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는 노부나가[信長], 히데요시[秀吉], 이에야스[家康]로 이어지는 소위 겐키[元亀][각주:1] - 텐쇼우[天正][각주:2]의 천하 통일기에 저 3명과 가까이 하며 백만석의 기초를 쌓아 올린, 센고쿠[戦国] 역사에서도 특필할 만한 무장이었다.

 토시이에는 14살 때 당시 나고야[那古野] 성주였던 4살 연상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겼고[각주:3], 같은 해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섰다[각주:4]. 19살 때 노부나가가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유키[信行]를 공격한 이노우 전투[稲生の合戦]에서 노부유키의 청년 친위대장[小姓頭] 미야이 칸베에[宮井 勘兵衛]라는 강적을 쓰러뜨리는 공적을 세웠다.[각주:5]

 이 즈음 토시이에는 카부키모노[かぶき者]로 성질이 급하여 자주 남과 싸웠다.
 ‘카부키모노’라는 것은 기발하고 특이한 복장이나 행동을 해서 남을 놀라게 하고는 기뻐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 기풍이었다. 예를 들어 토시이에는 굉장히 화려한 장식을 한 창을 들고 다녔기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 ‘창의 마타사에몬[槍の又左衛門][각주:6]’이란 이명(異名)을 붙었기에 이를 들은 토시이에는 기뻐하였다.
 그런 토시이에였기에 늙어서도 특이한 젊은이를 사랑하였으며, 또한 말하길,
 “젊은이에게는 큰소리 치도록 만드는 편이 좋다. 그러면 자신이 했던 말들을 거짓으로 만들 수 없다며 분투하게 되니까”
 라고 하였다.

 카부키모노였던 22살의 1559년, 토시이에는 커다란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어느 날 노부나가의 도우보우[同朋][각주:7] 쥬우아미[十阿弥]가 토시이에의 남성용 비녀[笄][각주:8]를 훔쳤다. 토시이에는 곧바로 노부나가에게 쥬우아미를 처벌할 테니 허락을 내려달라고 했으나 노부나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토시이에는 주군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이 참았지만, 이런 토시이에를 보고 쥬아미 등이 ‘용기도 없는 놈’ , ‘무사라는 자가 한번 벤다고 했으면 베어야지 주군의 명령이라고 베지도 못하다니’ 라는 식으로 뒷담화를 깠다.[각주:9]
토시이에는 이를 듣고 불문곡직하고 쥬우아미를 베어 죽였다. 더구나 일부러 노부나가의 눈에 띄는 곳을 골라서 죽여버린 것이다. 평소부터 카부키모노라는 점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토시이에로서는 당연한 행위였다.
 노부나가는 격노하여 토시이에를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숙노(宿老)들의 중재 덕분에 목숨만은 건져 오다 가문[織田家]에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낭인(浪人)이 된 토시이에가 취한 방도는 슬며시 전투에 참가하여 공적을 세워 복귀를 허락 받는 것이었다.[각주:10] 그런 기회가 그 다음 해인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가 되어 찾아왔다. 토시이에는 오다 군[織田軍]에 참가하여 이마가와[今川] 측의 목을 세 개를 가져왔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토시이에가 그 목을 노부나가의 앞으로 가져왔지만 노부나가가 무시했기에 그 목들을 버리고 다시 전쟁터로 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결국 노부나가의 용서는 없었다.

 그 2년 뒤, 노부나가가 미노[美濃]를 침공하였을 때 토시이에는 또 참가하여 모리베 전투[森部の合戦]에서 ‘목 사냥꾼 아다치[首取り足立]’라는 이명(異名)을 가진 강한 무사를 죽이는 수훈을 세우자 노부나가도 용서를 하여, 다시 오다 가문의 가신(家臣)으로 복귀하게 되었다.[각주:11]

 그 후 토시이에는 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 함께 호쿠리쿠 방면[北陸方面]에서 활약하며 차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1582년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나,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치자,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와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곧이어 이 둘은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토시이에의 입장은 복잡했다. 토시이에에게 있어 카츠이에는 오다 가문에서 쫓겨나 낭인으로 보내던 시대에 몇 번이나 도와주었던 은인이며, 오랜 기간 전쟁터를 함께 해 온 의리가 있었다. 한편 히데요시와도 젊었을 적부터 친교가 있어, 딸 중 하나인 ‘고우[豪]’[각주:12]는 태어나자마자 히데요시에게 양녀로 주었을 정도였다. 토시이에는 어느 쪽과도 싸우고 싶지 않다 – 는 것이 본심이었다. 하지만 형식상으로는 영지가 이웃인 시바타 측에 속할 수 밖에 없었다.

 1583년 4월 21일부터 다음 날 아침에 걸친 시즈가타케의 전투[賤ヶ岳の戦い]는 히데요시의 승리로 싱겁게 끝났지만, 이때 마에다 군[前田軍]은 그다지 전투에 참가하는 일 없이 영지(領地)인 에치젠[越前] 후츄우[府中]로 철퇴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토시이에가 이 전투에 대한 기본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히데요시가 마음만 먹는다면 토시이에가 농성하고 있는 후츄우의 성은 단숨에 낙성시킬 수 있었다. 이때가 토시이에의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였다.[각주:13]

 하지만 전하는 바에 따르면 포위망을 친 히데요시는 혼자 말 타고 후츄우의 성문 앞에 와서는 “마타사[又左]~ 마타사~”하고 토시이에의 통칭을 불렀고, 성안에 들어 온 히데요시는, 서로 원한이 없으니 앞으로도 사이 좋게 지내자며 토시이에에게 말하였다. 이런 것은 히데요시의 특기인 남의 마을을 끌어들이는 기술이기도 하지만, 남에게 미움 받지 않는 토시이에의 인덕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이리하여 토시이에는 시바타 카츠이에가 멸망 당하여 죽은 뒤 히데요시의 둘도 없는 한 팔이 되어 신뢰를 받았고, 나중에는 여러 장수들에게서도 신뢰를 받아 히데요시 정권에서 무게감을 더해 갔다.

