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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오타 도우칸은 에도성을 축성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원래 에도성은 주가(主家)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가문[扇谷上杉家]의 거성인 카와고에 성[川越城]의 지성(支城)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후년의 에도성(지금의 황거(皇居))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소규모 성이었지만 자성(子城), 가운데 성(中城), 외성(外城)이라는 삼중으로 되어있고 주위에는 깊은 해자(垓子)가 둘러쳐 있었다고 한다.

 도우칸은 이곳을 30년간 거성으로 했지만 한 번도 공격 당한 적은 없었다. 성내의 저택을 죠우쇼우켄[勝軒]이라 이름 지어 여기서 자주 와카(和歌)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도우칸은 문무겸비의 명장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젊었을 적에는 무()에만 열중했었다고 한다.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그 유명한 [황매화 마을(山吹)]의 고사이다.

 

 사냥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비가 내렸다.

 도우칸이 한 민가(民家)에 가서 도롱이[각주:1]를 빌려달라고 부탁하자, 소녀가 황매화 한 송이를 내민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도우칸은 이유를 알지 못하고 이 꽃을 받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노신 중에 한 명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황매화는 열매[각주:2]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후습유화가집(後拾遺和歌集)]에 있는 카네아키라 친왕[兼明 親王],

일곱 겹 여덟 겹 꽃이 피지만 황매화는, 열매가 하나도 없으니 슬프구나

七重八重花けども山吹みのつだになきぞしき

라는 옛 시를 이용하여 소녀는 하고자 하는 말을 전한 것이었다. 도우칸은 이 때 소녀의 풍부한 문학적 소양에 놀라고 자신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각주:3]. [각주:4] [각주:5]

 이로부터 도우칸은 문학의 길에도 힘을 써 ()도 발전했던 것이다. 역사서, 와카선집(和歌選集), 기록, 의서(醫書), 병서(兵書) 등 수천 권을 에도성 죠우쇼우켄에 모았다.

 

 전투에서도 와카로 인해 크게 덕을 보았다.

 1483 10.

 바야흐로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扇谷上杉]의 군세가 한밤 중에 해안에 이르러 절벽아랫길을 지날 때였다. 그러나 밀물인지 썰물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적의 복병을 두려워하여 누구도 알아보려 하는 자가 없었다. 그때 도우칸이 가보지 않고 맞춘 것이다.

 옛 시에,

멀리서건 가까이서건 우는 바다의 물떼새의 노래 소리에 물이 차고 빠진 것을 안다

遠くなり近くなるみの浜千鳥、潮の干をにてぞ知る

 가 참고가 되었던 것이다. 물떼새(浜千鳥)의 울음이 멀리서 들렸기에 물이 빠진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야기를 거슬러, 당시 칸토우[]의 정세는 혼란스러웠다.

 칸토우 쿠보우[東公方 칸토우()를 지배하는 아시카가 씨[足利氏]를 지칭][각주:6]코가[古河][각주:7]호리고에[堀越][각주:8] [각주:9]로 나뉘어져 대립하였고, 코가 쿠보우[古河公方] 아시카가 시게우지[足利 成氏]와 칸레이[管領 쿠보우의 보좌][각주:10] 가문인 우에스기 가문[上杉家[각주:11] 야마노우치 우에스기[内上杉][각주:12]와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扇谷上杉][각주:13]의 두 가문]이 계속 싸우고 있었다. 칸레이 가문의 실권은 가재(家宰[각주:14])의 손에 있어 야마노우치는 나가오 카게노부[長尾 景信], 카게하루[景春] 부자(父子), 오오기가야츠는 오오타 스케키요[太田 資清], 스케나가[資長]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이 스케나가가 후에 불문에 들어가 도우칸[道灌]이라는 호를 칭하게 되는 것이다.

 

 1476.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가재(家宰) 나가오 카게하루가 주가(主家)에 반기를 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더구나 이를 공격한 우에스기가 패배를 당한 것이다. 여기서 도우칸은 두 우에스기 가문[각주:15]을 도와 나가오 가문[長尾家]와 싸우게 되었다. 도우칸은 많은 전투를 경험하지만 한 번도 지는 일이 없었다. 도우칸의 가신들은,

 우리 주군은 제갈 공명의 환생이다

 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무패의 전력을 자랑하는 도우칸에게도 검은 음모의 그림자가 다가오게 된다.

