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

1602 10 18일 병사(病死) 21

1582~1602.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1]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 家定]의 아들. 처음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이어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승리할 수 있도록 서군을 배신하여 빈고[備後], 빗츄우[備中], 미마사카[美作] 50만석 다이묘우[大名]가 되지만 곧 젊은 나이에 죽었다.









역사를 바꾼 선택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이름을 단번에 알린 것은 다름 아닌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 하지만 히데아키는 그 2년 뒤인 21살의 나이에 죽어버렸다. 따라서 히데아키에게 있어서 말년은 그 2년간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전날 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서로 자기 진영에 끌어들이기 위한 모략 싸움이 활발히 펼쳐졌다. 하지만 결전 당일인 9 15, 히데아키는 고민 끝에 아군인 서군을 배반하고 동군에 내응을 결심하여 머물고 있던 마츠오 산[松尾山]을 내려와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진영을 급습한 것이다. 히데아키의 배반에 당황한 서군의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은 연달아 무너져 결국 서군이 괴멸된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 전투로 인해서 동군의 총대장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패권(覇權)이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직접적인 승리의 요인은 히데아키의 결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10 15일 논공행상에서 히데아키는 큐우슈우[九州]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에서 서군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영지였던 비젠[備前], 미마사카 57만석으로 가증(加增) 이봉(移封)되어 오카야마 성[岡山城] 거성으로 삼았다.


 하지만 비젠의 오카야마 성으로 옮겼을 즈음부터 히데아키의 운명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는 예전보다 더 술을 즐기기 시작하였고 그것도 날이 갈수록 더 마시게 되어, 쿄우토[京都]에서 죽은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를 공양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던 양어머니 키타노만도코로를 걱정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히데아키는 1582년 키타노만도코로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나 3살 때 히데요시 부부의 양자가 되어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후계자로 길러졌다.

 히데요시 부부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히데아키는 당대 제일의 문화인으로 알려진 쇼우고인 도우쵸우[聖護院 道澄]에게 글자를 배우거나 와카[和歌] 그리고 케마리[蹴鞠][각주:2]를 할 때의 손 움직임, 축이 되는 발의 움직임 등도 단번에 습득할 정도로 똑똑한 소년이었기에 기대를 받았다고도 한다.


 하지만 1593년에 히데요시에게 자신의 피를 이은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히데아키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되었다. 이것은 히데아키가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 후보에서 제외된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히데아키를 친족으로 중히 여겨 1597년 조선 재출병[각주:3] 때에는 총대장으로 파견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코바야카와 가문에 양자로 보낸 히데아키를 불쌍히 여긴 히데요시는 살아 생전에 히데아키가 바라는 것이 있으면 내가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어떠한 것이건 들어주길 바란다고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보낸 히데아키 자필(自筆) 돈 차용증.


매사냥 직후의 급사(急死)


 1602년 초두에 히데아키는 이름을 히데아키라[秀詮]로 개명하였다.

 이는 전년에 일어난 - 히데아키에게 간언(諫言)한 스기하라 키이노카미 시게마사[杉原 紀伊守 重政]를 죽인 사건이나, 숙노(宿老)인 이나바 마사나리[稲葉 正成][각주:4]를 쫓아 낸 사건 등 가문 내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새롭게 나아가겠다는 의미에서 개명했다고 생각한다.


 그 즈음 히데아키는 쿄우토[京都]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던 고모 겸 양어머니인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고 어떤 때는 황금 50(500)이라는 거금을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빌리기도 했다. 사용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여러 사건이 일어나는 등 혼란 속에서 술에 빠져 평판이 좋지 못한 히데아키를 키타노만도코로는 죽은 히데요시와의 약속을 지키면서 마지막까지 뒤를 돌봐준 것이라 생각된다.


 히데아키가 죽은 것은 키타노만도코로에게서 거금을 빌린 불과 반년 후인 10 18일. 향년 21살이었다.

 사인(死因)에는 여러 설이 있어 확실치 않지만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 동서 양군의 내응 공작에 마지막까지 고민한 끝에 결국 아군을 배신한 행위를 부끄러워하여 양심의 가책과 주위의 비난에 견딜 수 없어 미쳐 죽었다고도 한다.


 죽기 직전인 10 15일.

