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

1642 11 25일 병사(病死) 76.

 

1569 ~ 1642.

오오토모 씨[大友氏]의 중신 타카하시 죠우운[高橋 紹運]의 아들. 타치바타 도우세츠[立花 道雪]의 양자가 되었고,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야나가와[柳川] 13만석을 하사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했기 때문에 카이에키[改易][각주:1] 당했지만 후에 옛 영지(領地)를 회복. 이후는 막부(幕府)에 충성을 다했다.

 

 

 





야나가와-시마바라[島原]의 난

 

 1620 8 7일.

 치쿠고[筑後]의 영주 타나카 타다마사[田中 忠政][각주:2]가 에도()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36세. 세자가 없었고, 형인 야스마사[康正][각주:3]오우미[近江]로 이동, 배치되었기 때문에[각주:4], 치쿠고[筑後] 야나가와가 주인 없는 빈 땅이 되었고, 8 20일에는 나이토우 마사나가[ 政長] 등의 막부(幕府)의 사자(使者)들이 야나가와 성[柳川]을 접수하러 왔었다.

 그 후 후임 다이묘우[大名]가 임명되기까지 치쿠고[筑後]의 행정은  미노[美濃] 부교우[奉行][각주:5] 오카다 젠도우[岡田 善同] 붕고[豊後] 후나이[府内]의 영주인 타케나카 시게요시[竹中 重義]히젠[肥前]시마바라[島原]의 영주인 마츠쿠라 시게마사[松倉 重政]가 위임 받았다.

 

 6개월간의 대관(代官)[각주:6] 지배 시기인 1620년 가을에 연공() 징수가 있었다.

 1655년에 쓰여진 시모츠마 군[下妻郡] 나카지마 촌[中島村]의 쇼우야[庄屋][각주:7] 이치로우베에[兵衛]의 기록에 의하면, 

붕고[豊後]마츠쿠라 붕고노카미 시게마사[松倉 豊後守 重政]은 자신이 담당한 곳 백성들이 (세금 내기가) 힘들다고 하여도, 집에 강제로 들어가서는 가마니에 담긴 것은 뭐든 싹 쓸어갔으며,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노오도리[蓑踊り] – (미노[蓑]란 비를 피하기 위한 짚 같은 것으로 엮은 도롱이이다. '미노오도리'란 사람에게 그 도롱이를 입히고 풀지 못하도록 줄로 묶은 상태에서 불을 붙여 고통으로 날뛰는 것을 춤이라 표현한 것으로 고문의 일종이다. – 역자 주)를 하게 만들었다. 우네메[采女]- 타케나카 우메노카미 시게요시[竹中 采女正 重義] 과 쇼우겐[監]- 오카다 쇼우겐 젠도우[岡田 監 善同]의 담당지역은 별로 심하지 않았고 느슨한 편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히젠[肥前] 시마바라 성주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지배하고 있던 대관 지역의 연공 징수는 가혹했으며, 미납한 백성에게는 도롱이를 씌우고 거기에 불을 붙여 '미노오도리'를 시켰다고 한다


 시마바라 성주는 1616년부터 1630년까지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재임. 그 후 1638 4 12일까지 아들인 시게츠구[重次]가 이었다.

 그 사이 1637년 가을부터 1638 2 28일까지 아마쿠사-시마바라의 난[天草島原の乱]의 난이 일어났다.

 발발 원인 중 하나로 번주(藩主)가 기독교 농민에게 '미노오도리' '모쿠바세메[木馬責め][각주:8]', '꼬챙이 꿰기[さし][각주:9]', '지옥맛보기[地獄責め][각주:10]' 등의 고문이 행해지는 식의 학정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난이 발생되기 16년 전에 이미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미노오도리'라는 잔인한 방식으로 가혹한 연공 징수를 거두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미노오도리'는 기독교도를 박해하기 위한 행위로 여겨졌지만, 원래는 연공 미납 농민에 대한 처벌 행위였다. 위정자()를 선택할 수 없는 농민들의 슬픔이 있었던 것이다.

 마츠쿠라 시게마사, 시게츠구 부자(父子)에 의한 대관 지배가 길어졌다면, 한 때 기독교 농민이 많았던 야나가와 영내(領內)에서 '야나가와-시마바라의 난'이 있어났을 지도 모른다.

 

야나가와 재 부임과 시마바라 출진(出陣)

 

 1620 11 27.

 쇼우군[軍] 히데타다[秀忠]는 타치바나 무네시게에게 예전에 그의 영지(領地)였던 야나가와의 영주가 될 것을 명했다.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서군에 섰기 때문에 영지를 몰수당했던 무네시게는 여러 지역을 방랑한 끝에 이에야스[家康]를 섬기었고 그 후 무츠[奥] 타나쿠라[棚倉] 3만석을 하사받았다. 야나가와에는 20년 만에 가보는 것이었다. 나이는 이제 54세가 되어 있었다.

