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데루모토[毛利 輝元]

1625 4 27일 병사(病死) 73.

 

1553 ~ 1625.

모우리 타카모토[毛利 隆元]의 장남. 할아버지인 모토나리[元就]가 죽은 뒤 가독 상속. 츄우고쿠[国] 지방에 120여 만석을 영유(領有)하며 토요토미[豊臣] 정권의 오대로(五大老)[각주:1] 중 한 명이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서군(西軍)의 총사령관이 되지만 패하여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2개 국[]으로 감봉(滅封). 쵸우슈우 번[長州藩]번조(藩祖)가 되었다.

 

 




 


은거와 오오사카[大坂]의 전투

 

 테루모토는 1553 1 20일에 아키[安芸]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모우리 타카모토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타카모토의 급사(急死)로 인하여 할아버지인 모토나리의 후견(後見)을 받아 11살에 성인식을 치렀다.

 젊어서부터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등을 상대하며 성장했다.

 

 히데요시의 말년에는 오대로(五大老)라는 중직에 임명되어 츄우고쿠[国] 지방 9개국() 120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군림하고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서군의 총사령관이면서도 중요한 때 움직이지 않았다.

 

 테루모토는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지자마자 머리를 깎고 '겐안소우즈이[幻庵宗瑞]'라는 호를 칭하였다.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2개국()으로 감봉 되어, 번(藩)의 수도를 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북쪽 해변의 땅 하기[萩]로 하는 이봉(移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테루모토의 말년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쉬기에는 일렀다.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役]에서는 토쿠가와 씨[徳川氏]에 대한 충성과 히데요시가 죽을 때 말한 '히데요리를 부탁한다'라는 유언 사이에서 고심한 끝에 토요토미 가문[徳川家]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는 의미로 극비리에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 秀頼]에게 사노 도우카[佐野 道可]라는 인물을 파겼하였다.

 사실 사노 도우카라는 것은 위명(僞名)으로 정체는 필두(筆頭) 노신(老臣)인 시시도 모토츠구[宍戸 続]의 동생인 나이토우 모토모리[藤 元盛]였다.

 테루모토는 도우카에게 병량(兵糧) 1만석()[각주:2]을 대신한 황금(黃金) 500매를 주고서는 그의 가족과 자손은 확실히 뒤를 돌보아 줄 테니 걱정 말라며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입성시켰다.

 , '만약 토요토미 쪽이 이겼을 때는 모우리 씨[毛利氏]에게 10개국()을 줄 것'이란 약속을 히데요리와 맺었다.

 

 그러나 토요토미 측이 패배하여 오오사카 성이 낙성(落城)되고, 토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뒤에도 도우카가 살아 남았기에 문제였다. 이에야스는 도우카가 모우리의 가신(家臣)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테루모토는 모른다고 잡아떼면서 쿄우토[京都]에 숨어있던 도우카를 잡아서는 할복(割腹)시키고, 목을 이에야스에게 바치기까지 했다. 또한 테루모토가 뒤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던 도우카의 장남인 모토요시[元珍]와 둘째인 아와야 모토토요[粟屋 元豊]도 이에야스에게 보냈다.

 이에야스는 두 아들까지 죄를 주고 싶지 않다며 귀국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테루모토는 둘 다 아비 도우카와 마찬가지로 배를 가르게 하여 막부(幕府)에게 자신은 무죄라는 것을 주장했다.

 충신을 죽여서 가문을 지킨다.

 모우리의 그런 전통으로 이후에도 바쿠후에게 카이에키[改易][각주:3]당하는 일 없이 메이지 시대[明治時代]를 맞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토쿠가와의 천하가 되자 테루모토도 그다지 위기감 느끼는 일 없이 - 은거생활은 주로 모우리 종가(宗家)안태(安泰)를 위해 힘썼다.

 

 우선은 1616.

 테루모토의 딸과 킷카와 히로마사[吉川 正][각주:4]와의 결혼이었다. 킷카와 가문[吉川家]에 시집 보내기에 앞서 테루모토는 제멋대로이고 성질이 급한 딸에게, 

 모우리 가문과 킷카와 가문과의 강한 유대를 위해서이니 불만이 있더라도 뭐든 참아야 하느니라 

 라고 아비답게 간절히 타이르고 거기에 결혼 지참금[化粧料]으로 5천석을 주어서 시집 보냈다. 

 결혼으로 인해 이와쿠니 령[領] 킷카와 가문과의 결속이 두터워지자, 1617년에는 둘째 아들인 나리타카[就隆]에게 스오우[周防] 토쿠야마[山] 3만석을 나누어 주어 '토쿠야마 번[徳山藩]'을 만들었다.

 

 1600년에는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의 '쵸우후 번[長府]' 3 6천석을 창설.

 나중의 일이지만 1653년에 히데모토의 둘째 아들 모토토모[元知]의 '키요스에 번[藩]' 1만석이 세워져, 종가(宗家) 보좌를 맡는 모우리 삼가(三家)가 만드는 등 영국(領國) 경영을 강화해 갔다.

