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이에[秀家]는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제일의 악모가(惡謀家)로 악명 높았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581년 나오이에가 죽기직전에 당시 오다 가문[織田家]의 쵸우고쿠[中国] 모우리 공략[毛利攻め]을 담당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 히데이에(당시는 하치로우[八郎])의 후사를 부탁하여, 이에 응한 히데요시는 나중에 히데이에를 유자(猶子)[각주:1]로 삼게 된다.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름글자도 히데요시의 ‘히데[秀]’를 하사 받아 하치로우[八郎]에서 히데이에[秀家]로 바뀌었으며, 히데요시 덕분에 관위도 계속해서 승진하였다. 1594년 조선침략 중 공적을 세워 24살의 젊은 나이로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임명 받아, ’비젠 츄우나곤[備前中納言]’으로 칭해질 정도였다.
 결혼 또한 히데요시의 애정이 듬뿍 담긴 것이었다. 부인은 히데요시가 친자식처럼 기른 양녀 고우히메[豪姫 –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딸]였다.

 히데요시의 이러한 히데이에에 대한 애정은 친자식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도 변하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양자들 중 관백(関白) 히데츠구[秀次]는 자살을 언도 받았고, 히데아키[秀秋]는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에 양자로 보내졌지만, 이 히데이에만은 유자의 신분을 계속 보장받았던 것이다. 나중에 히데요시가 병상에 누워서 후사를 부탁한 오대로(五大老)[각주:2]의 면면들에 관해 이야기 할 때도,
 “히데이에는 어렸을 적부터 내 손수 키웠던 사람이기에, 히데요리를 지켜는 것에 있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며 깊은 신뢰를 보냈다.

 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히데이에의 운명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첫 번째 신호는 집안싸움[御家騒動]이었다.
 히데이에는 무장으로서의 자질은 꽤 있었지만, 영지(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빗츄우[備中] 절반)를 다스리는 정치능력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히데요시의 과보호 상태에서 성인이 되었기에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히데이에의 가신단 중 본거지에 있는 ‘본거지파[国許派]’와 수도권에 올라와 있던 ‘수도권파[上方派]’의 가로(家老)들 사이에 험악한 파벌대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히데이에가 부인인 고우히메 휘하 가신으로
카가[加賀] 마에다 가문[前田家]에서 파견된 나카무라 지로우베에[中村 治郎兵衛][각주:3]를 중용한 것이 본거지파를 자극했다.

 그래도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는 공공연히 다툼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히데요시가 죽자 결국 본거지파 가로들의 분노가 폭발, 나카무라를 주살해야 한다면 공공연히 병사를 일으켜 수도권으로 올라온 것이다. 필두가로 우키타 사쿄우노스케[宇喜多 左京亮 – 후에 사카자키 데와노카미[坂崎 出羽守]][각주:4], 토가와 히고노카미[戸川 肥後守][각주:5], 하나부사 시마노카미[花房 志摩守][각주:6] 등이었다. 하지만 나카무라를 아낀 히데이에가 나카무라를 카가로 도망치게 하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사쿄우노스케 들은 이번엔 주군이 적이라며, 오오사카의 우키타 가문 저택 앞에 바리케이트[逆茂木]를 치고 화톳불을 피워 전투준비를 한 것이다. 금방이라도 시가전으로 발전할 듯 하였으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중재로 전투는 회피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커 우키타 가문의 본거지파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활약하게 된다.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히데이에는 서군의 부사령관 격으로 1만7천의 대군을 거느리고 출진하였다. 결전의 이틀 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는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군 제장들의 동요하는 모습에 한탄하면서도, ‘그 와중에 우키타 히데이에는 목숨을 던질 각오로 있는 것이 든든하다’고 적었는데, 태합(太閤) 히데요시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히데이에의 성실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초반의 활약은 훌륭했다. 아카시 타케노리[明石 全登][각주:7]가 이끈 우키타 군[宇喜多軍]은 용맹으로 이름을 떨치는 동군(東軍)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대와 치열한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서군은 패했다. 히데이에는 전쟁터에서 후퇴, 해로(海路)를 타고 사츠마[薩摩]까지 잠행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끝까지 숨지 못하고 포로가 되어,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로 유배당한다.

 이후 이 섬에서 살길 50년, 1655년 84세에 죽었다고 한다. 그 사이 토요토미 가문[豊臣家]는 멸망하였고, 토쿠가와 쇼우군[徳川将軍]도 4대 이에츠구[家継]의 시대가 되어 있었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1572년생. 히데요시[秀吉] 휘하로 시코쿠 정벌[四国征伐]
[각주:8],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9],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0], 조선의 역[朝鮮の役][각주:11]에 종군하였다. 전성기 때는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빗츄우[備中]의 절반, 하리마[播磨] 일부를 합쳐 총 57만4천석을 영유했다.


  1. 양자와 같은 개념이나 양아비의 성(姓)과 재산을 상속받지는 않는다 [본문으로]
  2.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3. 시바 료우타로우[司馬遼太郎] 선생의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豊臣家の人々]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4와 5편에 등장하는 인물. [본문으로]
  4. 우키타 아키이에[宇喜多 詮家]. 히데이에와는 사촌지간(각각 아비가 형제) [본문으로]
  5. 토가와 타츠야스[戸川 達安]. [본문으로]
  6. 하나부사 마사나리[花房 正成] [본문으로]
  7. 시바 료우타로우[司馬遼太郎] 선생의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豊臣家の人々]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5와 6편에 등장하는 아카시 카몬[明石 掃部]을 말함. [본문으로]
  8. 1585년 행해진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羽柴秀長]의 시코쿠[四国] 침공. [본문으로]
  9. 히데요시의 전쟁금지령[惣無事令]을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정벌하려 한 전쟁. 1587년 개전. [본문으로]
  10.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1.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합쳐 일본에선 이렇게도 부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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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07.18 09: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의 글이시군요!
    아무도 댓글을 달지 않은 글에 첫 댓글을 남기는 것은 인터넷을 키면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 감히 말하겠습니다.

