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효우고노카미 요시히로[島津 兵庫頭 義弘]! 무운 다하여 여기서 배를 가른다. 일본의 무사들이여! 너희들이 내 목을 베었다고 나중에 자랑하지 말지어다”


1600년 9월13일. 사츠마[薩摩] 카모우[蒲生]에 있던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은, 소수의 병력[각주:1]으로 서군(西軍)에 참가해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의 동원령에 응하여 요시히로의 저택이 있던 쵸우사[帳佐]와 자신이 다스리던 카모우[蒲生]의 무사 70여명을 이끌고 8월 3일 출발하여 9월 13일 이른 아침 세키가하라의 난구우산 산[南宮山] 근방에 도착.

아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휘하의 병사 1000명을 파견하여 마중.  
길 양측에 도열해서는 앞을 지나가는 쵸우쥬인 세이쥰의 병사들에게 큰소리로,
"오시는 동안 많은 고난이 있었을 텐데 이렇게 무사히 오시다니 정말 군신(軍神)이 따로 없소"
라 외쳤고, 마중 나왔던 미츠나리는 금으로 된 지휘부채[軍配]를 주며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의 노고를 치하.

점심.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가 주둔해 있던 오오가키[大垣]에 도착.
요시히로 문밖으로 달려 나와,
”쵸우쥬[長寿]구나! 자네가 가장 먼저 와 줄거라 믿고 있었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라 기뻐하며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하사 받았던 흰 봉황이 새겨진 진바오리[陣羽織][각주:2]를 하사.

이틀 뒤인 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시작.

서군(西軍)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시마즈 부대의 본영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그 너무도 빠른 서군의 붕괴에 요시히로는 아직 갑옷도 완전히 입지 않은 상태였다.[각주:3] 서군의 좌익 이시다, 우익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는 이미 무너져 전장에 남아있는 서군의 부대는 시마즈 부대 뿐이었다. 앞으로 어느 쪽으로 탈출할 지를 놓고 토론하였다. 그때 세이쥰이 들어왔다.
”이때가 되어서도 한가롭게 말싸움이나 하고 있을텐가? 말로 다툼하는 대신 무공으로 다투고 싶은 사람은 나와 함께 여기에 남아 마지막 무명을 높이세”

막료들이 이러고 있는 동안 요시히로는 할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조카인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각주:4]가 와,
“이제 정해진 천운(天運)을 바꿀 순 없습니다. 살아 장수를 누리는 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여기서 싸우다 죽으려 하니, 그 사이 큰아버지는 가신들을 이끌고 사츠마[薩摩]로 돌아가십시오.”
그래도 요시히로는 듣지 않았다.
“큰아버지의 몸에 시마즈 가문의 운명이 걸려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옵소서”
라고 외치자 그제서야 요시히로는 일어섰다.

그 대화를 보고 있던 세이쥰은 요시히로와 토요히사의 말이 끝나자 재빨리 요시히로의 갑주 쪽으로 가 자신의 무구를 벗은 후 요시히로의 것을 서둘러 입었다. 그것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고 있기에 요시히로는 아무 말 없이 대신 세이쥰이 벗은 무구를 입었다. 이로 인해 세이쥰은 도착했을 때 요시히로에게 받은 진바오리와 요시히로의 무구, 거기에 미츠나리가 준 황금 지휘부채로 인해 오히려 요시히로보다 더욱 화려한 모습이 되었다.

역할이 정해졌다.
토요히사는 시마즈 요시히로를 호위하며 탈출하기로, 세이쥰은 본진이었던 곳에 남아 요시히로의 영무자[影武者]가 되기로.

요시히로가 부하에게 물었다.
“어느 쪽 적의 기세가 가장 왕성한가?”
부하가 답했다.
“동쪽에 있는 적이 가장 기세 등등합니다.”
부하의 보고를 받고 요시히로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 기세를 향해 돌파할 것. 돌파하지 못하면 효우고 뉴우도우[兵庫入道][각주:5]는 할복할 뿐!”
부하들이 합창하듯이 답했다.
“말씀하신 두 명령. 받자와 메시겠습니다”

떠나는 토요히사에게 세이쥰이 다가가 말했다.
“이것으로 금생에서는 더 만나지 못할테니 지금 인사를 올립니다”
토요히사는 말했다.
“오늘은 아군이 약하기에 무공을 세우긴 힘들 것 같군요”
둘은 미소를 지으며 헤어졌다.

남겨진 쵸우쥬인 세이쥰 부대 200~300에 동군(東軍) 부대 700이 돌진해 왔다.
처음엔 본진에 적들이 난입하기 전에 철포로 물리쳤다.
두 번째는 난전이 되었다.
시마즈 부대의 암구호는 ‘자이[ざい]’였는데, 하필 상대도 ‘자이[ざい]’였다[각주:6]. 같은 편끼리 죽고 죽이기도 하였다. 개중에는 두려워 본진 뒤편에 파 두었던 해자[垓字]로 도망치는 자들도 있었다. 세이쥰은 노하여 외쳤다.
“사츠마까지는 500리나 된다. 설사 도망치더라도 멀어서 가기나 하겠나? 거기에 도망치는 놈은 얼굴 다 알려졌을테니 앞으로의 굴욕을 어떻게 감당하려 하나!”
몇몇이 해자에서 기어나와,
“잠시 동안이라도 미련을 가졌던 것이 정말 창피하옵니다.”
라 말했다.

난전이 된 두 번째 적의 파도을 제압한 세이쥰이 부하들에게 물었다.
“주군은 어디까지 가셨나?”
부하들은 모두 입 맞추어,
“적진을 돌파하였습니다. 이제는 아주 멀리 가셨을 것입니다.”
“축하할 일이구나. 이제 내가 주군의 영무자[影武者]로 죽는 일만 남았군”

적의 3차 돌격에서 세이쥰은 죽었다고 한다.
“시마즈 효우고노카미[島津 兵庫頭] 죽으려고 환장했으니 올테면 와라”
라 외치며 돌진하다 무수한 적의 창에 몸이 꿰뚫린 후 힘 다해,

“시마즈 효우고노카미 요시히로! 무운 다하여 여기서 배를 가른다. 일본의 무사들이여! 너희들이 내 목을 베었다고 나중에 자랑하지 말지어다”[각주:7]

외친 후 배를 열십자로 가르고 머리를 북쪽으로 향해 죽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283명은 그 모습을 보고 돌진하여 살아남아 도망친 자는 50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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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퇴각전 중 그가 타고 있던 말만 나타났다고 한다. 토요히사를 죽였는지 아니면 그가 죽어있을 때 갑주만을 벗겨 전공품으로 삼았는지 알 수 없지만, 토요히사가 입던 갑옷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양자 후쿠시마 마사유키[福島 正之]의 부대에 꼽사리 끼었던 낭인[浪人] 카사하라 토우자에몬[笠原 藤左衛門]이 가져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소유했다고 한다. 후에 소문을 들은 토요히사의 6대손이 찾아가 살피자, 갑옷에는 창에 꿰뚫린 자욱이 두 군데 있었다고 한다.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 1548년~1600년.
盛淳을 일본 위키피디아의 해당항목이나 일본 일반 웹에서는 ‘모리아츠’라고 읽으나 세이쥰은 승려에, 그의 스승이 ‘다이죠우인 세이큐우[大乗院 久]’였기에, 스승의 이름자 하나를 물려 받았을 터이니 ‘세이쥰’이라 읽어야 할 듯.
어렸을 적부터 불문에 들어갔다.[각주:8] 처음 입문한 곳은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기도를 올리는 사원인 다이죠우인[大乗院]. 그 후 키이[紀伊]의 네고로 사[根来寺], 코우야[高野]에서 수행 후 사츠마[薩摩]로 돌아와 안요우 원[安養院]의 주지가 되었다. 그 후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의 부름으로 환속하여 시마즈 가문의 국정에 참가. 후에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의 휘하 가로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요시히로의 동원령에 호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하였다 요시히로의 영무자(影武者)가 되어 전사. 향년 53세.

  1. 약 200명 이하. 여담으로 1600년 8월 토요토미 정권이 정한 시마즈의 재경 주둔병(在京駐鈍兵)은 7000명이야 했다. [본문으로]
  2. 조끼처럼 생긴 갑옷 위에 덧 입는 옷. [본문으로]
  3. 이를 고쿠소쿠[小具足]라 한다. 갑옷의 내피만 입고 외피를 입지 않은 상태. 요시히로는 당시 60대 중반의 나이였기에 체력 온존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본문으로]
  4. 시마즈 토요히사는 시마즈 4형제의 막내 시마즈 이에히사[島津 家久]의 아들. [본문으로]
  5. 뉴우도우[入道]는 불문에 입도한 사람에 붙는 말. 요시히로는 히데요시가 죽자 그의 명복을 빈다며 중이 된 상태였다. – 단 머리는 밀지 않았던 듯 당시 몇몇 종군기에는 머리 묶는 끈에 대한 묘사가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6. 당시 전투방식으로, 무사들끼리 대치하면 우선 자기 부대의 암구호를 대어, 상대방도 맞으면 다른 적을 찾아 나서고, 다르면 싸우는 식이었다. [본문으로]
  7. 내가 스스로 죽었는데도 나를 죽이고 내 목을 베었다고 무공을 자랑하지 말라는 말. [본문으로]
  8. 이에 대해선 그의 부친 하타케야마 요리쿠니[畠山 頼国]가 “우리 집안은 원래 아시카가 쇼우군[足利将軍]의 중신이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서국의 벽지(사츠마[薩摩])에 오게 되었다. 내 자손을 미천하게 키우고 싶지 않으니 불문에 보내고 싶다”고 하여 불문에 보냈다는 설이 있다…카더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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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gorekun.com BlogIcon 고어핀드 2010.11.15 0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하, 이것이 저 유명한 전진철수 때 있었던 일화로군요! 지금까지는 전진철수와 카게무샤에 대해서도 그냥 듣기만 했을 뿐인데, 이 두 가지가 실제로 어떤 식으로 벌어졌는지에 대해서 알려 주는 흥미로운 일화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 Gyuphi IV 2010.11.15 2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이에히사-토요히사 경우엔 부자가 참 비명횡사라니(...) 그런데 그런것 치고는 토요히사의 죽음에 대해서 아무런 기록이 안 남은건 참 묘한 노릇이군요.. 창에 뚫린 갑옷만이 남았다라(...) 구스타프 2세 아돌프스가 뤼첸전후에 셔츠바람의 총구멍 수군데 난 시체로만 발견됐던 것과 묘하게 닮은데가 있습니다 (...아니 이런 실례를...)

    오니 시마즈가 승세를 탄 동군의 이이 나오마사를 중앙돌파하며 손가락까지 날려버린데는 참 언제 생각해도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과연 경륜이 다르군요)


    여담이지만 최근 CAPCOM의 괴작 전국바사라3(...)를 하고 있습니다만 저 장렬한 시마즈 요시히로(나 영무자나..)의 모습과는 달리 간헐천에 뛰어들었다 튀어나왔다를 하며 플레이어를 괴롭히는 유치찬란함은 참으로(....)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1.16 09: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내용상 불필요할 것 같아서 토요히사는 짧게 썼는데, 토요히사의 부대도 꽤나 장렬하게 싸우긴 한 것 같더군요. 아무래도 요시히로를 튀게 만들려다 보니 쫓아오는 적들을 상대하는 임무를 맡았던 듯 합니다.(다만 그 전술이 잘 못 되었기에 에도 시대 내내 사츠마 번내에서는 까였다고 하더군요.)

