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쿠고[筑後] 야나가와 성[柳川城]의 성주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는 용맹하고 정직한 성격이었다. 이러 성격 덕분에 나중에 기적적인 복귀를 할 수 있게 된다.

 무네시게는 큐우슈우[九州]의 강호인 오오토모 씨[大友氏]의 일족 타카하시 죠우운[高橋 紹運]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타치바나 도우세츠[立花 道雪]의 양자가 되었다.[각주:1] 이 도우세츠라는 인물은 오오토모 가문에서도 굴지의 명장이었다.

 무네시게는 이 도우세츠에게 스파르타 교육을 받으며 키워졌다.
 예를 들면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식사 중의 일이다. 도우세츠가 보자 무네시게는 생선의 뼈를 발라내며 입안에서도 뼈를 혀로 골라내서는 손으로 집어 상 위에 놓았다. 도우세츠는 천둥 같은 큰소리를 지르며 화냈다. 
 “계집애처럼 뼈를 골라내며 쳐먹다니. 머리부터 입에 넣어라. 뼈도 이빨로 으깨어 삼켜라. 타치바나 가문을 잇는다고 하는 녀석이 생선 뼈도 삼기지 못하다니 앞길도 훤하구나!”
 이렇게 성장한 무네시게이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그 용명(勇名)은 높아져만 갔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의 출진명령으로 인하여 전국에서 여러 다이묘우[大名]이 쿄우토[京都]로 상경하였다. 이때 히데요시[秀吉]는 일부러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불러 그 휘하에 있는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도 함께 호출하여 타치바나 무네시게와 대면하게 한 뒤,
 “동국(東国)에 그 누구보다 뛰어난 혼다 헤이하치[本多 平八], 그리고 서국무쌍의 타치바나 무네시게.”라고 하며 여러 다이묘우들 앞에서 소개했다고 한다.

 무네시게는 용맹함에 더하여 인정미도 넘쳤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큐우슈우의 시마즈 가문을 정벌하기 위해 큐우슈우로 내려오자, 무네시게는 그런 토요토미 가문의 휘하 무장으로 어느 성을 공격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무네시게는 히데요시를 알현하게 될 일이 생겼는데, 그때 적의 성에 사자를 보내어,
 “태합[太閤] 전하를 알현하기 위해 잠시 휴전하고자 하오. 당신들이 지금 정전을 받아준다면 반드시 당신들을 위해 구명탄원하겠소.”
 라고 말하였기에, 성 측도 무네시게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겼다고 한다.
 무네시게가 알현하러 오자 히데요시는 굉장히 기뻐하며 명마(名馬)와 명도(名刀)까지 주며 대접하였지만, 무네시게가 성을 수비하는 자들을 살려달라고 하자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무네시게는 열심히 탄원하였다. 너무도 끈질기게 달라붙자 히데요시의 참모인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가 손으로 저리가라는 시늉까지 하며 쫓아내려 할 정도였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굴하지 않고,
 “그들을 살려주시지 않는다면 저도 역시 함께 죽여주십시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무네시게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결국 받아들여 수성하던 자들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한다.

 도리를 지킨다는 점에서도 무네시게는 명쾌했다. 삿사 나리마사가 다스리기 시작한 히고[肥後]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무네시게도 동원되어 공적을 세웠는데, 히데요시는 이때의 공적에 대한 상으로 무네시게를 사위(四位) 지쥬우[侍従]에 임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무네시게는 이때,
 “생각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오나, 주인 뻘인 오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 = 소우린[宗麟]의 아들, 분고[豊後] 후나이 성[府内城]의 성주]의 관위가 오위(五位)이기에, 관위로 주인을 뛰어넘는 것은 도리가 아니옵니다.”
고 하며 오위(五位)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히데요시의 의향에 따라 사위(四位)에 서임되었다.[각주:2]

 임진왜란 때 무네시게의 용맹함에 대해서도 명성이 높다. 조선 측에 “일본군의 맹장 타치바나”라 평판이 높을 정도였다.
 특히 경기도 벽제관(碧蹄館)에서는 명나라 군의 총대장 이여송(李如松)을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함께 격파하였다. 
 이때 일본군의 군감(軍監)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무네시게에게 한가지 제안을 하였다. 이렇게 발군의 무공을 세우더라도 히데요시[秀吉]에게는 총사령관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공적으로 알려질 터이지만, 만약 나에게 부탁한다면  무네시게의 공적으로 히데요시에게 전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무네시게는 쌀쌀맞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거참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구려. 있는 그대로 태합 전하에게 전하는 것이 군감인 당신의 임무가 아니었습니까? 부탁하면 잘 말해주겠다니 그 무슨 소리입니까?”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정도로 권세를 부리던 미츠나리라 하더라도 굴함이 없는 강직함이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 측에 서 오우미[近江]의 쿄우고쿠 타카츠구[京極 高次]가 지키는 오오츠 성[大津城]을 공략하였지만, 주전장(主戰場)인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에서 서군은 참패하였다. 무네시게는 군을 되돌려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한 뒤 동군에 대한 철저항전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네시게는 할 수 없이 군을 재정비한 뒤 큐우슈우[九州] 야나가와[柳川]로 철수하였다.
 도중 역시 같은 서군에 서서 장렬한 적중돌파에 이은 철수를 감행한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와 맞닥뜨리게 되었다.[각주:3] 
 타치바나 가문의 부대는 거의 손실이 없는 편인 것에 비해, 시마즈 가문의 부대는 참담한 모습의 패잔병으로 7~80명에 불과했다. 이를 보고 타치바나의 가신들 중에는, 
 “지금이야말로 아버님의 원수를!” 
 하고 은밀히 무네시게에게 권하는 자가 있었다. 무네시게의 친아비 타카하시 죠우운[高橋紹運]은 시마즈와의 전투에서 성을 함락당해 자해했기 때문이다.[각주:4]
 무네시게는 그 가신에게 용사가 할 짓이 아니라며 혼을 내고는, 시마즈와 함께 일심하여 큐우슈우로 향했다고 한다.[각주:5]
 나중에 시마즈에서는 이때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무네시게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에게 야나가와 성[柳川城]가 공격 당했을 때 원군을 보냈다.[각주:6]

