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

1619 7 21일 병사(病死) 85.

1535 ~ 1619.

형인 요시히사[義久]와 함께 큐우슈우[九州]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지만,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한 후에 가독 상속. 분로쿠-케이쵸우의 역[慶長役][각주:1]에서 활약했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는 서군에 속했지만, 패배 후에도 영지(領地)안도(安堵)받았다.

 

 

 







전쟁터가 어울리는 무인(武人)

 

 1535년.

 요시히로는 시마즈 가문[島津家] 15대 당주 타카히사[貴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요시히사가 후방에서 전군을 컨트롤하고 있었고, 요시히로는 그런 요시히사의 수족이 되어 각지에 출진. 최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우며 화려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본래대로라면 시마즈 가문의 한 무장으로 생애(生涯)를 끝마쳤을 터였다. 하지만 1595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토요토미 정권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계속 취하고 있던 요시히사를 은거하게 만들고, 시마즈 가문의 차기 당주에 요시히로를 앉힌 것이다. 요시히사나 시마즈의 가신들 대부분은 이 명령에 불만을 품었지만 히데요시의 명령에는 거부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따랐다.

 

 당주 요시히로의 지위는 토요토미 정권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었기에, 1598년에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정권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요시히로의 지위도 불확실한 것이 되었다.

 이 때문에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 요시히로의 동원 명령이 요시히사나 가신들에게 무시당했기 때문에 요시히로는 얼마 안 되는 수하를 이끌고 전쟁터로 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군이 패배하자 적중 돌파를 감행하여 귀국하지만 이 패전으로 인해 요시히로의 정치 생명은 끝나게 되었다.

 

다도(茶道)에 몰두

 

 정치 생명이 끝난 요시히로가 몰두한 것은 다도와 그것에 필요한 차제구(茶諸具)의 제작이었다.

 요시히로가 언제부터 다도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카고시마[鹿島] 현립 도서관에는 요시히로가 센노 리큐우[千 利休]에게 다도의 오의(奧義)에 대해 질문한, '이신(惟新 = 요시히로)님이 리큐우에게 물어본 조서[惟新より利休江御尋]'사본(寫本)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조선에서는 언제나 츠루쿠비의 차기(茶器 - 鶴首の茶入 학의 목의 형태를 한 차 가루를 넣는 사기로 된 도구(비슷한 형태역자 주)를 허리에 차고 다니며, 조금이라도 틈만 나면 차를 즐겼다고 한다.

 

 1606. 요시히로는 쵸우사[帖佐]에서 히라마츠[平松], 또 다음 해인 1607년에는 카지키[加治木]로 거처를 옮겼다. 이 카지키에 있을 때 요시히로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차를 함께 즐길 상대를 찾았으며 응하는 사람이 있으면 굉장히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카고시마에서 열린 다회(茶會)에 초대받았을 때에는 기대에 부푼 나머지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전날의 오후 8시 즈음에는 카지키를 출발하여 날이 밝기 전에 카고시마에 입성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에 갔을 때, 자신이 원하는 차기를 만들기 위하여 조선인 도공(陶工)사츠마[薩摩]로 데리고 왔다. 이것이 사츠마야키[薩摩焼]의 기원이다.

 데리고 온 도공들은 총 80 여명이었다고 한다. 이 중에 김해(金海)라는 도공이 요시히로의 맘에 특히 들었다고 한다. 요시히로는 그에게 '호시야마 츄우지[星山 仲次]'[각주:2]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5년 정도 쿄우토[京都] 근방에 유학시켰다고 한다.

 

 요시히로는 김해에게 쵸우사 저택의 북서쪽에 '우토[宇都] 가마'를, 카치키 저택의 북서쪽에 '오사토[御里] 가마'를 만들게 하여 자신 취향의 차제구를 만들게 하였다.

 동시에 이 당시에는 사츠마[薩摩]에서 사기를 만들기에 적합한 백토(白土)를 찾지 못하여, 조선에서 가지고 온 백토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히바카리테[火計手]'이다. 조선인 도공이 조선의 흙을 사용하여 만들어 구운 불() 만이(ばかり)[각주:3]이 사츠마[薩摩]의 것이라는 의미이다.[각주:4]

 

 또한 요시히로는 자신이 맘에 드는 차제구가 만들어 졌을 때에는 도장[각주:5]을 눌러 구웠다고 한다. '고한테[御判手]'라 한다. '카지키 영감탱이 이야기[加治木古老物語]'에는 고한테 하나라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손가락 하나쯤은 아깝지도 않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진중(珍重)받았다고 한다.