      적진 퇴각이 성공한 이유 중에 하나는 동군 대부분이 우키타나 이시다 부대 쫓아가는데 몰두하다 보니 요시히로 일행에게는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요인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요시히로 역시 적들이 자기 쪽으로 오기보다는 이시다나 우키타 부대를 쫓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적진을 돌파라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센고쿠 바사라라...일본에 레키죠[歴女] 열풍을 불게 만들었다는 그 작품이군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를 말하는데 있어 그의 부인인 호소카와 가라샤[細川 ガラシャ]를 빼놓을 수 없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셋째 딸로 이름은 타마[玉], 절세의 미녀였다. 타다오키는 이 가라샤에 관계된 일이라면 질투심이 특히 심했다고 한다.
 어느 날.
 정원사가 일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지나가던 가라샤에게 계절이 어떠네 날씨가 어떠네하며 인사를 했다고 한다. 단지 그랬을 뿐이었는데도 타다오키는 이 정원사를 직접 칼을 뽑아 죽였다.

 부친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에게 물려받은 재능으로 각종 예도[藝道]에도 뛰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아트 디자이너적인 재능이 풍부하였던 듯 자기 부인의 옷도 스스로 옷감을 고르고, 색이나 모양까지 디자인했다고 한다. 갑주(甲胄)나 갑옷에 걸쳐 입는 동의(胴衣), 큰칼[太刀]의 디자인 등도 직접 고안하였고, 다른 다이묘우[大名]에게서도 의뢰 받아 투구 등을 만들었다.
 어느 날 의뢰 받아 제작한 투구의 뿔을 진짜 물소의 뿔이 아닌 가벼운 오동나무로 만든 적이 있었다. 의뢰한 다이묘우가 완성품을 보고 이래서는 부러지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자, 타다오키는 “투구의 뿔이 부러질 정도로 활약하는 것이야말로 무사의 본분일 것이오”라고 화를 내며 말했다고 한다.

 질투 심한 격정(激情)인 성격이 플러스로 작용하여 전쟁터에서는 용감한 활약을 하였다.
 1577년 10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장남 노부타다[信忠]를 따라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의 속성 카타오카 성[片岡城]을 공격했을 때의 일이다. 15세에 선두에 서서 분전하여 수급을 베었지만, 이때 돌에 머리를 맞아 상처가 나 늙어서도 그 상처자국이 지워지질 않았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는 노부나가에게서 자필 표창장[感状][각주:1] 를 받았다.[각주:2]

 앞서 이야기한 것보다 전인 같은 해 3월의 사이가 정벌[雑賀征伐] 때는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다. 혈기에 날뛰어 명성이 자자하던 사이가의 철포대에게 돌격하려 한 것이다. 적들이 총을 쏘고 난 간격에 맞추어 돌진하려다 부하가 막은 덕분에 탄환의 먹이가 되는 것을 피했다. 이때의 경험이 머리에 새겨졌는지 노년(老年)에 들어서도 자주 입에 담았다고 한다.

 

[호소카와 구요]

그런 용맹한 활약들이 노부나가를 흡족하게 하여 노부나가는 타다오키를 시동[小姓]으로 삼았다. 유명한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의 문장(家紋)이 구여(九曜)로 정해진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노부나가의 칼을 받들고 있던 타다오키가 그 칼의 칼자루에 새겨져 있던
구요의 장식에 반하여 곧바로 이를 자신이 입는 옷에 새겨 입자 이를 본 노부나가가 “멋진 문양이구나”고 칭찬한 것이 호소카와 가문의 문장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부친 유우사이[幽斎]까지 호소카와 가문의 문장은 오동나무[桐] 혹은 ‘원 안에 두 줄[二つ引両]'였지만 타다오키의 대가 되어 구요의 문장으로 바뀌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아케치 미츠히데의 딸 타마(후의 가라샤)와 결혼한 것은 1578년의 일로 타다오키 16세였다.
 그러나 이 결혼이 1582년 호소카와 가문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위기를 가져다 주게 된다. 이해의 6월 부인 가라샤의 부친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우 사[本能寺]에 머물던 주군 노부나가를 죽이고, 호소카와 부자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야말로 호소카와 가문은 운명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타다오키의 부친 유우사이는 노부나가를 죽인 미츠히데의 천하가 결코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여, 그때까지 친구였던 미츠히데의 권유를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아들인 타다오키와 함께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에 대한 조의를 표하였다[각주:3].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아케치 토벌전인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가 시작되자, 이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미츠히데의 영지인 탄바[丹波]에 침공, 성 2개를 공략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더구나 미츠히데의 딸인 가라샤를 탄고[丹後]의 미토노[味土野]의 산속에 유폐하여 미츠히데와 연을 끊었다는 것을 세상에 구체적으로 알린 것이다. 이렇게 노력한 것이 효과를 보아 호소카와 부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에게서 탄고 영유를 그대로 인정받는 서장을 얻었고 가라샤 부인의 유폐도 풀리게 되었다[각주:4].

 그 후 타다오키는 히데요시의 천하평정 전쟁에 참가하여 유우사이와 함께 히데요시 정권하에서 확고한 지위를 쌓아가지만 1595년에 큰 재난에 휩싸이게 된다. 관백(関白)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의 실각사건이 그것이다.
 히데츠구는 잔혹한 행동 때문에 할복을 명령 받고 그의 처첩, 가신들까지 살해당하거나 추방당하였는데, 그 중에 타다오키의 인척이 있었다. 타지마[但馬] 이즈시[出石]의 영주 마에노 나가야스[前野 長康]의 아들 나가시게[長重]의 부인이 타다오키의 장녀였던 것이다. 더구나 운 나쁘게도 타다오키는 히데츠구에게서 황금 100매를 빌리고 있었다. [각주:5] 그러한 일로 타다오키 역시 히데츠구의 일당이 아닌가 하는 혐의가 받게 된 것이다.

 타다오키는 곧바로 근신을 명령 받았다. 히데요시 측근의 말에 따르면, 오봉행(五奉行)[각주:6]의 의향은 타다오키를 할복시키려는 의향이라고 하였다.
 타다오키는 분노했다. 이는 평소부터 사이가 나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참언(讒言)에 의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호락호락 누명을 쓰고 죽을 바에는 미츠나리를 죽이고 후시미[伏見][각주:7]에 불을 질러 화려하게 끝을 장식하겠다”
 고까지 생각하였다. 아예 처자식을 죽이고 자신의 저택에 불을 지르려고 여러 준비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러는 한편 열심히 변명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히데요시는 딸을 인질로 바칠 것, 히데츠구에게 빌린 황금 100매를 반납할 것을 조건으로 타다오키의 결백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라 타다츠구에게는 당장 황금 100매라는 거금이 없었다. 온갖 방법을 쓴 끝에 겨우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빌려 반납할 수 있었다. 이때의 은의(恩義)로 인해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와 친교를 맺기 시작하여 히데요시가 죽은 뒤 혼란스런 정세 속에서 차츰 토쿠가와 측이라는 자세를 확실히 나타내게 된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생전에 정한 법도를 계속해서 어겨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이시다 미츠나리 등 사대로(四大老), 오봉행(五奉行)들과 험악한 대립관계에 들어갔다.
 타다오키는 마에다 가문[前田家]과 인척관계였다. 적자 타다타카[忠隆]의 부인이 토시이에의 딸이었던 것이다.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에 대한 은의와 토시이에와의 인척관계 사이에 끼어 괴로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타다오키와 친한 토시이에의 장남 토시나가[利長]가 타다오키에게 놀랄만한 정보를 가져온 것이다.
 이시다 미츠나리의 이에야스 암살계획이었다. 타다오키는 기겁했다. 그것은 마에다 가문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시나가를 설득하여 함께 토시이에를 만나 이에야스와의 화해를 권고하자, 토시이에는 오히려 바닥을 내려치고 격노하면서 이에야스의 약속위반을 하나하나씩 거론하였다. “이래서는 히데요리[秀頼]공에게 해가 될 뿐.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에야스를 죽이고 말겠다!”고 외쳤다.
 타다오키는 필사적으로 설득하여 겨우 토시이에가 재고하게 만드는데 성공하였고, 토시이에는 타다오키에게 이에야스와 화해하는데 중개를 맡아달라고 하였다. 그 후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이에야스도 깜짝 놀라며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하며 감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타다오키의 노력으로 인하여 양자는 화해하게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토시이에가 죽자 타다오키를 포함한 무공파 장수들이 이시다 미츠나리 습격을 계획하여 미츠나리는 자신을 구해준 이에야스에게 은퇴 당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가 하면 이번엔 타다오키가 새빨간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마에다 토시나가와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가 공모하여 이에야스의 암살계획을 세웠고, 타다오키도 토시나가와 인척관계인 만큼 여기에 참가했다는 이야기였다.
 놀란 호소카와 가문에서는 곧바로 부친 유우사이와 타다오키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겠다는 맹약서를 이에야스에게 제출하였고, 이에야스의 요구대로 마에다 가문과의 인척관계를 끊고 에도[江戸]에 셋째 아들인 타다토시[忠利]를 인질로 보냈다[각주:8]. 즉 호소카와 가문은 이걸로 완전히 이에야스에게 복종을 맹세한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타다오키는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 정벌[会津征伐][각주:9]에 참가하는데, 그가 출진한 사이 오오사카[大坂]의 저택에서 가라샤 부인이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시다 미츠나리 등은 거병하자 오오사카에 있던 동군(東軍) 무장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잡아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가라샤 부인은 용감히 이를 거부하고 가노(家老)에게 자신을 찌르게 하여 마지막을 장식하고 화약에 불을 붙여 저택을 폭발시키게 만들었다. 기독교도였던 가라샤 부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했기에 그러한 수단을 취한 것이다.

 타다오키는 부친 유우사이에 뒤지지 않는 굴지의 다인(茶人)으로 또한 그런 방면의 서적을 많이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1563년 나가오카 후지타카[長岡 藤孝=유우사이[幽斎]]의 아들로 태어났다. 통칭 요우이치로우[与一郎]. 호는 산사이[三斎]. 탄고[丹後] 미야즈[宮津] 성주. 임진왜란 때는 2년 동안 재진하였고, 진주성(晋州城) 공격에도 참가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부젠[豊前] 코쿠라[小倉]에 봉해졌다. 1632년 아들 타다토시[忠利] 때 히고[肥後] 55만석으로 전봉되었다. 센노리큐우[千 利休]에게 사사 받아 리큐우 칠철[利休七哲][각주:10]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1645년 12월 2일 죽었다. 83세.

