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있다. 사츠마(薩摩)의 시마즈(島津), 시마바라(島原)의 아리마(有馬) 연합군과 싸워 패사(敗死)했을 당시의 모습을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기록하였다.
 [타카노부는 너무 뚱뚱해 말에도 타지 못하였기에 6명이 메는 가마에서 지휘하였다]
 주색에 빠진 말년의 타카노부를 생생히 전해주는 기록이다.

 처음에 타카노부는 절에서 생활하였다. 류우조우지 가문과 인연이 깊은 호우린 원(淋院)에 들어가 '엔게츠(円月)' 혹은 '츄우나곤(中納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승려답지 않게 호방하며 거칠고 난폭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엔게츠가 17살 때 류우조우지 가문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불행이 찾아온다.
 1545년 1월에 조부 이에즈미(家純), 부친 치카이에(周家)를 시작으로 한 숙부 등 일족의 주요한 면면들이 아야베(綾部) 성주 바바 요리치카(馬場
周)의 모략으로 인해 한꺼번에 살해당한 것이다. 그때 90세가 넘는 증조부 이에카네(家兼)가 바바 요리치카를 물리쳐 복수했지만 그 다음해의 봄,
 "츄우나곤(타카노부)는 남다른 기개와 그릇을 가지고 있다. 류우조우지 가문을 재흥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 아이일 것이다. 츄우나곤을 환속시켜라"
 라는 유언을 남기고 93세의 나이로 죽었다.

 류우조우지 가문은 사가 성(佐賀城)에 종가인 '무라나카 류우조우지(村中 造寺)'와 분가인 '미즈가에 류우조우지( 竜造寺)'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타카노부는 분가 출생이었다. 증조부의 유언에 따라 환속하여 타네노부(胤信)라는 이름을 칭한 타카노부는 종가의 당주 타네미츠(胤栄)가 죽자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종가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그 2년 뒤에는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의 이름 글자 하나를 하사 받아 타카노부()로 이름을 고쳤다.

 1551년 그 오오우치 요시타카가 가신 스에 타카후사( 隆房)에게 살해당하자 타카노부의 주변도 소란스러워 진다. 여러 호족들과의 항쟁이 끊이질 않았지만 이들을 전부 정복하였으며, 1559년에는 큐우슈우(九州)의 명문 쇼우니 토키히사(少弐 時尚[각주:1])를 물리쳐 무명을 높였다. 그 후인 1570년 8월에는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이 대군을 이끌고 타카노부의 본거지 사가 성에 육박하는 큰 위기에 빠지지만 타카노부의 외사촌[각주:2]이며 동생이기도 한[각주:3] 모신(謀臣)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의 활약으로 간신히 낙성은 면했다.[각주:4]

 그 전투에서의 일이다.
 오오토모 측에서 타카노부의 어떤 중신에게,
 "타카노부를 배신하고 우리 쪽으로 온다면 무엇을 바라건 다 해주겠다"
 는 편지가 화살에 엮여 날라왔다. 이 중신은 평소 타카노부와 사이가 안 좋았던 가신이었다. 그 편지가 타카노부에게 전해지자,
 "우리의 결속을 무너뜨리려는 오오토모의 책략이다"
 고 하며 그 편지를 펴 볼 생각도 안하고 버렸다고 한다.

 1580년 오오토모 휘하의 벳키 아키츠라(戸次 鑑連=타치바나 도우세츠(立花 道雪))와 화의를 맺었을 때도 타카노부는 호방한 태도를 보여준다.
 벳키 측에서 큰칼(
太刀), 말, 술과 안주를 가지고 온 사자(使者)가 오자 마침 식사 중이던 타카노부는,
 "마침 잘 되었군. 그 술을 이리 다오"
 라고 한 것이다. 측근은 예부터 적이 보내온 술은 마시지 않는 것이 통례이며 어쩌면 독이 들어있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였지만 타카노부는,
 "아키츠라는 당대의 명장. 그런 더러운 수를 쓸 사나이가 아니다"
 고 말하며 밥그릇에 술을 세 번 따라 마신 뒤,
 "이 잔을 아키츠라에게 주마"
 하고는 사자의 발 앞으로 던졌다. 사자는 그 호쾌한 태도에 압도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1580년 가독을 적자 마사이에(政家)에게 물려준 뒤부터 주색에 빠진 타카노부는 정신이 황폐해지기 시작하여 류우조우지 가문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딸의 남편을 속여서 죽이거나[각주:5]어린 인질을 십자가에 메달아 찔러 죽이거나 하는[각주:6] 등의 행태에 휘하 장수들의 마음도 떠나기 시작한다.

 1584년 3월. 타카노부에게 최후의 시간이 온다. 시마바라 반도의 모리타케()에서 시마즈-아리마 연합군과 싸워 무턱대고 돌격만 하다가 패하여 죽은 것이다.
 시마즈의 용사 카와카미 사쿄우노스케(
川上 左京亮)에게 목이 잘렸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비참하게도 그 수급을 류우조우지 가문에 전해졌을 때,
 "재수없는 머리통은 우리도 필요 없다"
 며 아군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국경 부근의 간고우 사(
願行寺)로 보냈다고 한다.

[류조지 다카노부(竜造寺 隆信)]
1529년생. 히젠(
肥前) 사가(佐賀) 성주. 한때는 5개 지역()[각주:7]과 두 개의 섬(島)[각주:8]. 1584년 3월 시마즈(島津), 아리마(有馬) 연합군과 시마바라(島原)에서 싸우다 패하여 죽었다. 56세.

