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시대에 스즈키 시게히데(鈴木 重秀)라는 사람이 호우죠우 가문의 역대 당주들을 평가하면서 우지야스에 대해서, '문무겸비의 무장으로 생애에 걸쳐 몇 번이나 전투에 나섰지만 패한 적이 없다. 거기에 인덕도 있었다. 이 시대에 관팔주(八州 = 칸토우())의 병란을 평정하여 크게 가명을 높였다. 고금의 명장이다'고 절찬하였다.

 우지야스는 칸토우의 태반을 자신의 산하에 두어, 조부인 소우운(早雲)의 꿈을 실현시킨 것이었다.


 우지야스가 다스리던 오다와라(小田原)의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기록이 남아 있다.

 1551 4. 하코네(箱根) 유모토(湯本)소우운(早雲)사(寺)에 참배하고 오다와라에 들린 쿄우토(京都) 난젠()사(寺)261대 토우레이치오우(東嶺智旺)가 직접 보고 쓴 것이다.

 [유모토의 소우운 사()에서 1(4km). 수도인 오다와라에 도착했다. 거리는 작은 길만 수만 개. 땅에는 먼지 하나도 없다. 동남쪽은 바다이다. 바닷물이 오다와라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군주인 우지야스의 성()은 거목 울창한 곳에 있으며 크고 아름답다. 삼면에 큰 연못이 있다. 연못의 물은 가득 차 있어 깊고 낮음을 잴 수 없다. 백조나 물새들이 날개를 쉬고 있다. 군주인 우지야스는 겉으로는 문(), 속으로는 무()의 인물로 형벌(刑罰=정치)이 깨끗하여 원근(遠近)이 모두 복종하고 있다. 그야말로 이 시대 천하 무쌍의 패왕이다.]

 이렇게 전성기의 호우죠우 씨()의 오다와라를 굉장히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불패의 용장이라 일컬어지며 16살의 첫 출진(初陣)을 경험한 이후 병으로 죽을 때까지 36번의 전투에 출격하여 한번도 적에게 아게마키([각주:1])를 보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전군의 선두에 서서 적과 부딪쳐 몸에는 도창(刀槍)의 상처가 7군데 있었고, 얼굴에도 2군데의 상처가 있었다. 그래서 몸 정면에 있는 상처를 [우지야스상처(氏康傷)]라고 부르며 존중 받았다고 한다.


 소년시대의 그의 사람됨을 알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12살 때였다. 철포는 아직 드물었던 시기로 어느 날 우지야스는 철포의 사격 연습을 구경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굉음에 놀란 우지야스는 일순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었다. 옆에 있던 무사가 그것을 보고 웃었다. 우지야스는 참을 수가 없었다. 창피함에 얼굴이 확 빨개져서는 곧바로 작은 칼을 꺼내어 자해(自害)하려고 하였다. 근시(近侍)의 무사가 당황하여 이것을 막았다. 우지야스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우지야스를 부속 가로(家老)인 시미즈()라는 자가 옛날부터 용기 있는 무사일수록 잘 놀란다고 합니다. 뛰어난 말도 성격이 예민하여 잘 놀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참았다고 한다.[각주:2]


 우지야스의 무명(武名)을 천하에 널리 알리게 한 것은 일본 3대 기습전[각주:3] 중에 하나로 꼽히는 카와고에(河越) 전투이다.

 1545 8.

 호우죠우 가문의 영국(領国)과 국경을 접하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 上杉 憲政)는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토모사다(扇谷 上杉 朝定)스루가(駿河)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와 손을 잡고 우지야스를 일거에 괴멸시키고자 하였다.

 요시모토는 우지야스 측의 스루가(駿河) 나가쿠보(長久保)성(城)을 포위하였고,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도 역시 공격해 왔다. 한편 노리마사는 토모사다와 함께 호우죠우 츠나시게( 綱成)가 지키는 카와고에(河越)() 탈환을 꾀했다. 카와고에 성() 1537년에 츠나시게에게 빼앗긴 토모사다의 거성(居城)이었다. 츠나시게는 원래 쿠시마(福島)라는 성()이었지만 호우죠우 씨()의 보호를 받으며 우지야스의 동생 격의 신분이 되어 있던 인물이었다[각주:4].

 더욱이 이 카와고에 공성(攻城)에는 우지야스의 매제(妹弟)인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 아시카가 하루우지(足利 晴氏)도 가담하고 있었다. 노리마사의 꼬임에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이리하여 카와고에 성()은 노리마사, 토모사다, 하루우지 8만의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어 버렸다. 그리고 반년에 걸친 공격을 받아 언제 낙성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놓였다.


 1546 4.

 우지야스는 카와고에 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8천의 병사를 이끌고 달려왔다. 병력의 차이는 10 1이었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우지야스에게 승산이 없었다.

 우지야스는 거기서 사자(使者)를 아시카가 하루우지에게 보내어 카와고에에서 농성(籠城)하고 있는 병사들의 목숨만이라도 살려주십시오. 그래 주신다면 카와고에의 성과 영지(領地)를 쿠보우(公方)님에게 바치겠습니다하고 몇 번에 걸쳐 애원한 것이다. 하루우지는 듣기는커녕 비웃으면서 네놈들이 바치지 않아도 당장 내일 즈음은 성이 떨어질 것이다. 성 안의 병사들은 전부 죽이고 또한 우지야스도 잡아 죽일 테다고 잘난 척 했다.

 우지야스는 또한 우에스기의 부장(副將) 오다(小田)()의 부하인 스게노야(菅谷)라는 자에게도 사자를 보내어 어떻게든 성의 츠나시게를 도와줄 방법은 없겠습니까? 도와만 준다면 카와고에 성()은 당신에게 받치겠습니다. 만약 전투라도 일어난다면 우리 쪽은 병사 수가 적으니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고 전했다. 우에스기 측은 우지야스의 이러한 애원에 [호우죠우 측은 겁쟁이 병이 돌고 있다]고 보았다. 그 소문은 우에스기 연합군 전체로 퍼져, 이제는 다 이기기라도 한 듯한 분위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우지야스의 노림수였다. 우지야스는 시노비([각주:5])를 써서 적측의 정세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4 20일 밤.

 우지야스는 경장(輕裝)의 정예병으로 구성된 돌격대를 편성해서는 적진 깊이 잠입시켜 놓고서는 불을 밝혀 성안에 있던 병사들과 호응하여 기습을 하였다. 어두운 밤 중의 습격에 우에스기 연합군은 단지 당황하여 허둥댈 뿐으로, 결국 도망을 치다 오우기가야츠 토모사다는 전사하였고 노리마사, 하루우지는 간신히 도망쳤다(카와고에 전투:위키 한글판).


 1554.

 그때까지 적이었던 타케다 신겐,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삼국동맹(同盟)을 맺었다. 우지야스의 장남 우지마사(氏政)와 신겐의 딸을 결혼시키고, 우지야스의 딸을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자네()에게 시집 보내어 상호간에 인척 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스루가(駿河)젠토쿠()사(寺)에서 모여 맺었기에 세상에서는 이를 [젠토쿠 사의 회맹]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동맹도 요시모토가 죽은 다음에는 깨어진다.


 우지야스는 민정가(民政家)로서도 뛰어나 다른 다이묘우(大名)들보다 먼저 본격적인 검지( 전답의 석고를 정하는 것)와 세제(稅制) 개혁을 행하였고, 전마(傳馬 수송용의 말)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통화를 명나라의 영락전(楽銭)으로 통일하여 상공업자를 보호하는 등 경제 정책에도 능하였다. 또한 아시카가 학교(足利[각주:6])를 원조하거나, 와카(和歌)를 산죠우니시 사네타카(西 )에게 배우는 등 문화인(文化人)적인 측면도 겸비하고 있었다.


