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타헤에[母里 太兵衛][각주:1]라고 하면 ‘쿠로다 타령[黒田節]’[각주:2]으로 유명한 무인이다.
 노래 속에 등장하는 ‘히노모토 제일의 창[日ノ本一の槍]’ 니혼고우[日本号]는 원래 궁중에 있던 것이라고 하며, 오오기마치 텐노우[正親町天皇]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게 하사한 것이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거쳐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 전해진 것이다. 창날이 약 70cm 거기에 약 2m30cm의 푸른 창자루가 달린 창이다.
 
어느 날 마사노리가 사자로 파견된 타헤에에게 술을 강제로 먹이려고 하면서, 이걸 마시면 뭐든 바라는 것을 준다고 하며 커다란 잔에 술이 넘치도록 따라서 주자 타헤에는 그것을 완샷하고 난 뒤 니혼고우의 창을 냉큼 집어 들고 왔다고 한다[각주:3]. 즉 술로 따낸
것이다.

니혼고우[日本号]의 창날의 앞뒷면. 상기의 링크와 함께 보시길.

타헤에는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를 섬겼으며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와는 동료였다. 임진왜란 때는 쿠로다 카즈시게[黒田 一成][각주:4], 고토우 마타베에와 서로 번갈아 가며 선봉대장을 맡았다. 쿠로다 가문[黒田家]이
치쿠젠[筑前] 52만석의 대봉(大封)을 받았을 때, 타헤에도 쿠라테 군[鞍手郡] 타카토리 성[鷹取城] 1만 8천석의 높은 봉록을 하사 받았다. 가신이라고는 해도 다이묘우[大名] 클래스의 석고(石高)였다.

 타헤에는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기풍을 사랑하던 사나이로 상대가 주군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꺾는 일이 없었다.
 주군 나가마사의 적자 만토쿠마루[満徳丸=후의 타다유키[忠之]]가 4살이 되어 처음으로 바지[袴]를 입는 축하연 때의 일이다. 만토쿠마루의 후견인[お守り]이 된 타헤에는 이 아기를 무릎에 앉히고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서 어른이 되셔서 아버님을 능가하는 공명(功名)을 세우소서”
 라고 말하였다.
 나가마사는 그것을 듣고 화를 내며,
 “타지마(但馬=타헤에)!! 아비를 능가하는 공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조선에서도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지금처럼 태평스러운 시대에 어떻게 만토쿠마루가 나를 능가하는 공적을 세울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말하며 실언을 취소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타헤에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태연히 만토쿠마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무공을 자랑하다니 어처구니가 없군요.”
 라고 말하며 말을 취소하려 하지 않았다. 험악한 분위기가 되었지만 옆방에 있던 노신 쿠리야마 토시야스[栗山 利安]가 중재하여 겨우 나가마사는 화를 풀었다.
 “이거 내가 실수했네. 이리 와서 이걸 마시게”
 하고 술잔을 건네자, 타헤에는 세 번이나 더 달라고 한 뒤 다 마신 후,
 “오늘은 경하스러운 자리인데 분위기가 내려갔군요. 제가 춤을 추어 다시 분위기를 끌어 올리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일어서 노래 부르며 춤을 추었다.
 이때 쿠리야마 토시야스는,

 “마음 씀씀이가 깊은 것도 주군. 또한 사려가 부족한 것도 주군. 큰 얼간이는 타지마(=타헤에), 또한 믿음직스러운 것도 타지마”
 라고 했다고 한다.

 또 어느 해의 초반 신춘(新春)의 축하연에서 나가마사가 쿠리야마 토시야스의 저택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주연이 시작되어 밤 10시 즈음이 되자 나가마사가,
 “내가 있으면 젊은이들이 맘 놓고 술을 마시지 못하겠지. 난 이만 가니 맘 놓고들 술을 마시게”
 하고 말하곤 돌아가려 하였다. 이때 역시 이 자리에 있던 타헤에가 일부러 큰 소리로,
 “이런 날 좀 더 자리에 앉아서 젊은이들과 속 터놓고 즐기면 좋을 것을… 어쨌든 자기 멋대로인 주군이시군. 정수리에 커다란 뜸이라도 놓아 정신차리게 해야지 이거야 원…”
 라는 말을 내뱉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가마사는 듣지 못했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런 타헤에의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완고함으로 주군이라 하더라도 안중에 없다는 듯한 센고쿠 생존자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술을 좋아하는 타헤에의 일면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타헤에는 고토우 마타베에처럼 주군 가문을 버리는 일이 없었던 것을 보면 완고한 반면 주군 가문에 대한 충성심도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리 다헤[母里 太兵衛]
출생은 확실하지 않지만 씨는 모우리[毛利]였다고도 한다. 이름은 토모노부[友信]로 타지마노카미[但馬守]를 자칭하였다. 쿠로다 요시타카[黒田 孝高=죠스이[如水]]-나가마사[長政]를 섬기며 조선에서도 공을 세워 쿠라테 군[鞍手郡] 타카토리 성[鷹取城] 1만8천석에 봉해졌다.

  1. 위키에 따르면 쿠로다 가문[黒田家] 내에서는 모리는 ‘보리ぼり’라고 읽는 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여담으로 지금도 유명하여, 일본 유명 사회자인 타모리[タモリ]는 상대가 후쿠오카 사람일 경우 “후쿠오카의 결혼식에선 항상 술 취한 할배가 나와서 쿠로다 타령을 부른다”는 소재를 말하는 것을 보면 지금도 유명한 듯. [본문으로]
  3.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의 정전기에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파견된 모리 타헤에에게 마사노리가 자꾸 술을 권했다. 타헤에는 행여라도 실수할까봐 계속 거부했지만, 마사노리는 '마시면 뭐든 다 주마'라고 하며 결국에는 '술도 못마시는 쿠로다의 무사' 운운해대며 쿠로다 가문을 굴욕하자 술을 다 마신 뒤 '니혼고우'를 달라고 해서 가져왔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의 가신 카토우 시게노리[加藤 重徳]의 아들.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가 노부나가를 배신한 아라키 무라시게를 설득하러 갔다가 잡혔을 때 죠스이를 극진히 보살폈다고 한다. 그때의 보살핌을 잊지 않은 죠스이는 무라시게가 패해 몰락한 카즈시게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쿠로다 가문[黒田家]의 일문으로 대했다. 후에 쿠로다 가문이 치쿠젠 52만석에 봉해지자 그도 1만 6200여석에 봉해져 그의 후손은 대대로 쿠로다 가문 필두중신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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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gorekun.com BlogIcon 고어핀드 2011.03.14 2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노부나가의 야망>을 할 때 언제나 애용하는 무장이지요. 보통 성격이 완고하면 딱딱하고 매력이 없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데, 이 무장에게 남겨진 이야기들을 읽어 보니 오히려 아주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무장을 더 즐겨 쓸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요.

    +1. 그리고 니혼고우의 사진은 생전 처음 봅니다만... 저 창에 새겨진 것은 금강저라 하여, 부동명왕이 들고 다니며 마귀를 물리칠 때 쓰는 칼입니다. 부동명왕이든 금강저든 칼이나 창에 자주 새겨지는 대상이지요. 어쨌든, 굉장히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15 0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http://hima.que.ne.jp/tendou/tendou_data_d.cgi?equal1=E402 에 따르면 천도에서는 통솔 71에 무력 90이군요. 근데 저같은 경우 예전 시리즈를 할 때 보면 항상 오다 가문으로 하다 보니 모리 타헤에를 얻을 때 즈음(등장도 1571년이니)이면 이미 쩌리가 되더군요.

      과연 고어핀드님!!
      좋은 설명 감사드립니다. ^^
      위키에서 니혼고우에 대해서 찾아보니, 너무 아름다운 창이어서 창 제작의 장인들은 실력이 되면 일생에 한번은 복사에 도전한다고 하는군요.(그런 만큼 복사품도 많다고 하네요.)


 닛코우[日光]에 가면 토우쇼우 궁[東照宮][각주:1]에 있는 돌로 만들어진 오오토리이[大鳥居]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이는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가 저 먼 큐우슈우[九州]에서 거대한 바위를 옮겨와 건조한 것이다.
 
당시로써는 굉장히 힘들었을 듯한 이런 공정을 나가마사는 어떻게 해낼 수 있었을까?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에도[江戸]에서 닛코우로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 돌기둥 하나를 배 한 척에 싣고, 그 배의 양쪽에 굵은 밧줄을 연결한 배 두 척이 끌게 하였다. 육로로 옮겨지자 슈라구루마[修羅車]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나 큰 목재를 옮기는 수레에 싣고 수 마리의 소로 끌게 하였다. 닛코우로 가는 길은 흑토(黑土)라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두꺼운 널빤지를 200여 미터정도 빈틈없이 깔아가며 옮겼다.
 
오오토리이를 조립하는데도 고생하였다. 기둥을 양쪽에 세운 후 상부에 돌을 얹어야 했는데, 나가마사는 근처에 사는 백성들에게서 쌀, 보리, 메밀, 콩을 채운 가마니를 사 모은 뒤 이 가마니를 쌓아 발판으로 삼고 도르래를 장치하여 돌을 끌어 올렸다. 이것만으로도 천 명을 필요로 하는 대공사였다고 한다. 나가마사는 호쾌한 기술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가마사는 덩치가 컸기에 전쟁터의 모습은 괴물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가신(家臣) 시마 사콘[島 左近]은 '일본에서 가장 용맹한 무사'라고 경외 받았는데, 어느 날 갑주를 입고 살기를 풍기는 사콘을 보고 사콘의 부인조차 공포에 떨었다. 그러자 사콘은 "참 겁도 많으시군. 쿠로다 카이노카미[黒田 甲斐守=나가마사]가 갑주 입은 것을 보면 아예 기절하시겠구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쟁터에서의 활약도 매우 열정적이었다.
 
