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요시타카[九鬼 嘉隆]는 히라도[平戸]의 마츠라 가문[松浦家]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명한 수군(水軍) 대장이다. 요시타카의 선조는 키이[紀伊] 무로 군[牟婁郡] 쿠키 포[九鬼浦] 출신으로, 요시타카의 조부 즈음부터 시마[志摩]에 살았으며, 요시타카는 시마 7개 섬[志摩七島]의 수군을 휘하에 둔 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게 되었다.

 쿠키 수군의 위력은 뭐라 해도 유럽에서 전래한 화포중심의 새로운 장비였다.
 1578년 6월. 요시타카는 거함 7척을 이끌고, 키이의 사이가 포[雑賀浦] 앞에서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願寺] 측에 선 키이 사이가[雑賀]의 수군 500척을 ‘유럽의 화술[蛮国之火術]’로 격파하였다. 사이가의 고전적 해적(海賊)의 전법으로는 신병기 화포를 장비한 쿠키 수군에 승리할 방도가 없었다.

 7척의 거함은 폭 약 13m, 길이 약 22m로, 당시의 상식을 깨는 거대함선이었다. 더구나 선체는 철을 두른 철갑선이었다.
당시 일본에 와 있어 이 배를 목격한 포르투갈의 선교사 오르간티노는, “일본 전국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며, 우리 왕국(포르투갈)의 배와 닮았다…”고 하며 배에는 대포 3문이 장착되어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해의 9월. 오다 노부나가도 이 7척의 신예전함을 보기 위해 친히 사카이[堺]로 향할 정도였다. 이후 11월, 쿠키 수군은 이 신예함을 거느리고, 혼간지[本願寺]로 군량을 수송하기 위해 오오사카 만[大阪湾] 키즈 강[木津川] 앞에 나타난 모우리 수군[毛利水軍] 600여 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요시타카는 이 전공으로 시마와 이세[伊勢]의 각지에 3만5천 석을 하사 받아, 새로이 토바 성[鳥羽城]을 쌓고 본거지로 삼았다.

 하지만 이 일본 해군 역사상 획기적인 전함건조자의 명예는 임진왜란 때 모래성처럼 무너지게 된다. 요시타카는 수군의 총사령관적인 역할로 출진하였지만, 일본수군은 조선의 명장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에게 연전연패한 것이다.
 요시타카는 그 책임을 전가 받아 1597년 은퇴를 명령 받고 가독(家督)을 차남 모리타카[守隆]에게 물려주었다. 모리타카는 토바 성 3만 석을 영유하였고, 요시타카는 은거료(隠居料)로 5천 석이 주어졌다.

 그러나 요시타카의 운명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자 암전한다. 아들인 모리타카를 토쿠가와[徳川] 측에 서게 하고, 요시타카 자신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권고에 응하여 서군(西軍)에 선 것이다.
 처음에 요시타카는 아들인 모리타카가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을 떠나는 토쿠가와 군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미츠나리의 사자를 두 번 거절하였지만, 쿠마노 신쿠우 당[熊野新宮党]의 호리우치 우지요시[堀内 氏善]가 “오오스미노카미[大隅守=요시타카] 님만 응해주신다면 곧바로 쿠키 님 밑으로 달려가겠다.”는 것을 전해 듣고, 결국 서군 가담을 수락한 것이다.
 
또한 다시 한번 자신의 힘으로 화려한 영광의 쿠키 수군을 다시 만들고 싶었을 것인지도 모른다.

 아들인 모리타카는 아비가 서군으로 돌아섰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그것을 이에야스[家康]-히데타다[秀忠]에게 보고하여 자신에게 딴 마음이 없음을 맹세하였다. 이에야스는 그 뜻을 기뻐하며 모리타카에게 귀국하여 시마-쿠마노의 수군을 복속시키라 명령하였다.

 모리타카가 귀국하자 이미 토바 성은 요시타카의 손에 떨어져 있어, 본뜻과는 다르게 부자지간에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역시 서로 배려하며 자그마한 싸움만 있었을 뿐이었다.
 세키가하라 결전은 동군의 승리로 끝났고, 모리타카는 서군 선박의 통행을 막은 공적으로 5만5천 석으로 가증되었다.

