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들어선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가신들을 이끌고 말에 올라 에도[江戸]의 대로를 가로지르는 히고[肥後] 54만석의 다이묘우[大名] 카토우 키요마사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에도 시민들 사이에 화제를 되었다.
 키요마사는 신장이 6척[각주:1]을 가볍게 넘고[각주:2]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에 입이나 턱 주위에는 수염이 무성하게 덮인 대장부였다. 허리에는 1m7cm의 큰 칼[大刀]을 차고, 어깨높이가 180cm 넘는 괴물같이 거대한 말에 올라타 있었다 한다. 무엇보다 당시의 말은 어깨높이 120cm가 보통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키요마사에게서 고(故)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秀吉]의 직속 장수, 무공이 뛰어나 ‘칠본창[각주:3]’이라는 이명을 얻은 무장, 임진왜란 시 일본의 맹장에 걸맞은 보습이라 보고 나중에는 유행가까지 만들었다.

에도 깡패 모가리에게 거칠 것은 없겠지만 밤색 제석만은 피하시오
江戸のもがりにさわりはすとも、よけて通しゃれ帝釈栗毛
 ‘에도 깡패 모가리[江戸のもがり]’는 당시 에도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공갈 깡패를 말하며, ‘밤색 제석[帝釈栗毛]’는 키요마사의 애마를 말한다. 안하무인인 깡패라도 키요마사가 타는 말에는 대적할 수 없다는 말이리라.

 키요마사는 센고쿠[戦国] 무장 중에서도 일화가 많은 사람인데, 특히 조선에서 호랑이 퇴치는 널리 알려져 있다. 십문자 창을 휘둘러 호랑이의 숨을 끊었는데 그때 호랑이는 창의 한쪽 날을 물어서 뜯었다는 이야기인데[각주:4], 이는 에도 시대 말기의 창작으로 처음 실린 책에서 키요마사는 철포를 쏘아 호랑이를 잡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키요마사의 통칭은 토라노스케[虎之助]로  범 호(虎)자가 들어간다.

 키요마사는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尾張] 나카무라[中村] 태생이라고 하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키요마사의 모친은 히데요시의 모친(오오만도코로[大政所])과 사촌지간이라고 한다[각주:5]. 그런 연으로 키요마사는 어릴 적에 당시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주였던 히데요시에게 맡겨졌다. 이때부터 문자 그대로 히데요시가 직접 키운 가신으로서의 키요마사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다.
 히데요시 자신도 노부나가[信長]가 아니었다면 출세할 수 없었을 정도로 미천하였기에, 친척이나 히데요시 가문을 대대로 섬긴 가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키요마사와 같이 조금이라도 핏줄이 닿는 사람을 교육시켜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려 하였다. 그런 만큼 키요마사의 출세도 빨랐다.

 1576년 15살 성인식이 있던 해에 170석을 받았으며[각주:6], 1581년 6월 20살에 톳토리 성[鳥取城] 공성전에서 데뷔전[初陣]을 치르게 되는데 키요마사는 정찰 나갔다가 공을 세웠고, 이후 히데요시를 따라 각지를 전전.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칠본창(七本槍)라 일컬어지는 전공을 세워 일약 3000석[각주:7]이 주어진다. 지위도 철포 150정, 히데요시가 파견하는 무사[与力] 20명을 휘하에 둔 중급 장교[物頭]로 승진하였다. 이 정도되면 당당한 무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례적인 출세에는 히데요시의 덕도 있었겠지만 그 이상으로 키요마사 자신이 무장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후도 키요마사는 히데요시를 따라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役], 큐우슈우 정벌전[九州の役] 등에 참전하여 1588년에는 일거에 히고[肥後] 절반이 주어져 드디어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나머지 반을 하사 받은 것이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이다.

 1592년 조선 침략[각주:8]에서 키요마사는 코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선봉에 임명되어 서로 경쟁해 가며 파죽지세로 진격하였지만, 곧바로 의병(義兵)이 일어나고 명나라가 원군을 파병하자 전황이 악화되었다. 거기에 전쟁정책에 관해 대륙정복론자인 키요마사와 화평론자인 코니시 유키나가 사이에는 자연스레 반목이 생겨, 결국에는 작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원래 둘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소위 무공파와 문치파로 대립하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키요마사의 신상에 위기가 생긴다.

