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를 제외하고 날짜는 전부 일본의 구력(舊曆 ) 기준입니다.(신력 찾기 귀찮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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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제의정서가 만들어지기까지
1867년. 그러니까 일본에선 케이오우(慶応) 2년 6월.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 강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던 야마우치 요우도우(山内 容堂)는 도막(倒幕)으로 치닫는 삿쵸우(薩長)에게서 토쿠가와 가문을 지키기 위한 방도를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사카모토 료우마(坂本 龍馬)가 등장하여 선중팔책(船中八策)을 건의합니다.
이것을 토사번(土佐藩)의 고토우 쇼우지로우(後藤 象二郎)에게서 전 번주(藩主)인 야마우치 요우도우에게로 그리고 야마우치는 바쿠후(幕府) 노중(老中) 이타쿠라 카츠키요(板倉 勝静)에게 역시 건의하여 1867년 10월 14일 당시 쇼우군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는 조정에 정권을 반환하게 됩니다. [대정봉환(大政奉還)]
여기서 잠깐~
사카모토 료우마는 토쿠가와 바쿠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에도 시대 때도 다른 번(藩)에 비해 유별나게 차별 받던 토사의 고우시(郷士) 출신이었기에 그 토사 번을 성립시키고 유지시키는 바쿠후를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다만 일본 전체를 위해서 원한 깊었던 토사 번을 이용하기로 하였으며 , 또한 삿쵸우가 하자는 대로 무력도막으로 발전할 경우 발생할 전란과 거기에 파고들려는 서구열강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카모토는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거부할 시 아예 요시노부를 살해하려고 까지 합니다. 요시노부는 3년 전인 1863~1864년에 존재했던 유력 다이묘우 출신자들의 연합정권인 참여회의(参預会議)때만 하더라도 바쿠후의 권위와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어렵게 성립된 참여회의를 무너뜨린 경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건백을 반드시 성공시키고 실패시에는 고토우에게 배를 가르라며,
난 처음부터 목숨을 걸고 있었으니까 만약 건백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종묘사직을 위해서 카이엔타이(海援隊)를 이끌고 입궐하려는 쇼우군을 죽일 생각입니다. 그리 되었을 시는 저 세상에서 선생(고토우)와 만나겠습니다
万一行ハれざれば固より必死の御覚悟故、御下城無之時ハ、海援隊一手を以て大樹参内の道路ニ待受、社稷の為、不倶戴天の讐を報じ、事の成否ニ論なく、先生地下ニ御面会仕候
- 1867년 10월 13일에 고토우 쇼우지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런 때 고토우에게서 성공의 편지가 도착합니다. 그 권력과 권위에 집착하던 요시노부가 일본을 위해 자신의 생각에 따라 준 것을 기뻐하며,
쇼우군 가문의 지금 심정을 이해합니다. 훌륭한 결단을 내려주셨군요. 훌륭한 결단을 내려주셨군요. 맹세하오니 저는 공(즉 요시노부)을 위해서 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将軍家の今日の心中さこそ察し申す。よくも断じ給えるものかな。よくも断じ給えるものかな。余は誓ってこの公のために一命を捨てん
라며 정권을 조정에 반환하여도 다시 정치에 참여할 길을 열어준 것이 바로 신관제의정서(新官制疑定書)입니다.(요시노부가 받아들인 배경에는 정치체계만 바꾸어 대정봉환 후에도 계속 토쿠가와 가문이 권력을 좌우할 수 있게 하고자 하는 꿍꿍이도 있었습니다)
각각의 면면들
사카모토 료우마는 산죠우 가문(三条家)의 케닌(家人)인 토다 우타(戸田 雅楽)와 협의하여 대정봉환 후의 관료를 정하게 됩니다. 산죠우 가문 사람과 협의한 만큼 일본 황실의 친왕들보다 낮은 기껏해야 세이가케(清華家)인 산죠우 사네토미가 무려 칸파쿠에 임명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칸파쿠(関白)
산죠우 사네토미(三条 実美) - 8월18일의 정변(八月十八日の政変)으로 쿄우토(京都)에서 쫓겨난 존왕양이(尊皇攘夷)파 쿠교우(公卿)들 즉 소위 칠경낙향(七卿落ち) 중 가장 가문의 격식이 높았던 것과 토다 우타 덕분에 칸파쿠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귀족)
