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전 노부나가[信長]님의 흑색 화살막이[黒母衣]였던 사람이다. 이 목은 니가 죽을 때까지 세운 무공 중 가장 큰 공적이 될 것이다. 너는 정말 운이 좋구나. 어서 나를 죽이고 수훈을 세우거라”


1569년. 1월 3일.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는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의 마지막 거점 토오토우미[遠江]의 카게가와 성[掛川城] 공략을 위해 8000의 군사를 이끌고 오카자키 성[岡崎城]을 출발.

이에야스는 토오토우미를 가로질러 가며 호족들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 같은 달 17일 카게가와 성 북쪽에 진을 치고 공성 시작.

18일. 우지자네 부하이며, 노부나가의 미노[美濃] 침공으로 고향에서 쫓겨난 미노 출신 히네노 빗츄우[日根野 備中]의 급습으로 이에야스 측 전선기지 중 하나인 카나마루 요새[金丸山砦] 함락. 이에야스는 지원군으로 이마가와를 배신하고 자신에게 붙은 토오토우미의 호족 오가사와라 우지오키[小笠原 氏興], 본거지 미카와[三河]의 군사들까지 보냈으나 다 패배하고 퇴각함. 이에야스 이에 엄청 분노.

20일. 이마가와 측. 또다시 성밖으로 나와 개김. 오가사와라 요격하러 나섰으나 패퇴. 이에야스 다시 미카와 군세를 파견하여 농성군을 패퇴시켜 성 안으로 몰아넣음.

22일 저녁. 이마가와 측. 토구가와 진영에 야습을 가하나, 토쿠가와 측은 미리 알아채고 매복을 펼쳐 큰 승리를 거둠.[각주:1]

23일 새벽. 패퇴하는 이마가와 야습군을 뒤쫓아 토쿠가와 군 성내로 돌격. 혼전.

혼전 속에서 많은 상처를 입고 다 죽어 가던 이토우 부헤에[伊藤 武兵衛] 앞에 무쿠하라 지에몬[椋原 冶右衛門]이라는 이에야스 부하가 다가와 창을 들이대자, 앉아 있던 부헤에는 벌떡 일어나,

“나는 예전 노부나가[信長]님의 흑색 화살막이[黒母衣]였던 사람이다. 이 목은 니가 죽을 때까지 세운 무공 중 가장 큰 공적이 될 것이다. 너는 정말 운이 좋구나. 어서 나를 죽이고 수훈을 세우거라”

라고 외치며 칼을 던져버리고 목을 길게 내밀어 죽음을 맞이하였다.


같은 해 같은 달 6일.

이토오 부헤에가 죽는 순간까지 인정받았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미노[美濃] 기후 성[岐阜城]의 성주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이 옹립한 15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가 머무는 혼코쿠 사[本圀寺]에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이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신들에게 동원령을 내리면서 자신은 단기(單騎) 출격하였다.


카게가와 성은 그 후에도 버텨 같은 해 5월 6일 우지자네의 안전을 조건으로 개성.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장인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가 있는 사가미[相模]로 향했다.


이에야스의 직속부하[旗本]였던 무쿠하라 지에몬은 후일 토쿠가와 사천왕의 한 명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에게 파견된 가로[御附家老][각주:2]가 되어 대대로 이이 가문[井伊家]을 섬겼다. 상기의 이야기는 대대로 후손에게 전해진 선조의 무공담이라 한다.


이토우 부헤에[伊藤 武兵衛]. ?~1569.
武兵衛는 ‘타케베에’, ‘무헤에’라고도 읽는 듯.
사가미[相模] 출신이라고 한다. 일찍부터 노부나가를 섬기다 그에게 인정받아 엘리트 친위부대인 ‘흑색 화살막이 군단[黒母衣衆]’에 발탁되었으나, 동료를 죽이고 오다 가문[織田家]을 떠나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를 섬긴다. 1569년 1월 23일. 카케가와 성[掛川城] 전투에서 토쿠가와의 무쿠하라 지에몬[椋原 冶右衛門]에게 죽었다.

  1. 여담으로 이때 공적을 세운 사람 중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노부나가를 섬기기 이전에 속해 있었던 마츠시타 카헤에[松下 嘉兵衛]도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2. 다이묘우[大名]에게 막부에서 파견된 가로[御附家老]로, 격으로 따지면 동격이었다. 가문에 따라서는 막부가 파견한 감시역이기도 했다. 때문에 후대로 갈 수록 다이묘우와 동격이라 우기는 파견가로와 자신의 가신이나 마찬가지로 여기는 다이묘우[大名] 간에 불화가 생기기도 하였으며, 직접 막부에 주청하여 벗어나길 바라는 파견가로 가문도 있었다. [본문으로]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12/e2009121318055597490.htm
https://m.sedaily.com/NewsView/1HR58NY109
에 실린 글을 보면서….

☞ 한문에 링크 걸린 곳은 일본어 위키로 점프합니다.
☞ 노란 칸안에 굵은 글씨는 본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주신구라(忠臣藏).' 연말연시면 으레 일본의 TV에 등장하는 특집극 소재다. 내용은 주군을 잃은 사무라이 47인의 복수극.

 

 

적어도 신문처럼 영향력이 있으면 표기법을 따라주었으면 좋겠습니다[각주:1]. 국립국어원의 일본어 표기법에 따라 ‘ちゅうしんぐら’이니 ‘주신구라’로 해야 하지요.
풀네임을 따지자면 ‘충신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忠臣 大石 内助]’이니 [충신 쿠라]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듯도 싶으나, 역시 문학 작품의 고유 명사이니 [주신구라]인 편도 좋을 듯.