[호조 우지야스( 氏康)]

1515년 우지츠나(氏綱)의 아들로 태어나다. 소우운(早雲)에서부터 3대째이다. 1541년 부친 우지츠나가 죽은 뒤 27살의 나이로 가독을 이었다. 카와고에의 야전(夜戰)에서 승리하여 무사시()의 태반을 영유(領有)하였고, 1551년에는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히라이(平井)성(城)을 공략하여, 칸토우()를 자신의 세력권 하에 두었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타케다 신겐과도 싸웠다. 1571년 죽었다.

  1. 갑옷의 등 뒤에 묶은 끈을 지칭. 링크타고 가시면 이미지를 볼 수 있습죠. [본문으로]
  2. 우지야스 12살이면 1527~8년경. 많이 알려진 타네가시마(種子島) 섬에 철포가 전래된 것은 1543년 이지만, 위의 우지야스 일화가 실린 [호우죠우 오대기(北条五代記)]에 따르면 1510년에 외국에서 일본 사카이(堺)로 전래되었고 1528년 즈음에 오다와라에 있던 늙은 중(山伏)이 사카이에 갔다가 신기하여 한 정 사서는 우지츠나(氏綱 – 우지야스의 부친)에게 받쳤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나머지는 이츠쿠시마(厳島) 전투, 오케하자마(桶狭間) 전투 [본문으로]
  4. 둘 다 1515년 태생으로 동갑이긴 하다 [본문으로]
  5. 닌쟈(忍者)를 말한다. [본문으로]
  6. 당시 칸토우 지방 최고의 학교 겸 서고. 후에 히데츠구의 강압으로 많은 책을 빼앗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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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5.02 1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기 쉽게 정리가 참 잘 되었군요.
    잘 보고 갑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2 1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칭찬 고맙습니다~
    (참...月山殿의 이야기 건필을 기원하겠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5.02 1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月山朝鮮守殿의 전기문도 구상중입니다.
    攝津浪人의 자제로 태어나 云云하는 스토리로요. ㅋㅋ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5.02 12: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사람도 보면 전국사를 통틀어도 빠지지 않은 명장인데 주위에 너무 괴물(다케다씨, 우에스기씨)들이 많아서 묻히는 경향이 있죠. 마치 우리나라가 지금 위치에서는 미국, 일본 이런 애들 땜에 새우로 보이지만 유럽 한복판에 갖다놓으면 한따까리하는것과 비슷하달까 -_-;;
    이 사람이 3할인가 4할을 세금으로 거둔다고 하던가? 지금 현대의 기준에서도 그다지 많지 않은 세금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도쿠가와가가 들어왔을 때 잇키가 좀 일어났다고..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5.02 15: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다(小田) 씨의 가신 菅谷씨는 스게노야씨입니다.

    가와고에 싸움은 호조측이 잘 한 건지 간토 바쿠후(?)가 삽질한 건지…

  6.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8.05.02 2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풍림화산>에서 카와고에의 야전을 본 것 같은데 정말 대담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3 08: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otokanfist님//그 셋츠도 정말..센스 짱이십니다~

    흰꿈님//전 주변에 맞게 성장한다고 생각하는 주의라.. ^^ 아마 쪼그만 애들이 모인 격전구에서는 거기에 알맞게만 컸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잇키까지 일어났나요? 불만은 있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거기까지는 모르겠군요. 함 검색해봐야 겠습니다.

    신사본론님//헤~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얼릉 고쳐야겠군요 ^^)
    뭐... 강해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이 강하다는 말에 따르면 호우죠우 측이 잘 한 것이겠죠.

    턴오버님//그...그런가요!! (..라고 말할 때는 항상 보고 싶더니 막상 시간나면 딴 거 보기만 하다 보니...^^)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kirkeis BlogIcon 키르케 2008.05.03 13: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전부 오빠가 번역하는거에요? 오앙. 멋지당.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3 19: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새삼스럽게...*-_-*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5.04 12: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초상화는 뽀샵 덕택에 피부에 잡티하나 없이 깨끗하군요(-_-..칼빵은 어디 숨기고;)
    한니발 초상화 같은 것도 아닌지라 각도로 숨길만한 상처가 아닌듯 싶은데(;;...)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4 1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군상 등에 실린 그림과 미묘~하게 다르더군요. ^^
    뭐 다테 마사무네같은 경우도 초상화에 양쪽 눈 그려달라했다는 이야기도 있는 거 보면 모델의 희망이 아니었을지...^^ 뭐 저 그림 자체가 언제 그려졌는지 모르다보니(아...제가 말입니다)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군요.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5.27 13: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분명 대단한 사람이긴 하지만.. 守의 인장은 대세 판단미스가 아니었나 싶군요.. 다케다 오다가 천하포무를 실현시켜가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27 2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떻게 보면 오다 가문의 영토 확장 속도가 그만큼 빨랐다고 생각합니다. 불과 20년 사이에 일본의 1/3을 차지할 정도였으니까요. 아마 누구도 그렇게 빨리 확장할 거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오오우치 씨(氏)는 센고쿠(戦国) 시대 초기에 서부 츄우고쿠(中国)에서 북부 큐우슈우(九州)까지 지배했던 일본 최대의 다이묘우(大名)였다.
 역대의 당주가 모두 문화인이었다. 그러한 지배자의 영향으로 오오우치 씨의 야가타(屋形=정청(政廳) 겸 저택)가 있던
야마구치(山口)는 귀족(公家) 문화의 풍취가 짙어 [서쪽의 쿄우토]라 불리며 조선이나 명(明)나라의 문화도 섞인 이국적인 색체가 강한 도시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발달된 문화도 곧이어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폐해(弊害)가 생겨 오오우치 씨(氏)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오우치 씨(氏)는 요시타카 시대에 황금기를 맞이하고 그리고 붕괴한다.

 장년시대의 요시타카를 그린 그림이 야마구치 시(市) 류우후쿠(龍福)사(寺)에 남겨져 있는데 실로 미목수려(眉目秀麗)한 도무지 센고쿠의 무장답지 않은 용모로 문화인 다운 지성(知性)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정한 그림의 뒤편에는 냉엄한 현실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에 왔던 외국인 선교사[각주:1]가 야마구치에 와서 요시타카를 만났는데, 그 생생한 리포트가 남겨져 있다.
 “…
스오우(周防)의 수도로 가장 인구가 많고 번영한 도시 야마구치에 도착했다. 이 도시의 왕은 오오우치도노(大内殿)라고 하며, 일본에서 가장 힘 있는 왕으로 그 가신의 수나 저택의 호화로움은 다른 다이묘우들을 능가하고 있다. 이 왕의 행동은 제멋대로인대다가 무절제하며 추잡한 욕망에 몸을 던지고 있었다….”

 요시타카는 너무 과할 정도로 쿄우토(京都) 문화를 동경하였다.
 그의 부인들을 열거해보면 그가 얼마나 [쿄우토]에 심취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정실(正室)인 사다코(貞子)는 상급귀족
(公卿)인 마데노코우지 히데후사(万里小路 秀房)의 딸이었다. 사다코를 시중들며 따라왔던 [오사이노카타(おさいの方)]를 요시타카는 총애하였는데 이 여성도 하급귀족인 오츠키 코레하루(小槻 伊治)의 딸이다. 또한 [히가시노고텐(東ノ御殿)]이라 불린 측실도 역시 쿄우토의 귀족인 히로하시 카네히데(広橋 兼秀)의 딸이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요시타카는 조정(朝廷)을 통째로 야마구치로 옮겨오려고 했을 정도였다.

