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政]

1636 12 30일 병사(病死) 81.

1559 ~ 1638.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적남(嫡男).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郎]를 섬기며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에서 데뷔전. 시코쿠[] 공략의 전공(戰功)으로 아와[阿波] 일국()을 하사 받았다. 조선 침략 시에는 위기에 빠진 아사노 요시나가[野 幸長]를 구출하는 활약을 하였고 은거 후에도 적자 요시시게[鎮]를 보좌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과 이에마사

 

 1600 9월.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토요토미 계[豊臣系] 무공파(武功派) 다이묘우[大名]의 유력 무장으로 여겨지던 하치스카 이에마사는 - 아직 14살인 적자 요시시게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의 동군에 종군시키는 한편 자신은 영지를 히데요리에게 반환하고 아와[阿波]를 나와서 은거. 머리를 깎고 '호우안[蓬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코우야 산[高野山]에 올랐다[각주:1].

 이것이 효과를 발휘해 아와[阿波] 일국은 요시시게에게 새로이 주어졌다.[각주:2]

 

 이에마사는 아와[阿波]로 돌아와서 카츠우라 군[勝浦郡] 나카다 촌[中田村]의 은거소(코마츠시마 시[小松島市])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센고쿠(戦国).

 1605년 아와 군[阿波郡] 이치바 쵸우[市場町]에 호우안의 서명으로 마을 법률을 반포하는 등, 요시시게의 뒤에서 번()의 정치를 보좌하는 한편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秀忠]나 이이 가문[井伊家] 등 -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중신(重臣)과 연락을 자주 하여 하치스카 가문[蜂須賀家]과 토쿠가와 막부(幕府)와의 파이프를 강고히 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614 8월.

 은거소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에게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히데요시의 목상(木像)을 받든 호우코쿠 신사[神社]를 세웠다. 이 해 10월에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坂 冬の陣]이 일어났기에 이 사실은 이에마사를 이야기하는데 있었서 굉장히 흥미롭다.

 

편히 쉬려던 여생이……

 

 어쨌든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 夏の陣]에서 토요토미 씨가 멸망하여 천하가 토쿠가와의 것이 되자, 요시시게는 전공(戰功)에 의해 아와지[淡路] 일국()이 더해져 25 7천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618년.

 요시시게도 착실히 성장하여 농민정책을 중심을 한 '벽서 23개조[壁書二十三条][각주:3]라는 국법을 제정하여 번정(藩政) 확립에 힘썼다.

 이에마사도 안심했을 것이다. 번정은 전부 요시시게에게 맡기고 편히 여생을 즐기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역사는 이에마사를 쉬게 나두질 않았다.

 1620 2 26일.

 하치스카 요시시게가 35살이라는 한창 일할 나이에 토쿠시마 성[城]에서 병으로 죽어버린 것이다.

 4월에 그 뒤를 센마츠마루[千松丸 = 타다테루[忠英]]가 이었지만 아직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이에마사는 나카다 촌()의 은거소에서 토쿠시마 성의 서측 성곽[西丸][각주:4]으로 옮겨 와, 어린 번주(藩主)를 후견하여 1629년 병으로 누울 때까지 사실상 이에마사가 통치를 계속 하게 된 것이다.

 

 그때 가노(家老)[각주:5]나 모노가시라[物頭][각주:6] 등 주요 가신들에게 대하여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번주가 어린 동안에는 모노가시라가 모든 것을 처리할 것.

 주인이 어린 동안에는 각자가 자기 할 일은 확실히 할 것.

 공공(公共)의 일은 밤낮없이 봉사할 것.

 어떤 일이건 사사로운 감정을 넣지 말 것.

 

 등의 지시를 내렸다.

 또한 에도[戸] 루스이야쿠[留守居役][각주:7]에게도 에도 저택의 운영에 대해서 4개조의 지시를 내렸다.

 

 이에마사는 하세가와 에치젠[長谷川 越前]이나 외손자인 하치스카 야마시로[蜂須賀 山城][각주:8]를 가로(家老)로 삼아 센마츠마루를 보좌시켰다.

 참근교대(交代)[각주:9] 할 때에도 이에마사가 같이 갔다.

 이에마사는 번정의 확립에 큰 역할을 이룸과 동시에 노련함을 무기로 바쿠후가 흠잡을 만한 일이 없도록 노력했다.

