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이 날로부터 11일째에 미츠히데[光秀]는 야마자키[山崎] 텐노우잔[天王山] 산의 산기슭과 요도가와[淀川] 천 사이에 있는 들판에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결전을 벌였고, 북상해온 히데요시 군에게 전군(全軍)이 무너져 패배하였다. 미츠히데는 도주하던 중 오구루수[小栗栖]에서 목숨을 잃었다. 하루 만에 역사가 전환되었다.

 

 미야[宮]는 미츠히데의 패망을 듣고 승리자의 이름을 물었다.

 - 그 자를 히데요시라고 하는가?

 이 승자의 이름을 미야는 기억하고자 하였다. 그 이름이 사악(邪惡)을 쳐부수었다. 그 이름이 승자의 이름이라는 것 이상으로 소년의 감각 속에서는 그 어느 것보다 정의로운 울림을 가지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시세(時勢)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히데요시는 그 후 곧바로 전쟁터를 떠나지 않고 야마자키의 타카라데라[宝寺]라는 절에 본영을 설치하고 천하를 손에 넣을 계책을 진행시키는 한편, 사람을 파견하여 쿄우[]의 질서를 회복하였다. 히데요시는 10월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입궐하여 종오위(從五位) 사콘에쇼우쇼우[左近衛少将]에 임명 받았다. 노부나가[信長]의 장례식을 다이토쿠 사[大徳寺]에서 치를 때는 그 관위로서 임했다. 여전히 히데요시는 그 경쟁자 오다 가문[織田家] 필두 가로(家老)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가 있기에 쿄우[京]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쿄우[京]는 요해(要害)가 아니다. 이 시기의 히데요시처럼 불안정한 정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머물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 후 히데요시의 지모는 천하를 진동케 하였다. 군세를 여기저기로 이동시켜, 다음 해인 1583 4월에는 오우미[近江]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시바타 카츠이에를 격파하고 더욱 북진하여 에치젠[越前]에서 카츠이에를 멸하였다.

 그 다음 달에는 다시 쿄우()에 나타나 입궐하였다. 이때 종사위하(從四位下) 산기[参議]에 임명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히데요시의 천하는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 시기부터 여전히 몇 년간, 옛 오다계의 다이묘우[大名]로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토우카이[東海]에서 독립된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칸토우[東], 오우우[奥羽], 시코쿠[], 큐우슈우[九州]는 여전히 히데요시 정권 밖의 땅이었다.

 

 히데요시는 여전히 바뻤다. 이 병마(兵馬)의 분주함 속에서도 히데요시는 오오사카[大坂]에 성을 쌓고 있었다. 1583년이 저물 즈음이 되어서야 주성(本丸)이 막 완성되었음을 쿄우토[京都]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대한 성이라고들 하였다. 히데요시는 그 주성의 바로 옆에 '산골 성곽[山里廓]'이라는 이름의 성곽을 만들어, ()를 즐기는 장소로 하였다.

 

 산골 성곽.

 ..이라는 이름은 쿄우[]에서 화제가 되었다.

 산골 성곽은 - 그 이름이 나타내는 대로 성내에 있는 한 성곽 안에 산을 만들고 숲을 우거지게 하여 계곡을 일으키고 물을 흐르게 하여 사시사철 송운(松韻)을 울리게 할 정도로 큰 규모의 자연을 만들어서, 그 초목(草木)으로 파묻힌 곳에 한 채의 다실(茶室)을 만들어 거기에서 히데요시는 와비챠[わび茶]를 즐기고 있다고 한다.

 

 상당히 차를 즐기는 사람[수키샤=数奇者]인 것 같군

 

 하고 궁정의 사람들도 들은 소문으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미야도 그러한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차()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몰랐다. 우선은 이해하기에 미야가 너무 어렸으며, 한편으로 공가(公家)라는 전통사회는 아직 차와 같은 그러한 막연한 신흥(新興) 미의식(美意識)이 이식되어 있지 않았다. 전시대의 노부나가는 차를 좋아하였지만, 차를 공가(公家)의 세계로 가져오지는 않았다. 자연히 차 등을 즐기는 것은 쿄우[京], 사카이[], 하카타[博多] 근방의 부유한 상인이나 스님 혹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무가(武家)의 일부 정도들만의 것이라고 궁정의 신하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취향을 대단히 잘 살려 흥미롭더군요

 

 하고 히데요시에게 초대받아 오오사카에 내려갔다 온 상급귀족[公卿]들이 산골 성곽에 갔다가 가지고 온 이야기를 카쥬우지 가문[勧修寺家]에 전하였다. 다실이라는 것은 굉장히 작아서, 불과 타타미[畳] 두 장 깔려 있을 정도의 크기[각주:1]라고 한다.

 불과 타타미 두 장 깔린 다실에…’

 미야는 그것을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저 장대한 성곽 안에, 히데요시는 불과 타타미 두 장 정도 크기의 작은 다실을 만들고 몸을 집어 넣어 허리를 굽혀서는 시골 할배처럼 차를 마시고 있다고 한다. 그 그림을 미야는 우스꽝스러움과 호의를 담아 상상했다.

 어째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일까?’

 하고 미야는 소년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고 하였다.

 

 그것이 차에서 말하는 와비[び]라는 것이옵니다

 

 고 가르쳐 준 것은 탄고[丹後]의 다이묘우[大名]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였다. 유우사이는 토요토미 가문의 다이묘우이기 이전에는 오다 가문의 다이묘우였으며, 한때는 미츠히데의 지휘 하에 속해있었다. 거기에 그 전에는 아시카가 쇼우군[足利 軍]의 측근으로서 그 삼대의 변동기를 교묘한 살아가며, 항상 어느 시대의 권력자에게건 그 교양을 진중 받았다. 

 처세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우사이는 아케치 미츠히데와 각별한 사이로, 그의 적자(嫡子) 타다오키[忠興]의 부인이 미츠히데의 딸이기도 하여 엮어진 연()은 보통이 아니었지만, 미츠히데의 몰락을 예상하고 그의 모반에는 참가하는 일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산요우도우[山陽道]를 거슬러 온 히데요시 측에 서서는 그 군단에 참가하였다. 앞을 내다보는 것에 있어서는 대단한 후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유우사이는 공가(公家)에서도 신망이 두터웠다. 뭐라 해도 유우사이는 옛 무로마치 막부[室町 幕府]의 명문가 출신이며, 그렇기에 쿄우[京]의 무가귀족(武家貴族)다운 차분함과 공가(公家)와 같은 교양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 교양도 평범한 것이 아니어서 렌가[連歌]도 할 수 있으며, 다도도 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요리(料理)의 실력조차 달인의 영역에 달해 있었다. 그렇지만 유우사이를 쿄우[京]에서 더욱 무게감있게 만드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시가(詩歌)의 학문일 것이다. 그는 시가 학문의 최고권위라고 할 수 있는 고금전수(코킨덴쥬=古今)’를 산죠우니시 사네키[西 枝]에게 전수 받은 상태였다[각주:2]. 상급귀족들도 공가(公家) 문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가를 무인(武人)인 유우사이에게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유우사이가 카쥬우지 가문에 출입하며 미야나 나중에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 天皇]가 되는 미야의 형에게 시가를 가르치고 있었다.

