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큐우슈우[九州] 6개 지역[国]에서 위세를 떨친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은 기독교 다이묘우(大名)로도 유명하다.
 일본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하여 당시
야마구치[山口]에 머물고 있던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를 자기 영지(領地)인 붕고[豊後]의 후나이[府
=현 오오이타 시[大分市]]로 초대하여 회견하였다. 소우린 22살 때였다. 이때부터 이 젊은 붕고의 주인은 이국(異國)의 종교에 흠뻑 빠져들기 시작한다.
"…(전략)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들은 이 가르침보다 고귀한 말씀은 없었다. 또한 이 가르침보다 도리에 맞는 가르침 역시 없을 것이다"
 이때는 이렇게 고백하였지만 사실 당시만 해도 아직 기독교에 입신하지 않았다. 그 대신 붕고 영내(領內)에 포교를 허용하였으며 후나이[府
内]에 교회를 세워 한때 소우린의 영지(領地)는 일본 기독교 활동의 근거지가 될 정도였다.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는 병원까지 지었다.

 한편 청년 소우린은 믿음직한 기독교 보호자이기는 하였지만 호전적이고 빠굴을 굉장히 좋아하는 센고쿠 무장이기도 하였다. 1553년에는 가신의 부인 중에 미모로 유명한 여성을 강제로 빼앗아 첩으로 삼았기 때문에 부인을 빼앗긴 핫토리 우쿄우노스케[服部 右京助]를 시작으로 한 이치마다 아키스케[一万田 鑑相], 무네카타 아키히사[宗像 鑑久] 등의 중신들이 모반을 일으켰다[각주:1]. 그외에도 소우린은 친족이나 가신들의 부인에게 손을 댔다.

 가독을 상속할 때 피비린내 나는 가문 내란이 일어났다.
 소우린의 부친 요시아키[
義鑑]가 난폭한 소우린[각주:2]을 미워하여 총애하던 측실과의 사이에서 낳은 시오이치마루[塩一丸]를 후계자로 삼으려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장자상속을 주장하는 두 중신[각주:3]이 1550년 2월 10일 밤에 오오토모 저택의 2층에서 자고 있던 요시아키를 습격하여 시오이치마루와 그 어미를 죽인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를 '이층의 붕괴[二階崩れ]'라고 한다.[각주:4]

 소우린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자가 있으면 육친이라 하더라도 용서치 않았다.
 1554
히고[肥後]의 키쿠치 요시타케[菊池 義武][각주:5]가 붕고[豊後]를 노렸다는 이유로 나오이리 군[直入郡] 키하라[木原]로 불러들여서[각주:6] 살해하였다. 요시타케는 소우린의 숙부였다. 이 숙부의 수급을 검사할 때 소우린은 "오오토모 가문을 노린 괘씸한 놈"이라며 채찍을 휘둘러 그 목을 마구 쳤다고 한다.

 1559년부터 1570년 동안 오오토모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 사이에 쿄우토[京都] 다이토쿠 사[大徳寺]의 고승 이운 화상[惟雲和尙]을 초대하여 그에게 사사 받아 머리를 밀고 불문에 들어가 '즈이호우 소우린[瑞峯宗麟]'이라는 법호(法號)를 얻었다. 여전히 소우린은 기독교도가 아니었다.

 1571년 소우린은 아시카가 쇼우군[足利軍]에게서 '큐우슈우 탄다이[九州探題]'에 임명 받아 부젠[豊前],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붕고[豊後], 히젠[肥前]의 6개 지역을 영유(領有)하는 거대 다이묘우가 되었다. 당시 후나이[府内]에 있던 선교사도 "일본 최대의 영주 중 한 명"이라며 소우린의 위세를 전해주고 있다.

 큐우슈우[九州]에 남은 곳이라고는 명문 시마즈 씨[島津氏]가 영유(領有)하는 휴우가[日向]의 일부, 사츠마[薩摩], 오오스미[隈] 3개 지역이었다. 그 시마즈 씨가 큐우슈우[九州] 제패를 목표로 북상하여 소우린의 이웃 나라인 휴우가[日向]에 침입하였다.

 이해 즉 1578년 49세의 소우린은 불교의 법의(法衣)를 벗고 세례를 받아 '프란시스코'[각주:7]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다년간 그의 입신을 거부해 왔던 부인을 버리고 새로운 부인을 맞이하여 입신한 것이었다. 신앙도 철저하여 영내(領內)에 있던 신사(神社), 사원(寺院)을 계속해서 불태워 파괴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우린의 기독교 개종과 동시에 오오토모 가문의 운명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 1578년에 4만 대군으로 휴우가[日向]에 진출한 오오토모 군[
大友軍]은 시마즈 군[島津軍]이 선두에 내세운 '하치만 대보살[八幡大菩薩]'의 깃발에 위압당해 전군이 붕괴되어 패주하였다. 사상자 2만에 달하는 참패였다. 이것이 유명한 휴우가[日向] 미미가와 전투[耳川の合戦]이다.

 이후 오오토모 왕국은 급속히 쇠퇴하여 1587년 소우린은 실의 속에 이 세상을 떠났다.

[오토모 소린(大友 宗麟)]
1530년생. 이름은 요시시게[
義鑑], 세례명은 프란시스코. 붕고[豊後] 우스키[臼杵] 성주. 1582년 오오무라[大村], 아리마[有馬] 등과 함께 일본 최초로 유럽의 로마 교황에게 사절(使節)을 파견하였다. 1587년 5월에 죽었다. 58세.

