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키가와 가즈마스(川 一)

1586 9 9 병사 62.

1525 ~ 1586.

오우미(近江) 코우가(甲賀)영주(小領主)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중신(重臣)으로 출세. 이세(伊勢) 평정, 타케다(武田) 공략, 칸토우() 공략에서 전공을세워 칸토우 칸레이(管領)에 임명받지만 노부나가가 죽은 후에는 삽질을 연속. 히데요시(秀吉)에게 항복하여 실의(失意)속에서 방랑하다 병으로 죽었다.

<그림은 태합입지전 V에서>







오다 군단의 군단장


 타키가와 카즈마스는 오다 노부나가가 오와리를 평정했을 즈음부터 노부나가를 섬겨 오대군단장(五大軍團長)[각주:1]의 한 사람으로까지 승진했다. 철포와 군략에 뛰어나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함께 [정치는 이 네 사람의 손 안에 있다[각주:2]]고 평해졌으며, 뛰어난 지휘로 [나아가는 것도 타키가와 물러날 때도 타키가와]라 했을 정도였다.하지만 노부나가가 1582년 쿄우토(京都)의 혼노우(本能)()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에게 죽음을 당한 후에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코우즈케(上野)에 있었던 것도 있어 시도한 것이 전부 실패. 노부나가의 후계자 싸움에서도 라이벌인 히데요시에게 뒤쳐져 비참한 말로를 걷게 된다.


 코우가(甲賀) 닌쟈(忍者)의 마을 -오우미(近江) 코우가 군() 오오하라(大原) ()의 호족으로 타키() 성주의 아들로 태어나 오우미 겐지(源氏) 사사키() 롯카쿠 가문(六角)과도 친하였고 노부나가의 유모의 아들인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와는 사촌지간[각주:3]. 와다 코레마사(和田 惟政)와는 고향의 친구 사이였다.


 1558 34세의 봄.

 사사로운 일로 숙부를 말다툼 끝에 죽이고 방랑을 떠났다. 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하지만 사카이()에서 신병기인 철포를 배웠고 각지에서 축성 공사에 참가. 군략(軍略)도 배웠다고 한다.몇 년이 흘러 츠네오키나 시바타 카츠이에의 추천으로 노부나가를 섬기면서부터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1567년.

 44살에는 노부나가군의 이세(伊勢) 평정의 선봉을 맡아 오와리(尾張)의 카니에(蟹江) 성주에 임명되었다.

 나가시마(長島) 문도(門徒) 토벌시에는 코우가 닌쟈(忍者)와 시마(志摩)의 수군을 이용하여 방화, 살육을 감행. 특유의 조략공작(調略工作)으로 북() 이세의 강력한 호족 48개 가문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노부나가 군단에 편입시켰다.

 세 살 연상인 카츠이에에게 [철포의 달인]이라 상찬() 받았으며, 아홉 살 연하인 노부나가에게 신뢰받았다. 특히 3년에 걸친 이세 평정에서는 호소노 후지아츠(細野 藤敦)의 아노우즈(安濃津), 키타바타케 토모노리(北畠 具敎)의 오가와치(大河內)성 공략에서 공을 세웠다.

 공격뿐만 아니라 북부 이세의 칸베(神戶)씨에 노부나가의 삼남 노부타카(信孝)를, 중부 이세의 쿠도우 나가노(工藤 長野)씨에는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네(信包), 또한 남부 이세의 키타바타케씨에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노부카츠(信雄)를 각각 양자로 들여 보내는 교섭을 성공시켰고, 그들에게 가문을 상속시켜 각 가문의 정예 가신단을 단번에 노부나가 군단에 편입시키는 뛰어난 공적을 거두었다.


 1582 3월.

 노부나가의 코우슈우(甲州) 원정의 선봉을 맡아, 코우슈우 타케다(武田)()를 멸망시킨 후 [칸토우 칸레이(管領)]에 임명받아 코우즈케(上野)()시나노(信濃)의 2()을 받아 마야바시(厩橋)성에 본진을 두었다.

 당시 58.

 늙었으며 더구나 중앙에서 먼 칸토우에서의 생활에 어두운 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비겁자가 되어 버린 후반생과 말로


 노부나가의 죽으면서 카즈마스의 운도 끝이 난다. 말년은 반대로 좌절과 패배의 내리막길로 굴러 떨어지게된다.