 

 1623년에는 쿠니부교우[奉行]를 설치하여 지방 행정의 정비를 꾀했고,

 1627 7월에는 요시시게의 '벽서 23개조'를 보완하는 의미에서 '이서 7개조(裏書七)'를 제정하였다.

 센마츠마루는 1623년에 아와노카미 타타시게[阿波守 忠鎮]라 이름을 바꾸고, 다음 해 봄에는 타다테루(忠英)라 고쳤다.

 

 그 후에도 이에마사는 신전(新田)개발이나 염전(鹽田)개발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매년 에도에 가서는 막부와의 파이프를 더욱 강고히 했으며 죽기 직전까지 이에마사가 가신들에게 영지를 배분하는 문서를 쓰는 등 번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에마사의 언행을 기록한 [존어집(尊語集)]에는,

 어린 타다테루의 늦잠을 고치라고 한 말이나, 가신들이 타다테루가 자신들을 함부로 다루는 것에 대해 상담하러 왔을 때, '어렸을 때는 그런 법이다'라며 타다테루를 감싸는 듯 하다가, 에도로 출발하기 전에 인사를 올리러 온 타다테루에게 정원에 있는 개나 참새를 자신의 뜻대로 다루는 것을 보여준 뒤 새나 동물도 이렇게 자신을 따르게 할 수 있으니 부하에게 정을 주고 위엄을 가지고 가르치면 충의를 행하지 않는 자는 없다고 말한 부분이 보인다.

 

 1638 12 23일.

 토쿠시마 성[城] 서측 성곽에서 죽었다 81.

 번정의 확립을 자신의 눈으로 끝까지 지켜본 일생이었다.

코우겐 사[興源寺]에 있는 이에마사의 묘 - 토쿠시마 시[徳島市]


  1. 속세를 버리고 중이 되겠다는 의미. [본문으로]
  2. 이에마사는 서군 편에 섰다, 혹은 병에 걸렸었기에 오오사카[大坂]에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본문으로]
  3. 벽서(壁書)란 법령을 적은 종이나 나무를 벽에 붙인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4. 에도시대 때. 보통 서측 성곽[西の丸]은 다이묘우[大名]가 은거하며 머무는 곳이었다. [본문으로]
  5. 가문의 수상(首相) 격 [본문으로]
  6. 중급 관리자. [본문으로]
  7. 에도[江戸]에 있는 번(藩)의 저택의 책임자. [본문으로]
  8. 하치스카 야마시로의 증조부는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죽은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이다. [본문으로]
  9. 참근(参勤)은 쇼우군에게 봉사한다는 의미, 교대(交代)는 봉사를 쉬고 자기 영지로 돌아가 정무를 맡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1년 터울로 에도와 자기 영토를 왔다 갔다 했으며 처자식은 인질로 에도에 항상 남겨 두었다. [본문으로]

이케다 데루마사[池田 輝政]

1613 1 25일 병사 50

1564 ~ 1613.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유형제(乳兄弟)[각주:1]인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아들.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부친이 죽는 바람에 오오가키[大垣]성주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공을 세워 하리마[播磨] 하사받아, 히메지 성[姫路城]를 쌓았다. 후에 '서국 쇼우군[西 ][각주:2] 이라는 이명(異名)을 얻었다.









히메지 백만석


 이케다 테루마사의 할머니인 요우토쿠인[養徳院]이 오다 노부나가의 유모(乳母)였던 연()도 있어 테루마사는 어려서부터 노부나가를 가까이서 섬겼다. 노부나가가 죽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섬기며 중용(重用)받아 히데요시는 테루마사를 양자(養子)로 삼는다는 약속도 하였다[각주:3]. 그러나 나가쿠테의 전투에서 부친 츠네오키와 형인 요시스케[之助]가 전사한 후에는 이케다 가[池田]를 상속하여 미카와[三河] 요시다([吉田] 15 2천 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594 8월.
 테루마사는 히데요시의 중매로 토쿠가와 이에야[
川 家康]의 둘째 딸 토쿠히메[督姬][각주:4]를 후처로 맞이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이에야스 편에 섰고, 공을 세워 하리마 52 1천 석이라는 큰 영토를 하사받아 히메지성에 입성했다. 입국한 다음 해인 1601년부터 성을 개축(改築)하기 시작하여, 1609년에 한 층 더 호화장대(豪華壯大)한 성곽이 완성되었다.


