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www.mofa.go.jp/mofaj/area/korea/visit/1112_pre/meeting.html 


2011년 12월 18일(일요일) 오전 9시 10분부터 약 한 시간,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대신은 쿄우토[京都]에서 방일 중인 이명박 한국 대통령과 일한 정상회담을 행하였으며, 개요는 다음과 같다(동석자 : 일본측부터 사이토우 츠요시[斎藤 勁] 내각관방 부장관 외, 한국측에서 신각수 주일본 대사, 천영우 외교안보 수석비서관 외). 본 회담은 10월 일한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셔틀외교’ 활성화의 실현이며, 양 정상은 17일 노다 총리 주최의 정상만찬에서 대통령의 71살의 생일 축하 및 41회째 결혼기념일(둘 다 12월 19일)을 축하하는 등을 통해서 개인적 신뢰관계를 더욱 강화하였다.

1. 일한관계

1. 노다 총리가 (1)일한 양국은 미국의 동맹국이며 기본적 가치,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번영의 확보 등의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 (2) 대통령과의 개인적 신뢰관계, 활발한 양국 국민간의 교류도 포함한 것을 기초로 하여 다양한 계층에서 미래지향적인 일한관계를 구축해 간다. (3) 일본은 동일본대지진 때의 피해지의 청소년 교류를 통하여 일본재생에 관한 이해를 증진하는 ‘유대 강화 프로젝트[キズナ強化プロジェクト]’를 만들어 2013년 3월말까지 한국과 약 1300명 규모의 청소년교류를 실시하고자 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대통령은, 세계경제가 어둡고 불확실적이며, 지금은 북한과의 문제가 있는 때이기에 한일쌍방의 의사소통을 강화하고, 지역-세계의 관심사에 대비하여야 함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뜻을 말했다.

2. 도서 인도에 관해서 노다 총리는, 인도가 종료된 도서를 일한우호의 증거로써 보존하고 싶다, 한국에 있는 일본에서 전해진 문서에 관한 접근이 개선됨에 따라 일한의 문화교류가 더욱 활발해 지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이대통령은 도서의 인도에 관한 노다 총리의 노력에 대해서 감사한다는 뜻을 전하고, 한국에 있는 일본에서 전해진 문서에 대한 접근이 개선될 것이라 본다는 뜻을 전했다.

3.  양 정상은 10월의 회담에서 합의한 ‘제2차 일한 신시대 공동연구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환영하였고, 또한 양 정상은 ‘제3차 역사 공동연구 프로젝트’의 개시에 합의하였다.
[참고] 일한 역사공동연구 : 제1차 공동연구는 2001년에 발족하여 2005년에 보고서를 공표. 제2차 공동연구는 2005년에 발족하여 2010년 3월에 보고서를 공표. 제3차의 구체적 개시시기, 멤버 등에 관해서는 앞으로 조절한다.

4.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이대통령에게서는, 이 문제가 해결되면 여러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된다. 이 문제해결을 위해서 진실된 용기가 필요하다는 등 위안부문제의 중요성을 말하며 그에 따른 대처를 요구하였다. 노다 총리는 이에 대해, 일본은 일관되며 명확한 법적 입장에 기초하여 일본의 입장은 알고 계시는 대로라는 뜻을 전한 뒤, 지금까지 일본은 인도적인 면에서 노력을 해왔으며 앞으로도 인도적인 견지에서 여러 고려를 하겠다고 전했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건설된 위안부 동상에 관해 노다 총리는 이대통령에게 동상의 건설은 유감스럽다며 조속한 철거를 요구하였다.