 

 다도라는 것도 그리 무시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 요즘 유행하는 미의식을 몸에 익히도록 미야에게 권하였다. 아직 소년인 미야에게 있어서는 차보다도 시가 쪽이 재미있었다.

 

 와비[び]라는 것은 어떠한 마음가짐인가?”

 

 하고 이때 미야는 질문했다. 어째서 히데요시는 산골 성곽 같은 것을 좋아하고 있나?

 

 와비의 마음은 시가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고 유우사이는 말하며, 단정하게 몸을 일으켜 부채를 무릎에 세우고는,

꽃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산골에

눈 사이의 풀이 봄을 보여주니

花をのみ待つらむ人に山里の

雪間の草の花を見せばや

 라고 읊었다. 후지와라노 카류우[藤原 家隆]의 시였다. 이것이 와비의 정신적 풍경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하고 유우사이는 말했다. 보잘것없는 초가집에 천하에 둘도 없는 명마(名馬)를 매단 풍경이야말로 와비이며, 차의 마음가짐이라고 하였다.

 

 천하에 둘도 없는 명마란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말하는 것인가?”

 

 하고 미야는 말했다. 미야는 너무 잘 깨달을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저 금은을 아로새긴 오오사카 성의 한 성곽에 자연을 만들고 타타미 두 장이 깔린 다실(茶室)을 둔 히데요시의 마음씀씀이를 희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았다.

  1. 대략 타타미 한 장에 1m*2m 정도. 보통 직사각형의 타타미를 세로로 깔아 정사각형에 가깝게 만들어 2m*2m의 크기일 것이다. [본문으로]
  2. '북두의 권'과 같이 한 시대에 한 명만 전수 받는 일자전승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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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8.18 05: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많이 기다렸습니다~ 하치죠우노미야는 별로 풍파에 휘말리지는 않은 듯 하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8.18 1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북두의권이라..ㅎㄷㄷ 절묘한 비유이시군요.

    유우사이는 볼때마다 느끼는게 정말 중세의 르네상스인의 분위기를 풍긴다랄까.. 더군다나 거기에 정치센스까지 담았으니..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18 2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선생님//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시대가 황실의 인물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은 듯 합니다.

    다메엣찌님//아마...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 護熙) 총리가 좀 더 오랫동안 그 직에 머물러 인기를 끌었다면, 그의 선조이기에 NHK 대하 드라마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예전에 생각해 본 적이 있습죠.

.

 

 토요토미 씨[豊臣氏]는 갑자기 출현했다.

 지금까지 지상(地上)에 나타난 어떠한 정권보다도 호화롭고 장대한 이 정권은 불과 십여 일만에 1582 6 2일에 노부나가[信長] 횡사(橫死), 같은 달 13일에 미츠히데[光秀] 패사(敗死)라는 믿기 힘들 정도로 짧은 시간 만에 홀연히 지상에 나타났다. 귀족(貴族)이 되기 위한 어떠한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채 이 일족은 서둘러 귀족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이 여러 형태의 뒤틀림을 낳았다. 그 혈족, 인척, 그리고 양자들은 이 갑자기 바뀐 환경 속에서 우둔한 자는 우둔했던 만큼 똑똑한 자는 똑똑했던 만큼 편히 숨도 못 쉴 수가 없어 평온하게 있지 못하고 불에라도 덴 듯 항상 미쳐 날뛰었으며 때로는 무너져 갔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그만이 냉정하게 있을 수 있었다. 그만은 계속해서 평온했으며 이 새로운 시대와 환경을 잘 견딜 수가 있었다.

 우리미노미야[瓜見宮][각주:1]

 라는 젊은이이다.

 정확하게는 하치죠우노미야 토모히토[宮 智仁] 친왕(親王)’이라고 한다. 텐노우[天皇]의 동생이다. 당연하게도 이 태어나면서부터의 귀족은 토요토미 가문의 양자들 중에서 혈통이라는 점으로는 군계일학이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학문에 더해 정치감각까지도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참고로 쿄우토[京都]의 남쪽 교외에 있는 카츠라[桂]의 마을에는 보기 좋은 오이 밭이 펼쳐져 있다.

 쿄우토의 사람들에게는 사계절마다 즐길 수 있는 것이 많다. 봄에는 아라시야마[嵐山]에서 놀며, 신록(新綠)의 계절에는 키요미즈[水]에서 태양빛에 반짝이는 비()를 구경하고, 가을에는 타카오[高雄]에서 단풍놀이를 한다. 한여름에도 즐길 거리가 있었다. 한낮에 탄바 가도[丹波 街道]를 이용하여 카츠라[]로 가, 그 근방에 자라고 있는 굵직한 오이를 보며 즐기는 '우리미[瓜見]'를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밭에 내려 쪼이는 강렬한 여름 햇빛을 오이 맛의 시원함 속에 담아서 맛보고자 하는 것이 이 우리미()의 풍취일 것이다.

 그 한여름의 풍취를 가장 즐긴 것이 이 친왕이었기에 [우리미노미야]라는 별명이 붙었다.

 

 토모히토[智仁] 1577년 정월에 태어났다[각주:2]. 아명을 코사마루[古佐丸]라 한다. 태어났을 시기, 이미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는 아즈치 성[安土城]을 완성하였고, 또한 츄우고쿠[国]의 모우리[毛利]나 오오사카[大坂]의 혼간지[本願寺]와 싸우면서 쿄우토의 시정(市政)에도 신경을 써, 그 질서를 안정시키는 것에 힘을 쏟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궁정을 존숭(尊崇)했다. 궁정이나 상급 귀족[公卿]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드는 것에도 마음을 써 그들에게 땅을 주고, 그 저택을 계속해서 새로 짓게 하였다. 궁궐 주변은 항상 망치소리로 활기차, 미야[본 항의 주인공 하치죠우노미야[]’를 부르는 말. 이하 그를 미야'로 지칭한다. – 역자 주]는 목수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성인이 되었다. 후년 이 미야가 건축에 강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러한 어렸을 즈음의 환경 때문일 것이다.

 

 부친은 사네히토[誠仁] 친왕이다. 모친은 카쥬우지 하루코[修寺 晴子]라고 하였다.

 미야는 귀족의 관습으로 모친의 친정인 카쥬우지 가문에서 태어나고 또한 자랐다.

 같은 배에서 나온 형이 있었다. 후에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가 된다. 성인식을 치른 후에 이름을 카네히토[周仁]라고 하며, 6살 위에 형이었다[각주:3].

 

 꼬꼬마일 적에는 아무 일도 없이 평온하였다.

 그러다 미야의 6살이 된 여름. 오다 노부나가가 쿄우[京]에서 죽었다. 이것이 미야가 꼬꼬마일 즈음 최대의 사건이었을 것이다. 1582 6 2일 새벽, 미야는 혼노우 사[本能寺]의 하늘을 붉게 물들인 화염을 카쥬우지 저택의 담 너머로 지켜보는 운명을 가지게 되었다. 지켜보면서 몸이 떨려 우는 것 조차 할 수 없었다. 미야가 가진 용모의 특징인 면도날로 짼 듯이 길고 얇은 실눈으로 그 화염을 계속 지켜보았다. 곧이어,

 

 휴우가노카미[日向守=미츠히데]는 여기까지 쳐들어 올까?”