 토시이에가 여러 장수의 인망을 모았다는 것에 관해서는 이런 일화가 있다.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병들었을 때, 토시이에는 당시 명의로서 명성을 떨치던 의사 마나세 도우산[曲直瀬 道三]에게 직접 의뢰하여 병을 치료하게 하였으며, 우지사토가 죽자 그 아들 츠루치요[鶴千代 = 후에 히데유키[秀行]]가 어리기 때문에 아이즈[会津]라는 중요한 곳을 지키기 힘들다는 의견이 높았지만, 부인 호우슌인[芳春院]과 함께 히데요시 부부를 설득하여 가모우 가문[蒲生家]의 영지 상속을 실현시켜 주었다.[각주:14]
 
 또한 이해에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 사건이 일어나 평소 히데츠구와 친밀했던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가 연좌의 혐의를 받자, 토시이에는 온갖 수단을 다해 변호하여 아사노 부자에게 쏠린 혐의를 벗게 하였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는 조선에서의 행동 때문에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근신 당하고 있다가 ‘지진 카토우[地震加藤]’[각주:15]라는 이명(異名)을 얻을 때의 활약으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풀었는데, 이것도 토시이에의 중재에 의한 것이 컸던 듯 나중에까지 키요마사는 토시이에의 중재를 고마워하였다.

 이렇듯 토시이에가 장수들의 위기를 구했기에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도 신뢰할만한 인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토시이에는 말년이 되어 적자 토시나가[利長]에게 여러 다이묘우들의 차용증을 건네주었다. 자신이 죽은 뒤 마에다 가문의 편에 선 다이묘우의 차용증은 돌려주라고 하며, 그렇게 되면 한층 더 아군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토시이에는 단순히 ‘좋은 인간성’만의 무장이 아니라 상당한 정치가이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토시이에는 경제적으로 유복했다. 그것도 센고쿠 무장[戦国武将]로는 드물게 경제감각의 소유자로 수치에 밝아 항상 주판을 가지고 다니며 병사의 수를 세거나 금전 출납, 곡물을 계량할 때도 주판을 튕겼다. 그랬기에 토시이에는,
 “돈이 많으면 남에게도 세상에게도 겁먹을 일이 없지만, 가난해지면 세상이 무서운 법이다”
 고 말했다고 한다.

 1598년 8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豐臣 秀吉]가 죽었다. 정치와 어린 히데요리[秀頼]의 안전은 오대로(五大老)[각주:16], 오봉행(五奉行)[각주:17]의 손에 맡겨지게 되어, 토시이에는 주로 히데요리의 양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대로의 필두인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여러 다이묘우들과 사돈관계를 맺으려 하는 등 히데요시의 유언을 어기기 시작하기에 이르자, 토시이에는 긴박한 정치의 장에 병든 몸을 이끌고 나가게 된다.

 이에야스를 가장 적대시하는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오봉행이었다. 그리고 이 미츠나리는 무공파(武功派)라 일컬어지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의 격한 증오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이리 되자 천하는 이에야스-무공파 장수들과 이시다 등 반 이에야스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에야스의 다음가는 실력자 마에다 토시이에는 미츠나리 등과 함께 이에야스에게 힐문장을 보냈다. 이에 대해 이에야스는 변명이라고도 할 수 없는 답변으로 응대하였다. 오오사카의 토시이에와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간에 불온한 공기가 흘렀다.
 이 사태에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각주:18]와 토시이에에게 은혜를 입은 카토우 키요마사,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 등 여러 장수들이 열심히 양자간의 사이를 중재하여 겨우 화해하였다고 한다.
 그때 토시이에는 이미 병상이 깊어 마에다 가문의 의지는 적자 토시나가가 결정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인망이 두터웠던 토시이에였기에 여러 장수들도 중재에 힘썼던 것이며, 이에야스 역시 예부터 알고 지낸 그런 토시이에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시이에는 죽었다.
 그 임종의 자리에서 토시이에는 히데요리의 장래를 걱정하며,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이빨을 간 뒤 베갯머리에 있던 ‘신도우고 쿠니유키[新藤吾 国行]’의 작은 칼[脇差]을 뽑지도 못해 칼집 채 가슴에 누르고는 무언가 크게 중얼거린 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각주:19]

마에다 도시이에[前田 利家]
1583년
오와리[尾張] 출신. 통칭 이누치요[犬千代]. 오다 가문[織田家]를 섬겼고, 형 토시히사[利久]를 대신하여 본가를 이었다[각주:20].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공적을 세워 에치젠[越前] 후츄우 성[府中城]의 성주가 되었고[각주:21], 이어서 노토[能登] 나나오 성[七尾城]의 성주.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후 히데요시의 휘하가 되어 카가[加賀] 오야마 성[尾山城][각주:22] 성주가 된다. 1585년 하시바 치쿠젠노카미[羽柴 筑前守][각주:23]의 칭호를 하사 받았고, 1590년에는 토요토미 성[豊臣姓]을 하사 받았다. 히데요시 죽은 지 8개월 후인 1599년 죽었다. 62세.[각주:24]

