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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7.08.14 야마나카 유키모리 10
  4. 2007.06.28 제 3화 일미 정상회담(전편) 4
  5. 2007.06.23 혼간지 켄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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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과는 틀리게, 이 때만 해도 한신 타이거즈는 꼴찌아니면 꼴찌에서 두번째 였습니다.

三百年の実績と信頼 - 300년의 실적과 신뢰 ... 264년간 에도 바쿠후(幕府)가 일본을 통치했었으니까..

石の上にも300年 - 원래는 3년... 뜻은 돌 위에 3년간 있으면 처음엔 불편하지만,지내고보면익숙해진다는 뜻.

즉,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시간이 흐르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뜻.


센츄리 - 토요타에서 만든 일본에서황족, 정치가, 갑부 등이 타는 차.거의 수제로 제작된다고 함. 가격은 천만엔 이상이라고 들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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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카 유키모리[山中 幸盛]

1578 7 17모살(謀殺) 34


1545 ~ 1578.

보통 시카노스케[鹿之助]로 알려져 있다. 아마고 카츠히사[尼子 勝久[각주:1]]를 옹립하여, 모우리 씨[毛利氏]에게 멸망 당한 주가(主家)의 부흥을 위해서 분투(奮鬪).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츄우고쿠[中国] 평정군(平定軍)을 따르며 하리마[播磨] 코우즈키 성[上月城]을 수비하지만,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의 공격을 받아 항복. 빗츄우[備中] 아이[阿井]의 나루터에서 살해당했다.






아마고 잔당(殘黨)의 성 


 1577.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모우리 씨()가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고, 10월이 되자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하리마[播磨]로 출진하였다.

 하리마[播磨]의 코우즈키성()은 하리마[播磨],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의 국경 근처의 전략적 요충지로 히데요시는 이 성을 점령하여 이곳에 아마고 씨()의 잔당인 야마나카 유키모리를 입성시켰다. 그 잔당의 맹주로 옹립되어 있던 사람은 쿄우토[京都]의 토우후쿠 사[東福寺]출가(出家)해 있던 아마고 카츠히사였다.


 코우즈키 성() 천연의 요해(要害)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듯한 성이 아니다. 지금 성터를 돌아 보아도 아무런 특징도 없이 산등성이가 이어진 낮은 산이다. 지키기에 어려운 성이다.

 모우리의 숙적이었던 아마고 군()을 모우리 진영에 대비하여 최전선에 배치하는 것은 당시로선 상식적인 작전이었지만 얄궂기도 했다. 아마고 쪽의 장수 중의 하나인 타치하라 히사츠나[立原 久綱]는 이 성에 입성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하며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유키모리는 여기서 싸우는 것에 의욕을 보였다.


 다음 해 1578 4.

 모우리는 3만의 군세(軍勢)를 이끌고 코우즈키 성()을 포위했다.

 유키모리 등이 의지하고 있던 히데요시 군() 이 때 오다 측을 배신한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를 공격하러 가 있있다.

 유키모리에게서 급보를 받자마자 히데요시는 미키 성() 공격을 중지하고,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와 함께 코우즈키 성() 동쪽 2킬로 지점인 타카쿠라 산[高倉山]()을 세웠다. 그러나 모우리 군()의 포위망은 두터워, 이것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모우리쪽은 보급로를 끊어 성을 아사(餓死)시키는 작전을 세워서는 확실히 포위망을 좁혔기에 코우즈키성()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히데요시는 아마고의 구신(舊臣)인 카메이 코레노리[亀井 惟矩]를 성 안으로 잠입시켜,

 포위망의 약한 부분을 돌파하여 빠져 나올 수는 없는가?”

 하고 전했다. 그러나 이미 성 안의 쌀은 다 떨어지고 굶주림에 괴로워하고 있던 성병(城兵)의 전의(戰意)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히데요시는 서둘러 노부나가를 만나 전황(戰況)을 보고하며 코우즈키 성이 얼마나 위험에 처했는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코우즈키 성()을 포기하고, 미키 성() 공략에 집중하라

 는 명령을 내렸다.

 코우즈키 성()은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하리마[播磨]로 돌아와서는 6 26, 타카쿠라 산()의 진을 치우고 철수했다.


아이(阿井) 나룻터의 참극(慘劇)


 유키모리 등의 아마고 잔당은 자신들이 버려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태까지 모우리와 아마고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던 코우자이 모토미치[香西 元通]도 함께 농성(籠城)하고 있었다. 유키모리는 모우리의 진영(陣營)에 사자를 보내어,

 이번 사건의 원흉은 코우자이 모토미치이니까, 모토미치의 배를 가르게 하는 조건으로 항복하겠다

 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모우리 측은 이 요청을 거부하고 우선 맹주인 아마고 카츠히사의 할복(割腹)을 요구했다.