나이다이진(内大臣)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 –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최후의 쇼우군(将軍). (바쿠후(幕府))
기소우(議奏)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有栖川宮 熾仁 親王) – 쵸우슈우(長州)와 끈이 강했던 친왕. 14대 쇼우군(将軍) 이에모치(家茂)의 부인(카즈노미야(和宮))은 원래 이 사람과 약혼한 사이였기에 정혼자를 빼앗아 간 바쿠후에 원한을 갖고 있었습죠.(왕가(宮家))
야마시나노미야 아키라 친왕(山階宮 晃 親王) - 후시미노미야 가문(伏見宮家) 출신. 친왕이면서 무려 개국론을 주장할 정도로 깨인 인물. 1863년 조정(朝廷)내에 설치된 정무 의론 기관 [国事掛]의 수장 격인 [국사어용담당(国事御用掛)]에 있을 정도로 친왕 출신 치고 뛰어난 정치력을 소유. (왕가)
닌나지노미야 요시아키 친왕(仁和寺宮 嘉彰 親王) – 대정봉환 전까지만 해도 닌나 사(仁和寺)에 있었기에 활약은 없었습니다. 아마 닌나지노미야가 토다 우타의 친가인 오자키(尾崎) 가문의 주인댁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왕가)
시마즈 타다요시(島津 忠義) – 당시 사츠마 번(薩摩藩)의 번주 (사츠마 번)
모우리 타카치카(毛利 敬親) – 기록에 따라 그의 양아들인 모우리 사다히로(毛利 定広)가 그의 이름대신 들어가 있기도 함.(쵸우슈우 번)
마츠다이라 슌가쿠(松平 春嶽) – 그야말로 막정을 좌지우지하던 사람. 후쿠이 번(福井藩)의 번주. 당시 나름 똑똑했다는 네 명의 번주를 이르는 사현후(四賢侯) 중 한 명.(후쿠이 번)
야마우치 요우도우(山内 容堂) – 토사 번(土佐藩)의 전 번주. 당시 나름 똑똑했다는 네 명의 번주를 이르는 사현후(四賢侯) 중 한 명.(토사 번)
나베시마 칸소우(鍋島 閑叟) – 번주가 가는 길에 상인들이 빚 갚으라며 막아서던 막장 사가 번(佐賀藩)을 일본에서 가장 하이테크한 번으로 만든 인물.(사가 번)
토쿠가와 요시카츠(徳川 慶勝) –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어삼가(御三家)의 필두 오와리 번(尾張藩)의 전 번주(오와리 번)
다테 무네나리(伊達 宗城) – 우와지마 번(宇和島藩)의 전 번주. 당시 나름 똑똑했다는 네 명의 번주를 이르는 사현후(四賢侯) 중 한 명.(우와지마 번)
오오기마치산죠우 사네나루(正親町三条 実愛) – 사츠마 번(薩摩藩)과 끈이 강했던 귀족. (귀족)
나카야마 타다야스(中山 忠能) – 메이지 텐노우(明治天皇)의 외조부.(귀족)
나카미카도 츠네유키(中御門 経之) – 양이(攘夷)파 귀족.(귀족)
산기(参議)
이와쿠라 토모미(岩倉 具視) – 당시 조정에서 가장 정치력이 높았던 귀족. 출세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던 인물.(귀족)
히가시쿠제 미치토미(東久世 通禧) – 칠경낙향 멤버 중 한 명.(귀족)
오오하라 시게토미(大原 重徳) – 국사어용담당(国事御用掛). 친막파 귀족이나 친왕과 자주 대립(귀족)
나가오카 요시노스케(長岡 良之助) – 호소카와 쿠마모토 번(細川熊本藩) 번주의 자식.(히고 번)
사이고우 타카모리(西郷 隆盛) – 유신삼걸(維新三傑) 중 한 명.(사츠마 번)
코마츠 타테와키(小松 帯刀) – 사츠마 번의 실질적인 수상. 솔직히 이 사람 없었음 유신도 없었다고 생각함. (사츠마 번)
오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 利通) – 유신삼걸 중 한 명.(사츠마 번)
키도 타카요시(木戸 孝允) – 유신삼걸 중 한 명.(쵸우슈우 번)
히로사와 사네오미(広沢 真臣) – 왕정복고의 공신에게 조정이 내린 식읍(永世禄)을 쵸우슈우에서 받은 번사(藩士)는 키도(木戸)와 히로사와 뿐.(쵸우슈우 번)
요코이 쇼우난(横井 小楠) – 사카모토 료우마는 이 사람의 심부름꾼이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카모토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히고 번)
유리 키마마사(由利 公正) – 후쿠이 번의 재정을 재건하여 막말기에 후쿠이 번이 제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함.(후쿠이 번)
고토우 쇼우지로우(後藤 象二郎) – 뛰어난 정략가. 토사 근왕당(土佐勤王党)을 탄압하는 바람에 당시 정세에 뒤쳐져 있던 토사를 단번에 유신의 주역 중 하나로 만들었습죠.(토사 번)
후쿠오카 타카치카(福岡 孝弟) – 대정봉환과 삿쵸우와 토사의 동맹에 조력(토사 번)
후에 삿쵸우도비(薩長土肥)의 출신자들만 득세한 메이지 정부에 비하면 실로 다양한 출신들이 이름을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료우마가 직접 만난 이들이 대부분(친왕이나 귀족계층의 일부는 토다 우타(戸田 雅楽))의 의견이 반영된 듯)인지라 료우마의 발이 얼마나 넓은지도 알 수 있습니다.
