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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토시이에'에 해당되는 글 22건

  1. 2008.12.18 요도도노(淀殿), 그 아들 -4-
  2. 2008.09.21 하치죠우노미야[八条宮] -6- (9)
  3. 2008.07.20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 -5- (7)
  4. 2008.02.09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4- (6)
  5. 2007.12.14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1- (12)

四.

 

 삼 년이 지났다.

 챠챠(茶々)는 20살이 되었다.

 “아자이 님(浅井殿)의 아씨를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하고 어느 날 밤에 히데요시에게 물은 것은 놀랍게도 그의 부인인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였다.

 “이미 시집갈 곳은 정하셨겠죠?”

 “아직이다”

 히데요시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듯한 얼굴을 하였다.

 “아직이요?”

 “그렇다”

 “알고 계십니까? 벌써 스무 살이옵니다”

 말할 것까지도 없사옵니다만 - 하고 키타노만도코로는 거듭 말했다.

 “보통 15살이면 시집을 갑니다. 20살이면 좋은 날이 다 가 정실이 먼저 죽은 곳이라도 찾을 수 밖에 없는 나이라고 할 수 있죠. 소중한 분을 맡고 계시면서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하고 그녀가 끈질기게 말한 것은 성안의 소문을 하루 종일 듣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존귀한 핏줄이며 저렇게 미인인데도 – 하고 소문은 말한다. 어디로 갈 것이라는 결혼 소식을 전혀 들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전하는 뭐랄까 그 거시기 한 마음이 있으신 것은 아닐까? 필시 그럴 것이다 - 라는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호색은 천하에 유명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시대는 남자건 여자건 모이면은 그런 종류의 이야깃거리로 쑤군거렸다. 예를 들어 성안의 소문에 따르면 –

히데요시님은 옛날부터 챠챠 님의 모친이신 오이치 마님(お市御料人)을 짝사랑하고 계셨었다. 아자이 씨(氏) 멸망 후 오이치 마님께서 오다 가문(織田家)으로 돌아오셨을 때도, 제발~제발~하면서 돌아가신 노부나가 님께 매달려서는, 제 부인으로 받아 들이고 싶습니다고 부탁하였지만 정작 오이치 님께선 그 분을 싫어하여 우연히 정실이 돌아가셔 홀몸이셨던 시바타(柴田)님께 가셨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시바타 공격은 사랑의 복수이죠. 그 증거로 히데요시님은 좀처럼 적을 죽이시지 않던 분이셨는데 시바타 님만은 용서하지 않고 텐슈각(天守閣)을 아예 재로 만드셨잖아요.

 라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것은 억측에 지나지 않았다. 오이치가 아직 결혼하기 전엔 짝사랑하고자 하여도 아예 만날 기회조차 없었다. 또한 오이치가 과부가 되었을 때 히데요시가 그녀를 부인으로 하고 싶다며 울며 매달렸다고 하지만 히데요시에게는 비루한 신분일 때부터 처 네네(寧々) – 키타노만도코로가 있었다. 히데요시는 엄청난 호색한이었으면서도 이 조강지처를 유난히도 존중하며 둘도 없는 상담 상대로 하였고 겸해서 조심하는데 있어 예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처를 버리고 오이치를 정실로 맞아들인다는 이야기는 우선 이 남자에 한해서 있을 수 없었다. 참고로 호쿠리쿠(北陸)에서 시바타 카츠이에를 공격하여 죽였을 때는,

 “카츠이에를 죽이고 싶지는 않지만~”

 하고 몇 번이나 부하들에게 말했다. 죽이고 싶지 않지만 카츠이에를 죽이지 않으면 천하가 안정 되지 않는다, 이건 어쩔 수 없다 - 고 말하였다. 히데요시에게 놓여진 조건이 카츠이에를 죽여버렸다. 오다 정권의 필두가로를 이 세상에 살려두면 히데요시 정권은 성립되지 않는다. 사랑 놀음이 아니었다. 또한 히데요시는 원한을 몸 안에 저장하기 어려운 성격으로 원한, 복수라는 에너지가 이 인물의 성정에서는 절대 끓어 오르지 않을 것이다.

 소문은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고도 확신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에치젠(越前) 이치죠우다니(一乗谷)에서 처음으로 성숙해진 챠챠를 보았을 때 이렇게 오이치님과 똑 빼 닮을 수 있을까? 하고 틀림없이 피가 끓었다. 오이치를 짝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 과거는 없었다고 하여도, 오이치를 이 세상에서 미모가 제일인 사람이라고 마음 속으로 깊이 동경했었던 적은 틀림없이 있었으며 이는 히데요시뿐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오다 가문의 가신들 중에서 수 없이 많이 있었을 터이며 오이치는 그런 존재였다. 오이치는 하늘나라 사람이었다. 히데요시는 거기까지 손을 뻗으려고 생각한 적이 없었고 그것이 무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현실인식 감각이 너무 예리했던 그 당시의 히데요시는 무리인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할 정도 별난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치젠 이치죠우다니의 단계에서 달랐다.

 ‘이 아이는 내 날개 품 속에 있다’

 라는 것이 현실이었다. 오이치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그녀와 쏙 빼 닮은 소녀가 하늘나라에서 떨어져 자신의 날개 품에서 보호받는 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품어주마 하고 몰래 결심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한 히데요시의 기분을 집요하게 윤색하고 왜곡하면 소문과 같은 이야기처럼 될 것이다.

 히데요시는 요 삼 년 챠챠를 조용히 그 생활 속에서 살게 해 두었다.

 - 조용히……

 라는 것이 히데요시의 챠챠에 대한 방침이며 머지않아 챠챠를 얻는 길이라고도 믿고 있었다. 그것은 공성전과도 닮아있었다.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도 이나바(因幡) 톳토리 성(鳥取城)도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도 히데요시는 결코 무리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장기 포위전 형태를 취하며 적의 보급선을 끊고 수로를 끊어 때로는 수공을 하여, 어쨌든 농성하는 병사들의 전의를 잃게 하는 전술에 주안점을 두어왔다. 그런 감각으로 챠챠라는 존재를 보고 있었다. 무턱대고 챠챠의 침실에 함부로 뛰어드는 식의 어리석음을 이 남자만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히데요시가 보건대 챠챠에게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긴 시간이 챠챠가 가지고 있는 옛 상처를 아물게 할 것이다. 그 동안 빈번한… 그러나 담백하고 온정에 넘치는 접촉이 히데요시에 대한 챠챠의 마음을 조금씩 바꾸어갈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요 삼 년 궁중의례를 위해서 쿄우(京)에 올라와서 전쟁 때문에 몇 번이나 스즈카토우게(鈴鹿峠) 고개를 넘어[각주:1] 동쪽으로 정벌하러 떠나면서, 그렇게 간 곳곳마다 반드시 챠챠에게 진귀한 선물들을 보내며 근황을 묻는 편지를 보냈다. 자연스레 챠챠도 예의상 그에 대한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챠챠에게 있어서 요 삼 년은 일분일초가 히데요시의 온정 속에 있었다.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네네는 그러한 히데요시의 거동을 그렇게 볼 수 있다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시녀들에게서도 여러가지 소문을 듣고 있었다. 편지 왕복 등도 챠챠의 시녀가 남들에게 흘렸기 때문에 네네의 귀까지 들어왔다.

 불길한 생각을 계속 하던 차에 몇 일전 오다 우라쿠(織田 有楽)가 차(茶)의 자리에서,

 “오우미(近江) 사람들이 열심이더군요”

 라는 것을 네네에게 뜬금없이 말한 것이다. 우라쿠는 많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네네의 현명함은 그것을 헤아릴 수 있었다. 오우미 사람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주력인 오와리 파벌(尾張衆)에 대항하기 위해 열심일 것이다. 오와리 파벌은 이 네네에게 옹호 받고 있다고 세간에서는 보고 있었다. 오와리 파벌의 다이묘우(大名)나 무장이 히데요시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하면 반드시 네네에게 울며 매달려서는 히데요시에 대한 중재를 부탁했다. 네네는 언제나 기분 좋게 받아들였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네네에게 그 이상의 야망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성안의 소문은 달랐다. 오와리 파벌이라는 이 오오사카 성에서 가장 큰 관료, 무신 세력의 중심에 네네가 있다고 보고 있어, 네네의 존재는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선명하게 정치적 자력(磁力)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네네도 시녀의 입으로 그러한 풍문은 듣고 있었다.

 “오우미의 사람들이 자기들도 오와리에 태어나고 싶었다며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네네에게 있어서는 이외였다. 오우미 파벌의 대다수는 이 네네에게 접근조차 하지 않았으며 부탁하러도 오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극소수의 오우미 사람만이 네네와 접촉하고 있었다. 서 오우미 출신인 타나카 요시마사(田中 吉政)나 비와고(琵琶湖) 호수 동쪽 중부 출신인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이 그들로, 그들은 오히려 같은 지역인 오우미 사람들과는 소원하며 오와리 파벌들과 잘 지내고 있었다. 참고로 오와리 파벌의 대표적 인물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일 것이다. 그 외에 젊은 축으로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다소 나이가 있는 자로는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등이 있으며, 모두 초창기의 히데요시와 함께 전쟁터의 먼지를 뒤집어 쓰며 성장한 역전의 무장들이었다. 오와리 파벌의 특색은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라는 것에 있었다.

 이 점 오우미 파벌은 관리에 뛰어났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나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는 거의 ‘희대의’라고 붙여도 좋을 정도로 뛰어난 경제 관료로, 미츠나리 등은 거대하게 성장한 히데요시의 재산을 꾸려나가기 위해서 각종 장부를 발명했다. 천하 재정을 위한 장부부터 부엌의 자잘한 출납장에 이르기까지 장부를 만들어 그것을 가지고 하위 관료들을 지휘하였고 관리하였다. 그들 오우미 파벌의 관료가 없으면 히데요시는 병사를 일으킬 수 없었고, 직할지를 다스릴 수 없어 하루라도 편안히 지낼 수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이미 이 신정권의 중추에는 그들 오우미 사람들이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오다 우라쿠의 걱정은 그들 오우미 사람들이 만약 결속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우라쿠는 네네에게 말로 하지 않았을 뿐, 조심하시길, 만약 그들이 옛 주인격인 아자이 님(浅井殿=챠챠(茶々))을 옹립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라기보다 좀더 대놓고 말하면,

- 그들은 아자이 님께서 측실이 되신다면……

 라고 그것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아예 까놓고 말하면 그들 오우미 사람들은 히데요시를 그녀의 침실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것이었다.