 유키모리는 8살 연하의 카츠히사에게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면서 자살을 권했다.

 “무운이 다하여 이제는 여기까지 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저도 여기서 함께 배를 갈라야만 합니다만 다년(多年)간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 조금 더 이 생명을 빌리고 싶습니다.”

 카츠히사는 이 대답을 듣고 답했다.

 “법의(法衣)를 두르고 이름도 없이 일생을 끝냈을 터인 몸이면서, 자네들의 충성으로 한 성()의 주인으로써 아마고의 깃발을 세워 싸울 수 있어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네. 후회나 원망은 없다. 아니, 후회라고 한다면 아마고의 부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7 3.

 카츠히사는 시 한 수 남기고 죽음의 자리에 앉았다. 26세였다.

 카츠히사의 형 우지히사[氏久], 코우자이 모토미치도 성 안에서 배를 갈랐다.


 1578 7 5.

 코우즈키 성()은 항복하였고, 유키모리는 포로가 되어 빗츄우[備中] 마츠야마[松山]에 있는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의 본진으로 호송되게 되었다. 그러나 킷카와 모토하루는 도중에 목을 베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중신(重臣) 아마노 모토아키[天野 元明]의 가신(家臣)인 쿠리야 히코에몬[栗屋 彦右衛門], 야마카타 사부로베에[山県 三郎兵衛]의 감시를 받으며, 빗츄우[備中] 타카하시[高梁]에 흐르는 타카하시가와 강에 있는 아이(阿井)의 나룻터까지 왔다. 유키모리는 배를 기다리며 나룻터 한 구석에 있는 돌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그 때 등 뒤에서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유키모리가 알아채는 것과 동시에 암살자는 베어왔다.

 순간 유키모리는 눈 앞의 강()으로 뛰어들었지만, 이미 암살자의 칼은 유키모리의 어깨에서 등까지 굉장히 깊은 상처를 만들고 있었다.

 

 암살자로 선택된 사람은 카와무라 신자에몬[河村 新左衛門]으로 카와무라도 따라 뛰어들어 물 속에서 유키모리와 뒤엉켰다. 후쿠마 히코에몬[福間 彦右衛門], 미카미 아와지노카미[三上 淡路守]도 카와무라를 돕기 위해 달려 들어 유키모리를 뒤에서 잡고 눌러서 죽였다.

 7 17.

 초추(初秋)는 이름뿐인 무더운 날이었다고 한다.

 34세의 생애(生涯)였다.

  1. 모살 된 신구우 당[新宮黨]의 두령(頭領)인 아마고 쿠니히사[尼子 国久]의 손자이며, 그의 아들 사네히사[誠久]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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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간지 켄뇨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7. 6. 23. 23:16 Posted by 발해지랑

혼간지 겐뇨(本願寺 顕如)

1592 11 24일 병사 49

1543~1592.

쟁토진종(爭土[각주:1]) 혼간 사(本願)의 승() - 이하 혼간지로 통일 -. 11세 종주(宗主)가 되어 혼간지를 세습하였다. 이시야마(石山) 혼간지에서 물러나길 원하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충돌. 후에 키이(紀伊)() 사기노모리(鷺森)로 물러났다. 12세 쿄우뇨(教如)와 의절한 것이 후에 혼간사()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노부나가와의 10년전쟁


 [켄뇨(顕如)]는 법명(法名)으로 이미나([각주:2])는 코우사(光佐) 일반적으로는 [혼간지 켄뇨(本願寺 顕如)]라 불리고 있다. 혼간지 10세인 쇼우뇨(証如)의 첫째 아들로 13살에 제 11세가 되어 종주가 되었다.


 1559
년. 오오기마치(正親町) 텐노우(天皇)의 즉위 비용을 헌상하여 승정(僧正[각주:3])이 되어 몬제키(門跡[각주:4] )에 준하게 되었다. 뇨슌니(如春尼) - 그녀의 언니는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의 부인 와 결혼하여 쿄우뇨(教如)나 쥰뇨(准如) 등의 아이들을 얻었다.


 1570년. 오오사카(大坂) 이시야마에 있는 혼간지에서 퇴거(退去)를 요구하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든 이후 10년에 걸친 싸움에 도전하여 자주 노부나가를 고난에 빠뜨렸다. 켄뇨는 노부나가와 대립하는 동안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 아자이 나가마사(長政),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모우리 씨(毛利)와 동맹을 맺고 또한 각 지역의 문도(門徒)들을 동원하여 노부나가와 대결하였다. 그러나 타케다 신겐이나 아자이 나가마사 등의 죽음으로 인하여 동맹은 와해되었으며 각지의 문도 집단도 괴멸. 거기에 이시야마 혼간사()가 포위당하기에 이르르자 1580 3월에 오오기마치(正親町) 텐노우(天皇)의 칙명에 따라 노부나가와 화해하고 다음 달인 4월 키이(紀伊)의 사기노모리(鷺森)로 거처를 옮긴다.


