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사이 한국을 강타한 요미우리 신문의 기사를 번역해 보았음...

 

출처http://www.yomiuri.co.jp/politics/news/20080714-OYT1T00501.htm

저자: 読売新聞

게재시간: 20087142234

 

 정부가 중학교 사회 교과서의 새로운 학습지도 요령해설서에 타케시마(竹島문제를 처음으로 명기한 것은타케시마의 소유에 관해서 지금까지의 교육이 불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단지한국 측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일한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 염려되고 있다.

 

 타케시마 문제를 둘러싸고는, 2005 3나카야마 나리아키[中山 成彬] 문부과학상(당시)이 국회에서 "다음 번 학습지도 요령에서는 확실히 써야 할 것이다"고 답변하여이번 학습지도 요령의 개정 작업에서 검토가 되었다하지만 새로운 요령안의 발표시기가 올해 2월 한국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과 겹쳐문부과학성은 일한 관계에 대한 영향을 고려하여 기재를 미루었다이에 대해자민당 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생겼기 때문에문부과학성은 해설서에 명기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한국측은 민감하게 반응했다기술하는 것의 조정이 마무리에 다다른 이번 달 9이 대통령은 홋카이도우[北海道] 토우야코[洞爺湖] 서미트 회의장인 호텔에서 후쿠다[福田] 수상과 서서 이야기를 하였을 때우려의 뜻을 표명관계자에 따르면수상이 "타케시마를 쓸 수밖에 없다"고 알리자대통령은 "지금은 곤란하다기다리길 바란다"고 요구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 내에서는 "한국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말해야 할 것은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수상의 의향을 따르면서표현에 대해서는 허용되는 만큼의 최대한 조정을 거듭했다.

 

 토카이"渡海" 문부상은 11수상관저에서 마치무라 관방장관을 방문하여, 2종류의 문안(文案)을 제시했다하나는 북방영토의 기술에 이어 [타케시마 등도 언급하여북방영토와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의 영토영역에 대해서 이해시키는 것도 필요하다]고 하는 A또 하나는 이것에 이어 [또한 타케시마에 대해서는 한국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고 한국의 주장을 기록한 B안이었다최종적으로는 13일 밤, A안의 전제를 [우리 나라와 한국과의 사이에서 타케시마를 둘러싸고 주장이 상반된다는 것 등도 언급]하는 것으로 결착되었다.

 

 자민당 내의 보수파 의원은 [우리 나라의 고유 영토]라는 표현을 미룬 것에 대한 불만이 나오고 있다나카가와 쇼우이치[中川 昭一] 전 정조회장은 14, [한국에 양보하여애매한 기술이 되어버렸다견해서에 쓰는 것이라면 고유의 영토라고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여정부의 대응을 비판했다.

 

 한국 측도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내세워일한관계가 좋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만큼일본 정부 내에서는 [명기하는 것은 당연하지만타이밍이 좋지 않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마치무라 장관은 14일 기자회견에서 [일한관계가 어긋나 버리면, (북한의 핵 문제를 둘러싼) 6개국 협의의 프로세스나납치문제를 포함한 일본-북한간의 여러 현안 해결에도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고 말하며일한 쌍방의 냉정한 대응을 호소했다.

 

ps; 기사의 분위기를 전하려고 하다보니 한일을 일한으로, 독도를 타케시마로 하였음. 이건 이해를...

ps2; 대충 한 것이니 세세하게 파고 들어가지 마시길...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는 평생에 걸쳐 결코 잊지 못할 억울한 일이 하나 있다.
 "마왕"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명사 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명령에 따라 아들인 노부야스[信康]와 마누라 츠키야마도노[築山殿]를 자신의 입으로 사형선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맹자의 명령이라고는 해도 자신의 손으로 마누라와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이에야스에게도 엄청난 고뇌가 뒤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른 노부야스, 츠키야마 살해사건'은 어딘가 이상하다.
 우선 사건의 개략을 살펴보자.


 1560년 5월.
 오다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물리쳤다. 그리고 3년 뒤 천하통일을 목표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는다. 동맹의 증거로써 노부나가의 딸 토쿠히메[徳姫]와 이에야스의 아들 노부야스의 결혼이 성립된다.

