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음력으로 9월 15일[각주:1]이 되면 카고시마 현[鹿児島県] 히오키 군[日置郡] 이쥬우인 정[伊集院町]이 시간여행의 무대라도 된 듯 센고쿠 시대처럼 갑주를 몸에 걸친 무사들이 오며 “체스토! 세키가하키라”를 외치면서 행진한다.
 ‘체스토[チェスト]’라는 것은 카고시마 방언으로 ‘
치쿠쇼우[畜生]’라는 의미이며 화 났을 때나 분노했을 때 표현하는 단어이다.
이 행사를 ‘묘우엔 사 참배[妙円寺詣り]’라고 하며, 9월 15일에 행해지는 것은 1600년 9월 15일[각주:2]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의 패전을 잊지 않기 위함이라고 한다. 묘우엔 사[妙円寺]는 시마즈 군[島津軍]의 대장이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의 위패를 안치한 절이다.[각주:3]

                                                                [묘우엔 사 참배[妙円寺詣り]]

  시마즈 요시히로는 세키가하라의 패장이다. 그러나 요시히로가 세키가하라 전쟁터에서 보여준 모습에 패자의 비참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그러기는커녕 당시 요시히로의 후퇴는 ‘시마즈의 전진철수[島津の背進]’라 칭송 받으며 무명(武名)을 높였다. 요시히로의 무명(武名)은 시마즈의 큐우슈우[九州] 제압 때부터 유명했지만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조선에서의 활약과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우선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상대방인 명나라 측에 ‘석만자(石曼子)’로 계속 기억될 정도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8년 가을. 요시히로는 사천(泗川)의 성에 7천의 병사를 이끌고 농성하고 있었다. 사천성(泗川城)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가 지키는 울산성(蔚山城),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가 지키는 순천성(順川城)과 함께 명나라 군이 ‘왜의 세 소굴(倭之三窟)’이라 부르며 최대의 공격목표로 삼은 곳이었다.

 10월 1일, 명나라 군 20만[각주:4]은 사천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요시히로는 명나라 군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상대를 충분히 끌어들이는 작전이었다. 명나라 군은 의심 없이 성벽에 달라붙었다. 알맞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요시히로는 총공격을 명했다. 시마즈 군의 철포가 굉음을 내며 일제히 불을 뿜었다. 더구나 미리 숨겨놓았던 화약통을 저격하여 대폭발 시킨 것이다.[각주:5] 명나라 군은 혼란에 빠졌다. 그런 명나라 군에 시마즈 군이 돌격하였다. 혼란에 빠져 도망치려던 명나라의 피해는 굉장히 컸다. 기록에는 시마즈 군이 이 일전에서 벤 목은 3만8천7백여[각주:6]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각주:7]
 
요시히로 스스로도 “명예를 중국, 일본에 드높였다”고 할 정도로 이 사천의 대승리를 자랑스러워 하였다. 더구나 이 승리의 영향은 커 울산, 순천의 두 성을 포위하고 있던 명나라 군도 사천에서의 패전소식을 듣고 철퇴한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에서 요시히로는 벤 적의 목들 대신 코를 베어 히데요시에게 보내어 공적의 증거로 삼았다고 한다. 또한 히데요시에게 몸보신하라며 호랑이의 머리, 고기, 내장 등을 소금에 절여 보내거나 하였다.

 어쨌든 요시히로가 특출한 장수의 그릇이며 또한 개인적으로도 무예, 무용이 뛰어났다는 것은, 이 조선에서의 전쟁에서 “스스로도 칼로 공적을 세웠다” – 즉 스스로도 칼을 휘두르며 싸웠다는 것에서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요시히로도 또한 조부 짓신사이 타타요시[日新斎 忠良][각주:8] 이래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전통에 따라 아군, 적군 구별 없이 전사자의 공양에 힘썼다는 것에 있다. 현재 와카야마 현[和歌山県] 코우야 산[高野山]에 있는 “조선진공양비(朝鮮陣供養碑)”가 그것이다.

 참고로 요시히로의 조부 타다요시[島津 忠良]는 시마즈 가문의 중흥의 시조로 유교, 불교, 신도(神道)에 밝은 학자이며 실천자였다. 1583년 사츠마[薩摩] 카세다 성[加世田城]을 공략한 타다요시는 당시 경험한 종교적 체험으로 인해 전사자는 모두 부처라 깨닫고는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극진히 공양하였고, 이 전통은 아들인 타카히사[貴久][각주:9] 그리고 타카히사의 아들인 요시히사[義久], 요시히로에게로 이어진 것이다.

 어쨌든 1600년 9월 15일 – 세키가하라 전투 당일의 일이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300기(騎), 총 1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부대의 오른 편에 진을 쳤다.[각주:10] 그 시마즈의 우측에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본진이 있었다.
 오전 8시[각주:11]. 전투가 시작되었다. 서군 중에서 주력으로 싸운 것은 이시다, 코니시, 우키타의 부대였다. 요시히로는 어째서인지 병사 한 명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시다 측의 사자[각주:12]가 싸워달라고 부탁하여도, 말투가 싸가지 없다
[각주:13] 쫓아내는 식이었다.[각주:14] 결국 미츠나리 자신이 직접 움직여달라고 요청하러 왔다. 그러자 요시히로[각주:15]는, “오늘 전투는 각 부대가 스스로의 힘을 다하여 싸울 뿐이외다. 승패는 하늘이 정할 터” 라고 하며 더 이상 대화도 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 요시히로는 당초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뜻을 같이하고,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会津征伐] 때 후시미 성[伏見城]의 수비를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츠나리가 거병하자 농성군 주장인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가 요시히로의 입성을 거부한 것이다.[각주:16] 요시히로는 미츠나리의 세력범위의 한 가운데 남겨진 꼴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방침을 180도 전환하여 서군에 속하게 된 것이었다.[각주:17]

 정오가 조금 지났을 즈음,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전황 [각주:18] [각주:19]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신으로 인해 서군이 급격히 무너졌다. 요시히로는 그래도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군이 붕괴하자 동군은 요시히로의 진영으로 밀물처럼 다가왔다.

 이때가 되자 요시히로는 처음으로 싸우려 결심하였다. 그러나 전황은 이제 싸우다 죽는 것 외에 없는 듯 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대장이 싸우다 적의 손에 죽는 것은 예부터 사츠마 군[薩摩軍]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것이었다. 요시히로 주종은 사력을 다하여 전쟁터에서 탈출을 꾀하려 하였다. 퇴로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동군의 후방에 있는 ‘이세로[伊勢路]’뿐이었다. 요시히로 이하 300기(騎)는 기치(旗幟)를 버리고, 부대표식[馬標]을 부러뜨린 뒤 전군 일환이 되어 고함을 지르며 동군의 한가운데로 돌진하였다.

 동군은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부대가 시마즈 군을 포위하면서 공격해 왔다. 요시히로의 조카 토요히사[豊久][각주:20]가 요시히로의 진바오리[陣羽織][각주:21]를 입고 요시히로의 영무자가 되어 전사, 이어서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이 “내가 바로 시마즈 요시히로다”고 외치며 동군의 주의를 끌다 격전 끝에 전사하였다. 그들 외의 다른 병사들도 길 위에 각각 앉아 총을 쏘는 “좌선진(座禪陣)”이라는 진형을 취해 추격해오는 동군을 저지하였다. (대충 이런 식으로 빠져나간 듯(링크))

 이러한 휘하의 용감한 싸움 덕분에 요시히로는 구사일생하여 이세로[伊勢路]로 빠져나간 것이다. 이때 당초 300기였던 무사는 80기로 줄어있었다.[각주:22]
 
이 요시히로 주종의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탈출 전투는 장렬히 싸운 모습으로 인해 패주라는 인상을 전혀 주지 않고 반대로 크게 무명을 드높이는 결과가 되었다.

 그 후, 종전처리는 형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가 중심이 되어 뻐팅김과 끈질긴 외교를 전개하여 2년 뒤, 요시히로의 무죄와 시마즈 가문의 본령이 안도를 쟁취하게 된다. 그러나 요시히로는 은거의 몸이 된다.
 이때부터 요시히로는 시마즈 가문을 이은 아들 타다츠네[忠恒=이에히사[家久]][각주:23]에게 치세의 마음가짐 등을 가르쳤다. 화려함과 문약(文弱)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말년에 저술한 한문체의 자서전에 그러한 정치철학을 담았다.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무시하고 단지 일신의 능력만을 믿고 세상을 살아가려는 자는 곧 멸망해 버리지만, 우리 시마즈 가문은 대대로 신불(神佛)을 우러르며, 선조를 공경하였다. 학문을 갈고 닦으며 번영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앞으로 우리 가문을 잇는 자는 더욱 이 전통을 지켜나가야만 한다”
 라는 것이었다. 또한 나중에는 “쿄우[京]의 말투를 쓰거나 다른 지역[国]을 따라 한다면 사츠마는 멸망한다”고까지 말했다.

 요시히로는 굉장히 건강했다. 세키가하라에서 장거리 도피행에 이어 귀국했을 때가 66세였다. 그리고 1607년 이때 나이 73세였다. 이해에 전 관백[前関白] 코노에 사키히사[近衛 前久]가 보내온 편지에,
 “귀공은 여전히 천하에 그 무명을 떨치고 있으면서도, 여기까지 들려오는 바에 따르면 지금도 여자들에게 하자고 조른다는 말을 들었소이다. 스스로 무명을 깎아 내리는 일이 아니오?”
 라고 놀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요시히로도 차츰 쇠약해져 곧이어 식사하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늙어갔다. 그래도 이 노웅(老雄)에게 식사하도록 만드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밥상을 준비하고는 측근들이 큰 소리로 전쟁터의 함성을 지르며 “적이 다가왔습니다. 어서 식사를 하시고는 적에 대비하십시오”라고 말하면, 그 순간만은 요시히로도 정신이 돌아와 혼자서 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85년의 생애에서 수많은 격전을 쌓아 온 무인의 면목이 드러나는 일화이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
1535년생. 형 요시히사[義久], 동생 토시히사[歳久], 이에히사[家久]와 함께 ‘시마즈 사형제[島津四兄弟]’[각주:24]로 용명을 떨쳤다. 1587년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25]사츠마[薩摩], 오오스미[大隅], 휴우가[日向]의 시마즈의 본령(本領) 중 오오스미를 히데요시에게 영유를 인정받았다.[각주:26] 임진왜란-정유재란을 통해 용명을 떨쳐, 그 공적으로 총 69만9천석이 된다[각주:27] .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 패하지만, 패장인 채 그대로 영지를 인정받은 것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1619년 죽었다. 85세.