    뭐랄까요, 어떠한 인물들의 삶에서 히데요시는 때론 냉혹하지만 때론 매우 따뜻한 사람의 양면성을 보이며 개입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장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는 쪽이 히데이에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치적인 상황을 떠나 정말로 히데이에를 사랑한 것으로 보이니 말입니다. 아마 히데이에의 착하고 순수한 성품이 순수한 일면을 가지고 있던 히데요시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리라 생각되네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이에야스가 굳이 히데이에를 죽이지 않은 것은 마에다 가문과의 관계도 있지만 5대로 시절부터 그 역시 히데이에의 성품을 알고 있었던 것 역시 작용을 하지 않았나 감히 추측해봅니다. 물론 유배생활을 하게 된 히데이에는 자신이 50년을 더 살거라곤 생각을 못했겠지만 말입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7.19 1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시바 선생의 우키타 히데이에 #2에 이런 문장이 있습죠.
      " 히데요시 자신도 하치로우 모친의 몸을 알고 있던 만큼 어렴풋이 그렇게 착각할 법한 정념(情念)을 이 소년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부친이라는 것은 원래 출산의 고통이라는 동물적인 체험이 없이, 단순히 그 아이의 모친의 몸을 알고 있을 뿐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히데요시는 히데이에 부친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했다."
      .... 히데이에 모친 엔유우인[円融院]의 몸을 통해서 정말 아들로 인식하고 있었을지도...

      저 개인적으로는 시바 선생의 평과 같습니다.
      이에야스가 생각하기에 히데이에가 주도적으로 큰 일을 벌일만한 그릇이 아니었기에(거기에 자신의 가문을 잘 다스리지 못한 것도 있고), 그냥 유배로 끝나지 않았을지.
      (물론 성품이 뛰어난 것도 있었기에, 여러 다이묘우들의 조명탄원 운동도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2. 맹꽁이서당 2011.07.18 18: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요토미 가의 사람들... 예전에 올리셨을 때 반갑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게 벌써 3년전이라니 세월 참 빠릅니다 ㅎㄷㄷ
    그나저나 우키다 가의 본거지파는 좀 어정쩡했겠네요. 아무리 도쿠가와를 위해 활약했더라도 세키가하라 이후 가문 자체가 날아간 상황이니.. 어디 다른 가문에 취직이라도 했을까나.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7.19 1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때는 나름 자주 포스팅을 했었는데 말입죠.. 정말 세월 참 빠릅니다.

      주군의 가문 자체는 날아갔어도,

      사카자키(우키타 사쿄우)는 이와미[石見] 츠와노 번[津和野藩] 3만석(오오사카 공성전 후 가증 되어 약 4만 3000석).

      토가와 히고노카미(타츠야스)는 니와세 번[庭瀬藩] 3만석.

      하나부사 시마노카미(마사나리)는 5000석의 거물 하타모토[旗本]가 되었던 지라 나름 알아서들 출세했다고 보아야 합죠.

출처: http://careerzine.jp/article/detail/1789 

일본 IT 업계 전직 사이트 CAREERzine에 올라온 글입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 회사 트렌더스가 20~59세 사이의 일본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 관심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60%가 ‘있다’고 대답.

 ‘있다’고 대답한 사람에게 ‘센고쿠 시대의 어떤 부분에 흥미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1위는 ‘센고쿠 무장의 캐릭터, 인물상’         77%
2위는 ‘센고쿠 무장이 보낸 격동의 인생’      59%
3위는 ‘혼돈스런 하극상 사회’                    38%
4위는 ‘전투의 전법, 전술’                         36%

 센고쿠 무장 중에서 가장 빨리 출세할 듯한 인물은?

1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秀吉]          41%
2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21%
3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17%
4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15%
5위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2%

‘기업가로 성공할 듯한 인물’은?

1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                        38%
2위 토쿠가와 이에야스                           35%
3위 오다 노부나가                                 32%
4위
타케다 신겐                                    16% 

히데요시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눈치가 빨라 임기응변에 능하고, 일을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잘 만든다’ (23세 여성), ‘하극상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성품’(27세 남성), ‘백성에서 천하를 손에 넣은 현명한 노력가에 오기가 센 무장이라 생각’(25세 여성)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저 질문에 가장 출세할 듯한 인물은 이건 뭐 두말할 필요도 없이 히데요시일 듯. 하지만 기업가로는 노부나가,

기업가 히데요시의 단점을 보자면,
무엇보다 주제도 모른 해외침략.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자신의 규모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덩치만 불리려 한 인수합병 혹은 주력 업종 외에 제대로 된 인식도 없으면서 문어발 확장이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전 히데요시건 이에야스건 노부나가가 없었음 저렇게 컸을지도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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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04.27 07: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셨을런지 모르지만 드라마 '욕망의 불꽃'에서는 이와 비슷한 감상이 느껴졌는데, 극중에서 이순재옹은 이러한 대사를 남기셨죠. 기억에 의존한 것이라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나는 회사를 세우고 영민(순재옹의 아들)이는 회사를 정리하고, 민재(손자 즉 3세) 대에 들어서 회사가 크게 번창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저 대사를 들으면서 오다 - 도요토미 - 도쿠가와 3대가 생각이 났습니다. 앞의 두 명이 그러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이 자의는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2. 178 2011.04.28 14: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출세는 완전 히데요시 이미지인듯...
    기업가는 호죠 우지야스 생각나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28 17: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가 시스템 운영은 최고였던 듯 합니다.

      호우죠우 가문은 기록을 많이 남겨놓았기에 지금도 당시를 연구하려는 사람들 대부분이 호우죠우 가문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더군요. 거기에 선정을 베풀었는지 이에야스가 들어간 다음에도 옛 호우죠우의 시대를 잇지 않았다고 할 정도니까요.

      여담으로 호우죠우 가문도 노부나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인해 멸망으로 이어집죠..어디까지나 결과론입니다만...^^
      5대 당주 우지나오[北条氏直]의 정실로 노부나가의 딸을 맞이하여 가문과 영지를 보존하고 싶었는데, 혼노우 사의 변 크리.

  3. 나그네 2011.05.05 0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눈팅만 하다가 첨으로 글 남겨 봅니다. 전국무장에 관한 글들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
    개인적으로 전국무장 중에서 히데요시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히데요시는 오다와라정벌 이전과 이후가 좀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아서...(마치 삼국지에서 적벽대전 이후의 관우 같다능....)
    이시다 미츠나리가 좀 의외네요. 적을 굉장히 많이 만드는 스타일일 듯 한데 출세를 빨리 할 무장으로 꼽히다니...
    암튼 저 개인적으로는 아무래도 '기업가'적 인물은 이에야스가 아닐까 하는....기업가는 일시적 성공도 중요하지만 그 성공을 영속화시키는 능력을 봐야하지 않을까요? 그런면에서 250년 막부의 초석을 놓은 이에야스에 한표....그런 의미에서 호죠가의 소운도 평가대상이지 싶은...^^;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05 23: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방문 감사드립니다. ^^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인식입니다만,

      히데요시는 원래 잔인하고 포악하며 욕심이 많았던 인물인 듯 하더군요. 나중에 여러 문학작품이 나오면서 조금씩 좋아지지 않았나? 하고 생각합니다.