  1. 1570~1573년. [본문으로]
  2. 1573~1592년 [본문으로]
  3. 봉록은 50관. [본문으로]
  4. 오와리[尾張]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이며 키요스[清須]의 성주인 오다 노부토모[織田 信友]와의 카야즈 전투[萱津の戦い]. [본문으로]
  5. 오와리 통일전에 참가하며 봉록은 100관으로 증가. [본문으로]
  6. 토시이에의 통칭이 마타사에몬[又左衛門]이었기에. [본문으로]
  7. 다이묘우[大名] 곁에서 잡무를 맡거나 다도[茶道]에 관련된 일을 하던 스님. [본문으로]
  8. 일본 시대극을 자주 보시는 분이라면, 주인공이 도망치는 적이나 멀리 떨어진 상대에게 표창 대신 젓가락 비슷한 것을 던지는 장면을 보셨을 것이다. 그것이 코우가이[笄]. 이것으로 머리를 긁거나 머리를 다듬기도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政]가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10. 이런 행위를 '진가리[陣借り]'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11. 복귀하면서 얻은 봉록 300관. [본문으로]
  12. 토시이에의 4째 딸. 나중에 오대로 중 한 명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에게 시집간다. [본문으로]
  13. 도망치던 시바타 카츠이에는 토시이에의 후츄우 성[府中城]에 들러, 무단 퇴각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오랜 기간 자신을 잘 도와 주웠다는 것에 감사한 뒤 히데요시에게 투항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14. 여기에는 토시이에의 2남 토시마사[利政]의 부인이 우지사토의 딸인 점이 컸을 듯. 즉 서로 사돈지간. [본문으로]
  15. 596년 9월 5일 킨키[近畿]에 지진이 일어나 후시미[伏見]가 혼란에 빠졌을 때 키요마사는 근신의 몸임에도 군사들을 이끌고 후시미 성[伏見城]에 가 히데요시를 수비하였기에 붙은 이명. [본문으로]
  16. 이 당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7. 주로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를 이름. [본문으로]
  18.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代]는 타다오키의 적자 타다타카[忠隆]의 부인. 즉 토시이에와 타다오키는 사돈지간. [본문으로]
  19. 일설에는 복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신도우고 쿠니유키의 작은 칼로 스스로 를 갈라 죽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0. 토시이에는 4남이어서 원래 자격은 없으나, 1569년 토시히사가 병약해서 공적이 없다는 이유로 토시이에가 당주가 되도록 명령. [본문으로]
  21. 나가시노의 공적보다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감시역으로 되었다고 보아야 할 듯. [본문으로]
  22. 후에 카나자와 성[金沢城]으로 이름을 바꾼다. [본문으로]
  23. 히데요시가 한참 동안 쓰던 성과 관직명. [본문으로]
  24. 가보나 계보도에는 62세라고 하나, [케타신사 문서[気多神社文書]]나 [토시이에 야화[利家夜話]] 등에서 63세로 하는 사료도 많아 63세일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노부나가 가신단 연구가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 克広]). [본문으로]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政)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가신들 중에서도 용맹함으로는 첫째 둘째를 다투는 무사였다.
 나리마사가 죽은 뒤의 일이다. 나리마사가 일평생 혐오했던 정적(
政敵) 히데요시(秀吉)도 나리마사의 용맹함을 인정할 정도였다.
 오다와라(
小田原) 정벌 때의 일화이다.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부대표식(馬標)을 [금박이 칠해진 삼단 갓(三階菅笠)]으로 바꾸고 싶다며 히데요시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그 부대표식은 대단한 무용(
勇)을 자랑하던 나리마사의 부대표식이다. 아주 뛰어난 공을 세우지 않는 한 이것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어떤 공을 세우느냐에 따라 줄 수도 있지"
 고 말했다. 우지사토는 그 말을 듣고 결사적인 활약을 펼쳐 명예로운 [삼단 갓]을 허용 받았다고 한다.

 나리마사의 선조는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의 명장 사사키 모리츠나(佐々木 盛綱[각주:1])라고 한다. 오다 가문(織田家)에서는 늦깎이 출세를 하였다. 노부나가의 [검은 화살막이 부대(黒母衣衆)]에 발탁된 것은 중년이 되어서였다. 이 즈음 노부나가는 옆나라 미노(美濃)의 사이토우 타츠오키(斎藤 竜興)를 공격하였는데 나리마사는 이 전투에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와 함께 사이토우 측의 장수 이나바 마타에몬(稲葉 又右衛門)을 쓰러뜨리는 공을 세웠다. 그런데 수급을 취하는 단계가 되어서 나리마사와 토시이에는 상대방이 더 잘했다며 서로 공을 미루기만 하였다. 거기를 우연히 지나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서로 공을 미루는 말싸움을 지켜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목을 주워서는 노부나가에게로 가 본 그대로를 말했다. 노부나가는 이 세 명에게 각각의 행동에 대한 상을 내렸다고 한다[각주:2].

 나리마사는 그 후 입신출세하여 시바타 카츠이에의 요리키(与力[각주:3])가 되어 엣츄우(越中)를 하사 받았다.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주군 노부나가가 죽자 그 후 자신의 운명을 카츠이에에게 걸었다. 나리마사는 히데요시를 혐오했다. 성격도 단순하여 한 가지를 생각하면 오로지 그것만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어 정치정세를 두루 살펴보고 행동하는 요령이 부족한 듯했다.

 그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 후세에 나리마사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킨 전진미답의 일본 알프스[각주:4] 돌파였다.
 히데요시와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연합군이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싸운 1584년이었다. 이 전쟁이 화해로 끝난 것을 안 나리마사는 철저항전을 주장하기 위해서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에게로 달려가려고 한 것이다. 당시 엣츄우에 있던 나리마사가 하마마츠에 가기 위해서는 에치젠(越前)에서 오우미(近江)를 거쳐 미노, 오와리(尾張)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거기는 전부 히데요시의 세력이 있는 적지였다. 남은 길은 중부 산악지대를 종단(縱斷)하는 직선코스였다.

큰 지도에서 일반적인 토야마(富山) 하마마츠(浜松) 루트 보기

 때는 11월[각주:5]. 엄동의 계절이었다. 몸의 반 이상이 빠질 정도로 쌓인 눈 덮인 험준한 일본 알프스를 돌파하는 것은 현대에 와서도 쉽지 않다. 살아서 하마마츠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확실했다. 나리마사는 그것에 도전하였다. 나리마사 일행은 험난한 쿠로베(黒部)의 비경에 들어섰다. 자라토우게(ザラ) 고개라는 난소를 극복하여 하리노키토우게(木峠) 고개를 넘어 간신히 시나(信濃)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것도 [인기척 끊겨 지나온 곳은 모두 산과 계곡(るところ皆山谷えて人煙無し)]라는 깊은 산속에서 나무꾼의 집 한 채를 발견하는 행운도 있었다. 이 나무꾼의 안내로 길을 잃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시모스와(下諏訪)를 거쳐 12월이 돼서야 하마마츠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야스와 만나자 나리마사는 노부나가에게 하사 받아 보물처럼 여기던 작은칼(脇差)을 이에야스에게 바치며, "내 영지인 엣츄우에 히데요시가 공격해 온다면 부디 원군을 부탁 드리옵니다"
 하고 간절히 부탁하는 한편, 토쿠가와와 삿사가 한 편을 이루면 예전 타케다 신겐(
武田 信玄),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합쳐진 만큼의 파괴력을 가져 히데요시 따위는 단번에 멸할 수 있을 것이오 – 하며 열변을 토했다 한다.