  1. 후에 후유히사(冬尚) [본문으로]
  2. 나오시게의 모친은 타카노부의 숙모. [본문으로]
  3. 타카노부의 모친이 나베시마 가문과의 끈을 강화하기 위해서 48살의 나이로 홀아비가 된 나오시게의 아비에게 멋대로 시집갔다. [본문으로]
  4. 이마야마 전투(今山の戦い). 오오토모 6만 vs 류우조우지 5000. 류우조우지 군은 사가 성(佐賀城)에서 농성. 오오토모 군의 허술한 틈을 눈치챈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야습하여 승리한 전투. 그러나 전술적인 작은 승리에 불과하여 이후 류우조우지는 오오토모에 화의를 청하여 그 휘하로 들어간다. [본문으로]
  5. 카마치 시게나미(蒲池 鎮漣). 증조부 이에카네와 함께 도망친 곳이었으며, 그 후에도 분가출신이기에 류우조우지 종가의 가신들에게 추방당했던 타카노부는 카마치 가문의 신세를 지며 그 군사를 빌려 다시 당주에 앉을 수 있었으나 카마치의 영지인 야나가와(柳川)가 너무 탐났고 시마즈로 접근하며 독립심 강한 사위를 놀러 오라고 꼬셔서 살해. [본문으로]
  6. 아카호시 무네이에(赤星 統家)의 14살짜리 적자와 8살짜리 딸. 무네이에는 이때의 원한으로 타카노부가 패사하는 '오키타(沖田) 외길(畷)의 전투(沖田畷の戦い)'에서 시마즈 측의 선봉 중앙에서 활약하였다. [본문으로]
  7. 히젠(肥前), 히고(肥後) 반,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부젠(豊前) 일부 [본문으로]
  8. 이키노시마(壱岐島)와 츠시마(対馬) [본문으로]

 오오우치 씨(氏)는 센고쿠(戦国) 시대 초기에 서부 츄우고쿠(中国)에서 북부 큐우슈우(九州)까지 지배했던 일본 최대의 다이묘우(大名)였다.
 역대의 당주가 모두 문화인이었다. 그러한 지배자의 영향으로 오오우치 씨의 야가타(屋形=정청(政廳) 겸 저택)가 있던
야마구치(山口)는 귀족(公家) 문화의 풍취가 짙어 [서쪽의 쿄우토]라 불리며 조선이나 명(明)나라의 문화도 섞인 이국적인 색체가 강한 도시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발달된 문화도 곧이어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폐해(弊害)가 생겨 오오우치 씨(氏)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오우치 씨(氏)는 요시타카 시대에 황금기를 맞이하고 그리고 붕괴한다.

 장년시대의 요시타카를 그린 그림이 야마구치 시(市) 류우후쿠(龍福)사(寺)에 남겨져 있는데 실로 미목수려(眉目秀麗)한 도무지 센고쿠의 무장답지 않은 용모로 문화인 다운 지성(知性)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정한 그림의 뒤편에는 냉엄한 현실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에 왔던 외국인 선교사[각주:1]가 야마구치에 와서 요시타카를 만났는데, 그 생생한 리포트가 남겨져 있다.
 “…
스오우(周防)의 수도로 가장 인구가 많고 번영한 도시 야마구치에 도착했다. 이 도시의 왕은 오오우치도노(大内殿)라고 하며, 일본에서 가장 힘 있는 왕으로 그 가신의 수나 저택의 호화로움은 다른 다이묘우들을 능가하고 있다. 이 왕의 행동은 제멋대로인대다가 무절제하며 추잡한 욕망에 몸을 던지고 있었다….”

 요시타카는 너무 과할 정도로 쿄우토(京都) 문화를 동경하였다.
 그의 부인들을 열거해보면 그가 얼마나 [쿄우토]에 심취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정실(正室)인 사다코(貞子)는 상급귀족
(公卿)인 마데노코우지 히데후사(万里小路 秀房)의 딸이었다. 사다코를 시중들며 따라왔던 [오사이노카타(おさいの方)]를 요시타카는 총애하였는데 이 여성도 하급귀족인 오츠키 코레하루(小槻 伊治)의 딸이다. 또한 [히가시노고텐(東ノ御殿)]이라 불린 측실도 역시 쿄우토의 귀족인 히로하시 카네히데(広橋 兼秀)의 딸이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요시타카는 조정(朝廷)을 통째로 야마구치로 옮겨오려고 했을 정도였다.

 요시타카는 쿄우토(京都)를 너무 존중한 나머지 정치나 군사에 이르기까지 조정의 방식을 따르고자 하였다.공문서의 작성을 함에 있어 실수가 없도록 일부러 쿄우토(京都)에서 오츠키 코레하루를 초대하였다. 오츠키는 조정 문서의 기안(起案), 발행을 관직으로 하고 있던 하급 귀족이었다. 또한 이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당대 일류 귀족(公家) 학자 산죠우니시 사네타카(三条西 実隆)에게 300개가 넘는 질문을 보냈다. 이것을 정리한 것이 [타다라 문답(多々良問答)]이라 일컬어지는 유직고실(有職故実-조정이나 무가(武家)의 예식, 관직, 법령 등의 연구)의 서적이다.

 모든 것을 쿄우토 조정 방식에 따랐다. 숙적 쇼우니 씨(少弐氏[각주:2])를 공격하기 위해서 우선 쇼우니보다 위계가 높은 [다자이노다이니(太宰大弐[각주:3]]에 임명받기 위해서 활발한 조정 공작을 펼쳤다. 조정에서는 당초 요시타카가 가진 쇼우니 토벌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기에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시타카는 그것을 황실에 거액의 헌금으로 손에 넣은 것이었다. 가난한 황실은 이 헌금으로 겨우 고나라(後奈良) 텐노우(天皇)의 즉위식을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요시타카는 다자이노다이니[각주:4]
에 임관되자마자 쇼우니 씨(氏)를 멸해 버렸다.

 쇼우니 씨(氏)를 대신하여 바라 마지않던 다자이후(太宰部)의 지배자가 되자 요시타카는 고대[각주:5]의 다자이후 문서와 같은 형식의 명령[다이후센(大府宣)]을 관내의 여러 지역에 빈번히 내렸던 것이다. 심각한 시대 착오였다.

