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는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각주:1]]에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과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는 뛰어난 무용(武勇)의 장수이지만, 센고쿠[戦国] 무장 특유의 연극적 행동이나 허세가 없어 어렸을 때부터 노련(老鍊)한 느낌을 준다.

 반 단에몬[塙 団右衛門]이라고 하는 요시아키의 가신이 있었다. 그는 소위 호걸형 무사였기에 주종간에 다툼이 많았다. 어느 날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카토우 키요마사가, 저렇게나 유명하고 뛰어난 무사를 어째서 우대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요시아키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화를 내었다고 한다. 보통 자기 부하의 무명(武名)이 높으면 기뻐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요시아키는 단에몬과 같은 스타 플레이어를 선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단에몬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한 부대의 지휘관으로 출진했지만, 지휘관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망각하고 필마단기로 돌격하여 가장 먼저 적진에 돌입하였으며(一番槍), 적의 목을 베어 오는(一番首) 수훈을 세웠다. 그러자 요시아키는,
 “네 녀석은 지휘관을 맡기엔 부족한 놈이다”
 고 차갑게 질책하여 단에몬을 화나게 하였다. 결국 단에몬은 요시아키에게서 떠났다[각주:2]. 즉 요시아키는 단에몬과 같은 스탠드플레이어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시아키 자신도 떠들썩하게 남의 주목을 끄는 행동을 싫어하였다.

 요시아키가 얼마나 침착했는지를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요시아키의 부하들이 모닥불에 둘러앉아 장난 삼아 불에 달구어진 불쏘시개를  거꾸로 세워 나중에 온 사람이 그것을 쥐다 뜨거움에 놀라는 것을 보며 낄낄대고 있었다. 거기에 요시아키가 지나치게 되었다. 부하들은 만약 요시아키가 불쏘시개를 쥐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지만, 말하는 타이밍을 놓쳐 누구 하나 말하지 못하던 중 결국 요시아키가 아무 생각 없이 불쏘시개를 잡았다. 요시아키의 손에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 올랐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태연히 그 불쏘시개로 땅바닥에 한 일(一)자를 그리고 잠시 떠들다 갔다고 한다. 더구나 나중에 어떠한 문책도 없었다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조선 침략의 본거지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여러 장수들이 주둔하고 있을 때였다. 조선에서 포획한 호랑이를 쇠사슬에 묶어 끌고 가던 중 호랑이가 그들을 뿌리치고 날뛰었다. 구경하던 다이묘우[大名]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바빴지만, 그런 소동 속에서 요시아키 단 한 사람만이 벽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그리고 호랑이가 사라지자 그제서야 눈을 뜨며, “뭔 일 있었나?”하고 입을 열었다 한다.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뒤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도 요시아키 한 사람만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정점으로 하는 문치파가 이에야스[家康] 타도를 획책하였고 키요마사, 마사노리 등 무공파가 미츠나리를 죽이고자 행동을 일으켜 일촉즉발의 긴박한 공기가 떠돌 때도 요시아키는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 저택을 방문하여,
 “세상이 소란스러운 듯 합니다만 이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지금까지 곁에 두고 있던 50기(騎) 중 20기를 제 본거지인 이요[伊予]로 돌려보냈습니다. 남은 인원은 이에야스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바칠 생각입니다”
 고 말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도 요시아키는 냉정침착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신으로 인해 서군(西軍)이 패주하기 시작하자, 동군(東軍)은 앞다투어 가며 도망치는 적을 쫓아갔기에 진형이 흐트러져 각 무장의 본진을 지키는 방비가 부실해졌다. 하지만 요시아키의 부대만큼은 질서정연했다. 요시아키의 지시가 구석구석 잘 전해져 일사불란한 방비태세를 유지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적이 패주하자 요시아키는 출진할 때 몸에 걸치고 있던 화려한 갑주를 재빨리 벗어버리고 평범한 갑주로 갈아입었다. 이는 결사의 각오를 한 적병이 적어도 대장만이라도 죽이고자 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나중에 이를 전해 들은 이에야스는,
 “사마노스케[左馬助=요시아키]는 정말 빈틈이 없구나”
 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전초전인 기후 성[岐阜城] 공성전에서 승리하였을 때, 승리를 알리고자 칸토우[関東]의 이에야스에게 보고하기 위해 사자(使者)를 고르려 했으나 아무도 사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 막 결전이 시작되려는 때에 사자가 되어 전쟁터에서 이탈해 버리면 공적 세울 기회를 잃기 때문이었다. 이 때 요시아키는 가신 한 명을 지목하여 그에게 머리를 숙이며,
 “칸토우에 사자를 보내는 것은 긴급을 요하는 일이며 이것 역시 공적이라 할 수 있다. 부디 가주지 않겠는가?”
 하며 간절히 부탁했다고 한다.

 역시 세키가하라 때의 일이다.
 요시아키 진영에 잠입한 닌쟈[忍者]가 잡혔을 때 요시아키는,
 “이자도 자기 주군의 명령에 죽음을 각오한 용사이다. 지금 여기서 이자를 죽여도 승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며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한다. 요시아키는 적이라 하더라도 용사를 인정하는 도량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키가하라에서의 공적으로 인하여 요시아키는 이요 마츠야마[松山] 20만석에서 아이즈[会津] 40만석의 가증되었지만 요시아키는 이것이 불만이었다고 한다.
 처음에 이에야스는 요시아키를 위해 50만석을 주려고 하였지만 이에야스의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너무 많다며 막았다고 한다. 이를 들은 요시아키는 곧바로 마사노부에게 가서 이유가 뭐냐며 따졌다. 마사노부의 답변은 이러했다.
 “당신은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많은 은혜를 입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너무나도 많은 봉토를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게 받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결코 좋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나중의 화근거리가 될 수도 있기에 그렇게 처리한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아무리 요시아키라도 이에는 반론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각주:3]

 이에야스는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히데타다[秀忠]를 병상(病床)으로 불러 여러 다이묘우들에 관해 자신이 가진 인물평을 전해 주었는데 요시아키에 대해서는,
 “우직하고 의리 있는 자이기는 하지만 사사로운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워 불만을 표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부분을 잘 판단해서 처리하도록”
 하고 말하였으며 또한,
 “의리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의 부추김을 받는 다면 아무리 소심한 사람이라도 모반을 일으키는 법이다.”
 고 말하며 감시의 눈을 게을리 하지 말도록 말을 남겼다 한다.

 카토우 요시아키의 가문은 아들인 아키나리[明成] 때 아이즈 42만석을 몰수당하여 단절을 맛보게 된다.

[가토 요시아키(加藤 嘉明)]
1563년생. 통칭 마고로쿠[孫六], 사마노스케[左馬助]. 미카와[三河] 출신으로 일찍부터 히데요시[秀吉]를 섬기며 시즈카다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의 공으로 3000석을 하사 받았다. 1585년 아와지[淡路] 1만5천석, 조선침략에서는 수군(水軍)으로 참전. 1597년에는 거제도에서 조선 수군의 배를 탈취했다[각주:4].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이요 마츠야마 성[伊予松山城]를 축성. 후에 아이즈 42만석으로 이봉(移封). 1631년 9월 12일 죽었다. 69세.

  1. 1583 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떠날 때 성문에 ‘결국 시골 좁은 천에 머물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를 높이 나는 갈매기 처럼 유유히 떠난다[野水江南遂に留まらず、高く飛ぶ 天地の一閑鷗]' – 즉 요시아키는 그릇이 작아서 대인배인 나님은 떠나마..라는 뜻일 것임. 아마... - 라는 시를 붙이고 갔기에, 이에 분노한 요시아키는 단에몬이 다른 가문에 취직 못하도록 타 다이묘우에게 편지를 돌렸다(이를 奉公構라고 한다). 그래서 단에몬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 밑에 있었으나 얼마 안가 그곳에 있지 못하고 쿄우토[京都]에 가서 탁발승을 하다가 나중에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 때 오오사카 성에 입성하게 된다. [본문으로]
  3. 전후 처리과정에서 이에야스가 논공행상을 주도하게 된 배경에는 이에야스가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대리인과 후견인이라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세키가하라 이후 동군이 영토를 하사 받은 것은 이에야스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 아닌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다. [본문으로]
  4. 元凶(원균..이라고도 읽는다)의 칠천량 해전을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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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10.01.09 05: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카토우 요시아키의 멸봉당한 아들내미가 제법 비중 큰 보스격으로 나오는 만화도 있던 기억인데요.. 아이즈 40만석을 걸 가치가 있다던가...(내용은 안드로메다였던 기억입니다만;)

    아무튼 담력이 참 멋지군요(..근데 왜 저는 한편으론 뭔가 마초짓은 바보같다고 느껴지는지;;)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09 08: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야규우 쥬우베이[柳生 十兵衛]가 등장하는 와이쥬우엠 야규우인법첩[Y+M 柳生忍法帖]인 듯 하군요.

      http://ja.wikipedia.org/wiki/Y%E5%8D%81M_%E3%80%9C%E6%9F%B3%E7%94%9F%E5%BF%8D%E6%B3%95%E5%B8%96%E3%80%9C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유일한 딸인 치요히메[千代姫]를 아이즈의 시골 무사가 무시하는 쌍큼한 시작이 짱이었습죠.

      여담으로 호랑이 소동 때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는 호랑이와 눈싸움하였고 서로 노려보다 호랑이가 물러갔다고 합니다.(...풋~)

      시간과 문화가 다르다 보니 느껴지는 것도 천차만별이라 생각합니다.

  2.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0.01.09 1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7본창 중에서 마사노리나 기요마사가 최정상급 스타고, 다케노리나 나가야스가 단역에 그치는 인기를 누린다면, 요시아키나 가쓰모토는 중간급 배우라는 생각이 듭니다.(말많고 탈많은 와키자카는 제외하겠습니다. 이순신 덕에 인기는 제대로 끌었으니)

    그나저나 아이즈는 정말 일본역사에 많은 이들이 오간 장소군요. 아시나, 다테, 우에스기, 가모, 가토 요시아키, 거기에 호시나 번까지 있었으니 .. 막말의 아이즈는 말할 필요도 없군요. 간토와 오슈 사이의 요충지라서 그런 면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막부가 호시나번을 아이즈에 둔 까닭은 대 다테 방어선의 역할이 맞는지요?

    P.S : 발해지랑님께선 원균 명장론을 믿지 않으시는 듯 하군요 (낄낄) 원균이 용맹하다는 기록은 곳곳에서 튀어나오기는 한다만, 6년간의 모아온 전력을 한 번의 전투에서 모두 날려먹은 게 명장의 기준이 되는지는 의문입니다. 발해지랑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09 15: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담으로 일본 위키에 따르면 키요마사나 마사노리는 나머지 등등과 동급으로 취급 받는 것을 싫어했다고도 하더군요.

      그러게요. 그래서 아이즈라는 쿠니[国]도 아닌 일개 지역을 따로 태그로 지정하였습죠. 언젠가 함 능력되면 아이즈에 관해서도 함 쓰고 싶습니다.

      ps..에 관해서는...
      승패야 병가지상사다 보니 뭐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존망의 시기에 동료를 참언하여 나락에 빠뜨린다거나, 국가존망의 시기에 사복을 채우고자 돈 받고 병사 제대시키거나, 충무공의 운주당이라는 참모부 건물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여성들을 데려다 하렘을 만든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더군요.

    • 정동희 2010.01.11 1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이즈가 확실히 요지는 요지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기요마사나 마사노리는
      아무래도 다른 칠본창 멤버와는 달리 히데요시 쪽하고
      인척관계가 있어서 좀 다른 대접이었지 않는가 싶습니다

  3. 맹꽁이서당 2010.01.09 2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7본창엔 센고쿠 히데히사는 없네요~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이쪽도 결국 막부시대에 단절당한 도요토미 가문 출신 인물이었군요.
    새해부터 좋은 지식 얻어갑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10 22: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즈카다케 전투 당시 히데요시의 배후 중 가장 위험스러웠던 시코쿠[四国]의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에 대한 방비책으로 시코쿠에 파견나가 있었습니다.

