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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1.19 아자이 나가마사
  2. 2006.05.22 토우도우 타카토라 - 천수를 누리며 천하태평을 위해 힘쓰다.

아자이 나가마사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6. 11. 19. 09:58 Posted by 발해지랑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
1573
8 28
할복 29

1545 ~ 1573.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성주(城主).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여동생인 오이치()를 처로 맞이하여 동맹을 맺지만, 맹우 아사쿠라(朝倉)()를 노부나가가 공격하였기 때문에 배반. 아사쿠라 요시카게(義景)와 함께 아네가와(姉川)의 전투를 벌이나 패배. 후에 오다니 성을 공격당하여 할복했다.






부인과 자식을 사랑하는 호북(湖北)의 용장(勇將)


 아자이 가문은(浅井)초대(初代) 스케마사(亮政)가 주가(主家)인 쿄우코쿠(京極)()를 하극상(下剋上)으로 밟고 올라 와 히사마사(久政), 나가마사로 3대가 이어져 소위 [호북의 패자(覇者)]가 되어있었다. 특히 나가마사는 조부의 기질을 이어 받아 뛰어난 무략(武略)을 발휘하여 가문의 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1567년.

 오와리(尾張) 키요스(淸州) 성주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 오이치를 처로 맞이하여 아자이 가()의 위세는 안정되게 되었다. 오이치와의 사이에 2 3녀를 두었고 이 행복이 영원이 이어질 것이라고 꿈꾸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받들어 상경(上京)할 때 나가마사는 망설임 없이 노부나가와 함께 롯카쿠(六角)()를 싸워 추방시켰다.


 하지만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의 이기적인 면을 꽤 뚫어 보지 못했다. 아니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부인이나 자식들을 너무 사랑하여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을 것이다.노부나가는 나가마사의 사람 좋은 것을 이용하여 약속을 위반하였다.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공격이었다.


노부나가와 갈라서다.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을 때 - 에치젠의 아사쿠라씨()는 조부 스케마사의 시대부터 친밀한 관계이니 자신한테 알리지 않고 아사쿠라씨()를 공격하지 않는다. 만약 아사쿠라씨()를 공격할 때에는 사전에 나가마사의 이해를 구하도록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은 노부나가를 싫어하여번히 쿄우()로 올라오도록 한 요청에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다의 속성(属城)인 테즈츠(手筒), 카나가사키()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노부나가는 격노하여 나가마사에게 통보하지 않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원군과 함께 에치젠 공격을 감행했다. 1570 2월이었다.


 그야말로 오다군의 선봉이 아사쿠라의 본거지인 이치죠다니(一乗谷)를 포위하려 할 즈음 노부나가는 나가마사가 배반하여 요시카게에게 가담한 것을 알게 되었다. 옛 의리를 중요시 하는 부친 히사마사의 설득에 의한 것이었다고도 하지만 거기에는 나가마사의 논리가 있었으며 맹목적으로 노부나가를 섬길 수 없다는 오우미(近江) 무사의 의지도 있었을 것이다. 노부나가는 에치젠에서 철수를 명하고 쿄우()로 돌아갔다. 앞뒤로 협격 당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사태는 같은 해 6월의 아네가와(姉川) 전투로 발전했다.

 이부키(伊吹)산에서 비와코(琵琶)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아네가와 천을 사이에 두고, 오다-토쿠가와 연합군과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이 싸웠다. 선전했지만 노부나가 측의 머릿수에 눌려 나가마사 측은 패배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나가마사는 거성(居城)인 오다니 성을 중심으로 끊이지 않고 노부나가 진영을 공격하여 괴롭혔다.


부인과 자식을 도망시키고 철저항전


 부인과 자식을 가진 인간은 자식이 성장함과 동시에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필시 나가마사도 그랬음에 틀림이 없다. 오오기마치(正親町) 텐노우(天皇)의 명령를 바탕으로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중개에 나서자 나가마사는 간단히 화의(和議)에 응했다. 성립은 1570년 12월 14.

 이것을 좋지 않게 생각한 나가마사 휘하의 무장도 있었다. 이소노 카즈마사(磯野 員昌) 등의 부하 장수들이 나가마사에게는 더 이상의 가망성이 느낄 수 없다고 단념하며 뒤를 이어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였다. 나가마사의 수동적인 모습에 실망을 느꼈기 때문이다.