 히데요시가 츄우고쿠(中国)에서 대군을 이끌고 [대반전]을 하여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를 토벌한 즈음에 코우즈케(上野)에서 [노부나가 죽다]라는 소식에 난폭해진 칸토우의 호족들과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北条) 세력, 카이의 타케다 잔당,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上杉) 세력에 둘러 쌓여 사면초가.

 소수의 부하로 혈로를 뚫고 겨우 오와리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노부나가의 후계를 정하는 키요스(淸州) 회의가 전부 히데요시의 바램대로 끝나 형님 격인 카츠이에도 에치젠(越前) 키타노쇼(北ノ庄)로 돌아갔었다.


 카즈마스는 지금 가진 자신의 실력도 생각해보지 않은 채 카츠이에에게 호응하여 1583 이세 나가시마성에서 히데요시 토벌의 병사를 일으키지만 병사가 모이지 않아 분루를 삼키며 항복했다. 카츠이에도 북 오우미(近江)의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히데요시에게 패하여 거성 키타노쇼(北ノ庄)성에서 자살하였다.


 다음 해인 1584.

 이번에는 히데요시에게 속해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 합전에 참전하여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을 공격하게 되는데 여기서 추태를 부리게 된다.

 한 때 자신의 성이기도 했던 오와리 카니에성에서 농성하는 마에다 타네토시(前田 種利)를 설득하여 아군으로 끌어들인 후 입성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전황이 불리해지자 이에야스에게 타네토시를 받쳐 할복시키고 자신은 목숨을 건졌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제 목숨만 귀한 추태]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후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받아 출가하여 깨평[각주:4]으로 에치젠 오오노(大野)에 은거료를 받지만, 이미 늙은 몸에 [공적이 없음을 창피해 하며] 반환하고 다시 방랑의 길로 떠났다. 몇 개의기록에는 [에치젠에 작은 암자를 지었다]고 하지만 정확히 어느 곳인가는 불명. 단지 오오노(大野)시의 호우쿄우(宝慶)()에 고문서가 내려져 와 1586년 9월 9 병사했다고 전해지지만 확실치는 않다.

  1.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 一益)를 이름 [본문으로]
  2. 政道四人の手にあり[老人雑話] [본문으로]
  3. 부친끼리 형제이나 츠네오키의 성이 다른 이유는 츠네오키의 부친 츠네토시(恒利)가 이케타 가문의 딸(노부나가의 유모인 요우토쿠인(養徳院))과 결혼하면서 데릴사위가 되어 이케다 성을 계승했기 때문. [본문으로]
  4. 보통 捨扶持..라고 한다. [본문으로]

도도 다카토라[藤堂 ]

1630 10 5 병사 75

1556 ~ 1630.

가난한 무사 집안의 둘째로 태어났다. 처음으로 전쟁터에 발을 디딘 것이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 오다[織田], 토요토미[豊臣], 토쿠가와[德川] 씨를 섬기며 활약. 또한 축성의 명인으로 각지에 성을 쌓았다. 고미즈오 텐노우[後水尾天皇]와 토우후쿠몬인 마사코[東福門院 和子]의 결혼을 성공시켜 공무일화(公武一和[각주:1])를 실현하였다.










센고쿠[戦国] 시대에서 수완 좋게 살아남기


 토우도우 타카토라는 말년의 대부분을 에도[江戶]에서 생활하였다.

 에도 성[江戸城] 개수(改修)와 마을 정비에 분주한 한편 우에노[上野]나 칸다[神田]등에 번저(藩邸[각주:2]), 별저(別邸)를 두고 쇼우쥬[松寿]부인(2대 번주 다카츠구[高次]의 모친)을 살게 하여 인질, 참근 교대의 선례를 만들었다.

 에도성에 자주 등성하여 2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 3대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미츠[德川 家光]를 보좌하여 '천하태평(天下泰平)' '공무일화(公武一和)'에 심혈을 기울였다.


 오우미(近江)에서 태어난 그는 건장한 몸과 드센 힘을 타고났으며, 15살에 오우미의 아자이 나가마사[井 長政]아시가루[軽]가 되어 아네가와 전투에 참전. 이후 아츠지 요시히데[阿閉 義秀], 이소노 카즈마사[磯野 員昌], 오다 노부스미[織田 信澄[각주:3]] 등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 하시바 히데나가[羽柴 秀長 히데요시[秀吉]의 동생]을 섬겼으며 여러 고난을 겪은 후에 히데요시의 가신이 된 후 히데요시가 죽자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긴다.