 이에야스는 이에 대해 확답을 피했다고 한다. 나리마사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아 다음 해 1585년 히데요시가 엣츄우에 침공했을 때는 결국 이에야스의 원군은 얻지 못하였다.

 이렇게까지 히데요시에게 반항했음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용서하여 히고(肥後) 전역을 하사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리마사는 영내(領內) 호족 반란의 책임을 요구 받아 영지(領地) 몰수와 함께 셋츠(摂津) 아마가사키(尼崎)에서 자살을 명령 받았다.

[삿사 나리마사]
1516년생. 오와리(
尾張) 출신. 엣츄우(越中)를 하사 받지만 노부나가(信長)가 죽은 뒤 히데요시(秀吉)에 대항하다 패하여 항복. 1587년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 성주. 다음 해 1588년 5월 자살. 73세[각주:6].

  1.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최측근 중 한 명. 겐페이 쟁란기 때의 활약으로 후에 에치고(越後)와 이요(伊予)의 슈고(守護)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이 이야기는 [상산기담(常山記談)]과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에 나오는 것으로, [신장공기(信長公記)] 권수(巻首)의 '쥬우시죠우 전투(十四条合戦)' 항목에는 稲葉又右衛門を、池田勝三郎・佐々内蔵佐、両人としてあひ討ちに討ちとるなり(이나바 마타에몬을 이케다 카츠사부로우(나중에 코마키-나가쿠테에서 죽는 사람), 삿사 쿠라노스케 둘이서 물리쳤다)고 나온다. 저 마에다, 삿사, 시바타는 나중에 호쿠리쿠(北陸)에서 함께 활약한 무장들이라 후세에 만들어진 이야기라 하다. [본문으로]
  3. 이 즈음 오다 가문의 경우 각 유력 부장에게 파견된 오다 씨의 직속 신하를 뜻한다. 물로 세세히 들어가면 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노부나가나 노부타다가 영지를 인정하였다. [본문으로]
  4. 윌리엄 골란드(William Gowland)라는 인물이 이 산맥을 조사한 후 '일본 알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일본 알프스'란 이름이 붙기 전에는 히다 산맥(飛騨山脈 – 현 '키타(北) 알프스'), 키소 산맥(木曽山脈 – 현 '츄우오우(中央) 알프스'), 아카이시 산맥(현 '미나미(南) 알프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본문으로]
  5. 일본 구력. 현재로 치면 12월 하순 쯤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6. [무덕편년집성(武徳編年集成)]과 [무가실기(武家事記)]에 따르면 1516년생으로 죽을 때 73세가 되지만,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과 [삿사 군기(佐々軍記)]에는 1536년생으로 되어 있어 죽을 때의 나이는 53이 된다. 일본어 위키는 1536년생을 채용하고 있다. [본문으로]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인텔리[각주:1] 무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센고쿠(戦国)의 거친 파도를 헤쳐 나온 무장이면서도 끈적끈적한 정치적인 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의 행동거지에서 미적인 품위를 느낄 정도이다.

 중세 굴지의 문화인(文化人) 센노 리큐우(千 利休)는 우지사토를 평하길,
 “일본의 무장 중에서도 하나나 둘 있을까 말까 한 문무 겸비의 명장”
 라 말하며 칭송했다고 한다.

 우지사토 스스로도 자신이 명장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사서에 따르면 측근에게,
 “
토요토미 타이코우(豊臣 太閤)가 죽은 뒤 천하인(天下人)가 되는 사람은 카가(加賀)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아니면 나다”
 고 단정지었다고 하다.
 또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어떻게 보느냐는 물음에는,
 “이에야스는 가신에게 땅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그릇이 아니기에 천하인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미의식을 통한 인물감정이기에 현실과 밀착한 통찰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뜻하는 바가 웅대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히데요시에게서
아이즈(会津) 42만석[각주:2]의 거대한 영지(領地)에 봉해졌을 때 우지사토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반대로 변경으로 옮겨지는 원통함에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를 메이지(明治) 시대의 문호(文豪)
코우다 로한(幸田 露伴)은,
 “내 비록 미관말직이더라도 쿄우토(京都) 근방에 있다면 여차할 때 무슨 일이라도 하여 깃발을 천하에 휘날릴 수 있을 터인데, 이제 큰 영지(領地)를 받았다곤 하여도 산과 강이 사이에 놓여진
시라카와(白河) 관문[각주:3] 저 너머 오우슈우(奥州) 데와(出羽)의 깡촌에 있어서는 평소 가지던 큰 뜻도 펼치기 힘드니…”[코우다 로한의 蒲生氏郷]
 라 표현하였다. 우지사토의 눈이 항상 천하로 향해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어려서부터 그 장재(將材)는 노부나가도 눈여겨볼 정도였다. 부친 카타히데(賢秀)가 오우미(近江)의 롯카쿠(六角)씨를 버리고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겼을 때 13살의 우지사토는 인질로 오다 가문에 오게 되었다. 우지사토를 본 노부나가는,
 “눈빛이 보통이 아니다”
 며 장래의 대기(大器)를 한눈에 알아보고 자신의 사위로 삼는다고 약속까지 하였다. 그런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다음 해 14살의 데뷔전(初陣)[각주:4]에서는 이름있는 무사의 수급을 취하였다. 이 해 약속대로 노부나가의 딸 후유히메(冬姫)를 부인으로 맞이한다.