용맹하기로 유명한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는 나가마사의 부친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 때부터 쿠로다 가문의 가신이었는데, 나가마사는 전투에서 언제나 이 마타베에와 치열한 공적다툼을 벌였다. 가신들이 목숨을 아까지 않는 이런 무모한 모습에 간언하자,
"아버지(죠스이)가 안 계시다면 아들 타다유키[忠之]에게 선봉을 맡기고 나는 후방에서 지휘를 하겠지만, 아직 아버지는 건재하시다. 만약 내가 전사하더라도 우리 집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
 라고 말했다 한다.

 부친 죠스이의 교육 방침으로 나가마사와 마타베에는 형제처럼 자랐지만 그것이 역기능으로 작욕하여, 둘은 어렸을 때부터 끝없이 싸웠다.[각주:2] 결정적으로 사이가 틀어진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마타베에는 나가마사가 강 한가운데서 조선 장수[각주:3]와 필사적으로 격투하고 있는 것을 방관만하며 도우려하지 않았던 것이다[각주:4].
  나가마사에게는 마타베에가 하는 짓 하나하나가 맘에 들지 않았다.
  전의관(全義館)에 포진하고 있을 때 호랑이가 마굿간에 침입하여 말을 잡아먹은 사건이 일어났다. 가신 칸 마사토시[菅 政利][각주:5] [각주:6]가 퇴치하고자 달려들었지만 호랑이는 더욱 날뛰었다. 마사토시가 위험에 처하자 마타베에가 달려들어 호랑이의 미간에 두 번 칼질을 퍼부어 겨우 잡았다고 한다. 나가마사는 마타베에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한 부대의 대장이라는 자가 축생과 싸우다니 이 무슨 짓이더냐?"하고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각주:7]

 1606년 결국 나가마사와 마타베에는 헤어진다. 나가마사가 노[能]를 관람하는 자리에서 마타베에의 아들 모토노리[基則]에게 작은 북[小鼓]을 치게 만든 것에 분노[각주:8]하여 마타베에는 1만6천석의 가록(家祿)을 버리고 쿠로다 가문을 떠났다.[각주:9]

 나가마사는 무용일변도인 외견과는 달리 굉장히 뛰어난 정략가(政略家)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죽은 뒤의 혼돈스런 정치정세 속에서 토쿠가와 정권수립을 위해 암약한 것이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토벌군을 일으켜 시모츠케[下野]의 오야마[小山]까지 갔을 때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병 소식이 전해져 왔다. 여기서 토쿠가와 가문의 운명을 나누는 사상 유명한 오야마의 군의[小山の軍議]가 열리게 되었다.

 이에야스를 따라온 다이묘우[大名] 대부분이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의 다이묘우였다. 거기에 미츠나리는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명령에 따라 토쿠가와 타도의 병사를 일으켰다고 하였다.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의 향배가 이에야스의 운명을 쥐고 있었다. 이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존재가 급격히 클로즈업 된다. 히데요시가 손수 키운 맹장(猛將)이며 히데요리에 대한 충성심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그런 사내가 토쿠가와 편에 선다고 표명한다면 다른 장수들도 전부 이에 따를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가마사는 이런 흐름을 민감히 캐치하여 이에야스에게 부탁받기 전에 마사노리의 진소(鎭所)를 방문하였다. 나가마사는 다음과 같이 마사노리를 설득했다고 한다.
  "미츠나리놈은 토요토미 가문을 위해서라고 떠벌리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천하를 쥘 심산이다. 생각해보게나. 어리신 히데요리님에게 거병의 의지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마사노리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무공파 다이묘우[武功派大名]의 대표격인 인물로, 문치파인 미츠나리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나가마사는 마사노리의 그런 증오심을 자극한 것이다. 마사노리는 나가마사의 교묘한 설득에 넘어가 단번에 미츠나리에 대한 적개심을 일으켜 미츠나리와 싸우는 것을 맹세한 것이다.

 다음 날 열린 오야마 군의는 마사노리가 발언한 말에 따라 장수들은 전부 토쿠가와 측에 서게 된 것이다. 이에야스는 나가마사의 행동이 굉장히 기뻤는지 애용하던 투구와 말을 한 마리 주었다. 나중에 나가마사에게 치쿠젠[筑前] 52만 3천석이라는 거대한 영지를 준 것도 이 오야마 군의에서의 공적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각주:10]

 정계의 막후 모사라 할 수 있는 정치력을 가진 나가마사였지만 그의 부친 죠스이의 기량에는 결국 이르지 못했다. 나가마사는 항상, "나는 14살 때부터 여러 번 공적을 세웠지만 사람들은 조금도 칭찬해 주지 않았다.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의 아들]는 천하의 누구나가 그의 무용을 칭송한다. 이는 요시나가의 부친 나가마사에게 특별한 무공(武功)이 없었기 때문에 요시나가의 이름이 빛나는 것이다" 라고 하며 은근히 너무나 위대했던 아비를 갖았다는 것에 한탄하였다고 한다. [각주:11]

 그렇다고 하여도 부친 죠스이의 영향은 커 영지경영에 대한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부친의 방식을 지켰으며, 임종할 때에도 아들 타다유키에게 오로지 죠스이의 노선을 지키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구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1568년생. 요시타카[孝高=죠스이[如水]]의 아들. 1589년 가문을 이어 부젠[豊前]의 6개 군(郡)과 카와치[河内] 탄보쿠 군[丹北郡][각주:12]을 영유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에도 출진하여 김해성(金海城) 공략. 1597년 정유재란에서는 직산(稷山)에서 1만의 명나라 군을 격파[각주:13].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부젠 18만석에서 치쿠젠[筑前] 52만석[각주:14]이 된다. 1623년 8월 4일 죽었다. 56세.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 신사(神社). [본문으로]
  2. 여담으로 쿠로다 죠스이가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를 설득하러 갔다가 잡혀 유폐되었을 때, 마타베에의 백부 2명이 쿠로다 가문을 떠나는데, 마타베에도 함께 쿠로다 가문을 떠나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를 섬긴다. 그러나 나가마사가 마타베에의 기량을 아까워해 다시 불러들였다. 오히려 죠스이는 배신자의 핏줄이기에 가까이 쓰지 말라고 하여, 나가마사는 쿠리야마 시로우에몬[栗山 四郎衛門]의 요리키[与力]로 삼아 100석만 주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이응리(李應(応)理)라고 하는데 누군지 모르겠음. [본문으로]
  4. 당신의 주군이니 구하라고 하는 코니시[小西] 부대 사람의 말에 "내 주군이라면 저 정도로 죽지는 않을 것이오" 라고 고토우 마타베에는 말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나가마사는 간신히 이기고 나왔는데, 마타베에는 태연히 부채질하면서 구경하고 있었기에 벙쪄했다 한다. [본문으로]
  5. 菅은 '스게'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6. 사족으로 이 칸 마사토시는 세키가하라에서 시마 사콘[島 左近]을 부상(혹은 사망)당하게 하는 철포대의 지휘관이었다. [본문으로]
  7. 물론 칸 마사토시도 함께 혼났다. [본문으로]
  8. 모토노리는 원래 작은 북을 잘 쳐 나가마사가 시킨 것이기는 했지만, 무사인 자신이 연극배우[能楽師]의 흥을 위해서 치는 것에 굴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아비인 마타베에에게 일러 일이 발생. [본문으로]
  9. 마타베에의 영지는 오오쿠마 성[大隈城]였는데, 이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興元]의 영지와 인접한 곳이었다. 쿠로다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이는 호소카와 가문이 부젠[豊前]에 오기 전 영주인 쿠로다 가문이 치쿠젠으로 이동하면서 연공(年貢)을 싹슬이 가져가는 바람에 호소카와는 초기 영지경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만큼 쿠로다 나가마사를 미워했다. 나가마사 역시 자꾸 항의하는 호소카와 가문에 화가 나 가신들에게 호소카와 가문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하였다. 호소카와를 감시하고 압박을 주라고 배치한 마타베에가 오히려 호소카와와 친하게 지내자 나가마사가 자주 화를 내었기에 이런 불화가 쿠로다 나가마사와 코토우 마테베에 양측에 쌓인 면도 있다. [본문으로]
  10. 거기에 세키가하라 때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가 배신하도록 암약한 것도 나가마사였다고 한다. 전투가 행해질 때 히데아키가 배신을 하지 않자 초조해진 이에야스는 나가마사에게 사자를 보내 히데아키가 배신을 하는 것이 확실한지 다그칠 정도였다. 즉 히데아키는 나가마사가 담당했다. 여담으로 다그치는 이에야스의 사자에게 나가마사는, “히데아키가 배신할지 어떨지 내가 지금 그걸 어케 알어!! 싸우기 바쁜데 짜증나게 할래?”…라고 했다고 한다. 보고를 들은 이에야스는 짜증이 확 나 왼손 엄지손가락 손톱 물어뜯어 피 철철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그러나 효심은 깊어, 시즈가타케[賤ヶ岳]의 전초전인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 盛政]의 강공 때 사쿠마 군세의 공세에 놀란 죠스이가 죽음을 각오하며 부하 쿠리야마 시로베에[栗山 四郎兵衛]에게 아들을 데리고 도망가라고 하여 쿠리야마는 나가마사에게 아무 것도 알리지 않은채 나가마사와 함께 전장을 벗어났다. 나중에 쿠리야마에게 이동지를 묻다가 사정을 알아챈 나가마사는 “아무리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아들이 아비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다”면서 전장으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덧붙여 이 시즈가타케에서 수급을 얻어 450석을 하사 받음. [본문으로]
  12. 전부는 아니고 쿠로다 나가마사의 시즈가타케 활약 450석 +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 때 후방을 노리던 네고로[根来], 사이카[雑賀]를 격퇴하여 2000석 + 쿠로다 죠스이 가족 재경료 500석. [본문으로]
  13. 직산 전투를 말하는 것인데, 명나라 기병 4000에 쿠로다 5000의 격돌. 몇 차례 접촉은 있었으나 서로 물러났음. [본문으로]
  14. 치쿠젠 전부, 히젠[肥前] 2군(郡), 치쿠고[筑後] 2군을 포함하여 정확히는 52만2천4백여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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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03.08 0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망의 세키가하라 전투 대목을 읽다보면 마쓰다이라 다다요시가 나가마사와 마타베에의 일화와 똑같은 포지션에 놓이는 일이 있었지요. 소하치씨는 뻔뻔한(?) 소설가인 셈이군요.