 

 타나카마루 컬렉션[田中丸コレクション]의 '카타츠키 챠이레[肩衝茶入][각주:6]'인 이름()사이노호코[サイノホコ], ‘토우쿄우 국립 박물관[東京国立博物館]의 '코쿠유우분린챠이레[釉文琳茶入]'[각주:7]인 이름 모치즈키[望月]등. 현재도 '코사츠마[古薩摩]'[각주:8]의 명품으로써 높은 평가를 얻고 있는 다기(茶品) 등도 이 우토와 오사토의 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병상(病床)에서 울리는 전쟁터의 함성

 

 1618년 봄.

 요시히로는 병으로 쓰러졌다. 예전의 전우였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나 류우큐우[琉球][각주:9] 국왕 등이 문병(問病)의 사신을 보내고, 막신(幕臣)[각주:10]으로는 쿄우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각주:11]였던 이타쿠라 카츠시게[板倉 勝重], 요시히로의 아들이며 당주인 이에히사[家久][각주:12]의 요청을 받아 쿄우토[京都]에서 명의(名醫)로 소문 난 쥬토쿠안[寿徳庵]을 카치키에 파견하여 요시히로를 진찰시켰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요시히로는 쇠약해져 음식도 먹지 못 하게 되었지만, 가신들이 전쟁터에서의 함성을 지름과 동시에 옆에 있던 가신이 빨리 준비를 갖추시길 바랍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요시히로는 갑자기 제 정신으로 돌아와 단번에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 삼켰다고 한다. 항상 전쟁터에 몸을 두고 있었기에 전쟁터의 함성을 들으면 멋대로 몸이 반응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허무하게 병은 회복할 조짐도 보이지 않고 다음 해인 1619 7 21일.

 카치키의 저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85.

  1.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일본에서 지칭하는 말. [본문으로]
  2. 대대로 타테노 계[竪野系]의 도공은 이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김해의 자손들이라 한다. [본문으로]
  3. 일본어로 “~만”, “~뿐”일 때 사용하는 부조사. [본문으로]
  4. 여담으로 '테[手]'의 의미는 차제구의 분류하기 위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보리 엔슈우[小堀 遠州]'라는 다인과 그 주변 인물들에 의한 것으로, 가장 뛰어난 다기에 붙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자신의 이름 글자 중 하나인 '요시[義]'라는 글자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6. 한 쪽이 돌출 된 형태를 말함. [본문으로]
  7. 검은 광택이 나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
  8. 초기 사츠마 도자기, 즉 조선인 도공인 만든 도자기를 지칭. [본문으로]
  9. 현 오키나와[沖縄] 지역 [본문으로]
  10. 에도 막부[江戸幕府]의 신하 [본문으로]
  11. 에도 바쿠후의 쿄우토[京都] 치안 유지를 임무로 하는 직책이나, 쿄우토에 있던 막신들의 총 책임자였기에 황실 및 쿠게[公家], 서국 다이묘우[大名]들의 감시 등을 임무로 하였다. [본문으로]
  12. 타다츠네(忠恒)가 1606년 개명. [본문으로]

시마즈 요시히사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7. 11. 28. 17:50 Posted by 발해지랑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

1611 1 21일 병사(病死) 79.

1533 ~ 1611.

시마즈 씨[島津氏] 16대 당주(). 오오토모 씨[大友氏], 류우조우지 씨[造寺氏]를 격파하여 영토를 확대하지만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하고, 가독(家督)을 동생인 요시히로[義弘]에게 물려준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후에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카이에키[改易][각주:1]의 위기에 빠지자,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와 교섭하여 영지(領地)안도(安堵)받았다.

 

 



히데요시가 내린 은거 명령

 

 1595 6.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시마즈 씨[島津氏]에게 영지안도장(領地安堵)을 발급하였다.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점하고 있던 영지에 행해지던 태합 검지[각주:2]가 종료되어 산출된 57 8천 여석의 영유(領有)를 승인한 것인데, 그 영지안도장에 쓰여진 이름은 시마즈 가문당주 요시히사가 아닌 동생 요시히로[義弘]로 되어있었다. 이것은 토요토미 정권에 비협조적인 요시히사에게서 시마즈 가문의 가독을 몰수하고, 친 토요토미 적인 요시히로를 시마즈 가문 당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동시에 요시히사는 시마즈 가문이 대대로 거성(居城)을 삼고 있던 사츠마[薩摩]카고시마[鹿児島]에서 물러나라는 명령을 받아, 오오스미[大] 토미쿠마[富隈]에 있는 토미쿠마 성[富隈城]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가 끝난 후인 1604년에는 오오스미[] 코쿠부[国分]에 마이즈루 성[舞鶴城]을 신축하여 거성으로 삼았다.