 노부나가는 집념이 강하다. 자신을 거역한 자를 방치해 두는 성격이 아니다. 우선 1573 8월에 에치젠을 공격하였고, 20일에는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자살로 몰았다. 일족인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의 배반이 원인이었다. 그리고 노부나가는 이 공격의 기세를 이용하여 나가마사의 오다니 성을 포위하였다.


 8 26일.

 노부나가는 오우미(近江)의 토라고젠(虎御前)산에 포진하고, 후와 카와치노카미(不破 河內守)를 사자로 하여 나가마사에게 항복을 권고하였다. 요시카게를 쓰러트린 지금 나가마사에게는 원한이 없으니 항복한다면 나쁘게는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나가마사가 거절하자 이번엔 야마토(大和) 일국을 주겠다고 하였다.

 나가마사는 1568년 오우미(近江) 침공부터 6년 간 노부나가의 동향을 빠짐없이 관찰해 왔다. 아무래도 목숨을 구해 줄 것 같은 상대가 아니다. 나가마사는 다시 거절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오다니성에 농성하는 무장들을 동요시켜 전투의욕을 잃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카와치노카미가 돌아가자 부인인 오이치노카타(市の方)를 설득하여 딸 세 명(챠챠([각주:1]), 오하츠(お初), 오고우(お江[각주:2]))과 함께 노부나가에게 보냈다. 아들인 만부쿠마루(万福丸)와 이쿠마루(幾丸[각주:3])는 도망치지만 만부쿠마루는 잡혀서 살해당한다.


 나가마사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성 밖으로 나가 용감하게 싸웠다. 그리고 8 28일. 성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아카오 미마사카노카미(赤尾 美作守)의 저택에서 할복하였다. 향년 29.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사람이 많았다.

  1. 후에 요도도노(淀殿). [본문으로]
  2. 후에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2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부인. [본문으로]
  3. 갓난 아기였기에 절로 보내져 중이 되었지만 후에 호소카와(細川)씨의 가신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도도 다카토라[藤堂 ]

1630 10 5 병사 75

1556 ~ 1630.

가난한 무사 집안의 둘째로 태어났다. 처음으로 전쟁터에 발을 디딘 것이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 오다[織田], 토요토미[豊臣], 토쿠가와[德川] 씨를 섬기며 활약. 또한 축성의 명인으로 각지에 성을 쌓았다. 고미즈오 텐노우[後水尾天皇]와 토우후쿠몬인 마사코[東福門院 和子]의 결혼을 성공시켜 공무일화(公武一和[각주:1])를 실현하였다.










센고쿠[戦国] 시대에서 수완 좋게 살아남기


 토우도우 타카토라는 말년의 대부분을 에도[江戶]에서 생활하였다.

 에도 성[江戸城] 개수(改修)와 마을 정비에 분주한 한편 우에노[上野]나 칸다[神田]등에 번저(藩邸[각주:2]), 별저(別邸)를 두고 쇼우쥬[松寿]부인(2대 번주 다카츠구[高次]의 모친)을 살게 하여 인질, 참근 교대의 선례를 만들었다.

 에도성에 자주 등성하여 2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 3대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미츠[德川 家光]를 보좌하여 '천하태평(天下泰平)' '공무일화(公武一和)'에 심혈을 기울였다.


 오우미(近江)에서 태어난 그는 건장한 몸과 드센 힘을 타고났으며, 15살에 오우미의 아자이 나가마사[井 長政]아시가루[軽]가 되어 아네가와 전투에 참전. 이후 아츠지 요시히데[阿閉 義秀], 이소노 카즈마사[磯野 員昌], 오다 노부스미[織田 信澄[각주:3]] 등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 하시바 히데나가[羽柴 秀長 히데요시[秀吉]의 동생]을 섬겼으며 여러 고난을 겪은 후에 히데요시의 가신이 된 후 히데요시가 죽자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긴다.

 토자마 다이묘우[ 大名[각주:4]]이면서도 절대적인 신뢰를 받아 이세[伊勢], 이가[伊賀] 32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 인물에게 말년이라던가 "정년"에 평온은 없었다.


 1608년.

 53살 때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에서 이세 츠[]로의 이봉(移封)은 영전(榮轉)이었으나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있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공략하기 위한 포석과 이가 닌쟈[忍者]의 공급원이가[伊賀]의 지배라는 무거운 사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런 막부(幕府)의 부탁과도 같은 임무에 응하여 이가 우에노[上野], 아노우즈[安濃津]에 성을 쌓았다.