 

 하고 유모에게 물었다. 미야는 꼬꼬마이면서도 미츠히데라는 이름에 적의(敵意)를 느꼈다. 당연할 것이다. 지금 저 화염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오다 노부나가는 궁정의 사람들에게 있어 요 수세기 동안 처음으로 출현한 구세주였으며, 궁정이나 상급 귀족들에게 땅을 내리고 저택을 지어주며, 옛 의식을 부활시키는 등 생각하지도 못했던 행복을 계속해서 가져다 준 신()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지금 미츠히데가 공격하였다. 더구나 가신인 주제에 주인을 시해(弑害)하려고 하고 있었다. 소년의 마음에는 미츠히데라는 자가 악마(惡魔)같이 느껴졌다. 소년뿐만 아니라 궁정의 사람이라면 텐노우[天皇] 이하 누구나가 다 같은 생각을 - 저 불길을 보며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증오보다도 우선 공포 쪽이 더 컸다. 노부나가가 궁정의 아군인 이상,

 휴우가노카미는 필시 궁궐로 쳐들어올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모를 뒤돌아 보며 그것을 몇 번이나 물었다.

 유모는 오오쿠라쿄우[卿]라고 하였다. 궁정의 여관(女官)들 중에서는 시가(詩歌)를 잘 짓기로 유명하였다. 미야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아니요. 아마도

 

 공격해 오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만약 군사들을 이끌고 온다고 하여도, 그것은 텐노우[天皇]를 지키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 고 유모는 반쯤 자신에게 납득시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믿고자 했다. 미츠히데는 무가(武家)이지만 공가(公家)만큼이나 교양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옛 것을 사랑하고, 옛 권위에 낭만을 느끼고 있는 인물이 궁정을 적으로 돌리겠는가?

 

 …”

 

 하고 유모는 미야를 안은 손에 힘을 담았다.

 

 가만히 계십시오. 이렇게 가만히 있는 한, 무가(武家)의 무리들이 여태껏 쿠게(公家)에 손을 댄 적은 없사옵니다. 침착하게 있으시길.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침착하고 담담함을 계속 지키는 것이 쿠게(公家)의 길이옵니다

 

 하고 유모는 말했다. 그랬지만 미야는 조용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으며, 오히려 유모 쪽이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의 낭패함을, 자신의 교훈으로 안정시키고자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교훈에 틀림이 있지는 않았다. 역사라는 것이 유모의 교훈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공가(公家)텐노우[天皇]와 궁정 신하 가 침착하고 담담하게 있는 한 권력을 놓고 싸우는 자들이 공가에 손을 쓴 예가 없었으며, 오히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공가를 자신들의 진영으로 끌어들이고, 공가를 자신들이 옹립할 수 있는지에 부심하였다. 유모는 미야에게 그것을 가르치고자 하였다.
  공가(
公家), 무가(武家)의 권력자들이 권력을 서로 빼앗기고 뺏고 있을 때, 어느 한쪽에 말씀을 주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항상 방관하며 어느 쪽에건 서지 마시길. 승패가 확정되고 승자가 살아남으면 그 살아남은 자가 맞이하러 올 때까지 자리에서 움직이면 안 됩니다 - 고 유모는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미야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침묵하며 두 눈을 밝아오는 하늘로 열어두고 있었다. 유모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기에는 아직 미야가 너무 어렸으며, 거기에 그 정도의 교훈으로는 지금 이 자리에서 느껴지는 미츠히데에 대한 증오와 공포를 지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1. ‘우리[瓜]’는 오이를 말한다. 우리미[瓜見]는 꽃구경이라 번역되는 ‘하나미[花見]’와 같은 개념으로, 오이 밭에서 시원한 오이를 먹으며 피서를 즐기는 것. ‘미야[宮]’는 황족의 존칭을 말한다. [본문으로]
  2. 위키에 따르면 1579년 2월 생. [본문으로]
  3. 역시 위키에 따르면 ‘周仁’는 ‘카타히토’라고 읽으며 8살 위(1571년 생)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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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8.06 0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쩌다 황실의 핏줄이 원숭이의 유자가 됐을까요.. 잘 모르던 인물인데 이번 편을 통해서 좀 알아야겠습니다. 기대되네요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06 1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잘 모르는 인물이어서, 이번에 번역하면서 좀 찾아 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쿠게(公家) 쪽은 관심을 덜 가지고 있다 보니..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8.07 0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쿠게들이 조총들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려면 메이지때까지 기다려야하니..(ㅎㅎ;) 이분도 조용히 전란을 구경하는 삶으로 일관했을 것 같군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8.07 18: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잘모르는 생소한 인물이라 다음 편도 기대되네요^^;

  5.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8.08.16 09: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바 료타로의 소설은 역시 재밌습니다. 저 슬램덩크 만화책 일본어판으로 샀어요. 지금 1권 열심히 읽고 있는 중입니다. 어렵네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17 14: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이 늦어져 정말 죄송합니다. -- __ ^^

    다메엣찌님//메이지 때라고 해도 쿠게 정도면 다들 멋진 정복을 입고, 본영에 앉아 있기만 하지 않았던가요? 메이지 때 전쟁이라고 하면 세이난 전쟁 밖에 생각이 나질 않아서..

    NOA님//잘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역사 전면에 나서질 못한 곳에 있던 사람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턴오버님//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슬램덩크라... 저도 처음엔 H2로 시작했지만, 젊은 학생들이 나오는 만화는 아무래도 슬랭어나 말줄임 말이 많은 편이라 조금 힘들수도 있습니다. 뭐 그만큼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는 있지만요.(전 그 다음에 본 만화가 '변변찮은 청춘들(ろくでなしBLUES)'이라 H2에서 배운 것이 나름 도움 되더군요 ^^)
    처음엔 뭐든 힘들더군요. 건승을 기원합니다.

 노부나가의 성격은 크게 나누어 두 개의 면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합리적인 근대(近代)에 대한 동경과 잔혹한 살육에 대한 의지가 그의 몸 안에 공존하고 있는 것 같다.

 포르투갈의 선교사 프로이스(Luis Frois)는 직접 노부나가와 회견하였는데, 당시의 일을 로마 교회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전략)…키가 크고 말랐으며, 수염이 적고, 목소리는 대단히 크며…(중략)… 전술이 뛰어나고, 대부분의 규율에 복종하지 않으며, 부하의 진언에 따르는 것이 드물다…(후략)]

 고 쓰면서, 최하급의 병사와도 친근감 있게 이야기를 하는 대장(大將)이라 말하고 있다. 독선적인 성격이지만 뛰어난 군단지휘자의 풍모를 방불케 한다

 

 노부나가는 중세의 무거운 쇠사슬을 끊어, 일본에 근세의 여명기를 가져다 주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동시대의 영웅인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 차별화 되는 것은 이 근대적인 합리성일 것이다. 신겐이나 켄신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반드시 신불(神佛)에게 기도를 올렸지만 노부나가는 그것을 부정하였다. 노부나가는 무신론자였다.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납득한 것도 노부나가였다. 이보다 백 년 뒤, 에도 바쿠후(幕府)의 어용학자 하야시 라잔(林 羅山)은 지구가 둥글다는 설에 반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노부나가가 얼마나 시대에 앞선 근대성을 가지고 있었는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코우베()코우베 시립박물(市立博物館)에는 노부나가가 애용하던 세계지도 병풍이 있다.

