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康政)

1606 5 14 병사 59

1548 ~ 1606.
어려서부터
토쿠가와 이에야스
[德川 家康]를 섬겼으며, '토쿠가와 사천왕[徳川 四天王][각주:1]'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아네가와[][각주:2], 나가시노[長條][각주:3]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고, 이에야스가 칸토우(関東)로 이봉(移封)되자, 코우즈케[上野] 타테바야시[館林] 10만석에 봉해진다. 히데타다[秀忠][각주:4]의 보좌역을 맡으며 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무공파(武功派) 의 대표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가문은 야스마사의 조부 키요나가[淸長]가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부친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 広忠]를 섬긴 이래의 미카와[三河] 오카자키 후다이[岡﨑 譜代[각주:5]]이다.


 1560년의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각주:6] 직후에 마츠다이라 가 씨사(氏寺[각주:7])인 다이쥬[大樹]에서 이에야스를 배알하였다. 이 때 야스마사 13. 이에야스보다 6살 연하였다. 이후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많은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고 혼노우[本能]의 변[각주:8] 직후 이에야스 최대의 위기 '이가 도피행[伊賀越え]' 때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야스마사의 [야스()]는 이에야스에게 일자배령(一子拜領[각주:9])을 받은 것으로 이러한 공적에 대한 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의 전투에서는 히데요시의 행동을 비난하는 격문을 돌려 히데요시를 크게 화나게 했다. 이 즈음부터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와 더불어 이에야스에게 [삼걸(三傑)이 있다]고 칭송 받게 되었다.


 1590년 칸토우 입국에 따라 코우즈케 타테바야시 10만석이 주어져, 역시 카즈사[] 오오타키[大多喜]에 10만석을 받은 타타카츠와 함께 이이 나오마사에 버금가는 후다이 직신(直臣) 2위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 때 나오마사 43세였다. 이후 16년간 성 밑 마을(城下町)의 정비나 민정에 조력하여 타테바야시 번()의 경영에 힘 썼다.


미토[水戶] 전봉[転封] 사퇴


 1600년.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 53세의 야스마사는 토쿠가와 본대(本隊)를 이끈 히데타다 군의 선봉장으로 토우산도우[東山道]를 거슬러 진군하였다. 그러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노부시게[信繁[각주:10]] 부자(父子)시나노[信濃] 우에다[上田城] 공략에 시간을 너무 지체하여, 결국 결전에 참가하지 못하는 추태를 범했다. 젊은 지휘관 히데타다가 공을 서두른 것이 첫째 원인이지만, 선봉장이면서 전투의 스페셜리스트였던 야스마사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뒤 논공행상에서 야스마사가 빠진 이유도 이런 점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단, 논공행상에 대해서 '사카키바라 계보[榊原 系譜]'에는 다음과 같은 이설(異說)이 쓰여져 있다.

 1601년에 이에야스에게서 히타치[常陸] 미토[水戶] 25만석으로의 전봉이 타진되었지만, 야스마사는 거부하였다. 그 이유로 미토는 오우슈우(奧州)를 제압하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여차할 때에 성을 비우고 출진하기가 쉽지가 않다. 또한 예전 칸파쿠[関白]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가 히데요시에게 멸망 당했을 때 이에야스의 명령을 받고 단 하루만에 이에야스의 본진을 따라 잡을 정도로 신속히 행동을 취할 수 있었던 것도 타테바야시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토라면 3일은 걸릴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선봉을 맡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의 진위는 확실하지 않지만 무공만으로 토쿠가와 가문을 크게 만들어 왔다는 자부심을 강하게 가지고 있던 야스마사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체념과 반골


 한편 세키가하라의 전투를 계기로 무력으로 토쿠가와 가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사라졌다. 그리고 막부 성립 후는 타다카츠나 야스마사 등 무공파를 대신하여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 등 문치파(文治派)가 이에야스에게 중용 되는 것이 시대의 추세였다.

 사실 야스마사는 세키가하라의 전투 이후 이에야스 측근의 지위에서 물러나 타테바야시의 경영에 힘을 쏟아 막정(幕政)의 무대에 나서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제 야스마사 등 무공파가 나설 곳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들을 대신하여 등장한 혼다 마사노부 등의 문치파 세력과 마찰을 일으켜 토쿠가와 가문의 내분이 천하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막정에 대해 참견하지 않도록 힘 쓴 결과라고 한다. 야스마사가 단순한 [저돌적인 멧돼지 무사]가 아닌 세상의 변화를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이,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평가이다.


  죽을 때가 되어서 장염이 악화되었을 때 쇼우군[将軍] 히데타다와 오오고쇼[大御所] 이에야스에게서 병문안의 사자가 파견되었지만 대응에는 명확한 차이를 두었다고 한다.