 말년에는 이것이 더욱 증폭되어 당시 허명에 지나지 않았던 효우부쿄우(兵部卿)에 임관되었다고 득의만만하고 있었다.

 쿄우토(京都)에 대한 동경은 요시타카의 문화에 심각하다고까지 할 정도의 경도(傾倒)로 이어진다. 그랬던 만큼 와카(和歌), 렌가(連歌)에 대한 조예는 깊었다. 지금도 다자이후 텐만(天満)궁(宮)이나 이츠쿠시마(厳島) 노사카(野坂) 가문 등에는 당대 일류의 렌가시(連歌師) 등과 시회(詩會)에서 만들었던 요시타카의 시작 구절(홋쿠(発句)이 적지 않게 남겨져 있다. 거기에 요시타카는 불교, 유교를 시작으로 케마리(蹴鞠), 노래, 각종 악기, 춤 등에도 정열을 쏟았다.
 요시타카는 야마구치에 쿄우토(京都)의 귀족(公家)들이나 학자, 예능에 있어 초일류인 사람들을 몇 십 명씩 초대하였다. 요시타카는 그들에게 만금을 써도 아깝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지나친 나머지 그런 막대한 비용이 가신단이나 영민의 어깨를 짓눌러 왔다. 요시타카는 그야말로 성가신 주군이었다. 이러한 불만이 쌓이고 쌓여서 곧이어 가신의 분열이 되고 내분(內紛)으로 발전해 간다.

 오오우치 가문의 정치 조직은 오오우치씨(氏)를 중심으로 스오우(周防) 슈고다이(守護代)인 스에(陶)씨(氏), 나가토(長門) 슈고다이에 나이토우(内藤)씨(氏), 부젠(豊前) 슈고다이에 스기(杉)씨(氏)가 맡고 있었다. 각각의 아래에 또다시 쇼우슈고다이(小守護代)를 두고 영지(領地)를 지배하고 있었다.

 쿄우토(京都)에서 오는 귀족들이나 문화인 집단은 현지의 무단파 가신단에게 있어서는 불쾌한 존재였다. 그런 그들의 불만에 불을 붙인 것이 요시타카 측근인 문관 사가라 타케토우(相良 武任)의 중용이었다. 유우히츠(祐筆)의 신분인 주제에 후다이(譜代)의 중신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 등과 동급인 종오위하(從五位下)에 임명된 것이었다.
 거기에 또 하나 무단파가 요시타카에게 멀어지게 된 것은
이즈모(出雲)의 아마고(尼子) 공략에서 대패를 하였기 때문이다.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각주:6])가 오오우치 씨(氏)에 속해있던 아키(安芸)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코오리야마(郡山)성(城)을 공격하자, 요시타카는 스에 타카후사에게 명하여 코오리야마 성(城)에 구원군을 파견함과 동시에 자신도 1만5천의 병사들을 이끌고 아마고 씨의 본거지인 이즈모(出雲) 토다갓산(富田月山)성(城)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처참한 패배였다. 보급로는 끊기고 유력한 무장들에게 배신당하여 간신히 야마구치로 도망쳐 온 것이었다. 이 패전이 얼마나 뼈에 사무쳤는지 요시타카는 이후 완전히 군사면에서 손을 떼어 오로지 문약(文弱)으로만 내달렸다.

 요시타카의 최후는 비참했다.
 스에 타카후사 등 무단파에 모반 당하여 간신히 나가토의 센자키(仙崎)로 도망쳤지만 결국 이 근처에서 자살해 버린 것이었다.



큰 지도에서 요시타카가 가려 했던 센자키(仙崎)항(港) 보기

 함께 죽은 것이 전(前) 칸파쿠(関白) 니죠우 코레후사(二条 尹房), 니죠우 요시토요(二条 良豊), 전 사다이진(左大臣) 산죠우 키미(킨)요리(三条 公頼), 츄우나곤(中納言) 지묘우인 모토노리(持明院基規), 칸무수쿠네(官務宿禰) 오츠키 코레하루. 거기에 시텐노우(四天王)사(寺)의 악인(樂人)들이었다. 호화로운 쿄우토(京都)의 귀족들이 요시타카의 죽음을 화려하게 장식했다고 할 수 있다.

[오우치 요시타카(大 義隆)]
1507년생. 요시오키(義興)의 장남. 오오우치씨(氏)는 백제 왕의 자손. 1528년 가문을 이어 스오우(周防) 등 7개국의 슈고(守護)가 된다. 쇼우니(少弐)씨(氏)를 물리치고 분고(豊後)의 오오토모 요시아키(大友 義鑑)와 강화(講和)를 맺었고, 1535년 다자이노다이니(大宰大弐)에 임명 받아 후에 종이위(從二位)까지 되어[각주:7] 효우부쿄우(兵部卿) 겸 지쥬우(侍従)가 된다. 1543년 이즈모(出雲) 토다 성(城)의 아마고 하루히사를 공격하였지만 실패. 명, 조선과의 무역이나 기독교 포교를 허용하는 등 외래 문화 도입에도 힘썼다. 문약으로 흘렀기 때문에 스에 타카후사에게 공격받았다. 1551년 9월 1일 자살. 45세.