 그리고 1570년.
 이에야스는 그때까지 거성이었던 오카자키 성[岡崎城]을 아들 부부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새로이 지은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10년 정도 흐르자... 이에야스의 처 츠키야마도노가 등장하여 쓸데없는 참견을 한다. 아들 노부야스 부부는 금슬이 좋아 사이에 딸 두 명을 두고 있었지만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토쿠가와 가문의 장래를 걱정한 츠키야마가 노부야스에게 미녀를 보낸다. 노부야스는 그 미녀에게 빠졌을 뿐만 아니라 오카자키 성 밑 마을에서 유행하던 풍류춤[風流踊り]에도 흠뻑 빠져버린다.
 거기에 츠키야마도노도 타케다[武田] 측의 스파이 겐케이[減敬]를 통해서 타케다 측과 내통할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츠키야마도노의 모친은 노부나가가 죽인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여동생이다. 노부나가에게는 처음부터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것이다.
 이런 것을 보고 그 때까지 무시 받고 있던 토쿠히메의 역습이 시작되었다(이번에는 노부야스의 부인 토쿠히메의 등장인 것이다). 토쿠히메는 지금까지의 사정을 편지에 적어 그것을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를 통해서 애비 노부나가에게 보냈다. 편지는 12개조로 되어 있어 그 중의 2~3개를 거론해 보면,

-. 요즘 오카자키 성 밑 마을에는 춤이 유행하고 있는데 노부야스는 그 춤에 빠졌을 뿐만 아니고 춤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활로 싸 죽였다.
-. 노부야스는 토쿠히메에게 딸려 온 시녀 코지쥬우[小侍從]를 자주 고자질한다고 입을 찢어 죽였다.
-. 츠키야마도노는 타케다의 스파이 겐케이라는 의사와 밀통하고 있으며 오다 토쿠가와 가문과 오다 가문을 망하게 해달라며 부탁하고 있다.
 이 편지를 읽은 노부나가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사실관계를 사카이 타다츠구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사카이 타다츠구는,
 "12개 중 10개는 사실이옵니다"
 며 인정해 버린 것이다. 노부나가는 노발대발했다. 화를 냄과 동시에 이것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노부나가에게 는 적자로 노부타다[信忠]가 있다. 그러나 기량이 노부야스보다 훨씬 떨어지기에 내심 장래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부타다와 노부야스의 시대가 된다면 노부타다는 노부야스의 쨉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호기로 삼아 노부야스를 죽인다면.... 이라고 생각하여, 이에야스에게 노부야스와 츠키야마도노의 사형을 명했다.

 이에야스는 앙천했다. 그러나 이에야스에게 있어 시국이 어려운 이 때에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깰 수도 없어 눈물을 삼켜가며 부인 츠키야마를 죽이고, 다음에 아들 노부야스의 배를 가르게 하였다.
이상이 사건의 개략이다.....

◎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에게 기대고 있었다?!

 이 사건은 거의 정사로 취급 받고 있으며, 이 사건을 근거로 만들어진 토쿠가와 이에야스 관련의 소설,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고뇌하는 이에야스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정말로 이상한 점이 많다. 그 이상한 점을 거론해 본다.

 우선, 이에야스에게 노부야스의 죽음을 명한 노부나가인데, 아무리 마왕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명사라고는 하여도 이때 이에야스가 어쩌면 반항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반항까지 안 가더라도, 부인과 아들의 죽음까지 명령하는 노부나가와는 더 이상 같이 못 해 먹겠다며 동맹을 파기해 올 것이라고 생각을 안 했을까??
 그랬다면 정말로 곤란한 것은 노부나가였을 터인 것이다. -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당시 상황은 이에야스보다는 노부나가가 힘든 때였다.

 노부나가는 [천하포무(天下布武)]를 선언해, 무(武)의 의한 천하통일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는 이에야스 이외에 모두 적들뿐이었다.
 그 때문에 에치고[越後]의 우에스키[上杉]에게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츄우고쿠[中国]의 모우리[毛利]에게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탄바[丹波]에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이세[伊勢]에는 타키가와 가즈마스[滝川 一益] 등 장수들을 각지에 파견하고 있었다.