 

 부인이나 가신 106명을 이끌고 타나쿠라를 출발. 에도에 들린 후, 쿄우토[京都]를 거쳐 오오사카에서 배로 세토 내해[瀬戸 内海]를 배로 타고 서행(西行). 코쿠라[小倉]에서 오래만에 치쿠고 로[筑後路]를 남하. 1621 2 28일에 야나가와 성[梁川城]에 입성하였다. 과거 야나가와 성에서 물러날 때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렸던 영민(領民), 마츠쿠라 시게마사의 대관 지배에 고통을 받았던 농민들은 무네시게의 야나가와 부임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번의 재정은 시작부터 적자였고, 1636년 시점에서 번의 채무금은 5100 칸메(貫目)에 달하였기에, 같은 해 막부에게 5만 냥(3150 칸메)을 빌렸다. 거기에 다음 해인 1637년에는 시마바라로 출진해야 함에 따라 500 칸메가 더 들었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영민에게 '미노오도리'를 시키는 일 없이, 번사(藩士)[각주:11]의 땅을 거두어 들이고 봉급으로 대신하거나, 아리아케[有明] 해안의 간척을 추진하여 재원의 증가를 꾀했다.

 

 같은 해인 1637년 가을.

 아마쿠사, 시마바라에서 대규모 기독교-농민 반란이 발생했다.

 막부에게 출진을 명령받은 아들 타다시게[忠茂][각주:12] 11 16일에 에도를 출발. 12 6일에 야나가와에 도착.

 다음 7일에는 5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배로 시마바라로 출진했다.

 다음 해인 1638 1 1일에 3회째의 하라 성[城] 총공격에서 막부 군()의 총 사령관인 이타쿠라 시게마사[板倉 重昌]가 전사. 막부는 총 사령관으로 노중(老中)[각주:13] 마츠다이라 노부츠나[松平 信綱]를 파견. 무네시게도 1 13일에 에도를 출발, 2 7일에 시마바라에 도착하였다. 72살이라는 늙은 나이에 참전이었다.

 

 2 28.

 바쿠후 군의 총공격으로 하라 성은 낙성.

 무네시게는 일단 야나가와로 돌아온 뒤 다시 에도로 가서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에게 보고하였다.

 

 다음 해인 1639 4 3.

 가독(家督)을 적자(嫡子)에게 타다시게에게 물려주고, 은거하여 '류우사이[斎]'라는 호를 칭했다. ()를 좋아하여, 다인(茶人)들과의 교류를 즐겼다.

 '류우사이 공의 말씀 기록[公御咄之]'이라는 29개조의 유훈을 남기고, 1642 11 25일. 시모가야[下谷]의 야나가와 번 저택에서 생애의 막을 내렸다. 76세였다.

  1.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삭감. [본문으로]
  2.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후 숨어있던 서군의 주모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잡은 타나카 요시마사[田中 吉政]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
  3. 요시마사의 둘째 아들. 야나가와 번[柳川藩藩)의 지번(支藩) 후쿠시마(福島) 3만석의 번주(藩主). [본문으로]
  4. 이곳 저곳 분산된 곳을 합쳐 2만석. [본문으로]
  5. http://valhae.tistory.com/script/powerEditor/pages/%EC%97%90%EB%8F%84%20%EC%8B%9C%EB%8C%80%EC%97%90%20%EB%AF%B8%EB%85%B8[%E7%BE%8E%E6%BF%83]%EB%8A%94%20%EC%A0%84%EB%9E%B5%EC%A0%81%20%EC%9A%94%EC%B6%A9%EC%A7%80%EB%A1%9C%20%EC%9D%B8%EC%8B%9D%EB%90%98%EC%96%B4%20%EB%A7%89%EB%B6%80%EC%9D%98%20%EC%A7%81%ED%95%A0%EC%A7%80%EC%9D%B8%20%EC%B2%9C%EB%A0%B9(%E5%A4%A9%E9%A0%98)%EC%9D%B4%20%EB%A7%8E%EC%95%98%EA%B3%A0,%20%EA%B7%B8%EB%9F%B0%20%EC%A7%80%EC%97%AD%EC%9D%98%20%ED%96%89%EC%A0%95%EC%9D%84%20%EB%A7%A1%EC%95%98%EB%8B%A4. [본문으로]
  6. 영주를 대신하여 그 지역의 행정을 맡아 봄. [본문으로]
  7. 마을의 대표자 겸 세금 징수나 행정을 맡는 한편 마을 주민의 요청을 대변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8. 몸통이 삼각형으로 된 다리를 붙인 말 형태의 고문틀에, 양 다리에 돌을 매단 사람을 앉혀서 그 무게가 가랑이 사이에 집중되게 하여 고통을 주는 고문법, 현재는 SM플레이 등에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왈라키아 공(公) 블라드 체페슈가 오스만투르크의 전쟁 포로들에게 행했다고 하는 그 고문. [본문으로]
  10. 유황이 들어간 뜨거운 물을 몸에 뿌리는 고문. [본문으로]
  11. 번에 소속된 무사.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 공무원. [본문으로]
  12. 무네시게의 동생 타치바나 나오츠구[立花直次]의 넷째아들. 즉 양자. [본문으로]
  13. '로우쥬우'라고 읽는다. 에도 막부의 수상 격으로 4~5명이 1개월 당 한 명씩 돌아가면서 정무를 맡았으며, 중요한 일은 전원의 합의에 따라 결과를 도출했다. [본문으로]
마쓰라 시게노부[松浦 信]

