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政)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가신들 중에서도 용맹함으로는 첫째 둘째를 다투는 무사였다.
 나리마사가 죽은 뒤의 일이다. 나리마사가 일평생 혐오했던 정적(
政敵) 히데요시(秀吉)도 나리마사의 용맹함을 인정할 정도였다.
 오다와라(
小田原) 정벌 때의 일화이다.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부대표식(馬標)을 [금박이 칠해진 삼단 갓(三階菅笠)]으로 바꾸고 싶다며 히데요시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그 부대표식은 대단한 무용(
勇)을 자랑하던 나리마사의 부대표식이다. 아주 뛰어난 공을 세우지 않는 한 이것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어떤 공을 세우느냐에 따라 줄 수도 있지"
 고 말했다. 우지사토는 그 말을 듣고 결사적인 활약을 펼쳐 명예로운 [삼단 갓]을 허용 받았다고 한다.

 나리마사의 선조는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의 명장 사사키 모리츠나(佐々木 盛綱[각주:1])라고 한다. 오다 가문(織田家)에서는 늦깎이 출세를 하였다. 노부나가의 [검은 화살막이 부대(黒母衣衆)]에 발탁된 것은 중년이 되어서였다. 이 즈음 노부나가는 옆나라 미노(美濃)의 사이토우 타츠오키(斎藤 竜興)를 공격하였는데 나리마사는 이 전투에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와 함께 사이토우 측의 장수 이나바 마타에몬(稲葉 又右衛門)을 쓰러뜨리는 공을 세웠다. 그런데 수급을 취하는 단계가 되어서 나리마사와 토시이에는 상대방이 더 잘했다며 서로 공을 미루기만 하였다. 거기를 우연히 지나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서로 공을 미루는 말싸움을 지켜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목을 주워서는 노부나가에게로 가 본 그대로를 말했다. 노부나가는 이 세 명에게 각각의 행동에 대한 상을 내렸다고 한다[각주:2].

 나리마사는 그 후 입신출세하여 시바타 카츠이에의 요리키(与力[각주:3])가 되어 엣츄우(越中)를 하사 받았다.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주군 노부나가가 죽자 그 후 자신의 운명을 카츠이에에게 걸었다. 나리마사는 히데요시를 혐오했다. 성격도 단순하여 한 가지를 생각하면 오로지 그것만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어 정치정세를 두루 살펴보고 행동하는 요령이 부족한 듯했다.

 그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 후세에 나리마사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킨 전진미답의 일본 알프스[각주:4] 돌파였다.
 히데요시와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연합군이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싸운 1584년이었다. 이 전쟁이 화해로 끝난 것을 안 나리마사는 철저항전을 주장하기 위해서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에게로 달려가려고 한 것이다. 당시 엣츄우에 있던 나리마사가 하마마츠에 가기 위해서는 에치젠(越前)에서 오우미(近江)를 거쳐 미노, 오와리(尾張)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거기는 전부 히데요시의 세력이 있는 적지였다. 남은 길은 중부 산악지대를 종단(縱斷)하는 직선코스였다.

큰 지도에서 일반적인 토야마(富山) 하마마츠(浜松) 루트 보기

 때는 11월[각주:5]. 엄동의 계절이었다. 몸의 반 이상이 빠질 정도로 쌓인 눈 덮인 험준한 일본 알프스를 돌파하는 것은 현대에 와서도 쉽지 않다. 살아서 하마마츠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확실했다. 나리마사는 그것에 도전하였다. 나리마사 일행은 험난한 쿠로베(黒部)의 비경에 들어섰다. 자라토우게(ザラ) 고개라는 난소를 극복하여 하리노키토우게(木峠) 고개를 넘어 간신히 시나(信濃)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것도 [인기척 끊겨 지나온 곳은 모두 산과 계곡(るところ皆山谷えて人煙無し)]라는 깊은 산속에서 나무꾼의 집 한 채를 발견하는 행운도 있었다. 이 나무꾼의 안내로 길을 잃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시모스와(下諏訪)를 거쳐 12월이 돼서야 하마마츠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야스와 만나자 나리마사는 노부나가에게 하사 받아 보물처럼 여기던 작은칼(脇差)을 이에야스에게 바치며, "내 영지인 엣츄우에 히데요시가 공격해 온다면 부디 원군을 부탁 드리옵니다"
 하고 간절히 부탁하는 한편, 토쿠가와와 삿사가 한 편을 이루면 예전 타케다 신겐(
武田 信玄),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합쳐진 만큼의 파괴력을 가져 히데요시 따위는 단번에 멸할 수 있을 것이오 – 하며 열변을 토했다 한다.

 이에야스는 이에 대해 확답을 피했다고 한다. 나리마사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아 다음 해 1585년 히데요시가 엣츄우에 침공했을 때는 결국 이에야스의 원군은 얻지 못하였다.

 이렇게까지 히데요시에게 반항했음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용서하여 히고(肥後) 전역을 하사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리마사는 영내(領內) 호족 반란의 책임을 요구 받아 영지(領地) 몰수와 함께 셋츠(摂津) 아마가사키(尼崎)에서 자살을 명령 받았다.

[삿사 나리마사]
1516년생. 오와리(
尾張) 출신. 엣츄우(越中)를 하사 받지만 노부나가(信長)가 죽은 뒤 히데요시(秀吉)에 대항하다 패하여 항복. 1587년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 성주. 다음 해 1588년 5월 자살. 73세[각주:6].

  1.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최측근 중 한 명. 겐페이 쟁란기 때의 활약으로 후에 에치고(越後)와 이요(伊予)의 슈고(守護)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이 이야기는 [상산기담(常山記談)]과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에 나오는 것으로, [신장공기(信長公記)] 권수(巻首)의 '쥬우시죠우 전투(十四条合戦)' 항목에는 稲葉又右衛門を、池田勝三郎・佐々内蔵佐、両人としてあひ討ちに討ちとるなり(이나바 마타에몬을 이케다 카츠사부로우(나중에 코마키-나가쿠테에서 죽는 사람), 삿사 쿠라노스케 둘이서 물리쳤다)고 나온다. 저 마에다, 삿사, 시바타는 나중에 호쿠리쿠(北陸)에서 함께 활약한 무장들이라 후세에 만들어진 이야기라 하다. [본문으로]
  3. 이 즈음 오다 가문의 경우 각 유력 부장에게 파견된 오다 씨의 직속 신하를 뜻한다. 물로 세세히 들어가면 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노부나가나 노부타다가 영지를 인정하였다. [본문으로]
  4. 윌리엄 골란드(William Gowland)라는 인물이 이 산맥을 조사한 후 '일본 알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일본 알프스'란 이름이 붙기 전에는 히다 산맥(飛騨山脈 – 현 '키타(北) 알프스'), 키소 산맥(木曽山脈 – 현 '츄우오우(中央) 알프스'), 아카이시 산맥(현 '미나미(南) 알프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본문으로]
  5. 일본 구력. 현재로 치면 12월 하순 쯤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6. [무덕편년집성(武徳編年集成)]과 [무가실기(武家事記)]에 따르면 1516년생으로 죽을 때 73세가 되지만,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과 [삿사 군기(佐々軍記)]에는 1536년생으로 되어 있어 죽을 때의 나이는 53이 된다. 일본어 위키는 1536년생을 채용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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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07.26 1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 73세 설도 있었습니까. 처음 알았습니다@.@

    랄까, 결국 히데요시가 할복신킨것 보면 舊怨이 남아있던걸지도 모르겠군요. 뭐 결국 가토와 고니시 좋게 만들어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마는(..)

    그건 그렇다 쳐도 저 당시에 저 계절에 일본알푸스 돌파라니.. 뭔가 저것만으로도 중세 산악사에 신기원을 세울만한 일 아닙니까(@>@!) 어째서 이런게 잘 알려지지 않은거지;;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27 13: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가진 책들에서는 몰년 73세의 것들이 많은데(...문제는 쇼우와(昭和) 시대의 것들이지만요 ^^) 위키는 53세설을 취하고 있더군요.