5. 노다 총리가 일한관계에는 일본측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도 포함하여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 일한관계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대국적인 견지에서 협력하고 싶다, 셔틀외교를 자주 행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으며, 이 대통령은 일한간에 여러 현안이 있지만 개인적 관계에 바탕한 대화를 행하고 싶다, 셔틀외교에 관해서도 자주 행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번 초대에 감사하며, 쿄우토[京都]의 영빈관에는 감명을 받았다는 뜻을 전했다.
[참고] 2011년 12월 17일에 겐바 코우이치로우[玄葉 光一郎] 외무대신이 청와대의 천영우 외교안보수석비서관에게, 한국 국회의원의 독도방문이나 시설구축의 중지를 요구하였다.

6.  양 정상은 군사정보의 교환의 중요성에 대해서 의견교환을 하였다.

2. 일한EPA를 포함하여 일한경제관계 등

노다 총리가 – 일중한(日中韓)FTA산관학(産官學) 공동연구가 성공리에 종료, 일중한 투자협정교섭에 있어서 일한의 노력, 일한EPA교섭의 재개, 토우호쿠 지방[東北地方]의 부흥, 원자력안전 등에 대해서 말하였고, 이 대통령은 일본과 한국간 민간레벨에서의 교류가 많아졌으며 앞으로도 활발한 교류를 행하고 싶다는 뜻을 말했다.

3. 북조선문제

북조선문제에 관해서 양 정상은 북조선에 의한 우라늄 농축활동을 포함한 핵개발이나 미사일 문제에 대한 대처에 있어서 일한 및 미국이 긴밀히 연대하는 것, 남북대화, 미국과 북한 대화를 계속해서 실시하여 북조선의 구체적 활동에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최근의 동향은 일한미(日韓美) 3개국의 긴밀한 협력의 성과임에 일치하였다. 또한 노다 총리는 납치문제에 관한 한국측의 이해와 협력에 감사하며, 이대통령은 납치문제에 대한 한국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을 표명하였다.

ps; 일본 외무성의 내용을 번역하였기에 원래 '한일'로 해야 하지만 '일한'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ps2; 
일본 외무성의 내용을 번역하였기에 원래 '한중일'이나 '한미일'로 해야 하지만 '일중한', '일한미'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ps3; 조선일보의 "
[韓·日정상회담] 日 "동상(위안부 평화비) 철거해달라"… 韓 "이러면 제2·3 동상 나와기사도 함께 보심이 좋은 줄 아뢰옵니다.

 



오늘 19일(월요일) 오후 2시 50분 즈음부터 약 10분간, 노다 요시히코[野田 佳彦] 내각총리대신은 이명박 한국대통령과 전화로 회담하였으며,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김정일 북조선국방위원장의 사거라는 긴급사태에 대해, 일한 정상 간에 긴밀히 연대할 필요가 있다, 돌발사태에 대비하여 정보를 면밀히 교환하며 긴밀하게 협력하고 싶다는 뜻의 발언이 있었습니다.

2. 이에 대하여 노다 총리는, 이번 사태가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악영향을 주지 않기를 기대한다는 뜻을 말한 뒤, 오늘 오후 개최된 안전보장회의에서 (1) 정보수집태세의 강화, (2) 한국을 포함한 관계국간 정보공유, (3) 불측의 사태에 대비하여 만전의 태세를 취하도록 지시하였다며 회의에서 나온 대략적인 내용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3. 추가로 양 정상은 다양한 정보수집이나 그런 정보를 공유함에 있어서 협력하며, 긴밀히 연대를 취할 것 및 앞으로도 필요에 따라 서로 연락을 취해가는 것에 의견이 일치하였습니다. 

ps; 일본 외무성의 내용을 번역하였기에 원래 '한일'로 해야 하지만 '일한'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ps2; 일본 외무성의 내용을 번역하였기에 원래 '한반도'로 해야 하지만 '조선반도'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출처 : http://jbpress.ismedia.jp/articles/-/27372
저자 : 타마키 타다시[玉置 直司]

 2011년 10월 26일에 치러진 한국 서울 시장보결선거에서 야당계열의 무소속후보 박원순(55세, 당선 다음 날 시장에 취임)가 여당인 한나라당 후보인 나경원(47세)씨에게 압승하였다.

