙤양볕 내려쬐는 밭에서 밭일하며 태웠을테니(-_-..)

    아.. 하긴 아사히는 아침해를 뜻하니 좀 엇나간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횡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06 0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닷가에서 뱀새 술 마시고 모래 사장에서 자다 새벽 햇살에 깰 때의 따끔함은 장난 아니죠(저도 횡설..)

.

 

 선천적인 인격자였을지도 모른다.

 코이치로우[小一郎]히데요시의 부름을 받은 것은, 형제의 첫 대면을 치른지 3년 후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織田家]에서 낮은 신분인 채로 스노마타[墨俣]의 요새() 수비에 임명 받았을 즈음이었다. 히데요시는 코이치로우뿐만 아니라 그 어미, 누나와 매형, 그리고 여동생인 아사히[朝日]도 요새로 불러 크게 대접하였다. 이 때 오나카[]는 처음으로 히데요시의 처인 네네[々]와도 대면하였고, 네네의 양갓집 동생인 아사노 야헤에 나가마사[野 弥兵衛 長政]와도 면식을 텄다. 말하자면 히데요시의 가족과 네네의 친정 쪽의 사람들과의 대면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그 사람과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접대하였고 곧이어 술자리가 끝나자,

 

 코이치로우는 이 요새에 남아라

 

 라고 이 아비 다른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나카는 될 수 있으면 막고 싶었지만 코이치로우는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코이치로우는 이날부터 무사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 동생을 별실로 불렀고 이어서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처남에 해당하는 아사노 나가마사도 불러 오게 한 후,

 

 둘이서 나를 도와라

 

 고 말했다. 옛날부터 무가(武家) 관습으로 가문의 당주가 대장이 되며, 그 동생이나 숙부가 곁에서 수족과 같은 부장(副將)이 되어 그것을 보좌하였. 말하자면 가문은 일족의 혈맹에 의해 성립되어 가는 이상 히데요시도 그런 형식을 취하고 싶었다.

 

 코이치로우는 언젠가는 내 대리인(名代)이 되어야 할 때도 올 것이다. 뭐든 잘 익혀두도록

 

 라고 말하며 이 즈음 이미 스노마타 성에 와서 히데요시의 휘하가 되어 있던 미노[美濃] 출신의 군사(軍師)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에게 코이치로우의 교육을 부탁했다. 한베에는 스노마타로 쳐들어 오는 적과 싸우는 실전 속에서 아이에게 젓가락질을 가르쳐 주듯이 전투의 밀고 당김을 알려 주고 적 상태를 보는 법, 명령을 내리는 법, 사졸들을 돌보는 방법 등 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가르쳤다.


 코이치로우는 좋은 학생이었다. 언제나 조신한 태도로 그것을 들었고 전투 속에서 보고 배웠다. 실제로 지휘시켜 보자, 어떤 것이든 과하지 않고 부족함 없이 한베에가 가르친 대로 행했다. 그 이상의 재능은 없었지만, 성을 지키는 것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를 한베에는 가졌다.

 이것도 하나의 기량일 것이다

 고 한베에는 생각하였다. 한베에가 보건대, 독창성이 없기에 어떤 일에건 익숙해지는 것이 빨랐다. 성격이 이의(異意)를 내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지시한대로의 것을 한다. 더구나 그 행함이 견실했다. 마치 성을 지키기 위해서 태어난 듯한 성격이었다.

 

 실제로 히데요시는 오다 군[織田]기후 성[岐阜城]을 공격할 때, 이 동생에게 진()을 지키게 하였다. 히데요시는 이 전투에서 하치스카 당[蜂須賀黨]의 경병(輕兵) 소수만을 이끌고 기후 성 뒷산에서 샛길을 타고 성 안으로 잠입하였다. 출발에 앞서 코이치로우에게 미리,

 

 내가 이끄는 부대는 성 안으로 은밀히 잠입하여 안에서부터 성문의 빗장을 풀겠다. 그 때 신호로 장대에 매단 표주박을 높게 쳐들 테니까 그걸 보면 곧바로 밖에서 문을 열고 성안으로 들어와 나와 합류하거라

 

 고 사전에 계략을 설명해 두었다. 만약 이 방법이 어긋났다면 히데요시는 성안에서 자멸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코이치로우는 타이밍에 맞추어 지시한대로의 것을 멋지게 성공하였다.

