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고쿠라는 시대의 무서움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1574년의 설날, 기후(岐阜)성(城)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정월 잔치를 연 자리였다. 중신들과 종속 다이묘우(大名)들이 물러간 뒤 친위대(馬廻) 장수들만의 술자리가 되었을 때, 노부나가는 검은 상자 세 개를 가지고 오게 하였다. 누군가가이번에는 어떤 안주인 것입니까?”하고 묻자, 노부나가는이 세상에 진귀한 안주다라고 말했다.

 노부나가가 꺼낸 내용물을 보고 자리는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아름다운 금은으로 채색되어 있지만, 인간의 두개골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거기에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 아사쿠라 사쿄우다이부 요시카게[朝倉 左京大夫 義景]

. 아자이 시모츠케[井 下野(=히사마사(久政)]

. 아자이 비젠[井 備前(=나가마사(長政))

 바로 전년도에 노부나가에게 쓰러진 자들의 두개골이었던 것이다.

 

 부자가 함께 사람들 앞에 두개골이 내보이게 된 아자이 가문은 오우미(近江)의 명문가였다.

 비와코(琵琶湖) 호수의 북부에 그들의 거성 오다니(小谷)성(城)이 있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으로는 산기슭을 둘러싼 거대한 연못이 천연의 해자(垓子)를 이루고 있었다. 거기에 남쪽에도 커다란 늪이 있었다. 지키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고 공격하기에 역시 이보다 더 어려울 수 없는 성이었다.

 

 오다니 성()이라고 하면 아자이 나가마사의 부인 [오이치노카타()]가 유명하다. 이곳에 시집온 다음부터 [오다니노카타(小谷)]가 된다. 노부나가의 여동생이라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시집을 온 것은 나가마사 20, 오이치가 18살 때였다. 평판이 자자했던 미모의 여성이었다. 나가마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들은 각각 화려한 생애를 보내게 된다. 장녀는 요도기미(淀君[각주:1])가 되었으며, 차녀는 쿄우고쿠 타카츠구(京極 高次)의 부인, 삼녀는 토쿠가와 2대 쇼우군() 히데타다(秀忠)의 부인이 된다.

 

 아자이 나가마사의 불행은 범용한 부친을 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조부인 스케마사(亮政)는 기량이 뛰어난 무장이었지만 그 뒤를 이은 히사마사는 놀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가신들의 신망도 적었다. 스케마사가 죽자 이 히사마사는 아자이 가문의 원로 격인 오오하시 히데모토(大橋 秀元)를 강제로 할복시켜 버렸다. 나가마사와도 의견이 맞지 않았다. 어렸을 적의 나가마사는 부친의 분노를 사서 일년 정도 오다니의 키요미즈다니(水谷)에 있는 묘우오우(明王)()에 감금당한 적이 있다.

 

 결혼 문제로도 충돌했다.

 나가마사 15살 때였다. 상대는 오우미(近江) 칸논지(音寺)성(城)의 성주 사사키 요시카타( 義賢[각주:2])의 노신 히라이 이가노카미(平井 伊賀守)의 딸이었다. 히라이 씨()는 사사키의 일족이라고는 하여도 그 가신에 불과하였다. 나가마사로서는 사사키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오우미 명문의 긍지가 있었다[각주:3]. 아무리 부친의 권유라고는 하여도 승복하기 힘들었다. 그는 이 결혼 이야기를 확실히 거부했던 것이다[각주:4]. 부친 히사마사는 화를 내었지만 가중의 신망은 이미 젊은 주군 나가마사에게 모이고 있었다. 히사마사는 이 다음 해에 가신들의 청원으로 은거 당하게 된다.

 

 여기서 언급해 두어야 할 것이 아자이 가문 비극의 원인은 조부 스케마사 대부터 이어져 왔던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가문과의 친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와 당시의 아사쿠라 가문의 당주 요시카게는 사이가 나빠 천하포무(天下布武)를 목표로 하는 노부나가가 두 번이나 상경을 재촉했는데도 불구하고 요시카게는 이를 계속 거절한 것이다. 이는 노부나가에 대한 도전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때 요시카게는 동맹자인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밀사를 보내 자신들과 함께 움직일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나가마사는 괴로운 입장에 놓였다.

 노부나가는 마누라의 오빠였다. 그렇다고 해서 조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아사쿠라와의 친분을 버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에게 자신에게 아무 말도 없이 무단으로 아사쿠라를 공격하지 않도록 약속시켰다.