 1년 뒤 대통령선거를 남겨놓은 시점의 ‘수도결전’에서 승부수가 된 것은 ‘경제양극화’에 대한 불만이었다. 대기업이나 재벌을 강하게 비판해 온 시민운동가 출신 박원순씨의 당선에 경제계는 술렁이고 있다.


20~40대의 70%가 여당후보에게 NO!

참패한 여당 한나라당 후보인 나경원씨의 선거공보물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그야말로 야당 단일후보의 압승이었다. 박원순씨의 득표율은 53.4%로 여당인 나경원 후보에 7포인트 이상 크게 앞섰다.

 특히 큰 차이가 났던 것이 젊은층의 득표율이었다. 지상파방송 3사의 공동출구조사에 의하면 20대 69.3%, 30대 75.8%, 40대 66.8%가 박원순씨에게 투표하여 여당의 나경원 후보를 압도하였다.

 20대~40대 젊은 층의 70%가 여당후보에게 NO를 외친 결과이기에 여당에게 있어서는 충격적이다.

 “또다시 하필이면 피곤한 사람이 당선되었군”. 개표 뒤 하루 지난 10월 27일 낮에 만난 한 재벌기업의 임원은 이렇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피곤한 사람’이라는 것은 정말 그럴 것이다. 당선된 박원순 시장은 한국 재벌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박시장은 검사출신이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변호사가 되어 시민운동에 몸을 던졌다.

 2000년 총선거 때 특정 정치인을 저격하며 ‘낙선운동’을 펼친 것은 일본에서도 굉장히 유명한데, 한국 경제계에서는 그 이상으로 유명한 것이 ‘참여연대’라는 시민운동단체이다.


한국경제계가 두려워 한 ‘참여연대’

 박원순씨가 설립 시 주요멤버로 참여한 이 시민단체는, 재벌의 세습인사나 불투명한 기업통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대상기업의 주식을 취득하여 주식총회에 참석해 적극적으로 경영진을 추궁했다. 1998년 삼성전자 주식총회는 이 참여연대의 추궁으로 13시간 반이라는 기록적인 마라톤 총회가 되었다.

 박원순씨는 그 후 ‘아름다운 재단’이라는 사회공헌단체를 설립하였는데, 이 단체에는 삼성,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이나 대기업이 빠짐없이 기부에 응하였다. 이 기부에는 대기업에 ‘박원순씨의 목표가 되었다간 큰일난다’는 생각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박원순씨는 시민운동계에서 유명했지만 일반적인 지명도는 결코 높지 않았다. 박원순씨를 단번에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한국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사회운동가로 서울대 교수이기도 한 안철수(49세)씨였다.

 안철수 교수는 서울대 의학부를 졸업 후 연구직에서 활동하였다. 원래 컴퓨터를 좋아하여 1980년대 말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하였고, 이를 사업화하여 대성공을 거둬 ‘한국의 빌 게이츠’로 불리고 있었다. 그 후 회사 운영에서 손을 떼고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한 편, 전국을 순회하며 학생이나 젊은이들을 격려, 지원하는 강연이나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안철수 열풍’이 커다란 순풍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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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의 승리를 기뻐하는 박원순씨]

 그 인덕과 젊은이들을 자기 돈으로 지원하는 모습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으며, 책을 쓸 때마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지금은 젊은이들의 교주적 존재가 되어 있다. 안철수 교수는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할 의향을 보였지만 ‘예부터 알던 맹우’인 박원순씨도 출마한다는 소식에 단념. 박원순씨 지원이라는 포지션을 취했다.

 둘이 ‘후보단일화’에 합의한 모습은 계속해서 TV의 뉴스에 보도되어 박원순씨도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박원순씨는 야당인 민주당 등의 지지도 얻어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여 압승하였다.

 이에 대해 여당 한나라당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열세인 선거전이었다.