      시바타 카츠이에(...정확히는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 측은 히데요시의 배후를 위협하는 의미로 모토치카에게 협력을 요청. 그에 응한 모토치카는 시코쿠의 히데요시 파인 소고우 마사야스[十河 存保]를 공략. 그러자 마사야스는 히데요시에게 원군 요청. 그래서 파견된 것이 히데히사였습죠.

      히데히사는 휘하 2000을 거느리고 시코쿠에 도하. 모토치카는 그 소식에 휘하의 카가와 노부카게[香川 信景]에게 5000을 주어 요격을 명령. 그 움직임을 캐치한 히사히데는 복병을 배치하여 카가와의 선봉대는 격파하나 깊숙히 추격하다 후속부대에 패배. 도망쳐 히케타[引田]라는 곳에서 머물다 기세를 타고 야습해 온 카가와의 군세에 대항도 못하고 도주. 도주할 때 부대 깃발까지 빼앗기는 굴욕도 맛보았다고 하는군요.(바로 시즈카다케 전투가 벌어지는 날과 같은 날이었다고 합니다[1583년 4월21일])

      이렇게 쓰면 히데히사가 조금 바보 같지만, 당시 가장 불온한 움직임을 펼치던 모토치카에게 대항하도록 파견한 점. 만약 모토치카의 그릇이 커, 과거 미요시 가문[三好家]이 그러했듯이 사카이[堺]에 상륙하여 쿄우토[京都]를 노리기라도 했으면 히데요시의 정권은 없었을 것이기에, 그런 것을 방비하기 위해 파견한 센고쿠 히데히사는 당시 히데요시가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지를 알려 준다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담으로...히케타[引田]에서 패하여 도망친 센고쿠 히데히사는, 본거지 아와지[淡路] 근방 수역을 장악하였다는 공로로, (졌음에도 불구하고) 4개월 뒤에는 아와지[淡路] 스모토[洲本] 5만석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패했는데도 영지가 4000석에서 5만석이 늘어난 것을 보면 히데요시의 신뢰가 얼마나 컸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

      사족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七本槍]은 아즈키자카 고개 칠본창[小豆坂七本槍]을 베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시즈가타케 전쟁이 히데요시 vs 카츠이에와 같이 보이는 것도 또한 실상도 그러하지만 그들이 각각 내세운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vs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즉 오다 가문 내부의 싸움입죠)
      오다 가문에는 과거 미카와 아즈키자카 고개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군세를 격파한 적이 있었고, 거기서 대활약한 7명의 용사에게 아즈키자카 칠본창[小豆坂七本槍]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하니, 히데요시는 자신이 직접 키웠다는[子飼い] 무장 7명에게 저 칭호를 줌으로써, 무장들에게는 더욱 활약할 수 있는 동기부여와 발판을 마련해 줌과 동시에, 오다 가문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정치적 효과를 노리지 않았나? 하고 생각합니다.

      새해에도 찾아주시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 정동희 2010.01.11 1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센코쿠 히데히사...
      게임상의 능력치는 참 거시기(?) 하게 나오는 인물인데
      역시 마지막이 중요한건가요?
      일찌감치 히데요시 막하에서 많은 무공을 세웠고,
      발해지랑님 말씀처럼 사랑도 많이 받았던 모양입니다
      다만 역시
      한 방면의 총책을 맡기에는 신중함이 많이 부족한
      인물이었죠
      돌격대장형 인간이랄까...

      암튼 그 뒤로 큐슈 원정 때, 시마즈씨 낚시걸이에 말려 들어서 대패해 도망치고, 가이에끼

      하지만 오다와라 원정 때, 백의종군(?)해서 다시 복귀

      세끼가하라때도 동국에 속해서 그 뒤로도 계속
      가문을 이었던 것 같네요(요건 좀 불확실)

      전국시대 격전의 전장을 수 없이 거치면서
      수 차례 패하고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질긴 인물입니다

  4.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11 2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동희님께//
    " 기요마사나 마사노리는
    아무래도 다른 칠본창 멤버와는 달리 히데요시 쪽하고
    인척관계가 있어서 좀 다른 대접이었지 않는가 싶습니다"

    => 그렇습니다. 키요마사는 조선침략의 최중요 후방 기지라 할 수 있는 히고를.
    마사노리는 토요토미 씨 발상의 지라고 할 수 있는 오와리를 영유한 것만 보아도 기타 등등과는 확실히 틀린 취급을 받은 것 같습니다.

    "센코쿠 히데히사...
    게임상의 능력치는 참 거시기(?) 하게 나오는 인물인데"

    => 확실히 게임 상에서 센고쿠는 절망입죠. ^^

    말씀대로 센고쿠는 선봉대 대장 정도가 한계인 인물인 것 같습니다.

    "국시대 격전의 전장을 수 없이 거치면서
    수 차례 패하고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질긴 인물입니다"

    => 덕분에 우리는 매력적인 만화의 주인공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정동희 2010.01.14 1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에서 가정만큼 무의미 한 건 없지만
      히데요시에게 가족이나 인척이 많았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하다 못해 동생 히데나가쪽이라도 좀 번성했으면 어땠을지
      가토나 후쿠시마 등도 싸움에만 능했지 정치, 외교에 약해서 히데나가 사후에는 미쓰나리등 젊은 관리들에게 너무 의존하지 않았나 싶네요(물론 그래도 다 지 하고 싶은 대로 했지만)

      센코쿠 히데히사 만화책은 저도 읽어 봤는데,
      고증도 잘 되있고, 재미도 있더군요
      센코쿠 같은 전국무장도 정말 드물지만
      굳이 비교를 하자면 도도 다카토라 같은 인물이
      역시 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일본 전국시대에서 보통 한 번의 패배나 반역,가이에끼
      은거는 거의 그 인물의 종막이 되기 마련인데
      위에 언급한 센코쿠나 도도가 보기 드믄 케이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밖에 또 누가 있을 까요... 앞 선 인물들 정도 까지는 아니지만 다치바나 무네시게 정도...
      찌질거리면서도 오래 버틴걸로 따지면
      롯카쿠 쇼테이 부자도 만만찮죠...

      이런 인물들도 나름 드라마 성은 있을 것 같은데... ㅋㅋ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15 23: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데요시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조선이나 일본이나 불행이 더 길어졌겠죠. ...아마. 개인적으로 히데나가가 계속 살았다면 일본군이 조선에 진주해 있던 기간이 더욱 늘어나지 않았을지...

      키요마사나 마사노리도 내정면에서 뛰어난 것을 보면 히데요시가 오래 살았다면 나름 유능한 지방행정관으로 남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센고쿠 천정기라고...센고쿠 시즌2가 현재 일본에선 진행되고 있습죠. 시간 되시면 함 보시길. 신촌 북오프에 센고쿠 천정기가 있더군요...일본어 판이긴 합니다만. 재미있습니다. ^^ 전 지금까지 나온 것 다 가지고 있습죠. 원하시면 만날 때 들고 나가겠습니다. ^^

      아~ 다음에 등장할 인물이 토우도우 타카토라입니다.

      사족을 하나 붙이자면...롯카쿠가 찌질하시다고 하니 생각나는 것인데, 롯카쿠 가문은 대군이 몰려들었을 당시는 본거지를 버리고 코우가 산중으로 도망쳐 게릴라 활동하는 것이 롯카쿠 가문의 방어 전략이었던 것 같습니다.

      과거 1487년에 롯카쿠 타카요리[六角 高頼]는 아시카가 막부 9대 쇼우군 요시히사[足利 義尚]가 공격해 오자, 나중에 노부나가가 오우미에 진공했을 시 쇼우테이가 그러했듯이 코우가 산중으로 피신하여 게릴라 활동. 지친 막부군은 쇼우군이 진중에서 병으로 죽는 것도 있어 물러감으로써 싸움 종결.

      롯카쿠가 찌질했다기 보다는 노부나가가 너무 강했다고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찌질하면서도 오래 버틴 듯한 인상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자네가 아닐지... 무려 아비 원수 노부나가 앞에서 공놀이를 할 정도였으니..

      (절대 그럴 일 없겠지만) 이마가와 우지자네로 1년짜리 대하드라마를 만들어도 꽤 이야기 성이 있을 듯... 아비 요시모토에 아비 원수 노부나가, 본거지를 공격해 온 타케다 신겐에, 도망친 처갓댁 호우죠우 우지야스와 그 우지야스가 죽자 눈치 겁나게 주는 처남 우지마사. 도움을 청한 과거 자기네 집에서 더부살이 하던 토쿠가와 이에야스. 쿄우토에 가서도 당시 귀중한 기록가인 야마시나 토키츠구와도 교류. 말년엔 히데요시와도 교류. 드라마 하면 등장할 인물들이 정말 풍부한 것 같습니다.

  5. 정동희 2010.01.18 1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코쿠 천정기는 번역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일전쟁의 경과는... 참 예측하기가 어렵네요... 히데나가가 만약 총사령관급으로 왔다면
    조선측이 좀 더 힘들지 않았을까...

    롯카쿠는 본래 그런식의 게릴라전을 했군요... (이거 무슨 이가패도 아니고... 고가패인가...)

    우지자네는 찌질하긴 하지만 분명 얘기꺼리는 많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뭐 나름
    노부토라 앞세워서 미카와 침공도 하고, 호죠에 원군청해서 신겐한테도 좀 버티고
    뭐 아주 싸움질을 안한건 아니더군요

    암튼 능력을 떠나서 운도 없었던 인물로 보입니다...(살아남는 처세술은 대단)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키운 무장들[秀吉の子飼い] 중에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무장이다. 둘 다 맹장(猛將)으로 유명한 것에 더해, 히데요시를 섬기게 된 방식과 토쿠가와 정권하에서 멸문하게 되는 운명 등 둘은 비슷한 경력을 걸었다. 단지 키요마사 쪽은 아들 타다히로[忠広] 때 삭탈관직 당하지만, 양쪽 다 토요토미 은고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였기에 막부(幕府)가 판 함정에 빠지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키요마사와 같은 오와리[尾張] 출신이다. 나이도 마사노리가 한 살 연상 혹은 동갑이라고 한다. 히데요시와는 아비 측의 연으로 어렸을 적부터 히데요시를 섬겼다고 한다. 마사노리가 나무통 직공의 아들로 부친이 히데요시의 아비와 아비 다른 형제라고 하지만 속설이기에 확증은 없다.

 어쨌든 그 즈음에 이치마츠[市松]라 불렸던 마사노리는 츄우고쿠[中国] 공략군의 사령관으로 하리마[播磨]의 히메지 성[姫路城]를 본거지로 하였던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히데요시도 또한 모친 쪽 연으로 데려온 카토우 토라노스케[加藤 虎之助 = 키요마사]와 마찬가지로, 이 이치마츠를 자신의 팔다리로 만들기 위해 곁에 두고 가르쳤다.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의 기대대로 용맹한 무장의 재능을 보이게 된다.

 1578년 하리마 미키 성[三木城] 공략 때 18살의 나이로 데뷔하여 공적을 세웠고, 그 후에도 톳토리 성[鳥取城],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각주:2]]에서 공을 세워 명성을 높여갔으며, 1583년의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의 용장 하이고우 이에요시[拝郷 家嘉]를 쓰러뜨려 소위 ‘칠본창(七本槍[각주:3])’이라 용명을 얻는 수훈을 세워, 상으로 혼자서만 5000석을 하사 받아, 칠본창 중 다른 멤버들이 3000석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그가 세운 공적이 다른 멤버들을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알 수 있다.

 그 후에도 마사노리는 히데요리를 따라 각지를 전전. 임진왜란 때도 조선에 출진했지만 1594년에는 귀국하여, 다음 해인 1595년 히데요시에게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코우야 산[高野山]에서 할복을 명령 받았을 때 검시관에 임명되었다. 전쟁터의 마사노리는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한편으로 인정이 깊은 성격이기도 했다. 특히 은혜를 입은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다. 히데요시의 애미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가 병에 걸렸을 때는 잠도 자지 않고 간호했다고 하며, 히데츠구가 배를 갈랐을 때는 그 가엾은 운명에 눈물을 흘렸다고도 한다.