 이때 철저항전을 주장하는 첫째 아들인 쿄우뇨와 대립하여 부자(父子) 관계를 의절했다. 이 의절이 중신이나 문도 사이의 대립을 낳아 후에 혼간지가 동서로 분열되는 원인이 되었다.


혼간지 재흥(再興)과 발병


 노부나가가 죽은 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켄뇨에게 접근하여 문도 집단의 회유(懷柔)를 꾀했다. 히데요시는 우선 켄뇨를 이즈미(和泉) 카이즈카(貝塚)로 옮긴 후 키이의 사이카(雑賀)()을 공략하여 혼간사지 세력이 강한 땅을 빼앗았다.


 이시야마 혼간사()가 있던 곳에 오오사카 성()을 쌓은 히데요시는 텐마(天満)에 절터를 주어 혼간지를 재흥시켰다. 켄뇨와 그의 부인인 뇨슌니는 히데요시나 키타만도코로(北政所[각주:5])에게 때때로 다회(茶會)에 초대받는 등 친교를 맺었다.
 텐마의 혼간사
() 예전과 같이 슈고(守護)의 힘이 미치지 않는 등
[각주:6]의 특권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히데요시 정권의 지배 아래 놓여졌다. 켄뇨도 히데요시 권력의 비호(庇護) 아래 들어가는 감으로써 혼간사()의 존립을 꾀하려 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종교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서 1591년에 혼간지를 쿄우토(京都)의 호리카와(堀川) 로쿠죠우(六条)로 옮겨가도록 명령했다. 1년 후 현재의 니시혼간지(西本願寺)의 땅에 건립되었다.


 그 동안 켄뇨는 자주 병에 걸려 아리마(有馬)의 온천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 병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절에 대한 사무를 보는데 지장은 없었던 듯하다.


혼간사(), 동서(東西)로 나뉘다.


 1592 11 20일.
 켄뇨는 새벽 수행을 끝내고
불전 청소를 끝낸 후에 갑자기 쓰러졌다. 본사(本寺) 이전에 따른 마음의 피로가 쌓였던 것일까? 병명은 [중풍]이었다.


 켄뇨와 친했던 쿠교우(公卿)인 야마시나 토키츠구(山科 言継)의 일기 [토키츠구 경기(言繼卿記)]에는,

11 20일. 몬제키[각주:7]. ()시에 큰 중풍에 걸리다. 즉시 여러 명의(名醫)를 불러 치료하게 했지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발병한지 4일 후인 24일. 명의들의 치료도 보람 없이 [()시에 죽다](言繼卿記)고 쓰여있는 것을 보면 점심 지나서 죽은 듯하다. 향년 49.


 12세 종주의 자리에는 장자(長子)인 쿄우뇨가 계승하지만 곧이어 뇨슌니가 '켄뇨는 셋째인 쥰뇨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양도장(讓渡狀)을 히데요시에게 제출함에 따라 사태는 급변하였다. 그 결과 히데요시의 판정에 따라 쿄우뇨는 은거의 몸이 되었고 17살인 쥰뇨가 혼간지의 법주 자리를 잇게 되었다.


 이 판정에 불만을 품은 쿄우뇨와 문도들은 세키가하라(ヶ原) 전투 후에 권력을 장악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접근하여 그 비호 아래서 카라스마루(烏丸) 로쿠죠우(六条)에 절(현재의 히가시혼간(東本願寺))를 건립하게 된다.


 켄뇨는 혼간사()의 분열을 우려하여 쿄우뇨와 화해했지만 이시야마 혼간사()의 퇴거를 둘러싼 싸움은 켄뇨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은 후에 교단을 둘로 나뉘는 대립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기노모리(鷺森)에 있는 니시혼간사(西本願)사(寺)별원(別院)[和歌山市]>
  1. 한 번이라도 진실된 마음으로 염불을 외우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여,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던 하층민이나 농민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함. [본문으로]
  2. 실제 이름. 그러나 실제 이름은 영적인 것이라 하여 생전에는 부르지 않았다. [본문으로]
  3. 일본 승위승관(僧位僧官)의 관리 중 하나. [본문으로]
  4. 황족 혹은 귀족이 출가한 절 또는 주지를 말한다. [본문으로]
  5. 히데요시의 정부인. [본문으로]
  6. 즉 세금이나 부역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었다. 수호불입(守護不入)이라 한다. [본문으로]
  7. 켄뇨를 이름. 이 당시 몬제키에 준하는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에 이 때부터 몬제키는 혼간사의 주지를 이르는 속칭이기도 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