 

 1617년에는 쵸우후의 모우리 히데모토의 딸 쇼우키쿠코[松菊子]를 토쿠야마의 나리타카와 결혼시켜 쵸우후 번[長府藩]과 토쿠야마 번[徳山]의 결속도 강화시켰다.

 

 1619.

 2대 쇼우군[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川 秀忠]의 상락(上洛)[각주:5]이 있었다.

 테루모토는 히데타다와 만나기 위해서 노쇠한 몸을 이끌고 상락.

 간신히 히데타다의 숙소인 니죠우 성[城]에 입성했다. 테루모토의 몸을 걱정한 히데타다의 배려로 가마를 타고 현관까지 왔고, 야규우 무네노리[柳生 宗矩], 카미오 모리요[神尾 守世], 전의(典醫)[각주:6]인 마나세 마사츠구[曲直瀨 正紹] 등의 도움으로 입장하여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의 손에 이끌려 겨우 히데타다와 대면할 수 있었다. 

 전 병이 들어 약해졌습니다. 앞으로 모우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라는 뜻을 전한 후 영지로 돌아왔다.

 

 돌아오자 마자 테루모토의 큰 아들로 초대 하기 번주(藩主)인 모우리 히데나리[秀就]에게 가문의 번영과 조심해야 할 것에 대해서 타이르고 20개조에 이르는 유훈(遺訓)을 남겨 히데나리에게 반성과 자숙을 촉구했다.

 그 후에도 쇠약한 몸을 쉬는 일 없이 1625 4 27일.

 향년 73세로 하기 성[萩城]에서 병으로 죽었다.

옛 텐쥬 원[天樹院]에 있는 테루모토 부부의 묘 - 하기 시[萩市]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2. 1석은 어른 한 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쌀. 약 150Kg. 즉 1만석이면 쌀 1500톤. [본문으로]
  3.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4. 세키가하라 때 서군이던 모우리 가문을 혼란에 빠뜨려 전후 감봉으로 몰아 넣었던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의 아들. [본문으로]
  5. 상경(上京)의 다른 말. 여기서 락(洛)은 낙양(洛陽)의 '낙(洛)'이다. 여러 번 중국 왕조의 수도가 되었기에, 낙양에 간다는 말은 곧 수도로 간다는 말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6. 궁중 의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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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8.26 1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료마가 간다>를 읽다보니, 모리가에서는 이후 200여 년간 신년이 될때마다 신하가 한슈에게 '도쿠가와를 칠 준비가 됐습니다'라고 보고하고, 한슈는 '아직 시기가 적철치 못하다'고 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실제로는 군비가 바쿠후에 상대가 안 되지만, 그런 관습이 있을만큼 바쿠후에 대한 감정이 최악이었나 봅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8.26 11: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 그런 이야기가 있다고 하던데, 그 전통을 만든 것이 테루모토라고들 하더군요.
    그런데 그렇게 대놓고 했다간, 바쿠후의 밀정에게 걸릴 위험이 큰 만큼, 비밀리에 모여,
    필두 가로가 "올 해는 어떻게 할까요?"라고 하면 번주는 "아직 이르지 않나?"라는 짧은 문답이었다고 하더군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09.25 14: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길래 줄을 잘서지..(-_-..) 라고는 해도, 테루모토도 할만큼 했으니 뭐라 말은 못하겠군요(;;)

    혁신을 하면서 정치는 좀 더 올려줘도 나쁘지 않을까 싶었던 사람.. 모리가에는 세키가하라때는 도무지 사람이 없어서..(-_-)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9.25 17: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우리에게 있어서는 히로이에가 죽일 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세키가하라에서 모우리 군 선봉으로 있으면서 후속의 아군들을 못 움직이기 한 점이나, 오오사카 성에서 재기를 도모하려던 서군 세력을 - 총지휘관을 빠져나가게 하는 수법으로 와해시키는 등. 히로이에가 아닌 안코쿠지 에케이 하나만을 창구로 서군에 온 힘을 몰아 넣었음 역사도 달라지지 않았나 하고 생각합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09.26 1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로이에야 부친과 형이 히데요시때문에 제명에 못죽었으니..(자연사라고는 하나..-_-) 분노할 구석이 없잖아 있었겠지만서도;; 덕분에 대국을 망쳐놨으니 아주..??-_-='
    모우리가가 세키가하라때 3만을 이끌고 왔다는 내용을 본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정도로라면 세키가하라때 버벅댔더라도 오사카성 퇴거 안하고 버텼으면 재밌는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겠군요.. -동군 맹주 도쿠가와에 서군 맹주 모우리 정도..-;

    -그러면 다시 전란의 시대로...? 이번 혁신 pk의 1603년 같은 시나리오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상황이긴 해도..-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9.26 15: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 버티고 있었으면 상당히 복잡해 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큐우슈우(九州)에서는 카토우 키요마사가 어떻게 했을지 모르겠지만 쿠로다 칸베에의 세력과 동북지방의 타테나 우에스기가 할거하여 4~5개 정도의 세력으로 나뉘어지지 않았을까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1624년 7월 13일 병사(病死) 64세.