 

시골의 다이묘(영주) 아사노가 수도인 에도에서 다른 다이묘인 기라에게 상처를 입혔다.' 아사노가 분개한 이유는 술수에 빠져 격식과 예법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게 돼 위신을 잃었다고 판단했기 때문. 아사노는 술책을 꾸민 기라의 얼굴에 칼자국을 남겨 무사로서 위신을 세웠으나 '할복' 명령을 받았다. 쇼군 앞에서 칼을 뽑았다는 이유에서다.

 

 

1701년에 반슈우[각주:2] 아코우 번[播州 赤穂藩] 5만석의 영주 아사노 타쿠미노카미[浅野 内匠頭][각주:3]가 키라 코우즈케노스케[吉良 上野介]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맞습니다만, 키라는 다이묘우[大名]가 아닙니다.

키라는 막부 직신 즉 하타모토[旗本]로 그의 영지는 다이묘우의 기준인 1만석에 미치지 못합니다. 가문 대대로 미카와[三河] 키라[吉良]라는 곳에 4200석, 그에 더하여 직책이 코우케키모이리[高家肝煎][각주:4]였기에 봉급으로 2000석을 더하여 총 6200석의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말이 길어졌는데 한마디로 다이묘우가 아니었단 말입죠.

참고로 코우케[高家]란 막부(幕府]의 예식(禮式) 담당으로, 쇼우군[将軍]의 대리인이 되어 쿄우토[京都] 조정에 사자로 파견되거나, 반대로 쿄우토 조정에서 칙사가 왔을 시에는 칙사를 접대하는 향응역의 지휘와 지도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그 지휘와 지도 아래서 조정의 칙사들을 접대하는 직책으로 향응역[饗応役]이 있었습니다. 향응역에는 보통 5만석 전후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5]가 임명되었습니다.

지도를 하는 키라 코우즈케노스케[吉良 上野介]와 그 지도를 받는 아코우 번주 아사노 타쿠미노카미[浅野 内匠頭]는 서로 반목했다고 합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키라가 원했던 아코우 번의 염전기법을 알려주지 않았다던가, 당시 코우케가 향응역을 지도하면 사례금을 받는 것이 통례였지만 아사노가 키라에게 준 사례금이 겁나게 적었다거나, 성질 급하고 한번 폭발하면 가슴에 통증이 생기는 병을 가진 아사노의 성질이 더러워서라던가…. 어쨌든 먼저 아사노의 뒷따마를 깐 것은 키라라고 합니다.[각주:6]

이야기나 연극의 세계에서는 저 불화로 키라가 아사노를 괴롭혔다고 합니다.
칙사를 맞이하는 방의 병풍을 화려한 것으로 하면 안 된다고 키라가 말했기에 아코우 번은 수묵화로 된 병풍을 준비했더니 나중에는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쪽을 준다거나, 예복으로 다이몬[大紋]이라는 복장을 해야 하는데 키라는 나가카미시모[長裃]를 입고 나오라고 해서 쪽을 준다거나, 준비해야 할 요리도 반대로 알려주고, 타타미[畳]도 교체해야 하는데 알려주지 않았다던가…하는 이야기들이 나와 그럴 때마다 아코우 번사들이 임기응변으로 그런 난관을 헤쳐나가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만… 실제로 아사노 타쿠미노카미와 아코우 번은 이 일이 일어나기 18년 전인 1682년에 조선통신사 향응역에 임명된 적이 있었으며, 이번 칙사 향응역에 앞서서도 5년 전 칙사 향응역이었던 아사노 타쿠미노카미의 마누라의 친정 미요시 번[三次藩]의 기록도 조사했으며, 바로 전년 향응역이었던 시바타 번[新発田藩]의 기록도 살폈다 하기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어디까지나 이야기 속에서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장치겠지요.

하단에 있는 하늘색 옷이 다이몬[大紋], 상단에 있는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이 나가카미시모[長裃].

서울경제의 편집위원께서는 쇼우군[将軍] 앞에서 칼을 뽑았다고 하는데, 물론 아닙니다. 칼을 뽑은 장소는 외측 복도로 벽에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고 해서 ‘마츠노오오로우카[松の大廊下]’라 불리는 복도에서 입니다. 성안에서 칼을 뽑는 것도 물론 금지입니다.

소나무가 그려진 복도[松の大廊下](모형). 사건은 쇼우군 앞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복도에서 일어나죠.

어쨌든, 키라는 이 복도에서 막부 루스이[留守居][각주:7]들을 총괄하는 오오루스이[大留守居] 카지카와 요소베에[梶川 与惣兵衛]와 이야기 하던 중, 아사노 타쿠미노카미가 키라의 등뒤로 다가와 “여태까지의 원한 잊지 않았겠지!”라며 차고 있던 예식용 칼[殿中差]로 한 번 휘두르지만 헛스윙, 그 외치는 소리에 뒤돌아 본 키라의 이마 한가운데에 약 11cm, 그 상처에 놀라 도망가는 키라의 등 오른쪽 견갑골에 18cm 정도의 상처를 남기고, 곁에 있던 카지카와 요소베에에게 제압당합니다.

사건을 일으킨 당시만 해도 무사의 위신 세웠다기 보다는 ‘미친놈 별지랄 다하는구나’라는 인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사노가 칼 들고 설치며 자기를 공격하는데도 성안이라는 장소를 분별한 키라는 무죄석방 되었습니다. 싸움을 하면 양쪽이 다 벌을 받던 무가의 관습법 ‘다툼 시 쌍방 처벌[喧嘩両成敗]’에 어긋났기에 약간의 동요가 있었습니다만, 조사 결과, 때와 장소를 분별치 못하고 원한이 있었기에 칼질 했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젊은 영주 아사노와 장소 분별한 늙은 키라와의 차이는 그 후의 처분에서도 나타납니다. 아사노는 당일 할복 & 번 폐쇄, 키라는 무죄석방.