 토자마 다이묘우[ 大名[각주:4]]이면서도 절대적인 신뢰를 받아 이세[伊勢], 이가[伊賀] 32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 인물에게 말년이라던가 "정년"에 평온은 없었다.


 1608년.

 53살 때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에서 이세 츠[]로의 이봉(移封)은 영전(榮轉)이었으나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있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공략하기 위한 포석과 이가 닌쟈[忍者]의 공급원이가[伊賀]의 지배라는 무거운 사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런 막부(幕府)의 부탁과도 같은 임무에 응하여 이가 우에노[上野], 아노우즈[安濃津]에 성을 쌓았다.


 7년 후인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坂冬の陣]에서는 60세의 나이로 6천의 군세를 이끌고 토쿠가와 측의 선봉을 맡았다. 다음해 여름의 전투에서도 4천의 군세를 이끌고 쵸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 盛親]의 부대와 사투하였다.


 1619년.

 64살 때 오오사카 성 재건의 명령을 받아 완수하였고 또 그 즈음에 여러 축성 공사에 착출되어 불만이 쌓인 토요토미 은고[豊臣 恩顧[각주:5]] 다이묘우[大名]의 반란에 대비한 셋츠[津] 타카츠키[高槻], 탄바[丹波] 사사야마[篠山]의 축성을 지휘하였다.


 다음해인 65. 노령에 굴하지 않고 90여일 간 머물면서 거대한 바위를 키츠가와 강[木津川[각주:6]] 야마시로[山城] 카모[加茂]의 죠우넨 사[常念寺] 운반하는 작업을 담당하였다.


세찬 바람에 맞서 서있는 거목


 이 즈음부터 눈병을 앓아 에도로 돌아오자 실명 직전. 그러나 공무일화(公武一和)를 위해서 상경하여 쇼우군 히데타다[秀忠]의 딸 토우후쿠몬인 마사코[東福門院 和子]를 고미즈오 텐노우[後水尾天皇]의 부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막부(幕府)의 출장소라고 할 수 있는 니죠우 성[二条城]의 정비에 조력했다.


 텐노우에게는 이미 '오세츠노 츠보네[於世津局]'와의 사이에 황자인 카모미야[加茂宮]와 황녀 우메미야[梅宮]를 둔 상태였기에 텐노우와 쿠교우[公卿[각주:7]]들이 반발. 그에 따라 쇼우군의 면목도 손상되어 막부 각료들도 격한 반대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타카토라는 히데타다가 딸을 사랑하는 마음에 감복. 물심양면의 노력을 하여 결국목적을 달성했다.


 1627년.

 72살 때. '생애 최대의 스승이며 은인'이라는 이에야스를 위해서 이에야스의 묘를 만들었다.

 다음해에는 코우즈케[上野]에 있는 칸에이 사[寬永寺]에 칸쇼우 원[寒松院]을 건립하였고, 쿄우토[京都]의 난젠 사[南禪寺]에는 일본 최대의 산문(山門[각주:8])을 만들어 헌납하여 오오사카 공성전에서 전사한 가신의 넋을 기렸다.


 1630 10 5.

 에도 야나하라[柳原]의 별저(邸)에서 잠이 드는 듯 편안히 죽었다.

 마지막 말은 "천하를...[津] 부탁한다"고 했다고도 하며, 몽롱한 듯한 모습으로 타카토라를 위해서 토우도우 가문[藤堂家]을 위해서 전쟁터에서 죽은 수많은 가신들의 이름을 주문처럼 외웠다고도 한다.

 향년 75. 경애하던 이에야스의 죽음보다 14년 더 살았으면서도 이에야스와 같은 75세의 죽음이었다.


 토우도우가의 기록에 의하면,

 "몸에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상처가 있었다. 총에 의한 상처, 창에 의한 상처 등 모두 전투에서 얻은 것으로 왼손의 약지는 뭉개져 손톱이 없었고 오른손 중지도 1촌 정도 짧았으며 오른발의 발톱은 전부 빠지고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3대 쇼우군 이에미츠[家光]는 그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텐카이[天海] 그 빛나는 생애(生涯) "세찬 바람에 맞서 서있는 거목"이라 찬양했다.