 

 좋은 동생분을 두셨군요

 

 전투가 끝난 뒤 한베에가 일부러 축복할 정도였다.

 한베에의 지론으로는 혈족군단에 있어서 뛰어난 인물은 형 하나로 족했고, 동생이라는 것은 형보다 능력이 뛰어나서는 안 되었다. 뛰어나면 사졸은 자연히 동생에게 달라붙어 가문 통제가 흐트러질 것이다. 또한 동생은 욕심이 없어야 한다 는 것이 한베에의 생각이었다. 욕심이 많으면 형의 부하인 다른 부장(副將)들과 공명(功名)을 다투기 때문에 가문이 흐트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두 가지 점에서 코이치로우라는 젊은이는 거기에 딱 알맞을 정도로정도가 좋았다.

 

 스노마타 즈음부터 십 수년이 흘러,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아 츄우고쿠[国]로 향하였을 때, 코이치로우는 이 군단의 선봉장으로써 전쟁터에 있었고 하리마[播磨]에서 빗츄우[備中]에 걸쳐 각지를 전전하며 무공을 세웠다. 그가 지휘하는 모습은 오다 군단의 다른 무장들과 비교해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기에 무장들 사이에서의 평판도 크게 높아졌다.

 

 이 시기.

 타케나카 한베에는 현지에서 지병(持病)이 재발하여 자리에 누웠다. 코이치로우가 병문안을 하러 왔을 때에 한베에의 용태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그는 시중드는 소년에게 등을 받치게 해서는 몸을 일으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고 스노마타 때부터 순종적인 제자를 위해서 이미 가냘퍼진 숨을 쥐어 짰다.

 

 몸의 안전을 꾀하시길. 병법에서 궁극(窮極)의 극의(極意)…. 그것입니다.”

 

 한베에의 걱정은 코이치로우의 평판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오르면 자연히 마음도 거만해 진다. 오만해 져서는 다른 부장의 원한을 사게 되어 참언(讒言)을 치쿠젠[筑前](=히데요시)에게 할 수도 있다. 공을 세우면 그것을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시길. 다른 무장들은 공명을 세워야 출세를 할 수 있지만 당신은 아무리 공이 없다고 하여도 치쿠젠님의 동생분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 오셨다

 

 고 한베에는 새삼 코이치로우의 이 십 수년간의 발자취를 칭찬하였다. 전혀 명성을 떨치려고 하지 않았고 공은 부하에게 돌렸으며, 히데요시의 대리인[名代]이 되어도 히데요시만을 세우고 자신의 존재를 자랑하는 일이 없었다.

 

 잘 해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어떨지 모른다. 특히 이 하리마[播磨] 부근에서의 코이치로우의 뛰어난 활약과 평판은 그의 인격을 바꾸어 버릴지도 몰라, 한베에는 그것을 두려워했다.

 

 그림자처럼 되시기를……”

 

 하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히데요시의 그림자가 되어 그것만을 만족하고 코이치로우 히데나가라는 존재를 버리라는 것이었다. 앞날을 생각하면 그걸 말고 당신께서 이 세상에 있으실 장소가 없다. 병법의 극의는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기는 것에 있다. 아시겠습니까? 하고 한베에는 확실히 해 두었다.