 잠재되어 있던 야마노우치-오오기가야츠 양 우에스기 가문의 대립이 깊어지던 중, 도우칸의 주군인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사다마사[扇谷 上杉 定正]가 도우칸의 명성을 질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야마노우치 우에스기[山内 上杉]의 당주 아키사다[]에게서 모략의 손길이 뻗쳐왔다. 아키사다는 사다마사에게 밀사(密使)를 보내어 도우칸을 없애면 손을 잡아도 좋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도우칸이 주군 사다마사에게 암살당한 곳은 사가미[相模]카스야[糟屋]에 있는 사다마사의 저택에서였다. 초대되어 목욕을 하던 중에 자객에게 습격 당한 것이다. 칼질을 당했을 때 도우칸은,

 당가(當家 - 오오기가야츠 가()) 멸망!”

 이라 외치고 쓰러졌다고 한다.

 

[오오타 도우칸(太田 道灌)]

 1432년 태생. 첫 이름은 스케나가[資長], 후에 모치스케[持資]로 바꾸었다. 24살에 정오위하(正五位下) 빗츄우노카미[備中守]에 서임.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가문의 가재(家宰)로 에도성의 축성자. 암살당한 것은 1486 7 26. 55.

  1. 일본 발음으로 ‘미노[みの(蓑)]’라고 한다. [본문으로]
  2. 일본어 발음으로 ‘미[み(実)]’라고 한다. [본문으로]
  3. 열매[実]와 미노[みの]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했다는 말. [본문으로]
  4. 이 이야기는 후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우칸은 어렸을 때부터 ‘카마쿠라 오산[鎌倉五山 – 유명한 절 다섯 개]’에서 수행을 한 천재로, 특히 도우칸의 아버지 또한 굉장히 시에 관심을 갖고 여러 문인들과 교류를 맺었기에 그런 환경에서 자란 도우칸에게 문학적 소양이 없을 리 없다고 한다. [본문으로]
  5. [노사어록(老士語録)]이라는 책에 와카가 뛰어난 늙은 여자와 도우칸 과의 이야기가 있어, 이것을 후에 유아사 죠우잔(湯浅 常山)이 자신의 저서 [상산기담(常山紀談)]에서 재미있게 각색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6.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우군(将軍)은 종가(宗家), 카마쿠라 쿠보우는 분가(分家)가 되겠다.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 尊氏]의 셋째 모토우지[基氏]의 자손이 대대로 카마쿠라 쿠보우를 이어받았다. 독립지향이 강하여 자주 종가인 쇼우군 가문에게 개겼고, 이것이 후에 칸토우 분란의 원인이 되었다. [본문으로]
  7. 오리지날 카마쿠라 쿠보우[鎌倉公方](즉 칸토우쿠보우[関東公方]. 대대로 카마쿠라에 거점을 두었다. 카마쿠라 쿠보우의 보좌역인 칸토우 칸레이(関東 管領)가 쇼우군 가문 편을 들었기에 카마쿠라 쿠보우와는 자주 다투었다. 이러다가 5대 쿠보우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당시의 칸토우 칸레이 우에스기 노리타다[上杉 憲忠, 야마노우치 가문 출신]를 죽인 것을 발단으로 쿄우토쿠의 난[享徳の乱]이 일어나고, 칸토우칸레이 우에스기 측은 시게우지의 부당함을 막부에 일러, 이에 바쿠후는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노리타다[今川 範忠]에게 칸토우 평정을 명하자 노리타다는 카마쿠라로 침공하여 함락시켰다. 이때 다른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카마쿠라를 비워 두었던 시게우지는 카마쿠라를 탈환할 생각을 하지 않고, 시모우사[下総]의 코가[古河]를 본거지로 삼아 이때부터 [코가 쿠보우]를 칭하게 된다. [본문으로]
  8. 카마쿠라에서 카마쿠라 쿠보우(즉 칸토우 쿠보우)를 쫓아낸 바쿠후 쇼우군(당시 아시가 요시마사[足利 義政]는, 그 자리에 개김성이 강해진 먼 친척보다 자신의 동생을 임명하고자, 승려였던 마사토모[政知]를 환속시켜 정식으로 칸토우 쿠보우로 임명하여 내려 보냈다. 하지만 여전히 강성한 시게우지 세력과 그 시게우지와 싸웠던 칸토우칸레이 우에스기 가문 내에서조차 마사토모를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이론(異論) 등으로 인해서 카마쿠라까지 가지 못하고, 이즈[伊豆]의 호리고에[堀越]에 머물렀다. [본문으로]
  9. 이로 인해 이 당시는 칸토우 쿠보우가 둘이 생기는 결과가 되었다. 빽으로 바쿠후가 있는 호리고에 쿠보우, 여전히 칸토우에서 끗발이 날리는 코가 쿠보우. 둘 다 칸토우 쿠보우를 자칭했기에 구별을 위해서 ‘코가 쿠보우’, ‘호리고에 쿠보우’라 지칭하게 되었다. [본문으로]
  10. 카마쿠라 쿠보우를 보좌하기 위해서 바쿠후에 칸레이[管領]가 있듯이, 칸토우[関東]에도 칸레이[管領]가 두어져, 이를 칸토우 칸레이[関東管領]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11. 우에스기 씨는 무로마치 바쿠후를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 尊氏]의 외가. 초대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인 우에스기 노리아키[上杉 憲顕]는 타카우지와 외사촌지간. [본문으로]
  12. 거처가 카마쿠라의 야마노우치[山内]라는 곳에 있었기에 야마노우치 가문이라고 일컬어졌다. 초기를 제외하곤 대대로 칸토우 칸레이 직을 세습하였다. [본문으로]
  13.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먼 친척. 그래서 부하. 거처가 카마쿠라의 오오기가야츠[扇谷]라는 곳에 있었기에 오오기가야츠 가문이라고 일컬어졌다. ‘우에스기 젠슈우의 난[上杉禅秀の乱]’ 때를 제외하곤 야마노우치 가문의 부하였으나, 오오타 도우칸의 활약으로 거의 대등한 힘을 가지게 된다. [본문으로]
  14. 그 가문의 필두 중신. [본문으로]
  15.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山内上杉家]와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가문[扇谷上杉家]. [본문으로]