      음...어땠을까요... 아직 개인적으로 일본의 서적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인데, 김성한 작가님의 소설 '임진왜란'에는 흥미로운 해석을 하셨더군요. 삿사 나리마사를 히고에 앉힌 것이 조선침략시에 선봉장으로 쓰기 위함이었다고. 잘 생겼고 뛰어난 전술적 역량에 주변 무장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고... 인기가 있었는지 잘 생격는지는 모르겠지만, 본문의 일화에도 나와 있듯이 나리마사의 용맹함을 인정하고 있었을 정도이니 아주 무책임한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 김성한 작가님의 '임진왜란'은 지금 봐도 대단합니다. 아직도 이시다 미츠나리가 임진왜란 때 주도적인 침공론자라고 주장하는 글들이 일본에서도 있지만 저 소설에서는 시작부터 코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전쟁 저지를 위해서 노력하거든요...히데요시 가족들에 관한 것은 시바 선생의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을 많이 참조한 듯 싶지만요 ^^ )

      나리마사는 더군다나 무려 '가마'를 타고 넘었다고 합니다. ^^ ...아랫사람들만 불쌍한 법...
      제가 가진 책들에는 94명설과 60여명설이 있는데 94명설에는 십 수명의 동사자가 나왔다고 하며 60여명설에는 약 반 수가 죽었다고 하네요.

  2. 나라 2009.07.26 11: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시이에와 마츠에서 봤지만... 저 산을 겨울에 넘어가다니 후덜덜(..) 지금도 장난 아니던 걸요.
    니이가타현 눈 내리는 산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의 막막함을 생각하면..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27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호오~ 그 드라마에서는 나왔나 보군요...하긴 드라마에서는 토시이에의 라이벌 격인 인물로 나왔다고 하니... 괜찮은 드라마일 것 같기는 한데 아직 연이 안 닿아 보질 못했네요.

      니이가타 현에서 길을 잃었다고 하던가요? 본문에서 나온 하리노키토우게 고개(이곳은 현재 나가노 현)에서 길을 잃어 좀 돌기는 했다고 하더군요.

  3. 나라 2009.07.27 16: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뇨 제가 거기서 길을 잃어버렸던 적이 있어서(...) 눈이 가득가득 쌓이는 데 정말 막막하더군요.

  4. 써니데이 2009.07.27 21: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시이에와 마츠에서는 나리마사와 더불어 그 일행들이 걸어서 산을 넘는걸로 나오죠.
    이 드라마가 나리마사, 토시이에, 히데요시 세 명 주축으로 한 드라마라..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29 12: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헤~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남자 주인공(카라사와 토시아키唐沢 寿明), 여자 주인공(마츠시마 나나코松嶋 菜々子) 둘 다 좋아하는 배우라 보고 싶다는 생각은 정말 강한데... 띄엄띄엄 본 적만 있고 아직 전부 다는 못 보았네요.
      나리마사에게도 꽤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졌나 보군요.

  5.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8.08 1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시이에와 마츠>에서는 토시이에의 진실한 친구로서 등장하더군요.
    며칠전 아들과 함께 실종된데 이어 각성제 복용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사카이 노리코가 그 작품에서 오네(네네) 역으로 출연했었죠;;

    카라사와 토시아키를 거기서 처음 보고 얼마전 <하얀 거탑>을 감상했는데 정말 대단한 배우라는 생각이 듭니다. 배우가 되기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했다던데 그의 대단한 연기력이 드러났던 명작이었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8 14: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카이 노리코...는 예전 저 고딩 때도 한국에서 인기가 있었...다고 하기는 좀 그렇군요. 당시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이텔 같은 곳도 아직 생기기 전인지라...하여튼 이름은 알고 있던 처자였습죠. 당시는 주전법자(酒井法子)라고 그냥 한자로 읽던 기억이 나는군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는 조금 삐둟어진 앞니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카라사와 토시아키...는...정말 재미있는 배우더군요.
      그분 부인이 또 유명 여배우로 야마구치 토모코(山口 智子)라고 있는데, 워낙 인기인들이다 보니 불화설 또한 자주 퍼지던 중 야마구치가 잠깐 수영복 입은 방송이 나와 화제가 되었고(나이에 걸맞지 않은 몸매로), 다른 방송일로 기자들에 둘러쌓인 카라사와에게 그런 것이 화제가 된다고 하자, 카라사와 왈 "아 그래요? 전 매일 밤 그 보다 더 굉장한 것을 보아서요"

      버라이어티 방송에서 카라사와 보면 얼마나 웃기고 재미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ex; smapxsmap에서 비스트로 스마프에서 멤버들과 개그대결 펼치는 거 보면 정말 웃깁니다).

      .....만 이렇게 말하는 저는 아직 그가 배우로 나온 것을 본 적이 없네요. '토시이에와 마츠'도 안 보았고 '하얍 거탑'도 안 보아서..

 시코쿠(四) 전역을 정복한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이지만 시작은 토사(土佐) 오코우(岡豊) 3000관의 호족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던 군소호족이 한때는 츄우고쿠(中)의 모우리(毛利), 큐우슈우(九州)의 시마즈(島津)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서일본 삼대세력 중 하나로 커졌는데 그 원동력이 된 것은 토사(土佐)의 독특한 [이치료우구소쿠(一領具足)]라 불리는 민병조직에 있었다.

 [이치료우구소쿠]는 평소엔 농업에 종사하는 지역 무사(士)의 무리들이다. 그들은 밭이나 논으로 나갈 때 창 끄트머리에 짚신이나 갑옷, 식량을 매달고 나가 그것을 한 켠에 놓았다가 전투 참가의 군령을 받으면 낫이나 괭이를 내던지고 그 자리에서 창을 메고 모여들었다. 즉 갑옷(具足) 한 벌(一領), 말 한 마리로 집합했기에 [이치료우구소쿠(一領具足)]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6000~9000평의 토지를 소유한 묘우슈(名主 – 부유한 농민) 계급으로 몇 명 정도 부하를 데리고 있었다. 이것이 우수한 쵸우소카베 군단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쵸우소카베 씨의 선조는 시나노(信濃)의 하타 씨(秦氏)로 백제에서 온 도래인(渡[각주:1])이었다. 처음엔 '소카베(宗我部)'라고 하였지만 토사에 또 다른 소카베 씨가 있었기에 앞에 '쵸우(長)'를 붙였다고 한다.[각주:2]
처음엔 시코쿠 탄다이(
探題)인 '호소카와 씨(細川氏)'의 중신이었다. 그 호소카와 씨가 미요시(三好) 일족에게 멸망 당하자 차츰 자력으로 세력을 키웠지만, 1508년 당주 카네츠구(兼序)가 모토야마 씨(本山氏)등에게 공격받아 살해당하자 아직 꼬꼬마였던 센유우마루(千雄丸[각주:3])는 토사(土佐)의 코쿠시([각주:4]) 이치죠우 후사이에( 房家)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이 '센유우마루'가 모토치카의 부친 쿠니치카()이다. 쿠니치카는 후사이에의 보호 속에 오코우 성(岡豊城)으로 돌아오자 옛 영지(領地)를 회복하여 토사 제패를 목표로 세력을 확대해 갔다.

 이야기를 바꾸어 보자. 어렸을 적 쵸우소카베 모토치카의 외모를 전해주는 사료에 따르면, [키가 크고 흰 피부에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가신들은 '어린 아씨(若子)'라 부르며 뒤따마를 깠다]고 한다. 후년 시코쿠의 패왕이라는 이미지와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내성적인 청년이 데뷔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모토치카의 데뷔전은 1560년 5월 22살 때였다.
 쿠니치카 부친(즉 모토치카의 할아버지)의 원수인 모토야마 시게토키(
本山 茂辰)와의 전투에서 모토야마의 거성 나가하마 성(長浜城)을 점령한 후 도망친 시게토키를 우라토 성(), 아사쿠라 성(朝倉城)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전투가 한창 행해지던 도중 부친 쿠니치카가 급사하는 바람[각주:5]에 가독을 이은 22살 모토치카의 양 어깨에 쵸우소카베 가문의 운명을 달리게 된 것이다. 평소 가신에게 경시 받던 선이 가는 젊은이가 이 순간부터 당당한 무장으로 변신을 이루게 된다.