      미츠나리는 오히려 시대가 내려오면서 안 좋은 쪽으로 변한 듯 합니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발도 넓었기에 상당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지만 아무래도 반역군의 수장이다 보니, 살아 남은 사람들이 안 좋은 것들을 전부 미츠나리에 밀어 넣은 것 같더군요.

      특히나 그 일하는 방식만 본다면야, 현대 일본에서도, 일본식 관리 프로젝트의 선구자 운운할 정도니까요. 거기에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것에도서 많은 돈을 뽑아내는 듯한 에피소드에, 부하에게 아낌없이 주는 모습을 보면 관리자로서는 최상급이었던 듯 합니다.

      이에야스도 센고쿠 3영걸 중 하나로 꼽히니 당연 인물이겠지만, 250년 이어진 에도 막부 전체로 본다면은 흔히 토쿠가와 3대로 지칭하 듯 - 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츠 이 세명이 다 공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야스가 남겨놓은 유산만 보면 분쟁의 씨앗은 남아 있는 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 히데타다가 그 씨앗을 잘 뽑았고, 거기에 이에미츠가 시스템으로 평온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호우죠우 소우운北条早雲은 확실히 창업은 잘 했지만, 그의 인생 후반기에 행한 업적들이 대부분 그의 아들 호우죠우 우지츠나北条氏綱가 한 것들이라고 하더군요.

      편협한 제 주장만 주저리 늘어놓은 것 같은데...
      이 경영자적인 면을 창업에 무게를 두어야 할지 아니면 그 이후 번영으로 이어가는 부분에서 놓아야 할지에 따라서 평가는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ps;제가 노부나가빠..에 가까운지라 노부나가말고 다른 사람 언급하시면 단점 찾아내기 바쁩지요. 이건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

  4. 나그네 2011.05.06 1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해까지야....
    저야 일본사를 그다지 잘알지도 못하고 일본어도 잘 못하고 한국사람이 쓴 교양개론서 하나 읽은게 고작인데요. 발해님 번역하신 글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
    제가 히데요시를 평가한다고 한건 일본사 통틀어서 그렇게 출세한 인간이 없는 걸로 알고 있고 그 출세가 필요불가결한 무력동원만 하고 나머지는 이해조정(말빨?)으로 가능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에야스에게 한방 먹기는 했지만 혼노지변 이후 오다와라 정벌까지의 히데요시의 정략을 보면 실로 깔끔하다고 느껴져서요.(열도 통일을 위한 최단거리를 가로지르는 듯한...)
    뭐 그 이후에는 삽질의 연속이었던 것 같은데 이게 원래의 본 모습인지 아니면 자만심이나 노망(?)에서 나온 결과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걸 본 모습으로 본다면 발해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p.s 저는 이에야스빠가 아닐뿐더러 절대 히데요시빠는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이에야스케릭터(능구렁이 너구리)는 밥맛이고 한국인으로서 히데요시를 좋아하기는 참 어렵지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06 21: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 일본 전쟁의 흐름은 반드시 투항교섭 -> 결렬시 무력...으로 이어졌습지요. 히데요시만이 그렇게 이해조정을 한 것만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죠.

      오히려 히데요시의 경우(그리고 타케다 신겐 등 몇몇도 그러했지만) 나중에 알아서들 기라며 츄우고쿠中国에 첫번째로 공략하는 곳은 싸그리 죽이고 시체들을 창에 꿰어 진군하는 식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습죠.

  5. 나그네 2011.05.06 1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쩌면 말년의 히데요시의 삽질이 너무 빠른 성공에서 기인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네요. 경쟁상대(대표적으로 이에야스)를 박살내 놓은 것이 아니라 적절히 타협을 통해 무마해 놓은 거였고 빠르게 형성된 세력이었기에 내부결속도 공고하지 못했던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 오버하게 된 건 아닌지...결국 그 오버스러운 행태에 의해 단점이 덧난 꼴이 되었겠지만 말이죠.(어디까지나 갠적인 망상)
    다시한번 강조하는데 저는 절~~때(x100) 수길이빠는 아니지만요 센코쿠 무장중에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 하나인 것은 사실입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5.06 22: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에야스를 상대로 교섭에 나선 것은 저도 나그네 님과 비슷합니다. 당시 히데요시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킨키近畿라는 발판이 확고히 다듬어진 편이 아니었기에, 이에야스와는 어떻게든 빨리 끝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즉 나그네님 말씀대로 너무 빠른 성공에 발판을 다질 틈이 없었다고)

      ps; 개인적으론 히데요시에게 흥미는 많이 있습죠. 다만 그 젊은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잘 알 수가 없다는 점이 좀 아쉽더군요.

  6. 하시바 2011.07.29 0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제도 모른 해외침략"이라고 하셨지만, 애초부터 히데요시는 매우 낮은 신분의 남자였습니다. 일개 다이묘의 가신으로도 설 수 없을 천한 신분의 남자가 오직 능력만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며 그것들을 모두 현실로 이뤄낸 인간입니다. 그런 히데요시기에, 역시 '가질 수 없는' 혹은 '누구도 가져본 적이 없는' 조선과 대륙을 가지려고 한 것은, 어쩌면 그의 속성으로는 당연한 행동이 아니었을까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7.29 17: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보통 그런 것을 '주제(혹은 분수)도 모른다'라고 합지요. 아니면 '허황된 망상'이라고도 하고요.

    • ken 2011.08.25 08:43  댓글주소  수정/삭제

      꿈을 추구한다..라고 말하고 싶군요
      가정에 불과하지만 연개소문이 정말 중원도모를 시도했더라도 "주제도 모르는 망상"이라고 폄하할 수 있는 건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27 12: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꿈이라...
      전쟁은 거는 쪽의 백성들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을 미사여구로 표현하시다니... 참 안타깝군요.

      "가정에 불과하지만 연개소문이 정말 중원도모를 시도했더라도 "주제도 모르는 망상"이라고 폄하할 수 있는 건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라고 말씀하셨는데...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연개소문이 우리 역사에 속한 인물이기 때문인가요? 제 블로그 우상단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 그런 식의 인식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잣대는 항상 일정하기에 잣대인 것입니다. 기분에 따라 줄거나 는다면 그것은 잣대가 아니니까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는 노부나가[信長], 히데요시[秀吉], 이에야스[家康]로 이어지는 소위 겐키[元亀][각주:1] - 텐쇼우[天正][각주:2]의 천하 통일기에 저 3명과 가까이 하며 백만석의 기초를 쌓아 올린, 센고쿠[戦国] 역사에서도 특필할 만한 무장이었다.