  1. 교통의 요지로 스즈카 산맥 중 가장 낮은 위치에 있어 이로부터 동쪽을 東国이라 일컬었다. 쿄우토에서 동쪽으로 간다는 의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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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8. 미야[] 12살이 되었다.

 이 해의 봄, 히데요시[秀吉]는 이 나라의 궁정이 생긴 이래 가장 성대한 유흥을 기획하였다.

 흔히 말하는 쥬라쿠테이 행행[第 行幸]이다. 히데요시의 쿄우토[京都] 저택인 쥬라쿠테이에 텐노우[天皇] 이하 궁정사람들을 초대하여 무신(武臣)들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자는 것이었다.


 미야도 당연히 초대를 받았다. 미야는 히데요시의 쥬라쿠테이[第]를 예전부터 보고 싶어하였기 때문에, 이 기획을 들은 날부터 당일까지가 너무 길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 쥬라쿠테이[第]라는 성곽과 저택을 겸한 장대하고 아름다운 건조물은 작년 가을에 쿄우[京]의 우치노[野]에 준공하여, 큐우슈우[九州] 정복을 끝낸 히데요시는 개선 후에 거기서 살며 새해를 맞이하였다. 그 장대하고 아름다움은 수도 안에 또 하나의 수도가 생긴 것과 같았으며, 어떤 화가(畵家)의 붓으로도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4 14일이 그 당일이었다.

 그날 아침. 히데요시는 직접 텐노우를 마중하러 나왔다. 텐노우[天皇]시신덴[紫宸殿]에서 출어(出御)하여 봉련(鳳輦)까지 걸어가는 동안 히데요시는 그 배후로 돌아가 텐노우의 옷 끝자락을 들고 모셨다.

 어소(御所)에서 쥬라쿠테이[第]까지 약 1636미터이다. 1636미터의 길을 경비하던 무사들의 수는 육 천명이었으며, 그 사이를 화려한 행렬이 지나갔다. 미야[]도 겉을 옻칠한 상자와 같은 가마(塗輿)에 타고 텐노우[天皇]의 뒤를 따랐다.

 

 건물 주위에 둘러친 해자(垓子)에 붉은색 다리가 세워져 있어 다리를 건너 쥬라쿠테이[第]의 성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미야는 별천지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이 웅대하고 화려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한단 말인가? 기품 속에 화려함이 있어, 지금까지 대건축물의 상징인 사원(寺院)들과 같은 축축함이 없었고, 어디까지나 현세(現世)를 한 없이 즐기고자 하는 히데요시의 마음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자칫하면 그것이 실속 없는 아름다움으로 격하될 지도 모르는 것을, 히데요시의 다도취향(茶道趣向)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서는 실속 없는 아름다움을 억눌러 새어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 호우칸파쿠[=히데요시]이니 할 수 있는.

 이라고 미야는 후년까지 이때의 감동을 잊지 못했다. 미야가 생각하기에 불도를 닦는 승이 그림으로 자신의 기개(氣槪)와 품격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과 같이 히데요시는 건축으로 그것을 하고자 하려는 것 같았다.

 

 텐노우[天皇]가 준비된 자리에 들어섰다. 히데요시가 나아가 착석의 의식을 치렀고 곧이어 주연(酒宴)이 시작되었다.

 연회가 행해지는 자리의 서쪽은 활짝 개방되어 있어 그 앞에는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정원은 온통 새싹들의 향연이었다. 거기에 철 늦은 벚꽃, 일찍 핀 진달래, 제철인 황매화, 제비붓꽃 등이 색을 더해, 그 근방에서 피어오르는 꽃내음 속에서 연회가 진행되었다. 연회 중간에 히데요시가 수많은 헌상품을 받쳤다. 밤의 연회는 음악이 중심이었다. 텐노우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는지 직접 소우[]라는 악기를 옆에 누이고 멋지게 연주하였다.

 

 연회는 3일간 이어졌다. 3일로 끝날 예정이었지만 텐노우[天皇]는 더 즐기고 싶었는지이틀 더 있고 싶다고 말하였다. 유사이례 예가 없었던 일로 군신들은 놀랐다.

 미카도[帝]도 히데요시가 좋으신 것이다

 하고 미야는, 형인 텐노우와 좋아하는 점이 일치했다는 것에 날뛰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기뻤다. 미야는 이 텐노우[天皇]필시 역사상 어느 텐노우[天皇]보다도 교양이 높았을 이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를 평생 존경하였다. 텐노우는 미야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중국 시학(詩學)의 재미를 가르쳐 준 것도 이 텐노우였으며, 백씨문집[白氏文集]의 기초를 쌓아 준 것도 이 고요우제이[後陽成]였다.

 히데요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고 미야는 신경이 쓰였지만, 신경을 쓸 필요도 없이 이 연기(延期)를 가장 기뻐한 이는 당연히 히데요시 자신이었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자기 휘하의 다이묘우[大名]들을 텐노우[天皇] 앞에 모이게 하였다. 예정에 없었던 일이었다. 소집된 자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서 삼위[三位][각주:1] 이상의 계급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였다. 이들보다 위계가 낮은 자들은 별실에 모여있었다.

 

 히데요시는 앞으로 나아가,

 -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라는 말과 함께 다이묘우[大名]들에게 훈계를 하였다. 그 훈계의 주된 내용은,

 

 지금 이처럼 우리들 같이 무신(武臣)같은 것들에게 텐노우와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게 허용해주신 이번 행행(行幸)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생의 영광이다. 이 기쁨에 우리들은 몸 둘 바가 없도다. 그러나 우리들 자손은 어떨까? 성은을 잊거나 혹은 무()를 내세워 텐노우에 대해 무례를 꾀하는 자가 나타날지 두렵다. 그러니 서약서를 제출하여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텐노우에 대해 배신하는 일 없도록 맹세하도록

 

 라는 것이었다.

 모두 서약서를 제출하였다.

 미야는 그 자리의 처음과 끝을 그 눈으로 보았다. 보면서 위복(位服) 속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며 히데요시의 행동에 감격하였다. 미야의 조부(祖父)에 해당하는 선대 오오기마치 텐노우[正親町天皇]가 나이 어렸을 시기, 무가(武家)는 황실 같은 것이 있는 줄도 몰랐으며, 어소는 평소 수라(水剌)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빈곤하였는데 그때와 비교해 보면 지금 히데요시와 같이 황실을 생각해 주는 인물이 나타난 것 자체가 기적이지 않은가?

 

 물론 히데요시는 히데요시대로의 꿍꿍이가 있었다. 히데요시 휘하의 다이묘우[大名]들은 예전 그 자신과 동격이거나 아니면 오다 노부카츠,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이 그 자신보다도 상격(上格)에 있던 자들이 많았지만, 앞으로도 토요토미 가문이 그런 그들을 통제하는 한편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도 계속 이어지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텐노우[天皇]의 신성함을 빌려, 그 신성함을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에게 철저하게 주입시켜서는 그로 인해 신하 중 제일인 칸파쿠 가문이 얼마나 중한가를 교육하여, 텐노우[天皇]를 따르는 것과 같이 토요토미 칸파쿠 가문을 따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야는 그렇듯 심술궂게 이 현상을 관찰할 정도로 성숙해 있지 않았으며 거기에 무엇보다도 미야는 히데요시 빠돌이였기에 히데요시의 순수함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미야는 토쿠가와 다이나곤[大納言] 이에야스라는 인물을 보았다. 이에야스는 극히 최근까지 히데요시와 싸우고 있던 토우카이[東海]의 패자(覇者), 히데요시도 이 인물에게는 조심하여 휘하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빈객(賓客)을 대하는 것과 같이 응대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었다. 목이 두꺼운 인물이었다.

 구레나룻이 엷고 볼통통한 얼굴이었으며 동작에 지장을 줄 정도로 뚱뚱하였다. 하지만 어디에도 히데요시의 군사를 물리쳤다는 무인의 거만함 없이 공손하고 정중하여 그 행동거지나 풍모는 아무리 보아도 은거한 거상(巨商)과 같았다. 이에야스도 서약서를 써 제출하였다.

 

 시를 읊는 시회(詩會)의 행사도 행해졌다.

 참석자는 상급귀족(公卿) 측에서 24, 무가 측은 히데요시를 포함한 4명으로 합계 28명이었다. 자리순은 히데요시가 최상석으로 이어서 미야[], 말석에서 두 번째가 토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각각의 무릎 앞에는 직접 지은 시를 필사하기 위한 벼루와 종이가 놓여졌다. 시회의 진행에 필요한 역할도 정해졌다. 시회 진행자[御歌奉行], 주제를 선정하는 사람[다이샤(題者)], 시가 쓰인 종이를 정리하여 낭독자[코우시(講師)]에게 전해주는 사람[도쿠시()], 낭독자 뒤에서 가락을 넣는 사람[핫세이(発声)] 등의 역할이다. 텐노우의 시가 적힌 종이를 옮기는 것[師]은 히데요시가 직접 하였다.

 텐노우[天皇]의 시는 정말 군자(君子)답다는 그의 인격에 어울리는 가락의 산뜻함이 갖추어진 것이었다.

그리도 오늘까지 기다린 보람이 있으니 소나무 가지에

온 세상의 언약을 매달아 보면서

わきて今日待つ甲斐あれや松が枝の

の契りをかけてみせつつ

 미야가 그것에 화답시를 만들었고, 거기에 히데요시도 그것의 화답시를 지었다. 히데요시의 그것은,

만대에 걸쳐 임금이 놀러 오시는 것을 익숙한 풍경으로 한다.

나무가 높은 건물에 쓰이는 것과 같이

よろづ代の君がみゆき(行幸)になれなれむ

みどり木高玉松 


 ‘이에야스는 어떨까?’