 

 너무 합리적인 나머지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만 이용하려는 냉혹한 면이 있었다. 쓸모 있는 자는 히데요시와 같이 그 출신에 구애 받지 않고 계속 출세시켜 주었지만, 한번이라도 무능이라는 낙인을 찍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버렸다. 가로(家老)로써 힘써온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등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혼간지(本願寺) 공략에서 아무런 활약이 없었다는 이유로 고우야(高野)산(山)으로 추방 당하였고 말년에는 길가에서 굶어 죽는 비참함 죽음을 맛보게 하였다.

 

 1571 9.

 노부나가는 히에이잔(比叡山)산(山)을 포위하여 건물, 석탑, 승가가람(僧伽藍摩)을 전부 불태움과 동시에 남녀노약을 가리지 않고 수천 명을 학살했다. 이어서 1574년 키소카와() 강 하구(河口)나가시마(長島)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1])를 토벌했을 때는, 퇴성(退城)을 허용한 듯이 속여서는 방심한 틈을 타서 일제 사격하고 성에 불을 질러 2만여 명의 남녀를 태워 죽였다. 에치젠(越前)의 잇코우잇키 정벌에서는, 그 시체들로 인하여 후츄우(府中)의 마을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부 불교도에 대한 노부나가의 철저한 증오가 표출된 것이다[각주:2].

 반대로 기독교에는 관대하여 오히려 보호하였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발령한 선교사 추방령을 해제하였고, 쿄우토(京都)에 교회당을 세우는데 원조까지 하였다.

 

 노부나가에게도 익살스러운 인간적인 측면이 있었다.

 별명을 붙이는 것이 장기로, 히데요시에게는 [원숭이([각주:3])]라던가, [대머리생쥐(げネズミ[각주:4])]라고 붙였으며,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에게는 [대머리(キンカ)[각주:5]]라고 붙였다.

 

 따스한 인간성을 나타내는 편지가 남아있다. 히데요시의 마누라 네네(ねね)에게 보낸 것이다.

 […(전략)네네님 정도의 미인을 저 대머리생쥐 히데요시는 두 번 다시 얻지 못할 테니까, 네네님도 지금부터는 마님다운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질투 같은 것을 일으키지 않게…(후략)]

 히데요시가 여색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을 네네가 노부나가에게 호소하자 그 답변으로 보낸 편지이다. 그 외에도 냉철한 무장의 이미지와는 상상할 수 없는 인간미 넘치는 일면이 있었다.

 스모우(相撲[각주:6])를 아주 좋아하여, 1578년에 아즈치(安土)성(城)에서 열린 스모우 대회에는 주변에서 300여명이 모였고, 이 중에서 23명의 우수 씨름꾼을 선발하여 승자에게는 부채 등의 상품을 내렸다.

 

 오다(織田) 가문 중에서도 노부나가의 가문은 말류(末流)이다.

 오다 가문은 아시카가 쇼우군(足利 )을 보좌역인 시바(斯波) 가문의 오와리(尾張) 슈고다이(守護代[각주:7])였다. 이 오다 가문에 오와리 위쪽 4개군()이세노카미(伊勢守) 가문과 아래쪽 4개군()을 지배하는 야마토노카미(大和守) 가문이 있어, 노부나가가 태어난 가문은 이 야마토노카미 가문을 섬기는 세 행정관(三奉行[각주:8]) 중의 하나였다. 아시카가 쇼우군에서 보면 부하(斯波)의 부하(오다 종가(領家))의 부하(織田 大和守)의 부하(織田 正忠)에 지나지 않는다[각주:9].

 그러나 당시의 하극상 풍조를 타고 노부나가의 부친 노부히데(信秀) 시대에는 오와리(尾張) No.1 실력자로 올라선다.

 

 부친이 죽었을 때, 노부나가는 아직 16살로 세간에서 [최강 찌질이(うつけ)]로 불리며 얼간이 취급을 받고 있었다. 당시의 기록에 따라 그 풍모를 설명하자면, 반바지(半袴)에 나시(なしの浴衣)이며 헤어스타일은 챠센마게(茶筅), 머리를 묶는 끈(元結)은 빨간색이나 짙은 녹색 등의 강렬한 색을 좋아하였으며, 큰 칼(太刀)의 칼집은 붉은색. 무구(武具)도 새빨간 색이었다.

 이런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였고 걸어 다니며 밤, , 오이, 떡 등을 칠칠 맞게 흘려가면서 먹었다. 거기에 남의 어깨에 매달려 다니거나 하여 행동거지에 예절이 없는 것을 말하면 끝이 없었다.

 

 부친 노부히데의 장례식 날도 제대로 차려 입지 않고 나타나, 부처님 상 앞에 나아가서는 갑자기 향을 움켜쥐고는 부친의 위패에 집어 던지고서는 돌아갔다고 한다. 이 폭거에 교육을 담당한(傅役)인 노신 히라테 마사히데(平手 政秀)는 노부나가의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배를 가르고 죽었다.

 

 오케하자마()의 일전이 그런 노부나가의 천하를 손에 넣기 위한 첫 번째 도약대였다.

 1560 5 19일 심야. 노부나가는 갑자기 나각(法螺貝)을 울리게 하여 병사를 동원하면서, 손수 코우와카마이(幸若舞[각주:10]) [아츠모리(敦盛)]를 춤추었다.

 [인간 오십년, 하천(下天)과 비교해 보니, 몽환(夢幻)과 같도다(人間五十年、下天のをくらぶれば、夢幻のごとくなり).]

 이 부분을 세번 춤추었다 한다. 춤이 끝나자 뜨뜻한 물에 밥을 말아서 먹은 뒤 질풍과 같이 달려 나갔다고 한다.

 

 적은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대군단을 이끄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이다. 오와리 절반만 소유한 오다 씨()같은 것은 가볍게 물리치고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천하에 패를 외치고자 하였다. 오다 가문의 위급존망지추(危急存亡之秋)였다. 이마가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기습 전법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폭풍우가 치고 있었다. 오다 군()덴가쿠하자마(楽狭)에서 쉬고 있는 이마가와 군의 허를 찔러 습격, 결국 대장 요시모토의 수급을 베고 승리의 함성을 울려 퍼지게 한 것이었다(누누이 말씀 드렸듯이 저는 아케치 님의 “[說] 오케하자마(桶狹間) 진상정면공격설”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생각합니다. – 역자 주)

 

 1575 5나가시노(長篠)의 전투는 일본 전투 사상 획기적인 전투였다. 근대 전법을 구사한 오다 군이, 그때까지 센고쿠(戦国) 최강을 자랑하던 타케다(武田) 군단을 괴멸시킨 것이다. 노부나가는 철포 3000정을 끊임없이 타케다의 병마(兵馬)에 집중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각주:11].

 

 아즈치(安土) 7층루의 장대한 성을 쌍은 것은 1579년이다. 아즈치는 쿄우토(京都)와 가깝고 비와코(琵琶湖) 호수의 물길을 이용할 수 있으며, 북쪽으로는 호쿠리쿠(北陸)와 통하며, 남쪽으로는 이세(伊勢)로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7층의 텐슈카쿠(天守閣)의 내부는, 카노우(狩野)파의 벽화로 장식되었고, 최상층은 금박(金箔)을 입혔다고 한다. 일본에 와 있던 선교사들은 성안의 어느 것이나 세계에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한 건물이라고 절찬하였다.