  1.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서는 노부나가의 거의 유일한 자필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특별한 일이었는지 전해준 호리 히데마사[堀 秀政]도 ‘이 표창장은 노부나가님이 직접 쓰신 거임’이라고 첨부한 편지에 쓸 정도였다. [본문으로]
  2. 표창장을 받은 이유는, 타다오키가 그의 동생 호소카와 오키모토[細川 興元]와 함께 카타오카 성을 가장 먼저 침입해 들어갔다[一番乗り]. [본문으로]
  3. 타다오키의 경우 노부나가에 심취해 있었던 듯, 죽을 때까지 매달(!) 노부나가의 제삿날을 잊지 않고 챙겼다 한다. [본문으로]
  4. 그러나 그녀는 이때 받은 타다오키에 대한 불신감으로 인하여, 기독교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당시에는 이렇게 돈을 빌려주는 행위가 빌린 사람을 자기 부하로 만들거나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한다.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秀長]도 다른 다이묘우들에게 돈을 마구 빌려주어 형인 히데요시를 화나게 한 적도 있다 한다. 즉 현대의 감각처럼 단지 돈을 빌려주고 빌렸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다. 타다오키가 히데츠구와 주종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6.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를 지칭. [본문으로]
  7. 히데요시가 쥬라쿠다이[聚楽第]를 히데츠구에게 물려주고 은거해 있던 곳. [본문으로]
  8. 타다토시는 인질로 에도[江戸]에 가서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은 덕분에 후에 폐적된 첫째 형과 둘째 형을 제치고 타다오키의 세자가 된다. [본문으로]
  9.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상경하라고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복하고 그렇게 꼬우면 현피뜨자는 편지까지 받자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정벌하려 감. [본문으로]
  10. 리큐우 휘하의 뛰어난 제자 일곱 명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 利貞]를 이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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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동희 2010.10.07 1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사에서 이래 저래 요리 조리 잘 빠져 나가서 성공한 인물 중 하나죠
    다다오끼는 전공도 많이 세우고, 큰 영지로 얻고, 오래 살기도 하고 재주도 많고
    암튼 여러가지로 다재 다능 했던 인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다다오끼의 성공은 대부분 그 아버지(후지타카)의 은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다다오끼야 말년에 뭐 지가 전국의 난세을 헤쳐 나온 불세출의 인물이라고 생각 했겠지만
    그래도 쇼군 업고 이찌노다니에서 빠져나와 노부나가를 의지하게 한 후지타카에 비할까 싶습니다
    이른바 양조택목(良鳥擇木)이 전국시대에서는 제 일의 덕목이라 생각하는데
    후지타카가 그걸 참 잘 했죠(그닥 비굴하지 않게)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7 12: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정동희님. ^^

      제가 가진 이미지도 비슷합니다.

      다만 세키가하라 즈음부터는 타다오키의 의견이 아비의 그것보다 더 중했던 듯 싶습니다.

      확실히 타다오키가 아비만 못한 듯 합니다만, 이런 무장의 일화를 소개하는 책들에 부자(父子) 이대가 한 꺼번에 실린 것을 보면 타다오키도 부친의 그늘에 가려지기만 할 정도는 아닌 듯 합니다.

      참 타다오키에 관해서 이 글도 함 보시길.

      http://blog.naver.com/nagoomo/140056207097

      타다오키의 성격을 잘 나타낸 것 같더군요.

  2. 정동희 2010.10.07 1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가 히데쓰꾸 실각에 얽혀서 그렇게 고생한 줄은 저도 처음 알았네요
    이에야스 암살 건은 이에야쓰가 충성 맹세 하라고 얽은 느낌이 드는군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7 1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땐 그렇게 돈을 빌려 준 뒤 고리로 매달 이자를 받았다고 하더군요(예나 지금이나 돈으로 묶이면 아무래도 따를 수 밖에 없는지라). 히데츠구 실각에는 그런 고리대금에 관한 문제도 있었던 듯 합니다.

      아사노 나가마사와 토시나가, 타다츠구는 말씀하신대로 이에야스의 책략이었던 것 같습니다. 목표는 마에다 토시이에가 죽었다곤 해도 여전히 No.2였던 마에다 가문으로 흔들기 위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 정동희 2010.10.08 0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사노나 마에다는 도요토미에 정말 큰 은혜를 입은
      가문인데요...
      그럼에도 그렇게 쉽게 이에야쓰에게 무릎을 꿇었으니
      솔직히 나머지 도요토미계 다이묘들이 이에야쓰에게 붙은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었나 싶네요
      결국 미쓰나리만 동분서주...
      요시쓰구는 친구 따라 저승 갔고
      모리, 우에스키는 나름 야심을 품다 망했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8 1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서 '대세'란 무서운 것 같습니다. 한번 휩쓸리면 다시 되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까요.

  3. 정동희 2010.10.07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다나베성 건은 저도 전에 읽어 봤는데요
    그걸 읽으면서도 역시 다다오끼는 좀 과격하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뭐 조선 가서 고생도 하고 나름 집안의 우두머리가 되긴 했지만
    여러가지로 후지타카의 노련함에는 못 미치는 인물이 아닌가...
    그래도 뭐 결국 이에야쓰한테 고개 숙이고 잘 살았으니 성공한 인생이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7 13: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담으로...

      헤우게모노[へうげもの]라는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가 주인공인 만화에서 타다오키는 후지타카의 1/10에도 못 미치는 인물로 그려지더군요. 뜬금없는 짓을 벌이다 아비에게 뒷목을 맞고 기절하여 끌려가는 역으로 나옵죠. ^^
      (참고로 후지타카는 그의 후손인 전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 護煕]의 얼굴로 그려져 있습죠)

    • 정동희 2010.10.08 0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호소카와 가문이 막말까지 아주 잘 살았죠
      사실 호소카와번은 무로마치 시대의 간레이 호소카와 하고는 상당히 먼~~~ 호소카와인데... 어쨌든 전국난세를 거쳐 명문 호소카와의 대표 주자가 됐으니 참...
      호소카와 총리가 기자 출신인데 특종을 그렇게 잘 잡았답니다 이유인 즉슨... 당시 경시총감인가 암튼 경찰 고위직이 호소카와 가문의 하급 무사 집안이었다네요
      (새 모이 주는 무사...)
      암튼 그래서 옛 주군가를 섬기는 마음으로 모리히로에게 특종을 많이 줬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8 1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모리히로 총리의 기자시절 에피소드는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

      요즘 한국에 그런 일이 있었음..
      '막부가 없어졌는데도 아직도 주종 운운하는 더러운 세상~'....했을지도.

  4. jane 2010.10.08 0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다오키 저 친구 그래도 전 그다지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 다재다능하고 성격도 불 같고 의외로 순정-_-파고...

  5. Gyuiphi IV 2010.10.08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센덕후 열이 좀 식은 지금에 와서 다시 보자면 공과를 떠나서 이사람 성격 자체는 센고쿠에서나 먹힐만한 성격이지 지금 생각하면 막장에 다름아니다 싶긴 하더군요.

    뭐 교양인에 용맹했고 대세를 파악하는 눈도 뛰어났던건 재능이긴 합니다만 그 외의 부분에서(-_-..;;)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8 12: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시대가 다르다 보니.. ^^

      사족으로 시이나 타카시[椎名 高志]의 만화 "미스터 지팡구"에서 노부나가는 어느 상인을 베어 죽인 후 히데요시에게,
      "지금은 봉건시대고 나는 전제군주다. 틀렸음 '아~ 미안'하면 될 일이야"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뜻이었을 듯)

      뭐 비슷한 일들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랫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지금과 비교하면 막장이지만 당시는 그것이 당연시 되던 시대였으니까요.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의 부하들은 수틀리면 칼 뽑아 칼질하는 나오마사[별명:人斬り兵部!!] 때문에 출사하기 전에 조상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설 정도였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니...비단 타다오키만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센고쿠 시대[戦国時代]는 좋은 주군을 찾아 여러 가문에 발길을 남기는 것이 일상다반사였기에, ‘7번 주군을 바꾸지 않으면 제대로 된 무사라고 할 수 없다’고 일컬어졌을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 전형적인 인물이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였다. 타카토라는 7번 주군을 바꾸었다.

 처음 오우미[近江] 아자이 가문[浅井家]을 섬긴 타카토라는 이때 아직 13살의 소년이었다. 그 당시 일화로 도망자를 처치한 이야기가 있다. 죄를 짓고 도주하다 어느 집에 숨어 들어가 저항하는 죄인을 처치하였는데, 이때 행한 타카토라의 모습에서 그의 인생 전반에 걸친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부친과 형이 집 안에 들어가 죄인과 싸우자, 죄인은 틈을 엿보다 집 밖으로 도망쳤다. 타카토라는 문 근처 그늘에 숨어있다가 도망에 성공했다고 방심한 죄인을 불현듯이 덮쳐 처치하였다고 한다. 즉 정공법보다도 오히려 물밑 정치교섭에 뛰어난 타카토라의 특색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타카토라는 아자이 가문이 아네가와[姉川]에서 오다[織田]-토쿠가와[徳川] 연합군에게 패하여 위세가 낮아지자, 17살에 낭인이 되어 같은 오우미의 아츠지 아와지노카미[阿閉 淡路守]를 섬겼고[각주:1], 그 다음으로 이소노 탄고노카미[磯野 丹後守]를 섬긴다. 둘 다 한 달 어쩌면 수개월 만에 각 가문에 한계를 느껴 오다 노부즈미[織田 信澄]의 가신이 되었지만[각주:2] 노부즈미도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때 누명을 쓰고 살해당했다. 노부즈미의 부인이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딸이었기에 미츠히데 일당으로 오해 받아 살해당한 것이다[각주:3].

 다음으로 히데요시[秀吉]의 동생 하시바 히데나가[羽柴 秀長]를 섬기면서 2만석까지 출세. 그제서야 안정을 찾나 싶었더니 그 히데나가도 1591년에 죽었고, 다음으로 히데나가의 양자인 히데야스[秀保]를 섬기지만 히데야스 역시 몇 년 뒤 죽자, 아무리 타카토라라도 한때는 세상을 버리고 코우야 산[高野山]에 은거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히데요시의 소환에 응하여 하산하여 이요[伊予] 7만석에 봉해졌다. 이렇게 타카토라는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 히데요시 휘하에 속하게 된 것인데, 그러는 동안 눈에 뛸만한 무용담이 거의 없다. 타카토라는 창놀림보다는 원활한 인간관계를 추구함으로써 세상을 헤쳐나간 것이다.

 훗날의 일로 그가 부하를 얼마나 능숙히 썼는가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신 중에 유녀(遊女)에 빠진 자와 도박에 미친 자가 있어 둘 다 재산을 모두 잃고 말았다. 타카토라는 유녀에 빠진 자를 좆병진이라며 영구추방하였지만, 도박에 미친 자에게는 100일간 근신과 급료 감봉에 그쳤다. 이 둘에 대한 처분에 차이가 생긴 것은 이러했다. 유녀에 빠져 무기까지 파는 놈은 앞길이 암담하지만, 도박에 미친 자는 남에게 이기려는 호승심이 있기에 무사로서는 아직 쓸만한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각주:4]

 또한 사표를 내고 떠나는 가신에게 타카토라는 그 무사를 초대하여 직접 차를 대접하고 차고 있던 칼을 주면서,
“새로 취직하는 곳에서 맘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다시 돌아오게나”
라는 말을 항상 하였기에 일단 토우도우 가문[藤堂家]을 떠났더라도 다시 돌아와 예전 봉록을 그대로 받은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타카토라는 이름있는 무사를 자신의 가신으로 삼는 것에도 노력하였다. 센고쿠 시대에 탑 클래스 급의 무용을 자랑하던 와타나케 칸베에[渡辺 勘兵衛]를 2만석으로 데리고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쟁터에서는 무명잡배 100명보다도 명성이 자자한 와타나베 칸베에 쪽이 적에게 더 공포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 타카토라의 생각이었다.