 하고 미야는 말석에 가까운 이에야스를 보았다. 미야는 이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영웅이라는 소문을 예전부터 듣고 있었기에 관심을 안 가질래야 안 가질 수 없었다. 메노토[傅人]인 카쥬우지 하루토요[修寺 晴豊]의 말에 의하면, 히데요시와 같은 예술적 취미를 일체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라고 한다. 화려한 의상을 좋아하지 않고 화려한 건축을 좋아하지 않기에, 그 거성(居城)하마마츠 성[浜松城]도 극히 실용적이며 소박한 건조물에 지나지 않아, 성안에는 다실(茶室)도 없다고 한다. ()를 이에야스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있으며, 와카[和歌] 등도 일체 읊는 적이 없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런 사나이가 시회에 섞여 있었다. 읊었을 턱이 없는 와카를 저 뚱뚱한 사나이는 어떻게 읊을 것일까?

 

 미야는 계속 관심을 가졌다. 곧이어 이에야스는 품 안에 손을 집어넣어 작은 종이쪽지를 꺼냈다. 그것을 한자한자 옮겨 적기 시작했다.

 옮겨 적다니!’

 하고 미야는 놀랐다. 필시 대작(代作)일 것이다.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임에 틀림이 없다고 미야는 생각했다. 왜냐면 이 이에야스가 재작년 10,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어 그 휘하에 들어오기 위한 의식을 치르러 오오사카[大坂]에 왔을 때, 그 회견석의 접대역을 예식(禮式)에 밝은 유우사이가 맡았다. 그것을 미야는 유우사이에게 직접 들었었다. 그 이래 유우사이는 이에야스와 친교를 두터이 하고 있다고 한다. 대작을 했다고 하면 필시 유우사이일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조금 남의 눈을 피하면서 베껴 적으면 좋을 것을 이에야스는 당당히 종이쪽지를 펼쳐 거리낌없이 베껴 적고 있었다. 그 모습에 미야는 위화감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취했던 공손한 태도와는 대략 다른 뻔뻔스러움이 있어, 과장되게 말하면 텐노우[天皇]의 앞에 있다는 경외감(敬畏感)같은 것을 조금도 가지지 않은 듯 했다. 곧이어 읽는이[講師]가 그 이에야스의 시를 읽었다.

녹색 창연한 소나무 잎마다 임금의

천 년을 언약으로 본다.

たつ松の葉ごとにこの君の

を契りてぞ見る 

 라는 것이었다. 소나무의 잎은 수없이 많다. 그 수많은 소나무 잎마다 텐노우[天皇] 천 년의 번영을 빌었다는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시가 만약 지은이의 심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에야스도 또한 이 시에 따라 궁정의 번영을 보증했다 - 는 것이 될 듯했다.

 

 1590년이 되었다.

 미야는 이제 성인식을 치러 '토모히토 친왕[智仁 親王][각주:2]'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이 14세였다.

 그 전해에 토요토미 가문에 친자식이 태어났다. 츠루마츠[鶴松]였다.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는 칙사를 오오사카[大坂]로 내려 보내어 축하선물로 큰 칼[太刀]을 하사하였다. 이후 화제는 자연스럽게 미야를 토요토미 가문 유자(猶子)라는 신분에서 풀어놓아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논으로 이어졌다. 히데요시에게 친자식이 생겼고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었다. 이 기회에 미야를 원래의 순수한 궁정인으로 되돌려놔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렇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한때 자신의 유자였던 이 미야를 위해서 어떤 보답이건 해 주고 싶었다. 생각 끝에 독립된 궁가(宮家)를 창설시키자는 것으로 생각이 미쳤다. 궁가를 창설하기 위해서는 영지(領地)와 저택이 필요했다. 우선 영지(領地) 3000석을 주었고, 이 새로운 가문의 명칭을 [하치죠우노미야 가문[]]으로 하였으며, 그 저택을 하치죠우[条] 강변[河原]에 마련해 주었다.

 

 이해의 정월.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3] 준비로 매우 바빴지만, 틈을 보아 입궐해서는 미야를 저택공사지로 데려갔다.

 

 미야의 저택 건물배치는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여전히 건축을 좋아했다. 히데요시는 미야를 저택의 예정지로 데리고 가서는 현장에 토목(普請), 건축(作事) 담당관리(奉行)와 장인(匠人)들을 불러 우선 기본방침을 세웠다.

 

 굉장히 어렵게들 생각하는군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친왕의 주거지이기에 어소(御所) 풍의 - 즉 토노모 형식[主殿造り][각주:4]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경쾌함이 결여된다. 채광(採光)도 나빴고 무엇보다 너무 고풍스러웠다. 거기에 신흥(新興)의 스키야 형식[奇屋造 다실(茶室) 풍의 건축]도 가미하라 - 는 것이 히데요시의 주문이었다.

 

 미야도 무언가 말씀하시길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지만, 미야는 아직 건축에 대해 잘 몰라,

 

 모두 공(公)에게 맡기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히데요시는 장인에게 도면을 그리게 하여 오오사카[大坂]에 돌아가서 그것을 받아보고서는 직접 붉은 먹을 먹인 붓으로 수정을 한 뒤,

 - 미야께도 보여드려라

 고 명했다. 미야는 그 도면을 보았다. 히데요시의 것은 너무 다도(茶道)의 취향이 드러나 있는 듯 했다. 미야는 그 점에 대해 그다지 불만이 있지는 않았지만, 희망을 말하자면 위로 매달아 열어 햇빛이나 비를 막는 시토미[蔀] 등을 사용한 왕조(王朝) 풍의 요소도 다소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다. 이 즈음 형인 텐노우[天皇]와 함께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고찰에 몰두하고 있던 미야로서는 그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공간이 하나 있었으면 했을 것이다. 그 의견이 히데요시에게 전해졌다. 히데요시는,

 

 지당하신 말씀이다

 

 라며 마지막 붉은 선을 그려 넣고서는 오다와라 정벌을 향해 출발하였다. 하지만 오다와라의 진영에서도 건축 진행 상태를 신경 써 하나하나 보고시켰다.

 미야도 자주 건축현장에 가서는 장인들 틈에 섞여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 미야가 차츰 건물과 건축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이 하치죠우[条] 저택의 건축부터일 것이다.

 

 연말에 건물이 거의 완성되었다. 히데요시는 오다와라에서 그것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맹장지에 그려지는 그림()만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후원하던 화가 카노우 에이토쿠[狩野 永徳]에게 재촉했다. 그 해의 마지막 날 전에 그것이 완성되어 저택에 설치되었다.

 그림의 주제는 노송나무였다.

 큰 화면 가득 짙은 묵의 선을 달리게 하여 노송나무를 그렸고 거기에 농후한 색채의 물, 하늘, 바위를 곁들인 그야말로 히데요시가 좋아하는 - 말하자면 쥬라쿠테이[第] 풍의 호화장려(豪華壯麗)한 구도로 히데요시가 만들어 낸 이 시대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는 듯 했다.

카노우 에이토쿠[狩野 永徳]의 그림. 현재는 병풍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참고로 화가인 카노우 에이토쿠는 그 해의 10월(1590년 10월)에 사망하였기에, 완성을 한 것은 아마 제자일 것이라고 한다.

  새해가 되자, 미야는 이 새로운 저택으로 옮겼다. 이어 9월에 히데요시는 동방에서 개선한 뒤에 이 저택에 들렸다.

 

 잘 만들어진 것 같군요

 

 히데요시는 저택 안을 확인해 보면서 몇 번이나 말하였는데, 단지 정원만이 맘에 들지 않은 듯 직접 지휘를 해서는 바위를 이곳 저곳으로 옮겼다.

 

  1591년은 토요토미 가문에 불행이 이어졌다. 정월에 히데요시의 동생인 야마토다이나곤[大和大納言] 히데나가[秀長] 죽었으며, 8월에는 츠루마츠가 죽었다.

 토요토미 가문은 다시 후계자를 잃었다. 히데요시는 결국 결심을 하여, 이 해의 11월 조카인 히데츠구[秀次] 받아들여 자로 삼고, 그 다음 달에 칸파쿠 직책을 이 양자에게 물려주었다. 그 후 조선 침략이 시작되었지만 히데요시는 이 즈음부터 몸의 심이 부러졌는지 갑자기 노쇠하기 시작했다.

  1. 이 삼위(三位)가 되면 당상가라 하여 궁궐에 입궐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공경(公卿)라 하여 상급귀족이 되었다. - 사족으로 정사위(正四位) 산기[参議]에 임명된 자는 사위(四位)임에도 특별히 공경이 되었다. [본문으로]
  2. 위키에는 ‘토시히토’라고 한다. [본문으로]
  3. 칸토우[関東] 호우죠우 씨[北条氏]와의 전쟁. [본문으로]
  4. 그 건물 안에 여러 행사나 침식 등을 모두 행할 수 있는 다목적 슈덴(主殿)이라는 건축물이 저택의 중심에 있는 저택형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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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9.21 2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는 인물이라, 과연 어떤 인생을 살아 나갈지 궁금해집니다.
    이번편도 잘 읽었습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1 2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옛시가 많다는 이유로 질질 끌어왔던 이 '하치죠우노미야'편도 다음이 마지막입니다....(근데 그러고 보니 시는 몇 편 없었네요 ^^;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9.22 07: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조선이고 일본이고 시는 어렵군요. ^^; 재밌게 읽었습니다. ^^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22 12: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을 읽고 관심이 생겨, 카노우 에이토쿠에 대해 찾아보니 의외로 요절했더군요. 위키에서는 과로사일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적혀있었지만서도...