 코이치로우는 역시 이론(異論)을 말하지 않고 순순히 끄덕이며,

 

 좋은 말씀 감사 드립니다

 

 고 눈물을 담아 감사를 전했다. 이로부터 25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한베에는 숨을 거두었다. 자연히 위에 있는 것은 한베에가 이 세상에서 말한 최후의 말이 되었다.

 

 이 히데요시의 츄우고쿠[国] 공략이 한창일 때,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었다. 히데요시는 쿄우[京]를 점령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치기 위해서 빗츄우[備中]에서 군을 되돌려 우선 히메지 성[城]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게 북부 오우미[近江] 세 개의 군() 외에 하리마[播磨]도 하사 받아서는 이 히메지 성을 거성(居城)으로 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빗 속의 급행군을 마치고 입성해서는 곧바로 욕탕(浴湯)에 들어가, 욕실(浴室)에서 온갖 군령을 내렸다. 히데요시는 이 일전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듯이 성 안에 있던 금은이나 쌀을 모두 사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명령한 뒤,

 

 성을 지키는 것은 코이치로우가 해라~!”

 

 고 말했다. 코이치로우는 욕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그것을 들었다.

 이것은 치욕이다

 라고 생각하여, 한베에가 죽은 뒤 히데요시의 모신(謀臣)의 자리에 앉아 있는 쿠로다 칸베에[田 官兵衛=죠스이[如水]]에게 따지며, 이 너무도 불명예스러운 자리 배치의 변경을 원했다.

 하고자 하는 주장은 당연할 것이다. 형인 히데요시가 아케치와의 일전에서 패하기라도 한다면 이 히메지 성은 적의 일격에 무너져 버릴 것이. 성 안에는 500명의 수비병밖에 없으며 더구나 농성에 필요한 병량(兵糧)은 나누어 주어서 없고, 또한 그 수비 임무라는 것이 하리마[播磨]의 여러 호족들에게 받은 인질의 감시와 히데요시의 첩인 통칭 히메지도노[路殿][각주:1]라고 불리는 여인의 보호 정도였다. 이 천하존망의 시기에 남자로서 명예로운 자리가 아니다. 하지만 쿠로다 칸베에는 코이치로우의 소매를 끌고서는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가서,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말씀을 하시는군요

 

 라고 말했다. 칸베에가 말하기를 이번 일전은 천하를 판가름하는 싸움이 될 것이다. 히데요시 휘하에 있는 무장들의 8할은 오다 가문에서 파견 나온 장수들로, 이번 일전에서 히데요시를 앞세워 자기 가운(家運)을 트이게 하기 위해서 안달들이 나있다. 치쿠젠님(=히데요시)의 운은 이런 그들의 활약으로 인해 트이는 것이기에, 지금 당장은 육친이시니 참으시길. 그들과 공을 다투면 안됩니다. 공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시라는 것이었다. 평소의 코이치로우였다면 온후한 얼굴로 끄덕이며 이 도리에 따랐을 것이지만,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이 온후한 남자라도 감정을 주체 못하고,

 

 나는 언제나 성이나 지켜야 한다. 형이 모든 것을 거는 이 때만큼은 이 코이치로우도 야마시로[山城]의 전쟁터에서 죽고 싶다!”

 

 고 큰소리로 외쳤다. 목소리만이 히데요시와 닮아 컸다. 그 목소리가 욕실에 있던 히데요시의 귀에도 달했다.


 코이치로우!!”

 

 하고 역시 큰소리로 외치며,

 

 다 들린다! 뭐 그런 생각이 다 있느냐! 니가 그런 말을 한다면 나가하마[長浜]는 어쩌란 말이냐? 나가하마는 지금 버린 성이나 마찬가지다. 지금쯤 어머니도 내 마누라도 시뻘건 불길 속에서 타 죽고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다!

 

 고 소리질렀다.