 타카토라의 이름이 갑자기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은 히데요시가 죽은 다음부터이다. 혼돈스러운 정세 속에서 타카토라는 그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주인 고르기를 행했다. 타카토라는 히데요시 사후의 천하인(天下人)을 이에야스[家康]로 보고 자주 친해지려고 접근하였으며[각주:5], 그러기 위해 이에야스와 대립하고 있던 사람들의 정보를 크건 작건 세세히 이에야스에게 보고하였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무리가 꾸미던 이에야스 타도 계획을 밀고 한 것도 타카토라였다. 선택 받은 이에야스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죽어 히데요리[秀頼] 후견자로 사실상 No.1 실력자가 되자, 모반을 꾸몄다는 이유를 대며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토시이에의 후계자]와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에게 인질을 바치게 만들었다.
 
이에야스가 이렇게 인질을 얻도록 만든 것이 타카토라였다. 자신도 나서서 동생 쿠라노스케 마사타카[蔵之助 正高]를 에도[江戸]에 보냈다. 곧이어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이 다가오자 타카토라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있어 중대한 역할을 맡게 된다.

 1600년.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했다는 소식에 이에야스는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정벌 중이던 군사를 회군하였지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등의 부대가 오와리[尾張] 키요스 성[清洲城]까지 진출하였는데도, 이에야스 자신은 에도 성[江戸城]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선견 부대의 장수들의 동향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그들은 전부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 다이묘우[大名]들이기에, 갑자기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에게 돌아설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타카토라의 무대 뒤 활약은 이때도 펼쳐지게 된다. 이에야스가 에도 성에서 대기하도록 진언한 것도 타카토라였으며, 키요스 성에 있으면서 다른 장수들의 동향을 시시각각 에도에 보고한 것도 타카토라였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러한 타카토라의 정보에 따라 안심하고 에도를 출발하였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9월 15일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동서(東西) 결전의 막이 올랐다. 여기서도 타카토라의 수면 하 공작이 빛을 발한다. 타카토라의 부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지휘아래서 서군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부대와 싸웠지만 차츰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반이 형세를 역전시켰다. 마츠오 산[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코바야카와 부대가 오오타니 부대의 옆구리를 찌른 것이다. 그리고 오오타니 부대에 속해 코바야카와를 대비하기 위해 배치했던 쿠츠키[朽木], 와키자카[脇坂], 오가와[小川], 아카자[赤座] 등의 약소 다이묘우마저 코바야카와에 동조하여 오오타니를 공격한 것이다. 이 약소 4명의 다이묘우가 배신하도록 사전에 공작한 것이 타카토라였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활약으로 인해 타카토라는 8만석에서 단번에 이요[伊予]의 반인 20만석으로 가증되었다.

 이에야스에 대한 타카토라의 헌신은 계속 이어졌다. 앞서 언급된 동생 마사타카[正高]에 이어, 1606년에는 다른 다이묘우들보다 앞서 처자식을 에도에 보냈을 뿐만 아니라, 휘하 가로[家老] 4명의 자제들까지도 에도에서 살게 만들었다.

 타카토라의 헌신적인 자세는 이에야스가 죽어서도 이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막부(幕府)에 대한 충성으로 닛코우[日光]에 이야야스 묘소 선정, 건물 설립 등에 조력하였으며, 에도 우에노[上野]에는 칸에이 사[寛永寺]가 세워졌을 때에는 지금도 남아있는 우에노 토우쇼우 궁[上野東照宮][각주:6]을  만들어 바쳤다.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1556년 오우미[近江] 아자이 군[浅井郡] 토우도우 향[藤堂郷]에서 태어났다[각주:7]. 아자이 가문[浅井家] 멸망 후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가 1594년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섬겨 이요[伊予] 우와지마[宇和島]에 7만석. 1597년 제2차 조선침공[각주:8]에서는 수군(水軍)으로 출동.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이요[伊予]의 절반을 하사 받았으며, 오오사카 전쟁[大坂の役]에서 세운 공적으로 이가[伊賀], 이세[伊勢] 거기에 더해 시모우사[下総] 카토리 군[香取郡]을 합쳐 총 32만3900여석의 영지를 거느린다. 1616년 4월 17일 죽었다. 75세.

  1. 아자이 가문[浅井家]과 아츠지를 떠난 것은, 두번 다 성질을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다투다 칼을 뽑아 부상을 입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오다 노부즈미[織田 信澄]는 이소노 탄고노카미의 양자였기에, 이소노가 노부나가에게 쫓겨난 뒤 그대로 노부즈미를 섬기게 아닌가 싶다. [본문으로]
  3. 노부즈미가 살해당하기 이전에 노부즈미와 결별하였다. 결별이유는 뭔가 맘에 안 들었기 때문이라고만 한다. [본문으로]
  4. 사족으로 만약 저였다면 둘 다 쫓아 냈을 것입니다. 도박이건 유녀건 앞뒤 가리지 못 하는 놈들이기에 앞길이 암담하긴 마찬가지. 오히려 도박이 더 맘에 안 듭니다. 주위에 도박에 미친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피하시길. [본문으로]
  5. 그 이전 히데요시의 정무소였던 쥬라쿠테이[聚楽第]의 이에야스 거처를 건축한 것이 타카토라로, 이때부터 친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에도에 있던 토우도우 저택[藤堂藩邸]에 만들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7. 이누가미 군[犬上郡] 혹은 코우라 군[甲良郡] 출신이 더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정유재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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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0.08.30 08: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오랜만에 보는 새 포스팅의 느낌이란 이런 것이군요!
    독자들을 갈증에 시달리게 하기 위해 일부러 장치를 마련하셨다고 믿겠습니다. 무정한 분 같으니(..응?)

    일본에서 도도하면 가장 빠르게 생각나는 것은 다카토라와 헤이스케가 아닐런지요. 다카토라는 이순신에서의 굴욕 덕분인지 그나마 대중에게 더 유명한 느낌이 듭니다.

    다카토라는 7번이나 주인을 바꿨지만 사람됨됨이를 보아 주인을 섬길때는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섬겼다는 느낌이 듭니다.

    사족입니다만 유녀와 도박에 빠진 이야기를 하셨는데, 도박에 빠진 자의 경우에는 저도 써볼 의향은 있습니다. 인생은 도박판이니까요. 승부사라고 완곡하게 바꿔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후후) 아, 그리고 각주 5번에 '타카노라'라고 쓰셨네요. 첫 댓글을 다는 자는 오타도 제일 처음 지적하는 영예를 누릴 수 있어서 참 좋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8.30 2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말 죄송합니다. 늙은 것이 그저 게을러서....

      토우도우[藤堂]하면 말씀하신 이름에 더해 전 개인적으로 토우도우 효우에[藤堂 兵衛]가 추가로 떠오르는군요. 지상 최강의 교장[校長]에게 한 칼에 두동강이가 나도 죽지 않는 양반입죠.

      초반에 지 성질머리 못 참고 뛰쳐 나온 것을 보면 히데나가 이후에나 열과 성의를 다 했나 봅니다.

      인생은 도박판이다!!라고 외쳐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만큼 판돈(빽이라던지 돈이라던지)이 있어서 성공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 같더군요. 거기에 휩쓸리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꼼꼼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얼릉 고치겠습니다.

  2. Gyuphi IV 2010.08.30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세키가하라 이전에 가봤을때 서군 패배조(...)들 포진터 한꺼번에 몰린데를 보긴 했는데 세부공작은 이녀석 때문이었던가(...) 서군측에 있어서는 정말 눈엣가시었겠군요(...) 초전에서 잘 싸우던게 다 망했으니(...)

    시간당 6000엔의 아가씨와 자금운용의 묘에 따라 같은 금액으로 수시간 이상 버틸 수 있는 게임센터 파칭코를 비교해 본다면 도박쪽에 미친 친구가 묘하게 재능에서 앞선다는 느낌을 받긴 합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8.30 23: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책에선 그렇다는데... 다른 곳에선 그렇다고 한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책의 신뢰도야... (번역하고 있는 제가 할 말은 아닙니다만...^^; )

      일본에 있을 때, 파친코에 빠진 유학생을 보았습니다만... 그분을 말리려 그분 부인께서 파친코에 갔다가 같이 빠져서 부부가 함께 파친코를 하더군요.....결국...

      파친코가 지금도 그때와 같은 시스템인지 모르겠지만, 가장 소액인 3000엔짜리 카드는 금방 사라지더군요. ^^ 6000엔으로 그 이상 불릴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같은 경우라면 아가씨에게...(퍽~)

      재능은 모르는 거라 생각합니다. 단순히 파친코에 특화된 재능으로 다른 곳에는 무능할 수도 있으니까요.

      여자건 도박이건 자기 일을 내팽게친 상태에서 이미 아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같음 차라리 자기 일 내팽게치지 않고 승부욕 있는 사람을 찾는 노력을 더하겠습니다.

  3. 1 2010.09.02 1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읽었습니다. 언제 올라오나 한달에 몇 번씩 들어왔는데 드디어 올라왔네요!
    계집질, 도박 둘 다 뭐. 근데 보통 음주까지 세 개 같이 하지 않습니까?ㅋ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9.04 2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서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찾아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뭐든 적당히만 하면 스트레스 풀기도 하기에 나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적당을 넘어서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입죠. 공자할배도 그랬다고 하더군요. 뭐든 과하면 부족한만 못하다고 했다니까요.

  4. 정동희 2010.09.09 1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간만에 글 정말 잘 봤습니다
    다카토라 이 놈은 정말... 전국시대에서도 보기 드물게 흥미로운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 놈을 모사꾼, 기회주의자 수준으로만 생각했는데, 나름 인생은 열심히 살았더라구요
    만화책 '센코쿠' 인가 에서는 의외로 상당한 무용의 인물로 묘사했더군요(근거가 있는 모양입니다)

    다카토라가 주인을 여러번 바꿨다지만 역시 주인이라면 히데나가가 떠오르는데
    저도 직장생활 10년하면서 여러가지 느낀 바가 있지만
    이 히데나가를 섬길때가 이 인물의 최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나중에 이에야쓰를 섬기면서 더 출세를 하긴 했지만, 뒤로 욕도 많이 먹었으니)

    다카토라의 출신이나 그 간에 섬긴 주인(이소노, 노부즈미)을 보면 참 재수가 없었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던 그가 히데나가를 만나면서 앞길이 확 트인거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9.11 11: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타카토라는 키와 덩치가 크다는 기록과 그가 죽었을 때 살펴보니 수 많은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보면 무용도 꽤 뛰어났을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의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인한 실패 등을 히데나가 밑에 와서야 경험으로 살린 것 같습니다.

    • 정동희 2010.09.13 1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젊어서 사람 죽이고 도망친 건 도시이에 하고도 비슷하네요
      제가 늘 주장하지만 역시 인간은 여러가지 경험을 통해서 바뀐다는...
      젋어서는 욱해서 사람 죽이고 했지만, 나이 들어서는 엄청 신중해 질 수도 있다는...

  5. 정동희 2010.09.09 16: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랄까... 그 동안 전망도 안보이고 딱히 실력도 없는 그저 그런 중소 하도급업체 부장정도로 근무하다가
    갑자기 초 일류 대기업 회장의 동생 회사에 임원급으로 입사를 하게 됐다고나 할까요

    말이 동생 회사지 사실은 본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고, 사세(영지)도 상당하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빵빵하고, 주인도 능력있고...
    그야말로 가진 능력을 보여주며 도약 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만났다랄까...