  1. 조정과 바쿠후(幕府)를 인척관계로 맺어지게 하여 사이 좋게 함 [본문으로]
  2. 에도나 쿄우토[京都]등에 세운 각 번(藩)의 대사관 같은 것. 에도의 경우 참근 교대(参勤 交代)로 올라온 다이묘우[大名]가 머물렀다 [본문으로]
  3. 보통 '츠다 노부스미[津田 信澄]'라 불린다.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츠[信勝 - '노부유키'로 많이 알려져 있다]의 아들로 노부나가에게는 친조카. '츠다[津田]'는 오다 가문[織田家] 가문의 별성으로 방계의 친족들은 이 성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주로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를 치른 후에 이에야스에게 복종하기 시작한 다이묘우. [본문으로]
  5.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입은 다이묘우를 지칭 [본문으로]
  6. 오오사카 부근에 있다 [본문으로]
  7. 상급 귀족들. 보통 종삼위(従三位) 이상을 말한다. [본문으로]
  8. 사원의 정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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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나가마스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6. 5. 12. 18:03 Posted by 발해지랑

오다 나가마스(織田 長益)

1621 12 13 병사 75

1547 ~ 1621.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동생. 출가하여 우라쿠사이(有樂). 노부나가가 죽은 뒤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이어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겼으며,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 전투, 오오사카(大坂) 겨울의 전투의 화평 교섭 등에서 활약. 후에 다인(茶人)으로 살아가며, 토우쿄우(東京) 유우라쿠쵸우(有樂町)에 그 이름을 남겼다.









다인(茶人) [우라쿠(有樂)]의 탄생


 토우쿄우(東京)유우라쿠쵸우(有樂町)라는 번화가가 있다.

 이 지명은 오다(織田) 우라쿠(有樂)가 에도(江戶) 초기에 이 곳에 저택을 지어 살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오다 우라쿠'라는 인물은 노부나가의 동생인 나가마스(長益)를 지칭하는 것이다. 노부나가의 동생들 중에 에도 시대까지 살아 남은 것은 노부카네(信包)와 나가마스, 두 사람이었지만 바쿠마츠(幕末)[각주:1]까지 다이묘우로 존속한 것은 나가마스의 가계(家系)뿐이다.


 나가마스는 1547년생으로 노부나가와는 13살 차이가 난다.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당시의 행적은 대부분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전장에 나간 기록도 1582 카이(甲斐) 타케다(武田)씨를 정벌 할 때 노부나가의 장남인 노부타다(信忠)의 부하로 키소(木曽) 방면에서 침공한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


 혼노우(本能)()의 변 후, 나가마스는 오와리(尾張)나 북() 이세(伊勢)를 영유(領有)하는 조카인 노부카츠(信雄)를 섬기며, 1 3천관을 식록(祿)으로 받는 유력한 가신이 되어 검지봉행(奉行[각주:2]) 등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寛政重修諸家譜[각주:3]]에 의거하여 [혼노우(本能)()의 변 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기며 셋츠() 시마시타(島下)() 마이타(昧舌)에서 2천석을 치교우(知行)로 받았다]라는 설(國史大辭典 등)은 잘못된 것이다.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는 것은 1590 9월로 그 직전에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에게 오와리를 빼앗기는 등 카이에키(改易[각주:4])당했기 때문이다. 머리를 깎고 [우라쿠(有樂)]라는 호를 칭하는 것도 이 시기이다. 우라쿠 44살 때였다. 필시 셋츠 치교우를 지급 받은 것도 이 즈음이라고 추측된다.


 우라쿠는 센노 리큐우(千 利休)의 뛰어난 제자 일곱명(利休七哲[각주:5])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데, 차를 즐기게 된 것은 리큐우가 노부나가의 사도우(茶頭[각주:6])를 맡을 즈음인 것 같다. 하지만 다도(茶道)의 세계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우라쿠라는 호를 칭하는 시기부터라고 한다.


 1591 2월 리큐우가 죽자 [차의 장인(宗匠)]라 불리며 히데요시가 다도회를 열때마다 옆에서 도와주는 일이 많아졌고, 다음 해인 1592년에 조선 출병이 시작되자 히데요시를 따라서 큐우슈우(九州)로 내려가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성에서 자주 다회를 열었다.