 

 단지 요시히로의 가독 계승은 토요토미 정권이 요시히사나 시마즈 가신단의 의향을 무시하고 멋대로 결정한 것이었기에 실권은 여전히 요시히사가 계속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실권을 누구에게 물려주는가에 대해서 강제로 은거를 당했던 요시히사를 끊임없이 고뇌하게 만든 것이다.

 

세 딸과 두 명의 후계자 후보.

 

 요시히사에게는 세 명의 아이가 있었지만 모두 여자였다.

 

 첫째 딸인 오히라[御平] 1551년생으로, 삿슈우 가문[薩州家][각주:3]의 시마즈 요시토라[島津 義虎]에게 시집갔다.

 요시토라의 부친 사네히사[久]와 요시히사의 부친 타카히사[貴久][각주:4] 예전에 종가(宗家)의 가독을 쟁취하려고 계속 다투어 왔던 사이였기에 요시토라도 겉으로는 요시히사에게 복종하고는 있었지만 그 본심은 알 수 없었다.

 1585년. 요시토라가 병으로 죽어 오히라가 낳은 타다토키[忠辰]가 그 뒤를 이었지만, 그 타다토키도 진심으로 복종한 것이 아니었기에 틈만 나면 본가를 탈취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1592년. 조선 출병 시[각주:5]에 요시히사의 휘하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멋대로 행동하다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다음 해인 1593년 카이에키 당하여 처지를 한탄하다 병으로 죽었다.

 또한 오히라는 타다토키 외에 타다키요[清], 타다히데[栄] 등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삿슈우 가문 카이에키 후 히고[肥後] 반국()를 영유(領有)하고 있던 코니시 가문[小西家]로 보내져 유폐되어 있었기에 요시히사의 후계자로 삼기 힘들었다.

 

 둘째 딸(이름 불명)[각주:6] 1563년생으로, 타루미즈 가문[垂水家] 시마즈 테루히사(島津 彰久)의 부인이 되었다.

 타루미즈 가문은 타카히사의 동생 타다마사[忠昌]를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테루히사는 3대째 가주(家主)였다. 테루히사는 1594 7월 조선에서 병으로 죽었지만, 1585년 그와의 사이에서 둘째 딸이 타다나오[忠仍]를 낳았었다.

 

 또한 셋째 딸 카메쥬[亀寿] 1572년생으로, 처음엔 요시히로의 세자(世子)인 히사야스[久保]에게 시집갔지만, 1593년 조선에서 히사야스가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 동생인 타다츠네[忠恒]와 재혼했다.

 

 이 때문에 둘째가 낳은 외손자 타다나오와 셋째 카메쥬의 남편이며 사위 겸 조카인 타다츠네. - 이 둘이 요시히사의 후계자 후보가 된 것이다.

 

제비뽑기로 정해진 후계자

 

 요시히사가 은거했던 1595년. - 타다나오는 11, 타다츠네는 20살이었다.

 요시히사는 자신의 피가 흐르는 외손자 타다나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싶었던 듯하지만 너무 어렸다.

 

 타다나오의 혈통을 이어받은 신죠우 시마즈 가문[新城 島津家]의 족보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요시히사는 사위인 타다츠네로 할지 외손자인 타다나오로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결심하지 못하였고, 쇼우하치만 궁[正八幡宮] 현 카고시마 신궁(鹿 神宮)에서 후계자를 정할 제비뽑기를 하였다.

 그 결과. 타다츠네를 후계자로 하는 제비가 뽑아져 요시하시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고 한다.[각주:7][각주:8][각주:9]

 이 제비뽑기의 이야기는 '신죠우 시마즈 가문 족보[新城島津家家譜]' 이외의 사료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필시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시히사는 타다츠네와 카메쥬 사이에서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길 기대하고 있었다. 타다츠네는 이 외손자가 가독을 이어받을 때까지의 징검다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요시히사의 기대와는 반대로 둘 사이에서는 아들이 생기질 않았다. 카메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아이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지자, 요시히사의 머리 속에서는 타다나오를……’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짙어져만 갔다.

 이리해서 가독 계승문제가 다시 문제가 되어 요시히사와 요시히로-타다츠네 부자(父子)간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가신들도 타다츠네 파()와 타다나오 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그러던 중 요시히사는 병이 나 1611 1 21.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79.

 요시히사의 사망으로 인해 가독 계승문제는 잠잠해져, 타다나오를 지지했던 가신 일부가 숙청되는 것을 끝으로 가문 분열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마즈 가의 가독은 타다츠네에서 타다츠네의 측실(側室)이 낳은 미츠히사[光久]에게로 이어졌다. 이 측실의 부친은 코니시 가문으로 유배를 갔던 삿슈우 가문의 시마즈 타다키요 - 즉 요시히사의 첫째 딸인 오히라의 아들이었다.