 

아사노가 죽자 로닌(浪人·떠돌이 무사)이 될 처지인 가신 300여명이 모였다. 우두머리 격인 오이시는 '당장 기라를 치자'는 사무라이들을 만류하고 은거에 들어갔다. 적의 감시에서 벗어나고 끝까지 함께 갈 동지를 가려내기 위해서다.

 

저 300명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군요....This is Akou!?
에도[江戸]에서의 급변이 아코우 성[赤穂城]에 전해지자, 필두 가로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大石 内蔵助]는 아코우 영내에 있던 번사(藩士) 200여명을 성안에 모이게 하여 농성을 할 것인지, 개성을 할 것인지를 협의하게 됩니다. 막부가 번 폐쇄를 명했으니 따르는 것이 순리였지만, 아코우 번사들에게는 자신들의 주군이 할복하고 번까지 폐쇄 당했는데도, 키라는 무죄 석방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다툼 시 쌍방 처벌[喧嘩両成敗]’였으니까요. 관습법으로요.

막부 역시 행여라도 아코우 번이 개길까 싶어[각주:8] 수성사[収城使]의 정사로 5만3000석의 타츠노 번[竜野藩]의 번주 와키사카 아와지노카미[脇坂 淡路守], 부사로 2만 3000석의 아시모리 번[足守藩]의 번주 키노시타 히고노카미[木下 肥後守]의 병사 4500여명이 아코우 성을 향하였고, 주변 오카야마 번[岡山藩]은 600명을 번경에 배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히메지[姫路], 톳토리[鳥取], 바다 건너 시코쿠[四国]의 마루가메[丸亀], 토쿠시마[徳島] 번도 만일을 대비하여 경계 병력을 준비시켰습니다.

당연 비둘기파와 매파가 생겼습니다.
비둘기파는 성을 넘기고 막부의 명에 순순히 따르자는 파였고, 매파는 이대로 물러나서는 너무 억울하니 농성하며 키라의 처벌도 상소하고자 했습니다. 5만석 영주의 성으로는 너무도 방어력이 뛰어나고 훌륭한 편이었던 아코우 성[赤穂城]을 내세워 농성하자는 것이었죠.

그리고 어느 시대건 비둘기파는 비겁한 놈들이 되고 매파는 지조와 절개의 사나이가 되는 법.
비둘기파의 수장이던 차석 가로 겸 번 재정담당 오오노 쿠로베에[大野 九郎兵衛]는 매파의 협박과 욕설에 견디지 못하고 밤중에 튀게 됩니다. 얼마나 급했는지 손녀를 놓고 도망갈 정도였습죠.

매파도 둘로 나뉘는데 매파 중 강경파는 아시가루 부대장[足軽頭] 하라 소우에몬[原 惣右衛門][각주:9]  등 다수로 그들은 농성하다 죽자고 주장. 매파 중에서도 온건파는 필두 가로 오오이시 쿠라노스케를 중심으로 우선 성은 내주더라도 막부에게 할복한 아사노 타쿠미노카미의 동생 아사노 다이가쿠[浅野 大学]를 새로운 번주로 삼아 가문을 재흥과 동시에 키라에게도 벌을 내려달라는 청원을 하자는 쪽이었죠.

…이야기가 길어지니 어쨌든 성을 내주게 됩니다. 오오이시는 끝까지 농성하자던 강경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후일을 위한 혈판 서약서를 쓰게 하였습니다. 그 혈판 서약서를 쓰며 아사노 가문 재흥을 맹세했던 자들 중 끈이 있는 자들은 그런 끈을 의지하여 흩어지고, 능력 있는 자들은 능력을 살려 제 갈 길들을 갑니다. 능력 없고 빽이 없어 남겨진 쭉정이들은[각주:10], 번주를 죽게 만들고 자기는 살아남은 키라를 당장 죽이자는 파와 막부의 최종판결을 기다리자는 파로 나뉘게 됩니다. 오오이시는 막부에게 청원했던 아사노 다이가쿠의 번주 취임과 아코우 아사노 가문 재흥을 기다립니다만…. 막부의 최종판결은 아사노 다이가쿠의 영구 칩거였습니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자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키라에 대한 복수뿐이었습니다.

 

오이시가 고른 47명은 '주군과 의리를 저버린 자'라는 수모 속에서 시간을 기다렸다. 군자금을 마련하려 행상에 나서고 가족을 버렸다. 어떤 로닌은 여동생을 원수인 기라에게 하녀 겸 첩으로 바쳤다. 

47이란 숫자는 키라 저택에 쳐들어 간 숫자로 쳐들어 가기 전만 해도 몇 명이 더 있었습니다[각주:11]. 가령 ‘여동생을 원수인 기라에게 하녀 겸 첩으로 바쳤다’는 낭인은 가장 마지막에 탈맹한 모우리 코헤이타[毛利 小平太]를 말하는 것으로, 그가 여동생을 하녀 겸 첩으로 바쳤다는 것은 후세의 창작입니다[각주:12]. 모우리 코헤이타가 키라의 저택에 직접 들어가 하인으로 일하며 가장 정확한 정보를 가져다 주었기에 후세의 작가가 그런 식으로 창작을 하였나 봅니다.[각주:13]

 

복수에 성공한 로닌들은 쇼균의 할복 명령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영원히 살아 있다.