 무엇보다 이번 ‘보궐선거’는 한나라당 소속의 전 시장이 야당 계열의 교육감이 결정한 ‘학교 무상급식’에 반대하여, ‘시장직을 건’ 주민투표를 실시했지만 투표율이 규정에 미치지 못해, 투표자체가 무효로 되어 시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시작된 소동극이 보궐선거의 계기가 되었다.

 혼란을 일으킨 여당의 전 시장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던 중 반한나라당 세력은 눈깜짝할 새에 박원순씨를 내세웠다.

 당황하며 여당이 내세운 후보가, 서울이 지역구로 미모로 인기가 높은 국회의원 나경원 후보였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의 선두주자’인 박근혜(59세) 의원도 4년 만에 선거지원 유세에 나서 필사적으로 나경원 후보를 지원했지만, 그 차이는 마지막까지 좁히지 못했다.


‘선거의 여왕’이라 일컬어지는 차기 대통령후보에게 뼈아픈 상처

 이번 선거결과의 의미는 (1) 수도 서울에서 여당후보가 참패했다. (2) 당선자가 무소속후보였다. (3)젊은이들이 압도적으로 야당측 후보에게 투표하였다 – 일 것이다.

 서울시장에 무소속 후보가 당선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2012년 총선거(봄), 대통령선거(연말)를 앞두고 정치계에 큰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여당 한나라당에 있어서는 수도결전에서 참패한 타격이 크다. 박근혜씨는 지금까지 ‘선거의 여왕’이라 불리며, 그녀는 지원한 후보를 대부분 당선시켜 왔다.

 이번에도 서울시장 선거와 동시에 치러진 부산시 구청장 선거 등에서는 지원 유세한 후보를 격전 속에서 전부 당선시켜 자신이 가진 위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유세한 서울 시장선거에서 여당후보가 참패한 것은 본인에게 있어서도 큰 상처가 될 것이다.

 투표일인 10월 26일은 부친인 박정희 전대통령의 기일이었다. 박근혜씨는 32주년인 이날 부친의 묘 앞에서 무엇을 보고하였을까?

 야당인 민주당은 더 큰일이다. 무엇보다 서울시장 선거에 후보조차 내세우질 못했으니까. 박원순씨에게는 집요하게 민주당 입당을 권했지만 박원순씨는 일축했다. 어쩔 수 없이 박원순 지원에 힘쓰긴 했지만, ‘민주당 해체와 정계재편은 불가피’라는 목소리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결과가 된 것인가? 경제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기존정당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새로운 얼굴의 정치인’을 원하는 커다란 흐름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경제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폭발, ‘새로운 얼굴의 정치인’을 요구하는 목소리

 한국은 1997년에 IMF위기로 일컬어지는 통화위기,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초경쟁사회, 초격차사회로 재탄생 해버렸다. 과감한 합리화와 국제화를 추진한 일부 대기업은 더 강해지고 더 거대해졌다. 그런 한편 경제격차도 훨씬 벌어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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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대통령의 경제정책으로 인해 일부 대기업은 돈을 벌었지만 일반시민의 생활은 어려워지기만 했다.]

 2007년 말의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후보가 압승할 수 있었던 것은 “대기업 CEO출신으로 누구보다 경제에 정통한 내가 경제를 재건하여 누구나 잘 살게 하겠습니다”라는 메시지에 많은 국민들이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기업중시’의 경제정책으로 일부 대기업은 더 거대화했지만 격차는 벌어지기만 했다.

4년 전에 경제를 지지했던 젊은층…’그들만의 경제’에 분노, 反한나라로(링크:조선일보)’. 선거 다음날 ‘조선일보’는  이런 제목으로 시장선거를 총괄했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크게 성장하는 한편 ‘생활은 더 안 좋아지기만 했다’라는 것이 일반시민의 체감경기이다.

 이명박대통령은 파이를 크게 한 뒤 분배한다고 약속했다. 확실히 파이는 커졌지만, 일부 대기업으로의 부의 편중은 더욱더 심화될 뿐이었다.