 히데요시도 우지사토의 인물을 높게 평가하였다.
 1587년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 때의 일이다. 당시 이세(伊勢) 마츠자카(松坂) 성주였던 우지사토도 출진하였다.
어쨌든 히데요시 앞에서 그의 측근들이 심심풀이로 인물비평에 열중하고 있었다. 듣고 있던 히데요시는 이 때,
 “우지사토는 나와 닮았지.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을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 해내더군. 정말 두려운 녀석이야”
 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즈(会津)의 대봉(大封)을 받을 때 있어서도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아이즈(会津)는 오우슈우(奥州)를 제압하는 주요지점이었다. 히데요시는 누가 적임일지 여러 장수들에게 토의하게 하였다. 10명중 9명이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를 추천하였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네놈들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어라”며 우지사토를 지명했다고 한다.

 우지사토가 아이즈 부임할 때 히데요시는 자신의 겉바지(袴)와 우지사토의 겉바지를 교환하였다. 히데요시의 특기 인심장악술이었다. 자신의 전권대리인으로서 오우슈우(奥州)의 지배자가 되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말도 전해진다. 우지사토가 너무도 뛰어난 인물이었기에,
 “이쪽에 두기에는 너무 무서운 녀석이다”
 고 생각한 히데요시가 오우슈우(奥州)의 깡촌으로 쫓아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각주:5]

 히데요시는 우지사토가 오우슈우(奥州)로 출발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도 하였다. 같은 자리에 아이즈(会津)와 인접한 카사이(葛西), 오오사키(大崎)에 영지(領地)를 가지고 있던 키무라 이세노카미 요시키요(木村 伊勢守 吉清)와 그의 아들 키요히사(清久)가 있었다.
 “이세노카미. 너희들은 앞으로 우지사토를 주군 혹은 부모라 생각하고 섬기거라. 앞으로 쿄우토(京都)에 올 필요 없다. 그 대신 아이즈(会津)로 출사하거라”
 그리고 우지사토에게는,
 “이세노카미를 자식 또는 동생이라고 여기며 돌봐주길 바란다”
 고 말하였다.
 우지사토는 오우슈우(奥州) 총독과 같은 지위에 오른 것이다.

 오우슈우(奥州)에서 으뜸가는 실력자로 자타가 공인하던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는 자연스레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우지사토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불태웠다. 그런 분위기를 전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마사무네가 세이쥬우로우(清十郎)라는 16살의 자객을 가모우 일족의 타무라 나카츠카사노쇼우(田村 中務少輔)의 시동으로 잠입시켰다. 목적은 우지사토의 암살이었다. 어쩌다 편지가 국경초소에서 발각되어 정체가 탄로나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우지사토는 그 충성심을 높게 평가하며 감옥에서 풀어주었다고 한다.[각주:6]

 우지사토는 세례명을 ‘레온[각주:7]’이라고 하여 기독교에 신앙했었다. 센고쿠 당시의 지식계층은 이 서양의 종교를 신지식으로 받아들였는데 우지사토의 인텔리전트적인 면모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

 풍류의 길에도 밝아 사세구로써,

 끝이 있으니 불지 않아도 꽃은 떨어질 것을
 성급도 하구나 꽃샘바람
 限りあれば吹かねど花は散るものを
 心みじかき春の山嵐
  라는 것을 남겼다.

 다도(茶道)도 리큐우의 뛰어난 일곱 제자 중 하나[각주:8]로 꼽혔다.

 말년의 영지(領地)는 92만석에 달했지만 안타깝게도 40세에 죽었다.
 가모우 가문 자체의 명맥도 짧아 아들인 히데유키(秀行)의 대[각주:9]에 단절되었다.

[가모 우지사토(蒲生 氏)]
1556년
오우미(近江) 가모우 군(蒲生郡) 히노 성(日野城)에서 태어났다. 첫 이름은 마스히데(賦秀)[각주:10], 통칭을 츄우사부로우(忠三郎)라 하였다. 1584년 이세(伊勢) 마츠자카(松坂) 12만석의 성주가 되었고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에서의 공으로 쇼우쇼우(少将)로 승진하여 '마츠자카 쇼우쇼우(松坂少将)'라 불렸다.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에서 공을 세워 아이즈(会津) 와카마츠(若松) 42만석에 봉해졌다. 1591년 오우슈우(奥州) 카사이-오오사키 반란(葛西・大崎一揆)[각주:11]를 진압하여 타무라(田村), 시노부(信夫) 등 5개 군(郡)이 더해졌고, 같은 해 또다시 오우슈우 정벌(奥州征伐)[각주:12]에 참가하여 다테 군(伊達郡)을 가증 받아 영지(領地)는 91만9320석에 달하였다. 1595년 2월 7일 죽었다.

  1. '지식인'..이라고 번역해야하지만, 왠지 네이버 지식즐~ 때문인지 뉘앙스가 좀... [본문으로]
  2. 46만석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링크 된 구글맵을 보면 어째서 이런 어중간 한 곳을 거론하였는지 하고 이상히 여기겠지만, 7세기 일본 율령제가 실시된 당시 일본령 최북단인 오우슈우(후대의 오우슈우의 남반부만 있었고 작았다)의 세 관문(奥州三関) 중 하나이다. 그 의미가 이어져 그냥 일본 최북단을 표현하는 관용어가 되었다. [본문으로]
  4. 대다수의 서적들은 1569년 8월의 이세(伊勢) 키타바타케(北畠) 공략이라고 하지만, 우지사토가 이토우 한고로우(伊藤 半五郎)에게 보낸 편지에는 1568년 9월의 노부나가 상경전 때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이와는 반대로 우지사토에게 세례를 한 오르간티노는 우지사토가 죽자 히데요시는 히데요리를 보호해 줄 사람이 죽었다며 눈물 흘렸다고 한다. [본문으로]
  6. '常山紀談'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하다. [본문으로]
  7. 레오(Leo)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8. 리큐우 칠철(利休七哲)을 말한다. 우지사토를 제외한 나머지는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오리베'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利貞). 우지사토는 이 칠철 중 No.1으로 꼽힌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실제로는 업치락뒤치락 후 우지사토의 손자 타타도모(忠知) 때 완전히 끊김. [본문으로]
  10. '야스히데'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11. 상기의 키무라 이세노카미 요시키요(木村 伊勢守 吉清)가 영내 정치를 잘못해서 '카사이-오오사키의 난'이 일어난다. [본문으로]
  12. 정확히는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의 난. [본문으로]