 한편 패한 측인 요시타카는 아고[英虞]의 와구 포[和具浦]에 숨어있었지만 곧이어 자살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모리타카의 가로(家老) 토요타 고로우에몬[豊田 五郎右衛門][각주:1]이 독단으로 요시타카에게 자살을 강요했다고 한다. 모리타카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조명탄원이 성립된 것도 모른 채. – 때문에 토요타는 후에 모리타카의 명령으로 참수 당했다고 한다.[각주:2] 

구키 요시타카[九鬼 嘉隆]
1542년생. 오오스미노카미[大隅守]. 처음엔 키타바타케 가문[北畠家] 휘하였지만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속하여 혼간지 공략[本願寺攻め]에 참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에서는 서군에 속하여 1600년 10월 자살. 59세.    

  1. 토요타의 부인이 요시타카의 장녀인 것을 보면 가신들 중 필두의 위치에 있었던 듯. [본문으로]
  2. 일설에 따르면, 토요타 고로우에몬은 몸을 땅에 묻고 머리만 남겨놓은 채 옆에 톱을 놓아, 지나가는 사람들이 토요타의 목을 톱으로 베게 만들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타카카게[隆景]가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의 후계자가 된 데에는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모략이라는 덫이 작용하고 있다.

 모우리 가문[毛利家] 발전을 위해서는 세토 내해[瀬戸内海] 연안의 호족 코바야카와 가문을 빼앗는 것이 긴급한 과제였던 것이다.
 코바야카와 가문은 당시 누타[沼田]와 타케하라[竹原]라는 두 가문으로 나뉘어져
[각주:1] 있었다. 그 중 타케하라 가문의 당주인 오키카게[興景]가 병으로 죽었다. 운 좋게 모토나리의 조카가 죽은 오키카게의 부인이었다. 곧바로 모토나리는 당시 9살인 토쿠쥬마루[徳寿丸=후의 타카카게]를 후계자로 밀어 넣었다.
 그 직후 이번엔 누타 가문에서 당주 마사히라[正平]가 죽었고 거기에 그의 아들인 마타츠루마루[又鶴丸]에게 눈이 머는 불행이 찾아왔다. 모토나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처음부터 누타 가문의 중신 노미 씨[乃美氏]를 꼬셔놓은 상태에서 은밀히 모략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모토나리는 강제로 누타 가문을 타케하라 가문에 합병시키고는 그 당주에 타카카게를 앉혔다. 더불어 합병 반대파인 누타 가문의 가신들 하나하나를 숙청한 것이었다. 누가 보아도 일련의 당주 사망사건에는 모토나리의 검은 모략의 냄새가 풍기고 있다.

 어쨌든 이런 어두운 모략에 의해 탄생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이지만, 모우리 가문 발전의 방향타를 쥐고서는 전란의 세상에서 그 지모를 아낌없이 발휘하여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継], 시마 사콘[島 左近] 등과 더불어 센고쿠[戦国]의 삼대지장 중 한 명으로 손꼽히게 된다.

 타카카게가 죽었을 때,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는,
 "일본에서 지혜로운 사람 한 명이 사라졌다. 이 인물은 모우리 가문이라는 거대한 배를 조종하는 뱃사공과 같았다…"
 하고 회상하였다.

 또한 이런 이야기가 있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상급귀족[公卿]인 키쿠테이 하루스에[菊亭 晴季]와 바둑을 두다가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자 자기도 모르게
 “이건 타카카게라도 풀 수 없겠지……”
 라고 혼잣말을 한 것이다. 옆에서 관전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도
 “정말 그렇겠군요”
 라며 끄덕였다고 한다.

 거슬러 올라가 소년시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타카카게가 형인
모토하루[元春]와 각각 아이들을 데리고 편을 갈라 눈싸움을 하였을 때, 처음엔 모토하루의 돌격에 패하였지만, 두 번째는 부하를 몇 명인가 복병으로 숨겨 놓아 모토하루의 허를 찔러 승리하였다고 한다.