 요시타카는 쿄우토(京都)를 너무 존중한 나머지 정치나 군사에 이르기까지 조정의 방식을 따르고자 하였다.공문서의 작성을 함에 있어 실수가 없도록 일부러 쿄우토(京都)에서 오츠키 코레하루를 초대하였다. 오츠키는 조정 문서의 기안(起案), 발행을 관직으로 하고 있던 하급 귀족이었다. 또한 이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당대 일류 귀족(公家) 학자 산죠우니시 사네타카(三条西 実隆)에게 300개가 넘는 질문을 보냈다. 이것을 정리한 것이 [타다라 문답(多々良問答)]이라 일컬어지는 유직고실(有職故実-조정이나 무가(武家)의 예식, 관직, 법령 등의 연구)의 서적이다.

 모든 것을 쿄우토 조정 방식에 따랐다. 숙적 쇼우니 씨(少弐氏[각주:2])를 공격하기 위해서 우선 쇼우니보다 위계가 높은 [다자이노다이니(太宰大弐[각주:3]]에 임명받기 위해서 활발한 조정 공작을 펼쳤다. 조정에서는 당초 요시타카가 가진 쇼우니 토벌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기에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시타카는 그것을 황실에 거액의 헌금으로 손에 넣은 것이었다. 가난한 황실은 이 헌금으로 겨우 고나라(後奈良) 텐노우(天皇)의 즉위식을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요시타카는 다자이노다이니[각주:4]
에 임관되자마자 쇼우니 씨(氏)를 멸해 버렸다.

 쇼우니 씨(氏)를 대신하여 바라 마지않던 다자이후(太宰部)의 지배자가 되자 요시타카는 고대[각주:5]의 다자이후 문서와 같은 형식의 명령[다이후센(大府宣)]을 관내의 여러 지역에 빈번히 내렸던 것이다. 심각한 시대 착오였다.

 말년에는 이것이 더욱 증폭되어 당시 허명에 지나지 않았던 효우부쿄우(兵部卿)에 임관되었다고 득의만만하고 있었다.

 쿄우토(京都)에 대한 동경은 요시타카의 문화에 심각하다고까지 할 정도의 경도(傾倒)로 이어진다. 그랬던 만큼 와카(和歌), 렌가(連歌)에 대한 조예는 깊었다. 지금도 다자이후 텐만(天満)궁(宮)이나 이츠쿠시마(厳島) 노사카(野坂) 가문 등에는 당대 일류의 렌가시(連歌師) 등과 시회(詩會)에서 만들었던 요시타카의 시작 구절(홋쿠(発句)이 적지 않게 남겨져 있다. 거기에 요시타카는 불교, 유교를 시작으로 케마리(蹴鞠), 노래, 각종 악기, 춤 등에도 정열을 쏟았다.
 요시타카는 야마구치에 쿄우토(京都)의 귀족(公家)들이나 학자, 예능에 있어 초일류인 사람들을 몇 십 명씩 초대하였다. 요시타카는 그들에게 만금을 써도 아깝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지나친 나머지 그런 막대한 비용이 가신단이나 영민의 어깨를 짓눌러 왔다. 요시타카는 그야말로 성가신 주군이었다. 이러한 불만이 쌓이고 쌓여서 곧이어 가신의 분열이 되고 내분(內紛)으로 발전해 간다.

 오오우치 가문의 정치 조직은 오오우치씨(氏)를 중심으로 스오우(周防) 슈고다이(守護代)인 스에(陶)씨(氏), 나가토(長門) 슈고다이에 나이토우(内藤)씨(氏), 부젠(豊前) 슈고다이에 스기(杉)씨(氏)가 맡고 있었다. 각각의 아래에 또다시 쇼우슈고다이(小守護代)를 두고 영지(領地)를 지배하고 있었다.

 쿄우토(京都)에서 오는 귀족들이나 문화인 집단은 현지의 무단파 가신단에게 있어서는 불쾌한 존재였다. 그런 그들의 불만에 불을 붙인 것이 요시타카 측근인 문관 사가라 타케토우(相良 武任)의 중용이었다. 유우히츠(祐筆)의 신분인 주제에 후다이(譜代)의 중신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 등과 동급인 종오위하(從五位下)에 임명된 것이었다.
 거기에 또 하나 무단파가 요시타카에게 멀어지게 된 것은
이즈모(出雲)의 아마고(尼子) 공략에서 대패를 하였기 때문이다.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각주:6])가 오오우치 씨(氏)에 속해있던 아키(安芸)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코오리야마(郡山)성(城)을 공격하자, 요시타카는 스에 타카후사에게 명하여 코오리야마 성(城)에 구원군을 파견함과 동시에 자신도 1만5천의 병사들을 이끌고 아마고 씨의 본거지인 이즈모(出雲) 토다갓산(富田月山)성(城)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처참한 패배였다. 보급로는 끊기고 유력한 무장들에게 배신당하여 간신히 야마구치로 도망쳐 온 것이었다. 이 패전이 얼마나 뼈에 사무쳤는지 요시타카는 이후 완전히 군사면에서 손을 떼어 오로지 문약(文弱)으로만 내달렸다.

 요시타카의 최후는 비참했다.
 스에 타카후사 등 무단파에 모반 당하여 간신히 나가토의 센자키(仙崎)로 도망쳤지만 결국 이 근처에서 자살해 버린 것이었다.



큰 지도에서 요시타카가 가려 했던 센자키(仙崎)항(港) 보기

 함께 죽은 것이 전(前) 칸파쿠(関白) 니죠우 코레후사(二条 尹房), 니죠우 요시토요(二条 良豊), 전 사다이진(左大臣) 산죠우 키미(킨)요리(三条 公頼), 츄우나곤(中納言) 지묘우인 모토노리(持明院基規), 칸무수쿠네(官務宿禰) 오츠키 코레하루. 거기에 시텐노우(四天王)사(寺)의 악인(樂人)들이었다. 호화로운 쿄우토(京都)의 귀족들이 요시타카의 죽음을 화려하게 장식했다고 할 수 있다.

[오우치 요시타카(大 義隆)]
1507년생. 요시오키(義興)의 장남. 오오우치씨(氏)는 백제 왕의 자손. 1528년 가문을 이어 스오우(周防) 등 7개국의 슈고(守護)가 된다. 쇼우니(少弐)씨(氏)를 물리치고 분고(豊後)의 오오토모 요시아키(大友 義鑑)와 강화(講和)를 맺었고, 1535년 다자이노다이니(大宰大弐)에 임명 받아 후에 종이위(從二位)까지 되어[각주:7] 효우부쿄우(兵部卿) 겸 지쥬우(侍従)가 된다. 1543년 이즈모(出雲) 토다 성(城)의 아마고 하루히사를 공격하였지만 실패. 명, 조선과의 무역이나 기독교 포교를 허용하는 등 외래 문화 도입에도 힘썼다. 문약으로 흘렀기 때문에 스에 타카후사에게 공격받았다. 1551년 9월 1일 자살. 45세.