  1. 지금은 참가하기 쉽게 10월 넷째 주 일요일 날 행해진다고 함. [본문으로]
  2. 서력으로는 10월 21일. [본문으로]
  3. 그러나 지금은 토쿠시게 신사[徳重神社]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한다.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망하고 들어선 메이지 정부[明治政府] 초기 불교탄압과 신도 일원화를 위한 폐불훼석(廃仏毀釈) 때 사라진 묘우엔 사[妙円寺]가 있던 자리에 대신해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받드는 토쿠시게 신사[徳重神社]가 세워진 후에는 "「토쿠시게 ‘신사’」에서 「묘우엔 ‘사’ 참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조선측 기록에서는 약 3만 9천. [본문으로]
  5. 선조실록[선조 105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0월 8일(경신) 7번째기사 군문 도감이 동 제독이 후퇴하였다고 아뢰다]에 따르면 모국기의 진영에서 취급주의로 인하여 폭발이 있었던 듯. [본문으로]
  6. 「시마즈가문 문서[島津家文書]」의 주장. [본문으로]
  7. 사족으로 일본 측에서 전쟁 중이나 후에 가증을 받은 가문은 없지만 시마즈 가문은 이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요시히로의 아들 타다츠네[忠恒]가 종사위하(従四位下) 사코노에쇼우쇼우左[近衛少将]로 임관됨과 동시에 5만석의 가증을 받게 된다. [본문으로]
  8. 짓신사이[日新斎]는 33살에 은거 후 불문에 들어가면서 칭한 호칭. [본문으로]
  9. 요시히로의 아비. [본문으로]
  10. 근래의 주장으로는, 이 자리 즉 미츠나리 진영의 우측에는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가 있었으며, 요시히로는 미츠나리 진영 후방에 있었다는 듯. [본문으로]
  11. 오전 10시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12. 야소지마 스케사에몬[八十島 助左衛門]. 임진왜란 때부터 미츠나리가 시마즈 측에 자주 사자로 보내던 인물이었기에 시마즈 측의 면면들과도 안면이 있었다고 한다. 사족으로 히데요시가 죽었을 때 미츠나리의 사자가 되어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히데요시의 죽음을 알린 것도 이 야소지마 스케사에몬이었다. [본문으로]
  13. 말투라기 보다는 야소지마가 급하다며 말 위에서 출격을 부탁한 것이 당시 예의나 군법에 어긋났기에, 사츠마의 병사들이 욕하며 죽인다고 난리를 쳤다. 오히려 야소지마와 안면이 있었던 상급지휘관들이 말리는 일면이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4. 사족으로 야소지마 스케사에몬은 이에 대한 일건을 미츠나리에게 보고한 뒤 본진을 빠져나와 전쟁터에서 도망쳤다. 세키가하라 후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에게 취직하여 500석, 후에 타카토라에게 인정받아 타카토라의 문서담당관[右筆]이 되어 1000석을 받게 된다. [본문으로]
  15. 요시히로가 아닌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와의 대화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16. 이에야스[家康]는 상경을 거부하며 불온한 움직임을 행하고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처벌하기 위해 아이즈[会津]로 향하면서 요시히로에게 후시미 성[伏見城]에 입성하여 지켜줄 것을 명령하였으나, 구두로만 전했을 뿐 문서로 남기지 않았기에 모토타다는 요시히로를 믿지 못하였다고 한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당시 후시미 성을 지키던 군세는 전부 이에야스 휘하의 군세였던 만큼 이질적인 사츠마의 군세가 들어왔을 시 명령계통과 통일적인 움직임에 균열이 생길까 하여 모토타다가 거부하였을 수도 있다 [본문으로]
  17. 요시히로의 사츠마 군세가 이런 것을 포함하여 여러 이유로 세키가하라 때 싸우려 하지 않았다는 시각이 현재도 주류이지만, 카고시마[鹿児島] 출신으로 사츠마[薩摩] 관련 전문가인 키리노 사쿠진[桐野 作人]씨는 이때 사츠마의 군세가 방관이나 눈치보기를 했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야소지마의 일건과 이시다 미츠나리의 내방 사이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반이 일어나 서군이 무너지는 시점이었기에, 미츠나리의 요청으로 군을 움직인다고 하여도 사츠마 1500명의 군세로는 전국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츠마 측 참전인물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오히려 전투 초반 요시히로는 활발히 미츠나리의 진영에 사자를 보내어 수고한다고 격려하면서 작전계획을 면밀히 짜는 한편 응원이 필요한 곳에 철포 부대를 파견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8. 시간흐름과 전황은 일본군 참모본부의 「일본전사 세키가하라역[日本戦史・関ヶ原役]」에 따른 것인데, 문제는 일본군 참모본부는 센고쿠 관련 연구를 당시의 일차사료가 아닌 에도시대에 나온 군기물(軍記物)에 주로 의존하여 정리하였기에 80년대 중반부터 관련연구가들로부터 자주 까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듯. [본문으로]
  19. 참고로 사츠마 참전 병사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미츠나리의 군세는 2시간도 버티지 못하였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듯이 서군의 분전은 없었다는 인식인 듯. 뭐 전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쓰여진 회고록인지라 아군의 붕괴에 일어났던 일보다 과장된 감정과 지식을 가질 수도 있기에, 그에 대해선 감안해서 보아야 할 듯. [본문으로]
  20. 시마즈 4형제 중 막내 이에히사[家久]의 아들. [본문으로]
  21. 갑옷 위에 덧입는 조끼처럼 생긴 전포(戰袍) [본문으로]
  22. 요시히로와 함께 탈출한 이는 50명 정도인 듯, 밤 10시 즈음 오와리 코마노 고개[駒野峠] 앞마을 주민들에게 밥 좀 달라고 할 때 50명 정도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3. 1606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이름자 하나를 물려 받고, 시마즈 가문 당주의 통자 ‘히사[久]’를 결합하여 타다츠네에서 이에히사로 바꿈. [본문으로]
  24. 사족으로, 본문에도 나오는 시마즈사형제의 할애비인 시마즈 타다요시[島津 忠良]는 사형제의 인물됨을 평하며, "요시히사[義久]는 삼주(=사츠마[薩摩], 오오스미[大隅], 휴우가[日向])의 총대장이 될 덕목을 태어나면서부터 갖추었으며, 요시히로[義弘]는 영웅의 무략을 갖추어 이에 따를 자 없으며, 토시히사[歳久]는 사건처리의 일부시종의 이로움과 해를 깨닫는 지략에는 견줄 이 없으며, 이에히사[家久]는 군법전술의 묘를 터득했다"고 평하였다. - 덕분에 듣보잡인 토시히사는 신장의 야망이 버전업 할 때마다 지략이 상향조정되어 등장한다. [본문으로]
  25. 1586년~1587년 사이에 히데요시가 시마즈 가문[島津家]에 공격당하던 큐우슈우[九州]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구원요청에 응하여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26. 그러나 사츠마에 태합검지(太閤検地)가 끝난 1596년에는 히데요시 측의 의중으로, 요시히로가 사츠마[薩摩]를, 요시히사는 요시히로의 영지였던 오오스미[大隅]로 영지가 바뀌게 된다. 당시는 본거지에 대한 애착이 강하였던 때인지라 시마즈 가문의 본령이 있는 사츠마를 영유하게 된 요시히로가 시마즈 가문을 대표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사족으로 요시히로는 형 요시히사를 의식하여 사츠마에는 자신의 자식이며 요시히사의 딸을 부인으로 삼아 후계자 취급을 받던 타다츠네[忠恒]를 입성시키고, 자신은 오오스미와 사츠마의 국경에 있는 쵸우사[帖佐]라는 곳에 머문다. [본문으로]
  27. 실제로는 61만 9430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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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2.01.14 22: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견인지 모르겠지만 미나미큐슈사람들은 (제가 본 주변에 한해서지만) 시마즈가의 영향이련지 꽤 운동부계열의 기질의 애들이 많더군요. 하긴 활동하기 좋은 따스한 동네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고보니 전 관백 부분에서 혁신같은 게임을 플레이할적엔 코노에 마에히사라고 그냥 읽고 다녔는데 요미가 달랐었군요(..아 부끄럽네요) 이쪽방면으로는 정말 익혀도 익혀도 이래저래 끝이없는 것 같습니다(__)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1.16 09: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카고시마 쪽 사람들은 아예 본 적이 없어서.. 일본사 속에서도 사츠마하야토[薩摩隼人]라고 하여 날랜 이민족의 있었다 하니 조금이나마 그런 형질의 피가 흐를지도 모르겠군요.

      저도 자주 헷갈리더군요. 특히 야마시나 토키츠기[山科 言継], 토키츠네[言経]의 경우 항상 코토츠기, 코토츠네...로 읽습지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koviet2 BlogIcon 꼬비에뚜 2012.01.18 18: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웹에 이렇게 성의있는 번역물을 올리는 분을 처음 보았습니다. 너무 늦게 알게 되서 ...
    네이버에 안 계시니 소통은 좀 더딜 듯합니다만 자주 찾아와서 뵙겠습니다.

  3. dsfsd 2012.03.23 0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귀석만자 귀신 석만자라는 소문은 무슨 실록인가? 보니까 그런 얘기 들은 적이 없다 라고 조선관료가 그랬다는데 사실인지..??? 그리고........ 생각해보니........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명장을 귀신이라고 붙이질 않잖아요 ...ㅋㅋㅋ ...........오직 동아시아에서 일본에서 鬼자 붙이잖아요 ㅋㅋㅋ 귀의중 귀진벽 귀신 도청흥 적귀 아카이 나오마사 청귀 인정교업 오니 도세츠 오니 시바타 오니 미노 오니 토라..... 개나소나 귀신이라잖아요 ㅋㅋㅋㅋㅋ 그 때 한번 제대로 이기긴했는데. 귀신 시마즈라고 소문났대 라고 시마즈 진영에서 뻥튀기한 거 같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3.24 15: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늦어 죄송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뇌내망상의 사츠마"라 지칭하고 있습죠. ...뭐 근데 자기 공적이나 조상들 공적 뻥튀기하는 거야 고금동서를 가리지 않으니..