 타카카게가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선 것은 1547년 그의 나이 15살 때에 칸나베 성[神辺城]공략전이었고, 1555년 이츠쿠시마 전투[厳島合戦]에서는 일찍부터 후년 천하 삼대지장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은밀한 상륙작전에는 아무래도 세토 내해의 수군인 노지마[能島], 쿠루시마[来島] 수군의 응원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들과 교섭하여 현실화시킨 것이 타카카게인 것이다.

 이러한 외교적 수완뿐만이 아니라 실전에서도 민첩한 기동성을 보여주었다. 별동대를 이끌고 대담하게도 적의 정면인 이츠쿠시마 신사(神社) 오오토리이[大鳥居] 가까이에 배를 대었다.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의 군사들은 설마 적측인 모우리의 군사들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그냥 수상히 여기고 있자, ‘큐우슈우(九州)에서 원군으로 온 수군이다’[각주:2]고 속이고는, 적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상륙하여 스에 군의 본진 토우노오카[塔ノ岡]의 허리쯤에 진영을 세웠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의 결전에서는 스에 군의 배후에서 습격한 부친 모토나리 등의 주력과 호응하여 스에 군을 협공하였다. 타카카게 자신도 3개소의 상처를 입으면서 분전. 적 부하장수인 야마토 오키타케[大和 興武]를 포로로 잡았으며, 적 대장인 타카후사를 추격하여 자살로 몰아넣었다.


크게 보기                                                 < 이츠쿠시마의 전투 >

 1570년 6월.
 부친 모토나리가 이 세상을 떠나자 타카카게는 모토하루와 함께 테루모토[輝元]를 잘 보좌하여 [모우리의 양천(毛利の両川)[각주:3]]으로서 존재감을 발휘하였다. 그러는 한편 모우리 본가에 대한 충성심도 두터워, 조카인 테루모토가 머물고 있는 방을 지날 때는 반드시 무릎을 굽혀 예를 다하며 지나갔으며, 테루모토가 없을 때도 그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하통일을 목표로 서쪽으로 진격을 해 온 오다 군[織田軍]과의 격돌에서 그의 군략가로서의 특질이 발휘된다.
 1575년 오다 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오오사카[大坂]의 혼간지[本願寺]와 손을 잡은 모우리는 같은 해 7월 혼간지에 식량을 해상 수송하였는데, 그때 총지휘를 한 것이 타카카게였다. 모우리의 수송선단은 요격하러 나온 오다 군과 키즈가와 강[木津川] 하구에서 격전을 벌인다. 그러나 이쪽은 이츠쿠시마 이래의 전통을 자랑하는 코바야카와 수군이다. 오다 측의 수군을 능숙하게 포위한 후 철포, 불화살을 쏟아 붙는 듯이 공격하여 수 백 명을 죽이는 대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각주:4]

 이제 츄우고쿠[中国] 모우리의 명성은 시코쿠[四国], 큐우슈우[九州]에까지 이르렀다. 더구나 모우리는 그 이전에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통해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카이[甲斐]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도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과 호응하여 오다[織田]를 동서에서 협격하고자 하는 대전략이었다.

 이러던 중 오다-모우리 대결 최대의 고비가 되는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 공방전에 이르게 된다.
 이 전투는 타카마츠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의 할복을 조건으로 강화를 맺게 되는데,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의 변 소식이 전해지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죽음을 숨긴 채 다음 날 무네하루를 할복시키고는 급히 쿄우토[京都]로 군사를 돌려던 것이다.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소식은 모우리 군에게 있어서 다시 오지 않을 반격의 기회였다. 여기서 히데요시를 추격한다면 물리치는 것은 쉬웠다. 대부분이 이 의견에 찬성하였다. 하지만 타카카게는 결사반대를 외쳤다.

 타카카게 외교감각의 탁월함이 여기서 멋지게 발휘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카카게는 히데요시가 장래 반드시 천하를 쥐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추격하지 않고 히데요시에게 아케치[明智] 토벌을 성공시키면 반드시 히데요시는 모우리에게 호의를 갖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모우리의 장래를 위해서도 그러는 편이 훨씬 이득이라고 설득한 것이다.