    그러고보니 다케나카 가문은 시게카도가 번을 세웠나요? 한베에는 구로다 가문의 큰 은인셈이지만 자기 가문엔 마땅한 역할을 하지 못한 셈이 되는건데 말입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08 08: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 어떤 에피소드인가요? 대망은 노부나가 죽은 이후부터는 읽질 않아서요.

      입번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전쟁터에서도 분발하고 나름 큰 공적(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생포)에 자기 영지에서 전투(세키가하라)가 일어났는데도 가증을 못 받은 것을 보면 정치외교력이 부족했던 듯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1.03.08 18: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대망 9권 '늙은 호랑이와 젊은 표범'이란 챕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탈출과 이이 나오마사와 마쓰다이라 다다요시의 추격이 주 소재인데 여기서 다다요시는 혈기를 참지 못하고 섣불리 추격을 하다가 시마즈 무사에게 목숨을 잃게 될 상황에 처하지요.

      이때 (여기선 이에야스의 전령이라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호로무사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오구리 다이로쿠란 도쿠가와 무사가 지나가다가 요코타 진에몬이란 다른 무사가 다다요시를 구해주려는 것을 저지합니다. 다다요시는 가까스로 살아나온 후 눈이 벌개져 다이로쿠와 진에몬을 찾지만 이미 주위에선 사라졌지요.

      세키가하라의 피냄새가 멎을 무렵 이에야스가 군대를 점검할때 다다요시가 오구리 다이로쿠에 대해 따지게 되고, 이에야스의 질문에 다이로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대장의 신분이었으므로 그리하였습니다"

      이에야스는 다다요시에게 자상한 훈계를 하면서 훈훈한 엔딩을 맞습니다.

      볼때마다 매우 흡사한 에피소드라고 생각됩니다만 학식이 짧은터라 다른 분들에겐 아니라고 느껴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케나카 시게카도가 글솜씨가 뛰어났던 것으로 아는데 애석히도 그쪽의 재주는 없군요. 그러고보면 미노계 인물들 중 마지막까지 웃은 사람은 별로 없다는게 또 역사의 아이러니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3.09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도련님께서 직접 싸우신다는 것이 우선 에러군요(^^)

      아마 찾으면 좀 있을 것 같지만...
      (당장 떠오르는 것은 모리 란마루 집안의 모리 가[森家]군요. 미마사카 18만석으로 입번하지만 중간에 후계없어서 폐번크리.

      뭐 그래도 미노 계열 중 가장 출세한 사람이라면 이번 년도 NHK대하드라마 고우[江]의 라이벌이 되는 카스가노츠보네[春日局] 인 듯하군요(태어난 곳은 탄바[丹波]라고 합니다만..)

  2. ckyup 2011.03.09 05: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친구에대한 평가는 그렇게 좋치도 나쁘지도 않은것 같던데요, 마사노리나 기요마사와 더불어 전국말기에 흥미를 더해주는 무장임에는 분명한것 같습니다 - 왠지 전투에 데리고 나가서 본진 앞에두면 든든할것 같은....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둘째 딸 토쿠히메[督姫=토미코[富子]]와 결혼하였다. 둘 다 재혼이었다. 테루마사의 첫 번째 부인은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전사한 셋츠[摂津] 이바라키 성[茨城城] 성주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清秀]의 딸이었다.

 토쿠히메의 전 남편은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우지나오[北条 氏直]였으나,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후 몰락하여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 돌아와 있었다. 결혼은 히데요시[秀吉]가 선 중매였지만, 이에야스의 사위라는 조건이 테루마사의 출세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전쟁터에서 공명을 다툰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가 이렇게 빈정댄 적이 있었다.
 “산사에몬[산사에몬[三左衛門=테루마사]이 지금은 거대한 영지의 영주로 출세했지만 그건 오로지 그의 ‘거시기’ 덕분이다. 창 한 자루로 이렇게 출세한 나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지”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테루마사는,
 “확실히 나는 ‘거시기’로 이렇게 출세했지. 만약 창까지 사용했다면 천하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창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야”
 하고 웃으며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인이 이에야스의 딸이라는 이유로 굉장히 신경 썼었던 듯 하다.
 토쿠히메를 따라서 이케다 가문[池田家]에 온 늙은 시녀[老女]가 어느 날 테루마사 부부 앞에서,
 “우리 가문이 이렇게 번영한 것도 토쿠히메 님 덕분이옵죠”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테루마사는 얼굴색을 확 바꾸며,
 “내가 공적을 세웠기에 부인도 우리 가문에 시집온 것이며 영지도 더 하사 받은 것이다.”
 고 말하며 평소와는 달리 엄하게 질책했다고 한다.
 이는 테루마사가 연극한 것이다. 그 후 은밀히 그 늙은 시녀를 불러서는,
 “사실 말하자면 우리 가문의 영달은 자네 말마따나 토쿠히메 덕분이지. 그러나 그걸 대놓고 말하면 부인이 기어오를지도 몰라. 앞으로도 부인 앞에서는 그러한 말은 자제해 주기 바라네”
 하고 부탁했다고 한다.

 테루마사는 키가 작았다. 하지만 그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 날 제후가 열석한 주연(酒宴)에서 테루마사는 왜소한 키에 대해서 비웃음 당한 적이 있다. 그러자 테루마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럼 내 왜무(矮舞)라고 새로 만든 춤과 노래가 있으니 한번 들어보시오”
 라고 말하며 일어서 박수를 치며,
 “하리마[播磨], 비젠[備前], 아와지[淡路][각주:1]라는 세 지역[国]의 주인이기에 키 따위 바라지도 않으니…”
 하고 부채를 펼치고, 몸과 손으로 춤을 추었다고 한다.

 테루마사는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둘째 아들로 키요스 성[清洲城]에 있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저택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부친 츠네오키의 전력(戰歷)은 혁혁한 것이었다.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세운 공적으로 한 부대의 부대장[侍大将]가 되었고, 계속해서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정벌[朝倉征伐], 오우미[近江]의 오다니 성[小谷城] 공략,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등에 출진하였다.

 테루마사의 데뷔전은 1580년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공략이었다. 16세인 테루마사는 부친이나 형과 함께 셋츠 하나쿠마 성[花隈城]을 공성하였는데 이케다 부자(父子)의 활약은 눈부셔, 공략이 끝난 후 노부나가는 츠네오키에게 아라키 무라시게의 영지를[각주:2], 장남 모토스케[元助]에게 이타미 성[伊丹城], 테루마사에게는 아마가사키 성[尼崎城][각주:3]을 하사하였다. 노부나가가 츠네오키에게 내린 표창장에서 테루마사에 대해 언급하길,

나이 16살에 불과하면서도 적진에 돌격하여 큰 무용을 자랑하니, 이는 정말 이케다 키이노카미[池田 紀伊守=츠네오키] 자네의 아들 답네. 내가 눈 여겨본 것이 틀리지 않아 기쁘며, 세운 공적 또한 비할 대 없도다
 고까지 말하며 격찬하였다.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자 이케다 부자는 히데요시 편에 서지만, 부친과 형은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와 싸운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전사하였다. 히데요시는 특별히 테루마사의 조모 요우토쿠인[養徳院][각주:4]에게 편지를 보내어, 츠네오키와 모토스케의 죽음을 위로하며 남겨진 테루마사를 포함한 아들들을 잘 돌보겠다고 약속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테루마사는 이에야스의 사위로 토쿠가와 진영에 접근하였고 곧바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테루마사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격렬한 공적 다툼을 벌인다. 이해의 7월 아이즈 정벌[会津征伐][각주:5]에 나섰던 이에야스는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거병소식을 듣고 급거 철군하여 서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때 선봉에 선택된 것이 테루마사와 마사노리였다.