  4. Favicon of https://megathinking.tistory.com BlogIcon ijaeho 2012.08.25 19: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쓰마 관련 배경지식을 찾다가 들어와서 보고 글 남깁니다. 도장에서 지겐류 이야기를 들을때 전율했던 기억이 납니다. 괜히 =_= 지겐류가 강했던게 아니었군요.

  5.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06: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인물열전 100화를 처음부터 감사히 잘보고있습니다. 요시히로 말년에 밥먹이는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네요.

 천하의 분수령이 대전투의 승패를 배반이라는 행위로 결정짓게 한 인물 – 때문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는 ‘사상 최대의 배반자’라는 오명을 역사에 남기고 있다.

 히데아키는 히데요시[秀吉]의 부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오빠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 家定]의 아들[각주:1]로 태어났지만, 히데요시 부부에게 자식이 없었기에 양자가 되어 키타노만도코로의 손에 키워졌다. 이 즈음에는 히데토시[秀俊]라는 이름을 썼다.

 1588년. 히데요시는 쥬라쿠테이[聚楽第]에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 天皇]의 행행(行幸)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는데, 7살의 히데아키도 이 영광스런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 즈음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각주:2] 하지만 다음 해인 1589년에 히데요시의 애첩 요도도노[淀殿]가 남자아이를 낳았다. 이때부터 히데아키의 운명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히데요시는 이 첫 아들에게 츠루마츠[鶴松]라는 이름이 지어주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불과 3년을 살았을 뿐이었다. 히데요시는 츠루마츠 사망이라는 충격을 잊으려는 듯 조선 침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도 또한 히데요시의 총애를 되찾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조선 침략이 한창이던 1593년, 요도도노는 또다시 남자아이(히데요리[秀頼])를 낳았기에 히데요시의 히데요리에 대한 눈먼 사랑이 시작되어, 우선 관백(関白)인 히데츠구[秀次]를 실각시켰다. 히데아키의 신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는 히데요시의 의중을 헤아려, 히데아키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로 들여보내는데 성공하였다.[각주:3]

 정유재란 때 히데아키는 일군의 대장으로 출진하였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의 농성으로 유명한 울산성(蔚山城)에 대규모 구원군을 이끌고 갔을 때의 일이었다. 도망치는 명나라 군사를 쫓아 총대장인 히데아키가 직접 창을 꼬나 쥐고 휘두르며 짐승을 쫓는 사냥꾼처럼 학살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였다.

 다음 해인 1598년. 돌연 히데아키는 귀국 명령을 받았다. 히데아키는 득의만만한 얼굴로 히데요시에게 출두하였다. 필시 조선에서의 활약에 대한 칭찬해 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히데아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은 의외로 조선에서의 경거망동을 질타하는 히데요시의 노호였다. 히데요시는 “네 녀석과 같은 놈을 대장으로 삼다니 내 눈이 삐었구나”라고 까지 말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북부 큐우슈우[九州] 33만 6천 석을 삭감하여, 에치젠[越前] 15만석의 이봉이라는 가혹한 결정까지 내렸다.
 히데아키는 이 사태가 모두 군감(軍監)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참언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골똘히 생각한 끝에 결론 내렸다. 하지만 지금은 뾰족한 수도 없었다.

 이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였다. 온화한 얼굴로 히데아키의 불평을 들어주고서는, 히데요시에게도 가 히데요시의 분노가 풀리도록 노력하였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었다. 이에야스의 조처로 감봉에 따른 이봉을 피한 히데아키의 처우도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흐지부지해졌다. 히데요시 사후 천하를 쥐고자 계획하고 있던 이에야스는 이러한 히데아키에게 은혜를 입힌 형태가 되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히데아키가 배반한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의 결전 당일, 마츠오 산[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히데아키는 시간이 흘러도 어느 편인지 확실히 나타내지를 않고 지켜만 보았다. 애간장이 탄 이에야스는 철포대에게 명령하여 히데아키의 배반을 재촉하는 철포를 쏘게 하였다. 이때서야 비로서 히데아키는 병사들을 움직여 서군의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를 공격한 것이다. 알려진 대로 이것이 세키가하라의 승패를 갈랐다.[각주:4]

세키가하라 포진도. 왼쪽 중간 마츠오 산[松尾山]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부대가 진을 치고 있다.

 싸움이 끝난 후 히데아키는 세키가하라 때 서군을 배반한 공적으로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에 51만석을 하사 받아 오카야마 성[岡山城]의 성주가 되었지만, 2년 뒤인 1602년에 21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계속 배반자라는 비난을 받아 정신이 병들었다던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망령에 괴롭힘을 받아 미쳤다는 등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츠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의 괴제백선상(魁題百撰相)에 나오는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 히데아키[秀秋]에게 원령(怨霊)이 되어 나타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1582년 오우미[近江]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 밑 마을에서 태어났다. 1584년 히데요시[秀吉]의 양자가 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5]에 출진. 이때 미노[美濃] 오오가키 성[大垣城]의 성주로 관직은 쇼우쇼우[少将]였다. 이어서 우코노에츄우죠우[右近衛中将], 산기[参議]
[각주:6] 겸 곤츄우나곤[権中納言]으로 이례적인 스피드로 승직하였다. 1594년에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가 되었다.

  1. 이에사다의 다섯 번째 아들. [본문으로]
  2. 이때 다른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는 텐노우[天皇] 나아가서는 텐노우의 대리인인 히데요시에게 대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였는데, 다이묘우들이 서약한 대상이 히데아키였다. [본문으로]
  3. 히데츠구의 실각이 나중(1595년)이며, 히데아키가 코바야카와 가문에 양자로 간 것은 1594년의 일. [본문으로]
  4. 지금까지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 때 히데아키가 서군이었다는 시각이었으나(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전 히데아키가 동군이 지키고 있던 후시미 성[伏見城] 공격군의 총대장이었던 것도 있어), 근래에 들어서는 동군으로 참전했다는 시각도 있다. 정황증거로 마츠오 산에 진을 치고 있던 서군 이토우 모리마사[伊藤 盛正]를 쫓아내고 차지한 점, 이후 행해진 서군 군의(軍議)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점, 말단인 시마즈의 사츠마 병사들 역시 히데아키를 동군으로 보고 있었다는 점 등이 있다. 그런 동군으로 참가한 히데아키가 참전을 주저했던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내건 당근인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가 성인이 될 때까지 관백(関白)직과 킨키[近畿] 근방에 2개국 가증에 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5.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6. 1590~92년 사이의 관직이라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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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1.11.08 2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금오중납언에서는 시바료타로선생이 따로 언급하진 않았었던듯 하지만 그래도 82년 출생설이 정설인가보네요. 82년생이라면 정유재란때 활동했을시 나이가 너무..라고 생각해보니 아사노가 도련님은 오다와라전역때 15살이었던걸 생각하면 꼭 그런것도 아닌것같고(...)

    거 그렇다곤 쳐도 21세에 사망이라 이래저래 설이 많긴 많나봅니다. 딱히 지병이 있었던것도 아니고 괴설이 나돌만도 하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08 2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당시는 15살이면 일반적으로 데뷔전[初陣] 치를 나이인 것 같더군요.

      매사냥에 갔다 돌아 온 뒤 '기분이 안 좋아'라는 말 한 마디 뒤 자빠져 계속 자다가 한번 깨곤 사망... 당시도 이해하기 힘든 죽음 방식이었는지 농부에게 불알 채여서 죽었다는 소리까지 나왔나 봅니다.

  2.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11.12 09: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고밖엔 표현할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도요토미가의 황태자였으나 결국엔 도요토미가의 멸망을 이끄는 단초를 마련해준 인물이니 말입니다. 다만, 그 당시에는 이에야스 역시 히데요리를 위한다는 기치를 내걸었을테니 히데아키를 두고 도요토미를 배신했다는 비난은 안 주어졌을테니 그것 역시 극적인 요소군요.

    어쩌면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가타쿠라에 대한 상사병이 아닐런ㅈ..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12 17: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말씀대로 드라마틱한 삶을 산 것 같습니다. 히데아키는.

      카타쿠라라.. ^^
      하지만 카타쿠라의 몸도 마음도 이미 마사무네의 것... 애송이 히데아키가 오우슈우의 독안룡에게 情人을 빼앗기는 여러모로 힘들겠군요. 으익~ 상상만해도.. ㅋㅋ

    •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11.17 09: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잉? 마사무네와 시게나가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나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17 15: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오사카 공성전 때 시게나가에게 선봉을 명하면서 "너 말고 누구한테 시키겠니~♡"라면서 볼에 뽀뽀했다고 하더군요.

      카타쿠라 가문의 기록[片倉代々記]에 마사무네와 시게나가는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하네요.

  3. 2011.11.26 17: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가 히데요시의 본진을 방문하는 그림.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 때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에 대한 평판은 굉장히 나빴다. ‘우인(愚人)’[각주:1], ‘영승(佞僧)’[각주:2], ‘요승(妖僧)’[각주:3] 등 최저의 표현으로 기록되어 비난 받았다.
 이는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때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를 서군의 총수로 내세워 쓰라린 패전의 맛보게 만들었고, 그에 따라 120만석이었던 영지를 단번에 37만석으로 떨어뜨린 장본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주로 모우리 가문[毛利家]가 퍼뜨린 악담인 듯 하다.

 우선 그에 대해선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안코쿠지 에케이라고 하면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횡사(橫死)와 히데요시[秀吉]의 천하제패를 예언한 통찰력이나 안목으로 유명하다.
 1573년. 당시 모우리[毛利]의 외교승이었던 에케이는 쇼우군[将軍]
요시아키[義昭]의 처우를 놓고 오다[織田]-모우리[毛利] 의 사이에 긴장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상경해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절충을 거듭하고 있었다.
예언은 이 교섭이 끝난 뒤 돌아오는 길에 오카야마[岡山]에서 모우리 가문의 중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에케이는 다음과 같이 썼다.

노부나가가 3~5년은 버틸 것입니다. 내년 즈음에는 공가(公家)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각주:4] 그러나 그 뒤 높은 곳에서 벌렁 자빠져 떨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토우키치로우[藤吉郎][각주:5]는 만만치 않게 뛰어난 사람입니다.
 에케이의 이 예언은 10년 뒤 현실이 되었다.[각주:6] 

 에케이의 출신성분에 대해서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듯 하지만, 아키[安芸] 카나야마 성[銀山城]의 성주 타케다 노부시게[武田 信重][각주:7]  핏줄이라 전해지며[각주:8] 아키[安芸]의 안코쿠 사[安国寺][각주:9] [각주:10]에 들어가 중이 되었으며, 이 절의 주지가 되었다.[각주:11] 이러는 사이 에케이의 스승인 에신[恵心]이 당시 외교승(外交僧)으로 모우리 가문[毛利家]과도 친했기에, 에케이도 모우리 가문의 외교승이 되었다.