 종가(宗家) 적류(嫡流)에 자신의 피를 남기고 싶어했던 요시히사의 꿈은 외손의 혈통이 이어가는 것으로 현실이 되었다.

  1.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2. 타이코우 켄치(太閤 検地)라 읽음. 태합[太閤] 히데요시가 통일된 규격으로 논밭(영지안의 산과 숲은 제외)의 생산량을 계산하여 세금, 부역을 산출 혹은 할당하게 한 것. [본문으로]
  3. 삿슈우는 사츠마[薩摩]의 별칭. 시마즈 가문의 분가(分家), 당주가 대대로 사츠마노카미[薩摩守]를 자칭했었던 것이 이름의 유래. [본문으로]
  4. 사츠마의 이사쿠[伊作] 지역를 영유(領有)하고 있던 시마즈의 분가 이사쿠 가[伊作家] 출신. [본문으로]
  5.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6. 타마히메[玉姫]라는 설이 있음. [본문으로]
  7. 일본은 예전부터 중요한 일을 정하는 제비뽑기를 신의 뜻이라 여겼기에로 정했기에 아주 어처구니 없는 일은 아니었다. [본문으로]
  8. 무로마치 막부[室町 幕府]의 6대 쇼우군[将軍]인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 義教]는 3대 쇼우군 요시미츠[義満]의 셋째 아들로, 별칭이 [제비뽑기 쇼우군]라 한다. 형인 4대 쇼우군 요시모치[義持]의 아들인 5대 쇼우군 요시카즈[義量]가 아버지 보다 먼저인 19살의 나이에 죽고, 3년 뒤에 요시모치도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죽었다. 그 때문에 당시의 칸레이[管領 – 무로마치 바쿠후의 수상 격] 하타케야마 미츠이에[畠山 満家]는 3대 요시미츠의 아들들 사이에 누구를 쇼우군[将軍]으로 할지 이와시미즈하치만 궁[石清水八幡宮]에서 제비뽑기를 한 결과, 당시 중이었던 기엔[義円]을 환속시켜 쇼우군[将軍]으로 추대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9. 또한 현대에 이르러서도 각종 선거에서 동수의 표를 얻었을 경우에는 제비뽑기로 당선자를 정한다. 2007년 11월 27일만 하더라도 오키나와[沖縄]의 나고 시[名護市]의 시장은 제비뽑기로 정해졌다. [본문으로]

가토 기요마사[加藤 ]
1611년 6월 24일 병사(病死) 50세.

1562년 ~ 1611년.
시즈가타케[賤ヶ岳] 칠본창(七本槍)[각주:1]중 한 명. 히데요시[秀吉]가 큐우슈우[九州]를 제압하자 히데요시에게서 히고[肥後]의 반(半)을 하사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동군(東軍)에 속하였고, 히고 일국(一国)를 영유하며 쿠마모토 성[熊本城]을 축성하였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회견을 성사시켰지만 곧바로 병이 나서 죽었다.



갈등으로 고심한 말년

 카토우 키요마사가 일부 지역을 뺀 히고[肥後]와 붕고[豊後]의 3개 군(郡)[각주:2]을 합하여 54만석을 소유하게 된 것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인 1600년 11월.

 키요마사의 "말년"은 용맹을 바탕 삼아 혁혁한 공을 세워 온 센고쿠[戦国] 무장에서 위정자(爲政者)로 변신한 이 해의 38살부터 한창 일할 나이인 50세로 죽었을 때까지인 12년간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쿠마모토에서는 키요마사를 [세이쇼우 코우(清正公 = 키요마사 공)]을 줄여 [세이쇼코 상(セイショコ さん = 키요마사 씨)]이라 부르며 키요마사의 은덕(恩徳)을 우러르는 풍습이 남아있다. 이 12년 동안 키요마사가 정력적으로 기반을 닦고 발전을 위해 노력한 것이 후에 쿠마모토 발전의 기초가 되었고 지금도 그 노력의 은혜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의 명성(名城)인 쿠마모토 성(城)의 축성, 가도(街道)의 정비, 관개(灌漑)의 확충, 간척(干拓) 등에 의한 경작지(耕作地)의 조성, 제사(製絲) 등의 산업 진흥 등이 그 후의 히고 쿠마모토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히고 카토우 가문[加藤家]은 그 다음 대인 타다히로[忠広]의 삭탈관직[改易[각주:3]]과 함께 끊어지지만, 카토우 가문 다음으로 이봉(移封)되어 온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이 카토우 가문의 유적, 풍습을 존중한 것도 키요마사에 대한 히고 사람들의 감사와 존경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군(名君) 카토우 키요마사의 말년은 정말 충실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내면(内面)에서는 토요토미 은고(恩顧)의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토쿠가와 정권에 순종할 수 밖에 없는 인간적 갈등으로 고심했다고 여겨진다.