 히데타다의 사자에게는 누워 있던 이불에서 나와 예복을 차려 입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한편 이에야스의 사자에게는 이불에 누운 채로 '장이 썩어서 얼마 안가서 죽을 것'이라고 전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히데타다에게는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쓰디쓴 경험을 맛보게 했다는 자책의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신하로서 정중한 태도를 끝까지 잃지 않았다. 토쿠가와 가문에서 '인품 제일'이라 평가 받던 야스마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 이에야스에게는 시대의 흐름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많은 피를 흘려 온 무공파를 대신해서 문치파를 중용하는 이에야스에 대한 반발심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나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이 썩었다'는 것은 예전 야스마사가 마사노부를 욕할 때 사용하던 말이었다.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의 사자가 온 지 얼마 안 된 1606년 5월 14일.

 야스마사는 타테바야시 성에서 59세로 죽었다.

  1.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등의 토쿠가와가(家)를 지탱한 네 명의 공신을 지칭. [본문으로]
  2. 1570년에 오다-토쿠가와[織田・徳川] 대 아자이-아사쿠라[浅井・朝倉]간에 벌어진 전투. [본문으로]
  3. 1575년 오다-토쿠가와[織田・徳川] 대 타케다[武田] 간에 벌어진 전투. 보통 타케다의 기마 돌격을 오다 3단 철포로 물리쳤다는 떡밥으로 유명한 전투. [본문으로]
  4. 이에야스의 아들. 후에 에도 막부[江戸幕府} 2대 쇼우군[将軍] [본문으로]
  5. 마츠다이라 가문(=토쿠가와 가문)이 오카자키에 자리를 잡았을 때 마츠다이라 가문의 부하가 되어 대대로 섬긴 가문. [본문으로]
  6. 1560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물리친 전투. [본문으로]
  7. 문의 위패를 모신 절. [본문으로]
  8. 1582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쿄우토[京都] 혼노우 사[本能寺]에 머물다 자신의 부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반란에 살해당한 사건. [본문으로]
  9.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자신의 이름 중 한 글자를 내리는 것. [본문으로]
  10. 보통 사나다 유키무라[真田 幸村]로 유명하다. [본문으로]

혼다 다다카쓰[本多 忠勝]

1610 10 18 병사 63.

1548 ~ 1610.

통칭 헤이하치로[平八郞].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겼다. [삼걸(三傑)[각주:1]]의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공이 많으며, 이가 도피행[伊賀越え[각주:2]]에도 따랐다.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각주:3]], 나가시노[長篠[각주:4]], 세키가하라[関ヶ原] 50여 번의 전투를 치르면서 한번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야스에게 과분한 무장


 혼다 가문[本多]은 사카이[酒井]나 오오쿠보[大久保]처럼 마츠다이라 씨[松平氏[각주:5]] 창업 때부터 함께 한 후다이(譜代)의 명문가이다. 그런 혼다 가문을 대표하는 것이 [천하 무쌍의 용장]이라는 헤이하치로 타다카츠이다.


 1548년에 태어난 타다카츠는 이에야스보다 6살 연하이다. 13살에 이에야스의 옆에서 처음으로 전쟁을 경험. 이후 50여 번의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미카타가하라의 전투, 나가시노의 전투 그리고 혼노우 사의 변에서는 적합한 정세 판단으로 이가를 통과하여 미카와[三河]로 귀국을 진언했던 것[각주:6],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의 전투[각주:7]에서 행한 대담한 용병술[각주:8]이나 세키가하라[関ヶ原] 등에서는 보여준 활약은 특필할 만한 것이다.

 더욱이 쌍벽을 이룰 정도로 토쿠가와 가문을 대표하는 맹장 나오마사[井伊 直政]의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 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각주:9]. 3.9미터에 이르는 [톤보기리(蜻蛉切[각주:10]]라는 명창을 가볍게 휘두르며 항상 앞장서 달려나가 용명을 날렸지만 죽을 때까지도 공적을 자랑하는 일은 없었다.


 이러한 타다카츠의 존재는 당시의 천하인에게도 알려져 오다 노부나가 [화실겸비의 무사(花實兼備의 武士)], 토요토미노 히데요시 [일본제일 고금독보의 용사(日本第一 古今獨步之勇士)]라 절찬했다. 또한 미카타가하라 후 '이에야스에게 과분한 것이 둘 있으니 중국산 투구와 혼다 헤이하치[각주:11]'라며 타케다 무사들은 타다카츠를 칭송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의 전투까지는 힘으로 영토를 얻는 시대였기에 타다카츠는 그야말로 이에야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


 이이 나오마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와 함께 토쿠가와 가문 [삼걸(三傑)]로 칭해지던 타다카츠는 1590년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칸토우[関東]로 이봉되었을 때, 카즈사[上総] 오오타키[大多喜] 10만석에 봉해 이이 나오마사 다음[각주:12]으로, 동갑인 야스마사와 더불어 후다이에서 두 번째로 큰영지를 받았다. 무공파(武功派) 신하로써의 역할을 높게 평가받은 결과이다.