 히데요시의 정권장악은 타카카게의 이 추격반대 덕분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후년 히데요시는 이때의 타카카게 배려에 깊은 감사를 하여, 모우리 씨[毛利氏]에게 이때의 은혜를 갚음과 동시에 특히 타카카게를 본가의 테루모토와 동격으로 올려, 대로(大老)의 한 사람으로 발탁하였다. 영지(領地)도 치쿠젠[筑前] 전부와 치쿠고[筑後]와 히젠[肥前]에 각각 2개군(郡)을 하사하여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만들어 주었다.

 한편 타카카게가 모우리 가문에 얼마나 헌신적이었는가는 히데아키[秀秋]를 양자로 받아들인 것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세자가 없는 모우리 가문에 히데요시의 양자 히데아키가 후계자 후보로 거론된 것이다. 타카카게는 경악했다. 아키[安芸] 명문가의 피가 히데요시의 친척이라고는 하여도 기껏해야 잡병[足軽]이나 맡을 인물에게 더럽혀진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타카카게 필사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히데요시의 주치의인 야쿠인 젠소우[施薬院 全宗]에게 히데요시의 의향이 어떤지 묻자, 히데아키를 모우리에 보낸다는 건은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타카카게는 이때 자기 가문을 희생시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52만석의 영지(領地)를 킨고 츄우나곤[金吾中納言] 히데아키 님에게 물리 드리고 싶습니다"
 는 요청하였다.
 모우리의 분가라고는 하여도 코바야카와 가문은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때부터의 명문가였다. 이런 명문가가 히데아키 따위에게 더럽혀 지는 것 또한 참기 힘들었다. 더구나 타카카게에게는 이미 동생인 히데카네[秀包]를 양자로 하고 있었음에도[각주:5], 그를 분가시키면서까지 히데아키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싶다며 간청한 것이었다. 타카카게의 모우리 가문 안녕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오히로이[お拾=후의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자 양자 히데아키의 처우에 곤란해 있었던 히데요시는 타카카게의 신청에 굉장히 기뻐하였다고 한다. 타카카게에게는 은거료(隠居料)로써는 파격적인 빙고[備後] 미하라[三原] 3만석이 주어졌다.

 이보다 앞선 1593년 1월.
 타카카게는 조선에서 전군을 그 지휘하에 두고서 명(明)나라의 병력 30만을 상대로 싸웠다. 적의 대장은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던 이여송(李如松)이었다. 이 명나라 장수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를 패주시킨 기세를 타고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타카카게는 이를 격파하는 대공을 세운 것이었다.[각주:6]
 그러나 조선에 있던 중 병을 앓았고 귀국하여 미하라에서 요양을 하였지만 1597년 뇌혈관 장애로 졸도하여 일생을 마쳤다.

 참고로 코바야카와 가문은 히데아키의 대가 되어서 자식이 없어 단절되지만,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이르러 당시 모우리 가문의 당주인 모우리 타카치카[毛利 敬親]가 일족 중의 한 명에게 코바야카와 가문을 잇게 하였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 隆景)]
1533년 태어났다.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삼남. 부친 모토나리, 조카 테루모토[輝元]를 도와
츄우고쿠[中国]를 경략. 미하라[三原]를 본거지로 하여 세토 내해[瀬戸内海]에 강력한 수군을 편제하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와 강화한 후, 히데요시의 시코쿠[四国], 큐우슈우[九州], 오다와라[小田原] 정벌[각주:7]에 참가. 조선의 역에서는 1593년 명(明)나라의 대장 이여송(李如松)의 대군을 개성(開城)에서 물리쳤다. 히데요시의 양자 킨고 츄우나곤 히데아키[金吾中納言 秀秋]를 세자로 받아들였으며, 1597년 6월 20일 죽었다. 65세.