 그 후 마사노리는 히데츠구의 영지였던 오와리 키요스[清須] 24만석으로 가증(加增) 받았는데, 이때 마사노리는 어렸을 적에 자신을 귀여워 해주던 지모쿠 사[甚目寺]라는 절의 늙은 비구니를 찾아, 예전 은혜를 갖는다며 먹을 것을 계속 보냈다. 더구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로시마[広島]로 옮기게 되자, 새로 오와리의 영주가 되는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각주:4]]의 가로(家老)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종래대로 늙은 비구니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후 떠났다 한다.

 인정가(人情家)이기도 한 마사노리는 그런 만큼 격정가(激情家)이기도 했다.
 히로시마로 옮겼을 때의 이야기로, 어느 날 측근 중 하나에게 잘못한 것이 있어 이에 화가 난 마사노리는 이 측근을 굶겨 죽이고자 성 한 켠에 가두어 놓고 식사반입을 금지시켰다. 시간이 흘러 마사노리가 그 측근의 생사를 살펴보자 어찌된 일인지 이전과 변함이 없었다. 마사노리는 누가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냐고 열화와 같이 화내며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다도의 자리에서 시중드는 중[茶坊主]이, 자기가 그러했다며 그 측근은 예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기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측근이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억지로 먹였다고 하며, 측근을 대신해서 자기가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사노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라며 중은 물론 유폐했던 측근까지 죄를 용서하였다.

 이러한 마사노리의 격정은 토요토미 정권의 행정관[奉行]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에 대한 격렬한 증오로도 나타나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600년. 마사노리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따라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토벌군에 종군하였는데, 이시다 미츠나리 거병 소식에 따라 열린 대책회의인 ‘오야마 군의[小山軍議]’가 열렸을 때의 일이다.
 이에야스는 이미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나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 유력 다이묘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는 하였어도, 진중에 있던 다이묘우들 대부분은 토요토미 가문에게 은의를 느끼는 다이묘우였으며 게다가 오오사카[大坂]에 처자를 두고 있었다. 히데요리[秀頼]의 명령을 바탕으로 한 미츠나리의 거병이었기에 다이묘우들이 동요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렇게 말했다.
 “미츠나리와 한편이 되더라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소. 즉각 오오사카니 돌아가시길.”
 자리에 있던 다이묘우들은 이것저것 재보고 눈치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미츠나리의 거병은 히데요리 공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불과 8살의 어린 주군께서 그러한 생각을 하실 리가 없소. 즉 미츠나리 놈의 잔꾀일터.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이 마사노리는 나이후[内府=이에야스]와 함께 할 생각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 마사노리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 다른 다이묘우들도 잇따라 이에야스에 협력하겠다고 나섰다. 죽은 히데요시의 은혜를 가장 많이 입고 또한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생각함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마사노리가 이시다 미츠나리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이미 천하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던 이에야스의 앞길을 크게 넓혀준 것이다.

 세키가하라 결전에서도 마사노리는 최전선에서 전투의 시작을 알렸고 맹렬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였기에 승리한 동군에서 가장 큰 전공을 세운 무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것을 마사노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는지 전투 직후 어느 사건을 너무도 강인하게 해결하고자 하여 마사노리의 앞날에 중대한 화근을 남기게 된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를 거둔 후 마사노리는 쿄우토[京都]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연락할 일이 있어 사자(使者)인 사쿠마 카에몬[佐久間 加右衛門]를 쿄우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히노오카[日ノ岡]의 검문소를 점거하여 왕래하던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던 토쿠가와의 직속 신하[旗本] 이나 즈쇼노카미[伊奈 図書頭] 휘하의 부하들과 말싸움을 하다가 이나의 부하들에게 사쿠마는 몽둥이에 맞고 쫓겨나 버린 것이다. 사쿠마는 마사노리에게 돌아와 사정을 보고하고 난 뒤, 마사노리의 허락을 받고 배를 갈라 자결하였다. 마사노리는 이때,
 “반드시 이나 즈쇼의 목을 자네의 무덤으로 가져오겠네”
 라고 눈물을 흘리며 사쿠마의 자결을 허락했다고 한다.
 마사노리는 이에야스에게 사쿠마의 목을 보내고선, 이나 즈쇼의 목을 달라며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재촉하면서 토쿠가와 측의 어떠한 타협안도 거부하여 결국 이나 즈쇼의 배를 가르게 하였다.

 어쨌든 마사노리는 세키가하라에서의 전공으로 아키[安芸], 빙고[備後] 2개 지역 49만8천2백석이라는 큰 영지를 얻게 되지만 이 단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시세가 변한 것을 깨닫지 못하였고, 이에야스가 막부를 연 뒤에도 오오사카의 토요토미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여, 1608년에 히데요리가 천연두를 앓았을 때는 급거 히로시마에서 오오사카로 달려가 막부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간호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일어나지만, 마사노리는 겨울과 여름 양 전투에서 에도 성 잔류[留守居]를 명령 받았기에 전쟁터에는 나가지 않았다. 물론 토요토미 가문을 소중히 여기는 마사노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막부의 처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토요토미 측이 은밀히 마사노리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마사노리는,
 “이에야스는 야전이 특기로 공성전은 잘하지 못한다. 오오사카 성[大坂城]은 돌아가신 타이코우[太閤] 전하[각주:5]가 세우신 천하제일의 성이니 이를 굳게 지키면 낙성되는 일은 없을 것”
 이라고 사자(使者)에게 말했다고 한다. 또한 오오사카에 있는 후쿠시마 가문[福島家]의 비축미(備蓄米)도 맘대로 쓰라고 했다 한다. 직접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내심 히데요리[秀頼]를 위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오사카 공성전으로 토요토미 가문은 멸망하여 토쿠가와 정권의 기반이 강고히 다져지자, 토요토미 가문과 끈이 강했던 다이묘우들에 대하여 매서운 숙청정책이 시작되었다.
 1617년 마사노리는 법도(法度)에 따라 홍수로 파손된 히로시마 성[広島城] 보수공사를 해도 되는지 막부에 요청하여, 노중(老中)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각주:6]]에게,
 “뭐 조금 정도 보수하는 것이라면 괜찮겠죠”
 라는 구두 언약을 믿고서 정식 서류를 제출하지 않은 채 보수공사를 시작하였지만, 결국 이것을 ‘모반의 징조’라는 생트집에 잡혀, 1619년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 4만5천석[각주:7]으로 감봉되었다.

 더구나 마사노리가 죽었을 때 막부의 검시관을 기다리지 않고 그 유체를 화장하였다는 이유로 후쿠시마 가문은 모든 영지를 몰수당하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1561년 오와리[尾張] 키요스[清須]에서 태어났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5000석을 하사 받았으며, 1585년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에 10만석, 1595년 오와리 키요스 24만석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공적을 세워 히로시마 49만8천200석이 되었지만, 1619년 실각, 4만5천석으로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감봉. 1624년 죽었다. 64세.

  1.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후 토쿠가와 가문의 부하가 된 다이묘우. [본문으로]
  2.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죽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와 히데요시가 싸운 전투. [본문으로]
  3. 1583 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4.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
  5. 히데요시를 말한다. [본문으로]
  6.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아들. [본문으로]
  7. 이 중 에치고[越後] 우오누마 군[魚沼郡] 2만 5천석은 아들 타다카츠[忠勝]의 영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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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동희 2009.12.28 1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싸움에는 능했지만 정치에는 서툴렀다고 해야 할까요
    인생 후반기에 너구리 영감에게 철저히 이용만 당하고...
    사기꾼한테 사기 당하면서도 난 사기당한게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순진남이랄까

  2.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09.12.28 10: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센고쿠 시대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보처럼 인정에 휘둘리는가 하면 때때로는 어느 쪽이 득실이 있는가를 파악하는 능력도 뛰어났으니까요.(아무리 미쓰나리가 미워도 서군이 압승을 거둘 상황이었으면 서군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마사노리의 성품상 동군에 잔류해서 자폭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도요토미 가문이 불꽃처럼 번졌다가 사라진 것처럼 키워낸 이들도 불꽃처럼 사라지는 걸 보면 역사란 재미있습니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사람들이 빚어내는 이야기라서 그런 것이겠지요.

    P.S : 加藤 嘉明는 가토 요시아키가 맞는 건가요, 요시아키라가 맞는 건가요? 요새는 아사이가 '아자이'로 바뀌었다가 다시 어느 학자가 아사이가 맞다고 하기도 하고. 아직도 논란인 山內가 야마우치/야마노우치가 맞는가 논쟁도 있고. 사람들이 만드는 일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 )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8 14: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땠을까요... 이시다에게 과연 넘어왔을지...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것 같아서, 이 인간은 좀 조심스럽군요.

      두번 째 문단은 좋은 말씀이십니다.

      ps;저도 보는 책마다 달라 헷갈리더군요. 일단은 양 쪽 다 괜찮지 않을까요? ^^; 일본 사람들 이름 읽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 정동희 2009.12.28 15:54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 뭐...
      전에 일본사 강의 들을 때,
      왜 겐페이 시대에는 성뒤에 노를 붙였습니까
      (ex : 후지와라노, 다이라노, 미나모토노 )
      라고 교수한테 물어 보니
      당시에는 개인의 이름보다 어느 집안 출신이냐를 중시해서
      그렇게 불렀다(뭐 그 이후에는 안그랬나 마는...)
      좀 캐 물으니 정확한 사유는 안나오더군요 딱히 언제부터 그랬다 라는 것도 없고

      또 일본 사람들은 대충 한자나 가나로 이름 적고 자기가 부르고 싶은대로 부른다네요 어느정도 규칙은 있지만 그게 꼭 그렇지는 않는다는...

      아사이나 아자이, 야마우치나 야마노우치
      뭐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너무 지엽적인거 가지고 이게 맞다 저게 맞다
      굳이 따질 필요가 있나 싶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8 2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동희님께//
      조금 이야기가 샙니다만 순서상 ^^

      후지와라 -> 우에스기[上杉], 사토우[佐藤]
      타이라 -> 호우죠우[北条], 치바[千葉], 오다[織田]??
      미나모토 -> 아시카가[足利], 닛타[新田]...
      로 나뉘어 지듯이, 후지와라, 타이라, 미나모토를 저는 우리나라의 김씨, 이씨, 박씨... 등등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거기에 가령 저같은 경우 함창 김씨 이니, 일본식으로 이름을 쓴다면 '함창 태진'....이 되지 않을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

      후지와라나 겐지, 헤이시가 각각 안 쓰이게 되는 상황 등을 살펴 보면 나올 것도 같습니다(헤이시가 太政大臣을 한 다음 멸문한 다음 '타이라'라고 칭하지 않았다거나, 겐지가 将軍을 한 뒤 '미나모토'를 직접 칭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식으로 뭔가 법칙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야~ 법칙은 있습니다.(가령 지금도 이름으로 쓸 수 없는 한자가 있다고 하네요)

      그리고 그 사람이 원하는 식으로 불러 주는 것이 올바르다 생각합니다.
      가령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는 당시에 서로간의 편지나 족보 등에 '야마우치 카츠토요'라고 되어 있다고 하니, 그렇게 불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면서도 저는 입에 배었는지 '야마노우치 카즈토요'라고 하지만요)

  3. Gyuphi IV 2009.12.28 2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뭔가 이 사람은.. 뭐 결과론적인 말입니다만 중요한 순간의 어리석은 선택의 반복으로 인생 쫑낸 것 같이 느껴지더군요. 명줄이라도 카토 키요마사처럼 짧았어도 이렇게나 당대에 망가지진 않았을것을.. 역시 바보라서 별 걱정도 생각도 없어서 오래 산건가 싶기도 싶기도 하고 말이죠-_-;;

    그런데 정말이지 오사카성 말입니다만.. 뭐 지금의 공구리 보수 이전의 규모는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만, 후쿠시마 마사노리 말 마따나 오사카측이 선택에 전연 미스 없이, 굳게 지키고 있었다면 낙성당하지 않았으려나요, 해자를 메운다는게 정말이지 일반적인 상상 이상의 도쿠가와가에게 전술적 이득을 안겨준 행위였던가, 싶네요. (라곤 해도 나고야성 가보면 그 해자도 참 깊다 생각드는데 당시 규모의 오사카성이었다면..)