    특히 시코쿠 원정은 그 절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마 히데요시가 직접 참전하지 않은 최초의 대규모 원정으로 생각되는데, 글자 그대로
    회장의 대리인으로 부회장(히데나가)이 프로젝트의 총책을 맡았고,
    히데나가가 그 밑에 수석 중역이었으니, 이 때의 감개가 어떠했을지...
    특히 도중에 일(죠쇼카베 공략)이 지연되자 회장이 직접 나서겠다 했는데
    이 때 히데나가가 처음으로 제가 직접 나섰는데 체면좀 살려 주십쇼 하면서 거절했잖아요

    이 때의 기분도 생애에 다시 느끼기 어려운 쾌감이 아니었을까 생각 됩니다

    그리고 뒤 이은 규슈 정벌에서도 별동대(10만)를 이끌고 전공을 세웠고,
    누가 보더라도 히데요시 정권에서의 이인자는 히데나가
    히데나가의 오른팔은 다카토라 라고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도쿠가와 정권 하에서의 몇 십만석이 뭐 대단하겠습니까)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9.11 11: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와 지금을 좋은 예로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확실히 히데나가의 오른팔 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히데나가가 죽고 난 뒤 히데나가의 후계자인 히데야스[秀保]의 대리인 격으로 임진왜란에 출정한 것을 보면 야마토 토요토미 가문[大和豊臣家]에서 지위는 수석가로급이었듯 합니다.

    • 정동희 2010.09.13 1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나가도 보통 인물이 아닌데
      그 가로격으로 발탁이 됐다면 다카도라가 여러가지로
      능력을 보였던 모양입니다
      사실 그 전에 근무했던 곳을 보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데 말이죠...(최종 이력이 쓰다 노부즈미 밑에 있다 나온...)
      암튼 다카도라나 시마사콘이나 히데나가집이 잘 됐으면
      훨씬 역사에 크게 남았을 것 같은데요
      능력도 능력이지만 역시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6. 정동희 2010.09.09 16: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구나 히데나가는 어쩄든 히데요시 보다 나이가 적고,
    히데요시는 마땅히 후계자도 없으니
    다카토라의 마음속에 원대한 포부와 계획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주인(히데나가)이 갑자기 졸 하고,
    그 후계자 마저 얼마 살지 못했으니,
    이 때 절망감과 상실감이...

    미쓰나리 처럼 일찌 감치 엘리트로 발탁되어 본사 중역을 했던 것도 아니고,
    도라노스케나 이치마스 처럼 인척관계로 승승 장구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런 중소기업 전전하다 마침내 줄을 잡아 대권까지 바라보게 됐는데
    한순간에 다시 퇴물 뒷방 늙은이가 되었으니...

    그래도 은거했다가 다시 나와서 히데요시, 이에야쓰를 섬긴 걸 보면
    젊어서 부터 인고의 세월을 거치며 쌓은 공력이 헛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간만에 글을 보고 기뻐서 두서 없이 말이 많아졌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9.11 1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중이되겠다고 세상을 등졌던 것을 히데요시가 설득하여 자기 휘하로 만든 것을 보면 히데요시에게도 인정받았던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헛된 공력은 아니었던 듯.

      감사한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 꾸준히 글을 올리겠습니다.(...근데 전 이 주말에도 일하고 있어요...T.T)

    • 정동희 2010.09.13 1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요시의 인정은 당연한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시코쿠 정벌 사령관, 큐슈 정벌 별동대 사령관의
      수석가로격이니...
      지금으로 따지면 대표PM이나 본부장이 있지만 실제 업무는 그 밑에 실무수석이 많이 하잖아요
      히데요시 특기가 옆집 기둥뿌리 뽑기인데, 자기 동생이자 정권이 2인자 격인 히데나가의 심복을 몰랐을 리 있을까요

      암튼 그건 그렇다 치고
      토요일까지 근무로 노고가 많으십니다
      풀뿌리 민초의 삶이 참 고단하네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키운 무장들[秀吉の子飼い] 중에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무장이다. 둘 다 맹장(猛將)으로 유명한 것에 더해, 히데요시를 섬기게 된 방식과 토쿠가와 정권하에서 멸문하게 되는 운명 등 둘은 비슷한 경력을 걸었다. 단지 키요마사 쪽은 아들 타다히로[忠広] 때 삭탈관직 당하지만, 양쪽 다 토요토미 은고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였기에 막부(幕府)가 판 함정에 빠지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키요마사와 같은 오와리[尾張] 출신이다. 나이도 마사노리가 한 살 연상 혹은 동갑이라고 한다. 히데요시와는 아비 측의 연으로 어렸을 적부터 히데요시를 섬겼다고 한다. 마사노리가 나무통 직공의 아들로 부친이 히데요시의 아비와 아비 다른 형제라고 하지만 속설이기에 확증은 없다.

 어쨌든 그 즈음에 이치마츠[市松]라 불렸던 마사노리는 츄우고쿠[中国] 공략군의 사령관으로 하리마[播磨]의 히메지 성[姫路城]를 본거지로 하였던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히데요시도 또한 모친 쪽 연으로 데려온 카토우 토라노스케[加藤 虎之助 = 키요마사]와 마찬가지로, 이 이치마츠를 자신의 팔다리로 만들기 위해 곁에 두고 가르쳤다.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의 기대대로 용맹한 무장의 재능을 보이게 된다.

 1578년 하리마 미키 성[三木城] 공략 때 18살의 나이로 데뷔하여 공적을 세웠고, 그 후에도 톳토리 성[鳥取城],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각주:2]]에서 공을 세워 명성을 높여갔으며, 1583년의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의 용장 하이고우 이에요시[拝郷 家嘉]를 쓰러뜨려 소위 ‘칠본창(七本槍[각주:3])’이라 용명을 얻는 수훈을 세워, 상으로 혼자서만 5000석을 하사 받아, 칠본창 중 다른 멤버들이 3000석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그가 세운 공적이 다른 멤버들을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알 수 있다.

 그 후에도 마사노리는 히데요리를 따라 각지를 전전. 임진왜란 때도 조선에 출진했지만 1594년에는 귀국하여, 다음 해인 1595년 히데요시에게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코우야 산[高野山]에서 할복을 명령 받았을 때 검시관에 임명되었다. 전쟁터의 마사노리는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한편으로 인정이 깊은 성격이기도 했다. 특히 은혜를 입은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다. 히데요시의 애미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가 병에 걸렸을 때는 잠도 자지 않고 간호했다고 하며, 히데츠구가 배를 갈랐을 때는 그 가엾은 운명에 눈물을 흘렸다고도 한다.

 그 후 마사노리는 히데츠구의 영지였던 오와리 키요스[清須] 24만석으로 가증(加增) 받았는데, 이때 마사노리는 어렸을 적에 자신을 귀여워 해주던 지모쿠 사[甚目寺]라는 절의 늙은 비구니를 찾아, 예전 은혜를 갖는다며 먹을 것을 계속 보냈다. 더구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로시마[広島]로 옮기게 되자, 새로 오와리의 영주가 되는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각주:4]]의 가로(家老)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종래대로 늙은 비구니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후 떠났다 한다.

 인정가(人情家)이기도 한 마사노리는 그런 만큼 격정가(激情家)이기도 했다.
 히로시마로 옮겼을 때의 이야기로, 어느 날 측근 중 하나에게 잘못한 것이 있어 이에 화가 난 마사노리는 이 측근을 굶겨 죽이고자 성 한 켠에 가두어 놓고 식사반입을 금지시켰다. 시간이 흘러 마사노리가 그 측근의 생사를 살펴보자 어찌된 일인지 이전과 변함이 없었다. 마사노리는 누가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냐고 열화와 같이 화내며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다도의 자리에서 시중드는 중[茶坊主]이, 자기가 그러했다며 그 측근은 예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기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측근이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억지로 먹였다고 하며, 측근을 대신해서 자기가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사노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라며 중은 물론 유폐했던 측근까지 죄를 용서하였다.

 이러한 마사노리의 격정은 토요토미 정권의 행정관[奉行]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에 대한 격렬한 증오로도 나타나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600년. 마사노리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따라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토벌군에 종군하였는데, 이시다 미츠나리 거병 소식에 따라 열린 대책회의인 ‘오야마 군의[小山軍議]’가 열렸을 때의 일이다.
 이에야스는 이미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나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 유력 다이묘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는 하였어도, 진중에 있던 다이묘우들 대부분은 토요토미 가문에게 은의를 느끼는 다이묘우였으며 게다가 오오사카[大坂]에 처자를 두고 있었다. 히데요리[秀頼]의 명령을 바탕으로 한 미츠나리의 거병이었기에 다이묘우들이 동요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렇게 말했다.
 “미츠나리와 한편이 되더라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소. 즉각 오오사카니 돌아가시길.”
 자리에 있던 다이묘우들은 이것저것 재보고 눈치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미츠나리의 거병은 히데요리 공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불과 8살의 어린 주군께서 그러한 생각을 하실 리가 없소. 즉 미츠나리 놈의 잔꾀일터.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이 마사노리는 나이후[内府=이에야스]와 함께 할 생각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 마사노리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 다른 다이묘우들도 잇따라 이에야스에 협력하겠다고 나섰다. 죽은 히데요시의 은혜를 가장 많이 입고 또한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생각함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마사노리가 이시다 미츠나리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이미 천하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던 이에야스의 앞길을 크게 넓혀준 것이다.

 세키가하라 결전에서도 마사노리는 최전선에서 전투의 시작을 알렸고 맹렬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였기에 승리한 동군에서 가장 큰 전공을 세운 무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것을 마사노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는지 전투 직후 어느 사건을 너무도 강인하게 해결하고자 하여 마사노리의 앞날에 중대한 화근을 남기게 된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를 거둔 후 마사노리는 쿄우토[京都]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연락할 일이 있어 사자(使者)인 사쿠마 카에몬[佐久間 加右衛門]를 쿄우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히노오카[日ノ岡]의 검문소를 점거하여 왕래하던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던 토쿠가와의 직속 신하[旗本] 이나 즈쇼노카미[伊奈 図書頭] 휘하의 부하들과 말싸움을 하다가 이나의 부하들에게 사쿠마는 몽둥이에 맞고 쫓겨나 버린 것이다. 사쿠마는 마사노리에게 돌아와 사정을 보고하고 난 뒤, 마사노리의 허락을 받고 배를 갈라 자결하였다. 마사노리는 이때,
 “반드시 이나 즈쇼의 목을 자네의 무덤으로 가져오겠네”
 라고 눈물을 흘리며 사쿠마의 자결을 허락했다고 한다.
 마사노리는 이에야스에게 사쿠마의 목을 보내고선, 이나 즈쇼의 목을 달라며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재촉하면서 토쿠가와 측의 어떠한 타협안도 거부하여 결국 이나 즈쇼의 배를 가르게 하였다.