 이러한 정권에 대한 잠재적 불만에 불을 붙인 뉴스도 선거기간 중 나왔다. 이명박대통령이 퇴임 후에 살 집을 준비하였는데, 토지구입비 등을 위해 43억 원의 국비를 투입한다는 발표로 인해 국민의 반발을 사 허둥지둥 철회를 하게 되었다.

 나경원 후보에 대해서는 연회비가 1억 원이나 하는 ‘초고급 피부관리 클리닉’에 다니고 있다는 뉴스가 선거전 종반에 진보계열의 인터넷 뉴스사이트에 ‘특종’으로 올라와, 눈깜짝할 새에 네티즌에게 퍼졌다. 나경원 후보진영은 ‘연회비가 1억 원이라는 것은 허위보도다’고 반론하였지만, ‘역시 갑부 패거리’라는 네거티브이미지를 붙여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격차확대’에 대한 불만 이상으로 커다란 변화가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어, 이것이 선거전에 영향을 끼쳤다는 흥미 깊은 시각도 나왔다.


한국사회에 커다란 변화? ‘경제논쟁은 아무런 성과도 없다’라는 의식도

 어떤 정치학자는 이렇게 분석하였다.

 “IMF 위기직후부터 한국은 극심한 약육강식의 자본주의국가로 변신하였다. 누구나가 경제를 최우선시하였다. 이명박씨에게 기대한 것도 실리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IMF위기에서 15년 가까이 지나 최근에는 경제적 가치관보다도 도덕적 의식이나 정(情) 등 전통적인 가치관을 중시하는 풍조가 강해졌다.
여당인 한나라당은 꿈과 같은 경제성장을 말하며, 야당인 민주당은 분배중시를 주장한다. 많은 국민, 특히 젊은 층은 이러한 경제논쟁이 성과가 없기만 하다는 것에 자각하여 기존 정당에 속하지 않는 안철수 교수나 박원순씨에게 끌린 것이 아닐까?”

 박원순씨는 시민운동 출신이라고는 해도 지금까지의 많은 시민운동가들과는 굉장히 다른 경력의 소유자이다. 서울의 명문고인 경기고등학교에서 서울대(학생운동으로 중퇴)를 거쳐 검사가 되었다. 그 후 시민운동으로 위치를 바꾸었지만, 이데올로기를 중시하는 과격파가 아닌 보다 실무에 정통한 시민운동을 계속해 왔다.

 안철수 교수도 좀 특이한 경력이다. 둘의 공통점은 프로 정치가가 아니라는 것. 특정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운동가도 아니라는 것이다.

 투표 이틀 전인 24일 오후. 안철수 교수는 박원순씨의 선거사무소를 방문하여 격려했다. 기자 등 보도진의 앞에서 악수하고 대화를 나눈 것은 불과 5분이었지만, ‘안교수가 직접 응원했다’는 모습이 몇 번이나 TV에 나와, 마지막까지 투표할지 정하지 못하고 있던 젊은층에 나름 영향을 끼쳤다 것에는 틀림이 없다.

 이번 선거결과는 앞으로의 한국 정치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정계에서 당면의 최대 초점은 안철수 교수가 내년 대통령선거에 출마를 할지 안 할지이다.

 이번 선거에서 박원순씨를 당선으로 이끈 최대의 공로자는 안철수 교수이다. 8월말에 정계진출의 뜻을 나타낸 이후 그 인기는 상승일로이다. 대통령 선거를 생각한다면 그 전에 있는 총선거에도 준비할 필요가 있다. 안철수 교수가 기존 정당에 입당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에, 그럴 경우 야당의 재편은 불가피하다.