 

 하지만 1570 4.

 노부나가는 대군을 일으켜 에치젠 침공을 시작하였다.

 이때 나가마사의 결단이 아자이 가문의 명운을 가르게 되었다. 아자이 가문은 노부나가의 침략을 보고 마누라의 오빠라는 노부나가와의 관계보다, 50년에 걸친 아사쿠라 가문과의 교분을 우선시한 것이다. 보수적인 부친 히사마사의 의견이 강했던 것이다.

 

 오다 측에서는 아자이가 공격해 올 턱이 없다고 믿고 에치젠에 진공하였던 것이지만 거기에 갑자기 등뒤에 있던 아자이 군이 공격해 온 것이다. 오다 군은 완전히 퇴로가 가로막힌 꼴이 되었다. 괴멸의 위기였다. 오다 군은 간신히 비와고(琵琶湖) 호수 서쪽 산맥으로 우회하여 퇴각했다.

 이 결단으로 인해 아자이 가문은 노부나가를 완전히 적으로 돌려버리게 된다. 파죽지세와도 같은 신흥세력을 버리고 늙은 대국 아사쿠라 가문과 운명을 함께하고자 결의한 것이다.

 

 1573 8.

 오다 군은 재차 에치젠(越前)에 침공하여 별 힘 안들이고 아사쿠라 군을 괴멸시키고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로쿠보우(六坊) 켄쇼우(賢松)()에 몰아넣어 자살하게 만들었다.

 오다니 성()의 아자이 가문은 이젠 완전히 고립되었다. 압도적 우세에 선 오다 군은 이번에야말로 아자이의 숨통을 끊어놓고자 성 밑 마을(城下町)을 오다 군의 군사들로 메운 것이었다.

 곧바로 토라고젠야마(虎御前山) 산이 오다 측의 공격을 받았다. 이곳은 오다니 성()을 지키는 요해(要害)의 땅으로 아자이의 병사 482명은 끝까지 오다 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남은 것은 아자이의 본거지 오다니 성()만이 남게 되었다.

 오다의 대군은 슬금슬금 성을 포위하여 파리가 드나들 틈도 만들지 않았다. 이제 오다니 낙성은 시간의 문제였다. 여기까지 이르자 노부나가는 후와 카와치노카미(不破 河)를 사자로 보내어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얌전히 성을 건네고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야마토(大和)() 전체를 준다고 까지 말하였다. 그러나 나가마사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오다니 성() 최후가 다가오자 나가마사는 장졸 700여명을 모이게 한 후 자신의 위패를 내보이며 각오를 단단히 했다. 이 다음날인 8 27, 오다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나가마사는 낙성이 되기 전에 오이치노카타와 딸 셋을 노부나가에게 보내었고, 부친 히사마사가 28일에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자, 성에 불을 지르고 배를 갈라 죽었다. 29세의 젊은 나이였다.

 

 아자이 부자의 목은 쿄우토(京都)로 보내져,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목과 함께 옥문에 내걸렸다.

 

[아자이 나가마사( 長政)]

1545년 히사마사(久政)의 아들로 태어난다. 처음엔신쿠로(新九朗)’라고 하였다.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성주.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여동생 오이치노카타(お市の方)에게 장가간 것으로 유명. 롯카쿠 요시카타(六角 義賢)를 물리치고, 쿠츠키(朽木)()를 거느리며 오우미(近江)의 대부분을 영유(領有)한다. 처음엔 오다 씨()와 사이가 좋았지만,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와의 맹약으로 인하여, 노부나가의 에치젠(越前) 침공 때는 아사쿠라 측에 서서 노부나가와 싸웠다. 1570년 아네가와의 전투(姉川の戦い)에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 대패. 1573년 거성 오다니를 노부나가에 공격받아 패사(敗死).