 

 희대의 영웅 노부나가는 1582 6 2. 갑자기 일어난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으로 인해 혼노우(本能)()에서 쓰러졌다.

 이날, 모리 란마루(森 蘭丸)의 보고로 모반의 군세가 아케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노부나가는 단 한마디 [是非に及ばず 할 수 없군, 어쩔 수 없군한국어로 정확히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 역자 주]라고 말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노부나가는 손수 활을 들고 싸웠지만 이제는 여기까지라는 것을 깨닫자 건물 깊숙이 들어가 문을 닫고 자인(自刃)했다.

 

 그는 단 한 올의 머리카락도 이 세상에 남기지 않았다. 적에게 자신의 시체를 보여지는 것에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1534년 노부히데(信秀)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죽은 후 오와리 절반을 통일하였고,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에서 물리치고 미카와(三河)의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동맹을 맺어 오와리를 통일. 1564미노(美濃)를 공략. 1568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옹립하여 쿄우토(京都)에 입경한다. 이후 아자이(), 아사쿠라(朝倉), 타케다(武田) 등 여러 가문을 물리치고 혼간지(本願寺)의 잇코우잇키(一向一揆)를 항복시켜 천하 제일의 실력자가 되지만, 패업(覇業)을 목전에 두고 부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으로 인하여, 쿄우토(京都) 혼노우(本能)() 에서 자인했다. 49.
  1. 혼간지(本願寺)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농민 폭동군. [본문으로]
  2. 증오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과격한 행동은 에도 시대의 혼간지(本願寺) 측이 왜곡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원숭이(일본 발음으론 사루(さる))라고 붙게 된 것은, 1591년 쿄우토(京都)에 낙서가 되어있길.. “말세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무 아래 있는 어느 칸파쿠를 보더라도(末世とは別にはあらじ、木下にさる関白をみるにつけても)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나무 아래’는 키노시타(木下)로 히데요시가 하시바(羽柴) 성을 쓰기 전의 성이다. [본문으로]
  4.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칭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정말로 대머리였다기 보다는, 미츠(光)의 아랫부분과 히데(秀)의 윗부분이 결합되어 ‘대머리 독(禿)’이 되었고, 그와 같은 뜻인 ‘キンカ頭’로 부르지 않았나 싶다. [본문으로]
  6. 일본 씨름 [본문으로]
  7. 여러 지역을 가진 슈고 혹은 바쿠후(幕府)의 중요 직책을 가지고 있을 경우 그 지역에 가지 않은 채 가신 혹은 친척에게 대신 그 지역을 통치시켰고 그런 사람을 슈고다이(守護代)라 하였다. [본문으로]
  8. 오다 이나바노카미(織田 因幡守), 오다 토우자에몬(藤左衛門), 오다 단죠우노죠우(織田 弾正忠)의 세 가문. [본문으로]
  9. 이세노카미 가문(伊勢守)이 오다 가문의 종가라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10. 단한 춤을 추며, 옛 무장들의 영웅담을 읊는 것. [본문으로]
  11. 3000의 철포와 3단 철포는 없었다는 것이 대세이다. 자세한 사항은 검색해 보시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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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9 02: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년도 NHK 대하드라마 주인공이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이기에 만약 그 때까지 번역할 수 있다면 그가 짱 먹을 것 같습니다(예로 '무인 토시이에'의 주인공 마에다 토시이에 포스트( http://blog.naver.com/valhae0810/100023192573 )는 제 블로그에서 가장 많은 댓글과 링크 스크랩을 자랑하고 있습죠)

    문제는 나오에 카네츠구는 92번째 인물이고, 이제 노부나가는 19번째 인물이라는 거....
    (아마 내년 그 드라마가 끝날 즈음에나 가능하지 않을지...)

    개인적으로도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7.20 0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노부나가!!!
    역자 주에 쓰신 것 처럼 부풀려진 면도 있지만 어쨌든 대단한 인물이네요
    '빠'는 아니지만 여러가지로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전국무장100화 중에서 댓글이 가장 많이 달리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보네요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7.20 0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지인』은 나오에 카네츠구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군요
    내년엔 다시 남자들의 세계를 그린 대하드라마~!!! >ㅁ<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0 1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연은 워터보이즈에서 빤스입고 춤추던 츠마부키...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20 1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분도 플레쉬 오버 덕분에 깔끔한 화장을 하실 수 있었던 듯 싶더군요(-_-;) 아무튼 이렇듯 허무하게 죽으리라고는..잔넨(-_-)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1 08: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무라고 말씀하시니까, 프로이스가 노부나가의 죽음에 대해 말한 부분이 생각납니다.(저는 그 부분이 맘에 들더군요)
    [그 이름만으로도 만인을 공포에 떨게했던 인물이, 이 세상에 머리카락 한 올도 남기지 않았다]...는 부분이(...자세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뜻이었던 것 같네요 ^^)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kanshiniove BlogIcon 루키아 2008.08.27 2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오다 노부나가를 아주아주 좋아합니다앗..ㅋ.ㅋ.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free_artist BlogIcon 2008.09.18 15: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1 2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루키아님//저도 노부나가를 아주아주 좋아합니다!

    쏭님//자주자주 들려주세요~

  10. 오호라 2016.09.02 07: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림은 히데요시그림입니다.

 '살무사 도우산'이라는 별명으로 알 수 있듯이, 사이토우 도우산의 평판은 굉장히 안 좋다.

 타이라노 마사카도[門][각주:1],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등과 함께 악인(惡人)의 전형적인 인물로 일컬어지고 있다.

 같은 시대에도 도우산을 비난하는 아래와 같은 낙서가 유행했다고 한다.

주인을 베고, 사위를 죽이는 것은 몸의 파멸. 옛날엔 오사다, 지금은 야마시로

主を斬り、聟を殺すは身のおわり、昔はおさだ、いまはやましろ

 미노오와리(()のおわり)미노[美濃]오와리[尾張]를 말하는 것으로, 주군 토키 요리요시[土岐 芸]가 도우산에게 추방 당하여 미노에서 오와리로 쫓겨난 것을 말하며, ‘오사다 [헤이지의 (平治)]에서 주군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 義朝][각주:2]를 죽인 오사다 타다무네[長田 忠致]를 지칭하는 것이다. ‘야마시로는 사이토우 야마시로노카미 도우산[斎藤 山城守 道三]을 말한다. 어느 쪽이건 주군을 배신한 극악인(極惡人)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손가락질했던 것이다.


 잔혹한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

 [도우산은 작은 죄를 지었더라도 거열형(車裂刑)에 처했으며, 혹은 솥에 죄인을 넣어 그의 부인이나 부모형제에게 불을 피우게 하여 사람들 앞에서 삶아 죽이게 하였다.]


 적수공권(赤手空拳). 일개의 기름 상인에서 미노[美濃] 일국(一国)의 태수로 출세했을 만큼 젊었을 때부터 두뇌의 명석함은 발군이었다.