토요토미 안태(安泰)를 꾀하다

 키요마사에게는 세 명의 측실(側室)이 있었다고 한다.
 2남 1녀를 낳은 ‘혼가쿠인[本覚院 = 통칭 카와지리도노[川尻殿]]’, ‘죠우코우인[浄光院 = 통칭 키쿠치도노[菊池殿]]’, 후에 뒤를 잇는 셋째 아들 타다히로와 둘째 딸 아마[あま]의 1남1녀를 낳은 ‘쇼우오우인[正応院]’이다.

 키요마사가 죽은 뒤, 불과 12살며 셋째 아들 타다히로가 뒤를 이은 것은 이미 장남 토라노스케[虎之助]가 2살, 둘째인 타다마사[忠正]가 8살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정실(正室)[각주:4]법호(法號)를 ‘쇼우죠우인[清浄院]’이라 하는데, 이에야스의 외숙부 미즈노 타다시게[水野 忠重]의 딸이다. 이에야스는 모친 오다이[於大 = 덴즈우인[伝通院]]의 동생인 이 타다시게의 딸을 양녀로 삼아서 키요마사에게 시집보냈다[각주:5].

 그리고 키요마사의 장녀인 코야[古屋 – 혼가쿠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를 토쿠가와 사천왕[徳川 四天王][각주:6] 중 한 명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아들 야스카츠[康勝]와 결혼시켰고, 둘째 딸 아마를 후에 어삼가(御三家[각주:7])인 키슈우 토쿠가와 가문[紀州家]를 세운 이에야스의 10째 아들 요리노부[徳川 頼宣]와 결혼시켰다.

 토쿠가와 가문과 키요마사가 이런 인척(姻戚)관계로 이어진 것은,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한 책략의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다. 토요토미 은고 다이묘우(大名)를 회유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키요마사가 비록 서국(西国) 큐우슈우[九州]에 있더라도, 키요마사라는 인물은 적으로 돌리면 또 이 정도로 성가신 무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키요마사는 밖에서 보면 토쿠가와와 친하며, 토요토미와는 거리가 생긴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우직한 인물은 고(故) 히데요시의 두터운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 은혜를 갚는 길은 겉으론 토쿠가와에게 복종하면서, 히데요리를 당주로 하는 토요토미 가문의 안태를 꾀하는 것 말고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강요하는 니죠우 성[二条城]에서 히데요리와의 회견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등과 함께 요도도노[淀殿 – 히데요리의 생모]를 설득하여 실현시킨 것은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귀국 도중에 병이 나다

쿠마모토 시[熊本城]에 있는 키요마사 동상.

 이에야스와 히데요리의 회견은 1611년 3월 27일 무사히 끝났다.
 니죠우 성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온 키요마사가 침실에서 몸 안에 품고 있던 단도를 꺼내고 잠시 이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慶元記[각주:8]].

 회견장에서 만약의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그 단도로 히데요리를 지킬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태가 되지 않았다는 안심에서 흐른 눈물일 것이다.

 히데요리를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경호하며 돌려보내는 도중에 후시미[伏見]에 들렸다. 그곳에 있는 자기 저택 앞을 흐르는 강에 배를 띄우고 그 배에서 잔치를 연 키요마사는 그제서야 어깨의 무거운 짐을 내린 듯한 생각이 들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같은 해 5월 하순.
 귀국하던 배에서 갑자기 병이 나 병든 몸을 질질 끌듯이 하며 쿠마모토로 돌아왔다. 혀가 꼬이는 증상의 병이었는데 확실한 병명(病名)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병은 나날이 악화되어 6월 24일 숨을 거두었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 夏の陣]에서 토요토미가(家)가 멸망하기 4년 전이었다.

  1. 1583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후에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의 무대가 되는 아마쿠사[天草] 섬 등은 기독교도들이 많았기에 막부에 부탁하여 옆 지방인 붕고[豊後]의 세 개군(郡)과 교환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카이에키[改易]라 읽는다.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4. 키요마사의 정실은 야마자키 카타이에[山崎 片家]의 딸로, 키요마사가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건너가 있던 중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쇼우죠우인[清浄院]은 후실(後室). [본문으로]
  5. 그녀의 나이 18세. 키요마사와는 20살 차이가 난다. [본문으로]
  6.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토쿠가와가(家)를 지탱한 네 명의 공신을 지칭. [본문으로]
  7. 오와리[尾張], 키슈우[紀州], 미토[水戸]에 이에야스의 각각 9째, 10째, 11째 아들들이 임명된 가문으로, 후에 쇼우군 본가가 끊길 경우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가문. 특징 겸 우대로써 토쿠가와[徳川]라는 성(姓)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에도 바쿠후에서는 다방면에 걸쳐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본문으로]
  8.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条 綱成)의 증손자 호우죠우 우지나가(北条 氏長)가 쓴 책. [본문으로]

아리마 하루노부(有馬 晴信)

1612 5 6일 참형(斬刑) 46.