 매사냥을 하러 나갔던 히데아키는 해가 저물어서 성으로 돌아왔지만 기분이 좋지 않다고 말한 채 눕자마자 인사불성이 되었다. 다음 날에는 숨이 중간에 멈추기도 하여 놀란 측근들이 쿄우토[京都]에 파발을 보내기도 했다. 17일에 잠깐 눈을 떴지만 다음 날 새벽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히데아키가 죽기 3일 전인 15일에 형인 키노시타 토시사다[木下 俊定]도 급사하였기에 그 죽음에는 이상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1. 히데요시의 정실(正室) 네네[寧々]를 말함. [본문으로]
  2. 과거 일본에서 행해진 축구의 리프팅과 같은 경기. 여러 명이서 사슴 가죽으로 된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발등으로 서로 주고 받는 경기. [본문으로]
  3. 정유재란을 이름. [본문으로]
  4. 아직 이 때의 성은 하야시[林]였다. 코바야카와 가문을 떠난 후 미노[美濃] 이나바 시게미치[稲葉 重通 – 이나바 잇테츠[一鉄]의 서장자(庶長子)]의 사위가 되어 성을 ‘이나바’로 바꾸었다. 여담으로 이때 결혼한 것이 후에 카스가노츠보네[春日局 – 3대 쇼우군[将軍] 이에미츠[家光]의 유모]이다. [본문으로]

혼간지 켄뇨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7. 6. 23. 23:16 Posted by 발해지랑

혼간지 겐뇨(本願寺 顕如)

1592 11 24일 병사 49

1543~1592.

쟁토진종(爭土[각주:1]) 혼간 사(本願)의 승() - 이하 혼간지로 통일 -. 11세 종주(宗主)가 되어 혼간지를 세습하였다. 이시야마(石山) 혼간지에서 물러나길 원하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충돌. 후에 키이(紀伊)() 사기노모리(鷺森)로 물러났다. 12세 쿄우뇨(教如)와 의절한 것이 후에 혼간사()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노부나가와의 10년전쟁


 [켄뇨(顕如)]는 법명(法名)으로 이미나([각주:2])는 코우사(光佐) 일반적으로는 [혼간지 켄뇨(本願寺 顕如)]라 불리고 있다. 혼간지 10세인 쇼우뇨(証如)의 첫째 아들로 13살에 제 11세가 되어 종주가 되었다.


 1559
년. 오오기마치(正親町) 텐노우(天皇)의 즉위 비용을 헌상하여 승정(僧正[각주:3])이 되어 몬제키(門跡[각주:4] )에 준하게 되었다. 뇨슌니(如春尼) - 그녀의 언니는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의 부인 와 결혼하여 쿄우뇨(教如)나 쥰뇨(准如) 등의 아이들을 얻었다.


 1570년. 오오사카(大坂) 이시야마에 있는 혼간지에서 퇴거(退去)를 요구하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든 이후 10년에 걸친 싸움에 도전하여 자주 노부나가를 고난에 빠뜨렸다. 켄뇨는 노부나가와 대립하는 동안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 아자이 나가마사(長政),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모우리 씨(毛利)와 동맹을 맺고 또한 각 지역의 문도(門徒)들을 동원하여 노부나가와 대결하였다. 그러나 타케다 신겐이나 아자이 나가마사 등의 죽음으로 인하여 동맹은 와해되었으며 각지의 문도 집단도 괴멸. 거기에 이시야마 혼간사()가 포위당하기에 이르르자 1580 3월에 오오기마치(正親町) 텐노우(天皇)의 칙명에 따라 노부나가와 화해하고 다음 달인 4월 키이(紀伊)의 사기노모리(鷺森)로 거처를 옮긴다.


 이때 철저항전을 주장하는 첫째 아들인 쿄우뇨와 대립하여 부자(父子) 관계를 의절했다. 이 의절이 중신이나 문도 사이의 대립을 낳아 후에 혼간지가 동서로 분열되는 원인이 되었다.


혼간지 재흥(再興)과 발병


 노부나가가 죽은 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켄뇨에게 접근하여 문도 집단의 회유(懷柔)를 꾀했다. 히데요시는 우선 켄뇨를 이즈미(和泉) 카이즈카(貝塚)로 옮긴 후 키이의 사이카(雑賀)()을 공략하여 혼간사지 세력이 강한 땅을 빼앗았다.