  1. 이 선교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자비에르=San Francisco Xavier)는 일본 독특의 문화와 우상 숭배, 남색에 대한 비난을 하였다가 요시타카에게 쫓겨났다고 같이 있던 페르난데스 수도사의 기록에는 적혀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원래의 성(姓)은 무토우(武藤)였으나 무토우 스케요리(武藤 資頼)가 무가(武家)이면서 쿠게(公家)의 관직인 다자이노쇼우니(太宰少弐)에 임명 받은 후 대대로 세습되었기에 아예 성으로 삼고 있었다. [본문으로]
  3. 서열을 나태내는 사등관(四等官) 중 카미(長官) 다음 가는 스케(次官)의–니(弐)는 이(二(貳)의 일본식 약자- 서열 첫째이기에 다이니(大弐), 그 다음이 쇼우니(少弐)가 된다. [본문으로]
  4. 다자이후(太宰部)는 큐우슈우(九州) 전역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관장했다. [본문으로]
  5. 다자이후가 생긴 것은 7세기 전후라고 한다. [본문으로]
  6. 아마고 츠네히사(尼子 経久)의 손자로 이 당시 아마고 당주. [본문으로]
  7. 이 당시는 아시카가(足利) 쇼우군(将軍)조차도 종삼위(從三位)였기에 무가(武家)로써는 최고위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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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4.26 0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서쪽의 다이묘들이 연달아 소개되어서 새로운 지식을 많이 얻고 있습니다. ^^

    오늘 내용중에는 상대 다이묘를 공격하기 위해 더 높은 관직을 구했다는 대목이 흥미롭네요. 교토 문화에 빠졌다던 요시타카 만의 삽질이었는지 아니면 전국시대의 일반적인 행동원리(?)였는지 궁금합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26 0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쉽게도 다음 편은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입니다. ^^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도 미카와노카미(三河守), 노부나가도 오와리노카미(尾張守)를 얻어 각자의 본거지 내에서 권위를 세운 적은 있습니다. 조정의 관위나 막부의 역직을 얻어 그 권위를 이용(음...이 부분을 자세히 쓰려면 좀 길겠군요...이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해서 다른 국인(호족)들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그것을 듣지 않는 상대방을 억압 & 공격하는 대의명분으로 삼은 케이스는 꽤 될 것입니다.
    (유명한 예로는 관동(칸토우関東)의 무사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관동관령(칸토우칸레이)이 된 우에스기 켄신. 그 전에 칸토우에서 뿌리 내릴 명분을 찾기 위해 카마쿠라의 옛 지배자를 자처한 호우죠우(北条)씨, 토우호쿠(東北)에서 다른 호족들보다 상위에 서기 위해서 므츠노카미(陸奥守)를 얻은 다테(伊達) 등)...
    일반적인 행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요시타카처럼 점령지에서 조정 방식과 옛날 방식을 따라하진 않았겠습니다만. 단 우에스기 켄신은 칸토우칸레이 취임식때 옛날 방식대로 취임식을 가졌다고는 하더군요)

    이 책이 좀.... 각 무장에 대한 평가에서 오버기가 있습니다.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4.26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읽고 갑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4.26 14: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종2위라…
    요즘 카페에서 전국무장명 정리하다가 보니까 아소 코레토요가 종2위, 이토 요시스케가 종3위더군요. 구게 놈들 관직 주는 기준이 뭔지 헷갈립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26 18: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otokanfist님//고맙습니다. ^^

    신사본론님//아마 쩐~과 출신 가문의 문제가 아닐까요? (저도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돈이 있을 때 100만원 받는 거야 그냥 고맙지만, 돈 없을 때 50만원은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급이고..
    아소는 황실의 핏줄이 이어지는 거대 신사, 이토우는 후지와라 명문가 핏줄이니... 뭐...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26 1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公이 킨으로 읽히는 경우가 제법 되는군요.. (후세의 淸華家 元老 사이온지 킨모치처럼;)

    그나저나 무려 고셋케급의 쿠게가 순사(-_-;)할 정도라니.. 센고쿠 다이묘로서 정말 고품격이 아니었나 생각... (오다 우후가 귀천했을때 비슷한 상황이었다 한들 이렇지 않았을듯;;)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26 1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天文20年(1551年)8月29日に陶晴賢の謀反事件(大寧寺の変)に遭遇し、避難中に没した。享年56歳だった。法名を後大染金剛院殿と号した。墓は山口県長門市大寧寺にある。

    퇴란중 죽었다고만 나와서 어떻게 죽었나 싶었는데.. 오호 순사라(-_-;)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26 19: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책에는 '키미'...인데, 위키에는 '킨'..으로 나왔더군요. 아마 쿠게는 '킨'으로 읽는 관습이 있지 않았을지...(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만) 루비가 확실히 찍혀 있는 사람들(혹은 외국 선교사가 로마자로 쓴 분들)은 어느 것을 보건 같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과거에 같은 글자에 어떻게 읽었나 보고 판단해서 그런가 봅니다.

    그게...순사였을지..아니면 스에의 군사들에게 잡혀 추하게 살려달라고 하다가 죽었을지는 모르죠. 아마 쿄우토 근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면 여러 눈치를 살피느라 죽이기까지는 않았을테지만, 평소 거들먹 거리며, 자신들의 돈을 삼키던 먼 쿄우토에서 온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26 2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0대에 우다이진 20대에 칸파쿠 역임한 고셋케가 이렇도록 허무하게..(쩝;) 뭐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는 일이기도 합니다마는;;; 시골 국회의원이 쌀개방 해놓고 고향땅 돌아온 느낌이랄까(;;;)

    킨/키미는 저도 통 감이 안오더군요.. 뭐가 맞는지(쩝;) 그냥 볼때 볼때 '아..'뭐 이정도지;;

    P.S. 마데노코우지家는 유신 후 백작가가 되었던 걸로 기억하네요 사이온지 긴모치 평전보니 사이온지 친구로 마데노코우지가 도련님이 나와서 기억이 아른아른 나는게..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paxkore BlogIcon 포증 2008.04.27 02: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니죠우 코레후사라... 토사의 이치죠가와 연관이 있는 인물인가요? 이치죠가도 전국3국사 중 한 가문으로 대대로 관백이나 고위관직을 지낸걸로 압니다만.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27 1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저는 막말 바쿠후 쪽의 인물은 쪼금 알지만 신정부가 들어선 이후로는 아예 모르는 편이라..^^;

    포증님//아~ 저로서는 운 좋게도 대화대납언#2를 번역하면서 조사한 것이 나왔군요 ^^
    토사의 이치죠우, 본문에 언급되는 니죠우도 가문의 격이 셋케(摂家)라는 후지와라 씨의 적류입니다. 셋케는 다섯 개의 가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코노에(近衛), 쿠죠우(九条), 이치죠우(一条), 니죠우(二条), 타카츠카사(鷹司)가 그것입니다. 서로 돌아가면서 칸파쿠를 하였다고 하더군요.

< 사진 출처: http://www.nijl.ac.jp/index.html>

 스에 타카후사는 그의 주군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와 무엇이든 대조적이었다. 요시타카가 문화에 탐닉했던 것에 반해 타카후사는 그쪽 방면으로는 전혀 흥미를 나타내지 않아 당시 유행이었던 렌가(連歌) 모임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스에 씨(氏)는 오오우치 가문의 필두 중신이며 원래는 오오우치 씨(氏)의 지족(支族)이다. 부친 오키후사(興房)의 뒤를 이은 타카후사도 오오우치 가문에서 위세가 강하여 주군 요시타카조차 회담 뒤에는 일부러 타카후사를 배웅할 정도였다고 한다.

 무장으로써도 뛰어났다. 사서는 타카후사의 인물상을 [서국(西国) 무쌍의 사무라이 다이쇼우(侍大将), 지용(智勇)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평하고 있다. 오오우치 씨(氏)의 이즈모(出雲) 원정이 실패로 끝나 전군이 철퇴하였을 때 타카후사는 부하들에게 쌀을 주고 자신을 생선의 내장을 먹으며 굶주림을 참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이 이즈모(出雲) 아마고 원정의 실패가 - 타카후사가 요시타카를 정점으로 하는 문치파(文治派)를 공격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처음 목표로 삼은 것은 요시타카의 총신(寵臣) 사가라 타케토우(相良 武任)였다. 비서관(祐筆)에서 출세한 문치파의 톱이었다. 신참(新參)이면서 후다이(譜代)의 중신 스에 타카후사 등과 같은 종오위하(從五位下)에 임명 받지만 1545년 5월 타케토우는 타카후사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머리를 밀고 히고(肥後)의 사가라(相良)로 물러났다. 타카후사의 행동은 노골적이 되어 주군 요시타카를 은거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이르렀다.