 우선 목표로 한 것은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노부나가의 손자]가 지키는 기후 성[岐阜城]이었다. 주공의 대장은 마사노리, 조공은 테루마사로 정해졌다.
 8월24일. 전투가 시작되어 기소가와 강[木曽川]을 도하한 테루마사 휘하 7천의 병사는 성 밖 엔마 당[閻魔堂]에 포진한 오다의 군세를 습격하여 수급 700을 취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주공인 후쿠시마의 군세는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다. 테루마사의 공적이 한발 앞서나가자 마사노리는 화가 났다. 왜냐면 공격은 동시에 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마사노리의 분노를 느낀 다른 장수들이 테루마사를 설득하여 다음 날 공성전에서는 마사노리가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자 테루마사는 그 약속을 어기고 앞서나가려 한 것이다. 마사노리는 열화와 같이 화내며 결국 테루마사가 나아가려는 길에 불을 질러 진로를 막았다. 이 양자의 공적 다툼은 낙성된 뒤에도 이어져 어느 쪽이 먼저 성에 진입하였는가에 대해서 서로 자기네가 먼저라고 말하며 물러서지 않아, 마사노리는 테루마사를 죽인다고 까지 말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당신은 이에야스의 사위잖소’라며 독전관[軍監]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의 말에 테루마사는 깨끗이 공을 마사노리에게 양보했다고도 하며, 양자가 동시에 성을 함락시키는 것으로 했다는 말도 있다.[각주:6]

 테루마사는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戦い]에서는 그다지 공을 세우지 못했지만, 이 기후 성 공성에서 세운 공적으로 미카와[三河] 요시다[吉田] 15만2천석에서 하리마[播磨] 히메지[姫路] 52만석이라는 대봉(大封)을 하사 받아, 이곳에 후세까지 명성이 자자한 히메지 성[姫路城] 축성을 개시하였다.
히메지 성은 모우리[毛利], 시마즈[島津] 등 서국(西国]의 토자마다이묘우[外様大名] 감시와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위압하기 위해 무엇보다 웅대하게 만들어졌다.

재능있는 낭인(浪人)을 고용하여 자가(自家)의 강군(强軍)을 꾀했지만 그로 인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각주:7] 유명한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를 고용하여 그의 옛 주가인 쿠로다 가문[黒田家]은 물론 막부(幕府)에서도 클레임이 왔지만 테루마사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그를 지켜주었다고 한다.

[이케다 데루마사(池田 輝政)]
1565년 생. 1584년 미노[美濃] 오오가키 성[大垣城] 성주[각주:8]. 1590년 미카와[三河] 요시다[吉田] 15만2천석으로 옮겼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메지[姫路]를 하사받았다. 1613년 1월 27일 죽었다. 49세.

  1. 이상 테루마사의 영지. [본문으로]
  2. 거성은 아리오카 성[有岡城]. [본문으로]
  3. 그냥 표창장[感状]만 받았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4. 노부나가의 유모(乳母). 고귀한 집안은 젖물리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아기 때의 노부나가는 다른 유모의 젖꼭지를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지만 테루마사의 조모인 요우토쿠인[養徳院]의 젖꼭지는 물어 뜯는 일 없이 얌전히 먹었다고 한다. 요우토쿠인은 후에 노부나가의 부친 노부히데[信秀]의 측실이 된다. [본문으로]
  5.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하자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 사건. [본문으로]
  6. 테루마사는 5년간 기후 성[岐阜城]의 성주였다. 때문에 마사노리 보다는 성 공격이 수월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7. 대신 그만큼 절약하여 부인 토쿠히메[督姫]가 놀이개를 갖는 것도 금지했으며, 아이들에게도 장난감을 사주지 않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1585년엔 기후 성[岐阜城] 성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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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동희 2010.11.23 1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친구도 참 난세를 거쳐 예상치 못한 출세를 한 대표적인 인물이죠
    이에야쓰의 사위가 되서 출세를 한 것도 행운이었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 아버지와 형이 횡사를 한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히데요시 입장에서 이께다 부자가 괜히 오까자끼 공격하겠다고 나서서 사실 손해만 본 싸움이었는데
    그래도 그 아들을 잘 돌봐 줬으니 히데요시에 대한 의리도 큰데 말이죠
    아무튼 눈치 빠르게 이에야쓰에게 붙어서 영화를 누렸으니
    역시 센코쿠 지다이의 공명은 눈치싸움이 아니었는지...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1.23 12: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정동희님.

      개인적으로는 운만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테루마사의 부친 츠네오키는 노부나가 유모의 아들입니다. 당시 그리고 에도 시대 때를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유모의 혈통들은 막부의 중추가 되어 활약하더군요. 만약 노부나가가 살았다면 테루마사 역시 오다 정권의 중추에서 활약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아...이것도 운이라면 운이군요. ^^;)

      혈통문제를 하나 더 언급하자면 테루마사의 여동생(누나??)은 칸파쿠 히데츠구[秀次]의 정실이었습니다. 히데요시 정권이 이어졌더라도 테루마사는 순풍만파한 인생을 보냈을 것 같습니다.

      또한 테루마사 역시 범용한 무장은 아니던 것 같습니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했다는 말 중에 이런 것이 있던데, "주군에게 받은 녹은 인재를 모으는 데 써야 한다". 노부나가 역시 자기 부하들에게 축재를 하지 말고, 영지를 주면 거기서 나는 이익으로 인재를 모으는데 쓰라고 하지요(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를 쫓아낼 때도 그런 말을 합지요).

      테루마사도 그런 말을 하였는데,
      "내 스스로 다 할 순 없으니까 인재를 모아야 한다"
      라고 하며 50만석 이상의 다이묘우가 2~3만석 정도의 다이묘우와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하며, 자기 부하 중에 그렇게 실천하는 자들을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 합니다.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의 정벌전 때 세운 공 역시 상당했던 것을 보면 나름 능력은 있었다 생각합니다.

      테루마사는 이에야스의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役]이 일어나기 2년전에 죽었는데, 토요토미 가문과 나름 인연이 깊었던 인물 들(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이 동시기에 죽었기에 에도 막부에 의한 암살설도 있습죠.

      센고쿠 뿐만 아니라 지금도 눈치(=시세를 읽는 능력)는 중요한 재능이라 생각합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10.11.23 2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전에 코마키-나가쿠테 전장터 표끊어서 갔을때 근처에 아버님 츠네오키 무덤도 있었던 듯 한데 이게 또 기억이 잘 안나는군요(...) 이래저래 능력있던 무장인듯은 싶습니다...

    정작 혁신에서는 그 간지 일러스트에 비해 능력이 그 마사노리보다 놀랄만큼 구려서 세키가하라 사나다로 플레이시에는 잡자마자 냉큼 +9 명검이 아까워서 참수시켰던 기억이라 이래저래 안습이(....)

    요즘엔 센고쿠 관련 게임만 하다보니 정작 역사쪽으론 등한시 하는 경향이 생겼는데(OTL...)발해지랑님 포스팅덕에 이래저래 많이 배우고 갑니다.

    //

    그 암살설에 관해서는 소녀 닌자 아즈미...라는 괴 영화에서 잘 다루고 있더군요(OTL....)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1.24 1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름 무패의 장수입죠. ^^(싸운 횟수가 그만큼 적지만요)

      확실히 신장의 야망에선 뭐 하나 특출날 것 없는 평범 그 자체같더군요.

      그쵸. 아즈미가 싹 다 죽이더군요. 오히려 너무 쉽게 죽이는 거 같아서 개인적으로 어처구니 없더군요(뭐 만화에 많은 것을 바랄 순 없습니다만)

  3. 맹꽁이서당 2010.11.28 15: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래 주군이었던 오다 가문보다 결과적으로 더욱 부흥했군요.
    도쿠가와 가문을 원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텐데, 오히려 사위가 되고 거대한 영지까지 받았으니.. 묘하네요. ^^

    간만에 인사드립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전 초가을에 이스탄불과 파리에 잠시 다녀왔답니다. ㅎㅎ
    http://belldandy314.blog.me/50100327508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1.29 1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죠. 오다의 핏줄들이야 전부 1만석 쩌리들이었는데 이케다 핏줄은 10개 가까운 다이묘우에 전 영지를 따지면 100만석 가까웠다고 하니까요.

      여담으로 이케다 테루마사가 이에야스의 딸과 결혼할 때, 이에야스에게 부탁하여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테루마사의 아비 츠네오키[恒興]를 죽인 나가이 나오카츠[永井 直勝]를 불러 아비가 전사할 때의 모습을 듣고 난 뒤,
      "자네는 영지가 얼마나 되나?"라고 묻자 나가이 왈,
      "5000석입니다"
      는 말을 듣고,
      "아버지의 목이 5000석밖에 안 되는구나"
      라고 하여 이에야스는 즉좌에서 나가이의 영지를 1만석으로 가증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
      .
      .
      ...만 실제로는 나가이 나오카츠가 1만석을 얻게 되는 것은 결혼식(1594)이 있는 후 몇년 뒤 세키가하라가 끝난 뒤인 1601년에 1만석이 되었다고 하니 그냥 일화일 뿐인 듯 합니다.

      ==================================================

      유럽여행기 잘 보았습니다. ^^
      엄청나게 풍부한 사진을 찍어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b

      양이 엄청난 만큼 오늘은 3일차까지만 보았습니다.

      이스탄불은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물가와 비슷한 듯 합니다.

      이교의 건물들을 그냥 놔두는 데에서 그들의 관용(??)을 느낄 수 있더군요.