 이시야마 혼간사()가 있던 곳에 오오사카 성()을 쌓은 히데요시는 텐마(天満)에 절터를 주어 혼간지를 재흥시켰다. 켄뇨와 그의 부인인 뇨슌니는 히데요시나 키타만도코로(北政所[각주:5])에게 때때로 다회(茶會)에 초대받는 등 친교를 맺었다.
 텐마의 혼간사
() 예전과 같이 슈고(守護)의 힘이 미치지 않는 등
[각주:6]의 특권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히데요시 정권의 지배 아래 놓여졌다. 켄뇨도 히데요시 권력의 비호(庇護) 아래 들어가는 감으로써 혼간사()의 존립을 꾀하려 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종교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서 1591년에 혼간지를 쿄우토(京都)의 호리카와(堀川) 로쿠죠우(六条)로 옮겨가도록 명령했다. 1년 후 현재의 니시혼간지(西本願寺)의 땅에 건립되었다.


 그 동안 켄뇨는 자주 병에 걸려 아리마(有馬)의 온천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 병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절에 대한 사무를 보는데 지장은 없었던 듯하다.


혼간사(), 동서(東西)로 나뉘다.


 1592 11 20일.
 켄뇨는 새벽 수행을 끝내고
불전 청소를 끝낸 후에 갑자기 쓰러졌다. 본사(本寺) 이전에 따른 마음의 피로가 쌓였던 것일까? 병명은 [중풍]이었다.


 켄뇨와 친했던 쿠교우(公卿)인 야마시나 토키츠구(山科 言継)의 일기 [토키츠구 경기(言繼卿記)]에는,

11 20일. 몬제키[각주:7]. ()시에 큰 중풍에 걸리다. 즉시 여러 명의(名醫)를 불러 치료하게 했지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발병한지 4일 후인 24일. 명의들의 치료도 보람 없이 [()시에 죽다](言繼卿記)고 쓰여있는 것을 보면 점심 지나서 죽은 듯하다. 향년 49.


 12세 종주의 자리에는 장자(長子)인 쿄우뇨가 계승하지만 곧이어 뇨슌니가 '켄뇨는 셋째인 쥰뇨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양도장(讓渡狀)을 히데요시에게 제출함에 따라 사태는 급변하였다. 그 결과 히데요시의 판정에 따라 쿄우뇨는 은거의 몸이 되었고 17살인 쥰뇨가 혼간지의 법주 자리를 잇게 되었다.


 이 판정에 불만을 품은 쿄우뇨와 문도들은 세키가하라(ヶ原) 전투 후에 권력을 장악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접근하여 그 비호 아래서 카라스마루(烏丸) 로쿠죠우(六条)에 절(현재의 히가시혼간(東本願寺))를 건립하게 된다.


 켄뇨는 혼간사()의 분열을 우려하여 쿄우뇨와 화해했지만 이시야마 혼간사()의 퇴거를 둘러싼 싸움은 켄뇨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은 후에 교단을 둘로 나뉘는 대립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기노모리(鷺森)에 있는 니시혼간사(西本願)사(寺)별원(別院)[和歌山市]>
  1. 한 번이라도 진실된 마음으로 염불을 외우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여,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던 하층민이나 농민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함. [본문으로]
  2. 실제 이름. 그러나 실제 이름은 영적인 것이라 하여 생전에는 부르지 않았다. [본문으로]
  3. 일본 승위승관(僧位僧官)의 관리 중 하나. [본문으로]
  4. 황족 혹은 귀족이 출가한 절 또는 주지를 말한다. [본문으로]
  5. 히데요시의 정부인. [본문으로]
  6. 즉 세금이나 부역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었다. 수호불입(守護不入)이라 한다. [본문으로]
  7. 켄뇨를 이름. 이 당시 몬제키에 준하는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에 이 때부터 몬제키는 혼간사의 주지를 이르는 속칭이기도 했다. [본문으로]

쓰쓰이 준케이[筒井 順慶]

1548 8 11일 병사 35

1549~1584.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 성주. 부친인 쥰쇼우[順昭]가 죽자 2살에 가독을 이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대립하자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도와 마츠나가를 멸망시켜 야마토를 영유(領有). 야마자키 전투[山崎 合戦]에서는 미츠히데를 버리고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 섰다.