발 넓은 료우마가 직접 만나 상대방의 그릇을 재가며 선택한 인물 중에 그의 스승이라는 카츠 카이슈우(勝 海舟)의 이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아시는 바대로 사카모토도 카츠를 높게 평가하긴 하였습니다.
원래 인간의 일생은 처음부터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이지요. 운이 나쁜 사람은 목욕탕에서 뒤로 자빠졌는데도 불알이 깨져 죽는 법도 있으니까요.
그에 비해 저는 운이 강한지 죽을지도 모른다고 곳에 가서도 죽지 않으며, 스스로 죽으려고 생각하더라도 아직 더 살면서 해야 할 일이 많기에, 지금은 일본 제일의 인물 카츠 린타로우(勝 憐太郎)라는 사람의 제자가 되어 매일매일 여러 아이디어를 짜느라 노력하고 있습니다
扨も扨も人間の一世ハがてんの行ぬハ元よりの事、うんのわるいものハふろよりいでんとして、きんたまをつめわりて死ぬるものもあり。
夫とくらべてハ私などハ、うんがつよくなにほど死ぬるバへででもしなれず、じぶんでしのふと思ふても又いきねバならん事ニなり、今にてハ日本第一の人物勝憐太郎殿という人にでしになり、日々兼而思付所をせいといたしおり申候
1863년 3월 20일에 누나인 오토메(乙女)에게 보낸 편지.
하지만 잠시 같이 행동하긴 하지만 그 후엔 카츠를 쌩깝니다. 시기 상으로는 대략 칠경낙향(七卿落ち)에 이은 금문의 변(
禁門の変)에서 사츠마 군의 지휘관으로서 대활약을 한 사이고우 타카모리에게 만나보려고 하니 카츠 카이슈우에게 소개장을 써달라고 한 즈음부터입니다. 1864년 여름 즈음입죠.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카츠 카이슈우의 개차반같은 성격으로 인해서 신정부라는 밭에 생길 불화의 싹을 미리 제거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쨌든 더 이야기를 이어갑시다.(…다 쓰고 나서야 이 글의 목적인 료우마가 구상한 신정부의 관료에 카츠 카이슈우(勝 海舟)의 이름이 없다는 것만 쓰면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기에…)
저 이름들 속에는 토다 우타의 강력한 추천으로 사카모토 료우마의 이름도 산기(参議)에 있었지만 몇 일 후 사이고우 타카모리에게 보여주었을 때는 료우마가 일부러 자신의 이름을 빼고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사이고우는 저 면면들을 보고 정말 균형 잡힌 인선이라고 하며 사카모토의 이름이 없는 것을 말하자…
사이고우(西郷)를 찌질이로 만든 무츠 무네미츠(陸奥 宗光)
“나는 공무원이 싫어. 정해진 시간에 집을 나서 정해진 시간에 집에 돌아오는 것은 나하고 안 맞아”
“그럼 무엇을 할 생각인가요?” 라고 묻는 사이고우에게
“음… 세계의 카이엔타이(海援隊)라도 만들까?”
이 말을 옆에서 듣고 무츠 무네미츠(陸奥 宗光)는,
“료우마와 비교하면 작금의 삿쵸우 인간들은 쭉정이지. 유신이 되기 전 신정부의 관료를 정할 때 료우마는 세계의 카이엔타이를~하고 말했어. 그때 료우마는 사이고우보다 한 층 더 거대해 보였지”
龍馬あらば、今の薩長人などは青菜に塩だね。維新前、新政府の役割を定めたる際、龍馬は世界の海援隊云々と言えり。この時龍馬は西郷より一層大人物のように思われき”
고 후일 말했다고 합니다…만 실제로는 료우마의 이름이 있었던 듯 합니다.
신관제의정서(新官制擬定書)에서는 산기(参議)에 이름이 있던 사카모토 료우마
이 신관제의정서(新官制擬定書)는 오자키 사부로우(尾崎 三良)가 쓴 기록 등에서 나옵니다. 참고로 오자키 사부로우란 사카모토 료우마와 함께 신관제의정서를 만든 토다 우타(戸田 雅楽)가 유신 후 친가의 성(姓)으로 돌아가면서 칭한 이름입니다.