 야나가와로 귀향한 뒤 큐우슈우에 있던 동군 측의 무장들과 싸웠지만 승산이 없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개성하였다. 무네시게가 성을 떠날 날이 되자, 영내의 백성 150여명 정도가 무네시게의 앞길을 막고,
 “치쿠고[筑後] 네 고을(四郡)의 백성들 모두 무네시게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각오이오니, 부디 성으로 돌아가시옵소서”
하고 탄원한 것이다.
 무네시게는 백성들의 마음씀씀이에 감사한 뒤, 싸우지 않고 항복하는 것은 영민을 위해 개성하는 것임을 알리자, 백성들은 모두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무네시게는 일개 낭인의 신분으로 전락하지만 기적적으로 컴백을 이루어낸다. 유랑하던 무네시게를 이에야스[家康]가 고용한 것이다. 처음엔 오우슈우[奥州] 타나쿠라[棚倉] 1만석이었지만, 차츰 승진하여 결국 옛 영지였던 치쿠고[筑後] 야나가와[柳川] 10만석[각주:7]의 성주로 복귀한 것이다. 무네시게의 인덕이 이에야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
1568년생. 무네토라[宗虎, 統虎], 시게토라[鎮虎], 마사나리[正成] 등 여러 번 이름을 바꾸었고 ‘무네시게[宗茂]’라고 한 것은 말년에 와서이다. 1587년 치쿠고[筑後]의 네 개 군(四郡)에 13만 2천 석을 하사 받아 야나가와 성[柳川城]의 성주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하였기에, 전쟁 후 치쿠고 영내에서 나베시마 카츠시게[鍋島 勝茂][각주:8]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등과 싸우나 항복. 1620년 재차 야나가와 성의 성주가 된다. 1642년 11월 25일 죽었다. 75세.    

  1. 타치바나 도우세츠의 딸이며 당시 여성으로는 드물게 타치바나 가문[立花家]의 가독을 잇고 있던 긴치요[立花誾千代]와 결혼해서. [본문으로]
  2.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이 끝난 다음 해인 1588년 당시, 큐우슈우[九州]에서 '지쥬우[侍従]'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오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 류우조우지 마사이에[竜造寺政家], 타치바네 무네시게[立花宗茂] 단 4명 뿐이었다. 요시히로는 사츠마[薩摩], 요시무네는 분고[豊後], 마사이에는 히젠[肥前]이라는 각각 한 지역[国]의 주인[国主]이었으나, 무네시게는 치쿠고[筑後]의 절반 정도만을 소유함에도 지쥬우[侍従]가 되었다. 이는 무가관위(武家官位)로 다이묘우들의 서열을 만들려 하던 히데요시의 의향에 비추어보았을 때 오오토모 가문[大友家]의 휘하에 있던 무네시게를 히데요시가 얼마나 맘에 들어 했는지 알 수 있으리라. [본문으로]
  3. 1600년 9월 22일 오오사카 앞바다인 니시노미야 앞바다[西宮沖]에서 만났다고 한다. [본문으로]
  4. 그러나 실제로는 세키가하라 전후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가장 신경을 쓰고 있던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후계자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인 며느리 카메쥬[亀寿]의 오오사카 탈출을 도운 것이 먼저 오오사카에 와 있던 타치바나 무네시게였다고 한다. 타치바나는 임진-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함께 싸운 요시히로를 존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여담으로 둘이 함께 츄우고쿠[中国] 스오우[周防]에 도착하였을 때, 무네시게는 요시히로의 배로 건너가 인사를 하였는데 둘은 만나자 마자 눈물을 흘리며 서로의 생존을 기뻐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사실 시마즈 가문이 원군을 보낸 것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清正]가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영지를 공격하였기에 코니시 가문이 같은 서군이었던 시마즈 가문에 원병 요청에 따른 것. 오히려 시마즈 가문과 카토우 키요마사의 군이 대치 중일 때 먼저 항복한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시마즈 가문에 편지를 써서 화해를 권고하였다. [본문으로]
  7. 정확히는 10만 9200석이라 한다. 참고로 세키가하라 전쟁 이전에는 13만 2000석. [본문으로]
  8.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의 아들. [본문으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정신구조인 ‘하극상(下剋上)’이 “아래(下)가 위(上)를 이긴다(剋)”는 주종역전이라는 것을 본 작품에서도 거듭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무가사회(武家社会)의 주종관계(主従関係)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관계가 어떻게 변해갔는가? - 정신적인 면에 주안을 두며 살펴보자.