  1. 실은 오오우치 가문[大内家]에 후계자로 보낸 동생 오오우치 요시나가[大内 義長]가 큐우슈우에 있던 오오우치 가문 영지에 손을 썼고 그에 동조하여 상기의 세 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당했다. 부인을 취한 것은 그 후의 일. 참고로 이치마다 아키스케의 부인도 취했다. [본문으로]
  2. 소우린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소우린을 폐적하고 시오이치마루 옹립을 주도적으로 꾀한 이리다 치카자네[入田 親誠='이리다'는 '뉴우타'라고도 읽는다]는 소우린의 후견인 & 스승이었다...지만 여기엔 또 히고[肥後]의 영지를 둘러싼 오오토모 가문 내의 파벌 싸움도 섞여 있었다. [본문으로]
  3. 소우린을 폐적하기 위해 요시아키는 네 명의 중신과 협의하였지만 네 명 다 반대. 그래서 요시아키는 네 명중 두 명을 살해하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두 명이 난을 일으켰다. [본문으로]
  4. 침입한 중신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참살. 요시아키는 이때 입은 상처로 이틀 후 사망. [본문으로]
  5. 소우린의 부친 요시아키가 히고의 명문가인 키쿠치 가문을 빼앗기 위해 키쿠치 가문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자신의 동생(즉 소우린에게는 숙부가 됨)을 양자로 들여보냈지만 독립심과 야망, 멍멍이 같은 성격에 비해 능력이 딸려 결국 키쿠치 가문의 가신들에게 추방. [본문으로]
  6. 갈 곳이 없는 차에 소우린이 보호해 준다는 명목으로 초대하였다. [본문으로]
  7. Dom Francisco.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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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라 2009.06.02 19: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사람도 나름 능력자이긴 한데 종교에 잘못 빠져 그만 망한 듯...
    나중에 시마즈 씨에게 처절하게 깨지는 걸 보면 정말 안 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히데요시가 조금이라도 천천히 왔다면 시마즈가 정말 큐슈 제패를 했을지도 모르는데(..)
    물론 그래도 히데요시에게 깨졌겠지만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3 1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창천항로...라는 만화에서 조조가 원소를 평하길..
      "원소는 패배를 자신의 승리로 만드는 힘이 있다"...
      미미가와에서 시마즈에게 패배하기 전까지만 해도 소우린은 그런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모우리, 류우조우지와의 전술적 패배에도 결국엔 전략적 승리로 이끌어 내는 것을 보면 능력은 상당한 것 같습니다.

      시마즈는 언제까지고 본거지를 사츠마(薩摩)에서 옮기지 않았던 것을 보면 설사 큐우슈우를 제패했더라도 일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2. 朴先生 2009.06.02 22: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독교로 개종하면 악업을 구원받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조강지처를 버리면서까지 개종한 걸 보면 다른 목적이 있었던걸까요? 스페인과의 교역이나 뭐 다른 이유로...
    하지만 그간 행적이 막장이었으니 전자의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기독교 다이묘치고 타카야마 우콘이랑은 또 다른네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3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워낙 많이 일어나는 가신들의 반란과 내분 속에서 정신적 안정을 종교에서 찾았다는 말도 있더군요. 그래서 머리 밀고 중도 되었으며, 거기서 만족감을 못 찾아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6.02 2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대인배였지만 내적모순과 외적모순을 조화시키지 못하고 결국 무너졌다고밖에..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많은 사람이지만 뭐 어차피 일본에서 기독교다이묘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조금 빠른 몰락'으로 받아들이면 되는거겠죠(어허허)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3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외로 동 시메온처럼 겉으로는 "안 믿을께요~"하고 뒤로는 믿으면서 신앙을 지켰을지도...

      노부나가, 이에야스, 마사무네처럼 본거지를 옮기며 영지를 재편하는 센스가 없는 한 결국 멸망만이 기다렸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4. 나라 2009.06.03 16: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 그렇게 따지면 역시 오다, 도쿠가와, 다테 정도만이 그런 센스를 가졌군요. 서국에선 의외로 그런 센스를 가진 다이묘가 없네요...; 우에스기도 옛 자기 영토에 좀 집착하고 말이죠. 도쿠가와는 어찌보면 앗싸 ㅋ 영지 바꿨다 ㅋ 라는 느낌...;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3 18: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에야스는 미카와(三河) 오카자키(岡崎)에서 토오토우미(遠江) 하마마츠(浜松)에 자력으로 옮긴 적이 있으니까요.

      그러고보니 서국도 미요시 나가요시 같은 사람은 본거지를 옮겼군요. 아와(阿波)에서 수도권(近畿)로.

 오다와라 평정(小田原の役[각주:1]) 때 히데요시(秀吉)는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의 무공(武功)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시하루는 내가 토우키치로우(藤吉
)라고 불리던 아주 옛날부터의 부하로 나와 함께 수 많은 전쟁에 참가하였다. 그 무용은 일기당천으로 미나모토노 요리미츠(源 光)[각주:2]의 사천왕(四天王)에 필적한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아자이(井) 공략에서는 적의 척후를 잡아 죽였으며, 나가시노 전투(長篠のい)에서는 2개의 수급을 취했다. 츄우고쿠(中) 모우리(毛利) 공략에서는 몸에 13군데의 상처를 입을 정도로 분전하였다. 아케치 토벌전(明智討伐戰)인 야마자키 전투(山崎合),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물리친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合) 등 요시하루의 무명(武名)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높아져 갔다.

 평소의 요시하루는 온화하였고 용모도 얼핏 보기에는 아녀자와 같이 부드러워 [부처님 모스케(茂助)]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이랬던 사람이 막상 전쟁터에 나가면 180도 바뀌어 악마와 같이 활약을 하는 것이다.
 1576년 아케치 미츠히데(
明智 光秀)의 영지(領地) 탄바(丹波)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하시바 히데요시,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 등 총 3만여가 지원군으로 참가하였다. 이 전투에서 요시하루의 부대는 실로 수급 36급을 거두었으며 더구나 그 중 3급은 요시하루가 직접 벤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이건 정말 '부처님 모스케'에 어울리지 않는 활약이구나. 앞으로는 '악마 모스케(鬼茂助)'라고 불러야겠다"
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평소의 요시하루는 정말 얌전하였지만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과 싸울 때는 한발작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다와라 평정 때의 일이다.
 야마나카 성(山中城[각주:3]) 공성에 참가한 요시하루는 성을 공격하기에 최적의 위치를 발견하고는 진을 쳤다. 그러자 동료인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가 그것을 보고 칸파쿠(
白) 히데츠구(秀次)에게 부탁하여 요시하루의 장소를 이동시키고 카즈우지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아니나다를까 나카무라 카즈우지가 야마나카 성에 제일 먼저 진입(一番り)하는 공적을 세운 것이다[각주:4].
 화를 억누를 수 없는 요시하루는 히데츠구 앞에 나아가 장소 교체에 따른 분노를 말을 가리지 않고 표출하였다. 주위에 있던 사람 모두가 어르고 달래도 듣지 않고 눈을 치켜 뜨며 나중에는 칼자루에 손을 댈 정도였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에게 접근하였다. 1599년 사대로(四大老), 다섯 행정관(五奉行)의 대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와 이에야스의 사이가 험악해지자 그 중간에 서서 양측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여 일단 큰일로 번지게 하지 않게 하였다. 그 공적에 보답하기 위해 이에야스는 은거료(隱居料)로 하라며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청하여 에치젠(越前) 후츄우(府中) 5만석을 주도록 만들었다. 이때 본거지인 하마마츠(浜松) 12만석을 아들인 타다우지(忠氏)에게 물려주었다.

