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우치 씨(氏)는 센고쿠(戦国) 시대 초기에 서부 츄우고쿠(中国)에서 북부 큐우슈우(九州)까지 지배했던 일본 최대의 다이묘우(大名)였다.
 역대의 당주가 모두 문화인이었다. 그러한 지배자의 영향으로 오오우치 씨의 야가타(屋形=정청(政廳) 겸 저택)가 있던
야마구치(山口)는 귀족(公家) 문화의 풍취가 짙어 [서쪽의 쿄우토]라 불리며 조선이나 명(明)나라의 문화도 섞인 이국적인 색체가 강한 도시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발달된 문화도 곧이어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폐해(弊害)가 생겨 오오우치 씨(氏)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오우치 씨(氏)는 요시타카 시대에 황금기를 맞이하고 그리고 붕괴한다.

 장년시대의 요시타카를 그린 그림이 야마구치 시(市) 류우후쿠(龍福)사(寺)에 남겨져 있는데 실로 미목수려(眉目秀麗)한 도무지 센고쿠의 무장답지 않은 용모로 문화인 다운 지성(知性)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정한 그림의 뒤편에는 냉엄한 현실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에 왔던 외국인 선교사[각주:1]가 야마구치에 와서 요시타카를 만났는데, 그 생생한 리포트가 남겨져 있다.
 “…
스오우(周防)의 수도로 가장 인구가 많고 번영한 도시 야마구치에 도착했다. 이 도시의 왕은 오오우치도노(大内殿)라고 하며, 일본에서 가장 힘 있는 왕으로 그 가신의 수나 저택의 호화로움은 다른 다이묘우들을 능가하고 있다. 이 왕의 행동은 제멋대로인대다가 무절제하며 추잡한 욕망에 몸을 던지고 있었다….”

 요시타카는 너무 과할 정도로 쿄우토(京都) 문화를 동경하였다.
 그의 부인들을 열거해보면 그가 얼마나 [쿄우토]에 심취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정실(正室)인 사다코(貞子)는 상급귀족
(公卿)인 마데노코우지 히데후사(万里小路 秀房)의 딸이었다. 사다코를 시중들며 따라왔던 [오사이노카타(おさいの方)]를 요시타카는 총애하였는데 이 여성도 하급귀족인 오츠키 코레하루(小槻 伊治)의 딸이다. 또한 [히가시노고텐(東ノ御殿)]이라 불린 측실도 역시 쿄우토의 귀족인 히로하시 카네히데(広橋 兼秀)의 딸이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요시타카는 조정(朝廷)을 통째로 야마구치로 옮겨오려고 했을 정도였다.

 요시타카는 쿄우토(京都)를 너무 존중한 나머지 정치나 군사에 이르기까지 조정의 방식을 따르고자 하였다.공문서의 작성을 함에 있어 실수가 없도록 일부러 쿄우토(京都)에서 오츠키 코레하루를 초대하였다. 오츠키는 조정 문서의 기안(起案), 발행을 관직으로 하고 있던 하급 귀족이었다. 또한 이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당대 일류 귀족(公家) 학자 산죠우니시 사네타카(三条西 実隆)에게 300개가 넘는 질문을 보냈다. 이것을 정리한 것이 [타다라 문답(多々良問答)]이라 일컬어지는 유직고실(有職故実-조정이나 무가(武家)의 예식, 관직, 법령 등의 연구)의 서적이다.

 모든 것을 쿄우토 조정 방식에 따랐다. 숙적 쇼우니 씨(少弐氏[각주:2])를 공격하기 위해서 우선 쇼우니보다 위계가 높은 [다자이노다이니(太宰大弐[각주:3]]에 임명받기 위해서 활발한 조정 공작을 펼쳤다. 조정에서는 당초 요시타카가 가진 쇼우니 토벌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기에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시타카는 그것을 황실에 거액의 헌금으로 손에 넣은 것이었다. 가난한 황실은 이 헌금으로 겨우 고나라(後奈良) 텐노우(天皇)의 즉위식을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요시타카는 다자이노다이니[각주:4]
에 임관되자마자 쇼우니 씨(氏)를 멸해 버렸다.

 쇼우니 씨(氏)를 대신하여 바라 마지않던 다자이후(太宰部)의 지배자가 되자 요시타카는 고대[각주:5]의 다자이후 문서와 같은 형식의 명령[다이후센(大府宣)]을 관내의 여러 지역에 빈번히 내렸던 것이다. 심각한 시대 착오였다.

 말년에는 이것이 더욱 증폭되어 당시 허명에 지나지 않았던 효우부쿄우(兵部卿)에 임관되었다고 득의만만하고 있었다.

 쿄우토(京都)에 대한 동경은 요시타카의 문화에 심각하다고까지 할 정도의 경도(傾倒)로 이어진다. 그랬던 만큼 와카(和歌), 렌가(連歌)에 대한 조예는 깊었다. 지금도 다자이후 텐만(天満)궁(宮)이나 이츠쿠시마(厳島) 노사카(野坂) 가문 등에는 당대 일류의 렌가시(連歌師) 등과 시회(詩會)에서 만들었던 요시타카의 시작 구절(홋쿠(発句)이 적지 않게 남겨져 있다. 거기에 요시타카는 불교, 유교를 시작으로 케마리(蹴鞠), 노래, 각종 악기, 춤 등에도 정열을 쏟았다.
 요시타카는 야마구치에 쿄우토(京都)의 귀족(公家)들이나 학자, 예능에 있어 초일류인 사람들을 몇 십 명씩 초대하였다. 요시타카는 그들에게 만금을 써도 아깝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지나친 나머지 그런 막대한 비용이 가신단이나 영민의 어깨를 짓눌러 왔다. 요시타카는 그야말로 성가신 주군이었다. 이러한 불만이 쌓이고 쌓여서 곧이어 가신의 분열이 되고 내분(內紛)으로 발전해 간다.