 이것 외에도 '나가시노 전투[長條合戦]'에서 타케다 측과 싸워 한번은 이겼다고는 하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는 살아 남아 반격의 틈을 노리고 있었다. 거기에 에치젠[越前]의 잇코잇키[一向一揆]가 힘을 길려왔지, 칸토우[関東]에서도 호죠 우지마사[北条 氏政]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이렇게 노부나가의 주위가 모두 적 투성이로 기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에야스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있다. 당시 노부나가에게 적을 막는 것뿐만 아니라 내부를 다스리기에도 바빴다. 부하인 시바타 가츠이에와 하시바 히데요시의 불화를 시작으로, 우군으로 편입한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배반, 이어서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도 배반...이란 상태였다.
(상기는 세세히 따지면 오류가 있다. 그냥 대세가 그런 분위기였다…는 정도로 하자 – 역자 가필)

 노부나가에게 있어, 정말 기댈 수 있는 것은 이에야스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에야스에 대해 딸이 푸념을 했다는 정도로 '처와 아들을 죽여라'며 잔인하고 위험한 명령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덧붙여 노부야스의 기량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면서 호기라 생각해 죽이라고 명령한 것도 이상하다. 딸인 토쿠히메의 말이 사실이라면, 노부야스는 춤에 빠진 얼간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백성을 죽이는 바보인 것이다. 기량을 두려워하기는커녕 그 정도라면 가만 놔두어도 자멸할 터이다.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는 그런 춤에 빠진 노부야스보다 바보였던 것일까?

 이에야스가 둘을 죽인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죽인 날짜도 이상한 것이다.
 위에서 적은 개략에서는 자세히 적지 않았지만, '둘을 죽여라'하고 노부나가가 명령한 것이 1579년 7월16일. 그리고 이에야스가 자객을 풀어 츠키야마도노를 죽인 것은 8월29일인데, 이 사이 한달 반이나 걸린 것이다. 시간이 너무 걸린 것은 아닐까?
 노부나가의 성격으로 본다면 말한 것은 곧바로 실행시켰어야 할 터이다. 더구나 그 이유가 [타케다와의 내통]이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한달 반 동안이나 그대로 놔두고 있었던 것일까??
 더불어 이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를 한꺼번에 죽이지 않은 것도 이상한 점이다. 최종적으로 노부야스가 자인을 명령 받은 것은 츠키야마도노의 죽음에서 또 보름 정도 지난 9월 15일인 것이다.

◎ 이에야스에게 있어 처와 아들은 방해물이었다??!!

 어쨌든 이 사건에는 이상한 점이 많은데 이 [이상함]은 사건에서 노부나가를 빼버리면 부드럽게 연결되어 간다.
 처음부터 노부나가의 명령 따위는 없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후세의 창작인 것...이라고 해 보는 것이다.

 노부나가가 명령했다......고 쓰여 있는 것은 [徳川実紀[각주:1]], [改正三河風土記[각주:2]], [武徳編年集成[각주:3]] 등 전부 후세의 것으로, 또한 이에야스를 신군(神君)으로 쓰고 있는 자기네들끼리의 것들뿐이다. 이에야스에게 불리한 것들은 쓰여 있지 않다.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았다는 것은 창작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는 이에야스 자신의 뜻으로 죽였다...... 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에야스 스스로 사랑하는 처와 귀여운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사실 이에야스는 더 이상 츠키야마도노와의 사랑 같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1570년.
 이에야스는 그때까지의 거성인 오카자키 성을 노부야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신축한 하마마츠 성으로 옮겼다. 이때 츠키야마도노는 하마마츠로 가지 않고 노부야스와 함께 오카자키에 남아있었다. 이후 7년간 이에야스는 츠키야마도노와 별거 상태였던 것이다. 사랑이라고는 없었던 것이다.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는 이에야스의 영지(領地) 왼쪽 반인 오카자키 성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오른쪽 반인 하마마츠 성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고....
 당시 노부야스는 21살로 이에야스는 36세. 가신들은 자연히 좌와 우로 나뉘어져 있었다. 결국,노부야스를 맹주로 하는 [오카자키 파]와 이에야스를 맹주로 하는[하마마츠 파]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이다. 파벌이 생겼던 것이다.