 이 시점까지 아직 다른 무장들은 타카후사에게 찬동하고 있지 않았다. 타카후사에 다음가는 중신 나이토우 오키모리(内藤 興盛), 스기 시게노리(杉 重矩)는 오히려 타카후사의 위험한 야망을 꿰뚫어 보고 주군에게 [스에 암살]을 권할 정도였다. 하지만 문화인(文化人)인 요시타카는 아무래도 타카후사 암살이라는 과감한 수단을 취할 질 못했다. 이 우유부단함이 후에 자신의 파멸을 부르게 된다.

 주군과 타카후사의 암투는 계속되었다. 요시타카도 나름대로 손은 썼다. 예전에 총애하던 사가라 타케토우를 다시 가문으로 불러들였으며,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장남 타카모토(隆元)에게 자신의 양녀[각주:1]를 시집 보내어 끈을 강화하였다. 모략가 모토나리는 이 때 요시타카와 연락을 하는 한편, 타카후사의 밀사(密使)와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어차피 요시타카 측은 문약(文弱)한 무리였다. 대책이 허술했다. 사가라 타케토우 등은 “스에가 반란을 일으킬 턱이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3년이 지난 후 모든 정세가 주군 요시타카 측에 불리하게 되었다. 여전히 요시타카의 문화적 탐닉은 고쳐질 낌새도 보이지 않았으며 그에 따른 낭비로 인하여 가문 내의 인심은 떠나가 버린 것이다. 반 요시타카 감정은 스에 씨(氏)뿐만이 아닌 가문 전체로 퍼져있었다.
 타카후사에게 반대하고 있는 스기 시게노리도 스에의 계획에 참가하였고, 나이토우 씨(氏)도 심정적으로는 동조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1550년. 타카후사는 휴가를 청하여 자신의 영지(領地) 와카야마(若山)성(城)으로 돌아와서는 모반 계획을 착착 짜기 시작했다.

 결국 다음 해인 1551년 8월 28일. 반란의 병사를 일으켰다. 스에 이하 스기, 나이토우 등의 군세 5000여가 야마구치(山口)로 침입하여 문치파의 저택을 돌아가며 약탈하였고 오오우치의 저택을 습격하였다. 오오우치 측은 정면으로 대항할 수 있는 병사가 적었으며 거기에 대부분이 뿔뿔이 도망쳤다.
 요시타카 주종은 밤의 어둠을 이용하여 산길을 이용하여 한반도에서 보면 동해(東海) 쪽의
센자키(仙崎) 항(港)으로 피하였지만 결국 이곳의 타이네이(大寧)사(寺)에서 자살하였다.

 타카후사는 이후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를 영유(領有)하여, 츄우고쿠(中国) 일대에 위세를 떨쳤지만, 1555년 9월 30일 모우리 모토나리와 이츠쿠시마(厳島)에서 싸워 전사(戰死)하였다.

큰 지도에서 이츠쿠시마(厳島) 전투 보기

[스에 다카후사(陶 隆房)]
주군 요시타카를 멸한 후 하루카타(晴賢)라는 이름을 칭했다[각주:2]. 1539년 18살의 나이에 가독을 이어 오오우치 가문의 가로(家老)가 되었다. 1541년 모우리 모토나리와 협력하여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각주:3])를 물리쳤다. 1551년 오오우치 요시타카를 멸한 뒤,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동생 하루히데를 맞이하여 오오우치 가문을 잇게 한 뒤 요시나가라는 이름을 칭하게 하였다. 1555년 이츠쿠시마에서 패사(敗死).

  1. 나이토우 오키모리의 딸. 때문에 나이토우 가문은 이츠쿠시마(厳島) 전투 때, 오키모리가 죽은 다음이기도 하여 타카후사 지지파와 모토나리 지지파로 나뉘었다. [본문으로]
  2. 요시타카의 양자로 꼭두각시로 세운 오오우치 요시나가(大内 義長)가 양자로 오기 전의 이름이 오오토모 '하루'히데(晴英)였기에 그 이름을 따서. [본문으로]
  3. 츠네히사(経久)의 손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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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4.17 0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기씨는 죽 쒀서 개 줬군요. 뭐, 스에씨도 죽 쒀서 개 줬으니…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4.17 0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타가 있네요 7번 째 단락 마지막 줄에 스기 시게노리 아닌가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17 15: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군의 은혜를 배반했으니 인과응보 아니려나 싶습니다. (김재규도 그랬던 것 처럼;;)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7 1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사본론님//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처럼 위가 없어지면 서로 싸워야죠~

    박선생님//맞습니다. 얼릉 고쳤습니다. 꼼꼼히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메엣찌님//서로 衆道관계였다고 하니 주군이 죽었다는 소식에 요시타카의 숨결과 살결이 타카후사의 뇌리에 떠오르...응?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yangkki87 BlogIcon 한베에 2008.04.21 1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줄에 오오토모 소우린의 동생 하루히데를 맞이하여 '오우치' 가문을 잇게 한 뒤로 수정해주십시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21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쳤습니다. 지적 감사드립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4.23 0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들 세세하게 읽으시네요 아님 꼬투리를 잡으려고하는건지^^;;;
    저는 전자입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23 18: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저러신 분들 기억하고 있다가 반드시 후자가 될 것입니다!!! 우하하하~ 두고봅시다~~~~...^^;


 아마고 츠네히사[각주:1] 이즈모[出雲] 슈고다이[守護代][각주:2]의 직책을 빼앗긴 뒤 2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와신상담 끝에 옛 지위 회복의 비책을 짜내어 결국 그것을 이루어 냈을 뿐만 아니라 산인[山陰]의 패자(覇者)까지 된 굉장한 인물이다.


 떠돌이 생활을 할 때 고생을 많이 하였기에 백성이나 어민(漁民)들에게까지 잘 보살폈고, 언제나 따스한 미소를 잃는 일이 없었기에 여자 아이들조차 친근감을 가졌다고 한다.

 가신(家臣)들에게 대하는 태도는 더욱 헌신적이었다. 부상 당한 자는 손수 간호를 하였으며, 싸우다 죽은 이의 육친에게는 식록(食祿)을 늘려주었고, 명복을 빌며 직접 불경(佛經)을 읽었다. 이 때문에 휘하 병사들은 츠네히사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고 씨[尼子氏]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조부(祖父) 모치히사[持久] 때 부터이다.

 모치히사는 이즈모[出雲]의 슈고[守護] 쿄우고쿠 씨[京極氏]에게 중용 받아 슈고다이까지 출세해서는 토다갓산 성[富田月山城]을 본거지로 삼았다.


 츠네히사의 부친 키요사다[]가 뒤를 이어서는 활발히 영토를 넓혀 미호노세키[美保関]를 손에 넣음으로써 아마고 씨의 재정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즉 이 세키[関][각주:3]의 세키센[関銭][각주:4]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원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것이지만 횡령하였다.


 강성해졌던 아마고 씨는 츠네히사의 시대가 되자 일시 몰락한다.

 아마고 씨가 너무도 강대해 졌기에 슈고[守護] 쿄우고쿠 씨가 미사와[沢], 엔야[塩谷], 미토야[三刀屋] 등의 호족을 꼬드겨 츠네히사를 공격시켜다. 츠네히사는 슈고다이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토다갓산 성에서 쫓겨난 츠네히사는 이곳 저곳을 방랑하게 된다.