1561년 ~ 1624년.
어렸을 때부터 히데요시를 섬겼고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각주:1]]에서는 칠본창(七本槍[각주:2]) 필두(筆頭)로 이름을 드높였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동군(東軍)에 속하여 승리. 아키[安芸], 빙고[備後]를 하사받지만, 막부(幕府)에 의심 받아 히로시마 성[広島城] 무단 개수(改修)를 이유로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감봉(滅封)당했다.





마사노리의 인물상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각주:3]]가 쓴 [번한보(藩翰譜)[각주:4]]에 따르면 마사노리는,
'몹시 사납고 거칠어 사람 죽이는 것을 벌레를 죽이는 것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던가, '악행을 일삼아 아키, 빙고의 토민(土民) 등 모두 학정에 괴로워하여 맘 편할 날이 없었다'고 혹평을 하고 있다.
 확실히 그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성격이기에 영민(領民)이나 가신(家臣) 중 겉으로는 뺀질 대면서 뒤로는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이나 명령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용서 없이 귀나 코를 베는 등 잔혹한 형벌로 다스렸다.

 하지만 그가 영내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세심하고, 공정한 토지조사[検地[각주:5]]와 토산품의 개발, 상업 무역의 진흥 등에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또한 그가 개명(開明)적인 것은 히로시마 성(城) 아래에 기독교 교회를 설립하여 가신이나 영민중에 입신, 세례하는 사람이 매년 천명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당시 마사노리는 예수회 선교사들 사이에서 굉장히 평판이 좋았다. 1609~10년의 [일본 예수회연보]에는,

우리 성교(聖敎)를 보호하는 신도(信徒)가 아닌 제후 중 제일은 아키, 빙고 양국(兩国)의 영주(領主)인 후쿠시마 타이후[大夫]님이다. 그는 예전부터 우리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올해는 한층 더 명확히 그 뜻을 보이고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자기 영토의 항구에 스페인, 포르투갈의 상선을 입항시켜 해외무역을 활발히 하려는 타산(打算)에서 생겨난 결과겠지만, 그가 개명적이며 상업활동에 열심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카이에키[改易[각주:6]]와 히로시마 성(城) 명도(明渡)

 1619년 6월 2일.
 바쿠후가 갑자기 마사노리를 카이에키한 것은 그가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각주:7]]를 어기고 수해(水害)를 입은 히로시마 성(城)을 무단으로 고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구실로 속으로는 그가 옛 토요토미[豊臣]의 유신(遺臣)이었다는 것이 바쿠후의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의 카토우 가문[加藤家]처럼 진심으로 토쿠가와 가문에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한 어차피 카이에키를 벗어날 순 없었을 것이다. 주목할만한 점은 카이에키가 전해졌을 때 취한 마사노리의 태도와 히로시마 성(城) 명도 때 가신들의 대응이다.

 1619년 6월 2일.
 마사노리는 카이에키를 전하는 사자(使者)에게 절을 하며,
 “내리신 말씀은 알겠습니다. 오오고쇼[大御所[각주:8]]가 살아계시다면 마사노리도 할 말이 있지만, 당대(當代[각주:9])에게는 이제 와서 할 말도 없습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또한 마사노리의 가신들은 히로시마 성(城) 접수를 하기 위해 온 여러 장수들에게,
 “이 성은 주군 마사노리가 지키라고 명령받은 성이니 아무리 쇼우군[将軍]의 명령이라 하여도 건넬 수는 없소. 억지로라도 건네 받으려면 창으로 뺏어보시길”
 이라 말하며 농성(籠城)하다 죽을 각오를 선명히 하였다.

 그 때문에 접수사(接收使)는 에도[江戸]에 억류되어 있던 마사노리에게 이 뜻을 전하여 마사노리가 직접 쓴 편지[각주:10]를 얻어 겨우 개성(開城)을 승낙시켰다고 한다. 더구나 성을 건넬 때도 흐트러짐 없었고, 넓은 마루에는 혈판(血判)으로 된 농성을 맹세하는 무사 2000여명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붙어있어 그 각오가 단단했는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성을 건넨 후 그러한 가신들은 모두 다른 다이묘들에게 초대되어 임관될 수 있었다고 하니, 마사노리가 평소부터 얼마나 가신들에게 존경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봉(移封)후의 선정(善政)

 히로시마 49만 8천석에서 감봉 당한 마사노리는 시나노 카와나카지마 2만석과 에치고[越後] 우오누마 군[魚沼郡] 2만 5천석[각주:11]을 합한 4만 5천석이 주어졌다.

 1619년 7월.
 근신(近臣) 30여명을 이끌고 임지로 향하여 타카이노 촌[高井野村]에서 1624년 7월까지 6년 정도 지냈다. 죽은 것은 1624년 7월 13일. 향년 64세였다.