    문화인은 대체로 장수하는게 일반적(;)이라고 생각했었기에 조금 의외였습니다(~~;)

    이에야스 경우엔 참.. 뚱뚱이 외관을 잘 묘사했더군요~~; 뭐, 취미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일지 모르겠습니다만서도 그래도 대놓고 컨닝은 좀(~~;)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2 17: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다충승님//재밌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참고로 시의 해석은 엉터리입니다. 고어는 자신도 없고, 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다보니 그냥 단어 뜻의 나열(겸 대충 때려 맞춘 것)입니다. 그래서 밑에 원어를 적어 넣었습니다. 잘 아시는 분이 보시면 알려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 이건 넓은 마음으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다메엣찌님//그런 방면에 일이 많던 시기에, 그 분야에서 No.1급의 인물이다보니 이곳저곳 많이 불려다녀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근데 정말 저렇게 뚱뚱하였을지... 제 이미지로는 그냥 북두의 권의 작가가 그린 "꽃의 케이지"에 나오는 정도입죠...(그것이 동작에 지장을 줄 정도로 뚱뚱함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요)

    이에야스니까 조금 당당하고 거만하게 비춰지는 것이겠죠... 하지만 찌찔이급이 그랬다면 어떤 이야기가 되었을지 궁금하군요.(무엇보다 저렇게 베낀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 없었늦지 의문이지만요. 처음 들어 보는 일이다 보니... 함 찾아봐야 겠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zardizm BlogIcon zardizm 2008.09.22 22: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이에야스가 단지 베껴썼다고 싫어하게된건가 싶었는데 위키를 보니 좀더 큰 일이 있었군요;;
    다음 화에 나오려나요...? 기대해봅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2 22: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쨌든 다음이 마지막 편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9.23 0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나 곱게 자라 풍파없이 곱게 황실로 돌아간...
    과연 마지막 편에는 무슨 일이 있으려나요^^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3 09: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떠한 고민도 가져다 주는 일 없이 잘 먹여주고, 잘 대접해주고, 집까지 지어주고....
    저래주었는데도 빠가 되어 주지 않았다면, 하치죠우노미야가 천하의 개*놈일 듯...

五.

 이에야스[家康]는 그 흐름을 조종했다. 여기서 신경 쓰이는 것은 히데야스[秀康]의 존재였다.
 - 그 분은 순진하시다. 길을 잘못 들지 않게 잘 보좌하라.
 며 히데야스의 가로(家老)들을 불러 이에야스는 훈계하였다. 히데야스가 순진하게 토요토미 가문[豊臣家] 문제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 그 중 어느 한 쪽 진영에 옹립되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이에야스의 숨겨두었던 의도가 무너질 수 가능성이 높았다.

 파벌은 두 개였다.
 이에야스를 정권 찬탈의 의도를 가진 야심가로 규탄하고 있는 것이 히데요시(秀吉)의 정무 보좌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그 무리들로, 그들은 히데요리[秀頼]의 생모 요도도노[淀殿]를 자기 파벌의 보호자로 두고 있었다.
 이 이시다 파벌에 대항하고 있는 것이 야전파(野戰派)라고 할 수 있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그의 친구들로, 그 파벌의 중심에는 히데요시의 정실(正室)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가 자리잡고 있다.

 두 파벌 다 히데요시가 키운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토요토미 정권이 확립되면서부터 이시다파는 문관(文官)으로 정권의 중추에 있었고, 카토우파는 야전 종사자가 되어 중추에서 밀려났다. 카토우 파는 자신들을 일이 있을 때마다 곤경에 빠뜨려온 것이 히데요시 측근인 이시다파였다고 보고, 히데요시가 죽자마자,
 - 이제는 전하 때문에 조심하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시다 놈들을 죽이고 그 고기를 씹어 보자.
 고 울부짖으며 각각 오오사카[大坂)]의 자신들 저택을 무장하고, 공공연히 대립하며, 시가전까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이에야스는 이 토요토미 가문의 내분(內紛)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때로는 토요토미 가문 필두 대로(大老)로서 두 파벌을 중재하였고, 때로는 은근히 부추겼다. 이에야스가 은밀히 밀고 있었던 것은 키타노만도코로와 카토우 키요마사의 파벌이었다. 이에야스는 카토우파에 꼽사리 껴, 이 파벌이 이시다파를 향해서 뿜어대고 있는 증오의 에너지에 풀무질하고 두들겨 단단히 해서 만든 칼로 정권 교체의 쿠데타를 완성시키고자 하였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칸토우 군단(関東 軍團)을 가지고 토요토미 가문을 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토요토미 가문의 은혜를 입은 다이묘우들끼리 내부에서 싸우는 형식을 그대로 유지시키며, 그 격화(激化)의 마지막 단계에 일대 결전을 연출하여, 그제서야 처음으로 쿠데타를 전개한다 – 는 구상이었다. 이 구상대로 이에야스는 착실히 돌을 깔았으며, 그렇게 깐 돌 한수 한수가 재미있을 정도로 성공하였다.

 ‘히데야스는 그냥 풀어놓아서는 안 된다. 무슨 짓을 해버릴 지 알 수가 없다’
 고 이에야스가 생각한 것은 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히데야스를 자유로이 풀어놓으면 오오사카로 내려가 히데요리를 따르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었다. 히데요리를 따르게 되면 자연히 이시다파의 진영에 들어갈 것이다.

 이에야스는 자식인 히데야스에게도 손을 썼다. 1599년 3월, 이에야스는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를 불러,

 “나를 경호해 주길 바란다”

 고 말했다. 이에야스는 사정을 설명했다. 정세가 악화되어 이시다 측은 이에야스에게 위해를 가하고자 끊임없이 밀모를 꾸미고 있는 듯하다 – 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며 히데야스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쿄우토[京都] 근방에는 토쿠가와 가문의 병사가 소수밖에 없었다. 내 몸 지키기가 힘들구나 – 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적자(嫡子)인 히데타다[秀忠]는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칸토우[関東]로 돌아가 에도[江戸]에서 출동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쿄우[京]-오오사카[大坂]에는 토쿠가와의 군사가 적다. 츄우나곤[中納言=히데타다]을 대신하여 나를 도와주길 바란다”

 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이에야스는 그렇게 부탁함으로써 히데야스의 의협심을 자극시키고자 하였다. 바라던 대로 히데야스는 감격했다. 이 진짜 아비에게 이렇게 부탁 받은 것은 태어나서 이번이 처음이었으며, 히데야스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눈물이 나오려 했다.

 “불초한 소생이지만 분골쇄신하겠사옵니다”

 고 히데야스는 거의 외치듯이 소리를 질렀으며, 이때 처음으로 이에야스의 자식이 된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 후의 일상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즉 이에야스의 저택, 숙소에 항상 처박혀 있을 뿐이었다. 외출도 못 하였고,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다.
 ‘한층 맘이 놓이는군’
 하고 이에야스는 생각했다. 이렇게 새장 속에만 넣어두면, 다른 야심가의 희생물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1599년 윤3월 3일.
 히데요시가 죽은 뒤, 토요토미 가문에서 중재 세력이었던, 대로 차석(大老 次席)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오오사카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죽었다. 카토우 키요마사들은 그로 인해 폭동의 자유를 얻었다. 토시이에가 죽은 그 3일 뒤의 밤, 이시다 미츠나리를 오오사카에서 죽이고자 시가전을 계획하였다. 미츠나리는 사전에 알아차리고, 홀홀 단신으로 후시미[伏見]로 도망쳤다. 카토우들은 그를 쫓았다. 카토우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였다.

 미츠나리는 도망갈 곳이 마땅치 않자 대담하게도 후시미의 이에야스 저택으로 도망 와 보호를 청했다. 이에야스는 미츠나리에게 있어서 쓰러뜨려 마땅한 숙적이었으며, 더구나 쫓아오는 일곱 장수들의 숨겨진 보호자였고, 그 장막 건너편의 수괴였다. 물론 그것을 미츠나리는 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에 그 숨겨진 사정을 반대로 이용하였다. 이에야스는 자신을 죽일 리 없다 – 고 보고 있었다. 바로 그러했다. 이에야스는 그를 보호하고 죽이지 않았다.

 이에야스의 부하들은,
 - 이 기회에 미츠나리를 죽이십시오.
 하고 헌책하는 자도 많았다. 계속 탄핵을 받고 있는 미츠나리를 죽이고, 일곱 장수의 호의를 얻는 편이 좋다 – 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들을 생각도 안 했다. 단 한 사람, 모신(謀臣)인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만은 이에야스와 같은 의견이었다. 미츠나리를 보호하고 살려두어, 그의 거성(居城)인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으로 풀어준다. 후일 그는 반드시 책모(策謀)하고 다이묘우들을 긁어 모아 이에야스를 물리치기 위한 병사를 일으킬 것이다. 그때야말로 쿠데타가 완성될 때이며, 그때까지는 미츠나리를 살려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야스는 후시미까지 쫓아온 일곱 장수를 설득했다.

 “돌아가신 전하가 저 세상으로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또한 히데요리 공(公)의 천하는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후시미에서 일을 낸다면 불충 이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오. 만약 그래도 여전히 지부쇼우유우[冶部少輔=미츠나리]를 죽이고자 하신다면, 이 이에야스가 상대를 하겠는데, 어떠신지?”

 하고 반 공갈을 하였다. 모두 이에야스가 그렇게까지 말을 한다면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야스는 그날 밤 미츠나리를 자택에서 머물게 하고, 다음날 아침 그를 보내고자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도중에 키요마사들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지 않는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에야스의 배려는 세심했다.

 “소장(少将=히데야스), 당신이 세타[瀬田]의 다리까지 보내드리시게”

 하고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불러 미츠나리의 경호를 명했다. 히데야스는 알았다고 하며 만약을 위해 질문을 하였다.

 “만약 도중에 키요마사들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싸워라”

 하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이 한마디가 히데야스를 흥분시켰다. 이렇게까지 뛰어난 기상과 재기(才氣)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히데야스는 지금까지 한번도 전투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히데요시의 오다와라[小田原] 정벌에도 종군하였으며, 조선침략에 있어서도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까지 따라는 갔었다. 그러나 야전에 나가지 않았다. 히데야스의 기량은 여태까지 실전에서 시험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안심하고 싸우라고 하였다. 전투가 일어날 리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에야스의 아들인 히데야스가 경호하고 있는 것이다. 키요마사들이 히데야스의 경호대를 공격하는 것은 이에야스에게 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할 리가 없다 – 고 보고 있었다.

 히데야스에게 있어서는 불행하게 도중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히데야스는 미츠나리와 말머리를 함께하며 다이고 가도[醍醐 街道]를 나아가며, 반은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과 함께 미츠나리를 염려하며 말했다.

 “목숨을 바꿔서라도 공을 지키겠소이다”

 하고 히데야스는 볼에 젊디젊은 피로 붉게 물들이게 하며 말했다. 미츠나리는 이 말을 오해했다.
 ‘역시 이 분은 다르다. 히데요리님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계실 것이다. 이에야스나 그 외의 사람들과는 별개의 감정을 토요토미 가문에 대해 가지고 있다. 아군이 되어주지는 않을까?’
 하고 자신의 의도에 좋은 쪽으로만 해석했다. 곧이어 세타의 물길에 걸려있는 세타 대교[瀬田 大橋]의 서편까지 왔다. 동쪽으로 이 다리를 건너면
오우미[近江] 평야가 펼쳐져 있다. 북 오우미의 산야는 미츠나리의 영지(領地)였다.