 토시이에는 14살 때 당시 나고야[那古野] 성주였던 4살 연상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겼고[각주:3], 같은 해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섰다[각주:4]. 19살 때 노부나가가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유키[信行]를 공격한 이노우 전투[稲生の合戦]에서 노부유키의 청년 친위대장[小姓頭] 미야이 칸베에[宮井 勘兵衛]라는 강적을 쓰러뜨리는 공적을 세웠다.[각주:5]

 이 즈음 토시이에는 카부키모노[かぶき者]로 성질이 급하여 자주 남과 싸웠다.
 ‘카부키모노’라는 것은 기발하고 특이한 복장이나 행동을 해서 남을 놀라게 하고는 기뻐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 기풍이었다. 예를 들어 토시이에는 굉장히 화려한 장식을 한 창을 들고 다녔기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 ‘창의 마타사에몬[槍の又左衛門][각주:6]’이란 이명(異名)을 붙었기에 이를 들은 토시이에는 기뻐하였다.
 그런 토시이에였기에 늙어서도 특이한 젊은이를 사랑하였으며, 또한 말하길,
 “젊은이에게는 큰소리 치도록 만드는 편이 좋다. 그러면 자신이 했던 말들을 거짓으로 만들 수 없다며 분투하게 되니까”
 라고 하였다.

 카부키모노였던 22살의 1559년, 토시이에는 커다란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어느 날 노부나가의 도우보우[同朋][각주:7] 쥬우아미[十阿弥]가 토시이에의 남성용 비녀[笄][각주:8]를 훔쳤다. 토시이에는 곧바로 노부나가에게 쥬우아미를 처벌할 테니 허락을 내려달라고 했으나 노부나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토시이에는 주군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이 참았지만, 이런 토시이에를 보고 쥬아미 등이 ‘용기도 없는 놈’ , ‘무사라는 자가 한번 벤다고 했으면 베어야지 주군의 명령이라고 베지도 못하다니’ 라는 식으로 뒷담화를 깠다.[각주:9]
토시이에는 이를 듣고 불문곡직하고 쥬우아미를 베어 죽였다. 더구나 일부러 노부나가의 눈에 띄는 곳을 골라서 죽여버린 것이다. 평소부터 카부키모노라는 점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토시이에로서는 당연한 행위였다.
 노부나가는 격노하여 토시이에를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숙노(宿老)들의 중재 덕분에 목숨만은 건져 오다 가문[織田家]에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낭인(浪人)이 된 토시이에가 취한 방도는 슬며시 전투에 참가하여 공적을 세워 복귀를 허락 받는 것이었다.[각주:10] 그런 기회가 그 다음 해인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가 되어 찾아왔다. 토시이에는 오다 군[織田軍]에 참가하여 이마가와[今川] 측의 목을 세 개를 가져왔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토시이에가 그 목을 노부나가의 앞으로 가져왔지만 노부나가가 무시했기에 그 목들을 버리고 다시 전쟁터로 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결국 노부나가의 용서는 없었다.

 그 2년 뒤, 노부나가가 미노[美濃]를 침공하였을 때 토시이에는 또 참가하여 모리베 전투[森部の合戦]에서 ‘목 사냥꾼 아다치[首取り足立]’라는 이명(異名)을 가진 강한 무사를 죽이는 수훈을 세우자 노부나가도 용서를 하여, 다시 오다 가문의 가신(家臣)으로 복귀하게 되었다.[각주:11]

 그 후 토시이에는 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 함께 호쿠리쿠 방면[北陸方面]에서 활약하며 차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1582년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나,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치자,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와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곧이어 이 둘은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토시이에의 입장은 복잡했다. 토시이에에게 있어 카츠이에는 오다 가문에서 쫓겨나 낭인으로 보내던 시대에 몇 번이나 도와주었던 은인이며, 오랜 기간 전쟁터를 함께 해 온 의리가 있었다. 한편 히데요시와도 젊었을 적부터 친교가 있어, 딸 중 하나인 ‘고우[豪]’[각주:12]는 태어나자마자 히데요시에게 양녀로 주었을 정도였다. 토시이에는 어느 쪽과도 싸우고 싶지 않다 – 는 것이 본심이었다. 하지만 형식상으로는 영지가 이웃인 시바타 측에 속할 수 밖에 없었다.

 1583년 4월 21일부터 다음 날 아침에 걸친 시즈가타케의 전투[賤ヶ岳の戦い]는 히데요시의 승리로 싱겁게 끝났지만, 이때 마에다 군[前田軍]은 그다지 전투에 참가하는 일 없이 영지(領地)인 에치젠[越前] 후츄우[府中]로 철퇴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토시이에가 이 전투에 대한 기본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히데요시가 마음만 먹는다면 토시이에가 농성하고 있는 후츄우의 성은 단숨에 낙성시킬 수 있었다. 이때가 토시이에의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였다.[각주:13]

 하지만 전하는 바에 따르면 포위망을 친 히데요시는 혼자 말 타고 후츄우의 성문 앞에 와서는 “마타사[又左]~ 마타사~”하고 토시이에의 통칭을 불렀고, 성안에 들어 온 히데요시는, 서로 원한이 없으니 앞으로도 사이 좋게 지내자며 토시이에에게 말하였다. 이런 것은 히데요시의 특기인 남의 마을을 끌어들이는 기술이기도 하지만, 남에게 미움 받지 않는 토시이에의 인덕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이리하여 토시이에는 시바타 카츠이에가 멸망 당하여 죽은 뒤 히데요시의 둘도 없는 한 팔이 되어 신뢰를 받았고, 나중에는 여러 장수들에게서도 신뢰를 받아 히데요시 정권에서 무게감을 더해 갔다.

 토시이에가 여러 장수의 인망을 모았다는 것에 관해서는 이런 일화가 있다.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병들었을 때, 토시이에는 당시 명의로서 명성을 떨치던 의사 마나세 도우산[曲直瀬 道三]에게 직접 의뢰하여 병을 치료하게 하였으며, 우지사토가 죽자 그 아들 츠루치요[鶴千代 = 후에 히데유키[秀行]]가 어리기 때문에 아이즈[会津]라는 중요한 곳을 지키기 힘들다는 의견이 높았지만, 부인 호우슌인[芳春院]과 함께 히데요시 부부를 설득하여 가모우 가문[蒲生家]의 영지 상속을 실현시켜 주었다.[각주:14]
 
 또한 이해에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 사건이 일어나 평소 히데츠구와 친밀했던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가 연좌의 혐의를 받자, 토시이에는 온갖 수단을 다해 변호하여 아사노 부자에게 쏠린 혐의를 벗게 하였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는 조선에서의 행동 때문에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근신 당하고 있다가 ‘지진 카토우[地震加藤]’[각주:15]라는 이명(異名)을 얻을 때의 활약으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풀었는데, 이것도 토시이에의 중재에 의한 것이 컸던 듯 나중에까지 키요마사는 토시이에의 중재를 고마워하였다.