  1. 누타(沼田) 쪽이 종가였다. [본문으로]
  2. 당시 오오우치 가문[大内家]의 당주는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동생 오오우치 요시나가[大内 義長]였기에, 타카카게는 오오토모 소우린이 보낸 원군이라고 한 것이다. [본문으로]
  3. 킷카와[吉'川']나 코바야카와[小早'川']에는 내 천(川)자가 들어있기에. [본문으로]
  4. 제1차 키즈가와 강 입구의 전투[第一次木津川口の戦い]. 참고로 2차는 오다 군의 철갑선으로 복수했다는 전투이다. [본문으로]
  5. 모우리 모토나리의 9번째 아들. 모친이 코바야카와 가문의 분가인 노미 씨[乃美氏]인 연도 있어 아들이 없던 타카카게의 후계자가 되어 있었다. [본문으로]
  6. 벽제관 전투를 말한다. 여기 쓰여있는 30만을 그대로 믿으면 지는 겁니다. [본문으로]
  7.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공격한 것. [본문으로]

무라카미 다케요시[村上 武吉]

1604 8 22일 병사 72.

1533년 즈음(??) ~ 1604.

노시마[能島] 무라카미 씨[村上氏] 5대 당주. 가독(家督) 종가(宗家)에게서 가독을 빼앗았다. 세토 내해[瀬戸內海]의 수군(水軍)을 이끌었다. 이츠쿠시마 전투[厳島の戦い]에서는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편에 서 스에 하루카타[陶 晴賢]와 싸웠고 후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지배 하에 들어가 치쿠젠[筑前], 부젠[豊前]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도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를 도왔다.








노시마[能島] 퇴거[退去]


 무라카미 타케요시가 선조 대대로 내려오던 수군성(水軍城) 노시마를 뒤로 하고 아키[安芸] 타케하라[竹原]로 자리를 옮긴 것은 1585년 가을이었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모우리 공략(빗츄우[備中] 원정)시에 3번에 걸쳐 항복을 권했지만 이에 따르지 않았고, 모우리 씨[毛利氏]가 히데요시에게 굴복한 뒤에도 히데요시의 사이카[
] 공략 요청에 응하지 않았으며, 1585 6시코쿠[] 정벌에도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자 히데요시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에게 명령하여 그를 본거지에서 쫓아낸 한 것이다.


 노시마[能島]는 쿠루시마[來島] 해협의 무시[務司], 나카토[中途]의 두 성()과 함께 노시마 무라카미 씨[能島村上]세토 내해를 항행하는 선박에게 세키제니[関銭 통행세]를 징수하기 위한 바다의 세관(稅關)이었기에, 이곳을 잃었다는 것은 해적중(海賊衆[각주:1])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된다는 의미가 되었다.


 더구나 3년 후인 1588 7 8일.
 히데요시는 해적 금지령을 발포하여 타케요시 부자(父子)가 이 금지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둘을 죽이려고 하였다. 다행히 이때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와 히데요시의 복심(腹心)인 토다 카츠타카[
田 勝隆]의 주선으로 사형은 면하게 되지만, 그 대신 아키[安芸] 타케하라에서도 쫓겨나 아카마가세키[赤間 시모노세키[]]부터 동쪽 - 즉 세토 내해에서의 거주를 금지 당한다.


 타케요시는 어쩔 수 없이 이요[伊予]에서 치쿠젠[筑前]으로 전봉()을 명 받은 타카카게를 따라 치쿠젠[筑前] 나지마[名島]로 거처를 옮겼고, 곧이어 부젠[豊前] 미노시마[箕島]로 이주 당한다. 부젠[豊前] 미노시마는 히데요시의 복심인 쿠로다 칸베에 요시타카[黑田 官兵衛 孝高]의 영지(領地) 위험 분자 타케요시를 칸베에의 감시하에 두고자 하는 히데요시의 노림 수였다.


 1591년.