 쿠니치카의 죽음이 알려지자 역시 모토야마 세력은 역습으로 나섰다. 2천여의 대군이었다. 쵸우소카베는 500여[각주:6]. 중과부적으로 무너지려는 찰나에 모토치카가 용감히 나서,
 "물러서지 마라!"
 라며 창을 직접 휘둘러 곧바로 적 두 명을 죽였다. 그 모습에 쵸우소카베의 군사들은 사기가 올라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해서 기세에 탄 쵸우소카베는 단번에 모토야마의 군사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전투에서의 모습으로 모토치카의 평가가 180도 변한다.
 [지모용(
智謀勇) 겸비]
 라며 가신들의 신뢰를 손에 넣은 것이다.
 그 후 상승기류를 탄 모토치카는 각지를 전전하여 1570년 즈음에는 이치죠우 가문(
)의 하타(幡多), 타카오카(高岡) 2 군()을 제외한 토사 전역을 손에 넣었다.

 이치죠우 가문은 선조에 칸파쿠() 노리후사([각주:7])가 있을 정도인 토사 제일의 명문가였다. 더군다나 모토치카의 부친 쿠니치카()는 이치죠우 가문의 보살핌 속에 자랐다. 쵸우소카베 가문에게 있어 큰 은인인 가문이었다. 모토치카도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였지만 그러던 중 평소 소행에 문제가 많던 당주 카네사다(兼定)가 가중에서 가장 인망 높던 가로(家老)[각주:8]를 직접 베어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모토치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이치죠우 가문의 가신들을 소집하여 카네사다를 은거시키고 적자에게 당주자리를 물려주도록 꾀하였다. 라기보다 그 자리에 드센 가신들을 대기시켜두었기에 오히려 쿠데타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모토치카는 이렇게 카네사다를 이요(伊予)로 추방하고 카네사다의 적자 킷포우시(吉房子)[각주:9]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켜 이치죠우 가문의 당주로 앉혔다. 이로써 토사 전역은 모토치카에게 완전히 장악되었다.[각주:10]

 다음 목표는 시코쿠() 전역의 정복이었다. 이 즈음 모토치카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교류하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부하 장수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가신 사이토우 토시미츠( 利三)의 딸이 모토치카의 부인이었던 것이다.[각주:11]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 우호관계도 무너진다. 모토치카가 아와(
阿波)를 시작으로 차츰 지배영역을 넓혀가자 천하통일을 목표로 하는 노부나가에게 있어 방해물이 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케다 신겐(
武田 信玄),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라는 이대 거물이 죽어 후방이 안정되자 곧이어 노부나가는 시코쿠 정벌을 진행시키려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원정군이 배를 타고 떠나려 하는 때[각주:12] 혼노우 사(本能寺)의 변[각주:13]이 일어나 노부나가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모토치카는 지금이야말로 시코쿠 제패의 호기라 보고 행동을 개시했다. 우선 아와를 침공한 사누키()의 소고우 나가야스(十河 存保[각주:14])를 공격하여 쇼우즈이 성(勝瑞城)을 함락하고 이와쿠라 성(岩倉城)을 손에 넣어 아와를 통일한 후 사누키의 소고우 성(十河城)까지 하락하였다. 도망칠 곳을 잃은 소고우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로 도망쳐 원조를 청했다.

 당시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츠히데를 물리쳐 주군 노부나가의 원한을 갚았고 시즈가타케 전쟁(い)에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물리쳐 천하인(天下人)으로 향하는 길을 파죽지세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연합군과 싸우고 있던 중이라 소고우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이 틈에 모토츠카는 시코쿠 전역을 자신의 세력하에 둔 것이다.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군이 출진한 것은 1585년 6월이었다. 이에야스, 노부카츠와 평화협정을 맺고 키이(紀伊)를 평정한 지금 그 여력을 몰아 시코쿠로 달려든 것이다. 총 12만 3천이라는 대군이었다.
 아무리 모토치카라도 이런 대군에는 개길 수 없어 인질로 셋째 아들인 치카타다(
親忠)를 바치고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였다. 그리고 아와(阿波), 사누키(), 이요(伊予)의 반환을 명령 받았지만 토사(土佐)만은 안도받았다. 히데요시는 반항했던 모토치카에게 관대했다. 모토치카가 본령 안도의 인사를 올리러 상경하자 큰 환대와 함께 비젠나가미츠(備前長光)의 이름난 칼, 황금 100매, 말 한 마리, 화려한 장식의 안장과 일본식 등자()를 히데요시에게 하사 받았다고 한다.

 이 다음 해. 모토치카는 히데요시의 큐우슈우(九州) 정벌에 종군하여 붕고(豊後) 방면의 적을 – 예전에는 적이었던 소고우 나가야스(十河 存保)와 함께 공격하였다. 시코쿠의 군세는 이요의 이마바리(今治)를 출발하여 붕고에 상륙하자마자 시마즈(島津)의 성들을 계속해서 낙성시켜 나가다가 헤츠키가와 강(戸次川)에서 시마즈 군과 정면충돌하게 되었다.
 파견지휘관(
軍目付)인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는 막무가내였다. 곧바로 결전을 벌이자고 나댔다. 그러나 모토치카와 나가야스는 신중했다. 시마즈가 얼마나 강한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토치카는 주력군을 기다린 후 공격하는 것이 좋다고 권했지만 센고쿠 히사히데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12월 12일 결전을 벌인다. 시마즈 군은 일부러 지는 척하고 퇴각하였다. 센고쿠 히사히데는 여기에 낚였다. 참담한 패배였다. 소고우 나가야스는 전사하였으며, 모토치카의 적자 노부치카(信親)도 죽었다.

 노부치카는 당시 22살로 한번에 여덟 명을 상대하여 더구나 그들을 이길 정도로 무예에 뛰어났다고 한다. 모토치카는 이 노부치카의 죽음에 너무 낙담한 나머지 자신도 적진에 돌격하여 죽으려 하였지만 말리는 가신들과 애마 '나이키구로()'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헤츠기가와 전투에서 쵸우소카베 가문은 700명의 병사를 잃었다. 이 전사자의 위패는 지금도 코우치 시(
高知市)의 하다 신사(秦神社)에 모셔져 있다.

 이 패전이 모토치카의 말년을 꼬이게 만들어 둘째 치카카즈(親和), 셋째 치카타다(親忠)를 제쳐두고 넷째 모리치카(盛親)를 세자로 정하였으며, 이에 반대하는 가신과 친족들까지 죽이고 병으로 누워있는 둘째 치카카즈의 병간호도 하지 못하게 한 채 유폐시켜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후에 모리치카는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서군에 섰기에 영지(領地)를 몰수당하였고 낭인이 된 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이 끝난 후에 잡혀 죽었다. 명문 쵸우소카베 가문의 멸망이었다.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
1538년생. 1560년에 가독을 이어 토사(
土佐)의 여러 호족들을 거느리고 1583년에 시코쿠() 전역을 평정하지만 히데요시(秀吉)의 시코쿠 정벌군에 항복하여 토사만 허락 받았다.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에 종군하였고 임진왜란 때도 조선에 출진. 1599년 5월 19일 죽었다. 60세.