오오타 도우칸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4. 12. 2. 06:19 Posted by 발해지랑

오타 도칸[太田 道灌]

1486 7 26 모살(謀殺) 55


1432 ~ 1486.

이름은 스케나가[資長].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씨[扇谷 上杉氏]씨를 섬겼으며, 에도[江戶]에 성을 축성하여 거성으로 삼았다. 오우기가야츠, 야마노우치[山內]의 양 우에스기 씨간의 대립에서 주가(主家)를 위해서 무공을 세웠지만, 주군인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에게 살해당한다. 학문, 문예를 좋아했으며, 와카[和歌] 또한 뛰어났다











잠깐 동안의 평화


 오오타 도우칸은 1485 9월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를 에도 성[江戶城]으로 초대하였다.

 반리[万里]는 린자이 종[臨濟宗] 소우코쿠 사[相国寺]()의 승려로 한시인(漢詩人)으로 높은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오우닌의 난[応仁の乱]을 피해 미노[美濃]에 살고 있었다.

 도우칸은 이때 54세였다. 반리[万里] 4살 연상인 58세로 두 사람은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인 것처럼 약 10개월간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면서 서로 시가(詩歌)를 함께 만들었다. 도우칸에게 있어서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을 것이다.


 도우칸은 24살에 아버지 도우신[道真]에게 가독(家督)을 물려 받은 이래 30년간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씨[扇谷 上杉氏]의 가재(家宰[각주:1])로써 정무와 군사로 쉴 틈 없는 세월을 보내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1454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각주:2]] 우에스기 노리타다[上杉憲忠]가 카마쿠라 쿠보우[鎌倉 公方[각주:3]] 아시카가 시게우지[足利 成氏]에게 모살(謀殺)되었고 이후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각주:4]]가 된 아시카가 시게우지와 칸토우칸레이 우에스기 아키사다[上杉 顕定]칸토우[関東]의 무사들을 둘로 나누어 25년간 싸웠다.

 1476년에는 우에스기 아키사다의 중신(重臣) 나가오 카게하루[長尾 景春]가 아시카가 시게우지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도우칸은 30차례가 넘는 야전, 공성전을 사가미[相模], 무사시[武蔵], 코우즈케[上野], 시모우사[下総]에서 전개하여 쿄우토쿠의 난[享德の乱]을 종결시켰다.


 이즈[伊豆]에서는 호우죠우 소우운[北条 早雲]이 태두하여 호시탐탐 사가미, 칸토우[関東]평야를 노리고 있었다. 칸토우의 무가(武家)들 사이에서는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아키사다[上杉 顕定]나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사다마사[扇谷上杉 定正]에게 실망을 느끼는 반면 그에 비례해서 오오타 도우칸[太田 道灌]의 명망은 높아만 갔다.