 마사노리는 이 곳에 오자마자 영내(領內)를 순시하며, 당시까지 햇볕이 잘 들거나 그늘이 어느 정도 드는지 또는 물길이 좋고 나쁜 것만으로 연공을 차등 부과하고 있던 농지에 생산력이 좋고 나쁨까지 고려한 새로운 토지조사[検地]를 실시하여 농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오부세[小布施]의 하천 개수 공사를 하여 지금도 '타이후[大夫]의 천냥 둑[千両堤]이라는 사적이 남아있다. 즉 현재 오부세 정[小布施町] 우에하라[上原]에 있는 천냥 둑은 여기를 지나던 마츠가와 강[松川]이 몇 갈래로 나뉘어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던 것에 둑을 쌓아 흐름을 바뀌게 하여 피해를 없앤 둑이다.

 마사노리의 4만 5천석은 아들 타다카츠가 죽자 그의 우오누마 군(郡) 2만 5천석을 바쿠후에 반상하였고, 남은 카와나카지마 2만석도 그가 죽은 후 몰수당했다.

 '토쿠가와짓키[徳川実紀][각주:12]]에 따르면, 마사노리가 죽은 후 가신이 바쿠후의 검시관이 도착하기도 전에 유골을 화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째서 검시관을 기다리지 못했는지 그 죽음이 자살이라는 설도 있어 그의 마지막은 수수께끼이다.

  1. 1583년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의 싸움. [본문으로]
  2. 시즈가타케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사.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3. 에도시대 중기의 정치가 겸 학자. [본문으로]
  4. 6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츠나토요[徳川 綱豊]가 고우후[甲府] 번주(藩主)였을 때,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명해 여러 다이묘우[大名] 337개 가문의 유래를 모아 계보를 만든 것. [본문으로]
  5.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본문으로]
  6.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7. 에도 막부가 다이묘우[大名]나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 등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법. [본문으로]
  8.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말함. [본문으로]
  9. 2대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를 말함 [본문으로]
  10. "활을 보라. 적이 있을 때는 중요하게 쓰이지만, 평화로운 시대가 되면 보자기에 쌓여 창고에 보관된다. 나는 활이다. 지금은 치세(治世)이니 카와나카지마[川中島]라는 창고에 보관되어 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본문으로]
  11. 이 곳은 아들 타다카츠(忠勝)의 것 [본문으로]
  12. 토쿠가와 바쿠후의 공식 기록서. 조선왕조실록 같은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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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7.26 20: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공도 크고 세력도 대단한데다 히데요시의 부하였던 점 때문에 가이에키는 누가봐도 당연한 수순이었을듯 합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7.27 08: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히려 바쿠후의 수뇌부(도이 토시카츠(土井 利勝)나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등은 다른 다이묘우의 눈을 두려워 했다더군요. 땡깡 함 부렸음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더군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7.29 15: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번 들고 일어났더라면 다시 혼란의 길로 접어들었을 수도 있었겠네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7.29 18: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는 카이에키가 자주 일어나던 시기였던 만큼, 각지의 낭인들과 불만있던 다이묘우까지 포섭하여 들고 일어났다면 정말 혼란의 시대로... 물론 역사의 if는 쓸모없다곤 합니다만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07.30 18: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국일성령이나 참근교대 같은 것이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7.30 1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국일성령 덕분에 군사적 기반이 약해졌고, 참근교대 덕분에 지방 다이묘우의 경제적인 힘이 약화됨으로 결과적으론 일본에선 드물게 평화가 지속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케다 데루마사[池田 輝政]

1613 1 25일 병사 50

1564 ~ 1613.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유형제(乳兄弟)[각주:1]인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아들.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부친이 죽는 바람에 오오가키[大垣]성주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공을 세워 하리마[播磨] 하사받아, 히메지 성[姫路城]를 쌓았다. 후에 '서국 쇼우군[西 ][각주:2] 이라는 이명(異名)을 얻었다.









히메지 백만석


 이케다 테루마사의 할머니인 요우토쿠인[養徳院]이 오다 노부나가의 유모(乳母)였던 연()도 있어 테루마사는 어려서부터 노부나가를 가까이서 섬겼다. 노부나가가 죽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섬기며 중용(重用)받아 히데요시는 테루마사를 양자(養子)로 삼는다는 약속도 하였다[각주:3]. 그러나 나가쿠테의 전투에서 부친 츠네오키와 형인 요시스케[之助]가 전사한 후에는 이케다 가[池田]를 상속하여 미카와[三河] 요시다([吉田] 15 2천 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594 8월.
 테루마사는 히데요시의 중매로 토쿠가와 이에야[
川 家康]의 둘째 딸 토쿠히메[督姬][각주:4]를 후처로 맞이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이에야스 편에 섰고, 공을 세워 하리마 52 1천 석이라는 큰 영토를 하사받아 히메지성에 입성했다. 입국한 다음 해인 1601년부터 성을 개축(改築)하기 시작하여, 1609년에 한 층 더 호화장대(豪華壯大)한 성곽이 완성되었다.