 조선에 가 4년째인 1595년.
 갑자기 히데요시에게서 귀국을 명령 받은 것이다. 그것이 히데요시의 분노를 나타내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귀국명령은 일본군의 감찰[軍監]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이 작성한 키요마사의 행동보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시다의 보고는 전부 키요마사의 방자한 말과 행동을 비난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명령에 따라 키요마사는 후시미[伏見]로 돌아왔지만, 히데요시는 면담을 허용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키요마사는 다섯 행정관[五奉行] 중 한 명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에게 히데요시의 화를 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나가모리는 미츠나리와 화해하기만을 권할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키요마사는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냐며,
“하치만[八幡][각주:9]도 굽어 살피소서, 지부[治部][각주:10]놈과 평생 화해 따위 하지 않겠소. 그 놈은 조선에서 한 번도 싸우지 않은 주제[각주:11]에 남의 뒤따마만 까며 끌어내리려고만 하는 더러운 놈이다. 아무리 소인이 타이코우[太閤[각주:12]]에게 용서를 받지 못하고 배를 가르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지부 놈과는 화해는 하지 않겠소.”
하며 분노하였다고 한다.

 키요마사의 근신생활은 반년 정도 이어졌다. 그러던 1596년 7월. 킨키[近畿] 지방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 속설에 따르면 키요마사는 근신 중인 자신의 처지도 잊고 수하 200여를 이끌고 후시미 성에 와서 히데요시를 보호하며 성을 수비하였다. 이것을 안 히데요시도 노여움을 풀고 키요마사의 죄를 용서했다고 한다[각주:13] [각주:14]. 후세 연극 등에서 ‘지진 카토우[地震 加藤]'라 불리게 되는 명장면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키요마사의 명성은 한층 더 높아지게 되었다.

 1597년. 조선으로 재침공. 즉 정유재란이 시작되자 키요마사는 또다시 출정하여 이 해의 막바지에 가장 치열하고 처참한 전투를 치르게 된다. 유명한 울산성(蔚山城) 농성전이다.
 엄동의 12월[각주:15]. 4만4천이라는 명나라 대군의 포위 속에서도 키요마사는 철저항전 하였다. 성 안의 식량은 이미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더구나 명의 전법은 장기 포위전[兵糧攻め]이었다. 성 안에 있던 오오코우치 히데모토[大河内 秀元][각주:16]는,
 “매일 행전(行纏)[각주:17]이 흘러 내렸다. 처음엔 고쳐 맸지만 나중에 뭔가 이상하여 행전을 떼어 보자 다리에 살이 하나도 없이 뼈와 가죽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고 기록하였고, 명나라 기록에도 - 일본군은 종이를 먹고 오줌으로 갈증을 해소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듯이 성 안 일본 병사들은 굶주림과 추위로 인해 동상에 걸리는 사람, 얼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러한 지옥 속에서 키요마사도 죽음을 각오했는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 등 여러 장수들에게 보낸 편지에,
 “만약 낙성된다면 이런 모습들을 타이코우[太閤] 님에게 보고해 주길 바란다”
 고 썼다. 모우리[毛利], 나베시마[鍋島], 쿠로다[黒田] 등 여러 장수의 구원이 제시간에 도착하여 조선과 명의 군사들은 포위를 풀고 철퇴하였다.

 고군(孤軍)이면서 항전을 계속한 키요마사에게 적인 명나라 측도,
 “오랑캐[酋] 중에서는 가장 사납고 굳세다”
 “재능은 유키나가보다 몇 배나 뛰어나다”
 며 절찬하였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어 길었던 조선에서의 싸움도 끝났다. 키요마사에게 남겨진 것은 두 번에 걸친 전쟁 중에 한층 더 깊어진 이시다 미츠나리, 코니시 유키나가 등에 대한 증오뿐이었다. 이런 키요마사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의 편을 들 이유가 없었다.
 키요마사는 큐우슈우[九州]에서 동군 측에 서서 싸워, 코니시 유키나가의 거성 우토 성[宇土城]과 속성 야츠시로 성[八代城]을 공략. 전쟁 후 히고[肥後] 전부를 하사 받았다[각주:18]. 천하의 명성 쿠마모토 성[熊本城]의 축성에 임한 것은 다음 해인 1601년이었다.

 토쿠가와의 시대에 들어서도 키요마사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없었던 듯, 토요토미 가문 존속을 위해, 1611년 히데요리[秀頼]를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대면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쿠마모토로 돌아가던 도중 병에 걸려 귀성한 뒤 얼마 지나 죽었다. 그 죽음이 너무도 급작스러웠기에 독살설도 유포되었다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加藤 清正)]
1562년 오와리[尾張] 에치 군[愛智郡] 나카무라[中村]에서 태어났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合戦] 후
오우미[近江], 야마시로[山城], 카와치[河内]에 조금씩 3000석을 하사 받았다.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에 종군하여 히고[肥後]의 반인 25만석을 영유하였다[각주:19].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동군에 속하여 히고 54만석을 하사 받았다. 축성, 치수, 간척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1611년 6월 24일 죽었다. 51세.