 안철수 교수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지금까지 ‘박근혜 대세론’으로 굳혀져 있던 여당도 커다란 변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예측 불가능한 정치의 계절, 대기업은 전전긍긍

 투표 당일인 10월 26일부터 27일에 걸쳐 한국의 정계, 미디어 관계자는 혼란에 빠졌다. 대부분의 반응은 “충격적인 결과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는 필시 안철수 교수가 출마할 것이다. 이젠 누구도 안교수에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성질 급한 어느 학자는 “여당은 2012년의 대통령선거를 포기하는 편이 좋다. 2017년을 향해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이다.

 물론 대통령선거까지는 1년 이상 남았다. 안철수 교수나 박원순 시장의 인기가 일과성으로 끝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단지 젊은층의 압도적 다수가 ‘기존 정당이 아닌 새로운 선택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 간단히 바뀔 것 같지는 않으며, 정계는 큰 변화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좀 더 눈앞의 일을 생각한다면 대기업이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원순씨가 서울시장에 취임하여 시장이라는 자리에서 대기업을 때리는 사태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세론의 대기업에 대한 시선이 더욱 싸늘해질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세론의 압력으로 이명박정권이 ‘친기업정책’에서 더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을 터이다.

 ‘정치에는 될 수 있는 한 관여하지 않는다’가 한국 대기업의 기본적인 자세이지만, 세계경제가 불경기인 지금 기업성과 악화가 예상되는 시점에서 정부의 협력을 얻지 못하는 것은 기업활동에도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2012년 총선거(봄)과 대통령선거(연말)를 실시한다. 같은 해에 두 대형선거가 실시되는 것은 20년에 1번 있을 수 있는 일로, 앞으로 본격적인 ‘정치의 계절’을 맞이한다. ‘예측 불가능한 정치의 계절’은 대기업에 있어서도 굉장히 불안한 일일 것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일본사 이것저것 2011. 10. 17. 07:58 Posted by 발해지랑

각지를 전전하던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가 1568년 쇼우군이 되자, 그때까지 키나이[機内] 지방을 장악하고 있다가 쫓겨났던 미요시삼인중[三好三人衆]은 재탈환을 노리며 쇼우군 요시아키가 임시로 거처를 삼고 있던 로쿠죠우[六条]의 혼코쿠 사[本圀寺][각주:1]를 1569년 1월 4일 공격합니다.

1569년 1월6일 자신이 옹립한 쇼우군이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기후 성[岐阜城]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는 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자신은 단기(單騎)로 쿄우토[京都]를 향합니다. 하필 눈이 엄청나게 와 생각만큼 나아가질 못하던 중 노부나가는 오다 군(織田軍)의 물자를 수송하던 운송업자들이 다투고 있는 것을 목격합니다.

노부나가는 운송업자들이 다투고 있는 곳에 가서 “어째서 다투느라 가질 않고 있는가?”라고 물어, 그 이유가 서로 자기 말에 배당된 물품이 더 무겁다는 등이 이유로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노부나가는 각자의 말들에 짊어진 물품들을 내리게 한 뒤 직접 짊어진 뒤 “똑같은 무게다. 서두르길 바란다”며 진격을 재촉합니다.

이때의 모습을 신장공기는

운송업자들이 물품 배당 문제로 다투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말에서 물품을 내리게 하여 양쪽 다 살펴보신 뒤, “같은 무게다. 서둘러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봉행(奉行)인 자가 어느 한쪽만 편들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셨기에 하신 일이다.
馬借の者も、御物を馬に負候とて、からかいを仕り候。御馬より下りさせられ、何れも荷物一々引見御覧じて、同じおもさなり、急ぎ候へと仰せ付げられ候。是れは奉行の者に依怙贔屓もあるかと、おぼしめしての御事なり。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의 대통령 되시는 분이 자주 쓰시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이렇게 직접 해본 뒤 해결책을 내놓아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뿐인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비웃음만 살 뿐이라는 것은 어째서 몇 년이 지나도록 이해하지를 못하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1. 여담으로 당시는 '혼코쿠 사[本國寺]'라고 '코쿠'의 글자를 國자로 썼으나, 에도 시대에 미토 코우몬[水戸黄門]으로 유명한 토쿠가와 미츠쿠니[徳川光圀] 생모의 추선공양을 한 뒤 미츠쿠니의 보호를 받아, 이후 혼코쿠의 '코쿠' 자가 圀로 바뀌었다. [본문으로]
출처: http://www.asahi.com/international/update/1114/TKY201011130389.html