 천하인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직위가 신하로서는 최고인 칸파쿠(白) 다이죠우다이진(太政大臣)까지 되었지만 그 출신이 오와리(尾張) 나카무라(中村)의 성(姓)도 없는 일개 농민의 자식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다. 어렸을 적에 도적 하치스카 고로쿠(蜂須賀 小六)의 밑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굉장히 유명하지만 스루가(駿河) 이마가와 가문(今川)에 속해있던 마츠시타 카헤이(松下 嘉兵衛)를 섬겼을 때의 이야기도 소년시대의 히데요시의 풍모를 전해주고 있어 흥미롭다.
 마츠시타 카헤에가 하마마츠(浜松)의 마을 밖의 히쿠마가와(曳馬川) 강 근처에서 얼굴이 특이한 아이를 주웠다.
 [원숭이인가? 하면 사람. 사람인가? 하면 원숭이]
 어느 책에 이렇게 기록되어있는데 그것이 히데요시였다. 이때 카헤이는 하마마츠의 영주 이이오 부젠(飯尾 豊前)을 방문하여 "특이하게 생긴 꼬마를 주웠다네"하며 이 히데요시를 구경거리로 데리고 간 것이다. 이이오 부젠의 부인이나 딸들이 신기해하며 밤을 던져주자 히데요시는 마치 원숭이처럼 입으로 껍질을 벗겨 먹었다. 그녀들은 손뼉을 치며 재미있어했다고 한다.
 후세에 만들어진 위의 이야기처럼 사서로 전해지는 것에서도 히데요시의 용모는 원숭이와 닮았던 듯 하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원숭이(猿=사루)'라고 불렀던 것은 너무도 유명한데[각주:1] 히데요시를 보았던 모우리(毛利)의 신하 타마키 요시야스(玉木 吉保)는 [붉은 수염을 기르고 원숭이 눈과 같이 정신 없이 움직인다.[각주:2]]하고 쓰여 있으며,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
)도 조선 침공 계획을 듣고 "원숭이놈 죽을 자리를 못 찾아서 미쳤나?"라 욕하고 있다.

 이쯤에서 히데요시가 출세할 수 있었던 비결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본다.
 우선 돈을 쓰는 방법이 절묘했다.
 전투를 할 때도 공을 세운 병사에게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상금을 주었다. 톳토리 성(鳥取城) 공략 때,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가 성을 정찰하러 갔다가 적을 만나 물리치고서는 보고를 하였는데 이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곧바로 황금 한 웅큼과 100석을 가증해 주었다고 한다.
 특히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때
츄우고쿠(中
)에서 급히 아케치(明智)를 물리치기 위해 쿄우토(京都)로 향했을 때 돈을 뿌린 방식이 굉장했다. 히메지 성(路城)에 있던 금은과 쌀을 하나도 남김없이 부하들에게 준 것이다. 즉 이때 히데요시는 무일푼이 되었던 것이다. 그 과감한 투자로 히데요시는 천하를 얻은 거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돈이라고 하면 천하를 얻은 후 쥬라쿠테이(聚
第) 문 밖에서 돈을 나누어 준 것은 고금에 예를 볼 수 없었던 쇼였다. 금은 합계 36만 5천냥을 친족부터 시작해서 고급 귀족(公卿)이나 다이묘우(大名)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분배하였다.

 또 하나 히데요시 출세의 비결은 어떤 일이건 철저히 한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젊었을 때는 철저히 봉사를 함으로써 주군 노부나가에게 인정받았다. 짚신을 따스하게 덥혔다는 에피소드에서 상징되듯이 오로지 주군만을 생각하였으며 자그마한 욕심도 부리지 않았다. 어떠한 공을 세우더라도 영지(領地)에 대한 야심은 병아리 눈곱만큼도 보이질 않았다. 츄우고쿠 정벌 때 노부나가가 하리마(播磨)를 준다고 하였지만 사퇴하면서 그보다도 조선(朝鮮)을 공략하게 되면 그 나라를 받겠습니다 – 라며 꿈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열석해 있던 다른 무장들은 코웃음 쳤지만 노부나가는 그 무욕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1581년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게
오우미(近江), 하리마(播磨), 타지마(但馬) 등 70여만석이라는 영지(領地)를 하사 받았는데 이 때 고마움을 나타내고자 노부나가에게 막대한 선물을 보냈다. 타치(太刀) 한 자루, 은자(銀子) 6000매, 옷(小袖) 백 벌, 가죽 200매, 종이 200다발, 말린 도미 1000마리, 그 외에 도자기 등이 끝없는 행렬을 만들며 아즈치 성(安土城)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사람을 쓰는데 있어서도 히데요시는 뛰어났다.
 천성적으로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으며 인정미가 넘쳤고 미천한 신분 시대에 얻은 거짓말 안하기, 남을 속이지 않기가 다른 사람의 신용을 얻는 것이라는 '생활의 지혜'가 그 기본이 되었다.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을 섬겼으며 나중에 히데요시에게 시모츠케(下野)에 3만석을 하사 받은 사노 후사츠나(佐野 房綱)는 "신겐공이나 켄신공을 만날 때는 분위기가 엄격하여 압도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히데요시공은 '여어~ 텐토쿠지(天
寺=후사츠네의 호). 잘 오셨네'며 굉장히 친근하면서도 정중한 말투를 쓰셨기에 감개무량하였다"고 히데요시의 거드름 피우지 않는 성격을 전해주고 있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때도,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秀),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등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산하의 다이묘우(大名)가 인질을 받쳐 충성을 맹세하고자 하였지만 히데요시는 "그럴 필요 없소"하며 인질을 받지 않았다.

