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1636 5 24 병사(病死) 70.

1567~1636

센다이(仙台) 번조(藩祖). 하타케야마 씨[畠山氏]를 물리치고 '스리아게하라(摺上原) 들판의 전투'에서 사타케[佐竹], 유우키[結城] 연합군을 격퇴. 아시나[芦名]를 멸망시켰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오다와라[小田原] 공격에 참가하지만 늦게 참진하는 바람에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게 된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쟁에서는 동군에 가세하여 우에스기(上杉)와 싸웠다.









화려한 다테 씨(伊達氏)의 전통


 현대에서도 [다테수가타=だて姿-멋진 모습]라던가 [다테메가네=だて眼鏡-멋내기 위해 쓰는 테만 있는 안경]라는 단어는 멋을 낸다거나 화려함을 뜻하는 의미로 통용되는데 이 단어의 기원은 이외로 오래되었다고 한다.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3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 義滿]의 시대. 다테 모치무네[伊達 持宗]라는 오우슈우[奧州]의 호족이 일부러 쿄우토[京都]까지 상경해서는 화려하고 진기한 토산품들로 인사하고 다녔다. 이후 다테씨는 쇼우군이 바뀔 때마다 상경해서 화려하게 물품을 뿌리고 갔다.

 모치무네의 아들 나리무네[成宗]의 행동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일부를 소개해 보자면, 쇼우군[将軍] 요시히사[義向]와 전대 쇼우군[前将軍] 요시마사[義政]에게는 명마 20두 씩과 사금 백 냥 씩을 각각 받친 것 외에 쇼우군의 생모 히노 토미코[日野 富子]를 시작으로 주요한 사람들에게 총 말 95,도[刀] 28자루, 사금 380냥과 그 외의 명산품 등을 합쳐 막대한 양의 물품을 헌상했다. 그 이후로도 쇼우군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 되었기에 쿄우토에서 다테라고 하면 화려함의 대명사가 되어있었다.


 다테씨는 그 후에도 쇼우군의 이름 중에 한자를 받아 적자에게 히사무네[尚宗], 타네무네[稙宗], 하루무네[晴宗], 테루무네[輝宗]등으로 이름을 지어왔다. 단지 테루무네의 즈음에는 쇼우군의 권위가 떨어져서인지 마사무네에게는 다테씨 중흥의 선조 이름을 붙여주었다.


 마사무네의 젊었을 때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방불케하는 면이 있다. 모친에게 사랑받는 동생을 살해해서 영내를 통일하고 주변을 침략하여 세력을 넓혔다. 마침내 숙적 아이즈[会津]의 아시나[盧名]를 물리쳤으나 이미 중앙에선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공격을 계획하며 천하인(天下人)가 되려 하고 있었다. 마사무네가 천하를 잡기에는 30년이나 늦었던 것이다. 마음을 정한 마사무네는 전신 백색으로 된 죽어서 입는 옷을 입고서 히데요시를 만나러 갔다. 이런 의표를 찌르는 마사무네의 행동에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의 결의를 읽고 늦게 참가한 것을 용서해 주었다. 그 뒤에도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인해[각주:1] 마사무네는 또 한번 백색으로 된 옷을 입고 히데요시를 만나러 가게 되었는데 이 때는 화려한 사형대를 세워 들고서는 쿄우토로 갔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천하를 쥔 것은 늙어서였다. 토요토미씨에게서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동안 다테 마사무네는 토우호쿠[東北] 지방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실은 이것이 이에야스와 마사무네의 연계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서일본을 평정하기 위해서는 마사무네가 동일본 전체에서 동란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불가결했다. 이러한 전국적인 평정이 우선 이루어지자 이에야스는 안정을 위해서 무장들의 영토를 바꾸는 일에 착수한다. 당초 만석을 약속받았던 다테씨였지만 이에야스의 눈을 피해 뒤에서 행한 조그만 음모[각주:2]가 폭로되어 오우슈우[奧州] 60만여석을 받는데 그쳤다.


 그러나 그것으로 백만석의 꿈을 포기한 마사무네가 아니었다. [千代=센다이]라고 하는 숲과 습지대에 둘어쌓인 토지를 [仙台=센다이]로 이름을 바꿔서 성과 성 밑 마을의 건설을 착수했다. 동시에 1605 황무지의 토지조사[検地]를 명했다. 이 후 때때로 검지를 행해 병농지를 늘려 갔다. 거기에 키타가미[北上], 하자마[], 에아이[江合] 3대 하천에 개수를 행하고 이시노마키[石卷]에 항구를 열어 산물이 모여들게 했다. 이런 토목사업에 의해 새로운 농지 개발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센다이 번[仙台藩]에서는 매미제도[買米制度]라고 하는 세금[年貢] 이외에 남은 쌀을 번[]이 사주는 독특한 시스템을 만들어 농민들의 의욕을 높였다. 이렇게 증산된 쌀은 배편으로 이시노마키 항에 모여져 에도[江戶]로 가져가 팔아 치움으로써 번의 재정을 윤택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오모테다카(表高[각주:3])는 낮았지만 실질 백만석을 달성했던 것이다.