 히데요시는 분로쿠의 역[の役[각주:2]]을 앞두고 타케요시를 나가토[長門] 오오츠 군[大津郡]으로 이주 시켰다. 이 곳은 모우리 씨[毛利氏]의 영지로 주어진 석고(石高) 1만석이라고 하지만, 예전에 본거지였던 세토 내해와는 멀리 떨어진 한국 동해(東海)측의 벽지(僻地)였다. 이럴 정도로 히데요시는 무라카미 타케요시라는 존재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재기(再起)를 꿈꾼 야망(野望)


 타케요시가 나가토 오오츠 군에서 아키[安芸] 타케하라로 돌아 온 것이 1598년 가을. 이해 8 18일에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가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타카카게는 그 전해인 6 12일 미하라 성[三原城]에서 병으로 죽었기 아키[安芸] 타케하라는 모우리 테루모토의 영지가 되어 있었다.


 이때 타케하라의 친카이잔 성[海山城]에서 살고 있던 타케요시는 아들인 모토요시[元吉]와 함께 이요[伊予] 노시마로 복귀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세토 내해 중앙부의 지배권을 회복하여 예전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천하 형세는 그런 타케요시의 바램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히데요시의 죽음에 의해 생긴 절호의 기회를 모우리 테루모토가 놓쳤고, 그의 우유부단으로 인하여 천하는 수군을 적대시(敵對視)하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1600년 여름.
 천하를 판가름하는 전투를 눈 앞에 두고 타케요시의 몸은 장시간 잠들고 있었던 바다 무사의 피가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그의 계획은 무라카미 수군의 온 힘을 다해서 오오사카 만[大坂灣]으로 출동. 오오사카 만()에서 이세 만[伊勢灣]에 걸친 해역을 봉쇄해서 동군을 견제하고, 예전의 라이벌이었던 쿠키[九鬼] 수군[각주:3]과 협력하면서 서군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군의 총수(總帥) 모우리 테루모토는 그런 무라카미 수군에게 이요[伊予] 마사키 성[松前城] 공략을 명했다. 그 때문에 무라카미 수군 세력은 둘로 나뉘어 오오사카로의 출동은 빗츄우[備中] 카사오카[笠岡]의 무라카미 카게히로[[각주:4]]과 타케요시의 둘째 아들 카게치카[景親]가 담당하고, 타케요시 자신은 장남인 모토요시나 인노시마[因島] 무라카미 수군의 무라카미 요시타다[村上 吉忠] 등을 이끌고 이요[伊予] 미츠카하마[三津浜]로 출동한 것이다.


고난 속에서 죽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오오사카로 출동한 수군 부대는 거의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올렸지만, 이요[伊予]에 상륙한 무라카미 수군의 육전대(陸戰隊)는 부대장이며 타케요시의 장남 모토요시를 포함하여 후루미츠[古三津]에서 전멸 당하였다. 항복한다고 속임수를 쓴 적의 야습에 당한 것이었다.

우치노뉴우[內入] 겐세이 사[元正寺]에 있는 타케요시의 묘(墓).

 때문에 타케요시는 세키가하라[ヶ原]의 패배에 따라 영지(領地) 대부분을 잃은 모우리 씨를 따라, 스오우오오시마[周防大島]로 떠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주한 곳은 스오우오오시마 동부의 우치노뉴우[]였다. 한 때 일본 최강의 해상군단(海上軍團) 총수(總帥)로 천하인(天下人) 히데요시에게조차 공포심을 안겼던 바다의 효장()도 지금은 불과 120명의 부하를 거느린 늙은이에 지나지 않았다.

 패사(敗死)한 장남 모토요시의 뒤를 이은 것은 불과 7살의 손자 모토타케[元武], 둘째 아들 카게치카가 자신의 부하 300명을 이끌고 모토타케를 보좌했지만, 모우리 씨에게 하사받은 영지는 다 합쳐서 3000여 석에 지나지 않았기에, 농부가 되어 밭을 가는 것 말고는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에 절망한 부하들은 계속해서 새로 취직할 자리를 찾아 섬을 떠났다.


 이런 고난 속에서 타케요시가 노시마의 바다를 추억하며 죽은 것은 1604 8 22.

향년 72(79세라는 설도 있다)였다.