승의(僧衣)의 무장


 츠츠이 쥰케이의 부친인 쥰쇼우는 나라[奈良]의 코우후쿠 사[興福寺]의 승병이었다. 쥰쇼우는 소에시모 군[添下郡]의 츠츠이 성[筒井城]을 본거지로 삼고, 야마토 지역에서 최강인 무사단을 이끌고 야마토 전역을 거의 평정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551년, 아직 쥰케이가 2살일 때 쥰쇼우가 병으로 죽었다.


 주변 가신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하여 18세에 코우후쿠 사[興福寺] 세이신 원[成身院]에서 득도(得度)하여 '요우슌보우 쥰케이[陽舜坊 順慶]'라는 이름을 자칭하였다. 승의의 무장이 된 쥰케이는 쇼우죠우히[猩[각주:1]]로 물들인 두건을 쓰고 금색의 가사(袈裟)를 걸치고 출진했다고 한다.


 쥰케이는 시기산 성[信貴山城]에 웅거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여러 번 압박 받던 중 아케치 미츠히데의 주선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게 되었다. 노부나가는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히사히데보다 쥰케이를 신뢰하여 야마토를 맡긴 것이다.[각주:2] 이에 불만을 품은 히사히데는 돌연 시기산 성에서 모반을 일으켜 자멸하였다.


 1580년.

 쥰케이는 성을 야마토[大和]의 코오리야마[郡山]에 축성한다. 미츠히데가 성의 건물 배치를 맡았다고 하니 둘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다[각주:3].


갑자기 찾아온 복통(腹痛)


 하시바 히데요시와 미츠히데가 싸운 야마자키 전투에서는 미츠히데의 필사적인 출진 요청에도 불구하고 '호라가토우게 고개[洞峠]'에서 어느 쪽에 붙을지 고민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데, 실제로는 출병하지 않고 코오리야마 성()에서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후 곧바로 히데요시의 진()으로 달려가 천하의 명기(名器)인 이토 차완[井戸茶碗]을 헌상하고 공순(恭順)의 뜻을 나타내어 야마토 일국(一国)의 영유를 허락받았다.


 1548 1월.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히데요시에게 신년인사를 한 후 후나바[船場]의 자택에서 체재하고 있던 2월 중순. 쥰케이는 갑자기 칼로 쑤시는 듯한 고통이 수반하는 복통을 일으켰다. 소강상태를 지나 3 2일에 코오리야마 성()에 돌아와 몸을 추스르고 있을 때 히데요시에게서 출진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가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와 손을 잡고 싸움을 걸어 온 것이다. 이 전쟁은 후에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이라 불리게 되는 전쟁이 된다.


 히데요시에게 충심을 나타낼 절호의 기회로 본 쥰케이는 병든 몸을 이끌고 3월에 오우미[近江]로 출진하였고, 거기서 이세[伊勢] 마츠가시마[松島]에서 싸운 후 쉴 틈도 없이 6월에 미노[美濃]의 타케노하나[竹鼻]로 이동하였다. 양군이 대치한 상태가 된 7월이 되자, 복통은 더욱 심해져 제대로 먹기조차 힘들어지는 것에 더해 한 여름의 더위까지 겹쳐 몸은 갈수록 말라 갔다.


명의(名醫)의 치료도 보람없이


 코우후쿠 사()의 중도(衆徒)로서는 제일 높은 자리인 호우인 소우토[法印 僧都]가 되어 있던 쥰케이의 병 쾌유를 기원하기 위해 코우후쿠 사(), 카스가 대사[春日 大社]에서는 여러 가지 기도가 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효과는 없어 결국엔 쿄우토[京都]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쿄우토에는 오오기마치 텐노우[正親町天皇]의 병을 고친 명의(名醫) 마나세 도우산[曲直瀨 道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우산의 치료에도 진전이 없어 격통이 멈추지는 않았다. 쥰케이의 병은 요즘으로 말하면 악성 위궤양 혹은 위암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회복될 기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고향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코오리야마 성()으로 돌아왔다.

코우야 산[高野山]에 있는 쥰케이의 묘.