1614 5 26일 병사(病死) 66

 

1549 ~ 1614.

부친 타카노부[隆信]와 함께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큐우슈우[九州] 정벌군을 따랐으며, 조선의 역[朝鮮役][각주:1]에서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수군 부대로 출진.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영지(領地)히라도[戸]이키[岐] 등도 영유(領有)하며 초대 히라도[平戸藩] 번주(藩主)가 되었다.





 

 

 

적남(嫡男)의 갑작스런 죽음

 

 히젠[肥前] 히라도 번주 마츠라 시게노부는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의 다음 해인 1601년에 53세에 은거하여, 적남(嫡男) 히사노부[久信]에게 히라도 번()을 잇게 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쟁때 시게노부는 아들 히사노부를 쿄우토[京都] 후시미 성[伏見城]을 수비하도록 출진시켰지만, 정작 자신은 현해탄에 배를 띄어놓고서는 거의 마지막까지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각주:2], 전쟁이 끝난 뒤 토쿠가와 가문[家]에게서 어떠한 처벌을 받을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각주:3]

 

 그러나, 사태는 급변하여 1602년 가을 갑자기 후시미[伏見]의 마츠라 저택에서 번주 히사노부가 급사(急死) 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시게노부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이 히사노부의 급사에 관하여 번의 기록인 『가세전(家世伝)』에는, '후시미(伏見)에서 치질에 걸려 8 29일 죽다. 향년 32'라고 쓰여져 있으며 또한 다른 가보(家譜)에는 '할복'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주저하면서 어느 쪽에 붙을지 망설이던 부친 시게노부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토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심을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또는 며느리이며 히사노부의 부인 쇼우토우인[松東院]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인은 마츠라 씨[松浦氏]와 오오무라 씨[大村氏]가 서로 다투었던 시기에 양 가문의 화해를 하기 위해서 마츠라 가에 시집 온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의 딸로 이름은 소노였다.

 소노는 이미 세례를 받았으며(세례명: 도나 메시아), 시집올 때 배교(背敎)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었다.

 부인이 된 쇼우토우인은 첫째 아들을 비밀리에 세례 받게 하였고, 히사노부의 세례마저 준비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렇게 열심인 모습은 곧바로 선교사들간에 널리 알려져,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의 부인 가라샤 타마코[ガラシャ 玉子][각주:4]와 함께 칭송받았다. 또한 시아버지인 시게노부의 계속된 개종 요구에도 신을 버리는 것 보다 천 번의 죽음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저항하며 신앙을 지켰다고 한다.『프로이스의 일본사[フロイスの日本史]』

 

 이러한 사정이 번주 히사노부의 할복에 영향을 끼친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히사노부가 죽은 다음 해인 1603년 손자인 타카노부[隆信]를 데리고 순푸[駿府]로 가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알현하고나서야 3대 번주로 인정을 받아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거성[居城] 카메오카 성[城] 불타오르다.

 

 3대 번주 타카노부의 뒤를 봐주면서 주로 남만무역(南蠻貿易)[각주:5]에 전념했다.

 이미 부친 타카노부[隆信][각주:6] 때부터 '하비에르'나 '루이스 프로이스'를 히라도에 초대하는 등 무역 기반을 닦아 놓고 있었다.

 

 그런 노력 덕분에 1609년에 네덜란드의 배가 처음으로 히라도에 입항.

 1613년에는 영국 배도 입항하여 성 밑 마을[城下町]상관(商館)을 설치하였다.