  1. 6척3촌. 약 191cm. [본문으로]
  2. 5척3촌(161)이라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1583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4. 때문에 키요마사의 동상에 있는 창은 십문자창이 아니라 "ㅓ"자형 창이다. [본문으로]
  5.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한보[藩翰譜]에는 그렇게 실렸다 한다. [본문으로]
  6. 문서로 남아 있기로는, 1580년 히데요시에게서 하리마[播磨] 내에 120석을 받은 것이 초견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7. 오우미[近江] 내에 1800석, 카와치[河内] 내에 1097석, 야마시로[山城]에 50석...으로 약 3000석. [본문으로]
  8. 임진왜란. [본문으로]
  9. 무가(武家)의 수호신 [본문으로]
  10. 지부쇼우유우[治部少輔]. 이시다 미츠나리의 관직명. [본문으로]
  11. 행주산성에 참전하여 부상당했다. [본문으로]
  12. 타이코우[太閤]는 칸파쿠[関白]직에서 물러난 사람을 이르는 경칭. 즉 히데요시. [본문으로]
  13. 당시 키요마사가 히데요시의 안부를 묻는 편지가 있기에(직접 지켰다면 안부 편지 같은 것은 안 쓸테니), 실제로 달려가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14. 실제 키요마사 근신이 풀리는 데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주선 덕분이라 여겨지고 있다. [본문으로]
  15. 음력. [본문으로]
  16. 일본측에서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전말을 기록한 "조선 이야기[朝鮮物語]"의 저자. [본문으로]
  17. 정강이에 차는 각반....(저는 행전보단 각반이 익숙합니다만 '행전'으로 쓰라고 하네요) [본문으로]
  18. 단 후에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의 무대가 되는 아마쿠사[天草] 섬 등은 기독교도들이 많았기에 막부에 부탁하여 옆 지방인 붕고[豊後]의 세 개군(郡)과 교환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9. 19만~25만석까지 다양. 개인적인 추측으로 19만석은 키요마사에게 주어진 것이며, 3만석은 키요마사 편제 하의 히고 지역 호족[国人], 거기에 히고[肥後] 안에 있던 히데요시 직할령[蔵入地] 3만석을 키요마사가 대관(代官)이 되어 관리한 것을 포함하여 25만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본문으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시대에서도 이나바[因幡] 톳토리 성[鳥取城] 농성전만큼이나 인간성이 극한으로 몰린 것은 드물 것이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대규모 포위작전으로 인해 성은 완전히 아귀지옥으로 떨어져 사람 고기를 먹는 미증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당시의 기록은 그 모습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전략)… 벼 베고 남은 그루가 최고의 먹을 것으로 나중에는 이조차 떨어져 말과 소를 먹었으며, 서리와 이슬을 맞고 약한 자는 아사(餓死)…(중략)… 말라 뼈만 남아 걷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남녀가 성의 책(柵)에 달라붙어 포위군을 향해서 살려주소~하고 울어도 그것에 용서 없이 공격군의 철포가 집중되었다. 맞은 자가 아직 숨이 붙어있는데도 성안의 사람들이 손에 칼을 들고 모여들어 다투어가며 그 살을 떼어 먹었다. 몸에서도 특히 머리가 맛있다고 하여 머리를 서로 뺏어가며 도망 다녔다…(후략)…

 히데요시의 ‘굶겨 죽이기. 칼도 창도 필요 없다’는 장기 포위공성전[兵量攻め]의 전형이 이 톳토리 성에 대해서 행해진 것이다. 장기 포위공성전의 이점은 아군 병사의 손해 없이 상대의 자멸을 기다리는 것에 있다. 단지 시간이 걸린다. 이 공성전은 1581년 7월에 시작되어 낙성을 보기까지 반년을 요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츄우고쿠[中国] 방면사령관으로서 출진한 히데요시는 하리마[播磨], 타지마[但馬]를 정복한 뒤 산인[山陰] 방면으로 더 진출하여 톳토리 성을 포위하였다. 그런데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진귀한 현상이 일어났다. 성주인 야마나 토요쿠니[山名 豊国]가 단 혼자서 히데요시에게 항복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모우리[毛利] 측에 마음이 기울어져 있던 가신들은 원군을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에게 청하였다. 그래서 파견된 이가 킷카와 일족의 킷카와 츠네이에[吉川 経家]였다. 츠네이에는 성격이 우직하며 남다른 각오로 톳토리 성에 입성한 것을 알게 된 히데요시는 대규모 포위작전을 전개하였다.