오자키 사부로우의 기록은 이하와 같습니다.
[오자키 사부로우 자서전(尾崎三良自叙略伝)],
[역사 담화 속기록, 79편, 오자키 사부로우 담화(史談会速記禄, 79輯、尾崎三良談話)]
[‘사카모토 료우마 관련 문서’ 1권에 수록 된 ‘오자키 사부로우 비망록’(坂本龍馬関係文書1巻, 尾崎三良手控)]
[‘사카모토 료우마, 카이엔타이의 알파와 오메가 3’에 인용 된 ‘오자키 사부로우 비망록’(坂本龍馬海援隊始末 3, 尾崎三良手控)]
[유신 토사 근왕사(維新土佐勤王史)]
저 다섯 개의 기록 중 상기 3개(붉은색)와 하기 2개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기 2개 즉 [‘사카모토 료우마’ 관련 문서]와 [유신 토사 근왕사]는 오자키 사부로우의 기록을 근거로 ‘사카자키 시란(坂崎 紫瀾)’이라는 인물이 쓴 글입니다. 즉 원 소스에 있었던 [산기(参議) 사카모토 료우마]를 없앤 것이죠. 이 사카자키 시란이란 사람은 어째서 있었던 이름을 지운 것일까요?
사카자키 시란(坂崎 紫瀾)이란 인물.
사카자키 시란은 토사 번 출신입니다.
유신 후 메이지 정부에서 마츠모토(松本)란 곳의 재판소 판사를 했지만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다 정쟁에 패하여 사직 & 낙향. 후에 고향인 토사에서 도요우 신문(土陽新聞 – 현 코우치 신문(高知新聞))에 사카모토 료우마를 주인공으로 한 [한혈천리마(汗血千里駒)]를 썼는데 이것이 인기폭발. 현 일본에서 역사상 좋아하는 인물 1,2위를 다투게 만드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나오는 료우마 관련 소설들은 이 [한혈천리마]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많이 차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정치적인 색채가 강한 소설이라고 합니다.
당시 일본 정계와 군부는 삿쵸우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항하여 정부의 중추에서 밀려난 토사 출신자들은 자유민권운동(自由民権運動)을 벌이며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가 총리인 자유당(自由党)을 결성하였습니다. 사카자키 시란은 이 자유당의 일원으로 자기 고장의 인물 사카모토 료우마의 전기소설인 [한혈천리마]를 써 료우마를 자유민권의 선구자로서 자유당 이념의 화신으로 만들었습니다.
현실은 소설과 다른 경우가 많습죠.
그런 료우마가 권세를 휘두르는 관료라니? 자유민권의 이념과 반했던 것이죠. 그래서 소설에서는 그런 부분을 뺀 것입니다.
료우마가 등장하는 소설, 드라마, 영화에는 항상 나오는 “세계의 카이엔타이(海援隊)라도 할까”라는 부분은 일본을 위해서 노력하지만 그것을 내세워 권세를 휘두르는 일 없이 시선을 전세계로 향했던 료우마의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검호 료우마.
사람 죽이지 않았던 료우마.
해군 사관학교의 생도 대표인 료우마
인물이라는 카츠 카이슈우와의 멋진 사제지간
삿쵸우 동맹을 생각해낸 사람
대정봉환을 처음으로 생각한 사람… 등등의 잘못 알려진 많은 료우마 전설.
실제로 료우마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지금처럼 여전히 인기가 있을까요? 궁금해질 때도 있습니다.
ps1;쓰기 시작한 것은 “그냥 보충”에서 댓글로 쓴다고 한 날부터… 근데 여태까지 남의 지식을 번역만 했지 직접 글을 쓴 적이 없기에 이렇게 오래 되어 버렸네요. 늦어져서 죄송.
ps2;역시 직접 쓴 적이 없기에 적당히 끊어야 하지만 아직 경험 미숙으로 읽기 힘든 난잡한 글이 되고 말았네요. 그 점도 죄송.
ps3;다음 일본사 칼럼은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은 정말 세이와 겐지(清和源氏)만이 될 수 있었을까?” 혹은 “쿄우토와 조정을 지켰다고? - 중세의 조폭 엔랴쿠지(延暦寺)” 아니면 “웅대한 꿈과 그에 비례한 찌질한 행태 – 카츠 카이슈우(勝 海舟)”편 입니다. 북극해의 얼음이 다 없어지기 전까지는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