 “그럼 이제는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히데야스가 정중하게 말했다. 미츠나리도 정중하게 예를 올리며, 마침 몸에 지니고 있던 마사무네[正宗][각주:1]의 단도(短刀)를 히데야스에게 선물하였다. 이 즈음 미츠나리가 소유하고 있던 이 단도의 명성은 온 천하에 울리고 있었기에, 그런 것을 선물했다는 것은 얼마나 깊은 감사와 호의를 나타내고자 하였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단도는 후세, 이시다 마사무네[石田正宗]라 칭해지며 전해 내려오고 있다.

  1. 여기서 ‘마사무네’는 칼 상표의 이름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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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7.20 1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생부터 불행하더니 자신의 힘을 펼칠 수도 없고 친부한테는 계속 이용당하네요
    시로유메님 말씀처럼 역시 인생은 운!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0 1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행한 히데야스를, 시바 선생은 더욱 극대화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20 17: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화도 재밌게 봤습니다. 여기서 이시다가 유우키 히데야스에게 칼을 주는군요..

    더불어, 무려 나츠코미때(;) 상경하시어 오덕질 할 시간 쪼개시어 기간한청 이시다 마사무네 공개판을 찍어오신 이름 없는 일본분께 박수를(ㅎㄷㄷ)

    どうやら刀の受け傷らしく、ここから「石田切込正宗」の号がついたらしいです。
    切込라게 칼에 난 금을 가리키는 말로 알고 있는데 아무튼 이러한 이명이 있군요. 덕택에 국보는 아니고 중요문화재라지만, 왠지 몇몇 기스가 더 칼로서의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ㅎㅎ)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1 08: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봐주셔서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

    나츠코니...라는 것이 오덕후와 관계가 있는 것인가 보군요. 정확하게는 어떤 것인가요?
    검색해 보아도, 그냥 참가했다는 글들만 보여서...

    칼은 칼등으로 막는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칼 등에 상처난 것 또한 좋더군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7.25 2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여름 코믹마켓(만화 동인지등을 파는 큰 시장..이랄까나요)이요. 그걸 줄여서 나츠코미(夏コミ)라고 하는 듯 하더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26 1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그렇게 줄인 것이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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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에 들어와서,

 "타이코우(太閤), 타계(他界)하시다"

 라는 경천동지할 소식이 성에서 새어 나와 그걸 들은 사람들이 사방으로 퍼트려 제후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 소문에 성 밑에 있던 저택마다 사람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뛰어다니며 소식을 전하는 사자(使者)들로 온 거리가 소란스러웠지만, 정작 히데요시는 아직 혼마루[本丸]의 깊숙한 곳에 살아있었다. 진상을 말하자면 극도의 쇠약에 때마침 발작이 더해져 침상에서 두 시간 정도 기절하여 인사불성이 된 것이 죽음의 오보(誤報)가 되었다. 그 뒤 다소 기력은 회복했지만, 히데요시는 이제 자신의 생명에 끝이 왔음을 각오할 수 밖에 없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토요토미[豊臣] 정권이 잘 굴러갈 수 있도록 운영 체제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시기까지 히데요시 정권에는 운영 상의 조직 같은 것 없이, 히데요시 자신이 독재(獨裁)하며 그 수족으로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등의 비서관(秘書官)이 그때그때마다 명령을 행정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바꾸어 그 비서관 다섯 명을 토요토미 가[豊臣家]의 행정관(行政官)으로 삼아 '오봉행(五奉行)'[각주:1]이라 칭했다.

 그 상부조직(上部組織)으로 다섯 명의 의정(議定官)을 두었다. '오대로(五大老=고다이로우(고타이로우))라 일컬어졌다. 대로 필두(筆頭)나이다이진[大臣]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이며, 히데요리[頼] 보좌의 수상(首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수상(副首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차석(次席) 대로인 다이나곤[大納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이다. 이어서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이다. 이 다섯 명에게 히데요리를 보좌함에 있어서 최고의 발언권을 가지게 하였다. 물론 석고(石高), 관위(官位)를 보아도 그들은 여러 다이묘우[大名] 중에서도 특출났다. 그러나 그 능력, 성격, 신망(信望)이라는 점에서는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 세간 일반의 평가로 말하자면, 카게카츠는 우직(愚直)했으며, 테루모토는 너무 범용(凡庸)했고 또한 우키타 히데이에는 단순한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그 새로운 조직을 병상에서 구술(口述)하였다.

 히데요시의 말을 받고 있던 것은 평소와 다름없이 이시다 미츠나리 이하 다섯 명의 행정관들이었다. 그 중에는 아사노 나가마사[野 長政]도 포함되어 있었다. 히데요시는 구술을 끝마치자 감상을 말하였다. 오대로에 대한 인물평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한숨이 섞인 감상을 아사노 나가마사는 붓으로 적어 자식에게 전했고 또한 후세에 남겼다.

 

 에도님[殿=이에야스]은 의로운 분이시다. 그 의로움을 나는 오랫동안 보아왔다. 그의 손녀를 히데요리와 맺어주고 싶다. 의로우신 에도님께선 히데요리를 잘 보필해 줄 것이다.”

 

 이것은 관찰이라기 보다는 히데요시의 희망이 너무 깃들어 있었다. 또한 이 말이 이에야스에게 전해졌을 경우의 효과도 기대하였을 것이다.

 

 카가[加賀] 다이나곤(마에다 토시이에)[각주:2]…… 나와는 죽마지우(竹馬之友). 그가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때문에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 임명한다. 필시 히데요리를 위해서 잘 해줄 것이다.”

 

 카게카츠, 테루모토는 이 또한 의로운 사람들이다

 

 히데이에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그 아이는 어렸을 적부터 내가 손수 키워 온 아이다. 히데요리를 지키며 키우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어떤 일이건 만에 한 가지 경우가 있더라도 도망치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대로(大老)이기는 하나 봉행(奉行)들 틈에 껴 착실히 직무에 힘써 너희들과 대로들간의 사이에서 공평히 주선(周旋)해 줄 것이다.”

 

 히데요시는 또한 오대로, 오봉행을 시작으로 여러 다이묘우들에 대하여 자신이 죽은 후에도 토요토미 가문의 법도와 체제를 지켜 히데요리에 대한 봉공(奉公)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뜻의 서약서를 쓰게 하여 거기에 혈판(血判)을 찍게 하였다. 한 번뿐만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쓰게 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에야스의 서약서는 히데요시가 공손히 받으며,

 

 이것만은 관에 가지고 들어가 명토(冥土)로 가져 가겠다

 

 라고 까지 말하였다. 하지만 허무했다. 그의 사후(死後), 아미다가미네[阿弥陀峰] 산봉우리에 있던 히데요시의 묘소는 이에야스에 의해 파괴되었다. 물론 직후가 아니라 오오사카 전쟁[大坂の役]가 끝난 다음의 일이긴 하지만.

 

 히데요시는 죽기 한 달 전 즈음 제후들에게 자신이 쓰던 옷이나 무구(武具) 등을 나누어 주었고, 자신이 죽은 후 법률이 될 수 있게 치밀한 유언을 써 남겼으나 아직 숨은 있었다. 죽은 15988 18일 전전날, 오대로를 병실로 불러 들였다. 한번 더 히데요리에 대한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다섯 명 중 우에스기 카게카츠만은 자신의 영지(領地)로 돌아가 있어 부재중이었기에 토쿠가와 이에야스 이하 네 명이 얼굴을 나란히 하였다. 베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가 주어졌다.

 

 어느 얼굴이건 심각하고 비통한 표정을 만들고 있었지만 히데이에만은 아랫입술을 악물고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히데이에 만은 병상에 있는 히데요시를 보고 그러한 정치적 얼굴 표정을 만들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받았다. 이제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앙상해져 눈을 감을 때마다 배 곪아 죽은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살아있었다.

 이 모습이…… 타이코우이신가?’

 라 생각하자 히데이에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때로는 너무 격하여 중요한 히데요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히데요시는 눈동자만 히데이에를 향해 움직인 후 희미하게 말했다.

 

 하치로우~”

 

 라고. 모두 귀를 세웠다.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단다. 좀 조용히 해주지 않을래?”

 

 쇠약으로 인하여 의식이 희미해진 탓인지, 마치 어린 아이에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히데요시는 말하였다. 그 말투와 목소리가 히데이에를 한층 더 슬프게 하였다. 어렸을 때 히데요시 곁에서 다른 꼬마 시동들과 장난 등을 쳤을 때의 꾸짖었던 그 목소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어서 말했다.

 내용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히데요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오, 부탁 드립니다, 의로우신, 의로우신 등으로 애처롭게 호소할 뿐으로, 살아 남은 측의 잘난척하는 입장에서 보면 우스운 망탄(妄誕)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과 같은 정경(情景)을 이미 8살 때, 죽은 아비의 머리맡에서 체험했던 히데이에에게 있어서는 다른 세 명과는 전혀 다른 정념(情念) 속에 있었다. 당시 자신이 지금의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이며, 죽은 나오이에[直家]가 히데요시였다. 당시 하시바 치쿠젠노카미[羽柴 筑前守]였던 히데요시는 온 몸에서 광망(光芒)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모습으로,

 

 안심하시길…… 하치로우님에 대한 것. 반드시 뜻하시는 바대로 받들겠습니다.”

 

 라고 나오이에의 귓가에서 말하였다. 그 말대로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의 손아래서 성인이 되었고 이제 20대 중반을 넘었으며 영지(領地)도 나오이에 때보다 커졌다. 임종(臨終)의 약속이 지켜진 증거가 지금 여기에 있는 히데이에의 존재 그 자체인 것이었다. 히데이에는 만약 히데요시가 자기 혼자 여기에 있게 해주었다면 목소리 높여 이불 자락에 매달려서는 히데요시에게 안심하라고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작법(作法)에 따라 이 자리에서는 상석자(上席者)가 응답해야만 하였다. 상석자인 이에야스가 곧바로 무릎걸음하며 응답을 하였다.