 1600년의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는 나오마사와 함께 동군 선봉군의 군감(軍監[각주:13])으로 참가하여 일시 열세가 된 동군을 질타 격려하여 진용을 바로 세워 승리로 이끄는 활약을 했다. 이 때 당시 53세였다.


 다음 해인 1601년 정월.

 타다카츠는 이세[伊勢] 쿠와나[桑名] 10만석으로 전봉(転封)하게 되었다. 토요토미 은고(恩顧[각주:14])의 유력 다이묘우가 많았던 서일본에서 에도[江戸]가 있는 동일본으로 이르는 길을 방비하는 토우카이도우(東海道) 입구의 요충지가 맡겨졌다는 것은, 토우산도우[東山道] 입구의 요충 오우미 사와야마[佐和山城]에 배치된 나오마사와 같은 역할이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의 이에야스가 무공파 유력 후다이[譜代] 다이묘우에게 기대한 것은 바쿠후 정치의 중추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서일본을 방비함과 동시에 막부(幕府)측의 선봉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에야스는 이때 타다카츠의 둘째 아들 타다토모[忠朝]에게 카즈사[上総] 오오타키[大多喜] 5만석을 주었다. 타다카츠의 가문은 5만석 가증된 것을 의미한다. 그 점에 대해당초 타다카츠에게 5만석 가증의 이야기가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를 통해서 전해졌다고 하지만 사퇴했기 때문에 행해진 처리라는 이야기가 타다카츠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는 한편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전공으로 한 지역[]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가신들에게 줄 영지 배분안까지 만들었지만 결국 아무런 연락도 없어 이에야스의 사자가 왔을 때에 배분안을 불 속에 던져버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필시 후다이 No.1 중신이며 지금까지의 공적을 있기에 타다카츠는 적어도 나오마사의 사와야마 18만석 이상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예측하고 있었겠지만 김치국만 마시게 된 꼴이 혼다 가문에 전해져 내려온 결과 앞과 같은 이설을 낳았을 것이다. 타다카츠라 하여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가문의 번영을 비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무공파의 면목 잃지 않다.


 세키가하라의 전투 이후. 토쿠가와 가의 중추 세력이 무공파에서 혼다 마사노부 등의 문치파(文治派)로 옮겨지고 있던 상황을 민감히 깨달은 타다카츠는 구와나 성으로 옮기자 동시에 막정(幕政)의 중추에서 물러나 남은 10년을 번정(藩政) 확립에 주력한다.


 그 즈음의 이야기로써 타다토모와 함께 성 주변에 물을 채워 둘러 친 해자에 배를 띄어 타던 중 손에 든 노로 풀 밭을 헤치자 낫으로 벤 듯이 잘렸다는 이야기나 앞서 말한 [톤보키리]의 창을 약 90센티 정도 잘라 사용했다는 이야기(그래도 3미터 정도는 되었다)도 전해지고 있다.


 또한 가신 중 하나가 하리마[播磨] 히메지[嬉路] 52만석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의 가신과 싸움이 일어났을 때, 끊질기게 관계자 처형을 바라는 테루마사의 사자를 향해서 "이 이상 귀찮게 하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늙어서도 여전한 맹장의 면목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1610 10 18일.

 쿠와나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63. 화장을 한 후에 죠우토 사[浄土]에 묻혔다.

  1.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를 지칭. [본문으로]
  2.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자, 이에야스가 사카이[堺]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이가[伊賀]라는 지방에서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고생했다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
  3.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의 전투. 패주하던 이에야스가 바지에 똥을 지린 것으로 유명. [본문으로]
  4.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의 전투. 보통 3단철포 떡밥으로 유명하다. [본문으로]
  5. 토쿠가와 씨[徳川氏]의 원래 성. [본문으로]
  6. 노부나가의 죽음을 들은 이에야스는 자기도 죽겠다며 배를 가르려 했지만 타다카츠가 말렸다고 한다. [본문으로]
  7. 히데요시와 싸운 전쟁.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와 동맹을 맺고 오다 가문을 제 것으로 만들어 가던 히데요시와 싸웠다. [본문으로]
  8. 이에야스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 히데요시의 직할군 3만8000을 500의 병사로 가로 막았다고 한다. 그 사이에 강이 있어 타다카츠는 그 강에서 말을 목욕시켰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병사들이 철포로 쏘아 죽이려 하자 히데요시는 "저런 용사는 살려 두어야 한단다. 언젠가 내 편이 되었을 때 쓸모가 많을테니"라면서 쏘지 못하게 했다 한다. [본문으로]
  9. 이이 나오마사가 중장갑인데 비해 타다카츠는 움직임을 중시한 경장갑을 선호했다고 한다(by wiki). [본문으로]
  10. 너무도 날카로워 세워놓은 창에 잠자리[蜻蛉 – 톤보]가 앉았다 미끄러져 반으로 잘렸다는 이야기에서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함. [본문으로]
  11. 家康に過ぎたるものは二つあり、唐のかしらに本多平八. 중국산 투구[唐のかしら]란 티벳 지방의 소인 야크(Yak)의 털로 장식한 투구를 말하는 것으로 당시 미카와 무사 10의 7~8은 이 투쿠로 썼다고 한다. [본문으로]
  12. 나오마사는 코우즈케[上野] 미노와[箕輪] 12만석. [본문으로]
  13. 전투 독려, 참모, 감시, 논공행상을 위한 공적 조사 등을 행함. [본문으로]
  14.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입었거나, 히데요시가 직접 키운 무장을 이름. [본문으로]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