 또한 전년 9월에 우라쿠는 히데요시의 '오토기슈우(御伽衆)'에 들어갔다. 오토기(御伽)라는 것은 주군이 심심할 때 말상대를 해주는 것을 말하며 그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오토기슈우'라 칭했다. 필시 우라쿠는 히데요시의 오토기슈우에 더해짐으로써 다인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한 것이라 추측된다. [리큐우 류()]를 기반으로 하면서 독자적인 다풍(茶風)을 가미한 [우라쿠 류()]의 다도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1600년 세키가하라(ヶ原) 때는 우에스기(上杉)를 정벌하기 위하여 칸토우()로 내려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따라 종군하였으며 이어서 세키가하라 전쟁터에서도 무공을 세웠다. 싸움이 끝난 뒤 은상으로 셋츠에 가지고 있던 2천관에 더하여 야마토(大和) 3만석이 주어졌다. 다인(茶人) 다이묘우 오다 우라쿠의 탄생이다.


 세키가하라에서는 노부나가의 적류(嫡流)인 기후(岐阜) 성주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 노부나가의 맏손자) 에치젠(越前) 오오노(大野)성주 오다 히데카츠(織田 秀雄 노부카츠의 장남)가 서군에 속하여 카이에키 당하였기에 에도(江戶) 바쿠후(幕府) 초창기에 오다 일족 중에서 다이묘우로써 남아 있던 것은 우라쿠의 가계(家系)뿐이었다.


()로 보내는 나날


 토쿠가와 쇼우군()의 지배를 받는 다이묘우가 된 우라쿠는 에도나 순푸(駿府)에 자주 출사(出仕)하였고, 그러는 한편 오오사카(大坂) 성에도 빈번히 출입하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의 생모 요도도노(淀殿)의 외숙부라는 인척 관계로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1611 3월.

 히데요리가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니죠우(二条)성에서 회견했을 때 우라쿠가 히데요리를 따르고 있는 모습은 그의 입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흥미 깊다.그 후 토쿠가와-토요토미 양 가문의 사이가 악화되자 우라쿠의 정치적 입장도 미묘하게 되어 일설에 의하면 우라쿠는 이에야스의 첩자가 되어 토요토미 측의 비밀을 보고 했다고도 하며, 오오사카 겨울의 전투가 시작되자 오오사카 성 안에서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에게 이에야스를 복종하도록 계속해서 설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름의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는 오오사카 성을 빠져나와 쿄우토에 가서 살며 아들 나가마사(長政)와 히사나가(尚長)에게 각각 1만석씩 나누고 자신은 남은 1만석을 가지고 살았다.


 우라쿠는 항상 쿄우토에 칩거하며 다도에 몰두하면서 여생을 보내었고 1621년 12월 13 중풍으로 쿄우토 히가시야마(東山)에서 죽었다. 고죠우(五条) 강변(河原)에서 장례식이 치러졌으며 히가시야마의 겐인(建仁)() 세이덴(正伝)()에 묻혔다. 향년 75.

  1.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말기를 말함. [본문으로]
  2.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하는 행정관 [본문으로]
  3. 칸세이(寛政=1789‐1801)년간에 에도 바쿠후(幕府)가 토쿠가와 일족을 제외한 다이묘우, 하타모토 등에게 족보를 제출하게 하여 각 가문의 유례를 기록한 것. 자유 제출이었던 만큼 자신들의 조상을 띄우기 위해 날조나 왜곡이 많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영지를 삭감 혹은 전부 몰수 당하고 심하면 평민으로 강등 [본문으로]
  5. 제자들 중 뛰어난 일곱 제자.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利貞)를 지칭함. 오다 우라쿠사이의 경우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리큐우의 아들인 센노 도우안(千 道安)과 함께 십철(十哲)로 꼽힌다. [본문으로]
  6. 다이묘우를 섬기며 다도에 관한 것을 관장함 [본문으로]

오다 노부카츠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6. 5. 9. 18:35 Posted by 발해지랑

오다 노부카쓰(織田 信雄)

1630 4 30 병사 73

1558 ~ 1630.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둘째 아들. 키타바타케 토모노리(北畠 具敎)의 양자가 되어 이세(伊勢) 코쿠시()가 되었다. 혼노우(本能)()의 변 후에는 오다가()의 차기 당주인 산포우시(三法師)의 후견인이 되었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대항하여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전투을 일으키지만 화해하여 복속. 토요토미씨 멸망 후에는 토쿠가와(德川)씨를 섬겼다.