 가정면에서도 토쿠히메와의 사이에 5명의 남자아이가 탄생. 전처(前妻)의 아들인 장남 토시타카[利隆]는 둘째 치더라도 2남 타다츠구[継]는 다섯 살 때 외할아버지인 이에야스에게서 비젠[備前] 오카야마[岡山] 28 6천 석을 하사 받았을 뿐만 아니라, 3남 이하에게도 아와지[淡路], 하리마 안에 각각 영토를 하사받았기에 그런 영지들을 합쳐서 '히메지 백만석', '서국 쇼우군' 등으로 불렸다. 너무 과한 대우에 이에야스의 적남(嫡男) 히데타다[秀忠]가 질투하여,
 “
아예 테루마사에게 천하를 잇게 하는 것이 좋겠군요
 라고 삐쳤을 정도였다.


 사위와 장인이 되어서부터 급속히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 관계가 깊어진 테루마사이지만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은혜를 잊는 일 없이 어린 히데요리에 대한 배려를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다. 누나가 칸파쿠[白] 히데츠구[秀次]의 정부인이라는 것도 있어 토요토미 가문과는 깊은 연으로 맺어져 있었다.
 
히데요리가 니죠우 성[
二条城]에서 이에야스와 만났을 때도 옛 토요토미 가의 무장들과 함께 히데요리를 경호(警護)했으며, 1602년 정월 궁궐에 신년인사를 할 때도 테루마사는 히데요리를 대리해서 입궐하였다.


성내에 이변(異變)이 일어나다.


 1609 5월.

 천수각(天守閣)을 완성했을 때부터 히메지 성 안에서 이변이 자주 일어났다. 예를 들면,


 '
천수각의 한 방에서 17~8살 정도의 시녀가 12히토에[単][각주:5]를 입고 홀로 촛불을 들고는 혼자서 앉아있었다. 젊은 사무라이가 이상히 여겨 가까이 다가가자 빗을 건내 주었다. 그 빗은 천수각의 갑옷 상자 안[각주:6]에 있던 것이었다.'


 '심야(深夜). 맹인(盲人)이 나타나서 들고 있던 비파의 통을 열어보라고 하였다. 젊은 사무라이가 열어보려고 하자 맹인은 키가 3미터나 되는 귀신으로 변신해서나는 이 성의 주인이다라고 위협했다'


 같은 해 12 13일. 한 통의 이상한 편지가 성에서 발견되었다.
 보낸이는 '하리마의 주인인 대천신(大天神) 토우센보우()' '수도(首都) 니죠우[二条]의 센마츠'이며, 받은이는 테루마사와 토쿠히메 부부로 되어 있는 것으로 50~60장에 이르는 협박문이었다. 내용은,

토오토우미[遠江]의 요린보우라는 대천신(大天神)이 큐우린보우라는 천신(天神)을 꼬셔서 테루마사 부부를 저주하여 죽이려고 한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성 안에 8층탑을 세우고 호마(護摩)의 비법을 익혀 기도하라.
 
또한 팔층탑안에 넣을 두루마기와 그림은 천축에서 이 나라에 전해진 두통 중 하나를 넣을 것. 한 통은 하리마 동쪽에 사는 유명한 목수인 히하라[
日原]가 몰래 가지고 있다. 호마는 온타케산[御嶽山] 산에 있는 시미즈 사[清水寺], 후나코시산[船越山] 산에 있는 루리 사[瑠璃寺] 등의 고명한 중을 스승으로 삶아 수련할 것.

등의 지시가 쓰여져 있었다. 테루마사는 몸집이 작은 사내였지만 용맹과감하고 침착한 사나이였기에 협박장을 무시했다.


 그러나 1611 12월.
 그는 갑자기 중풍에 걸렸다. 발병 당일. 테루마사는 가신의 집에 방문했다가 갑자기 쓰러져 가마로 성으로 돌아오는 도중 어디서 왔는지 모를 수 많은 까마귀들이 날아와 가마에 부딪혔다. 성에서 이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렇게 되자 아무리 테루마사라도 어쩔 수 없었다.