 한국 이명박 대통령과 후나바시 요우이치(wiki_jp)[船橋 洋一] 아시히 신문 주필의 인터뷰 일부를 발췌하는 기사들은 있으나 전문은 게재한 곳이 없기에(...있으면 대략 시간낭비) 번역해 올립니다.

- 는 후나바시 요우이치 씨의 질문.
굵은 글자는 이명박 대통령의 답변입니다.




- G20 의장국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셨습니다. G20을 앞으로 어떻게 키워나가고자 하십니까? 그리고 의장으로서 이번 회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처음 G20이 모인 것은 2008년 11월 워싱턴. 그때는 (금융)위기였기에 선진국, 신흥국 등 대륙을 대표하는 나라들이 모였습니다. 지금은 회복기에 들어섰습니다만 걱정은 남아있습니다. 위기 때는 단결하지만 회복기가 시작되면 나라마다 각각의 사정이 다르기에 과연 한마음이 될 지 걱정입니다. 그 고비가 된 것이 서울에서의 회의입니다. 앞으로도 G20이 계속 이어질 것인가, 서울에서 합의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많이 제기되었습니다. 때문에 과거의 회의에는 없었을 듯한 부담감을 크게 느꼈습니다. 서울 회의로 인해서 G20 역할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입니다.[각주:1]

 결과적으로 G20에 속한 나라들은 세계의 문제를 토론하는 자리로써 앞으로도 G20을 대신할 포럼이 없다는 인식을 가졌습니다. 회의 마지막에는 모든 정상들이 G20이야말로 세계적으로 어려운 때 문제 해결의 장소가 될 것이라는 인식을 같이 하였습니다. G20을 대신할 상설 채널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G20 멤버 이외에도 개발문제가 있기에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2개국을 초청하였습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까지 G20이 앞으로도 선도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최선진국, 신흥국, 가장 가난한 나라까지 모두가 G20에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 한국은 세계의 글로벌 파워로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는 14년전에 가입한 선진국입니다. 한국이 G8에 들어가 G8을 강화하는 시대가 온 것은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아직 세계 경제문제가 주된 관심사인 G20입니다만 이번 토론에서는 기후변동에서 개발도상국 개발문제까지 다양한 토의를 하였습니다. G20에서 함께 연구하는 편이 효과적이라 생각합니다.

- 한국은 환태평양 파트너십 협정(TPP)에 어떤 방침을 가지고 임하고 있습니까?

 상징적인 효과는 있습니다만 실질적 효과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역내의 APEC 국가들이 역내에서 자유무역을 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어 어느 나라건 (TPP를) 검토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한국도 그러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 한일 자유무역협정(FTA)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까요?

 제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일본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많은 나라와 FTA를 맺고 있습니다. 비관세 장벽을 없애는 것만으로 자유무역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세 장벽과 비관세의 장벽을 없에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당 부분이 일본 측 의사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 일본의 어려움 중 하나는 농업을 보호하고자 하는 정치적 압력입니다만 그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TA를 연달아서 성사시키고 있습니다. 어떻하면 농촌, 농민의 반발, 불안감, 반대 등을 극복하고 FTA 쪽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입니까?