  1. 이 선교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자비에르=San Francisco Xavier)는 일본 독특의 문화와 우상 숭배, 남색에 대한 비난을 하였다가 요시타카에게 쫓겨났다고 같이 있던 페르난데스 수도사의 기록에는 적혀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원래의 성(姓)은 무토우(武藤)였으나 무토우 스케요리(武藤 資頼)가 무가(武家)이면서 쿠게(公家)의 관직인 다자이노쇼우니(太宰少弐)에 임명 받은 후 대대로 세습되었기에 아예 성으로 삼고 있었다. [본문으로]
  3. 서열을 나태내는 사등관(四等官) 중 카미(長官) 다음 가는 스케(次官)의–니(弐)는 이(二(貳)의 일본식 약자- 서열 첫째이기에 다이니(大弐), 그 다음이 쇼우니(少弐)가 된다. [본문으로]
  4. 다자이후(太宰部)는 큐우슈우(九州) 전역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관장했다. [본문으로]
  5. 다자이후가 생긴 것은 7세기 전후라고 한다. [본문으로]
  6. 아마고 츠네히사(尼子 経久)의 손자로 이 당시 아마고 당주. [본문으로]
  7. 이 당시는 아시카가(足利) 쇼우군(将軍)조차도 종삼위(從三位)였기에 무가(武家)로써는 최고위였다. [본문으로]

< 사진 출처: http://www.nijl.ac.jp/index.html>

 스에 타카후사는 그의 주군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와 무엇이든 대조적이었다. 요시타카가 문화에 탐닉했던 것에 반해 타카후사는 그쪽 방면으로는 전혀 흥미를 나타내지 않아 당시 유행이었던 렌가(連歌) 모임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스에 씨(氏)는 오오우치 가문의 필두 중신이며 원래는 오오우치 씨(氏)의 지족(支族)이다. 부친 오키후사(興房)의 뒤를 이은 타카후사도 오오우치 가문에서 위세가 강하여 주군 요시타카조차 회담 뒤에는 일부러 타카후사를 배웅할 정도였다고 한다.

 무장으로써도 뛰어났다. 사서는 타카후사의 인물상을 [서국(西国) 무쌍의 사무라이 다이쇼우(侍大将), 지용(智勇)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평하고 있다. 오오우치 씨(氏)의 이즈모(出雲) 원정이 실패로 끝나 전군이 철퇴하였을 때 타카후사는 부하들에게 쌀을 주고 자신을 생선의 내장을 먹으며 굶주림을 참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이 이즈모(出雲) 아마고 원정의 실패가 - 타카후사가 요시타카를 정점으로 하는 문치파(文治派)를 공격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처음 목표로 삼은 것은 요시타카의 총신(寵臣) 사가라 타케토우(相良 武任)였다. 비서관(祐筆)에서 출세한 문치파의 톱이었다. 신참(新參)이면서 후다이(譜代)의 중신 스에 타카후사 등과 같은 종오위하(從五位下)에 임명 받지만 1545년 5월 타케토우는 타카후사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머리를 밀고 히고(肥後)의 사가라(相良)로 물러났다. 타카후사의 행동은 노골적이 되어 주군 요시타카를 은거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이르렀다.

 이 시점까지 아직 다른 무장들은 타카후사에게 찬동하고 있지 않았다. 타카후사에 다음가는 중신 나이토우 오키모리(内藤 興盛), 스기 시게노리(杉 重矩)는 오히려 타카후사의 위험한 야망을 꿰뚫어 보고 주군에게 [스에 암살]을 권할 정도였다. 하지만 문화인(文化人)인 요시타카는 아무래도 타카후사 암살이라는 과감한 수단을 취할 질 못했다. 이 우유부단함이 후에 자신의 파멸을 부르게 된다.

 주군과 타카후사의 암투는 계속되었다. 요시타카도 나름대로 손은 썼다. 예전에 총애하던 사가라 타케토우를 다시 가문으로 불러들였으며,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장남 타카모토(隆元)에게 자신의 양녀[각주:1]를 시집 보내어 끈을 강화하였다. 모략가 모토나리는 이 때 요시타카와 연락을 하는 한편, 타카후사의 밀사(密使)와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어차피 요시타카 측은 문약(文弱)한 무리였다. 대책이 허술했다. 사가라 타케토우 등은 “스에가 반란을 일으킬 턱이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3년이 지난 후 모든 정세가 주군 요시타카 측에 불리하게 되었다. 여전히 요시타카의 문화적 탐닉은 고쳐질 낌새도 보이지 않았으며 그에 따른 낭비로 인하여 가문 내의 인심은 떠나가 버린 것이다. 반 요시타카 감정은 스에 씨(氏)뿐만이 아닌 가문 전체로 퍼져있었다.
 타카후사에게 반대하고 있는 스기 시게노리도 스에의 계획에 참가하였고, 나이토우 씨(氏)도 심정적으로는 동조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1550년. 타카후사는 휴가를 청하여 자신의 영지(領地) 와카야마(若山)성(城)으로 돌아와서는 모반 계획을 착착 짜기 시작했다.

 결국 다음 해인 1551년 8월 28일. 반란의 병사를 일으켰다. 스에 이하 스기, 나이토우 등의 군세 5000여가 야마구치(山口)로 침입하여 문치파의 저택을 돌아가며 약탈하였고 오오우치의 저택을 습격하였다. 오오우치 측은 정면으로 대항할 수 있는 병사가 적었으며 거기에 대부분이 뿔뿔이 도망쳤다.
 요시타카 주종은 밤의 어둠을 이용하여 산길을 이용하여 한반도에서 보면 동해(東海) 쪽의
센자키(仙崎) 항(港)으로 피하였지만 결국 이곳의 타이네이(大寧)사(寺)에서 자살하였다.

 타카후사는 이후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를 영유(領有)하여, 츄우고쿠(中国) 일대에 위세를 떨쳤지만, 1555년 9월 30일 모우리 모토나리와 이츠쿠시마(厳島)에서 싸워 전사(戰死)하였다.