 중세의 주종관계의 큰 특징 중 하나가 주인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맘에 안 들면 주인을 바꾸면 되는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 요시나가[可児 才蔵 吉長 - 1554년~1613년]’는 그 대표적인 무사라 할 수 있다. 그의 과거을 살펴보면 엄청나다. 사이토우 타츠오키[斉藤 龍興][각주:1],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각주:2],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로 주군을 바꾸었다. 센고쿠의 시대를 질주한 사나이로서 떳떳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에게 “아래가 위를 먹어 치운다”는 것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위를 존중하지 않는 정신구조는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종관계가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막부(幕府)를 연 ‘쇼우군[将軍]’은 휘하에 가신(家臣)을 두었다. 이를
고케닌[御家人]이라 한다. 이 고케닌은 쇼우군에 충성을 맹세하는 대신에 ‘지두(地頭-じとう)에 임명 받았다. 이는 어느 일정한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이다. 이 지배권을 침해 당할 때에는 쇼우군이 나서서 권리를 부활시켜 주었다. 이것이 ‘본령안도(本領安堵)’. 쇼우군에게서 받은 ‘어은(御恩)’이다.

 대신 고케닌은 쇼우군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것이 ‘봉공(奉公)’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출진하였다. 목숨을 바쳐 자기 영지[本領]를 안도 받으려 노력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주종관계 즉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은 어디까지나 상호계약이었다는 것이다. 쇼우군이 ‘어은’을 해주지 않는다면 ‘봉공’할 필요는 없었다. 정신적인 ‘절대복종’이 아니라 ‘give and take’에 가까웠던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라면 ‘어은’을 받지 못했기에 당신에게는 ‘봉공’할 수 없습니다 – 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정신을 가졌던 고케닌은 발생 당시 숫자가 얼마큰 있었을까?
 1185년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가 요시츠네[義経]를 토벌하기 위해 모은 15개 쿠니[国]의 고케닌은 2096명이었다고 한다. 즉 ‘무사(武士)’는 1 쿠니[国] 당 130여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외로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즈음의 전투가 대군을 이끌고 자신의 경제력(병력동원력)을 과시하며, 실제의 전투는 일기토[一騎打ち]에 의한 것이었기에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는 그렇게까지 필요하지 않았던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더 말하자면 병기가 되는 철(鉄)이 귀중품이었기에 일반병사들에게까지 병기가 충분히 전해지지 않았던 것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무사의 본거지라고도 할 수 있는 동국(東国)에서 이 숫자인 것이다. 이외로 무사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서서히 소빙하기가 무가사회(武家社会)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1230년, 여름에 이상기온이 찾아왔다. 6월9일에
무사시[武蔵] 카네코 장[金子荘]과 미노[美濃] 마키타 장[蒔田荘]에 눈이 내렸다. 이 보고를 받은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는 동요했다. 이상기온은 곧바로 벼농사의 괴멸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7월에 들어서자 여러 지역에 서리가 내렸다.
 ‘이본탑사장첩(異本塔寺長帳)[각주:3]’에 따르면 “일본 전국이 겨울과 같아 매우 추웠다”는 상태였던 것이다. 쿄우토[京都]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아사자가 속출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확실히 비상사태였다. 이때 막부는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할 장치를 만들었다. 이즈[伊豆]와 스루가[駿河] 지역의 예를 살펴보자. 막부가 보증하니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빌려주도록 도소우[土倉]에 명령하였다. 만약 백성이 쌀을 변상하지 못하더라도 막부가 대신해서 변상한다는 것이었다.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 따르면 이 연도에 덕정령(徳政令)을 취한 다음에도 약 9000여 석의 비축미를 방출했다고 한다.

 이렇게 몇 백 년 정도 이어진 것이다. 비축미도 바닥을 보였다. 막부는 점점 체력을 잃었고 그에 따라 군사력도 저하되었다. 이젠 ‘본령안도(本領安堵)’같은 것을 할 때가 아니었다. 막부의 승인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막부가 아무리 ‘본령안도’를 하더라도 기근으로 인해 마을 자체가 없어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막부의 권위는 점점 떨어졌다. 그렇게 점차 일본인의 정신구조에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구제정책덕분에 도움을 받았다”는 감사의 마음에서, “또 쌀을 달라고”라는 억지스런 요구로, 나중에는 “어째서 막부는 도와주지 않는 것이냐!?”라는 원망으로 생각이 바뀌어 간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총촌(惣村)=센고쿠(戦国)의 마을’이 출현하게 된다. 이 마을은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이라는 주종관계를 몰랐다. 원래 고케닌[御家人]과는 혈연관계도 아니었다. 새로운 ‘자칭’ 무사(武士)’가 태어났다. 그들이 바로 ‘코쿠진[国人]’이며 ‘재지령주(在地領主)’로 그야말로 쿄우토의 귀족들과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미천한 자들이었다. 최대로도 하나의 쿠니[国]당 130명밖에 없었던 과거의 무사계급이 센고쿠 시대에 볼 수 있는 대군단을 편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향에 쐐기를 박듯이 1450년대의 ‘오우닌의 난[応仁の乱]’으로 인하여 막부의 통치능력 결여가 명확히 드러났다.