 쿄우토[京都]의 묘우카쿠 사[妙覚寺]에서 수행할 때는 '배움은 부처의 가르침에 통달하였으며, 변설(辯舌)부루나(富樓那 석가의 제자로 변설가)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며, 내외(內外)를 잘 깨닫고 있으니 훗날 굉장한 명승(名僧)이 될 것이다'고 촉망 받았다. 묘우가쿠 사()에서는 호우렌보우[法蓮坊]라는 이름이었다. 이 시절에 알게 된 난요우보우[南陽坊]가 훗날 도우산이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난요우보우는 미노의 호족 나가이 토시타카[長井 利隆]의 동생으로, 후에 미노[美濃]명찰(名刹) 죠우자이 사[常在寺]의 주지(住持)가 되어 '니치운 상인[日運上人]'이라 불리게 된다.


 도우산의 전반생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어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쿄우토[京都]의 교외에 있는 니시노오카[西]의 낭인 마츠나미 모토무네[松波 基宗]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마츠나미 가문은 대대로 '북면의 무사(北面武士 상황(上皇)의 거처를 지키는 무사)' 집안이었다고 한다.

 호우렌보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환속하여 기름 상인이 되었다. 나라야[奈良屋]데릴사위로 들어가, 야마자키야 쇼우고로우[山崎屋 庄五郎]라는 이름을 칭었다.


 미노[美濃]의 성 밑 마을(城下町)에서 기름 행상을 하고 있을 때의 에피소드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손님을 모으기 위해서 일종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것이다. 기름을 에 담아 손님의 항아리에 옮기는데 깔때기를 사용하지 않은 채 일문전(一文銭[각주:3])의 구멍을 통해서 흘려 넣은 것이었다. 한 방울도 구멍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구멍 주위에 한 방울이라도 묻는다면 공짜로 주겠다고 하였기에 그에게는 손님들이 잔뜩 모여들었다고 한다.

 어쩌다가 이 퍼포먼스를 미노[美濃]의 호족 나가이 토우자에몬[長井 藤左衛門]의 가신 중에 한 명이 보게되었다.

 굉장한 기술이군. 저 묘기를 무예로 살린다면 필시 뛰어난 무사가 될 수 있을 텐데……”


 이 나가이 가문의 무사가 한 말이 도우산을 무사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도우산은 기름 상인을 관두고 창() 수련에 정진하기 시작했다. 3간반(間半=약 6미터40센티[각주:4])이라는 굉장히 긴 창(=나가야리(長槍))을 만들어, 그 창 끝에 바늘을 달아서는 대나무 가지에 매단 일문전의 구멍을 뚫는 연습을 하였다. 필사의 수련 끝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고 이어서 백발백중의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나가야리[長槍]는 센고쿠[戦国]전투에는 필수인 것이 되었는데 도우산이 그것의 발명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철포()의 실력도 또한 굉장했다고 한다[각주:5].
 이리하여 무예가 숙달된 도우산은 예전 묘우가쿠 사()에서 함께 수행했던 난요우보우=니치운 상인[日運上人]의 연줄로 나가이 토우자에몬 나가히로[長井 藤左衛門 長弘]를 섬기며, 마츠나미 쇼우고로우[松波 庄五
郎]라는 이름을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우산이 가진 다른 매력적인 면으로 나가이 씨()에게 접근한 것은 아닌가 하는 말들도 있다. 기름 상인이라고 하여도 조그만 가게를 운영했던 것이 아니라야마자키 하치만 궁[山崎八幡宮]전매권(專賣權)을 가진 기름 조합(油座)에 속해있던 상인으로 대단히 큰 규모의 가게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기름 조합의 상인은 관소(關所[각주:6])를 통과할 때도 세금을 면제받는 특권상인이었던 것이다.


 곧이어 도우산은 미노 슈고[美濃守護] 토키 모리요리[土岐 盛頼][각주:7]의 동생인 요리요시[芸]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이 즈음부터 그의 야망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는 요리요시를 꼬드겨 자신을 멀리하고 있던 당주인 모리요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당주가 된 요리요시는 도우산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도우산은 요리요시의 애첩 미요시노[深芳野]까지 자신의 부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독선적 행위가 두드러지기 시작하자 노신(老臣)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특히 도우산을 천거했던 나가이 토우자에몬이 가장 강하게 반발한 것이다. 그러자 도우산은 은혜를 입었던 이 토우자에몬을 모살(謀殺)해 버린다. 이미 나가이 신쿠로우 토시마사[長井 新九朗 利政]로 이름을 바꾸고 있던 도우산은 이렇게 나가이 가문을 완전히 빼앗은 것이다. 일시적으로 나가이 일족의 반발을 사 공격을 받아, 주군 요리요시 밑으로 도망쳤으나 오우미[近江]의 슈고다이묘우[守護大名] 사사키 씨[木氏][각주:8]의 중재로 겨우 지위를 보전하였다.

 이후 도우산은 또다시 성()을 바꾸어 사이토우 성[姓][각주:9]을 칭하였다. 쇠약해져 있던 사이토우 씨()의 양자로 들어가 사이토우 야마시로노카미 히데타츠[藤 山城守 秀竜]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착실히 그는 출세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야망은 끝없이 커져만 갔다. 다음 목표는 미노[美濃]의 주인 자리였다.


 그의 독선적인 행동이 또다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미노의 호족들이 반 히데타츠 연맹군을 조직하여 공격해 왔다. 그러나 운 좋게 오우미[近江]의 사사키 씨(),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씨[朝倉氏]의 중재로, 큰일이 터지기 전에 화해하였다. 이때 히데타츠는 그 죄를 사죄한다는 의미로 머리를 밀고 불문에 들어가 이때부터 도우산[道三]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도우산의 덫이었다.

 15425. 갑자기 도우산은 요리요시의 거성 오오가 성[大桑城]을 습격하여 주군을 추방하여 명실공히 미노[美濃]의 태수(太守)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도우산은 곧이어 이웃나라 오와리[尾張]의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의 공격을 받게 되지만, 딸인 노히메[]를 노부히데의 적자 노부나가와 결혼시켜 평화협정을 맺었다.

 당시 얼간이라는 말을 들으며 무시를 받고 있던 노부나가를 한번 보자마자,

 안타깝게도 이 얼간이 집 앞에 내 자식들은 말을 메게 되겠구나[각주:10]

 라고 탄식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이 즈음의 일인데, 도우산은 멍청함을 가장한 노부나가의 얼굴에서 일찍부터 후년 천하의 패자(覇者)가 가진 재능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역시 예언은 적중하여, 도우산의 손자 타츠오키[興] 때가 되어 사이토우 가문은 노부나가에게 멸문 당해 버린다[각주:11]

 

 도우산의 말년은 비참했다.

 그는 주군 요리요시의 복수를 받게 된다. 그의 부인이 된 미요시노는 도우산에게 왔을 때 이미 요리요시의 씨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도우산의 적자 요시타츠[]였다. 이 설의 진위는 확실치 않지만 도우산의 애정은 이 장자에게는 박했고, 둘째인 마고시로우[孫四郎], 키헤이지[喜平次]에게만 쏠려 있었다.

 

 도우산은 요시타츠에게 가독을 물려주어 킨카잔 성[金華山城][각주:12]에 있게 하고, 자신은 나가라가와[長良川] 강 건너편에 있는 사기야마 성[鷺山城]에 은거하였다.