 눈보라가 치던 어느 날 밤. 츠네히사는 옛 신하 야마나카 카츠시게[山中 勝重][각주:5]의 집에 방문한다. 얼굴을 가리는 삿갓[深編笠]을 쓰고, 살을 에이는 추위에도 얇은 마()로 된 옷 한 벌이라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이미 굶주림과 추위로 삐쩍 말라있었다. 야마나카는 젊은 주인의 몰락한 모습에 눈물을 흘리며 불을 쪼이게 하고 술을 내와 위로하였다.

 그러나 츠네히사의 의기는 드높았다. 몸을 녹이면서 토다갓산 성 탈환 계획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이 야마나카 일당의 협력덕택에 아마고 재기의 발판이 되는 토다갓산 성 탈환이 가능하게 된다.

 

 1485년의 섣달 그믐날 밤이었다.
 
목적지는 예전의 본거지 토다갓산 성이었다. 성주는 츠네히사에게서 슈고다이의 직책과 성을 뺏어간 엔야 카몬노스케[塩谷 掃部助]였다.
아마고 일당은 밤의 어두움을 이용해서 성 안으로 숨어들었다. 천연의 요해(要害)였지만 예전엔 자신의 성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잠입에 성공하였다.

 

 다음 날은 설날이었다.

 아마고 츠네히사의 노림 수는 신년 축하 행사였다. 츠네히사는 이미 신년 축하에 흥을 돋구는 사당패 가마[賀麻] 일당을 포섭해 두고 있었다. 성 안에서 큰 북(太鼓)이나 작은 북()의 박자에 맞추어 춤이 시작되자 그와 동시에 갑자기 성 안의 곳곳에 숨어 있던 아마고의 군사들이 일제히 불을 지르며 공격하였다. 춤을 추고 있던 가마 일당도 아마고 측 군사들의 함성을 듣자 준비해 두었던 갑옷으로 갈아입고는 성병(城兵)들에게 칼질을 퍼부었다. 아마고의 기습은 보기 좋게 성공하여 불과 100여명으로 성병 700명 이상을 물리쳤다.

 이렇게 토다 성을 탈환한 후 츠네히사는 최대의 강적인 미사와 씨[三沢氏]를 물리치는 것에도 모략을 이용하게 된다.

 

 중신(重臣)이 된 야마나카 카츠시게에게 일부러 누명을 씌어 미사와 씨에게 도망치게 만든 것이다. 야마나카는 일년간 미사와 씨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이제 미사와는 야마나카 카츠시게를 완전히 신용하였. 야마나카 카츠시게는 “츠네히사를 위해 충성을 다하였건만 사소한 죄를 하나 지었다고 저를 쫓아내어 여기로 왔는데, 츠네히사는 제 부인과 자식, 늙은 모친마저 감옥에 가두고 학대하고 있습니다. 억울해 견딜 수 없으니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미사와는 정예 500명을 야마나카에게 맡겼고, 그는 이 500명을 이끌고 토다 성으로 데리고 갔다. 토다갓산에 도착한 야마나카 카츠시게는 성 안에 있는 자기의 옛 부하들에게 연락을 하여 내응하게 만든다며 사라졌고, 사라진 사이 츠네히사와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와 미사와의 병사들을 격파하였다.

 

 아마고 씨는 이후 각지에 진출하여 산인산요우[山陽]11개 지역[]에 위세를 떨치는 거대 세력으로 발전해 간다. 그러나 증손자인 요시히사[義久]의 대가 되어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에게 멸망 당한다.

 

[아마고 쓰네히사(尼子 )]

키요사다[清定]의 아들. 이즈모[出雲], 오키[岐], 이와미[石見], 이나바[因幡], 호우키[伯耆]를 영유(領有). 모우리 모토나리도 한때 휘하에 두었다. 1541년 죽었다. 84세라고 한다.

  1. ‘아마코’라고 읽을 수도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지방관인 슈고[守護]의 대리. 오우닌의 난[応仁の乱] 이전만 해도 해당 지역에 가지 않고 주로 쿄우[京]에서 정무를 보았기에, 그런 슈고를 대신해서 해당 지역에 가서 실무를 보았다. [본문으로]
  3. 지금의 세관이라 할 수 있는 곳. 통과하려면 돈을 내어야 했다. [본문으로]
  4. 세키 통행을 위해 내는 돈. [본문으로]
  5. 이 사람의 손자가 후에 아마고 재흥군을 이끌게 되는 야마나카 유키모리[山中 幸盛=시카노스케[鹿之助]]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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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4.11 09: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소를 장악해서 재정을 충실하게한 아마고씨, 관소를 철폐하여 오히려 재정수입을 늘린 오다씨.
    시대의 흐름과 노부나가의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이 느껴집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11 14: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모리 이전의 최고의 꾀돌이 할아버지.(;;) 혁신 CG에 비해 미남이군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4.11 16: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상기 첫 시나리오에서 제일 강력한 모략 수치를 가지고 있지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4.11 22: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아마고 츠네히사 vs 모리 모토나리 빅매치를 보고 싶네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2 06: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otokanfist님//과연~ shotokanfist님은 항상 저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

    다메엣찌님//아마 그 모델은 NHK 대하 드라마 [毛利元就]의 오가타 켄(&amp;#32210;形 拳)이 아닐지.. 실제로 딱 한번 가까이서 본 적이 있는데 생각 외로 키가 크더군요.
    참고로.... 그 분의 홈페이지
    http://ogata-ken.com/framepage-top.html

    볼리바르//헤~ 그런가요? 너무 어려워서 중도 포기한지라 머리 속에 남아있지를 않네요.

    허공님//NHK의 대하 드라마 [毛利元就]에서는 완벽한 부하로, 모토나리가 꼬셔 온 호족을 죽이라고 하니까 못 죽이겠습니다~ 하다가 '그럼 니가 죽어라'라면서 칼을 들이대니까 놀라는 장면(정말 추한 장면이었습니다. 강아지가 배 까집듯이 놀랐거든요)이 생각나는군요.(워낙 옛날에 본 것이라 틀릴 수도 있습니다만 ^^;)... 모토나리는 츠네히사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휘하의 일개 종속대명인지라 아쉽게도 빅매치까지는 갈 수 없을 것 같네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5.04 14: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 무장들 초상화를 보다보니.. 우리나라 선조분들은 쌍커풀이 거의 없는거에 비해서 죄다 쌍커풀이 -0-.. 북방계 남방계 차인가..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4 18: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습니까? 쌍커풀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만..^^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5.04 1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따스한 얼굴을 무너뜨리는 법이 없었다라…
    고작 영지가 적다고 자기한테 반란을 일으켜 결국 죽여야 했던 셋째 아들, 엔야 오키히사 앞에서는 어찌했을까요.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4 19: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쎄요... 제가 츠네히사도 아니고, 제 돈을 노리는 세째 아들을 가져본 적이 없다보니...
    뭐 정치가들이야 다 그런거 아닐까요? 남에게 보여주는 얼굴이 따로 있을 것이고...
    설사 아들이라도 무리한 욕심을 부려 가문에 풍파를 일으켜 약체화 시킬 것 같으면 그것도 미리 막아야 할 것이고요(도망쳐서는 자살한 것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겠죠)

아키[安芸]의 산골에 있던 미력(微力)한 소영주(小領主)에서 출발하여, 실로 10개 쿠니[]에 걸친 거대 다이묘우[大名]로 성장한 모우리 모토나리. 그는 자신의 생애를 시종일관 철저한 모략가(謀略家)로 살았다. 그의 고독한 성장 과정이 원인이었다.