 특히 네덜란드는 일본 무역의 거점이 1641년에 나가사키[長崎][각주:7]로 이전되기 전까지 30여 년간 히라도에서 사키카타 쵸우[崎方町]부두(埠頭)를 만들고 상관이나 주택을 계속 세워가며 동양 무역의 일대 거점으로 삼았다.

 이 즈음 히라도에는 남만인(南蠻人)[각주:8]들에 더해 수 많은 상인들이 모였기에 서국(西国)[각주:9] 제일의 상업 도시가 되어 번영의 극을 달했다.

 

 그러나 1613 10 3일 밤.

 시게노부는 갑자기 자기 손으로 1599년에 새로 축성한 거성 카메오카 성[亀岡城][각주:10]에 불을 질러 무너뜨렸고, 다음 해인 5 26일에 의사 타케노 소우후우[武野 宗楓]의 간병을 받는 중 66세의 생애의 막을 내렸다고 한다.『가세전[家世伝]』

 

 이 사건은 자살한 아들 히사노부의 망령에 괴로워하다 미쳤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사건의 진상(眞相)은 무역 이익을 독점하던 것과 나아지지 않고 있던 기독교 금지령에 있지 않았을까?

 혹독한 기독교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히라도 번[平戸藩]에는 이키츠키[生月] 등 영내(領內)의 섬들에 많은 신도들이 숨어있었고, 쇼우토우인과 그 주변 인물들은 여전히 신앙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이에야스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어 히라도 번 계속해서 압력을 받았을 것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남만무역의 유지와 기독교 개종의 유예(猶豫)를 조건으로 거성을 불에 태워 없애고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것이다.

 

 하극상의 센고쿠 시대부터 근세 초기의 혼란기까지 살아 남은 마츠라 시게노부.

 기독교 덕분에 철포(), 오오츠츠[大筒][각주:11]나 막대한 무역 이익을 손에 넣어 히젠[肥前] 서부(西部)의 패권을 쥘 수 있었지만, 그 기독교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나 가신, 히라도의 상징이었던 카메오카 성[亀岡城]까지 잃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이쿄우 사[最教寺]에 있는 시게노부의 묘 - 히라도 시[平戸市]


  1. 임진, 정유의 난을 말함. [본문으로]
  2. 마지막에 동군에 서게 됨. [본문으로]
  3. 가독 상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우선 용서를 받았다고 볼 수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4. 가라샤는 세례명, 타마코는 이름. [본문으로]
  5.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을 말함. [본문으로]
  6. 시게노부의 손자와 부친의 이름이 똑같이 타카노부(隆信)이다. [본문으로]
  7. 에도 시대에는 네덜란드만이 나가사키에서 일본과 무역을 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8. 유럽인들을 말함. [본문으로]
  9. 쿄우토[京都]를 기준으로 서쪽 지역을 지칭. [본문으로]
  10. 보통 히라도 성[平戸城]으로 불린다. [본문으로]
  11. 대포를 말한다고 하지만, 구경이 큰 철포를 지칭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오토모 소린[大友 宗麟]

1587 5 23일 병사(病死) 58.

1530 ~ 1587.

이름은 요시시게[義鎮]. 붕고[豊後] 우스키[臼杵] 성주(城主). 선교사 하비에르를 후나이[府内]로 초대하였고 후에 세례를 받아 이토우 만쇼[伊藤 マンショ] 등 텐쇼우 견구소년사절(天正遣少年使節[각주:1])을 로마로 파견했다. 큐우슈우[九州] 6개국을 지배했지만, 미미가와 강의 전투[耳川い]에서 시마즈 씨[島津氏]에게 패하여 쇠퇴(衰退)하였다.








신앙으로 인한 부부싸움.


 센고쿠[戦国]의 시대.
 오오토모 소우린의 전성기 때에는 붕고[豊後]를 중심으로 큐우슈우[九州]의 붕고, 부젠[豊前], 히젠[肥前], 히고[肥後],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의 슈고[守護][각주:2]에 임명 받았고 큐우슈우 탄다이[九州探題][각주:3]도 병행해서 수행했다. 그러나 말년은 시마즈 씨()의 위협, 부인과의 싸움 건강 악화라는 고난으로 가득 찬 나날들이었다.


 소우린이란 이름은 불교인 선종()에 들어갔을 때 얻은 호() 원래는 요시시게라고 하였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으며 적자(嫡子)인 요시무네[義統[를 낳은 부인은 쿠니사키[東] 반도에 있는 나타 하치만 궁[奈多 八幡宮]의 대궁사(大宮司) 나타 아키모토[奈多 鑑基]의 딸이었다. 이 부인과 소우린은 자주 부부싸움을 하였다.