 이제 더 이상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은 없었다. 즉 ‘위(上)’는 없었다. 새로운 무사단이 ‘아래(下)’라고 한다면 통치능력이 없는 막부, 슈고[守護] 등 ‘위’를 물리치려는 사상이 발생하는 것도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하극상의 행동규범이 없었다면 센고쿠 시대를 살아서 헤쳐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오케하자마 전기[桶狭間戦記]’ 3권속에서 ‘오다 야마토노카미 노부토모[織田 大和守 信友]’[각주:4]가 “신하를 지키지 않는 주인은 주군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오와리 슈고[尾張守護] 시바 요시무네[斯波 義統]를 쓰러뜨린 것은 센고쿠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손에 넣은 ‘서바이벌 방식’이 아니었을까?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사이토우 도우산[斎藤 道三]의 손자. 미노[美濃]의 영유하다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쫓겨난다. [본문으로]
  2.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셋째 아들. [본문으로]
  3. 주로 아이즈[会津] 지역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오와리[尾張]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마타다이[守護又代 - 슈고다이[守護代]의 대리]. 오다 노부나가의 가문[織田 信長]의 가문인 '단죠우노죠우 가문[弾正忠家]'의 주가(主家)였다. 1554년 시바 요시무네[斯波 義統]의 아들 시바 요시카네[斯波 義銀]가 가신들을 이끌고 낚시하러 간 사이에 슈고[守護] 시바 요시무네를 살해. [본문으로]

 만약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가 만약 이에야스[家康]의 아들이라는 자리에 있지 아니했다면, 어엿한 센고쿠[戦国]의 영웅으로 한자리를 차지하며 찬란한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뛰어난 자질을 가졌으면서도 그 핏줄로 인하여 결국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고 일생을 끝마쳐 버린 것이다.

 히데야스의 자질을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히데야스가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67만석이라는 큰 영지에 봉해졌을 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가 방문해서는,
 “만약 천하에 이변이 일어났을 시에 소인은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누구의 눈으로 보건 동생인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보다 히데야스의 기량이 뛰어나 보였던 듯 하다. 아비 이에야스조차 히데야스를 두려워 했던 듯한 흔적이 있다.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때,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결전에 참가시키지 않으려고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봉쇄하는 임무를 주며 우츠노미야 성[宇都宮城]을 지키게 한 것은, 행여 히데야스가 세키가하라에서 전공이라도 세워 쇼우군 히데타다를 능가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각주:1]. 히데야스라면 이런 혼란을 틈타 천하를 취할법한 실력을 가졌다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히데야스의 생모는 이름을 오만[お万]이라고 하며 미카와[三河] 치리후[池鯉鮒[각주:2]]에 있던 신사에 근무하던 신관[각주:3]의 딸이었다고 한다[각주:4]. 이에야스의 정실 츠키야마도노[築山殿]의 시녀였던 것을 이에야스가 미카와 오카자키 성[岡崎城]의 목욕탕에서 손을 대어 히데야스를 낳게 했다고 한다. 오만이 임신한 것을 알아챈 츠키야마도노는 질투를 증오로 바꾸어 오만의 옷을 모두 벗겨 나무에 매달아 채찍질했다고 한다.[각주:5] [각주:6] [각주:7]
 이런 과정을 거쳐 태어난 히데야스는 그 용모가
동자개[ギギ – 매기와 비슷하게 생긴 물고기]와 닮았다 하여 ‘오기마루[於義丸]’ 라고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혼다 사쿠사에몬 시게츠구[本多 作左衛門 重次]나 이에야스의 적자 노부야스[信康]가 꾀를 내어 대면시켜 결국엔 이에야스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기마루에 대한 이에야스의 애정은 박했다. 그리고 히데야스가 태어난 지 5년이 지나 이에야스의 애첩 오아이노카타[お愛の方]에게서 히데타다[秀忠], 타다요시[忠吉]가 태어나자 한층 더 히데야스의 존재감은 엷어져 갔다.

 11살 때, 오기마루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에야스가 바친 인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히데야스의 호탕한 기질을 사랑했다. 이름을 자신의 ‘히데[秀]’와 이에야스의 ‘야스[康]’를 따 ‘히데야스[秀康]’로 지은 것도, 거기에 칸토우[関東]의 명족(名族) 유우키 씨[結城氏[각주:8]]를 계승하게 한 것도 히데요시의 깊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전[九州の役] 때, 히데야스가 후방에 있어 공을 세우지 못한 아쉬움에 눈물 흘린 것을 보고,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正]가 히데요시에게,
 “역시 토쿠가와 님의 기풍을 물려받으신 듯”
 하고 말하자 히데요시가,
 “그렇지 않네. 히데야스는 이제 내 아들이니 무(武)에 관해서는 이 히데요시를 닮은 것일세”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히데요시가 히데야스에게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졌었는지를 전해주는 이야기이다.