 

 부디 안심하시길 바랍니다

 

 목소리는 차분함 함께 목 끝에서 울리며 나와, 누가 들어도 신뢰감이 있을 듯한, 거의 장중(莊重)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음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들은 히데요시는 혼신의 힘을 담아서 미소 짓고 턱을 당겨 희미하게 끄덕였다.

 

 다다음 날 심야. 히데요시는 죽었다.

 

***************************************************************************************************

 

 히데요시의 죽음은 그 다음날부터 후시미[伏見]의 정계(政界)를 바꾸었다.

 이에야스는 딴 사람이 되었다. 이미 세키가하라[ヶ原]를 상정(想定)하여, 그 목표에 따라 행동하였다. 히데요시가 유언으로 만든 법의 금지사항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며 제후들의 마음을 취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으로 접촉을 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의 법을 무시하여 자기 멋대로 제후들과 인척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이것이 봉행 이시다 미츠나리를 자극했다. 이에야스는 미츠나리 혹은 마에다 토시이에를 화나게 만들게 만들어 그들이 거병(擧兵)하게 한 후 그것을 토벌함으로써 정권 교체의 매듭을 짓고자 하였다. 이 목표를 향해서 이에야스는 치밀하고 더구나 대담하게 움직였다. 그런 이에야스의 동향을 보고 나름대로 추측한 토요토미 가의 제후들 대부분은 자기들이 나서서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였다.


 이 즈음. 우키타 가[宇喜多家]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이 소동도 히데요시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지적했듯이 히데이에게 결여되어 있던 것은 정치 능력이었을 것이다. 특히 히데이에는 가문을 다스리는데 어두웠고, 자신의 본거지에서 영지를 다스리던 중신(重臣)들과 친분이 얕았다. 이 때문에 중신들과의 정치에 관한 연락에는 나카무라 교우부[中村 刑部]라는 측근을 중용하였고 이를 총애하고 있었다.

 

 교우부는 원래 우키타 가문의 가신이 아니었다. 카가[加賀] 사람이었다.

 고우히메[姫]에 딸린 부하로써, 카가 마에다 가[前田家]에서 우키타 가문에 편입되었다. 원래 마에다 가에서 오오사카 성[大坂城]과의 창구 역할을 하고 있던 인물로 사교(社交)에 뛰어났다.

 

 지로우베에[兵衛 교우부의 통칭]는 꽤 쓸만하군

 

 하고 히데이에는 무심코 이를 어떤 일이건 시켰고 그러던 중에 정치 관련의 연락도 담당하게 하였다. 연락이라는 것은 오오사카[大坂] 비젠지마[備前島]주재(駐在)하는 필두 가로인 오사후네 키이노카미[長船 紀伊守]에 대한 심부름이었다. 그러던 중 교우부는 오사후네에게 아첨을 하여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차츰 이 카가 사람은 히데이에와 오사후네 쌍방을 농락하게 되어 얼마 안가 히데이에, 오사후네 둘 다 이 남자가 끼지 않으면 서로의 뜻이 통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기에 나카무라의 눈치를 살피는 강대한 세력이 만들어졌다. 토요토미 가문의 이시다 미츠나리와 닮은 존재일 것이다. 히데이에는 이 교우부에게 2천석을 하사하여 가로의 말석에 앉게 하였다.

 

 벼락 출세한 놈이 우리들에게 지시를 내린다고?”

 

 라는 불만이 가문에 팽배해졌다.

 특히 이 악감정은 히데이에의 본거지에서 더 심했다. 오오사카 저택에서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라는 명령이 본거지로 온다. 본거지에 사는 가신들은 궁핍했지만 명령 받은 만큼 금과 쌀을 오오사카로 보내야만 하는 수동적인 입장이었기에 평소부터 감정이 편치 않았다.

 거기에 필두 가로인 오사후네 키이노카미는 원래부터 인망이 없어 모든 것에 강압적이었고, 정치에 있어서도 한 쪽만 편드는 일이 많았다. 오사후네에 대한 원한은 장년(長年)에 걸쳐 쌓였던 만큼 교우부가 가로에 임명되기 이전부터 본거지에서는 오사후네를 죽인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 점 히데이에도 모르지는 않았다.

 

 예전 조선에 있을 때 망부(亡父) 때부터의 노신(老臣)인 오카 부젠노카미[岡 豊前守]라는 사람이 진중(陣中)에서 병이 들어 부산에서 죽었다. 그 임종 전에 히데이에는 병 문안을 가 오랫동안 자신을 보좌해 준 공로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며,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서 해 줄 말은 없는가?”

 

 하고 물었다. 부젠노카미는,

 

 보람도 없을 것이지 말입니다

 

 라고 말하고선 입을 다물었다.

 말해도 효과가 없다는 의미였다. 히데이에가 거듭 청하자,

 

 아닙니다. 말씀 드렸다고 하여도 들어주실 턱이 없지 말입니다

 

 라고 부젠노카미는 말했다. 또 히데이에는 바랬다. 그러자 부젠노카미는 알았다며,

 

 오사후네 키이노카미는 대악인(大惡人)이지 말입니다. 저 인간을 계속 사용하신다면 가문에 난이 일어나지 말입니다. 불길한 말입니다만 결국에는 멸문하게 될 것이지 말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오카 부젠노카미는 죽었지만 그 예언대로 히데이에는 그 말을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사후네 키이노카미는 망부 때부터 노신이며, 히데요시에게서 하시바[羽柴][각주:3]라는 성()을 하사 받고 있었다. 히데요시를 존중하고 있던 히데이에의 성격으로는 히데요시를 무시하는 듯이 이 노인을 정무(政務)에서 추방한다는 생각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또한 본거지의 반() 오사후네 파()도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는 하시바 성[羽柴姓]인 오사후네에 대해서 공공연히 적대하는 것을 삼가고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죽음이 그들을 활성화시켰다.

 

 '타이코우가 죽었다. 그렇다면 이제 오사후네의 운명도 끝이다! 각각 수하들을 이끌고 카미가타[上方]로 밀고 올라가 오사후네와 일전(一戰)을 치루고 벼락 출세한 나카무라 교우부라는 놈과 함께 목을 따버리자!'

 

 라며 떠들썩하던 중에 당사자인 오사후네 키이노카미가 갑자기 병이 나 오오사카 저택에서 죽었다. 한번 해보자며 들고 일어난 기세가 있었던 만큼 본거지의 반대파들은 실망했지만,

 

 '어떻게 하긴~ 아직 나카무라 교우부 놈이 살아있다!'

 

  며 일부는 교우부를 죽이기 위해서 이미 철포()를 준비해서는 본거지를 출발했다고 한다. 그것을 오오사카에서 전해 들은 교우부는 곧바로 야밤에 배를 타고는 후시미[伏見]로 와 히데이에의 저택으로 도망쳐 왔다. 히데이에는 저택에 있지 않았고 후시미 성에 있었다. 교우부는 저택에서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성에 입성하여 히데이에를 배알(拜謁)하고자 하였다.
  1. 이시다 미츠나리, 나츠카 마사이에,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를 지칭. [본문으로]
  2. 토시이에의 거성이 카가[加賀]에 있었기에, 토시이에의 관직과 합쳐 카가 다이나곤[加賀大納言]이라 불렀다. [본문으로]
  3. 히데요시가 토요토미 씨[豊臣氏] 이전에 쓰던 성(姓).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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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2.09 15: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 때마다 차라리 히데쓰구에게 확실히 승계시키는것만 못했다는 생각밖에는 안듭니다. 결과론적인 말이긴 하지만..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0 0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랬을 경우 나중에 히데츠구가 과연 정말로 히데요리에게 정권을 물려주겠느냐~ 라는 것이 당시 히데요시의 생각이었을테니까요...(그리고 그럴 수 있을 만큼 인심 장악이 가능할 정도의 재능을 히데츠구가 보여주었던 것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뭐 히데요시도 마에다 토시이에가 그렇게 자기가 죽은 뒤 따라서 같이 죽을 줄은 생각도 못했을테니까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2.10 1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시이에가 죽지 않고 이에야스가 히데요시를 따라서 죽었더라면... 도요토미 정권은 평안을 지킬 수 있었을려나? 흠...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1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 혼란의 시기가 길어졌을 수는 있지만(戰쟁이 아닌 政쟁으로..) 토요토미 정권이 오래가긴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마에다 토시이에는 이에야스가 기어 들어가기 전 칸토우의 주인인 호우죠우(北条)씨의 피가 흐르는 사람을 데리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만약 마에다 가문이 토쿠가와 가문과 싸울 일이 있었으면 칸토우에선 선정을 펼쳐 인기가 높았다고 하는 호우죠우 가문의 후계자는 꽤나 요긴하게 쓰였을 것 같습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11 19: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튼 결과론적이라지만 마에다 토시이에의 이른 죽음 덕택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말년의 포석은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으니.. 서약서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의 대로가 어디 토시이에 말고 있었겠나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20: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감입니다. 토시이에가 한 번 큰소리치자 이에야스도 잠시동안 꼬리를 말았었으니까요.

一.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통칭 네네(寧々). 히데요시의 정실이기에 당연히 토요토미 가문[豊臣家門] 가정(家庭)의
주재자(主宰者)이다. 소탈하고 밝은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종일위(從一位)라는 신분이 되어서도 잘난 척하지 않았고 삶이 끝나는 날까지 태어난 고향인 오와리[尾張] 사투리를 사용하였으며 히데요시와의 대화도 누가 보건 말건 꺼리낌이 없었다.

 어느 날, 부부가 함께 란부[舞]를 보고 있었다. 보던 중 뭔 일인지 말싸움이 시작되어 서로 언성을 높였지만 둘 다 오와리 사투리로 빨리 내뱉었기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곧이어 키타노만도코로가 깔깔거리며 웃었고 히데요시도 등이 휘도록 웃어 제꼈다.
 ‘싸움이 아니었나 보군’
 이라 생각하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안심하였는데, 히데요시는 그런
예인(藝人)들에게,

 “지금 싸움을 어떻게 보았나?”