아즈치(安土)성 방화범의 소문


 1582 6 2일.

 혼노우(本能)()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었을 때 장남인 노부타다(信忠)와 다섯 째인 카츠나가(勝長)가 함께 전사하였으며 이어서 다음 해에는 셋째인 노부타카(信孝)가 오다 가문의 집안싸움 끝에 자살하게 되었다. 따라서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때 성인식을 치루고 전장에 나가 한 사람의 무장으로 성장한 노부나가의 아들들 중에서 노부나가 사후 그 혈통을 지킨 것은 차남인 노부카츠뿐이었다. 또한 노부나가의 자식들 대부분이 노부나가가 죽은 후에 성인식을 치렀기에 노부나가를 따라 종군하여 아버지의 싸우는 모습을 가까이서 직접 본 것은 노부카츠뿐이었던 것이다.


 노부카츠는 혼노우 사()의 소식을 거성인 이세(伊勢) 마츠가시마()에서 들었다. 곧바로 구원군을 이끌고 오우미(近江)츠치야마(土山)까지 진출시켰지만 거의 하는 일 없이 되돌아왔다고 한다. 노부카츠가 오우미에 진출해 있을 즈음인 6 13 비와(琵琶) 호숫가에 장엄히 서 있던 천하의 명성 아즈치 성이 갑자기 불길에 휩싸였다.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노부카츠가 아무도 없는 성에 불을 질렀다고 하며, 일본측 사료에서는 점령하고 있던 아케치 히데미츠(明智 秀)가 성을 떠나면서 불을 질렀다고 기록한다. 그 밖에도 지역민 방화설도 있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의문에 싸여 있다.

 진상이 확실치 않으면서도 선교사의 보고서에 쓰여있듯이 노부카츠가 방화범으로 몰리는 것은 소문에 지나지 않지만 사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부나가의 아들로써 불명예스러운 소문임에는 틀림이 없고 후에 노부카츠의 무장으로써의 평가에도 영향을 끼쳤다고도 생각된다.


몰락 다이묘우(大名)로 가는 길


 키요스(淸須) 회의[각주:1]로 인하여 노부카츠는 형 노부타다의 영지였던 오와리(尾張)을 계승하여 원래 있던 영지인 이세, 이가(伊賀)를 합친 3국을 지배하는 다이묘우가 되었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인식 받으며 급성장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의 권력 항쟁(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의 전투)에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와 손을 잡고 국지전에서는 승리를 거두지만 대국적으로는 히데요시의 압도적인 군세와 뛰어난 외교술로 인해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어 어쩔 수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와 화해한다.


 이후 칸파쿠()에 취임하여 일본 통일을 목표로 하는 히데요시와 협조 체제에 들어간다. 조정의 관직 체계에서는 항상 히데요시보다 한단계 아래인 다이나곤(大納言), 나이다이진(內大臣)으로 승진하지만 실상은 오와리, 이세를 영유하는 토요토미 정권의 일개 다이묘우라는 입장에 지나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입장에서는 주군 노부나가의 아들로서 노부카츠를 우대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씨 정벌 후의 영지 재배치에서 칸토우()로 이동한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옛 영지로의 전봉()을 거부한 노부카츠를 카이에키(改易[각주:2])한 후 히타치(常陸)의 사타케(佐竹)씨에게 유배를 보냈다.

 히데요시의 노림수는 토요토미 정권을 강고히 하기 위해서도 오다, 토요토미 양 가문의 발상지인 오와리의 영국화(領國化)와 노부나가, 노부타다의 직신(直臣)을 많이 고용하고 있는 노부카츠 가신단 해체를 단번에 해치우려 했던 것이다.

 노부카츠로써도 옛 주군의 아들인 자신을 카이에키에 처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다씨()와 연이 깊은 오와리를 몰수 당하는 것은 노부카츠에게도 자기 존재를 부정 당하는 것이라 인식했음이 틀림이 없으며 히데요시의 영지 변경 명령 거절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도 칸파쿠의 명령 거부는 토요토미 정권에 대한 반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이묘우에서 평민으로 몰락한 노부카츠는 관위도 박탈당해, 머리를 밀고 출가하여 [죠우신()]이라 호를 칭하였다. 이 때 33.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용서받아 히데요시의 오토키슈우(伽衆[각주:3])에 들어갔으며, 1595년에는 장남인 히데카츠(秀雄)에게 에치젠(越前) 오오노(大野) 4 5천석이 주어져 사실상 노부카츠의 가계(家系)는 다시 일으켜졌다.
 