 이렇듯 토시이에가 장수들의 위기를 구했기에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도 신뢰할만한 인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토시이에는 말년이 되어 적자 토시나가[利長]에게 여러 다이묘우들의 차용증을 건네주었다. 자신이 죽은 뒤 마에다 가문의 편에 선 다이묘우의 차용증은 돌려주라고 하며, 그렇게 되면 한층 더 아군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토시이에는 단순히 ‘좋은 인간성’만의 무장이 아니라 상당한 정치가이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토시이에는 경제적으로 유복했다. 그것도 센고쿠 무장[戦国武将]로는 드물게 경제감각의 소유자로 수치에 밝아 항상 주판을 가지고 다니며 병사의 수를 세거나 금전 출납, 곡물을 계량할 때도 주판을 튕겼다. 그랬기에 토시이에는,
 “돈이 많으면 남에게도 세상에게도 겁먹을 일이 없지만, 가난해지면 세상이 무서운 법이다”
 고 말했다고 한다.

 1598년 8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豐臣 秀吉]가 죽었다. 정치와 어린 히데요리[秀頼]의 안전은 오대로(五大老)[각주:16], 오봉행(五奉行)[각주:17]의 손에 맡겨지게 되어, 토시이에는 주로 히데요리의 양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대로의 필두인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여러 다이묘우들과 사돈관계를 맺으려 하는 등 히데요시의 유언을 어기기 시작하기에 이르자, 토시이에는 긴박한 정치의 장에 병든 몸을 이끌고 나가게 된다.

 이에야스를 가장 적대시하는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오봉행이었다. 그리고 이 미츠나리는 무공파(武功派)라 일컬어지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의 격한 증오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이리 되자 천하는 이에야스-무공파 장수들과 이시다 등 반 이에야스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에야스의 다음가는 실력자 마에다 토시이에는 미츠나리 등과 함께 이에야스에게 힐문장을 보냈다. 이에 대해 이에야스는 변명이라고도 할 수 없는 답변으로 응대하였다. 오오사카의 토시이에와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간에 불온한 공기가 흘렀다.
 이 사태에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각주:18]와 토시이에에게 은혜를 입은 카토우 키요마사,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 등 여러 장수들이 열심히 양자간의 사이를 중재하여 겨우 화해하였다고 한다.
 그때 토시이에는 이미 병상이 깊어 마에다 가문의 의지는 적자 토시나가가 결정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인망이 두터웠던 토시이에였기에 여러 장수들도 중재에 힘썼던 것이며, 이에야스 역시 예부터 알고 지낸 그런 토시이에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시이에는 죽었다.
 그 임종의 자리에서 토시이에는 히데요리의 장래를 걱정하며,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이빨을 간 뒤 베갯머리에 있던 ‘신도우고 쿠니유키[新藤吾 国行]’의 작은 칼[脇差]을 뽑지도 못해 칼집 채 가슴에 누르고는 무언가 크게 중얼거린 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각주:19]

마에다 도시이에[前田 利家]
1583년
오와리[尾張] 출신. 통칭 이누치요[犬千代]. 오다 가문[織田家]를 섬겼고, 형 토시히사[利久]를 대신하여 본가를 이었다[각주:20].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공적을 세워 에치젠[越前] 후츄우 성[府中城]의 성주가 되었고[각주:21], 이어서 노토[能登] 나나오 성[七尾城]의 성주.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후 히데요시의 휘하가 되어 카가[加賀] 오야마 성[尾山城][각주:22] 성주가 된다. 1585년 하시바 치쿠젠노카미[羽柴 筑前守][각주:23]의 칭호를 하사 받았고, 1590년에는 토요토미 성[豊臣姓]을 하사 받았다. 히데요시 죽은 지 8개월 후인 1599년 죽었다. 62세.[각주:24]

  1. 1570~1573년. [본문으로]
  2. 1573~1592년 [본문으로]
  3. 봉록은 50관. [본문으로]
  4. 오와리[尾張]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이며 키요스[清須]의 성주인 오다 노부토모[織田 信友]와의 카야즈 전투[萱津の戦い]. [본문으로]
  5. 오와리 통일전에 참가하며 봉록은 100관으로 증가. [본문으로]
  6. 토시이에의 통칭이 마타사에몬[又左衛門]이었기에. [본문으로]
  7. 다이묘우[大名] 곁에서 잡무를 맡거나 다도[茶道]에 관련된 일을 하던 스님. [본문으로]
  8. 일본 시대극을 자주 보시는 분이라면, 주인공이 도망치는 적이나 멀리 떨어진 상대에게 표창 대신 젓가락 비슷한 것을 던지는 장면을 보셨을 것이다. 그것이 코우가이[笄]. 이것으로 머리를 긁거나 머리를 다듬기도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政]가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10. 이런 행위를 '진가리[陣借り]'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11. 복귀하면서 얻은 봉록 300관. [본문으로]
  12. 토시이에의 4째 딸. 나중에 오대로 중 한 명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에게 시집간다. [본문으로]
  13. 도망치던 시바타 카츠이에는 토시이에의 후츄우 성[府中城]에 들러, 무단 퇴각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오랜 기간 자신을 잘 도와 주웠다는 것에 감사한 뒤 히데요시에게 투항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4. 여기에는 토시이에의 2남 토시마사[利政]의 부인이 우지사토의 딸인 점이 컸을 듯. 즉 서로 사돈지간. [본문으로]
  15. 596년 9월 5일 킨키[近畿]에 지진이 일어나 후시미[伏見]가 혼란에 빠졌을 때 키요마사는 근신의 몸임에도 군사들을 이끌고 후시미 성[伏見城]에 가 히데요시를 수비하였기에 붙은 이명. [본문으로]
  16. 이 당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7. 주로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를 이름. [본문으로]
  18.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代]는 타다오키의 적자 타다타카[忠隆]의 부인. 즉 토시이에와 타다오키는 사돈지간. [본문으로]
  19. 일설에는 복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신도우고 쿠니유키의 작은 칼로 스스로 를 갈라 죽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0. 토시이에는 4남이어서 원래 자격은 없으나, 1569년 토시히사가 병약해서 공적이 없다는 이유로 토시이에가 당주가 되도록 명령. [본문으로]
  21. 나가시노의 공적보다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감시역으로 되었다고 보아야 할 듯. [본문으로]
  22. 후에 카나자와 성[金沢城]으로 이름을 바꾼다. [본문으로]
  23. 히데요시가 한참 동안 쓰던 성과 관직명. [본문으로]
  24. 가보나 계보도에는 62세라고 하나, [케타신사 문서[気多神社文書]]나 [토시이에 야화[利家夜話]] 등에서 63세로 하는 사료도 많아 63세일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노부나가 가신단 연구가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 克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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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04.12 06: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고쿠시대에서 손꼽히는 재능을 지녔던 오다계열의 필두가신들 중에서 센고쿠 시대의 끝자락까지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란 점에서 도시이에란 인물의 역량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니와나 삿사는 히데요시 손에 의해 숙청되었고 시바타, 다키가와, 아케치들은 히데요시에게 칼을 겨누는걸 택하고 패망했으니 말이죠. 예외라면 장렬히 죽으면서 아들 데루마사와 가문을 지킨 이케다 쇼뉴 정도일까요.