 또한 이러한 일도 있었다. 히데야스가 16살 때의 일이라 하는데, 히데야스가 후시미[伏見]에 있는 승마장에서 말을 타고 있을 때, 승마장 관리인이 경주라도 하려는 듯이 히데야스의 옆으로 달려와 말머리를 나란히 한 것이다. 히데야스는 그 무례에 분노하며 단칼에 베어 죽여버렸다. 관리인의 죽음에 승마장에 있던 관리인의 동료들이 살기를 띠며 히데요시에게 히데야스를 벌 주라고 간청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오히려,
 “내 아들에게 무례를 범한 승마장 관리인이야말로 죽어 당연하다”
 고 말하며 히데야스의 호방함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 히데요시가 죽은 뒤,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응어리져 있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무공파 장수들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 관료들의 알력이 표면화 되었다. 결국 카토우 등이 이시다 미츠나리 습격을 꾀함에 이르자 미츠나리는 어쩔 수 없이 이에야스에게 보호를 청하였고 그 후 목숨을 건지는 대신 사와야마[佐和山]에 은거 당하게 된다. 사와야마로 향하는 미츠나리의 안전을 위해서 이에야스는 히데야스에게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와 함께 호위를 맡도록 지시하였다. 히데야스는 그때 병사[足軽]들에게는 철포의 화승에 불을 붙인 채 경계하면서 행군하도록 하였으며[각주:9], 무사들에게도 갑주를 두르게 하여 완전 무장한 채로 행군하는[각주:10] 등 히데야스는 철저한 경계태세를 유지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데야스는 에치젠[越前] 후쿠이[福井[각주:11]]로 이봉(移封)되어 마츠다이라 성[松平姓]를 칭하였는데[각주:12], 1605년 히데타다가 쇼우군[将軍]이 되자 히데야스는 쇼우군의 형님이었기에 히데야스의 에치젠 가문은 “제도 밖의 에치젠 가문[制外の越前家]’이라고도 일컬어지며 남다른 대우를 받게 되었다.
 히데야스가 에도[江戸]에 올 일이 있을 때에는 쇼우군 히데타다가 일부러 시나가와[品川]까지 마중 나왔고, 시나가와에서 에도로 향하는 길에서 히데타다는 자신의 가마를 히데야스보다 아랫자리에 위치하도록 했을 정도였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히데야스의 행렬이 에도로 가기 위해서
우스이 고개[碓氷峠]]의 관문소[関所]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이때 에치젠 가문은 철포 100정을 휴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정도 에도로 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 천하의 법도였다. 당연히 관문소의 하급 관리들은 철포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를 보고 히데야스가 말했다.
 “그것은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3]]에게나 적용되는 법도일 것이다. 내가 에치젠 츄우나곤 히데야스[越前 中納言 秀康]임을 알고 막는 것인가?”
 히데야스가 이렇게 말하자 관문소의 하급 관리들은, 츄우나곤이건 다이나곤[大納言]이건 법도는 법도올시다. 통과시킬 수는 없소 하며 말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시팔시팔댔다. 히데야스는 격노했다.
 “관문소의 법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욕설들과 츄우나곤 다이나곤하며 운운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도다”
 라고 말한 뒤, 부하들을 향해서,
 “저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버려!”
 하고 명령한 것이다.
  에치젠 가문의 무사들은 일제히 창을 꼬나 쥐고 칼을 칼집에서 뽑았다. 하급 관리들은 놀라 모두 도망쳤다.
 이것이 에도에 전해지자 히데타다는,
 “관리들이 도망친 것은 분별 있는 행동이도다. 아무리 관리들이 죽더라도 함부로 츄우나곤(히데야스)에게 벌을 내릴 수는 없는 법”
 이라 말하며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히데야스의 마음 속에 배다른 동생 히데타다가 쇼우군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더라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느 날, 후시미[伏見]에서 오쿠니[阿国]를 불러 그 춤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오쿠니의 춤을 보면서 히데야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천하에는 수천 만의 여성이 있겠지만 이 오쿠니를 천하 제일의 여인이라 한다. 하지만 나는 천하 제일의 남자가 될 수 없으니 여자인 오쿠니에게조차 이르질 못하는구나. 이 어찌 분하지 않단 말인가”
 하고 말했다 한다.

 히데야스는 동생 히데타다가 쇼우군이 된지 2년 후에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
1574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둘째 아들. 1584년 코마키-나카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의 강화 교섭 후 인질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었고, 1590년 시모우사[下総]의 명문가 유우키 가문[結城家]의 양자가 되어 10만 1천석을 상속.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마츠다이라 성[松平姓]으로 복귀하여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67만석에 봉해졌다. 1607년 죽었다.