  1.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를 낳는 히데요시의 측실. 키미(君)는 에도 시대 유곽에 있던 여성의 끝에 붙이던 것으로, 그녀를 낮추려는 의도가 이어진 것으로, 당시에 여성을 부를 때는 그냥 '도노(殿)(ex;요도도노)’나 ‘노(の)’ 다음에 ‘카타(方)’(ex;요도노카타=淀の方)를 붙였다. [본문으로]
  2. 롯카쿠 요사카타(六角 義賢)를 말한다 [본문으로]
  3. 아자이 씨(氏)는 지역 호족 출신으로, 사사키의 분가인 쿄우고쿠(京極)씨(氏)의 부하에 지나지 않아 그다지 격이 높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사키 즉 롯카쿠 씨(氏)는 무가로써는 최상격의 가문이었다. [본문으로]
  4. 실은 결혼식만 치른 후 이혼 [본문으로]

 쿄우토(京都) 토우지(等持)원(院)에 현존하는 요시아키의 목상(木像)을 보면, 얼굴 아래쪽이 통통한 얼굴로 코가 크며 눈썹이 수려하고 콧수염이 아래로 쳐진 전형적인 귀족의 용모이다.


 진위를 보증할 수는 없지만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일으킨 [혼노우(本能)()의 변]의 흑막은 요시아키라는 것이다. 노부나가(信長)에게 추방되어 빙고(備後) 토모노우라()로 망명해 있던 요시아키가 예전 자신의 부하였던 미츠히데에게 비밀리에 지령을 내려 노부나가를 죽이게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자신을 쇼우군으로 만들고 추방했던 노부나가에 대한 끝없는 증오가 느껴진다.


 요시아키의 노부나가에 대한 증오는 무시무시할 정도였지만 노부나가 덕분에 쇼우군이 되었을 때는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하였다. 그랬을 뿐만 아니라 1569 4월에 요시아키의 새로운 거처 니죠우() 저택이 완성되어 그곳에 그 저택을 만들어 준 노부나가가 기후(岐阜)로 돌아간다는 작별 인사를 하러 온 돌아갈 때가 되자 문 밖까지 직접 배웅을 하고 노부나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서 있었다고 한다.


 요시아키는 12대 쇼우군 요시하루(義晴)의 둘째로 태어났지만, 처음에는 불문(佛門)에 들어가,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 이치죠우()원(院)의 몬제키(門跡[각주:1])가 되어 카쿠케이()’라는 호로 불리고 있었다.

 그 조용한 불문의 생활이 - 요시테루(義輝=13대 쇼우군)가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마츠나가(松永) 무리에게 살해당하자 급격히 변하기 시작한다. 카쿠케이는 미요시-마츠나가 무리를 피하여 오우미(近江)의 와다 코레마사(和田 惟政), 칸논지(音寺)성(城)롯카쿠 요시카타(六角 義賢), 와카사()의 타케다 요시무네(武田 義統[각주:2]) 등을 의지하여 방랑하다가 에치젠(越前)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에게 갔을 때 겨우 안정을 되찾아, 여기서 환속(還俗)하여 요시아키()’라는 이름이 되었고, 곧이어 요시아키()’로 개명하였다.


 요시아키의 운명은 노부나가로 인해 크게 비약한다. 1568 7, 둘은 기후의 릿쇼우(立政)사(寺)에서 회견했다.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쇼우군으로 옹립함으로써 자신이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고자 하였다.

 요시아키를 옹립한 노부나가는 6만의 대군을 이끌고 상락(上洛)하여 미요시 세력을 쫓아버리고,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를 항복시켰다.


 드디어 요시아키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에 임명된 것이다. 여러 지역을 유랑한 끝에 얻은 영광이었다. 요시아키는 이 때 노부나가에게 아시카가 가문의 문장인 [오동나무(桐)[각주:3]] [니히키료우(二引)[각주:4]]의 사용을 허락하였고, [아빠 오다 단죠우노죠우님(御父織田忠殿)[각주:5]]라는 명칭으로 쓴 직접 쓴 표창장()까지 보내었다. 얼마나 그의 기쁨이 컸던가를 알 수 있다.

 그 기쁨은 다음 해까지 이어진다. 다음 해(1569) 정월에 미요시 일당이 쇼우군의 거처인 혼코쿠()사(寺)를 습격하자 노부나가는 기후에서부터 눈 속을 삼일 만에 주파하여 미요시 군세를 쫓아낸 것이었다.