  1. (일본으로 바다) 건너(渡) 온(来) 사람(人)이란 뜻. 보통 중국계나 한국계를 말한다. [본문으로]
  2. 나가오카 군('長'岡郡)에 있었기에 쵸우(長)를 붙였으며, 또 다른 소카베 씨는 카미 군('香'美郡)에 있었기에 코우소카베 씨('香'宗我部氏)가 되었다. 후에 모토치카의 부친 쿠니치카가 자신의 셋째 아들인 치카야스(親泰)를 양자로 들여보내 가문을 탈취. 치카야스는 형인 모토치카의 시코쿠 제패를 도왔다. [본문으로]
  3. '치오우마루'라고도 읽는 듯 하다. [본문으로]
  4. 조정의 관직. 그 지역(国)의 행정과 사법 등 모든 것을 관장. 보통 '***노카미'라 불리는 직책. [본문으로]
  5. 실은 전투가 끝난 후에 사망. 전투는 1560년 5월 28일. 쿠니치카의 사망은 6월 15일. [본문으로]
  6. 1000이라고도 2500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오우닌의 난(應仁の亂) 때 토사로 피신하였다. [본문으로]
  8. 도이 소우산(土居 宗珊)을 말한다. 사족으로 신장의 야망-혁신 PK의 튜더리얼에서 나오는 그분이다. [본문으로]
  9. 실제로는 '만치요(万千代)'라고 한다. 이치죠우 타다마사(一条 内政) [본문으로]
  10. 사족으로 [신장공기]나 [타몬인 일기(多聞院日記)]에 따르면 수도권 근방(上方)에서 보는 모토치카의 인식은 이치죠우 정권(大津御所 - 킷포우시 즉 이치죠우 타다마사(一条 内政)가 있던 곳 '오오츠'를 따서)의 보좌역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실제로 모토치카가 노부나가와 연락을 할 때는 자신이 부하가 아닌 이치죠우 가문의 부하 '카쿠미 이나바노카미(加久見 因幡守)'를 통해서 였을 정도였다. [본문으로]
  11. 토시미츠의 형이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친위군사조직인 호우코우슈우(奉公衆) 멤버인 이시가이 미츠마사(石谷 光政)씨의 사위로 들어갔고(이시가이 요리토키(石谷 頼辰)), 그 이시가이 미츠마사에게 또 딸이 하나 있어 그녀가 모토치카의 부인이 되었다. 한마디로 토시미츠와 피가 이어져 있지는 않다. [본문으로]
  12. 예정은 6월 3일. [본문으로]
  13. 6월 2일. [본문으로]
  14. 이 즈음은 미요시 나가야스로 불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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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7.18 0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모토치카가 2년만 더 살았다면 하는 생각이 종종 들더군요. 아니, 1년 반만 더 살았더라도 어떻게든 세키가하라 전후처리때 능숙히 토사 정도는 안도받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아.. 그렇다면 료마는 없게 되는거려나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19 12: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동군쪽으로 서긴 했을 것 같긴 합니다.

      그쵸 아마 료우마라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은 나오지 않았겠죠. 토사 향사의 차별도 없었을 테니 돈 많은 집 도련님으로 탱자탱자 지냈을 것이고 또한 인물이기에 토사 계급사회의 시스템을 극복하려 했던 타케치 한페이타(武市 半平太)나, 그 타케치를 통해서 만난 료우마 업적 중 하나로 여겨지는 삿쵸우 동맹의 고안자 중 한 명인 나카오카 신타로우(長岡 慎太郎)도 만나지 못했을테니요.

  2. 나라 2009.07.18 1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사람 인생도 정말...ㅠ_ㅠ 때를 잘못 타고 나면 망한다는 전형 같습니다그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19 12: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욕심이 과했던 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노부나가가 힘들 때 인심 넉넉한 말(시코쿠 땅 중 니가 점령한 거는 다 니꺼) 좀 했다고 그걸 내세워 자신의 가치가 떨어졌는데도(노부나가는 모우리 가문 공략 시 시코쿠 방면에서 압박을 줄 카드로 사용할 생각을 처음에 가졌다고 하더군요) 그런 시세도 못 읽었고, 노부나가가 제시한 토사 1국과 아와 반국의 카드를 지 손으로 내쳐 한때 멸문의 위기까지 빠지게 됩죠(노부나가 삼남 노부타카의 시코쿠 정벌). 운 좋게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 숨을 돌리지만 또 히데요시에게 개기다가 토사 일국으로 삭감.

      때를 잘못 타고 난 것은 노부나가랑 동시대에 태어난 모든 군웅들에게 적용될 것 같습니다. 몇 백년 이어져 오던 전란의 시대(개인적으로 무로마치 바쿠후도 평온한 시기가 적었던 듯 해서요)를 불과 십 수년 만에 통일정권 수립 일보 직전까지 가져갔으니까요.

  3. Favicon of https://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7.18 18: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부치카가 저 때 죽었군요.
    위키를 찾아 읽어보니 모토치카 아들들은 죄다 원치않게 죽은듯...(줄을 잘못 선것도 있겠지만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19 12: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타케다 가문의 예(카츠요리勝頼)에서 볼 수 있듯이 타가문 후계자로 보낸 이를 다시 종가집에서 받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 같더군요.

      모토치카도 타케다 신겐과 비슷한 입장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호족의 연합정권이라는 불안한 내부구조와 더불어 후계자로 키워왔던 장남이 없어짐으로 인해서 급히 자신의 권력을 이을 후계자를 만들려다 보니 무리가 많이 따랐던 듯 합니다.

  4. 나라 2009.07.19 14: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 전국시대는 군웅할거지만 고만고만한 애들이 여기저기 부딪힌 기분... 입니다.
    천하인 3인을 제외하면 그닥 뛰어난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19 15: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그런가요? ^^

      뛰어나다 아니다는 것은 동시대 동지역에 있던 사람들끼리의 비교우위문제 인지라...
      가령 노부나가가 오우슈우 끄트머리에 있었음 우리가 아는 노부나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랬다면 노부나가도 좇병진이었겠고 그 노부나가가 끌어 올려준 히데요시도 병진이 채였을 것이고 그 노부나가를 평생 따라다니고 그가 죽자 히데요시의 안색 살피다 히데요시 삽질 & 죽음 덕분에 천하인이 된 이에야스도 별 볼일 없었겠죠.

      뭐...천지인...이란 말은 그래서 나온 것 같습니다.
      천시와 지리와 인사를 다 잡아야만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요.

  5. 맹꽁이서당 2009.07.19 22: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는 서쪽에 치우친 지리적 요건이 오히려 이점이 되었다던데, 이 동네는 또 경우가 달랐군요. 하긴 동서남북 다 트인 광활한 대륙과 길쭉한 섬나라가 같을 리가 없겠지만요.

    센고쿠 히데히사 녀석 삽질의 최대 피해자가 되었다는 점이 안타깝네요. 과연 만화에서는 그 장면이 어떻게 진행 될지... (요새 센고쿠 천정기 원서라도 사 볼까 생각중인데, 높은 환율이 발목을 잡습니다 --a)

    아참, 지난번에 가르쳐주신 [규슈 영지 랭킹]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생각보다 규슈 석고가 많았더군요(TOP 5가 235만석이니 전체는 300만 쯤 되려나?) 혹시 일본 다른 지역, 혹은 전역을 대상으로 한 순위는 없을까요? 참고할만한 사이트라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_)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19 2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쿄우토만 제압하면 일본을 지배할 수 있는 빠르고 편한 길이 있었는지라... 오와리(尾張)라는 가장 적당한 위치에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사보고 싶은데...환율이 역시...서울역 북오프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죠.
      참~ 원서 가능하시면 헤우게모노(へうげもの) 강추입니다!

      그렇잖아도 자료 정리도 할 겸 구글 문서도구 스프레드쉬트로 만드려고 했었는데 말씀하시길레...
      '아이 참~ 생각났을 때 만들어 두었음 이럴 때 떡 하니 내놓으면 참 멋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드네요... --;

      어디선가 석고 정리해 둔 사이트를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네이버 낭풍까페가서 겨우 찾았습니다.

      http://homepage3.nifty.com/ksatake/fkunu1.html

      이곳 함 가보시길.

  6. ckyup 2009.07.20 22: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 하나의 재미있는글 감사합니다. 몰랐던 것을 또 알게되었네요.

    지금 막 대망 한번 끝네고, 두번째 연달아 읽고 있는데요, 역시 방대한 분량이라서 그런지 기억이 새롭네요.... 오늘 아침에 신겐이 피리소리 듣다가 총맞고 가버렸습니다.

    근데 읽으면서 궁금한점은, 소설 앞부분에 나오는 인물들의 나중 얘기가 전혀나오지 않는데요, 예를들어 이에야스 큰딸이라던지, 이에야스 큰며느리인 노부나가 딸이라던지...., 그리고 뭐 다른 중신들의 세키카하라 이후의 얘기라던지... 등등 (특히 소설초반의 재미를 톡톡히 해주는 헤이하치로와 사쿠자에몬).