 적으로부터의 공격보다도 내부 분열을 우려한 이에야스는 기선을 제압해 오카자키 파의 중심인물 츠키야마도노를 죽였다. 그리고 오카자키 파 면면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주요인물들을 확인해 내기 위해서였다.
 그런 뒤에 오카자키 파의 중핵인 노부야스에게 죽음을 명한 것이다. 귀여운 아들이라고 할 틈은 없었다. 파벌을 형성하여 영지를 둘로 나누려 했던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기에, 귀여워했던 만큼 미움도 그 만큼 커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도 파벌항쟁 과정에서 아들 요시노부[義信]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다테 마사무네[伊達 正宗]도 동생 코지로우[小次郎]를 참살하였다.

 덧붙여 주요인물로 확인된 [오카자키 세 행정관(岡崎三奉行)]인 고우리키 키요나가[高力 淸長], 혼다 시게츠구[本田 重次], 아마노 야스카게[天野 康景] 등의 가신은 오카자키 파에 속하였기에 사건 후 푸대접을 받았고, 오카자키 파의 필두가로(筆頭家老)였던 이시카와 가즈마사[石川 數正]는 참을 수 없어 토쿠가와 가문을 떠나 히데요시에게로 도망친 것이다.
(이 부분은 오버. 대부분 이후에도 중요한 일들을 맡았으며 카이에키나 푸대접 등에는 각각의 사정이 있었다. - 역자 가필)

 이에야스를 신군으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자기들끼리의 책이었기에 이러한 이야기를 그대로 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토쿠히메의 푸념, 노부나가의 잔인한 명령 등이 창작되어 눈물을 꾹 참으며 신군 이에야스는 사랑하는 처와 아들을...... 이 된 것이다.

 츠키야마와 노부야스의 살해는...... 이에야스 본인의 의사였던 것이다..

ps; 이 글은 1994년에 발간된 고토우 쥬이치[後藤 寿一]의 [뭔가 이상하잖아! 일본사(なんかヘンだぞ!日本史)]에 있던 것을 번역한 것입니다.예전에 하이텔 전클에 올렸던 것을 조금 손 봐서 올립니다. 조금 오버기가 있지만 그냥 그런 흐름이었다고 생각해 주시길... 세세하게 파고드면 양이 너무 많아져요~(그래서 그런 능력이 없어서 번역해서는 올리는 것입니다. --; )

  1. 에도 바쿠후의 공식 기록서. 19세기 전반 즈음 편찬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토쿠가와 가문의 역사를 기록. 19세기 전반 편찬. [본문으로]
  3. 이에야스의 전기. 18세기 중반에 작성. [본문으로]
이 게시판에 올려도 괜찮은지 모르습겠니다만...

디시의 공지와 비슷한 것인가 보더군요.

센고쿠(戦国) 시대 게시판의 기초 지식

이 정도는 알아 두지 않으면 병진 취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센고쿠 시대 전반적인 것에 대해.

  • 치안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쿄우토(京都)도 자치조직 같은 것이 있었다).

  • 하지만 역시 다이묘우(大名)끼리의 국경 근처는 위험했다.

  • 영토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석고(石高). 예를 들면 오와리(尾張)같은 곳은 저렇게 조그맣지만 50만석이 넘는 대국.

  • 1만석X250이 대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병사수. 예를 들어 50만석이면 12500, 100만석이면 25000 정도가 기준

  •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던 시대였기에 숫자가 굉장히 엉망. 오케하자마에서 이마가와4만이라던가 미미카와(耳川 오오토모(大友)와 시마즈(島津)의 싸움 역자 주)에서 오오토모 6만이라던가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

  • 노부나가는 인망이 있었다.

  • 노부나가는 이외로 좋은 사람.

  • 노부야스(信康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의 아들)는 노부나가가 죽인 것이 아니다.

  • 노부나가에게 좋지 않고 이에야스에게 좋은 이야기는 대체로 에도 시대의 창작(아네가와(姉川) 전투, 노부야스죽이기 등)

  • 노부나가와 미츠히데는 사이가 좋다.