      냥이 사진도 있어 기뻤습니다. ^^

      대항해시대에 관련된 것은 놓치지 않고 언급하시는데에서 맹꽁이서당님이 얼마나 대항해시대를 좋아하셨는지 알 수 있는 것 같아 나름 동질감을 느껴 기쁩니다. ^^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를 말하는데 있어 그의 부인인 호소카와 가라샤[細川 ガラシャ]를 빼놓을 수 없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셋째 딸로 이름은 타마[玉], 절세의 미녀였다. 타다오키는 이 가라샤에 관계된 일이라면 질투심이 특히 심했다고 한다.
 어느 날.
 정원사가 일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지나가던 가라샤에게 계절이 어떠네 날씨가 어떠네하며 인사를 했다고 한다. 단지 그랬을 뿐이었는데도 타다오키는 이 정원사를 직접 칼을 뽑아 죽였다.

 부친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에게 물려받은 재능으로 각종 예도[藝道]에도 뛰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아트 디자이너적인 재능이 풍부하였던 듯 자기 부인의 옷도 스스로 옷감을 고르고, 색이나 모양까지 디자인했다고 한다. 갑주(甲胄)나 갑옷에 걸쳐 입는 동의(胴衣), 큰칼[太刀]의 디자인 등도 직접 고안하였고, 다른 다이묘우[大名]에게서도 의뢰 받아 투구 등을 만들었다.
 어느 날 의뢰 받아 제작한 투구의 뿔을 진짜 물소의 뿔이 아닌 가벼운 오동나무로 만든 적이 있었다. 의뢰한 다이묘우가 완성품을 보고 이래서는 부러지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자, 타다오키는 “투구의 뿔이 부러질 정도로 활약하는 것이야말로 무사의 본분일 것이오”라고 화를 내며 말했다고 한다.

 질투 심한 격정(激情)인 성격이 플러스로 작용하여 전쟁터에서는 용감한 활약을 하였다.
 1577년 10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장남 노부타다[信忠]를 따라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의 속성 카타오카 성[片岡城]을 공격했을 때의 일이다. 15세에 선두에 서서 분전하여 수급을 베었지만, 이때 돌에 머리를 맞아 상처가 나 늙어서도 그 상처자국이 지워지질 않았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는 노부나가에게서 자필 표창장[感状][각주:1] 를 받았다.[각주:2]

 앞서 이야기한 것보다 전인 같은 해 3월의 사이가 정벌[雑賀征伐] 때는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다. 혈기에 날뛰어 명성이 자자하던 사이가의 철포대에게 돌격하려 한 것이다. 적들이 총을 쏘고 난 간격에 맞추어 돌진하려다 부하가 막은 덕분에 탄환의 먹이가 되는 것을 피했다. 이때의 경험이 머리에 새겨졌는지 노년(老年)에 들어서도 자주 입에 담았다고 한다.

 

[호소카와 구요]

그런 용맹한 활약들이 노부나가를 흡족하게 하여 노부나가는 타다오키를 시동[小姓]으로 삼았다. 유명한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의 문장(家紋)이 구여(九曜)로 정해진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노부나가의 칼을 받들고 있던 타다오키가 그 칼의 칼자루에 새겨져 있던
구요의 장식에 반하여 곧바로 이를 자신이 입는 옷에 새겨 입자 이를 본 노부나가가 “멋진 문양이구나”고 칭찬한 것이 호소카와 가문의 문장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부친 유우사이[幽斎]까지 호소카와 가문의 문장은 오동나무[桐] 혹은 ‘원 안에 두 줄[二つ引両]'였지만 타다오키의 대가 되어 구요의 문장으로 바뀌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아케치 미츠히데의 딸 타마(후의 가라샤)와 결혼한 것은 1578년의 일로 타다오키 16세였다.
 그러나 이 결혼이 1582년 호소카와 가문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위기를 가져다 주게 된다. 이해의 6월 부인 가라샤의 부친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우 사[本能寺]에 머물던 주군 노부나가를 죽이고, 호소카와 부자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야말로 호소카와 가문은 운명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타다오키의 부친 유우사이는 노부나가를 죽인 미츠히데의 천하가 결코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여, 그때까지 친구였던 미츠히데의 권유를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아들인 타다오키와 함께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에 대한 조의를 표하였다[각주:3].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아케치 토벌전인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가 시작되자, 이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미츠히데의 영지인 탄바[丹波]에 침공, 성 2개를 공략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더구나 미츠히데의 딸인 가라샤를 탄고[丹後]의 미토노[味土野]의 산속에 유폐하여 미츠히데와 연을 끊었다는 것을 세상에 구체적으로 알린 것이다. 이렇게 노력한 것이 효과를 보아 호소카와 부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에게서 탄고 영유를 그대로 인정받는 서장을 얻었고 가라샤 부인의 유폐도 풀리게 되었다[각주:4].

 그 후 타다오키는 히데요시의 천하평정 전쟁에 참가하여 유우사이와 함께 히데요시 정권하에서 확고한 지위를 쌓아가지만 1595년에 큰 재난에 휩싸이게 된다. 관백(関白)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의 실각사건이 그것이다.
 히데츠구는 잔혹한 행동 때문에 할복을 명령 받고 그의 처첩, 가신들까지 살해당하거나 추방당하였는데, 그 중에 타다오키의 인척이 있었다. 타지마[但馬] 이즈시[出石]의 영주 마에노 나가야스[前野 長康]의 아들 나가시게[長重]의 부인이 타다오키의 장녀였던 것이다. 더구나 운 나쁘게도 타다오키는 히데츠구에게서 황금 100매를 빌리고 있었다. [각주:5] 그러한 일로 타다오키 역시 히데츠구의 일당이 아닌가 하는 혐의가 받게 된 것이다.

 타다오키는 곧바로 근신을 명령 받았다. 히데요시 측근의 말에 따르면, 오봉행(五奉行)[각주:6]의 의향은 타다오키를 할복시키려는 의향이라고 하였다.
 타다오키는 분노했다. 이는 평소부터 사이가 나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참언(讒言)에 의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호락호락 누명을 쓰고 죽을 바에는 미츠나리를 죽이고 후시미[伏見][각주:7]에 불을 질러 화려하게 끝을 장식하겠다”
 고까지 생각하였다. 아예 처자식을 죽이고 자신의 저택에 불을 지르려고 여러 준비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러는 한편 열심히 변명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히데요시는 딸을 인질로 바칠 것, 히데츠구에게 빌린 황금 100매를 반납할 것을 조건으로 타다오키의 결백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라 타다츠구에게는 당장 황금 100매라는 거금이 없었다. 온갖 방법을 쓴 끝에 겨우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빌려 반납할 수 있었다. 이때의 은의(恩義)로 인해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와 친교를 맺기 시작하여 히데요시가 죽은 뒤 혼란스런 정세 속에서 차츰 토쿠가와 측이라는 자세를 확실히 나타내게 된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생전에 정한 법도를 계속해서 어겨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이시다 미츠나리 등 사대로(四大老), 오봉행(五奉行)들과 험악한 대립관계에 들어갔다.
 타다오키는 마에다 가문[前田家]과 인척관계였다. 적자 타다타카[忠隆]의 부인이 토시이에의 딸이었던 것이다.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에 대한 은의와 토시이에와의 인척관계 사이에 끼어 괴로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타다오키와 친한 토시이에의 장남 토시나가[利長]가 타다오키에게 놀랄만한 정보를 가져온 것이다.
 이시다 미츠나리의 이에야스 암살계획이었다. 타다오키는 기겁했다. 그것은 마에다 가문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시나가를 설득하여 함께 토시이에를 만나 이에야스와의 화해를 권고하자, 토시이에는 오히려 바닥을 내려치고 격노하면서 이에야스의 약속위반을 하나하나씩 거론하였다. “이래서는 히데요리[秀頼]공에게 해가 될 뿐.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에야스를 죽이고 말겠다!”고 외쳤다.
 타다오키는 필사적으로 설득하여 겨우 토시이에가 재고하게 만드는데 성공하였고, 토시이에는 타다오키에게 이에야스와 화해하는데 중개를 맡아달라고 하였다. 그 후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이에야스도 깜짝 놀라며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하며 감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타다오키의 노력으로 인하여 양자는 화해하게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토시이에가 죽자 타다오키를 포함한 무공파 장수들이 이시다 미츠나리 습격을 계획하여 미츠나리는 자신을 구해준 이에야스에게 은퇴 당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가 하면 이번엔 타다오키가 새빨간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마에다 토시나가와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가 공모하여 이에야스의 암살계획을 세웠고, 타다오키도 토시나가와 인척관계인 만큼 여기에 참가했다는 이야기였다.
 놀란 호소카와 가문에서는 곧바로 부친 유우사이와 타다오키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겠다는 맹약서를 이에야스에게 제출하였고, 이에야스의 요구대로 마에다 가문과의 인척관계를 끊고 에도[江戸]에 셋째 아들인 타다토시[忠利]를 인질로 보냈다[각주:8]. 즉 호소카와 가문은 이걸로 완전히 이에야스에게 복종을 맹세한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타다오키는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 정벌[会津征伐][각주:9]에 참가하는데, 그가 출진한 사이 오오사카[大坂]의 저택에서 가라샤 부인이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시다 미츠나리 등은 거병하자 오오사카에 있던 동군(東軍) 무장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잡아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가라샤 부인은 용감히 이를 거부하고 가노(家老)에게 자신을 찌르게 하여 마지막을 장식하고 화약에 불을 붙여 저택을 폭발시키게 만들었다. 기독교도였던 가라샤 부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했기에 그러한 수단을 취한 것이다.