    암튼 좋은 정보 감사드리고요, 연재물 번역, 뼈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점 알아두시지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21 11: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똥싸개 이에야스 사건 다음인 피리 소리가 들리는 노다성...부근이군요. 총 맞아 온 몸에 마비가 와 침 질질 흘리면서도 (제 딴에는 정신으로) 근습들을 질타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에...그러니까 제 블로그에 이에야스의 큰 딸이나 노부나가 딸, 혹은 이에야스 부하들의 말년...이 안 나온다는 말씀? 아니면 소설 상에서?

      헉~ 혀...협박이 것입니까? 직접 제 앞에서 협박하신다면 무릎꿇고 용서를 빌겠습니다만, 온라인 상에서 전 그래도 강직한 편에 속합니다. 그런 위협으로는 fss를 그리는 나가노 마모루, GM이나 삼국전투기를 그리시는 최훈 님의 연재속도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려하는 절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7.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8.08 1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쪽도 줄 잘못 섰다가 가문이 박살났군요.

    아, 전부터 질문해야지 하면서도 잊고 있다가 신장의 야망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이 났는데요.
    시마즈 타카히사의 4남이 이에히사 맞죠? 능력치도 그렇고 열전에도 보니 꽤나 용맹한 장수였던 것 같은데, 히데요시가 규슈 정벌에 나섰을 때 히데요시-시마즈 회견 후 급사했다고 열전에 나와있더군요. 병으로 죽은건지, 아니면 시마즈 세력을 두려워한 히데요시 측에서 뭔가 손을 쓴건지 그게 궁금합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8 14: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보통 암살설이 흘러나오면 가장 득을 보는 사람이 범인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있는데...

      어쨌든 시마즈 가문의 기록(島津国史)에는 토요토미노 히데나가가 독살했다는 듯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만 주변 정황을 보아선 토요토미 측이 독살해서 득을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마즈 가문의 당주 요시히사와 둘째 동생 요시히로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마즈를 분열시키려면 땅을 각 형제나 중신들에게 나누어 다이묘우로(그러니까 시마즈 가문의 신하에서 토요토미 가문의 다이묘우로 만들어) 버리면 될 것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으니까요(또한 이에히사 역시 그리 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이에히사는 젊었을 적에 쿄우토에 올라가 노부나가의 힘(즉 천하인의 힘)을 보았던 인물에, 뛰어난 전술가인 만큼 직접 싸워서 패한 만큼 상대의 힘을 인정하는 무장이었다 생각합니다.

      너무도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서 암살설이 흘러 나오는 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s://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8.08 15: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인가요...

      신장의 야망 - 혁신을 하다보면 '신겐신의 야망'이라 불릴 정도로 나가오, 다케다 두 가문이 제일 쉽지만, 시마즈 가문도 클리어하기가 수월하더군요. 확실한 철포 기술이 있는데다 유능한 일문이 많으니까요 ㅎㅎ

      그 일문들을 이용해서 큐슈만 통일을 하면 오오토모 소린, 다치바나 도세츠, 나베시마 나오시게 같은 좋은 장수들을 부하로 삼을 수 있으니 군단 만들어서 돌리면 알아서 천하가 손안에 들어오네요 ㅋ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8 16: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거기서 시작하면 편할 듯. 무엇보다 나갈 쪽이 정해진대다 거기에 주변은 약한 놈들 뿐. 그 약한 놈들만 처리하면 정말 오오토모나 류우조우지 녀석들을 쉽게 먹을 수 있겠군요. 더구나 오오토모 놈은 제 기억 상으론 무작정 무기들만 키우는 녀석들인지라.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일찍부터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라는 인물을 높게 평가하였다.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가 훌륭한 명장이라 일컬어지는 이유는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같이 뛰어난 인물에게 국정을 맡겼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대놓고 말하자면 나오시게가 있었기에 류우조우지 가문의 융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1584년 3월. 시마즈(島津)-아리마(有馬) 연합군에게 패하여 대장 타카노부가 전사하자 류우조우지 가문의 운명은 나오시게의 양 어깨에 달리게 되었다. 타카노부의 뒤를 이은 마사이에(政家)는 대장으로서의 기량이 결여되어 있었다. 히데요시의 천하였던 1587년, 이 마사이에의 범용함으로 인해 류우조우지 가문은 모반혐의를 받게 된다.

 이해, 히고(肥後)에 있던 삿사 나리마사의 영내(領內)에서 토착 영주(国人)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근린의 여러 다이묘우(大名)가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전부 출진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사이에는 병에 걸렸다며 출진하지 않은 것이다.(관련링크[각주:1])
 당시 오오사카(大坂)에 있던 나오시게는 서둘러 귀국하여 어쨌든 자신만이라도 출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히고(肥後)에 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등의 감찰관(軍奉行)들과 만났다. 감찰관들은,
 "마사이에는 병에 걸렸다고 하지만 실은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말하였다. 나오시게는 열심히 그 사실을 부정했다. 곧바로 마사이에를 데리고 참전하겠습니다 – 하고 변명에 힘쓴 후 사가(
佐賀)로 돌아와 마사이에를 나무란 후 참전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마사이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카와카미 다이묘우진(
河上大明神[각주:2]) 의 신탁이 이르길 참전은 쓸모 없는 일이라고 나왔으며, 요가 신사(与賀神社)에 있던 녹나무의 잎이 전부 떨어지는 불길한 일이 있었다. 또한 이이모리 촌(飯森村)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타카노부)의 혼령이 씌어 출전하면 전사한다고 외쳤다더군. 성안에서도 여자의 우는 소리가 나는 등 이변이 끊이질 않네"
 나오시게는 너무도 어리석은 답변에 격노하며, 녹나무가 늙어서 잎이 떨어지는 것에 뭔 이상한 점이 있소 – 라며 불길하다는 말을 입에 담은 자를 즉각 처형하고,
 "주군은 여우에게조차 좆병진 취급[각주:3]을 당하고 있습니다!"
 고 질타하곤 히고(肥後)의 전쟁터로 끌고 나간 것이다.

 이리하여 마사이에는 모반혐의를 벗을 수 있었지만 이런 마사이에였기에 점점 희미한 존재가 되어갔고 반대로 나오시게의 존재감이 커져만 갔다.
 1590년 결국 마사이에는 아직 35세라는 한창 일할 나이에 병약함을 이유로 은거의 몸이 되었다.
 이때 일문과 숙노들이 모여 회의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마사이에의 친할머니인 케이긴니(
慶誾尼[각주:4])가,
 "지금 이 상황에서 나오시게님 말고는 류우조우지 가문의 안태를 꾀할 수 있는 인물이 없습니다. 마사이에 다음의 가독은 나오시게님이 하셔야만 합니다"
 라는 의견을 내놓자 그곳에 있던 모두가 동의를 했다고 한다. 또한 나오시게가 가독을 이은 배후에는 히데요시의 뜻도 작용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나오시게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조선의 왕자 둘[각주:5]을 포로로 잡는 대공을 세웠다. 후에 키요마사가 나오시게를 평하길,
 "내 생애에서 조선에서 싸운 것만큼 편한 적은 없었다. 모두 나베시마 나오시게 덕분이다. 공을 다투는 일 없이 군율을 엄격히 지키며 나에게 협력해 주었다"
 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오시게는 일찍부터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역량을 파악하여 세키가하라() 후엔 토쿠가와의 천하가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 혜안덕분에 막말(幕末)까지 35만석의 나베시마 가문은 이어질 수 있었다.

 그에 비해 류우조우지 가문은 비참했다. 마사이에의 아들 타카후사(高房)는 영지(領地)를 나오시게에게 빼앗긴 것을 원망하여 1607년 19살의 자기 부인을 찔러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꾀하여 실패. 결국 그 상처가 원인이 되어 죽었다. 후년 이야기꾼(講談)들에 의해 유명해진 [나베시마 냥이 소동(鍋島猫騒動)[각주:6]]은 이 류우조우지 가문의 원한을 바탕으로 각색한 것이라 한다.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
1583년생. 첫 이름은 노부나리(
信生). 류우조우지 가문(竜造寺家)의 가신이었지만 타카노부(隆信)의 죽음 후 실권을 장악하였고, 1590년 류우조우지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 히젠(肥前) 사가 성(佐賀城)의 성주가 된다. 1618년 6월 죽었다. 81세[각주:7].