 농민의 문제는 단순한 경제문제가 아닙니다. 한국과 일본이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FTA를 체결하려면 많은 농민을 설득해야만 합니다만 반대가 굉장히 많습니다. 지금도 깃발을 휘날리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가가 그런 반대들을 극복하여 결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모든 분야가 국제적인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농업도 국제경쟁력을 가져야만 하는 점이 중요하며, 농민도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는 농민의 입장을 정치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려는 것이 아니라, 농민의 입장에 서서 어떻게 하면 외국과 경쟁해가면서 잘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대화를 많이 나누고 싶습니다. 제 생각을 이해해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근본적으로 한반도의 평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가 전제이며 그 다음이 경제협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협력이 실현되면 자연히 통일문제입니다. 지금 당장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고 북의 비핵화라는 커다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저는 언제라도 정상회담이 가능하다고, 취임했을 때부터 일관되게 말해 왔습니다. 하지만 정상회담을 국내의 정치적인 목적때문에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한반도의 남북전체를 위한 길을 탐색하기 위한 회담을 해야만 합니다.

- 저는 북한이 권력계승기에 진입하고 있으며, 불안정하게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도 미리 상정하여 한국의 대응, 한미, 한미일의 협력이 필요하지 않냐고 생각합니다.

 삼대세습은 일반적,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납득되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삼대세습했다고 해서 곧바로 북한이 위험해 진다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항상 한반도 전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한반도 전체, 동아시아 전체의 정세를 보고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협력할 것이며, 지금도 협력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은 동맹관계이며 미국과 한국도 동맹관계이기에 자연히 말씀하신 것은 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금은 예전에 비해 더욱 국제무대에서 상호간 긴밀히 협력하고 있습니다. 천안함 사건이 있던 때도 국제연합에서 일본이 앞서서 잘 협력해 주었습니다. 그렇 것을 통해서 상호 신뢰가 깊어지기에 북한 정세가 위험하다거나 위험하지 않다거나에 관계없이 앞으로도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 한일 안전보장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재 우리는 자연스럽게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면 자연히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강화한다고 하면 주변 나라들이 의심스런 눈으로 볼 지도 모르기에, 반대로 그런 의심을 강하게 받게 될 지도 모릅니다. 자연스럽게 서로 이해하고 신뢰를 쌓아 간다면 자연스레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번 한국에서 대량파괴병기 확산방지구상(PSI)의 훈련이 있었을 때 일본에서도 왔습니다. 훈련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았지만 참관하였습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면 다음에도 또 자연스럽게 관계가 발전해 나가지 않겠냐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 자체가 지금까지 없었던 일입니다.

- 한미의 군사연습을 예전에 했을 때, 일본 해상자위대를 옵저버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미일간 훈련할 때 한국도 옵저버로 올 수 있습니까?

 참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히.

- (한국이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문화재 인도 서명이 한일간에 행해집니다. 연내에 1205점을 인도할 때 대통령 스스로 한 번 더 일본에 오셔서 가져가시는 것도 가능할까요?

 그런 문제는 일본 국회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통과된 다음부터 생각하겠습니다.

- 6자회담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어떤 행동, 태도로 나올 필요가 있을까요?

 간단한 일입니다. 과거를 되돌아 보면 6자회담을 하고 있는 도중에 적절한 보상을 주더라도 그들은 핵실험을 하여 망친 다음 또 (회담에) 나오거나 하는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전략에는 6자회담을 열더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핵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사를 전제로 회담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과 한국은 같은 생각이며, 중국도 어느 정도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러시아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미국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회담을 위한 회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북한이 만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하면 핵을 포기하는가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대화하는 자세를 가지고 나올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북한에 대해서 언제나 중국을 모델로 하라고 말해 왔습니다. 중국정부에 대해서도 북한을 중국과 같이 해 주길 바란다고 말햇씁니다. 우리들이 개방하시오, 변하시오 라고 하여도 그들은 오해하는데, 중국이라는 성공사례도 있으며 체제도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직역 반, 의역 반. 제 실력이 딸릴 수도 있겠지만 좀 중구난방한 느낌이 있습니다. 일본어 가능하신 분은 링크를 직접 참고하시고 보시는 편이 좋을 듯.
  1. 아마도 서울 회의에서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면 G20이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으셨다고 말씀하시는 듯.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