1567 ~ 1612.

아리마 요시사다(有馬 義貞)의 둘째 아들. 형 요시즈미(義純)에게서 가독을 상속. 시마즈(島津)()와 협력하여 히젠(肥前) 시마바라(島原)에서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를 물리쳤다. 세키가하라(ヶ原) 전투 후에도 영지(領地)를 안도(安堵[각주:1])받지만,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의 가신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 大八)의 꾀에 빠져 유배지인 카이(甲斐)에서 죽었다.

(가문(家紋)은 http://www2.harimaya.com/sengoku/html/farima_k.html 에서 무단 발췌)


소년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아리마 하루노부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이에야스의 양녀[각주:2]를 아들의 부인으로 맞이하는 등 말 그대로 순풍에 돛을 단 듯한 인생이었지만 말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빼앗겼던 선조 전래의 옛 땅을 - 돈만 주면 어떻게든 찾아 주겠다는 달콤한 말에 넘어간 것이 자신의 생명을 앗아가 46세의 나이에 죽음을 명령 받는 비운에 휩싸이게 된다.


 하루노부는 형이 병으로 죽는 바람에 불과 5살의 나이로 아리마 가 14대 당주가 되었다. 하지만 부친 요시사다(義貞)가 여전히 건재하여 부친이 정치를 돌보았다. 그러나 그랬던 부친도 하루노부가 10살 때 세상을 떠나 시마바라 반도(半島)의 히노에 성(日野江)과 하라 성([각주:3])을 다스리는 소년 성주가 되었다.


 아리마 씨()는 하루노부의 부친 요시사다의 시대 때 류우조우지 타카노부(竜造寺 隆信)에게 압박당하여 아리마 가문이 누대에 걸쳐 소유하던 히젠(肥前)의 후지츠(藤津), 키시마(杵島), 소노기(彼杵) 3()을 빼앗겼다. 그 류우조우지 가문의 위협은 하루노부의 시대가 되어서도 여전했다.
 하지만 1580년에 부친처럼 기독교에 입신한 하루노부(당시 14)예수회에게서 많은 식량, 무기, 탄약 등을 원조받아 사츠마(薩摩)의 시마즈씨()와 연합하여 승리. 타카노부를 패사(敗死)로 몰아넣었다.


 또한 하루노부는 서(西) 큐우슈우(九州)에 있으면서도 일본 전국에 퍼져있던 선교사들에게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두각을 나타내자 재빨리 히데요시에게 줄을 댓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강성하기 시작하자 세키가하라(ヶ原) 전투에서는 이에야스에게 붙는 등 천하의 동향을 정확히 판단하여 가문을 지켰다.


숙원인 옛 땅 회복


 하루노부는 기독교 다이묘우(大名)였기에 히데요시가 기독교 금지령을 선포했을 때에는 선교사들을 은닉하는 등 히데요시를 두려워하지 않고 영지(領地)의 기독교화를 진행시키는 용기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이런 하루노부는 토쿠가와의 천하가 되자 적자(嫡子) 나오즈미(直純)를 이에야스에게 보내 그의 가신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에야스의 요청으로 베트남에 배를 보내어 향수 무역을 행했다. 그러다가 도중에 들린 마카오에서 선원이 포르투갈 사람과 싸움이 나서 쌍방에서 죽는 사람까지 나왔을 뿐만 아니라 파견했던 배까지 불에 탔다.


 하루노부는 이 소식을 듣고 보복하고자 나가사키의 항구에 입항한 포르투갈 배인 [마드레 데 데우스(Madre de Deus)] 호에 불을 질러 침몰[각주:4]시켰다. 이는 이에야스의 심중을 미리 짐작하고 하루노부가 과감히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당연히 순푸(駿府)에 있던 이에야스 거기에 당시 쇼우군(
)인 히데타다(秀忠)는 이를 기뻐하여 큰 칼(太刀)을 하사하였고 이에야스는 쿠니히메(国姫 혼다 타다마사(本多 忠政[각주:5])의 딸로 이에야스의 외증손녀)를 양녀로 삼아 나오즈미와 결혼시켰다.


 이에야스의 큰 신뢰를 얻었다고 생각한 하루노부는 기뻤다. 그래서 과거에 류우조우지 타카노부에게 빼앗겨 지금은 나베시마 번(鍋島)의 영지(領地)가 되어있는 옛 땅을 바쿠후(幕府)의 힘으로 되찾는 것도 꿈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하루노부의 흑심을 파고든 것이 이에야스 넘버 원 측근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의 가신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 大八)였다.