 1600년 7월. 세키가하라 전투(ヶ原合)가 막 일어나려고 할 즈음 요시하루는 하마마츠를 출발하여 새로 얻은 영지인 에치젠으로 향하였는데 그 도중 자객의 습격을 받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미카와(三河) 치리우(池鯉鮒=현재는 치류우(
知立))에서 일어난 일이다. 예부터 알고 지내던 카가노이 시게모치(加々野井 重望[각주:5]그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친했다) 만나 함께 요시하루의 친구인 미카와(三河) 카리야(刈屋) 성주인 미즈노 타다시게(水野 忠重)에게 들렸고 타다시게는 그들을 위해 주연을 열었다. 주연이 깊어져 요시하루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갑자기 카가노이가 칼을 뽑아 타다시게를 베어 죽이며 여세를 몰아 요시하루를 습격한 것이다. 카가노이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자객이었다. 벌떡 일어선 요시하루는 곧바로 응전하여 반대로 카가노이를 베어 쓰러뜨렸다. 하지만 소란스런 소리에 급히 달려온 미즈노의 가신들이 피 묻은 칼을 들고 홀로 서 있는 요시하루를 보고, 그가 자신들의 주인과 카가노이 두 사람을 죽였다고 오해하였다[각주:6].
 요시하루는 열심히 설명하였지만 이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요시하루에게 불리했다. 천천히 조여오는 미즈노 가신들의 포위에 요시하루는 촛대를 발로 차 어둡게 하여 그 틈에 도망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각주:7]. 사건은 후에 요시하루의 무죄가 판명되어 이에야스에게서 병문안 편지를 받았다.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1543년생. 통칭 모스케(
茂助)로 이름(諱)은 요시사다(吉定), 요시나오(吉直)라고도 하였다. 와카사(若) 타카하마(高浜)[각주:8], 오우미(近江) 사와야마(佐和山)[각주:9] 등의 성주를 거쳐 하마마츠(浜松) 성주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후에는 아들 타다우지(忠氏)와 함께 이즈모(出雲)의 땅[각주:10]이 주어져 1611년 마츠에(松江)에 성을 축조. 이 해의 6월에 죽었다.

  1. 1590년에 히데요시가 칸토우(関東)의 후 호우죠우 씨(後北条氏)를 정벌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2. 헤이안 시대에 왠지 헤라클레스 급..까지는 아니고 하여튼 전설적인 활약을 펼치는 무사. 그의 이야기는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 "내 시체를 넘고 가라(俺の屍を超えてゆけ)"에 잘 나타나 있다(...믿으시면 곤란합니다) [본문으로]
  3. 후 호우죠우 씨(後北条氏) 축성의 진수가 담긴 성이었지만 단 하루 만에 낙성되었다. [본문으로]
  4. 덤으로 요시하루의 경우 옮겨진 구역에서 성을 공격하다 적자 킨스케(金助)가 전사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5. 보통 '加賀井 重望'로 알려져 있다(발음은 동일). 에도 바쿠후의 공식 기록서인 [토쿠가와 짓키(徳川実紀)]에 따르면 그는 미츠나리가 아니라 서군(西軍) 호쿠리쿠(北陸) 당담인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 한다...뭐 미츠나리가 서군의 총수격이었으니 그게 그거지만.. [본문으로]
  6. 사족으로 당시의 나이 요시하루 57세. 시게모치의 나이 39. [본문으로]
  7. 칼에 베인 상처가 17군데에 이르러 이후 거동이 불편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코구다카(石高)는 1만 7천석. [본문으로]
  9. 코쿠다카는 4만석. [본문으로]
  10. 23만 5천석으로 보통 24만석으로 칭해진다. 이 호리오 마츠에 번(堀尾松江藩)은 야스하루의 손자 타다하루(忠晴) 때 자식이 없어 끊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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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5.30 20: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시마네현 소개 팜플렛에서 일본에서 유수의 천수각이 남아있다는 글을 본기억이 있는데 생각해보면 이양반처세때였던 것도 같군요(ㄷㄷ..)

    시마네현도 국립대가 있나 없나 싶어서 이리저리 찾아대던 시절 기억이덥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30 2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고 보니 다른 분들이 쓴 거 없으신가 하고 한국 웹 검색했는데 전부 마츠에 성에 관한 것만 있더군요.

      이즈모라...
      FSS의 이즈모시티..라는 명칭으로 인해 SF적인 느낌과
      코에이 게임으로 인해 깡촌..이라는 느낌과
      일본신화 땜시 왠지 종교적인 건물이 많을 듯한 느낌...이 교차하는 곳입죠 저에겐.

 아사노 나가마사[野 長政]가 출세하는데 있어 히데요시[秀吉]의 친족이었다는 것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나가마사의 부인 오야야[おやや]가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ねね=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와 배다른 자매[각주:1]였기에 나가마사와 히데요시는 동서지간이 된다. 친족이 적었던 히데요시가 나가마사를 중용한 것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히데요시의 측근으로서 군사에 관해서도 담당하기는 하였지만 주로 외교나 민정가로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민정가로서의 나가마사를 나타내는 에피소드가 있다.
 후에 이 아사노 나가마사의 후손으로 겐로쿠[元
1688~1703] 시대 소위 '아코우 사건([赤事件][각주:2]'을 일으켜 당시 세상에 충격을 준 하리마[播磨] 아코우[赤穂] 5만석 아사노 타쿠미노카미 나가노리[匠頭 長矩[각주:3]]가 있는데, 이 사건 최대의 주역이 되는 가로(家老)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大石 内蔵[각주:4]]가 영내(領內) 순시를 위해 아보시[網干]라는 곳에 들렸을 때이다. 이 마을 중심가의 한 곳만 공터가 되어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궁금히 여겨 마을사람에게 물어보자,
 "이곳은 아사노 단죠우[
=나가마사]님이 히메지[路]에 계실 적에 그분의 저택이 있던 자리옵니다. 백성들을 잘 보살펴 주신 분이었기에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이곳은 풀 한 포기 손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고 답했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휘하가 된 나가마사는 히데요시가 1573년 아자이 나가마사[ 長政]의 옛 영토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12만석을 하사 받자 히데요시에게서 120석을 받았고, 다음 해인 1574년 히데요시가 거성을 나가하마 성[長浜城]으로 옮긴 후 노부나가와 함께 전쟁터를 전전하였기에 히데요시가 부재인 동안 이 성을 다스릴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거기에 하리마[播磨], 츄우고쿠[国] 공략에서는 히데요시와 행동을 함께하며 전선부대장으로서 용전분투하였고 또한 히데요시의 거성 히메지 성[路城]의 보충 공사를 담당하거나 하였다.