 젊었을 때의 소우린은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남편을 죽이면서까지 남의 부인을 빼앗는 등 악행을 일삼았다. 그러나 나타 씨[奈多氏]라고 불린 부인과의 부부싸움 원인은 여성 문제가 아니었다. 부인은 해가 갈수록 소우린이 기독교에 빠져가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소우린은 해외무역의 막대한 이익에 주목, 무역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권한을 가진 선교사와의 우호를 위해서 가신들 뿐만 아니라 혈연들에게까지 입교를 권했다.


 나타 씨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친정은 대궁사(大宮司)를 하고 있으며 신도(神道)를 깊이 믿고 있던 나타 씨에게 있어 기독교는 사교(邪敎)였다.

 남편이 둘째 아들 치카이에[親家]에게 세례받도록 권한 것을 따졌으며, 또한 그녀는 자신의 친오빠 치카카타[親賢]와 함께 교회를 파괴하거나 선교사를 죽이려고 병사를 보내 크리스천 무사들과 충돌하는 일도 있었기에 부부 사이는 더 멀어졌다.


 선교사들은 이런 나타씨에게 이세벨이란 별명을 붙였다.

 이세벨이란 이스라엘 왕 아합의 부인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예언자를 추방한 여자였다. 프로이스의 [日本史] - 나타 씨는 행실이 좋지 못하였고 성격차이가 심했기에 소우린은 그녀를 혐오하였고 너무 고민한 나머지 병에 걸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당시 나타 씨의 시녀장(侍女長)은 병상에 있던 소우린을 정성껏 간호하였는데, 이 여성은 집안일을 다스리는데 뛰어났다. 소우린은 이 여자를 나타 씨의 저택에서 데리고 나와 세례를 받게 하여 '쥬리아'라는 세례명을 가지게 하였고 나타 씨와 이혼한 후 그녀와 결혼하였다. 1678년의 일로 소우린 49, 쥬리아 40세였다. 또한 소우린은 기독교라는 신앙을 순수하게 믿게 되어 결국 자신도 세례를 받고 [동 프란시스코]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몰락의 시작


 이 즈음인 휴우가[日向]의 영유하고 있던 이토우 요시스케[伊東 義祐]가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에게 패해 도망쳐 와서는 소우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소우린은 침략자 시마즈를 쫓아내고 휴우가[日向]에 기독교 왕국을 세우고자 했다.


 처음에 해로를 택한 소우린은 배에 인도의 부왕(副王)에게 선물받은 붉은 십자가의 깃발을 앞세웠으며, 거기에 새로운 부인인 쥬리아 그리고 선교사들과 함께 휴우가[日向]로 향했다. 도중에 육로(陸路)를 택한 소우린은 가는 곳 마다 신사(神社) 절을 파괴하였으며 길이 험한 곳은 불상으로 메우면서 진격했다.

 오오토모 5만의 병사들 대부분은 기독교도가 아닌 신불을 믿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신불을 무시하는 소우린을 불신하여 사기는 낮아만 갈 뿐이었다. 또한 소우린은 시마즈를 경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너무도 커서 11월.

 7(里)[각주:4]의 산과 들에 2만이 넘는 시체가 널릴 정도로 미미가와 강의 전투에서 대패했다. 가신들은 신불이 내린 벌이라며 소우린을 비난하였고 이는 오오토모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기도로 보낸 은거생활


 가독(家督)을 물려주었던 적자 요시무네도 변변치 못하여 지역 호족들의 모반이 이어졌다.

 1586. 57세의 소우린은 오오사카[大坂]로 가서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히데요시는 이에 응하여 큐우슈우[九州]로 군사들을 보낼 준비를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마즈 씨의 압박은 계속 되어 우스키 성[臼杵城]이 포위당했다. 2문의 대포 '쿠니쿠즈시[国崩]'가 성 방어에 크게 활약했지만 성 밑 마을은 재로 변하였고 후나이[府内]도 불에 타고 파괴당했다. 이때 소우린은 전투 지휘는 물론 쥬리아 부인과 함께 영민(領民)들을 도우고자 옷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농성에 의한 피곤으로 인하여 눈에 띌 정도로 쇠약해져 갔다.


 히데요시가 큐우슈우[九州]에 와서 시마즈 씨를 쫓아 버렸다.

 그런 와중에 소우린은 자신의 남은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깨닫고 츠쿠미[津久見]에 은거하며 쥬리아 부인과 함께 기도로 가득 찬 날들을 보낸다. 히데요시는 큐우슈우를 제압해 가는 도중에 소우린의 아들 요시무네에게 붕고[豊後]의 영지(領地)를 안도(安堵)해 주었다. 소우린은 안심했다. 또한 히데요시는 소우린에게 휴우가[日向]의 일부를 은거료(隱居料[각주:5])로 하사하려 했지만 사양하고 받질 않았다.