  1. 우에스기 정벌을 앞두고 세키가하라로 향하게 되는 오야마 평정[小山の評定] 후 약 1개월 간은 히데타다가 우츠노미야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후 히데타다는 후방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를 정벌하러 떠나고 대신해서 그제서야 그 임무를 맡게 된 것이 히데야스이다. 그 사이 미노[美濃]의 기후 성[岐阜城]이 너무도 단기간에 함락되어 상황이 변화되자 히데타다는 급히 세키가하라로 향하게 된다....한줄 요약하면 히데야스가 공 세울 것을 두려워 하여 처음부터 우츠노미야에 남긴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2. 현 치류우 시[知立市]. 당시 연못[池]에 잉어[鯉]와 붕어[鮒]가 많이 살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3. 신사(神社)의 말단 사무를 보는 직책인 샤닌[社人]이었다 한다. [본문으로]
  4. 나가미 시마노카미 요시히데[永見 志摩守 吉英]의 딸. 혹은 셋츠[摂津]의 의사인 무라타 이치쿠[村田 意竹]의 딸(또한 나가미 시마노카미가 나중에 셋츠로 가서 무라타 이치쿠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5. 그렇게 매달린 오만을 혼다 시게츠구[本多 重次]가 구해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낳게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6. 또는 오만이 매질을 맞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친척인 혼다 한에몬[本多 半右衛門]의 집으로 도망갔으며, 한에몬은 시게츠구에게 이런 일을 보고하여 시게츠구가 양육을 담당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에치젠 가문의 가전[越前家伝]에 따르면 –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이에야스의 명령을 거역하고 혼다 한에몬[本多 半右衛門]의 큰엄마(伯母)에게 와서 도망치겠다고 하자 한에몬의 큰엄마는 성으로 돌아가라고 했으나, 오만은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했다 한다. 이 한에몬의 큰엄마는 과거 이에야스가 어렸을 때 시중 들던 여성이라 한다. 한에몬의 큰엄마 다음 날 입성하여 이에야스를 만나 오만에 대해 보고하였지만 이에야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그냥 한에몬 큰엄마 집에서 머물다 30일 뒤 쌍둥이를 낳았다 한다. 한 명은 곧바로 죽었으며 나머지 한 명이 히데야스라고 한다....(여담으로 쌍둥이 중 하나가 죽지 않고 나가미 사다치카[永見 貞愛]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당시는 동물이나 한꺼번에 여럿 낳지 사람은 한 명씩만 낳기에 쌍둥이는 사람 취급을 안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에야스의 할머니부터 9대 쇼우군 이에시게[家重]의 생모에 이르기까지 에도 막부의 역대 쇼우군의 생모, 정실, 애첩, 측실 및 유모를 기록함과 동시에 그녀들의 출신 가문들을 기록한 [옥여기(玉輿記)]에 따르면, 유우키 가문은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초대 쇼우군[将軍]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의 셋째 아들인 유우키 토모미츠[結城 朝光]를 시조로 하며 - 공인된 요리토모의 아들은 2대 쇼우군 요리이에[頼家], 3대 쇼우군 사네토모[実朝]로 두 명뿐. - 히데야스의 양아버지가 되는 유우키 하루토모[結城 晴朝]는 토모미츠의 19대손이라 한다. 참고로 유우키 토모미츠는 그 어미가 요리토모의 씨를 품은 상태로 요리토모가 오가와 토모미츠[小山 朝光]에게 하사하였고 그 후 태어난 것이 유우키 토모미츠라 한다....근데 이걸 믿으면 질 확률이 높다. [본문으로]
  9. 오발의 위험과 화승을 아끼기 위해서 막 전투가 벌어지기 전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0. 갑옷과 투구 무게도 무시할 수 없는 터라 행군 시에는 상체 갑옷과 투구를 따로 챙겨서 이동하였다. [본문으로]
  11. 이때까지는 아직 키타노쇼우[北ノ庄]. 후쿠이[福居]로 이름이 바뀌는 것은 에치젠 마츠다이라 가문 3대이며 히데야스의 차남인 마츠다이라 타다마사[松平 忠昌] 때. 키타노쇼우[北ノ庄]의 키타[北]가 패배(敗北)와 글자가 같아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후에 후쿠이[福井]로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바뀌게 된다. [본문으로]
  12. 위키에 따르면 확실히 마츠다이라 성을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세키가하라 이후 토쿠가와 가문을 섬긴 가문 [본문으로]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政)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가신들 중에서도 용맹함으로는 첫째 둘째를 다투는 무사였다.
 나리마사가 죽은 뒤의 일이다. 나리마사가 일평생 혐오했던 정적(
政敵) 히데요시(秀吉)도 나리마사의 용맹함을 인정할 정도였다.
 오다와라(
小田原) 정벌 때의 일화이다.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부대표식(馬標)을 [금박이 칠해진 삼단 갓(三階菅笠)]으로 바꾸고 싶다며 히데요시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그 부대표식은 대단한 무용(
勇)을 자랑하던 나리마사의 부대표식이다. 아주 뛰어난 공을 세우지 않는 한 이것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어떤 공을 세우느냐에 따라 줄 수도 있지"
 고 말했다. 우지사토는 그 말을 듣고 결사적인 활약을 펼쳐 명예로운 [삼단 갓]을 허용 받았다고 한다.

 나리마사의 선조는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의 명장 사사키 모리츠나(佐々木 盛綱[각주:1])라고 한다. 오다 가문(織田家)에서는 늦깎이 출세를 하였다. 노부나가의 [검은 화살막이 부대(黒母衣衆)]에 발탁된 것은 중년이 되어서였다. 이 즈음 노부나가는 옆나라 미노(美濃)의 사이토우 타츠오키(斎藤 竜興)를 공격하였는데 나리마사는 이 전투에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와 함께 사이토우 측의 장수 이나바 마타에몬(稲葉 又右衛門)을 쓰러뜨리는 공을 세웠다. 그런데 수급을 취하는 단계가 되어서 나리마사와 토시이에는 상대방이 더 잘했다며 서로 공을 미루기만 하였다. 거기를 우연히 지나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서로 공을 미루는 말싸움을 지켜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목을 주워서는 노부나가에게로 가 본 그대로를 말했다. 노부나가는 이 세 명에게 각각의 행동에 대한 상을 내렸다고 한다[각주:2].

 나리마사는 그 후 입신출세하여 시바타 카츠이에의 요리키(与力[각주:3])가 되어 엣츄우(越中)를 하사 받았다.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주군 노부나가가 죽자 그 후 자신의 운명을 카츠이에에게 걸었다. 나리마사는 히데요시를 혐오했다. 성격도 단순하여 한 가지를 생각하면 오로지 그것만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어 정치정세를 두루 살펴보고 행동하는 요령이 부족한 듯했다.

 그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 후세에 나리마사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킨 전진미답의 일본 알프스[각주:4] 돌파였다.
 히데요시와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연합군이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싸운 1584년이었다. 이 전쟁이 화해로 끝난 것을 안 나리마사는 철저항전을 주장하기 위해서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에게로 달려가려고 한 것이다. 당시 엣츄우에 있던 나리마사가 하마마츠에 가기 위해서는 에치젠(越前)에서 오우미(近江)를 거쳐 미노, 오와리(尾張)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거기는 전부 히데요시의 세력이 있는 적지였다. 남은 길은 중부 산악지대를 종단(縱斷)하는 직선코스였다.