  1. 전국무장 말년과 최후. '삿사 나리마사'항목의 중간쯤 관련 사항이 나와 있습죠. [본문으로]
  2. '요도히메카미(與止日女神)'의 별칭. 바다의 신인 '와타츠미카미(大綿津見神)'의 딸 혹은 일본 판타지 주인공 '신공왕후(神功王后)'의 여동생이라고도 한다. 히젠(肥前)에서는 가장 급수가 높은 신사(肥前一宮)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말로 "여우에 홀리다(狐憑き)"는 말이 있다. [본문으로]
  4. 류우조우지 가문을 위한다며 50가까운 나이에 나오시게의 부친을 강제로 취한 타카노부(隆信)의 모친. 즉 나오시게의 양엄마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5. 함경도에 있던 임해군과 순화군. 그들이 잡았다기 보다는 반란을 일으킨 함경도의 아전 국경인(鞠景仁)에게 잡혀 넘겨졌다. [본문으로]
  6. 여러 버전이 있는데...대충 종합하면...나오시게의 아들 카츠시게(勝茂)가 사사로운 일로 가신을 죽였다. 그 가신에게는 늙은 모친이 있어 아들이 죽자 카츠시게를 저주하는 말을 기르던 고양이에게 하다가 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고 한다. 고양이는 모친의 피를 핥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후 카츠시게는 병이 들거나 그의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 또한 성안에 이변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수상히 여긴 가신들이 불침번을 서다가 새로 성에 들어온 카츠시게의 측실 '토요노카타(豊の方)'가 고양이괴물로 변해 일을 꾸미는 것을 퇴치한 이후로 카츠시게의 병도 낫고 이변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버전에서는 타카후사가 기르던 고양이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7. 죽을 때 귀에 생긴 종양으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죽었기에 이것이 류우조우지 타카후사의 저주로 인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나베시마 냥이 소동'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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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ameh 2009.07.08 1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 의외로 사인이 종기였군요. 그래도 장수니 나쁘진 아니한가 싶기도 합니다.

    여담이지만 뭐 류조지 타카노부는 자기가 무덤을 판게지요. 암, 하늘의 칼은 종종 필요한데에 떨어질때도 있는데 타카노부가 딱 그러한 경우다 싶더군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09 18: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오시게의 노년 때는 미쳐서 무녀의 말을 듣고는 부하도 몇 명 죽이고 했나 보더군요. 하지만 나오시게는 역사의 승자인지라 葉隠라는 필살기로 온화하기만 한 명군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 같더군요.

      여담으로... 센고쿠 삼배신(三倍臣)이라면...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 호리 나오마사(堀 直政)이지만, 호리는 신장의 야망에 나오지 않을 때도 있을 정도로 안습...하지만 하가쿠레(葉隠)에서 히데요시가 말했다며 호리 나오마사를 빼고 나오시게 투입... 그 이후 왠지 삼배신하면 코바야카와, 나오에, 나베시마로 굳혀진 듯.

      2009/07/09. 18.52분 추가..
      나오시게를 칭찬한 하가쿠레가 먼저(1716) 나왔군요. 호리 나오마사가 나온 명장언행록(1869)에 나온 것 보다..컥~

  2. 맹꽁이서당 2009.07.08 16: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쪽도 가신 출신으로 영주가 된 사람이군요.
    요새 춘추전국시대를 읽고 있는데, 전국칠웅 중 절반 이상이 '찬탈' 가문인 것을 알고 새삼 놀랬습니다. 진을 분할한 한,위,조는 그렇다 해도 제나라까지 그랬을줄이야... 과연 적은 외부 뿐 아니라 내부에도 있었군요.
    하여튼 35만석이라면 막부시대 규슈에서는 시마즈 다음으로 큰 다이묘였을까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09 1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중국 춘추전국시대는 꼭 공부해 보고 싶은 것인데 개념이 잘 안 잡히더군요. 저는...
      산 책만 몇 권 되는데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듯..
      (어쩌면 읽긴 했어도 읽었다는 기억도 없을 정도)

      큐우슈우 No.1은 말씀하신 대로 시마즈 77만석입니다.
      2위는 호소카와(細川) 쿠마모토(熊本)의 54만석.
      3위는 쿠로다(黒田) 후쿠오카(福岡) 47만석.
      4위는 나베시마(鍋島) 사가(佐賀) 36만석.
      5위는 쿠루메(久留米) 아리마(有馬) 21만석...입니다.

  3. shiroyume 2009.07.10 12: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잠시 딴 소리 하자면 시마즈가에 점령되어 일본과 명의 중개무역을 담당했던 오키나와 왠지 모 소설의 '페잔'같지 않나요 ㅋㅋ
    뭐 아시겠지만 저도 확인차 보니 1600년도에 아들인 가쓰시게는 의외로 서군에 참여했다고 하네요. 히데요시가 이런거 보면 의외로 인망이 있었나?
    이것도 아시겠지만 참고로 훗날 에도바쿠후 당시 나베시마가문의 히젠한의 전매품은 '도자기'라고 합니다. 불쌍해요 삼평아저씨 ㅠㅠ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15 11: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호오~ 그런가요? 오키나와에 관해서는 아직 공부해 본 적이 없어서요.

      세키가하라에서 서국 다이묘우들이 서군에 참가한 것은...조금 복잡한 것이 이시다 미츠나리가 후시미나 오오사카, 쿄우에 있는 인질 잡기나 길에 검문소 등을 설치해서 동군에 참가를 막았기 때문인 듯 합니다. 뭐 이런 식으로 여겨지는 사람은 쵸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 盛親)도 그렇고... 조금 상황이 다르지만 원래는 동군에 참가하려다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의 의심으로 서군에 참가할 수 밖에 없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도 있는 등...세키가하라에서 동서로 나누는 것은 간단하지가 않더군요.

      에도시대 각 번의 재정재건에 관한 책에서 각 번별로 특산품 & 전매품에 관해 정리가 잘 된 책이 있었는데 누구 빌려 주었다가 돌려 받지 못했습죠... 하신 말씀을 듣고 보니 그 책이 너무 아깝군요.

 조부(祖父) 때부터 삼대가 기독교 다이묘우(大名)인 아리마 하루노부(有馬 晴信)는 로마로 [텐쇼우 소년 사절단(天正少年使節)]을 파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 등의 다이묘우(大名)와 공동으로 파견하였는데 이 소년들은 모두 이탈리아의 선교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가 아리마의 히노에 성(日野江城)아래에 만든 일본 최초의 세미나리요(초등신학교[각주:1]) 출신들이었다.
 사절단을 파견한 1582년에 하루노부는 16살이었다. 이 해의 1월 28일 4명의 소년들은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를 알현하기 위해 저 먼 이탈리아를 향해서 출발한 것이었다.

 하루노부는 이 사절단 파견의 3년 전에 세례를 받아 '동 프로타지우(Don Protasio)[각주:2]'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하루노부는 세미나리요에 이어 영내(領內)인 카즈사(加津佐)에 고등신학교라 할 수 있는 '콜레지오'를 세웠다. 이곳에는 후에 소년 사절단이 유럽에서 가지고 온 일본 최초의 인쇄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세미나리요에서는 교리(敎理) 외에도 국어(일본어), 라틴어, 문학, 음악을 가르쳤으며 나중에는 회화(繪畵)나 천에 수를 놓는 자수(刺繡)까지 과목에 들어갔다.

 아리마 가문의 시조는 해적대장군으로 유명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 純友)[각주:3]라는 설이 있지만 이것은 선조인 타이라노 나오즈미(平 直純)가 스미토모의 아들이라고 잘못 전해졌기 때문에 그런 설이 내려온 것이라 한다.
 후에
큐우슈우(九州)의 다섯 개 지역(
)[각주:4]과 두 개의 섬(島)[각주:5]을 영유(領有)한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가 조부 하루즈미(晴純)때부터의 숙적이었다. 하루즈미는 히젠(肥前) 내의 4개 군(郡)을 영유(領有)하며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의 쇼우반슈우(相伴衆)[각주:6]에 이름을 올렸지만, 1563년 타카노부와 싸워 대패한 이래 아리마 가문(有馬家)은 류우조우지 가문 아래서 와신상담하고 있었다.