    후세인이란 그러고보니 참 편한듯 합니다. 이정도 세월이 지나면 그 당대의 고민따윈 크게 의식않고 막 말해도 잡아가는 사람도 없으니까요(아, 이건 참 역사에 흥미있는 사람들의 특권@.@)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30 0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 곳을 정하면 무작정 그 방향으로만 냅다 뛰는 성격이 아닐지... 왠지 저에겐 그렇게 느껴지더군요.

      전쟁과 성 쪽은 제가 좀 딸리는 편이라 말하기 뭐합니다만, 토쿠가와 쪽의 오오사카 성이 이시가키[石垣]가 더 높고 텐슈[天守]도 크고 높으며, 성 면적 자체도 조금 더 커졌더군요. 그렇게 만든 놈이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라고 하던데, 직접 오오사카 공성전에 참가한 놈이었던 만큼, 뭔가 허술한 점을 찾았기에 히데요시와는 다른 형태의 성을 만들었다고도 생각합니다.(뭐 대포가 쓰인 것도 있었고 말입니다)

      그쵸. 당시에 그 사람 앞에서 대놓고 이야기 했다간 斬り捨て御免이었을테니까요. ^^;

  4. 맹꽁이서당 2010.01.01 2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두번째 분 (상?장안) 님의 두번째 문단에 공감이 가네요.
    (근데 도요토미 덕택에 출세한 인물 들 중에서도, 도요토미 본가나 가토, 후쿠시마 와는 달리 에도 막부 시대에도 건재했던 가문도 있을 법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하여튼 올 한해도 좋은 글 잘 읽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1.02 0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사가미 나가야스[相模 長安]'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 사가미님 ^^

      호소카와 가문[細川家]가 우선 떠오르는군요. 토요토미 덕택에 출세한 가문으로. 뭐 마에다 가문[前田家]도 100만석 이상 얻어 떵떵거리며 살았고, 아사노 가문[浅野家]이라던가, 하치스카 가문[蜂須賀家], 야마우치 가문[山内家]도 그 범주에 포함될 듯.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저 역시 올 한 해 잘 부탁드립니다. ^^

    •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10.01.08 08: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가미 나가야스로 읽는 것이 맞습니다.
      저같은 소인에게 관심을 가져주시니 감사할 따름. (헤헤)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들어선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가신들을 이끌고 말에 올라 에도[江戸]의 대로를 가로지르는 히고[肥後] 54만석의 다이묘우[大名] 카토우 키요마사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에도 시민들 사이에 화제를 되었다.
 키요마사는 신장이 6척[각주:1]을 가볍게 넘고[각주:2]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에 입이나 턱 주위에는 수염이 무성하게 덮인 대장부였다. 허리에는 1m7cm의 큰 칼[大刀]을 차고, 어깨높이가 180cm 넘는 괴물같이 거대한 말에 올라타 있었다 한다. 무엇보다 당시의 말은 어깨높이 120cm가 보통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키요마사에게서 고(故)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秀吉]의 직속 장수, 무공이 뛰어나 ‘칠본창[각주:3]’이라는 이명을 얻은 무장, 임진왜란 시 일본의 맹장에 걸맞은 보습이라 보고 나중에는 유행가까지 만들었다.

에도 깡패 모가리에게 거칠 것은 없겠지만 밤색 제석만은 피하시오
江戸のもがりにさわりはすとも、よけて通しゃれ帝釈栗毛
 ‘에도 깡패 모가리[江戸のもがり]’는 당시 에도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공갈 깡패를 말하며, ‘밤색 제석[帝釈栗毛]’는 키요마사의 애마를 말한다. 안하무인인 깡패라도 키요마사가 타는 말에는 대적할 수 없다는 말이리라.

 키요마사는 센고쿠[戦国] 무장 중에서도 일화가 많은 사람인데, 특히 조선에서 호랑이 퇴치는 널리 알려져 있다. 십문자 창을 휘둘러 호랑이의 숨을 끊었는데 그때 호랑이는 창의 한쪽 날을 물어서 뜯었다는 이야기인데[각주:4], 이는 에도 시대 말기의 창작으로 처음 실린 책에서 키요마사는 철포를 쏘아 호랑이를 잡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키요마사의 통칭은 토라노스케[虎之助]로  범 호(虎)자가 들어간다.

 키요마사는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尾張] 나카무라[中村] 태생이라고 하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키요마사의 모친은 히데요시의 모친(오오만도코로[大政所])과 사촌지간이라고 한다[각주:5]. 그런 연으로 키요마사는 어릴 적에 당시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주였던 히데요시에게 맡겨졌다. 이때부터 문자 그대로 히데요시가 직접 키운 가신으로서의 키요마사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다.
 히데요시 자신도 노부나가[信長]가 아니었다면 출세할 수 없었을 정도로 미천하였기에, 친척이나 히데요시 가문을 대대로 섬긴 가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에 키요마사와 같이 조금이라도 핏줄이 닿는 사람을 교육시켜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려 하였다. 그런 만큼 키요마사의 출세도 빨랐다.

 1576년 15살 성인식이 있던 해에 170석을 받았으며[각주:6], 1581년 6월 20살에 톳토리 성[鳥取城] 공성전에서 데뷔전[初陣]을 치르게 되는데 키요마사는 정찰 나갔다가 공을 세웠고, 이후 히데요시를 따라 각지를 전전.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칠본창(七本槍)라 일컬어지는 전공을 세워 일약 3000석[각주:7]이 주어진다. 지위도 철포 150정, 히데요시가 파견하는 무사[与力] 20명을 휘하에 둔 중급 장교[物頭]로 승진하였다. 이 정도되면 당당한 무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례적인 출세에는 히데요시의 덕도 있었겠지만 그 이상으로 키요마사 자신이 무장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후도 키요마사는 히데요시를 따라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役], 큐우슈우 정벌전[九州の役] 등에 참전하여 1588년에는 일거에 히고[肥後] 절반이 주어져 드디어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나머지 반을 하사 받은 것이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이다.

 1592년 조선 침략[각주:8]에서 키요마사는 코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선봉에 임명되어 서로 경쟁해 가며 파죽지세로 진격하였지만, 곧바로 의병(義兵)이 일어나고 명나라가 원군을 파병하자 전황이 악화되었다. 거기에 전쟁정책에 관해 대륙정복론자인 키요마사와 화평론자인 코니시 유키나가 사이에는 자연스레 반목이 생겨, 결국에는 작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원래 둘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소위 무공파와 문치파로 대립하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키요마사의 신상에 위기가 생긴다.

 조선에 가 4년째인 1595년.
 갑자기 히데요시에게서 귀국을 명령 받은 것이다. 그것이 히데요시의 분노를 나타내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귀국명령은 일본군의 감찰[軍監]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이 작성한 키요마사의 행동보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시다의 보고는 전부 키요마사의 방자한 말과 행동을 비난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명령에 따라 키요마사는 후시미[伏見]로 돌아왔지만, 히데요시는 면담을 허용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키요마사는 다섯 행정관[五奉行] 중 한 명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에게 히데요시의 화를 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나가모리는 미츠나리와 화해하기만을 권할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키요마사는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냐며,
“하치만[八幡][각주:9]도 굽어 살피소서, 지부[治部][각주:10]놈과 평생 화해 따위 하지 않겠소. 그 놈은 조선에서 한 번도 싸우지 않은 주제[각주:11]에 남의 뒤따마만 까며 끌어내리려고만 하는 더러운 놈이다. 아무리 소인이 타이코우[太閤[각주:12]]에게 용서를 받지 못하고 배를 가르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지부 놈과는 화해는 하지 않겠소.”
하며 분노하였다고 한다.

 키요마사의 근신생활은 반년 정도 이어졌다. 그러던 1596년 7월. 킨키[近畿] 지방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 속설에 따르면 키요마사는 근신 중인 자신의 처지도 잊고 수하 200여를 이끌고 후시미 성에 와서 히데요시를 보호하며 성을 수비하였다. 이것을 안 히데요시도 노여움을 풀고 키요마사의 죄를 용서했다고 한다[각주:13] [각주:14]. 후세 연극 등에서 ‘지진 카토우[地震 加藤]'라 불리게 되는 명장면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키요마사의 명성은 한층 더 높아지게 되었다.

 1597년. 조선으로 재침공. 즉 정유재란이 시작되자 키요마사는 또다시 출정하여 이 해의 막바지에 가장 치열하고 처참한 전투를 치르게 된다. 유명한 울산성(蔚山城) 농성전이다.
 엄동의 12월[각주:15]. 4만4천이라는 명나라 대군의 포위 속에서도 키요마사는 철저항전 하였다. 성 안의 식량은 이미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더구나 명의 전법은 장기 포위전[兵糧攻め]이었다. 성 안에 있던 오오코우치 히데모토[大河内 秀元][각주:16]는,
 “매일 행전(行纏)[각주:17]이 흘러 내렸다. 처음엔 고쳐 맸지만 나중에 뭔가 이상하여 행전을 떼어 보자 다리에 살이 하나도 없이 뼈와 가죽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고 기록하였고, 명나라 기록에도 - 일본군은 종이를 먹고 오줌으로 갈증을 해소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듯이 성 안 일본 병사들은 굶주림과 추위로 인해 동상에 걸리는 사람, 얼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러한 지옥 속에서 키요마사도 죽음을 각오했는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 등 여러 장수들에게 보낸 편지에,
 “만약 낙성된다면 이런 모습들을 타이코우[太閤] 님에게 보고해 주길 바란다”
 고 썼다. 모우리[毛利], 나베시마[鍋島], 쿠로다[黒田] 등 여러 장수의 구원이 제시간에 도착하여 조선과 명의 군사들은 포위를 풀고 철퇴하였다.

 고군(孤軍)이면서 항전을 계속한 키요마사에게 적인 명나라 측도,
 “오랑캐[酋] 중에서는 가장 사납고 굳세다”
 “재능은 유키나가보다 몇 배나 뛰어나다”
 며 절찬하였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어 길었던 조선에서의 싸움도 끝났다. 키요마사에게 남겨진 것은 두 번에 걸친 전쟁 중에 한층 더 깊어진 이시다 미츠나리, 코니시 유키나가 등에 대한 증오뿐이었다. 이런 키요마사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의 편을 들 이유가 없었다.
 키요마사는 큐우슈우[九州]에서 동군 측에 서서 싸워, 코니시 유키나가의 거성 우토 성[宇土城]과 속성 야츠시로 성[八代城]을 공략. 전쟁 후 히고[肥後] 전부를 하사 받았다[각주:18]. 천하의 명성 쿠마모토 성[熊本城]의 축성에 임한 것은 다음 해인 1601년이었다.

 토쿠가와의 시대에 들어서도 키요마사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없었던 듯, 토요토미 가문 존속을 위해, 1611년 히데요리[秀頼]를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대면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쿠마모토로 돌아가던 도중 병에 걸려 귀성한 뒤 얼마 지나 죽었다. 그 죽음이 너무도 급작스러웠기에 독살설도 유포되었다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加藤 清正)]
1562년 오와리[尾張] 에치 군[愛智郡] 나카무라[中村]에서 태어났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合戦] 후
오우미[近江], 야마시로[山城], 카와치[河内]에 조금씩 3000석을 하사 받았다.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에 종군하여 히고[肥後]의 반인 25만석을 영유하였다[각주:19].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동군에 속하여 히고 54만석을 하사 받았다. 축성, 치수, 간척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1611년 6월 24일 죽었다. 51세.