 1586년은 아사노 가문의 장래를 보았을 때 기념할만한 해가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접촉하여 절친해지는 계기가 되는 단초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役] 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와 화해(和解)를 꾀하며 아비 다른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姫][각주:5]를 이에야스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 교섭성립을 위해 분주히 뛰어다녀 이 1586년의 결혼을 성립시켰는데, 이때 성실히 임하는 모습을 이에야스에게도 인정받아 나가마사는 한층 더 명성을 높이게 된다.

 임진왜란 때 나가마사는 본진에서 근무하며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성의 축조를 담당하였다. 이때 세운 망루()가 후에 카라츠 성[唐津城]으로 옮겨졌는데 나가마사의 관도명(官途名)인 단죠우쇼우히츠[正少弼]의 이름을 따 단죠우망루[正櫓]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나고야에 있을 때 나가마사는 히데요시를 화나게 하여 자칫하면 죽을 뻔한 사건이 일어난다.
 서전의 파죽지세에 콧대가 높아진 히데요시는 작전회의 자리에서,

 "일본은 이에야스에게 맡기고선 나는 30만 군세를 이끌고 조선에 건너가 곧바로 명의 수도에 진격하여 황제가 될 생각이다"
 고 선언한 것이다. 이에야스가 그런 큰 일을 담당하기에는 벅차다고 하자, 그것을 옆에서 듣고 있던 나가마사가 이에야스에게,
 "지금 칸파쿠 전하의 말씀은 제정신으로 한 말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필시 뭔가에 씌어 미치신 것 같으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히데요시의 얼굴이 급변했다.
 "네 이놈 나가마사! 내 직접 네놈을 죽이겠다!"
 고 외치며 손에 칼을 쥐고 일어섰다. 동석해 있던 마에다 토시이에[
前田 利家]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鄕]가 열심히 말렸다. 그래도 나가마사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절 죽여서 국가가 안정된다면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근년 조선과의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은 궁핍해 있습니다. 거기에 전하가 바다를 건너시면 국내 치안은 흔들릴 것입니다. 바다 건너는 것도 중지하시고 파견군도 전부 불러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히데요시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되었다. 결국 나가마사는 숙소에서 벌을 기다리는 몸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 히고[
肥後]에서 반란[각주:6]이 일어나 나가마사의 말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어 죄를 용서받았다. 그 후 진압되어 어수선한 히고[肥後]를 진정시키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각주:7]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네 명의 대로(大老)[각주:8]와 다섯 행정관(五奉行)[각주:9]이 이에야스의 전횡에 분노하여 이에야스 타도를 꾀하였지만, 토시이에가 죽은 뒤 나가마사는 다른 행정관들과는 다른 행동을 취하며 이에야스와 기맥을 통하였다. 또한 1599년 무공파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이 이시다 미츠나리를 제거하고자 했을 때도 나가마사는 아들 요시나가[幸長]를 무공파에 참가시켰다. 이제 나가사마는 확실히 이에야스 편에 섰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이 즈음의 정치정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0월 갑자기 나가마사는 영지(
領地)인 카이[甲斐]로 내려갔다. 자세한 사정은 확실하지 않지만 일설에 따르면 9월 9일 이에야스가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頼]를 방문하고자 하였을 때, 행정관 중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와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등이,
 "마에다 토시나가[
前田 利長][각주:10]에게 모반의 낌새가 있습니다. 아사노 나가마사나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히지카타 카츠히사[土方 勝久], 오오노 하루나가[大野 冶長]를 부추겨 암살을 꾀하려 하고 있습니다"
 고 이에야스에게 밀고하여 그 때문에 나가마사는 영지(
領地)에 칩거를 명령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나가모리들의 참언을 믿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가마사는 카이[
甲斐]로 내려가자마자 에도[]에 가서 이에야스의 후계자 히데타다[秀忠]를 만나 그에게 환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가마사는 얼마 지나지 않은 1600년 1월에 셋째 아들 나가시게[長重]를 히데타다에게 출사시켰으며, 세키가하라 결전[原の戦い] 결전에서 나가마사는 히데타다를 따라 나카센도우[中山道]를 거슬러 올라갔고 적남인 요시나가는 이에야스의 선봉으로 출진한 것이다.

 말년의 나가마사는 이에야스의 바둑상대로 자주 초대받았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천하의 정치정세에 대해 나가마사의 의견을 듣기 위함이었다. 나가마사가 죽자 이에야스도 바둑을 관두었다고 한다.

 아사노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쟁 후 키이[紀伊] 37만4000석이 요시나가에게 주어졌고, 나가아키라[長晟]의 대[각주:11]가 되어 아키[安芸] 42만6000석에 봉해져 이후 아사노 가문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이어진다.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1544년생. 야스이 시게츠구[
安井 継]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사노 나가카츠[浅野 長勝]의 양자가 되었다[각주:12]. 첫 이름은 나가요시[長吉]. 1587년 와카사[狭] 오바마[小浜] 성주. 임진왜란에서는 조선에 건너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등과 함께 진주성 공격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카이[甲斐] 후츄우[府中] 22만5천석.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뒤에는 적자 요시나가[幸長]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 1611년 4월 7일 죽었다. 68세.