 타카 군[多可郡] 엔만 사[円満寺]의 묘우카쿠() 아사리에게 악마 퇴치, 국가 수호의 기도를 부탁했다. 37일간 성안에서 술법을 행한 묘우카쿠의 진언(進言)에 따라, 천수의 귀문(鬼門)에 해당하는 북동쪽에 팔층탑을 세우는 동시에 오사카베 신사[刑部神社]를 건립하였다. 오사카베 신사는 원래 히메야마[姫山] 산에서 지방신(地方神)을 모시던 신사의 건물을 히데요시가 히메야마 산에 성을 세울 때 산 아래로 옮겼기 때문에 신의 분노를 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테루마사의 중풍은 일시 회복했다. 성 안은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다음 해 1월에 재발하여 테루마사는 피를 토했다. 이 때도 수 많은 까마귀가 날아와서 창호지에 부딪혔다. 마당에 죽은 솔개가 두 마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아타고[愛宕][각주:7] 신자인 테루마사는 이 일울 흉한 일이 있을 징조라 생각하여 더욱 병이 깊어졌다. 이에야스가 중풍의 묘약을 보내왔지만 테루마사는 25일 오후. 숨을 거두었다.


 이에야스는,

 "그런가…… 죽었는가. 뭐든지 아타고에게 의존한다고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천하를 노리고 있던 테루마사의 마음 속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 같은 여인의 젖을 먹고 자란 사이. 높은 집안의 아이는 모친의 젖이 아닌 다른 사람의 젖을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노부나가는 유두를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다고 하지만 츠네오키의 모친의 젖만은 얌전히 먹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칸토우[関東]의 토쿠가와 쇼우군[德川 将軍]만큼 권세와 힘이 있다는 뜻에서. [본문으로]
  3. 실제로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 것은 테루마사의 동생 이케다 나가요시[池田 長吉]. [본문으로]
  4.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우지나오[北条 氏直] 부인이었으나 우지나오의 죽음으로 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본문으로]
  5. 귀족 여성의 정복. [본문으로]
  6. 평시에는 열지 못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본문으로]
  7. 일본의 종교인 신도(神道)에서는 불을 막는 신이지만, 신불습합 사상에 따라 불교의 승군지장[勝軍地蔵 – 지장보살의 군신(軍神)일 때의 이름]과 같은 신으로 여겨졌다. [본문으로]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

1615 5 28일 병사 60

1556~1615.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을 섬겼으며 '시즈가타케 칠본창[七本槍]'[각주:1] 중 한 사람이다.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후견역(後見役)이 되어 토쿠가와[德川] 측에 대한 연락창구가 되었지만, 오히려 내통자로 오해 받아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떠났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 후에 죽었다.







우직한 카츠모토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16살 때부터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기기 시작했는데, 이런 카츠모토를 히데요시는 곁에 두고 길러 키워 가신(家臣)으로 삼았다.

 1583 4월 시즈가타케의 전투에서 '칠본창'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공을 세워 3000석을 받았다. 그러나 동료인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淸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과 비교하면 출세 가도에서 밀려나 히데요시 말년인 1595년이 되어서야 겨우 셋츠[摂津] 이바라키[茨木] 1만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그 전 해인 1594년에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신하로 선택되었다. 히데요리의 여러 신하들, 특히 측근을 감찰(監察)하는 지위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다다음해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이 시작되었다. 카츠모토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도 오오사카 성에 입성해서는 히데요리 곁을 지키며 참전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그런 우직함을 신뢰하여 1601년 카츠모토에게 야마토[大和] 헤구리 군[平郡郡] 18천석을 가증하여 히데요리의 가로(家老)로 임명하였다. 이때는 몰랐지만 후에 생각해보면 이것이 카츠모토에게 있어서 불행의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곧이어 이에야스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 되어 에도[江戶]에 막부(幕府)를 열었고, 이 일로 인하여 토요토미 가문[豊臣家]과는 뭐든지 미묘한 문제가 많아지게 되었다. 특히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고 있던 카츠모토에 대하여 요도도노[淀殿][각주:2]를 필두로 한 오오사카 성내의 반토쿠가와파는 무엇이든 의심의 눈초리로 카츠모토를 보게 되었다. 토요토미-토쿠가와 양 가문의 중개자로써 쌍방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부심하는 카츠모토는, 언제부턴가 오오사카 성내의 혼란과 이간을 꾀하는 이에야스의 교묘한 술책에 희롱당하게 되었다.


호우코우 사[方広寺] 종명(鐘銘) 사건


 1602 4월.

 이에야스는 카츠모토를 통해 히데요리 모자(母子)에게 쿄우토[京都] 호우코우 사[方広寺] 대불전(大佛殿)의 재건을 권유하였다. 히데요리도 요도도노도 죽은 히데요시의 공양과 토요토미 씨()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하여 이를 따랐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이에야스가 오오사카 성()에 저장되어 있는 막대한 금은을 쓰게 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카츠모토가 조영(造營) 책임자라는 큰 임무에 임명받았다. 그는 이에야스와 빈번한 연락을 통해 꼬투리 잡힐 일 없이 사업을 진행해갔다.