  1. 일반적인 해적질을 목적으로 하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바다의 용병집단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본문으로]
  2.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3. 과거 모우리 가문[毛利家]과 오다 가문[織田家]이 다툴 때, 오오사카의 혼간 사[石山本願寺]에 병량을 반입시키기 위해 싸운 키즈 강 입구 전투[木津川口の戦い]에서 싸웠던 사이이다. 여담으로 두 차례 수전이 일어났는데, 1차는 무라카미 수군의 승리. 2차는 철갑선을 앞세운 쿠키 수군의 승리. [본문으로]
  4. 타케요시의 사촌. [본문으로]

구키 요시타카(九鬼 嘉隆)

1600 10 12 자살 59

1542~1600.

토바[鳥羽]성주. 시마 수군[志摩水軍] 두령의 아들로 태어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나가시마 잇키[長島一揆][각주:1] 토벌,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공략,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조선(朝鮮) 출병 등에서 전공을 세우지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에서 서군(西軍) 측에 서 패배, 할복하였다.










쿠키 수군의 총수


 쿠키 요시타카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해적대장군(海賊大將軍)'이며 제독(提督)이다.

 기묘하게도 같은 해에 태어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천하를 쥐었을 때, 반대로 요시타카는 패배하여 자살함으로써 명암이 갈렸다.


 요시타카는 쿠마노 수군[熊野水軍]의 일파로 이세[伊勢] 코쿠시[国司] 키타바타케 가문[北畠家]에 굴복했던 시마 수군의 두령으로, 천하에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1578년에 오다 노부나가의 오오사카[大坂] 혼간사[本願寺] 공격에 참가하여 모우리 수군[毛利水軍]과의 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두면서였다.


 10 1일.

 철갑 전함 7척으로 구성된 '쿠키 함대'오오사카 만()의 키즈 강[木津川]의 입구로 출동시켜 혼간지에게 무기와 탄약을 지원하던 아키[安芸] 모우리 가문[毛利家] 휘하의 무라카미[村上], 코우노[河野]세토 내해[瀬戸内海] 수군 6백 수십 척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일본 해전사에서도 유명한 대해전에서 노부나가 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쿠키 함대 중 6척은 요시타카가 이세의 오오미나토[大溱]에서 건조한 것이고, 나머지 1척은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 一益]가 이세의 시로코[白子]에서 건조하였다. 최신예의 철갑선으로 사카이[堺]로 회항한 그 모습을 본 예수회 선교사 오르간티노는,

일본에서는 가장 크며 그리고 또한 화려하다. 우리 포르투갈 왕국의 배와 닮았다. 이걸로 오오사카[각주:2]는 멸망할 것이다. 배에는 대포가 3문 탑재되어 있다

 고 감탄하며 기록하고 있다.

 노부나가는 요시타카의 이런 전공에 큰 상을 내려 시마와 셋츠[摂津]의 후쿠시마[福島], 노다[野田] 등을 합하여 7천석을 더해 주었고, 나중에는 3 5천석을 영유하기에 이르렀다.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은 뒤로는 히데요시[秀吉] 섬기며 큐우슈우[九州], 오다와라[小田原] 정벌에서 활약. 임진왜란 때에는 토바에 토바 성[鳥羽城을 쌓고, 거대한 함선인 '니혼마루[日本丸]'를 건조하였다. 토바성은 정문을 바다 쪽으로 향하게 하고 당당한 석축[石垣]을 가진 '해적대장군의 본진'에 어울리는 성곽이었다. '니혼마루'는 전장 33.67미터, 11.77미터로 백 개의 노를 가지고 있었으며 1.9킬로그램의 탄환을 쓰는 대포 3문과 수부(水夫) 백 명을 태우는 일본 최초의 거대 전함이었다.


부자가 갈라선 세키가하라 합전


 1597. 56.

 조선에서 귀국하여 아들인 당시 24살의 모리타카[守隆]에게 가독과 토바성을 물려주고 이세 지방에 은거료[각주:3] 5천석을 받았다.


 3년 후인 1600년.

 천하의 향방을 결정하는 세키가하라에서 모리타카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会津征伐]에 출진하였고 요시타카는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지만,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이세, 이가[伊賀], 키이[紀伊]를 주겠다'는 제안을 하자 서군에 참가한다.