 라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어떤 때이건 밝은 분위기로 만들고 싶어하는 버릇이 있어, 쿄우카[狂歌]나 임기웅변(臨機應變)적인 재치를 굉장히 좋아했다. 예인들도 그런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우선 큰 북을 치던 이가,

 “부부싸움에 모두 놀랐습니다요”

 라며 갑자기 북을 쳐 좌중을 놀라게 하며 대답했다. 피리를 불던 이가 곧바로,

 “어느 쪽이건 삐리리비리리♪”

 어느 쪽이건 잘못 하였고() 또한 말이 맞다()……라고 피리의 음에 맞추어 말하였다. 이 재치 있는 대답에 부부는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키타노만도코로는 그런 귀부인(貴婦人)이었다.

 이 귀부인이 아이를 낳았다면 토요토미 가문의 운명도 크게 변했을 것이다. 토요토미 가문에 아이가 없다는 것은 토요토미 정권이 성립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이 입에는 담지 않았지만 맘속으로는,
 ‘이 정권은 오래가지 못한다. 전하가 살아계신 동안만이다.’
 라 생각하여 다음에 이 천하를 계승할 사람이 누굴까라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당연 누구의 눈에건 실력을 말해도, 혈통을 말해도, 인물을 말해도, 관위를 말해도
제후(諸侯) 필두(筆頭)인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였다. 자연히 토요토미 가문을 존중하고는 있었지만, 뒤로는 이에야스와 끈을 잇고자 하는 사람도 많았다. 히데요시가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은 이에야스와 다이묘우[大名]라는 점에서는 동격이면서도 은밀히 이에야스에게,

 “절 부하로 여기시옵소서.”

 라고 까지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한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토요토미 가문은 후계자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것이 그런 의미에서는 이 정권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불행은 혈연(血緣)이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조카인 히데츠구[秀次]를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히데츠구 이외에 더 이상 적당한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혈연이 아닌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까지도 양자로 하여 토요토미 가문의 일족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히데요시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킨고 츄우나곤[金吾 中納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까지 히데요시의 양자 중 한 명이 된 데에는 그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히데아키는 키타노만도코로의 혈연이었다.
 키타노만도코로의 친정집은
생가(生家)와 양가(養家)의 두 곳이 있다.
 그녀는 오다 가문[織田家]의
미관(微官)이었던 스기하라[杉原 = 후에 키노시타[木下]로 성을 바꾸었다] 스케자에몬 사다토시[助左衛門 定利]의 딸로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이모가 있던 아사노 가문[浅野家]에서 키워졌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손에 넣는 것과 동시에 이 스기하라(키노시타) 가문도 아사노 가문도 제후가 되었고, 기묘하게도(이유는 있지만) 키타노만도코로의 이 두 친정만은 토쿠가와 다이묘우[徳川大名]로 남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살아 남는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취할 즈음, 키타노만도코로의 생가 스기하라 가문 당주는 그녀와 연년생 동생 이에사다[家定]였다. 그 이에사다에게는 자식들이 많아 키타노만도코로는 일찍부터,

 “니가 가진 많은 아이들 중에서 한 명 갖고 싶구나”

 고 말했었다. 그 키노시타 가문에 다섯 번째 남자아이가 1582년 태어났다. 히데아키였다.
 이 당시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츄우고쿠[中国] 방면 사령관이었으며, 키타노만도코로는 거성(居城)인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에 있었다. 스기하라 가문은 이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되어있었기에 당연히 그 집은 나가하마 성 밑에 있었다. 그녀는 성주 부인이면서도 자신의 친정에 남자 아이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동생이자 부하인 이에사다의 집에 방문하였다.

 “얘는 참 귀엽구나”

 아기를 들여다보다 키타노만도코로는 손벽을 치며 기뻐했다. 아예 이 아이를 기저귀를 차고 있을 때부터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이에사다에게 말하자,

 “그 정도로 맘에 드신다면”

 하면서 누이의 뜻에 따라주었다.
 키타노만도코로는
하리마[播磨]의 전쟁터에서 돌아 온 히데요시에게 그 뜻을 말하자,

 “오~ 그거 좋은 생각이군. 양자로 삼자구”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는 히데요시는 간단히 처의 요청을 승낙하였고, 이로 인해 히데아키는 나가하마 성에서 돌보게 되었다. 물론 유모가 있었지만 키타노만도코로 자신도 아이를 좋아하였기에 아기보기도 – 아이를 가지지 못한 것 치고는 능숙했다.

 히데아키는 무사히 성장했다. 통칭을 타츠노스케[辰之助]라고 하였다.
 동그란 얼굴에 흰 피부로 눈동자 움직임이 빨랐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과 비교해서도 굉장히 똑똑해 보였다.

 “저 아이가 자라면 한 몫을 할만한 인물이 될 거에요”

 라고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에게 말했다.

 “그거 기대되는군”

 히데요시도 고양이와 아이를 굉장히 좋아했다. 거기에 히데요시는 자기 처의 장점 중 하나가 사람을 보는 안목에 있다고 은근히 생각하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따라서 히데요시도 히데아키에게 기대를 하였다. 집안 내에서 히데아키의 위치는 양자 서열 1위인 히데츠구의 동생이라는 순위였지만 그러나 히데츠구에게 만약의 일이 있을 경우에는 가문의 상속권을 주어도 좋다고까지 히데요시는 생각하여,

 “네네, 이 가문을 저 아이에게 물려주어도 좋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시게”

 라고 까지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말하였다.

 1585년 히데요시는 관백(関白)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조정에 요청하여 12살인 히데아키를 종사위하(從四位下) 우에몬노카미[右衛門督]에 임명 받게 하였다. 이 관을 당명(唐名)으로는 킨고쇼우군[金吾将軍]이라고 한다. 궁문(宮門)의 경비대장이며, 금혁(金革)을 차고 문을 지킨다고 하여 [금오(金吾=킨고)]라는 호칭이 생겼을 것이다. 이 때문에 제후들은 이 토요토미 가문의 소년을,
  "킨고님"
 이라 부르며 각별한 경의를 표했다. 물론 뒤에서는 ‘킨고놈’ 이라고 소곤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 즈음부터 히데아키는 아이였을 때의 귀여움이 사라지고 영특함이 사라져, 간단히 말하면 우매해지고 얼빠지기 시작했다. 장래
상급 귀족(公卿) 사회에서 창피를 당하지 말라고 글과 시의 선생을 붙여주었지만 조금도 나아질 기색이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본 것 같네’
 키타노만도코로는 그것을 깨닫기에 이르러 차츰 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는 조정에서도 행동거지가 나빠 코를 흘리고 엄숙해야 할 곳에서 갑자기 웃거나 했다. 아주 조심히 걸어야만 하는 조정의 복도에서 동동거리며 뛰어다니기도 했다.

 “저 아이만큼은 창피하네요”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에게 푸념했다.
 원래 그녀의 생가인 스기하라(키노시타) 가문의 핏줄은 모두 무사(武士)로서의 용기나 과감함이 결여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그녀와 닮아서 총명한 인물도 많아, 히데아키의 큰 형 
카츠토시[勝俊 = 지쥬우[侍従], 후에 쵸우쇼우지[長嘯子]] 등은 시에 대한 재능에 있어서만은 어느 제후의 자식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시게”

 히데요시는 그 점에 있어서 낙관적이었다. 어렸을 때의 얼간이 짓이라면 자기 또한 그러했으며, 그의 옛 주군이며 생애의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악동(惡童)스러움은 당시 오다 가문의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그에 비추어보아 어릴 때의 난폭함과 우둔함을 가지고 나중의 그 인물이 현명하게 될지 어리석게 될지를 잴 수 없다.

 “뭐 그런 것일세”

 히데요시는 그렇게 말하며 오히려 키타노만도코로를 달랬다.
 그러나 키타노만도코로의 마음은 좋아지질 않았다. 왜냐하면 히데아키는 12살의 꼬꼬마인 주제에 성(性)에 대한 관심만은 이상할 정도로 강하여,
여관(女官)들이 방에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있을 때면 어느 순간에 들어왔는지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빤히 쳐다보았다. 타이르면 미친 사람마냥 소리질렀다. 그렇지만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히데요시는,

 “색을 좋아하는 것은 각자의 개성이나 경향과 같은 것으로 착하고 나쁘고 현명하고 우둔함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런가~ 킨고도 벌써 훔쳐보기인가.. 나이에 비하면 빠르군”

 이라 말하며 웃을 것이 뻔했다. 호색(好色)과 조숙(早熟)이라는 점에서는 히데요시 자신도 그러했기에 이런 남편에게 호소해 보았자 였다.
 히데요시는 오히려 자신의 친족인 히데츠구보다도 히데아키 쪽을 중시하고 있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1588년.
 히데요시는 쿄우[京]에 쥬라쿠테이[聚楽第]를
조영(造營)하여 4월 14일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의 방문을 요청하였다. 텐노우[天皇]가 신하의 사저(私邸)에 방문하는 것은 요 백 년 동안 없었기에, 토요토미 정권의 안정을 화려하게 알릴 수 있는 효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온 힘을 다하여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날 쿄우토[京都]의 근방은 물론 먼 지방 사람들까지 구경을 하려 몰려들어, 길가와 거리를 경비하는 경비병 만으로 6000명이 동원되었다. 행렬은 화려함의 극을 달했다.
 -텐노우님이라는 것은 이렇게까지 존귀하신 것인가?
 라고 다이묘우[大名] 이하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히데요시가 기대했던 이 의식의 정치적 효과였다. 텐노우의 존귀함을 천하에 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텐노우 다음가는 이는 관백(関白)이다. 텐노우의 존귀함을 알게 됨에 따라 자연히 관백의 신성함도 알 수 있게 됨에 틀림이 없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천하가 갑자기 성립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제후는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가신으로 있었을 때의 옛 동료들이었고, 토쿠가와 이에야스 등은 오다 가문과 동맹했던 나라의 국주(国主)로 히데요시보다 오히려 지위가 높았다. 거기에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는 옛 주군 노부나가의 아들이었다. 히데요시가 무력과 운(運)으로 그들을 휘하에 두고는 있었지만 출신이 출신인만큼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는 복종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에게 존비(尊卑)의 가치관만큼이나 완고한 것은 없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부수고자 했다. 천자의 존귀함을 빌려 그것을 선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존비관(尊卑觀)과 질서를 알려주고자 하였다.