 가정면에서도 토쿠히메와의 사이에 5명의 남자아이가 탄생. 전처(前妻)의 아들인 장남 토시타카[利隆]는 둘째 치더라도 2남 타다츠구[継]는 다섯 살 때 외할아버지인 이에야스에게서 비젠[備前] 오카야마[岡山] 28 6천 석을 하사 받았을 뿐만 아니라, 3남 이하에게도 아와지[淡路], 하리마 안에 각각 영토를 하사받았기에 그런 영지들을 합쳐서 '히메지 백만석', '서국 쇼우군' 등으로 불렸다. 너무 과한 대우에 이에야스의 적남(嫡男) 히데타다[秀忠]가 질투하여,
 “
아예 테루마사에게 천하를 잇게 하는 것이 좋겠군요
 라고 삐쳤을 정도였다.


 사위와 장인이 되어서부터 급속히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 관계가 깊어진 테루마사이지만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은혜를 잊는 일 없이 어린 히데요리에 대한 배려를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다. 누나가 칸파쿠[白] 히데츠구[秀次]의 정부인이라는 것도 있어 토요토미 가문과는 깊은 연으로 맺어져 있었다.
 
히데요리가 니죠우 성[
二条城]에서 이에야스와 만났을 때도 옛 토요토미 가의 무장들과 함께 히데요리를 경호(警護)했으며, 1602년 정월 궁궐에 신년인사를 할 때도 테루마사는 히데요리를 대리해서 입궐하였다.


성내에 이변(異變)이 일어나다.


 1609 5월.

 천수각(天守閣)을 완성했을 때부터 히메지 성 안에서 이변이 자주 일어났다. 예를 들면,


 '
천수각의 한 방에서 17~8살 정도의 시녀가 12히토에[単][각주:5]를 입고 홀로 촛불을 들고는 혼자서 앉아있었다. 젊은 사무라이가 이상히 여겨 가까이 다가가자 빗을 건내 주었다. 그 빗은 천수각의 갑옷 상자 안[각주:6]에 있던 것이었다.'


 '심야(深夜). 맹인(盲人)이 나타나서 들고 있던 비파의 통을 열어보라고 하였다. 젊은 사무라이가 열어보려고 하자 맹인은 키가 3미터나 되는 귀신으로 변신해서나는 이 성의 주인이다라고 위협했다'


 같은 해 12 13일. 한 통의 이상한 편지가 성에서 발견되었다.
 보낸이는 '하리마의 주인인 대천신(大天神) 토우센보우()' '수도(首都) 니죠우[二条]의 센마츠'이며, 받은이는 테루마사와 토쿠히메 부부로 되어 있는 것으로 50~60장에 이르는 협박문이었다. 내용은,

토오토우미[遠江]의 요린보우라는 대천신(大天神)이 큐우린보우라는 천신(天神)을 꼬셔서 테루마사 부부를 저주하여 죽이려고 한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성 안에 8층탑을 세우고 호마(護摩)의 비법을 익혀 기도하라.
 
또한 팔층탑안에 넣을 두루마기와 그림은 천축에서 이 나라에 전해진 두통 중 하나를 넣을 것. 한 통은 하리마 동쪽에 사는 유명한 목수인 히하라[
日原]가 몰래 가지고 있다. 호마는 온타케산[御嶽山] 산에 있는 시미즈 사[清水寺], 후나코시산[船越山] 산에 있는 루리 사[瑠璃寺] 등의 고명한 중을 스승으로 삶아 수련할 것.

등의 지시가 쓰여져 있었다. 테루마사는 몸집이 작은 사내였지만 용맹과감하고 침착한 사나이였기에 협박장을 무시했다.


 그러나 1611 12월.
 그는 갑자기 중풍에 걸렸다. 발병 당일. 테루마사는 가신의 집에 방문했다가 갑자기 쓰러져 가마로 성으로 돌아오는 도중 어디서 왔는지 모를 수 많은 까마귀들이 날아와 가마에 부딪혔다. 성에서 이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렇게 되자 아무리 테루마사라도 어쩔 수 없었다.


 타카 군[多可郡] 엔만 사[円満寺]의 묘우카쿠() 아사리에게 악마 퇴치, 국가 수호의 기도를 부탁했다. 37일간 성안에서 술법을 행한 묘우카쿠의 진언(進言)에 따라, 천수의 귀문(鬼門)에 해당하는 북동쪽에 팔층탑을 세우는 동시에 오사카베 신사[刑部神社]를 건립하였다. 오사카베 신사는 원래 히메야마[姫山] 산에서 지방신(地方神)을 모시던 신사의 건물을 히데요시가 히메야마 산에 성을 세울 때 산 아래로 옮겼기 때문에 신의 분노를 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테루마사의 중풍은 일시 회복했다. 성 안은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다음 해 1월에 재발하여 테루마사는 피를 토했다. 이 때도 수 많은 까마귀가 날아와서 창호지에 부딪혔다. 마당에 죽은 솔개가 두 마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아타고[愛宕][각주:7] 신자인 테루마사는 이 일울 흉한 일이 있을 징조라 생각하여 더욱 병이 깊어졌다. 이에야스가 중풍의 묘약을 보내왔지만 테루마사는 25일 오후. 숨을 거두었다.