최후의 봉공[奉公[각주:4]]과 죽음


 마사무네는 이에야스가 죽을 때 센다이에서 순푸[駿府]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바쿠후의 관료 중 일부는 '다테씨의 모반인가?'라며 긴장하는 일막도 있었다고 한다. 2대 쇼우군 히데타다[秀忠]가 죽을 때도 에도로 달려갔다. 이에야스도 히데타다도 막부의 후사를 마사무네에게 맡겼다.


 1636 2월. 70세를 맞이한 마사무네는 자신이 주최한 마지막 사냥에 모인 사람들에게 후사를 잘 부탁한다며 눈물을 섞어 가며 접대를 했다고 한다. 4월에 에도로 출사하여 3대 쇼우군 이에미츠[家光]를 알현하였는데 안색이 너무도 나쁘다고 하여 이에미츠는 의사를 파견시키는 한 편, 5 21일에는 이에미츠 자신이 병문안을 했다. 그러나 3일 후인 24일. 에도 사쿠라다 번저[桜田藩邸]에서 숨을 거두었다.

흐림 없는 마음의 달을 앞세워
세상의 어둠을 밝혀 간다.

りなきだてて
らしてぞ[각주:5]
 마사무네가 죽을 때 남긴 시이다.

  1. 카사이-오오사키 반란[葛西大崎一揆] 때 뒤에서 반란군을 책동했다는 의혹. [본문으로]
  2. 와가 타다치카[和賀 忠親]를 지원하여 이에야스 측에 선 난부[南部]씨의 영토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한 것. [본문으로]
  3. 막부에 신고 된 공식 석고(石高) [본문으로]
  4. 막부가 다이묘우에게 부과한 일. [본문으로]
  5. 정확하지 않다. 단어의 뜻에 불구하니 유념하시길. [본문으로]

쓰가루 다메노부[津軽 為信]
1607년 12월 5일 병사 58세.

1550 ~ 1607.

히로사키[弘前]의 번조(藩祖). 처음엔 오오우라[大浦]씨를 칭하나 난부[南部]씨의 지배가 약화되자 독립.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서 츠가루 지방의 지배를 인정 받아, 츠가루를 성(姓)으로 삼았다.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는 동군에 속해 오오가키[大垣] 공략에 참가하였다.

 

 

 




 



전국말기에 주가를 배반한 무장.

 

 오오우라 성[大浦城]의 성주 오오우라 타메노리[大浦 爲則]의 사위인 타메노부[爲信]는 그 때까지 난부[南部]의 성(姓)을 썼었다. 츠가루[津軽]라는 성은 1589년 오다와라 성[小田原城] 공략을 위해 참진하여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서 츠가루에 3개 군(郡)을 안도 받으면서 쓴 성이다.


 난부 가문 츠가루 담당관(郡代)의 집사(執事)를 맡고 있던 타메노부가 츠가루 지역 일원을 난부 가문에게서 무력으로 강탈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난부 가문에 후계자 문제로 인해 내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타메노부는 불만이 많은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와 손을 잡는 한편 아세이시 성[浅瀬石城]을 영지로 가지고 있던 난부 가문의 가신 센토쿠 마사우지[千德 政氏]와 맹약을 맺고 지금까지 츠가루의 영민을 잘 다스린 실적을 기반으로 츠가루 일원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운 좋게도 이런 강탈 행위가 히데요시가 발령한 '칸토우오우 총무사령[関東奧羽㹅無事令]'[각주:1]이 발령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어 센고쿠 시대 말기에 자신의 영토를 얻는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상대방의 역량을 정확히 파악한 후에 속공과 기습 작전을 성공시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시류를 잘 살펴 민정에 힘을 쏟은 점이 특징적이다. 지용겸비의 무장이라 칭해도 좋을 것이다.

 

놀랄만한 전략으로 영토를 안도

 

 군웅할거의 센고쿠 시대는 힘 있는 자가 내키는대로 빼았을 수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타메노부는 신빙성 높은 정보를 모아서 중앙 정국의 동향을 누구보다도 빨리 탐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인물에게 접근하면 유리한가를 정확히 판단했다. 센고쿠 무장의 대부분은 중앙 권력자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진기한 물건이나 재보를 헌상하는 방법을 이용했다. 타메노부도 그렇게 하여 성공한 무장 중의 한 명이다.