 텐노우는 쥬라쿠테이에서 4일간 머물렀다.
 머물던 중 마당을 구경하려는 텐노우[天皇]의 짚신을 천하의 지배자인 히데요시가 마당으로 내려가 자기 손으로 직접 가지런히 정리하였다. 또한 쥬라쿠테이[聚楽第]의 방 하나에 토요토미 가문에서 가장 힘 있는 여섯 명의 제후를 모아 놓고 텐노우를 모시고 와 이들과 대면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여섯 명은 다음과 같다.

나이다이진[内大臣]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다이나곤[大納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곤다이나곤[権大納言]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 = 히데요시의 동생]
츄우나곤[権中納言]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산기사코노에노츄우죠우[参議左近衛中将]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우코노에노곤쇼우쇼우[
右近衛権少将]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이들에게,

 “너희들은 들으라. 이제 천자(天子)의 고마움과 고귀함에 감루(感淚)를 흘렸을 것이다.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충성을 다할 것을 서약서에 써서 제출하도록”

 하고 명령하였다. 앉은 자리 앞으로 서약서가 놓였다. 이미 문장은 쓰여있었기에 일동은 여기에 혈판(血判) 서명을 하기만 한 것이다. 서약서에 쓰인 문장의 말미에,

칸파쿠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어떤 것이든 따르며 조금이라도 거부하지 않겠다.

 고 적혀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텐노우[天皇] 앞에서 제후에게 복종을 맹세시키는 이 일이야말로 이번 텐노우의 쥬라쿠테이[聚楽第] 방문 최대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서약서를 받는 인물은 히데요시 본인이 아니었다. 히데요시의 대리인(代理人)이었다. 히데요시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대리인에 히데아키를 선택하였다.
 [킨고님]
 이라고 서약서에는 미리 쓰여져 있었다. 맹세하는 상대는 15살의 킨고 히데아키에 대해서였다. 이렇게 되면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는,
 ‘이외로 킨고님이?
 라는 것이 되었다. 당연한
추찰(推察)이었다. 이 서약서로 인해 토요토미 가문에 있어서의 히데아키 지위는 명확해졌다. 비약(飛躍)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히데요시는 히데츠구보다도 히데아키에게 천하를 물려줄 생각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킨고님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되지’
 라 다이묘우[大名]들은 생각하며 이제 막 ‘이방 수염’이 나기 시작한 소년에게 알랑거리기 위해서 다투듯이 선물을 보내게 되었다.

 “저래서는 거만해지지 않을까?”

 하고 키타노만도코로는 걱정했지만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의 경우에도 그랬듯이 히데아키에 대해서도 제후들이 떠받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오히려 기뻐하는 듯 했다.

 “선물 같은 것 받게 내비 두시게. 히데아키가 얼마나 존귀한가를 천하에 알리는 편이 좋은 것일세”

 “그러나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킨고님에게는 독이 될 것입니다”

 키타노만도코로는 말했지만 그러나 가정(家庭)에서의 히데요시는 팔불출(八不出)에 가까웠다.

 “쓸데없는 걱정일세”

 그 총명함에 있어서는 고금무쌍(古今無雙)이라 일컬어지는 히데요시에게도 단점이 있었다. 자식 교육이라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말하지만, 교육은 원래 쓸데없는 걱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히데요시는 교육을 받지 않고 어른이 되었다. 그렇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것은 토요토미 가문의 결함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가문은 갑자기 성립된 귀족(貴族)인 만큼 다른 다이묘우[大名]나 하다못해 촌구석의 조그만 호족 가문에도 반드시 전통으로 지켜져 내려오는 자녀교육이라는 것을
가풍(家風)으로써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히데요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관위를 승진시켜주는 것 정도였다.
 히데아키가 15살이 되는 해인 1591년에는 산기[参議]에 임명되었는데, 우에몬노카미[右衛門督]는 그대로 겸하게 하였다.
 16살인 1592년에는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임명되어 정삼위(正三位)로 승진하였다. 이리하여 세간에서는,
"킨고츄우나곤[金吾中納言]"
 이라 불렀다. 단 히데아키 승진의 속도는 이 곤츄우나곤에서 우선 멈추게 된다. 왜냐면 이 해에 형 뻘인 히데츠구가 갑자기
약진(躍進). 관백에 임명되어서는 명실공히 천하의 후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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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7.12.15 18: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왜 서약서에 히데아키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했는지 궁금하네요... 이때는 히데아키의 성이 도요토미 였을려나?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15 1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문을 읽어보니, 히데아키가 1577년에 태어난건가요? 위키페디아나 여타 자료처럼 1582년에 태어난건가요..(음..)

    도요토미가의 자식교육이 캐실패(;)였다는건 공감합니다. 오히려 거의 손을 못댄 히데요리쪽이 가장 괜찮아 보일 정도로..(..)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7 0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공님//이 당시는 아직 토요토미 성이었죠.

    다메엣찌님//그렇습니다... 본문은 천정 5년이라고 나왔지만, 1582로 고쳤습니다. 문맥상(히데요시가 천하를 취함 즈음...)으로 보아도(다른 책들을 보아도 천정 10년 1582년생이라고 하더군요)

    중간에 1584 -> 1585로 고칩니다... 근데 그럼 두살인데 열두살... 책이 잘 못 된것인지... 시바 선생이 착각했는지...--;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1.31 04: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에야스가 조정의 권한으로 히데요리를 교토로상경하라고 명했을때, 히데요리가 상경하면 죽이고, 상경하지 않으면, 반역으로 몰아 공격할려고 했지만 가토,아사노 2명에게 호위를 하도록하여 상경한것을 보고, "히데요리는 어지리만 얕잡아볼수 없는 인물이다, 살려놓으면 나중에 큰 후환이 될 것이다."라고도 말한적이 있지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31 1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이 글에 어째서 히데요리와 이에야스의 만남에 대한 덧글을 다셨는지 조금 의문이군요...
    (다메엣찌님이 히데요리 언급하셔서 인가요?)

    미묘하게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군요.

    조정의 권한이라기 보다는 손녀 사위 얼굴 함 보자는 의미였고, 토요토미 가문은 쿠게(公家)에서도 쿠교우(公卿)인지라 텐노우(天皇)가 바뀌는데 참석 안 할 수가 없었죠.

    상경하면 죽인다뇨? 대의명분 없이 자기 주인격인 히데요리를 죽이면 나중에 뒷감당은 어떻게 할려구...이에야스도 그 대의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려서 호우코우(方広)사(寺) 종명 사건을 만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대의명분이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힘이 있더라도 상전을 이유없이 죽였다간 후에 당장은 자기한테 머리를 숙이고 있는 토자마(外様)들에게 나중에 들고 일어날 명분을 줄 수 있으니까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8: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다메엣찌님이 히데요리를 언급하셔서 몇자 더 적어보았구요.
    이에야스가 센히메를 히데요리에게 시집보내 히데요리의 장인어른의 신분이였지만, 정략결혼에 의한것이지요. 도요토미가가 공경가문인것 맞는말이지만 그 당시 시국으로보아도 어쩔수 없었습니다. 이미 세키가하라 전투후 도요토미가를 표면적으로 받느는 가문은 거의 없다시피했지요. 히데요리가 교토로 상경하면 이에야스가 표면적으로 죽이지않고 암살을 할것이기때문이죠. 외냐하면 새로운 천황이 등극하는시기에 히데요리가 자신을 호위하는 군사는 데리고 교토로 상경할수 없으니, 히데요리는 십중팔구 이에야스의 의지에따라 교토로상경하면 암살될것이란걸 알고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경하지않는다면 반역으로 몰아 도요토미가를 공격하려고 했던것이죠. 이에야스는 도요토미가를 멸할 명분은 찾고있었으므로.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기때문에 히데요리가 얻은 방법이 자신에게 교토로 상경할것을 설득하러온 카토,아사노에게 호위를 하도록 하죠. 이렇게되면 이에야스에게있어서는 히데요리는 결국 교토에 상경하였으니 반역으로 몰아넣을수도 없었고, 암살을하자니 가토와 아사노까지 죽이면 도요토미계 출신장수들이 반발할것임은 분명했으니 말이죠. 그래서 히데요리는 얕볼수없는 자라고 평하기도했습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코사종명사건은 상황이 좀 틀립니다. 호코사종명사건은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에서 칩거할때의 얘기죠.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에 틀어박혀있는동안은 암살은 꿈도 못꾸는것이니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9: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고 암살에 대의명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에야스가 히데요리를 암살을해도 대명들은 심증만 있을뿐잊 물증이 없을테니까요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chaosrinor BlogIcon chaosrinor 2008.02.11 1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리에게 오사카성 밖은 결코 안전할수 없는곳이였습니다.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1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덧글 감사합니다.

    미묘하게 서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요. 전 chaosrinor님께서
    [히데요리가 상경하면 죽이고, 상경하지 않으면, 반역으로 몰아 공격할려고 했지만]라고 언급하시길레 그에 대한 반론으로 상경한다고 죽이면 대의명분이 없기에 나중에 호오코우사 종명 사건을 이으켜 대의명분을 얻었다고 말씀 드린 것이고....

    chaosrinor님께서 오늘 달아주신 말씀은 저와 비슷한 의견이시군요.
    (표면적으로 죽이지 않고 암살을 한다는 말씀은 어떤 의도로 하신 말씀인지는 모르겠고, 상경하면 암살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은 다르지만...)

    상경하면 부하인 이에야스의 명령에 주가인 토요토미 가문이 부하에게 굴복한 꼴이 되고,
    상경을 거부하면 실질적인 힘(무가의 톱인 쇼우군 가문)을 가진 이에야스가 대의명분으로 삼을 것이고..

    때문에 그 중간책을 사용해서, 손녀 사위의 얼굴을 본다는 말이 나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19: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직 끝나지 않으셨었군요...

    자꾸 반역 반역 하시는데, 반역이란 아랫 사람이 윗사람에 대해서 하는 것입니다.
    주가는 어디까지나 토요토미, 부하가문은 토쿠가와.
    하지만 토쿠가와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이이다이쇼우군 이라는 무가 정치를 만들어서 복잡하게 된 것입니다.

    호코우사 종명 사건은 왜 일어났을 까요?
    토요토미 가문이 가지고 있던 재산(즉 '힘')을 소비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쿄우토에서 만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토요토미의 힘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전쟁이란 그리 쉽게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만, 이에야스가 그렇다고는 전 생각할 수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