  1. 6척3촌. 약 191cm. [본문으로]
  2. 5척3촌(161)이라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1583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4. 때문에 키요마사의 동상에 있는 창은 십문자창이 아니라 "ㅓ"자형 창이다. [본문으로]
  5.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한보[藩翰譜]에는 그렇게 실렸다 한다. [본문으로]
  6. 문서로 남아 있기로는, 1580년 히데요시에게서 하리마[播磨] 내에 120석을 받은 것이 초견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7. 오우미[近江] 내에 1800석, 카와치[河内] 내에 1097석, 야마시로[山城]에 50석...으로 약 3000석. [본문으로]
  8. 임진왜란. [본문으로]
  9. 무가(武家)의 수호신 [본문으로]
  10. 지부쇼우유우[治部少輔]. 이시다 미츠나리의 관직명. [본문으로]
  11. 행주산성에 참전하여 부상당했다. [본문으로]
  12. 타이코우[太閤]는 칸파쿠[関白]직에서 물러난 사람을 이르는 경칭. 즉 히데요시. [본문으로]
  13. 당시 키요마사가 히데요시의 안부를 묻는 편지가 있기에(직접 지켰다면 안부 편지 같은 것은 안 쓸테니), 실제로 달려가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14. 실제 키요마사 근신이 풀리는 데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주선 덕분이라 여겨지고 있다. [본문으로]
  15. 음력. [본문으로]
  16. 일본측에서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전말을 기록한 "조선 이야기[朝鮮物語]"의 저자. [본문으로]
  17. 정강이에 차는 각반....(저는 행전보단 각반이 익숙합니다만 '행전'으로 쓰라고 하네요) [본문으로]
  18. 단 후에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의 무대가 되는 아마쿠사[天草] 섬 등은 기독교도들이 많았기에 막부에 부탁하여 옆 지방인 붕고[豊後]의 세 개군(郡)과 교환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9. 19만~25만석까지 다양. 개인적인 추측으로 19만석은 키요마사에게 주어진 것이며, 3만석은 키요마사 편제 하의 히고 지역 호족[国人], 거기에 히고[肥後] 안에 있던 히데요시 직할령[蔵入地] 3만석을 키요마사가 대관(代官)이 되어 관리한 것을 포함하여 25만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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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12.18 15: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이전에 쿄토 갔을적 니죠성에 들른적이 있었는데 이사람이 단검품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추워서(1월-_-..)였을지도 모르겠다 싶긴 했는데-_-.. 아무래도 히데요시 코붕들(;)에겐 별 관심이 없었던 덕일지 모르겠다 싶네요.

    뭐 아무튼 숙적에서의 이미지는 정말이지 聖(;) 아우구스티노 유키나가(-_-..)의 반대역이어서 그런지 영 안 땡기던데 말이죠. 역시 창칼드는 캐러들이 제 취향은 아닌듯 합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18 23: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니죠우 성[二条城]하면 개인적으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 - 대정봉환한 장소 - 더군요.

      이외로(??) 키요마사는 재정과 무역에 밝은 인물이었다고 하더군요. 거기에 이름뿐이긴 해도 관직명이, 지금의 재무부 관료인 '카즈에노카미[主計頭]'. 창칼 뿐만이 아닌 듯 하더군요.

  2.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2.18 2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쿠가와나 오다의 사천왕 같은건 나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데
    칠본창은 왠지 창이 아니라 방패막이 7명 느낌이 들더군요. 히데요시 출신 때문인가...음;;;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18 23: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스케일이 달라서 그런 것 아닐까요? ^^

      가령 오다나 토쿠가와의 사천왕은 그 가문 전체의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이고, 칠본창 같은 경우 단지 일개 전투에서 공적을 세운 애들 뿐이니까요.

      히데요시의 칠본창은, 오다 가문의 '아즈키자카 칠본창[小豆坂 七本槍]'이나, 토쿠가와 가문의 '카니에 칠본창[蟹江 七本槍]'과 비교해야 할 듯 싶군요. 히데요시도 저 7이란 숫자에 맞추어 칠본창을 만들었을 수도 있고요.

  3. 朴先生 2009.12.19 15: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에이 게임에서는 왠만한 무장들이 통솔, 무력이 90이상이면 지력이나 정치는 거의 40이하로 버리는 편이지만 키요마사는 70정도는 돼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태합에서는 스킬은 차지하고, 대략 용장형, 검호형, 책사형, 내정형, 먼치킨형, 그냥 병X...정도로 구분하지만 키요마사는 먼치킨급은 아니나 내정에도 그런대로 쓸만하니...

    그냥 '변태'같습니다.

    불현듯 두산 베어스의 변태 스탯 '고영민'선수가 떠오르네요.ㅋ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19 17: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컴퓨터 바꾸면서 태합 설치를 않해서 잘 기억은 안나지만 키요마사는 꽤 쓸모가 있었던 듯한 기억이 나는군요.

      ps;요즘 야구를 안 봐서 고영민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거기다 좋아했던 팀이 LG인지라 두산하면...아이고 배 아퍼!!! 라는 느낌이 먼저 드는군요.

  4. 朴先生 2009.12.20 1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두산의 2번 타자로 타율은 높지 않지만 출루율이랑 장타율은 높고 갖가지 허슬 플레이에 자기 위치도 아닌데 어느샌가 달려가 플라이 볼을 잡아내는 이상한 선수입니다.

    저도 LG팬입니다. 몇년째 하위권을 맴돌아 직접 보러갈 기분도 안나지만요. 가면 실망만 잔뜩하고;
    잠실 가본지도 오래됐네요..
    내년엔 가을에 야구장 갈 수 있게되면 좋겠습니다 제발 좀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1 11: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 엘지가 유지현 내칠 때 마음이 어느 정도 떠났습죠. 인위적인 세대교체가 얼마나 팀에 악영향을 끼치는지 좋은 견본이 되었다 생각합니다.

  5. Favicon of https://michiganlake.tistory.com BlogIcon Commissioner 2009.12.20 19: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인 전국시대 3대 수수께끼라면 히데요리의 아버지(생물학적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 그리고 '기요마사의 키'가 아닐까 싶습니다. 투구로 만인을 속인 것인지 아니면 진짜 거인인 건지. (만약 191cm라면 야마가타와는 최대 70cm까지 차이나는군요!!)

    기요마사는 히데요시가 아껴서 키워낼만한 사람이란 생각이 듭니다. 마사노리, 미쓰나리, 요시쓰구, 요시아키라, 나가마사, 기요마사. 히데요시의 손을 거친 장수들은 본바탕도 좋았겠지만 히데요시의 능력이 십분 발휘된 것 아니겠습니까? (이 능력이 어찌 후손을 보는 쪽으로는 없었는지.) 언급한 사람들 중 나가마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문이 박살나버렸지만. 그러고보니 다다히로의 정확한 가이에키 명분은 투서사건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혹시 다른 이유가 있었나요?

    한국인(당시 조선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위키디피아에서는 '쾌지나칭칭나네'가 기요마사 덕분에 탄생했다는 소개도 있구요.) 너무 작전수행을 열심히 한 덕분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 인물이 되어버렸다는 점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네요 -_-

    수능도 지나갔는데 언젠가 시간이 되면 구마모토와 나고야를 가보고 싶습니다. 기요마사의 유품인 우아한 명성들은 저에게 무슨 얘기를 해줄까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1 11: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가미님의 미스터리에 대한 제 주관적인 시각은....

      - 히데요리의 애비는 히데요시가 맞다고 생각하며,

      - 미츠히데의 모반은 노부나가의 시코쿠[四国] 정책 변경에 따른 아케치의 부하장수 사이토우 토시미츠[斎藤 利三] 주도로 일어난 일(....심하게는 미츠히데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죠)

      - 키요마사는...음.... 어떨까요. 조선왕조실록을 다 살핀 것은 아니지만, 키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냥 평범한 편은 아닐지...

      타다히로에 관해서는 일반적인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무엇보다 키요마사가 가상의 적으로 막부군에 대비한 영내 경영을 펼친 것이 가장 크지 않을지...나중에 사이고우 타카모리[西郷 隆盛]가 당시 최강이라 일컬어 지던 사츠마 군[薩摩軍]을 이끌고도 함락시키지 못한 쿠마모토 성은 물론, 정부군이 큐우슈우[九州]로 내려오자 그에 맞써 싸운 타하라자카 고개[田原坂]조차 키요마사가 히고 번주일 때, 토쿠가와 막부가 쳐들어 왔을 때를 대비해 인공적으로 만든 곳이라고 하니까요. 그런 모습들이 막부를 불안케 하지 않았을지...

      조선에서 미움 받는 것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술책인 듯 싶습니다.(황정욱 손자의 팔다리를 자른 막장짓도 있습니다만).
      거기에 일본군의 대명사로 유키나가, 키요마사로 지칭되며 코니시는 약간 선역, 키요마사는 악역으로 대표되지 않았나도 싶습니다.

      부럽군요. 여행 많이 다니면 좋습죠. 개인적으로 여행은 목적지로 가능 동안의 시간을 좋아하지 않아 싫어하는 편입니다만, 나이 먹고 보면 여행 많이 안 다닌 것이 좀 아쉽더군요.

  6. 정동희 2009.12.21 1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작년인가 구마모토성 보고 왔는데... 가이드 말이... 거의 대부분 조선 포로들이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전국 시대 3대 궁금증은 저도 참 궁금하네요...
    히데요리가 히데요시의 친자가 맞다면... 요도기미하고는 원숭이 아저씨가 유달리 궁합이 잘 맞었던 모양이군요
    미츠히데의 모반 건은... 정말 의문이에요... 계획적이라고 보기엔 그 뒤의 행동이 너무 허술하고
    충동적이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큰 일을 저질렀고...
    여태까지 원한설, 조정음모설 등등은 들어 봤는데, 사이토 도시미츠에 의한 설은 처음 듣네요
    발해지랑님 가능하시면 좀 자세히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미츠히데 - 죠쇼카베, 히데요시 - 미요시, 소고 정도 까지만 알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1 13: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성에 관해서는 무지에 가까운지라...
      근데 가이드하셨던 분은 일본분이셨나요?

      개인적으로 쿠마모토 성이 조선 포로로 만들었다는 말은, 모 방송에서 한국 여학생이 그런 식으로 말한 뒤에 한때 화제가 되긴 했습니다만, 아직 제가 책같은 매체로 접한 적은 없습니다.

      요도도노가 다산이 가문 특기인 오다 가문 출신인 점도 한 몫 했다고 생각합니다.

      컥~ 또 쓸데없는 말을 해서 독박쓰게 생겼네요 ^^;
      미츠히데-쵸우소카베, 히데요시-미요시까지 아시면 조금만 더 파고드시면 "아~ 이 자슥이 기껏해야 이런 걸로 저런 말을 하는구나"라는 것을 아시게 되지 않을지....댓글로 끝낼 수 있는 분량이 아닌 것 같군요. 나중에 따로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이건 용서를...

      ps;정동희님이시라... 혹시 전클 유키무라..님???

    • 정동희 2009.12.21 13: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전클 유키무라 맞습니다
      전클의 추억도 이젠 가물가물 하군요
      가이드는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본사에
      대한 지식이 많더라구요
      저도 근거는 없고 그냥 들은 얘기 입니다

      히데요리의 경우는 저도 히데요시 친자쪽이라고 믿고 있는데... 이상하게 애비를 너무 안 닯은 것 같아서요

      미츠히데 모반건은 책이나 뭐 인터넷을 뒤져 봐야겠네요
      근데 전국사에 대한 흥미도 이젠 바쁜 생활에 파묻혀서...
      예전처럼 관심사 비슷한 사람들 만나서 얘기하면 재미 있겠지만

      그냥 이래 저래 먹고 사는 고민 만으로도 정신 없네요

      발해지랑님처럼 좋은 글 올려주시는 분들 덕분에 이 약간의 취미나마 이어가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1 20: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전클의 나오이에[直家]였다는 것을 알면서 존댓말 쓰시는 겁니까? ....라고 해도 못 만난지 십 년 가까이 지났으니 어쩔 수 없긴 하겠군요.(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대학로 였던 듯 ^^ )

      가이드에 관해서 일본인이냐고 물었던 것은...
      요 몇 해전에도 우리나라에서 조선족 관광가이드가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세종대왕이 한글을 화장실에서 일보다 창틀보면서 만들었네 어쩌네 하고, 뭐든 중국기원설을 펼쳐서 문제가 된 적이 있듯이 저 개인적으로는 관광가이드를 신뢰하기는 좀 그렇더군요.