 그리고 시마즈 요시히사가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15일 후인 1587 5 23일.

 츠쿠미에서 쥬리아의 병간호를 받는 도중 58세의 나이로 생애의 막을 내렸다.

  1. 텐쇼우[天正]는 당시의 일본 연호. 이토우 만쇼, 치지와 미겔[千々石 ミゲル]의 정사(正使)와, 나카우라 쥬리안[中浦 ジュリアン], 하라 마르티노[原 マルティノ]의 부사로 구성된 사절단으로 유럽 각국을 순방하고 왔다. [본문으로]
  2.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군사와 행정을 책임지던 지방관.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바쿠후가 큐우슈우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의 장관. [본문으로]
  4. 리(里)는 길이의 단위, 약 4Km. 7리는 약 28Km. [본문으로]
  5. 은거한 사람에게 주는 쌀 또는 그 만큼의 이익이 나는 영지. [본문으로]

구로다 나가마사[田 長政]

1623년 윤8 4일 병사(病死) 55.

1568 ~ 1623.

쿠로다 요시타카[田 孝高]의 장남. 부친과 함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섬기며,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 공략 때 데뷔전[初陣].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성주(城主)가 되어 조선 침공[朝鮮役][각주:1]에 종군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공을 세워 치쿠젠[筑前] 52만석을 하사 받아, 후쿠오카 번[福岡藩]번조(藩祖)가 되었다.








모친과 처를 탈출시켜 준 것에 대한 은상(恩賞)


 1600 12 11일.
 쿠로다 나가마사는 부젠[豊前] 나카츠 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이 성은 너무 좁았기 때문에 다음 해인 1601년에는 후쿠오카 성[福岡城] 축성에 착수함과 동시에 영내(領內) 6개의 지성(支城)을 쌓아, 세키가하라[
ヶ原] 때 전공이 있던 중신들을 죠우다이[城代][각주:2]로 임명, 배치하였다.

 쿠라테 군[鞍手郡]의 타카토리 성[鷹取城]의 죠우다이에는 모리 타헤이[母里 太兵衛]가 임명되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서 명창(名槍) '니혼고우[日本号]'를 술내기로 따낸 일화로 유명한 타헤이는 세키가하라 때도 활약하였다.


 나가마사가 이에야스[家康]의 우에스기 토벌[会津征伐][각주:3]에 출진하자, 나가마사의 예언대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세력은 오오사카[大坂] 텐마[
満]의 쿠로다 저택을 포위했다. 타헤에는 밤을 기다려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 부인 코우엔[幸圓]과 나가마사의 부인인 네네[]를 가마니 안에 넣고, 두 개의 가마니를 바구니에 담아 긴 막대 끝에 걸쳤다. 그리고 상인으로 변장하여 그 막대를 어깨에 메고 뒷문 쪽에 있는 목욕탕의 벽을 뚫고 탈출, 쿠로다 가[黒田家]에 출입하는 상인 나야 쇼우자에몬[納屋 小左衛門]의 집으로 옮겨 숨겼다.


 부친 죠스이가 나카츠[中津]에서 파견한 배가 오오사카[大坂] 포구에 도착했지만, 이시다 측의 군선이나 작은 배들, 병사들의 경비가 심해서 타헤이, 쿠리야마 토시야스[栗山 利安], 미야자키 스케다유우[宮崎 助太夫]의 세 가노(家老)들은 당혹하였다.


 7 17일 밤.
 타마츠쿠리[玉造]의 하늘이 갑자기 붉게 물들었다. 이시다 쪽의 인질요청을 거부하고 자살한 호소카와 가라샤[細川
ガラシャ][각주:4]와 호소카와 저택이 불타오른 것이었다. 경비하던 병사들이 타마츠쿠리로 향한 틈을 타서 코우엔과 네네는 729일 본국인 나카츠에 무사히 도착했다.


 모친과 부인을 탈출시킨 그들의 공적을 마음 속 깊이 감사하고 있던 나가마사는 새로운 영지(領地) 후쿠오카 번()을 지배함에 있어서 지성 주둔 제도를 택하여 타헤이를 타카토리 성(), 쿠리야마 토시야스를 아사쿠라 군[朝倉郡] 마테라 성[左右良城]에 죠우다이로 각각 임명했다. 또한 가중 통제의 일환으로 '화내지 않는 모임[腹立てずの会]'이라는 것을 만들어, 중신부터 하급 무사에 이르기까지 자유로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토론회를 열어 그들의 의견을 나가마사에게 전할 수 있게 하였다.