 또한 히데요시는 남을 직접 돌봐줄 때도 마치 자기 친형제에게 하는 듯이 애정 넘쳤다. 나가쿠테 전투(長久手合)에서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 모토스케(助)가 전사하였을 때, 츠네오키의 부인을 위로하고 남겨진 차남 테루마사(輝政)를 친자식처럼 키웠으며, 비젠(備前)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가 노부나가에게 미움 받았을 때는 노부나가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감쌌다.
 속이지 않으며 약속을 지킨다는 점에서는 저 나오이에에게 약속한대로 아들인 히데이에를 후에 오대로(
五大老)의 한 명으로 만들 정도로 크게 중용하였으며,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의 경우 그의 주인 요시카게(義景)를 배반한 요시아키라의 행위에 노부나가는 혐오하며 용서치 않으려고 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끝까지 노부나가를 설득하여 그의 생명을 구했다.

 조선의 기록에 파격적인 히데요시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 있다.
 1590년 11월 조선의 사자(使者)를 접견했을 때였다. 술을 내어 접대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는 잠깐 나갔다가 갓난아이(장남 츠루마츠(鶴松))를 안고 들어왔다. 안고서 실내를 어슬렁거리다가 조선의 악사(樂師)들에게 연주를 시키게 하던 중 그 갓난아이가 오줌을 싸버린 것이다. 히데요시의 옷도 다 젖었다. 히데요시는 크게 웃고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고 한다. 조선의 사신은 이를 '방약무인'이라고 평하였다.[각주:3]

 무엇이든 스케일이 다른 히데요시는 호색도 남달라 수 많은 측실을 데리고 있었지만 부인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에 대한 배려만은 허술히 하지 않았으며 세세했다. [신신당부하네만 대변이 나올 수 있게 쓰셨으면 하는 마음에…]하고 설사약에 대한 것까지 편지에 적고 있다.
 후계자를 낳은 요도도노(
淀殿)에 대한 애정은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였다. [20일 즈음에 반드시 네게로 가 도련님(츠루마츠)을 안고 싶구나. 밤에는 너와 함께 자고 싶다…]고 쪽팔리지도 않은 듯이 편지를 쓰고 있다. 한편으론 오다와라(小田原) 정벌 때 진영에서 키타노만도코로에게 편지를 보내어서는 '당신 말고는 요도가 맘에 들더군' 라는 등 서열을 확실히 정하여 그녀의 우월감을 만족시켰다. 또한 모친 오오만도코로(大政所)에 대한 효심도 깊어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재진 중이던 1592년에 오오만도코로가 죽자 히데요시는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기절했다고 한다.

 센고쿠(戦国) 시대는 사람 좋은 것만으로 헤쳐나갈 수 없다. 히데요시도 또한 센고쿠 무장이다. 천하인(天下人)이 되기 위해서는 뛰어난 무장이 아니면 안 된다. 히데요시가 천재적인 무략가라는 예를 들어보자.
 1582년 6월. 히데요시 46살 때였다. 빗츄우(
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를 수공(水攻)하고 있던 6월 3일 한밤중의 히데요시 본진에 혼노우(本能)사()의 변보가 전해졌다.
 이 순간부터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일개 부장에서 천하인으로의 길을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전군을 질타하여 폭풍우 속의 타카마츠를 출발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질주하였다. 히메지(
)까지 100km를 불과 하루 만에 돌파라는 엄청난 스피드였다. 이것이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순식간에 물리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그 후 시즈가타케()에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격파한 것도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에 의한 것이었다.

 말년의 히데요시는 오로지 히데요리()에 대한 맹목적 사랑에 빠져 더 이상 천하를 취한 영웅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는 그냥 평범한 노인으로 변모하였다. 3살의 히데요리에게 보낸 편지에 '곧 너를 보러 갈 테니 그 때까지 엄마의 젖을 많이 빨고 있으렴' 등을 쓰며 요도도노의 모유 상태까지 걱정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히데요리의 장래가 걱정되었는지 죽음이 가까운 1598년 8월 5일 병상에서 이에야스(家康)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등 오대로(五大老)에게 '히데요리가 다 클 때까지…'하고 불안하다는 듯이 유언을 남겼다. 그로부터 13일 뒤인 18일 미명. 63세의 나이로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다.

[도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37년 오와리(尾張)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오다 가문(織田家)의 아시가루() 키노시타 야에몽(木下 弥右衛門). 최초의 이름은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1574년에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 성주가 되었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친 후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멸망시켰고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싸운 후 화해. 1585년 49살 때 칸파쿠()가 된다. 다음 해 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이 되어 성을 토요토미(豊臣)로 바꾸었다. 1587년 쥬라쿠테이() 완성. 1598년 8월 제2차 조선역(朝鮮役)[각주:4]이 한창이던 중에 죽었다.

2007/03/23 -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 토요토미노 히데요시

  1. 노부나가가 그를 '원숭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노부나가는 그를 대머리생쥐(禿げ鼠)라고 불렀을 뿐이다. 그것도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키타노만도코로)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서만 보이는 표현이다. [본문으로]
  2. 원문의 猿まなこをぎょろつかせ・・・猿まなこ는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낸다는 뜻이지 원숭이와 닮았다는 뜻은 아니다. 즉 이 책의 저자는 예시를 잘못 들은 듯. [본문으로]
  3. 有頃, 秀吉 入內, 在席者不動。俄而便服, 抱小兒出來, 徘徊堂上而已, 出楹外招我國樂工, 盛奏衆樂而聽之。小兒遺溺衣上, 秀吉 笑呼侍者, 一女 倭 應聲出, 乃授其兒, 更他衣, 皆肆意自得, 傍若無人。- 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3번째 기사. [본문으로]
  4. 정유재란을 말한다. [본문으로]

가모 우지사토[蒲生 氏]

1595 2 7일 병사 40

1556~1595.