 이에야스는,

 "그런가…… 죽었는가. 뭐든지 아타고에게 의존한다고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천하를 노리고 있던 테루마사의 마음 속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 같은 여인의 젖을 먹고 자란 사이. 높은 집안의 아이는 모친의 젖이 아닌 다른 사람의 젖을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노부나가는 유두를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다고 하지만 츠네오키의 모친의 젖만은 얌전히 먹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칸토우[関東]의 토쿠가와 쇼우군[德川 将軍]만큼 권세와 힘이 있다는 뜻에서. [본문으로]
  3. 실제로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 것은 테루마사의 동생 이케다 나가요시[池田 長吉]. [본문으로]
  4.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우지나오[北条 氏直] 부인이었으나 우지나오의 죽음으로 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본문으로]
  5. 귀족 여성의 정복. [본문으로]
  6. 평시에는 열지 못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본문으로]
  7. 일본의 종교인 신도(神道)에서는 불을 막는 신이지만, 신불습합 사상에 따라 불교의 승군지장[勝軍地蔵 – 지장보살의 군신(軍神)일 때의 이름]과 같은 신으로 여겨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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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

1615 5 28일 병사 60

1556~1615.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을 섬겼으며 '시즈가타케 칠본창[七本槍]'[각주:1] 중 한 사람이다.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후견역(後見役)이 되어 토쿠가와[德川] 측에 대한 연락창구가 되었지만, 오히려 내통자로 오해 받아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떠났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 후에 죽었다.







우직한 카츠모토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16살 때부터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기기 시작했는데, 이런 카츠모토를 히데요시는 곁에 두고 길러 키워 가신(家臣)으로 삼았다.

 1583 4월 시즈가타케의 전투에서 '칠본창'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공을 세워 3000석을 받았다. 그러나 동료인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淸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과 비교하면 출세 가도에서 밀려나 히데요시 말년인 1595년이 되어서야 겨우 셋츠[摂津] 이바라키[茨木] 1만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그 전 해인 1594년에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신하로 선택되었다. 히데요리의 여러 신하들, 특히 측근을 감찰(監察)하는 지위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다다음해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이 시작되었다. 카츠모토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도 오오사카 성에 입성해서는 히데요리 곁을 지키며 참전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그런 우직함을 신뢰하여 1601년 카츠모토에게 야마토[大和] 헤구리 군[平郡郡] 18천석을 가증하여 히데요리의 가로(家老)로 임명하였다. 이때는 몰랐지만 후에 생각해보면 이것이 카츠모토에게 있어서 불행의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곧이어 이에야스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 되어 에도[江戶]에 막부(幕府)를 열었고, 이 일로 인하여 토요토미 가문[豊臣家]과는 뭐든지 미묘한 문제가 많아지게 되었다. 특히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고 있던 카츠모토에 대하여 요도도노[淀殿][각주:2]를 필두로 한 오오사카 성내의 반토쿠가와파는 무엇이든 의심의 눈초리로 카츠모토를 보게 되었다. 토요토미-토쿠가와 양 가문의 중개자로써 쌍방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부심하는 카츠모토는, 언제부턴가 오오사카 성내의 혼란과 이간을 꾀하는 이에야스의 교묘한 술책에 희롱당하게 되었다.


호우코우 사[方広寺] 종명(鐘銘) 사건


 1602 4월.

 이에야스는 카츠모토를 통해 히데요리 모자(母子)에게 쿄우토[京都] 호우코우 사[方広寺] 대불전(大佛殿)의 재건을 권유하였다. 히데요리도 요도도노도 죽은 히데요시의 공양과 토요토미 씨()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하여 이를 따랐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이에야스가 오오사카 성()에 저장되어 있는 막대한 금은을 쓰게 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카츠모토가 조영(造營) 책임자라는 큰 임무에 임명받았다. 그는 이에야스와 빈번한 연락을 통해 꼬투리 잡힐 일 없이 사업을 진행해갔다.


 호우코우 사() 대불전은 1614 4월에 준공.

 하지만 예정되어 있던 개안공양을 눈 앞에 두고 이에야스가 불만을 표했다. 종에 새겨진 '家安康' '칸토우[関東]를 저주하는 말'[각주:3]이고, [君臣豊樂子孫殷昌]이 토요토미의 번영만을 기원하는 말이라며 개안공양의 연기를 명령했다.

 카츠모토는 급히 순푸[駿府][각주:4]로 해명하기 위해서 향했다. 당초는 이 문제가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에야스는 카츠모토를 면회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를 통해 오오사카 성()이 어째서 많은 수의 낭인을 모집하고 있는지 힐문하였다. 그리고,

1. 히데요리가 에도로 온다.[각주:5]

2. 요도도노가 인질이 되어 에도에서 산다.