  • 아무 때나 방화를 일삼는 것은 아니다(미노(美濃) 공략때도 산 전체를 불태우면 을 취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 노부나가는 아스퍼거 증후군

  • 삼단철포 같은 것은 없다.

  • 낙시낙좌()는 노부나가의 오리지널이 아닌 롯카쿠(六角)의 것을 베낀 것. 참고로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도 했던 것.

  • 오케하자마는 어쩌다 이겼다는 것이 대세.

  • 하지만 그걸로 노부나가를 과소평가하면 이노우 전투( 노부나가와 동생 노부유키(信行)간의 싸움 700 vs. 1700 – 역자 주), 모리베 전투(森部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목 사냥꾼 아다치(頸取足立)’를 쓰러뜨렸다는 전투. 3000 vs. 6000(사이토우()) – 역자 주), 텐노우지 전투(天王寺 텐노우지 요새(7000)을구원하는 노부나가 3000 vs 혼간지 15000의 전투. 노부나가는 선두에 서서 돌격했다고 한다 역자 주) 등 적은 수로 대군을 물리친 전투가 몇 번 더 있었기에 오케하자마에서 어쩌다가 이겼다고 하여도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다.

  • 미카타가하라 전투 최대의 피해자.

  • 신겐 정도는 여유롭게 쓰러뜨린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

  • 백성에게 사랑 받은 타이코우(太閤) 어르신이라는 것은 거짓말.

  • 혼노우(本能)()의 변시점에서 히데요시의 위치는 가신 필두인 시바타(柴田), 2위인 아케치(明智), 여러 좋은 대우를 받고 있던 니와(丹羽) 아래인 4번째 정도.

  • 가난한 농민 출신이 아니라 부잣집 출신(이었다는 설도 있다)

  • 잔혹한 행위를 많이 했다.

  • 노부나가가 죽은 다음부터 노부나가 뒤따마로 없던 것도 만들어서 퍼트린 것을 보면 정말로 성격이 나쁘다.

  • 알려진 만큼 타케나카(竹中)나 쿠로타()의 도움을 받지 않았지만 히데나가(秀長)의 힘 없이 천하인 히데요시는 될 수 없었다.

  • 토요토미 가문 멸망의 원인은 전부 이 녀석.

  • 아기씨(精子)가 없다.

  • 히데요리()는 아마 이 녀석의 아이가 아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 편.

  • 자기한테 안 좋은 것은 전부 노부나가에게 덮어 씌었다(아들 죽이기, 미카타가하라에서 3000밖에 병사를 보내 주지 않았다 등)

  • 아네카와에서의 분투 같은 것은 없었다 - 라기보다 아네카와 전투 자체가 알려진 만큼 대규모 전투는 아니었다.

  • 미카타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의 미스라기 보다 거기서 물러난다면 코쿠진()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게 되기에 어쩔 수 없이 출진. 별로 신겐이 굉장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는 것이 타당.

  • 실은 알려진 만큼 괴로운 인질 시대 같은 것은 없었다(요시모토에게는 굉장한 기대를 받았고, 타이겐 셋사이(太原 雪)에게 교육을 맡길 정도였다)

타케다 신겐 편.

  • 센고쿠 시대에서 가장 과대평가 받고 있는 과대사천왕(타케다, 우에스기, 시마즈, 다테, 쵸우소카베(長宗我部) 5명이 있지만 단어 가지로 따져서는 안 된다)의 필두.

  • 항상 우세한 상태에서 싸움을 걸기에 소수의 군사로 대군을 물리친 전투가 없다.

  • 그런 주제에 몇 번이나 졌던 것을 보면 이 녀석 역시 전쟁 하수일 것이다.

  • 노부토라(信虎) 이상으로 세금 폭탄을 먹였다.

  • 영민들에게 미움 받았다.

  • 기껏해야 코쿠진() 연합의 맹주적인 존재이기에 조직 만들기는 안 된다.

  • 사람을 쓰는 것이 정말로 뛰어난지 어떤지는 미묘.

  • 노부나가가 두려워하거나 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

  • 자기보다 격이 떨어지는 인물밖에 이기질 못한다.

  • 오야붕(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는 개기질 못한다.

  • 미카타가하라는 3배의 병력 차이가 있었기에 이길 수 있었다. 별로 신겐이 굉장한 것은 아니다.