 

 

이 복수극에 성공한 로우시[浪士]들은 막부에 자수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처분을 두고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츠나요시[徳川 綱吉]는 고민하게 됩니다.
시간을 두었다가 나중에 살려주자는 막부의 평정소[각주:14], 그러나 평정소의 보고를 받은 노중[老中][각주:15]들의 결론은 조직폭력배같은 놈들이니[각주:16] 참수를 하자고 주장[각주:17], 이 상반된 의견에 곤혹해진 츠나요시의 최측근 야나기사와 요시야스[柳沢 吉保]는 자신의 브레인 오규우 소라이[荻生 徂徠]에게 의견을 묻자, 그들의 명분을 인정해주는 명예로운 할복[각주:18]. 야나기사와 요시야스는 오규우 소라이의 의견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기고 쇼우군 츠나요시에게 여쭙니다.
 츠나요시는 그럼에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다음 해 2월 1일 신년 인사를 하러 온 우에노[上野] 칸에이 사[寛永寺]의 코우벤 법친왕[公弁法親王]에게 의견을 묻자, 그들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으며 충신인 그들은 목숨을 살려주더라도 다른 주군을 모시지 못할 것. 그러니 지금 그들에게 명예 있는 죽음을 언도하면 그 이름을 영원히 남길 수 있다 – 고 츠나요시에게 말하여 할복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법친왕의 말대로 그들은 이후 충성의 대명사로 일본인에게 영원히 남습죠. 또한 연말연시가 되면 어느 방송국 중 하나는 반드시 저 츄우신쿠라[忠臣蔵]에 관한 드라마를 방영하지요.

 

호전적 일본과 집요하게 기술을 개발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일본기업에도 '주신구라'라는 공통의 인자가 담겨 있다.

 

 

이 말은 사족인 것 같습니다. 저도 사족을 달아보자면, 전투국가 한국은 집요하게 기술 개발과 시장 개척을 안 한답니까? 그럼 우리 기업에도 ‘주신구라’의 인자가 있나요?

  1. 저처럼 표기법을 전혀 따르지 않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지만, 전 듣보잡 블로거고 신문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본문으로]
  2. 하리마[播磨]를 말합니다. [본문으로]
  3.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가신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의 현손. 즉 손자의 손자. [본문으로]
  4. 코우케를 통솔하는 직책 [본문으로]
  5.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후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부하가 된 다이묘우 [본문으로]
  6. 키라 저택에 침입한 47명 중 한 명인 호리베 야헤에[堀部 弥兵衛]가 쓴 '堀部弥兵衛金丸私記'에는, "칙사가 머무는 저택에서 키라 코우즈케노스케님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욕을 하셨지만, 맡은 임무가 막중한 것을 알기에 아사노 타쿠미노카미님은 계속 참으셨다" [본문으로]
  7. 에도성 안채[大奥]를 감찰, 성 출입증서 관리, 쇼우군이 에도성에서 외출했을 때 에도성 수비의 임무를 가진 직책. [본문으로]
  8. 사실 이런 사태에 병력 파견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아코우 번도 7년전인 1694년 빗츄우[備中] 마츠야마 번[松山藩] 미즈타니 가문[水谷家]에 후계가 끊겨 번 폐쇄가 되었을 때 3500명을 이끌고 가서 성을 접수한 적이 있었습니다. [본문으로]
  9. 여담으로 2000년도 작 영화 '기묘한 이야기 – 사무라이의 휴대폰편'에서 자주 오오이시에게 보고하며 귀찮게 하던 동글동글한 아저씨가 바로 하라 소우에몬입니다. [본문으로]
  10. 큰일을 벌이고 명성을 높여 다른 가문에 취직하고자 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실제로 거사를 벌일 후에 낭인들은 4가문에 각각 나뉘어 유폐 당했는데, 그 중 쿠마모토 호소카와 번[熊本細川藩]의 번주 호소카와 츠나토시[細川 綱利]는, 거사를 벌인 충성이 기특하다며 나중에 잘 되면 자기네 번에 취직시켜주겠다는 말을 하여, 낭인들을 희망에 부풀게 만듭니다. [본문으로]
  11. 최종적으로 맹약서를 서명한 사람은 1702년 음력 7월~8월 사이에 55명이었고, 그 수가 점점 줄어 사건이 벌어진 1702년 음력 12월 14일에는 8명이 빠진 47명이 되지요. [본문으로]
  12. 쿠니에다 칸지[邦枝 完二]의 여첩자[女間者]. [본문으로]
  13. 참고로 모우리 코헤이타는 거사가 일어나기 3일전인 12월 11일에 탈맹합니다. 이 모우리 코헤이타가 빠지면 그렇잖아도 소심한 오오이시 쿠라노스케가 마음을 돌릴까 두려워, 호리베 야스베에[堀部 安兵衛]는 비밀로 하고 정문 침입조에 배치한 계획서를 오오이시에게 제출할 정도였습니다. 오오이시도 그가 있는 줄 알고 나중에 모우리 코헤이타를 포함시켜 보고할 정도였습죠. [본문으로]
  14. 막부의 최고사법기관. 막부의 최고 직책들이 모여 회의. 단 이때 노중(老中)는 없었음. [본문으로]
  15. 막부의 수상들 [본문으로]
  16. 특히 밤 중에 무리지어 활까지 쏘며 공격한 것은 불한당이라며. [본문으로]
  17. 당시 무사에게 참수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이었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18. 할복은 무사다운 죽음이었다 합니다. [본문으로]

연도를 제외하고 날짜는 전부 일본의 구력(舊曆 ) 기준입니다.(신력 찾기 귀찮아서요…)
한글에 링크된 부분은 다음 백과사전.
한문에 링크된 부분은 위키 일본판 해당 사항으로 링크된 것입니다.

