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

1633 1 25일 병사(病死) 64


1570 ~ 1633.

히타치[常陸] 오오타[太田]성주. 아키타 번[秋田藩]의 번조(藩祖).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무사시[武蔵]로 출진. 부친인 요시시게[義重]의 활약에 힘입어 히타치[常陸]를 통일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는 움직이지 않고 중립을 선택했기 때문에 데와[出羽] 아키타[秋田]로 전봉(転封)되었다.










아키타 전봉(転封)의 이유


 사타케 가문[佐竹家]이 히타치 미토[水戶] 54만석에서 데와[出羽] 아키타[秋田] 20만석으로 전봉된 것은 1602 7 27일이었다.

 이에야스[家康]에게서 온 명령서에는 데와[出羽]의 아키타[秋田]와 센키타[仙北]로 가라는 말만 있을 뿐 석고(石高)가 명시되지 않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요시노부[義宣]를 시작으로 가신들은 깊은 실망에 빠졌다. 이에야스[家康]가 내린 징벌 좌천 인사였던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요시노부는 서군 총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의 깊은 친분으로 마음이 흔들렸기에 요시노부를 의심한 이에야스에게 칸토우[関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진 것이었다.


 미츠나리와의 깊은 관계라 함은, 요시노부의 맹우였던 우츠노미야 쿠니츠나[宇都宮 国綱]카이에키[改易[각주:1]]에 휩쓸려 사타케 가문이 처분받을 뻔한 때에 미츠나리 덕분에 위험에서 피할 수 있었으며, 반대로 요시노부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토요토미[豊臣]의 여러 다이묘우[大名] 간의 내분으로 인해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淸正] 7명의 무장이 미츠나리를 습격했을 때에는 요시노부가 구출했던 때도 있었다.


역전의 발상


 히타치 54만석은 히데요시의 주인장(朱印狀)에 의한 것이지만 그 중에 요시노부의 영지 20만석. 거기에 은거한 부친 요시시게[義重]에게 5만석, 사타케 3가의 하나인 히가시 요시히사[東 義久]에게 6만석, 그 외는 요리키 다이묘우[与力 大名][각주:2]들의 영지 등으로 인해 '나라 안에 나라'가 있는 상태였다.


 요시노부는 아키타 전봉을 이러 변칙 체제의 타파와 자신의 권력기반을 확립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지금까지의 영지는 전부 무시하고 아키타에서 새로 영지를 분배하였고 그것을 봉급으로 했다. 요시히사의 아들 요시카타[義賢]에게는 10분의 1 6000석만을 지급했다. 가신중에서도 200석 이상은 불과 25명 이었다. 이것이 여태까지의 가격(家格[각주:3]), 관례에 구속 당하지 않는 새로운 정략의 실시를 가능케 하여 새로운 인재 등용도 가능하게 했다.


 신천지에서 우선 영내(領內)의 안정에 힘써 쿠보타 성[久保田城] 축성과 안도우 씨[安東氏], 아키타 씨[秋田氏]에게서 이어 받은 성 밑 마을[城下町]의 정비에 힘을 쏟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농지를 개척하고 광산 개발에 힘썼다.


 한편 막부가 일으킨 오오사카 겨울 전투와 여름 전투[大坂の陣]의 군역(軍役)은 물론 계속되는 막부의 요청에 의한 토목공사에도 나서서 응했다.

 요시노부의 아키타 번에 30년 간 부과되어진 주요한 토목 공사에는 에도 성[江戶城] 수리를 시작으로 우치사쿠라다[內桜田]의 칸다바시 문[神田橋門]의 수리, 소토사쿠라다[外桜田] 코우지마치[麹町]의 토라 문[虎門]과 이어지는 담 공사 등 도합 5.

 군역(軍役)은 오오사카의 진[大坂の陣]외에 유리[由利]()의 인수, 에치젠[越前] 마츠다이라 타다나오[松平 忠直]의 카이에키[改易][각주:4]에 동원 등 합계 4, 쇼우군[将軍]이 쿄우토[京都]에 갈 때 같이 간 것이 4, 그 외에 19번의 참근(参勤[각주:5])이 있었다. 한 시도 맘을 놓을 수 없는 봉공(奉公)의 연속이었다.


 거기에 막부에게 쓸데없는 의심 받을까 하여 성에는 천수각도 담도 쌓지 않는 철저함을 보였다. 적이 공격해 오면 어떻게 하겠냐는 부친 요시시게[義重]의 물음에, "나가서 공격할 뿐입니다. 이런 작은 성에서 농성해서는 운도 트일 리 없습니다."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중앙집권화에 따른 정치 체제의 변화와 전술의 진보에 따라 축성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다.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하에서 이에야스[家康]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로쿠다이쇼우(六大将[각주:6])]로 평가되어 온 요시노부가 이렇게까지 막부에 대해 신경을 썼기에, 의심이 많은 이에야스도 요시노부를 인정할 수 밖에 없어 "이 세상에 사타케 요시노부 만큼 정직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칭찬하면서도, "그래도 너무 정직해서도 곤란해"하며 충고할 정도였다.


병법가, 다도가(茶道家)로서의 일면


 요시노부는 화약의 조제법을 연구해서 책을 쓸 정도의 병법가였다. 한 편 취미인 차를 즐기는 것도 달인의 영역에 달했었다.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따라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재진 중일 때 영지로 보낸 편지에 자기 스스로 칸토우[関東] 제일의 다도가라고 할 정도였다. 요시노부는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에게 직접 전수받은 다도를 말년에 즐겼다.


 요시노부는 16331 25. 에도의 칸다[神田]의 저택에서 죽었다. 향년은 64.

 [정월 7일부터 산기(疝氣)를 앓으셨다.] [羽陰史略]에 적혀 있다. 산기라는 것은 대장 또는 소장 혹은 허리부분이 아파지는 병이라고 한다. 죽음을 앞두고 유언으로 순사(殉死[각주:7])를 금했다. 막부가 순사 금지령을 발포하기 30년 전이므로 영단이라 할 수 있다.


 17살에 가독을 이은 요시노부는 24살 때 일찍 죽은 정실과 나중에 맞아 들인 부인에게서도 아들을 볼 수 없었다. 때문에 동생인 이와키 사다타카[岩城 貞隆]의 첫째 아들을 양자로 받아들여 요시타카[義隆]로 이름 지어 세자로 삼았다. 아키타 6() 20만석의 영지가 확정된 것은 요시노부가 죽은 다음해 였다.

  1.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킴. [본문으로]
  2. 배하(配下)의 다이묘우[大名]. 즉 요시노부가 명령권을 가진 다이묘우. [본문으로]
  3. 가문의 등급. [본문으로]
  4. 이에야스[家康]의 2남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의 장남.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발군의 활약을 펼쳤으나 은상이 적은 것(차항아리[茶壷] 한 개)에 불만을 표하고 참근교대도 안 하였기에 카이에키. [본문으로]
  5. 1년 터울로 에도와 자기 영내를 오고 가는 것. [본문으로]
  6. 여섯 개의 큰 가문. 토쿠가와, 마에다[前田], 모우리[毛利], 시마즈[島津], 우에스기[上杉]와 더불어. [본문으로]
  7. 주인이 죽으면 자살하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