 오우미 나가하마 성은 히데요시의 본성(本城)으로, 거기에 오나카도 네네도 살고 있었다. 적은 당연히 이 성을 공격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병가상사(兵家常事). 어머니도 네네도 아녀자지만 성벽 뒤에 몸을 기대고 지키고 있음에 틀림 없다. 그래도 니는 히메지의 수비가 불만인가? 아니면 히메지에서 죽을테냐?”

 

 히데요시도 역시 흥분했는지 말을 꼬여가며 되지도 않는 논리를 내세우며 무조건 호통만 치고 있을 뿐이다. 코이치로우는 이미 그 호통소리에 압도되어 풀이 죽었다.

 세상에 동생이라는 자리만큼 처량한 것이 없다

 고도 생각하였다. 형인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세상에 동생만큼 편리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이 정도로 매도(罵倒)당하면 - 다른 무장이라면 원한을 가지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디론가 갈지도 모르지만, 동생이라면 그런 점에서 안심할 수 있어 좋았다. 지금도 코이치로우는 뚱뚱한 몸을 움츠리고서는 둥그런 얼굴도 들지 않고 그냥 떨고만 있었다.

 

 알겠느냐?”

 

 하고 히데요시가 못을 박자 코이치로우는 허리를 굽히며,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히데요시는 히메지를 출발, 곧이어 야마시로[山城] 야마자키(山崎)에서 아케치 군[明智軍]을 물리치고 오다 정권의 후계자로써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 후 코이치로우는 히데요시의 천하 패권을 건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い][각주:2]에도 참가하였고, 코마키[小牧] 전투[각주:3]에도 종군하였다. 또한 킨키[近畿]소탕전(掃蕩戰)이라고 부를 수 있는 키슈우 정벌[紀州征伐]에 참가하여 평정 후, 히데요시에게서,

 

 코이치로우는 키슈우를 다스려라

 

 는 명령을 받았다. 키슈우는 노부나가 시대부터 골치를 썩여왔던 곳으로 지역 무사들의 기풍이 거칠고 독립심이 강하여, 센고쿠[戦国] 100여년 동안 그들은 연합하여 키이[紀伊]를 합의에 의해 운영하여, 한 번도 통일 다이묘우[大名]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거기에 '잇코우 종[一向宗][각주:4]의 기반이 되는 땅으로 영민(領民)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만을 절대적인 존재로 하여 지상(地上)에 있는 현세의 교주(敎主)조차 존중하지 않는 풍토가 있었고, 또한 산에는 산적이 많았으며 해안의 항구는 대부분이 해적의 소굴이 되어 있었다. 히데요시가 보건대,

 키이[紀伊]는 코이치로우와 같은 사람이 아니면 다스려지지 않는다

 라는 것이었다. 그들을 쓰다듬으며 가지고 있는 불평들을 끈기 있게 잘 들어주고, 계속해서 불공평을 없앤다는 점에서는, 많은 장수들이 있다고 하여도 코이치로우만이 할 수 있었다.

 

 이 동생은 그 기대에 응했다. 1585 3월 봉토(封土)를 받자마자 코사이가[賀][和歌山城]을 쌓아 신영주(新領主)의 위용을 나타내는 한편, 부하의 잘못에는 벌을 내려 법제를 철저히 하고, 민치에 힘을 썼기에 그토록 다스리기 어렵다고들 하던 이 지역의 호족들이 이상할 정도로 잘 따라 키노카와[川] 강 주변은 물론이거니와, 히데나가의 영지(領地)북으로는 이즈미[和泉]에서 남으로는 쿠마노[熊野]에 있는 70여 만석의 산야(山野)가 아주 평온해 졌다.


 코이치로우에게는 기묘한 품성과 재능이 있구나

 하고 그것을 명령했던 히데요시가 제일 먼저 놀랐다. 히데요시가 보건대 코이치로우는 천성의 조정가(調整家)이며 민정가(民政家)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히데요시를 또 기쁘게 한 것은 좆병진들이 많은 히데요시의 혈연 중에서도 이 코이치로우만은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걸출하다는 것이었다. 장래에 그 기량과 인격을 보건대 필시 히데요시 정권의 (柱石)이 되어 줄 것이다.