 1558 8월에 장남 타카모토[隆元]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5살에 어머니와 이별하고 10살에 아버지와 사별(死別)하였다. 오로지 형 오키모토[興元]만을 의지하였지만 이 형도 내가 19살 때 죽어버렸다. 이후로는 부모형제도 없고 백부, 조카 등 친척 중에서도 도와주는 친척이 없어, 단지 혼자서 오늘날까지 어떻게든 어려움을 헤치고 살아왔던 것이다……
고 술회하였다.


 모토나리는 모우리 씨[毛利氏]의 본거지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당주 히로모토[弘元]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7살 때까지 코오리야마의 서쪽에 있는 타지히[多治比] 루가케 성[猿掛城]에서 살게 되었다. 이곳은 모우리 가문의 부하 격인 이노우에[井上] 일족의 힘이 강하여 그들의 보호를 받기도 했지만 그대신 모토나리의 땅을 횡령 당하거나 하였다. 모토나리는 이때부터 20여 년간, 이노우에 씨()의 세력 아래서 인종의 나날을 보내었다. 이런 인종의 나날 속에서 옆 군()의 호족 킷카와 쿠니츠네[吉川 国経]의 딸 묘우큐우[妙玖]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1523년에는 장남 타카모토를 얻었다. 모토나리는 27살이 되어 있었다. 이해의 여름이 끝날 즈음 모토나리의 환경이 급변하였다.


 모우리 종가(宗家)인 형 오키모토가 24살에 죽고(1516), 그 뒤를 이은 오키모토의 아들 코우쇼우마루[幸松丸]도 불과 9살로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후임 자리를 두고 내란이 일어났다.

 모토나리와 배다른 동생인 모토츠나[元綱[각주:1]]를 축으로 가문이 둘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 내란 때 이노우에 일족의 도움으로 모토나리가 상속자의 자리를 손에 넣었다. 모토나리는 이때 라이벌 모토츠나를 죽였다[각주:2].

 조연에서 단번에 주연에 오른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모우리 가문의 당주가 된 모토나리는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옹립해 준 이노우에 일족에게는 또다시 갚아야 할 빚를 만들고 말았다. 때문에 모토나리는 여전히 긴 인종의 세월을 이어가야 했다.


 그의 고독하고 남을 믿지 못하는 마음은 이때 배양된 것이다. 후에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된다.

 '우리 가문이 잘 되라고 하는 사람은 다른 나라에 있을지언정, 이 나라에는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은 모토나리의 소위 네거티브한 면인데, 포지티브한 면을 나타내는 에피소드로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13살 때였다. 가신과 함께 이츠쿠시마 신사[(神社]에 참배한 후 모토나리는 가신에게 무엇을 빌었는지를 물었다. 가신은 우리 주군이 츄우고쿠[国]의 큰 영주가 되게 해달라 빌었다고 했다. 그러자 모토나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몽둥이만큼 빌어도 바늘 정도밖에 이루어 지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빌 거라면 어째서 천하를 잡게 해달라고 빌지 않은 것이냐?”

 기개와 도량이 큰 인물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화이다[각주:3].


 또한 17살 때 중국 명()나라 사람들이 모우리 가문에 들렸는데, 그 일행 중에 관상을 보는 사람이 모토나리의 얼굴을 살펴보고서는,

 너는 고조, 태종의 관상을 겸비하고 있다. 장래 반드시 위세를 사방에 떨칠 수 있을 것이다

 고 예언했다고도 한다.


 모토나리가 당시 직면하고 있던 츄우고쿠[国]의 정세를 말하자면, 산인[山陰] 지방에는 아마고 씨[尼子氏]가 패권을 쥐고 있었고,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에서 북부 큐우슈우[九州]에 걸쳐서는 오오우치 씨[氏]가 세력을 뻗고 있었다. 두 거대 세력에 끼인 소영주(小領主) 모우리 가문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고도의 외교적 수완이 필요했다.


 1531.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각주:4]와 의형제를 맺고 있었지만, 1537년에 결별하고서 그때까지 적이었던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에게 적자인 타카모토를 인질로 받치고 그 휘하에 들어갔다.


 1541년 가을.

 아마고 씨() 3만의 병사를 이끌고 모우리의 본거지 코오리야마[郡山]로 진격해 왔을 때 오오우치 요시타카는 스에 하루카타[陶 晴賢]에게 1만의 군세를 주어 구원하도록 하였다. 아마고 군세는 이때 큰 눈을 만나 보급선이 끊겨 참패를 당하였다. 오오우치 군세도 아마고 군세를 이즈모[出雲]까지 깊숙이 추격하였다가 대패를 당했다.


 이 양 세력의 약체화는 모우리 가문이 바라던 바였다. 모토나리는 곧바로 아키 슈고[安芸守護] 타케다 씨[武田氏]를 멸하여 아키[安芸]에 군림한 것이다. 또한 이 지배 체제를 강고히 하기 위해서 모토나리는 세토 내해[瀬戸內海] 연안의 호족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과 산인[山陰]국경에 있는 킷카와 가문[吉川家]을 모략을 이용해 탈취하여, 코바야카와 가문에는 셋째인 타카카게[隆景], 킷카와 가문에는 둘째인 모토하루[元春]를 각 가문의 당주 자리에 앉혔다. 이름만 다를 뿐 실상은 어디까지나 모우리 가문의 분가(分家), 세상에서는 이를 '모우리 양 천[毛利 ][각주:5]'이라고 불렀다.


 양 가문을 손에 넣자, 모토나리는 지금이야 말로 모우리 가문을 장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중신 이노우에 일족의 숙청이었다. 20년간 모토나리는 그들의 전횡(專橫)을 참아왔던 것이다. 그 숙청은 철저의 극에 달하여 일족의 장로 모토카네[元兼] 이하 30명 이상을 죽였다. 이 과감한 결단으로 인해 가문 내의 공포는 굉장했다고 한다. 모토나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강력한 권력을 일거에 장악하여 가신들에게 복종을 맹세시켰던 것이다.


 이 결집된 힘을 이용하여 모우리 가문은 유명한 이츠쿠시마 전투[島の戦い]에 돌입하게 된다.

 츄우고쿠[国]의 명문 오오우치 가문[内家]을 격퇴하여 더욱 크게 웅비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오오우치 가문은 스에 하루카타가 주군 요시타카를 자살로 몰아 넣고, 그 자리에 요시나가[義長]를 앉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전투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모략전에서 모토나리는 진가를 발휘하였다.

 오오우치 씨()의 거점인 야마구치[山口]에 모우리의 밀정들을 잠입시켰다. 모토나리는 그들에게 스에[]의 부하인 용장() 에라 후사히데[江良 房栄]가 모우리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을 유포시키게 하였다. 작은 의혹들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결국 하루카타도 그런 소문을 믿고 후사히데를 죽여버린 것이다.


 1555년 봄.

 모토나리는 가신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츠쿠시마 섬[島]에 미야오 성[宮尾城]을 쌓았다. 적의 대군을 작은 섬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미끼였다.

 성을 쌓으려고 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 완성할 때까지 스에[陶] 군이 쳐들어 오지 않으면 좋겠는데……”

 이런 생각을 적측에 새어 나갈 수 있도록 모토나리를 손을 써 두었다. 하루카타가 조금 찔러보자 이외로 세찬 반응이 일어났다. 모우리의 숙장(宿) 중의 한 사람이 내응을 약속해 온 것이다.

 모든 것은 모토나리가 놓은 덫이었다.