()의 미래를 생각하며……


 1623.
 55
세가 된 나가마사는 에도[
戸]에서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약을 복용했지만, 열격(噎膈)이 같이 생겼다. 쿄우토[京都]에 들리지 않고 후시미[伏見]에서 오오사카[大坂]로 이동. 치쿠젠에 귀국해서 몸을 돌보려 했지만, 이에미츠[家光] 3대 쇼우군[軍] 취임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 결국 오오사카에서 2~3일 정도 머문 후 상경하여 호우온 사[報恩寺]를 숙소로 정했다. 상경한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도 나가마사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병문안 하였다.


 나가마사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온 것을 깨달았을 때, 부하에게,

 지금 죽을 때가 되니 안타까운 것이 세 가지 있다
 고 말했다고 한다(쿠로다 가문 족보[黑田家譜]).


 [첫째는 어머니 코우엔보다 먼저 죽는 불효를 저지른 것이며,
 
둘째는 적자(嫡子) 타다유키[忠之]가 아직 약관(21)임에도 뒤를 돌보아 주지 못하고 죽는 것.
  셋째는 휘하의 장졸들을 데리고 평소 훈련시키며, 전투에 임해서는 엄숙과 절제를 지키고, 내 수족과 같이 움직이고 싶었다. 이것을 정말 해보고 싶었다. 이 이외에 미련은 없다.]


 윤 8 4일.

 나가마사는 일어나 앉아서 타다유키에게,

 “위를 공경하고 아래를 자비롭게 대하거라. 절대 게으름 부리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

 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사세구는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속세를 떠돌아다녔지만 이제는 돌아간다 극락정토의 하늘로

 此のほどはうき世の旅にまよひきて今こそかへれあんらくの空

  1.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2. 성주를 대신해서 성과 그 주변을 행정, 관리, 방어하는 직책. [본문으로]
  3.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하자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 사건. [본문으로]
  4.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의 부인. 이 글에선 자살했다고 하지만 그녀는 크리스천이었기에 가신에게 자신을 창으로 찌르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구로다 요시타카[ 孝高]

1604 3 20일 병사(病死) 59.

1546 ~ 1604.

()인 죠수이[如水]가 더 알려져 있다. 통칭 칸베에[官兵衛].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섬기며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와 더불어, [하시바의 두 명의 베에(羽柴兵衛)]라 일컬어 졌다. 히데요시의 큐우슈우[九州] 제압 후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성주(城主)가 되었고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큐우슈우[九州]의 서군과 싸웠다.








천하인(天下人)에의 야망과 좌절


 1604 3 20일.

 야마시로[山城] 후시미[伏見]의 저택에서 쿠로다 요시타카는 59세의 생애를 마쳤다.

 세키가하라[ヶ原]로부터 4 늦은 봄의 이별이었다.


 요시타카가 세상을 떠날 때, 아들인 나가마사[長政]에게 유언으로 남긴 내용이 [무공담 모음집(咄聞書)]에 전해지고 있다.

 “나는 도박을 잘하지만 너는 못한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세키가하라[ヶ原] 이에야스 공[家康公]과 지부[冶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100일 정도 서로 싸우게 냅두면, 그 동안 난 츠쿠시[筑紫[각주:1]]를 제압한 후 쿄우토[京都]로 올라가 천하를 잡을 수 있었을 터였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가 하루 만에 끝나질 않고 이에야스와 미츠나리가 100일 간 싸웠다면 자신은 얼른 큐우슈우[九州]를 평정하여 승기(乘機)를 타 츄우고쿠[国]의 모우리[毛利], 우키타[宇喜田]의 서군 세력을 물리치고 쿄우[京]에 올라가 어느 쪽이건 승자와 대결하여 천하를 잡을 수 있었다고 - 죽기 직전에 나가마사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10월 15일.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천하를 손에 넣은 이에야스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논공행상을 행하며 공이 있는 다이묘우[大名]들에게 영지(領地)를 배분했다.

 카토우 기요마사[加藤 正]에게는 히고[肥後] 54만석, 나가마사에게는 치쿠젠[筑前] 50 2416석이라는 큰 영토가 주어졌지만 요시타카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었다. 이에야스는 요시타카의가 천하를 손에 넣으려 했던 숨겨진 야망을 꿰뚫어 보았던 것은 아닐까?

 치쿠젠[筑前]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가 된 나가마사는 부젠[豊前] 나카츠 -그때까지의 영지 18 2천석 - 에서 치쿠젠[筑前] 나지마[名島] 입성하였다.