1614 12 28 병사 77

1538~1614.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아들.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죽자 가독을 상속. 스루가(駿河), 미카와(三河), 토오토우미(遠江)를 영유했지만 타케다(武田)()에게 스루가를, 토쿠가와(德川)씨에게는 미카와와 토오토우미를 빼앗겼다. 처가인 호우죠우(北条)()를 의지하였으나 후에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에게도 쫓겨나 토오토우미의 하마마츠(浜松)로 거처를 옮겼다. 후에 쿄우토(京都)에서 출가하여 소우긴(宗誾)이란 호를 칭했다. <그림은 태합입지전 V>





유랑의 귀공자


 1560 5월.

 부친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죽었을 당시 우지자네는 22세였다.

 다음 달인 6월에 죽은 부친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기는 했지만 영내의 동요를 억제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느라 부친의 원수인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싸움을 걸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 소극적인 자세가 일문(一門[각주:1]), 후다이(譜代[각주:2])들의 이탈을 초래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손 잡은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 스루가에 침공해 온 것은 1568년으로, 많은 가신들에게 버림받은 우지자네는 순푸(駿府)의 이마가와 관()을 지키지 못하고, 아사히나 야스토모(朝比奈 泰朝)카케카와(掛川)으로 피신하였다. 한 해가 다해가는 굉장히 추운 겨울에 우지자네의 부인은 가마 같은 탈 것도 없이 걸어서 도망쳤다. 우지자네 부인의 부친 즉 장인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 이 치욕을 갚지 않고선 견딜 수 없다며 편지를 보내왔다.


 다음해 정월.
 
이번엔 서쪽에서 토오토우미에 침공해 온 이에야스가 카케카와성을 포위하였다. 몇 번의 총공격에도 불구하고 농성군측은 잘 버텼지만 5월이 되자 결국 성을 이에야스에게 넘기고 우지자네는 호우죠우 가문이 파견한 병사들에게 호위받으며 처가댁인 오다와라(小田原)로 갔다.
 
우지자네는 [駿河国守]의 역직[각주:3]을 호우죠우 우지마사의 아들에게 물려주니, 이것으로 노리쿠니(範国) 이래 250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온 스루가 슈고쇼쿠(駿河 守護職)에, 아시카가 가문과 친족관계인 명문 이마가와 씨()는 실직적으로 멸망한다. 그 우지자네는 이즈(伊豆) 토쿠라(戸倉)성이나 오다와라 근처의 하야카와(早川)로 거처가 옮겨졌다고 한다.

 
오다와라 호우죠우씨에게 보호 받던 우지자네의 평온도 그리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다다음 해인 1571년. 우지야스가 죽자 우지마사(氏政 - 우지자네 처의 오빠 즉 매형)는 그 때까지의 정책을 바꾸어 타케다 신겐과 손잡는다. 우지자네는 사가미(相模[각주:4])에서 쫓겨나,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에게 의지하기 위하여 떠난다. 이 때 마지막 가신인 미우라 모토마사(三浦 元政)등에게 여태까지 잘 보필해 주었다는 뜻을 쓴 문서를 써주어서는 떠나 보냈다[각주:5].

 1575년에는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오다 노부나가를 알현하고 케마리(蹴鞠[각주:6])를 보여주었던 것은 유명하다. 이 당시 우지자네는 스루가 국주(駿河 国主)의 자리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여도 영지를 얻는 것에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쿄우토와 하마마츠(浜松)사이를 왕래했을 것이다. 이에야스의 휘하로 타케다 공격에 참가하였고 후방 지원이나 미카와 스와바라(諏訪原)성 수비에 종사하였지만, 타케다씨() 멸망 후 스루가는 이에야스에게 주어진다.