신관제의정서가 만들어지기까지

 1867년. 그러니까 일본에선 케이오우(慶応) 2년 6월.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 강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던 야마우치 요우도우(山内 容堂)는 도막(倒幕)으로 치닫는 삿쵸우(薩長)에게서 토쿠가와 가문을 지키기 위한 방도를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사카모토 료우마(坂本 龍馬)가  등장하여 선중팔책(船中八策[각주:1])을 건의합니다. 
 이것을 토사번(土佐藩)의 고토우 쇼우지로우(後藤 象二郎)에게서 전 번주(藩主)인 야마우치 요우도우에게로 그리고 야마우치는 바쿠후(幕府) 노중(老中) 이타쿠라 카츠키요(板倉 勝静)에게 역시 건의하여 1867년 10월 14일 당시 쇼우군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는 조정에 정권을 반환하게 됩니다. [대정봉환(大政奉還)]

 여기서 잠깐~
 사카모토 료우마는 토쿠가와 바쿠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에도 시대 때도 다른 번(藩)에 비해 유별나게 차별 받던 토사의 고우시(郷士) 출신이었기에 그 토사 번을 성립시키고 유지시키는 바쿠후를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다만 일본 전체를 위해서 원한 깊었던 토사 번을 이용하기로 하였으며 [각주:2], 또한 삿쵸우가 하자는 대로 무력도막으로 발전할 경우 발생할 전란과 거기에 파고들려는 서구열강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카모토는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거부할 시 아예 요시노부를 살해하려고 까지 합니다. 요시노부는 3년 전인 1863~1864년에 존재했던 유력 다이묘우 출신자들의 연합정권인 참여회의(参預会議)때만 하더라도 바쿠후의 권위와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어렵게 성립된 참여회의를 무너뜨린 경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건백을 반드시 성공시키고 실패시에는 고토우에게 배를 가르라며[각주:3],

난 처음부터 목숨을 걸고 있었으니까 만약 건백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종묘사직을 위해서 카이엔타이(海援隊)를 이끌고 입궐하려는 쇼우군을 죽일 생각입니다. 그리 되었을 시는 저 세상에서 선생(고토우)와 만나겠습니다
万一行ハれざれば固より必死の御覚悟故、御下城無之時ハ、海援隊一手を以て大樹参内の道路ニ待受、社稷の為、不倶戴天の讐を報じ、事の成否ニ論なく、先生地下ニ御面会仕候
- 1867년 10월 13일에 고토우 쇼우지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런 때 고토우에게서 성공의 편지가 도착합니다. 그 권력과 권위에 집착하던 요시노부가 일본을 위해 자신의 생각에 따라 준 것을 기뻐하며,
쇼우군 가문의 지금 심정을 이해합니다. 훌륭한 결단을 내려주셨군요. 훌륭한 결단을 내려주셨군요. 맹세하오니 저는 공(즉 요시노부)을 위해서 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将軍家の今日の心中さこそ察し申す。よくも断じ給えるものかな。よくも断じ給えるものかな。余は誓ってこの公のために一命を捨てん
-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 栄一)의 [徳川慶喜公伝]에서[각주:4]
 라며 정권을 조정에 반환하여도 다시 정치에 참여할 길을 열어준 것이 바로 신관제의정서(新官制疑定書)입니다.(요시노부가 받아들인 배경에는 정치체계만 바꾸어 대정봉환 후에도 계속 토쿠가와 가문이 권력을 좌우할 수 있게 하고자 하는 꿍꿍이도 있었습니다)

각각의 면면들 

 사카모토 료우마는 산죠우 가문(三条家)의 케닌(家人[각주:5])인 토다 우타(戸田 雅楽)와 협의하여 대정봉환 후의 관료를 정하게 됩니다. 산죠우 가문 사람과 협의한 만큼 일본 황실의 친왕들보다 낮은 기껏해야 세이가케(清華家[각주:6])인 산죠우 사네토미가 무려 칸파쿠에 임명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칸파쿠(関白)

산죠우 사네토미(三条 実美) - 8월18일의 정변(八月十八日の政変)으로 쿄우토(京都)에서 쫓겨난 존왕양이(尊皇攘夷)파 쿠교우(公卿)들 즉 소위 칠경낙향(七卿落ち) 중 가장 가문의 격식이 높았던 것과 토다 우타 덕분에 칸파쿠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귀족)

나이다이진(内大臣)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 –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최후의 쇼우군(将軍). (바쿠후(幕府))

기소우(議奏)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有栖川宮 熾仁 親王) – 쵸우슈우(長州)와 끈이 강했던 친왕. 14대 쇼우군(将軍) 이에모치(家茂)의 부인(카즈노미야(和宮))은 원래 이 사람과 약혼한 사이였기에 정혼자를 빼앗아 간 바쿠후에 원한을 갖고 있었습죠.(왕가(宮家))

야마시나노미야 아키라 친왕(山階宮 晃 親王)  - 후시미노미야 가문(伏見宮家[각주:7]) 출신. 친왕이면서 무려 개국론을 주장할 정도로 깨인 인물. 1863년 조정(朝廷)내에 설치된 정무 의론 기관 [国事掛]의 수장 격인 [국사어용담당(国事御用掛)]에 있을 정도로 친왕 출신 치고 뛰어난 정치력을 소유. (왕가)

닌나지노미야 요시아키 친왕(仁和寺宮 嘉彰 親王) – 대정봉환 전까지만 해도 닌나 사(仁和寺)에 있었기에 활약은 없었습니다. 아마 닌나지노미야가 토다 우타의 친가인 오자키(尾崎) 가문의 주인댁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왕가)

시마즈 타다요시(島津 忠義) – 당시 사츠마 번(薩摩藩)의 번주 (사츠마 번)

모우리 타카치카(毛利 敬親) – 기록에 따라 그의 양아들인 모우리 사다히로(毛利 定広)가 그의 이름대신 들어가 있기도 함.(쵸우슈우 번)

마츠다이라 슌가쿠(松平 春嶽) – 그야말로 막정을 좌지우지하던 사람. 후쿠이 번(福井藩)의 번주. 당시 나름 똑똑했다는 네 명의 번주를 이르는 사현후(四賢侯) 중 한 명.(후쿠이 번)