 흔들리는 가마에 타고 오기에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고 오는 도중 우치[宇治]나 나라[奈良]에서 정양(靜養)해 가면서 귀성한 것은 8 7일이었다. 그 동안에도 쥰케이는 계속 고통을 느꼈다. 또 다시 코우후쿠 사()나 카스가 대사[春日 大社]에서 기도가 행해졌지만 역시 효험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쥰케이도 죽음을 각오했을 것이다.

 10일에는 머리맡에 일족들과 중신들을 불러 츠츠이 가문[筒井家]의 후사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인 11일. 모친 오오이카타 토노[大方殿] 등이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35.


 쥰케이는 츠츠이 가문의 앞날을 걱정하였지만 뒤를 이은 사다츠구[定次][각주:4], 죠우케이[定慶][각주:5] 둘 다 뛰어나지는 못하여 토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카이에키[改易][각주:6], 단절(斷絶)[각주:7] 당하게 된다.

 사다츠구는 이가[伊賀] 우에노[上野]로 영지가 옮겨져 20만석을 영유하고,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戦い]에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 쪽에 속했으나 후에 카이에키가 되어 이요[伊予]로 유배당한다.

 또한 그 다음 대인 죠우케이[定慶]에게는 코오리야마 성() 1만석이 주어졌지만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夏の陣]에서 오오사카 측에 너무도 간단히 성을 빼앗긴 일로 무가(武家)로써 어울리지 않다하여 가문이 끊겼다.

 

 
  1. 파란 빛을 띤 진홍색을 말함. [본문으로]
  2. 이전까지만 해도 히사히데가 쇼우군[将軍] 요시아키[義昭]의 휘하였기에, 히사히데의 적인 쥰케이는 요시아키의 명령을 받은 노부나가의 군세에 공격받아 위기에 빠지나, 1571년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뜬금없이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노부나가를 거역하더니 쇼우군 요시아키 휘하 장수들의 영지를 공격. 이에 요시아키는 히사히데의 적이었던 쥰케이를 옹호하게 된다(자연스레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있던 노부나가도 쥰케이를 옹호). 이후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사이가 벌어지자 히사히데는 요시아키 측에 붙고, 쥰케이는 히사히데에게 대항하기 위해 노부나가에게 붙는다. 덧붙여 요시아키를 쫓아낸 후 히사히데와 쥰케이의 상위에 자신의 측근 반 나오마사[塙 直政]를 두었으나 전사. 이후에 비로서 야마토를 지배하게 된다. 본문의 글처럼 미츠히데의 힘이라기 보다는 이전부터 노부나가를 성심성의껏 섬긴 쥰케이 노력의 결과라 봐야 할 듯. [본문으로]
  3. 성 안의 건물 배치는 극비이기 때문에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면 맡기질 않았다. [본문으로]
  4. 쥰케이에게는 사촌이며, 외조카(모친이 쥰케이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5. 확실하진 않으나 쥰케이와는 이종사촌지간인 듯. [본문으로]
  6. 무사의 신분을 빼앗기고 평민으로 강등 됨. [본문으로]
  7. 가문이 끊김. [본문으로]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

1615 5 28일 병사 60

1556~1615.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을 섬겼으며 '시즈가타케 칠본창[七本槍]'[각주:1] 중 한 사람이다.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후견역(後見役)이 되어 토쿠가와[德川] 측에 대한 연락창구가 되었지만, 오히려 내통자로 오해 받아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떠났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 후에 죽었다.







우직한 카츠모토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16살 때부터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기기 시작했는데, 이런 카츠모토를 히데요시는 곁에 두고 길러 키워 가신(家臣)으로 삼았다.