 거기에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위해서 니죠우()에 새로이 쇼우군 저택을 만들어 주었다. 손수 공사의 감독관이 되어 2만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불과 1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쇼우군과 노부나가의 좋은 관계는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요시아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쇼우군이란 노부나가의 괴뢰(傀儡) 실권은 어디까지나 노부나가가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요시아키는 실권을 가지고 싶었다. 은밀히 에치젠의 아사쿠라(朝倉)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上杉), 카이(甲斐)의 타케다(武田)나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노부나가와 적대하는 세력과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부나가는 이 불온한 움직임에 민감히 반응했다. 1570년 정월, 상경한 노부나가는 쇼우군 요시아키에게 강한 태도로 나왔다. [전중 법도(殿中御掟)]를 정하여 쇼우군이 다른 여러 지역에 편지를 보낼 때에는 반드시 노부나가가 쓴 편지도 첨부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걸로 쇼우군의 정치 행동은 크게 제약 받게 되었다. 쇼우군이라는 것은 이름뿐인 존재였다.


 바야흐로 요시아키의 물밑 공작은 점점 심해졌다. 노부나가의 제약이 반대로 반발로 작용한 것이다.

 여러 지역의 다이묘우들에게 보내는 노부나가 타도의 밀서는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과 싸우고, 이시야마 혼간지와 교전하며,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 적대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도 요시아키가 배후에서 선동한 것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요시아키의 적대적 행동에 참을 수가 없게 된 노부나가는 신겐이 서상(西上)하기 직전인 1571 9, 요시아키에게 17개조에 이르는 강경한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 여러 지역에 밀서를 내려서는, 말() 같은 것을 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
  • 우리들(노부나가)과 사이가 안 좋아졌다며 재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에 쿄우() 전체가 시끄럽다. 이렇게 니죠우()의 저택이 있는데 어디로 가시려는 것인가?
  • 노부나가와 친한 사람은 여관(女官)들마저도 잔인한 처벌을 하고 있다.
  • 소송을 노부나가가 청해도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 다른 지역에서의 헌상품을 감추거나 쌀을 팔아 금으로 바꾸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리 하시는 것인가?

 요시아키의 급소를 하나하나 찌르는 힐문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요시아키의 책모는 그치지 않았다. 그 시기 이러한 쇼우군의 행동에 정나미가 떨어진 중신(重臣)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는 결국 요시아키를 버리고 노부나가의 신하로 들어간다.


 1573 2.

 요시아키는 결국 깃발을 선명히 하여 노부나가 타도의 병사를 일으켰다. 타케다 신겐이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에서 토쿠가와()-오다(織田) 연합군을 대패시킨 것에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타케다와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군세로 노부나가를 포위 섬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기를 잃고 있었다. 요시카가가 이미 포위 작전을 내팽개치고 에치젠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요시아키는 이때 (西) 오우미(近江)이시야마(石山)에서 잇코우 종도(一向宗徒)들을 규합하여 거병하였다. 예전 형 요시테루(義輝)를 죽인 미요시, 마츠나가 등과도 손을 잡았다.


 하지만 결국 노부나가의 적은 아니었다.

 7. 야마시로(山城) 마키노시마(槇島)성(城)에서 농성하며 최후의 저항을 시도해보았지만 버티질 못하고 당시 2살의 아들 요시히로(義尋)를 인질로 바치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15대가 이어졌던 아시카가 바쿠후(幕府)는 사실상 끝을 고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

1537년 요시하루(義晴)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엔 외숙부 전() 칸파쿠(関白) 코노에 타네이에(近衛 稙家)의 유자(猶子)가 되어 나라(奈良) 이치죠우(一条)() 몬제키(門跡) 카쿠케이(覚慶)라는 이름으로 불문에 있었지만, 환속하여 요시아키(義秋)라 하고, 후에 요시아키(義昭)로 고친다. 처음엔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의지하였지만, 결국 오다 노부나가에 옹립되어 제15대 아시카가 쇼우군이 된다. 노부나가와 사이가 틀어지자 쫓겨나 빙고(備後)로 도망쳤다. 머리를 깎고 쇼우잔 도우큐우(昌山 道休)라는 호를 칭하였고,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보호를 받으며 1만석을 하사 받는다. 1597년 죽다. 61.

  1. 몬제키는 황족이나 고급 쿠교우(公卿)가 잇는 절을 말하며, 이치죠우 원(院)은 코노에 가문의 영향력이 강한 곳으로 외숙부인 코노에 타네이에(近衛 稙家)의 유자(猶子)로 들어갔다. [본문으로]
  2. ‘요시즈미’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3. 이것은 원래 황실의 것으로 쇼우군 가문이 하사 받은 것을 다시 노부나가에게 허용한 것. [본문으로]
  4. 후타츠히키(二つ引)’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5. 사족으로 노부나가는 1534년생, 요시아키 1537년생. 세 살차이.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