    결과론적으론 가모 히데유키를 아이즈에 놔두게 되면서 가모 가문이 쇠퇴하게 된 셈이네요. 차라리 가모 가문을 아이즈보다 중요도가 덜한 곳으로 전봉했으면 어떻게 되었을런지. 전국에 이러한 우호 가문들을 만들어놓은 것이 에도가 훗날에도 가가를 쉽게 건드리지 못하고 동맹의 울타리에 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12 0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1588년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가 쥬라쿠다이[聚楽第]에 행재하여 다이묘우들이 충성을 맹세하는 문서를 쓸 때, 노부나가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히데요시 일족과 이에야스, 모토나리 등과 함께 오다 가문 계열 무장 중에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것만 보아선 히데요시의 신뢰와 더불어 역량도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시바타, 아케치, 타키가와 등은 아무래도 히데요시 보다 서열이 위거나 동등하다 보니 천하를 노리는 히데요시로서는 멸망시킬 수 밖에 없었던 듯 합니다.

      가모우 가문[蒲生家] 자체가 우지사토[氏郷]를 중심으로 급격히 커져 신규 가신들을 다수 받아들이다 보니 가모우 가문 자체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했던 듯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후계자라고 하여도 히데유키에 대한 충성심이 떨어졌나 봅니다. 이건 아무래도 일찍 죽은 잘못이 있는 우지사토 때문인 듯 합니다.

      좀 벗어난 이야기 입니다만, 에도 시대 때 혼슈우[本州]에 있는 마에다 가문을 시코쿠[四国]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습죠. 막부도 나름 마에다 가문에는 신경을 썼다고 할 수 있습죠.

      마에다 가문도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자식 혼다 마사시게[本多 政重]를 자신의 가문으로 초빙하여, 가신으로서는 파격인 7만석을 안겨주며 막부와의 절충에 힘쓸 정도로 에도시대 초기에는 카가 번[加賀藩]과 막부는 나름 팽팽한 긴장관계에 있었던 듯 합니다.

  2. 본다충승 2011.06.03 14: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즈카타케에서의 무단 이탈 + 딸 2명중 한명은 히데요시의 양녀로, 또다른 한명은 히데요시의 측실로... 갠적으로 이 두가지로 인해 평소 좋게 생각했던 마타자의 환상이 팍 깨져 버렸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6.15 1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즈가타케 전투 때 토시이에의 마에다군은 마지막까지 후군에서 달려드는 히데요시를 막았고, 토시이에는 직접 창을 쥐고 싸웠다고 하는 기록도 있더군요.

      히데요시도 니와 나가히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토시이에를 살린 것은 우에스기 가문에 대한 방파제로 남긴 것으로 에치젠에 있는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임. 토시이에에게 마음을 열지 마시길'
      이라고 보낼 정도로 시즈가타케 전투 직후에는 토시이에와 히데요시가 알려진 만큼 친하진 않았던 것 같더군요.

      더더군다나 딸 2명 중 하나(우키타 히데이에에게 시집 간 고우히메[豪姫])는 태어나자 마자 간 양녀이고, 마아히메[摩阿姫=히데요시의 측실 카가도노[加賀殿]]는 원래 시바타 카츠이에에게 바쳐진 인질을 히데요시가 인수했던 것이라, 당시 인식으로 보아서 토시이에를 욕하기는 좀 부족하지 않을지...

  3. 지나다가 오타지적 2011.11.06 04: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바나가의 눈에 띄는 곳에서... → 노부나가의 눈에 띄는 곳에서... / 4문단 6번째 줄

  4. 한남충 2018.06.24 03: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
    아무리 의리가있고 인덕이 있어도
    시바타와의 의리를 지키기위해 수많은 식솔들과 가신들의 목숨을 뒤바꾸기는 힘들었을겁니다.
    저는 토시이에의 상황이 이해가는군요..
    참 의외인게 이에야스가 히데타다의 딸 타마히메를 마에다가문에 시집보낸것인데..
    토시이에 사후라 카가정벌까지 결정할뻔했던걸 혼인동맹을 맺어주며 포용한것이..
    포상할 땅을 엄청 필요로해서 카가를 먹기는 그리 힘들지는 않았을듯한데..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는 소위 전투의 프로페셔널로 센고쿠[戦国]의 세상을 유랑한 사나이이다. 7번 주군을 바꾸지 않으면 한 사람의 무장이라는 말할 수 없다 – 고 일컬어지는 센고쿠의 풍조가 바로 그의 인생이었다.

 미노[美濃]의 사이토우 타츠오키[斎藤 竜興]를 시작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각주:1], 하시바 히데츠구[羽柴 秀次][각주:2],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주군을 바꾸가며 전전하였다. 이런 식이었기에 사이조우의 행동은 언제나 조직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하시바 히데츠구[羽柴 秀次]를 섬기고 있을 즈음의 일이다.
 1584년
히데요시[秀吉]와 이에야스[家康]간에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가 일어나, 사이조우는 하시바 히데츠구의 선봉을 맡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선봉이었던 사이조우는 갑자기 최전선에서 철퇴를 하기 시작하여 히데츠구를 화나게 만들었다. 사이조우는,
 “오늘은 적이 대군이고 더구나 강력하기에 여기서는 일단 물러나야만 합니다. 무리하게 공격했다가는 대패로 이어질 겁니다.”
 하고 히데츠구를 설득하였지만 전투를 모르는 히데츠구는 펄펄 날뛰며 사이조우의 진언을 물리친 후 오로지 군사를 돌진시켰다. 사이조우도 또한 히데츠구의 무식과 무모함에 화가 나,
 “에이 좆병진!”
 라는 말을 내뱉고는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재빨리 철퇴했다고 한다.