 7년 후인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坂冬の陣]에서는 60세의 나이로 6천의 군세를 이끌고 토쿠가와 측의 선봉을 맡았다. 다음해 여름의 전투에서도 4천의 군세를 이끌고 쵸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 盛親]의 부대와 사투하였다.


 1619년.

 64살 때 오오사카 성 재건의 명령을 받아 완수하였고 또 그 즈음에 여러 축성 공사에 착출되어 불만이 쌓인 토요토미 은고[豊臣 恩顧[각주:5]] 다이묘우[大名]의 반란에 대비한 셋츠[津] 타카츠키[高槻], 탄바[丹波] 사사야마[篠山]의 축성을 지휘하였다.


 다음해인 65. 노령에 굴하지 않고 90여일 간 머물면서 거대한 바위를 키츠가와 강[木津川[각주:6]] 야마시로[山城] 카모[加茂]의 죠우넨 사[常念寺] 운반하는 작업을 담당하였다.


세찬 바람에 맞서 서있는 거목


 이 즈음부터 눈병을 앓아 에도로 돌아오자 실명 직전. 그러나 공무일화(公武一和)를 위해서 상경하여 쇼우군 히데타다[秀忠]의 딸 토우후쿠몬인 마사코[東福門院 和子]를 고미즈오 텐노우[後水尾天皇]의 부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막부(幕府)의 출장소라고 할 수 있는 니죠우 성[二条城]의 정비에 조력했다.


 텐노우에게는 이미 '오세츠노 츠보네[於世津局]'와의 사이에 황자인 카모미야[加茂宮]와 황녀 우메미야[梅宮]를 둔 상태였기에 텐노우와 쿠교우[公卿[각주:7]]들이 반발. 그에 따라 쇼우군의 면목도 손상되어 막부 각료들도 격한 반대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타카토라는 히데타다가 딸을 사랑하는 마음에 감복. 물심양면의 노력을 하여 결국목적을 달성했다.


 1627년.

 72살 때. '생애 최대의 스승이며 은인'이라는 이에야스를 위해서 이에야스의 묘를 만들었다.

 다음해에는 코우즈케[上野]에 있는 칸에이 사[寬永寺]에 칸쇼우 원[寒松院]을 건립하였고, 쿄우토[京都]의 난젠 사[南禪寺]에는 일본 최대의 산문(山門[각주:8])을 만들어 헌납하여 오오사카 공성전에서 전사한 가신의 넋을 기렸다.


 1630 10 5.

 에도 야나하라[柳原]의 별저(邸)에서 잠이 드는 듯 편안히 죽었다.

 마지막 말은 "천하를...[津] 부탁한다"고 했다고도 하며, 몽롱한 듯한 모습으로 타카토라를 위해서 토우도우 가문[藤堂家]을 위해서 전쟁터에서 죽은 수많은 가신들의 이름을 주문처럼 외웠다고도 한다.

 향년 75. 경애하던 이에야스의 죽음보다 14년 더 살았으면서도 이에야스와 같은 75세의 죽음이었다.


 토우도우가의 기록에 의하면,

 "몸에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상처가 있었다. 총에 의한 상처, 창에 의한 상처 등 모두 전투에서 얻은 것으로 왼손의 약지는 뭉개져 손톱이 없었고 오른손 중지도 1촌 정도 짧았으며 오른발의 발톱은 전부 빠지고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3대 쇼우군 이에미츠[家光]는 그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텐카이[天海] 그 빛나는 생애(生涯) "세찬 바람에 맞서 서있는 거목"이라 찬양했다.

  1. 조정과 바쿠후(幕府)를 인척관계로 맺어지게 하여 사이 좋게 함 [본문으로]
  2. 에도나 쿄우토[京都]등에 세운 각 번(藩)의 대사관 같은 것. 에도의 경우 참근 교대(参勤 交代)로 올라온 다이묘우[大名]가 머물렀다 [본문으로]
  3. 보통 '츠다 노부스미[津田 信澄]'라 불린다.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츠[信勝 - '노부유키'로 많이 알려져 있다]의 아들로 노부나가에게는 친조카. '츠다[津田]'는 오다 가문[織田家] 가문의 별성으로 방계의 친족들은 이 성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주로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를 치른 후에 이에야스에게 복종하기 시작한 다이묘우. [본문으로]
  5.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입은 다이묘우를 지칭 [본문으로]
  6. 오오사카 부근에 있다 [본문으로]
  7. 상급 귀족들. 보통 종삼위(従三位) 이상을 말한다. [본문으로]
  8. 사원의 정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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