오우미[近江] 히노[日野] 성주 가모우 카타히데[蒲生 賢秀]의 아들. 크리스트교를 믿어 세례명은 레오(는 레온).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겼고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공적으로 인하여 아이즈[津] 와카마츠[若松] 성주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즈음에는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로 출진하지만 갑자기 병을 나서 급사.









가신들에게 존경받는 명장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천하를 평정했을 때, 오우우[羽] 지방의 통치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처음에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에게 아이즈를 맡긴다고 하자 타다오키는 이런 큰 일을 맡을 자신이 없다며 사퇴하였다.

 오우우에는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등 그 지역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호족들이 많았다. 아이즈 쿠로카와[川] 42만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된다는 것은 이런 호족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칸토우[東]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검은 손길이 오우우에 미치지 않게 한다는 숨겨진 임무도 있었다.


 그 다음으로 선정된 것이 가모우 우지사토였다.

 이세[伊勢] 마츠자카[松板] 12만석의 다이묘우[大名]사코노에쇼우쇼우[左近衛少将]. 용맹함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많은 전쟁을 경험한 명장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딸 후유히메[冬姬]의 남편이라는 신분이 많은 사람들에게 외경심(畏敬心)을 품게 하였다.


 또한 우지사토만큼이나 가신들에게 존경받는 주인도 흔치 않았다. 주된 가신들을 모아서는 술자리를 열 뿐만 아니라, 가신들이 목욕탕에 들어갈 때는 직접 뗄감을 집어 넣으며 물을 끓였다고 한다. 그렇기에 충성스런 신하가 많았다.


오우우 평정에 조력


 히데요시는 이런 우지사토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선택하였다. 처음엔 타다오키처럼 사퇴하였지만 히데요시도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우지사토는 아이즈 쿠로카와 42만석을 받아 들인 거실의 기둥에 기대어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눈물을 흘렸다. 이것을 본 야마사키 우콘[山崎 右近]이 많은 영토를 가진 높은 신분으로 출세하여 기쁜 눈물을 흘리는 것인가요? 하고 묻자 우지사토는 그렇지 않다고 하며,

 "낮은 신분이나 작은 영토를 가지고 있더라도 쿄우[] 근처에 있다면 한 번 정도는 천하를 노릴 수 있었을 것을.... 아무리 높은 신분에 많은 영토라고 하여도 쿄우[]에서 먼 곳에 있다면 그런 바램도 이루어질 수 없기에 나도 모르게 분한 눈물을 흘렸다"

 고 대답했다지만 작위적인 냄새가 난다.


 우지사토가 아이즈로 향하기 전에 히데요시는 자신의 겉바지[袴]와 우지사토의 겉바지를 교환하여 입었다. 오우우 부임은 히데요시를 대리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우지사토가 두려웠기에 오우슈우[奧州]로 쫓아 보냈다고 근신(近臣)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사실여부는 둘째치고 라도 우지사토는 천하인(天下人)의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재능을 오우슈우[奧州] 통치에 이용하려고 한 히데요시의 날카로운 안목을 칭찬해야만 할 것이다.


 우지사토의 말년은 오우우 통치에 전력을 쏟는 시기였다. 카사이-오오자키의 난[葛西大崎一揆]을 진압하여 다테 마사무네의 야망을 좌절시켰으며,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의 난을 처리하였다. [우지사토 기[氏鄕記]]에 따르면, 이때 우지사토는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군법에 따라 군율을 엄격히 했다고 한다.


최후와 죽을 때 읊은 시


 여기서 하나의 일화가 태어났다.

 군감(軍監)으로 참전했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히데요시에게,
 [
우지사토의 진영을 보니 예사 인물이 아닌 듯 합니다. 타이코우[太閤] 전하에게 딴 마음을 품는다면 이 이상 두려운 사람은 없습니다. 일찍 죽여야만 합니다]
 
고 진언하여 독을 먹였다고 한다.
이야기로써는 흥미 깊지만 우지사토 독살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우지사토가 발병한 것은 1593년의 히젠 나고야 출진 중이었다. 몇 월 몇 일인가는 특정할 수 없지만 하혈(下血)하였다고 한다. 만약 이때의 일화에 나오는 듯이 히데요시나 미츠나리가 짐독(鴆毒)을 먹게 하였다면 그해 안에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은 중국산의 독조(毒鳥[각주:1]) 날개를 술에 담근 후 마시게 하면 죽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지사토가 죽은 것은 1595 2 7일로 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다.


 필시 하혈은 암()의 징조였음에 틀림이 없다. 우지사토도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사카이[]의 의사 소우슈쿠[宗叔]의 진찰과 투약으로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황달증상을 띠며 말라갔기에 히데요시도 걱정하여 당대의 명의였던 마나세 겐사쿠[曲直 玄朔][각주:2]에게 진찰시켰더니 [배에 물이 차거나 손발에 종기가 생기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고 하였다. 그래서1594년. 히데요시는 또 다시 9명의 명의에게 우지사토를 진찰시켰다. 안타깝게도 명의들 대부분이 포기할 정도로 상태는 악화되어 40세의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당시의 의학에선 어떻게 판단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직장암(直腸癌)의 병상(病狀)과 비슷하다.


 그의 사세구()가 물의를 빚었다.

 りあればかねどるものをみじかき山嵐
 끝이 있으니 (바람)불지 않아도 꽃은 떨어지는 것을 마음도 급하구나 꽃샘바람

누군가에게 독살되어 수명이 짧아졌다는 설이 태어났지만 명백한 오해이다. 현대의 의학으로도 고치기 힘든 암의 질환이다. 우지사토는 그런 병으로 인하여 일찍 죽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한 것이라 생각한다.

코우토쿠 사(興徳寺)에 있는 우지사토의 묘

  1. 가상의 새라고 한다. [본문으로]
  2. 마나세 도우산[曲直瀬 道三]의 양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