이 글은 소설입니다.


  1.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네[織田 信包]의 딸인 히메지도노[姫路殿]가 히데요시의 측실이 된 것은 노부나가가 죽은 다음의 일로(내가 알기로는 노부나가의 셋째 노부타카[信孝]와 히데요시가 싸울 즈음 노부카네가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받쳤다는 설이다). 아무리 히데요시가 유력 무장이라도 노부나가의 조카를 측실로 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2. 오다 가문 서열 1위인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의 싸움. [본문으로]
  3. 보통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라고 한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오와리 근방에서 싸운 전투. [본문으로]
  4. 정확히 설명하면 복잡하니 여기서는 혼간지[本願寺] 세력을 뜻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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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5.04 14: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케나카 시게하루가 하시바 히데나가에게 하는 말은 마치 자신이 그래 온 것 같이 해 달라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자신의 한을 그대로 물려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사노 나가마사라. 그러고 보니 얘도 하시바 히데요시의 육친으로써 히데나가보다도 더 숨어서 일하는 사람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히데요시의 일문중 중에서 이 히데나가랑 나가마사 빼면 쓸 만한 사람이 없긴 없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5.04 14: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 보니까 나가하마 성을 공격한 것이 다케다 모토아키랑 교고쿠 다카쓰구군요. 좀 중량 있는 무장을 여기다 배치했으면 어땠을까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5.04 15: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읽었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김이 약간 빠졌습니다. ^^a

    신사본론 님의 답글을 읽고 아사노 나가마사는 히데요시와 어떤 친척 관계인지 궁금해져서 검색을 해 봤는데, 위키의 친족표를 보니 데릴사위와 양녀 관계가 섞여서 뭔가 복잡하더군요. --a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4 19: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사본론님//나가마사 아들 있잖습니까~
    (히데츠구도 나름 괜찮았다~ 는 글들이 보이더군요... 저도 실은 그런 쪽입니다 ^^; )
    나가하마가 오우미다 보니 거기의 슈고였던 쿄우고쿠 씨는 제법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만 ^^
    뭐 결과가 그렇다 보니 뭐라고 말하기도 뭐하지만 말입니다.

    맹꽁서당님//에... 끝에 요약글 말씀이십니까?
    달까 말까 하다가... 일본에서도 시바 선생의 글을 역사로 여기는 분들이 많다고 하다 보니 달게 되었습니다.(^^ 다음 부터 비슷한 경우가 생길시에는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5.04 2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아니요... 그래도 소설도 읽고 정확한 역사적 지식도 얻는 것이 금상첨화겠지요.
    (이런 경우가 아니면 정확한 지식을 알게되는 기회가 잘 없는지라... 다음에도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5.04 2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젊은이-라고 평한 히데나가가 다케나카 한베에보다 4살이나 더 많았으니..;;

    그런데 히데나가 보면 볼 수록 삼국지의 노숙이 떠오르는군요;; 참 온화한 사람의 내면에서도 그 사람 나름대로 고충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걸 보여줄 수 있는게 소설의 묘미 아닐까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5 14: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맹꽁서당님//타이밍이나 흐름봐서 적당히 하겠습니다. ^^

    다메엣찌님//아~ 그런가요? 생각도 못하고 있었네요 ^^;
    그러고보니 말씀대로 형주의 관우와 자기 주군을 오가며 고뇌하는 모습과 겹치는 부분도 있군요.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5.06 17: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실제 노숙은 문무를 겸전한 상당한 터프가이입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6 2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헉~ 그렇군요!!! 저는 삼국지연의의 노숙말고는 모르다 보니.. ^^;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5.07 09: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연의 말고는 정사는 촉서 번역된거 밖에 안읽어봐서(ㅎ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