      히데요리와 히데요시는....
      어렸을 적에 뭘 먹고 자랐느냐에 관한 차이 아닐까요? 어렸을 때 험하게 자란 히데요시와 그에 반해 온갖 산해진미를 먹고 자란 히데요리는 차이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마치 현대 미국의 비만인이 50%가 넘는 것 처럼요.

      미츠히데 모반건은 언젠가 시간이 되면요..^^;

      예전처럼 언젠가 함 봐요. ^^

    • 정동희 2009.12.22 1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클의 나오이에님...
      아아 솔직히 기억이 안나네요
      사실 요즘은 어제 일도 기억이 잘 안나기 때문에
      만나뵈면 저도 좋죠

      전 결혼해서 방배동에 살고 있습니다
      회사는 분당 정자동으로 다니고 있구요
      월급쟁이 하면서 마누라 눈치 보면서
      근근히 살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2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컥~ 설사 기억이 안나셔도 쫌 기억난다고 좀 해 주시지... 저렇게 친한 척했는데.

      하긴 10년 전에 두세번 보았을 뿐이니 기억 못하시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

      신년이 되면 함 보자구요!(솔직히 전 굉장히 반갑거든요 ^^ )
      만나는 곳은 저희 집과 동희님 집 사이인 영등포 근처로 해서요.

    • 정동희 2009.12.23 09:44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즘 제 기억력이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그간 장복한 술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년 이맘때 결혼하고 하도 많은 일이 생겨서
      기억용량이 많이 오버된 모양입니다

      그래도 기억해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신년에 한 번 뵙죠
      결혼하고 나니 제 스케줄이 맘대로 조정이 안되서요
      암튼 언제든 시간 날 때 연락 드리겠습니다
      연락은 이 블로그에 댓글 다는 걸로 하겠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3 2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

      결혼하지 않았지만 저도 주체적인 스케줄 잡기가 어려우니 서로 협의해 나가자구요.

  7. 朴先生 2009.12.22 0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꾀돌이 유지현.. 저 개인적으로 KBO 최고 유격수는 아니었지만 LG에서는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고 생각합니다. 재치있는 플레이에 훌륭한 작전수행능력, 신바람야구는 유지현 타석부터였지요. 저도 LG에서 가장 좋아했던 선수였드랬습니다. 뭐 요즘엔 주루코치로 가아끔 보이더라구요. 뜬금없지만 결론은 LG를 '순페이'가 말아먹었다는 겁니다... 뭐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 선수의 은퇴나 트레이드가 이순철 감독 탓은 아니고 프런트에 의한 압박이란 말도 있지만요. 아무튼 인위적인 세대교체가 악영향을 끼쳤다는데는 저도 동감합니다. 2004년부터 막장으로 치달아 2006년엔 팀사상 처음으로 꼴찌.. 2008년에 또 꼴찌..

    어쩌다 화제가 키요마사에서 LG로... 아... 고영민... 변태;;;;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2.22 12: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병규가 와서 이제 아는 선수도 생겼으니 이번 년도는 함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더군요.

      한때 엘지는 유일하게 꼴찌 경험이 없던 팀이었는데, 진갑용 때 2차1순위 얻겠다고 두산이랑 꼴찌 다툼하며 팀 역사를 깡그리 무시하던 것이 생각나는군요.

      ....그러게요. ^^ 이제 야구 이야기는 여기서 끝!!!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일찍부터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라는 인물을 높게 평가하였다.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가 훌륭한 명장이라 일컬어지는 이유는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같이 뛰어난 인물에게 국정을 맡겼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대놓고 말하자면 나오시게가 있었기에 류우조우지 가문의 융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1584년 3월. 시마즈(島津)-아리마(有馬) 연합군에게 패하여 대장 타카노부가 전사하자 류우조우지 가문의 운명은 나오시게의 양 어깨에 달리게 되었다. 타카노부의 뒤를 이은 마사이에(政家)는 대장으로서의 기량이 결여되어 있었다. 히데요시의 천하였던 1587년, 이 마사이에의 범용함으로 인해 류우조우지 가문은 모반혐의를 받게 된다.

 이해, 히고(肥後)에 있던 삿사 나리마사의 영내(領內)에서 토착 영주(国人)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근린의 여러 다이묘우(大名)가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전부 출진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사이에는 병에 걸렸다며 출진하지 않은 것이다.(관련링크[각주:1])
 당시 오오사카(大坂)에 있던 나오시게는 서둘러 귀국하여 어쨌든 자신만이라도 출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히고(肥後)에 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등의 감찰관(軍奉行)들과 만났다. 감찰관들은,
 "마사이에는 병에 걸렸다고 하지만 실은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말하였다. 나오시게는 열심히 그 사실을 부정했다. 곧바로 마사이에를 데리고 참전하겠습니다 – 하고 변명에 힘쓴 후 사가(
佐賀)로 돌아와 마사이에를 나무란 후 참전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마사이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카와카미 다이묘우진(
河上大明神[각주:2]) 의 신탁이 이르길 참전은 쓸모 없는 일이라고 나왔으며, 요가 신사(与賀神社)에 있던 녹나무의 잎이 전부 떨어지는 불길한 일이 있었다. 또한 이이모리 촌(飯森村)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타카노부)의 혼령이 씌어 출전하면 전사한다고 외쳤다더군. 성안에서도 여자의 우는 소리가 나는 등 이변이 끊이질 않네"
 나오시게는 너무도 어리석은 답변에 격노하며, 녹나무가 늙어서 잎이 떨어지는 것에 뭔 이상한 점이 있소 – 라며 불길하다는 말을 입에 담은 자를 즉각 처형하고,
 "주군은 여우에게조차 좆병진 취급[각주:3]을 당하고 있습니다!"
 고 질타하곤 히고(肥後)의 전쟁터로 끌고 나간 것이다.

 이리하여 마사이에는 모반혐의를 벗을 수 있었지만 이런 마사이에였기에 점점 희미한 존재가 되어갔고 반대로 나오시게의 존재감이 커져만 갔다.
 1590년 결국 마사이에는 아직 35세라는 한창 일할 나이에 병약함을 이유로 은거의 몸이 되었다.
 이때 일문과 숙노들이 모여 회의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마사이에의 친할머니인 케이긴니(
慶誾尼[각주:4])가,
 "지금 이 상황에서 나오시게님 말고는 류우조우지 가문의 안태를 꾀할 수 있는 인물이 없습니다. 마사이에 다음의 가독은 나오시게님이 하셔야만 합니다"
 라는 의견을 내놓자 그곳에 있던 모두가 동의를 했다고 한다. 또한 나오시게가 가독을 이은 배후에는 히데요시의 뜻도 작용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나오시게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조선의 왕자 둘[각주:5]을 포로로 잡는 대공을 세웠다. 후에 키요마사가 나오시게를 평하길,
 "내 생애에서 조선에서 싸운 것만큼 편한 적은 없었다. 모두 나베시마 나오시게 덕분이다. 공을 다투는 일 없이 군율을 엄격히 지키며 나에게 협력해 주었다"
 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오시게는 일찍부터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역량을 파악하여 세키가하라() 후엔 토쿠가와의 천하가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 혜안덕분에 막말(幕末)까지 35만석의 나베시마 가문은 이어질 수 있었다.

 그에 비해 류우조우지 가문은 비참했다. 마사이에의 아들 타카후사(高房)는 영지(領地)를 나오시게에게 빼앗긴 것을 원망하여 1607년 19살의 자기 부인을 찔러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꾀하여 실패. 결국 그 상처가 원인이 되어 죽었다. 후년 이야기꾼(講談)들에 의해 유명해진 [나베시마 냥이 소동(鍋島猫騒動)[각주:6]]은 이 류우조우지 가문의 원한을 바탕으로 각색한 것이라 한다.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
1583년생. 첫 이름은 노부나리(
信生). 류우조우지 가문(竜造寺家)의 가신이었지만 타카노부(隆信)의 죽음 후 실권을 장악하였고, 1590년 류우조우지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 히젠(肥前) 사가 성(佐賀城)의 성주가 된다. 1618년 6월 죽었다. 81세[각주:7].

  1. 전국무장 말년과 최후. '삿사 나리마사'항목의 중간쯤 관련 사항이 나와 있습죠. [본문으로]
  2. '요도히메카미(與止日女神)'의 별칭. 바다의 신인 '와타츠미카미(大綿津見神)'의 딸 혹은 일본 판타지 주인공 '신공왕후(神功王后)'의 여동생이라고도 한다. 히젠(肥前)에서는 가장 급수가 높은 신사(肥前一宮)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말로 "여우에 홀리다(狐憑き)"는 말이 있다. [본문으로]
  4. 류우조우지 가문을 위한다며 50가까운 나이에 나오시게의 부친을 강제로 취한 타카노부(隆信)의 모친. 즉 나오시게의 양엄마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5. 함경도에 있던 임해군과 순화군. 그들이 잡았다기 보다는 반란을 일으킨 함경도의 아전 국경인(鞠景仁)에게 잡혀 넘겨졌다. [본문으로]
  6. 여러 버전이 있는데...대충 종합하면...나오시게의 아들 카츠시게(勝茂)가 사사로운 일로 가신을 죽였다. 그 가신에게는 늙은 모친이 있어 아들이 죽자 카츠시게를 저주하는 말을 기르던 고양이에게 하다가 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고 한다. 고양이는 모친의 피를 핥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후 카츠시게는 병이 들거나 그의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 또한 성안에 이변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수상히 여긴 가신들이 불침번을 서다가 새로 성에 들어온 카츠시게의 측실 '토요노카타(豊の方)'가 고양이괴물로 변해 일을 꾸미는 것을 퇴치한 이후로 카츠시게의 병도 낫고 이변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버전에서는 타카후사가 기르던 고양이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7. 죽을 때 귀에 생긴 종양으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죽었기에 이것이 류우조우지 타카후사의 저주로 인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나베시마 냥이 소동'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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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ameh 2009.07.08 1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 의외로 사인이 종기였군요. 그래도 장수니 나쁘진 아니한가 싶기도 합니다.

    여담이지만 뭐 류조지 타카노부는 자기가 무덤을 판게지요. 암, 하늘의 칼은 종종 필요한데에 떨어질때도 있는데 타카노부가 딱 그러한 경우다 싶더군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09 18: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오시게의 노년 때는 미쳐서 무녀의 말을 듣고는 부하도 몇 명 죽이고 했나 보더군요. 하지만 나오시게는 역사의 승자인지라 葉隠라는 필살기로 온화하기만 한 명군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 같더군요.

      여담으로... 센고쿠 삼배신(三倍臣)이라면...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 호리 나오마사(堀 直政)이지만, 호리는 신장의 야망에 나오지 않을 때도 있을 정도로 안습...하지만 하가쿠레(葉隠)에서 히데요시가 말했다며 호리 나오마사를 빼고 나오시게 투입... 그 이후 왠지 삼배신하면 코바야카와, 나오에, 나베시마로 굳혀진 듯.