 요시타츠는 한센병을 앓고 있었고 65(195cm)이라는 큰 키였으며 성격도 굉장히 과격했다고 한다.

 부자간의 사이는 좋지 않아 날이 갈수록 험악해 져 갔다. 도우산은 요시타츠를 없애고 둘째인 마고시로우에게 가문을 물려주려고 은밀히 꾀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요시타츠가 선수를 쳤다. 꾀병을 부려 숨이 있는 동안 유언을 하고 싶다고 하여 두 동생을 성에 불러들여 죽인 것이다.

 도우산은 격노하였다. 두 아들을 단번에 잃은 실망도 컸다. 이리하여 아비와 아들이 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556 4.

 결국 둘은 전쟁을 벌인다. 도우산은 63세가 되어 있었다. 젊은 요시타츠의 적수는 되지 못하였다. 패하여 키다이 사[城田寺]로 도망치던 도중, 요시타츠의 가신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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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타츠의 아들 타츠오키가 노부나가에게 패하여 사이토우 가문에 종지부가 찍히는 것은 이로부터 11년이 지난 1567년이었다.

 

[사이토 도산(藤 道三)]
이름은 토시마사[利政], 후에 히데타츠[竜]. 말년에 불문에 들어가 도우산[道三]이라는 이름을 칭했다. 미노 슈고[守護] 토키 씨[土岐氏]의 가신이 되었고, 1542년 주군 요리요시를 추방하여 미노 슈고가 된다. 1556 4 20일 적자 요시타츠와 싸워 전사(戰死).

  1. 939년에 칸토우(関東)에서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텐노우(新皇)]를 자임하였으나 진압당하였다. [일본 3대 원령(怨靈)] 중의 하나. [본문으로]
  2. 카마쿠라 바쿠후[鎌倉 幕府]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의 부친. [본문으로]
  3. 우리 나라의 엽전처럼 구멍이 뚫려 있다. [본문으로]
  4. 아시가루(足軽)가 아닌 일반 무사의 창은 1간반(약 2.7~3미터)~2간(약 3.6~4미터)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일본에 철포가 전래된 것은 1543년이라고 하니 이 당시는 아직 철포에 대해서 몰랐을 것이다. 말년(도우산 1556년 몰) 즈음의 이야기 일 것이다. [본문으로]
  6. 당시는 각 지방의 실력자(영주, 절, 신사 등)들이 재정 확충을 위해서 자신의 영지(領地)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곳이 많았다. [본문으로]
  7. 요리타케(頼武), 마사요리(政頼)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8. 보통 롯카쿠[六角]로 많이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9. 사이토우 씨(氏)는 대대로 미노[美濃]의 슈고다이[守護代]였다. [본문으로]
  10. 얼간이 집 ‘가서’ 인사를 올리거나 지시를 받으러 가야 한다는 의미. [본문으로]
  11. 멸문은 당했지만, 도우산의 막내 아들인 사이토우 토시하루[利治]는 노부나가의 부하가 되었고 후에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信忠] 부속 가신 되어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때, 노부타다와 함께 싸우다 니죠우 성[二条城]에서 죽게 된다. [본문으로]
  12. 이 시대에는 이리 불렸다 한다. 후에 이나바야마[稲葉山]를 거쳐 노부나가 시대에 기후[岐阜]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또한 이 성이 있는 산의 이름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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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8.03.20 2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우산의 아들 요시타츠나 손자 타츠오키의 이름에 '타츠'가 들어가서 왜 그런가 했더니 도우산의 본명에 '타츠'가 들어있었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1 05: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확실치는 않지만...그 윗대에 '타츠(龍,竜)"자가 없는 것을 보면 도우산 때부터 붙이기 시작했나 봅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3.21 1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다. ^^ 역시 도산은 아무리 생각해도 완전 히데요시처럼 밑바닥부터 발발 기어오른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밑바닥이락고 생각하는 기름장수설마저도 거상이라는 가설을 담고 있네요. 동전구멍으로 기름따르는건 대망에서도 본것 같은데 여기서 보니 또 새롭네요 ㅎ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21 18: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3년만 버텼어도 나병으로 알아서 죽을것을 뭣하러 도발해서(-_-;;)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1 2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iroyume님//저 [야망의 사나이 도삼] 보시지 않으셨다면 함 보세요. 볼 만합니다. 다만 끝부분은 서둘러 끝내는듯한 인상을 받지만요. (주인공이라서 그런지 찢어죽이거나 삶아 죽이는 것 같은 잔인한 행적은 나오지 않지만요)

    다메엣찌님//워낙 내정에 어두운 도우산이라 다른 호족들이 "못살겠다 바꾸자"라고 해서 도우산이 어디 간 사이를 노려 봉기했다는 말도 있지만요. ^^ (이노구치(井ノ口)등의 정비나 라쿠이치(楽市)등의 설치를 보면 내정에 어둡다기 보다는 그에 관련된 코쿠진(国人)이나 절, 신사 등의 이권 문제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만)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1582 6 2자인(自刃) 49.

1534 ~ 1582.

오와리(尾張) 키요스() 성주(城主).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에서 물리치고, 미노(美濃)의 사이토우()()를 멸망시켰다.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옹립하여 입경(入京). 아자이(), 아사쿠라(朝倉), 타케다(武田)()를 멸망시키지만 쿄우토(京都) 혼노우(本能)()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으로 인해 자해(自害)







최후의 상경(上京)


 1582 5 29.

 오다 노부나가는 아즈치(安土)()을 출발하여 오래간만에 상경하였다. 이보다 앞선 1 28일에 상경할 예정이었지만 중지된 적도 있기에 작년 3월 이래 실로 1 2개월 만의 상경이 되었다.

 2년 전. 이시야마(石山) 혼간지(本願寺)를 굴복시킴으로써 더 이상 키나이()에서 노부나가 정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없게 되었다. 안도감(安堵感)때문인지 왕년에 수많은 전쟁터에서 보여주었던 과감하고 전광석화와 같은 모습을 이 즈음의 노부나가에게서는 볼 수는 없다. 반대로 유흥(遊興)적인 면을 [신장공기(信長公記)]의 기사에 빈번히 볼 수 있다.


 1581 2월에 상경한 노부나가는 선교사에게서 데려온 흑인[각주:1]을 선물 받았고 그 직후에는 궁궐의 동쪽 마장(馬場)에서 텐노우(天皇)나 쿠게(公家)들이 구경하는 앞에서 오다 군단의 열병식(閱兵式)이라고 할 수 있는 우마조로에(馬揃)를 행하였다.


 같은 해 9.

 차남(次男) 노부카츠(信雄)를 사령관으로 하여 이가(伊賀) 정벌을 명하였고, 또한 1582 3월에는 첫째인 노부타다(信忠)를 총대장에 임명하여 카이(甲斐) 타케다(武田)() 정벌을 명하였지만, 노부나가 자신은 직접적으로 작전에 관여하는 일 없이 평정 후에 현지 검분(檢分) 만을 했을 뿐으로, 그 모습은 전적(戰跡地) 관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카이(甲斐) 원정에서 귀국했던 노부나가에게 조정(朝廷)에서 칙사가 파견되어,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각주:2])추임(推任)한다는 뜻이 전해졌지만 노부나가는 회답을 하지 않은 채 혼노우(本能)()의 변()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5 29.