 어쨌든 마사노리는 세키가하라에서의 전공으로 아키[安芸], 빙고[備後] 2개 지역 49만8천2백석이라는 큰 영지를 얻게 되지만 이 단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시세가 변한 것을 깨닫지 못하였고, 이에야스가 막부를 연 뒤에도 오오사카의 토요토미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여, 1608년에 히데요리가 천연두를 앓았을 때는 급거 히로시마에서 오오사카로 달려가 막부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간호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일어나지만, 마사노리는 겨울과 여름 양 전투에서 에도 성 잔류[留守居]를 명령 받았기에 전쟁터에는 나가지 않았다. 물론 토요토미 가문을 소중히 여기는 마사노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막부의 처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토요토미 측이 은밀히 마사노리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마사노리는,
 “이에야스는 야전이 특기로 공성전은 잘하지 못한다. 오오사카 성[大坂城]은 돌아가신 타이코우[太閤] 전하[각주:5]가 세우신 천하제일의 성이니 이를 굳게 지키면 낙성되는 일은 없을 것”
 이라고 사자(使者)에게 말했다고 한다. 또한 오오사카에 있는 후쿠시마 가문[福島家]의 비축미(備蓄米)도 맘대로 쓰라고 했다 한다. 직접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내심 히데요리[秀頼]를 위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오사카 공성전으로 토요토미 가문은 멸망하여 토쿠가와 정권의 기반이 강고히 다져지자, 토요토미 가문과 끈이 강했던 다이묘우들에 대하여 매서운 숙청정책이 시작되었다.
 1617년 마사노리는 법도(法度)에 따라 홍수로 파손된 히로시마 성[広島城] 보수공사를 해도 되는지 막부에 요청하여, 노중(老中)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각주:6]]에게,
 “뭐 조금 정도 보수하는 것이라면 괜찮겠죠”
 라는 구두 언약을 믿고서 정식 서류를 제출하지 않은 채 보수공사를 시작하였지만, 결국 이것을 ‘모반의 징조’라는 생트집에 잡혀, 1619년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 4만5천석[각주:7]으로 감봉되었다.

 더구나 마사노리가 죽었을 때 막부의 검시관을 기다리지 않고 그 유체를 화장하였다는 이유로 후쿠시마 가문은 모든 영지를 몰수당하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1561년 오와리[尾張] 키요스[清須]에서 태어났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5000석을 하사 받았으며, 1585년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에 10만석, 1595년 오와리 키요스 24만석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공적을 세워 히로시마 49만8천200석이 되었지만, 1619년 실각, 4만5천석으로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감봉. 1624년 죽었다. 64세.

  1.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후 토쿠가와 가문의 부하가 된 다이묘우. [본문으로]
  2.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죽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와 히데요시가 싸운 전투. [본문으로]
  3. 1583 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4.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
  5. 히데요시를 말한다. [본문으로]
  6.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아들. [본문으로]
  7. 이 중 에치고[越後] 우오누마 군[魚沼郡] 2만 5천석은 아들 타다카츠[忠勝]의 영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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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동희 2009.12.28 1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싸움에는 능했지만 정치에는 서툴렀다고 해야 할까요
    인생 후반기에 너구리 영감에게 철저히 이용만 당하고...
    사기꾼한테 사기 당하면서도 난 사기당한게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순진남이랄까

  2.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09.12.28 10: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고쿠 시대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보처럼 인정에 휘둘리는가 하면 때때로는 어느 쪽이 득실이 있는가를 파악하는 능력도 뛰어났으니까요.(아무리 미쓰나리가 미워도 서군이 압승을 거둘 상황이었으면 서군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마사노리의 성품상 동군에 잔류해서 자폭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도요토미 가문이 불꽃처럼 번졌다가 사라진 것처럼 키워낸 이들도 불꽃처럼 사라지는 걸 보면 역사란 재미있습니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사람들이 빚어내는 이야기라서 그런 것이겠지요.

    P.S : 加藤 嘉明는 가토 요시아키가 맞는 건가요, 요시아키라가 맞는 건가요? 요새는 아사이가 '아자이'로 바뀌었다가 다시 어느 학자가 아사이가 맞다고 하기도 하고. 아직도 논란인 山內가 야마우치/야마노우치가 맞는가 논쟁도 있고. 사람들이 만드는 일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 )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8 14: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땠을까요... 이시다에게 과연 넘어왔을지...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것 같아서, 이 인간은 좀 조심스럽군요.

      두번 째 문단은 좋은 말씀이십니다.

      ps;저도 보는 책마다 달라 헷갈리더군요. 일단은 양 쪽 다 괜찮지 않을까요? ^^; 일본 사람들 이름 읽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 정동희 2009.12.28 15:54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 뭐...
      전에 일본사 강의 들을 때,
      왜 겐페이 시대에는 성뒤에 노를 붙였습니까
      (ex : 후지와라노, 다이라노, 미나모토노 )
      라고 교수한테 물어 보니
      당시에는 개인의 이름보다 어느 집안 출신이냐를 중시해서
      그렇게 불렀다(뭐 그 이후에는 안그랬나 마는...)
      좀 캐 물으니 정확한 사유는 안나오더군요 딱히 언제부터 그랬다 라는 것도 없고

      또 일본 사람들은 대충 한자나 가나로 이름 적고 자기가 부르고 싶은대로 부른다네요 어느정도 규칙은 있지만 그게 꼭 그렇지는 않는다는...

      아사이나 아자이, 야마우치나 야마노우치
      뭐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너무 지엽적인거 가지고 이게 맞다 저게 맞다
      굳이 따질 필요가 있나 싶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8 2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동희님께//
      조금 이야기가 샙니다만 순서상 ^^

      후지와라 -> 우에스기[上杉], 사토우[佐藤]
      타이라 -> 호우죠우[北条], 치바[千葉], 오다[織田]??
      미나모토 -> 아시카가[足利], 닛타[新田]...
      로 나뉘어 지듯이, 후지와라, 타이라, 미나모토를 저는 우리나라의 김씨, 이씨, 박씨... 등등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거기에 가령 저같은 경우 함창 김씨 이니, 일본식으로 이름을 쓴다면 '함창 태진'....이 되지 않을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

      후지와라나 겐지, 헤이시가 각각 안 쓰이게 되는 상황 등을 살펴 보면 나올 것도 같습니다(헤이시가 太政大臣을 한 다음 멸문한 다음 '타이라'라고 칭하지 않았다거나, 겐지가 将軍을 한 뒤 '미나모토'를 직접 칭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식으로 뭔가 법칙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야~ 법칙은 있습니다.(가령 지금도 이름으로 쓸 수 없는 한자가 있다고 하네요)

      그리고 그 사람이 원하는 식으로 불러 주는 것이 올바르다 생각합니다.
      가령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는 당시에 서로간의 편지나 족보 등에 '야마우치 카츠토요'라고 되어 있다고 하니, 그렇게 불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면서도 저는 입에 배었는지 '야마노우치 카즈토요'라고 하지만요)

  3. Gyuphi IV 2009.12.28 2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뭔가 이 사람은.. 뭐 결과론적인 말입니다만 중요한 순간의 어리석은 선택의 반복으로 인생 쫑낸 것 같이 느껴지더군요. 명줄이라도 카토 키요마사처럼 짧았어도 이렇게나 당대에 망가지진 않았을것을.. 역시 바보라서 별 걱정도 생각도 없어서 오래 산건가 싶기도 싶기도 하고 말이죠-_-;;

    그런데 정말이지 오사카성 말입니다만.. 뭐 지금의 공구리 보수 이전의 규모는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만, 후쿠시마 마사노리 말 마따나 오사카측이 선택에 전연 미스 없이, 굳게 지키고 있었다면 낙성당하지 않았으려나요, 해자를 메운다는게 정말이지 일반적인 상상 이상의 도쿠가와가에게 전술적 이득을 안겨준 행위였던가, 싶네요. (라곤 해도 나고야성 가보면 그 해자도 참 깊다 생각드는데 당시 규모의 오사카성이었다면..)

    후세인이란 그러고보니 참 편한듯 합니다. 이정도 세월이 지나면 그 당대의 고민따윈 크게 의식않고 막 말해도 잡아가는 사람도 없으니까요(아, 이건 참 역사에 흥미있는 사람들의 특권@.@)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30 0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 곳을 정하면 무작정 그 방향으로만 냅다 뛰는 성격이 아닐지... 왠지 저에겐 그렇게 느껴지더군요.

      전쟁과 성 쪽은 제가 좀 딸리는 편이라 말하기 뭐합니다만, 토쿠가와 쪽의 오오사카 성이 이시가키[石垣]가 더 높고 텐슈[天守]도 크고 높으며, 성 면적 자체도 조금 더 커졌더군요. 그렇게 만든 놈이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라고 하던데, 직접 오오사카 공성전에 참가한 놈이었던 만큼, 뭔가 허술한 점을 찾았기에 히데요시와는 다른 형태의 성을 만들었다고도 생각합니다.(뭐 대포가 쓰인 것도 있었고 말입니다)

      그쵸. 당시에 그 사람 앞에서 대놓고 이야기 했다간 斬り捨て御免이었을테니까요. ^^;

  4. 맹꽁이서당 2010.01.01 2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두번째 분 (상?장안) 님의 두번째 문단에 공감이 가네요.
    (근데 도요토미 덕택에 출세한 인물 들 중에서도, 도요토미 본가나 가토, 후쿠시마 와는 달리 에도 막부 시대에도 건재했던 가문도 있을 법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하여튼 올 한해도 좋은 글 잘 읽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02 0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사가미 나가야스[相模 長安]'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 사가미님 ^^

      호소카와 가문[細川家]가 우선 떠오르는군요. 토요토미 덕택에 출세한 가문으로. 뭐 마에다 가문[前田家]도 100만석 이상 얻어 떵떵거리며 살았고, 아사노 가문[浅野家]이라던가, 하치스카 가문[蜂須賀家], 야마우치 가문[山内家]도 그 범주에 포함될 듯.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저 역시 올 한 해 잘 부탁드립니다. ^^

    •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0.01.08 08: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가미 나가야스로 읽는 것이 맞습니다.
      저같은 소인에게 관심을 가져주시니 감사할 따름. (헤헤)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들어선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가신들을 이끌고 말에 올라 에도[江戸]의 대로를 가로지르는 히고[肥後] 54만석의 다이묘우[大名] 카토우 키요마사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에도 시민들 사이에 화제를 되었다.
 키요마사는 신장이 6척[각주:1]을 가볍게 넘고[각주:2]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에 입이나 턱 주위에는 수염이 무성하게 덮인 대장부였다. 허리에는 1m7cm의 큰 칼[大刀]을 차고, 어깨높이가 180cm 넘는 괴물같이 거대한 말에 올라타 있었다 한다. 무엇보다 당시의 말은 어깨높이 120cm가 보통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키요마사에게서 고(故)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秀吉]의 직속 장수, 무공이 뛰어나 ‘칠본창[각주:3]’이라는 이명을 얻은 무장, 임진왜란 시 일본의 맹장에 걸맞은 보습이라 보고 나중에는 유행가까지 만들었다.

에도 깡패 모가리에게 거칠 것은 없겠지만 밤색 제석만은 피하시오
江戸のもがりにさわりはすとも、よけて通しゃれ帝釈栗毛
 ‘에도 깡패 모가리[江戸のもがり]’는 당시 에도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공갈 깡패를 말하며, ‘밤색 제석[帝釈栗毛]’는 키요마사의 애마를 말한다. 안하무인인 깡패라도 키요마사가 타는 말에는 대적할 수 없다는 말이리라.

 키요마사는 센고쿠[戦国] 무장 중에서도 일화가 많은 사람인데, 특히 조선에서 호랑이 퇴치는 널리 알려져 있다. 십문자 창을 휘둘러 호랑이의 숨을 끊었는데 그때 호랑이는 창의 한쪽 날을 물어서 뜯었다는 이야기인데[각주:4], 이는 에도 시대 말기의 창작으로 처음 실린 책에서 키요마사는 철포를 쏘아 호랑이를 잡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키요마사의 통칭은 토라노스케[虎之助]로  범 호(虎)자가 들어간다.