  1. 키타노만도코로 즉 네네는 양녀(나가마사의 양부 아사노 나가카츠의 부인의 여동생의 딸) [본문으로]
  2. 아사노 나가노리가 에도 성에서 바쿠후 의전 담당인 코우케[高家] 필두 키라 코우즈노스케[吉良 上野介]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 당시는 싸움 당사자간에 누구에게 죄가 있건 양쪽 다 처벌을 받았으나[喧嘩両成敗], 토자마[外様]의 약소번(5만석)의 다이묘우[大名]인 아사노 나가노리는 할복 & 번 폐쇄라는 엄벌이 처해졌지만 막부의 요직에 있는 키라에게는 아무 벌도 없었다. 그에 대한 복수로 번 폐쇄로 직장을 잃은 아코우 낭인들의 키라를 살해한 사건. 보통 '츄우신구라[忠臣蔵]'로 유명하다. [본문으로]
  3. 나가마사의 현손(玄孫). 즉 나가마사의 손자인 아코우 초대 번주 아사노 나가나오[浅野 長直]의 손자 [본문으로]
  4.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아코우 번 필두 가로로 아코우 사건의 주모자였다. 복수극에 성공한 이후 충성스런 신하 & 진정한 무사의 대명사가 된다. [본문으로]
  5. 시바 료우타로우[司馬 遼太郎]선생이 쓴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에 등장하는 스루가고젠[駿河御前]. [본문으로]
  6.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가신 우메키타 쿠니카네[梅北 国兼]가 일으킨 우메키타 반란[梅北一揆]를 말함. [본문으로]
  7. 여담으로 이 이야기는 18세기 중반의 유학자 유아사 죠우잔[湯浅 常山]이 쓴 상산기담(常山紀談)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 책에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8. 이에야스를 제외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9.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본문으로]
  10.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아들. [본문으로]
  11. 나가마사의 둘째 아들. 임진왜란 때 조선에 건너왔던 형 요시나가에게는 딸밖에 없어서 동생인 나가아키라가 후계를 이었다. [본문으로]
  12. 나가마사의 모친이 아사노 나가카츠의 누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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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iroyume 2009.05.23 1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요토미 히데요리 정권은 과연 아사노 나가마사, 기타노만도코로 등과 같은 히데요시의 가깝고 먼 친척들에게 '비정통적'인 정권이었을까. 히데요시에게 진절 머리가 난 걸까? 혹은 대세를 따른걸까? 아니면 히데요리가 세키가하라 당시 서군을 정군으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압적 성격이긴 하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가의 수호자로 비춰진걸까. 아님 히데요리는 천하통치의 능력이 없으니 사슴(천하의 패권)은 이에야스에게 안겨줘야 된다고 생각했을까. 히데요시의 친척들이 자의반 혹은 타의반 거의 히데요리를 떠나간 걸 보면 히데요시도 어지간히 사람관리는 안한 듯 합니다. 이래서 어찌보면 전통적인 가신과 귀족적 태생이 중요한걸지도? 저야 꼬시지만 말입니다 케케. 잘 읽고 갑니다.

  2. 朴先生 2009.05.26 0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타가 있는 듯...
    '어수순한 히고를 진압시키라는 명령을 받게된다' -> '어수선한 히고를'이 아닌가요?

  3. 나라 2009.05.28 0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지랑님 글을 읽다보면 가끔 바치다를 받히다 라고 쓰시는 경우가 있더군요. 죄송하지만 잘못 아시는 것 같아 적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28 1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니다. 제 고질병이옵죠. T.T

      그런 것을 발견하면 꼭 좀 지적해 주셨으면 하고...지적해 주시면 좋지 않냐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인텔리[각주:1] 무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센고쿠(戦国)의 거친 파도를 헤쳐 나온 무장이면서도 끈적끈적한 정치적인 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의 행동거지에서 미적인 품위를 느낄 정도이다.

 중세 굴지의 문화인(文化人) 센노 리큐우(千 利休)는 우지사토를 평하길,
 “일본의 무장 중에서도 하나나 둘 있을까 말까 한 문무 겸비의 명장”
 라 말하며 칭송했다고 한다.

 우지사토 스스로도 자신이 명장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사서에 따르면 측근에게,
 “
토요토미 타이코우(豊臣 太閤)가 죽은 뒤 천하인(天下人)가 되는 사람은 카가(加賀)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아니면 나다”
 고 단정지었다고 하다.
 또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어떻게 보느냐는 물음에는,
 “이에야스는 가신에게 땅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그릇이 아니기에 천하인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미의식을 통한 인물감정이기에 현실과 밀착한 통찰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뜻하는 바가 웅대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히데요시에게서
아이즈(会津) 42만석[각주:2]의 거대한 영지(領地)에 봉해졌을 때 우지사토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반대로 변경으로 옮겨지는 원통함에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를 메이지(明治) 시대의 문호(文豪)
코우다 로한(幸田 露伴)은,
 “내 비록 미관말직이더라도 쿄우토(京都) 근방에 있다면 여차할 때 무슨 일이라도 하여 깃발을 천하에 휘날릴 수 있을 터인데, 이제 큰 영지(領地)를 받았다곤 하여도 산과 강이 사이에 놓여진
시라카와(白河) 관문[각주:3] 저 너머 오우슈우(奥州) 데와(出羽)의 깡촌에 있어서는 평소 가지던 큰 뜻도 펼치기 힘드니…”[코우다 로한의 蒲生氏郷]
 라 표현하였다. 우지사토의 눈이 항상 천하로 향해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어려서부터 그 장재(將材)는 노부나가도 눈여겨볼 정도였다. 부친 카타히데(賢秀)가 오우미(近江)의 롯카쿠(六角)씨를 버리고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겼을 때 13살의 우지사토는 인질로 오다 가문에 오게 되었다. 우지사토를 본 노부나가는,
 “눈빛이 보통이 아니다”
 며 장래의 대기(大器)를 한눈에 알아보고 자신의 사위로 삼는다고 약속까지 하였다. 그런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다음 해 14살의 데뷔전(初陣)[각주:4]에서는 이름있는 무사의 수급을 취하였다. 이 해 약속대로 노부나가의 딸 후유히메(冬姫)를 부인으로 맞이한다.

 히데요시도 우지사토의 인물을 높게 평가하였다.
 1587년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 때의 일이다. 당시 이세(伊勢) 마츠자카(松坂) 성주였던 우지사토도 출진하였다.
어쨌든 히데요시 앞에서 그의 측근들이 심심풀이로 인물비평에 열중하고 있었다. 듣고 있던 히데요시는 이 때,
 “우지사토는 나와 닮았지.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을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 해내더군. 정말 두려운 녀석이야”
 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즈(会津)의 대봉(大封)을 받을 때 있어서도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아이즈(会津)는 오우슈우(奥州)를 제압하는 주요지점이었다. 히데요시는 누가 적임일지 여러 장수들에게 토의하게 하였다. 10명중 9명이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를 추천하였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네놈들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어라”며 우지사토를 지명했다고 한다.