 1581년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씨(島津氏)가 류우조우지 공격군을 일으켜 히고(肥後)로 진격해 왔다. 하루노부는 이 소식을 듣자 드디어 때가 왔다며 곧바로 류우조우지와의 협정을 파기하고 시마즈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군사를 일으켰다.
 전선은 고착되어 1584년에 되자 하루노부는 시마즈에 원군을 요청. 한편 류우조우지 타카노부도 5만7천의 대군을 이끌고 시마바라 반도(島原半島)로 진격을 개시했다. 류우조우지 군은 무기도 풍부하여 대포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에 비해 아리마-시마즈 연합군은 1만 명도 되지 않았다. 정공법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3월 24일. 모리타케 성(
森岳) 기슭에 포진한 아리마-시마즈 연합군은 적을 자군 진영 깊숙이 끌어들여 적의 전열을 늘어지게 만든 뒤 복병을 이용하여 기습, 분단된 류우조우지의 대군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류우조우지 타카노부까지도 죽인 것이다.

 센고쿠(戦国)의 거친 파도에서도 살아남았지만 토쿠가와(川)의 세상이 되자 하루노부는 불행한 사건에 휘말려 자해하게 된다.
 발단은 1609년 12월에 일어났다. 나가사키(長崎)에 정박 중인 포루투갈의 배 '마드레 데 제우스(Madre de Deus)' 호를 하루노부가 습격하여 침몰[각주:7]시킨 것이다. 2년 전 아리마 가문의 무역선 승무원이 마카오에서 살해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 서양선 습격 사건이 뜻밖의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 大八)라는 사기꾼에 낚인 것이다. 오카모토는 이에야스의 모신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의 가신으로 하루노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도였다.
 이 오카모토가 하루노부에게 서양선 습격에 대한 은상으로 이에야스가 땅을 하사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온 것이다. 하루노부는 이 거짓말에 속아넘어가 막대한 금품을 오카모토에게 바친다. 기다려도 땅을 주겠다는 말이 없음에 오카모토를 수상히 여긴 하루노부의 문의로 거짓이란 것이 들어나지만 감옥에 갇힌 오카모토는 하루노부가 나가사키의 행정관을 암살하려 했다
[각주:8]고 고발한 것이다. 어째서인지 하루노부는 변명을 하지 못하였고 결국 카이(甲斐) 츠루 군(都留郡)으로 귀양가 거기서 자해하였다.

[아리마 하루노부(有馬 晴信)]
1567년생. 1576년 형 요시즈미(義純)의 뒤를 이어 히젠(肥前) 히노에 성(日野江城)의 성주가 된다. 1600년 세키가하라(
ヶ原) 전쟁 때 처음에는 서군에 속했지만 나중에 동군으로 돌아서 영지(領地)를 안도 받는다. 1612년 5월 자살. 46세.

참고: 아리마 하루노부의 목상()을 볼 수 있는 사이트(더 큰 이미지)

  1. 포르투갈 어. seminaryo. [본문으로]
  2. 사족으로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이런 이름으로 나온다. [본문으로]
  3. 칸토우(関東)의 타이라노 마사카도(平 将門)와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동시기에 서쪽에서 난을 일으켰다.[죠우헤이-텐교우의 난(承平天慶の乱)] [본문으로]
  4. 히젠(肥前), 히고(肥後) 반,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부젠(豊前) 일부. [본문으로]
  5. 이키노시마(壱岐島)와 츠시마(対馬). [본문으로]
  6. 바쿠후의 중신. [본문으로]
  7. 선원들을 탈출시킨 뒤 선장이 자침. [본문으로]
  8. 포르투갈 배를 처리할 때 제대로 못한다고 핀잔주는 나가사키 행정관에게 '이 일이 끝나면 저 놈도 죽여주마'라고 홧김에 말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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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7.04 1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체로 센고쿠의 기독교도들은 비극적으로 생을 마치게 되는군요. 사족입니다만 그 당시 일본 전 인구의 3%나 되던 교세가 왜 지금은 이렇게 자유로운데도 1%에도 미치지 않느냐는 점에 대해 모리야선생께서 한번 외국인으로서 생각을 피력해보라 하시기에 '에도막부 탓이 아닐까요' 라니 '무르군!'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_-; 으헣헣..

    아.. 이거 개인적인 일 탓에 코맨트 남기는데에도 마음이 떨려서(..;)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05 22: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왜 현대에선 기독교가 일본에서 확장을 못하는 것일까요? 궁금하군요. 가르쳐 주시면 매우 고맙겠습니다.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 제 나이 대가 되면 그런 감정도 잘 일어나지 않아서요. 전 부럽군요.
      어떤 경험이든 그것을 나중에 뒤돌아 보았을 때 아름다운 추억이 될지 다시 생각하기 싫은 트라우마로 만들지는 앞으로의 노력 여하입니다.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2. shiroyume 2009.07.04 2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뇌물사건은 알고 있었는데 죽은 이유가 고작 저거군요. 생각해보면 양이(?)로써 포르투갈함선을 격침시킨 공로가 훨씬 더 클텐데. 하여튼 이래서 에도 바쿠후는 맘에 안들어요. 처리방식이 막말까지 음험하단 말입니다. -_-;;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05 22: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리마의 영지는 히데요시의 선교사 추방령 이후로 일본 전토에서 도망 온 선교사들이 숨어 살고 있었으며, 역시 기독교 신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하네요. 그 지역은 기독교 왕국과 같았다고...기독교 다이묘우인 하루노부와 그 지역을 분리시키기 위한 표면적인 이유로 내세운 것이 나가사키 행정관과의 다툼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에야스까..라서 어떻게든 이에야스를 깔아 뭉개고 싶지만 그가 세운 에도 바쿠후는 진국이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처리 방식은 '조용히 조용히...'가 모토다 보니 모략을 많이 이용하긴 하지만요. 덕분에 전란에 휩싸이지 않고 그건 그것대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Bolivar 2009.07.05 1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사기 사건이 결국 막정의 중핵인 혼다 마사즈미 실각의 한 원인이 되었으니 이름 자체는 자주 오르내리게 되었군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05 22: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잠깐 타격은 입었을 지 모르지만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후로 오히려 라이벌 오오쿠보 타다치카(大久保 忠隣)를 실각시킬 정도로 보니.

      오히려 너무 자존심이 센 것이 자기 몸을 나락으로 빠지게 만든 것은 아니가 싶습니다. 이에야스에게 많은 신뢰를 받다 보니 이에야스의 아들이 자신을 모략에 빠뜨려 놓고 베푸는 아량을 참을 수 없었을지도.

  4. 나라 2009.07.06 15: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다는 한 성깔, 토요토미는 여색, 도쿠가와는 음험...
    그래도 도쿠가와 방식이 사람을 가장 덜 죽이긴 하니까 다행인걸까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07 22: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셋 다 천하인인 고로 어느 면이나 특출난 것이 있었다 생각합니다.
      오다도 여색을 좋아하고..음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토요토미도 한 성깔하고 음험했으며,
      토쿠가와도 여색을 좋아하고 한 성깔했으니까요.

  5. 스펀지송 2013.11.11 0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우연히 이 곳에 들어와서 재밌게 읽고 갑니다.
    윗 글에 보니 중세 일본의 기독교 신자가 3퍼센트인데 현대의 자유로운 일본에서 1퍼센트도 안되는
    이유가 뭐냐? 는 말이 있네요.

    제 생각에는 일본이 2차 대전에서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게 패배했고, 특히 원폭을 맞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원망과 분노 때문에 반기독교 성향이 강한 듯 합니다.

  6. 스펀지송 2013.11.11 0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중세 일본에서 서양 기독교인들이 보인 사기와 만행을 봐도 일본인들이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생길 듯도 합니다.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있다. 사츠마(薩摩)의 시마즈(島津), 시마바라(島原)의 아리마(有馬) 연합군과 싸워 패사(敗死)했을 당시의 모습을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기록하였다.
 [타카노부는 너무 뚱뚱해 말에도 타지 못하였기에 6명이 메는 가마에서 지휘하였다]
 주색에 빠진 말년의 타카노부를 생생히 전해주는 기록이다.