큰 지도에서 이츠쿠시마(厳島) 전투 보기

[스에 다카후사(陶 隆房)]
주군 요시타카를 멸한 후 하루카타(晴賢)라는 이름을 칭했다[각주:2]. 1539년 18살의 나이에 가독을 이어 오오우치 가문의 가로(家老)가 되었다. 1541년 모우리 모토나리와 협력하여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각주:3])를 물리쳤다. 1551년 오오우치 요시타카를 멸한 뒤,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동생 하루히데를 맞이하여 오오우치 가문을 잇게 한 뒤 요시나가라는 이름을 칭하게 하였다. 1555년 이츠쿠시마에서 패사(敗死).

  1. 나이토우 오키모리의 딸. 때문에 나이토우 가문은 이츠쿠시마(厳島) 전투 때, 오키모리가 죽은 다음이기도 하여 타카후사 지지파와 모토나리 지지파로 나뉘었다. [본문으로]
  2. 요시타카의 양자로 꼭두각시로 세운 오오우치 요시나가(大内 義長)가 양자로 오기 전의 이름이 오오토모 '하루'히데(晴英)였기에 그 이름을 따서. [본문으로]
  3. 츠네히사(経久)의 손자. [본문으로]

아키[安芸]의 산골에 있던 미력(微力)한 소영주(小領主)에서 출발하여, 실로 10개 쿠니[]에 걸친 거대 다이묘우[大名]로 성장한 모우리 모토나리. 그는 자신의 생애를 시종일관 철저한 모략가(謀略家)로 살았다. 그의 고독한 성장 과정이 원인이었다.

 1558 8월에 장남 타카모토[隆元]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5살에 어머니와 이별하고 10살에 아버지와 사별(死別)하였다. 오로지 형 오키모토[興元]만을 의지하였지만 이 형도 내가 19살 때 죽어버렸다. 이후로는 부모형제도 없고 백부, 조카 등 친척 중에서도 도와주는 친척이 없어, 단지 혼자서 오늘날까지 어떻게든 어려움을 헤치고 살아왔던 것이다……
고 술회하였다.


 모토나리는 모우리 씨[毛利氏]의 본거지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당주 히로모토[弘元]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7살 때까지 코오리야마의 서쪽에 있는 타지히[多治比] 루가케 성[猿掛城]에서 살게 되었다. 이곳은 모우리 가문의 부하 격인 이노우에[井上] 일족의 힘이 강하여 그들의 보호를 받기도 했지만 그대신 모토나리의 땅을 횡령 당하거나 하였다. 모토나리는 이때부터 20여 년간, 이노우에 씨()의 세력 아래서 인종의 나날을 보내었다. 이런 인종의 나날 속에서 옆 군()의 호족 킷카와 쿠니츠네[吉川 国経]의 딸 묘우큐우[妙玖]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1523년에는 장남 타카모토를 얻었다. 모토나리는 27살이 되어 있었다. 이해의 여름이 끝날 즈음 모토나리의 환경이 급변하였다.


 모우리 종가(宗家)인 형 오키모토가 24살에 죽고(1516), 그 뒤를 이은 오키모토의 아들 코우쇼우마루[幸松丸]도 불과 9살로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후임 자리를 두고 내란이 일어났다.

 모토나리와 배다른 동생인 모토츠나[元綱[각주:1]]를 축으로 가문이 둘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 내란 때 이노우에 일족의 도움으로 모토나리가 상속자의 자리를 손에 넣었다. 모토나리는 이때 라이벌 모토츠나를 죽였다[각주:2].

 조연에서 단번에 주연에 오른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모우리 가문의 당주가 된 모토나리는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옹립해 준 이노우에 일족에게는 또다시 갚아야 할 빚를 만들고 말았다. 때문에 모토나리는 여전히 긴 인종의 세월을 이어가야 했다.


 그의 고독하고 남을 믿지 못하는 마음은 이때 배양된 것이다. 후에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된다.

 '우리 가문이 잘 되라고 하는 사람은 다른 나라에 있을지언정, 이 나라에는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은 모토나리의 소위 네거티브한 면인데, 포지티브한 면을 나타내는 에피소드로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13살 때였다. 가신과 함께 이츠쿠시마 신사[(神社]에 참배한 후 모토나리는 가신에게 무엇을 빌었는지를 물었다. 가신은 우리 주군이 츄우고쿠[国]의 큰 영주가 되게 해달라 빌었다고 했다. 그러자 모토나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몽둥이만큼 빌어도 바늘 정도밖에 이루어 지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빌 거라면 어째서 천하를 잡게 해달라고 빌지 않은 것이냐?”

 기개와 도량이 큰 인물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화이다[각주:3].


 또한 17살 때 중국 명()나라 사람들이 모우리 가문에 들렸는데, 그 일행 중에 관상을 보는 사람이 모토나리의 얼굴을 살펴보고서는,

 너는 고조, 태종의 관상을 겸비하고 있다. 장래 반드시 위세를 사방에 떨칠 수 있을 것이다

 고 예언했다고도 한다.


 모토나리가 당시 직면하고 있던 츄우고쿠[国]의 정세를 말하자면, 산인[山陰] 지방에는 아마고 씨[尼子氏]가 패권을 쥐고 있었고,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에서 북부 큐우슈우[九州]에 걸쳐서는 오오우치 씨[氏]가 세력을 뻗고 있었다. 두 거대 세력에 끼인 소영주(小領主) 모우리 가문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고도의 외교적 수완이 필요했다.


 1531.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각주:4]와 의형제를 맺고 있었지만, 1537년에 결별하고서 그때까지 적이었던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에게 적자인 타카모토를 인질로 받치고 그 휘하에 들어갔다.


 1541년 가을.

 아마고 씨() 3만의 병사를 이끌고 모우리의 본거지 코오리야마[郡山]로 진격해 왔을 때 오오우치 요시타카는 스에 하루카타[陶 晴賢]에게 1만의 군세를 주어 구원하도록 하였다. 아마고 군세는 이때 큰 눈을 만나 보급선이 끊겨 참패를 당하였다. 오오우치 군세도 아마고 군세를 이즈모[出雲]까지 깊숙이 추격하였다가 대패를 당했다.