 타다오키는 부친 유우사이에 뒤지지 않는 굴지의 다인(茶人)으로 또한 그런 방면의 서적을 많이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1563년 나가오카 후지타카[長岡 藤孝=유우사이[幽斎]]의 아들로 태어났다. 통칭 요우이치로우[与一郎]. 호는 산사이[三斎]. 탄고[丹後] 미야즈[宮津] 성주. 임진왜란 때는 2년 동안 재진하였고, 진주성(晋州城) 공격에도 참가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부젠[豊前] 코쿠라[小倉]에 봉해졌다. 1632년 아들 타다토시[忠利] 때 히고[肥後] 55만석으로 전봉되었다. 센노리큐우[千 利休]에게 사사 받아 리큐우 칠철[利休七哲][각주:10]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1645년 12월 2일 죽었다. 83세.

  1.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서는 노부나가의 거의 유일한 자필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특별한 일이었는지 전해준 호리 히데마사[堀 秀政]도 ‘이 표창장은 노부나가님이 직접 쓰신 거임’이라고 첨부한 편지에 쓸 정도였다. [본문으로]
  2. 표창장을 받은 이유는, 타다오키가 그의 동생 호소카와 오키모토[細川 興元]와 함께 카타오카 성을 가장 먼저 침입해 들어갔다[一番乗り]. [본문으로]
  3. 타다오키의 경우 노부나가에 심취해 있었던 듯, 죽을 때까지 매달(!) 노부나가의 제삿날을 잊지 않고 챙겼다 한다. [본문으로]
  4. 그러나 그녀는 이때 받은 타다오키에 대한 불신감으로 인하여, 기독교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당시에는 이렇게 돈을 빌려주는 행위가 빌린 사람을 자기 부하로 만들거나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한다.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秀長]도 다른 다이묘우들에게 돈을 마구 빌려주어 형인 히데요시를 화나게 한 적도 있다 한다. 즉 현대의 감각처럼 단지 돈을 빌려주고 빌렸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다. 타다오키가 히데츠구와 주종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6.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를 지칭. [본문으로]
  7. 히데요시가 쥬라쿠다이[聚楽第]를 히데츠구에게 물려주고 은거해 있던 곳. [본문으로]
  8. 타다토시는 인질로 에도[江戸]에 가서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은 덕분에 후에 폐적된 첫째 형과 둘째 형을 제치고 타다오키의 세자가 된다. [본문으로]
  9.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상경하라고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복하고 그렇게 꼬우면 현피뜨자는 편지까지 받자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정벌하려 감. [본문으로]
  10. 리큐우 휘하의 뛰어난 제자 일곱 명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 利貞]를 이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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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동희 2010.10.07 1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사에서 이래 저래 요리 조리 잘 빠져 나가서 성공한 인물 중 하나죠
    다다오끼는 전공도 많이 세우고, 큰 영지로 얻고, 오래 살기도 하고 재주도 많고
    암튼 여러가지로 다재 다능 했던 인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다다오끼의 성공은 대부분 그 아버지(후지타카)의 은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다다오끼야 말년에 뭐 지가 전국의 난세을 헤쳐 나온 불세출의 인물이라고 생각 했겠지만
    그래도 쇼군 업고 이찌노다니에서 빠져나와 노부나가를 의지하게 한 후지타카에 비할까 싶습니다
    이른바 양조택목(良鳥擇木)이 전국시대에서는 제 일의 덕목이라 생각하는데
    후지타카가 그걸 참 잘 했죠(그닥 비굴하지 않게)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7 12: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정동희님. ^^

      제가 가진 이미지도 비슷합니다.

      다만 세키가하라 즈음부터는 타다오키의 의견이 아비의 그것보다 더 중했던 듯 싶습니다.

      확실히 타다오키가 아비만 못한 듯 합니다만, 이런 무장의 일화를 소개하는 책들에 부자(父子) 이대가 한 꺼번에 실린 것을 보면 타다오키도 부친의 그늘에 가려지기만 할 정도는 아닌 듯 합니다.

      참 타다오키에 관해서 이 글도 함 보시길.

      http://blog.naver.com/nagoomo/140056207097

      타다오키의 성격을 잘 나타낸 것 같더군요.

  2. 정동희 2010.10.07 1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가 히데쓰꾸 실각에 얽혀서 그렇게 고생한 줄은 저도 처음 알았네요
    이에야스 암살 건은 이에야쓰가 충성 맹세 하라고 얽은 느낌이 드는군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7 1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땐 그렇게 돈을 빌려 준 뒤 고리로 매달 이자를 받았다고 하더군요(예나 지금이나 돈으로 묶이면 아무래도 따를 수 밖에 없는지라). 히데츠구 실각에는 그런 고리대금에 관한 문제도 있었던 듯 합니다.

      아사노 나가마사와 토시나가, 타다츠구는 말씀하신대로 이에야스의 책략이었던 것 같습니다. 목표는 마에다 토시이에가 죽었다곤 해도 여전히 No.2였던 마에다 가문으로 흔들기 위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 정동희 2010.10.08 0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사노나 마에다는 도요토미에 정말 큰 은혜를 입은
      가문인데요...
      그럼에도 그렇게 쉽게 이에야쓰에게 무릎을 꿇었으니
      솔직히 나머지 도요토미계 다이묘들이 이에야쓰에게 붙은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었나 싶네요
      결국 미쓰나리만 동분서주...
      요시쓰구는 친구 따라 저승 갔고
      모리, 우에스키는 나름 야심을 품다 망했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8 1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서 '대세'란 무서운 것 같습니다. 한번 휩쓸리면 다시 되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까요.

  3. 정동희 2010.10.07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다나베성 건은 저도 전에 읽어 봤는데요
    그걸 읽으면서도 역시 다다오끼는 좀 과격하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뭐 조선 가서 고생도 하고 나름 집안의 우두머리가 되긴 했지만
    여러가지로 후지타카의 노련함에는 못 미치는 인물이 아닌가...
    그래도 뭐 결국 이에야쓰한테 고개 숙이고 잘 살았으니 성공한 인생이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7 13: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담으로...

      헤우게모노[へうげもの]라는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가 주인공인 만화에서 타다오키는 후지타카의 1/10에도 못 미치는 인물로 그려지더군요. 뜬금없는 짓을 벌이다 아비에게 뒷목을 맞고 기절하여 끌려가는 역으로 나옵죠. ^^
      (참고로 후지타카는 그의 후손인 전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 護煕]의 얼굴로 그려져 있습죠)

    • 정동희 2010.10.08 0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호소카와 가문이 막말까지 아주 잘 살았죠
      사실 호소카와번은 무로마치 시대의 간레이 호소카와 하고는 상당히 먼~~~ 호소카와인데... 어쨌든 전국난세를 거쳐 명문 호소카와의 대표 주자가 됐으니 참...
      호소카와 총리가 기자 출신인데 특종을 그렇게 잘 잡았답니다 이유인 즉슨... 당시 경시총감인가 암튼 경찰 고위직이 호소카와 가문의 하급 무사 집안이었다네요
      (새 모이 주는 무사...)
      암튼 그래서 옛 주군가를 섬기는 마음으로 모리히로에게 특종을 많이 줬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8 1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모리히로 총리의 기자시절 에피소드는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

      요즘 한국에 그런 일이 있었음..
      '막부가 없어졌는데도 아직도 주종 운운하는 더러운 세상~'....했을지도.

  4. jane 2010.10.08 0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다오키 저 친구 그래도 전 그다지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 다재다능하고 성격도 불 같고 의외로 순정-_-파고...

  5. Gyuiphi IV 2010.10.08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센덕후 열이 좀 식은 지금에 와서 다시 보자면 공과를 떠나서 이사람 성격 자체는 센고쿠에서나 먹힐만한 성격이지 지금 생각하면 막장에 다름아니다 싶긴 하더군요.

    뭐 교양인에 용맹했고 대세를 파악하는 눈도 뛰어났던건 재능이긴 합니다만 그 외의 부분에서(-_-..;;)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8 12: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시대가 다르다 보니.. ^^

      사족으로 시이나 타카시[椎名 高志]의 만화 "미스터 지팡구"에서 노부나가는 어느 상인을 베어 죽인 후 히데요시에게,
      "지금은 봉건시대고 나는 전제군주다. 틀렸음 '아~ 미안'하면 될 일이야"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뜻이었을 듯)

      뭐 비슷한 일들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랫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지금과 비교하면 막장이지만 당시는 그것이 당연시 되던 시대였으니까요.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의 부하들은 수틀리면 칼 뽑아 칼질하는 나오마사[별명:人斬り兵部!!] 때문에 출사하기 전에 조상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설 정도였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니...비단 타다오키만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센고쿠 시대[戦国時代]는 좋은 주군을 찾아 여러 가문에 발길을 남기는 것이 일상다반사였기에, ‘7번 주군을 바꾸지 않으면 제대로 된 무사라고 할 수 없다’고 일컬어졌을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 전형적인 인물이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였다. 타카토라는 7번 주군을 바꾸었다.