 오후 12시 즈음부터 내린 비 속에서 아와타(粟田口[각주:3]) 쪽을 통해서 시죠우() 니시노토우인(西洞院)에 있는 혼노우(本能)()에 도착했다. 아와타구치에는 미리 노부나가 일행을 마중하려는 쿠게(公家)의 무리들이 다수 모여있었지만 마중할 필요는 없다는 고지를 모리 란호우시(森 乱法師=란마루(蘭丸)) 나리토시(成利)가 와서 전했기에 쿠게(公家)들도 집들로 돌아간 후 였고 또한 함께 한 수하들도 [코쇼우(小姓) 2~30] 정도였기 때문에 상경 모습은 조용했다. 상경한 시각은 오후 2시 즈음이라고도 오후 4시 즈음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건 이것이 마지막 상경이 될 것이라고 노부나가 자신은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상경의 주요한 목적은 츄우고쿠(), 시코쿠() 정벌이라는 양 작전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이즈미(和泉)의 사카이()에서 철갑선(鐵甲船)을 타고 아와지시마(淡路島)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서였다. 그 때문에 6 4일에는 쿄우토(京都)를 출발할 예정으로 있었기에 5일간 쿄우토에 있을 예정이었다. 혼노우(本能)()의 변은 그 재경(在京) 3일째에 일어난 것이다.


상경 축하의 나날


 그렇다면 그 3일간의 모습을 살펴보자.

 5 29일 상경했던 노부나가는 아와타구치에서 첫째 아들 노부타다(信忠)의 마중을 받아 함께 혼노우(本能)()로 왔을 것이다.


 이보다 먼저인 21.

 노부타다는 토오토우미(遠江)의 하마마츠(浜松)에서 아즈치(安土)로 올라 와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함께 쿄우토(京都)에 와 있었다. 하지만 27일이 되어서 노부나가가 갑자기 상경한다는 소식을 듣자, 구경하러 오오사카(大坂), 사카이()로 내려가는 이에야스 일행과 헤어져 쿄우토 니죠우()에 있는 노부타다 전용 숙소인 묘우가쿠()()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재경 이틀째인 6 1.

 혼노우(本能)()에는 텐노우(天皇)와 사네히토 신노우(誠仁 親王)가 파견한 곤다이나곤(大納言) 칸로지 츠네모토(甘露寺 ), 곤츄우나곤(中納言) 카쥬우지 하레토요(修寺 晴豊)가 상경을 축하하는 칙사로서 방문했다. 또한 총 40명에 이르는 쿠게(公家)들을 시작으로 승려나 상인 등 다수의 사람들이 노부나가 상경을 축하하기 위해서 방문하였다.

 쿠게들과의 대면은 수 시간에 이르렀고 노부나가는 환담 중에 칸토()를 평정했을 때의 이야기와 삼일 후인 4일에 서쪽으로 출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 공략에는 그다지 힘들이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또한 다회()가 행해져 노부나가가 자랑하는 수 많은 명물(名物) 다기(茶器)피로(披露)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밤이 되자 노부타다가 방문하여, 쇼시다이(所司代[각주:4])인 무라이 사다카츠(村井 貞勝)나 코쇼우(小姓)들과 환담의 시간을 보냈다. 얼마 안 있어 밤이 깊어져 노부타다가 묘우가쿠사()로 돌아가자 노부나가도 마지막 침상에 들었다.


 노부나가가 취침한 바로 그 즈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 3000의 군세를 이끌고 탄바(丹波) 카메야마(亀山)성(城)을 출발하여 한밤중에 쿄우토(京都)를 향해서 군세를 진군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6 2일 밤이 새기 전에 카츠라가(桂川) 천을 건너 쿄우토(京都)에 들어오기 직전, 미츠히데는 그제서야 혼노우(本能)()를 습격한다는 것을 전군에 전하였고 여명(黎明)에 이르러 혼노우사()를 포위하였다.


 6 2일 여명.

 아케치 미츠히데의 군세에게 습격 받았을 때, 노부나가는 아랫 것들의 싸움으로 인한 소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함성과 철포(鉄砲)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모반(謀反)임을 깨달아 스스로 활과 창을 손에 쥐고 싸웠지만 물량에는 당해내지 못하여 팔꿈치를 창에 찔리자 물러나 건물에 불을 지르고 깊숙이 들어가 침실 입구를 닫고 결국 배를 갈라 죽었다.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할복했다고 하는 사람도, 건물에 불을 지르고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중략)…… 머리카락 한 올 남기는 일 없이 재로 변했다]

고 한다. 아케치 미츠히데의 필사적인 탐색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의 시체는 결국 발견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1. 처음에 피부가 검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노부나가는 계속 씻겨도 광택만 더할 뿐 검은 색이 없어지지 않자 그제서야 믿고서는 맘에 들어하며 '야스케(彌介)'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혼노지의 변 때 싸우다 잡혔지만 미츠히데는 '사람도 아닌 미물이 뭐 알겠냐'는 식의 말을 하며 풀어 주었고 이후 소식은 불명. [본문으로]
  2. 바쿠후(幕府)를 열 수 있었다. [본문으로]
  3. 쿄우토(京都)에 들어오는 일곱 개의 입구 중 하나. 요즘으로 치면 톨게이트와 같다고 할까.. [본문으로]
  4. 이 때는 쿄우토(京都)의 행정, 치안, 여러 집단(조정, 상인, 절 등)과의 교섭 등을 맡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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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11 19: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육천마왕이 마계로 돌아간거죠(;)

    아무튼 말년의 깽판(...하타노가 징벌 때 있었던 미츠히데 숙모를 죽게 한 일이라던가..)덕에, 박통처럼 심복의 손에 사라지는 운명은 예견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1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느 만화... [KING OF ZIPANGU 信長]라는 만화의 끝 부분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고 하더군요.

    "저 남자는 "전국(戦国)을 끝내기 위해서 "사신(死神)"으로 이 세상에 강림했다. 쉴 새없이 계속 싸우다 떠나 갔다. 사람의 몸으로 "신"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이였던 것일까"

    ... 말씀대로 마계로 돌아간 것 같다는... ^^

    에이~ 설마 그거 믿으시고 계신 것은 아니시죠? 하타노는 성내의 반란으로 인해 성내 반란 세력이 하타노 형제를 받쳤다고 하더군요. 숙모인지 친모 이야기는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말이라는 것이 유력하다고 하네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2.12 09: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필사적인 탐색에도 불구하고~ 라니 미츠히데의 고지식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거 같군요.
    히데요시였다면 소사체 적당히 골라서 선전했을텐데, 이후 토벌당하기까지 미츠히데의 행보를 그대로 예고하는거 같습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12 0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타노쪽 얘기가 그런 얘기이군요(오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2 1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리바르님//와우~ 색다른 충격입니다. 과연.... 그럴 수 있겠군요. 이야~ 안목을 넓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다메엣찌님//어이쿠... 이런... 설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반드시 정답 혹은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을테니까요. 단정을 지다시피 한 말. 죄송합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8.03.09 03: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볼리바르님 말씀이 일리가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