 호우코우 사() 대불전은 1614 4월에 준공.

 하지만 예정되어 있던 개안공양을 눈 앞에 두고 이에야스가 불만을 표했다. 종에 새겨진 '家安康' '칸토우[関東]를 저주하는 말'[각주:3]이고, [君臣豊樂子孫殷昌]이 토요토미의 번영만을 기원하는 말이라며 개안공양의 연기를 명령했다.

 카츠모토는 급히 순푸[駿府][각주:4]로 해명하기 위해서 향했다. 당초는 이 문제가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에야스는 카츠모토를 면회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를 통해 오오사카 성()이 어째서 많은 수의 낭인을 모집하고 있는지 힐문하였다. 그리고,

1. 히데요리가 에도로 온다.[각주:5]

2. 요도도노가 인질이 되어 에도에서 산다.

3. 히데요리가 오오사카 성()을 나와 다른 곳과 영지를 바꾼다.[각주:6]

 라는 어느 것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요구해 왔다. 대불전 문제로 인하여 중대한 정치적 난제를 껴안게 된 카츠모토는 크게 놀랐다.


 한편 요도도노도 따로 이에야스에게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蔵卿局][각주:7]와 쇼우에이니[正栄尼][각주:8]를 파견하였다. 이에야스는 이 둘에게 종명 문제 등 난제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환대하며 히데요리 모자의 안부에 신경 썼기에 당연하게도 오오사카로 돌아온 쌍방의 보고는 전혀 상반되는 것이 되었다. 이에야스의 교묘한 분열 책략은 멋지게 성공했다.

 오오사카 성내에는 '카츠모토는 칸토우[関東]에 알랑거리는 놈'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곧이어 그 목소리는 '배신자 카츠모토를 죽여야 한다'로 변했다.


충신인가 역(逆)인가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의 신뢰를 잃은 지금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기에 카츠모토는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오오사카 성()을 탈출하여 이바라키 성()으로 갔다. 이에야스는 이것을 칸토우[関東]에 대한 오오사카 측의 선전포고라 여기고 오오사카 정벌을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1614 10 11일. 이에야스는 순푸를 출발하여 이로인해 '오오사카 겨울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된 이에야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음에 틀림이 없다.


 11 4일.

 쿄우토[京都]에 도착한 이에야스는 곧바로 카츠모토를 불러 오오사카 성() 공략에 대한 이야기 나누었다. 카츠모토에게는 원하지 않았던 바이며 어쩔 수 없던 선택이기도 했지만 이젠 더 이상 어찌할 수도 없었다. 오오사카 성내의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카츠모토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협력을 바라는데 거부할 수도 없었다.


 12 16일.

 시작된 공성 측의 대포 공격 중 한 발이 요도도노가 거주하던 곳에 떨어졌다. 거기에 다음해 여름의 싸움 때 야마사토[山里]의 성곽에 있는 히데요리 일행의 소재를 확인하여 히데타다[秀忠]에게 고한 것도 카츠모토라고 한다.


 토요토미 가 멸망으로부터 20일 후.

 카츠모토는 쿄우토[京都]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상은 깊은 죄와 자기 혐오에 빠져 자해(自害)를 했던 것이 아닐까?

  1. 시즈가타케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히데요리의 생모. [본문으로]
  3. 이에야스[家康]의 이름을 안(安)자로 갈라놓았기 때문. [본문으로]
  4. 이에야스[家康]가 히데타다[秀忠]에게 쇼우군[将軍]직을 물려주고 은거하고 있던 곳. 말이 은거지 중요정책사항들은 대개 맡아서 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즉 막부의 지배하에 들어오라는 의미. [본문으로]
  6. 대략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가 유력 후보지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7.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의 모친으로 요도도노[淀殿]의 유모(乳母). [본문으로]
  8.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秀頼]의 유모(乳母)이며, 히데요리의 창술 스승 와타나베 타다스[渡辺糺]의 모친. [본문으로]

도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98 8 18일 병사 62

1536 ~ 1598.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을 섬기며, [스노마타 하룻밤 성(墨俣一夜城)[각주:1]]등의 공을 세웠다. 빗츄우(備中) 타카마츠(高松)() 공격 중에 혼노우(本能)()의 변을 듣자마자 츄우고쿠 대반전(中国大返[각주:2])를 감행하여 야마자키(山崎)의 싸움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쓰러뜨렸다. 후에 쵸우소카베(長宗我部), 시마즈(島津), 호우죠우(北条)()를 항복시켜 천하를 통일하였다.