 1583 4월 시즈가타케의 전투에서 '칠본창'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공을 세워 3000석을 받았다. 그러나 동료인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淸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과 비교하면 출세 가도에서 밀려나 히데요시 말년인 1595년이 되어서야 겨우 셋츠[摂津] 이바라키[茨木] 1만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그 전 해인 1594년에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신하로 선택되었다. 히데요리의 여러 신하들, 특히 측근을 감찰(監察)하는 지위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다다음해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이 시작되었다. 카츠모토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도 오오사카 성에 입성해서는 히데요리 곁을 지키며 참전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그런 우직함을 신뢰하여 1601년 카츠모토에게 야마토[大和] 헤구리 군[平郡郡] 18천석을 가증하여 히데요리의 가로(家老)로 임명하였다. 이때는 몰랐지만 후에 생각해보면 이것이 카츠모토에게 있어서 불행의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곧이어 이에야스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 되어 에도[江戶]에 막부(幕府)를 열었고, 이 일로 인하여 토요토미 가문[豊臣家]과는 뭐든지 미묘한 문제가 많아지게 되었다. 특히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고 있던 카츠모토에 대하여 요도도노[淀殿][각주:2]를 필두로 한 오오사카 성내의 반토쿠가와파는 무엇이든 의심의 눈초리로 카츠모토를 보게 되었다. 토요토미-토쿠가와 양 가문의 중개자로써 쌍방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부심하는 카츠모토는, 언제부턴가 오오사카 성내의 혼란과 이간을 꾀하는 이에야스의 교묘한 술책에 희롱당하게 되었다.


호우코우 사[方広寺] 종명(鐘銘) 사건


 1602 4월.

 이에야스는 카츠모토를 통해 히데요리 모자(母子)에게 쿄우토[京都] 호우코우 사[方広寺] 대불전(大佛殿)의 재건을 권유하였다. 히데요리도 요도도노도 죽은 히데요시의 공양과 토요토미 씨()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하여 이를 따랐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이에야스가 오오사카 성()에 저장되어 있는 막대한 금은을 쓰게 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카츠모토가 조영(造營) 책임자라는 큰 임무에 임명받았다. 그는 이에야스와 빈번한 연락을 통해 꼬투리 잡힐 일 없이 사업을 진행해갔다.


 호우코우 사() 대불전은 1614 4월에 준공.

 하지만 예정되어 있던 개안공양을 눈 앞에 두고 이에야스가 불만을 표했다. 종에 새겨진 '家安康' '칸토우[関東]를 저주하는 말'[각주:3]이고, [君臣豊樂子孫殷昌]이 토요토미의 번영만을 기원하는 말이라며 개안공양의 연기를 명령했다.

 카츠모토는 급히 순푸[駿府][각주:4]로 해명하기 위해서 향했다. 당초는 이 문제가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에야스는 카츠모토를 면회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를 통해 오오사카 성()이 어째서 많은 수의 낭인을 모집하고 있는지 힐문하였다. 그리고,

1. 히데요리가 에도로 온다.[각주:5]

2. 요도도노가 인질이 되어 에도에서 산다.

3. 히데요리가 오오사카 성()을 나와 다른 곳과 영지를 바꾼다.[각주:6]

 라는 어느 것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요구해 왔다. 대불전 문제로 인하여 중대한 정치적 난제를 껴안게 된 카츠모토는 크게 놀랐다.


 한편 요도도노도 따로 이에야스에게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蔵卿局][각주:7]와 쇼우에이니[正栄尼][각주:8]를 파견하였다. 이에야스는 이 둘에게 종명 문제 등 난제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환대하며 히데요리 모자의 안부에 신경 썼기에 당연하게도 오오사카로 돌아온 쌍방의 보고는 전혀 상반되는 것이 되었다. 이에야스의 교묘한 분열 책략은 멋지게 성공했다.

 오오사카 성내에는 '카츠모토는 칸토우[関東]에 알랑거리는 놈'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곧이어 그 목소리는 '배신자 카츠모토를 죽여야 한다'로 변했다.


충신인가 역(逆)인가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의 신뢰를 잃은 지금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기에 카츠모토는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오오사카 성()을 탈출하여 이바라키 성()으로 갔다. 이에야스는 이것을 칸토우[関東]에 대한 오오사카 측의 선전포고라 여기고 오오사카 정벌을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1614 10 11일. 이에야스는 순푸를 출발하여 이로인해 '오오사카 겨울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된 이에야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음에 틀림이 없다.


 11 4일.

 쿄우토[京都]에 도착한 이에야스는 곧바로 카츠모토를 불러 오오사카 성() 공략에 대한 이야기 나누었다. 카츠모토에게는 원하지 않았던 바이며 어쩔 수 없던 선택이기도 했지만 이젠 더 이상 어찌할 수도 없었다. 오오사카 성내의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카츠모토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협력을 바라는데 거부할 수도 없었다.