 앞의 예언에서 10년. 에케이는 급격히 바빠졌다.[각주:12] 1582년 5월, 히데요시가 이끄는 대군이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을 포위하여, 당장이라도 오다-모우리 간에 대결전이 일어날지 모르는 정세가 된 것이다. 이때 에케이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를 대리하여 히데요시와 강화교섭에 나섰다. 히데요시는 타카마츠 성의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의 할복을 강화의 조건[각주:13]으로 냈다.[각주:14] 에케이는 독단으로 이것을 받아들여 시미즈 무네하루를 설득하여 배를 가르게 만들었다.[각주:15] 

 얼마 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대승을 거둔 히데요시는, 강화 때의 조건으로 내걸었던 모우리 가문의 영지 할양을 다시 꺼냈다. 그거도 만약 불복한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에케이는 다시 히데요시와 절충을 거듭했지만, 히데요시의 실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우리의 중신들 눈에는 에케이가 하는 일들이 모두 히데요시의 뜻을 대변하는 것으로만 보여, 나중에는 에케이를 “대갈이만 큰 땡중놈”이라고 욕하는 자까지 생겼다.
 이에 대해 에케이는 “지금은 사람의 외모나 모습으로 떠들 때가 아닙니다. 서로가 진심을 나눌 때입니다. 부디 저의 진심을 믿어주길 바랍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또한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은 모우리의 가문을 지키기 위함이며, 이것에 반대함은 천하의 정세에 어둡기 때문이다 – 라는 편지도 보냈다.[각주:16] 

 어쨌든 모우리 가문은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에케이도 이렇게 오랫동안 히데요시와 절충을 하는 동안 히데요시의 신뢰를 받아 승려인 채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각주:17]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의 항에서 언급했듯이,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모우리 가문은 에케이와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각주:18]의 대립[각주:19] [각주:20]으로 인하여 결국 아무 것도 못한 채 패배한 것이었다.[각주:21]

 에케이는 일단 전장에서 벗어났지만 쿄우토[京都]에서 잡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와 함께 참수되었다.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
아키[安芸] 안코쿠 사[安国寺]의 주지가 되어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사승(使僧)으로 활약, 후에 히데요시[秀吉]에게 이요[伊予] 와케 군[和気郡] 2만3천석을 하사 받았고 몇 년 뒤 6만석이 된다. 참수되었을 때는 63~4세라 한다.

  1. 오오타 규우이치[太田 牛一]의 케이쵸우기[慶長記], [본문으로]
  2. 아첨하고 얍삽한 중이란 뜻으로, 이와쿠니 킷카와 가문[岩国吉川家]의 가로(家老)인 카가와 마사노리[香川 正矩]가 저술한 인토쿠기[陰徳記]에 나오는 표현. 이 책은 주군인 킷카와 씨를 정당성을 주기 위해 각색한 티가 많이 난다고 한다. [본문으로]
  3. 1663년 아사노 히로시마 번[浅野広島藩]의 번 의사[藩医]인 쿠로카와 도우유우[黒川道祐]가 만든 지역 역사지인 게이비국군지[芸備国郡志] [본문으로]
  4. 실제로 노부나가는 다음 해인 1574년 종삼위(從三位) 산기[参議]가 되었다. [본문으로]
  5. 히데요시의 통칭 [본문으로]
  6. 저자는 이 예언을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일으킨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을 떠올린 듯 한데, 이는 결과론으로, 아마도 에케이는 노부나가의 부하가 반란을 일으킨다는 의미보다, 이 1573년 당시 노부나가의 권력기반이 강고하지 않다보니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였을 것이다. [본문으로]
  7. 노부시게는 다른 이름으로 ‘토모 노부시게[伴 信重]’라 하며, 아키 타케다[安芸武田家]의 당주인 카나야마 성주인 타케다 노부자네[武田 信実]의 사촌뻘이다. 사촌뻘이라 한 이유는, 노부자네가 와카사 타케다[若狭武田家]에서 아키 타케다 가문에 양자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에케이[恵瓊]가 아키 타케다 가문의 핏줄인 점은 맞는 듯 하다. 에케이의 증조할아버지인 타케다 모토시게[武田元繁]는 아키 타케다 가문의 당주였으며, 모토시게의 아들이자 에케이의 할아버지인 ‘토모 시게키요[伴繁清]’ 부터 토모 씨[伴氏]를 칭했다. [본문으로]
  8. 에케이의 출신을 알려주는 유일한 기록 ‘후도우인 유래기[不動院由来記]’에 따름. [본문으로]
  9. 안코쿠 사[安国寺]는 14세기 초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세운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전란으로 죽은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일본의 각 쿠니[国]에 세운 임제종(臨濟宗) 계열의 절이다. [본문으로]
  10. 아키[安芸]에 있는 안코쿠 사[安国寺]는 아키의 슈고[守護]였던 아키 타케다 가문[安芸武田家]의 위패를 보관하는 보제사(菩提寺)였기에, 아키 타케다의 피가 흐르는 에케이도 이런 연으로 이 절에 들어간 듯 하다. 여담으로 이 절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후에 아키 지역에 들어 온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서군의 수괴가 주지였던 이 절을 임제종에서 진언종(真言宗)으로 바꾸고 절이름도 ‘후도우 원[不動院]’으로 바꾼다. 위의 주석에 에케이의 출신을 알려준다는 기록이 ‘후도우 원 유래기[不動院由来記]’인 이유를 아실 수 있으리라 [본문으로]
  11. 1569년. 쿄우토 오산[京都五山] 중 4위이며 임제종 총 본산인 토우후쿠 사[東福寺]의 도서관장인 장주(藏主) 겸임. [본문으로]
  12. 뭐 사실 이 이전에도 모우리 가문이 오오토모 가문[大友家], 우키타 가문[宇喜多家] 등과의 대결에서 외교절충이나 후방지원 등에 활약했다. 갑자기 바뻐진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13.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쳐했던 모우리가 히데요시에게 화평을 청했고 이에 히데요시가 제시한 것이 ①모우리의 영지 중 5개 쿠니[国] 할양 ②인질제출 ③앞으로 개기지 않겠다는 기청문(起請文) 제출로. 무네하루의 할복을 조건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4. 그러나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일어나,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를 처벌하기 위해 상경하고자 하여 일시정전을 바라며 무네하루의 할복을 요구. 어차피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으로 낙성과 마찬가지였던 타카마츠 성의 성주 무네하루가 성의 병사들 목숨을 구하는 대신 할복하여 죽었다. [본문으로]
  15. …는 모우리 가문[毛利家]이 에케이 악인-무네하루 충신설을 만들기 위해 후세에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무네하루 할복에 에케이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에케이는 이 이후 모우리-히데요시 간의 화평교섭 때 참가하였을 뿐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16. 에케이의 끈질긴 교섭으로 본래 히데요시가 원했던 5개 쿠니[国] – 빗츄우[備中], 빈고[備後], 호우키[伯耆], 이즈모[出雲], 미마사카[美作] - 중 히데요시에게 비젠, 미마사카, 호우키의 세 개군(郡), 빗츄우의 동부를 할양하게 되지만, 대신 빈고[備後], 이즈모[出雲]와 호우키의 일부, 그리고 빗츄우의 서부를 지키게 된다. [본문으로]
  17. 에케이가 다이묘우[大名]였다는 것은 에도 시대의 편찬물에 쓰여졌을 뿐으로, 당시의 사료에는 안코쿠 사[安国寺]의 사령(寺領)으로 서국(西国)의 각 다이묘우 들의 영지에서 500~5000석씩 각출한 총 1만1500석이 주어졌다고 한다. 즉 에케이 개인이 아닌 절의 영지로 주어진 것이다. 거기에 만약 에케이가 다이묘우[大名]였다면, 히데요시 정권이 다른 다이묘우들에게 부과한 군역(軍役)처럼 군역을 부과받았겠지만, 에케이는 그것이 없었으며, 또한 영지 경영에 필수적인 가신단이 있어야 했지만, 역시 에케이에게는 가신단 또한 없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8. 모우리 양천[毛利両川] 중 하나이며, 모우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둘째 아들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의 셋째 아들. [본문으로]
  19. 대립이 있었다는 것은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가 세키가하라 전쟁이 지난 후에 비망록[覚書]으로 적어 놓은 것에 나오는 것으로, 내용은 모우리 가문이 서군에 붙게 된 것은 에케이의 말빨에 이은 독단에 이은 것이며, 나님(히로이에)는 말쌈하면서 까지 말렸지만 에케이가 듣지 않았다. - 는 식으로, 나쁜 것은 모두 에케이때문이라는 것과 그에 따라 모우리 가문과 킷카와 히로이에는 이에야스에게 개긴 적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내용을 날조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0. 후세의 편찬물이 아닌 당시의 서장 들을 살펴보는 한 히로이에와 에케이가 특별히 사이가 나쁘다거나 혹은 싸운 적은 없다. [본문으로]
  21. 사실 이는 서군 총사령관이면서도 양다리를 걸쳐 동군과도 부전조약을 맺은 모우리 테루모토[毛利輝元] 탓이 크다. 테루모토는 은거해 있던 미츠나리[三成]에게 에케이를 파견하여 반 이에야스 공작을 주도하였고, 한편으론 동군의 부사령관격이었던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와 친한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에게 명령하여 동군과도 연락하며, 전투가 일어나기 전날에는 동군-모우리 가문간에 부전조약을 맺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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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i IV 2011.10.29 16: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어디서 굴러들어온지 모를 돌인데 굉장히 출세(...여담이지만 무려 코에이사 모리 모토나루전에서는 모토나리 사후 가입캐러로 대활약 하더군요)한 사람이라 궁금했었는데 이런 연유가 있었군요.

    상대적으로 같은 교토 로쿠죠가와라에서 참수된 두명에 비하면 격이 떨어지는...사람으로 생각했었는데 쓰신 글을 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던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면 아무튼간에 승려신분으로 1만석 이상을 받은 사람이 더 있던가요? 텐카이는 어땠으려나..)