3. 히데요리가 오오사카 성()을 나와 다른 곳과 영지를 바꾼다.[각주:6]

 라는 어느 것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요구해 왔다. 대불전 문제로 인하여 중대한 정치적 난제를 껴안게 된 카츠모토는 크게 놀랐다.


 한편 요도도노도 따로 이에야스에게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蔵卿局][각주:7]와 쇼우에이니[正栄尼][각주:8]를 파견하였다. 이에야스는 이 둘에게 종명 문제 등 난제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환대하며 히데요리 모자의 안부에 신경 썼기에 당연하게도 오오사카로 돌아온 쌍방의 보고는 전혀 상반되는 것이 되었다. 이에야스의 교묘한 분열 책략은 멋지게 성공했다.

 오오사카 성내에는 '카츠모토는 칸토우[関東]에 알랑거리는 놈'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곧이어 그 목소리는 '배신자 카츠모토를 죽여야 한다'로 변했다.


충신인가 역(逆)인가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의 신뢰를 잃은 지금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기에 카츠모토는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오오사카 성()을 탈출하여 이바라키 성()으로 갔다. 이에야스는 이것을 칸토우[関東]에 대한 오오사카 측의 선전포고라 여기고 오오사카 정벌을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1614 10 11일. 이에야스는 순푸를 출발하여 이로인해 '오오사카 겨울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된 이에야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음에 틀림이 없다.


 11 4일.

 쿄우토[京都]에 도착한 이에야스는 곧바로 카츠모토를 불러 오오사카 성() 공략에 대한 이야기 나누었다. 카츠모토에게는 원하지 않았던 바이며 어쩔 수 없던 선택이기도 했지만 이젠 더 이상 어찌할 수도 없었다. 오오사카 성내의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카츠모토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협력을 바라는데 거부할 수도 없었다.


 12 16일.

 시작된 공성 측의 대포 공격 중 한 발이 요도도노가 거주하던 곳에 떨어졌다. 거기에 다음해 여름의 싸움 때 야마사토[山里]의 성곽에 있는 히데요리 일행의 소재를 확인하여 히데타다[秀忠]에게 고한 것도 카츠모토라고 한다.


 토요토미 가 멸망으로부터 20일 후.

 카츠모토는 쿄우토[京都]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상은 깊은 죄와 자기 혐오에 빠져 자해(自害)를 했던 것이 아닐까?

  1. 시즈가타케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히데요리의 생모. [본문으로]
  3. 이에야스[家康]의 이름을 안(安)자로 갈라놓았기 때문. [본문으로]
  4. 이에야스[家康]가 히데타다[秀忠]에게 쇼우군[将軍]직을 물려주고 은거하고 있던 곳. 말이 은거지 중요정책사항들은 대개 맡아서 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즉 막부의 지배하에 들어오라는 의미. [본문으로]
  6. 대략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가 유력 후보지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7.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의 모친으로 요도도노[淀殿]의 유모(乳母). [본문으로]
  8.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秀頼]의 유모(乳母)이며, 히데요리의 창술 스승 와타나베 타다스[渡辺糺]의 모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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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 다카토라[藤堂 ]

1630 10 5 병사 75

1556 ~ 1630.

가난한 무사 집안의 둘째로 태어났다. 처음으로 전쟁터에 발을 디딘 것이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 오다[織田], 토요토미[豊臣], 토쿠가와[德川] 씨를 섬기며 활약. 또한 축성의 명인으로 각지에 성을 쌓았다. 고미즈오 텐노우[後水尾天皇]와 토우후쿠몬인 마사코[東福門院 和子]의 결혼을 성공시켜 공무일화(公武一和[각주:1])를 실현하였다.










센고쿠[戦国] 시대에서 수완 좋게 살아남기


 토우도우 타카토라는 말년의 대부분을 에도[江戶]에서 생활하였다.

 에도 성[江戸城] 개수(改修)와 마을 정비에 분주한 한편 우에노[上野]나 칸다[神田]등에 번저(藩邸[각주:2]), 별저(別邸)를 두고 쇼우쥬[松寿]부인(2대 번주 다카츠구[高次]의 모친)을 살게 하여 인질, 참근 교대의 선례를 만들었다.

 에도성에 자주 등성하여 2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 3대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미츠[德川 家光]를 보좌하여 '천하태평(天下泰平)' '공무일화(公武一和)'에 심혈을 기울였다.


 오우미(近江)에서 태어난 그는 건장한 몸과 드센 힘을 타고났으며, 15살에 오우미의 아자이 나가마사[井 長政]아시가루[軽]가 되어 아네가와 전투에 참전. 이후 아츠지 요시히데[阿閉 義秀], 이소노 카즈마사[磯野 員昌], 오다 노부스미[織田 信澄[각주:3]] 등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 하시바 히데나가[羽柴 秀長 히데요시[秀吉]의 동생]을 섬겼으며 여러 고난을 겪은 후에 히데요시의 가신이 된 후 히데요시가 죽자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긴다.

 토자마 다이묘우[ 大名[각주:4]]이면서도 절대적인 신뢰를 받아 이세[伊勢], 이가[伊賀] 32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 인물에게 말년이라던가 "정년"에 평온은 없었다.