      2009/07/09. 18.52분 추가..
      나오시게를 칭찬한 하가쿠레가 먼저(1716) 나왔군요. 호리 나오마사가 나온 명장언행록(1869)에 나온 것 보다..컥~

  2. 맹꽁이서당 2009.07.08 16: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쪽도 가신 출신으로 영주가 된 사람이군요.
    요새 춘추전국시대를 읽고 있는데, 전국칠웅 중 절반 이상이 '찬탈' 가문인 것을 알고 새삼 놀랬습니다. 진을 분할한 한,위,조는 그렇다 해도 제나라까지 그랬을줄이야... 과연 적은 외부 뿐 아니라 내부에도 있었군요.
    하여튼 35만석이라면 막부시대 규슈에서는 시마즈 다음으로 큰 다이묘였을까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09 1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중국 춘추전국시대는 꼭 공부해 보고 싶은 것인데 개념이 잘 안 잡히더군요. 저는...
      산 책만 몇 권 되는데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듯..
      (어쩌면 읽긴 했어도 읽었다는 기억도 없을 정도)

      큐우슈우 No.1은 말씀하신 대로 시마즈 77만석입니다.
      2위는 호소카와(細川) 쿠마모토(熊本)의 54만석.
      3위는 쿠로다(黒田) 후쿠오카(福岡) 47만석.
      4위는 나베시마(鍋島) 사가(佐賀) 36만석.
      5위는 쿠루메(久留米) 아리마(有馬) 21만석...입니다.

  3. shiroyume 2009.07.10 12: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잠시 딴 소리 하자면 시마즈가에 점령되어 일본과 명의 중개무역을 담당했던 오키나와 왠지 모 소설의 '페잔'같지 않나요 ㅋㅋ
    뭐 아시겠지만 저도 확인차 보니 1600년도에 아들인 가쓰시게는 의외로 서군에 참여했다고 하네요. 히데요시가 이런거 보면 의외로 인망이 있었나?
    이것도 아시겠지만 참고로 훗날 에도바쿠후 당시 나베시마가문의 히젠한의 전매품은 '도자기'라고 합니다. 불쌍해요 삼평아저씨 ㅠ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15 11: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호오~ 그런가요? 오키나와에 관해서는 아직 공부해 본 적이 없어서요.

      세키가하라에서 서국 다이묘우들이 서군에 참가한 것은...조금 복잡한 것이 이시다 미츠나리가 후시미나 오오사카, 쿄우에 있는 인질 잡기나 길에 검문소 등을 설치해서 동군에 참가를 막았기 때문인 듯 합니다. 뭐 이런 식으로 여겨지는 사람은 쵸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 盛親)도 그렇고... 조금 상황이 다르지만 원래는 동군에 참가하려다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의 의심으로 서군에 참가할 수 밖에 없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도 있는 등...세키가하라에서 동서로 나누는 것은 간단하지가 않더군요.

      에도시대 각 번의 재정재건에 관한 책에서 각 번별로 특산품 & 전매품에 관해 정리가 잘 된 책이 있었는데 누구 빌려 주었다가 돌려 받지 못했습죠... 하신 말씀을 듣고 보니 그 책이 너무 아깝군요.

十三.

 요도도노(淀殿)는 분노했다. 상경하라니 마치 주인이 가신에게 보이는 태도가 아닌가? 사실 여기서 히데요리(秀)가 상경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관습에서 보건대 이에야스(家康)의 부하 다이묘우(大名)가 된다는 계약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요도도노는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키요마사(正)나 요시나가(幸長)는 [고(故) 타이코우(太閤)가 직접 키운 무장]이라는 자격으로 끈기 있게 요도도노를 설득했다. 이 귀부인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그녀의 자존심을 자극하면 안 되었기에 다소 말을 모나지 않게 하였다.
 - 지금만 조금 참으시면 됩니다
 라는 것이었다. 천하의 누구도 믿지 않는 관측이었지만 요도도노와 그녀의 시녀들에게만은 통용되었다. 이에야스가 죽고 나면 바라던 모든 것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토요토미 가문은 전쟁을 피해야만 하옵니다. – 고 키요마사들은 말했다. 요도도노도 그 점이 두려워,

 "그렇다면 히데요리님이 상경하시면 이에야스의 마음을 풀 수 있다는 것인가?"

 라는 것을 몇 번이나 키요마사에게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그렇사옵니다. – 하고 키요마사는 몇 번이나 말했을 것이다. 상경만 하신다면 양 가문에는 평화만 있을 뿐이옵니다 - 고 지금은 이에야스의 부하 다이묘우(大名)가 된 키요마사는 그 입장으로 보증하였다. 요도도노는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요도도노는 차츰 마음이 풀어졌다. 잠시 갸웃거리더니 뜬금없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코우다이인(高台院)님께서 히데요리님에게 해가 되실 말씀을 하시지는 않을 터이니 그에 따를 수밖에 없겠지"

 하고 그녀가 혼자 중얼거리자 예전부터 이 여성을 좋아하지 않았던 키요마사조차 가슴이 저려와 눈물을 흘리며, 졸자가!! – 감정을 주체 못하겠는지 거센 말투로 말했다.

 "졸자가 우다이진(右大臣)님의 손을 잡고 메시어 니죠우 성(二城)까지 함께 하는 이상,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우다이진님의 생명은 지키겠사옵니다"

 라고 말했다. 키요마사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이에야스가 이번 기회에 히데요리를 죽이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소문이 오오사카 성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도도노에게 전쟁이라는 자신의 생각 범위를 넘어선 커다란 위협보다도, 히데요리가 칼날에 쓰러진다는 자기나름의 현실적 상상 쪽을 훨씬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요도도노는 통통한 턱을 끄덕이면서 그제서야 승낙했다.

 이 해의 히데요리는 19살. 더 이상 소년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으며 거기에 벌써 1남 1녀의 부친이기도 했다. 정실 센히메(千)의 자식이 아니라 히데요리가 자신의 곁에 있던 시녀들에게 낳게 만든 아이들이었다.
 - 굉장히 어린아이 같다.
 라는 것이 이에야스의 귀에 들어와 있는 히데요리의 평판이었지만 그러나 아이를 만드는 능력에 있어서만은 망부 히데요시(秀吉)보다 뛰어났다. 그러면서도 상경여부 등 자신의 몸과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중대사에 관해서는 모두 모친에게만 맡겼다.

 히데요리가 오오사카(大坂)를 출발한 것은 그로부터 수일 후인 3월 27일이었다. 텐마(天)에서 화려한 귀족선(御座船)에 몸을 싣고 요도가와(淀川) 강을 거슬러 북상하였다. 이 히데요리의 신변을 지킴에 있어서도 키요마사는 만전을 기했다. 우선 쿄우토(京都)에서 예상치 못했던 사태가 일어났을 때를 대비하여 자기 가문 내에서 억센 무사 500명을 추려 상인이나 중으로 변장시켜 시내를 돌아다니게 하였으며, 거기에 300명을 후시미(伏見)에 주둔시켰고, 요도가와 강의 강변 경비를 위해서 아사노 요시나가(野 幸長)의 부하들을 포함한 철포 1000, 창병 500, 궁수 300인 부대를 배와 함께 북상시키는 한편 자신은 신발담당 하인, 가벼운 차림의 하급무사(足軽) 30명만을 주변에 두고 있었다. 이 신발담당 하인이나 하급무사들도 실은 변장으로 모두 경험 풍부한 무사 중에서도 용사만을 고르고 골라 따르게 하고 있었다. 거기에 항상 키요마사와 일컬어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와 미리 상담하여 후쿠시마 가문의 병사 1만 명을 자신의 본거지 히로시마(広島)에서 올라오게 하여 만일을 대비하였다. 마사노리 자신은 당장 쿄우()를 제압하기 쉬운 야하타(八幡)에 숙소를 정하여 거기서 뿌리라도 박힌 듯 다른 다이묘우(大名)들처럼 니죠우 성(二条城)에 가지 않았다. 단지 이에야스 측에게는 병 때문에 거동을 못한다는 식의 말은 하였다. 이에야스 측으로서는 카토우, 후쿠시마의 거동은 불유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토우, 후쿠시마에게 있어선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그렇게 많은 활약을 해 주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그런 만큼 이에야스는 좀 과중하게 보일지 모를 경비태세를 이해해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히데요리는 후시미(伏見)의 선착장에서 배를 내렸다. 키요마사와 요시나가는 히데요리의 가마의 양 옆에 찰싹 붙어 둘 다 거대 다이묘우(大名)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종자라도 되는 듯 예의 바르고 조심스럽게 더구나 말에도 타지 않은 채 걸어갔다. 후시미(伏見)에는 이에야스가 보낸 자신의 11살 난 아홉 번째 아들 토쿠가와 요시나오(徳川 義直[각주:1]) 9살 난 10남 요리노부(頼宣[각주:2])가 마중 나와 길 위에서 인사를 올렸다. 그 요시나오와 요리노부가 각각 자신의 종자들에게 양산을 받치게 하고 있는 것을 키요마사가 보고,

 귀인에 대해서 무례하오. 당장 양산을 치우시오

 하고 주의를 주었다. 이런 키요마사의 과감한 태도도 후에 이에야스를 불쾌하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이에야스는 곧바로 화내지 않았다. 이에야스가 죽은 뒤 카토우, 후쿠시마 양 가문은 에도 정권에 의해 멸문을 당한다.
 
어쨌든 19살 히데요리의 행렬은 입경하였다. 그 화려함은 타이코우 생전의 행렬을 방불케 하여 히데요시 행렬의 특징인
대모갑(玳瑁甲)으로 코팅된 창 천 자루를 2열 종대로, 철포대의 철포 덮개는 하나하나가 전부 호랑이 가죽이라는 화려함이었기에 쿄우토(京都)의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토요토미 가문의 행진을 보고 타이코우가 살아있을 적의 그 눈부심을 떠올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 즈음 쿄우토(京都)의 시민감정은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친토요토미였기에 당시 쿄우토의 거리에는 [15살이 되었다면 앞 싸리를 묶으시오~ 묶으시오]라는 노래가 불려지고 있을 정도였다. 노래의 의미는 히데요리님이 15살이 되면 이에야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성 앞의 방책을 준비하라는 뜻이었다. 그 히데요리가 지금은 훌륭히 자라 나이도 19살이 되어 죽은 아비와 같은 행렬을 하고 쿄우토(京都)에 올라온 것을 – 쿄우토(京都)의 사람들은 한 편의 웅장한 연극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그 행렬을 보았을 것이다. 히데요리가 탄 가마 옆에서 황공해하면서 시종해 가는 180cm가 넘는 키요마사를 보며 그 충성스럽고 의로움에 감동하여 키요마사라는 사나이에게 더욱 깊은 애정을 품었을 것이다. 키요마사는 살아있을 때 서민들에게 경애 받아 토쿠가와 가문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에도의 시민들조차 그를 의한 노래를 불렀다. [에도의 모가리에게 거칠 것은 없겠지만 밤색 제석천(帝釈栗毛=키요마사의 애마)은 피하시오].[각주:3]
 
후시미(伏見)에서 쿄우()로는 타케다(竹田) 가도를 이용했다. 도중 도로 옆에 마중을 나온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와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가 절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그들은 이에야스 휘하 다이묘우이긴 하였지만 이 시대 이 시기의 그들 감각으로 말하자면 이에야스는 상관이긴 했어도 주군이 아닌 다소 애매한 상하관계였으나 토요토미 가문과는 순수한 주종관계였다. 때문에 그들은 무릎 꿇고 넙죽 엎드린 예를 취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형식상 그렇다는 것이지 그들의 충성심은 이미 토요토미 가문에서 떠나 있었다. 가마 옆의 키요마사는 그들을 보자마자,

 "두 분도 따르시오"

 하고 말을 걸었다. 이 때문에 토자마다이묘우(大名[각주:4]) 중에서도 이에야스에게 충성하기로는 손에 꼽히는 그들도 어쩔 수 없이 그 장소부터 키요마사처럼 예의 바르게 가마를 시종했다.
 가마는 니죠우 성의 성문을 거쳐 곧이어 현관에 다다랐다.


큰 지도에서 관련지명-요도도도_아들_13 보기

 이에야스는 현관까지 마중 나와있었다. 30여명의 다이묘우들도 전부 현관 앞 흰 모래를 깐 곳에 넙죽 엎드려 히데요리가 가마에서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키요마사가 가마 옆에 오른쪽 무릎을 꿇고 곧이어 양손을 들어 가마의 문을 잡고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었다.
 '어떻게 자랐는가?'
 라는 것이 이에야스의 이 날 최고 관심사로 거의 숨을 죽이고 마른침을 삼키며 히데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오사카 성 깊은 곳에서만 성장한 히데요시의 아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며 히데요리가 역사에 그 몸을 노출하는 것도 이번이 최초였다.