 센고쿠[戦国] 무사의 피가 요동을 친 것일수도 있고, 시나노[信濃]의 사나다 가문[真田家]처럼 가문을 지키기 위한 '부자 분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의 전쟁터에는 출진하지는 않았고, 대신 옆 지방의 이나바 쿠란도[稲場 蔵人]가 지키는 이와데 성[岩出城]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요시타카가 이와데 성을 공격하던 중 세키가하라에서는 서군이 패했고, 9 11 미츠나리가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든 것을 단념했다.[각주:4]


 '니혼마루'에 타고서 시마의 나기리[波切] 항구를 출항하여 선조의 연이 닿아 있는 시마의 섬들을 한바퀴 돌고선, 토바의 앞바다에 있는 토우시지마[答志島] 섬에 상륙했다. 쵸우온 사[潮音寺]에 머물며, 잠시 푸른 바다와 녹색으로 가득 찬 섬들을 지켜본 후 10 12 토우센[洞仙] 암자로 들어가 할복 자살하였다.

 "나의 목을 이에야스님께 보인 후에는 이 섬 어딘가에 토바성이 보이는 곳에 묻어 다오. 쿠키의 가문을.. 모리타카를 부탁한다"

 라는 말을 남기고, 비젠[備前]의 명도(名刀) '신코쿠[信国]'를 왼쪽 배에 찔러 오른쪽으로 그은 후, 다시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근습(近習)인 아오야마 부젠[靑山 豊前]이 카이샤쿠[介錯][각주:5]하였다. 향년 59.

 '해적대장군'에 어울리는 당당한 최후였다. 목 무덤과 몸통 무덤이 지금도 토우시지마에 있다.


모리타카의 오열

 

 그러나 요시타카가 배를 가를 즈음, 아들 모리타카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전공을 바꿔서라도' 부친을 살려달라고 탄원.

 이에야스도 '쿠키님은 세키가하라의 본 전장에는 나오지 않으셨지'라며 허락하여 사면 소식을 전하는 배가 섬에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부친의 죽음을 안 모리타카는 오열했다.

 아오야마 등 근습들을 '아버지께 죽음을 서두르게 한 불충한 놈들'이라 화를 내며 톱 베기[각주:6], 참수[각주:7]에 처했다.

요시타카는 모리타카를 각별히 사랑했으며 모리타카도 부친을 경애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에야스는 이를 불쌍하게 여겨 모리타카에게 2만석을 가증해 주어, 토바성 5만석의 성주로 임명했다.


 그러나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는 쿠키 가문탄바[丹波], 셋츠[摂津]로 영지를 옮겼으며 더구나 산으로 둘러쌓인 지역 등으로 영지를 바꾸었다. 해적대장군의 영광을 두려워한 정략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쿠키 가은 지금의 쿄우토[京都] 아야베 시[綾部市]와 효우고[兵庫] 미타 시[三田市]에 '산 속의 수군 도시'를 만들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 번영시켰다.

  1. 나가시마 주변의 종교반란군. [본문으로]
  2. 혼간 사[本願寺]를 지칭. [본문으로]
  3. 가독을 물려 준 전 당주에서 주는 땅. [본문으로]
  4. 여담으로 이와데 성을 지키던 이나바 쿠란도 미치토오[稲葉 蔵人 道通]는 이때 쿠키를 저지한 공적으로 2만석을 가증 총 4만5300석이 되어 이세[伊勢] 타마루[田丸]로 이봉(移封)되었다. [본문으로]
  5. 할복할 때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목을 쳐주는 것. 이 행위를 하는 것은 신뢰의 상징이었기에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다. [본문으로]
  6. 죄인을 머리만 남기고 땅 속에 파 묻은 다음, 죄상을 적은 팻말과 함께 톱을 놔두어 지나가던 행인이 죄가 있다고 생각하면 목을 톱으로 베게 하는 형벌 [본문으로]
  7. 당시 무사는 할복을 무사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했지만, 할복을 못하게 하고 목이 베이는 것을 평민의 형벌이라 생각하여 불명예스럽게 생각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