말년의 안식


 혼노우(本能)()의 변이 일어난 후, 히데요시의 시대가 되자 격세지감을 느꼈는지 출가하여 소우긴(宗誾)이란 호를 칭했다. 무가동량(武家棟梁)이라는 명문가의 이름에서 해방되어 50세가 넘어서 이제서야 자신의 체질에 맞은 삶을 손에 넣은 것이다. 1590년 이에야스의 칸토우(関東) 이봉(移封)에 따르지 않고 마지막 거처를 쿄우토로 정했다. 이에야스에게서 오우미(近江) 500석의 영지를 받았다고도 한다.


 우지자네는 쿄우토 시죠우(四条)에 거처를 정하였고, 이마가와씨()가 잘 나갈 때 순푸에 내려와 있던 레이제이 타케카즈(冷泉 為和)의 손자 타케미츠(為満), 야마시나 토키츠기(山科 言継)의 아들 토키츠네(言経)등과 교류를 즐기며 귀족(公家)들이 개최하는 가회(歌會)에 빈번히 참석했다.
 
야마시나 토키츠네에게서 [슈우가이쇼우(拾芥抄)]를 빌려 고전 문학을 배워서는 고전 주석서를 옮겨 적는 것에 몰두하였다. 희귀한 책이나 차 도구 등의 매각을 알선하거나 특기인 환약이나 붙이는 약 등을 만드는 데 힘썼다. 몰락한 쿠게의 전형적인 생활이었다.

 1612
74세의 우지자네에게 마지막으로 전환의 시기가 찾아온다.
 
익숙한 쿄우토의 생활을 정리하고 에도(江戶)로 향했다. 우지자네의 첫째 아들인 노리모치(範以)는 이미 죽었지만, 손자인 나오후사(直房)가 전년인 1611년에 2대 쇼우군(将軍)인 히데타다(秀忠)를 섬겼기 때문에 그를 돌보기 위하여 에도로 갔을 것이다. 또는 차남 타카히사(高久)도 이미 1598년에 히데타다를 섬겨 코우즈케(上野)에 천 석을 받으며 시나가와(品川)()를 칭하며 에도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늙은 양친을 에도로 맞이했다고도 할 수 있다. 우지자네는 에도로 가는 도중 순푸에서 고희를 맞이한 이에야스를 방문하여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해, 오랫동안 역경을 함께 보내 왔던 부인을 잃는다. 이 때문에 기운이 쇠했는지 뒤를 쫓는 듯 다음 해인 1614년 에도에서 파란만장했던 인생의 막을 내렸다.

 
손자인 나오후사는 그 후 코우케(高家[각주:7])의 반열에 오르고, 영지도 더해졌으며 조정 관위도 종사위하(從四位下)로 올라갔다. 우지자네 부인의 5주기에 해당하는 1618년에 우지자네 부부가 대좌하는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짜리 몽탕한 체형, 커다란 코는 요시모토와 닮았다. 한 켠에는 책상이 그려져 겐지(源氏) 동량(梁)의 명문가이면서도 풍류의 세계에 살았다는 글이 덧붙여져 있다.

 
역사가 어떤 평가를 내리건 말년의 우지자네는 자신이 살고 싶은 생을 살았으며 일족과 함께 행복한 생활을 보냈을 것이다.
  1. 친족들을 이름. [본문으로]
  2. 대대로 섬겨온 부하 가문.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의 지방관직. [본문으로]
  4. 오다와라가 있던 지방의 이름. [본문으로]
  5. 이런 문서는 다른 가문에 취직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상급 귀족(公卿)들이 발로 하던 공놀이. 현재 축구의 리프팅과 비슷하다. [본문으로]
  7. 막부의 제례를 감독하던 직책. 또한 쿄우토 조정에서 오는 사자(使者)의 접대나, 쇼우군을 대신하여 쿄우토의 조정으로의 사자 등을 맡았다. [본문으로]

구키 요시타카(九鬼 嘉隆)

1600 10 12 자살 59

1542~1600.

토바[鳥羽]성주. 시마 수군[志摩水軍] 두령의 아들로 태어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나가시마 잇키[長島一揆][각주:1] 토벌,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공략,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조선(朝鮮) 출병 등에서 전공을 세우지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에서 서군(西軍) 측에 서 패배, 할복하였다.










쿠키 수군의 총수


 쿠키 요시타카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해적대장군(海賊大將軍)'이며 제독(提督)이다.

 기묘하게도 같은 해에 태어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천하를 쥐었을 때, 반대로 요시타카는 패배하여 자살함으로써 명암이 갈렸다.