 키요마사는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尾張] 나카무라[中村] 태생이라고 하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키요마사의 모친은 히데요시의 모친(오오만도코로[大政所])과 사촌지간이라고 한다[각주:5]. 그런 연으로 키요마사는 어릴 적에 당시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주였던 히데요시에게 맡겨졌다. 이때부터 문자 그대로 히데요시가 직접 키운 가신으로서의 키요마사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다.
 히데요시 자신도 노부나가[信長]가 아니었다면 출세할 수 없었을 정도로 미천하였기에, 친척이나 히데요시 가문을 대대로 섬긴 가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키요마사와 같이 조금이라도 핏줄이 닿는 사람을 교육시켜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려 하였다. 그런 만큼 키요마사의 출세도 빨랐다.

 1576년 15살 성인식이 있던 해에 170석을 받았으며[각주:6], 1581년 6월 20살에 톳토리 성[鳥取城] 공성전에서 데뷔전[初陣]을 치르게 되는데 키요마사는 정찰 나갔다가 공을 세웠고, 이후 히데요시를 따라 각지를 전전.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칠본창(七本槍)라 일컬어지는 전공을 세워 일약 3000석[각주:7]이 주어진다. 지위도 철포 150정, 히데요시가 파견하는 무사[与力] 20명을 휘하에 둔 중급 장교[物頭]로 승진하였다. 이 정도되면 당당한 무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례적인 출세에는 히데요시의 덕도 있었겠지만 그 이상으로 키요마사 자신이 무장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후도 키요마사는 히데요시를 따라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役], 큐우슈우 정벌전[九州の役] 등에 참전하여 1588년에는 일거에 히고[肥後] 절반이 주어져 드디어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나머지 반을 하사 받은 것이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이다.

 1592년 조선 침략[각주:8]에서 키요마사는 코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선봉에 임명되어 서로 경쟁해 가며 파죽지세로 진격하였지만, 곧바로 의병(義兵)이 일어나고 명나라가 원군을 파병하자 전황이 악화되었다. 거기에 전쟁정책에 관해 대륙정복론자인 키요마사와 화평론자인 코니시 유키나가 사이에는 자연스레 반목이 생겨, 결국에는 작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원래 둘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소위 무공파와 문치파로 대립하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키요마사의 신상에 위기가 생긴다.

 조선에 가 4년째인 1595년.
 갑자기 히데요시에게서 귀국을 명령 받은 것이다. 그것이 히데요시의 분노를 나타내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귀국명령은 일본군의 감찰[軍監]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이 작성한 키요마사의 행동보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시다의 보고는 전부 키요마사의 방자한 말과 행동을 비난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명령에 따라 키요마사는 후시미[伏見]로 돌아왔지만, 히데요시는 면담을 허용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키요마사는 다섯 행정관[五奉行] 중 한 명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에게 히데요시의 화를 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나가모리는 미츠나리와 화해하기만을 권할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키요마사는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냐며,
“하치만[八幡][각주:9]도 굽어 살피소서, 지부[治部][각주:10]놈과 평생 화해 따위 하지 않겠소. 그 놈은 조선에서 한 번도 싸우지 않은 주제[각주:11]에 남의 뒤따마만 까며 끌어내리려고만 하는 더러운 놈이다. 아무리 소인이 타이코우[太閤[각주:12]]에게 용서를 받지 못하고 배를 가르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지부 놈과는 화해는 하지 않겠소.”
하며 분노하였다고 한다.

 키요마사의 근신생활은 반년 정도 이어졌다. 그러던 1596년 7월. 킨키[近畿] 지방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 속설에 따르면 키요마사는 근신 중인 자신의 처지도 잊고 수하 200여를 이끌고 후시미 성에 와서 히데요시를 보호하며 성을 수비하였다. 이것을 안 히데요시도 노여움을 풀고 키요마사의 죄를 용서했다고 한다[각주:13] [각주:14]. 후세 연극 등에서 ‘지진 카토우[地震 加藤]'라 불리게 되는 명장면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키요마사의 명성은 한층 더 높아지게 되었다.

 1597년. 조선으로 재침공. 즉 정유재란이 시작되자 키요마사는 또다시 출정하여 이 해의 막바지에 가장 치열하고 처참한 전투를 치르게 된다. 유명한 울산성(蔚山城) 농성전이다.
 엄동의 12월[각주:15]. 4만4천이라는 명나라 대군의 포위 속에서도 키요마사는 철저항전 하였다. 성 안의 식량은 이미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더구나 명의 전법은 장기 포위전[兵糧攻め]이었다. 성 안에 있던 오오코우치 히데모토[大河内 秀元][각주:16]는,
 “매일 행전(行纏)[각주:17]이 흘러 내렸다. 처음엔 고쳐 맸지만 나중에 뭔가 이상하여 행전을 떼어 보자 다리에 살이 하나도 없이 뼈와 가죽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고 기록하였고, 명나라 기록에도 - 일본군은 종이를 먹고 오줌으로 갈증을 해소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듯이 성 안 일본 병사들은 굶주림과 추위로 인해 동상에 걸리는 사람, 얼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러한 지옥 속에서 키요마사도 죽음을 각오했는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 등 여러 장수들에게 보낸 편지에,
 “만약 낙성된다면 이런 모습들을 타이코우[太閤] 님에게 보고해 주길 바란다”
 고 썼다. 모우리[毛利], 나베시마[鍋島], 쿠로다[黒田] 등 여러 장수의 구원이 제시간에 도착하여 조선과 명의 군사들은 포위를 풀고 철퇴하였다.

 고군(孤軍)이면서 항전을 계속한 키요마사에게 적인 명나라 측도,
 “오랑캐[酋] 중에서는 가장 사납고 굳세다”
 “재능은 유키나가보다 몇 배나 뛰어나다”
 며 절찬하였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어 길었던 조선에서의 싸움도 끝났다. 키요마사에게 남겨진 것은 두 번에 걸친 전쟁 중에 한층 더 깊어진 이시다 미츠나리, 코니시 유키나가 등에 대한 증오뿐이었다. 이런 키요마사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의 편을 들 이유가 없었다.
 키요마사는 큐우슈우[九州]에서 동군 측에 서서 싸워, 코니시 유키나가의 거성 우토 성[宇土城]과 속성 야츠시로 성[八代城]을 공략. 전쟁 후 히고[肥後] 전부를 하사 받았다[각주:18]. 천하의 명성 쿠마모토 성[熊本城]의 축성에 임한 것은 다음 해인 1601년이었다.

 토쿠가와의 시대에 들어서도 키요마사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없었던 듯, 토요토미 가문 존속을 위해, 1611년 히데요리[秀頼]를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대면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쿠마모토로 돌아가던 도중 병에 걸려 귀성한 뒤 얼마 지나 죽었다. 그 죽음이 너무도 급작스러웠기에 독살설도 유포되었다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加藤 清正)]
1562년 오와리[尾張] 에치 군[愛智郡] 나카무라[中村]에서 태어났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合戦] 후
오우미[近江], 야마시로[山城], 카와치[河内]에 조금씩 3000석을 하사 받았다.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에 종군하여 히고[肥後]의 반인 25만석을 영유하였다[각주:19].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동군에 속하여 히고 54만석을 하사 받았다. 축성, 치수, 간척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1611년 6월 24일 죽었다. 51세.

  1. 6척3촌. 약 191cm. [본문으로]
  2. 5척3촌(161)이라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1583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4. 때문에 키요마사의 동상에 있는 창은 십문자창이 아니라 "ㅓ"자형 창이다. [본문으로]
  5.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한보[藩翰譜]에는 그렇게 실렸다 한다. [본문으로]
  6. 문서로 남아 있기로는, 1580년 히데요시에게서 하리마[播磨] 내에 120석을 받은 것이 초견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7. 오우미[近江] 내에 1800석, 카와치[河内] 내에 1097석, 야마시로[山城]에 50석...으로 약 3000석. [본문으로]
  8. 임진왜란. [본문으로]
  9. 무가(武家)의 수호신 [본문으로]
  10. 지부쇼우유우[治部少輔]. 이시다 미츠나리의 관직명. [본문으로]
  11. 행주산성에 참전하여 부상당했다. [본문으로]
  12. 타이코우[太閤]는 칸파쿠[関白]직에서 물러난 사람을 이르는 경칭. 즉 히데요시. [본문으로]
  13. 당시 키요마사가 히데요시의 안부를 묻는 편지가 있기에(직접 지켰다면 안부 편지 같은 것은 안 쓸테니), 실제로 달려가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14. 실제 키요마사 근신이 풀리는 데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주선 덕분이라 여겨지고 있다. [본문으로]
  15. 음력. [본문으로]
  16. 일본측에서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전말을 기록한 "조선 이야기[朝鮮物語]"의 저자. [본문으로]
  17. 정강이에 차는 각반....(저는 행전보단 각반이 익숙합니다만 '행전'으로 쓰라고 하네요) [본문으로]
  18. 단 후에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의 무대가 되는 아마쿠사[天草] 섬 등은 기독교도들이 많았기에 막부에 부탁하여 옆 지방인 붕고[豊後]의 세 개군(郡)과 교환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9. 19만~25만석까지 다양. 개인적인 추측으로 19만석은 키요마사에게 주어진 것이며, 3만석은 키요마사 편제 하의 히고 지역 호족[国人], 거기에 히고[肥後] 안에 있던 히데요시 직할령[蔵入地] 3만석을 키요마사가 대관(代官)이 되어 관리한 것을 포함하여 25만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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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12.18 15: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이전에 쿄토 갔을적 니죠성에 들른적이 있었는데 이사람이 단검품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추워서(1월-_-..)였을지도 모르겠다 싶긴 했는데-_-.. 아무래도 히데요시 코붕들(;)에겐 별 관심이 없었던 덕일지 모르겠다 싶네요.

    뭐 아무튼 숙적에서의 이미지는 정말이지 聖(;) 아우구스티노 유키나가(-_-..)의 반대역이어서 그런지 영 안 땡기던데 말이죠. 역시 창칼드는 캐러들이 제 취향은 아닌듯 합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18 23: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니죠우 성[二条城]하면 개인적으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 - 대정봉환한 장소 - 더군요.

      이외로(??) 키요마사는 재정과 무역에 밝은 인물이었다고 하더군요. 거기에 이름뿐이긴 해도 관직명이, 지금의 재무부 관료인 '카즈에노카미[主計頭]'. 창칼 뿐만이 아닌 듯 하더군요.

  2.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2.18 2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쿠가와나 오다의 사천왕 같은건 나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데
    칠본창은 왠지 창이 아니라 방패막이 7명 느낌이 들더군요. 히데요시 출신 때문인가...음;;;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18 23: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스케일이 달라서 그런 것 아닐까요? ^^

      가령 오다나 토쿠가와의 사천왕은 그 가문 전체의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이고, 칠본창 같은 경우 단지 일개 전투에서 공적을 세운 애들 뿐이니까요.

      히데요시의 칠본창은, 오다 가문의 '아즈키자카 칠본창[小豆坂 七本槍]'이나, 토쿠가와 가문의 '카니에 칠본창[蟹江 七本槍]'과 비교해야 할 듯 싶군요. 히데요시도 저 7이란 숫자에 맞추어 칠본창을 만들었을 수도 있고요.

  3. 朴先生 2009.12.19 15: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에이 게임에서는 왠만한 무장들이 통솔, 무력이 90이상이면 지력이나 정치는 거의 40이하로 버리는 편이지만 키요마사는 70정도는 돼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태합에서는 스킬은 차지하고, 대략 용장형, 검호형, 책사형, 내정형, 먼치킨형, 그냥 병X...정도로 구분하지만 키요마사는 먼치킨급은 아니나 내정에도 그런대로 쓸만하니...