 이 양 세력의 약체화는 모우리 가문이 바라던 바였다. 모토나리는 곧바로 아키 슈고[安芸守護] 타케다 씨[武田氏]를 멸하여 아키[安芸]에 군림한 것이다. 또한 이 지배 체제를 강고히 하기 위해서 모토나리는 세토 내해[瀬戸內海] 연안의 호족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과 산인[山陰]국경에 있는 킷카와 가문[吉川家]을 모략을 이용해 탈취하여, 코바야카와 가문에는 셋째인 타카카게[隆景], 킷카와 가문에는 둘째인 모토하루[元春]를 각 가문의 당주 자리에 앉혔다. 이름만 다를 뿐 실상은 어디까지나 모우리 가문의 분가(分家), 세상에서는 이를 '모우리 양 천[毛利 ][각주:5]'이라고 불렀다.


 양 가문을 손에 넣자, 모토나리는 지금이야 말로 모우리 가문을 장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중신 이노우에 일족의 숙청이었다. 20년간 모토나리는 그들의 전횡(專橫)을 참아왔던 것이다. 그 숙청은 철저의 극에 달하여 일족의 장로 모토카네[元兼] 이하 30명 이상을 죽였다. 이 과감한 결단으로 인해 가문 내의 공포는 굉장했다고 한다. 모토나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강력한 권력을 일거에 장악하여 가신들에게 복종을 맹세시켰던 것이다.


 이 결집된 힘을 이용하여 모우리 가문은 유명한 이츠쿠시마 전투[島の戦い]에 돌입하게 된다.

 츄우고쿠[国]의 명문 오오우치 가문[内家]을 격퇴하여 더욱 크게 웅비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오오우치 가문은 스에 하루카타가 주군 요시타카를 자살로 몰아 넣고, 그 자리에 요시나가[義長]를 앉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전투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모략전에서 모토나리는 진가를 발휘하였다.

 오오우치 씨()의 거점인 야마구치[山口]에 모우리의 밀정들을 잠입시켰다. 모토나리는 그들에게 스에[]의 부하인 용장() 에라 후사히데[江良 房栄]가 모우리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을 유포시키게 하였다. 작은 의혹들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결국 하루카타도 그런 소문을 믿고 후사히데를 죽여버린 것이다.


 1555년 봄.

 모토나리는 가신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츠쿠시마 섬[島]에 미야오 성[宮尾城]을 쌓았다. 적의 대군을 작은 섬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미끼였다.

 성을 쌓으려고 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 완성할 때까지 스에[陶] 군이 쳐들어 오지 않으면 좋겠는데……”

 이런 생각을 적측에 새어 나갈 수 있도록 모토나리를 손을 써 두었다. 하루카타가 조금 찔러보자 이외로 세찬 반응이 일어났다. 모우리의 숙장(宿) 중의 한 사람이 내응을 약속해 온 것이다.

 모든 것은 모토나리가 놓은 덫이었다.

 결국 하루카타는 모토나리의 유인에 넘어왔다. 하루카타는 2만의 대군을 500척의 군선에 태워서는 이츠쿠시마에 상륙시킨 후 토우노오카[岡]에 본진을 두고서는, 모우리의 미야오 성()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1555 9 21일이었다.

 30일 아침, 모우리 군은 은밀히 행동을 개시하였다. 비바람 세찬 날, 밤의 어둠을 이용하여 100척의 배로 이츠쿠시마[]로 건너 가서는 기습한 것이다.

 스에 군 2만은 4천의 모우리 군에 참패. 총대장 하루카타는 겨우 도망쳤지만 결국 섬의 서안 오오에[大江]의 바위 그늘에서 배를 갈랐다.



크게 보기                                                      < 이츠쿠시마 전투>

 이후 모토나리는 여세를 몰아 빙고[備後], 아키[安芸],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4개 쿠니[国]를 손안에 넣었다.

 

 모토나리는 죽을 때까지 현역에서 물러날 수가 없었는데, 자신이 죽은 후의 것까지 절치부심하였다.

 3명의 아들에 대한 교훈장[三子],

 '너희 셋 중에 조금이라도 사이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셋 다 멸망 당한다고 생각할 것'

 이라 써서 일치단결의 중요성을 말했으며, 세 아들에게서 서약서까지 받아 두었다.

 2차 대전 전의 일본 국정교과서에 실렸던 [세 대의 화살 교훈]은 유명한 이야기다. 한 대의 화살은 부러뜨릴 수가 있지만, 세 대를 합치면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깨닫게 하여 서로 협력할 것을 맹세케 하였다 한다. 이것은 위의 교훈장을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각주:6]

 

 1570, 손자인 테루모토[輝元]를 총대장으로 하여 이즈모[出雲]의 아마고[尼子]를 공략하러 보낸 모토나리는 그 보고를 듣지 못하고 다음 해 파란만장했던 생애의 막을 내렸다.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

1497년 아키[安芸] 요시다[吉田]지토우[地頭] 가문에서 태어났다. 처음엔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에 속하였고, 후에 오오우치[内] 휘하가 된다. 킷카와-코바야카와 가문을 손에 넣은 다음부터 차츰 세력을 넓혀, 스에 하루카타를 이츠쿠시마[島]에서 물리치고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에서 패권을 확립. 후에 츄우고쿠[国] 10개 쿠니[国]와 부젠[豊前]이요[伊予]의 일부를 영유하는 거대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571 6 14일 죽었다. 75.