 처음 오우미[近江] 아자이 가문[浅井家]을 섬긴 타카토라는 이때 아직 13살의 소년이었다. 그 당시 일화로 도망자를 처치한 이야기가 있다. 죄를 짓고 도주하다 어느 집에 숨어 들어가 저항하는 죄인을 처치하였는데, 이때 행한 타카토라의 모습에서 그의 인생 전반에 걸친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부친과 형이 집 안에 들어가 죄인과 싸우자, 죄인은 틈을 엿보다 집 밖으로 도망쳤다. 타카토라는 문 근처 그늘에 숨어있다가 도망에 성공했다고 방심한 죄인을 불현듯이 덮쳐 처치하였다고 한다. 즉 정공법보다도 오히려 물밑 정치교섭에 뛰어난 타카토라의 특색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타카토라는 아자이 가문이 아네가와[姉川]에서 오다[織田]-토쿠가와[徳川] 연합군에게 패하여 위세가 낮아지자, 17살에 낭인이 되어 같은 오우미의 아츠지 아와지노카미[阿閉 淡路守]를 섬겼고[각주:1], 그 다음으로 이소노 탄고노카미[磯野 丹後守]를 섬긴다. 둘 다 한 달 어쩌면 수개월 만에 각 가문에 한계를 느껴 오다 노부즈미[織田 信澄]의 가신이 되었지만[각주:2] 노부즈미도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때 누명을 쓰고 살해당했다. 노부즈미의 부인이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딸이었기에 미츠히데 일당으로 오해 받아 살해당한 것이다[각주:3].

 다음으로 히데요시[秀吉]의 동생 하시바 히데나가[羽柴 秀長]를 섬기면서 2만석까지 출세. 그제서야 안정을 찾나 싶었더니 그 히데나가도 1591년에 죽었고, 다음으로 히데나가의 양자인 히데야스[秀保]를 섬기지만 히데야스 역시 몇 년 뒤 죽자, 아무리 타카토라라도 한때는 세상을 버리고 코우야 산[高野山]에 은거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히데요시의 소환에 응하여 하산하여 이요[伊予] 7만석에 봉해졌다. 이렇게 타카토라는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 히데요시 휘하에 속하게 된 것인데, 그러는 동안 눈에 뛸만한 무용담이 거의 없다. 타카토라는 창놀림보다는 원활한 인간관계를 추구함으로써 세상을 헤쳐나간 것이다.

 훗날의 일로 그가 부하를 얼마나 능숙히 썼는가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신 중에 유녀(遊女)에 빠진 자와 도박에 미친 자가 있어 둘 다 재산을 모두 잃고 말았다. 타카토라는 유녀에 빠진 자를 좆병진이라며 영구추방하였지만, 도박에 미친 자에게는 100일간 근신과 급료 감봉에 그쳤다. 이 둘에 대한 처분에 차이가 생긴 것은 이러했다. 유녀에 빠져 무기까지 파는 놈은 앞길이 암담하지만, 도박에 미친 자는 남에게 이기려는 호승심이 있기에 무사로서는 아직 쓸만한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각주:4]

 또한 사표를 내고 떠나는 가신에게 타카토라는 그 무사를 초대하여 직접 차를 대접하고 차고 있던 칼을 주면서,
“새로 취직하는 곳에서 맘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다시 돌아오게나”
라는 말을 항상 하였기에 일단 토우도우 가문[藤堂家]을 떠났더라도 다시 돌아와 예전 봉록을 그대로 받은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타카토라는 이름있는 무사를 자신의 가신으로 삼는 것에도 노력하였다. 센고쿠 시대에 탑 클래스 급의 무용을 자랑하던 와타나케 칸베에[渡辺 勘兵衛]를 2만석으로 데리고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쟁터에서는 무명잡배 100명보다도 명성이 자자한 와타나베 칸베에 쪽이 적에게 더 공포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 타카토라의 생각이었다.

 타카토라의 이름이 갑자기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은 히데요시가 죽은 다음부터이다. 혼돈스러운 정세 속에서 타카토라는 그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주인 고르기를 행했다. 타카토라는 히데요시 사후의 천하인(天下人)을 이에야스[家康]로 보고 자주 친해지려고 접근하였으며[각주:5], 그러기 위해 이에야스와 대립하고 있던 사람들의 정보를 크건 작건 세세히 이에야스에게 보고하였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무리가 꾸미던 이에야스 타도 계획을 밀고 한 것도 타카토라였다. 선택 받은 이에야스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죽어 히데요리[秀頼] 후견자로 사실상 No.1 실력자가 되자, 모반을 꾸몄다는 이유를 대며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토시이에의 후계자]와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에게 인질을 바치게 만들었다.
 
이에야스가 이렇게 인질을 얻도록 만든 것이 타카토라였다. 자신도 나서서 동생 쿠라노스케 마사타카[蔵之助 正高]를 에도[江戸]에 보냈다. 곧이어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이 다가오자 타카토라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있어 중대한 역할을 맡게 된다.

 1600년.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했다는 소식에 이에야스는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정벌 중이던 군사를 회군하였지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등의 부대가 오와리[尾張] 키요스 성[清洲城]까지 진출하였는데도, 이에야스 자신은 에도 성[江戸城]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선견 부대의 장수들의 동향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그들은 전부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 다이묘우[大名]들이기에, 갑자기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에게 돌아설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타카토라의 무대 뒤 활약은 이때도 펼쳐지게 된다. 이에야스가 에도 성에서 대기하도록 진언한 것도 타카토라였으며, 키요스 성에 있으면서 다른 장수들의 동향을 시시각각 에도에 보고한 것도 타카토라였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러한 타카토라의 정보에 따라 안심하고 에도를 출발하였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9월 15일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동서(東西) 결전의 막이 올랐다. 여기서도 타카토라의 수면 하 공작이 빛을 발한다. 타카토라의 부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지휘아래서 서군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부대와 싸웠지만 차츰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반이 형세를 역전시켰다. 마츠오 산[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코바야카와 부대가 오오타니 부대의 옆구리를 찌른 것이다. 그리고 오오타니 부대에 속해 코바야카와를 대비하기 위해 배치했던 쿠츠키[朽木], 와키자카[脇坂], 오가와[小川], 아카자[赤座] 등의 약소 다이묘우마저 코바야카와에 동조하여 오오타니를 공격한 것이다. 이 약소 4명의 다이묘우가 배신하도록 사전에 공작한 것이 타카토라였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활약으로 인해 타카토라는 8만석에서 단번에 이요[伊予]의 반인 20만석으로 가증되었다.

 이에야스에 대한 타카토라의 헌신은 계속 이어졌다. 앞서 언급된 동생 마사타카[正高]에 이어, 1606년에는 다른 다이묘우들보다 앞서 처자식을 에도에 보냈을 뿐만 아니라, 휘하 가로[家老] 4명의 자제들까지도 에도에서 살게 만들었다.

 타카토라의 헌신적인 자세는 이에야스가 죽어서도 이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막부(幕府)에 대한 충성으로 닛코우[日光]에 이야야스 묘소 선정, 건물 설립 등에 조력하였으며, 에도 우에노[上野]에는 칸에이 사[寛永寺]가 세워졌을 때에는 지금도 남아있는 우에노 토우쇼우 궁[上野東照宮][각주:6]을  만들어 바쳤다.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1556년 오우미[近江] 아자이 군[浅井郡] 토우도우 향[藤堂郷]에서 태어났다[각주:7]. 아자이 가문[浅井家] 멸망 후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가 1594년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섬겨 이요[伊予] 우와지마[宇和島]에 7만석. 1597년 제2차 조선침공[각주:8]에서는 수군(水軍)으로 출동.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이요[伊予]의 절반을 하사 받았으며, 오오사카 전쟁[大坂の役]에서 세운 공적으로 이가[伊賀], 이세[伊勢] 거기에 더해 시모우사[下総] 카토리 군[香取郡]을 합쳐 총 32만3900여석의 영지를 거느린다. 1616년 4월 17일 죽었다. 75세.

  1. 아자이 가문[浅井家]과 아츠지를 떠난 것은, 두번 다 성질을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다투다 칼을 뽑아 부상을 입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오다 노부즈미[織田 信澄]는 이소노 탄고노카미의 양자였기에, 이소노가 노부나가에게 쫓겨난 뒤 그대로 노부즈미를 섬기게 아닌가 싶다. [본문으로]
  3. 노부즈미가 살해당하기 이전에 노부즈미와 결별하였다. 결별이유는 뭔가 맘에 안 들었기 때문이라고만 한다. [본문으로]
  4. 사족으로 만약 저였다면 둘 다 쫓아 냈을 것입니다. 도박이건 유녀건 앞뒤 가리지 못 하는 놈들이기에 앞길이 암담하긴 마찬가지. 오히려 도박이 더 맘에 안 듭니다. 주위에 도박에 미친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피하시길. [본문으로]
  5. 그 이전 히데요시의 정무소였던 쥬라쿠테이[聚楽第]의 이에야스 거처를 건축한 것이 타카토라로, 이때부터 친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에도에 있던 토우도우 저택[藤堂藩邸]에 만들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7. 이누가미 군[犬上郡] 혹은 코우라 군[甲良郡] 출신이 더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정유재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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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0.08.30 08: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오랜만에 보는 새 포스팅의 느낌이란 이런 것이군요!
    독자들을 갈증에 시달리게 하기 위해 일부러 장치를 마련하셨다고 믿겠습니다. 무정한 분 같으니(..응?)

    일본에서 도도하면 가장 빠르게 생각나는 것은 다카토라와 헤이스케가 아닐런지요. 다카토라는 이순신에서의 굴욕 덕분인지 그나마 대중에게 더 유명한 느낌이 듭니다.

    다카토라는 7번이나 주인을 바꿨지만 사람됨됨이를 보아 주인을 섬길때는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섬겼다는 느낌이 듭니다.