 당시 에도()의 쇼우군()과 순푸의 오오고쇼(大御所[각주:6])는 둘로 나뉘어 정무를 행했고 그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며 권세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 그의 적자(嫡子)인 마사즈미였다. 마사즈미의 가신인 다이하치는 나가사키 부교우쇼(長崎 奉行所[각주:7])에서 일한 적이 있었기에 하루노부와도 면식이 있었다.


텐모쿠잔(天目山) () 기슭에서 이슬로 떨어지다.


 다이하치에게 뇌물을 보내면 그가 마사노부, 마사즈미 부자(父子)에게 전해줄 것이고 이는 곧 옛 땅을 찾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하며 수 차례 걸쳐 남만 무역으로 얻은 진기한 물품이나 백은(白銀) 6천냥을 다이하치에게 건냈다. 이것이 발각되어 다이하치는 순푸에서 화형(火刑)에 처해졌다.[각주:8]


 이에야스는 일국의 다이묘우(大名)라는 자가 뇌물을 보내어 땅을 되찾으려 했다는 것에 크게 화를 내며 영지(領地)를 몰수한 후에 카이(甲斐)로 유배시켰다. 이때 뇌물이 혼다 부자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라 여겨지지만 부자는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서 다이하치를 재빨리 처형하고 하루노부의 입도 막기 위하여 할복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하루노부는 카이(甲斐)의 산골에 유배되었다. 이곳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가 부인이나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노부나가(信長)()에 포위되어 죽은 타케다 씨() 종언(終焉)의 땅이기도 했다. 그런 타케다 가문과 연이 있는 텐모쿠잔 세이운 사(栖雲)에는 가슴에 금빛 찬란한 십자가를 걸고 있는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이 현존하고 있다. 이는 하루노부가 조악한 작은 집을 만들어 거기서 기도를 올릴 때 마리아 상을 대신한 것이라고 한다.


 바쿠후는 하루노부에게 할복을 명했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죽는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하여 참수를 바라여 1612 5 6일 죽음을 맞이하였다. 세례명은 [동 프로타지우].
 이에야스의 양녀를 부인으로 맞이한 아들 덕분에 영지(領地)는 아들인 나오즈미에게 주어졌고 아리마 가문은 끊기는 일 없이 존속할 수 있었다.

  1. 원래 가지고 있던 영지를 계속해서 영유할 수 있도록 허락 받음. [본문으로]
  2.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손녀. [본문으로]
  3. 이 성은 후에 시마바라 난(乱)때 농민군이 점거하던 성이 된다. [본문으로]
  4. 실은 선장이 선원들을 탈출시키고 자침시켰다. [본문으로]
  5.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적남 [본문으로]
  6. 쇼우군을 은퇴한 사람을 높이 부르는 말. [본문으로]
  7. 나가사키에 있던 바쿠후(幕府)의 지방 기관. [본문으로]
  8. 아무런 연락도 없었기에 하루노부가 마사즈미에게 물어보았다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마사즈미가 다이하치를 조사하였고, 조사하던 중에 다이하치는 혼자 죽을 수 없다며 하루노부가 나가사키 부교우를 살해하려 했다는 말을 하였다. 하루노부는 옆에서 깐죽대던 나가사키 부교우에게 홧김에 실제로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기에 유배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

1587 4 17일 병사(病死) 55


스미타다의 사인[花押]

1533 ~ 1587.

히젠[肥前] 히노에 성[日野江城]의 성주(城主) 아리마 하루즈미[有馬 晴純]의 아들. 세례명 '바르톨로메오'. 서로 싸우던 양 가문의 화해(和解)를 위해서 오오무라 스미사키[大村 純前]의 양자가 된다. 또한 영내(領內)를 방문한 선교사(宣敎師)에게 세례를 받아 일본 최초의 기독교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일본 최초의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오오무라 가문[大村家] 18대 당주인 스미타다는 1563년에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 중에서는 최초로 기독교도가 되었다.

 사실 스미타다는 히노에 성주인 아리마 하루즈미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가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伊][각주:1]의 딸이었다.

  17대 당주 스미사키에게는 타카아키[貴明]라는 서자(庶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친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타케오 성[武雄城]의 고토우 씨[後藤氏]를 잇게 하고, 여동생이 낳은 아이를 일부러 양자로 맞이하여 후계자로 하였다. 이 때문에 오오무라 가의 가신들은 분열되어 오오무라 가문 아래에 있던 열 여덟 가문이 타카아키를 따랐다.