    그냥 '변태'같습니다.

    불현듯 두산 베어스의 변태 스탯 '고영민'선수가 떠오르네요.ㅋ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19 17: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컴퓨터 바꾸면서 태합 설치를 않해서 잘 기억은 안나지만 키요마사는 꽤 쓸모가 있었던 듯한 기억이 나는군요.

      ps;요즘 야구를 안 봐서 고영민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거기다 좋아했던 팀이 LG인지라 두산하면...아이고 배 아퍼!!! 라는 느낌이 먼저 드는군요.

  4. 朴先生 2009.12.20 1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두산의 2번 타자로 타율은 높지 않지만 출루율이랑 장타율은 높고 갖가지 허슬 플레이에 자기 위치도 아닌데 어느샌가 달려가 플라이 볼을 잡아내는 이상한 선수입니다.

    저도 LG팬입니다. 몇년째 하위권을 맴돌아 직접 보러갈 기분도 안나지만요. 가면 실망만 잔뜩하고;
    잠실 가본지도 오래됐네요..
    내년엔 가을에 야구장 갈 수 있게되면 좋겠습니다 제발 좀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1 11: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엘지가 유지현 내칠 때 마음이 어느 정도 떠났습죠. 인위적인 세대교체가 얼마나 팀에 악영향을 끼치는지 좋은 견본이 되었다 생각합니다.

  5.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09.12.20 19: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인 전국시대 3대 수수께끼라면 히데요리의 아버지(생물학적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 그리고 '기요마사의 키'가 아닐까 싶습니다. 투구로 만인을 속인 것인지 아니면 진짜 거인인 건지. (만약 191cm라면 야마가타와는 최대 70cm까지 차이나는군요!!)

    기요마사는 히데요시가 아껴서 키워낼만한 사람이란 생각이 듭니다. 마사노리, 미쓰나리, 요시쓰구, 요시아키라, 나가마사, 기요마사. 히데요시의 손을 거친 장수들은 본바탕도 좋았겠지만 히데요시의 능력이 십분 발휘된 것 아니겠습니까? (이 능력이 어찌 후손을 보는 쪽으로는 없었는지.) 언급한 사람들 중 나가마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문이 박살나버렸지만. 그러고보니 다다히로의 정확한 가이에키 명분은 투서사건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혹시 다른 이유가 있었나요?

    한국인(당시 조선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위키디피아에서는 '쾌지나칭칭나네'가 기요마사 덕분에 탄생했다는 소개도 있구요.) 너무 작전수행을 열심히 한 덕분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 인물이 되어버렸다는 점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네요 -_-

    수능도 지나갔는데 언젠가 시간이 되면 구마모토와 나고야를 가보고 싶습니다. 기요마사의 유품인 우아한 명성들은 저에게 무슨 얘기를 해줄까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1 11: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가미님의 미스터리에 대한 제 주관적인 시각은....

      - 히데요리의 애비는 히데요시가 맞다고 생각하며,

      - 미츠히데의 모반은 노부나가의 시코쿠[四国] 정책 변경에 따른 아케치의 부하장수 사이토우 토시미츠[斎藤 利三] 주도로 일어난 일(....심하게는 미츠히데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죠)

      - 키요마사는...음.... 어떨까요. 조선왕조실록을 다 살핀 것은 아니지만, 키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냥 평범한 편은 아닐지...

      타다히로에 관해서는 일반적인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무엇보다 키요마사가 가상의 적으로 막부군에 대비한 영내 경영을 펼친 것이 가장 크지 않을지...나중에 사이고우 타카모리[西郷 隆盛]가 당시 최강이라 일컬어 지던 사츠마 군[薩摩軍]을 이끌고도 함락시키지 못한 쿠마모토 성은 물론, 정부군이 큐우슈우[九州]로 내려오자 그에 맞써 싸운 타하라자카 고개[田原坂]조차 키요마사가 히고 번주일 때, 토쿠가와 막부가 쳐들어 왔을 때를 대비해 인공적으로 만든 곳이라고 하니까요. 그런 모습들이 막부를 불안케 하지 않았을지...

      조선에서 미움 받는 것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술책인 듯 싶습니다.(황정욱 손자의 팔다리를 자른 막장짓도 있습니다만).
      거기에 일본군의 대명사로 유키나가, 키요마사로 지칭되며 코니시는 약간 선역, 키요마사는 악역으로 대표되지 않았나도 싶습니다.

      부럽군요. 여행 많이 다니면 좋습죠. 개인적으로 여행은 목적지로 가능 동안의 시간을 좋아하지 않아 싫어하는 편입니다만, 나이 먹고 보면 여행 많이 안 다닌 것이 좀 아쉽더군요.

  6. 정동희 2009.12.21 1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작년인가 구마모토성 보고 왔는데... 가이드 말이... 거의 대부분 조선 포로들이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전국 시대 3대 궁금증은 저도 참 궁금하네요...
    히데요리가 히데요시의 친자가 맞다면... 요도기미하고는 원숭이 아저씨가 유달리 궁합이 잘 맞었던 모양이군요
    미츠히데의 모반 건은... 정말 의문이에요... 계획적이라고 보기엔 그 뒤의 행동이 너무 허술하고
    충동적이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큰 일을 저질렀고...
    여태까지 원한설, 조정음모설 등등은 들어 봤는데, 사이토 도시미츠에 의한 설은 처음 듣네요
    발해지랑님 가능하시면 좀 자세히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미츠히데 - 죠쇼카베, 히데요시 - 미요시, 소고 정도 까지만 알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1 13: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성에 관해서는 무지에 가까운지라...
      근데 가이드하셨던 분은 일본분이셨나요?

      개인적으로 쿠마모토 성이 조선 포로로 만들었다는 말은, 모 방송에서 한국 여학생이 그런 식으로 말한 뒤에 한때 화제가 되긴 했습니다만, 아직 제가 책같은 매체로 접한 적은 없습니다.

      요도도노가 다산이 가문 특기인 오다 가문 출신인 점도 한 몫 했다고 생각합니다.

      컥~ 또 쓸데없는 말을 해서 독박쓰게 생겼네요 ^^;
      미츠히데-쵸우소카베, 히데요시-미요시까지 아시면 조금만 더 파고드시면 "아~ 이 자슥이 기껏해야 이런 걸로 저런 말을 하는구나"라는 것을 아시게 되지 않을지....댓글로 끝낼 수 있는 분량이 아닌 것 같군요. 나중에 따로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이건 용서를...

      ps;정동희님이시라... 혹시 전클 유키무라..님???

    • 정동희 2009.12.21 13: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전클 유키무라 맞습니다
      전클의 추억도 이젠 가물가물 하군요
      가이드는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본사에
      대한 지식이 많더라구요
      저도 근거는 없고 그냥 들은 얘기 입니다

      히데요리의 경우는 저도 히데요시 친자쪽이라고 믿고 있는데... 이상하게 애비를 너무 안 닯은 것 같아서요

      미츠히데 모반건은 책이나 뭐 인터넷을 뒤져 봐야겠네요
      근데 전국사에 대한 흥미도 이젠 바쁜 생활에 파묻혀서...
      예전처럼 관심사 비슷한 사람들 만나서 얘기하면 재미 있겠지만

      그냥 이래 저래 먹고 사는 고민 만으로도 정신 없네요

      발해지랑님처럼 좋은 글 올려주시는 분들 덕분에 이 약간의 취미나마 이어가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1 20: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전클의 나오이에[直家]였다는 것을 알면서 존댓말 쓰시는 겁니까? ....라고 해도 못 만난지 십 년 가까이 지났으니 어쩔 수 없긴 하겠군요.(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대학로 였던 듯 ^^ )

      가이드에 관해서 일본인이냐고 물었던 것은...
      요 몇 해전에도 우리나라에서 조선족 관광가이드가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세종대왕이 한글을 화장실에서 일보다 창틀보면서 만들었네 어쩌네 하고, 뭐든 중국기원설을 펼쳐서 문제가 된 적이 있듯이 저 개인적으로는 관광가이드를 신뢰하기는 좀 그렇더군요.

      히데요리와 히데요시는....
      어렸을 적에 뭘 먹고 자랐느냐에 관한 차이 아닐까요? 어렸을 때 험하게 자란 히데요시와 그에 반해 온갖 산해진미를 먹고 자란 히데요리는 차이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마치 현대 미국의 비만인이 50%가 넘는 것 처럼요.

      미츠히데 모반건은 언젠가 시간이 되면요..^^;

      예전처럼 언젠가 함 봐요. ^^

    • 정동희 2009.12.22 1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클의 나오이에님...
      아아 솔직히 기억이 안나네요
      사실 요즘은 어제 일도 기억이 잘 안나기 때문에
      만나뵈면 저도 좋죠

      전 결혼해서 방배동에 살고 있습니다
      회사는 분당 정자동으로 다니고 있구요
      월급쟁이 하면서 마누라 눈치 보면서
      근근히 살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2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컥~ 설사 기억이 안나셔도 쫌 기억난다고 좀 해 주시지... 저렇게 친한 척했는데.

      하긴 10년 전에 두세번 보았을 뿐이니 기억 못하시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

      신년이 되면 함 보자구요!(솔직히 전 굉장히 반갑거든요 ^^ )
      만나는 곳은 저희 집과 동희님 집 사이인 영등포 근처로 해서요.

    • 정동희 2009.12.23 09:44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즘 제 기억력이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그간 장복한 술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년 이맘때 결혼하고 하도 많은 일이 생겨서
      기억용량이 많이 오버된 모양입니다

      그래도 기억해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신년에 한 번 뵙죠
      결혼하고 나니 제 스케줄이 맘대로 조정이 안되서요
      암튼 언제든 시간 날 때 연락 드리겠습니다
      연락은 이 블로그에 댓글 다는 걸로 하겠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3 2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

      결혼하지 않았지만 저도 주체적인 스케줄 잡기가 어려우니 서로 협의해 나가자구요.

  7. 朴先生 2009.12.22 0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꾀돌이 유지현.. 저 개인적으로 KBO 최고 유격수는 아니었지만 LG에서는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고 생각합니다. 재치있는 플레이에 훌륭한 작전수행능력, 신바람야구는 유지현 타석부터였지요. 저도 LG에서 가장 좋아했던 선수였드랬습니다. 뭐 요즘엔 주루코치로 가아끔 보이더라구요. 뜬금없지만 결론은 LG를 '순페이'가 말아먹었다는 겁니다... 뭐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 선수의 은퇴나 트레이드가 이순철 감독 탓은 아니고 프런트에 의한 압박이란 말도 있지만요. 아무튼 인위적인 세대교체가 악영향을 끼쳤다는데는 저도 동감합니다. 2004년부터 막장으로 치달아 2006년엔 팀사상 처음으로 꼴찌.. 2008년에 또 꼴찌..

    어쩌다 화제가 키요마사에서 LG로... 아... 고영민... 변태;;;;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2 12: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병규가 와서 이제 아는 선수도 생겼으니 이번 년도는 함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더군요.

      한때 엘지는 유일하게 꼴찌 경험이 없던 팀이었는데, 진갑용 때 2차1순위 얻겠다고 두산이랑 꼴찌 다툼하며 팀 역사를 깡그리 무시하던 것이 생각나는군요.

      ....그러게요. ^^ 이제 야구 이야기는 여기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