    사족입니다만 유녀와 도박에 빠진 이야기를 하셨는데, 도박에 빠진 자의 경우에는 저도 써볼 의향은 있습니다. 인생은 도박판이니까요. 승부사라고 완곡하게 바꿔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후후) 아, 그리고 각주 5번에 '타카노라'라고 쓰셨네요. 첫 댓글을 다는 자는 오타도 제일 처음 지적하는 영예를 누릴 수 있어서 참 좋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8.30 2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말 죄송합니다. 늙은 것이 그저 게을러서....

      토우도우[藤堂]하면 말씀하신 이름에 더해 전 개인적으로 토우도우 효우에[藤堂 兵衛]가 추가로 떠오르는군요. 지상 최강의 교장[校長]에게 한 칼에 두동강이가 나도 죽지 않는 양반입죠.

      초반에 지 성질머리 못 참고 뛰쳐 나온 것을 보면 히데나가 이후에나 열과 성의를 다 했나 봅니다.

      인생은 도박판이다!!라고 외쳐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만큼 판돈(빽이라던지 돈이라던지)이 있어서 성공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 같더군요. 거기에 휩쓸리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꼼꼼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얼릉 고치겠습니다.

  2. Gyuphi IV 2010.08.30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세키가하라 이전에 가봤을때 서군 패배조(...)들 포진터 한꺼번에 몰린데를 보긴 했는데 세부공작은 이녀석 때문이었던가(...) 서군측에 있어서는 정말 눈엣가시었겠군요(...) 초전에서 잘 싸우던게 다 망했으니(...)

    시간당 6000엔의 아가씨와 자금운용의 묘에 따라 같은 금액으로 수시간 이상 버틸 수 있는 게임센터 파칭코를 비교해 본다면 도박쪽에 미친 친구가 묘하게 재능에서 앞선다는 느낌을 받긴 합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8.30 23: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책에선 그렇다는데... 다른 곳에선 그렇다고 한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책의 신뢰도야... (번역하고 있는 제가 할 말은 아닙니다만...^^; )

      일본에 있을 때, 파친코에 빠진 유학생을 보았습니다만... 그분을 말리려 그분 부인께서 파친코에 갔다가 같이 빠져서 부부가 함께 파친코를 하더군요.....결국...

      파친코가 지금도 그때와 같은 시스템인지 모르겠지만, 가장 소액인 3000엔짜리 카드는 금방 사라지더군요. ^^ 6000엔으로 그 이상 불릴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같은 경우라면 아가씨에게...(퍽~)

      재능은 모르는 거라 생각합니다. 단순히 파친코에 특화된 재능으로 다른 곳에는 무능할 수도 있으니까요.

      여자건 도박이건 자기 일을 내팽게친 상태에서 이미 아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같음 차라리 자기 일 내팽게치지 않고 승부욕 있는 사람을 찾는 노력을 더하겠습니다.

  3. 1 2010.09.02 1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읽었습니다. 언제 올라오나 한달에 몇 번씩 들어왔는데 드디어 올라왔네요!
    계집질, 도박 둘 다 뭐. 근데 보통 음주까지 세 개 같이 하지 않습니까?ㅋ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9.04 2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서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찾아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뭐든 적당히만 하면 스트레스 풀기도 하기에 나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적당을 넘어서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입죠. 공자할배도 그랬다고 하더군요. 뭐든 과하면 부족한만 못하다고 했다니까요.

  4. 정동희 2010.09.09 1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간만에 글 정말 잘 봤습니다
    다카토라 이 놈은 정말... 전국시대에서도 보기 드물게 흥미로운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 놈을 모사꾼, 기회주의자 수준으로만 생각했는데, 나름 인생은 열심히 살았더라구요
    만화책 '센코쿠' 인가 에서는 의외로 상당한 무용의 인물로 묘사했더군요(근거가 있는 모양입니다)

    다카토라가 주인을 여러번 바꿨다지만 역시 주인이라면 히데나가가 떠오르는데
    저도 직장생활 10년하면서 여러가지 느낀 바가 있지만
    이 히데나가를 섬길때가 이 인물의 최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나중에 이에야쓰를 섬기면서 더 출세를 하긴 했지만, 뒤로 욕도 많이 먹었으니)

    다카토라의 출신이나 그 간에 섬긴 주인(이소노, 노부즈미)을 보면 참 재수가 없었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던 그가 히데나가를 만나면서 앞길이 확 트인거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9.11 11: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타카토라는 키와 덩치가 크다는 기록과 그가 죽었을 때 살펴보니 수 많은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보면 무용도 꽤 뛰어났을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의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인한 실패 등을 히데나가 밑에 와서야 경험으로 살린 것 같습니다.

    • 정동희 2010.09.13 1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젊어서 사람 죽이고 도망친 건 도시이에 하고도 비슷하네요
      제가 늘 주장하지만 역시 인간은 여러가지 경험을 통해서 바뀐다는...
      젋어서는 욱해서 사람 죽이고 했지만, 나이 들어서는 엄청 신중해 질 수도 있다는...

  5. 정동희 2010.09.09 16: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랄까... 그 동안 전망도 안보이고 딱히 실력도 없는 그저 그런 중소 하도급업체 부장정도로 근무하다가
    갑자기 초 일류 대기업 회장의 동생 회사에 임원급으로 입사를 하게 됐다고나 할까요

    말이 동생 회사지 사실은 본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고, 사세(영지)도 상당하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빵빵하고, 주인도 능력있고...
    그야말로 가진 능력을 보여주며 도약 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만났다랄까...

    특히 시코쿠 원정은 그 절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마 히데요시가 직접 참전하지 않은 최초의 대규모 원정으로 생각되는데, 글자 그대로
    회장의 대리인으로 부회장(히데나가)이 프로젝트의 총책을 맡았고,
    히데나가가 그 밑에 수석 중역이었으니, 이 때의 감개가 어떠했을지...
    특히 도중에 일(죠쇼카베 공략)이 지연되자 회장이 직접 나서겠다 했는데
    이 때 히데나가가 처음으로 제가 직접 나섰는데 체면좀 살려 주십쇼 하면서 거절했잖아요

    이 때의 기분도 생애에 다시 느끼기 어려운 쾌감이 아니었을까 생각 됩니다

    그리고 뒤 이은 규슈 정벌에서도 별동대(10만)를 이끌고 전공을 세웠고,
    누가 보더라도 히데요시 정권에서의 이인자는 히데나가
    히데나가의 오른팔은 다카토라 라고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도쿠가와 정권 하에서의 몇 십만석이 뭐 대단하겠습니까)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9.11 11: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와 지금을 좋은 예로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확실히 히데나가의 오른팔 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히데나가가 죽고 난 뒤 히데나가의 후계자인 히데야스[秀保]의 대리인 격으로 임진왜란에 출정한 것을 보면 야마토 토요토미 가문[大和豊臣家]에서 지위는 수석가로급이었듯 합니다.

    • 정동희 2010.09.13 1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나가도 보통 인물이 아닌데
      그 가로격으로 발탁이 됐다면 다카도라가 여러가지로
      능력을 보였던 모양입니다
      사실 그 전에 근무했던 곳을 보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데 말이죠...(최종 이력이 쓰다 노부즈미 밑에 있다 나온...)
      암튼 다카도라나 시마사콘이나 히데나가집이 잘 됐으면
      훨씬 역사에 크게 남았을 것 같은데요
      능력도 능력이지만 역시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6. 정동희 2010.09.09 16: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구나 히데나가는 어쩄든 히데요시 보다 나이가 적고,
    히데요시는 마땅히 후계자도 없으니
    다카토라의 마음속에 원대한 포부와 계획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주인(히데나가)이 갑자기 졸 하고,
    그 후계자 마저 얼마 살지 못했으니,
    이 때 절망감과 상실감이...

    미쓰나리 처럼 일찌 감치 엘리트로 발탁되어 본사 중역을 했던 것도 아니고,
    도라노스케나 이치마스 처럼 인척관계로 승승 장구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런 중소기업 전전하다 마침내 줄을 잡아 대권까지 바라보게 됐는데
    한순간에 다시 퇴물 뒷방 늙은이가 되었으니...

    그래도 은거했다가 다시 나와서 히데요시, 이에야쓰를 섬긴 걸 보면
    젊어서 부터 인고의 세월을 거치며 쌓은 공력이 헛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간만에 글을 보고 기뻐서 두서 없이 말이 많아졌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9.11 1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중이되겠다고 세상을 등졌던 것을 히데요시가 설득하여 자기 휘하로 만든 것을 보면 히데요시에게도 인정받았던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헛된 공력은 아니었던 듯.

      감사한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 꾸준히 글을 올리겠습니다.(...근데 전 이 주말에도 일하고 있어요...T.T)

    • 정동희 2010.09.13 1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요시의 인정은 당연한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시코쿠 정벌 사령관, 큐슈 정벌 별동대 사령관의
      수석가로격이니...
      지금으로 따지면 대표PM이나 본부장이 있지만 실제 업무는 그 밑에 실무수석이 많이 하잖아요
      히데요시 특기가 옆집 기둥뿌리 뽑기인데, 자기 동생이자 정권이 2인자 격인 히데나가의 심복을 몰랐을 리 있을까요

      암튼 그건 그렇다 치고
      토요일까지 근무로 노고가 많으십니다
      풀뿌리 민초의 삶이 참 고단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