 1608년.

 53살 때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에서 이세 츠[]로의 이봉(移封)은 영전(榮轉)이었으나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있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공략하기 위한 포석과 이가 닌쟈[忍者]의 공급원이가[伊賀]의 지배라는 무거운 사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런 막부(幕府)의 부탁과도 같은 임무에 응하여 이가 우에노[上野], 아노우즈[安濃津]에 성을 쌓았다.


 7년 후인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坂冬の陣]에서는 60세의 나이로 6천의 군세를 이끌고 토쿠가와 측의 선봉을 맡았다. 다음해 여름의 전투에서도 4천의 군세를 이끌고 쵸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 盛親]의 부대와 사투하였다.


 1619년.

 64살 때 오오사카 성 재건의 명령을 받아 완수하였고 또 그 즈음에 여러 축성 공사에 착출되어 불만이 쌓인 토요토미 은고[豊臣 恩顧[각주:5]] 다이묘우[大名]의 반란에 대비한 셋츠[津] 타카츠키[高槻], 탄바[丹波] 사사야마[篠山]의 축성을 지휘하였다.


 다음해인 65. 노령에 굴하지 않고 90여일 간 머물면서 거대한 바위를 키츠가와 강[木津川[각주:6]] 야마시로[山城] 카모[加茂]의 죠우넨 사[常念寺] 운반하는 작업을 담당하였다.


세찬 바람에 맞서 서있는 거목


 이 즈음부터 눈병을 앓아 에도로 돌아오자 실명 직전. 그러나 공무일화(公武一和)를 위해서 상경하여 쇼우군 히데타다[秀忠]의 딸 토우후쿠몬인 마사코[東福門院 和子]를 고미즈오 텐노우[後水尾天皇]의 부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막부(幕府)의 출장소라고 할 수 있는 니죠우 성[二条城]의 정비에 조력했다.


 텐노우에게는 이미 '오세츠노 츠보네[於世津局]'와의 사이에 황자인 카모미야[加茂宮]와 황녀 우메미야[梅宮]를 둔 상태였기에 텐노우와 쿠교우[公卿[각주:7]]들이 반발. 그에 따라 쇼우군의 면목도 손상되어 막부 각료들도 격한 반대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타카토라는 히데타다가 딸을 사랑하는 마음에 감복. 물심양면의 노력을 하여 결국목적을 달성했다.


 1627년.

 72살 때. '생애 최대의 스승이며 은인'이라는 이에야스를 위해서 이에야스의 묘를 만들었다.

 다음해에는 코우즈케[上野]에 있는 칸에이 사[寬永寺]에 칸쇼우 원[寒松院]을 건립하였고, 쿄우토[京都]의 난젠 사[南禪寺]에는 일본 최대의 산문(山門[각주:8])을 만들어 헌납하여 오오사카 공성전에서 전사한 가신의 넋을 기렸다.


 1630 10 5.

 에도 야나하라[柳原]의 별저(邸)에서 잠이 드는 듯 편안히 죽었다.

 마지막 말은 "천하를...[津] 부탁한다"고 했다고도 하며, 몽롱한 듯한 모습으로 타카토라를 위해서 토우도우 가문[藤堂家]을 위해서 전쟁터에서 죽은 수많은 가신들의 이름을 주문처럼 외웠다고도 한다.

 향년 75. 경애하던 이에야스의 죽음보다 14년 더 살았으면서도 이에야스와 같은 75세의 죽음이었다.


 토우도우가의 기록에 의하면,

 "몸에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상처가 있었다. 총에 의한 상처, 창에 의한 상처 등 모두 전투에서 얻은 것으로 왼손의 약지는 뭉개져 손톱이 없었고 오른손 중지도 1촌 정도 짧았으며 오른발의 발톱은 전부 빠지고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3대 쇼우군 이에미츠[家光]는 그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텐카이[天海] 그 빛나는 생애(生涯) "세찬 바람에 맞서 서있는 거목"이라 찬양했다.

  1. 조정과 바쿠후(幕府)를 인척관계로 맺어지게 하여 사이 좋게 함 [본문으로]
  2. 에도나 쿄우토[京都]등에 세운 각 번(藩)의 대사관 같은 것. 에도의 경우 참근 교대(参勤 交代)로 올라온 다이묘우[大名]가 머물렀다 [본문으로]
  3. 보통 '츠다 노부스미[津田 信澄]'라 불린다.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츠[信勝 - '노부유키'로 많이 알려져 있다]의 아들로 노부나가에게는 친조카. '츠다[津田]'는 오다 가문[織田家] 가문의 별성으로 방계의 친족들은 이 성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주로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를 치른 후에 이에야스에게 복종하기 시작한 다이묘우. [본문으로]
  5.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입은 다이묘우를 지칭 [본문으로]
  6. 오오사카 부근에 있다 [본문으로]
  7. 상급 귀족들. 보통 종삼위(従三位) 이상을 말한다. [본문으로]
  8. 사원의 정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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