 히데요리가 나왔다.

 이에야스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키가 180cm 가까이 되는 듯했다. 백설 같은 피부에 시원스런 눈매를 가진 위풍당당한 위장부(偉丈夫)로 그가 서 있는 것만으로 그 주위에서 광채를 뿜는 듯했다. 이런 훌륭한 골격은 모계 쪽 할아버지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의 판박이 같아 만약 그 머리와 심장까지 나가마사에게 물려받았다면 절대 쉽지 않으리라.
 이에야스는 그리 생각했다.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갑자기 상쾌해진 것은 이에야스의 정치적 입장에서 보면 묘했지만 그러나 좋은 골격을 가진 젊은이를 좋아하는 이에야스의 – 뿐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인간으로서의 – 말하자면 습성으로써 이에야스는 유쾌한 기분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직접 앞장서 안으로 들어갔다. 히데요리는 키요마사를 거느리고 아직 청년이라고 부르기에는 이른 키무라 시게나리(
木村 重成 – 히데요리 유모의 아들)에게 칼을 들게 하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 복도를 거쳐 객관의 앞을 지나 곧이어 [대면실]이라고 칭해지는 건물 끝으로 들어갔다.

 이에야스는 북을 향해서 앉았다.
 히데요리는 남을 향해서 이에야스와 대좌하는 자리에 앉았다. 쌍방 대등한 자리였다. 키요마사가 히데요리의 곁 60c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이 날 성안에서 작은 칼(
脇差
)도 차면 안되었기에 품 안에 단도를 숨기고 있었다.
 쌍방 대등한 입장이었기에 동시에 절을 하였다. 곧이어 키타노만도코로 – 이미
법체(
法體)가 된 코우다이인(高台院) 네네() – 가 나타나 이에야스와 히데요리 사이에 앉아 쌍방을 주선(周旋)하였다. 위계라는 점에서 말하면 종일위(從一位)인 코우다이인이 제일 높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안상이 나왔다. 들고 나오는 역할을 맡은 이들은 토쿠가와 가문 직속의 중신들로 이타쿠라 이가노카미(
板倉 伊賀守[각주:5]), 나가이 우콘(永井 右近[각주:6]), 마츠다이라 우에몬타이후(松平 右衛門大夫[각주:7]) 등이 예법대로 발을 바닥에 끌며 상을 내왔다. 히데요리는 사전에 키요마사에게 들은 대로 칠오삼의 상차림[각주:8]으로 나온 주안상에 한 번도 젓가락을 대지 않았고 잔도 입술에 가까이 대기만 할 뿐 마시지는 않았다. 대면은 말하자면 의식(儀式)으로 쌍방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곧이어 술잔을 세 번 받았을 때 키요마사가 히데요리를 향해서,

 "오오사카의 어머님께서 기다리실 것입니다. 오늘은 이만 자리를 뜨시옵소서"

 라고 말하자, 이에야스는 처음으로 입술을 떼어 목소리를 내었다. 굉장히 밝은 목소리로,

 "정말 오오사카의 어머님께서 기다리시겠구려. 오늘 참 경사스러운 날이었소. 그만 돌아가시길"

 하고 말했다. 그 말을 하며 이에야스가 일어나자 히데요리도 일어났다. 시종 무언이었다.
 이에야스는 다음 방까지 히데요리와 함께 갔다. 가다가 히데요리를 올려다 보며,

 "도노(殿)는"

 하고 그런 경어를 사용하여, 기분이 좋은 듯 말했다.

 "도노는 생각보다 훨씬 멋진 성인이 되셨소. 경사롭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 같소. 졸자는 나이를 많이 먹어 내일은 어찌 될지도 모르오."

 하고 말했다. 더 말하길,

 "졸자의 수명이 다하거든 우효우에(右兵衛=9남 요시나오)와 히타치노스케(常陸介=10남 요리노부)를 잘 부탁 드리옵니다."

 거기에는 요시나오, 요리노부라는 이에야스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히데요리는 그 쪽으로 눈길을 주고는 미소를 지으며(처음으로 표정이 변했다)

 "알겠습니다."

 하고 명쾌하고 또렷또렷하게 말했다. 이 상쾌한 말투를 들었을 때, 이에야스는 이때만큼 히데요리에게 시샘을 느낀 적이 없을 것이다. 늙음이란 이미 그 자체로 약함을 뜻하며 젊음이라는 것은 노인에게서 보면 그 자체가 거만함이었다. 이에야스는 이 젊은이를 자기가 죽을 때까지 살려 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히데요리는 쿄우토(京都)를 떠났다. 그 후 이에야스가 자기 방에서 휴식하고 있을 때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찾아왔다. 이에야스의 침실에까지 올 수 있는 것은 이 늙은 모신(謀臣)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다. 마사노부는 히데요리와 대면했을 때의 감상을 들으러 온 것이다. 어떠셨습니까? 하고 마사노부가 묻자 이에야스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곧이어 툴툴대며,

 히데요리는 어리석다고 들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현명했다. 다른 사람의 명령 같은 것은 받을 것 같지 않다

 는 뜻의 말을 하였다. 마사노부는 이때 이에야스에게 가까이 가, 걱정할 거 없지 않습니까? 저에게 그 분을 어리석게 만드는 묘안이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을 했다지만 사실인지 어떤지. 마사노부의 묘안이라는 것은 칸토우()에서 센히메()를 따라 오오사카(大坂)에 가 있는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려 히데요리가 주색에 빠지도록 만들어 정신을 황폐화시키자는 내용으로 사실 그렇게 비밀리에 지시를 내렸다고는 하지만 현실의 이에야스도 마사노부도 그런 것에 기대할 정도로 철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거친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1.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어삼가(御三家) 필두인 오와리 가문(尾張家)의 시조. 단 결국 한 번도 쇼우군 배출을 하지 못했다. [본문으로]
  2. 어삼가 No.2 키이 가문(紀伊家)의 시조. 후에 8대 요시무네(吉宗), 14대 이에모치(家茂)를 배출. [본문으로]
  3. 원문은 [江戸の無頼漢(もがり)にさわりはすとも、よけて通しゃれ帝釈栗毛]. 모가리(もがり)란 당시 에도에서 유명했던 공갈범을 말한다. 역자는 '帝釈栗毛'을 밤색 제석천이라고 해석하였다. 栗毛는 말의 털이 밤색을 의미하며, 帝釈는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帝釈天)을 말한다. [본문으로]
  4. 세키가하라(関ヶ原) 이후부터 토쿠가와 가문을 따른 다이묘우(大名). [본문으로]
  5. 이타쿠라 카츠시게(板倉 勝重). 당시 에도 바쿠후의 쿄우토 감시관(京都所司代). [본문으로]
  6. 나가이 나오카츠(永井 直勝) – 뛰어난 전술지휘관으로 작지만 각 요소요소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본문으로]
  7. 마츠다이라 마사츠나(松平 正綱) 당시 에도 바쿠후 재정장관(勘定頭). [본문으로]
  8. 七五三の本膳. 메인에 7개의 안주, 두 번째 상에 다섯 가지 안주, 세 번째 상에 세 가지 안주로 구성된 상. 성대한 주연에 나오는 차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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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이서당 2009.04.19 07: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편도 잘 읽었습니다! 히데요리가 키가 180가까이 되었다니 놀랍네요 (정말 히데요시의 씨? --a).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21 0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모계쪽 유전자를 이어 받았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초년기에 험하게 살았다는 히데요시에 비해 세상의 좋은 것은 모두 먹고 자란 히데요리는 키가 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담으로...
      60년대에만 하더라도 180만 넘어도 거구 소리를 들었지만(모 하드보일드 풍의 탐정은 6피트의 키로 엄청난 거구란 묘사가 있습죠) 지금은 그렇지도 않습죠. 어딘가에서 읽기로는 사람의 키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이유에는 냉장고의 보급을 들더군요. 신선한 먹거리가 인간의 키를 늘려 주었다고요.

  2. 댓글달자 2009.04.19 14: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인해 볼수는 없지만 십중팔구 히데요시 진짜 아들이 아닐겁니다.
    다른 여자들이 다 히데요시 씨를 못 받았는데 요도기미만 받았다는게 뭔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외모도 현저히 다르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21 0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예전엔 그리 생각했지만 지금은 반반입니다.

      여담으로...히데요시에게도 친자식은 있었습니다. 히데카츠(秀勝)라고...그를 너무 아쉬워 했는지 후에 양자 두 명(노부나가의 4째 아들, 살생관백 히데츠구의 동생)에게도 물려줄 정도였습죠.

      떠도는 말로는 딸도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다산이 가문 특징인 오다 가문의 여인 요도도노만이 두 명이나 히데요시의 자식을 배출한 것도 일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요약하자면 애기씨가 부족한 히데요시와 임신을 쉽게 하는 몸을 가진 요도도노...유독 요도도노만 임신한 이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임신이란 생각외로 쉽기도 혹은 어렵기도 하다더군요.

  3. dameh 2009.04.22 15: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전에 니조성에 갔을때 遠侍の間에 들어간적이 있었는데 설명에 '니조성 회견'이 여기서 열렸었다는 글이 있더군요.

    왠지 이 글을 읽고 그 광경을 떠올리니 전율 비슷한게 느껴집니다. 이래서 역사라는게 해볼만한 학문인가..싶기도 합니다만;

    사실 나고야에 산다면서 나고야성은 한번도 안가본 주제에 교토이야기 하려니 좀 묘하긴 묘하군요;; 아 게으름이랄까; 잡다하게 바쁨이랄까..;; 세월만 빨리 흐르고있으니 원;;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22 16: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문에서는 御座の間(저는 '대면실'이라고 번역)라 하여 응? 이라는 생각에 검색해 보니 다메엣찌님 말씀대로군요. 이루어진 곳은 토오자무라이(遠侍)에서 행해졌네요.

      御座の間는 시로쇼인(白書院)- 저는 '객관'이라고 번역했지만 이곳은 쇼우군의 침실이었고 - 의 별칭이었군요.

      아이 참~ 시바 선생님도...
      시로쇼인을 지나 시로쇼인으로 들어간다니...

      아~ 그 전율 저도 느끼고 싶군요...
      (당분간 일본에 갈 일이 없네요. 전...)

      뭐 전 한국에 살면서 일본에 관한 것만 포스팅하는데요 뭐.... 참~ 나고야성에 가시거든 사진 많이 찍고 저 좀 공유해 주세요~~~(나고야성 뿐만 아니라 역사관련 사진은 찍으면 전부 공유해 주세요)

  4.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4.25 21: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번 편에 이어서 잘읽었습니다.

    히데요리 얘기가 나와서입니다만...정실이 낳은 아들이 적자가 될수 있는것 같은데, 측실이 낳은 히데요리를 적자라 볼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딱히 경쟁자(?)가 없는 후계자라....;;; 상속은 했지만 적자라고는 부르지 않는지, 아님 그냥 그래도 적자라고 하는지 궁금하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26 2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른 아이가 있었다면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만 외동아들만 있는 상황에서 적자라는 명칭에 모친을 구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일본에서 적자는 모친의 구별보다는 우리의 '세자'...말씀하신 후계자에 가깝지 않았을까요?

      특히나...公家의 경우.
      적자의 선택은 부친의 권한이었다고 합니다. 그 부친인 히데요시가 적자라고 했으니 그것으로 끝이 아닐까요?

      ....까지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노아님께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시면 말씀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4.29 2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적자는 정실의 자식만.이라는 생각이었던지라 그냥 왠지 애매한 느낌이랄까...

      ...생각해보니 노부나가-노부타다의 경우도 있는게 제 고정관념이었나 봅니다;;

  5. 본다충승 2009.05.06 14: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나 아이를 만드는 능력에 있어서만은 망부 히데요시 보다 뛰어났다." 이 구절이 참 재밌네요.
    어삼가 도련님들과 오사카 전투의 토요토미측 중요 무장 키무라 시게나리도 등장 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