 사이조우의 말대로 히데츠구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여 히데츠구 자신도 겨우 목숨만 부지해서는 전장에서 도망치는 꼴이 되었다. 더구나 도망치던 도중 사이조우를 발견하고는 사이조우의 말을 빌려달라고 부탁하였지만, 사이조우는 단 한마디, “싫습니다.”라고 말하며 말에 채찍질하고는 도망가 버렸다.

 그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섬기고 있을 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 사이조우는 ‘조릿대의 사이조우[笹の才蔵"]’라는 이명(異名)을 얻는 기발한 활약을 하게 된다.
 이야기는 여러 버전이 전해지는데 여기서는 그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동서 양군의 결전이 시작되기 전날 미노[美濃] 세키가하라 근방 아카사카[赤坂]에 체진 중일 때의 일이다. 사이조우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돌격하지 말라는 말을 어기고 뛰쳐나가 서군의 용사 유하라 겐고로[湯原 源五郎]를 죽이고 와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질책을 받아 근신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그대로 얌전히 있을 사이조우가 아니었다.

 그 뒤 아카사카에 도착한 이에야스가 장수들을 소집하여 군의(軍議)를 연 뒤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지금까지 취한 목들을 살펴 봅시다”
 라고 말하였기에 각 부대가 취한 서군 무사들의 목을 검사하게 되었다.
 사이조우가 가져 온 유하라의 목 차례가 되자 이에야스의 옆에 있던 마사노리는,
 “너는 이 단 하나의 목을 취하기 위해서 군령을 어긴 어리석은 놈이다”
 라고 사이조우를 질타하였다. 그러자 사이조우는 다음과 같이 변명을 하였다.
 “사실 근신중인 몸이기에 매일 슬며시 나가서 적과 싸웠고 그럴 때마다 투구를 쓴 목[兜首][각주:3]을 베었습니다. 그러나 근신 중이기에 그 목을 가지고 올 수가 없기에 그런 목들에는 콧구멍이나 귓구멍에 조릿대[笹]를 끼어 넣은 채 버리고 왔습니다. 그런 것들은 아마 젊은 무사들이 주워와 자신의 공적으로 하였을 거라 사료됩니다.”
 사이조우의 이런 말투에 마사노리는 열화와 같이 화를 내었지만, 어쨌든 사이조우의 말대로 조사해 보자 정말 조릿대가 꽂힌 목이 17개나 되었다고 한다. 이것에는 이에야스도 놀라,
 “오늘부터 ‘조릿대의 사이조우[笹の才蔵]’라는 이름을 쓰라”
 며 이명(異名)을 하사하여 이때부터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사이조우의 무예를 알려주는 일화로 장도[長太刀] 기술이 있다.
 젊었을 때부터 장도[長太刀]를 허리에 차고 다니며 즐겨 사용하였지만 늙자 체력적인 부담이 있었던 듯 이 장도[長太刀]를 종자(從者)에게 들게 하고 다녔는데, 어느 무사[각주:4]가 이것을 보고 놀리며,
 “이제는 칼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늙으셨구랴. 그 정도라면 실력도 뻔하겠구먼”
 라고 말하자 사이조우는,
 “이거 참 부끄럽소. 하지만 실력이라면 그쪽이 보는 것만큼 늙진 않았소. 내 함 보여드리지”
 라며 재빨리 장도를 뽑아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 무사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사이조우는 젊었을 때부터 아타고 대권현[愛宕大権現][각주:5]을 믿었기에 항상 아타고의 신통력이 영효(靈效)로운 날[縁日]에 자신은 죽을 거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대로 1613년 음력 6월 24일[각주:6]에 몸을 깨끗이 하고, 갑주로 몸을 감싼 후 미첨도[薙刀]를 든 채 의자에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60세라고 한다.

가니 사이조[可児 才蔵]
미노[美濃] 혹은
오와리[尾張] 출신이라고 한다. 호우조우인 인에이[宝蔵院 胤栄]에게 창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1. 노부나가[信長]의 셋째 아들. [본문으로]
  2. 살생관백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본문으로]
  3. 아시가루[足軽]나 무가봉공인(武家奉公人)은 머리 방어구로 주로 삿갓[陣笠]였지만, 무사 계급이 되면 투쿠[兜]를 썼기에 투구를 쓴 목은 더 높은 전공의 대상이 되었다. [본문으로]
  4. 카헤에[嘉兵衛]라는 후쿠시마 일족의 인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5. 불의 신. [본문으로]
  6. 양력 8월 10일. 여담으로 블로그 주인장의 생일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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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1.04.09 2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혁신에도 나오시는 분이군요. 어린 마음에 '17명밖에 못 베었는데 무력이 90대야..'라는 진삼국무쌍적인 사고로 보았는데 참 이런 일화가 있을줄이라고는...;;...

    여담이지만 생신이 저랑 가까우시군요ㅇㅇ.. 학생신분으론 8월 생일이니 좀 어정쩡한 면이 있더군요. 다 방학때라 이것 참..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10 01: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신장의 야망 시리즈에는 등장이 좀 늦은 편이었습죠.

      이 무장은 전략, 전술 레벨에서 노는 무장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히는 곳에서 뛰는 무사더군요. 정말 1:1의 싸움에서라면 피하고 싶은 인물입니다.

      그래서 규피님의 생신을 기억하고 있습죠. ^^
      여담으로 저도 학생 때는 그게 참 아쉬웠어요. 학기 중이라면 선생에 따라서는 공책이나 연필을 받을 수 있었는데 방학 한 가운데다 보니..

  2. 효도롱 2012.04.26 06: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일어 원문을 좀 보고싶은데 어디가서 찾을 수 있을까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4.26 09: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戦国武将100話』란 책은 1978년에 발간된 책으로 저도 일본에 있을 때 헌책방에서 구한지라, 국내에 이 책을 가진 다른 사람이 있을 거 같지는 않군요.