  • 메뚜기전법(상대의 지역에서 물자를 약탈)과 인신매매로 겨우 버텼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정도.

  • 카와나카지마는 안개 속에서 퇴각하다가 우연 부딪혔을 뿐.

  • 타케다 가문 멸망의 원인은 전부 이 녀석.

  • 상대방이 일부러 동맹을 신청해서 맺었는데도 불구하고 손바닥 뒤집듯이 간단히 동맹을 끊는 것을 보면 너무 멍청이 같아서 옹호해 줄래야 옹호해 줄 수가 없다.

  • 처음부터 카이(甲斐) 22만석을 전부 가지고 있는 등 굉장히 좋은 환경.

  • 처음부터 5000의 병력을 움직일 수 있었기에 굉장히 좋은 환경.

  • 시나노(信濃)에는 다이묘우(大名)가 없는(소규모 호족 밖에 없었다) 굉장히 좋은 환경.

  • 기본적으로 역사 게임이라거나 TV 방송 등에서는 최강 취급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다테나 시마즈와 그리 차이가 나질 않는다.

우에스기 켄신 편.

  • 실은 여자가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 그 이상한 행동도 여자라고 하면 왠지 납득할 수 있는 것이 많다.
  • 메뚜기 전법과 인신매매가 특기

  • 우에스기는 **성을 뺏어 100의 금과 200의 식량을 얻었다 - 라는 게임 같은 것을 실제로 한 무서운 다이묘우(大名).

  • 10만의 대군으로 호우죠우()를 공격하지만 니노마루()도 없었던 오다와라(小田原)()을 낙성시키지 못했다.

  • 영토 확장 욕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영토 확장을 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 마지막 즈음은 북새통에 호쿠리쿠(北陸)의 대부분을 손에 넣어 100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

  • 오다 가문과의 국력 차이를 보면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이길 수 없다.

  • 테토리가와 전투(手取川)는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것이 아니라, 히데요시가 멋대로 전선 이탈하여 혼란에 빠진 카츠이에(勝家)를 쓰러뜨린 것뿐.

  • 우에스기측이 주장하는 만큼 큰 전투는 아니다.

  • 라기보다 실제로 있었는지 어떤지 조차도 미묘(있었다고 하여도 그걸로 우에스기 켄신의 명성을 높일 수 있는 듯한 큰 전투는 아니다)

호우죠우 가문 편.

  • 호우죠우라는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우지츠나(氏綱) 때부터라고 한다.
  • 알려진 소우운(早雲) 실적의 대부분은 우지츠나가 한 것.

  • 우지야스가 한 카와고에 전투(河越 - 11000으로 60000의 군세를 물리친 전투)는 여러 설이 있긴 하지만 우에스기와 호우죠우의 밸런스를 보는 한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전투로 센고쿠 시대에 기리 남을 멋진 전투.

  • 우지야스, 츠나시게(綱成), 우지시게, 우지마사 등 농성만 하였다.

  • 명군(名君)이 비교적 많은 핏줄.

출처: http://ja.wikipedia.org/wiki/李明博

이 명박(1941년 12월 19일 ~ )은, 한국의 정치가. 전 서울 시장. 신장 173Cm, 체중 70Kg. 혈액형은 B형. 식민지 시대에 있던 창시개명 시의 일본명은 츠키야마 아키히로(月山 明博)(~1945년까지). 호는 일송(一松). 별명은 [컴도저(컴퓨터 + 불도저)], [따스한 남자].

현대 건설 사장, 국회의원(한나라당) 등 요직을 역임했다. 2002년에 서울 시장이 되어, 2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청계천 복원 공사를 실시했다. 또하 한국 대통령 선거(2007년 말)의 전초전인 한나라당 예비선거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승리하여, 대통령 선거의 당 공인 후보가 되었다.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의 각종 여론 조사에서는 모두 1위, 2위이다.

인물상

-태어났을 때는 굉장히 가난하여, 중학교 시대에는 영양 실조로 쓰러진 적도 있지만, 졸업할 때의 성적은 전교에서 2위였다고 한다(가장 낮았을 때라도 3위였다). 집이 가난하여 인문계 고교에 진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야간 상고를 다녔다. 참고로 성적은 입학부터 졸업까지 매번 학년 1위였다.