 처음에 타카노부는 절에서 생활하였다. 류우조우지 가문과 인연이 깊은 호우린 원(淋院)에 들어가 '엔게츠(円月)' 혹은 '츄우나곤(中納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승려답지 않게 호방하며 거칠고 난폭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엔게츠가 17살 때 류우조우지 가문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불행이 찾아온다.
 1545년 1월에 조부 이에즈미(家純), 부친 치카이에(周家)를 시작으로 한 숙부 등 일족의 주요한 면면들이 아야베(綾部) 성주 바바 요리치카(馬場
周)의 모략으로 인해 한꺼번에 살해당한 것이다. 그때 90세가 넘는 증조부 이에카네(家兼)가 바바 요리치카를 물리쳐 복수했지만 그 다음해의 봄,
 "츄우나곤(타카노부)는 남다른 기개와 그릇을 가지고 있다. 류우조우지 가문을 재흥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 아이일 것이다. 츄우나곤을 환속시켜라"
 라는 유언을 남기고 93세의 나이로 죽었다.

 류우조우지 가문은 사가 성(佐賀城)에 종가인 '무라나카 류우조우지(村中 造寺)'와 분가인 '미즈가에 류우조우지( 竜造寺)'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타카노부는 분가 출생이었다. 증조부의 유언에 따라 환속하여 타네노부(胤信)라는 이름을 칭한 타카노부는 종가의 당주 타네미츠(胤栄)가 죽자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종가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그 2년 뒤에는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의 이름 글자 하나를 하사 받아 타카노부()로 이름을 고쳤다.

 1551년 그 오오우치 요시타카가 가신 스에 타카후사( 隆房)에게 살해당하자 타카노부의 주변도 소란스러워 진다. 여러 호족들과의 항쟁이 끊이질 않았지만 이들을 전부 정복하였으며, 1559년에는 큐우슈우(九州)의 명문 쇼우니 토키히사(少弐 時尚[각주:1])를 물리쳐 무명을 높였다. 그 후인 1570년 8월에는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이 대군을 이끌고 타카노부의 본거지 사가 성에 육박하는 큰 위기에 빠지지만 타카노부의 외사촌[각주:2]이며 동생이기도 한[각주:3] 모신(謀臣)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의 활약으로 간신히 낙성은 면했다.[각주:4]

 그 전투에서의 일이다.
 오오토모 측에서 타카노부의 어떤 중신에게,
 "타카노부를 배신하고 우리 쪽으로 온다면 무엇을 바라건 다 해주겠다"
 는 편지가 화살에 엮여 날라왔다. 이 중신은 평소 타카노부와 사이가 안 좋았던 가신이었다. 그 편지가 타카노부에게 전해지자,
 "우리의 결속을 무너뜨리려는 오오토모의 책략이다"
 고 하며 그 편지를 펴 볼 생각도 안하고 버렸다고 한다.

 1580년 오오토모 휘하의 벳키 아키츠라(戸次 鑑連=타치바나 도우세츠(立花 道雪))와 화의를 맺었을 때도 타카노부는 호방한 태도를 보여준다.
 벳키 측에서 큰칼(
太刀), 말, 술과 안주를 가지고 온 사자(使者)가 오자 마침 식사 중이던 타카노부는,
 "마침 잘 되었군. 그 술을 이리 다오"
 라고 한 것이다. 측근은 예부터 적이 보내온 술은 마시지 않는 것이 통례이며 어쩌면 독이 들어있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였지만 타카노부는,
 "아키츠라는 당대의 명장. 그런 더러운 수를 쓸 사나이가 아니다"
 고 말하며 밥그릇에 술을 세 번 따라 마신 뒤,
 "이 잔을 아키츠라에게 주마"
 하고는 사자의 발 앞으로 던졌다. 사자는 그 호쾌한 태도에 압도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1580년 가독을 적자 마사이에(政家)에게 물려준 뒤부터 주색에 빠진 타카노부는 정신이 황폐해지기 시작하여 류우조우지 가문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딸의 남편을 속여서 죽이거나[각주:5]어린 인질을 십자가에 메달아 찔러 죽이거나 하는[각주:6] 등의 행태에 휘하 장수들의 마음도 떠나기 시작한다.

 1584년 3월. 타카노부에게 최후의 시간이 온다. 시마바라 반도의 모리타케()에서 시마즈-아리마 연합군과 싸워 무턱대고 돌격만 하다가 패하여 죽은 것이다.
 시마즈의 용사 카와카미 사쿄우노스케(
川上 左京亮)에게 목이 잘렸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비참하게도 그 수급을 류우조우지 가문에 전해졌을 때,
 "재수없는 머리통은 우리도 필요 없다"
 며 아군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국경 부근의 간고우 사(
願行寺)로 보냈다고 한다.

[류조지 다카노부(竜造寺 隆信)]
1529년생. 히젠(
肥前) 사가(佐賀) 성주. 한때는 5개 지역()[각주:7]과 두 개의 섬(島)[각주:8]. 1584년 3월 시마즈(島津), 아리마(有馬) 연합군과 시마바라(島原)에서 싸우다 패하여 죽었다. 56세.

  1. 후에 후유히사(冬尚) [본문으로]
  2. 나오시게의 모친은 타카노부의 숙모. [본문으로]
  3. 타카노부의 모친이 나베시마 가문과의 끈을 강화하기 위해서 48살의 나이로 홀아비가 된 나오시게의 아비에게 멋대로 시집갔다. [본문으로]
  4. 이마야마 전투(今山の戦い). 오오토모 6만 vs 류우조우지 5000. 류우조우지 군은 사가 성(佐賀城)에서 농성. 오오토모 군의 허술한 틈을 눈치챈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야습하여 승리한 전투. 그러나 전술적인 작은 승리에 불과하여 이후 류우조우지는 오오토모에 화의를 청하여 그 휘하로 들어간다. [본문으로]
  5. 카마치 시게나미(蒲池 鎮漣). 증조부 이에카네와 함께 도망친 곳이었으며, 그 후에도 분가출신이기에 류우조우지 종가의 가신들에게 추방당했던 타카노부는 카마치 가문의 신세를 지며 그 군사를 빌려 다시 당주에 앉을 수 있었으나 카마치의 영지인 야나가와(柳川)가 너무 탐났고 시마즈로 접근하며 독립심 강한 사위를 놀러 오라고 꼬셔서 살해. [본문으로]
  6. 아카호시 무네이에(赤星 統家)의 14살짜리 적자와 8살짜리 딸. 무네이에는 이때의 원한으로 타카노부가 패사하는 '오키타(沖田) 외길(畷)의 전투(沖田畷の戦い)'에서 시마즈 측의 선봉 중앙에서 활약하였다. [본문으로]
  7. 히젠(肥前), 히고(肥後) 반,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부젠(豊前) 일부 [본문으로]
  8. 이키노시마(壱岐島)와 츠시마(対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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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mente21 BlogIcon 클레멘테 2009.06.16 09: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584년 아리마 하루노부가 류조지씨를 배신했을 때 타카노부는 마사이에에게 아리마씨 토벌을 명령했지만 마사이에가 아리마씨 출신 아내 때문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본인 스스로 아리마 토벌에 나섰다고 하더군요.

    그런 부분을 감안하면 타카노부가 전사한 것에 마사이에도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17 1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 류우조우지 당주인 마사이에가 제 앞가림 하는 놈이었다면 타카노부가 죽을 일은 확실히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뭐 아무리 뛰어났어도 자식 농사 못 지은 사람이 많은지라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말도 나온 것 같습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6.16 17: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나마 오오토모 프란시스코는 경건한 종교인으로서 몰락했으니 일말의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이 센고쿠판 동탁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인물이죠(먼산)

    개인적으로는 별로 맘에 안드는 인물이라..(역시 종교에 따라 취향을 좀 타서..) 뭐 저 비참한 죽음도 자업자득이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