현실도피의 꽃구경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는 1598년 새해가 밝자 교착상태에 빠진 조선 전선(朝鮮 戰線[각주:3])우울함에서 도피라도 하듯이 [다이고의 꽃구경(醍醐花見)]의 장소가 되는 다이고(醍醐)()의 정비에 열중했다. 1년 전부터 기획한 꽃구경이었지만 어두운 현실에서 눈을 돌려 도피하기에는 다시 없는 기회인 듯 했다.

 말년의 히데요시는 고독한 위정자(爲政者)였다.


 히데요시 스스로 다이고사()로 가서 오우닌의 난(応仁の乱) 때 황폐해진 절의 여러 건물()을 계속해서 수복(修復)하고 정원을 새로 만드는 것에도 직접 힘을 쏟는 등 진두지휘(陣頭指揮)하였다. 마치 이 꽃구경 행사가 [마지막 잔치]가 될 것이라는 것을 히데요시 자신이 예지라도 한 것인지 굉장한 열의를 가지고 힘을 쏟았던 것이다.


 이렇게 준비의 만전을 기한 끝에 열린 3 15 [다이고의 꽃구경] 문자 그대로 호화찬란한 사상 최고의 꽃구경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어린 히데요리()와 함께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4]), 요도도노(淀殿[각주:5]), 마츠노마루도노(丸殿[각주:6]), 산노마루도노(丸殿[각주:7])등의 정실(正室), 측실(側室)들을 시작으로, 그녀들의 시녀들이나 여러 다이묘우(大名)의 부인들과 함께 만개한 벚나무 아래를 거닐며 하루 종일 꽃구경 잔치를 즐겼다. 늙은 히데요시에게 있어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들 사이에서 즐기는 꽃구경은 현세를 잊고 도원경(桃源境)에서 노니는 심경이었음이 틀림 없다.


병에 걸린 히데요시


 꽃구경이 끝난 뒤에도 히데요시는 다이고사()에 들려 절 수복에 힘썼다. 여전히 어두운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도피하고픈 듯이.


 하지만 5 9.

 천하인(天下人)만이 소유할 수 있다고 하는 천하의 명석(名石 - 藤戸石) 히데요시의 손을 떠나 다이고사()로 옮겨져 산호우()()의 정원 정면 중앙에 놓여 졌을 때 히데요시는 후시미(伏見)()에서 병으로 누워 있었다.


 히데요시는 그 4일 전인 5 5일.

 갑자기 병에 걸려 그 날부터 투병 생활에 들어간다. 하지만 당초는 본인도 가볍게 생각하고 있던 병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 때문에 전국의 절과 신사(神社)들에게 쾌유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요청이 내려졌고 조정(朝廷)에서도 임시 카구라(神楽[각주:8])를 행하여 병마에서 헤어 나올 수 있게 하는 기도가 행해졌다. 하지만 기도의 효험은 나타나질 않았고 한 때는 인사불성에 빠졌다.


비통한 최후와 유언장


 히데요시도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깨달은 듯 하다.

 7 15일.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에게 후계자인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서약서(誓紙)를 제출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대로(五大老), 오봉행(五奉行)을 정하여 당시 6살의 어린 히데요리를 위해 토요토미 정권 체제를 강화하는 등 죽을 때가 다 된 히데요시에게오직 히데요리의 미래만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그리고 8 5일.

 히데요시는 오대로에게 보낸 이승에서의 이별이라고 할 수 있는 유언장을 써서 계속해서 히데요리를 부탁하였다.

히데요리를 부탁합니다. 이것 말고는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습니다.

거듭거듭 히데요리를 부탁합니다. 다섯 분에게 부탁합니다.

막상 다섯 분에게 말씀드리고나니 이별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현세에 미련을 남긴 채 죽음을 맞이하고 있던 텐카비토(天下人) 히데요시의 비통한 마지막 말이었다.


 이리하여 히데요시는 그 해인 1598 8 18일 새벽. 후시미 성에서 생이 마감하였다. 향년 62.


 히데요시에게는 또한 사세구()가 있다.

이슬 떨어져 이슬처럼 사라지는 나의 생명이려나

무슨 일(또는 오오사카)이건 꿈 속의 꿈

 오대로에게 보낸 유언장처럼 아쉬움이 배어 나오는 서글픈 시이다.