 그리고 칸토우에 겨우 평화가 방문했다. 도우칸은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와의 싸움에서 최전선기지이며 당시 비할대 없이 견고한 성이었던 에도 성[江戶城]성에서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를 맞이한 것이다.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와의 시가(詩歌)


 도우칸은 어렸을 적에 카마쿠라[鎌倉] 고잔[五山[각주:5]]에서 학문을 배워 학자로서도 전도가 유망했다. 그 후 무사(武事)에 골몰하는 날들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책을 가까이 두며 시가(詩歌)를 만드는 즐거움을 잊으려 하지 않았다.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를 맞이한 다음해 봄.

 55세를 맞이한 도우칸은 카마쿠라에서 켄쵸우 사[建長寺], 엔카쿠 사[円覚寺]의 시승(詩僧)들을 초대하여 반리[万里]와 함께 수미다 강[隅田川]에 몇 척의 배를 뛰어놓고 시가(詩歌)의 연회를 개최하였다. 도우칸은 또 6월에 반리와 함께 무사시[武蔵] 오고세[越生]의 산촌에 칩거하고 있는 부친 도우신[道真]을 방문해 몇 일을 함께 보냈다.

 도우신[道真]은 예전 카와고에 성[河越城]에 소우기[宗衹], 신케이[心敬]를 초대해서 렌가회[連歌会]를 열어 [河越千句]를 남길 정도인 무장 가인(武将 歌人)이었다. 은거소(隱居所) '지토쿠켄[自得軒]'에서 도우칸 부자와 반리는 렌가회[連歌会]를 열어 시로 서로의 마음을 통하였다.


 다음달인 7월.

 반리 슈우쿠와 여전히 문()의 세계를 즐기고 있던 도우칸은 주군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에게 초대를 받게 되었다. 도우칸은 아무 의심도 없이 에도성을 출발하여 26일에는 사가미[相模] 카스야[糟屋]에 있는 사다마사의 저택을 방문하였고 거기서 암살당했다.


주군(主君)에 의한 모살(謀殺)


 도우칸의 죽음에 대해서는 살해 장소도, 이유도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는데 반리 슈우쿠 14일 후의 기일(忌日)에 기록한 제문(祭文)에는

도우칸 공()은 사가미 카스야에 있는 주군의 저택에서 칼로 인해 쓰러졌고, 혼은 날라갔다.
 고 기록되어 있어 방문한 당일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에 의해 살해 된 것을 알 수 있다.


 후년(後年).

 도우칸[道灌]의 손자의 손자인 오오타 스케타케[太田 資武]가 오오타 가및 널리 전해지고 알려진 것들을 기록해 놓았는데 거기에는,

죽음에 대한 정설(正說)은 목욕탕 건물의 입구로 나왔을 때 소가 효우고[曾我 兵庫]라는 자가 휘두른 큰 칼[太刀] 맞았고, 쓰러지면서 '당가멸망[当方滅亡]'이라고 마지막에 외쳤다.

 도우칸이 주군의 계략에 빠져 [당가멸망]이라고 최후에 외쳤다는 것을 보면 도우칸이 평소부터 주군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년 후.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가 소가 붕고노카미[曾我 豊後守]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우칸은 에도, 카와고에성을 굳건히 하며 종가(宗家)인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아키사다[山內 上杉 顕定]를 쓰러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꾸짖었으나 결국 역심을 일으켰기에 주살하였다.
고 자기 변호하고 있다.


 도우칸이 죽은 후 오우기가야츠[扇谷], 야마노우치[山內]의 양 우에스기[上杉] 세력은 리더쉽의 결여로 인하여 칸토우[関東]의 여러 무장들의 지지를 잃었고, 이즈[伊豆]에서 침공해 온 호우죠우 씨[北条氏]에 위해 도우칸의 말대로 쇠망하게 된다.

  1. 가신(家臣) 중 No.1 [본문으로]
  2. 카마쿠라 쿠보우(鎌倉公方)를 보좌하는 신하 필두.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가 칸토우(関東)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자리. 대대로 아시카가(足利) 일족이 맡았다. [본문으로]
  4. 카마쿠라 쿠보우는 바쿠후에 개김성이 짙었기에 바쿠후는 이때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노리타다[今川 範忠]에게 시게우지 정벌을 명하였고 당시 시게우지가 다른 전투로 본진 카마쿠라를 비워두었던 틈을 타 점령. 이후 돌아 갈 곳이 잃은 시게우지는 코가[古河]로 자리를 옮겼다. [본문으로]
  5. 카마쿠라에 있는 절 중 가장 격이 높은 다섯 곳을 말함. 서열은 차례대로 - 켄쵸우 사[建長寺], 엔가쿠 사[円覚寺], 쥬후쿠 사[寿福寺], 죠우치 사[浄智寺], 죠우묘우 사[浄妙寺]. 당시 칸토우 학문의 본산이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