 오오우치 가문의 정치 조직은 오오우치씨(氏)를 중심으로 스오우(周防) 슈고다이(守護代)인 스에(陶)씨(氏), 나가토(長門) 슈고다이에 나이토우(内藤)씨(氏), 부젠(豊前) 슈고다이에 스기(杉)씨(氏)가 맡고 있었다. 각각의 아래에 또다시 쇼우슈고다이(小守護代)를 두고 영지(領地)를 지배하고 있었다.

 쿄우토(京都)에서 오는 귀족들이나 문화인 집단은 현지의 무단파 가신단에게 있어서는 불쾌한 존재였다. 그런 그들의 불만에 불을 붙인 것이 요시타카 측근인 문관 사가라 타케토우(相良 武任)의 중용이었다. 유우히츠(祐筆)의 신분인 주제에 후다이(譜代)의 중신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 등과 동급인 종오위하(從五位下)에 임명된 것이었다.
 거기에 또 하나 무단파가 요시타카에게 멀어지게 된 것은
이즈모(出雲)의 아마고(尼子) 공략에서 대패를 하였기 때문이다.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각주:6])가 오오우치 씨(氏)에 속해있던 아키(安芸)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코오리야마(郡山)성(城)을 공격하자, 요시타카는 스에 타카후사에게 명하여 코오리야마 성(城)에 구원군을 파견함과 동시에 자신도 1만5천의 병사들을 이끌고 아마고 씨의 본거지인 이즈모(出雲) 토다갓산(富田月山)성(城)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처참한 패배였다. 보급로는 끊기고 유력한 무장들에게 배신당하여 간신히 야마구치로 도망쳐 온 것이었다. 이 패전이 얼마나 뼈에 사무쳤는지 요시타카는 이후 완전히 군사면에서 손을 떼어 오로지 문약(文弱)으로만 내달렸다.

 요시타카의 최후는 비참했다.
 스에 타카후사 등 무단파에 모반 당하여 간신히 나가토의 센자키(仙崎)로 도망쳤지만 결국 이 근처에서 자살해 버린 것이었다.



큰 지도에서 요시타카가 가려 했던 센자키(仙崎)항(港) 보기

 함께 죽은 것이 전(前) 칸파쿠(関白) 니죠우 코레후사(二条 尹房), 니죠우 요시토요(二条 良豊), 전 사다이진(左大臣) 산죠우 키미(킨)요리(三条 公頼), 츄우나곤(中納言) 지묘우인 모토노리(持明院基規), 칸무수쿠네(官務宿禰) 오츠키 코레하루. 거기에 시텐노우(四天王)사(寺)의 악인(樂人)들이었다. 호화로운 쿄우토(京都)의 귀족들이 요시타카의 죽음을 화려하게 장식했다고 할 수 있다.

[오우치 요시타카(大 義隆)]
1507년생. 요시오키(義興)의 장남. 오오우치씨(氏)는 백제 왕의 자손. 1528년 가문을 이어 스오우(周防) 등 7개국의 슈고(守護)가 된다. 쇼우니(少弐)씨(氏)를 물리치고 분고(豊後)의 오오토모 요시아키(大友 義鑑)와 강화(講和)를 맺었고, 1535년 다자이노다이니(大宰大弐)에 임명 받아 후에 종이위(從二位)까지 되어[각주:7] 효우부쿄우(兵部卿) 겸 지쥬우(侍従)가 된다. 1543년 이즈모(出雲) 토다 성(城)의 아마고 하루히사를 공격하였지만 실패. 명, 조선과의 무역이나 기독교 포교를 허용하는 등 외래 문화 도입에도 힘썼다. 문약으로 흘렀기 때문에 스에 타카후사에게 공격받았다. 1551년 9월 1일 자살. 45세.

  1. 이 선교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자비에르=San Francisco Xavier)는 일본 독특의 문화와 우상 숭배, 남색에 대한 비난을 하였다가 요시타카에게 쫓겨났다고 같이 있던 페르난데스 수도사의 기록에는 적혀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원래의 성(姓)은 무토우(武藤)였으나 무토우 스케요리(武藤 資頼)가 무가(武家)이면서 쿠게(公家)의 관직인 다자이노쇼우니(太宰少弐)에 임명 받은 후 대대로 세습되었기에 아예 성으로 삼고 있었다. [본문으로]
  3. 서열을 나태내는 사등관(四等官) 중 카미(長官) 다음 가는 스케(次官)의–니(弐)는 이(二(貳)의 일본식 약자- 서열 첫째이기에 다이니(大弐), 그 다음이 쇼우니(少弐)가 된다. [본문으로]
  4. 다자이후(太宰部)는 큐우슈우(九州) 전역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관장했다. [본문으로]
  5. 다자이후가 생긴 것은 7세기 전후라고 한다. [본문으로]
  6. 아마고 츠네히사(尼子 経久)의 손자로 이 당시 아마고 당주. [본문으로]
  7. 이 당시는 아시카가(足利) 쇼우군(将軍)조차도 종삼위(從三位)였기에 무가(武家)로써는 최고위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