    그러고보면 같이 로쿠죠가와라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의 유골발굴때 보았던 포스팅인데, 同時に1本の「小づか」も発見されました。小づかとは打ち首にあった人を埋葬する時に首と銅をつなぐためのものです。라네요. 대충 잘린 목과 밑부분을 이어주기위한 것으로 해석하면 되려나요? 다른 참수된 사람들도 이렇게 묻는게 상례였는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어이쿠 고인께 실례되는 생각이나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30 03: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활동이나 업적 등을 보면 그 둘 보다 더하면 더했다고도 생각합니다.

      승려 신분으로 영지라...글쎄요..승려들은 寺領이라는 형식으로 받지 개인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보니...
      말씀하신 텐카이도 텐카이 개인이 받은 것은 모릅니다. 다만 그가 세운 칸에이 사[寛永寺, 쇼우군의 위패가 있고, 만약 막부와 쿄우토 조정과의 사이가 틀어질 경우 텐노우로 만들기 위해 황족의 인물을 주지로 받는 절]의 경우 최전성기 때 1만1790석을 소유했다고는 하지만, 이도 단계적으로 높아진 것이라...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무엇보다 참수형은 최고형이다 보니 유족들이 가져가 따로 모시는 것도 힘들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때때로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가령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경우는 목이 베인 뒤, 목은 효수된 뒤 이후를 알 수 없지만, 몸통은 기독교도들이 쿄우토[京都]의 기독교 사제관으로 몰래 가져와 묻었다고 합니다.(참수될 때 유키나가가 입었던 옷에 유언이 쓰여있다고 하더군요)

      여담으로 고승이었던 에케이의 유체를 따로 묻기 위해 '사이쇼우 죠우타이[西笑承兌]'가 운반의 허가를 구하자, 당시 쿄우토 책임자였던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奥平信昌, 나가시노 전투의 계기가 된 나가시노 성을 지키던 인물]는 그런 허가를 받지 못했다며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는 알 수가 없네요.

  2.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11.02 13: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느 시대나 그러한 인물들이 있는 법입니다만 16세기 일본의 인물들은 가깝게 느껴지면서 때론 이해할 수 없는 매력들이 있는데 안고쿠지 에케이 역시 그러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케이가 뛰어난 외교능력을 가졌다고는 확신을 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론 히데요시와 모리의 외교에서 에케이가 외교 책임자라고 보는 것보다 고바야카와가 그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옳다고 여겨집니다. 아무리 그가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모리 가문의 명운을 건 교섭에서 외교승을 중용한다는건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고 봐야겠지요. 그의 역할은 보좌로 봐야 맞는게 아닐런지.

    대 미쓰나리 외교도 데루모토와 깃카와를 비롯한 모리 혈족의 도마뱀 꼬리 자르기식의 처리로 인해 에케이가 모든 죄를 뒤집어쓴 것이라고 봐야 옳을 것 같습니다.

    말해놓고 보니 에케이가 참 불쌍하군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1.03 07: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결제권이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가지긴 했습지요. 다만 실무를 맡은 것이 에케이였습니다. 에케이는 쿄우토 오산[京都五山]의 인맥들을 활용하여 정보수집과 히데요시 측의 의중을 알아보는 한편, 히데요시 측의 실무진인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와 조정에 힘썼다고 합니다. 오히려 모우리 가문 산요우[山陽] 방면 담당인 타카카게(뿐만 아니라 모우리 가문 거의 전부가)는 비젠, 빗츄우가 관할지였다 보니 반대하는 편이었습죠. 히데요시의 힘을 인지하지 못하고 양보할 수 없다며 반대만하는 모우리 가문의 면면들에게, 에케이는 술 마시고 술기운에 투정을 마구 부린 편지도 현재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외교승이라는 것이 센고쿠 시대에서는 꽤나 널리 퍼졌던 시스템입니다. 세속적인 무가(武家)의 싸움에, 세속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고 여겨지던 승려는 중간에서 여러가지 조정을 맡곤 했습니다.

      가령 게임 상의 이야기입니다만, 신장의 야망에서 승려가 방문했을 때 외교적 선택(타세력의 침입시 강제적인 전투종결 및 단기간 부전합의, 포로를 반드시 데려 올 수 있음)에서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것에는 당시의 그러한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테루모토는 그런 짓이 특기인 것 같더군요.
      후년의 일입니다만 토요토미 가문을 멸한 오오사카 공성전 때 테루모토는 토요토미 측에 줄을 대기 위해서 중신 나이토우 모토모리[内藤 元盛]를 사노 도우카[佐野 道可]라는 인물로 변신시켜 오오사카로 보내며, 모토모리에게 만약 실패했을 시에는 모토모리의 자손들을 보호하겠다고 하면서도, 종전 후 모토모리가 토쿠가와에게 잡혔을 때 모토모리는 모우리 가문과의 관여를 끝까지 부정하며 모우리 가문에 충성을 다하지만, 테루모토는 이에야스에게 혼날까봐 모토모리의 아들을 전부 죽입니다.

    •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11.03 15: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그런 뒷이야기가 있었군요. 그렇다면 에케이가 대 히데요시와의 외교 전반에 관여했다고 보는 것이 옳겠군요. 그렇다면 노부나가의 죽음을 알았을테인데 정보의 입수가 늦었다는 것이 되는지 궁금해지는군요.

      여하튼 어긋난 지식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하사해주셔서 오늘도 새로운 정보를 얻고 가게 되는군요. 열심히 받아먹도록(?!) 하겠습니다.

      모토나리의 음험함을 가장 잘 이어받은 것이 데루모토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숙부인 다카카게보다도 더요.

  3.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07: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시가 시즈카타케 전투 후 종전에 맺은 모리와의 강화를 무시하고 다시금 처음 강화를 맺을때의 요구사항을 들이댔다는건가요?

 상인(商人)출신으로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까지 승진한 인물. 그리고 기독교도. –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는 센고쿠 무장으로서 이색적인 존재이다.  
 상인으로서의 특질은 언변이 뛰어난 외교관, 경제감각을 갖춘 행정관으로 발현되었다. 거기에 무인으로서도 재능도 상당하여, 히데요시를 섬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582년 히데요시가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에 수공(水攻)을 결행하였을 때, 유키나가는 물 위에 배를 띄어 놓고 타카마츠 성에 포격을 하는 활약을 보였다.[각주:1]
 “힘이 굉장히 셌고, 지모는 남들보다 훨씬 뛰어났으며, 흰 피부에 키가 커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는 소리를 들은 유키나가는 역시 평범한 상인이 아니었다.

 200석으로 히데요시를 섬긴 것이 1579~80년[각주:2] [각주:3], 나이는 21~2세 즈음이라고 하는데, 10년도 지나지 않은[각주:4] 1588년에는 히고[肥後] 절반인 24만석의 다이묘우[大名]로 발탁되었다. 이례적인 스피드 출세로, 유키나가의 능력이 굉장히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유키나가가 확실한 기독교도로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1583~84년 즈음으로 경건한 기독교 무장인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과 친교를 맺으면서 부터이다. 유키나가의 양친은 예전부터 기독교도였기에 유키나가도 어려서부터 세례를 받아 ‘아고스티뉴(Agostinho)’라는 세례명이 있었지만 형식적인 것으로 신앙은 그다지 깊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타카야마 우콘과 친해지면서 유키나가는 그때까지 거만했던 행동이 사라져, 주위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온화하고 겸손한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 신앙도 깊어져 오오사카[大坂]에 한센병 병원을 세우거나, 고아원 사업에 힘썼다.

 하지만 1587년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 중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갑자기 선교사 추방령을 발령한 것이다. 이로 인해 타카야마 우콘도 다이묘우에서 추방의 몸이 되었다.
 유키나가는 이때 선교사나 우콘이 숨을 수 있는 집을 준비해 주었으며, 큐우슈우[九州]의 기독교 다이묘우들에게도 선교사 보호에 힘써줄 것을 요청하였다.
 유키나가는 이미 기독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었다. 만약 이러한 일들이 히데요시에게 알려져 추방당한다면 순교(殉敎)하려고까지 생각하였던 것 같다. 실제로 히데요시가 힐문하자 유키나가는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역설하였다.[각주:5] 그 때문인지 히데요시의 기독교 탄압은 완화되었다. 거기에 다음 해인 1588년 유키나가는 히고 절반 및 예부터 기독교의 아성인 아마쿠사 지방[天草地方]까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히고의 나머지 절반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에게 주어졌다. 창 한 자루로 출세한 전형적인 무공 다이묘우이다. 이러한 인간은 보통 유키나가처럼 머리를 쓰는 능력으로 출세한 자에 대해 세찬 반감을 품고 있다. 한편 유키나가 역시 키요마사와 같은 무장을 ‘머리가 없는 녀석’이라고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다. 더구나 이 둘, 키요마사는 열렬한 법화종(法華宗) 신자였으며 유키나가는 경거한 기독교도였다. 서로 사이가 가까워질래야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양자의 반목은 조선침략에서 함께 선봉을 서게 되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 침략에서 유키나가는 시종 화평교섭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키요마사는 끝까지 주전론자였다. 이 대립은 일본군의 작전에 지장을 끼칠 정도가 되었다. 거기에 더불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유키나가와 친한 감찰[軍監]의 불리한 보고로 인해 키요마사가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귀국하게 되어 질책을 받은 것이다. 키요마사의 유키나가-미츠나리에 대한 증오는 참기 어려운 것이 되어 있었다.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決戦]은 천하제패의 야망에 불타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이러한 키요마사를 대표로 하는 무공파(武功派)와 미츠나리-유키나가 등 봉행파(奉行派)의 대립을 이용해 일으킨 것이다. 패한 유키나가는 이부키야마[伊吹山] 산중으로 도망쳤지만, 몇 일 뒤 근처의 마을 사람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리고 동군(東軍)의 진영으로 데려가게 만들었다. 기독교도인 유키나가는 자신의 신앙상 자살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사카이[堺]의 약종상(藥種商) 코니시 류우사[小西 隆佐]의 아들. 비젠[備前] 오카야마[岡山]에 있는 상인 가문의 양자가 되어 오카야마 성주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히데요시[秀吉]의 츄우고쿠 공략[中国攻略] 때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외교관으로 히데요시에게 접근, 그 재능을 인정받아 히데요시의 요청으로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 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와 함께 로쿠죠우 강변[六条河原]에서 참수되었다.