 우지사토가 아이즈 부임할 때 히데요시는 자신의 겉바지(袴)와 우지사토의 겉바지를 교환하였다. 히데요시의 특기 인심장악술이었다. 자신의 전권대리인으로서 오우슈우(奥州)의 지배자가 되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말도 전해진다. 우지사토가 너무도 뛰어난 인물이었기에,
 “이쪽에 두기에는 너무 무서운 녀석이다”
 고 생각한 히데요시가 오우슈우(奥州)의 깡촌으로 쫓아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각주:5]

 히데요시는 우지사토가 오우슈우(奥州)로 출발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도 하였다. 같은 자리에 아이즈(会津)와 인접한 카사이(葛西), 오오사키(大崎)에 영지(領地)를 가지고 있던 키무라 이세노카미 요시키요(木村 伊勢守 吉清)와 그의 아들 키요히사(清久)가 있었다.
 “이세노카미. 너희들은 앞으로 우지사토를 주군 혹은 부모라 생각하고 섬기거라. 앞으로 쿄우토(京都)에 올 필요 없다. 그 대신 아이즈(会津)로 출사하거라”
 그리고 우지사토에게는,
 “이세노카미를 자식 또는 동생이라고 여기며 돌봐주길 바란다”
 고 말하였다.
 우지사토는 오우슈우(奥州) 총독과 같은 지위에 오른 것이다.

 오우슈우(奥州)에서 으뜸가는 실력자로 자타가 공인하던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는 자연스레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우지사토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불태웠다. 그런 분위기를 전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마사무네가 세이쥬우로우(清十郎)라는 16살의 자객을 가모우 일족의 타무라 나카츠카사노쇼우(田村 中務少輔)의 시동으로 잠입시켰다. 목적은 우지사토의 암살이었다. 어쩌다 편지가 국경초소에서 발각되어 정체가 탄로나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우지사토는 그 충성심을 높게 평가하며 감옥에서 풀어주었다고 한다.[각주:6]

 우지사토는 세례명을 ‘레온[각주:7]’이라고 하여 기독교에 신앙했었다. 센고쿠 당시의 지식계층은 이 서양의 종교를 신지식으로 받아들였는데 우지사토의 인텔리전트적인 면모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

 풍류의 길에도 밝아 사세구로써,

 끝이 있으니 불지 않아도 꽃은 떨어질 것을
 성급도 하구나 꽃샘바람
 限りあれば吹かねど花は散るものを
 心みじかき春の山嵐
  라는 것을 남겼다.

 다도(茶道)도 리큐우의 뛰어난 일곱 제자 중 하나[각주:8]로 꼽혔다.

 말년의 영지(領地)는 92만석에 달했지만 안타깝게도 40세에 죽었다.
 가모우 가문 자체의 명맥도 짧아 아들인 히데유키(秀行)의 대[각주:9]에 단절되었다.

[가모 우지사토(蒲生 氏)]
1556년
오우미(近江) 가모우 군(蒲生郡) 히노 성(日野城)에서 태어났다. 첫 이름은 마스히데(賦秀)[각주:10], 통칭을 츄우사부로우(忠三郎)라 하였다. 1584년 이세(伊勢) 마츠자카(松坂) 12만석의 성주가 되었고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에서의 공으로 쇼우쇼우(少将)로 승진하여 '마츠자카 쇼우쇼우(松坂少将)'라 불렸다.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에서 공을 세워 아이즈(会津) 와카마츠(若松) 42만석에 봉해졌다. 1591년 오우슈우(奥州) 카사이-오오사키 반란(葛西・大崎一揆)[각주:11]를 진압하여 타무라(田村), 시노부(信夫) 등 5개 군(郡)이 더해졌고, 같은 해 또다시 오우슈우 정벌(奥州征伐)[각주:12]에 참가하여 다테 군(伊達郡)을 가증 받아 영지(領地)는 91만9320석에 달하였다. 1595년 2월 7일 죽었다.

  1. '지식인'..이라고 번역해야하지만, 왠지 네이버 지식즐~ 때문인지 뉘앙스가 좀... [본문으로]
  2. 46만석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링크 된 구글맵을 보면 어째서 이런 어중간 한 곳을 거론하였는지 하고 이상히 여기겠지만, 7세기 일본 율령제가 실시된 당시 일본령 최북단인 오우슈우(후대의 오우슈우의 남반부만 있었고 작았다)의 세 관문(奥州三関) 중 하나이다. 그 의미가 이어져 그냥 일본 최북단을 표현하는 관용어가 되었다. [본문으로]
  4. 대다수의 서적들은 1569년 8월의 이세(伊勢) 키타바타케(北畠) 공략이라고 하지만, 우지사토가 이토우 한고로우(伊藤 半五郎)에게 보낸 편지에는 1568년 9월의 노부나가 상경전 때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이와는 반대로 우지사토에게 세례를 한 오르간티노는 우지사토가 죽자 히데요시는 히데요리를 보호해 줄 사람이 죽었다며 눈물 흘렸다고 한다. [본문으로]
  6. '常山紀談'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하다. [본문으로]
  7. 레오(Leo)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8. 리큐우 칠철(利休七哲)을 말한다. 우지사토를 제외한 나머지는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오리베'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利貞). 우지사토는 이 칠철 중 No.1으로 꼽힌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실제로는 업치락뒤치락 후 우지사토의 손자 타타도모(忠知) 때 완전히 끊김. [본문으로]
  10. '야스히데'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11. 상기의 키무라 이세노카미 요시키요(木村 伊勢守 吉清)가 영내 정치를 잘못해서 '카사이-오오사키의 난'이 일어난다. [본문으로]
  12. 정확히는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의 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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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맹꽁이서당 2009.05.21 09: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92만석이면 5대로 수준이었네요. 전국시대라면 역시 땅따먹기가 재미있는지라, 지난번에 언급하신 니와 123만석 같이 가장 전성기 때의 세력을 알게 되는 것도 흥미있더군요.

    히데요시 시절의 아이즈라면 우에스기도 그 근방에 있지 않았나요? 두 가문 중 어느 쪽이 더 북쪽(교토에서 더 멀리?)에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22 11: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수준은 확실히 오대로 수준입죠.
      오대로 중 하나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같은 경우 33만석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우에스기는 에치고(越後)에 있었습죠. 이 우지사토가 죽은 다음 우지사토의 아들을 시모츠케(下野)로 쫓아버리고 우에스기를 아이즈로 옮기게 됩죠.