야마우치 요우도우(山内 容堂) – 토사 번(土佐藩)의 전 번주. 당시 나름 똑똑했다는 네 명의 번주를 이르는 사현후(四賢侯) 중 한 명.(토사 번)

나베시마 칸소우(鍋島 閑叟) – 번주가 가는 길에 상인들이 빚 갚으라며 막아서던 막장 사가 번(佐賀藩)을 일본에서 가장 하이테크한 번으로 만든 인물.(사가 번)

토쿠가와 요시카츠(徳川 慶勝) –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어삼가(御三家)의 필두 오와리 번(尾張藩)의 전 번주(오와리 번)

다테 무네나리(伊達 宗城) – 우와지마 번(宇和島藩)의 전 번주. 당시 나름 똑똑했다는 네 명의 번주를 이르는 사현후(四賢侯) 중 한 명.(우와지마 번)

오오기마치산죠우 사네나루(正親町三条 実愛) – 사츠마 번(薩摩藩)과 끈이 강했던 귀족. (귀족)

나카야마 타다야스(中山 忠能) – 메이지 텐노우(明治天皇)의 외조부.(귀족)

나카미카도 츠네유키(中御門 経之) – 양이(攘夷)파 귀족.(귀족)

산기(参議)

이와쿠라 토모미(岩倉 具視) – 당시 조정에서 가장 정치력이 높았던 귀족. 출세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던 인물.(귀족)

히가시쿠제 미치토미(東久世 通禧) – 칠경낙향 멤버 중 한 명.(귀족)

오오하라 시게토미(大原 重徳) – 국사어용담당(国事御用掛). 친막파 귀족이나 친왕과 자주 대립(귀족)

나가오카 요시노스케(長岡 良之助) – 호소카와 쿠마모토 번(細川熊本藩) 번주의 자식.(히고 번)

사이고우 타카모리(西郷 隆盛) – 유신삼걸(維新三傑) 중 한 명.(사츠마 번)

코마츠 타테와키(小松 帯刀) – 사츠마 번의 실질적인 수상. 솔직히 이 사람 없었음 유신도 없었다고 생각함. (사츠마 번)

오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 利通) – 유신삼걸 중 한 명.(사츠마 번)

키도 타카요시(木戸 孝允) – 유신삼걸 중 한 명.(쵸우슈우 번)

히로사와 사네오미(広沢 真臣) – 왕정복고의 공신에게 조정이 내린 식읍(永世禄)을 쵸우슈우에서 받은 번사(藩士)는 키도(木戸)와 히로사와 뿐.(쵸우슈우 번)

요코이 쇼우난(横井 小楠) – 사카모토 료우마는 이 사람의 심부름꾼이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카모토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히고 번[각주:8])

유리 키마마사(由利 公正) – 후쿠이 번의 재정을 재건하여 막말기에 후쿠이 번이 제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함.(후쿠이 번)

고토우 쇼우지로우(後藤 象二郎) – 뛰어난 정략가. 토사 근왕당(土佐勤王党)을 탄압하는 바람에 당시 정세에 뒤쳐져 있던 토사를 단번에 유신의 주역 중 하나로 만들었습죠.(토사 번)

후쿠오카 타카치카(福岡 孝弟) – 대정봉환과 삿쵸우와 토사의 동맹에 조력(토사 번)

 후에 삿쵸우도비(薩長土肥)의 출신자들만 득세한 메이지 정부에 비하면 실로 다양한 출신들이 이름을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료우마가 직접 만난 이들이 대부분(친왕이나 귀족계층의 일부는 토다 우타(戸田 雅楽))의 의견이 반영된 듯)인지라 료우마의 발이 얼마나 넓은지도 알 수 있습니다.

 발 넓은 료우마가 직접 만나 상대방의 그릇을 재가며 선택한 인물 중에 그의 스승이라는 카츠 카이슈우(勝 海舟)의 이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아시는 바대로 사카모토도 카츠를 높게 평가하긴 하였습니다.

원래 인간의 일생은 처음부터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이지요. 운이 나쁜 사람은 목욕탕에서 뒤로 자빠졌는데도 불알이 깨져 죽는 법도 있으니까요.
그에 비해 저는 운이 강한지 죽을지도 모른다고 곳에 가서도 죽지 않으며, 스스로 죽으려고 생각하더라도 아직 더 살면서 해야 할 일이 많기에, 지금은 일본 제일의 인물 카츠 린타로우(勝 憐太郎)라는 사람의 제자가 되어 매일매일 여러 아이디어를 짜느라 노력하고 있습니다
扨も扨も人間の一世ハがてんの行ぬハ元よりの事、うんのわるいものハふろよりいでんとして、きんたまをつめわりて死ぬるものもあり。
夫とくらべてハ私などハ、うんがつよくなにほど死ぬるバへででもしなれず、じぶんでしのふと思ふても又いきねバならん事ニなり、今にてハ日本第一の人物勝憐太郎殿という人にでしになり、日々兼而思付所をせいといたしおり申候
1863년 3월 20일에 누나인 오토메(乙女)에게 보낸 편지.
 하지만 잠시 같이 행동하긴 하지만 그 후엔 카츠를 쌩깝니다. 시기 상으로는 대략 칠경낙향(七卿落ち)에 이은 금문의 변(禁門の変)에서 사츠마 군의 지휘관으로서 대활약을 한 사이고우 타카모리에게 만나보려고 하니 카츠 카이슈우에게 소개장을 써달라고 한 즈음부터입니다. 1864년 여름 즈음입죠.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카츠 카이슈우의 개차반[각주:9]같은 성격으로 인해서 신정부라는 밭에 생길 불화의 싹을 미리 제거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쨌든 더 이야기를 이어갑시다.(…다 쓰고 나서야 이 글의 목적인 료우마가 구상한 신정부의 관료에 카츠 카이슈우(勝 海舟)의 이름이 없다는 것만 쓰면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기에…)