  1. 히데요시[秀吉]의 일생을 다룬 군기물 태합기(太閤記)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에 따르면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와 함께 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이 당시는 아직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어용상인 아부라야[油屋]의 양자였는데, 유키나가의 뛰어난 능력을 눈여겨 본 우키나 나오이에[宇喜多 直家]가 히데요시로 보내는 사자로 유키나가를 보냄으로 히데요시와 만나게 되었다. 여기에는 당시 히데요시의 참모로 사카이[堺]의 유력자 중 하나였던 유키나가의 애비 코니시 류우사[小西 隆佐]의 존재도 영향을 끼쳤던 듯 하다. [본문으로]
  3. 이전까지 우키타 가문의 가신이었던 유키나가가 히데요시의 직신이 된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1581년 히데요시의 명령을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에게 전하는 역할을 맡았고 이 즈음 무로츠[室津]를 관리한 이 즈음부터가 아닐까 한다. 그후 히데요시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친 야마자키 전투[山崎の合戦] 후인 1582년 히데요시에게 세토 내해[瀬戸内海]의 쇼우도 섬[小豆島]의 관리권과 3000석의 녹봉을 받으며 수군의 장수로 세토 내해[瀬戸内海]를 장악하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루이스 프로이스는 이런 그를 '바다의 사령관'이라 표현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중간인 1585년 히데요시의 키이 정벌[紀伊征伐] 때의 공으로(기록으로는 패했다는 것만 있음 - 프로이스의 일본사) 3000석에서 1만석으로 봉록이 가증됨과 동시에 관리만 하던 쇼우도 섬[小豆島]를 영지로 받게 됨. 일설에는 10만석을 영유했다고도 함. [본문으로]
  5. 사실 처음에는 도움을 청하는 선교사들을 '내 사정도 있잖아~'하는 식으로 쫓아내거나 잠시동안 단교하였지만 오르간티노 신부에게 설득당하여 타카야마 우콘이나 기독교 신부들을 영지인 쇼우도 섬[小豆島]에 숨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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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10.13 15: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달만의 글이라 매우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이웃국가나 이웃영지에 대한 반감과 증오는 참으로 오래된 역사를 가진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히고를 나눠가진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졌을 증오는 오랜 기간 쌓여서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겠지요. 도도 다카토라나 가토 요시아키라 역시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만 서로를 인정하는 상태는 있었을텐데 과연 기요마사와 유키나가는 그러한 수준까지는 유지했었던걸까요? 흥미롭네요.

    유키나가가 죽은 이후 고니시 가문이 유지는 되었습니까? 하타모토로도 남아있지 못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3 2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자주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아무래도 그렇죠. 지금도 가까운 나라 사람들과는 사이가 안 좋듯이 당시도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나 유키나가는 그래도 많은 외교적 절충(이게 전투에서 활약보다는 훨씬 높게 쳐주는 편입니다)이나 수송 등의 임무를 맡은데 비해, 키요마사는 정말 시즈가타케 칠본창 때의 얻은 영지(이전 1000+시즈가타케 3000) 총 4000석에서 단번에 히고 반국 19만여석 + 히데요시 직할지 3만석 대관으로 총 23만석의 다이묘우로 단번에 출새합지요.

      그래도 노력한 만큼 출세한 유키나가에 비해, 히데요시와 동향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출세한 키요마사는 안 좋을 수 밖에 없었겠지요. 거기에 키요마사는 틈만나면 유키나가가 무가 출신이 아닌 상인 출신이라고 깠다고 하니까요.

      유키나가가 죽은 뒤 코니시 가문은 멸문됩니다.
      장남[코니시 효우고노카미小西 兵庫頭]은 세키가하라 당시 오오사카 성[大阪城]에 (아마도) 인질로 있다가 싸움에서 졌다는 소식에 당시 오오사카 성을 수비하고 있던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가 지레 겁먹고 죽였다고 합니다. 이에야스는 너무한 처사라며 엄청 화냈다고 하던데... 음...

      아들 '아사야마 야사에몬[浅山 弥左衛門]'은 실제로 코니시의 아들인지 불명이나, 쿠로다 가문[黒田家]의 가신들 선조를 기록했다는 '쿠로다 가문 가신 선조 유래기[黒田家御家人先祖由来記]'에 따르면 유키나가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쪽은 야사에몬 손자 이후에는 기록에 없다고 합니다.

      또 하나 측실의 자식이라고 하는 '코니시 히데사다[小西 秀貞]'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인물은 우키나 가문[宇喜多家]에 맡겨졌다가 (역시 인질??) 싸움에 패했다는 소식에 시코쿠[四国]의 사누키[讃岐]로 도망쳐 중이 되어서는 세이렌 사[西蓮寺]를 세워 초대 주지가 되었고, 이후 그 자손들이 사누키에 대대로 살았다고 하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딸이며 대마도주 종의지(소우 요시토시=宗義智)에게 시집간 딸(코니시 마리아[小西マリア])은 세키가하라 후 이혼 당하고 나가사키에서 숨어살다가 죽었습니다.
      종의지와 코니시 마리아 사이에 생긴 아들(그러니까 유키나가의 외손) 만쇼 코니시[マンショ 小西]는 에도 막부의 기독교추방령으로 인해 마카오로 추방당한 뒤 로마에 가서 사제의 직위를 얻고 일본에 돌아와 포교활동을 하나 잡혀서 처형(일본인으로서는 마지막 사제였다고 합니다.)

  2. 본다충승 2011.10.13 18: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쿠사... 아마쿠사 시로? ^^; 세키가하라에서 고군분투 한 보람도 없이 한방에 훅 갔죠. 공명의 갈림길에선 조선에서 막 돌아온 기요마사&마사노리가 미츠나리한테 죽빵 날리려던걸 유키나가가 말리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3 21: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맞습니다. 그 아마쿠사 시로우 토키사다[天草 四郎 時貞]가 나온 땅입지요.
      이곳은 유키나가 영지였던 만큼 기독교도들이 많이 모여 살았고, 그런만큼 막부의 감시와 탄압도 심하여 1613년 추방당한 기독교 선교사 마르코스 페라로는 추방당하면서 "앞으로 25년 뒤 신동이 나타나 하느님의 나라를 세울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였고, 실제로 25년 뒤인 1637년 아마쿠사 시로우를 대장으로 한 잇키[一揆]가 막부의 대관(代官)을 죽이면서 시마바라의 난이 시작됩지요.

    • 본다충승 2011.10.13 23:49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 예언은 마치 영화나 소설에 나올법한 이야기 네요. 하지만 현실은 참으로 처참한...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4 00: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죠. 예언이란게 무책임해서 그럴 듯하게 만들다 보니 거기에 혹한 사람들을 더 많이 모이게 하여 피도 더 많이 흐르게 만들죠.

  3. Gyuphy IV 2011.10.13 22: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아주 좋아하는 엔도 슈사쿠 선생님의 '숙적'에서 아주 인상깊게 그려진 무장이라 기억에 오래 남았다죠. (소설 결말부에서 딸내미와 부인이 '무려' 카토 키요마사를 독살(..;;)하는 듯한 암시를 넣어둬서 어린마음에 아주 흥미깊었습니다만..)

    사실 종교인이 저정도로 살며 저정도로 출세하기도 힘든데 다카야마 우콘처럼 마닐라오쿠리(..)되는것 보다는 나름대로 삶의 한 궤적을 남기고 갔으니 괜찮은 삶이었다 보여집니다. 뭐 국내입장에서는 임진왜란(..) 탓에 좋게 볼래야 좋게 볼수 없다쳐도 천연기념물 잡아간 키요마사보다는 낫다 싶긴 하덥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4 00: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숙적이라는 소설에서 나카우라 쥬리안[中浦ジュリアン]이 죽는 장면이 쓰여있나요? '이 남자가 죽을 때'에 써먹으려고 했는데, 어디선가 엔도 슈우사쿠 선생이 그 '숙적'이라는 곳에 나온다고 하여서요.

      뭐.. 어떤 성격의 기록인지 잘 모르겠지만 豊臣秀吉九州下向記라는 책에는 조선에서 파죽지세로 진격 중인 유키나가를 히데요시가 "문무천하제일이며 충절은 비할데 없다. 조선이라면 1/3, 대명을 손에 넣었을 때는 50개국을 줄테다"고 할정도로 히데요시에게 인정받던 인물이니 기독교도라 하여도 어느 정도는 눈 감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4. Gyuphy IV 2011.10.14 0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게 꽤 오래전에 본 책이라 잘 기억은 안나지만 마지막 장면이 니죠성 회견 마치고 뱃편에서 키요마사가 혀꼬이고 엎어져서 바로 죽는 장면(..-_-...)이었으니 나카우라 쥬리안의 몰년을 생각해보면 아마 안나왔었던듯 싶은데 집에 책을 두고온바람에 확인이 되지 않아 죄송합니다(..)

  5. 정동희 2011.10.18 16: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도라노스케나 이치마스도 히데요시와의 인척 관계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까지 출세하지는
    못했을 텐데요...
    쵸닌의 자식이었던 유키나가쪽이 능력은 더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암튼 이게 다시 히데요시 때문이고... 조일전쟁 때문이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8 22: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키요마사나 마사노리도 나중에 나름 행정력을 갖추었다곤 하지만 말씀대로 그들이 오와리 출신이 아니었다면 그만큼 출세하기도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히데요시의 통일전에 유키나가는 다방면으로 활약하더군요. 주로 수군으로 활동하는 한편 군수물자 수송이나 하카타[博多]의 재건 등 동시기 키요마사가 3~400명 이끈 소부대의 지휘관(뭐 큐우슈우 정벌 시 군량 쪽 회계담당이었다고도 합니다만)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둘 사이에 차이는 꽤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요시츠구[吉継]라는 이름이 아닌 요시타카[吉隆]로 나와 있다. 갑옷을 입지 않고 지팡이 같은 것을 잡고 있는 인물이 요시타카(=요시츠구)

 오오타니 교우부쇼유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省 吉継]는 천하의 분수령이 된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 패할 것을 알면서도 우정을 위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편에 서 장렬히 싸우다  그 병든 몸을 산화시킨 비창(悲槍)의 무장으로 유명하다.

 1600년 6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정벌하기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를 동원하여 아이즈[会津]로 향했다. 이때 에치젠[越前] 츠루가[敦賀] 5만석의 성주 오오타니 요시츠구도 이에야스의 동원령에 응하여 7월에 츠루가를 출발하였다.
 이날이 되기 전까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이름은 역사의 표면에 눈에 띄게 등장한 적도 없었으며, 이 아이즈 정벌[会津征伐]의 시점에서도 극히 평범한 다이묘우로,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후견인인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고자 하였다.