큰 지도에서 일반적인 토야마(富山) 하마마츠(浜松) 루트 보기

 때는 11월[각주:5]. 엄동의 계절이었다. 몸의 반 이상이 빠질 정도로 쌓인 눈 덮인 험준한 일본 알프스를 돌파하는 것은 현대에 와서도 쉽지 않다. 살아서 하마마츠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확실했다. 나리마사는 그것에 도전하였다. 나리마사 일행은 험난한 쿠로베(黒部)의 비경에 들어섰다. 자라토우게(ザラ) 고개라는 난소를 극복하여 하리노키토우게(木峠) 고개를 넘어 간신히 시나(信濃)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것도 [인기척 끊겨 지나온 곳은 모두 산과 계곡(るところ皆山谷えて人煙無し)]라는 깊은 산속에서 나무꾼의 집 한 채를 발견하는 행운도 있었다. 이 나무꾼의 안내로 길을 잃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시모스와(下諏訪)를 거쳐 12월이 돼서야 하마마츠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야스와 만나자 나리마사는 노부나가에게 하사 받아 보물처럼 여기던 작은칼(脇差)을 이에야스에게 바치며, "내 영지인 엣츄우에 히데요시가 공격해 온다면 부디 원군을 부탁 드리옵니다"
 하고 간절히 부탁하는 한편, 토쿠가와와 삿사가 한 편을 이루면 예전 타케다 신겐(
武田 信玄),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합쳐진 만큼의 파괴력을 가져 히데요시 따위는 단번에 멸할 수 있을 것이오 – 하며 열변을 토했다 한다.

 이에야스는 이에 대해 확답을 피했다고 한다. 나리마사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아 다음 해 1585년 히데요시가 엣츄우에 침공했을 때는 결국 이에야스의 원군은 얻지 못하였다.

 이렇게까지 히데요시에게 반항했음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용서하여 히고(肥後) 전역을 하사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리마사는 영내(領內) 호족 반란의 책임을 요구 받아 영지(領地) 몰수와 함께 셋츠(摂津) 아마가사키(尼崎)에서 자살을 명령 받았다.

[삿사 나리마사]
1516년생. 오와리(
尾張) 출신. 엣츄우(越中)를 하사 받지만 노부나가(信長)가 죽은 뒤 히데요시(秀吉)에 대항하다 패하여 항복. 1587년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 성주. 다음 해 1588년 5월 자살. 73세[각주:6].

  1.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최측근 중 한 명. 겐페이 쟁란기 때의 활약으로 후에 에치고(越後)와 이요(伊予)의 슈고(守護)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이 이야기는 [상산기담(常山記談)]과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에 나오는 것으로, [신장공기(信長公記)] 권수(巻首)의 '쥬우시죠우 전투(十四条合戦)' 항목에는 稲葉又右衛門を、池田勝三郎・佐々内蔵佐、両人としてあひ討ちに討ちとるなり(이나바 마타에몬을 이케다 카츠사부로우(나중에 코마키-나가쿠테에서 죽는 사람), 삿사 쿠라노스케 둘이서 물리쳤다)고 나온다. 저 마에다, 삿사, 시바타는 나중에 호쿠리쿠(北陸)에서 함께 활약한 무장들이라 후세에 만들어진 이야기라 하다. [본문으로]
  3. 이 즈음 오다 가문의 경우 각 유력 부장에게 파견된 오다 씨의 직속 신하를 뜻한다. 물로 세세히 들어가면 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노부나가나 노부타다가 영지를 인정하였다. [본문으로]
  4. 윌리엄 골란드(William Gowland)라는 인물이 이 산맥을 조사한 후 '일본 알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일본 알프스'란 이름이 붙기 전에는 히다 산맥(飛騨山脈 – 현 '키타(北) 알프스'), 키소 산맥(木曽山脈 – 현 '츄우오우(中央) 알프스'), 아카이시 산맥(현 '미나미(南) 알프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본문으로]
  5. 일본 구력. 현재로 치면 12월 하순 쯤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6. [무덕편년집성(武徳編年集成)]과 [무가실기(武家事記)]에 따르면 1516년생으로 죽을 때 73세가 되지만,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과 [삿사 군기(佐々軍記)]에는 1536년생으로 되어 있어 죽을 때의 나이는 53이 된다. 일본어 위키는 1536년생을 채용하고 있다. [본문으로]

삿사 나리마사( 成政)

1588년 윤 5 14 할복 53.

1536 ~ 1588.

오와리(尾張) 히라(比良) 성주.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검은 화살막이 부대 - 쿠로호로(黑母衣)()' 필두(筆頭)에 발탁되었다. 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등과 호쿠리쿠(北陸) 방면을 담당하였다.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하여 히고(肥後) 국주()에 임명받았으나, 실정(政)의 책임을 지고 할복.








히데요시(秀吉), 토시이에(利家)와의 관계


 오다 노부나가 시대.

 용맹으로 유명했던 삿사 나리마사는 라이벌 마에다 토시이에와 거의 같은 스피드로 출세하여 토시이에가 오다 군단의 엘리트들이 모인 '붉은 화살막이 부대 - 아카호로(赤母衣)()'에 발탁되었을 때 나리마사는 쿠로호로중 필두가 되었다.

 1576년에는 토시이에와 함께 [부츄우(府中)삼인중[각주:1]]에 임명되었으며, 1581년에는 엣츄우(越中) 60만석을 받아 토야마(富山) 성주가 되었다.


 나리마사의 비운은 1582 6 노부나가의 죽음부터 시작되었다. 혹은 다음 천하인이 되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를 신출내기 출세자로 깔보는 감정이 나리마사의 말년 6년간의 운명을 결정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음 해인 1583년.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토야마성에서 움직이는 일 없이 형세를 관망하고 있던 중에 시바타 카츠이에가 히데요시에게 패했다. 할 수 없이 히에요시에게 둘째 딸을 인질로 받치고 항복. 히데요시도 이것을 받아들여 나리마사는 지금까지처럼 엣츄우 일국을 안도받았다.