      쿄우토에서라면 아무래도 에치고가 인식상 가까웠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2. 나라 2009.05.21 18: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모우 가문이 왜 단절되었는지 혹시 아십니까? 그거 굉장히 궁금한데 잘 안 나오더군요 ^^;
    항상 번역하신 것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22 2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두 가지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아이즈'라는 위치가 남쪽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북쪽의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라는 두 거물을 감시하고 만약의 사태에서는 제압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우지사토 사후에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라는 이 또한 거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에도 바쿠후(幕府)가 들어선 다음에도 그 중요성은 변치 않아 아이즈 북쪽의 다테 마사무네의 센다이 번(仙台藩)이라는 실질 에도 시대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번을 감시하여야 했습지요. 따라서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요네자와라는 곳으로 옮겨지자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현대에서는(라기보다는 koei의) 평가가 그다지 좋지 못하지만 당시는 뛰어난 전쟁꾼이었다는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그 카토우 가문 다음에는 에도 바쿠후가 가장 신임했던 아이즈 마츠다이라(会津松平 - 시조는 2대 쇼우군 히데타다가 몰래 낳은 호시나 마사유키(保科 正之))를 배치할 정도였습니다.

      ...사설이 길어졌는데(^^;) 그렇게 중요한 위치였는지라 우지사토가 죽은 다음의 아들은 그런 중요한 위치를 사수하기에 너무 어렸고 또한 밑에 시로유메님의 말씀대로 가문도 다스리지 못할 정도라 다른 곳으로 쫓아버리게 된 것입니다.(...라는 것이 아이즈 가모우 가문의 단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가모우 가문의 단절은 간단합니다.
      그의 손자 가모우 타다토모(蒲生 忠知)에게 후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에도 바쿠후의 법도에 따르면 후사가 없는 한(藩)은 없애버리거든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자주 들려주세요~

  3. shiroyume 2009.05.21 2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지랑/안녕하세요 자주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라/단절이 영지 감봉을 말하는지 혹은 아예 단절을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 후의 경과를 말하면 아들 히데유키는 가모 사토야스란 중신이 우지사토 때부터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이 사토야스란 양반이 정무를 독차지하고 다른 가신들하고 사이가 안좋아서 전쟁직전까지 불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히데요시로부터 니는 안되겠다. 그냥 감봉되라고 하면서 히데유키는 감봉 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이 있는데 이 분쟁의 원인이 된 사토야스는 그 후로 세키가하라에서 할복전까지 그럭저럭 지내는데 이 사토야스란 양반은 미쓰나리하고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히데요시하고 미쓰나리하고 사토야스하고 감봉시킬명분을 만들려고 짜고 소동을 일으켰을 확률이 높다는 소리.
    그 다음 우지사토의 손자에 해당하는 다다사토, 다다토모가 있는데 다다사토는 요절하고 다다토모는 원래 분가해서 새영지를 갖고 있었으나 다다사토의 뒤를 잇는 형식으로 가모가를 잇습니다. 그러나 이 다다토모도 가신들간의 분쟁을 겪고 골머리 썩히다가 산킨고타이(에도의 쇼군 방문)도중 교토에서 급사합니다...후손이 없으면 양자를 들여서라도 가문을 이으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문을 닫게 한 걸 보면 이로부터 첫째 바쿠후의 직할령을 넓혀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위한 그당시 바쿠후의 통치방침을 알수 있다. 둘째 가모가는 우지사토빼고 능력이 다이묘로서는 영글러먹었다..

    발해지랑/우연찮게 검색하다가 들어왔네요. 활발히 활동하고 계시네요 종종들릴께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22 11: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시로유메님 ^^


      대신해서 작성해 주신 장문의 리플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오셔서 저 대신 쫌(~퍽~)...^^;
      (제가 좀 설명하는 능력이 딸려서 말입죠)

  4. 나라 2009.05.22 08: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iroyume 님 정말 감사합니다.

  5. 朴先生 2009.05.26 0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만약 시로유메님이 말씀하신대로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와 오르간티노가 전하는 히데요시가 눈물흘린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히데요시... 흠좀무...
    뭐 '우지사토가 죽어서 히데요리의 후사를 보좌해줄 사람이 죽은 건 슬프지만
    아비에 비하면 그에 못 미치는 아들이 거대 영지를 갖고 있는게 불안요소다, 국가경영에 情과 理는 별개의 문제다'라고 생각했다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26 15: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로는 미츠나리와 우지사토의 죽음 사이에 연관성은 없다고 봅니다.

      '가모우'라는 성과 '사토(郷)'를 물려 받은 우지사토의 가신들이 미츠나리와 함께 세키가하라에서 싸운 것을 보면요.

      예전 호쿠리쿠(北陸) 120만 여석을 가진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도 죽자 히데요시는 그의 아들 나가시게(長重) 15만석 정도만 준 것을 보면, 히데요시 자체가 능력있는 사람에게는 땅을 왕창 주지만 그 후계자에게는 꼭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덤으로 그렇게 생긴 공백지에는 자신의 직속 부하들을 집어 넣을 수 있어 자기의 힘도 늘릴 수 있고요)

      ...써 놓고 보니 전혀 딴소리군요. ^^ 그렇다고 쓴 것 지우기도 아쉽고 하니 그냥 남겨 놓겠습니다.

 하치스카 코로쿠 마사카츠(蜂須賀 小六 正勝)의 이름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도적 두목이었던 코로쿠가 소년 시절의 히데요시 즉 히요시마루(日吉丸)와
야하기(矢作) 다리[각주:1]위에서 만났다. 다리 위에서 자고 있던 부랑아 히요시마루의 머리를 발로 차서 깨우자 소년을 대담하게도 “무례하구나! 이리 와 사과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코로쿠는 그 호방함에 반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시바 료우타로우(司馬 遼太郎) 선생의 글에 나오는 것인데, 선조가 도적이라는 것에 옛
아와(阿波) 번주인 하치스카 후작은 창피를 느꼈다고 한다. 메이지(明治) 시대에 귀족원 의장을 지낸 하치스카 가문의 당주 모치아키[각주:2](茂韶) 후작은 어느 날 메이지 텐노우(明治天皇)를 알현하였을 때 테이블에 진귀한 담배가 있었기에 2~3개를 품 안에 넣었다. 도중에 자리를 뜬 텐노우(天皇)가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역시 선조는 속일 수 없구만”하고 크게 웃었다고 한다. 텐노우(天皇)까지 하치스카 코로쿠가 도적이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각주:3]
 
그러나 이 불명예스러운 전설은 쇼우와(昭和) 초기 와타나베 요스케(渡辺 世祐) 박사의 고증으로 인해 사라지게 된다. 무엇보다 당시 야하기바시 다리는 걸려있지 않았다는 것이 명확해 진 것이다.[각주:4]

 하치스카 가문은 도적 따위가 아닌 오와리(尾張) 아마 군(海部郡)의 호족으로, 현재도
렌게 사(蓮華寺)라는 이름있는 절이 남아있어 그곳에는 하치스카 가문에 관한 문서가 전해지고 있다.