-병역은 입대 후에 기관지 확장증에 의해 제대가 되었다.

-존경하는 인물은 안창호, 간디.

-정계에 입문하기 이전은 경제인으로 유명하여, 중소기업에 지나지 않았던 현대 건설에서 정주영의 가르침 속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36살에 사장에 취임하여 한국 톱 기업으로 상승시켰다. [현대의 한국을 창조한 50인]에 선정되는 등, 한국에서 샐러리맨 신화의 대표적인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별명은 [불도저]. 건설업 출신이라는 것도 있어 개발 정책이 특기로, 시장 시대에는 청계 고가도로의 철거와 청계천 복원을 실현했다. 또한 차기 대통령 선거에는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한반도 대운하(내륙 운하) 프로젝트] 구상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박정희 정권 시, 한일기본조약 체계의 사전 단계인 한일 회담 반대 투쟁(6.3사태)를 고려 대학 학생회장으로 주도하여, 체포되었다.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복역 6개월)의 판결을 받았으며, 이 일로 인하여 박정희의 딸이며, 같은 한나라당 차기 대통령 선거 후보 라이벌이었던 박근혜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다고도 한다(출전이 필요)

-한국 정치가가 대부분 그렇듯, 시국에 맞춘 반일적 성향을 때때로 보인다. 예를 들면 일제 강점기 시대에 세워진 현 서울 시청을 태극기로 덮는 이벤트를 개최하거나, 일본 역사 왜곡 교과서 채택 저지를 위해 기부금 1억 3200만원을 모은 것이나, 서울 남산에 세워진 유스 호스텔에 일본인 수학 여행을 유치하여 독도 영유권이나 일제의 잔혹성에 대해서 학습할 기회를 만드는 계획이나, “이시하라 신타로우(동경 도지사)는 4류, 5류인 정치인”이라고 발언, “경제 대국인 일본의 전후 처리는 독일의 그것과 비교하면 구두쇠” 등의 주장이나 활동이 있다.

그러는 한 편 2006년 1월에 세계 경제 포럼에서는 “일부 아시아 정치 지도자들은 과거의 역사에 묶여, 국가 간의 긴장을 높여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며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여, 정부 여당인 열린 우리당에게 [친일 발언]이라고 비판당하거나, 같은 해 11월에 일본에 와서, 아베 신조우(당시)와 회담했을 때에는 “한국 국민의 3대 현안(역사, 독도, 야스쿠니 신사)을 미래지향적인 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부탁하고 싶다”고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는 발언을 하는 등, 안과 밖에서의 언동을 나눠서 사용한다.

또한 현대 건설 시대의 경험으로 인하여, 일본의 재계에 인맥이 있다고도 한다([사피오[각주:1]] 2007년 1월 4일판 “세계의 [반일수괴 vs 친일거인(世界の’反日首魁vs親日巨人’)]"에서

-일본어와 영어가 뛰어나다.

-현재 국회 부이장인 이상득은 실제 형이다.

-출생지는 경상북도 포항이라고 했지만, 후에 자서전에서 일본의 오오사카라고 밝혔다. 또한 당시 부친이 [츠키야마(月山)]이라는 성을 창씨하여, 본인도 그 성을 사용했었다고 형인 이상득이 말하고 있다.

약력

* 1941년 – 오오사카부 나카카와치군 카미촌(현 오오사카시 히라노구(大阪市平野区)에서 출생

* 1961년 – 고려 대학교 입학

* 1965년 – 현대 건설 입사

* 1977년 – 현대 건설 사장 취임

* 1988년 – 현대 건설 회장 취임

* 1992년 – 제 14대 국회의원 당선(민자당, 전국구)

* 1996년 – 제 15대 국회의원 당선(신한국당, 서울 종로구)

* 1998년 – 제 15대 국회의원 사임

* 2002년 – 제 32대 서울특별시 시장 취임

* 2006년 – 서울 특별시 시장 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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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자가 아는 일본인들은 대부분 이명박 전 서울 시장이 당선되길 바라고 있더군.
  1. 일본 보수 잡지, 세계의 반일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전을 가지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