 12 16일.

 시작된 공성 측의 대포 공격 중 한 발이 요도도노가 거주하던 곳에 떨어졌다. 거기에 다음해 여름의 싸움 때 야마사토[山里]의 성곽에 있는 히데요리 일행의 소재를 확인하여 히데타다[秀忠]에게 고한 것도 카츠모토라고 한다.


 토요토미 가 멸망으로부터 20일 후.

 카츠모토는 쿄우토[京都]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상은 깊은 죄와 자기 혐오에 빠져 자해(自害)를 했던 것이 아닐까?

  1. 시즈가타케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히데요리의 생모. [본문으로]
  3. 이에야스[家康]의 이름을 안(安)자로 갈라놓았기 때문. [본문으로]
  4. 이에야스[家康]가 히데타다[秀忠]에게 쇼우군[将軍]직을 물려주고 은거하고 있던 곳. 말이 은거지 중요정책사항들은 대개 맡아서 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즉 막부의 지배하에 들어오라는 의미. [본문으로]
  6. 대략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가 유력 후보지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7.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의 모친으로 요도도노[淀殿]의 유모(乳母). [본문으로]
  8.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秀頼]의 유모(乳母)이며, 히데요리의 창술 스승 와타나베 타다스[渡辺糺]의 모친. [본문으로]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1615 1 6일 병사(病死) 63

1552~1615.

셋츠(摂津) 타카츠키(高槻)성주(城主).

세례명 유스토(Justo).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기며 시즈가타케(賤ヶ岳)의 싸움 등에서 공을 세웠다. 히데요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기독교 금교령(禁敎令)으로 인하여 영지를 몰수당하고 국외로 추방 당하여 마닐라에서 병사하였다.








평화로운 생활을 깨트린 추방령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에게서,
 [
()을 따르겠느냐? 다이묘우(大名)로 남겠느냐?]라는 힐문에 주저없이 다이묘우(大名)의 지위를 버린 기독교 무장 다카야마 우콘은 카가(加賀) 마에다 가문(前田)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우콘은 카나자와(
)의 해자(垓子)이시가키(石垣) 등의 개수(改修)를 지휘하였고 타카오카 성(高岡)의 건물 위치나 배치(縄張)도 정했다.

 마에다 가문이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을 든 세키가하라(ヶ原) 전쟁 호쿠리쿠(北陸) 방면의 전투에서도 크게 활약하여 이에야스가, "우콘의 부하 천 명은 다른 무장의 1만 명에 필적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우콘의 정확한 영지는 불명이지만 2만석 전후라 여겨지며 마에다 가문의 역대 당주()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다.


 우콘은 카가, 노토(能登)를 비옥(肥沃)한 신앙의 땅으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여 예수회에 의뢰해서 수도원을 세우고 선교사를 초대하여 커다란 성과를 올렸다. 2대 번주(藩主) 토시나가(利長)는 그러한 우콘의 좋은 이해자였다.


 우콘은 또한 센노 리큐우(千 利休)를 스승으로 삼아, [리큐우 칠철(利休七哲)[각주:1]]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다인(茶人)이기도 하였다. 리큐우가 히데요시에게 죽음을 선고 받아 쿄우()에서 사카이()로 향하는 배를 타고 떠날 때도, 히데요시를 두려워한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와 함께 둘이서만 배웅했다. 우콘은 와비챠(わび[각주:2])의 극한에 이른 다인으로 '난보우(南坊)'라는 다인호(茶人號[각주:3])를 자칭했다. 신앙과 다도(茶道)…. 카나자와에서의 말년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토쿠가와 정권은 오오사카 성(大坂)의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가 에도 바쿠후(江戸幕府)와의 결전을 앞두고 낭인을 소집하고 있으며 또한 이들 중에 많은 기독교 무사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1612 12 바쿠후(幕府)는 선교사의 국외 추방(バテレン追放令)과 기독교인 명부의 작성을 명령하였다.


 62세인 우콘에게 힘겨운 새해가 찾아왔다.

 바쿠후에서 우콘그의 동료인 나이토우 죠안(内藤 如安[각주:4]) 그리고 그 가족들을 즉각 추방하라는 명령이 마에다 가에 전해졌다.