그러나 5년 뒤의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싸움에서 노부카츠-히데카츠 부자는 서군에 속했기에 싸움이 끝난 후 이에야스에게 영지를 빼앗겼다. 일설에 의하면 싸움이 일어나기 한 달 전에 노부카츠는 옛 영지 회복을 노리며 오와리에서 동군에 속한 옛 신하들의 분열을 노렸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오다 가 부활


 시간이 흘러 때는 오오사카(大坂) 겨울의 진()을 목전에 둔 1614 9월.

 노부카츠는 오오사카 성에서 퇴거하여 쿄우토(京都)의 류우안(龍安)()로 들어갔다. 개전을 앞두고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부름을 거절하고 은밀히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내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야스에게는 그 대가로 땅을 약속 받았던 듯 실제로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 이후, 1615 7월에 야마토(大和)코우즈케(上野)의 양국() 내에서 5만석이 주어졌다.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 1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드디어 다이묘우가 다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1630년 4월 30일.

 쿄우토에서 73세의 나이로 죽었다. 노부카츠의 생예는 노부나가의 혈맥을 유지하는 것에 집념을 불태운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노부나가 사후 노부나가의 중신들에 의한 오다 가문 후계자 선정 및 영토 나누기. [본문으로]
  2.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킴. [본문으로]
  3. 히데요시는 이런 오토키슈우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기 지식을 넓혀갔다. [본문으로]

다케나카 시게하루(竹中 重治)

1579 6 13 병사 36

1544 ~ 1579.

통칭 한베에(半兵衛). 사이토우 타츠오키(斎藤 龍興[각주:1])의 신하였으나, 오다 가문(織田)으로 배를 바꾸어 탄 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요리키(与力[각주:2])가 된다. 아자이(浅井)씨 공략이나 나가시노(長條) 합전 등에서 공을 세웠다. 노부나가(信長)츄우고쿠(中国) 지방 공략의 선봉으로 출진하지만 하리마(播磨) 미키(三木)성을 포위하고 있던 중에 진영에서 죽었다.










이나바야마(稲葉山)성 탈취극


 타케나카 시게하루는 통칭인 '한베에(半兵衛)'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외견은 아름다운 부인(婦人)과 같아 전장에서도 용맹함이 느껴지지 않으며, 말 가죽으로 둘러싼 투구와 목면의 하오리(羽織[각주:3]), 이치노타니(一ノ谷)의 갑옷을 입고 조용했다는 것이 [상산기담(常山紀談)]이 전해주는 이미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삼고지례로 맞이한 천재 군사라는 이야기는 [絵本太閤記]의 기술로 시게하루가 섬긴 것은 어디까지나 오다 노부나가이며 노부나가에게서 요리키라는 형식으로 히데요시에게 협력한 것이다.


 시게하루가 군략가로써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그 군략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이름을 알린 것은 1564 2로 20살 때의 일이었다.

 시게하루는 인질로 이나바야마성에 있던 동생 시게노리(重矩)의 병문안을 핑계로 불과 16명을 이끌고 성에 들어가 사이토우 타츠오키의 측근 사이토우 히타노카미(斎藤 飛騨守)[각주:4] 이하 6명을 죽였다. 거기에 호응하여 한베에를 사위로 둔 안도우 모리나리(安藤 守就)가 카가미시마(鏡島)성에서 병사를 보내어 타츠오키를 쫓아 내고 성을 점령한 것이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대의명분이 없었기 때문인지 사이토우씨에게 비판적인 카이센 쇼우키(快川 紹喜)조차도 쪽팔림도 모르고 의도 모르는 놈들이 타케나카, 안도우 패거리들이다고 할 정도였다. 이러는 동안 오다 노부나가는 성을 건네라고 자주 사자(使者)를 시게하루에게 보냈으나 시게하루는 여기에 응하지 않았고 8월 즈음에는 요시타츠에게 성을 되돌려 주었다.