 히데요시는 톳토리 성 멀리 3리(里) 사방부터 포위하였다. 그 포위한 진영은 산과 들의 형태를 바꿀 정도로 철저한 것이었다. 성밖 타이샤쿠산 산[帝釈山]의 정상을 깎아서 본진을 세웠고, 연장 2리(약 8km)에 이르는 포위선에는 흙으로 된 보루를 쌓고 책(柵)을 둘러 참호를 팠다. 약 1km마다 삼 층짜리 작은 성과 같은 망루(櫓)에 사수 100명씩을 두었고 또한 500m마다 초소를 만들어 사졸 50명씩 두었다. 밤에는 하늘까지 태워버릴 정도로 화톳불을 활활 피워서는 파리가 드나들 틈도 없을 정도로 엄중하게 경계를 섰다. 거기에 더해 히데요시는 이 진영에서 축제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시장을 만들어 여러 지역의 상인을 불러 모았고, 종을 치고 북을 때려 시끌벅적함 속에 유녀(遊女)들까지 불러들였다. 전투라기 보다는 관광유람에 가까웠다.

그러는 한편 히데요시는 이미 주변지역의 쌀과 보리 사재기에 빈틈없는 손을 쓰고 있었다[각주:1]. 시가 이상의 가격으로 쌀과 보리를 사들였기에 톳토리의 농민들은 앞다투어 팔았다[각주:2]. 톳토리 성 주변에서는 차츰 식량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킷카와 측이 모우리에 부탁한 식량선도 오는 족족 히데요시의 수군으로 인해 격침되어 버렸다. 히데요시는 성안이 굶어가는 것을 기다릴 뿐이 되었다.

 그리하여 성안의 식량난은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 가 결국에는 기아(飢餓) 상태로 빠져버린 것이다. 그 뒤는 지옥이었다. 이 공방전의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성안의 사졸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져 간 것이다. 적은 철포보다도 무서운 배고픔이었다. 이대로 포위가 계속 된다면 전원이 성안에서 굶어 죽을 뿐이었다.

 츠네이에는 결심했다. 히데요시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츠네이에가 배를 갈라 책임을 지겠으니 성병의 목숨만은 살려주길 바랍니다’고 청원한 것이다. 일족인 킷카와 모토하루의 셋째 히로이에[広家]에게 보낸 편지에 ‘오다와 모우리가 싸우는 일본에서 가장 화려한 전쟁터에서 배를 가르는 것, 후대까지 명예라고 생각한다’고 써서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를 나타냈고, 부친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렇듯 훌륭한 최후를 맞을 수 있게 된 것은 킷카와 일족의 명예라고 생각합니다’는 심경을 적어 보냈다. 히데요시는 츠네이에의 담백함에 감동하여 될 수 있으면 목숨을 구해주고 싶다고 생각한 듯, 처음에는 목숨을 바꾼 항복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엔 츠네이에의 바램을 인정하였다. 그 뒤 츠네이에는 성의 병사들과 이별 잔치를 벌이고 싶다며 술과 안주를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이에 응하여 술 10상자, 그릇 10상자, 안주 다섯 종류를 보냈다.

 마지막 모습을 전하는 것으로써 시동(小姓)으로 마지막까지 지켜본 야마가타 나가시게[山県 長茂]의 보고서가 남아있다. 츠네이에는 목욕으로 몸을 깨끗이 한 뒤 녹황색의 의상을 입고 주연에 참석하여 껄껄거리며 웃는 등 쾌활하게 행동하였다. 그리고 배를 가를 때가 되었을 때 갑옷상자에 앉아서는 큰 목소리로 “연습 같은 것도 해 본 적 없을 테니 필시 서투를 테지”하고 카이샤쿠닌(介錯人[각주:3])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은 더 세세하다. 와키자시[脇差[각주:4]]를 배에 꽂고는 기합과 함께 휘저었고 한번 칼을 뽑고는 다시 찔러 심장 아래까지 그어 올린 다음 배꼽 밑에까지 밀어 내리고선 와키자시를 배에 꽂은 채 무릎 위에 양 손을 올려 머리를 내밀었다… 츠네이에가 배를 가를 때 야마나 가문의 중신 몇 명도 뒤를 따라 배를 갈랐다.

 이리하여 성병의 대부분은 구원을 받게 되지만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태로 인하여 많은 성병들의 목숨이 사라져 버렸다. 극심한 기아를 겪은 후엔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하다. 기아상태인 사람은 위나 내장이 쪼그라들어 있기 때문에 한번에 많이 먹으면 급사한다고 한다. 그 때문에 시간을 들여 조금씩 먹으라고 지시를 하였지만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적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모처럼 도움 받은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킷카와 츠네이에(吉川 家)]
이와미[石見]의 호족 킷카와 가문[吉川家]의 분가 출신이다. 본가는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차남 킷카와 모토하루[元春]가 이은 가문이다. 톳토리 성[鳥取城]에서 자해하였을 때 츠네이에 35세였다.

  1. 이나바의 근린인 와카사[若狭]의 상인들을 시켜서. [본문으로]
  2. 성병들 조차 돈에 눈이 멀어 성 안의 쌀을 팔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3. 할복하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뒤에서 목을 베어주는 사람. [본문으로]
  4. 일본 무사들이 차는 칼 두 자루 중 작은 칼을 이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