 친구들은 우콘에게,

[60세를 넘긴 당신은 괜찮지만 손자들이 불쌍하다. 개종(改宗)한 척을 하면 어떻겠나?]하고 설득했지만 우콘은 이를 거절했다.

 우콘은 3대 번주인 토시츠네(利常)에게 앞으로 섬길 수 없음을 사과하고 그 해의 연공에 해당하는 황금 60매를 헌상. 은거하고 있던 토시나가에게도 황금 30매 상당의 다기(茶器)를 보냈지만 이별을 슬퍼하며 받지 않고 오히려 여행에 쓰라며 돈을 더해서 돌려주었다.


 이리하여 1월이라는 가장 춥고 눈도 많은 계절에 우콘은 부인인 쥬리아, 가노(家老)의 집에 시집갔었지만 우콘을 따르기 위해 이혼하고 온 딸, 죽은 장남의 아들인 손자 다섯을 포함한 8명과 죠안의 가족 10명들과 함께 카나자와를 출발하였다. 평소도 넘기 힘든 호쿠리쿠의 산길을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며 쌓여있는 눈을 손으로 헤쳐가며 걸어서 넘었다.


고난의 마닐라 항해



 나가사키(長崎)의 행정관(奉行)은 우콘 일행에게 국외 추방을 선언하였고 우콘은 존경하는 호레몬 신부가 마닐라로 향한 것을 알고 마닐라 행의 배에 몸을 실었으며 친구인 죠안도 이에 따랐다. 그 배는 너덜너덜한 정크선[각주:5]으로, 1614 11 8 나가사키 항구 밖의 키바치(木鉢)의 항구를 출항했다.


 배에는 350명이나 되는 인원이 꽉 들어차 계단뿐만 아니라 갑판에도 사람이 넘쳤다. 순풍을 만나면 10일이면 도착하지만 계절은 최악으로 1개월이 지나도 여전히 바다 위에 있었다. 위생상태도 나빴고 더구나 마닐라로 들어가기 직전에 폭풍우를 만나 돛대가 부러져 어선에 발견되기 전까지 4일간 바탄 반도의 앞바다를 표류하였으며 이 때문에 배 안에서 4명이 죽었다.


도착 직후에 객사


 그러나 선교사의 보고로 우콘 등이 얼마나 독실한 신자였는지를 알고 있던 스페인 현지 총독 후앙 데 실바는 표류하는 배를 구원하여 성벽도시 인트라므로스의 해안으로 견인하였다.


 일행은 요새에서 발사되는 축포로 환영 받으며 마닐라에 첫발을 내딛자 교회의 종들이 일제히 울렸고 의장병과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총독은 국빈 대우로 우콘을 맞이하여 신앙의 스승으로 앞으로도 오랫동안 머물기를 바랬다.


 그러나 이때 이미 우콘의 몸은 배에서의 열악한 환경, 거기에 마음의 피로가 겹쳐 병마에 침식당하고 있었다. 마닐라에 상륙한지 44일 후인 1615 1 6(서력 2 3), 가족과 죠안이 보는 앞에서 63세로 죽었다.

총독관저의 거실로 옮겨진 관 속의 우콘은 무인을 상징하는 갑옷과 다인을 의미하는 쥬우토쿠(十徳) 두건을 쓴 모습으로 마치 살아있는 듯이 보였다 한다.


 우콘의 관은 총독을 시작으로 재판관, 수도사, 시회 의원, 유력자 등이 바꿔가며 메었고 700미터 떨어진 산 타아나 교회로 이어져 그 교회의 주제단에 가까운 곳에 관구(管區)의 어른들이 영면을 취하고 있는 관들 사이에 놓였다.

 이 교회는 지진이나 폭격으로 파괴되어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며, 유골은 이곳 저곳을 떠 돈 끝에 현재는 케손 시티 교외의 노바레체스 수도원의 합동묘에 죠안과 함께 잠들고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1. 리큐우 휘하의 뛰어난 제자 일곱 명.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 利貞))을 이름. [본문으로]
  2. 말하자면 화려함 보다는 간소함을 찾는 다도(茶道)형식. [본문으로]
  3. 다도의 세계에서 쓰는 호를 말함. [본문으로]
  4. 우리나라에는 '소서비(小西飛)'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5. 중국식의 배를 말함.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