 하지만 이 시는 히데요시의 예언이기도 했는지 히데요시는 토요토미 가문을 시작으로 토요토미 정권의 비극적인 결말까지 예견한 듯하다.


 히데요리는 히데요시가 그 후사를 부탁했던 오대로의 필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공격 당하여 토요토미 가문은는 멸망하였다. 거기에 히데요시가 쌓은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오오사카 성()은 오오사카 여름의 전투에서 불에 타 없어졌으며 후시미 성()도 세키가하라(ヶ原)의 싸움에서 공격 받은 피해로 인하여 폐성(廢城)이 되어 없어졌다. 그리고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호우고쿠(豊国) 신사(神社) 이에야스의 파괴 명령으로 인해 소멸되었다. 이리하여 히데요시 일대(一代)의 힘으로 쌓아 올린 토요토미 가 영광의 흔적은 이에야스에 의해 전부 이 세상에서 말살되어 그야말로 남가일몽(南柯一夢)처럼 허무하게 없어진 것이다.

  1. 스노마타에 하룻밤만에 성을 세웠다는 전설. [본문으로]
  2. 보통보다 더 빨리 철수한 것을 이름 [본문으로]
  3. 정유재란을 말함. [본문으로]
  4. 정실 네네(ねね). [본문으로]
  5. 히데요리의 친모(親母). [본문으로]
  6. 와카사 타케다(若狭 武田)씨(氏) 최후의 당주 타케다 모토아키(武田元明)의 부인. 타케다가 혼노(本能)사(寺)의 변 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편을 들어 후에 할복. 이에 따라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었다. [본문으로]
  7. 오다 노부나가의 다섯 번째 딸. [본문으로]
  8. 신에 춤을 바치기 위해 추어진 가무(歌舞). [본문으로]

오다 나가마스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6. 5. 12. 18:03 Posted by 발해지랑

오다 나가마스(織田 長益)

1621 12 13 병사 75

1547 ~ 1621.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동생. 출가하여 우라쿠사이(有樂). 노부나가가 죽은 뒤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이어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겼으며,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 전투, 오오사카(大坂) 겨울의 전투의 화평 교섭 등에서 활약. 후에 다인(茶人)으로 살아가며, 토우쿄우(東京) 유우라쿠쵸우(有樂町)에 그 이름을 남겼다.









다인(茶人) [우라쿠(有樂)]의 탄생


 토우쿄우(東京)유우라쿠쵸우(有樂町)라는 번화가가 있다.

 이 지명은 오다(織田) 우라쿠(有樂)가 에도(江戶) 초기에 이 곳에 저택을 지어 살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오다 우라쿠'라는 인물은 노부나가의 동생인 나가마스(長益)를 지칭하는 것이다. 노부나가의 동생들 중에 에도 시대까지 살아 남은 것은 노부카네(信包)와 나가마스, 두 사람이었지만 바쿠마츠(幕末)[각주:1]까지 다이묘우로 존속한 것은 나가마스의 가계(家系)뿐이다.


 나가마스는 1547년생으로 노부나가와는 13살 차이가 난다.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당시의 행적은 대부분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전장에 나간 기록도 1582 카이(甲斐) 타케다(武田)씨를 정벌 할 때 노부나가의 장남인 노부타다(信忠)의 부하로 키소(木曽) 방면에서 침공한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


 혼노우(本能)()의 변 후, 나가마스는 오와리(尾張)나 북() 이세(伊勢)를 영유(領有)하는 조카인 노부카츠(信雄)를 섬기며, 1 3천관을 식록(祿)으로 받는 유력한 가신이 되어 검지봉행(奉行[각주:2]) 등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寛政重修諸家譜[각주:3]]에 의거하여 [혼노우(本能)()의 변 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기며 셋츠() 시마시타(島下)() 마이타(昧舌)에서 2천석을 치교우(知行)로 받았다]라는 설(國史大辭典 등)은 잘못된 것이다.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는 것은 1590 9월로 그 직전에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에게 오와리를 빼앗기는 등 카이에키(改易[각주:4])당했기 때문이다. 머리를 깎고 [우라쿠(有樂)]라는 호를 칭하는 것도 이 시기이다. 우라쿠 44살 때였다. 필시 셋츠 치교우를 지급 받은 것도 이 즈음이라고 추측된다.