 결국 하루카타는 모토나리의 유인에 넘어왔다. 하루카타는 2만의 대군을 500척의 군선에 태워서는 이츠쿠시마에 상륙시킨 후 토우노오카[岡]에 본진을 두고서는, 모우리의 미야오 성()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1555 9 21일이었다.

 30일 아침, 모우리 군은 은밀히 행동을 개시하였다. 비바람 세찬 날, 밤의 어둠을 이용하여 100척의 배로 이츠쿠시마[]로 건너 가서는 기습한 것이다.

 스에 군 2만은 4천의 모우리 군에 참패. 총대장 하루카타는 겨우 도망쳤지만 결국 섬의 서안 오오에[大江]의 바위 그늘에서 배를 갈랐다.



크게 보기                                                      < 이츠쿠시마 전투>

 이후 모토나리는 여세를 몰아 빙고[備後], 아키[安芸],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4개 쿠니[国]를 손안에 넣었다.

 

 모토나리는 죽을 때까지 현역에서 물러날 수가 없었는데, 자신이 죽은 후의 것까지 절치부심하였다.

 3명의 아들에 대한 교훈장[三子],

 '너희 셋 중에 조금이라도 사이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셋 다 멸망 당한다고 생각할 것'

 이라 써서 일치단결의 중요성을 말했으며, 세 아들에게서 서약서까지 받아 두었다.

 2차 대전 전의 일본 국정교과서에 실렸던 [세 대의 화살 교훈]은 유명한 이야기다. 한 대의 화살은 부러뜨릴 수가 있지만, 세 대를 합치면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깨닫게 하여 서로 협력할 것을 맹세케 하였다 한다. 이것은 위의 교훈장을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각주:6]

 

 1570, 손자인 테루모토[輝元]를 총대장으로 하여 이즈모[出雲]의 아마고[尼子]를 공략하러 보낸 모토나리는 그 보고를 듣지 못하고 다음 해 파란만장했던 생애의 막을 내렸다.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

1497년 아키[安芸] 요시다[吉田]지토우[地頭] 가문에서 태어났다. 처음엔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에 속하였고, 후에 오오우치[内] 휘하가 된다. 킷카와-코바야카와 가문을 손에 넣은 다음부터 차츰 세력을 넓혀, 스에 하루카타를 이츠쿠시마[島]에서 물리치고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에서 패권을 확립. 후에 츄우고쿠[国] 10개 쿠니[国]와 부젠[豊前]이요[伊予]의 일부를 영유하는 거대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571 6 14일 죽었다. 75.

  1. 가지고 있던 영지(領地)가 아이오우[相合]에 있었기에 풀네임은 ‘아이오우 모토츠나[相合 元綱]’라 하였다. [본문으로]
  2. 이때 모토츠나는 아마고[尼子]의 푸쉬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모토나리는 아마고 가문과 멀어지게 된다. [본문으로]
  3. 여담으로 나이를 먹고 죽기 전에는 '천하를 지배하는 자가 아무리 영화를 자랑하더라도, 몇 대가 지나고 나면 쇠하게 되어 자손까지 그 영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천하에 이름을 떨치기 보다는 일본을 다섯으로 나눠 그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잘 보전하여 자자손손까지 이 위세를 남겨라'……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4. 아마고 츠네히사[尼子 経久]의 손자 [본문으로]
  5. 코바야카와[小早'川']든 킷카와[吉'川']든 성에 내 천川자가 들어가 있기 때문. [본문으로]
  6. 이 이야기가 이어져 예전 노정윤이 뛰었던 일본 J리그의 산프레체 히로시마[サンフレッチェ広島]의 ‘산프레체’는, 일본 말로 3을 의미하는 ‘산(サン)’과 화살들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프레체(frecce)를 섞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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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3.27 1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을 쓰면서 기억나는거 2가지.
    첫 번째는 모리 료센을 료카와로 착각해서 포스트를 근1년동안 방치하고 있었던거 -_-;; 하지만 전 러시아어 공부하니까 패스. 일본어 히라가나정도 밖에 못읽으니까 ㅎㅎ

    두 번째는 뜨뜻한 방안에서 귤이나 까먹으면서 노신들하고 장기나 둘나이에 다카모토가 제발 죽을때가지 전쟁터좀 뛰어주세요 해서 바리바리 뛰어다녔던 모토나리가 항상 불쌍하다고 생각했던거. 사실 모토나리도 은근히 계속 현역으로 활동하고 싶었겠지만 이렇게나 늙은 나이까지 빡시게 뛰어다닐줄 상상이나 했을까요 -_-;;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7 14: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검색해보니 [료우카와]...라고 읽을 수도 있다고도 하네요.
    (부럽습니다. 러시아어!!)

    그러게 말입니다. 전쟁터라는 곳은 정말 가혹한 곳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총대장이라도 자는 곳은 방 안의 이불 위만 못할 것이며 식사, 배설물 등의 처리 등등을 생각하면 죽기 전까지 전쟁터에서 보내야 했던 모토나리는 불쌍하군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3.27 2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석에 달린 교훈장을 보니, 병X 히데아키 때문에 모리 료센에서 탈락한 고바야카와 가문이 어째 불쌍하게 여겨지네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3.28 03: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좋은 정보를 얻고 있습니다. 특히 히로시마 구단의 이름에 그런 뜻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네요. ^^
    근데.. 막부 성립 이후 킷카와, 코마야카와 가문은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9 17: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사본론님//대신 종가를 지킬 수 있었으니 그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았을지...

    맹꽁서당님//처음 댓글 남겨주신 것 같군요. 환영 &amp; 반갑습니다. ^^

    킷카와 가문은 이와쿠니(岩&amp;#22269;)번을 성립시켰지만, 막부에게는 대명 취급을 받았지만, 정작 쵸우슈우 모리번에게서는 대명 급으로 대우를 안 했다고 하더군요. 세키가하라와 오오사카 농성전(사노 도우카 사건) 등으로 인해서 종가와는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다고 하더군요.

    코바야카와 가문은 아시겠지만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계승하였지만 세키가하라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아키가 죽는 바람에 멸문 취급당했습니다. 에도 막부가 멸망한 뒤 메이지 유신기에 당주의 아들 중 하나가 코바야카와 성을 받아 화족이 되었다고 하는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01 21: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시도 타카이에가 누구이기에 딸내미 인생이 안됐다고 얘기 한걸까요..

    13조까지 진지함 일관이다가 14조에 노인 특유의 골계미가 느껴지는 마무리라니.. 역시 꾀돌이 영감다운 맛이 있다랄까요. 잘 봤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4.04 1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4국으로 시작했던 오다씨나, 가신한테 눌려있던 모오리씨나 성공했으니 다행이지, 안그랬으면 정말 안습인채로 마무리할 뻔 했지요.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04 2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분위기로 보아서는 혼란스런 정세 속에서 그때까지 적이었던 가문에게 시집을 보낸 것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인가...싶지만..솔직히 모르겠네요.
    여담으로 시시도 가문은 막말까지도 변함없이 모우리 가문에서 힘이 있었는지, 4개국 연합함대에 패배한 쵸우슈우 번의 사자로써 하찮은 가문 출신(150석)인 타카스기 신사쿠(高杉 晋作)는 급히 가로인 시시도 비젠노카미(&amp;#23437;&amp;#25144; 備前守)의 양자가 되어 [시시도 교우마(&amp;#23437;&amp;#25144; 刑馬)]라는 이름을 얻어 전후 처리를 맡았다고 하더군요.

    shotokanfist님//또한 그만큼 성공했기에 이렇게 역사상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9. 2010.11.02 0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1.02 10: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

      출처만 밝혀주신다면 좋습니다만... 이 전국무장 100화 - 에 관한 이야기들은 사실이 아닌 일화들이 많이 실린 책이다 보니 주의를 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