 요시타카는 쿠마노 수군[熊野水軍]의 일파로 이세[伊勢] 코쿠시[国司] 키타바타케 가문[北畠家]에 굴복했던 시마 수군의 두령으로, 천하에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1578년에 오다 노부나가의 오오사카[大坂] 혼간사[本願寺] 공격에 참가하여 모우리 수군[毛利水軍]과의 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두면서였다.


 10 1일.

 철갑 전함 7척으로 구성된 '쿠키 함대'오오사카 만()의 키즈 강[木津川]의 입구로 출동시켜 혼간지에게 무기와 탄약을 지원하던 아키[安芸] 모우리 가문[毛利家] 휘하의 무라카미[村上], 코우노[河野]세토 내해[瀬戸内海] 수군 6백 수십 척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일본 해전사에서도 유명한 대해전에서 노부나가 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쿠키 함대 중 6척은 요시타카가 이세의 오오미나토[大溱]에서 건조한 것이고, 나머지 1척은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 一益]가 이세의 시로코[白子]에서 건조하였다. 최신예의 철갑선으로 사카이[堺]로 회항한 그 모습을 본 예수회 선교사 오르간티노는,

일본에서는 가장 크며 그리고 또한 화려하다. 우리 포르투갈 왕국의 배와 닮았다. 이걸로 오오사카[각주:2]는 멸망할 것이다. 배에는 대포가 3문 탑재되어 있다

 고 감탄하며 기록하고 있다.

 노부나가는 요시타카의 이런 전공에 큰 상을 내려 시마와 셋츠[摂津]의 후쿠시마[福島], 노다[野田] 등을 합하여 7천석을 더해 주었고, 나중에는 3 5천석을 영유하기에 이르렀다.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은 뒤로는 히데요시[秀吉] 섬기며 큐우슈우[九州], 오다와라[小田原] 정벌에서 활약. 임진왜란 때에는 토바에 토바 성[鳥羽城을 쌓고, 거대한 함선인 '니혼마루[日本丸]'를 건조하였다. 토바성은 정문을 바다 쪽으로 향하게 하고 당당한 석축[石垣]을 가진 '해적대장군의 본진'에 어울리는 성곽이었다. '니혼마루'는 전장 33.67미터, 11.77미터로 백 개의 노를 가지고 있었으며 1.9킬로그램의 탄환을 쓰는 대포 3문과 수부(水夫) 백 명을 태우는 일본 최초의 거대 전함이었다.


부자가 갈라선 세키가하라 합전


 1597. 56.

 조선에서 귀국하여 아들인 당시 24살의 모리타카[守隆]에게 가독과 토바성을 물려주고 이세 지방에 은거료[각주:3] 5천석을 받았다.


 3년 후인 1600년.

 천하의 향방을 결정하는 세키가하라에서 모리타카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会津征伐]에 출진하였고 요시타카는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지만,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이세, 이가[伊賀], 키이[紀伊]를 주겠다'는 제안을 하자 서군에 참가한다.

 센고쿠[戦国] 무사의 피가 요동을 친 것일수도 있고, 시나노[信濃]의 사나다 가문[真田家]처럼 가문을 지키기 위한 '부자 분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의 전쟁터에는 출진하지는 않았고, 대신 옆 지방의 이나바 쿠란도[稲場 蔵人]가 지키는 이와데 성[岩出城]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요시타카가 이와데 성을 공격하던 중 세키가하라에서는 서군이 패했고, 9 11 미츠나리가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든 것을 단념했다.[각주:4]


 '니혼마루'에 타고서 시마의 나기리[波切] 항구를 출항하여 선조의 연이 닿아 있는 시마의 섬들을 한바퀴 돌고선, 토바의 앞바다에 있는 토우시지마[答志島] 섬에 상륙했다. 쵸우온 사[潮音寺]에 머물며, 잠시 푸른 바다와 녹색으로 가득 찬 섬들을 지켜본 후 10 12 토우센[洞仙] 암자로 들어가 할복 자살하였다.

 "나의 목을 이에야스님께 보인 후에는 이 섬 어딘가에 토바성이 보이는 곳에 묻어 다오. 쿠키의 가문을.. 모리타카를 부탁한다"

 라는 말을 남기고, 비젠[備前]의 명도(名刀) '신코쿠[信国]'를 왼쪽 배에 찔러 오른쪽으로 그은 후, 다시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근습(近習)인 아오야마 부젠[靑山 豊前]이 카이샤쿠[介錯][각주:5]하였다. 향년 59.

 '해적대장군'에 어울리는 당당한 최후였다. 목 무덤과 몸통 무덤이 지금도 토우시지마에 있다.


모리타카의 오열

 

 그러나 요시타카가 배를 가를 즈음, 아들 모리타카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전공을 바꿔서라도' 부친을 살려달라고 탄원.