 도중, 요시츠구는 미노[美濃] 타루이[垂井]에서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의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사자(使者)를 보냈다. 요시츠구와 함께 아이즈로 향하게 된 미츠나리의 아들 하야토노쇼우[隼人正][각주:1]를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이 즈음 사와야마에 은거하고 있던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에야스에게 대항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첫째 아들 하야토노쇼우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아이즈에 보내겠다고 신청한 상태였다.

 요시츠구는 사자의 구두로 미츠나리도 함께 아이즈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하였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미츠나리가 무공파 장수들에게 습격 받았을 때, 이에야스에게 도망쳐 보호를 받게 되지만[각주:2] 그로 인해 은퇴를 강요당한 미츠나리가, 반(反)이에야스의 태도를 버리기는커녕 여전히 이에야스 토벌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은 천하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츠나리가 아이즈로 함께 가준다면 요시츠구 자신이 이에야스와 화해할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는 뜻도 전했다.

 이에 대하여 미츠나리는 상담하고 싶은 것이 있다며 사와야마로 와 주길 바란다고 사자를 보내온 것이다. 요시츠구는 이 시점에도 무슨 일인가?하고 궁금해 하면서도 사와야마로 향했다. 미츠나리는 요시츠구와의 만남을 대단히 기뻐하며 잠시 옛정을 떠올린 뒤, 중대한 계획을 밝혔다.

 “이에야스의 행태를 보자니, 돌아가신 태합(太閤)님의 유훈(遺訓) 정치를 위반할 뿐만 아니라 히데요리 님을 무력화시키려 하고 있네. 우리처럼 태합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는 굉장히 불쾌한 일. 이에야스가 아이즈로 향하는 지금이야말로 이에야스 토벌을 위한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일세. 거병하여 이에야스를 쓰러뜨리려 하오.”

 듣고 있던 요시츠구는 놀랐다. 너무 무모하다 – 요시츠구는 잠시 틈을 준 뒤 입을 열었다.

 “나이후[内府=이에야스]는 300만석에 달하는 거대 다이묘우일세. 군사수도 많으며 더구나 지금에 와서는 그의 명망에 비견되는 이조차 없네. 돌아가신 태합도 항상 ‘이에야스 님은 지용을 겸비하신 분, 너희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고 말씀하신 인물이네…”

 요시츠구는 불과 19만석의 미츠나리가 그러한 이에야스와 싸운다는 것은 미친 짓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열심히 미츠나리의 뜻을 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미츠나리는 이 계획이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가로(家老)인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와 공모한 것이기에, 이제는 취소할래야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며, 요시츠구도 부디 참가해 주길 바란다고 부탁했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요시츠구도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요시츠구는 사와야마 성에서 나와 본진이 있는 타루이로 되돌아와 심사숙고 하였다.

 요시츠구는 미츠나리와의 우정과 그런 자신을 믿고 미츠나리가 밀모를 털어놓았다는 생각이 들자, 그것을 무시한 채 아이즈[会津]로 향할 수가 없었다. 되돌아보면 히데요시[秀吉]가 츄우고쿠[中国] 방면사령관으로 히메지[姫路]에 있을 때, 16살의 자신이 먼 분고[豊後][각주:3]에서 와서 섬길 수 있었던 것도 미츠나리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 아래서 150석으로 시작해 에치젠[越前] 츠루가[敦賀] 5만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어 종오위하(従五位下) 교우부쇼우유우[刑部少輔]에 임명되어, 히데요시가 관백(関白)으로 승진했을 때는 미츠나리와 함께 제대부(諸大夫)의 한 사람[각주:4]으로도 선정되었다. 요시츠구의 이런 출세에는 미츠나리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각주:5] 요시츠구는 미츠나리의 그런 우정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요시츠구와 미츠나리 사이에 속설이지만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히데요시가 다회(茶会)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그 즈음 요시츠구는 불치의 업병(業病)을 앓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장수들은 요시츠구가 입댄 찻종을 꺼려했다.[각주:6] 그때 미츠나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요시츠구에게 찻종을 받아 깨끗이 원샷한 것이다. 요시츠구는 이 일을 평생 잊을 수 없는 도움을 주었다며 미츠나리에게 고마워했다고 한다.

 한편 요시츠구는 이에야스[家康]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자주 이에야스의 저택을 방문하였다. 단지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어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집안싸움을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와 함께 양측의 화해조정에 힘쓰고 있을 때, 야스마사가 이에야스에게 크게 질책을 당하였기 때문에 요시츠구도 또한 이에야스의 저택에 방문하는 것을 관두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에야스를 미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요시츠구는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 정벌[会津征伐]에 응하려 했던 것이다.

 타루이의 본진에서 요시츠구는 심사숙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츠나리에게 승산은 없었다. 때문에 또다시 사자를 보내어 미츠나리에게 결심을 바꾸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미츠나리의 결심에 변함이 없었다.
 7월 11일.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타루이에서 전군을 이끌고 사와야마 성으로 향했다. 미츠나리를 위해서 죽자고 결심한 것이다. 
미츠나리를 만면에 기쁨을 표하며 요시츠구를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이에야스 타도의 준비계획은 이시다 미츠나리, 오오타니 요시츠구 그리고 역시 미츠나리의 요청에 응하여 사와야마 성에 온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의 협의에 따라 진행되었다.

 이에야스 타도에 임하기 전에 요시츠구가 미츠나리에게 전한 유명한 충고가 있다. 이하는 그 내용이다.
 “귀공(미츠나리)에게는 방자하고 거만한 점이 있다 – 고 다이묘우를 시작으로 말단 병사들까지 날마다 떠들고 있는 듯 하네. 다른 사람의 위에 서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의 인기를 얻지 않으면 안 되네. 이것을 잘 판단하여 이번 큰일도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님과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님을 위에 세우고, 귀공은 그 아래서 일을 진행시키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네. 거기에 남들이 보기에 귀공은 지혜와 능력에 있어서 천하무쌍이지만 그에 비해 용기는 부족하다고들 여기고 있소. 이에야스 타도계획에는 모우리, 우키타 님 외 다른 다이묘우들도 참가할걸세. 이 계획을 처음부터 짠 것은 귀공이니, 계획이 진행될 때는 남들보다 먼저 목숨을 바친다는 각오를 임하길 바라네.”
 그야말로 미츠나리의 결점에 대한 충고였다. 미츠나리도 당장은 친구 요시츠구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동서 20만의 대군이 격돌하였다.
 이날 요시츠구[각주:7]는 토다 카츠시게[戸田 勝成],
히라츠카 타메히로[平塚 為広][각주:8], 오오타니 요시하루[大谷 吉治][각주:9], 키노시타 요리츠구[木下 頼継][각주:10] [각주:11]의 부대를 후지카와 대[藤川台]에 두고, 자신은 그 후방에 본진을 두었다. 오오타니 부대의 우익에는 아카자 나오야스[赤座 直保][각주:12], 오가와 스케타다[小川 祐忠][각주:13], 쿠츠키 모토츠나[朽木 元綱][각주:14] 등을 배치하였다[각주:15]. 이 포진은 더 오른편에 있던 마츠오야마[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에 대비한 것이었다. 요시츠구는 처음부터 히데아키에게 딴마음이 있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주변의 배치도. 빨간색은 동군. 파란색은 서군. 노란색은 도중 배신하는 무장들이다.

 오전 8시. 결전이 시작되었다. 오오타니 부대는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高虎], 쿄우고쿠 타카토모[京極 高知]의 부대를 상대로 격전을 펼쳐 압도하고 있었다. 요시츠구는 병든 몸이었다. 뚜껑이 없는 가마에 타고서는 지휘하였다. 뭉개진 얼굴을 흰 포로 감싸 눈 만을 내 놓고 있었다. 그 눈도 거의 실명에 가까웠다.

 전황은 서군이 조금이지만 유리. 그러나 일진일퇴. 곧이어 정오가 되었다. 이때였다. 마츠오야마 산에서 형세를 관망하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갑자기 산을 내려와 오오타니 부대를 공격한 것이다. 요시츠구는 침착하게 맞아 싸웠다. 하지만 요시츠구의 오산이 생겼다. 이 배반에 대비하여 배치한 아사자 나오마사 등의 부대까지도 함께 배신하여 오오타니 부대를 향해서 공격한 것이다.[각주:16] 오오타니 부대는 세 방향의 적과 싸우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다 카츠나리, 히라츠카 타메히로 두 무장이 전사를 하였다. 요시츠구는 두 무장의 죽음을 보고 받고 각오를 정했다. 옆에 있던 유아사 고스케[湯浅 五助]를 가까이 불러,
 “내 목을 적에게 넘기지 마라”[각주:17]
 고 명한 뒤 배를 갈랐다. 고스케는 배 가르는 요시츠구의 목을 베어 준 뒤 그 목을 전포[羽織]에 싸서 땅에 묻은 다음 토우도우 부대를 향해 돌격하였다.[각주:18]

오타니 요시쓰구[大谷 吉継]
분고[豊後] 오오토모 가문[大友家]을 섬겼던 오오타니 씨[大谷氏]의 출신이라고 한다[각주:19]. 처음엔 키노스케[紀之介] 나중엔 요시타카[吉隆][각주:20]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측근시동[小姓]부터 시작하여 1585년 에치젠[越前] 츠루가[敦賀] 5만석의 성주가 되어[각주:21] 종오위하(従五位下) 교우부쇼우유우[刑部少輔]에 서임, 관백 히데요시의 제대부(諸大夫) 중 한 명이 된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신뢰를 받았기에 그에 대한 의리로 서군에 참가하였다. 사나다 유키무라[真田 幸村]의 부인은 요시츠구의 딸[각주:22]이다. 묘는 기후 현[岐阜県] 세키가하라 정[関ヶ原町]의 옛 전쟁터[古戦場], 후지카와 대[藤川台]에 있다. 격전을 펼친 토우도우 가문[藤堂家]이 요시츠구의 분전에 감명받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요시츠구가 나온 그림으로 이런 것도 있습죠.