      혹시 어느 부분의 일본어 원문이 궁금하신가요?
      거기에 이 책은 일화 중심의 책이다 보니 사실적으로 다른 곳이 많은 책입니다. 굳이 일본어 원문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후리타 오리베[古田 織部]의 이름은 센고쿠 무장[戦国 武将]이라기 보다는 다인(茶人), 도예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오리베 애호[織部好み]’라 불리는 기발한 그릇 모양과 특색있는 문양을 가진 도기(陶器)를 창시하였고, 그것이 지금 ‘오리베야키[織部焼]’라는 이름으로 명물이 되어 있다.

 오리베는 센노 리큐우[千 利休]에게 사사 받아 후세에 리큐우 칠철[利休七哲][각주:1]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인 다인 다이묘우[茶人大名]이다. 그러한 오리베였기에 특별한 무공은 없었다. 다도를 좋아했던 히데요시[秀吉]에게 총애를 받아 히데요시의 말상대인 ‘오토키슈우[御咄衆]’까지 출세하였다.

 스승으로 섬긴 리큐우가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자살을 언도 받은 뒤 오리베의 명성은 한층 더 높아져, 오리베의 저택에는 다이묘우나 다인(茶人)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아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한다. 오리베가 감정을 하고 보증서를 하나 써주면 바로 지금까지 부엌 한 구석에 놓여있던 투박한 사발[茶碗]도 곧바로 천금의 가격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고 곧이어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자 오리베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속하여,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통하고 있던 히타치[常陸]의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를 설득하여 서군에 참가하려던 요시노부를 중립에 서게 만들었고, 이 공적으로 인해 이에야스에게 1만석을 하사 받아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각주:2] 거기에 더해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다도사범이라는 지위를 얻어 2대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에게 다도를 가르치는 몸이 되었다.

 이때까지 오리베의 인생은 순풍에 돛이 단 듯했다. 그러나 곧이어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시작된다. 겨울 전투[大阪冬の陣} 때는 별일 없었다. 오히려 웃긴 일화조차 전해진다.

 어느 날 오리베는 살기등등한 진중 속에서 다도의 벗인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의 본진에 방문하였다.
 참고로 사타케 씨[佐竹氏]는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의 행동으로 이에야스의 분노를 사, 전후(戰後) 아키타[秋田]로 이봉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에야스의 속한 무장으로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공격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요시노부는 최전선에 설치된 시요리[仕寄 – 대나무 묶음 등을 연달아 이은 총탄 방어용 방패와 같은 것] 안에 들어가 있었다. 오리베는 그 안에 기어들어가기 위해서 투구를 벗고 들어갔고, 잠시 동안 요시노부와 쌓인 이야기를 한 뒤 차를 다리기 시작했다. 총탄이 오가는 와중에 지금으로 보면 실로 재수없는 행동이었다. 거기에 이 시요리[仕寄]의 대나무 묶음 속에 작은 차주걱[茶杓] 될 만한 좋은 대나무가 없나 하고 몸을 숙여가며 찾기 시작한 것이다. ‘싸움에 쓰이는 도구라도 다도에 쓰인다’는 오리베 류[織部流] 다도의 특색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좁은 시요리[仕寄]에서 몸을 움직였기에 오리베의 머리[キンカ頭]가 시요리[仕寄] 밖으로 삐져나와  태양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것이 성 방어군의 눈에 띄었다. 이 빛을 향해서 철포가 불을 뿜었다. 그 중 한발이 오리베의 머리를 빗맞혔다. 오리베는 ‘꺄아~”라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지고 옆에 놓아두었던 찻잔을 닦는 수건[茶巾]과 받침으로 쓰는 헝겊[ふくさ]로 흐르는 피를 막았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사타케의 군사들은 ‘다도인에 걸맞은 붕대구만’하고 낄낄대며 웃었다고 한다.

 이 다음 해인 1615년 여름 전투[大阪夏の陣] 직후 오리베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 전투도 마지막이 다가왔을 무렵, 오오사카 성 안에서 쿄우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각주:3]에게 밀고하는 자가 있었다. 그 사람의 말에 따르면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의 가신(家臣) 키무라 무네요시[木村 宗喜]라는 자가 미리 오오사카 측과 의논하여 이에야스[家康], 히데타다[秀忠]가 오오사카를 향해서 후시미[伏見]를 출발하는 것에 맞추어 쿄우토[京都]에서 거병하고, 오오사카 측과 호응하여 토쿠가와 군(軍)을 협격하려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일당의 체포가 시작되어 오리베도 역시 잡히는 몸이 되었고, 오오사카 낙성 후 할복이 언도되었다. 오리베가 정말 모반을 꾸몄는지, 만약 정말로 그러했다면 무엇이 원인인지는 아직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다.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
1544년 미노[美濃]에서 태어났다고 한다[각주:4]. 이름은 시게나리 혹은 시게테루[重然], 통칭은 사스케[左助]. 나카카와 키요히데[中川 清秀]의 매제로, 처음엔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의 휘하 무장[与力]이였고, 후에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거쳐.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뒤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긴다. ‘다도백개조(茶道百箇条)’를 저술하였고,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 혼아미 코우에츠[本阿弥 光悦], 코보리 엔슈우[小堀 遠州][각주:5]의 다도 스승이었다. 1615년 6월 아들 야마시로노카미 시게히로[山城守 重広]와 함께 자해. 72세.

  1.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 利貞]. [본문으로]
  2. 이미 이전에 히데요시에게 야마시로[山城] 니시가오카[西ヶ岡]에 3만5천 석을 하사 받아 다이묘우[大名]인 상태였다. 여담으로 '만화 헤우게모노[へうげもの]'에서 히데요시는 오리베에게 니시가오카 3만 5척석을 주며 "쿄우[京] 주변의 3만5천석은 중한 것이네"라는 대사를 한다.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의 일화 - 쿄우토 주변이라면 영지가 적어도천하를 바라 볼 수 있었을 것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쿄우토 주변은 적은 영지라도 무게감 있는 자리였다. [본문으로]
  3. 쿄우토 행정, 조정의 수호와 감시, 키나이[畿内]와 하리마[播磨]의 소송, 쿄우토, 나라[奈良], 후시미[伏見]의 각 봉행(奉行)를 통괄하던 직책. [본문으로]
  4. 노부나가 가신단 연구자인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 克広]씨는 '토키츠구 경기[言継卿記]'에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직할군에 속해 있다는 기록과 나카가와 키요히데의 4촌이라는 기록에 따라 킨키[近畿] 출신이 아닌가 - 라고 추론하고 있다. [본문으로]
  5. 근대 다도(茶道)를 집성시킨 인물. 또한 그 역시 1만석의 다이묘우[大名]였다. 3대 쇼우군 이에미츠[家光]의 다도사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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