 이에야스도 '쿠키님은 세키가하라의 본 전장에는 나오지 않으셨지'라며 허락하여 사면 소식을 전하는 배가 섬에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부친의 죽음을 안 모리타카는 오열했다.

 아오야마 등 근습들을 '아버지께 죽음을 서두르게 한 불충한 놈들'이라 화를 내며 톱 베기[각주:6], 참수[각주:7]에 처했다.

요시타카는 모리타카를 각별히 사랑했으며 모리타카도 부친을 경애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에야스는 이를 불쌍하게 여겨 모리타카에게 2만석을 가증해 주어, 토바성 5만석의 성주로 임명했다.


 그러나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는 쿠키 가문탄바[丹波], 셋츠[摂津]로 영지를 옮겼으며 더구나 산으로 둘러쌓인 지역 등으로 영지를 바꾸었다. 해적대장군의 영광을 두려워한 정략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쿠키 가은 지금의 쿄우토[京都] 아야베 시[綾部市]와 효우고[兵庫] 미타 시[三田市]에 '산 속의 수군 도시'를 만들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 번영시켰다.

  1. 나가시마 주변의 종교반란군. [본문으로]
  2. 혼간 사[本願寺]를 지칭. [본문으로]
  3. 가독을 물려 준 전 당주에서 주는 땅. [본문으로]
  4. 여담으로 이와데 성을 지키던 이나바 쿠란도 미치토오[稲葉 蔵人 道通]는 이때 쿠키를 저지한 공적으로 2만석을 가증 총 4만5300석이 되어 이세[伊勢] 타마루[田丸]로 이봉(移封)되었다. [본문으로]
  5. 할복할 때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목을 쳐주는 것. 이 행위를 하는 것은 신뢰의 상징이었기에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다. [본문으로]
  6. 죄인을 머리만 남기고 땅 속에 파 묻은 다음, 죄상을 적은 팻말과 함께 톱을 놔두어 지나가던 행인이 죄가 있다고 생각하면 목을 톱으로 베게 하는 형벌 [본문으로]
  7. 당시 무사는 할복을 무사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했지만, 할복을 못하게 하고 목이 베이는 것을 평민의 형벌이라 생각하여 불명예스럽게 생각했다. [본문으로]

기타바타케 도모노리(北畠 具敎)

1576 11 25 암살 49

1528~1576.

이세(伊勢) 고쿠시(国司[각주:1]) 키타바타케 씨() 8대 당주. 남부 이세 5()이가(伊賀), 야마토(大和)의 일부를 지배. 검호(劍豪)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에게서 [히토츠노 타치(一の太刀)]를 전수 받았으며 와카(和歌)에도 뛰어났.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둘째 아들 노부카츠(信雄)를 양자로 받아들여 은거하지만 옛 신하에게 암살당했다.

<그림은 http://homepage1.nifty.com/kitabatake/kitabatake21.html에서 불펌...>






노부나가에게 항복하다.


 무라카미(村上) 겐지(源氏)의 명류이며, [神皇正統記[각주:2]]를 쓴 것으로 유명한 키타바타케 치카후사(親房)와 그의 셋째 아들인 초대 이세 고쿠시 키타바타케 아키요시(北畠 顕能)가 남북조시대에 이세, 이가, 야마토 3국의 요충지인 타게고쇼(多芸御所)와 키리야마(霧山)에 성을 세운 다음부터 키타바타케 가(家)는 8대 토모노리까지 남부 이세 5()을 다스렸다.


 토모노리는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와도 친밀했으며 , 검법, 와카에도 뛰어난 문무양도의 달인으로 쿠교우(公卿)인 야마시나 토키츠구(山科言継)나 야마토의 야규우 세키슈우사이(柳生 石舟斎)등 문인(文人), 검호가 토모노리의 저택에 자주 방문하여 함께 풍류를 즐겼다. 특히 잠시 동안 머물던 츠카하라 보쿠덴에게서는 신토우(新当)류의 비전인 [히토츠노타치(一の太刀)]를 전수받아, 동문인 무로마치 바쿠후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를 지칭하는 [검호 장군(劍豪将軍)]을 빗대 [검호 국사(劍豪 国司)]라 칭송되었다. 후에 이 두 명 다 암살대와 칼을 맞댄 끝에 참사를 당한 것은 아이러니컬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풍류를 좋아하여 와카나 렌가(連歌) 모임을 개최했으며, 검의 타류시합(他流試合)도 하였다. 영내(領內) 20여개의 성이나 요새를 쌓아 정병(精兵)을 키우고 있었지만 천하를 향한 야망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1568 41살 때.

 천하 평정을 목표로 하는 오다 노부나가가 3만의 대군을 이끌고 갑자기 이세로 침공하여 유서있는 칸베(神戶)(), 코츠쿠리(木造)()를 자기 진영에 끌어들이고 키타바타케 가()를 공략할 준비를 시작했다.