 나지마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인 요해(要害)였지만 원래는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의 영지에 있던 조그만 요새에 불과하였고 더구나 마을을 만들 땅이 좁아 성 밑 마을(城下町)을 발달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 해에는 나카 군[那珂郡] 후쿠사키[福崎]에 새로이 성을 만들어 쿠로다 씨[黒田氏] 발상(發祥)의 땅인 비젠[備前] 오쿠 군[邑久郡] 후쿠오카[福岡]의 이름을 따와, [후쿠오카]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지마 성[名島城]을 없애고 후쿠오카에 새로 성을 축성하기로 결정이 나자 요시타카는 은거하여 모든 것은 나가마사에게 맡기고, 나지마 성에서 나와 다자이후[太宰府[각주:2]]에 임시 거처를 만들어 거기로 옮겨 살았다.

 다자이후 텐마 궁[宮] 경내(境內)에 세워진 초가집에서 매일매일 풍류를 즐기며, 다도(茶道)와카[和歌], 렌가[連歌] 등의 소양을 쌓았다.


문인으로써의 풍류의 나날


 예전에 멀리 떨어진 조정[遠の朝廷=발음은 とおのみかど’]”라고 불렸던 다자이후.

 그곳의 초가집에서 풍류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요시타카는 렌가 사[連歌師]인 키야마 죠우인[木山 紹印]에게 땅을 하사하여 살게 해서는 예전에 융성했던 다자이후 렌가의 부흥을 꾀했다.

 또한 다자이후 덴마궁()2천석을 기부하여 아치형 다리(太鼓橋), 석등(石燈)을 만들어 받치고, 큰 칼[太刀] 외에 [텐진엔기 에마키[天神絵巻[각주:3]]] 세 권과 렌가를 봉납함과 동시에 궁 사무 책임자인(宮司務別) 오오토리이 신간[大鳥居 信岩]과 친교를 맺었다.


 1601 1 17일.

 오오사카[大坂] 텐마 궁[宮]에서 개최된 렌가회()에 오오토리이 신간과 함께 참여했다.

 이 모임에서는 중앙 렌가계()의 중심적 존재인 사토무라[里村] 일문(一門)의 총사() 쇼우하[紹巴[각주:4]]나 쇼우시츠[昌叱[각주:5]],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다음 해인 1602 1 16.

 다자이후 덴마궁()에서 아들 나가마사, 신간[信岩], 렌가 사[連歌師]인 키야마 죠우인[木山 紹印] 등과 렌가회()를 열어, 예부터 큐우슈우[九州] 문화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다자이후 문예의 부흥을 꾀한 것은 특필할만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인(茶人)으로써도 뛰어났다.

 센노 리큐우[千 利休]와 친교를 맺고 그의 다도관을 몸에 익혔으며, 다이토쿠 사[寺]의 슌노쿠 화상[春屋和尙]을 참선(參禪)의 스승으로 삼아 다도에도 선()의 정신을 가미하여 깊이를 더해 갔다.


 1601 5월.

 이에야스가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개최한 잔치에 참가했던 요시타카는 그곳에서 가장 큰 차 가루를 넣어 두는 단지인 [葉茶壺]를 그냥 들고 나와 그 호방함에는 이에야스도 놀랐다고 한다[각주:6].


 2년간의 다자이후 생활 후 일부 완성된 후쿠오카 성 세번 째 성곽[丸] 은거 저택으로 옮긴 요시타카는 부인인 코우엔[幸圓]과 소박한 생활을 보냈다. 평생 부인 한 사람만 사랑한 그는 경건한 크리스천 다이묘우[大名]이기도 했다. ‘돈 시메온이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SIMEONJOSUI]라 쓰여진 로마자 도장을 사용했다.

 유해(遺骸)는 쿄우토[京都] 다이토쿠 사[寺]에 매장되었고, 하카타[博多]의 소우후쿠 사[崇福寺]에도 분골(分骨)[각주:7]되었다.



  1. 큐우슈우(九州)의 옛 이름. [본문으로]
  2. 과거 일본 조정이 힘이 있을 때의 큐우슈우[九州]와 부속 도서(島嶼)를 관장하던 관직인 다자이[太宰]의 정무소가 있던 곳. [본문으로]
  3. 일본에서 학문의 신으로 받들고 있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 道真]'의 일생과 그가 죽은 뒤에 텐진[天神]으로 신앙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그림과 설명이 쓰여진 두루마기. [본문으로]
  4. 당시 렌가계(界)의 일인자. 여담으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혼노우 사[本能寺]의 반역을 일으키기 직전에 아타고[愛宕]에서 연 렌가회의 사회자로 참가했었다. [본문으로]
  5. 죠우하의 아들. [본문으로]
  6.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훔쳤다는 뜻. [본문으로]
  7. 유해를 두 개소 이상으로 나뉘어 매장하는 것.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