 저 이름들 속에는 토다 우타의 강력한 추천으로 사카모토 료우마의 이름도 산기(参議)에 있었지만 몇 일 후 사이고우 타카모리에게 보여주었을 때는 료우마가 일부러 자신의 이름을 빼고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사이고우는 저 면면들을 보고 정말 균형 잡힌 인선이라고 하며 사카모토의 이름이 없는 것을 말하자…

“나는 공무원이 싫어. 정해진 시간에 집을 나서 정해진 시간에 집에 돌아오는 것은 나하고 안 맞아”

“그럼 무엇을 할 생각인가요?” 라고 묻는 사이고우에게

“음… 세계의 카이엔타이(海援隊)라도 만들까?”

이 말을 옆에서 듣고 무츠 무네미츠(陸奥 宗光)는,

“료우마와 비교하면 작금의 삿쵸우 인간들은 쭉정이지. 유신이 되기 전 신정부의 관료를 정할 때 료우마는 세계의 카이엔타이를~하고 말했어. 그때 료우마는 사이고우보다 한 층 더 거대해 보였지”
龍馬あらば、今の薩長人などは青菜に塩だね。維新前、新政府の役割を定めたる際、龍馬は世界の海援隊云々と言えり。この時龍馬は西郷より一層大人物のように思われき”

고 후일 말했다고 합니다…만 실제로는 료우마의 이름이 있었던 듯 합니다.[각주:10]

신관제의정서(新官制擬定書)에서는 산기(参議)에 이름이 있던 사카모토 료우마

 이 신관제의정서(新官制擬定書)는 오자키 사부로우(尾崎 三良)가 쓴 기록 등에서 나옵니다. 참고로 오자키 사부로우란 사카모토 료우마와 함께 신관제의정서를 만든 토다 우타(戸田 雅楽)가 유신 후 친가의 성(姓)으로 돌아가면서 칭한 이름입니다.

오자키 사부로우의 기록은 이하와 같습니다.

[오자키 사부로우 자서전(尾崎三良自叙略伝)],
[역사 담화 속기록, 79편, 오자키 사부로우 담화(史談会速記禄, 79輯、尾崎三良談話)]
[‘사카모토 료우마 관련 문서’ 1권에 수록 된 ‘오자키 사부로우 비망록’(坂本龍馬関係文書1巻, 尾崎三良手控)]
[‘사카모토 료우마, 카이엔타이의 알파와 오메가 3’에 인용 된 ‘오자키 사부로우 비망록’(坂本龍馬海援隊始末 3, 尾崎三良手控)]
[유신 토사 근왕사(維新土佐勤王史)]

 저 다섯 개의 기록 중 상기 3개(붉은색)와 하기 2개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기 2개 즉 [‘사카모토 료우마’ 관련 문서]와 [유신 토사 근왕사]는 오자키 사부로우의 기록을 근거로 ‘사카자키 시란(坂崎 紫瀾)’이라는 인물이 쓴 글입니다. 즉 원 소스에 있었던 [산기(参議) 사카모토 료우마]를 없앤 것이죠. 이 사카자키 시란이란 사람은 어째서 있었던 이름을 지운 것일까요?

사카자키 시란(坂崎 紫瀾)이란 인물.

 사카자키 시란은 토사 번 출신입니다.
 유신 후 메이지 정부에서 마츠모토(松本)란 곳의 재판소 판사를 했지만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다 정쟁에 패하여 사직 & 낙향. 후에 고향인 토사에서 도요우 신문(土陽新聞 – 현 코우치 신문(高知新聞))에 사카모토 료우마를 주인공으로 한 [한혈천리마(汗血千里駒)]를 썼는데 이것이 인기폭발. 현 일본에서 역사상 좋아하는 인물 1,2위를 다투게 만드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각주:11]. 그리고 그 이후에 나오는 료우마 관련 소설들은 이 [한혈천리마]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많이 차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정치적인 색채가 강한 소설이라고 합니다.
 당시 일본 정계와 군부는 삿쵸우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항하여 정부의 중추에서 밀려난 토사 출신자들은 자유민권운동(自由民権運動)을 벌이며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가 총리인 자유당(自由党)을 결성하였습니다. 사카자키 시란은 이 자유당의 일원으로 자기 고장의 인물 사카모토 료우마의 전기소설인 [한혈천리마]를 써 료우마를 자유민권의 선구자로서 자유당 이념의 화신으로 만들었습니다.

현실은 소설과 다른 경우가 많습죠.

 그런 료우마가 권세를 휘두르는 관료라니? 자유민권의 이념과 반했던 것이죠. 그래서 소설에서는 그런 부분을 뺀 것입니다.

 료우마가 등장하는 소설, 드라마, 영화에는 항상 나오는 “세계의 카이엔타이(海援隊)라도 할까”라는 부분은 일본을 위해서 노력하지만 그것을 내세워 권세를 휘두르는 일 없이 시선을 전세계로 향했던 료우마의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검호 료우마.
 사람 죽이지 않았던 료우마.
 해군 사관학교의 생도 대표인 료우마
 인물이라는 카츠 카이슈우와의 멋진 사제지간
 삿쵸우 동맹을 생각해낸 사람
 대정봉환을 처음으로 생각한 사람… 등등의 잘못 알려진 많은 료우마 전설.