 토모노리는 격노하여 산 속에 있는 타게고쇼(多芸御所)를 나와 이세 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오가와치(大河內)성에 본진을 두고 철저 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노부나가군 3만에 대하여 키타바타케군은 5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오다의 병사들에 비하여 2백여 년간의 평화로 인해 전의도 낮았다. 그럼에도 50여 일간 버텼지만 그러는 동안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으며 화살과 식량도 떨어졌고 노부나가의 조략으로 배신자가 나와 물길도 끊어졌다. 노부나가 군에도 피해가 생겼기에 노부나가는 타키가와 가즈마스(川 一益)와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의 진언에 따라 싸움을 멈추기로 하였다.


 노부나가쪽의 내건 조건은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인 챠센마루(茶筅丸 = 후의 오다 노부카츠) 토모노리의 딸인 유키히메(雪姬)의 남편으로 삼는 것과 동시에 양자가 되어 키타바타케가()를 상속하게 한다. 그 외의 처벌은 없다는 관대한 제안이었다.

 이걸로 개성(開城). 얼마 지나지 않아 양 가문의 혼례가 치러졌고 키타바타케가()의 가독을 이어받아 당주가 된 노부카츠는 마츠가시마(松ヶ島)성에 입성했다.

 [이젠 전쟁으로 이세의 사무라이나 백성들을 고생시키지 않아도 된다. 키타바타케의 가명만 남으면 그걸로 만족한다]

 라는 토모노리는 오다 가문을 증오하는 키타바타케의 가신들을 다독거리며 자신도 오가와치성에서 남서로 약 20킬로 떨어진 미세()의 저택에 은거했다. 그 곳은 해자로 둘러 쌓인 1만여 평의 작은 성이었지만 몇 몇의 종자들과 함께 자연을 노래하며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토모노리 암살 지령


 그렇지만 노부나가는 노부카츠에게 토모노리의 암살을 명하였고 노부카츠는 이미 자신의 충실한 부하가 되어있던 키타바타케 일족인 타키가와 사부로베에 카츠토시(川 三郞兵衛 雄利 토모노리의 동생인 코츠쿠리 토모마사(木造 具政)의 서자로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의 양자)에게 실행을 명했다.


 이리하여 1576년 11월 25 이른 아침.

 타키가와와 옛 신하였던 카루 사쿄우(加留 左京), 나가노 사쿄우노신(長野 左京進)등 몇 명이 미세의 저택을 방문하여 면회를 청했다.

 측근인 사사키 시로사에몬( 四郞左衛門)이 타키가와 등이 왔다는 소식을 토모노리에게 전하자 토모노리는 굉장히 반가워하며 그 들을 자신의 방으로 직접 오게 한 후 세 살인 토쿠마츠기미(德松君)를 무릎에 앉힌 채로,

 [잘 오셨네. 편히 쉬다 가게나. 내 딸이나 사위께선 건강하시겠지?]

 라고 미소를 지으며 차를 권했다.


 이때 토모노리가 윗몸을 내밀어 차 그릇을 권하는 순간. 카루가 소매에 감추어 두었던 테야리(手槍[각주:3])를 꺼내어 토모노리의 가슴팍을 향해서 찔렀다. 깜짝 놀란 토모노리는 검호 국사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뒤 편에 있던 칼걸이에서 칼을 뽑아 맞섰지만, 타키가와 등의 암살대는 계획대로 토모노리를 제압하여 세 살짜리 토쿠마츠기미까지 죽였다.

 한 사람이 목을 들고서 도망쳤지만 토모노리의 무사들이 뒤쫓아 난투를 벌였고, 양쪽에서 사상자가 나왔지만 카루와 나가노는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당시 토모노리에게는 1572년 상경을 목표로 하는 카이(甲斐)의 타케다(武田)군과 연락을 취하며 노부나가를 공격한다는 소문이 퍼져 의심 많은 노부나가가 암살을 시도한 것 같다. 방심하고 있던 토모노리만 불쌍할 따름이다.


 토모노리 암살을 알게 된 충성심 깊은 키타바타케 무사 약 400명은 각지에서 키리야마(霧山)성으로 모여들어 노부나가의 대군과 싸우다 12 5일 패했다. 이리하여 키타바타케씨가 이세에 들어온 이래 8 2 4십 여년 이어진 영광스런 역사도 막을 내렸다.

  1. 무로마치 바쿠후(幕府)와는 별도로 예전부터 쿄우(京)의 조정에서 임명. [본문으로]
  2. 일본의 남북조시대에 키타바타케 치카후사가 속한 남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쓴 역사서. [본문으로]
  3. 손잡이가 짧은 단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