  1. 이시다 미츠나리의 첫째 아들 이시다 시게이에[石田 重成] [본문으로]
  2. 미츠나리 포스팅에서도 썼듯이 실제로는 이런 적 없다. 오오사카[大坂]에서 공격받은 미츠나리는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도움으로 후시미 성[伏見城] 안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피했고, 여기서 농성했으며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와 연계하여 무공파 칠장 및 이에야스를 협격하려 하였다. 다만 동료였던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가 주저하는 사이 협격 모의는 실패하고, 이에야스와 화해를 하는 조건으로 책임을 지고 미츠나리는 봉행에서 물러나 은거를 하게 된다. [본문으로]
  3. 근래엔 오우미[近江] 출신이라고는 하나 정확히 어디 출신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오오타니 촌[小谷] 출신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요시츠구의 성과 같은 오오타니[大谷]라고 ‘큰 大’자를 썼으나,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의 수장의 고향인지라 그것을 감추기 위해 발음은 같지만 ‘작을 小’를 써서 마을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나카무라 시키부쇼유유우 카즈우지[中村 式部少輔 一氏], 이코마 우타노카미 치카마사[生駒 雅楽頭 – 이 당시엔 마사카츠[政勝]라 하였음], 오노기 누이도노스케 시게카츠[小野木 縫殿助 重勝], 아마고 쿠나이쇼우유우 하루히사[尼子 宮内少輔 晴久], 이나바 효우고노스케[因幡 兵庫助], 츠게 사쿄우노스케[柘植 左京亮], 츠다 오오이노카미[津田 大炊頭], 후쿠시마 사에몬다이후 마사노리[福島 左衛門大夫 正則], 이시다 지부노쇼우유우 미츠나리[石田 治部少輔 三成], 오오타니 쿄우부우쇼우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少輔 吉継], 후루타 효우부쇼우유우 시게츠네[古田 兵部少輔 重恒], 핫토리 우네메노카미[服部 采女正]. [본문으로]
  5. 미츠나리의 도움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나 요시츠구의 출세에는 히데요시의 마누라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집사격인 모친 ‘히가시도노[東殿]’의 영향력이 컸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요시츠구가 콧물을 떨어뜨렸다고도 하며, 얼굴의 고름이 찻종에 떨어졌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병사는 600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본문으로]
  8. 둘이 합쳐 900명. [본문으로]
  9. 요시츠구의 첫째 아들. [본문으로]
  10. 요시츠구의 둘째 아들 [본문으로]
  11. 둘이 합쳐 3500명. [본문으로]
  12. 에치젠[越前] 이마죠우[今庄] 2만석의 다이묘우[大名]. 600명 동원. [본문으로]
  13.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 7만석의 다이묘우. 2000을 동원. [본문으로]
  14. 오우미[近江] 쿠츠키[朽木] 2만석의 다이묘우. 600을 동원. [본문으로]
  15. 여담으로 아와지[淡路] 수모토[洲本] 3.3만석의 다이묘우로 1000명을 동원한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도 배치되어 있었지만, 일본에서 와키자카는 듣보잡 중의 듣보잡이라 이 책에선 4명 중 3이 나오면서도 기술에서 빠져있다. 정말 몇 년 전의 일이지만 이런 듣보잡 중의 듣보잡을 감히 이순신 장군의 라이벌 포지션에 배치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제작진은 평생 좆잡고 반성해야 한다. [본문으로]
  16. 여담으로 이 배신자들은 전후,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배신한다는 뜻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며 아카자 나오야스, 오가와 스케타다는 영지 몰수, 쿠츠키 모토츠나는 반토막(2만석에서 9590석)이 되며, 와카시카 야스하루만이 전투가 일어나기 전부터 배신한다는 뜻을 알렸다며 영지를 보전받았다. [본문으로]
  17. 병들어 추해진 얼굴을 적에게 보이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8. 유아사 고스케는 이때 묻는 모습을 토우도우 타카토라의 조카인 토우도우 타카노리[藤堂 高刑]에게 걸려, 타카노리에게 자신의 목을 줄테니 대신 주군의 목이 여기에 묻혀 있는 것을 비밀로 해주길 바란다고 하였다고 한다. 후에 이에야스가 타카노리에게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목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 묻자, 알기는 하지만 유아사 고스케와 약속을 하여 말할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티자, 오히려 감심한 이에야스에게 상을 받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19. 위에도 언급했지만 분고[豊後] 오오토모 가문[大友家]의 가신 출신이 아니라고 한다. 여담으로 유명한 '내적인 일은 센노 소우에키[千 宗易]에게 외적인 일은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에게'라고 가신에게 편지를 보낸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은, 그 편지에 요시츠구의 애미 히가시도노[東殿]의 영향력이 쎄다는 것도 썼지만, 만약 요시츠구의 가문이 오오토모 가문의 가신뻘이었다면 특별히 언급하였을 텐데도 그런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오오토모 가문과 오오타니 가문은 관련이 없는 것 같다. [본문으로]
  20. 한때 킨키[近畿]를 지배했던 미요시 가문[三好家] 마지막 당주의 이름 미요시 요시츠구[三好 義継]의 이름과 같아서 불길하다며 서군에 가담하기 직전에 바꾸었다고 한다. 위에 사진에도 나와 있듯이 세키가하라 병풍에는 요시타카[吉隆]로 나와 있다. [본문으로]
  21. 츠루가 성주가 된 것은 1589년의 일 [본문으로]
  22. 사위 유키무라와 장인 요시츠구의 나이차이가 최소 2 ~ 최대 11살 차이라 아마 조카나 친족의 여성을 양녀로 삼은 뒤 시집 보낸 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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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tele-mann.tistory.com BlogIcon telemann 2011.09.06 1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 좋은 글 감사드려요. 좋은 하루 되시길....

  2. Gyuphy IV 2011.09.06 2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헣헣허헣. 요시츠구의 악령이군요. 재밌게 봤습니다.
    그럭보면 세키가하라 고전장에 갔을적에 요시츠구의 묘에도 들렀었던 기억입니다만 참 산새우는소리만 들리는 산기슭이라, 그 처절한 전장터가 지금은 이런 촌구석(정말 학생들도 잘 안다니는 촌..;;)이라 기분이 묘했던 기억이 듭니다.

  3. Favicon of http://tele-mann.tistory.com BlogIcon telemann 2011.09.06 2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어 공부를 하다가 일본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발해지랑님 블로그를 알게되었습니다.

    실시간으로 못 보고 복습하다 보니,, 댓글이 늦었네요.

    글 올라오면 종종 댓글 달아드리겠습니다. ^^

  4.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09.07 0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은 참 가혹한 것이 돋보이는 미남자였던 요시쓰구에게는 나병을 내렸고, 통일을 눈앞에 둔 노부나가에게는 직전의 죽음을 선사했으며, 자식을 그리도 사랑하던 히데요시에게는 자식의 끔찍한 죽음을 내려주었으니 말입니다. 핀트가 엇나간 듯 합니다만, 요시쓰구란 인물은 곱씹을 수록 새로운 맛이 나는 사람입니다.

    군사적 재능은 킨고를 상대로 보여준 분전을 생각해 보았을 때 더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으며(히데요시가 요시쓰구에게 병사 십만을 주어보고싶다고 했던가요 제대로 기억이 안 나는군요.)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이자, 뛰어난 재사였으니 모든 면에서 준수한 팔방미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댓글을 등록하기에 생각난 것입니다만, 어쩌면 요시쓰구는 패배를 알고서도 미쓰나리의 편을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병이란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죽음이었을테니까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7 09: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시츠구가 미남이었다는 것은 후세의 창작이 아닐지... 보통 뛰어난 활약을 한 사람은 어느새 미남이 되는 경우가 있나 보더군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 義経]도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에 등장했을 때만해도 그다지 미남은 아니었나 본데 이후 절세의 미남이 되었듯이요.

      확실히 세키가하라 전쟁에서는 엄청난 활약을 했습지요. 머리 하나로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의 마에다 군 1만 5천을 되돌리게 하였으며, 사나다 부자를 끌어들여 토쿠가와 주력군 3만 이상을 시나노에 묶어 놓았으니까요. 아마 요시츠구가 없었음 서군은 아예 싸워보지도 못하고 끝났을 가능성도 있었습지요.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병들어 죽느니 전쟁터에서 죽길 바랬을지도.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7 1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시츠네가 미남이 아니었다는 것을 전 튀어나온 이빨을 근거로 한 말이었는데, 당시는 그것이 추남이 아닌 용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자세히는 耿君님의 블로그를 참조해 주시길.
      http://hyunk02.egloos.com/4126094

    •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09.07 20: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고가는군요. 요시쓰네는 토끼상이었단 것인가(..)

      사나다 유키무라가 받아온 미화를 생각해본다면, 발해지랑님의 말씀이 사실일 듯합니다. 요시쓰구 본인은 지하에서 이 얘기를 알게된다면 웃고 있겠군요.

      쓸데없는 소리입니다만 어언 100명을 다 채워가는 듯 한데, 요시쓰구는 몇번째인지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08 00: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시츠구가 84번째 였습니다.
      어서 빨리 이 책을 끝내고 신장공기 해야 하는데 말입죠..--;

  5. Favicon of http://pray4abyss.egloos.com/ BlogIcon 로날드럭 2011.09.14 19: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게임 전국바사라3에서는 좀 다크하게 나오더군요.
    분고 오토모 씨와 연줄이 있다고 해서 놀랐습니다만,
    발해지랑님도 여기에 그닥 동의하시지는 않는 것 같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14 23: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위에 주석에도 언급했습니다만, 만약 오오토모[大友] 가신 출신이라면 오오토모 소우린[大友宗麟]이 그런 것을 언급했을 것 같은데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오오타니 씨[大谷氏]가 큐우슈우[九州] 출신은 아닌 것 같습니다.

  6.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11.09.15 2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켄신이랑 같이 흰두건이 아이콘이 된 것 같은 요시츠구랄까;;
    요시츠구 얼굴 그림은 요괴나 악령 뺨치게 그려놨군요(...) 히데아키가 생각보다 일찍 죽어서 그런지 요시츠구의 저주 때문에 죽었다는 연관 스토리도 나름 임팩트가 강한거 같네요.

    각주 2번에 히데이에 한자가 나오이에로 써져있네요.

  7. 권지용 2011.09.17 2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에이 일러 탓에 첫인상은 타이의대모험의 미스트번 코스프레인줄 알았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9.18 16: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비슷한가 보죠? 어떤가 해서 찾아보려고 해도 어떤 것인지 모르겠군요. 검색해도 전국바사라의 것만 나와서요
      (전국바사라는 마치 떠돌이 검심의 시시오 같은 이미지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