  1. 가지고 있던 영지(領地)가 아이오우[相合]에 있었기에 풀네임은 ‘아이오우 모토츠나[相合 元綱]’라 하였다. [본문으로]
  2. 이때 모토츠나는 아마고[尼子]의 푸쉬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모토나리는 아마고 가문과 멀어지게 된다. [본문으로]
  3. 여담으로 나이를 먹고 죽기 전에는 '천하를 지배하는 자가 아무리 영화를 자랑하더라도, 몇 대가 지나고 나면 쇠하게 되어 자손까지 그 영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천하에 이름을 떨치기 보다는 일본을 다섯으로 나눠 그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잘 보전하여 자자손손까지 이 위세를 남겨라'……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4. 아마고 츠네히사[尼子 経久]의 손자 [본문으로]
  5. 코바야카와[小早'川']든 킷카와[吉'川']든 성에 내 천川자가 들어가 있기 때문. [본문으로]
  6. 이 이야기가 이어져 예전 노정윤이 뛰었던 일본 J리그의 산프레체 히로시마[サンフレッチェ広島]의 ‘산프레체’는, 일본 말로 3을 의미하는 ‘산(サン)’과 화살들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프레체(frecce)를 섞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

1551 9 1일 자살 45

1507 ~ 1551.

요시오키(義興)의 아들. 츄우고쿠()-큐우슈우(九州) 7개국의 슈고(守護[각주:1]). 히젠(肥前)으로 출병(出兵)하여 쇼우니()()를 멸하고 대륙 무역을 장악했다. 갓산토다(月山富田)() 공략 실패 후 귀족문화에 빠져 중신(重臣)들의 반감을 사, 스에 타카후사(隆房)가 모반을 일으키자 도망 끝에 자살.








이즈모(出雲) 원정의 실패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이와미(石見), 아키(安芸), 빙고(備後), 치쿠젠(筑前), 부젠(豊前) 등의 7개국의 슈고로써 영화를 누리며 영지(領地) 곳곳을 쿄우(京)의 우아함으로 치장한 오오우치 요시타카.
 그의 '말년'은 센고쿠(戦国) 무장의 자리를 버리는 요인이 된 이즈모(出雲)의 아마고(尼子) 토벌이 실패로 끝났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쿄우라기산(京羅木山) 산의 본진에서 갓산토다(月山富田)성(城)을 내려다 보며, 세자(世子)인 하루모치(晴持[각주:2])에게 말했다.
 “강적 아마고님은 철벽의 요새(要塞)나 지성(支城
)을 가지고 계셨다. 그 아마고 십기(尼子 十旗[각주:3]), 아마고 십새(十塞[각주:4])도 예전만 못하다. 내일은 함께 갓산토다(月山富田)를 취하자꾸나”
 그러나 공격할 때마다 실패하여 미토야 히사스케(三刀屋 久扶), 미사와 타케키요(三沢 為清), 야마노우치 타카미치(山内 隆通), 혼죠우 츠네미츠(本城 常光), 킷카와 오키츠네(吉川 興経) 등의 이즈모(出雲) 호족들이 배반하였다.

 1543년 5월 7일. 요시타카와 하루모치는 각각 따로 배를 타고 도주(逃走)하다가 하루모치가 탄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세자를 잃게 되었다.

무사(武士)와 귀족(公家) 사이에서

 야마구치(山口)로 돌아와서는 소우기(宗祇[각주:5])가 저택을 보고 영감을 얻어,

 연못은 바다요 나뭇가지 끝이 여름엔 산이구나
 池はうみ こずえは夏のみ山かな
라 시를 쓴 츠키야마(築山)의 저택에 틀어박혔다.
 츠키야마 저택은 거대한 연못과 연못을 파면서 생긴 흙으로 쌓은 큰 산이 있었으며, 한 편이 80간(間[각주:6])에 이르는 토담과 폭 3간[각주:7]해자(垓子)를 둘러쳐 현실에서 격리된 풍아(風雅)의 공간이었다. 

 츠키야마의 저택에는 귀족(公家)이나 문인(文人), 묵객(墨客)이 전란(戰亂)의 쿄우토(京都)를 피해 방문하였고 요시타카는 미남미녀에 둘러 쌓여 와카(和歌), 한시(漢詩), 렌가(連歌), 학문(學問), 신도(神道), 불교(佛敎), 유교(儒敎) 등에 몰두하는 문(文)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또한 전쟁도 벌였다.
 
이요(伊予)를 공격하였고 빙고(備後)도 손에 넣었다.
 스오우(周防)의 스에 타카후사(陶隆房 = 晴賢), 나가토(長門)의 나이토우 오키모리(内藤 興盛), 아키(安芸)의 히로나카 타카카네(弘中 隆包), 이와미(石見)의 토이다 타카모리(問田 隆盛), 치쿠젠(筑前)의 스기 오키츠라(杉 興連), 부젠(豊前)의 스기 시게노리(杉 重矩) 등의 슈고다이(守護代[각주:8]
)가 요시타카를 대신해서 오오우치씨(氏)를 지탱했다.

 요시타카도 1548년에는 종이위(従二位).
 쇼우군(将軍)직보다 관위가 더 높아[각주:9]
, 헤이안(平安[각주:10])시대라면 우다이진(右大臣)에 해당하는 관위였다.

 그러나 무장에게도 영지(領地)가 아닌 관위로 상을 내렸기에 무장들은 불만이 많았다[각주:11].
 사치는 백성들의 무거운 세금으로 이어졌다. [오오우치 요시타카 기(大內義隆記)]에는 “전쟁에 대한 준비도 없고 백성을 소중히 여기는 것 조차 잊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오우치 씨(氏)의 미래를 걱정한 명장(名將) 스에 타카후사는 끊임없이 요시타카에게 간언(諫言)하며 사태를 여기까지 이르게 한 원흉인 사가라 타케토우(相良武任)를 몇 번이고 추방했다.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변함이 없어 타카후사는 오오우치 가(家)나 백성을 위해서 요시타카의 추방을 결심할 수 밖에 없었다.