 실제로 료우마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지금처럼 여전히 인기가 있을까요? 궁금해질 때도 있습니다.

ps1;쓰기 시작한 것은 “그냥 보충”에서 댓글로 쓴다고 한 날부터… 근데 여태까지 남의 지식을 번역만 했지 직접 글을 쓴 적이 없기에 이렇게 오래 되어 버렸네요. 늦어져서 죄송.
ps2;역시 직접 쓴 적이 없기에 적당히 끊어야 하지만 아직 경험 미숙으로 읽기 힘든 난잡한 글이 되고 말았네요. 그 점도 죄송.
ps3;다음 일본사 칼럼은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은 정말 세이와 겐지(清和源氏)만이 될 수 있었을까?” 혹은 “쿄우토와 조정을 지켰다고? - 중세의 조폭 엔랴쿠지(延暦寺)” 아니면 “웅대한 꿈과 그에 비례한 찌질한 행태 – 카츠 카이슈우(勝 海舟)”편 입니다. 북극해의 얼음이 다 없어지기 전까지는 쓰겠습니다.

  1. 사카모토가 나가사키(長崎)에서 쿄우토(京都)로 향하는 중 배 안에서 토사번의 참정(参政 - 산세이) 고토우 쇼우지로우에게 제시한 것 [본문으로]
  2. 이때 토사 번의 앞잡이가 되었다고 다그치는 누이(坂本 乙女)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 이것저것 생각해주셔서 간신배에게 속았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러지 마시길. 나 혼자서 500명이나 700명을 이끌고 천하를 위하는 것보다 24만석을 가지고 천하국가를 위하는 것이 훨씬 나으니 건방지게 들리시겠지만 이런 것에 누님이 조금도 걱정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かれこれの所御かんがへ被成、姦物役人にだまされ候事と御笑被下まじく候。私一人ニて五百人や七百人の人のお引て、天下の御為するより廿四万石を引て、天下国家のの御為致すが甚よろしく、おそれながらこれらの所ニハ、乙様の御心ニハ少し心がおよぶまいかと存候。 1867년 6월 24일 [본문으로]
  3. 료우마는 신분이 너무 미천했기에 직접 나설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으로]
  4. 동시대에는 없었던 말로 이 말은 저 책에서 처음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본문으로]
  5. 상급귀족 가문에 속한 가신. [본문으로]
  6. 일본 귀족(公家)의 가문 격식 중 두 번째. 칸파쿠는 원래 셋케(摂家)만이 될 수 있었다. [본문으로]
  7. 미야 가문(宮家) 중에서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곳. [본문으로]
  8. 이지만 실질적으로 활약한 곳은 후쿠이 번(福井藩). [본문으로]
  9. 뭐 이에 대해서 핼리혜성이 다시 지구에 돌아오기 전에 또 포스팅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10. 즉 무네미츠도 모르지만, 없다는 이야기가 워낙 퍼져있기에, 무츠 자신이 인기인 료우마랑 친했다는 식으로 자랑했다는 말입죠. [본문으로]
  11. 이후로 러일전쟁 때 츠시마 해전(對馬海戰)을 앞두고 료우마가 메이지 텐노우의 황후인 쇼우켄 황후(昭憲皇太后)의 꿈에 나타나 일본 함대를 지키겠다던가, 시바 료우타로우(司馬 遼太郎)의 소설 [료우마가 간다(竜馬がゆく)]의 히트로 이어지며 결정적인 것이 되었습죠 [본문으로]

그냥 보충

일본사 이것저것 2009. 6. 6. 06:12 Posted by 발해지랑
한국에도 ´큰 人物´ 나올 때 됐다

글 중에서 하단에...
국면을 좌지우지한인물은 ‘사쓰마’의‘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오쿠보 도시미치’(大勾保利道),그리고 막부 측의‘가쓰카이슈(勝海州)의세 사람이었다.
음....카츠 카이슈우[勝 海舟]가 마지막에나 등장해서 에도 성을 무혈개성에 얼굴을 비추기는 하지만 국면을 좌지우지한 인물까지는 아니지 않을까요? 어련하면 그의 제자로 여겨지는 사카모토 료우마[坂本 龍馬]가 구상했다고 하는 조각론[각주:1]에도 카츠의 이름은 없을 정도로 존재가 희미하답니다.

‘사이고’는 일찍이 자살하고, ‘오쿠보’는 젊은 나이에 암살되었다. ‘이등’은 우리의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으로 일본은 일찌감치 통일되고, 서구화 근대화의 길을 질주하여 오늘날의 대국이 되었다
사이고우 타카모리[西郷 隆盛]는 지 뜻대로 되지 않자 무작정 낙향해서 '사학교당'이라는 파벌을 만들고는 결국 반란을 일으켰지만('おはんたちがその気なら、おいの身体は差し上げもんそ[각주:2]라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얼간이같은 짓[각주:3]으로 캐삽질하다가 패하고 닥돌하다 총 맞고 '이제는 여기까진가~'하고 배 가른 것.

오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 利通]가 49살에 죽은 것이 젊은 나이였는지 어땠는지는 느끼는 사람마다 다르니 그렇다 치고, 오오쿠보가 개혁하다가 보수꼴통들(당시 일본식으로 보자면)에게 암살당했는지는 아신다면 쓰신 글하고 안 맞지 않을까?

그냥 급한 땜질 포스팅~
  1. 바쿠후 최후의 쇼우군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 慶喜)가 정권을 조정에 되돌려 준 '대정봉환'에 감격하여 차후 정권의 중추(内大臣)에 요시노부를 앉힌 내각..비슷한 것. [본문으로]
  2. 반란을 일으키기 앞서 부하들에게 회의를 시키다 무개추가 반란에 이르르자. "니들이 그런 생각이라면 내 몸을 받치마"... [본문으로]
  3. 쿠마모토 성의 타니 타테키[谷 干城]한테 자기가 성을 비우고 자기 편이 되라고 명령내리면 정부를 배신하고 자기한테 올 줄 알았다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