 히데요시와 연을 맺게 된 것이 히데요시의 떠돌이시절인지 오다 가문(織田家) 내에서 만나면서부터인지 확실치 않지만 코로쿠 마사카츠가 세상에 얼굴을 내밀게 된 계기가 된 것은 히데요시의 스노마타(墨俣) 축성으로 인해서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는 자신의 영지(領地)인 오와리(尾張)와 사이토우 가문(斉藤家)의 미노(美濃)와의 국경에 성을 쌓아 전선기지로 만들려고 하였지만 사이토우 군의 방해로 인해 그 시도는 참담한 결과로 끝나 거의 불가능이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오다 가문에서도 미관말직이던 토우키치로우(藤吉郎=히데요시)가 단번에 만들어 버렸다. 세상에서 말하는 ‘스노마타 일야성(墨俣一夜城)’이다. 이를 계기로 토우키치로우는 크게 출세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성공의 뒤에서 활약한 것이 코로쿠 마사카츠이다.[각주:5] 코로쿠는 휘하의 도적들을 거느리고 스노마타 축성 공사와 수비에서 활약하였다. 스노마타 성이 완성되자 코로쿠는 오다 가문에 고용되어 성주가 된 토우키치로우를 돕는 역할을 하게 된다.

 코로쿠 마사카츠에게도 무공담은 전해지지만 그의 본질은 정략(政略)에 있었다.
 히데요시의 전투 방식은 상대를 죽이지 않고 항복시키는데 있었다. 상대를 이익으로 꼬시는 것인데 그 역할을 코로쿠가 담당하였다. 히데요시의
츄우고쿠(中国) 정벌에서 비젠(備前), 빗츄우(備中), 미마사카(美作), 호우키(伯耆)등의 여러 성을 공략했을 때 대부분 마사카츠의 외교절충으로 무혈 개성시켰다. 세토 내해(瀬戸内海)의 해적들도 코로쿠의 뛰어난 외교로 히데요시의 산하가 되었다.

 특히 가장 커다란 외교적 무대가 된 것은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 공략 시의 절충이었다.
 츄우고쿠(中国)의 실력자 모우리 씨(毛利氏)와의 강화(講和)가 이번 공성전의 처리 결과에 달려 있었다. 마사카츠는
쿠로다 칸베에(黒田 官兵衛)와 함께 모우리의 외교승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惠瓊)와 화의 교섭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하필 그때 혼노우 사(本能寺)의 변보가 전해진 것이다. 노부나가가 횡사했다는 소식이 모우리 측에 전해지면 강화는커녕 오다의 원군을 기대할 수 없기에 히데요시의 군은 모우리의 총공격에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패했을 것이다. 마사카츠는 이 중대한 위기 속에서 타카마츠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를 할복시키며 화의를 성공시킨 것이다.

 하치스카 가문은 후에 아와(阿波) 토쿠시마(徳島) 25만 7천석으로 막말까지 이어진다.

[하치스카 마사카쓰(蜂須賀 正勝)]
오와리(尾張)
하치스카 출신. 처음엔 그 지역의 소영주(小領主)였지만 오다 가문(織田家)을 섬겨 노부나가(信長)의 명령으로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각주:6]. 1581년 하리마(播磨) 타츠노(竜野) 성주가 된다. 1586년 오오사카(大坂)에서 죽었다.

  1. 링크된 맵은 야하기 야하기바시 역(矢作橋駅). 오른쪽에 흐르는 것이 야하기가와 강(矢作川). 다리는 역에서 동북쪽 근처에 있었다 한다 [본문으로]
  2. 이 책에서는 ‘시게아키’라고도 루비가 되어 있지만 ‘茂’라는 글자는 14대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모치(徳川 家茂)의 모치(茂)를 물려 받았으니 모치아키가 정확하다. [본문으로]
  3. 모치아키의 부친 나리히로(斉裕)는 에도 바쿠후 11대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나리(徳川 家斉)의 아들로 하치스카 가문에 양세자로 들어갔기에 혈연적으로 이어져 있지는 않다. [본문으로]
  4. 야하기바시 다리는 1601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참고로 히데요시는 1598년에 죽었다. [본문으로]
  5. 이 이야기는 주로 무공야화(武功夜話)의 기술에 따른 것이라고 하는데, 그 책에는 현대에나 쓰는 말이나 당시에는 없었지만 마을끼리 합병되면서 만들어진 지명, 교차검증에 따라 틀린 기술이 많은 점 등으로 인해 근년 무공야화는 위서(僞書)가 아니냐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본문으로]
  6. 1573년에 아자이 가문을 멸망시킨 노부나가가 히데요시에게 옛 아자이 가문 영지를 하사하였을 때 히데요시에게서 1600석의 영지를 받았다고 하니 이 즈음부터는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볼 수 있다고 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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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ameh 2009.05.18 00: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좀 곁다리 느낌입니다만, 메이지덴노에 관련된 일화 말입니다만 교수에게 들은것만해도 제법 재밌는게 몇개 있는거 보니 (어휘력 부족으로 잘 들리진 않았습니다만 에휴;) 그 근엄한 얼굴에비해 의외로 유머감각이 있었던 사람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나저나 이 시간에 접속이라(;;)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18 10: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항상 여덟 팔자로 입술을 앙 다물고 있는 것이 참 인상적이더군요. 그 덴노우는.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이토우 히로부미 등에게 모든 눈이 가서인지 메이지 덴노우에 관해서는 그다지 거론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그냥 제가 관심 없었을지도...그래서 이번에 책 한 권 샀습죠!...아직 안 읽었지만요.)

      첫술부터 배부를 수 있남요.
      불과 몇 달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사셨던 분이 가시자 마자 다 귀에 들어오면 그것만큼 불공평한게 어디 있겠습니까~

      제 글 올리는 시간에 비하면 준수하신 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