 

 이 타카아키를 시작으로 스미타다의 정실(正室) 부인 오엔[おえん]의 친정이며 이사하야[諫早]에 본거지를 둔 사이고우 씨[西氏], 히라도[戸]의 마츠라 씨[松浦氏] 등 주변 영주(領主)에게 공격 받는 등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거기에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의 위협에서 영지(領地)를 지키기 위해서 아들들을 인질로 받치는 등 말년에 이르러도 스미타다의 기반은 굉장히 약했다.

 

 이 약소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스미타다는 외국과의 무역에서 활로를 찾으려 하였고, 1569년 포르투갈의 배를 요코세[横瀬] 포구에 입항시켰다. 또한 다음 해 31살이 된 스미타다는 이 곳에서 선교사 토레스(Cosme de Torres)에게 세례를 받고 돈 바르톨로메오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주변 호족 연합은 이런 오오무라 씨의 이권을 뺏고자 요코세 포구를 공격하고 불을 질러 없애고, 스미타다도 일시적으로 거성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미타다는 예수회 선교사, 포르투갈 상인과 끊임없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것이 영토 안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스미타다가 세례를 결의한 배경에는 포르투갈에게 기대어 부와 무기를 얻고자 하는 흑심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차츰 기독교에 대해서 순수한 신앙을 가지기 시작한다.

 

적은 인원으로 성을 지키다

 

 그러한 스미타다의 후반생을 말해주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스미타다에게는 4명의 측실(側室)이 있어 세자인 요시아키(善前)도 측실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일부일처제로 측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미타다는 이를 무시하고 측실을 계속 두었다.

 한 편 정실 오엔은 남편이 측실을 두고 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는 처음엔 기독교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스미타다가 세례를 받은 지 7년 후에 기독교의 교리에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다.

 이 때 38살이 되어있던 스미타다는 오엔과 기독교의 서약에 따른 결혼식을 하였다. 이는 오엔의 희망에 따라, 처는 오엔 한 사람이며 측실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결혼식이었던 것이다. 즉 기독교의 교리를 스미타다가 완전히 받아들인 것을 의미한다.

 

 1573.

 스미타다는 주변 호족 연합에게 거성인 산죠우 성[三城城]까지 공격당하는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에 빠진다. 이때 선교사는 어떠한 때라도 자살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스미타다는 자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자신의 목에 지니고 있던 로사리오를 선교사와 교환하였다. 여기서도 신앙을 선택한 스미타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스미타다는 과감히 성을 나와 돌격하는 등 적은 인원으로 성을 사수하여, '산죠우 칠기 농성[三城七騎籠もり]'[각주:2]이라 일컬어지는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 해, 스미타다는 6만의 오오무라 영민(領民)봉헌하여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또한 1580년 오오무라를 방문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에게 나가사키[長崎]와 모기[茂木]의 땅을 예수회에 기증했다. 나가사키는 이후 세계로 열린 항구로써 각광을 받게 된다.

 

하늘로 날려진 작은 새

 

 말년.

 스미타다는 사가[佐賀]의 류우조우지 타카노부의 압박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세자인 요시아키를 사가에 인질로 보내게 된다. 요시아키가 인질이 된 2년 후, 동생 두 명도 인질로 보낼 수 밖에 없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강압적인 타카노부가 시마즈[島津]-아리마[有馬]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패해 전사함으로 인해 스미타다가 겨우 안도의 한 숨을 내쉰 것이 51살 때이다.

 

 히데요[秀吉]가 시마즈 토벌의 군을 큐우슈우[九州]로 보낸 것은 15873월이었다. 오오무라 씨는 이 때 히데요시를 따르게 되는데 스미타다는 종군(從軍)하지 않고 아들인 요시아키가 대신해서 출진했다. 왜냐면 이때 스미타다는 후두암폐결핵을 앓고 있어, 몸이 말라 뼈와 가죽만 남아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신력은 신을 받아 들여 아름답게 빛났다고 기독교 사료는 말한다.

 

 스미타다는 의사가 하는 미신(迷信)에 바탕을 둔 치료를 원치 않았고, 신부에게 천당에 대해서 계속해서 들려주길 원했으며 그것을 들으면서 대단히 만족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카구치[坂口]의 은거 저택에서 조용히 기도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던 스미타다는 영내(領內)구류(拘留)되어 있던 포로 200명을 석방했다. 마지막으로 새장에 있던 새를 하늘로 날려 보낸 4 17일. 반년에 걸친 투병 생활 끝에 55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히데요시가 기독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기 2개월 전의 일이었다.

  1. 나중에 양아비가 되는 스미사키의 부친. [본문으로]
  2. 1500명을 상대로 7명의 무장과 70명의 여자들로 성을 지켰다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