 그 후 시게하루는 잠깐 오우미(近江)의 아자이(浅井)() 아래로 몸을 피했으나 다음해는 미노(美濃)로 돌아왔다고 한다. 1566년 쿠리하라(栗原) 산에 칩거하고 있던 시게하루를 히데요시가 세번 방문하여 꼬셨다라고 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絵本太閤記]의 기술인데 실제로 노부나가를 섬긴 것은 안도우 모리나리가 노부나가에게 내응했던 다음해 8월 이후일 것이다.


미키(三木)성 포위중에 죽음


 아네가와(姉川) 전투 후 히데요시가 요코야마(橫山) 성주가 되자, 시게하루가 히데요시 부재시에 성을 맡는 일이 많아져 아자이 세력(勢力)의 빈번한 습격에서도 성을 지켜냈다. 1577 히데요시의 츄우고쿠 지방 공략이 시게하루 최후의 무대가 되었다.


 1578년.

 아리오카(有岡)성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모반을 일으켰을 때, 히메지(嬉路)성주 쿠로다 요시타카(黑田 孝高)는 무라시게 설득을 명령 받았지만 반대로 무라시게에게 잡혀 유폐되어 버렸다. 요시타카도 배반했다고 생각한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의 나가하마(長浜) 성에 맡겨 두었던 인질 처형을 명했다. 처치가 곤란해 하고 있던 히데요시에게 시게하루는 하나의 계책을 알려 인질을 자신의 본거지인 이와테(岩手)[각주:5]에 감추었다.


 1579 10월.

 아리오카 성이 낙성되어 요시타카도 구출되었고 인질도 요시타카에게 돌려주었다. 이 인질이 후의 쿠로다 나가마사(黑田 長政) 나가마사는 죽을 때까지 시게하루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1578 3월.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가 지키는 미키 성을 히데요시가 공격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곳을 성급히 정면 공격하지 않고 주위에 많은 수의 진지로(陳城[각주:6])를 세워 장기 포위전을 하기로 하였다. 긴 전쟁터 생활로 건강을 헤친 시게하루가 병으로 쓰러진 것은 포위 중이던 다음해 4월이었다.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시게하루는 쿄우토(京都)에서 잠시 휴양했지만 병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죽는다면 전장에서 죽는 것이 무가의 바램이다"라며 비장한 결의를 한 시게하루는 부하의 걱정스러운 말을 뒤로하고, 하리마(播磨) 히라야마(平山)로 돌아왔다. 6 13 시게하루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한창 일할 나이의 죽음이 이 글 초반에 언급한 [常山紀談]과 같이 천재지만 여성적이며 선이 가는 이미지를 시게하루에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코우야(高野) 칩거의 꿈


 시게하루의 장남 시게카도(重門)가 기록한 [토요카가미(豊鑑)] 히데요시의 한 없는 슬픔을 [제갈 공명]을 잃은 [유비]에 비교하고 있다. 또한 시게하루 죽은 뒤에도 군사 회의를 할 때마다 히데요시는 반드시 시게하루를 언급했다고 한다.([寬永諸家系図伝])


 한편 다음과 같은 견해도 있다.

 노부나가나 히데요시는 시게하루가 큰 뜻과 야망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서 결코 마음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시게하루에게 따로 영지를 하사하지 않고 고생만 시키며 그의 위세를 꺾으려 했다고 한다. 그것을 깨달은 시게하루는 미키성을 함락하면 코우야 산에 올라가 은퇴하여 세상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살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한다.([竹中家譜])


 시게하루의 유골은 미키성이 보이는 장소에 묻어졌다. 죽어서도 아군을 고무하며 전군을 지휘하려고 했을 것이다. 미키성이 낙성된 것은 시게하루가 죽은 반년 후인 1580 1월이었다.

  1. 사이토우 도우산(斉藤 道三)의 손자. [본문으로]
  2. 조력자...를 말한다. 주군이 부하에게 도움이 될 부하를 파견하는 것으로 격을 따지자면 동격임. [본문으로]
  3. 갑옷 위에 입는 조끼와 같은 덧옷 [본문으로]
  4. 성 탈취의 원인은 이 히타노카미가 시게하루에게 오줌을 쌌기 때문. [본문으로]
  5. 보다이야마 성(菩提山城)의 별칭. [본문으로]
  6. 합전 혹은 공성용으로 임시적으로 세워두는 주둔용 요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