 우라쿠는 센노 리큐우(千 利休)의 뛰어난 제자 일곱명(利休七哲[각주:5])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데, 차를 즐기게 된 것은 리큐우가 노부나가의 사도우(茶頭[각주:6])를 맡을 즈음인 것 같다. 하지만 다도(茶道)의 세계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우라쿠라는 호를 칭하는 시기부터라고 한다.


 1591 2월 리큐우가 죽자 [차의 장인(宗匠)]라 불리며 히데요시가 다도회를 열때마다 옆에서 도와주는 일이 많아졌고, 다음 해인 1592년에 조선 출병이 시작되자 히데요시를 따라서 큐우슈우(九州)로 내려가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성에서 자주 다회를 열었다.


 또한 전년 9월에 우라쿠는 히데요시의 '오토기슈우(御伽衆)'에 들어갔다. 오토기(御伽)라는 것은 주군이 심심할 때 말상대를 해주는 것을 말하며 그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오토기슈우'라 칭했다. 필시 우라쿠는 히데요시의 오토기슈우에 더해짐으로써 다인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한 것이라 추측된다. [리큐우 류()]를 기반으로 하면서 독자적인 다풍(茶風)을 가미한 [우라쿠 류()]의 다도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1600년 세키가하라(ヶ原) 때는 우에스기(上杉)를 정벌하기 위하여 칸토우()로 내려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따라 종군하였으며 이어서 세키가하라 전쟁터에서도 무공을 세웠다. 싸움이 끝난 뒤 은상으로 셋츠에 가지고 있던 2천관에 더하여 야마토(大和) 3만석이 주어졌다. 다인(茶人) 다이묘우 오다 우라쿠의 탄생이다.


 세키가하라에서는 노부나가의 적류(嫡流)인 기후(岐阜) 성주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 노부나가의 맏손자) 에치젠(越前) 오오노(大野)성주 오다 히데카츠(織田 秀雄 노부카츠의 장남)가 서군에 속하여 카이에키 당하였기에 에도(江戶) 바쿠후(幕府) 초창기에 오다 일족 중에서 다이묘우로써 남아 있던 것은 우라쿠의 가계(家系)뿐이었다.


()로 보내는 나날


 토쿠가와 쇼우군()의 지배를 받는 다이묘우가 된 우라쿠는 에도나 순푸(駿府)에 자주 출사(出仕)하였고, 그러는 한편 오오사카(大坂) 성에도 빈번히 출입하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의 생모 요도도노(淀殿)의 외숙부라는 인척 관계로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1611 3월.

 히데요리가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니죠우(二条)성에서 회견했을 때 우라쿠가 히데요리를 따르고 있는 모습은 그의 입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흥미 깊다.그 후 토쿠가와-토요토미 양 가문의 사이가 악화되자 우라쿠의 정치적 입장도 미묘하게 되어 일설에 의하면 우라쿠는 이에야스의 첩자가 되어 토요토미 측의 비밀을 보고 했다고도 하며, 오오사카 겨울의 전투가 시작되자 오오사카 성 안에서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에게 이에야스를 복종하도록 계속해서 설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름의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는 오오사카 성을 빠져나와 쿄우토에 가서 살며 아들 나가마사(長政)와 히사나가(尚長)에게 각각 1만석씩 나누고 자신은 남은 1만석을 가지고 살았다.


 우라쿠는 항상 쿄우토에 칩거하며 다도에 몰두하면서 여생을 보내었고 1621년 12월 13 중풍으로 쿄우토 히가시야마(東山)에서 죽었다. 고죠우(五条) 강변(河原)에서 장례식이 치러졌으며 히가시야마의 겐인(建仁)() 세이덴(正伝)()에 묻혔다. 향년 75.

  1.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말기를 말함. [본문으로]
  2.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하는 행정관 [본문으로]
  3. 칸세이(寛政=1789‐1801)년간에 에도 바쿠후(幕府)가 토쿠가와 일족을 제외한 다이묘우, 하타모토 등에게 족보를 제출하게 하여 각 가문의 유례를 기록한 것. 자유 제출이었던 만큼 자신들의 조상을 띄우기 위해 날조나 왜곡이 많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영지를 삭감 혹은 전부 몰수 당하고 심하면 평민으로 강등 [본문으로]
  5. 제자들 중 뛰어난 일곱 제자.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利貞)를 지칭함. 오다 우라쿠사이의 경우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리큐우의 아들인 센노 도우안(千 道安)과 함께 십철(十哲)로 꼽힌다. [본문으로]
  6. 다이묘우를 섬기며 다도에 관한 것을 관장함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