 그러나 다음해인 1584년.

 코마키(小牧)-나가쿠테(長久手)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대치하며 유리하게 싸움을 전개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요청에 응하여 8천의 병력을 이끌고 마에다 토시이에의 영내(領內)노토(能登) 하쿠이(羽咋)의 스에모리(末森)성을 기습하였다. 토시이에의 필사적인 반격에 패퇴하면서도 쿠리카라(俱利加羅) 고개에 병사를 배치하여 나리마사가 끈질기게 분전하고 있던 와중에 중앙에서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정전 교섭이 성립되려 하고 있었다.

 고립되는 것을 우려한 나리마사는 이에야스에게 싸움을 포기하지 말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엄동의 산길에 악전고투하면서도 돌파(‘サラサラ라 일컬어지고 있다).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를 만났지만 [나는 히데요시와 원래부터 원한이 없다]며 거절당해 허무하게 귀국한다.


키타노(北野) 대다회(大茶會) 중지


 토시이에의 원군을 요청 받은 히데요시는 호쿠리쿠에 칸파쿠()의 위광을 과시하기 위하여 다음 해인 1585 8만의 병사를 이끌고 보무당당하게 카가(加賀)로 진입했다. 히데요시-토시이에의 대군을 앞에 두고는 용맹을 떨친 나리마사도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머리를 밀고 중이 된 나리마사는 니이카와(新川)() 20만석으로 영지가 줄었지만 살아 남았다.


 그래도 1587년. 나리마사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다. 큐우슈우(九州)평정을 끝낸 히데요시는 종군했던 나리마사에게 히고(肥後) 일국(一国)을 하사하였다. 그러면서 히데요시는 히고를 지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하면서 앞으로 3년간은 토지조사를 행하지 말 것,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히고의 영민들을 힘들게 하지 말 것 등, 거기에 농민 반란을 일으키게 하지 말 것 등 5개조의 주의서를 나리마사에게 주었다[각주:2].


 엣츄우에서는 선정을 펼친 나리마사였지만 코쿠진([각주:3]) 영주의 세력이 강한 히고는 지금까지 나리마사가 겪어 온 것과는 달랐다. 거기에 나리마사에게는 히고로 왔을 때 영지 목록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곧바로 제출하라고 명령을 하자, 일부의 코쿠진 영주가 들고 일어났고, 진압을 서두른 나리마사가 3천의 병력을 보내자 반란은 들불처럼 번졌다.


 이때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의 키타노에서 큰 다회(茶會)를 열고 있었는데, 둘째날이 되어 나리마사가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초 10일간 열릴 예정인 다회를 중지하였다. 차 도구는 무엇이든 좋으며 빈부나 귀천을 묻지 않고 누구나 참가하라는 대 이벤트를 중지할 수 밖에 없게 된 히데요시의 분노는 컸다.


비운의 최후와 검은 백합 전설.


 새해가 된 1588년.

 히데요시가 파견한 원군으로 반란은 진정되기 시작했으나 히데요시에게 실정의 책임을 추궁받은 나리마사는 이유 설명을 위하여 오오사카(大坂)의 히데요시를 방문하려 했으나,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아마가사키(尼崎)의 호우온(法園)()에 유폐되어, 5 14 할복하여 죽었다.

 배를 열십자로 가르고 장기를 손으로 끄집어 내었다고 한다[각주:4].

 53세였다고 한다.


 강직했지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 했던 나리마사의 비운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러가지 [검은 백합 전설]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그 중 하나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산 나리마사는 아마가사키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던 중 하쿠산(白山) 산에서 핀다는 검은 백합을 하야비캬쿠(早飛脚[각주:5])로 받아서, 좋게 말해 달라며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6])에게 보냈다. 이 검은 백합이 맘에 든 키타만도코로는 곧바로 다회를 열어, 초대했던 요도도노(淀殿[각주:7])를 비롯한 측실들에게 은쟁반에 담아 이 귀중하고 신기한 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몇 일 지난 후.
 
꽃이 난 곳을 알아낸 요도도노는 대량의 검은 백합을 가져와 아무 곳에나 심은 뒤 자신의 다회에 초대한 키타노만도코로에게 그렇게 진귀한 것도 아니라는 듯이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키타만도코로는 나리마사에게 냉담해져 히데요시에게 나리마사의 목숨을 구해 달라는 탄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전 나리마사가 토야마 성주로 있을 때 죄가 없는데도 딴 남자와 놀아났다는 누명으로 죽인 애첩 사유리(小百合[각주:8]) 히메()의 저주가 추가된 것도 있.
  1. 또 한 명은 '후와 미츠하루(不破光治)'. [본문으로]
  2. 오제 호안(小瀬 甫庵)의 [보암태합기(甫庵太閤記)]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동시기에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하시바 히고지쥬우님(羽柴肥後侍従との)'이라고 썼지만, 저 5개조의 편지에는 '삿사 쿠라노스케(佐々内蔵助)'라 적혀있기에 실존성이 의심간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그 지방의 호족. [본문으로]
  4. 그 외에 오오사카 쪽을 노려보다 이빨을 너무 앙물어 서너개의 이빨이 부러졌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5. 지금으로 말하면 택배 같은 것. [본문으로]
  6. 히데요시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본문으로]
  7.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頼)를 낳았다. 이 일로 히데요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어 정실인 키타만도코로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작은 백합'이라는 의미. [본문으로]