 

 주인이었던 난부 가문에 반기를 든 대담함에 더하여 치밀함을 소유한 타메노부는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았기에 쓸데없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허례허식에 묶일 필요가 없었다. 창피함이라던가 겉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어떻게 행동하는 지가 최선인가를 재빨리 판단할 수 있었던 희대의 명장이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히데요시에게서 영토를 인정 받으려 할 때 나타난다.

 타메노부는 불과 18기(騎)의 부하와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다와라 공략 중인 히데요시의 본진을 목표로 내달려, 누마즈[沼津]에서 히데요시를 배알해서는 영토를 인정 받을 수 있었다. 난부 종가(宗家)의 노부나오[信直]가 히데요시를 알현하기 3일 전이라는 아슬아슬함이었다. 1590년 3월 27일의 일이었다.

 

 타메노부는 히데요시에게 츠가루 일대의 지배를 인정받은 다음부터 '쿠노헤의 란[九戸の乱]' 출병을 시작으로 많은 군역(軍役)을 부과 받지만 충실히 따랐다. 그러나 히데요시 사후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에서는 토쿠가와[德川]를 선택, 오오카키 성[大垣城] 공략에 참가하여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한편 쿄우토[京都] 조정에서 존중받고 있던 오섭가[五摂家][각주:2]의 필두인 코노에 가문[近衛家]과 친교를 맺는 등 여타의 무장들과는 다른 수법으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다. 타메노부 자신도 3번 쿄우토에 올라 재물을 받치고 감사의 뜻을 올리면서 쿄우토 산죠우 거리[三条通り]에 있는 츠가루 번(藩)의 저택에 머물면서 때때로 자식들을 불러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곤 했다.

 

말년과 죽음

 

 본의는 아니지만 가문의 안정을 위해서 츠가루 통일의 공로자인 센토쿠 일족을 모략으로 멸망시킨 타메노부는 남을 믿지 못하는 마음을 고치고자 남들보다 더 불교에 정진하여 마음의 불안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불행은 계속해서찾아 왔다.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장남 노부타케[信建]는 츠가루를 버리고 떠난 뒤 쿄우토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 3대 번주로 눈 여겨 두고 있던 손자인 오오쿠마[大熊]가 얼굴에 큰 화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고 계속해서 귀여워하던 딸 토미히메[富姬]가 자신 보다 먼저 죽는 비운을 맞보게 된다.

 

 츠가루 10만석의 번조(藩祖) 타메노부의 말년은 깊은 쓸쓸함과 죄를 뉘우치는 회개로 가득차게 되었다.

 오오우라 성에서 호리코시 성[堀越城]으로 옮긴 타메노부는 요해지인 타카가오카[鷹ヶ岡]에 새로운 성을 쌓으려 했으나 막부(幕府)에 허락 받지 못해 생전에 실현을 보지 못했다.(2대째의 노부히라[信枚]대에 완성).

 중앙 정권에 순순히 따르는 것으로 영지의 안태를 꾀했던 타메노부는 심혈을 쏟아부은듯 1607년 12월 5일 58세를 일기로 쿄우토에서 죽었다. 쿄우토의 츠가루 번의 저택이 아닌, 야마시나[山料]의 칼 장인(刀工)인 라이쿠니미치[來囯道]의 저택이라 한다. 히데요시처럼 심한 기침에 의한 것으로 추측된다.

 

 타메노부는 죽음을 앞두고 3남 노부히라를 머리맡으로 불러 가독을 물려주었다. 2남 노부카타[信堅]은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노부히라는 운 좋게도 후에 이에야스의 양녀 마테히메[滿天姬]를 정실로 맞아들였다. 마테히메는 이에야스의 이부제 마츠다이라 야스모토[松平 康元]의 딸이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楅島 正則]의 양자 마사유키[正之]에게 시집갔었으나 마사유키가 폐적, 참살당해 19세에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를 불쌍히 여겨 노부히라에게 시집보냈다고 한다.

  1. 칸토우[関東]와 오우우[奥羽] 지방의 무사들에게 사적인 타툼을 하지 말라는 명령. [본문으로]
  2. '고셋케'라고 발음. 칸파쿠[関白]를 배출할 수 있는 코노에[近衛], 이치죠우[一条], 니죠우[二条], 쿠죠우[九条], 타카츠카사[鷹司]를 말한다. 서열은 필두 코노에 가문을 제외하고 모두 동급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