 [타카후사 모반]의 소문은 차츰 퍼져나갔다.
 그런 와중에서도 1551년 8월 26일 츠키야마의 저택에서는 코우와카(幸若[각주:12]
)가 행해지고 있었다.

 다음 날인 27일.
 
남색(男色)을 즐기던 요시타카는 과거 스에 타카후사와 즐겼던 생각에 잠기며 미남(美男)인 야스토미 겐나이(安富 源内)와 함께 마당에 있었다.

 오후 8시.
 [스에 타카후사의 대군! 야마구치를 향해서 와카야마(若山)성(城)을 출발]이라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오오우치의 군세(軍勢)는 6천.

 그러나 스기 오키츠라(杉 興連) 이외의 슈고다이는 모두 스에 쪽으로 돌아섰다.
 요시타카는 방어하기 쉽게 츠키야마의 저택에서 호우센(法泉)사(寺)로 옮겼지만, 다음 28일 아침이 되자 남아있는 병사는 500으로 줄어 있었다.

 이곳에서 자살할까도 생각했지만 사랑하는 오사이노카타(おさいの方)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그 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적자(嫡子) 요시타카(義尊)와 함께 나가토(長門) 센자키(仙崎)로 도망쳤다. 거기에서 큐우슈우(九州)로 도망치려 작은 배에 올랐지만 바다가 거칠어졌기에 나가토(長門)의 타이네이(大寧)사(寺)로 돌아왔다.

 자신을 따라 온 것은 레이제이 타카토요(冷泉 隆豊)를 포함한 불과 60여명.
 스오우(周防)국(国)은 토우다이(東大)사(寺)의 장원(莊園)가 있었던 곳으로, 이 즈음 토우다이사(寺)에서는 [스에 오와리노카미 타카후사(陶 尾張守 隆房)가 마음을 고치길]과 요시타카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비는 엄숙한 기도회가 열렸다고 한다.(東大寺古文書[각주:13]
)

말세(末世)의 수행자(修行者)

 요시타카는 둔세(遁世)에 대하여 일찍부터 동경하여 젊어서부터 선(禪)에 심취해 있었다.
 아키(安芸)의 카나야마(銀山)성(城)을 한창 공격하던 중에 - 가까운 곳에 고명한 선승(禪僧)인 지큐우(次休) 소우스(蔵主[각주:14]
)의 옛 터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산 속 깊이 들어가 결국 발견하고서는 거기에 대가람(大伽藍)을 재건(再建)하려고 결심할 정도였다.

 또한 이즈모(出雲) 원정이 한창일 때조차 쿄우토(京都)에서 요시다 카네이에(吉田 兼家)를 초청하여 요시다(吉田) 신도(神道)를 전수받았다.

 요시타카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허무하며 마음은 신불(神仏), 와카(和歌), 한시(漢詩), 유우소쿠(有職[각주:15]), 귀족(公家)의 놀이에 몰두했다. 이를 [大內義隆記]에서는 ‘말세의 수행자’라 평했으며 이는 센고쿠(戦国) 무장에게 필요한 시의심(猜疑心)과 공격성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요시타카는 타이네이사(寺) 13대 이세츠 케이쥬(異雪 慶姝)가
 “죽음을 앞두고는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는 가르침을 듣자 요시타카는,
 “뭐가 어떻게 되든 좋습니다. 지금은 마음 속 하늘에 달이 보입니다”
 고 답하여 이세츠(異雪)의 가르침을 깨달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고 한다.

 죽기 전에 남긴 시는,

 죽이려는 사람도 죽는 사람도 모두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 같구나.
 부처가 세상을 구하려고 이 세상에 오는 것 또한 이와 같다
 討つ人も討たるる人も諸共に如露如電、応作如是観
향년 45세.



  1. 무로마치(室町)바쿠후(幕府)의 지방관. [본문으로]
  2. 친아들이 아니라 양자(養子)이다. 모친이 오오우치 요시타카의 누나이며 쿠게(公家)의 명문 이치죠우 가문(一条家) 출신이었던 점이 당시 친아들이 없었던 요시타카의 세자가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본문으로]
  3. 본성 갓산토다(月山富田)와 이어진 주요한 열 개의 지성을 말한다. [본문으로]
  4. 갓산토다(月山富田)와 아마고 십기 사이에 있던 열 개의 요새. [본문으로]
  5. 1421~1502. 살아 있을 당시는 렌가(連歌)계의 일인자. [본문으로]
  6. 1간은 약 1.82미터니까, 80간은 약 146미터 [본문으로]
  7. 약 5.5미터. [본문으로]
  8. 여러 지역을 가진 슈고일 경우 그 지역에 가지 않은 채 가신 혹은 친척에게 대신 그 지역을 통치시켰고 그런 사람을 슈고다이(守護代)라 하였다. [본문으로]
  9. 이 즈음 아시카가 쇼우군 가문(足利 将軍家)은 대체로 종삼위(従三位)였다. [본문으로]
  10. 94~1185 즈음. 귀족(公家)의 전성시대였다. [본문으로]
  11. 자칭이 많았던 다른 가문, 무장이 많았던 것에 비해 오오우치가(家)의 유력 무장들은 실제로 조정에서 하사 받은 것이었다. [본문으로]
  12. 간단한 춤을 동반한 시를 읊는 것.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즐겨 부른 아츠모리(敦盛)도 이것 중의 하나다. [본문으로]
  13. 이는 스오우(周防)를 지배하고 있던 스에 가문이 횡령한 토우다이사(寺)의 장원을 요시타카가 타카후사에게 토우다이사(寺)로 반환하라고 했기에 토우다이사(寺)는 요시타카를 위해서 기도를 한 것이다. [본문으로]
  14. 절에서 불교 경전 등을 관리하는 직책 또는 사람. [본문으로]
  15. 옛 선례(先例)를 바탕으로 관직(官職), 의식(儀式), 복장 등을 연구하는 학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